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이전

조선시대 초급 중국어 회화 학습서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장윤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1. 중국어 역관譯官 교육과 『노걸대』


   역사상의 어느 민족, 어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역시 한반도 주변의 중국, 몽골, 만주, 일본 등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과 다양하게 교류하면서 생활해 왔다. 이러한 교류에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과 국가적 차원의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어떠한 경우이든 이민족과의 교류에서는 언어 장벽의 극복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며, 특히 외교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교류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대두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부터 외국어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이 필요했고 이러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만큼 이 당시부터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 기관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기록상 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기록상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외국어 교육 기관은 1276년(고려 충렬왕 2)에 통역 사무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설치된 통문관通文館이다. 통문관은 고려 말에 사역원司譯院으로 개명되어 역관의 배양 등 통역 사무를 관장했는데, 이 사역원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구한말까지 역관의 외국어 교육 등 역어譯語 사무를 담당하였다. 
   교류 대상 가운데 특히 중국은 한동안 동아시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었던 만큼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중국과의 교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우리 민족의 독창적이고 괄목할 만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에는 중국을 통해서 수용한 문화적 요소들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거나 발전시킨 것들이 적잖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청자나 조선의 성리학이 그러하고, 우리 민족의 가장 독창적인 문화적 성취로 평가되는 훈민정음 역시 중국이라는 문화적 수원지에 유입되어 있던, 당시의 중국을 비롯한 제민족의 언어학 연구 결과물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바탕 위에서 창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밀접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과의 국가적 교류에서 중국어 역관의 교육과 양성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중국어의 학습에서 중국의 문어는 『천자문千字文』, 『소학小學』 등의 초학서나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의 학습을 통해서 습득이 가능했지만, 중국어 구어의 학습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구어 학습을 위해서는 별도의 중국어 회화 교재가 필요했다. 이는, 『전·후한서前·後漢書』, 『효경직해孝經直解』 등을 한어[중국어] 교재로 사용했는가 하면(『세종실록』 세종 5년(1423) 6월 임신), 이들 교재의 언어가 지나치게 저속하다고 하여 설장수偰長壽가 중국어로 소학을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중국어 교재로 삼았으며(『세종실록』 세종23년(1441) 8월 을해), 신숙주가 지은 중국어 책 『훈세평화訓世評話』를 교재로 삼고자 하기도 했다는(『성종실록』 성종11년(1480) 10월 을축) 등의 기록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어 교재들 가운데 이른 시기부터 가장 꾸준하게 사용된 중국어 회화 교재가 바로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이다. 『노걸대老乞大』는 초급, 『박통사朴通事』는 고급 중국어 회화 교재의 성격을 지니는데, 『세종실록』 세종 8년(1426) 8월 정축조 및 세종 12년(1430) 3월 무오조 등의 기록을 통해서 조선 초기부터 이미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가 사역원의 취재取才 과목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 이전부터도 이들 책이 중국어 회화 학습서로 널리 사용되어 왔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동안에도 이들 책이 모두 고려시대부터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는데, 1998년 고려 말에 편찬된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노걸대老乞大』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추정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책은 조선시대에도 수차례 중간重刊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본도 수차례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들 문헌이 중국어 회화 교육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책이름 ‘노걸대老乞大’의 의미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노’는 ‘노형老兄, 노사老師’ 등에서 보이는 중국어 경칭의 ‘노’로, ‘걸대’는 북방 민족들이 중국을 가리키던 말 ‘Kita(d), Kida(d)’의 중국어음 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노걸대’는 “중국인님”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고려의 상인과 그의 고종사촌 김金과 이종사촌 이李, 그리고 그의 이웃인 조趙 등 4명이 물건을 팔기 위해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요동에 사는 중국 상인 왕王을 만나 북경까지 동행해 가서 물건을 팔고 서로 헤어질 때까지 겪는 다양한 사건들과 그 장면에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노걸대』는 단순한 한어 회화 교재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문화에 대한 안내서의 성격까지 지녔다고 할 수 있다. 



2. 『노걸대』의 간행과 이본


   사역원에서 교육용 교재로 사용되었고 역관을 선발하는 역과의 시험 대상이었던 『노걸대』가 누구에 의해서 편찬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부터 편찬되어 사용되었을 것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아 왔다. 이 책의 원문에 ‘고려왕경高麗王京, 고려인高麗人’ 등이 나올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10월 을축조에 『노걸대』, 『박통사』가 원대元代의 언어로 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고치도록 해달라는 이창신李昌臣의 계啓가 있기 때문이다. 이창신이 ‘원대의 언어로 되어 있다’고 말한 그 『노걸대』는, 최세진이 1517년(중종 12)에 『노걸대』와 『박통사』를 우리말로 언해한 책을 만들면서 어려운 어구 등을 따로 뽑아 설명한 『노박집람』에서 이 두 책의 구본舊本이 다 원나라 때 말을 쓰고 있어서 신본新本에서는 지금 쓰는 말로 바꾸었다고 말했던 바로 그 ‘구본’에 해당하는 책으로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임에 틀림없다. 
   한동안 고려시대에 편찬한 원본 계통의 책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480년(성종 11) 이창신의 청을 받아들여 이전의 책을 ‘산개刪改’, 곧 교정하라는 명에 따라 중국인 방귀화房貴和 등이 수정을 시작하고 1483년 9월에 갈귀葛貴로 하여금 이전의 『노걸대』와 『박통사』를 교정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교정되어 간행된 책을 실록 기록에 따라 ‘산개본 노걸대’로 부르기도 하는데,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바로 이 산개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98년 대구에서 조선 태종조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노걸대』가 발견되고, 그 원문이 산개본과 차이가 있는 것이 밝혀지면서 ‘구본’ 곧 고려 말에 편찬되어 원대의 언어를 많이 담고 있는 원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노걸대』는 원대의 북경어인 한아언어漢兒言語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명明이 들어선 뒤 북경어는 이른바 북경관화北京官話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교류에서 중심이 되는 언어는 이전 『노걸대』의 언어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산개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산개본을 만들면서 언어의 차이는 물론 이민족에 의한 왕조의 교체로 인한 당시 중국의 문화적 차이도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잔치 요리 가운데 원대에 유행했던 ‘임료할육臨了割肉, 수반水飯’ 등이 산개본에서는 삭제되기도 하고, 원대의 화폐인 지폐 ‘중통초中統鈔’가 명대의 화폐인 ‘백은白銀, 관은官銀’ 등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원대의 화폐 단위였던 ‘정[錠 또는 定]’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원본 계통의 『노걸대』와 산개본의 비교를 통해서 원대와 명대의 언어적 차이는 물론 사회·문화적 차이의 일단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산개본 『노걸대』 가운데 1483년의 원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산개본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은 갑인자본의 복각본인 통문관본 『노걸대』이다. 이 책에는 간기가 없어 확실한 간행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여러 곳의 난상과 권말 여백의 기록을 통해서 적어도 1547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복각의 저본인 갑인자본은 15세기 말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복각본의 원문이 1517년 간행된 언해서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의 원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세진이 『노박집람』에서 말한 ‘신본新本’이 바로 이 계통의 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문관본보다는 뒤인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산개본 『노걸대』의 또 다른 이본 2종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홍문관弘文館’, 다른 하나는 ‘시강원侍講院’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 이들 책은 통문관본과 그 내용이나 행격이 동일한데, 특히 그 오자까지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규장각 소장 산개본 『노걸대老乞大』(奎 5158)      규장각 소장 산개본 『노걸대』(奎 6293)

 

 

   갑인자본의 복각본인 통문관본이나 규장각 소장의 구 홍문관 소장본, 구 시강원 소장본 등 세 이본과 본문은 같으면서도 2권 1책으로 달리 분권된 또 다른 목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산기문고(구 통문관본)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강희사십이년康熙四十二年’, 곧 1703년(숙종 29)의 간기가 있어서 간행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내용은 앞의 세 이본들과 같으면서도 분권되어 있는 것은, 『노걸대』의 언해본에서의 분권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중국에서 청으로 왕조가 바뀌고 북경어도 청대의 북경관화, 곧 만다린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노걸대』가 편찬되었다. 변헌邊憲, 김창조金昌祚 등이 이전의 『노걸대』를 수정하여 1761년(영조 37)에 간행한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이 그것이다. 

 

 

규장각 소장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奎 4871)

 


   이 책은 『신석노걸대』로도 불리는데, 그 간행 동기는 여기에 실린 홍계희洪啓禧의 서문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761년(영조 37) 8월에 작성된 이 서문에 따르면, 기존의 『노걸대』가 오래되어 시의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당시 상황에 맞도록 고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이 책임을 알 수 있다. 이 서문의 기록에 따라 이 책의 간행도 이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에서는 이전 산개본 『노걸대』 등에서의 ‘고려高麗’가 ‘조선朝鮮’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한아인漢兒人, 한아언어漢兒言語, 한아지면漢兒地面’ 등도 ‘중국인中國人, 관화官話, 중국지방中國地方’ 등으로 수정되어 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단어 등을 시의에 적합하도록 수정을 했으나 그 내용은 이전의 산개본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과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노걸대신석』이 간행된 뒤 30여년 후에 또 다시 중간본이 간행되었으니, 그것이 『중간노걸대重刊老乞大』이다. 이는 『노걸대신석』이 시의에 맞게 기존의 『노걸대』를 수정했으나 지나치게 비어가 많은 점이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이수李洙 등이 이들을 아어雅語로 수정하여 간행한 책이다. 그 결과 단어의 측면에서는 ‘조선朝鮮, 중국인中國人, 중국지방中國地方’ 등과 같이 『노걸대신석』에서의 수정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노걸대신석』에서 수정된 내용을 다시 원래의 『노걸대』 원문으로 되돌려 놓은 곳도 보인다. 이들 책의 권말에는 “을묘중추 본원중간乙卯仲秋 本院重刊”이라는 간기가 있어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매우 많이 간행되었던 듯 서울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 많은 곳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어본 『노걸대』의 이본들을 그 간행 시기를 기준으로 정리하여 소장처와 함께 보이면 다음과 같다. 

 

『중간노걸대重刊老乞大』(奎 3173)

 

•  원본계통『노걸대』(조선 태종조 이전): 대구 개인 소장 

•  산개본『노걸대』(1483년(성종 14) 이후):

   - 1547년(명종2) 이전 : 국립중앙도서관 산기문고 (구 통문관본) 

   - 16세기 후반 ~ 17세기 전반

       · 구 홍문관 소장본 : 서울대 규장각(<奎 5158>) 

       · 구 시강원 소장본 : 서울대 규장각(<奎 6293, 6294>) 

   - 1703년(숙종 29) : 국립중앙도서관 산기문고 (구 통문관본)

• 『노걸대신석』(1761년, 영조 37): 서울대 규장각(<奎 4871, 4872>), 연세대 도서관

• 『중간노걸대』(1795년, 정조 19): 서울대 규장각(<奎 3173> 등 다수)

 

 

3. 『노걸대언해』의 간행과 이본


 한어본 『노걸대』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들도 존재한다. 사실 『노걸대』가 사역원의 교육용 교재로 사용되었으나 피교육자가 교육받은 내용을 스스로 공부할 때에는 온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그 중국어 발음과 의미를 표기한 책은 일찍부터 요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기 어려웠을 터이지만, 한글이 창제되면서 이러한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노걸대』 원문 한자의 중국음을 달고 해당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언해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언해본 중 가장 이른 것으로 최세진崔世珍이 1517년(중종 12)년 경에 『노걸대』의 원문 한자에 한글로 중국의 정음과 속음을 달고 분절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간행한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이다. 현재는 이때 간행된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보이는 책이 고 백순재 씨 구장(권 상)과 성암고서박물관(권 하)에 전한다. 간행 기록이 없어서 간행 시기를 명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1517년(중종 12) 11월에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 서문에 『노걸대』, 『박통사』를 언해한 책과 『노박집람』을 간행한 바 있음을 말하고 있어 적어도 1517년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권두 서명은 ‘노걸대’이지만 『번역노걸대』로 부르는 일이 일반적인데, 이는 1517년에 간행된 『사성통해』의 권말에 덧붙어 있는 「번역노걸대박통사범례飜譯老乞大朴通事凡例」의 명칭을 따른 것이다. 현전하는 책은 복각본인 목판본뿐이지만, 글자체가 을해자의 복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번역박통사飜譯朴通事』가 을해자본이므로 이 책의 원간본 역시 을해자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

 

 

   이 책의 언해 방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언해서들과는 그 체제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원문에 구결을 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문 한자의 중국음 중 정음正音을 왼쪽에, 당시의 속음俗音을 오른쪽에 달았으며, 원문을 짧은 구절로 분절하고 원문 아래 ○표를 두어 구분한 뒤 해당 언해문을 싣고 있다. 이렇게 『번역노걸대』에 당시의 중국음이 실려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중국어사 연구의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독특한 언해 방식은 이 책의 목적이 원문의 중국어 학습이었기 때문에 나온 최세진의 독창적인 창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언해 방식은 후대 중국어 학습서의 전범이 되었다. 이때 언해의 대상으로 삼았던 원문은 산개본 『노걸대』이다. 산개본 『노걸대』의 부사 ‘즉則’이 『번역노걸대』의 원문에서는 ‘지只’(권 상 10장 앞면)로 되는 등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두 책의 원문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사실로, 『번역노걸대』 이전에 단지 『노걸대』의 원문 한자의 중국음만을 한글로 달아 언해문 없이 간행한 또 다른 번역서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노걸대』라는 서명의 근거가 된 「번역노걸대박통사범례飜譯老乞大朴通事凡例」(이하 「범례」)의 ‘정속음正俗音’ 항에서는 당시 중국음의 정음을 오른쪽에, 속음을 왼쪽에 달고 속음이 둘 셋 있을 때는 하나를 앞에 쓰고 다른 것들을 뒤에 써서 다 적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언해본 『번역노걸대』의 체제와 차이가 있다. 언해본 『번역노걸대』에서는 정음이 왼쪽, 속음이 오른쪽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속음도 하나만이 달려 있어 「번역노걸대박통사범례」의 진술과 다르다. 이는 결국 중국음 정음과 속음을 하나만 달고 원문 구절을 분절하여 우리말로 옮긴 언해본 『번역노걸대』 이전에 「범례」의 진술과 같은 방식으로 원문 한자의 정음과 다수의 속음을 달아서 간행한 또 다른 음역본으로서의 『번역노걸대』, 『번역박통사』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한동안 언해본 『번역노걸대』와 『번역박통사』의 범례로 알려져 왔던 「범례」는 사실 언해본의 범례가 아니라 또 다른 음역본 『번역노걸대』, 『번역박통사』의 범례인 것이다. 
   1670년(현종 11)에 사역원에서 이 언해본 『번역노걸대』의 체재와 표기 등을 따르면서도 그 잘못을 바로잡는 등 원문을 충실히 검토하여 수정 간행한 책이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이다. 이 책에서는 이전에 존재하던 한어본 『노걸대』나 언해본인 『번역노걸대』와는 달리 전체 내용을 106개의 과課로 구분하고 각 과의 시작 부분에 이엽화문어미二葉花紋魚尾로 표시하여 학습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이 책에는 간행 기록 등이 없어서 간행 연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통문관지通文館志』 권8 서적 조에 1670년에 『노걸대언해』 2부의 내사內賜 기록이 있어, 이때를 간행 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무신자戊申字로 간행한 책들이 현재 서울대 규장각 등에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번역노걸대』에 비해 150여 년 후에 새로이 언해가 이루어진 것인 만큼 『노걸대언해』와의 비교를 통해서 그 사이에 우리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비교해 보기에 좋은 자료이다.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奎 1528) 권 상 1장 앞면

 

 

   『노걸대』 언해본의 또 다른 이본도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권두에 변익卞熤이 1745년(영조 21)에 쓴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평양감영에서 중간했다는 간기가 있는 목판본으로, 평양판 『노걸대언해』라고 부르는 책이다. 이 책은 활자본 『노걸대언해』와 원문의 중국음과 어휘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원문의 오른쪽에 달아 놓은 속음은 동일하지만, 왼쪽에 달아 놓은 정음이 크게 달라져 있다. 이 책에서 수정한 정음은 이후에 간행된 『노걸대』의 언해본들에서 그대로 따르고 있다. 

 

 

평양판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奎 2303)

 

 

   지금까지 살펴본 『노걸대』의 언해본들은 모두 산개본 『노걸대』를 원문으로 하고 있는 것들인데, 시의성을 반영하여 한어본 『노걸대』를 수정하여 간행한 중간본들을 만들면서 이 책들을 언해한 책들이 만들어진다. 그 첫째는 1763년(영조 39)에 변헌, 김창조 등이 청대의 북경관화를 반영한 새로운 한어본 『노걸대신석』을 만들면서, 이와 함께 이를 3권으로 언해하여 간행한 목판본 『노걸대신석언해』이다. 이 책에서는 과별로 『노걸대신석언해』 내용을 수록한 뒤 한 과가 끝나면 1자를 낮추어 기존 『노걸대언해』의 해당 원문과 속음인 우측음을 옮겨 실어 놓았는데, 이로 인해 다른 언해서들과는 달리 3권 3책이 되었다. 이 책의 좌측음인 정음은 평양판 『노걸대언해』에서 수정한 음을 따르고 있으나,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던 우측음인 속음이 대대적으로 수정되어 있다. 해방 직후 권2와 권3이 소개된 이후 행방이 묘연했으나 1994년에 권1이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중간노걸대언해重刊老乞大諺解』(奎 2049)

 

 

   이후 1795년(정조 19)에 이수 등이 『노걸대신석』을 수정하여 새로 『중간노걸대』를 간행하면서 동시에 이를 언해하여 2권 2책으로 만든 목판본 『중간노걸대언해』가 간행되었다. 일반적인 서명의 관례에 따르면 『중간노걸대언해』라고 하면 『노걸대언해』의 중간본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책의 명칭은 그런 관례와는 달리 한어본 『중간노걸대』를 언해한 책이라는 의미이다. 책의 간행 기록이 없어 확실한 간행 시기를 알기 어려우나, 이 책의 판식이나 원문 한자음과 번역은 『노걸대신석언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중국음은 그대로 옮겨 왔다. 『노걸대언해』의 원문과 우측음, 곧 속음이 삭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은 서울대 규장각에도 20여 종이 넘는 책이 소장되어 있는 등 많은 곳에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걸대』 언해본의 이본들을 그 간행 시기를 기준으로 정리하여 소장처와 함께 보이면 다음과 같다. 

 

• 『번역노걸대』(1517년(중종 12) 이전): 고 백순재 씨 구장(권 상), 성암고서박물관(권 하) 

• 『노걸대언해』(1670년, 현종 11): 서울대 규장각(<奎 1528, 2044, 2304, 2347>) 

• 평양판 『노걸대언해』(1745년, 영조 21): 서울대 규장각(<奎 2303>) 

• 『노걸대신석언해』(1763년, 영조 39):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권 1) 

• 『중간노걸대언해』(1795년, 정조 19): 서울대 규장각(<奎 2049> 등 다수) 

 

 

4. 『노걸대』와 그 언해서의 가치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서 중국어 역관의 회화 학습 교재로 사용되었던 『노걸대』는 그 자체가 중국어 회화를 담고 있는 자료임에도 지금까지는 『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 등 그 언해서들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시간적 간격을 두고 동일한 원문이 우리말로 언해되면서 그 언해문에 그만큼의 시간차를 반영한 언어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우리말의 역사적 변화를 파악하기에 용이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더욱이 이들 문헌은 중국어 회화서를 언해한 것으로, 다른 언해서들과는 달리 당시의 구어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며, 따라서 한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들 언해서에 달려 있는 정음과 속음 등 당시의 중국음은 당연히 중국어사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당시 중국의 속음의 경우 『번역노걸대』, 『노걸대언해』에서와는 달리 『노걸대신석언해』, 『중간노걸대언해』 등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중국어에서 나타난 변화의 일단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언해서가 중국어사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노걸대』의 언해서들이 한국어사와 중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들 언해서는 물론 한어본 『노걸대』도 당시 중국의 생활 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원본 계통의 『노걸대』와 산개본 『노걸대』의 비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원본 계통의 『노걸대』에는 없던 내용이 『번역노걸대』의 원문인 산개본에 수록된 사례들, 즉 명대에는 산동산 관견官絹과 호주湖州산 실을 상품으로, 가흥嘉興산 비단과 정주定州산 실을 하품으로 보았다든지, 당시 중국에서 일본산 비단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대와 달라진 명대 문화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들 책의 내용이 상인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만큼 당시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원본 『노걸대』에서는 원대의 화폐인 지폐 중통초中統鈔가 쓰인 데 비해, 산개본 『노걸대』에서는 명대의 화폐인 은과 그 단위인 ‘량[兩], 돈[錢], 푼[分]’ 등이 쓰였다는 사실이나 당시에 하품의 은이 통용되기도 했고 위조 화폐가 유통되기도 했다는 사실 등도 알 수 있다. 나아가 당시의 거래 관례 등 경제생활과 관련된 정보는 물론 의식주와 관련된 문화 등도 드러나 있어, 원대와 명대의 생활 문화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