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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다스리는 보배 거울로서의 기록

『국조보감國朝寶鑑』

 

 

 

정재훈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의 통치 기록과 『국조보감』


  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다. 전통시대에 존재하였던 한국의 왕조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보유했던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의 기록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만 해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조선왕조 의궤, 『훈민정음 해례본』 등 그 수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의 중요 기록은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통치 내지 정치 행위와 관련된 연대기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미 적지 않게 소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록의 방대함과 상세함에서 다른 나라보다 크게 앞선다는 점에서 자랑해도 좋을 만한 유산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과 비슷하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기록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조보감』이다. 
  『국조보감』은 책의 이름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국조國朝는 곧 조선을 가리키며, 보감寶鑑은 보배로운 거울을 의미하므로 조선에서 보배로운 거울로 삼은 기록을 말한다. 보배로운 기록으로 삼을 만한 내용은 무엇일까? 그에 해당하는 대상은 바로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훌륭한 말嘉言과 좋은 정치善政이다. 즉 이 책은 역대 조선 임금들의 공적을 서술함으로써 후대의 임금들에게 정치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삼가게 만드는 것을 저술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서는 다름 아닌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렇다면 『국조보감』은 왜 실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국조보감』에 붙인 정조正祖의 어제御製 서문序文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정조는, 


 

『실록實錄』과 『보감寶鑑』은 모두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그 체재는 다르다. 크고 작은 사건과 득실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명산名山에다 보관해 둠으로써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전하려는 것은 『실록』이며, 훈모訓謨(가르침)와 공렬功烈(공적) 가운데 큰 것을 취하여 특별히 게재해서 후세 사왕嗣王(뒤를 잇는 임금)의 법으로 삼게 하려는 것은 『보감』이다. 『실록』은 비밀스러움이 있는 데 반해 『보감』은 드러냄이 있으며, 『실록』은 먼 훗날을 기약하는 데에 비해 『보감』은 현재에 절실한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虞·하夏·상商·주周의 사서를 공자가 1백편으로 정리한 취지에 비추어보면 『보감』이 더욱 그에 가깝다.

[「국조보감서國朝寶鑑序」(정조 어제)]

 

 

『국조보감』 어제 서문. 상기 이미지는 1782년(정조 6)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할 때, 

정조의 어제 서문만을 따로 책으로 엮은 『국조보감서國朝寶鑑序』(奎 901)의 이미지로, 

위에 제시된 서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라고 하여 매우 흥미로운 진술을 하고 있다. 즉 『국조보감』을 실록과 비교하여 현재에 절실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국조보감』이 실록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후대에 거울삼아 경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대기 기록 가운데 가장 정성을 기울여 만든 실록보다도, 정조가 『국조보감』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였던 이유는 바로 이 책의 현재성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실록이 완성된 뒤에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사고史庫에 보존되어 참고하기 어려운 것에 비해 『국조보감』은 바로 임금의 옆에 두어서 항상 참고하면서 거울처럼 비춰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조보감』의 기록은 항상 거울삼을 만큼 과연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우선 『국조보감』에 인용된 사료는 대체로 실록의 편찬에 이용된 사료 중에서 선택하였으므로 실록의 내용과 대동소이하였으며, 실록의 내용과 비교할 때 실록을 요약한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료적 가치라는 면에서는 실록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실록을 보완하는 자료로서 인식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록보다 사료적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점보다 근본적으로 『국조보감』이 갖는 약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후대 임금들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앞섰기에 그만큼 기록의 왜곡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국조보감』은 왕조를 찬양하는 기록으로 인식되어 어용御用의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는 면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실록보다 높게 평가하여 당대적 의미를 가졌던 이 기록에 대해 과연 왕조의 어용 편찬물로만 바라보아도 좋을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그 편찬 과정과 조선왕조에서의 위상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 인식의 차이를 줄여보고자 한다. 


편찬과정과 국왕의 위상


  조선시대의 왕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매우 많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 단편적이거나 흩어져 있는 사실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자기 이전의 선왕들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혹은 어떤 임금을 존경하였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국조보감』은 훌륭한 해석거리를 제공해 준다. 바로 『국조보감』의 편찬과정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국조보감』은 일시에 편찬이 완성된 책이 아니다. 『국조보감』의 편찬 과정 자체가 조선시대에 국왕의 위상이나 선왕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국조보감』은 태조에서 순종 때까지 편찬이 시도되어 태조에서 철종의 보감에 이르기까지 총 90권 28책의 방대한 양으로 집대성되었다. 가장 먼저 세조대에 최초의 『국조보감』이라 할 수 있는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사조보감四朝寶鑑』이 편찬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편찬되어 현재까지 이르렀다. 즉 『사조보감』, 『선묘보감宣廟寶鑑』, 『숙묘보감肅廟寶鑑』, 『영묘보감英廟寶鑑』, 『십이조보감十二朝寶鑑』, 『삼조보감三朝寶鑑』, 『양조보감兩朝寶鑑』의 순으로 편찬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모두 통틀어서 『국조보감』이라 부르며, 각각의 보감을 따로 일컫기도 한다. 
  『사조보감』은 최초로 편찬된 『국조보감』으로 세조 4년(1458)에 편찬되었다. 이전에도 편찬의 노력은 있었는데, 처음 세종이 『송사宋史』를 보다가 『실록』을 찬진한 후에 다시 조종의 큰 계획과 정책을 수집하여「[선조先祖]보훈寶訓」을 편찬하여 근신들의 강독에 대비하였던 것을 보고 이를 법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여 태조와 태종의 『보감』을 만들 것을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그 뜻을 이은 세조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조보감』에서 우리는 조선 초에 주목을 받았던 임금이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임을 알 수 있다. 즉 세조대에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정종 · 단종은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은 두 임금의 위상이 불안하였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정종은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려서, 조祖나 종宗의 묘호 대열에 끼지도 못했으며, 단종 역시 세조대에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대에 단종이라는 묘호로 불리게 되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사조보감』의 편찬 이후에 각 왕대에서는 보감을 계속 편찬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고 숙종 10년에 『선묘보감』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는 중종, 명종, 선조 때에 모두 『국조보감』의 성종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종대에도 『보감』이 어떤 형태로든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선묘보감』의 경우에는 이단하李端夏(1625~1689)가 주장하여 편찬이 추진되는데, 이단하는 인조 때에 부친인 이식李植(1584~1647)이 이 일을 맡았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이 일을 추진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묘보감』의 경우에는 앞서 『사조보감』에 비해 분량이 대폭 증가하여 『사조보감』이 3책에 불과한데 비해 『선묘보감』의 경우 4책이나 되었다. 
  『숙묘보감』의 경우에는 영조가 5년 9월에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 및 선조를 제외하고는 보감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보감』을 이어 편찬할 계획을 세우나 한꺼번에 모두 편찬하는 것은 무리였던지 계획을 변경하여 6년 2월에 『숙묘보감』만을 편찬하였다.
  조선 초에 『사조보감』이 편찬된 이후 숙종 때에 『선묘보감』이, 영조 때에 『숙묘보감』이 편찬되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흥미롭다. 문종 이후 여러 임금들이 있었지만 숙종과 영조에 의해 선조와 숙종의 보감이 만들어진 것은 그만큼 선조와 숙종 때에 거론할 만한 사실이 많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선조대의 경우 조선후기에 ‘목릉성세’로 인식되는 등 임진왜란의 전란으로 혼란했던 시기로 인식하였던 현재와는 다르게 이해하였던 점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숙종과 영조 역시 선왕들의 보감을 만듦으로써 국왕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 보감 편찬에서 제외된 왕들에 대한 『보감』의 편찬은 정조 때에 이루어졌다. 이는 정조의 적극적인 주도로 『영조실록』의 편수사업이 완료된 직후부터 서둘러 추진되었는데, 먼저 『영묘보감』이 편찬되고 나서 6년 11월 『십이조보감』이 편찬되었다. 이어 정조·순조·문조대리文祖代理의 『삼조보감』은 헌종 14년에 편찬되었고, 헌종·철종의 『양조보감』은 순종 3년에 편찬되었고, 고종·순종의 경우는 1936년에 편찬이 시도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에 의해 이루어진 『국조보감』의 대대적인 보완작업은 기억할 만한 사실이다. 이전까지 누락된 선왕들의 보감을 모두 편찬하여 68권으로 묶음으로써 조선의 모든 국왕의 보감이 갖추어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사실 정조가 이렇게 이전에 누락된 선왕들의 보감을 편찬하려고 한 데에는 국왕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보감이 완성된 후에 정조는 종묘의 선대 임금 전의 묘실에 각각 직접 『국조보감』을 아뢰는 의식을 직접 거행하기도 하였다. 

 

규장각 소장 『국조보감國朝寶鑑』(奎古 813)

 


  실록의 경우 거의 대부분 바로 이전 임금의 실록을 후대 국왕이 만들었던 반면에 『국조보감』은 세조 · 숙종 · 영조 · 정조 · 헌종 · 순종의 여섯 임금에 의해 모두 만들어진 차이가 있다. 특히 정조의 경우 가장 많은 임금을 한 번에 편찬한 사례이며, 편찬 작업 역시 탕평국왕답게 국왕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살펴본다면 조선전기에는 세조가, 조선후기에는 숙종 · 영조 · 정조와 같은 탕평군주가, 그리고 헌종과 순종이 이전 임금들의 행적을 높이는 데에 기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조는 조선왕조의 임금들의 행적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가장 국왕다움을 지향한 국왕이었음이 여기에서도 확인된다고 하겠다. 


조선왕조식의 보수와 개혁


  그렇다면 『국조보감』은 후대의 임금들에게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다음의 사례를 보자. 

 

 

상上[조선 태종]이 재보宰輔[재상]에게 이르기를,

“옛날 당 태종이 일찍이 아름다운 매를 한 마리 얻어 팔뚝에 올려놓고 있다가 위징魏徵이 오는 것을 보고 품속에다 감추었는데, 위징이 일을 주달하느라고 오래 있게 되자, 새매가 마침내 품속에서 죽고 말았다. 어찌하여 위징을 그렇게 무서워했는가?” 

하였는데, 시중 조준이 아뢰기를, 

“이는 위징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바로 태종이 훌륭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국조보감』 3권, 태종 4년 기사

 

 

  위의 『국조보감』 태종 4년의 기사는 당 태종과 위징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에게 조준이 어떠한 충고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태종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태종실록』에도,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손에 작은 매를 받쳐 들었다가, 위징魏徵이 이르는 것을 보고, 이에

그 매를 소매 속에 감추었는데, 위징魏徵이 이를 알고 일부러 스스로 오래 머무니, 매가 이에 죽었

었다. 어찌 위징魏徵을 두려워함이 이처럼 심하였던고?"

하니, 조준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위징이 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태종太宗이 어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 9월 21일 기미조 기사

 

 

위의 『태종실록』의 기사를 보면, 거의 『국조보감』의 기사와 내용은 같지만 위징의 행동에 대한 서술을 달리하고 있다. 즉 『국조보감』에서는 ‘위징이 일을 아뢰느라고 오래 있었다’고 하였지만 『태종실록』에서는 ‘위징이 당 태종이 옷소매에 매를 숨긴 사실을 알고 일부러 오래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실록의 기록보다 보감의 기록이 위징의 자발성을 감추어 황제의 체면을 살리는 방향으로 서술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중요한 것은 조준이 말한 내용대로 위징보다는 당 태종이 바른 말을 하는 신하를 두려워한 사실을 강조한 부분이다. 위징이 당 태종에게 취한 행동의 자발성 여부보다 임금에게 바른 행동을 직간하는 신하를 받아들이는 군주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측면에서는 보감이나 실록에서 기사를 인용한 취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약간의 꾸밈이나 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의 본받을 만한 행동을 후왕들에게 감계하고 강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조보감』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왕조국가였다. 국가의 주권은 임금에게 있었으므로 사실 임금이 마음대로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물론 그런 경우 역사적 현실에서는 반정反正의 대상이 되어 폐주廢主가 될 수 있기도 하였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왕조 국가에서 제대로 된 국가운영을 위해서 최고지도자였던 국왕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의 문제는 모두의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사에서 송대宋代 이후 황제를 설득하기 위한 교훈이 되는 책들이 많이 저술된 것은 바로 황제의 자의성恣意性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도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신하들은 임금에게 끊임없이 이러한 작업을 요청하였다. 『국조보감』이 국왕 측에서 먼저 편찬이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하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경연經筵에서 보거나 참고로 삼을 것을 요청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중종의 경우 과거 사례, 특히 연산군 때의 일을 경계하기 위해 실록을 자세하게 살펴서 보감을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직접 실록을 참고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다만 이미 만들어진 보감을 활용하여 경연에서 국왕의 계도를 위해 자주 보감이 인용되었다. 보감에 실린 내용에는 선왕의 선례 가운데 국왕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점은 당대의 국왕이 선왕의 전례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도구로 활용한 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국조보감』을 인용하는 것은 좋은 선례를 참고하라는 의도에서 인용되었기에 국왕의 자의성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었다. 바로 이점이 조선왕조에서 보수와 개혁이 이루어지는 측면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의 국왕은 선대 국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왕이 걸핏하면 제시하는 ‘조종朝宗의 전례前例’는 바로 선왕들이 이미 시행하였던 일을 자신이 바꿀 수 없다는 명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종의 전례’를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따를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때 바로 신하들은 『국조보감』을 인용하여 선왕의 행적 가운데 바람직한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하였던 것이다. 명종 때 경연의 석강에서 검토관檢討官 박민헌朴民獻이 명종에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학문에 열중한 성종과 바쁜 정사의 여가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독서한 세종을 본받을 것을 요청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한 것이었다. 
  정조는 『국조보감』을 편찬하면서 어제 서문에서 중국 송나라의 「삼조보훈三朝寶訓」·「전법보록傳法寶錄」과 명나라의 「조훈록祖訓錄」・「문화보훈文華寶訓」 등과 비교하여도 이 책이 선왕의 말과 행동을 함께 기록하였으며, 증거로 삼을 만 한 점에서 더욱 신뢰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국조보감』은 정조 10년(1786)에 완성된 역대 선왕의 업적을 서술한 『갱장록羹墻錄』의 중요한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또 『국조보감』의 내용 가운데 명나라를 높인 일과 관련된 사실을 모은 『국조보감별편國朝寶鑑別編』이 헌종 때 완성되기도 하였다. 
  『갱장록』이나 『국조보감별편』이 『국조보감』과 연관되어 국왕 측에서 제시된 편찬이 시도된 것이라면 고종 때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국조모훈國朝模訓』 역시 관련이 깊은 책이다. 『국조보감』 가운데 가장 거울삼아 경계가 될 만한 것들을 뽑아서 두 책으로 엮은 이 책 역시 신하의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제왕상을 담은 제왕학의 교과서였다. 여러 선왕들 가운데서도 세종, 선조, 정조대의 기사가 집중적으로 선택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이었다.
  이와 같이 살펴본다면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국가의 주권자였던 국왕에게 실록 이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 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국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왕이 해야 하는 최선의 정치 형태를 드러내었고, 이러한 내용은 역시 통치의 동반자였던 유신儒臣들과의 끊임없는 조정 속에서 도출된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국조보감』을 ‘어용의 관찬사서’라고 파악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조선의 맥락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 사료


조강朝講에서 정언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군신君臣을 접견하는 기회가 경연經筵이 있을 뿐인데, 심한 추위와 성한 더위에는 경연에 납시지 못합니다. 경연이 아니면 군신을 접견할 시간이 없으며, 임금은 항상 깊은 궁중에 계시니 자못 옛날에 군신을 대하던 일과 다릅니다. 비록 심한 추위와 성한 더위에도 따뜻하거나 서늘한 날이 있으면 군신 접견하려는 생각을 잊지 말아서, 혹은 경연관을 부르고 혹은 승지를 안으로 불러들여 치란治亂을 논란하고 공사를 의논함이 옳거늘, 보상輔相하는 대사大事까지도 환관으로 출납하게 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또 승지가 친계親啓하지 못하니,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건대 승지가 편전便殿에서 일을 아뢰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언제 폐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야대夜對 역시 시행하셔야 됩니다. 임금이 낮에는 부서簿書로 번거롭지만, 밤에는 상량商量하여 확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야강夜講이 더욱 유익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임금이 고요한 밤에 항상 환관 궁첩들과 같이 있으면 방탕한 마음이 이로부터 생기게 되니, 만약 군신을 인접하여 같이 강론한다면 그 유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권18, 중종 8년 8월 7일 임인조 기사

 

 

중종 때 『국조보감』이 실제의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왕이 평소에 경연관을 가까이 두어야 하고, 또 공식적인 정치는 승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이때 『국조보감』을 활용하여 환관, 즉 내시가 아닌 승지를 통해 정상적인 인사 행정이 이루어져야 함을 정당화하는 소재로써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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