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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휘고』와 낮은 곳의 경세가들

 

 

 

배우성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강위의 눈에 비친 역관시인들


   시인 강위姜瑋(1820∼1884)에게는 시에 관한 버릴 수 없는 원칙이 있었다. “뜻[志]으로 쓰고, 천하를 위해 쓰자.” 말로 쓰는 시라면, 개인을 위해 쓰는 시라면 그에게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시는 세상에 대해 품어온 뜻을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렇듯 현실 참여적인 시에 집착했던 것일까. 시 이외에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도가문의 엘리트들이 과거를 거쳐서 관료가 되는 것은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급 무반 가문 출신인 그에게 그런 길은 열려 있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시에 대한 그런 소신을 기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참여시만이 가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는가? 시를 짓는 일은 의리학과 경세학을 탐구하거나, 과거시험을 대비해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가?” 유생들이라면 능히 그렇게 되물었음직하다. 
   그 불협화음에 위화감을 느끼던 강위를 반겨준 사람은 이명선李鳴善(1845∼?)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1864년, 20세의 나이에 잡과에 합격하여 한학역관으로 활동하던 중이었다. 이명선은 강위에게 자신의 스승 현일玄鎰(1807∼1876)을 소개했다. 현일의 가르침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말과 함께. 강위는 서둘러 자기가 그동안 지어온 시를 현일에게 보내 논평을 받았다. 이번에는 현일이 자신의 시문집을 강위에게 보내 글을 부탁하기도 했다. 1880년, 현일의 손자인 현은玄檃(1860∼1934)이 현일의 시집에 서문을 붙여줄 것을 청했다. 강위는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정학연丁學淵(1783∼1859) 선생이 시로 해외에 이름을 날리셨으나 홀로 이상적李尙迪(1804∼1865) 선생에 대해 마음아파하시며 그의 시제자시詩弟子가 되려 하셨으니, 소견 좁은 내가 스스로를 정학연 선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스승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은 다르지 않으리라.” 강위가 롤 모델로 여기는 현일과 이상적은 적어도 강위의 시선으로 본다면, ‘뜻으로 쓰고 천하를 위해서 쓰는’ 그런 시인이었다. 
   현일은 21세 때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역관譯官의 길로 들어섰다. 천녕 현씨는 수많은 역관들을 배출해 온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었다. 현일은 1851년(철종 2), 통청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500여명 이상의 기술직 중인들과 함께 문반직에 제한 없이 임용될 수 있게 해달라고 연명하여 청원한 것이다. 그런 직책을 감당할만한 경륜과 역량이 있다고 자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주장이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는 경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일은 통청운동 후 연천현감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이후로도 여전히 역관 직책을 맡았다. 현감을 역임했다는 사실조차 역관 출신인 그를 경세가로, 나아가 양반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의 정체성은 역관이며 시인이었을 뿐이다. 
   김정희의 제자로 유명한 이상적 역시 역관이었다. 청나라를 열 두 차례 이상이나 드나들던 그는 청나라 문인들과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그가 남긴 여러 시문에는 그런 연행 경험들이 짙게 묻어 있다. 그의 시에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감각이 돋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역관 출신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엿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다. 사신단의 정사나 청나라 문인들이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주는 장면을 과장하는 대목들은 자신이 문학적으로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중인 역관이라는 현실의 무게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역관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재력을 쌓기도 했으며, 북경에서 새로운 문헌들을 들여오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었던 것은 이상적이 유배지에 있는 자신을 위해 북경에서 책을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1844년).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은 역관들이 수행한 사적인 역할이다. 그들이 역관인 한, 그들에게는 외교활동을 실무적으로 주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때로 그런 공적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자신들이 가진 직업적 전문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은 조선시대 외교 관계 문서를 모아놓은 책자들인데, 역관들은 이 책들의 편찬 과정에도 깊게 간여했다. 이중에서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집대성해 놓은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동문휘고』라고 해야 한다. 『동문휘고』가 처음 편찬되었을 때 교정역관校正譯官으로 참여한 현계환玄啓桓은 현일과 같은 천녕 현씨 출신이다. 이 거질의 책자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 소장중인 『통문관지』(奎 731)와 『동문고략』(奎 12498). 조선시대 외교관계 문서를 모아놓은 책이다.



* 정조와 『동문휘고


   1788년(정조 12) 9월, 교서관에서 『동문휘고』를 인쇄해 올리자, 정조가 편찬을 주관한 신하들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수 백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이제 비로소 하게 되었다.” 정조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조선이 조공책봉체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대교린은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교섭 원칙이었다. 조선은 북경과 에도로 사신을 파견했으며, 외교문서를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승문원이 각종 외교문서를 분류해 외교사료집을 편찬하고, 그 사본을 3년에 한 번씩 활자로 인쇄하게 되어 있었다. 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 따르면, 그 사료집은 의정부와 예문관에 보관되어야 했다. 승문원에서 외교사료집을 편찬해 예문관에 보관하면, 의정부는 예문관의 사료집을 활용해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규정대로만 된다면, 긴급한 외교 사안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법전의 규정은 사문화되었고, 서리들이 문서를 베껴두는 방식도 혼란스러워졌다. 정조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정조가 각종 외교문서를 분류하여 『동문휘고』를 편찬하게 한 것은 1784년(정조 8)의 일이었다. 북경이나 에도로부터 특별한 외교 현안이 생겨나던 때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국내적으로 보면, 이 시점은 정조가 즉위 초의 불안정한 정국 상황을 수습하고 규장각을 토대로 문화정치의 기틀을 다져가던 때다. 정조가 규장각에 초계문신제도를 둔 것은 1781년(정조 5)의 일이었다. 정조는 과거합격자 중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을 뽑아 규장각에서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그들은 정조의 문화정치를 뒷받침하는 인재들로 성장했다.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던 그 해, 정조는 『대전통편』을 편찬하게 했다. 『경국대전』의 개정판인 이 책이 완성된 것은 1785년(정조 9)의 일이었다. 정조 전반기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동문휘고』 편찬사업이 초계문신제도 내지는 『대전통편』 편찬사업의 이후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국가체제를 추스르는 일련의 작업을 시도한 뒤에 외교문서 정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수 백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 내고 있다는 자부심은 아마도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4년여의 작업 끝에 마침내 『동문휘고』가 완성되었다. 「원편原編」(79권)의 항목은 봉전封典・진하進賀・진위陳慰・문안問安・절사節使・진주陳奏・표전식表箋式・청구請求・석뢰錫賚・견폐蠲弊・칙유飭諭・역서曆書・일월식日月食・교역交易・강계疆界・범월犯越・범금犯禁・쇄환刷還・표민漂民・추징推徵・군무軍務・부휼賻恤・왜정倭情・잡령雜令이다. 「별편別編」(4권)의 항목은 「원편」과 대동소이하지만 더 간략한 편이다. 봉전封典・진하進賀・진위陳慰・절사節使・청구請求・석뢰錫賚・견폐蠲弊・칙유飭諭・교역交易・범월犯越・쇄환刷還・군무軍務・왜정倭情・잡령雜令 등이다. 「보편補編」(10권)에는 사신별단使臣別單・사행록使行錄・사대문서식事大文書式・조칙록詔勑錄・영칙의절迎勑儀節이 들어 있다. 「부편附編」(36권)의 항목은 진하陳賀・진위陳慰・고경告慶・고환告還・통신通信・진헌進獻・청구請求・약조約條・변금邊禁・쟁난爭難・체대替代・표민漂民・잡령雜令 등이다. 
   정조는 이 사료집을 활자로 인쇄하여 의정부 이하 여러 관청에 나누어 보관하게 했다. 더 많은 관청에서 이 외교문서에 기록된 전례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음직하다. 정조는 이후 산출되는 외교문서들을 정리해 3년마다 기록을 추가해 나가도록 했다. 3년의 원칙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러나 순조・헌종・철종・고종 때 여러 차례 기록이 추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정조의 방침 때문이었다. 

 

『동문휘고』(奎 660). 조선후기의 대청對淸 및 대일관계對日關係의 교섭문서를 집대성한 책이다. 

조선의 대외관계는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은 조선후기외교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외교 관련 기사를 가장 밀도 높게 기록하다.


   『동문휘고』는 조선후기 외교와 의례, 나아가 국제관계에 관한 사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병자호란, 정계비 문제 등은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구성하는 가장 굵직한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큰 사건들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해도 두 나라 사이에는 국경 주변에서 일상적이라 해도 좋을 갈등들이 있었다. 1871(고종 8)년 10월에 벌어진 충돌도 그런 일상적인 충돌 중 하나였다. 『동문휘고』는 이 사건을 어느 정도의 밀도로 기록했을까? 
   그해 10월 20일, 압록강 너머에서 벌목하던 청나라 쪽 주민 70여명이 야밤을 틈타 강을 건넌 뒤 평안도 후창군厚昌郡 두지동杜芝洞 산골짜기에 숨어들었다. 침입자를 발견한 후창군수 조위현은 그들을 강 너머로 내 쫒았다. 11월 9일, 이번에는 총을 들고 깃발을 앞세운 700∼800여 무리들이 다시 압록강 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 이주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관리시스템이 허술해지면서 강변 너머는 야인에게도, 조선인 이주자에게도 이미 해방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위현은 군사들을 보내 경계를 강화했다. 11월 25일, 400∼500명의 청나라 쪽 주민들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후창군으로 돌진해 왔다. 조위현은 그들을 금창리金昌里 건너편 마록포라는 곳으로 쫒아낸 뒤, 평안감사 한계원韓啓源, 평안병사 조태현趙台顯 등에게 그간의 경위를 보고했다.
   거의 두 달이 다 되도록 금창리 양편에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조위현은 시종일관 완강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침내 청측 주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즈음 왕양춘王陽春, 한오정韓五亭 등 청측 주민 대표 두 사람이 강을 건너 왔다. 그들은 이후로는 다시 강을 건너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적은 문서를 조위현에게 전달했다. 마침내 그들은 자진 해산했다. 조위현은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한계원과 조태현에게 알렸다. 12월 20일, 두 사람은 장계를 올려 저간의 사정을 고종에게 보고했다. 1872년(고종 9) 1월, 고종은 이 사태의 전말을 자문을 통해 청에 알렸다. 
   고종이 보낸 자문이 성경盛京 예부禮部를 거쳐 북경 예부에 도착한 것은 1872년(고종 9) 3월이었다. 예부는 사건에 대해 강을 넘어 소요를 일으킨 것만이 아니라 왕양춘 등이 제멋대로 문서를 만들어 보낸 것 모두를 문제 삼았다. 동치제는 성경장군盛京將軍에게 이 사태를 엄밀하게 조사하여 밝히도록 하자는 예부의 청을 재가했다. 
   예부는 동치제의 결정을 성경장군 도흥아都興阿 등에게 하달하고, 한편으로 조선에도 알렸다. 도흥아 등은 동치제의 명이 내려오는 그 시점까지도 이 사건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조선 국왕에게 두지동과 금창리의 위치를 문의하도록 할 것을 청했다. 조선이 청나라의 요청을 담은 자문을 받은 것은 그해 4월 22일이었다. 고종은 곧장 평안감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해당 위치를 조사해 보고하게 했다. 6월 2일, 현지 조사 결과를 담은 평안감사의 장계가 서울에 도착했다. 6월 19일, 고종은 이 내용을 담은 자문을 청나라 예부로 보냈다. 
   만일 『동문휘고』가 없었다면 이 사건의 전말을 이렇듯 상세히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청나라 쪽에도 관련 문서가 있고, 조선 측에도 『승정원일기』 등 다른 기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록도 『동문휘고』 만큼의 정보량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동문휘고』를 조선후기 외교사 관련 사료 중에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 『동문휘고』 편찬을 주도한 역관 가문들


   『동문휘고』가 완성되자 정조는 교정당상校正堂上, 감인당상監印堂上과 낭청郎廳, 그리고 교정역관校正譯官에게 상을 내렸다(1788년). 이조판서 정창순鄭昌順은 교정당상이자 감인당상이었다. 이재학李在學, 이도묵李度默 등은 감인당상으로 상을 받았다. 서얼 출신인 감인낭청 성대중은 상위직으로 임용되었다. 교정역관 현계환과 김윤서金倫瑞에게는 관품을 더해주는 상이 내려졌다. 1799년(정조 23) 2월, 『동문휘고』를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주도한 역관들은 현재명玄在明과 홍처순洪處純이었다. 
   역관들이 『동문휘고』의 수정・보완 작업에 참여하는 전통은 19세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94년(정조 18) 이후 1804년(순조 4)에 이르기까지 『동문휘고』 편찬을 위해 외교 사료를 수집하고 교열하고 감인한 것은 현후玄㷞와 변호邊鎬 두 사람이었다 한다. 1808년(순조 8)에는 변호邊鎬・이광재李光載・이일선李一選・김상순金相淳이, 1825년에는 이광재李光載・현재명玄在明・이시복李時復・한상우韓相瑀・박명준朴命浚・오계순吳繼淳 등이 각각 교정과 감인을 담당하는 역관으로 참여했다. 1849년(철종 즉위년)에는 이상적李尙迪・방우서方禹敍・진응환秦膺煥(1797∼?)・이경수李經修 등이 같은 역할을 맡았다. 1864년(고종 1)에는 오응현吳膺賢・김경수金景遂・방익용方益鏞・이집李執・김문주金文周・진계환秦繼煥(1808∼?) 등이, 1874년(고종 11)에는 이상건李尙健・현일玄鎰・현탁玄鐸 등이 참여했다. 
   『동문휘고』 편찬에 참여한 역관들 중에는 천녕 현씨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참여한 해를 기준으로 할 때, 1788년의 현계환, 1799년의 현재명, 1804년의 현후, 1825년의 현재명, 1874년의 현일・현탁 등이 모두 천녕 현씨다. 과연 역관 명문가답다. 현후는 현재명의 아버지이며, 현재명은 현일의 아버지다. 말하자면 현후에서 현일에 이르는 3대가 모두 『동문휘고』의 편찬・수정・보완 작업에 참여한 셈이다. 현일과 현탁은 현후의 손자들이다. 
   1825년의 오계순, 1864년의 오응현은 역시 역관 명문가인 해주 오씨 출신으로, 두 사람은 부자간이다. 오응현은 오경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849년의 이상적, 1874년의 이상건은 하음 이씨 출신의 역관들인데, 이상적은 이상건의 형이다. 이상적은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 준 바로 그 이상적이다. 오응현은 이상적과 같은 시기에 나란히 역과에 합격한 인연을 계기로 이상적에게 아들 오경석의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결국 오계순-오응현-이상적-이상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여러 대에 걸쳐 『동문휘고』 편찬에 참여한 셈이다. 


* 외교 현장에서 중요한 근거자료가 되다.


   『동문휘고』는 외교와 관련된 현안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책이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11월, 순조가 즉위하자 청나라로부터 칙사가 도착했다. 칙사는 책봉 의례를 먼저 하고, 선왕인 정조에 대해 조문하는 의례를 나중해 시행하자는 조선 영접도감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칙사는 역관을 통해 그것이 전례에 맞는 일인지 물어왔다. 영접도감에서는 정조가 즉위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했었다고 답했다. 칙사는 정조가 즉위하던 때의 의례를 기록한 책자를 보자고 요구했지만, 영접도감은 등록된 책자를 보여줄 수 없다며 버텼다. 온종일 이 문제로 실랑이하던 칙사는 마침내 조선 측이 제공하는 예단을 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청의 칙사가 정말 의례가 궁금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건 예단 접수를 거부한다면 조선 측으로서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영접도감은 최후의 방법으로 『동문휘고』에 기록되어 있는 의례 관련 내용을 찾아 내밀었다. 기사를 확인하고 망연자실해 하던 칙사는 결국 조선 측의 예단도 모두 받아들였다. 
   『동문휘고』는 일본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도 활용되었다. 1845년(헌종 11) 전라도 연안과 제주도 인근에 이양선이 나타난 일이 있었다. 『헌종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배는 영국 해군 소속 사마랑Samarang호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중국해로 탐사에 나서다가 제주도 인근까지 측량하게 된 것이다. 조선은 관례에 따라 청나라 예부로 외교문서를 보내 이양선이 출몰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일본에 알려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일본은 특히 이양선에 민감했다. 서양선박을 통해 기독교가 전파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 배가 기독교 선교와 관련된 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문휘고』에 실려 있는 일본 측 외교문서를 통해 이양선 문제에 관한 일본의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었던 좌의정 김도희는 이양선 출몰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자고 주장했다. 헌종은 김도희의 요청을 재가했다. 


* 정약용과 이청, 『동문휘고』를 근거로 『사대고례』를 편찬하다.


   『동문휘고』 수정 증보 작업은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순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들은 모든 외교관계 기사를 분류해 수록하고 시대마다 보완한다는 정조의 구상을 충실히 계승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동문휘고』라는 밀도 높은 외교 관계 사료집이 남아 있게 된 것은 그런 노력의 결실이다. 정조는 이 책이 널리 참고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모든 관련 기사를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다. 
   청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비변사는 『동문휘고』에서 전례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전례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례를 확인하려고 『동문휘고』를 펴면, 문제가 간단치 않다. 『동문휘고』에는 그 사안을 두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여러 차례 오고 간 외교문서가 원문 형태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원문에는 사건의 내용과 관련 없는 군더더기가 적지 않다. 더구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급 관서와 하급 관서 사이에서 오간 문서들이 그대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 문서들에는 사건 개요와 경과에 관한 동일한 서술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경우도 흔하다. 『동문휘고』는 전례를 확인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근거 자료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불편한 사례집인 것이다. 더구나 역관들이 외교 현장에서 매번 『동문휘고』를 가져다 참고할 수는 없는 문제도 있었다. 정조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799년(정조 23) 2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어 온다는 의주부윤의 장계가 서울에 도착했다. 조선이 영접도감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칙사의 일정을 담은 패문牌文이라는 공문서를 접수해야 했다. 정조에게 올라온 장계에는 의주부사가 패문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칙사가 조만간 압록강을 건너게 되리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그 일정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정조는 칙사가 강을 건넌 시점과 패문이 온 시점들에 관한 과거의 사례들을 확인한 뒤 이 문제를 논의에 부쳤다. 정조가 의지한 것은 물론 『동문휘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안을 일선에서 처리해야 할 역관들이 두꺼운 『동문휘고』를 매번 활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조는 역관들을 불러들인 뒤, 『동문휘고』를 재정리하고 『통문관지』에서도 내용을 보충하여 새로운 요약본 사례집을 만들도록 했다. 
   『통문관지』는 너무 간략하고, 『동문휘고』는 번거로울 정도로 자세하다. 이 두 책의 기사들을 하나로 모아 주제별로 분류하여 핵심적인 내용만 수록하고, 다른 문헌들에서 관련 기사를 보충한다면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좋은 책이 된다.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 『사대고례』다. 『사대고례』의 서문을 작성한 사람은 사역원 정을 역임한 한학역관 이시승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에 따르면, 편찬 실무를 주관한 것은 정약용의 강진 시절 제자인 이청이며, 정약용 자신도 이 책의 편찬에 깊이 간여했다. 차례를 정하고 내용을 정돈하는 것을 자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범례凡例 등을 직접 작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대고례』는 정약용과 이청의 합작품인 셈이다. 서문을 쓴 사역원 정 이시승은 정약용과 학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정조가 남긴 명을 실천한다는 차원에서 사역원의 역관이었던 이시승을 책의 전면에 내세웠음직하다. 1821년(순조 21) 완성된 이 책은 18개 항목, 26개의 권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일본 오사카 나카노지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항목 상 『동문휘고』에 비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사개고使价考」 세 권이다. 사신단에 관한 기록을 충실하게 보완한 것이다. 아마도 외교 실무에 참고하게 하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체제상으로는 각 항목의 개념과 연혁을 설명한 제서題敍, 필요한 내용을 도표로 정리한 비표比表, 편찬자의 의견을 적어 놓은 안설案說 등이 눈에 띤다. 범례와 마찬가지로 정약용이 직접 쓴 것이다. 
   정약용은 『사대고례』에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들도 수록해 놓았다. 이 책 「해방고海防考」에는 1801년(순조 1) 필리핀 루손 사람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가 9년간이나 조선에 체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우이도에 살던 홍어상인 문순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약용은 그의 이름을 여러 차례 적어 두었다. 문순득은 1802년(순조 2) 신안군 앞바다에서 표류하였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을 거쳐 1805년(순조 5) 조선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그런 역할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당시 우이도에 유배와 있던 정약전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글로 남겼다. 정약용이 『사대고례』에서 문순득을 거론했으며 정약전이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문순득이 강진에 있던 정약용과 우이도에 있던 정약전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사대고례』는 『동문휘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정약용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주도한 사찬 사료집이라는 점에서 『동문휘고』와는 차이가 있다. 


* 그들은 왜 시인일 수밖에 없었는가.


   정약용의 제자들 중에는 정학연, 정학유 두 아들과 외손 윤정기 이외에도 황상, 이강회, 이청 등이 있었다. 유배지에서 신분을 넘어 사람을 길렀던 정약용은 유배가 풀린 뒤 서울에 올라와 당파를 넘나들며 교유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은 『사대고례』 편찬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뒷날 서울에서 이상적과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다. 경세가 정약용의 강진 시절 제자 이청과 고증학자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 두 사람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상적이 『동문휘고』, 이청이 『사대고례』 편찬에 각각 깊숙이 간여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두 사람은 동북아 국제질서의 동향을 주시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낮은 신분이지만, 경세적인 안목을 갖춘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경세가로 인정받았는가. 
   다시 강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정학연이 이상적에 대해, 그리고 강위가 현일에 대해 마음아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상적과 현일이 처한 현실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북경을 왕래하면서 갖춘 안목, 『동문휘고』를 편찬하면서 얻은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외교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대접받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역관’을 직업으로 하는 ‘시인’일 뿐이다. 메아리가 없는 외침에 지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를 짓는 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시인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지만, 시인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육교시사의 리더 강위도 그런 현실에서 그리 자유롭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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