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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고려사핵심정리가 아니에요

 

 

 

 


사진 : 고려사절요奎貴3566 (甲寅字)

 
 
 


1932, 조선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었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사료(史料) 하나를 영인(影印, 책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원판으로 복제 인쇄하는 일)해서 300부를 출간한다. 이를 위해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그 사료를 빌렸다. 그런데 한 세트가 3535책인 그 사료는 군데군데 이 빠진 낙질(落帙)이었다.

 

 


사진 : 고려사절요』 (經古 951.04-G588-v.24/31) 

1933년 간행본 표지



사진 고려사절요』 (經古 951.04-G588-v.24/31) 

1933년 간행본 권24, 002a~b면 

 

 

그로부터 6년 뒤인 1938, 조선사편수회는 일본 나고야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던 그 사료의 완질(完帙)을 찾아냈다. 이에 조선사편수회는 앞서 영인했던 책에서 빠진 권1, 6, 18을 촬영, 보간(補刊)이란 단어를 붙여 영인 출간했다.

 

 


사진 : 고려사절요보간想白古951.04-G689X 

1938년 간행본 표지



 

사진 고려사절요보간』 想白古951.04-G689X 

1938년 간행본 첫 페이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영인본들을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신경 써서 만들었음이 느껴진다. 책의 훼손을 막고자 씌우는 겉포장인 포갑(包匣)을 열어보면 층층이 쌓인 책들이 가득하다. 그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겉모습도 원본의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일제강점기의 학자들이 그 정도로 귀하게 여겨 영인본을 만들었던 이 책, 글 제목에 나와 있다시피 고려 475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좀 전에 고려사얘기 실컷 해놓고 웬 고려사절요래요?”

거 성질도 급하기는, 물론 고려사란 책이 있다. 절요(節要)요점을 간추린다는 뜻이니, 고려사절요고려사의 요점을 간추린 책이라는 뜻이 된다. 139권에 달하는 고려사에 비해 고려사절요35권이므로, 언뜻 보면 그야말로 요약본이라 할 만 하다. 문제의 핵심은 그렇지만도 않다는 데 있지만.

아니라고요?”

 

 

 

 

 

고려사고려사절요의 차이

 

고려사절요는 편년체(編年體) 사서다. 편년체란 해마다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쭉 적어내려가는 식으로 구성하는 문체이다. 반면 고려사는 기전체(紀傳體), 곧 크게 통치자의 연대기인 기()와 유명한 인물의 전기인 전()으로 구성되는 문체로 쓰였다. 일단 문체만으로도 둘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기전체의 부분-고려사에서는 세가(世家)-은 편년체로 쓰인다. 그러면 고려사절요고려사세가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고려사절요고려사의 축약이라면 기사의 내용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만 있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고려사절요에만 있는 기사가 있고,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다. 예컨대 고려 제6대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즉위하던 해 왕명으로 3년간의 요역(徭役, 백성이 국가를 위해 하는 노동)을 면제하고 조세의 반을 깎아준 일을 보자. 이 일이 고려사세가에는 없고 식화지(食貨志)981년의 일이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시기가 없는데, 고려사절요를 보면 9818()의 일로 나온다.

 

 

. 위봉루(威鳳樓)에 임어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3년간의 요역을 면제하고 조세의 반액을 덜어주었으며

문무 관리의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 『고려사절요2, 경종(景宗, 재위 975~981) 68. -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고려사절요2의 성종 원년(982) 3월 기사다.

 

 

임오 원년(982) 송 태평흥국(太平興國) 7, 요 건형(乾亨) 4

3. 백관(百官)의 칭호를 고쳐서 내의성(內議省)은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광평성(廣評省)은 어사도성(御事都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 고려사3의 성종 원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오원년(982) 3월 경술 백관의 칭호를 고쳤다.

 

 

같은 기록이라도 고려사세가는 고려사절요에 비해 더욱 축약되어 있다. 물론 명칭을 고친 일에 대한 구체적 사항은 고려사백관지(百官志)에 조금씩 나누어 설명되고 있지만, 어떻게 했는지 일일이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반면 고려사절요는 간단하게나마 명칭을 고친 예를 들고 있어, 성종대 백관의 명칭을 어떤 식으로 고쳤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단 세가에서는 음력 3월 경술일(庚戌日, 계산하면 18)이란 날짜까지 들고 있다. 그러니 982318()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파악하려면 고려사절요고려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모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을 비롯한 고려시대 인물들의 논찬(論贊,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평)이 실려 있는데, 고려사절요의 논찬이 고려사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논평하여 말하기를,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우리 태조(太祖,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비록 부득이하였으나 또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우리 태조는 비(()이 많았고 자손도 번창하였지만 현종(顯宗)께서는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즉위하였으며,

이후로 왕통을 이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자손들이었으니이 어찌 그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김관의(金寬毅)와 임경숙(任景肅민지(閔漬, 1248-1326) 세 사가(史家)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가 태위(太尉) 이정언(李正言)의 딸로서 안종(安宗)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1에 실린 이제현의 논찬이다. 이제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논찬과 선배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신라의 고려 귀부를 긍정하는 논찬을 남겼다. 그런데 이 논찬은 고려사의 해당 부분에는 없다. 이런 사례만 보더라도 고려사절요가 단순히 축약 고려사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사서(史書), 고려사절요가 만들어지고 쓰이기까지

 

옆 게시물에서 보신 분은 알겠지만, 고려사를 그 고생 끝에 만들었는데도 왜 고려사절요를 또 만들었는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귀찮아서라도 안 만드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세종대왕의 큰아드님 문종(文宗)이 계시던 때로 시곗바늘을 돌려야 한다.

바야흐로 1451(문종 1) 8, 장장 5대에 걸쳐 이룩된 고려사139권이 문종 앞에 바쳐졌다. 받아보고 감격에 떨었을 문종은 고려사편찬자들에게 음식을 내렸다. 이때 총책임자 김종서(金宗瑞, 1390-1453) 등이 문종에게 그 번거로운 글을 줄이어 편년으로 사실을 기록한다면 읽어 보기가 거의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문종이 허락한다. 그로부터 반년이 겨우 지난 14522, 김종서 등이 문종에게 고려사절요35권을 올린다.

 

 

신미년(1451) 가을에 글이 완성되었는데

이에 또 사적(事迹)이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것과 제도가 본보기 될 만한 것을 모아서 

번잡한 것은 빼고 간략한 것만 취하였으며연월(年月)을 드러내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여 살펴보는 데 편리하도록 했으니,

그런 후에 47532왕의 사실이 포괄(包括)되어 빠진 것이 없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다 거론됨으로써

사가(史家)의 체재가 비로소 대략 구비된 듯합니다.

 -「진고려사절요전(進高麗史節要箋)」 -

 

 

그리고 김종서는 바로 이것을 인쇄해 배포하고 사고(史庫)에 보관할 것을 청한다. 문종은 그 역시 즉각 허락한다. 아직 고려사가 인쇄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고려사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력을 들였던 것에 비해 고려사절요는 너무나도 빨리 일을 끝냈다는 점이다. 고려사의 축약도 아니라고 하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허어, 그거 혹시 졸속 아닌가요?”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일단 고려사절요찬수 멤버들은 고려사를 만들면서 쌓인 노하우가 있었다. 고려사는 애초 편년체로 서술되어오다가 마지막에 기전체로 편집방침이 바뀌었다. 예전에 만든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 인쇄 직전의 원고본으로 남아있었고, 정해진 원칙 아래 이를 토대로 고려사절요를 편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사절요의 편찬 원칙은 책 첫머리에 실린 범례에 잘 드러난다.

 

 

1. ‘()’이라고 일컫거나 폐하(陛下)’·‘태자(太子)’라고 부르는 것들은 비록 참람(僭濫)하고 분수 넘치는 것이지만, 옛 일을 따라 그대로 곧장 씀으로써 그 실상을 보존하였다. 조회(朝會)와 제사(祭祀)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변고가 있으면 기록하였고 왕이 친히 제사 지냈으면 기록하였다. 사원(寺院)으로 행차하거나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도량(道場)을 베푸는 등 당시 임금들의 일상적인 일들은 기록하기에 그 번잡함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각각의 왕마다 처음 보이는 것,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을 기록하였다. 들로 나가 잔치를 벌여 즐긴 일이 비록 여러 번이더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방탕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함이다. 대신(大臣)의 임면과 어진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난 자초지종을 다 기록하였으며, 문장이나 상소 중에서 당시에 실행된 것과 사안에 있어 중요한 것들도 또한 모두 기록함으로써, 상고할 수 있게 갖추었다.

찬수고려사절요범례(纂修高麗史節要凡例)

 

 

고려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대신의 임명과 당시의 상소문 등을 모두 기록하고, 국왕에게 감계(鑑誡)가 될 일들도 모두 기록했다. 반면 국왕의 일상 등은 처음 보이거나 특별한 것만 기록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신료들의 위상을 강화시키는 서술방식이다. 그래서인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신료들은 고려사절요를 더 선호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김종서의 주청이 있은 지 1년 남짓 지난 1453(단종 1) 4, 고려사절요는 갑인자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간행된 고려사절요는 위기를 맞았다. 총책임자 김종서를 비롯한 찬수 멤버 상당수가 계유정난(1453)에 휘말린 데다, 왕권 강화를 꾀했던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입장에서 신료의 위상을 높이는 서술의 고려사절요는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고려사절요초간본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에 이르러서야 을해자(乙亥字)로 다시 간행되었는데, 그것도 이미 조선 후기부터 구하기 힘들어졌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마저도 고려사절요를 직접 보지 못했다.

지금은 DB화되어 언제든지 인터넷에서 고려사절요의 원문과 번역을 검색해볼 수 있고, 주석을 달아서 번역한 국역 고려사절요(민족문화추진회, 1968)나 몇 가지 판본을 교감한 교감 고려사절요(집문당, 2016)도 발간된 지 오래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고려사절요덕분에, 만약 고려사만 있었다면 알기 어려웠을 고려시대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고려사절요는 희귀한 책이었고, 그 때문에 일제 관학자들이 고려사절요의 완질을 보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러분, 이 글을 다 읽으셨거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오셔서 고려사절요를 한 번 대출해보시기를 바란다. 갑인자본이나 을해자본은 아마 귀중본이라 보기 어렵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영인본이라도 원본과 거의 같으니 아쉬운 대로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라. 아름답기로 유명한 갑인자(甲寅字)와 을해자(乙亥字)로 아로새겨진 고려의 역사적 사실을 눈으로 살피며, 고려사절요편찬 당시의 분위기와 그것을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이들의 집념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




사진 : 고려사절요奎貴3566, 1 001a~b

단종 1(1453) 간행, 甲寅字本.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노명호 외 교감, 교감 고려사절요, 집문당, 2016

노명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지식산업사, 2019

한영우, 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김철준, 高麗中期文化意識史學性格, 한국사연구9,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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