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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궤大禮儀軌』조선 문화의 맥락에서 본 황제 즉위식

 

 

 

김지영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의 의궤에는 결혼식, 장례식, 책봉의식, 존숭의식 등 다양한 왕조의 의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의식들이 여러 왕대에 걸쳐 여러 번 거행되었기에 같은 제목의 의궤들이 여러 종 남아 있다. 그런데 아래에 보이는 책은 다르다. 『대례의례』라고 이름 붙여진 이 황금색 책은 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유일한 의궤이다. 왕이었던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는 의식을 기록하였으니 황제즉위식이라고 해야 맞을까. 하늘이나 부처나 귀신의 보증보다 스스로의 덕을 증명하는 것을 즉위식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여겼던 조선의 오래된 전통을 고려할 때, 또 근대화와 산업화의 엄청난 변화에 처해 있던 당시 세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즉위식은 여러 모로 기이하다. 그 책과 책을 둘러싼 당시의 현실로 들어가 보자. 



 

규장각 소장 어람용御覽用 『[고종高宗]대례의궤大禮儀軌』 (奎 13488)

 

 

황제국 선포, 그 직전의 날들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 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 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드사 이달 십이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 독립국 뿐이 아니라 자주 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나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나리요. 금월 십일일과 십이일에 행한 예식이 조선 고금 사기에 처음으로 빛나는 일인즉 우리 신문에 대개 긴요한 조목을 게재하여 몇 만 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읽게 하노라. 
십이일 오후 두시 반에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정제하게 섰으며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정제히 벌려 서서 광국의 위엄을 나타내며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고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등물을 고쳐 누른빛으로 새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으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는데 위엄이 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 육군 장관들은 금수 놓은 모자들과 복장들을 입고 은빛 같은 군도들을 금줄로 허리에 찼으며 또 그 중에 옛적 풍속으로 조선 군복 입은 관원들도 더러 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더라. 어가 앞에는 대황제 폐하의 태극 국기가 먼저 가고 대황제 폐하께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타시고 그 후 황태자 전하께서도 홍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시며 붉은 연을 타시고 지내시더라.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사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친히 감하신[살펴보신] 후에 도로 오후 네시쯤 하여 환어還御하셨다가 십이일 오전 두 시에 다시 위의威儀를 베푸시고 황단에 임하사 하나님께 제사하시고 황제 위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오전 네 시 반에 환어하셨으며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 폐하께와 황태후 폐하께와 황태자 전하께와 황태비 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며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중략) 

 

이왕 신문에도 한 말이어니와 세계에 조선 대황제 폐하보다 더 높은 임금이 없고 조선 신민보다 더 높은 신민이 세계에 없으니 조선 신민들이 되어 지금부터 더 열심히 나라 위엄과 권리와 영광과 명예를 더 애끼고 더 돋우어 세계에 제 일등국 대접을 받을 도리들을 하는 것이 대황제 폐하를 위하여 정성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동포 형제에게 정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계에 났던 장부의 사업이라. 구습과 잡심을 다들 버리고 문명진보하는 애국애민하는 의리를 밝히는 백성들이 관민 간에 다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비노라.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제122호]


1897년 10월 고종은 환구단에서의 제천祭天 의식과 함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새로운 황제국의 이름은 ‘대한大韓’으로 정해졌다. 500년 이상 존재해 오던 조선이라는 국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왜 고종과 그의 조정은 황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하려 했던 것일까? 의식을 제안했던 권재형의 상소로 돌아가 보자. 

 

 

‘황皇’, ‘제帝’, ‘왕王’이라고 하는 것이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를 스스로 주관하고 독립하여 의존하지 않으며, 나라의 기준을 세워 백성들에게 표준이 된다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부터는 독립하였다는 명색은 있으나 독립한 실상이 없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 백성들의 의혹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나라 백성은 글만 숭상하여 나약한 것이 습성이 되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멀리로는 2000년, 가까이로는 500년 동안 중국을 섬겨 오면서도 그것을 편안히 여겨 고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주自主를 유지할 수 있다고 논하는 사람을 한 번 보기만 해도 대뜸 눈이 휘둥그레지고 혀를 내두르며 깜짝 놀라 마지않습니다. 당장의 정사를 바로잡는 방도는 진실로 위의威儀를 바로잡고 의식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민심을 흥기시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 즉시 의정부에 물어 의논하게 한 다음 빠른 시기에 중대한 계책을 결정하여 속히 높은 칭호를 올리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는 마음에 부응하시고, 한편으로는 글만 숭상하여 나약하고 남에게 의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혹을 깨뜨리소서. 또다시 굳센 의지로 정진하시며 정력을 다해 정사를 도모하시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의심하지 마시며 간사한 사람을 가차 없이 제거하소서. 그리하여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하여 명색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게 한다면, 전대前代를 빛내고 후세를 넉넉하게 할 수 있으며 또 멀리 있는 이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이를 친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국가나 신민에 있어서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1894년 7월 29일부터 우선 첫 단계로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로부터 다시 ‘대군주’로 호칭하였다. 중국 연호도 폐지하고 조선 왕조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이 되었다. 1895년 1월 7일에는 국왕이 종묘에 나아가 조상에게 서고문誓告文을 바치는 형식으로 〈홍범 14조〉를 공포하였다. 그 제 1조에 “청국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는 것을 선언하여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지위에 둠을 공포하였다. 1895년 윤5월에는 도성 남쪽 교외 옛 남단이 있던 자리에 환구단을 조성하였다. 또 1895년 8월 27일 국호를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개칭하고 대군주를 ‘황제’로 격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일본의 반대로 집행되지 못하였고,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됨으로써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려는 개화파의 운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기왕의 동아시아 사대질서 속의 천자-제후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앞서의 노력들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왕비가 궁궐 안에서 피살되고 국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제천의례를 위한 환구단 제도는 정비되어 갔다. 고종은 국가제례에 관한 규정을 새로 정했고, 동짓날이 다가오자 제천례의 축문과 악장을 지어 올리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환구단의 제기와 악기를 갖추게 했다. 제천의례라는 상징적 의식을 통해 조선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한다는 구상은 고종에게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1897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인근에 있던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온 고종은 자주 독립된 새로운 조선의 건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8월 16일에 고종은 ‘광무光武’라는 새 연호를 정하고 환구단 등에 이를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거행했다. 1897년 9월 21일에 고종은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의 건의를 수용하여 환구단 제도를 정비하면서 제단을 새로 건설할 것을 결정했다. 이 기간 동안 민관의 기부금으로 영은문을 헐고 자주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건립하는 일도 진행되었다. 독립문의 정초定礎 작업은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고 황제국 선포 후인 1897년 11월이나 12월에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고 제천의례의 공간을 준비해가는 가운데 황제국을 선포하여 자주 독립에의 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방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는 고종의 뜻이기도 했고 당시 열강의 침략에 맞설 강력한 국가건설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의지이기도 했다. 물론 자주독립을 위하여 실제로 국가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 군주의 칭호가 중요치 않다는 민권운동파 내부의 주장도 있었고, 전통적인 명분론에 집착하여 칭제를 반대하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권재형이 상소에서 독립한 실상이 없다고 지적한 것처럼 청일전쟁 이후 대두되기 시작한 일본이나 러시아의 보호국 관련 논의는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보호국 논의란 조선이 청의 보호국이었는데, 이제 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니 일본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896년 5월 16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보호국 논의의 부당함과 조선의 자주 독립의 보존방책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었지만 명색만 그러할 뿐 조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주독립된 국가였는데 근래에 원세개를 통해 청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스스로 속국의 지위를 자처했고, 이 때문에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스스럼없이 조선의 새로운 보호자를 자처하게끔 되었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일본과 청국이 싸운 후에는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고 말로는 하였으되 실상인즉 일본 속국이 됨[과] 같은지라. 조선 내정과 외교하는 정치를 모두 진고개 일본 공사관에서 조처하였으니, 독립국에도 남의 나라 사신이 그 나라 정부 일을 결정하는 나라도 또 있는지 우리는 듣고 보지 못하였노라.”는 표현이나 “만일 두 나라에 보호국이 되거드면 그것은 상전 둘을 얻는 것이니, 남은 있던 상전을 버리려고 사람들을 몇 만 명씩 죽여가면서 싸움도 하는데, 조선이 상전을 둘씩 한꺼번에 얻을 지경이면 아무리 조선 사람들이 어리석고 남의 천대를 분히 여길 줄 모르더라도 할 말이 조금 있을 듯 하노라.”는 표현에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자조감과 함께 모든 조선인들이 쉽게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자주 독립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당시에 처한 현실을 극복해야 나가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권재형이 상소를 올려 황제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 것도 단순히 고종의 이름을 높여 왕실에 아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국을 선포하는 의식을 통해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독립된 제국의 일원임을 각인시키고 독립된 제국으로서의 실상을 갖추기 위해 더욱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권재형의 상소가 올라간 후 연이어 황제의 칭호를 받으라는 상소가 잇달았고, 정부 대신들의 정청도 지속되었다. 각 논자마다 칭제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중화문화의 적통을 이어받은 문화국으로의 자존의식을 강조하는가하면 제국으로의 칭호가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만국공법萬國公法 상의 조항도 거론되기도 했다
. 만국공법을 거론한 것도 권재형이 처음이었다. 그는 만국공법의 조항 가운데 황제의 칭호를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조항을 인용하고, 이를 다시 재해석함으로써 황제의 칭호를 쓸 것인지의 여부는 각 나라의 인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정립할 것인지의 문제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공법 제85장에는 “관할하는 것이 한 개 나라나 본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넓은 경우에는 황제라 불러도 혹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참람하고 망령된 것에 가까울 것 같다.” 는 조항이 있고, 또 제84장에는 “여러 나라들이 모두 높은 칭호를 쓸 수 없으며 명색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고 걸맞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일견 모든 국가들이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0년 전 러시아의 임금이 황제라고 칭호를 고쳤는데, 처음에는 각 나라에서 좋아하지 않다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인정하였다.”라는 주석도 있고, 영국이나 러시아처럼 여러 나라를 거느린다거나 영토가 광대하다고 해서 꼭 황제의 칭호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터키나 일본과 같이 영토나 제국을 관할하지 않아도 황제의 칭호를 쓰고 있는 사례도 있음을 들어 황제국을 칭할 수 있는 공법상의 지위가 명백히 규정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는 이후의 상소나 정청에서 거듭 재인용되거나 더욱 적극적으로 재해석되었다. 9월 29일에 김재현 등 716명이 올린 연명상소에서는 조선이 제국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조선의 문화전통과 공법상의 규정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라파와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다 평등하게 왕래하고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는데 아시아의 풍속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 칭호를 보고 혹 불평등하게 대우한다면 교류함에 있어서 지장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宋 나라나 명明 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 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제국을 표방했던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때 조선이 제국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였다. 첫째, 조선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얻은 것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을 통해 로마의 계승을 천명하였던 일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영토나 인구로 볼 때도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제국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현재 영토는 옛날 ‘세 한韓나라’의 영토를 아우른 것이며, 인구가 2천만에 이른다는 사실이 근거였다. 삼한이라는 오랜 역사를 끌어다가 당당히 제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김재현 등에 의해 새롭게 주장된 것인데, 이 논의는 나중에 새 제국의 국호가 ‘옛 삼한의 영토를 아우른 큰 나라’라는 의미에서 ‘대한大韓’으로 정해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왜 이렇게 공법상의 규정에 신경을 쓴 것일까? 만국공법을 새로운 국제질서의 중요한 근거이자 기준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왕의 사대교린, 즉 예법에 토대한 평화적 국제질서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만국공법적 질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당시에 모색하였던, 만국공법에 토대한 질서라는 것이 서구적 근대 세계로의 전면적 전환이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대결적 세계를 중재해 줄 기준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가 없었다면 사대질서에서의 탈피를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10월 3일 고종은 황제의 칭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의식, 즉 대례의식大禮儀式은 나라에 처음 있는 의식인 만큼 고례를 순수하게 따를 필요는 없고, 우리의 예에서 참작하고 변통하여 간편한 것을 따르도록 했다. 이전부터 황제국 선포로 자주 독립에의 의지를 천명할 것을 주장해왔던 독립신문에서는 정부의 여러 신하들이 자유의지로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거듭 정청을 하여 황제 칭호를 받으라고 권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의지를 갖게 된 증거라고 강조하면서, 황제국 선포는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는 출발에 불과하다는 점을 거듭 지적했다. 



대례의식大禮儀式의 실제

 

황제 등극의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행할 것인가는 역대 전례를 살펴서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은 중국 명나라의 사례였다. 조선후기 숙종 때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조선에서 다시 간행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은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의 도덕적 문명을 조선이 계승하고 있다는 강렬한 문화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후 조선의 많은 의례 개정 때 명나라의 전례를 많이 참조해 왔다. 황제국의 의례를 새롭게 마련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과 연구가 부족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명나라의 전례를 가장 많이 참조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0월 7일에 이르러 황제 등극의식의 대체가 결정되었다. 

 

역대의 전례를 살펴보니 환구에 고하는 제사의식이 이루어진 후 교단의 앞에 의자를 설하고 대위에 오릅니다. 이어 태묘와 사직에 고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한 후 정전에 환어하여 백관이 표문을 올리고 진하하고 관원을 보내 황후, 황태자를 책봉하고 다음 날 천하에 조를 내려 고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마련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환구에 고하는 제사는 고종이 직접 지내고, 황태자의 자리에 오를 왕세자도 배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종묘와 사직에의 고유제에는 황제만이 참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고유제를 위한 서계의식이나 희생과 제물, 제기가 정결한지 살피는 것도 모두 황제가 직접 거행하기로 하였다. 의식의 준비는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보皇帝之寶 등 새 제국의 국새國璽와 어보御寶, 황제·황태후·황후·황태자·황태자비의 책보冊寶 등을 만드는 일, 창벽蒼璧·황종黃琮·금절金節 등 의식에 필요한 의물을 제작하는 일, 구체적인 의식의 의주를 마련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대례의궤』 수록 황제지보皇帝之寶 『대례의궤』 수록 황제지보皇帝之寶

 

 

 

『대례의궤』 수록 창벽蒼璧 『대례의궤』 수록 황종黃琮 및 금절金節


 

의식에 필요한 중요한 의물로 『대례의궤』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창벽, 황종, 금절이다. 창벽은 푸른빛의 둥근 옥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바치는 것이고, 황종은 누른빛의 네모진 옥으로 땅에 제사를 바칠 때 바치는 것이다. 천원지방의 의미를 취해 옥의 모양과 색을 정한 것이다. 창벽과 황종은 모두 단천옥으로 만들어졌다. 창벽과 황종은 제작된 후 환구에 곧바로 옮겨져 천지 제사에 대비하였다. 금절은 황제 의장 가운데 하나로 주홍칠을 한 나무 자루 위에 금으로 용 모양의 머리장식을 씌우고 그 아래로 원반을 설치하고 상모 끈을 8층으로 늘어뜨리고 그 위에 황색 비단에 용을 수놓은 자루를 씌운 것이다. 절節은 상벌의 규칙을 호령한다는 의미[號令賞罰之節]를 담고 있다. 
대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환구에서 하늘과 땅에 직접 제사를 올리는 일이었다. 왜 고종이나 의식을 준비했던 정부의 관료들은 하늘에의 제사를 황제 즉위의 중요한 상징으로 삼았을까. 이제 조선이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천제를 지냈으니 천자국이 될 수 있다는 과시용이었을까.
하늘에 대한 제사는 단지 나라의 운명을 하늘에 위탁하고 선처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시대까지도 하늘, 부처, 각지의 영험한 신에게 기도하여 복을 구하고 현세의 불안한 삶을 보살펴달라고 기도하는 의식들이 널리 행해졌다. 조선 초에도 왕실이나 부호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불교, 도교, 무속의 제사를 통해 개인적, 국가적 복을 빌었다. 유교 정치를 조선에 자리 잡게 하려던 개혁가들은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것의 의미를 하늘의 덕성 즉 천덕天德을 함께 한다는 의미로 바꾸고자 했다. 천지자연의 기운이 바르게 운행되는 것은 자연재해나 이상 기후가 없음을 의미하니, 농사를 주된 생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했다. 그 운행을 주관하거나 또는 그렇게 운행하도록 하는 원리 자체를 하늘의 덕이라고 일컬었다. 천지에 제사를 올리는 일은, 월령月令을 반포하여 천시天時에 맞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천덕에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였고, 그 가장 중요한 내용이 ‘기곡祈穀’이었다. 하늘 또는 천지자연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책임의식의 표현이었고, 그렇게 중요한 책무를 짊어진 자이기에 이 세계에 대한 가장 존귀한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인정되었다. 이것이 유교 왕조국가에서 왕 또는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는 이유였다. 
조선 전기에 환구제가 천자-제후의 명분과 충돌했을 때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혹자는 조선은 중국과 다른 독립적인 정치공동체이므로, 당연히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인 하늘 제사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언제라도 조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주변국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강압적인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좋은 정치의 방법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뢰의 정치학을 발달시켜 온 문명국가―물론 이는 당위적 차원에서의 중화국가에 대한 인식이며, 현실의 중국은 그 이상과 언제나 거리가 있었다―와 연대하여 세력으로 경쟁하려는 주변국을 관리해나가는 것이 조선이라는 독자적 정치공동체에 더 필요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 평화적 질서에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중화대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하늘 제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하늘 제사를 포기함으로써 조선은 스스로 ‘중화’적 문명세계의 일원이라고 선언하고 내부적으로 책임의 크기[名]에 따라 정치적 자원을 분배[分]하는 명분적 질서를 안착시키고자 했다. 
정치적 권위가 천덕天德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유교정치의 이념은 더욱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조선 전기에 즉위 후 기곡하는 의례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생각하여 선농에 제사하고 친경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하였던 것이나―이는 고려 말 성리학적 개혁을 추구했던 이들이 주장했던 바이기도 했다―조선 후기에 남교나 북교에 거둥하여 직접 기우제를 올리거나 정월의 사직기곡제를 중요한 의식으로 부활시켰던 것 등은 모두 정치적 책임의식을 의례의 형식에 담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고종이 자주와 독립의 상징으로서 환구에서의 천제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전통 위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단순히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천제를 지냄으로써 천자국임을 주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써 하늘에의 제사라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황제 등극 의식은 고천지례告天之禮가 끝난 후 교단 앞에 놓인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금교의에 앉은 고종에게 황제지보를 바치고 조정의 신하들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고종은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태극전으로 명칭을 바꾼 옛 즉조당에서 즉위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각국의 공사와 영사를 초대하여 축하를 받았다.

 

 

『대례의궤』 수록 반차도. 「대례시 황제옥보내출 예환구단반차도[大禮時 皇帝玉寶內出 詣圜丘壇班次圖]」

 

 

『대례의궤』 수록 반차도 일부

 

 


『대례의궤』 수록 황제 옥보요여[皇帝 玉寶腰輿] 반차도 일부

 


 

거창하게 자주 독립을 선언한 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왕조 체제 속에서 어떻게든 독자적 생존을 모색했던 조선의 마지막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고종 황제는 황제 즉위 10년 만에 강제 퇴위로 물러나야 했다. 세계의 평화공존적 질서를 끝까지 믿고 조선이 그 질서의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대한제국의 꿈이 결국 좌절되었던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 서구 열강이나 제국 일본에 비해 조선은 엄청난 약체였고, 그들의 탐욕은 조선의 선의를 비웃었다. 패자가 되어 실력을 키우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새로운 당위 속에서 우리는 제국의 시각을 스스로 내면화했고, 조선의 꿈을 완전히 잊었다. 조선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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