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이전

 

무당내력 巫黨來歷

 

 

 

서영대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2종의 『무당내력』

 

 『무당내력巫黨來歷』은 무당굿을 거리별로 그린 채색화에 해설을 붙인 책으로, 근래 나오는 무속 관련 논문이나 서적에 으레 도판 한 두 장이 올라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컬러풀한 그림이 끄는 매력에다가 무속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당내력』을 아는 데에는 백 마디 말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당내력』을 보다 보면 여러 가지 의문들이 떠오른다.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이런 책을 만들었을까? 또 이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까? 등등. 이런 의문점의 해소를 위해 여러 마디의 말도 필요할 때가 있다.

  『무당내력』은 지금까지 2종이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2종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이라면, 조선 왕실에서 수집하고 보관하던 책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처음부터 규장각 소장은 아니고, 원래는 모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장서였다. 즉 하나는 경성제국대학 시절인 1944년 12월에 오쿠히라 유키고奧平ユキ子로부터 4원[円]에 구입하여 고도서로 등록된 것이며(등록번호: 270298, 청구기호: 古1430-18), 다른 하나는 1963년에 이병기李秉岐(1891~1968) 선생이 기증한 가람문고 중의 하나이다(관리번호: 316721, 청구기호: 가람 398.3 M883). 그러므로 『무당내력』 2종은 다른 규장각 도서처럼 조선왕실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모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규장각으로 이관된 것들이다.

  『무당내력』 소장의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단서는 2종 모두에 찍혀있는 ‘동양후인신여석가장東陽後人申汝晳家藏’이란 도장이다. 동양이란 황해도 평산平山의 별칭이므로, 동양후인이란 평산 신씨를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평산 신씨 신여석의 집에서 소장하던 책이란 뜻의 장서인이다. 신여석이 언제 때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지금으로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통해 2종 모두 한때는 신여석이란 인물의 소장본이었으며,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서울대학교로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신여석이 2종 모두를 소장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으므로,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2종의 『무당내력』은 서명이 같은 만큼, 구성이나 내용에서 유사점이 많다. 우선 ‘무당내력’이란 서명이 적힌 표지 다음에 서문이 있고, 이어서 굿거리 장면을 하나씩 그린 채색 그림과 해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서문의 내용과 굿거리 그림 및 해설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굿거리의 순서를 비롯하여 다른 점도 많다. 다시 말해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동명이본同名異本이다. 따라서 양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책의 크기가 다른 점에 착안하여 경성제대의 고도서를 ‘작은 책’, 가람문고 소장본을 ‘큰 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크기로 이본異本을 구분하는 것은 일반적이 아니다. 더구나 제3, 제4의 『무당내력』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고, 그럴 경우 2종만의 상대적 크기를 기준으로 한 구분법은 구분으로서의 의미가 모호해질 수 있다. 물론 제3, 제4의 『무당내력』이란 희망사항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당내력』의 유사본 내지 별본別本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으므로(서울대 박물관의 「무당성주기도도차서巫黨城主祈禱圖次序」, 단국대 박물관의 『무녀연중행사절차목록巫女年中行事節次目錄』, 샤머니즘 박물관의 『거리巨里』, 일본 도쿠오우사[徳應寺]의 『무녀의巫女儀』 등), 바람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또 최길성의 『한국의 무당』(열화당, 1981)에서 『무당내력』으로 소개된 도판도 기왕에 알려진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2종 각각에 고유명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여기서는 전자를 고도서본, 후자를 가람본이라 칭하겠다.

  『무당내력』이 학계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69년 이즈미 세이이치[泉靖一]란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였다. 그는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이두현을 통해 『무당내력』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를 학계에 소개하였다(「『巫黨來歷』考」, 『東洋文化』46・47,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69). 이후 한국의 무속학자, 뒤이어 전통복식 연구자들도 이를 주목하고 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도서본만 알려졌을 뿐, 가람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람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70년 초에 필자 같은 학부생도 가람본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종 모두 특별 취급을 받는 책들이어서 열람 절차부터 까다로웠고, 몇 장 안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복사를 하는 데는 총장님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가람본이 한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접근의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가람본을 토대로 한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특히 1996년에 서울대 규장각에서 2종을 합본하여 원색으로 영인 간행했고, 2005년 민속원 출판사에서 이를 재발행하여 시판함에 따라, 『무당내력』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규장각에 보관 중인 2종의 『무당내력』 


1. 고도서본(古 1430-18) 표지와 서문




2. 가람본(가람古 398.3-M883) 표지와 서문

 

 

 

 

Ⅱ. 고도서본 『무당내력』


  고도서본은 크기가 20.8×16.9㎝이며, 모시를 배접한 종이에 그림과 글씨를 직접 붓으로 쓰고 그린 필사본이다. 표지와 뒷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8장 16면이다. 표지를 넘기면 순한문의 서문 1면이 나오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무당내력巫黨來歷

  상원갑자上元甲子[당요唐堯 때이다] 10월 3일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백두산이며, 혹은 묘향산이라고도 한다] 박달나무[檀木]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 분이 단군으로 신교神敎를 열어 사람들을 가르쳤다. 맏아들 부루扶婁가 현명하고 복이 많은 까닭에 인민들이 존경하고 신뢰했다. 뒷날 땅을 가려 단을 쌓고[等壇] 토기에 곡식을 담아 풀을 엮어 덮고는 부루단지扶婁壇地・업주가리業主嘉利라 했으며, 매년 10월 햇곡식이 익으면 시루떡・술・과일로 치성을 드리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는 노련한 여자가 했는데, 세상에서는 무인巫人이라 했고, 그 후에 숫자가 증가하면서 무의 무리[巫黨]라 불렀다. 그러나 근래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거듭되고, 한나라와 당나라에서는 무속으로 말미암은 옥사[巫獄]가 자주 일어났다. 최근 불가佛家에서 말하기를 신라 중엽 함양咸陽 등의 곳에 법우화상法雨和尙이 있어 여덟 딸을 낳아 8도로 나누어 파견하여 무당이 되었다고 하는데, 근거 없는 그릇된 소문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을유년 중춘에 난곡蘭谷이 심심풀이로 썼다.

 

 

이에 의하면 이 책은 난곡이란 사람이 을유년 중춘, 즉 음력 2월에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요지는 무속이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고 타락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속은 단군과 그의 아들 부루를 기리는 데서 출발했지만, 무당의 무리가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나고, 심지어 무속의 기원을 불교에서 찾는 잘못까지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 다음부터 13면에 걸쳐 굿거리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먼저 그림을 그린 다음 남는 여백을 이용하여 그림에 대한 해설을 붙였다. 그림은 무당이 치마를 묶으면서 생긴 주름을 표시할 정도로 비교적 세밀하며, 격렬하게 뛰기 때문에 평소 보여서는 안 되는 속바지가 치마 끝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표현할 정도로 동적이다. 그리고 해설은 거리의 명칭과 의미를 설명한 것인데, 순서에 따라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남자 2명이 각각 피리와 해금, 여자 2명이 각각 제금과 장구를 들고 연주를 시작하려는 그림만 

      있고, 그림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설명이 없는 것은 이 면이 유일하다. 

  ② 감응청배感應請陪[속칭 산바라기] : 태백산을 바라보며 성령聖靈[단군]이 오시기를 청하는 거리

     인데, 지금은 덕물산 최 장군[최영]을 청한다고 하니 잘못이라는 설명과 함께, 굿상 앞에서 무녀가 

     초록색 장의長衣를 걸치고 양손에는 백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③ 제석거리帝釋巨里 : 단군은 곧 자식을 점지하는 삼신이란 설명과 함께, 굿상 앞에서 흰 고깔에 

      흰색의 장삼을 입고 손에는 방울과 부채를 든 무녀를 그렸다.

  ④ 별성거리別星巨里 : 단군의 신하인 고시례高矢禮를 모시는 거리인데 지금은 사도세자를 

      모신다고 횡설수설한다는 설명과 함께, 둥근 굿상 앞에서 검은 벙거지를 쓴 무당이 동달이 위에 

      전복을 입고 손에는 언월도와 삼지창을 든 모습을 그렸다.

   ⑤ 대거리大巨里[속칭 최장군거리] : 단군에게 소원성취를 비는 거리로 원래는 단군의 복색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최 장군의 복색을 한다는 설명과 함께, 굿상 앞에서 붉은 호수립虎鬚笠에 남철릭

       藍帖裏을 입고 손에는 언월도와 삼지창을 든 무당을 그렸다.

  ⑥ 호구거리戶口巨里 : 천연두 신인 호구를 근래 최 장군의 딸 또는 첩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설명과 함께, 굿상 앞에서 쪽머리의 무녀가 노랑 저고리에 홍치마를 입고 호구포를 뒤집어쓴 모습

      을 그렸다. 무녀는 손에 부채와 방울을 들고 있다.

  ⑦ 조상거리祖上巨里 : 조상을 모셔 미래의 길흉화복을 듣는 거리라고 하지만 실제는 돈을 뜯어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설명과 함께, 쪽머리에 평복 차림을 하고 손에는 부채와 방울을 든 무녀를 

      그렸다. 이 장면부터는 굿상이 보이지 않는다.

  ⑧ 만신말명 : 무녀의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내보이기 위한 거리라는 설명과 함께, 쪽머리에 노란 몽두

      리를 입고 손에 부채와 방울을 든 무녀를 그렸다.

  ⑨ 거리 이름은 제시하지 않은 채 설명만 있는데, 무녀가 5색 깃발을 들고 5방 신장을 지휘하여 온갖 

      잡귀를 쫒는 장면이라는 설명이다. 그림은 벙거지를 쓰고 동달이 위에 전립을 쓴 무녀가 양손에 

      5방기를 나누어 들고 있는 장면이다. 지금 무속에서 무당이 5방기를 드는 것은 「신장거리」이므

      로, 이를 「신장거리」로 보기도 한다.

  ⑩ 창부거리唱婦巨里 : 굿돈을 뜯어내기 위해 나이 어리고 예쁜 무녀를 뽑아 한바탕 놀게 하는 

      거리로 60년 전부터 성행했다는 설명과 함께, 벙거지를 쓰고 치마저고리 위에 검은색 전복을 입었

      으며 노란색 긴 천이 달린 부채를 든 무녀를 그렸다.

  ⑪ 성조거리成造巨里[셩주푸리] : 단군 때 매년 10월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을 무녀로 하여금 축하 

      하던 전통을 이은 거리라는 설명과 함께, 검은 갓에 연두색 두루마기[小氅衣]를 입고 손에는 부채

      와 방울을 든 무녀를 그렸다.

  ⑫ 구릉 :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무사귀환을 축원하던 풍습을 계승하여 치성 때마다 으레 거행한다

      는 설명과 함께, 붉은 호수립虎鬚笠에 홍철릭을 입고 손에는 부채와 종이 보따리를 쥐고 춤추는 

      무당을 그렸다. 종이 보따리 옆에는 사행길 주변의 떠돌이 귀신[浮鬼]들에게 노잣돈을 주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⑬ 뒷젼 : 치성을 마친 후 이름 없는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거리라는 설명과 함께, 쪽머리에 평상복의 

      치마저고리, 양손에는 북어를 들고 춤추는 무녀가 그려져 있다.



Ⅲ. 『무당내력』 가람본


  가람본 역시 한문으로 된 서문이 있고, 굿거리 그림에 해설을 붙인 점에서는 고도서본과 같다. 그리고 무속은 원래 단군과 그 주변 인물을 모시는 것이었는데, 후대로 오면서 타락했다는 인식도 기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책의 크기가 고도서본 보다 약간 크다든지(28.1×16.9㎝), 종이 질이 다르다든지, 표현에 상략詳略이 있는 등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⑴ 고도서본에서는 서문 끝에 ‘을유년 중춘’, ‘난곡’이란 말이 있어 저작 연대와 저자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데, 가람본 서문에는 이런 것이 없다. 대신 표지 서첨書籤에 ‘난곡수장蘭谷手粧’이란 

      말이 적혀 있어, 가람본 역시 난곡이란 인물의 손을 거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⑵ 고도서본에는 해설이 없거나 명칭을 제시하지 않은 거리가 있지만, 가람본에서는 이를 모두 갖추

      었다. 예컨대 고도서본의 ①에서는 해설 없이 잽이 그림만 있는데, 가람본에서는 「부정거리不精巨

      里」란 제목에다가 “시작할 때 부정을 탈 염려가 있으므로, 무명 잡귀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란 설명까지 달았다. 또 무당이 오방신장기를 들고 있는 고도서본의 ⑨에는 거리 이름이 없는데, 

      가람본에서는 「축귀逐鬼」라고 거리 이름을 달았다. 그러나 「부정거리」의 경우, 부정不淨을 부정

      不精으로 잘못 썼을 뿐만 아니라, 필적도 가람본의 다른 글씨와 다르다. 그러므로 ‘부정거리’라는 

      이름과 설명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림 3 고도서본


그림 4 가람본 「부정거리」

 

 


그림 5 고도서본



그림 6 가람본 축귀


그림 7 최길성, 『 한국의 무당 』

                                                                      

  ⑶ 거리의 순서가 다르다. 고도서본은 ‘감응청배→제석거리→별성거리→대거리→호구거리→조상거리

      →만신말명→(이름없음)→창부거리→성조거리→구릉→뒷젼’의 순인데 비해, 가람본은 「부정거 

      리」  다음에 ‘제석거리→대거리→호구거리→별성거리→감응청배→조상거리→만신말명→구릉거리

      →?→창부거리→축귀→뒷젼’의 순으로 이어진다. 

  ⑷ 가람본의 ?라 표시한 장면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면은 별지에 해설 없이 그림만 

      그려 「창부거리」 면 위에 붙인 것인데, 그림은 얹은머리에 색동소매의 원삼을 입고 손에는 방울

      과 부채를 든 무녀가 굿상 앞에서 춤추는 장면이다. 이 그림을 흔히 「성조거리」라 하는데, 그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에 ‘성조거리’, ‘고1430 18 see’라는 펜글씨 때문이다. ‘고1430 18’이란 고도서본

      의 청구기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그림은 「성조거리」인데, 고도서본을 참고하라는 의미로 풀

      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도서본과 대비했을 때 가람본에만 없는 것이 「성조거리」이므로, 이 그

      림을 「성조거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조거리」가 고도서본에는 있는데 가람본에만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펜글씨라는 점, 그리고 ‘see라는 영어로 미루어 이것이 원저자의 글씨가 아

      니고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추기된 것임은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의 화풍은 가람본의 다

      른 그림과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이 면은 후대에 가람본에 추가한 것이며, 그림의 원작자가 「성조

      거리」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그림 8 가람본 『무당내력』 별지 그림(아래의 노란색 신발은 「창부거리」 무녀의 신발)

 

   ⑸ 무속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고도서본에서는 「조상거리」와 「창부거리」에 

       대해 돈을 뜯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비난했는데, 가람본은 현재의 무속이 잘못되

       었다고는 하지만, 강한 비난의 표현은 없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2종의 『무당내력』에서는 무속의례인 굿이 거리라는 이름의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거리마다 모시는 신령이 다르며(거리의 명칭도 들어오는 신령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다), 들어오는 신령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거리마다 무당의 복장과 무구를 달리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신령이 들어와 무당이 신령이 되고, 해당 거리에 들어온 신령과 일체화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무당이 무복과 무구를 바꾼다면, 이러한 무당은 강신무이다. 강신무는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한다. 또 굿을 하면서 홍철릭・남철릭 같은 문무 관리의 관복을 입는 것이나 「창부거리」 같은 굿거리는 서울 무속의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굿은 12거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굿의 종류나 상황, 그리고 여건에 따라 약간씩 가감이 있으나, 기본이 12거리라는 것인데, 『무당내력』의 굿이 대략 12거리이다. 따라서 『무당내력』은 서울지역의 굿거리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같은 서울 굿이라도 처음의 「부정거리」, 마지막의 「뒷젼」을 제외한 나머지 굿거리 순서는 무당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도서본과 가람본의 굿거리 순서가 다른 것도 이해가 간다.



Ⅳ. 『무당내력』의 저자, 난곡


  고도서본과 가람본이 동명이본同名異本이라면, 양자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고도서본과 가람본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글이나 그림은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전혀 별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참고로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양자의 선후 관계가 문제인데, 현재로서는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필사본은 전사가 거듭될수록 오류가 많아진다는 원칙을 적용해서 선후를 구별하려 해도, 고도서본의 오자가 가람본에서는 옳게 된 것이 있는가 하면[서문의 等壇⟶築壇] 반대의 경우도 있고[「제석거리」의 山上王⟶上山王], 심지어 양쪽 다 오자인 경우[「감응청배」의 感應을 憾應, 咸應이라 한 것]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서본이 종이의 질이 좋고 해설의 분량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일단은 고도서본이 고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는 같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여부가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필체나 그림 솜씨의 비교를 통해 보다 확실한 판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일단은 양쪽 모두에 ‘난곡’이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물론 고도서본에서는 서문의 말미에, 가람본에서는 표지의 서첨에 난곡이란 이름이 적혀있어 위치는 다르지만, 같은 난곡을 사용했다는 것은 제작자가 같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명의학도明義學道’, 즉 ‘의를 밝히고 도를 배운다’라는 도장이 양쪽 모두에 찍혀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도장 역시 고도서본에서는 서문의 끝에, 가람본에서는 서첨에 있어 찍힌 위치가 다르다. 또 제작자의 것이 아니라. 소장자의 장서인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에서 난곡이란 이름 근처에 찍혀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제작자와 관련이 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작자 문제도 일단은 동일인에 의한 이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같은 사람이 고도서본을 만들고 왜 또 가람본을 만들었을까? 그것도 굿거리 순서를 다르게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 점 역시 추측에 불과하지만, 서문이나 굿거리 설명에는 큰 차이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나름대로는 굿거리 순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쯤 되면 난곡이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난곡은 본명이 아닌, 아호雅號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난곡의 본명을 밝혀야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말의 양명학자 이건방李建芳(1861∼1939)이란 견해가 있다. 이건방의 호가 난곡인 점에 착안한 견해인데, 한국의 자나 호 관련 사전을 찾아보면 난곡이란 사람은 20명 가까이 있으므로, 이 설은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건방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또 이건방 같은 정통 유학자가 이런 책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건방이 직접 그리고 쓴 것이라면 이처럼 오자가 흔할 것 같지 않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난곡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난곡에 대한 주변적인 사실 몇 가지는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난곡은 서울 또는 서울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무당내력』이 서울 굿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한문을 쓸 정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장이나 오자들로 미루어 볼 때 큰 학자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에도 어느 정도 솜씨가 있다.

  셋째, 굿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굿거리마다 무당의 복색이나 무구, 상차림을 달리 그린 것을 보면, 무속에 대해 웬만큼 정통하지 않고서는 이런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곡은 굿을 자주 접할 수 있는 무속 주변의 인물인 것 같다.

  넷째, 무속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속에 대해 무조건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잘못된 신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감응청배」나 「대거리」는 단군을 청배해야 하는데 최영 장군을 모시고 있으며, 「별성거리」는 단군의 신하 고시례의 고마움을 기리는 거리인데 사도세자를 모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이다. 「조상거리」나 「창부거리」는 돈을 뜯어내기 위한 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속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의 무속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당내력』을 만든 의도의 일단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무당내력』은, 무복과 무구에 굿상차림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재현하려고 했지만, 굿의 실상을 충실하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다. 비록 가람본에서는 어느 정도 둔화되긴 했지만, 당시 무속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서본과 가람본을 막론하고 일관된 주장은 무속이 단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무속은 단군은 물론이고, 단군의 아들 부루, 신하 고시례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고, 「성조거리」도 단군시대 이래의 전통이란 것이다. 따라서 『무당내력』은 무속의 원래 전통을 되찾자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난곡은 단군 숭배자일 가능성이 크다. 


 


 고도서본 소재 「별성거리別星巨里」 그림



 가람본 소재 「별성거리別星巨里」 그림

 

 

Ⅴ. 『무당내력』의 제작 시기


  『무당내력』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작 시기이다. 이것이 밝혀져야 그것이 어느 시기의 굿거리 모습인지를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무속의 변천 과정 등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당내력』의 제작 시기를 논할 수 있는 단서로 그간 주목해 온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도서본에서 ‘을유 중춘’이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별성거리」에서 사도세자를 언급한 점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로 1762년(영조 38)에 죽었다. 그리고 죽은 직후 사도세자란 시호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을유년은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에서 구해야 하는데, 1762년 이후의 을유년으로는 1765년, 1825년, 1885년, 1945년, 1960년이 있다. 그러나 1765년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3년 뒤에 불과하므로, 사도세자가 별성으로 좌정하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에 제외될 수 있다. 그리고 1945년 이후도 제외될 수밖에 없다. 고도서본을 경성제대에서 구입한 것이 1944년이기 때문이다. 

 

 

 

『무당내력』 고도서본 등록대장

 

 

  그렇다면 1825년이나 1885년이 될 수밖에 없는데, 현재는 1885년 설이 통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고도서본이나 가람본을 막론하고 「창부거리」가 60년 전부터 성행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중요한 근거이다. 다시 말해 창부란 광대인데, 광대놀이가 성행한 것이 1820년대 무렵이므로, 그 보다 60년 뒤인 1885년이 옳다는 것이다. 또 『무당내력』에 나오는 「대거리」가 1930년대 자료에 이미 보이지 않고, 반면 「대감거리」는 1930년대 자료부터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지만 『무당내력』에는 없다는 점 등을 들어, 1885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 무당을 문화재로 지정할 때도 『무당내력』이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는 영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전통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느냐가 기준인데, 무복이나 무구 등이 『무당내력』에 가까울수록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무당내력』은 굿 제차 등에서 현재의 서울 굿과 다른 점이 많다. 예컨대 『무당내력』에서 독립거리인 「제석거리」・「호구거리」・「말명거리」・「구릉거리」가 지금은 부속거리에 불과한 점, 「대거리」처럼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거리 이름이 나오는가 하면, 지금은 널리 연행되는 「대감거리」나 「신장거리」가 『무당내력』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무당내력』은 지금과는 다른, 꽤 이전 무속의 실상을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홍태한, 「무당내력과 서울 굿의 양상 비교」, 『남도민속연구』 26, 남도민속학회, 2013). 그러나 제작 시기를 1885년으로까지 올려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첫째, 용어의 문제이다. 고도서본과 가람본을 막론하고, 「호구거리」에서 “천연두의 신을 호구라고 한다.”라는 설명이 있다. 천연두라는 용어를 가지고 호구를 설명했다는 것은 당시 천연두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천연두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1898년 4월 23일자 『독립신문』 이전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천연두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1849년에 이미 사용된 예가 있지만, 일본에서도 19세기에는 널리 통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고도서본에서 「창부거리」는 새전賽錢 때문이라고 했는데, 새전은 ‘신이나 부처에게 바치는 돈’을 뜻하는 일본어[さいせん]이다. 그렇다면 개항한 지 10년 정도밖에 안된 1885년에 호구를 쉽게 풀이한다는 취지에서 천연두란 용어를 동원할 수 있었을까? 또 일본어인 새전이란 말을 이렇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무당巫黨이란 말도 그렇다. 고도서본 서문을 보면, 저자 난곡은 무당을 ‘무의 무리 내지 집단’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나 19세기 자료에서는 무당巫黨이란 표현은 찾기 어렵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등장해서 일제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무당이란 표기 역시 『무당내력』이 1885년에 저술되었다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둘째, 기호의 문제이다. 고도서본에서는 「성조거리」를 설명하면서 ‘(속칭 셩쥬푸리’, 「구릉」에서는 사신성황당을 설명하면서 ‘(모화현외慕華峴外)’라고 했다. 사신성황당이 모화현 밖에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괄호나 반괄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괄호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이다. 성서는 1860년 전후부터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했지만, 1898년에 나온 『시편촬요』 이전에는 괄호의 사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당내력』이 1885년에 제작되었다면, 너무 선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복식의 문제이다. 『무당내력』에서 무당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모두 전통복장이다. 그런데 전통복장 역시 착용하는 데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예컨대 갓은 도포와 함께 입는 것인데, 고도서본 「성조거리」에서는 갓을 쓰고 장의를 입고 있다. 또 무관은 철릭 중에서도 홍철릭을 입는데, 고도서본에서나 가람본에서 모두 장군인 최영을 모시는 「대거리」에서 무당은 남철릭을 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사대를 이유로 금색 옷의 착용을 금했는데, 「만신말명」에서는 모두 금색 몽두리를 입고 있다. 금색 착용 금지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느슨해졌다고 하더라도, 어울리지 않는 옷이나 제도에 맞지 않는 옷을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19세기에 입었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넷째, 단군 인식의 문제이다. 『무당내력』에서는 단군이 상원 갑자 10월 3일에 태백산에 내려와 신교를 개창했다고 한다. 나아가 단군을 고도서본 「대거리」에서는 ‘단조檀祖’, 가람본 「제석거리」에서는 ‘단군성조檀君聖祖’라고까지 했다. 단군의 하강일을 10월 3일이라 한 기록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904년에 나온 대종교의 「단군교포명서」가 처음이며, 10월 3일을 단군절이라 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1909년 대종교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단군을 ‘단조’니 ‘단군성조’니 하면서 호칭을 높인 것 역시 이 무렵이다. 나아가 『무당내력』 서문처럼 부루단지와 업주가리가 단군의 아들 부루를 기리는 풍습이라든지, 「제석거리」처럼 단군이 곧 삼신제석이라든지, 「별성거리」처럼 고시례는 처음 농사를 가르친 단군의 신하라든지, 「성조거리」처럼 단군이 집을 짓고 거처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든지 하는 것은 1914년에 나온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檀實記』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 인식들이다(비슷한 언급은 『규원사화』에도 있지만, 『규원사화』의 저술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므로 논외로 한다). 만약 『무당내력』이 1885년에 제작된 것이라면, 이러한 단군 인식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무당내력』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무당내력』이 한말의 단군 중심의 민족운동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무당내력』의 저술 시기를 19세기로 보기는 어렵게 된다. 

  다섯째, 가람본 『무당내력』의 이면지 문제이다. 가람본은 물품 출납을 적은 종이를 반대로 접고 깨끗한 면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다음, 한쪽 끝을 풀로 붙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른바 고지故紙, 즉 이면지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풀을 붙인 책의 등[書背] 부분이 손상되면서 출납 물품의 목록을 적은 원래의 면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기유년 윤2월에 물품을 출납한 기록이 있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1762년 이후, 윤2월이 있는 기유년은 1909년이다. 그렇다면 가람본은 1909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 물론 가람본이 1909년 이후라고 해서, 고도서본도 20세기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고도서본과 가람본의 제작 시기의 차가 30년 정도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1885년 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가람본 『무당내력』 이면지 부분

 

 

  이상에서 제기한 문제점들에 의하면, 고도서본 1885년 제작설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1885년이 아니라고 해서 1945년설은 성립될 수 없다. 경성제대의 도서구입대장에 1944년 12월 26일에 구입 결정이 난 사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1945년 제작설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당내력』의 제작 시기 문제는 문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Ⅵ. 『무당내력』의 별본別本


  무당내력』의 제작 시기가 밝혀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 가치를 섣불리 논하기는 어렵다. 19세기의 것이라면 전통시대 무속의 굿거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단군의 하강일로서 10월 3일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등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로서는 연대 추정에 다가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당내력』과 유사한 자료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당내력』의 유사본 내지 별본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⑴ 『무당성주기도도차서』 : 서울대 박물관 소장으로, 230×148.5㎝ 크기의 1장짜리 두루마리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굿거리 장면이 전개되는데, 가장 왼쪽의 「셩쥬푸리굿졀차[巫黨城主祈禱圖次

     序]」란 제목에서 시작하여, 제3회 졔석굿→제1회 부졍푸리→제4회 대거리→제5・제6합(合) 대감노

     리 겸 별상굿→제2회 산바라기굿→제7회 구눙굿→제8회 성주푸리→제9회 호구→제10회 창부→제

     11회 말명조상거리→제12회 뒷젼 순으로 나간다. 마지막에 무당은 단군 때 소망 성취를 기원하던 

     데에서 시작하여 12거리로 발전했다는 언급이 있다. 『무당내력』에 비해 그림의 수준이 떨어지며, 

     왜 굿거리를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1979년에 나온 『서울대박물관 소장품목록』

     에 의하면, 1927년에 수집했다고 하므로, 192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은 확실하다.

  ⑵ 『무녀연중행사절차목록 전全』 : 단국대 박물관 소장본인데, 연세대 교수였던 이가원李家源(1917~

      2000)이 기증한 것이다. 서명, 선장본이라는 점, 마분지 같은 종이에 그린 점, 크레파스 같은 것으

     로 덧칠을 한 점 등에서 차이가 있으나, 가람본과는 오자까지 꼭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람본을 

     토대로 전사한 것이라 추측된다.

  ⑶ 『거리』 : 샤머니즘 박물관 소장으로, 서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굿거리 그림도 조잡하고 해설도 소

      략하다. 그림의 순서는 ①조샹거리→②챵부거리→③별리거리別里巨里→④호구거리→⑤만신발명

      →⑥대꺼리이다. 제작 시기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⑷ 『무녀의』 :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県] 슈우난시[周南市]에 있는 도쿠오우사[徳應寺]라는 사찰 소장

      인데, 경성제대 교수였던 아카마츠 지조赤松智城의 유품이다. 처음에 서문이 있는데, 『무당내력』

      에 비해 간단하긴 하지만, 끝에 남파서南坡書란 글이 있어 제작자가 남파란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

      다. 그러나 남파가 누구인지는 미상이다. 이어서 굿거리 그림과 해설이 있는데, 순서는 ①감응청배

      →②대거리→③별상거리別上巨里→④호구거리→⑤제석거리→⑥조상거리→⑦만신말명→⑧대감

      거리→⑨창부거리→⑩성조푸리→⑪구릉→⑫뒷젼이다. 이러한 순서는 고도서본과 비슷하지만, 오

      방신장기를 든 무당 그림에 대해 고도서본에서는 거리의 명칭을 언급하지 않은데 반해, 여기서는 

     「대감거리」라 한 것이 주목된다. 아카마츠가 1941년에 일본으로 돌아간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1941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무당내력』과 유사한 책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렇다면 무당이나 그 주변 인물 사이에서 이런 종류의 책자를 만드는 것이 한때 유행한 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류의 책을 만드는 것이 유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런 류의 책들이 계속 발굴되어 『무당내력』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을 작성하는 데 최종성(서울대), 홍태한(중앙대) 두 분의 자료 제공에 힘입은 바 컸다.

     


조상거리 비교

 


   
『무당내력』 고도서본 

 


『무당내력』 가람본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