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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시사

- 여말선초 지방 지식인 원천석이 바라본 세상

 

 


사진 : 耘谷詩史(3428-359-v.1-3)

 

 

 

운곡시사3, 三敎一理, - 會三歸一 -

<세 가지 가르침이 하나의 이치이다 -세 교리를 모아서 하나로 귀결시키다->

삼교의 종풍이 본래 차이가 없는데/三敎宗風本不差

시비를 다투는 소리가 개구리처럼 시끄럽네/較非爭是亂如蛙

한 가지 성품이라 모두 거리낌이 없는데/一般是性俱無礙

불교 유교 도교가 다 무엇인가/何釋何儒何道耶

 

 

운곡시사5 賀朝 <조정을 치하함>

성스러운 임금이 나라를 개화(開化)하매/聖神開化國

신하가 이윤(伊尹)같고 여상(呂尙)같은 사람들이라/伊呂在臣隣

세상은 다시 복희(伏羲)헌원씨(軒轅氏)의 세상이고/世復羲軒世

백성은 이제 요순(堯舜)시대의 백성이 되었네/民爲堯舜民

사방이 더욱 왕성해 가는가 하면/多方皆帖泰

다른 나라도 다 화친(和親)을 맺는데/異域盡和親

천자께서 유지(諭旨)를 내리시니/天子下宣諭

삼한(三韓)의 즐거움이 다시 새로우리/三韓樂更新

 

 

 

 

운곡시사와 저자 원천석

  :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여말선초 지방지식인의 삶

 

운곡시사는 여말선초 지방 지식인이었던 원천석의 문집이다. 원천석은 133078일 개성에서 탄생하였으나, 31세인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항상 원주 일대에 거주한 지방 유학자로 분류되며, 태종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였다.

원천석은 대대로 원주에서 향리를 역임한 가문 출신으로, 6대조이자 시조인 원극부부터 증조부까지 향리직을 역임하였고, 조부 원열은 고려 때 원주를 지키는 주현군(州縣軍)의 부대장인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역임하다가, 아버지 원윤적이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임명되면서 중앙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원천석은 1330년 개성에서 태어나 1339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원주에 내려와 살면서 청소년기에 춘천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청년 시절 다시 원주로 돌아왔다. 원천석은 국자감 학생 시절 잠시 개경에서 활동하였지만, 원주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관료가 되어야겠다거나, 서울로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을 단념하였다.

그 단념의 계기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국자감생 시절 예부시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천거되지 못한 것 또한 이유가 될 수 있고, 국자감생 합격과 더불어 딸의 사망으로 인해 현세에 미련을 버렸을 수도 있다. 물론 그 길을 포기했다고 해도 지방에서 국자감 진사의 지위는 좌주문생 네트워크를 통해 원주에 부임하는 지방관과도 교류할 수 있으면서도, 중앙정계의 격변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원천석은 비록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궁핍하게 생활하지는 않았다. 가령 원천석의 집에는 천여 권의 책이 있었을 만큼 큰 규모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원천석 자신의 서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원천석은 젊은 시절 서곡(西谷)에 살다가 45세가 된 공민왕 23(137) 이후에는 변암 남쪽산 아래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집 또한 초라한 규모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본채 남쪽 언덕에 물을 끌어다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본채 뒤 안 북쪽에는 소나무를 심어두었다고 하였다

원천석은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지역의 유지이자 유식자 지식인으로서 다른 지방의 유력자나 중앙의 관료지식인 등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 유명한 삼교일리론 병서의 사례를 보아도, 1387년에 그 글을 쓰면서, 삼교어록을 개경에서 간행된지 1년 내외에 구해서 참고할 수 있었고, 실제 1천여 권에 달하는 소장 도서를 수집할 수 있던 것 또한 개경을 거점으로 한 활발한 지식교류망에 합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역 인사들과의 교류 또한 방대했다. 운곡시사에 나타난 원천석과 교류한 불교 지식인 역시 종단을 막론하고 100여명에 이르는데, 그중에는 일본 승려들의 방문도 있었다. 운곡시사에 나타난 지역의 유학자들 또한 70여명에 달하는데, 국자감시 동년이었던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색, 설장수 등 당시의 최고 지식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원천석의 인적 교류망의 넓이를 알려 주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일본중국의 실정에 대해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원천석은 1376년 일본에서 온 세 명의 선종 승려(正宗莖松全壽)들과 시를 주고받은 것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고려로 유학을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승려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나눈 대화에서 일본 총림에 대한 대체적인 소개를 들은 다음, 곧바로 우리 나라 제도와 비슷한 점을 파악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원천석은 1370년 운유자 각굉이 중국 유학을 알리려 왔을 때, 각굉에게 중국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위험할 것이라는 염려를 남겼는데, 이처럼 원천석은 원주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곡시사의 발간 경위

 

 



사진 : 운곡시사』 박동량의 序文.

(3428-359-v.1-3) 1001a~001b

 

 

원천석의 문집은 사망 후 200년이 지나고서야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1603년 박동량이 강원도 관찰사로 원주에 부임하여 운곡시집을 입수한 뒤, 이를 기반으로 운곡시사로 편집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1800년에 13대손 원효달이 시집을 간행하기로 계획하고 정범조의 서문과 정장의 발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과정에서 17세기경 김시양, 이기 한백겸 등이 운곡시사를 접했다는 기록들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기의 운곡시사판본은 현전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원천석의 문집은 185816대손 원은이 집안에 전해지는 문서와, 박동량이 편집한 내용, 후대에 원천석에 대해 남긴 글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시문을 창작 시기순으로 편집하였으며, 책의 분량 때문에 32책에서 53책으로 만들었다. 현재 규장각(3428-359)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1865년에 쓴 후손 원용규의 발문이 추가되어 있는 64책의 필사본이 규장각(3428-359A)에 소장되어 있다.

 

 

 

 

운곡시사의 주목되는 기록들

 

 


사진 : 운곡시사정범조의 서문

(3428-359-v.1-3) 1005a~006b



권수(卷首)에는 1603년에 쓴 박동량의 서문과 정장정범조의 서문(1800)이 실려있다. 1~51351년부터 1394년까지 지은 1100여 수의 시가 창작순으로 수록되었다. 그 중 권3에는 아내를 여의고 자식을 위해 21년 동안 홀아비로 지낸 기분을 읊은 내가 불행하게 일찍이 부인을 잃고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위해 홀아비로 지냈네(余不幸早失主婦慮迷息所示索然守鱞), 유교도교불교가 한 가지 이치라는 내용의 삼교일리(三敎一理)가 대표적으로 주목된다. 특히 1387년 작성된 삼교일리에서 원천석은 여여거사(如如居士)의 말을 빌리는 방식으로 원천석은 불교와 도교의 핵심사상을 비교하고 결국 이치는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성리학이 이기(理氣)-인성론(人性論)을 근간으로 하여 우주와 인간을 통일적완결적으로 설명하는 철학사상으로 체계화하면서, 종래의 자기 수양을 담당했던 불교의 역할이 통합되는 한 과정을 보여 준다.

4에서는 역성혁명 전, 최영의 사형 소식을 접하고 슬픔을 담은 도통사 최공이 사형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함(聞都統使崔公被刑寓歎)이 주목된다. 원천석은 최영의 사형 소식을 듣고 ()을 위한 슬픔이 아니고 나라 위한 슬픔이라고 밝히며 크게 안타까워했다. 4에는 그 외에도 우창왕의 폐위와 죽음을 다룬 권4이달 15일에 나라에서 정창군(공양왕)을 왕위에 세우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듣다(聞今月十五日 國家以定昌君立王位 前王父子 以爲辛旽子孫 廢爲庶人)가 특히 주목된다. 여기에서 원천석은 우왕창왕이 신씨가 아니라 실제 왕씨임을 밝혔다. 우왕창왕이 신씨였다면, 이를 왜 일찍부터 가려내지 않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근거로 원천석은 우왕창왕의 몸은 서인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정당한 명분은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원천석의 주장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우왕창왕이 신씨라는 점은 조선 건국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논리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에 실린 연작 반자 양선생(半刺楊先生)이 보여 준, 안절사 정공(按節使鄭公)이 홍천 객관(洪川客舘)에 쓴 시에 차운하다(次半刺先生所示按節鄭公題洪川客舘詩云)라는 시도 주목된다. 그 중 첫 번째 시인 조정을 치하함(賀朝)을 통해 원천석은 조선 건국을 긍정하고 축하하는 내용을 담았다. 원천석은 위화도 회군 당시 최영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왕조 교체에 이르는 과정을 비판했지만, 바뀐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 태평성대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 잠시 충격과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점차 왕조 교체를 현실로서 인정했고, 머지않아 조선 건국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말선초 지방 지식인원천석의 삶

 

원천석의 운곡시사는 여말선초 지식인 중 잠시 국자감 생활을 제외하고는 관료 생활을 하지 않고, 지방에서 기거한 지방 지식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이다. 고려 후기 이전까지의 주요 지식의 수용과 소비교육의 대부분이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려 시기의 지방에는 향리로 대표되는 토착 지배층이 존재하였지만, 이들 중 관직에 진출하여 개경에 이주한 이들은 개경 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사망한 뒤에도 개경 주변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지방에서의 향리층 자신의 목소리가 남겨진 기록 또한 극히 드물어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러한 양상이 일부나마 변화된 것이 고려 후기부터다. 중앙을 중심으로 나타나던 식자층은 고려 후기부터 지방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다양한 배경이 손꼽히는데, 그중 원천석의 경우, 무신집권기 이후 관인층의 대폭 확대로 인해, 관직을 얻었으나 실제 개경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한 이들이 지방 사회에 남아서 활동하게 된 경우였다.

고려 명종대부터 집권하였던 무신들은, 종래의 문벌관료를 대신하기 위해 과거시험의 시행과 합격자 선발을 대폭 늘렸다. 무신집권기 이후 과거는 두 해에 한 번씩 시행되면서 90여년간 총 1,975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500여년 고려 왕조 전체의 1/3에 달하는 숫자였다.

과거의 잦은 시행은 두 가지 의미에서 지방 사회에 거주하는 지식층을 늘리게 된다. 첫째는 많은 합격자들이 모두 관직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과거제는 지방에서 치러지는 향공시(鄕貢試)와 계수관시(界首官試), 개경에서 치러지는 국자감시(승보시(陞補試)남성시(南省試)감시(監試)), 그리고 최종인 예부시(동당시(東堂試)춘관시(春官試))로 구성되는데, 그중 국자감시(國子監試)에는 100여명, 예부시(禮部試) 선발자는 33명이 선발되었다. 고려 시대의 실제 관직을 가진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종래 연구에 따르면 대략 3,000~4,000명 정도로 파악되는데, 이것은 2년에 한 번 33명의 최종 합격자들에게 모두 관직을 나누어줄 수 없었음을 의미하였다. 이는 관직을 얻지 못한 이들이 지방으로 낙향하는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둘째는 잦은 과거시험에 따른 낙방자들의 문제이다. 과거시험이 자주 열렸다는 것은 합격자가 늘어난다는 문제만은 아니며, 낙방자가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앞서 국자감시와 예부시 비율을 볼 때 단순히 계산해도 국자감시 합격자 중 67명은 낙방해야 했던 것을 의미한다. 과거시험이 자주 시행된다는 것은 매년 낙향해야 하는 낙방자들 또한 대폭 증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추세는 이후 지방 사회에서 향리와 구분되는 식자층의 형성과 활동 배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해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시험 시행 횟수가 줄어든 원 간섭기에 이후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원 간섭기에 접어들면 정치적인 혼란으로 낙향을 택한 이들이나, 지방에서 군공(軍功)을 통해 첨설직(添設職)’이라고 부르는, 실제 관직이 아닌 명예직을 받은 인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들 또한 지방 사회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유력자지식인층을 형성해갔다.

원천석 또한 이들 중 하나였다. 원천석은 국자감시에 합격하였지만 예부시에 합격하지는 않았다. 일설에 따라 원천석이 직접 시험을 포기했든, 응시한 시험에서 낙방했든 원천석은 진사라는 국자감 합격자 자격을 가지고 원주로 낙향하였고, 그곳에서 당시의 많은 지방 지식인층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자들을 길러내며, 장차 조선 왕조의 양반사대부등으로 불리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운곡시사에 나타나는 원천석의 삶의 행적, 나아가 그가 길러낸 70여명의 제자들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거대한 사회 변화의 생생한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빈, 1991, 운곡행록 해제

(이상 한국고전종합 DB 참조 https://db.itkc.or.kr/)

 

원천석 저 이인재허경진 옮김, 2006, 운곡시사, 혜안

이인재 편, 2007, 지방지식인 원천석의 삶과 생각,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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