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지』를 통해 본 정조의 규장각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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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지』
[중학교 국사] Ⅵ.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2] 탕평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보기)
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의 북쪽에 있고 규장각의 위쪽은 루(樓), 아래쪽은 헌(軒)으로[모두 여섯 칸이다] 현 임금의 초상화·글·글씨·보책(寶冊)·도장을 봉안한 곳인데, 규장각의 편액은 숙종의 글씨이다. 또 ‘주합(宙合)’이라는 편액을 남쪽 문에 걸었는데 현 임금(정조)의 글씨이다. (규장각의) 서남쪽에는 봉모당[가운데가 1칸이고 곁에 협실이 있다. 옛 열무정으로 『여지승람』·『궁궐지』에 실려 있다. 옛 제도를 따르고 고치지 않았으며 감탑(龕榻)만 설치하여 나누어 봉안하였다]이 있는데 역대 임금의 글·글씨·초상화·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 및 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장지(狀誌)를 봉안한 곳이다. <①>정남쪽에는 열고관이 있는데 위아래 2층이다[모두 두 칸이다]. 또 북쪽으로 꺾으면 개유와가 있는데[헌(軒) 1칸, 난방이 되는 각(閣) 2칸이다] 중국에서 간행된 도서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서쪽에는 이안각이 있는데[옛 이름은 서향각이다. 헌(軒) 3칸이고 좌우에 난방이 되는 각(閣)이 3칸씩이다] 임금의 초상화·글·글씨를 옮겨 봉안하여 햇볕에 말리는 곳이다. 서북쪽에는 서고가 있는데[3칸이다] 조선에서 간행된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규장각지』1 中 「건치」 (奎 82, 10면)
우리나라에서는 관청을 설치함에 있어 모두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홍문관은 집현원을, 예문관은 학사원을, 춘추관은 국사원을 모방하였으나 유독 (송나라의) 용도각·천장각의 제도와 같은 (임금의 글을 보관하는) ‘어제존각(御製尊閣)’의 장소는 없었다. … <②>숙종 대에 역대 임금의 글과 글씨를 봉안하기 위하여 종정시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건축하고 ‘규장각’ 세 글자를 숙종이 직접 써서 걸었으나 규모와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③>1776년(정조 즉위년) 현 임금의 즉위 초에 먼저 영조 대의 서적 편찬 담당이었던 구윤명・채제공 등에게 관청을 열도록 명하여 영조의 글을 엮어 목판에 새겨 간행하게 하고 영조의 글씨를 본떠 돌에 새기게 하였다. 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임금의 글 중에서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은 관청을 설치하여 베끼게 하되 하나는 무덤에 보관하고 하나는 대내(大內)의 별전에 임시로 안치하게 한 뒤 대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우리 선대왕의 글과 글씨는 모두 나를 가르쳐 주신 책이니, 존신경근(尊信敬謹)하는 바가 어찌 평범한 정성에 비하겠느냐? 마땅히 하나의 건물을 지어 송나라에서 공경히 봉안했던 제도를 따라야 할 것이지만, 역대 임금의 글・글씨 가운데 미처 존각(尊閣)에 보관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송나라 제도처럼 왕대마다 다른 건물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하나의 건물에 같이 봉안하면 실로 비용을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법이 될 것이다. 아아! 담당 관원은 창덕궁의 후원에 나아가 공사하거라”하셨다. 이어서 단청은 진한 색을 쓰지 말고 꾸미는 것은 무늬있는 종이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여 검소함에 힘쓰기를 명하셨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에 이르러 공사가 완료되었다.
『규장각지』1 中 「건치」 (奎 82, 87면)
① 규장각・외규장각의 설립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규장각지』는 규장각의 설립 경위, 조직 및 기능, 규장각 관원들의 역할과 근무 규정 등을 상세히 정리해놓은 책으로,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앞부분에는 정조가 직접 지은 서문이 붙어 있다. 위 사료는 『규장각지』 권1의 건치(建置) 항목인데, 짧은 글이지만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목적과 그 내용을 잘 보여준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규장각’이라는 이름부터 살펴보자. 규장각이란 ‘규성(奎星)이 빛나는 건물’이란 뜻인데, 규성은 문장을 담당하는 별로 중국과 조선에서는 흔히 군주의 글을 이 규성에 빗대었다. 따라서 규장각은 ‘국왕의 글이 빛나는 건물’이라는 뜻을 지닌다.
규장각을 설립하여 국왕의 글과 글씨 등을 보관하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세조 대 관료인 양성지였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가, 정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숙종에 의해 궁궐에 규장각이 세워졌다. 위 사료에서도 숙종이 역대 임금의 글과 글씨를 봉안하고자 종정시에 ‘규장각’을 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②). 숙종이 직접 쓴 현판을 내려주기는 하였으나 이 단계에서의 규장각이 종정시 산하의 작은 건물에 불과했다면, 정조 대에 이르러 규장각은 비로소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거처인 경희궁에 존현각과 서재를 두어 각종 서적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지로 삼았다. 왕으로 즉위한 직후에는 이를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설립을 명하고 선왕 영조의 글과 글씨를 수집하고 정리할 것을 주문했다(③). 나아가 정조 자신의 기록과 조선의 역대 국왕들의 기록도 규장각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왕의 글, 글씨, 초상화, 도장 등의 정리와 보관이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정조는 이 외에도 규장각에 다양한 기능을 부여했다. 규장각에서는 각종 출판 작업도 담당하였는데, 규장각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에 따라 정조는 인쇄소 성격을 지닌 교서관을 규장각 부속으로 통합시키고 출판에 필요한 활자를 제작하여 작업의 편리를 꾀했다. 규장각은 도서관 기능도 겸했다. 중국에서 간행된 책들을 수집하여 열고관, 개유와에 보관한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①).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입수하기 위하여 규장각에서는 청나라에 가는 연행사 편에 서적 구입을 의뢰하였는데, 일례로 1776년에는 총 5,022책에 달하는 『고금도서집성』을 북경에서 구입해오기도 했다.
1781년(정조 5)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강화도 행궁과 사고에서 보관해오던 국왕의 글, 글씨, 도장, 명나라에서 내려준 서적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 관원을 강화도로 파견하여 이를 관리하게 했다. 이후 왕이 열람하기 위하여 제작된 의궤 등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는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방화로 외규장각 소장품과 건물이 불타 없어졌다. 프랑스 군이 약탈한 의궤 300여 책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다가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간의 반환 교섭을 통해 2011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150여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② 규장각 조직과 근무 규정
규장각에는 어떤 직책들이 있었을까? 『규장각지』에 따르면 정조 대 규장각의 직책은 크게 세 가지고 나뉜다. 규장각의 고위직인 ‘각신’, 각신을 보좌하고 경비 근무, 글씨 필사, 책 관리, 그림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잡직’, 청소, 물 떠오기, 심부름 등의 잡일을 담당하는 ‘이속’이 그것이다(<표1> 참조). <표1> 『규장각지』에 나타난 규장각의 직제
이 가운데서도 각신은 규장각의 중추가 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각신은 왕명에 따라 글을 짓고 경연과 소대에 참석하여 정조와 학술적 토론을 벌였으며 성균관 시험의 시험관이 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각신은 봄, 여름에는 묘시(새벽 5시~7시)에 출근하여 오시(11시~1시)에 퇴근하고 가을, 겨울에는 진시(7시~9시)에 출근하여 미시(오후 1시~3시)에 퇴근했다. 각신 중에서도 직각과 대교의 경우 돌아가면서 숙직을 서야 했다. 정조는 이 외에도 각신에게 엄격한 근무 규정을 적용하였는데, 의무를 무겁게 함과 동시에 권리도 넓게 누리도록 해주었다. 정조가 각신에게 내린 예우는 남달라서, 각신이 죄를 범한 경우 당하관이라도 목에 칼을 씌우지 말게 하였다. 각신들의 집무실인 이문원에는 대신이나 홍문관 대제학 같은 고관이라도 출입할 수 없으며 ‘객래불기(客來不起)’라 하여 손님이 와도 각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이문원을 자주 찾았으며, 각신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측우기, 투호, 은잔, 연적 등 각종 하사품을 내려 우대하기도 했다. ③ 과거에 급제했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마라! - 규장각 초계문신제도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한 지 5년이 지난 1781년(정조 5), 규장각에 초계문신제도를 신설했다. ‘초계(抄啓)’란 뽑아서 아뢴다는 뜻으로, 의정부에서 문신 가운데 적합한 자들을 국왕에게 뽑아 올렸기에 이같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초계문신제도는 37세 이하의 초급 문신을 대상으로 재능있는 자를 선발하여 경서, 역사서 공부와 글쓰기를 집중적으로 학습하게 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며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일종의 관원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정조는 인재를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 어린 문신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나면 공부를 하지 않는 습속을 깨야 한다는 점, 문신들이 경서 공부를 하도록 매달 과제를 주는 규정이 있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조 재위 5년부터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총 142명의 초계문신이 선발되었으며, 김조순, 남공철, 윤행임, 정약용, 서유구처럼 정조 사후까지도 중앙 정계를 주도하거나 학문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낸 인물들이 젊었을 적에 모두 초계문신을 거쳤다.
정조는 시험 성적에 따라 상벌을 주어 초계문신의 경쟁을 유도했는데, 실제로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키우는 데 효과를 보았을 뿐 아니라 문신을 재교육하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모으는 데도 적지 않은 효과를 보았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는다. 반면 규장각과 초계문신 제도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없지 않다. 정조 대 초계문신들이 삼사의 간관 직을 맡자 국왕에 대한 간언이 실종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초계문신들이 정조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정조와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하고 측근 신하로 안주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정조 대 초계문신 출신이었던 정약용도 “초계문신 선발을 거친 자는 의기가 움츠러 들어서 감히 얼굴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종신토록 머뭇거리기만 하며 임금의 사인(私人)이 되어버리니 좋은 법제가 아니다”라며 초계문신제도에 대한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요컨대 규장각이 정조의 사사로운 관청[私閣]이 되고 각신이 정조의 사사로운 신하[私臣]가 된다는 비판이 당대에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④ 정조는 왜 규장각을 설립했을까
앞서 서술한 정조대 규장각의 각종 기능을 통하여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 목적을 정리해보자. 규장각은 첫째로 전현직 국왕과 관련된 문서와 물품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저장소 기능, 둘째로 중국과 조선의 서적을 구입하고 관리하는 왕실 도서관 기능, 셋째로 왕명에 의해 글을 짓고 서적을 편찬・출판하는 기능, 넷째로 하급 문신의 재교육 기능을 두루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정조 대에 규장각이 문한 기능을 도맡음으로써 높은 차원의 학술적 성과를 일궈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같은 문한 기능은 기실 정조 이전 시기에도 각 관청에서 나누어 담당하고 있던 것이었다. 『정조실록』 정조 6년 5월 29일자 기사에는 규장각에 대한 비판이 발생하자 정조가 신하들에게 이를 해명하는 부분이 실려 있어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 요지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즉위 이후까지 척리와 환시(宦寺)로부터 위협을 받았기에 이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하고자 하지만, 승정원과 홍문관 등 종래의 관청들이 신하를 가려서 뽑고 있지 못하므로 규장각을 통해 신하들을 엄선하여 기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고 그 위상을 크게 끌어올린 이유는 결국 자신이 직접 양성한 관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이 체제의 변동은 있었으나 1910년까지 유지된 반면, 초계문신제도는 정조 대에 주로 시행되었으며 헌종대에 2차례 초계문신을 선발한 것 외에는 시행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보아 규장각을 통해 정조 본인의 근신(近臣)을 양성하고자 한 정조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조선후기 #규장각지 #중등
한영우, 2008 『문화정치의 산실 규장각』, 지식산업사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 교과서 찾아보기의 교과서 자료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