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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설립의 역사 
『규장각지奎章閣志』

 

 

 

우경섭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



1. 규장각과 『규장각지』


    규장각은 본래 역대 임금들의 어제御製와 어서御書를 보관하기 위해 세워진 기구였다. 세조대 양성지梁誠之가 중국 송나라의 관각館閣 제도에 따라 선왕들이 남긴 문장과 글씨의 봉안 장소로서 규장각의 설립을 처음 건의한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종부시宗簿寺에 건물을 새로 짓고 ‘규장각’이라 쓴 임금의 친필 편액을 걸고부터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작은 건물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을 본격적인 정치·학술 기관으로 ‘창설’한 사람은 정조였다. 정조가 즉위한 지 6개월 만인 1776년 9월에 새로운 규모로 탄생한 규장각은 국왕의 친위세력 육성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여 학문적 역량을 키우려는 목적 아래 강력한 정치·학술 기관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것이다. 즉위 초반 경주 김씨를 비롯한 외척 및 그와 결탁한 환시의 위협 속에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했던 정조는 척신·환관의 세력을 제거하여 권신의 발호를 막고 새로운 정치기풍을 진작시킬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져가던 사대부의 명절名節과 문학文學을 다시 일으켜야만 했으니, 규장각의 창설에는 정조의 이러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규장각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홍문관 등 기존의 청요직淸要職에 못지않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당대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하는 강력한 기능을 지닌 기관으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계획 아래, 규장각은 1779년(정조 3) 9월 홍국영洪國榮 축출 이후 본격적인 학술기관으로서 기능을 구비하기 시작하였고, 1781년(정조 5) 2월에 이르러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비롯한 각종 법규를 완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규장각은 정치적으로 정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하는 근시기구로서 자리 잡게 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조선왕조의 문풍을 주도하는 핵심 관서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 수반된 규장각의 직제와 기능 변화를 정리하고 법제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된 것이 바로 『규장각지』였다. 그러므로『규장각지』는 정조 초반 규장각의 설치와 운영의 실상을 살펴보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2.『규장각지』의 편찬 과정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3종의 규장각지가 전해진다. 편찬된 순서에 따라 초초본初草本, 재초본再草本, 완성본完成本이라 칭해지는 이들 3종 가운데, 초초본과 재초본은 각 1부 그리고 완성본은 6부 등 도합 8부가 규장각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인 초초본과 재초본은 말 그대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 중에 임시로 편찬되었던 초본草本이다. 규장각의 업무일지라 할 수 있는『내각일력內閣日曆』을 살펴보면, 규장각 설립 직후부터 정조의 독려 아래 여러 차례에 걸쳐『규장각지』의 초본이 만들어지며 지속적인 수정 작업을 거쳤던 정황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2종의 초본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84년(정조 8)에 이르러 정유자丁酉字로 간인된 완성본이 나오게 되면서 정조 즉위 직후 시작된『규장각지』의 편찬 작업이 끝을 맺게 되었다.
    『규장각지』의 완성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규장각의 법식과 규정이 정조 8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초본과 재초본은 비록 임시적인 초본에 불과하지만 완성본이 간행되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내용으로 담고 있기에, 초기 규장각 제도의 확립 과정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이다. 또한 되풀이되는 보완 작업 가운데 삭제되어 결국 완성본의 편찬 이후 공식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현재 초초본과 재초본의 표지에는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초초初草’(奎 1400), ‘재초再草’(奎 734)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선배들의 연구들을 통해 초초본과 재초본의 표제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즉 표제와는 반대로 <규 734>본이 초초본이고 <규 1400>본이 재초본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첫째, 1781년(정조 5) 2월에 확정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에 근거하여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의 구체적 시행 방안을 설명한 내용이 <규 734>본에는 보이지 않는 반면 <규 1400>본에는 「배양培養」항목 아래 나타난다는 점, 둘째, 기사의 하한선이 <규 734>본의 경우 1779년(정조 3)인 것에 비해 <규 1400>본은 1782년(정조 6)이라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감안하면, <규 734>본이 초초본이고 <규 1400>본이 재초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좌. 『규장각지奎章閣志』 초초본(奎貴 734).

우. 『규장각지奎章閣志』 재초본(奎貴 1400).

표제와는 달리 <奎貴 734>본이 초초본이며, <奎貴 1400>본이 재초본이다.

 

 

    첫째,『규장각지』3종을 비교하면,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①권수卷首, ②연혁沿革, ③직제職制, ④서적書籍, ⑤원규院規, ⑥발문跋文 등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3종의 『규장각지』가 동일한 체재를 유지하는 가운데 순차적으로 편찬·보완되었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서·발문 등을 통해 정조 8년에 편찬되었음이 확인되는 완성본을 기준으로 검토하면, <규 1400>본이 <규 734>본보다 훨씬 잘 정리된 체재를 구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체재상의 이 같은 사실은 <규 1400본>이 <규 734>본보다 후대에 편찬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정조 초반 국정을 주도하다 1779년에 축출된 홍국영洪國榮의 이름이 <규 734>본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규 1400>본에서는 관련 기록이 모두 삭제되어 한 차례도 찾아볼 수 없다. 이를 통해 <규 734>본이 1779년 이전에 편찬되었고 <규 1400>본은 그 이후에 편찬되었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규 1400>본의 본문 중에는 주묵朱墨으로 수정하고 첩지貼紙를 붙인 부분이 상당수 발견되는데, 이처럼 교정된 내용은 완성본의 본문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규 1400>본은 완성본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편찬되었을텐데, 필자가 확인한 본문 기사의 하한선이 계묘년(1783년) 여름인 것으로 보아 대략 1783년(정조 7) 여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넷째,『내각일력』에 따르면 1783년 8월 20일 직제학 정지검鄭志儉이『규장각지』 초본을 올리자 정조가 처음으로 ‘계년록系年錄’의 편찬을 언급하며『규장각지』 가운데 관련 조항을 보충하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틀 뒤인 8월 22일 정지검이 보완된『규장각지』 초본을 다시 올리니 정조가 크게 만족하였는데, 이때 정조가 보았던『규장각지』 초본이 바로 <규 1400>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규 1400>본의 본문 가운데 ‘계년록’ 관련 조항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 1400>본의 편찬 시기는 1783년 8월임이 분명하다. 
    곧이어 1783년 11월에는 <규 1400>본을 저본으로 삼은『규장각지』가 완성되어 12월부터 인쇄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듬해인 정조 8년 2월까지도 완료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되는데, 첫째는 ‘계년록’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규장각지』 완성본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 7년 이후의 변화가 반영된 부분으로는 ‘계년록’의 명칭이 ‘일성록日省錄’으로 바뀐 것, 그리고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은 정조의 언설을 모아 엮은 『일득록日得錄』의 편찬 규례가 마련된 것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기 위하여 기존 <규 1400>본에 토대한 완성본의 간행이 실행되지 못하고 한 차례 더 보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둘째는 다른 관서지官署志들, 특히『홍문관지』와 관련된 이유라 생각된다. 정조가 규장각의 법규를 새롭게 만들어 가면서 법제적 모델로 삼은 것은 그동안 조선왕조의 문한文翰 기능을 총괄해 온 홍문관이었다. 그 결과 정조 5년 무렵 규장각은 홍문관을 대신하여 기존 관각들의 대부분 기능을 아우르면서 새로운 시대의 문치文治를 주도하는 기관으로 확립될 수 있었다. 즉 홍문관을 비롯한 여러 관각들의 기능이 규장각으로 일원화되면서 정치제도 전반에 걸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정조는 이러한 변화의 경과를 정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규장각과 홍문관 등 관각들의 기능과 법제를 새롭게 규정한 서적 즉 ‘관서지’의 편찬을 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정조가『규장각지』와 더불어『홍문관지』및 『태학지』를 ‘3지三志’라 일컬으며 함께 간인하도록 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3종의 관서지가 통일적인 체재를 갖추어야 할 필요에 기인하여『규장각지』 완성본의 간인이 잠시 미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지』 완성본(古 5820-1) 표지 및 권수卷首 부분.

『규장각지』완성본은 1784년(정조 8) 6월 정유자丁酉字로 간행되어 

정족산 사고를 비롯한 각처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결국『규장각지』완성본의 편찬은 1784년 4월 무렵 종료되었다. 그리고 5월 초부터 교정 작업이 진행되어 6월 1일에 간인에 들어가 6월 12일에 이르러 정조에게 올려졌다. 정조는 교정과 간행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린 뒤 사고史庫를 비롯한 각처에 이를 반사함으로써, 즉위 초부터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였던『규장각지』편찬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3. 규장각지에 담긴 정조의 의중


    정조는 즉위 초부터 규장각을 기반으로 삼아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친위세력의 육성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초계문신제 등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등용하고, 이들이 장악한 규장각으로 하여금 홍문관 및 승정원·종부시·사헌부·사간원 등의 기능을 겸하게 함으로써 왕조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하는 강력한 기구를 창설하고자 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부 신하들로부터 “규장각은 나라의 공적인 기구가 아닌 전하의 사각私閣이며, 각신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공적인 신하가 아닙니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정조가 즉위 초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규장각 설립을 밀어붙였던 근본적인 의도는『규장각지』권두에 실려 있는「어제규장각지서御製奎章閣志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정조의『규장각지』서문은 모두 2편으로, 초초본 및 재초본에 공통적으로 수록된 글과 완성본에 수록된 글이 전혀 다르다. 

 

 

정조의「어제규장각지서御製奎章閣志序」. 

정조가 지은『규장각지』서문은 초초본 및 재초본에 공통적으로 실린 글(좌. 奎古 734)과 

완성본(우. 古 5820-1)에 실린 글 등 모두 2편이 전해진다. 

정조는 이 서문들을 통해 규장각 설립이 단순한 제도 개혁의 차원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근본 바탕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밝히고 있다.

 

 

    우선 정조는 초초본과 재초본의 서문을 통해, 관서지 편찬의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규정하였다. ‘적蹟’을 갖추어 고금古今을 통괄하는 것과 ‘사事’를 정리하여 명실名實을 종합하는 것인데, 정조는 두 가지 방식 중 명실의 정리가 근본이며 고금의 서술이 부차적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각신들이 과거의 사실을 정리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규장각 설립의 근본 목적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사실 초초본을 일람해 보면, 규장각의 연혁과 건물에 대한 설명이 대단히 상세한 반면 업무와 기능을 규정한 부분은 소략할 뿐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같은 내용상의 특징은 설립 초기라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즉위 이후 초초본이 편찬되기까지 3년의 기간은 규장각의 외형적 기반을 마련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당연히 제도의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설립 경위 및 부속 건물에 대한 설명을 위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1781년(정조 5) 봄에 일단락된 제도정비의 성과를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는 재초본의 경우도 각신들에 대한 예우를 비롯한 원규의 정리에 주안점을 두다 보니 정조가 의도하던 명실의 문제를 종합하는데 이르지는 못했던 듯하다. 이에 정조는 관서지 편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의리를 밝히는 데 귀결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여러 차례의 개수를 명하였던 것이다. 
    규장각의 설립과『규장각지』편찬의 목적이 단순히 고금사적의 정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이끌어갈 세도世道의 확립에 있다는 정조의 이념은 1784년 5월에 지은 완성본의 서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조는 우선 관서지의 기본 성격이 ‘사事’를 기록하는 것이라 말하고, 규장각 설립 직후부터『규장각지』의 편찬을 명했지만 여태껏 완성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보다 그간 제도의 정비가 완료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강의 제도가 확립되어『규장각지』를 완성함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두려움이 앞서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것은 바로 공자가 말한바 내실[質]을 갖추기보다 외양[文]만 꾸미려는 세태, 즉 ‘사史’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저 고금의 사적만을 기록할 뿐 이념적 근본이 없는 상태를 ‘사史’로 규정한 정조는 근본을 먼저 확립한 뒤에야 제도 개혁의 성과가 의미를 지닐 것이지, 겉모습만 꾸미려 한다면 새로운 제도의 신설은 단지 번잡하고 거짓된 일일 뿐이라 누누이 강조하였다. 이는 규장각의 법제가 갖추어짐으로써 외양이 완비되었지만, 이제부터 내실을 갖추는데 힘써야 할 것임을 역설하며 신하들을 다잡으려는 말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우문일념과 탕평정치를 실현할 새로운 기구로서 규장각의 운영 방향을 밝히려는 의도이기도 하였다. 요컨대,『규장각지』완성본의 서문을 통해 정조는 즉위 이후 지난 8년간 추진해 온 규장각의 설립과 제도정비 과정의 한계를 반성하며, 규장각이 조선왕조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해 나가는 명실상부한 핵심 기관으로 운영될 것임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 사료 : 규장각지 완성본 서문


    지志란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일이 있는데 기록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못하고, 혹 전해지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어제 한 일을 오늘 잊는다면, 제도를 만들어도 다시 없어지고 의식을 정하여도 다시 문란해질 것이니, 어찌 참조할 만한 기록이 있음만 하겠는가? 오늘날 기록의 시급함이 이와 같기에 예악禮樂에도 지志가 있고 산천山川에도 지志가 있고 관서 및 군현에도 지志가 없는 곳이 없으니, 모두 오늘의 참고로 삼고 영원히 전하기 위함이다. 

    내가 즉위 초에 규장각을 세우고 곧이어 각신들에게『규장각지』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5~6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한 까닭은 천천히 편찬한 것뿐 만 아니라 제도와 의식이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제도와 의식이 대강 확립되어 완성을 재촉하니, 2권 8항목의 체재로 이루어졌다. 설치의 시말과 관직의 순서, 모훈謨訓을 봉안하고 어진御眞을 안치하는 일, 책을 편찬하고 글을 짓는 규정 등에 관한 크고 작은 조목이 갖추어지고 세세한 절차가 자세하니, 참고로 삼을 만하고 후대에 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서둘러 인쇄에 부치도록 명했으니, 혹시 미비함이 있더라도 추가하고 보충하면 안 될 것이 있겠는가? 

    아! 내가 이제 삼가 두려운 것이 있다. 근거할 문헌이 없음은 성인도 안타깝게 여겼지만, 오직 겉모습[文]이 본바탕[質]을 앞서는 것을 사史라 말하지 않았던가? 사史라는 것은 한갓 그 일만을 알 뿐 근본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군자는 충신忠信을 중심으로 삼고 절제된 행실을 닦아 먼저 그 바탕을 세운 연후에 예악으로써 겉모습을 꾸민다. 그러므로 겉모습이 번잡해도 싫증나지 않고 화려해도 거짓이 없게 되니, 그 용모와 마음이 볼만하고 덕행의 아름다움이 본받을 만하다. 군자가 움직이면 법도가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치이다. 

    지금 이『규장각지』에 수록된 제도나 의식은 겉모습[文]에 속한 일이다. 모든 각신들은 마땅히 그 내용을 삼가 준행해야 하겠지만, 그 본바탕이 사史인지 군자君子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스스로 법도가 되기에 부족하면서 이『규장각지』만 믿고 오랜 기간 멀리까지 전해질 것을 도모한다면 그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각신들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자들이라 이러한 말을 나눈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규장각지』가 완성됨에 사史가 더욱 두려워지기에 거듭 당부하며, 이 책을 펴면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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