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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동아시아 종합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노영구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1. 조선을 지탱한 군사적 능력과 무예

  

  조선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문약文弱한 국가’, ‘선비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조선이 비록 국력은 약하지만 정의롭고 평화적이었던 반면 조선을 침략한 상대국은 강하며 부도덕하고 호전적이었다는 역사인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과연 조선왕조가 약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중국과 일본 및 서양 세력의 위협 속에서 국가를 500여 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까? 
   조선은 14세기 말 왕조 성립 직후부터 주변의 여러 세력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꾸준히 받았고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15세기에는 여진과 대마도 지역에 대한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동북아시아 지역 안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이는 이 시기 조선의 군사적 능력이 주변 세력에 비해 뛰어났거나 최소한 대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 패권 교체의 과정에서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대규모 전쟁을 겪으면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적정 규모의 군사력을 확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운용한 결과였다. 
   조선의 군사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여러 무기와 함께 이를 운용하는 기예인 무예武藝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기병의 경우 말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창을 쓰는 기창騎槍 등의 무예가 있었고, 보병도 근접전에 필요한 전투용 도수 무예인 수박手搏과 검술 등을 훈련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위협이 상존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무예가 조선에 전파되어 조선의 무예는 이전에 비해 한층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보다 실용성이 강해졌다. 과연 ‘문약의 나라’, ‘군대가 없는 나라’라는, 우리의 조선왕조에 대한 기존 인식이 얼마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선 무예의 내용과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각신閣臣이었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이 편찬한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이다. 


2. 『무예도보통지』 이전 조선의 무예서 편찬과 정리


   조선의 무예 수준이 더욱 높아진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은 근세 동양 3국의 병법과 무기체계의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세계대전이었다. 특히 기존의 장점이었던 검술을 이용한 단병短兵[근접전 무기] 전술에 더하여 신식 소총인 조총을 활용한 장병長兵[원거리 발사 무기] 전술을 배합한 일본군의 전술에 대해 전통적인 장기였던 궁시弓矢 중심의 장병 전술로 대응한 조선군은 초기 전투에서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의 우수한 근접전 능력에 대응하기 위해 명나라 군으로부터 새로운 전술 체계인 이른바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도입하게 된다. 
   절강병법은 16세기 중반 명나라 남부 해안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개발한 전술체계이다. 절강병법은 16세기 중엽 명나라에 도입되었던 신형 화기인 조총과 호준포 등 가벼운 화약무기의 운용과 함께 등패, 낭선, 당파, 장창 등 다양한 단병기로 무장한 보병의 집중적인 병력 운용을 통한 근접전을 중시하였다. 절강병법에 따라 편성된 명나라 남방의 병사들, 이른바 남병南兵들은 각종 화기와 로켓무기인 화전火箭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서부터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하고 다양한 근접전 병기로써 일본군의 장기인 근접 백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절강병법의 가장 하위 편제인 각 대隊는 지휘자인 대장隊長과 취사를 담당하는 병사인 화병火兵 각 1명, 그리고 전투병 10명 등 모두 12명으로 이루어졌다. 전투병 10명은 등패수藤牌手 2인, 낭선수狼筅手 2인, 장창수長槍手 4인, 당파수鎲鈀手 2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살수殺手라 불렸다. 
   이상의 무예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에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었으므로 이를 훈련시키고 보급할 필요성이 높았다. 이에 선조의 명령으로 우선 훈련도감에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관련 보譜를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그러나 『기효신서』의 관련 내용은 그림만 나열되어 있고 내용도 대단히 소략하여 그것만 보아서는 새로운 무예를 익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근접전 군사인 살수의 무예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통일된 기예를 확립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 훈련도감 낭청이었던 한교韓嶠가 무예서를 편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가 바로 그것이다. 곤棍, 등패, 낭선, 장창, 당파, 검劒 등 여섯 가지 무예를 정리한 『무예제보』는 1598년(선조 31)에 완성되었다. 
   『무예제보』의 간행으로 일단 당시 가장 필요한 6가지 무예가 정리되었지만 당시 알려진 무예를 모두 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무예제보』는 기본적으로 『기효신서』의 무예 중 당장 실전에 필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왜검 등 일부 중요한 내용들이 누락되었다. 이에 따라 곧 『무예제보』의 속집 간행이 요구되었다. 한동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무예제보』의 속집은 1990년대 후반 계명대학교 도서관에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이라는 서명으로 발견되었다. 1권 1책의 이 책에는 『무예제보』에 실리지 않았던 무예인 대권大拳, 언월도偃月刀, 협도곤夾刀棍, 구창鉤鎗, 왜검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무예제보번역속집』은 『무예제보』에서 누락된 무예를 보충하는 의미 이외에도 궁극적으로 북방 여진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전차戰車를 중심으로 기병과 보병을 통합·운용하는 전술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데 필요한 단병 무예를 보급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이는 협도곤, 구창 등의 존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 이후 화기의 발달로 소총을 다루는 포수砲手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총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전투에서 사격 이후 다음 사격을 위해 장전하는 동안 포수가 적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해지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전에는 사수射手의 궁시 사격으로 시간을 벌 수 있었으나 17세기 중반 이후 사수의 비중이 낮아짐에 따라 이제 단병기를 가진 살수殺手의 전방 엄호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살수의 중요성이 이전에 비해 새롭게 부각되면서 『무예제보』의 중간重刊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관련 무예들이 계속 유입되었다. 이에 18세기 중반인 영조대에 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사도세자가 『무예제보』의 여섯 무예에 당시의 주요 12기技 무예를 추가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였다. 아울러 『무예제보』에 수록된 무예도 내용을 크게 수정·증보하였다. 『무예신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그 내용은 모두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어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갑자기 등장한 무예서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전수와 정리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종합 무예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동아시아에서 화기火器가 주요한 무기 체계로 정착하면서 전쟁에서의 대구경 화포 운용도 매우 많아졌다. 전장에서 화포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개량이 이루어져 포차砲車가 개발되었고, 아울러 정확한 조준이 가능해지면서 보다 정확히 목표를 명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보병 중심의 밀집 진형은 적군의 집중적인 화포 공격에 완전히 허물어질 위험성이 높아졌다. 기동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기병은 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화기의 살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병을 통한 견제 전술도 요구되었다. 당시 소총의 발사 속도가 기병의 돌진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는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기병의 특기인 충격력衝擊力을 활용하여 적군의 대형에 돌입하여 근접 육박전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인 숙종대 중반부터 다양한 기병 무예인 마상무예馬上武藝 훈련이 중시되었고 그 정리의 필요성도 높아졌다. 


3. 규장각(奎章閣)이 중심이 된 『무예도보통지』 편찬 사업


   정조는 즉위초인 1778년(정조 2)부터 표준적 무예체계 정비를 추진하였다. 당시 각 군영의 무예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동일한 무예라도 군영마다 부르는 명칭과 훈련체계가 달랐다. 표준적 무예체계의 정비는 단순히 군영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정조는 중앙 5군영제가 창설 당시부터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창설되었기 때문에 군권이 특정 정파에 소속되거나 군사 체제가 각기 달랐던 점을 우려하였다. 정조는 각 군영의 군권을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체제를 통일하기 위해 먼저 각 군영의 훈련 방식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한성의 주요 군영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용호영의 훈련 절차를 종합·정리하도록 하였다. 1785년(정조 9)의 『병학통兵學通』 편찬은 그 성과였다. 훈련 절차의 통일과 함께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할 무예 체계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아울러 앞서 보았듯이 18세기 들어 중시되던 기병 강화를 위한 마상무예馬上武藝의 정리 필요성도 매우 높았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명령하였다. 당시는 정조의 군영 체제 개편이 일단락되고 핵심적인 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이 창설된 직후였다. 정조는 이 책의 편찬을 규장각 각신인 이덕무, 박제가 등에게 맡겼다. 아울러 장용영의 장관將官인 백동수白東脩에게는 무예에 익숙한 장용영 장교들과 함께 무예를 실제 살피고 시험하도록 하였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으로서, 아마도 이덕무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 책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정조는 장용영에 편찬실을 열고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관련 서적 20여 부를 내려 보내주어 참조하도록 하였다. 당시 편찬에 참조하였던 145종의 방대한 문헌은 『무예도보통지』의 「인용서목引用書目」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문화 창조의 중심지로서 규장각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덕무는 관련된 참고 서적을 두루 열람하여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박제가는 그 원고를 해서체로 정서하여 판하본板下本을 만들었다. 백동수는 휘하의 장교인 김명숙金命淑, 여종주呂宗周와 함께 무예 실연을 담당하면서 표준적인 무예를 정리하는데 기여하였다.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된 것은 착수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4월 말이었다. 4월 중순 편찬의 모든 작업이 완성되었고, 곧 조지서造紙署에서 종이를 조달하여 인쇄에 들어가 보름 만에 간행 작업이 완료되었다. 편찬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으로 이 책에 수록된 방대한 분량의 판화를 들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모두 492도에 달하는 방대한 판화가 실려 있는데, 이는 백동수의 시연을 직접 스케치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판화 제작에는 허감許礛, 한종일韓宗一, 김종회金宗繪, 박유성朴維城 등 4명의 화원畵員이 공동으로 참여하였고, 그 그림을 목판에 새기는 각수刻手 등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奎 2893)



4. 『무예도보통지』의 체재와 구성


   『무예도보통지』는 4권 4책으로 되어 있으나 판본에 따라 언해본 1권 1책이 포함되어 5권 5책인 경우도 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의 표와 같다. 

   「무예도보통지총목」은 이 책의 총목차이다. 「무예도보통지범례」는 총 20항으로서 이 책의 편찬 원칙을 실었다. 「병기총서」는 조선 건국 이래로 군사 전반에 대한 주요 내용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으로, 이 책의 편찬 시말에 대해서도 함께 정리하였다. 「척소보모총병사실」은 이 책의 주요 참고 서적인 『기효신서』와 『무비지(武備志)』의 저자인 중국의 척계광과 모원의茅元儀의 전기를 간략히 수록하였다. 「기예질의」는 『무예제보』의 「주해중편교전법」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싣고 편찬자 한교의 전기를 덧붙였다. 「인용서목」은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인용한 각종 서적 145종의 서명을 밝혔다. 
   『무예도보통지』의 각 본문 구성은 24가지의 무예마다 도식圖式, 설說, 보譜, 도圖, 총보總譜, 총도總圖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식’은 여러 무기의 제도나 형태를 그린 그림이다. ‘설’은 해당 무기나 무예에 대해 여러 역사적 사례 등을 들어 설명한 부분으로, 병기의 제도와 기원, 제작법, 재료, 관련 인물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설’의 서술 방식에서 『무예제보』에 있는 무예인 경우에는 ‘원原’으로 표시하고 그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으며, 새로이 증보된 부분은 ‘증增’으로, 특별한 논증 사항이나 편찬자의 견해는 ‘안案’으로 표기하여 구분하고 있다. ‘증’ 부분은 아마도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편찬할 때 증보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 기존의 법전들을 종합하고 증보하여 편찬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의 서술 방식과 비슷하다. 
   ‘보’는 무예 동작을 글로 풀이한 것이고, ‘도’는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각 무예의 동작별로 한 페이지의 위 부분에는 ‘보’로 상세히 서술하고 아래 부분에는 도를 수록하였다. 총보는 한 무예의 전체 동작[勢]의 이름을 처음부터 마지막 동작까지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총도는 한 무예의 전체 동작을 연속 동작으로 정리하여 그린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총보                                『무예도보통지』 총도



   마지막의 「관복도설」은 각 무예에 따라 필요한 옷차림새를 그림으로 보이고 설명을 붙인 것으로서, 보군步軍과 마군馬軍, 그리고 마상재馬上才를 할 때 갖추어야 하는 복장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보군으로 장창, 죽장창 등의 무예를 익히는 자는 전건戰巾과 망수의蟒繡衣, 또는 청·홍·황색의 얼룩 상의에 청·홍·황색의 바지를 입고 무예를 하도록 하였다. 「고이표」는 편찬 당시 주요 군영별로 전수하는 무예의 자세가 다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비교표로서 정조의 표준적 무예체계 확립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4권 4책의 한문본 이외에 1책으로 이루어진 언해본도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19종의 『무예도보통지언해』가 소장되어 있는데 언해본을 한문본 뒤에 붙여 5권 5책으로 된 것과 함께 언해본만 따로 제책된 경우도 적지 않다. 언해본은 한문본의 총도와 총보 가운데 총보 부분만 언해되어 있는데, 일부 언해본 중에는 총도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총보만 언해한 판본은 71장張으로, 총도를 포함하고 있는 판본은 107장으로 되어 있다. 71장본은 한문본의 편집이 완료된 후 곧바로 총보를 언해하여 군사들의 훈련에 참조하도록 하였다. 107장본은 71장본 앞에 총도와 총보를 덧붙이고 범례를 새로이 작성하여 붙인 것이다. 
   107장본은 71장본 앞에 총도를 포함한 것이지만 총도와 총보가 한문본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특히 총도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수정하여 다시 그린 부분이 적지 않다. 이는 71장본의 간행 이후 내용을 수정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또 107장본은 71장과 달리 24기의 무예 가운데 기창騎槍, 마상쌍검馬上雙劍 등 마상 무예 6기가 빠져 있는 차이가 있는 점이 눈에 띤다. 


5.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의 종류와 내용


   무예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당시 무예는 찌르기[刺], 베기[砍], 치기[擊]의 세 가지로 크게 구분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서도 이 순서에 따라 대체로 창槍, 도刀, 권拳의 순서로 24종의 무예를 배열하였다. 
   창류는 권 1에서 정리되어 있는 장창,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鎲鈀, 기창騎槍, 낭선狼筅 등 6종으로 정리되어 있다. 장창은 길이 15척의 긴 창으로 찌르는 동작을 주로 하였다. 낭선은 9~11층의 대나무 가지가 붙어 있는 앞에 창날을 단 병기로서 가지를 이용하여 적의 칼날이나 화살을 막도록 되어 있는데, 척계광이 처음으로 제식 병기로 채택하였다. 당파는 길이 7척 6촌의 짧은 삼지창으로, 필요 시 창날 사이에 화전을 걸어 쏠 수 있었다. 죽장창은 20척의 긴 대나무 창이었다. 기창旗槍, 기창騎槍은 각각 15척 길이의 창이었다. 이 중에서 장창, 당파, 낭선은 절강병법을 조선에서 도입하면서 익힌 새로운 무예로서 살수대를 구성하는 주요 무예였다. 이 무예는 앞서 보았듯이 『무예제보』에도 실렸다. 기창騎槍은 조선 초기 무과의 시험과목 중에서 유일하게 채택된 단병 무예로서 주목된다. 
   베기 중심의 도검류는 권 2, 3에 등패籐牌를 포함하여 모두 12종이 소개되어 있다. 권 2에는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의 4가지가, 권 3에는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 월도月刀, 협도挾刀, 등패 등 8가지가 나온다. 쌍수도는 본래 장도長刀로서 검이 길어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일본에 기원을 둔 것으로 왜구가 사용하여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였으므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이를 받아 발전시켰다. 예도, 왜검,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등패 등은 각각의 제도가 있었으나 일반적인 훈련에서는 모두 짧은 칼인 요도腰刀를 사용하였다. 요도는 패용이 편리하도록 고리가 있는 칼로서 조선에서는 이를 환도環刀라 하였다. 쌍수도의 훈련도 평소에는 요도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협도는 긴 자루에 칼날을 붙인 것으로 보병이 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용도로 많이 운용되었다. 월도는 그 모양이 반달처럼 휘어진 모습이라고 하여 언월도偃月刀로 알려지기도 한 무기이다. 등패는 등나무로 만든 둥근 형태의 방패로서 가볍고 견고하여 이를 든 군사는 한손에는 등패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요도를 들고서 가장 앞에서 적과 맞서는 역할을 하였다. 방패수는 요도 이외에 표창鏢槍이라는 작은 창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적군과 교전하기 전에 표창을 던지고 나서 요도를 빼어 들고 돌격하였다. 
   치기 중심의 무예로는 권법拳法, 곤봉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이 있다. 권법은 모든 무예의 기초가 되는 도수 무예로서 그 동작은 임진왜란 중 명군으로부터 도입되었다. 조선에도 초기에 수박手搏이라는, 손을 위주로 한 도수 무예가 있었지만 18세기 무렵에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권법이 훈련되었다. 곤봉은 길지 않은 나무 자루에 짧은 날을 붙인 것으로 창류 무예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편곤은 도리깨와 비슷한 것으로 자루에 쇠줄로 작은 쇠막대기인 편鞭을 연결한 무기로서 보병용과 기병용 편곤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보병보다 주로 기병의 근접전 무기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기타 무예로는 격구擊毬와 마상재馬上才가 있다. 격구는 말을 타고 채막대기로 나무공을 때려서 구문毬門에 넣는, 오늘날의 폴로 경기와 비슷한 것으로서 조선초기 무과 시험의 과목 중 하나였다. 격구는 고려시대에도 군중軍中에서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성행된 유희의 하나로, 전투와 교통 등에 말을 널리 이용하였던 고려와 조선의 사회적 양상을 잘 보여준다. 마상재는 말 위에서 행하는 곡예라고 할 수 있는데 모두 9가지 동작이 실려 있다. 


6. 『무예도보통지』의 사료적 가치


   『무예도보통지』는 18세기 후반 당시 조선에 전해진 무예를 총 정리한 무예서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17세기 이후 나타난 동아시아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새로이 고안된 전술에 적합하게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군사 훈련용 병서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실제 『무예도보통지』는 당시 통용되던 병법을 정리한 병서인 『병학통』 등과 깊은 관련을 가졌다. 즉 『병학통』을 통해 일단 정리된 조선의 전술이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구체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무예도보통지』의 진정한 가치는 조선에 알려진 무예를 집대성하고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의 무예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의 전통적 무예 이외에 일본이나 중국의 무예 등을 포괄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 무예의 총화, 혹은 3국 무예를 창조적으로 흡수하여 발전시킨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에 전하지 않는 왜검의 기예가 이 책에 수록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의 문화 정리 및 창조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조대 창설된 규장각의 각신이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하고 규장각에서 수집한 각종 서적들이 이용된 점은 규장각이 당시 조선의 각종 정책 수립에서 가지는 위상과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수백 점의 판화는 당시 인물화의 텍스트북이라 부를 만큼 각종 자세의 인물 묘사가 풍부하다. 아울러 이후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에 수록된 여러 판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인 의미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관련 자료

 

   우리나라는 해외海外에 치우쳐 있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기예로는 궁시弓矢 한 가지만 있었고, 검과 창[劒鎗]에 대해서는 단지 그 무기만 있고 원래 습용習用하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상창馬上鎗 하나만이 시험장[試場]에서 사용되었지만 그 법도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검과 창[劒鎗]이 버려진 무기가 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왜적과 대진對陣할 적에 왜적이 갑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비록 창을 들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검을 칼집[鞘]에서 뺄 겨를이 없었고 창도 창날을 부딪칠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흉악한 칼날에 모두 피를 꺾였으니 이는 모두 습법習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 법을 비웃는 자가 말하기를 “궁弓과 포砲[조총]는 반드시 그 쏘는 것을 익혀야 하는데 검과 창 같은 것은 진에 임해야 격자擊刺할 수 있으니 어찌 익히기를 기다린 후에야 능하게 될 것입니까?”라고 하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만 중국인은 젓가락을 사용합니다. 중국인으로 하여금 숟가락을 사용하도록 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사용하도록 시험하면 각각 생소한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검과 창을 사용함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궁시弓矢는 비록 우리나라의 장기지만 어찌 그 하나만을 익히고 다른 무예는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료는 『무예제보』를 편찬한 한교韓嶠가 「기예질의技藝質疑」에 쓴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군사 및 무예의 상황을 잘 보여주며, 『무예도보통지』에도 그대로 전재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은 궁시와 기창騎槍 이외에 창과 칼의 무예가 널리 익히지 않아 일본군의 근접전 공격에 매우 취약했던 양상을 잘 보여준다. 한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단병 무예를 익히되 우리에 적합하도록 하며 아울러 조선의 전통적 무예도 함께 익힐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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