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고, 변방의 나라가 간직한 성인의 흔적
|
『기전고』
[고등학교 국사] Ⅵ. 민족 문화의 발달 > 3. 근세의 문화 > [2]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융성
옛날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치를 하는데 도(道)는 홍범(洪範)만한 것이 없고, 정치는 경계(經界)를 바로잡는 것보다 우선한 것이 없었다. 기자(箕子)는 홍범을 진술하며 천고의 변하지 않는 경계를 그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엄폐되고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홍범은 무왕에게만 진술되고, 경계는 외딴 나라에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해지면서 제후들이 모두 그 경계를 방치하니, 맹자께서 시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보면 비록 주나라가 조법을 사용하였으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 보아도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오직 평양의 기전만이 경계의 이치를 모두 갖추었다.
古昔聖王 御世出治 道莫尙於洪範 政莫先於經界 箕子陳洪範 日星千古而畫經界 迄今晦昧不章 何也 洪範陳之武王 經界畫於偏邦 故也 然周室旣衰 諸侯悉慢其經界 孟子引詩而曰 由是觀之 雖周亦助 是轍環天下而未嘗一見也 獨平壤箕田 疆理俱存
아, 상나라의 이(彝)와 주나라의 정(鼎)은 여전히 사람들의 보물이지만, 하물며 수천 년 뒤에 태어나서 맹자께서 보시지 못한 바를 볼 수 있겠는가! [기전의] 그림과 설명은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으로부터 시작하여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로 이어졌는데, 꽤나 분명하다. 나는 그것들이 흩어져 있음을 아쉬워하며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과 기전의 자료를 모으고 기록하였다. 이는 성인을 높이고 옛 것을 즐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왕자(王者)가 일어나기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와서 법을 취할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噫 商彝周鼎 人猶寶之 矧生於數千載之後 得見孟子之所未見者哉 其作圖著說 自韓久菴始 嗣後諸儒 頗有闡明 余病其散見 與同志之士 輯而錄之 非但尊聖好古 亦以待有王者作 必來取法云爾 『錦帶詩文抄』 下, 「箕田攷序」
조선시대 ‘경세론(經世論)’의 핵심 논의 사항 중 하나는 이른바 ‘토지개혁론’이다. 주요한 생산의 수단이었던 토지의 균등 분배와 생산성의 유지, 이를 바탕으로 한 국가 재정의 안정 등이 논의의 목표였다. 토지에 대한 개혁의 논의는 주장하는 개인의 학문적 수준과 이념, 혹은 붕당과 학파에 따라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견을 만들어내었다. 다만 각자의 논의 속에서 공통되는 점이 있었다. 바로 삼대(三代)의 제도라고 알려진 ‘정전제(井田制)’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전제의 논의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평양에 기자(箕子)가 구획하였다고 알려진 ‘기자정전(箕子井田)’이다. 다소 생소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실제 조선후기에 가면 기자정전은 토지제도에 대한 관심,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양의 실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자정전에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편집한 『기전고(箕田攷)』는 그러한 논의를 종합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정전이라는 기억의 생성 기자정전이 문헌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평양을 설명하면서 기자가 성안에 정전제를 시행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이를 통하여 적어도 『고려사』가 편찬되었던 조선 초기부터는 평양의 정전, 즉 기자정전이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430년(세종 12) 변계량이 지은 기자묘의 비문에 기자가 정전제를 시행하였다는 구절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전이 외성 안에 있으며, 그 모습이 완연하다고 하였다. 그 밖에 평양을 지난 당고(唐皐)와 사도(史道) 등 중국 사신의 시에서도 정전의 모습을 표현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목격담’으로 전해지던 기자정전을 시각화한 사례가 나타났는데,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편찬한 『평양지』에 실린 「平壤官府圖」이다.
<平壤官府圖[출처 : 『平壤志』(想白古915.18-P993)]>
「평양관부도」에는 평양성 내외의 주요 시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림 왼편에 위치한 평양 외성을 보면 바둑판 모양의 정전이 묘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지』 「고적」에도 기전이 외성에 있으며, 그 유적이 완연함을 설명하고 있다. 같은 책의 「잡지」에는 1585년(선조 18) 평양부 서윤 김민선이 기자정전의 흐트러진 경계를 바로 잡았다는 내용도 있다.
한백겸의 「기전도」가 쏘아올린 작은 공 평양 외성에 위치한 ‘기자정전’에 제도적 의미를 처음으로 부여한 것은 17세기 초 한백겸(韓百謙, 1552~1615)에 의해서였다. 한백겸은 1607년(선조 40)에 평양을 유람하다가 기자정전의 모습을 자세하게 관찰하였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선 그는 기자정전의 형태가 정(井)자 형태가 아닌 전(田)자 형태가 기준이 되었으며, 전(田)에는 총 4개의 구역이 있었는데, 이 구역의 크기는 70묘(畝)라고 하였다. 그리고 함구문과 정양문에서 시작된 대로의 사이에 위치한 구획이 가장 분명하였는데, 가로로 4개의 전과 8개의 구역이 있었으며, 세로로도 마찬가지여서 16개의 전(田)과 64개의 구(區)가 1전(甸)이 되는 것이 전형적인 기자정전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특히 한백겸은 이러한 기자정전의 제도가 은나라의 제도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맹자』에서 “은나라 사람들은 70묘로 조법(助法)을 시행한다.”라고 하였던 점과, 기자가 은나라의 태사(太師)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한 구역당 1백묘의 크기와 정(井) 모양의 구획을 가진 일반적인 정전제는 주나라 때에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한백겸이 주장한 기전의 ‘은대유제설(殷代遺制設)’은 이후 기자정전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마지막으로 한백겸은 자신이 분석한 기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는데, 아래의 「기전도(箕田圖)」가 바로 그것이다.
<箕田圖[출처 : 『箕田攷』(奎4820)]>
한백겸의 기자정전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로 이어졌다. 동시대 인물이었던 유근(柳根, 1549~1627)은 「기전도」의 발문을 작성하여 한백겸의 주장대로 기자정전은 은나라의 제도이며, 이를 주자(朱子)가 보았더라면 정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허성(許筬, 1548~1612) 역시 「기전도」를 보고 작성한 글에서 은나라의 제도임에 동의하였고, 한백겸이 설명하지 못한 공전(公田)과 여사(廬舍)를 보충 설명하기도 하였다. 한백겸과 유근, 허성의 논의는 기자정전을 제도화시키는데 나름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의 주장은 이후 기자정전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세트처럼 언급된다. 『기전고』에도 마찬가지로 세 사람의 해석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물론 한백겸의 기자정전에 대한 해석이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다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유형원의 경우 한백겸이 설명한 전(田)자 모양의 구획을 바탕으로 ‘공전제(公田制)’를 착안하기도 하였다.
‘이상理想’의 다양한 모습 17세기 말에 들어서면 기자정전이 삼대의 모습을 간직한 제도임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기자정전에 대한 논의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이 기자정전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한백겸의 기자정전 풀이가 일부 부정되는 사항들이 나타난다. 이익(李瀷, 1681~1763)은 한백겸의 기자정전 논의를 반박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맹자』의 “하후씨는 50으로 공법을 시행하고, 은나라 사람은 70을 조법으로 삼으며, 주나라 사람은 100묘로 철법을 삼으니 그 실체는 모두 10분의 1세이다.”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였는데, 하나라의 50・은나라의 70을 기존의 해석대로 50묘와 70묘라 하지 않고, 이를 보(步)라고 읽었다. 그 결과 하나라가 시행한 토지의 지급 기준은 50×50(보)로 25묘가 되고, 은나라는 70×70(보)의 50묘(≒49묘), 주나라는 100×100(보)로 100묘가 된다고 하였다. 이익은 이를 통하여 기전은 한백겸의 해석대로 70묘가 아닌 한 변의 길이가 70보인 50묘의 토지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64구를 기준으로 구획되었다고 하는 한백겸의 주장이 『주례』의 36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기전고』에 수록되어 있다. - 『기전고』는 대체로 이익의 문중이었던 이가환(李家煥, 1742-1801)과 이의준(李義駿, 1738~1798)이 이익의 「기전속설(箕田續說)」을 드러내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생각된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제 참조] - <箕田圖[출처 : 『箕田攷』(奎4820)]> 한백겸의 해석에 다른 의견을 낸 것은 이익뿐만이 아니었다.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1776년 평안감사로 재직하면서 평양의 기자 유적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 과정에서 외성에 위치한 기자정전의 일부를 사들여 구획을 재정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명응은 나름의 기자정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한백겸의 논의와 다르게 기자정전의 구획이 전(田)가 아닌 정(井)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平壤外城井田全圖[출처 : 『箕子外紀』(奎505)]>
한백겸과 다르게 기자정전을 해석한 경우는 이삼환(李森煥(1729~1813)의 논의도 있다. 그는 1786년(정조 10)에 평양의 기자정전을 직접 측량하여 한백겸의 의견대로 한 구역의 넓이는 70묘이지만, 구획의 기준이 전(田)라는 점은 부정하였다. 이삼환은 은나라의 토지제도 역시 정(井)자 형태이지만, 『맹자』에서 국중(國中)은 1/10세를 적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기자정전이 성 내에 있으므로 예외적이었을 뿐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세기 초에 가면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이규경(李圭景, 1788~1860)은 기자정전의 실체를 부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부터 믿지 않았다. 결국 기자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자정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에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평양 외성에 위치한 바둑판 모양의 토지의 실재는 무엇이었을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외성의 정사각형 형태의 구획은 고구려 때부터 있던 것으로 주거 구역을 나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유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져갔고, 삼대의 이상향을 꿈꾸던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기자정전’의 모습으로 대체되어갔다. 그렇다면 ‘기자정전’이라는 논의가 ‘착각’에서 시작한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의미하다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기자정전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대상’이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화를 찾는 노력, 이상향을 꿈꾼 결과물 등 의미는 많다. 다만 이러한 ‘과거의 실상’가 아닌 ‘역사의 실체’를 구체화하는 작업은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箕城圖[소장 :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문식, 1997, 「18세기 후반 徐命鷹의 箕子 認識」, 『우송조동걸선생 정년기념논총 한국사학사연구』 Ⅰ. 신항수, 2002, 「李瀷(1681~1763)의 『孟子』 井田記事 해석과 田制論」, 『조선시대사학보』 22. 김문식, 2003, 「星湖 李瀷의 箕子 인식」, 『퇴계학과 한국문화』 33. 오수창, 2010, 「조선후기 평양과 그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선시대 정치, 틀과 사람들』. 엄기석, 2016, 「星湖學派의 箕子井田 인식」, 『성호학보』 18. 기경량, 2018, 「고구려 평양 장안성의 외성 내 격자형 구획과 도시 형태에 대한 신검토」, 『고구려발해연구』 60.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공식적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