조선의 왕세자는 무엇을 공부했을까
| | 들어가며 |
“지난번에 드린 『공부자성적도』는 살펴보셨습니까?” 사도세자는 “지금 보고 있는데 꽤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기언은 다시 한 번 성적도를 잘 살펴보라고 강조해서 권합니다. 스승이 왕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한 『공부자성적도』란 무엇일까요? 왜 강조했을까요
| 학습목표 |
▶ 『공부자성적도』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 『공부자성적도』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배경지식 |
1. 『공부자성적도』라는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공부자성적도』 표지 (奎中 2405)
‘공부자’는 유학의 시조인 공자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성적도’란 공자의 성스러운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그린 그림을 뜻합니다. 즉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익히기 위해 공자의 삶을 따라 가보면서 배우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지요. 『공부자성적도』는 원래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졌어요. 원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명나라 때 본격적으로 많이 편찬되었어요. 이 때 그림이나 내용이 많이 들어갔고 종류도 100가지로 늘어났어요. 『공부자성적도』는 조선에도 들어와서 널리 퍼졌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서 들여오는 것 외에도 조선 사람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기언이 사도세자에게 바친 『공부자성적도』도 조선에서 만들어졌죠. 이기언은 『공부자성적도』 말미에 직접 글을 써 남기기도 했습니다.
2. 이기언은 사도세자에게 바친 『공부자성적도』 마지막에 어떤 말을 썼을까요
『공부자성적도』 마지막 부분 (奎中 2405)
위 사진은 『공부자성적도』 맨 마지막 장에 실린 이기언의 글입니다. 이기언은 이 그림책을 세자에게 바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자가 공부하다가 한가한 휴식 시간에 공자의 행적을 감상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공부자성적도』는 유교 경전인 『논어』나 『사기』에 나온 내용들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하여 그림으로 그린 일종의 만화책이기 때문에,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며 내용을 알기 쉽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쉬는 시간에 학습만화를 읽으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저절로 익혀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기언은 이 책에 100종류의 그림을 넣었다고 했지만, 현재 규장각에 남아있는 것은 57종류뿐입니다.
3. 『공부자성적도』의 내용을 직접 살펴봅시다.
1) 영공교영(靈公郊迎) ‘영공이 교외로 와서 환영하다’ - 그림의 한 가운데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 두 사람은 공자와 영공입니다. 누가 공자일까요 왼편의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공자입니다. 그 뒤로 서 있는 이들은 공자의 제자들이지요. 그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에 나와 있는 위나라 ‘영공’입니다. 위나라를 다스리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니만큼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있고, 그 뒤로 수행을 들고 있는 이들이 보입니다.
- 이 장면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위나라 영공은 공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 바깥이 교외까지 직접 나가서 공자를 맞이합니다. 이 그림은 영공이 공자를 정중하게 환영하는 모습을 담고 있어요. 공자는 영공의 요청에 따라서 위나라에 머물면서 관직에 오릅니다. 하지만 공자를 시샘하고 비방하는 무리들로 인해 결국 공자는 1년도 안 되어 위나라를 떠나 다시 천하를 주유하게 됩니다.
『공부자성적도』 중 「영공교영」 (奎中 2405)
2) 귀서천도(貴黍賤桃) ‘기장은 귀하고 복숭아는 천하다’
『공부자성적도』 중 「귀서천도」 (奎中 2405)
- 이 그림의 제목 ‘기장은 귀하고 복숭아는 천하다’는 무슨 의미일까요 오른쪽 상단에는 ‘귀서천도’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 애공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애공은 공자에게 복숭아와 기장(곡식의 일종)을 대접했습니다. 그림 가운데 탁자 위에 놓여진 그릇이 있지요? 그 중에서 왼쪽 것이 기장, 오른쪽 것이 복숭아입니다. 공자는 기장을 먼저 먹고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웃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애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장은 복숭아를 씻으라고 둔 것이지 먹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장은 곡식 가운데 으뜸이라 사직과 종묘 제사에 가장 윗자리에 올리는 음식이나, 복숭아는 가장 미천한 과일이라 제사에 쓸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귀한 기장으로 천한 복숭아를 씻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일이라 생각되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 기장과 복숭아가 왜 중요한가요
기장과 복숭아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이해가 안 갈 겁니다. 기장은 생산력이 높지 않았던 고대에 귀하게 여겨졌던 곡식으로 제사상도 중요하게 올라갔습니다. 한편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고 여겨져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어요. 복숭아는 지금도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답니다. 이러한 예법은 중국의 주나라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공자는 주나라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여겼기 때문에 주나라에서 실시한 제도와 의례를 실천해서 당시의 정신을 배우기를 바랐습니다. 이 그림에 담겨진 기장과 복숭아는 예를 강조하고 때와 장소에 맞는 예식을 지키려던 공자의 의지를 뜻하는 것이랍니다.
3) 자고인서(子羔仁恕) ‘자고의 인자함을 칭찬하다’
『공부자성적도』 중 「자고인서」 (奎中 2405)
- ‘자고인서’라는 제목의 이 그림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요 그림의 왼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잘 보아주세요.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한쪽 발이 불편해보입니다. 자고인서는 바로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들은 공자는 자고의 인자함을 칭찬하면서 “항상 인(仁)과 서(恕)의 마음으로 법을 집행하면 은혜로운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고 포악하게 집행하면 결국 원한을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유교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인자함(仁)’일 것입니다. 공자는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 인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인’은 진실하고 성실한 마음이며, 끊임없는 자기 절제를 통해 실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죄인이 자고의 어진 마음에 감동받아 변화했듯이 인을 통해서 세상 질서도 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1. 공자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여겨졌을까요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의 이름은 공구(孔丘)이며,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교육자입니다. 그가 남긴 가르침은 유학(儒學)의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공자가 가장 강조한 가르침은 ‘인(仁)’과 ‘예(禮)’입니다. ‘인’에 기초한 지배자의 정치를 위하여 ‘예’라는 형식이 강조된 것입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진 사상과 이념은 유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는 그들에게 당연히 존경받는 성인(聖人)이었고, 공자의 행적과 사상은 그들이 마땅히 마음속에 담고 실천해야하는 모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언이 사도세자에게 『공부자성적도』를 올리면서 공자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고 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자세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공자의 사상을 잘 알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자의 말은 국가 정책을 토론하거나 철학적 논쟁을 할 때 항상 중요한 근거로 인용되었지요. 만약 공자의 뜻을 왜곡하거나 옳지 않게 말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2. 이기언이 사도세자에게 『공부자성적도』를 바치면서 세자에게 특별히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기언은 사도세자가 이 책을 읽고 장차 왕위에 올라 ‘성군(聖君)’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공부자성적도』를 바쳤습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성인을 본받아 자신을 수양할 것을 강조하지요. 왕이나 왕세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왕도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하며 수양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특히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수양해야만 했습니다. 왕은 ‘경연’을 통해서, 그리고 세자는 ‘서연’을 통해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답니다.
1. 조선시대 왕세자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세자로 정해지면 더욱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의 공부 시간은 ‘서연(書筵)’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연을 담당한 곳은 세자시강원이라는 관서였습니다.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을 서연관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세자의 선생님이 되어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세자에게 가르쳤습니다. 서연관의 조건은 학문이 뛰어나고 단정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세자들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경전 공부를 하고, 한 달에 몇 번씩 수십 명의 서연관 앞에서 공부한 내용을 읊고 평가받아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과목은 유교 경전과 역사책이었지만, 그 외에도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효도와 같은 덕성교육, 한 나라를 책임질 군 통수권자로서 활쏘기나 말 타기 등의 교육도 중요하게 받았습니다.
2. 사도세자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이기언이 『공부사성적도』를 올렸을 때 사도세자는 아직 어린 나이였습니다. 어린 사도세자는 특히 영민하여 아버지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나면서 사도세자는 글읽기보다는 무예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눈에는 사도세자의 무인 기질이 마뜩치 않았고, 성군이 되기에는 영 미흡해 보였던 듯합니다. 영조는 “내가 동궁(세자가 기거하는 궁. 세자를 일컫는 용어)으로 있을 때는 쉴 틈이 없었고 두 차례의 서연을 거른 적도 없다”고 하면서, 세자가 언제 공부하고 하지 않았는지 일일이 기록하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엄격한 규율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해 했습니다. 사도세자가 22살 때 국왕 교육의 하나로 대리청정을 하여 나랏일을 돌보면서 영조와의 갈등은 더욱 더 커져만 갔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질책하면서 몇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킵니다. 양위란 국왕 자리를 물려준다는 의미인데, 왕이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경우는 사실 없었고, 왕이 왕세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일종의 시위인 셈이었습니다. 양위를 선언하면 세자는 분부를 거두어달라고 애원해야 했습니다. 부자간의 갈등이 깊어진 끝에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었습니다. 사도세자는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비극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사도세자가 정신적 압박 때문에 정신 질환에 걸려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당시 정치를 장악했던 노론 대신에 소수파인 소론에 기울어서 반대파의 배척과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한 가족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후 영조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도록 결정된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 산, 바로 정조였습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와 기대를 받고 자란 정조는 영조가 흡족해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끊임없이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처음 한 말은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합니다. 정조가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슬픈 가족사를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 정리 |
▶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유교의 시조 공자는 절대적인 모범이었습니다. 따라서 장차 왕이 될 왕세자가 성군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 위해 『공부자성적도』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