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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동아시아 고전소설의 절정

 

 

 

정길수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구운몽九雲夢』은 『금오신화金鰲新話』・『운영전雲英傳』과 더불어 우리 고전소설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17세기 후반 이래로 조선 후기 내내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며 후대의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대부가 여성들은 물론이고 국왕 영조英祖 또한 신하들과의 대화 중에 몇 차례나 『구운몽』을 언급하며 작자가 누구인지 묻고 “진정한 문장가의 솜씨[眞文章手]”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구운몽』의 인기는 대단했다.
  필자는 대학원 재학 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구운몽』의 몇 가지 이본을 묶어 해제를 작성하면서 처음으로 『구운몽』 원본을 접했다. 그 뒤 10년 동안의 『구운몽』 공부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했고, 최근에는 『구운몽』의 원형原型을 재구성하여 번역하는 일을 틈틈이 하고 있다. 요즈음도 『구운몽』을 읽으면 그때마다 그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구운몽』의 디테일을 발견하고 감탄한다. 작은 발견이 모여 기존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다 보니 15년 동안 『구운몽』을 되풀이하여 읽고 있으면서도 한 편의 글로 『구운몽』의 세계를 설명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진다. 지금까지의 공부 중 일부를 간추려 오늘날의 독자들이 『구운몽』을 읽으며 눈여겨볼 만 한 점 몇 가지를 소개해 보려 한다.



1.


  『구운몽』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1687년경 유배지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지었다. 김만중은 예학禮學의 대가로 알려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이조참판을 지낸 김반金槃의 손자다. 부친 김익겸金益謙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방어하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여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시 김만중의 형 김만기金萬基(1633~1687)는 네 살에 불과했고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모친 해평海平 윤씨尹氏와 외가 어른들의 훈육을 받아 훗날 형제가 모두 문형文衡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서인西人의 주도적 인물로 당대 정쟁의 한가운데 있던 김만중은 51세 때인 1687년(숙종 13) 9월 14일 유배형 처분을 받고 유배지인 선천으로 떠났다. 김만중의 후손이 작성한 『서포연보西浦年譜』에 이와 관련한 중요한 기록이 실려 있다.

 

부군府君[김만중]께서 유배지에 도착하신 뒤 윤부인尹夫人의 생신을 맞아 이런 시를 지으셨다.

 

어머니는 멀리서 두 아들 생각에 눈물 흘리시겠지

하나는 죽어 이별 또 하나는 생이별.

 

부군은 또 모친께 책을 지어 보내 소일거리로 삼게 하셨는데, 그 뜻은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꿈이요 허깨비라는 것으로, 마음을 넉넉히 하고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만중이 유배지 선천에서 모친에게 지어 보낸 책은 분명 『구운몽』일 터이다. 인용문 중의 시는 「9월 25일 유배 중에 짓다[九月二十五日謫中作]」라는 제목으로 『서포집西浦集』에 전문이 실려 있다. 작년 어머니 생신에는 두 형제가 나란히 어머니께 축하주를 올렸는데, 올해 생신은 3월에 장남 김만기가 세상을 뜬 데 이어 차남인 자신마저 변방 유배지에 있는 상황에서 맞이하게 되었다는 비감 어린 내용이다. 요컨대 김만중은 1687년경 유배지인 평안도 선천에서 모친 해평 윤씨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창작했다는 것인데, 다만 작품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9월 25일 유배 중에 짓다[九月二十五日謫中作]」. 규장각 소장 『서포선생집西浦先生集』(奎 4059) 권6 수록.


  김만중은 당대 정치와 문학 양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만중은 50대로 접어들던 시기 노론老論 계열을 대표하는 관료로서 숙종肅宗이 남인南人을 중용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장희빈 일가를 혹독히 비판하다가 결국 유배형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정권 교체는 평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대 정파의 대표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지극히 폭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왕의 면전에서 극언을 퍼붓다가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 간 김만중 또한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권력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지극히 위태로운 처지에 빠진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장편소설 창작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려는 지극한 효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구운몽』 창작을 결행하게 한 좀 더 근본적인 동기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구운몽』을 통해 당대의 조선 사회에 반드시 남겨야만 했던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


  김만중은 『구운몽』을 한문으로 창작했을까, 한글로 창작했을까?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점에서, 또 김만중이 여러 편의 한글소설을 썼다는 김춘택金春澤의 말에 근거해서 『구운몽』 원작이 한글로 창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상황에서는 한문으로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구운몽』의 최초 독자가 어머니이므로 『구운몽』을 한글로 창작했다는 생각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김만중의 모친 해평 윤씨는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이자 영의정 윤방尹昉의 증손녀요, 이조참판 윤지尹墀의 딸로서 두 아들에게 한문 기초 고전을 직접 가르쳤을 정도로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 김만중이 어머니의 일생을 쓴 행장行狀에 의하면 김만중 형제는 어린 시절 다른 스승 없이 어머니에게 『소학小學』·『사략史略』·당시唐詩를 배웠다고 했다. 『십구사략十九史略』과 당시를 가르칠 수준이라면 한문소설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터이다. 
  구운몽』은 17세기 후반에 창작된 이래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문본과 한글본이 동시에 널리 읽혔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문제를 최대한 단순화해 보면 현재 전하는 『구운몽』은 ‘원작 계열본’과 ‘한역개작본漢譯改作本’으로 나뉜다. ‘원작 계열본’은 원작에 가까운 형태의 초기본을 말하는데, 한문본과 한글본이 있다. 한문본은 학계에서 이른바 ‘노존B본’이라 불리는 강전섭 교수 소장본이고, 한글본은 바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규장각본’(서울대본)이다. 한역개작본은 원작자 김만중이 아닌, 후대의 누군가가 원작 계열 한문본이 아니라 한글본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내용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한글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문장 표현이 달라진 데다 추가된 내용이 많아 『구운몽』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버드대학 소장본을 비롯하여 이른바 ‘노존A본’ 계열로 불리는 한문필사본들, 그 뒤 ‘노존A본’에 약간의 변개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1725년 목판으로 간행된 ‘을사본乙巳本’이 모두 한역개작본에 해당한다. 이 관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구운몽』 한문 원작 ----------→ 노존B본 
                              ↓[한글번역]
                          규장각본
                              ↓[한역-개작]
                          노존A본 ------------→ 을사본

  현재 전하는 초기 이본을 종합 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구운몽』은 한문으로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문 원작에 가장 가까운 것은 ‘노존B본’이다. 그런데 현재 전하는 노존B본은 원작 계열본으로서 불완전하다. 서두·중간·결말부에 결락이 있는 원작 계열 한문본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결락 부분을 노존A본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한편 한문 원작이 한글로 번역되어 그 뒤로 몇 차례의 필사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현재 전하는 최고最古의 한글본인 ‘규장각본’이다. 규장각본 또한 한문 원작으로부터 직접 번역된 최초 형태는 아니기에 한문본과 비교할 때 일부 빠진 구절이 있다. 한글본은 직역直譯의 형태로 한문본을 충실하게 번역했는데, 번역 수준이 대단히 높다.
  원작에 가장 가깝다는 노존B본이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책을 『구운몽』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 사정이 복잡하다. 우선 원작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닌 것으로 보이는 작품 대부분에 대해서는 노존B본을 기본 대본으로 삼되 규장각본을 참조하여 부분적인 탈락을 보충해야 한다. 노존B본 중 원작이 아니라 ‘한역개작본’이 그대로 옮겨진 서두·중간·결말의 일부 단락에 대해서는 규장각본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 이 세 단락에서는 한문 원작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본이 한문본이 아니라 한글본이라는 기이한 실상 때문이다. 특히 결말부는 원작 계열본과 한역개작본의 차이가 대단히 커서 규장각본이 전하지 않았다면 김만중 원작 『구운몽』의 본래 면모를 전혀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인바, 규장각본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규장각 소장 『구운몽』(古 3350-91) 원전계열 한글본.

 

 

 



규장각 소장 『구운몽』(古 3350-91) 원전계열 한글본.

 


  결국 『구운몽』 원작 연구의 텍스트는 노존B본을 기본으로 삼되 노존B본의 결락을 규장각본으로 보충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노존B본만을 대본으로 삼은 현대어 번역본은 원작 계열본에 한역개작본이 일부 삽입된 결과인바 『구운몽』 원작의 면모와 그만큼의 거리가 있는 셈이고, 규장각본만을 대본으로 삼은 현대어 주석본도 노존B본과 규장각본의 비교를 통한 결락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부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현시점에서 『구운몽』 원형原型의 재구성과 새로운 번역·주석의 두 가지 작업이 요구된다. 



3.


  구운몽』은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담는 ‘액자 소설’의 형식을 취했다. 성진性眞과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외부 이야기’가 양소유와 여덟 여성의 ‘내부 이야기’를 감싸 안은 구조다. 『구운몽』은 주인공이 꿈속에서 다채로운 세상 체험을 하다가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구조를 취했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꿈을 꾸고 결말부에 이르러 꿈에서 깨어나는 구조를 ‘환몽구조幻夢構造’라 부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든 주인공이 길을 떠나 이런저런 인물을 만나며 세상사를 섭렵해 가는 구조를 ‘편력구조遍歷構造’라 부른다. 『구운몽』은 ‘환몽구조’와 ‘편력구조’를 결합한 당시까지의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도 두 구조를 가장 솜씨 있게 얽은 작품이다. ‘외부’와 ‘내부’가 이상적이라 할 만큼 긴밀하게 잘 얽혀 있기 때문이다.
  ‘외부 이야기’와 관련된 환몽구조 내지 환원구조還元構造는 『구운몽』 당대의 중국 통속소설에서 널리 이용되던 것이었다. ‘환원구조’란 환몽구조에서 꿈의 요소를 제거한 것을 말한다. 꿈속에서 세계 체험을 한 뒤 꿈에서 깨어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대신, 모든 일이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되 다채로운 체험 이후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형식이다. 체험 이후 ‘반성과 깨달음’에 이른다는 점에서는 ‘환몽구조’와 동일하지만, 꿈의 세계를 설정하지 않고 작품 속의 모든 사건이 현실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점이 특색이다. 환몽구조 혹은 환원구조와 편력구조를 결합하는 방식은 명말청초明末淸初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일대 유행했던 소설 형식이고, 유럽의 중세소설에서도 자주 이용되었다. 호색한 주인공이 여성 편력을 벌이고 결말부에서 반성과 깨달음에 이르는 구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합구조를 가진 동서양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개 편력구조 쪽에 작품의 무게중심이 놓여 있다. 이들 작품은 통속적 욕망의 자유로운 추구를 위해 ‘외부 이야기’에 교훈적 메시지를 담았다. ‘내부 이야기’의 일탈과 파격을 비난할 경우에 대비하여 ‘외부 이야기’를 일종의 ‘알리바이’로 준비해 둔 것이다. 
  편력구조를 감싸고 있는 『구운몽』의 환몽구조가 노린 제일의 목표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양소유의 일탈은 동시기 중국·일본·유럽 편력소설의 일탈에 비하면 ‘일탈’이라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잖은 편이다. 『구운몽』과 비교할 만한 17세기 동아시아 소설의 대표작이 중국의 『육포단肉蒲團』과 일본 근세소설近世小說의 효시인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1642~1693)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다. 두 작품 모두 남주인공 1인의 여성 편력을 다루었는데, 『육포단』의 미앙생未央生이 여성을 사로잡는 무기로 육체적인 성 능력을 내세웠다면, 『호색일대남』의 요노스케世之介는 막대한 유산, 곧 돈이 무기였다. 『육포단』은 노골적인 성 묘사 장면을 곳곳에 삽입했고, 『호색일대남』은 유곽의 풍속과 일본 각지의 유녀遊女[기녀]에 대한 평판을 기록하며 시종일관 ‘반성 없는 쾌락’을 추구했다. 이에 반해 『구운몽』의 양소유는 음악과 문예 능력을 무기로 삼았다. 양소유는 시를 매개로 진채봉秦彩鳳과 계섬월桂蟾月을 만났고, 거문고와 퉁소 연주로 최상층의 두 여성 정경패鄭瓊貝와 난양공주蘭陽公主를 아내로 맞이했다. 시와 음악을 매개로 한 정신적 교감이 강조되는 가운데 시종 양소유의 자상한 마음씨를 미덕으로 내세운 점, 남녀 주인공들의 향락이 점잖은 상층 예법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게끔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인 점 등이 다른 두 작품과의 큰 차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내내 상하 수직적인 질서의 구현 형식인 예법禮法이 강조되고 도학道學에 입각한 ‘금욕적禁慾的 인간형’이 이상으로 설정된 가운데 보수화 일로에 놓여 있던 조선 사회에서라면 오로지 애정 욕구 실현만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양소유를 꾸짖는 독자가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이때 『구운몽』의 작자는 독자 앞에 성진을 ‘알리바이’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런데 결말부를 읽어 보면 『구운몽』의 작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오늘날 환몽구조와 편력구조 중 어느 쪽에 무게중심이 놓여 있느냐는 논란이 벌어지고, 상반된 두 입장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이 제출된 것 또한 『구운몽』이 누구도 고안해 내지 못했던 ‘최상의 알리바이’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구운몽』은 유사한 구조의 소설 형식을 총결산하여 환몽구조와 편력구조의 결합 효과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4.


  다시 『구운몽』의 창작 동기로 돌아가 보자. 앞서 『구운몽』을 통해 김만중이 당대의 조선 사회에 남기고자 한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운몽』의 여주인공들이 맺은 관계를 통해 문제의 일단을 드러내 보려 한다. 
  『구운몽』의 여덟 여성 중 핵심은 정경패와 난양공주다. 난양공주는 황태후의 외동딸이요, 황제와 월왕越王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구운몽』에서 양소유보다 지위가 높은 존재는 황태후·황제·월왕뿐이니, 정경패가 비록 몇 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의 무남독녀라고는 하나 난양공주의 존귀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구운몽』에서 양소유의 정실부인 두 사람 중 제1부인의 지위는 정경패가 차지했다.
  정경패를 중심에 두기 위해 작품에는 몇 가지 조작이 가해졌다. 『구운몽』에서 갈등이 가장 고조된 대목은 양소유가 정경패와 정혼한 상태에서 난양공주와 혼인하라는 황태후와 황제의 압박을 받는 장면이다. 이때 먼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 난양공주다. 난양공주는 자신 때문에 파혼을 눈앞에 둔 정경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직접 정경패를 만나보기로 했다. 신분을 숨기고 정경패와 교유한 뒤 난양공주는 두 사람이 함께 양소유에게 시집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황태후는 결국 난양공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정경패에게 난양공주의 생각을 전했다. 
  난양공주와 정경패, 두 사람이 모두 양소유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황태후의 제안에 정경패는 미묘한 답변을 했다. 정경패는 우선 사대부가의 여성인 자신이 공주 아래에서 첩의 자리에 있는 것만도 영광이라며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나 본심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들어 있다. 자신은 이미 양소유와 정혼하여 정실부인의 자리에 있는바, 정실부인을 첩으로 삼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정경패가 난양공주와 동등한 위치에서 정실부인이 되는 것도 가당찮은 일이고, 그렇다고 첩의 지위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유일한 해결책은 정경패가 난양공주와 동등한 자격을 획득하는 것뿐이니, 그러자면 정경패 역시 공주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이 태후의 배려에 의해 실현됐다. 태후는 정경패를 양녀로 삼아 영양공주榮陽公主에 봉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더욱이 정경패는 난양공주보다 한 살이 더 많다는 이유로 영양공주의 언니가 되어 윗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구운몽』의 중심에는 정경패가 있었다. 양소유가 결연에 가장 큰 공을 들인 여성도 정경패요, ‘귀신 놀음’을 계획하여 양소유를 웃음거리로 만든 장본인도, 훗날 여성들이 모여 담소하는 자리에서 양소유를 ‘색중아귀’라며 조롱한다거나 감쪽같이 여장을 했던 양소유를 두고 장부의 기골이 부족하다고 놀린 사람도 모두 정경패였다. 더욱이 양소유의 6남 2녀 중 적장자嫡長子 양대경楊大卿이 바로 정경패의 아들이다. 난양공주 역시 아들을 두었지만 적경홍과 가춘운 소생에 이은 넷째아들에 불과하다. 사대부가의 여성인 정경패가 황제의 누이동생인 난양공주를 제치고 명실상부하게 여덟 여성의 중심에 섰다.
  왜 하필 정경패가 여성들 중 가장 윗자리를 차지해야 했을까. 정경패가 사대부가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양소유가 천하제일의 남자로서 천하제일의 여성들을 모조리 휘하에 둔 것도, 황제의 아우인 월왕과 낙유원에서 벌인 세력 대결에서 승리한 것도, 황제 이상의 예술인 집단을 거느렸던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구운몽』에서 세상의 중심은 사대부다. 군주보다 우월한 사대부라니, 중세의 왕국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당대 집권세력이었던 서인西人 혹은 노론老論의 발상과 상통하는 바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禮訟을 통해 드러난 대로, 예禮의 두 축인 ‘친친親親[부자父子 관계]’과 ‘존존尊尊[군신君臣 관계]’ 중 서인은 ‘친친’을 중심에 두어 누구든 동일한 예를 따라야 한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천하의 모든 사람이 같은 예를 따라야 한다]’를 주장했고, 남인南人은 ‘존존’을 중심에 두어 군주는 사대부나 일반 백성과 달리 특별한 예를 적용받는다는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군주의 예는 사대부나 일반 백성과 다르다]’를 주장했다. 서인에 의하면 효종孝宗은 엄연히 인조仁祖의 차남이고, 남인에 의하면 효종은 군주의 적통을 이었으니 인조의 장남으로 보아야 한다. 서인의 입장은 국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가 동일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보편주의’에 가깝다. 서인 혹은 노론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만중 역시 이 노선을 지지했다. 
  이런 관점에서 『구운몽』 여성들의 위계를 다시 조명해 보면 국왕과 사대부 사이의 ‘차등’이 교묘한 방식으로 허물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난양공주와 정경패에게 ‘보편주의’를 적용하여 평등한 관계를 이루도록 한 것이 그 1차적 결과물이다. 황실의 배려 혹은 시혜의 형식을 빌려 양소유와 정경패를 대표자로 삼는 사대부 계급은 국왕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더니, 어느 순간 세상의 중심에 사대부가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난양공주와 정경패만 ‘보편주의’의 적용을 받아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 나머지 여섯 여성들에 대해서는 ‘차등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수미일관 ‘보편주의’를 적용해야 옳다. 정경패가 선두에 서서 여덟 여성의 신분 차이를 허물어뜨리고 모두 같은 근본을 가진 평등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장면은 이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 사대부가의 여성이 공주와 대등하거나 우월한 위치에 서고, 나머지 여섯 여성까지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파격적인 생각은 여덟 여성 모두가 팔선녀의 화신化身이라는 설정 덕분에 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역시 ‘보편주의’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교묘한 설계의 결과다. 

  『구운몽』에서는 슬픔을 안고 살던 모든 존재가 위로 받고 신명나게 한데 어울려 화락和樂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웃음과 교양으로 가득한 『구운몽』의 조화로운 세계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춰보면 여성들 간의 지음 관계는 남성의 일부다처 욕망 내지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여성 간의 위계는 사대부 우위의 세계관을 은밀히 드러내는 데 이용된다. 『구운몽』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 원만하고 여유로운 예술가 김만중의 세계와 완강하고 비타협적인 정치가 김만중의 세계를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이 여유롭고 유쾌한 걸작을 무심히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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