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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길의 과학 연구와 규장각 자료

 

 

 

전용훈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조교수)


한국의 과학사학계에서는 19세기 조선의 과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 남병철南秉哲(1817-1863)과 남병길南秉吉(1820-1869) 형제를 거론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개척자 중 한 분으로 필자의 스승이신 고故 유경로(1917-1997) 선생님은 이들 형제의 과학 활동과 업적을 가리켜 조선 과학의 “서글픈 마지막[悼尾]”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이 19세기 조선에서 과학의 꽃을 피웠지만, 이런 성과가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망국을 맞았기에 서글픈 마지막이라고 한 것이다. 이들이 남긴 과학연구에 대한 헌사獻詞이자 만사輓詞였다.
  이들 형제는 특히 천문학과 수학 방면에서 동시대의 일반 유학자들과 구별되는 수준의 전문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또 각자가 창의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세도정치의 말폐가 드러나 망국의 길로 진입한 것으로 이해되는 19세기 중후반에 이들 형제에 의해 이룩된 과학적 지식의 정밀성과 체계의 방대함은 일견 당시의 일반적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시대에서 돌출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과학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19세기의 한국 과학사는 이들 형제의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동생인 남병길은 그의 형보다 훨씬 방대한 과학저술을 남겼지만 형에 비해서 주목을 덜 받아왔는데, 이 때문에 그의 저술에 대해 본격적인 과학사적 탐구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필자가 현재까지 파악한 정보에 의지하여 남병길의 과학연구와 그것을 가능케 한 지적인 배경, 그리고 규장각에 보관된 그의 방대한 과학 저술의 가치를 간단히 언급해보고자 한다.



생애와 활동


  남병길이 저술한 책에 적은 필명이나 주변 인물들이 그를 부른 호칭을 보면, 그의 자가 원상元裳 혹은 자상子裳이었고, 호는 혜천惠泉, 육일재六一齋, 만향재晩香齋, 유재留齋 등 여러 가지를 썼다. 1868년 이후 남상길南相吉로 개명하였는데, 이후의 책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모두 이렇게 적었다. 본관은 의령宜寧인데, 의령 남씨 집안에서는 현재 개명한 이름인 남상길로 부른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군 청학리에 있는 의령 남씨의 묘역에 그의 묘가 있다. 의령 남씨 가문은 조선후기에 명망가로 이름이 높았는데, 영조 때의 남유용南有容(1698~1773)과 아들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대표적이다. 남병길의 어머니는 순조純祖 시대 정권의 핵심이었던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딸이며, 아버지는 해주목사를 역임한 남구순南久淳(1794~1853)이다. 이들 부부에게서 19세기 조선의 천문학과 수학 연구의 마지막을 장식한 남병철과 남병길 형제가 나왔다. 이처럼 화려한 가문의 배경에 더해 형은 21세인 1837년(헌종 3)에, 동생은 29세인 1848년(헌종 14)에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이들 형제는 모두 천문학의 주무 관서인 관상감觀象監의 실무책임자인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정3품)를 역임한 것도 특이하다. 형은 예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예조・공조・형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59년(철종 9)에 관상감제조에 임명되었다. 남병길은 승정원 도승지(1859), 강원도 관찰사(1863), 한성부판윤(1865) 등을 역임하였고, 1861년에 예조판서 겸 관상감제조를 맡았으며, 1866년에도 관상감제조를 다시 맡았다. 남병길의 저술은 천문학・수학・택일擇日・시문詩文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나아가 『육전조례六典條例』, 『춘관통고春官通考』 등 국가 전적의 발간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특히 남병길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애제자였는데, 김정희의 사후에 『완당척독阮堂尺牘』 등 김정희의 저술을 편찬한 것도 그의 공로이다.

 


1867년 남병길에 의해 간행된 김정희의 척독문尺牘文을 모은 『완당척독』(奎 7165). 전사자全史字로 인쇄하였다.


 

   남병길의 저술을 인쇄하는 데에 자주 사용된 활자는 흔히 전사자全史字로 불리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활자이다. 원래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朴氏의 오빠 박종경朴宗慶(1765-1817)이 1816년(순조 16)에 청나라 취진판聚珍板 역사서의 글자를 바탕으로 하여 주조한 것이다. 이 활자는 1850~60년대에 천문서를 인쇄하는 데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남씨 형제들의 저작이 주로 이 활자로 인쇄되었기 때문이다. 전사자로 간행된 이들 형제의 저술은 전체적으로 15종이 넘는다. 이들 형제의 저술 출판에 전사자가 주로 이용된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문의 배경과 정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관상감의 책임자로서 천문학과 수학 방면에서 보인 높은 성취가 관련되어 있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시헌력과 서양천문학 연구


  남병길의 과학 연구는 천문학과 수학의 두 방면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는 34세(1853) 무렵부터 천문학과 수학 연구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근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고, 아버지의 사후에는 1856년경까지 형과 함께 묘소를 지켰는데,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형제의 저술이 대체로 1853년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서양천문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것을 적용한 시헌력법의 계산 매뉴얼 편찬(『시헌기요時憲紀要』, 『추보첩례推步捷例』), 시헌력을 적용하여 고대 경전인 『춘추春秋』에 수록된 중국 춘추시대 일식 기사 검증(『춘추일식고春秋日食攷』), 천문 계산을 위한 도구 개발(『양도의도설量度儀圖說』), 서울 기준의 시각 표준을 마련하기 위한 성표 작성(『성경星鏡』), 계절별 남중성을 다시 정하여 시각 표준 마련(『중수중성표重修中星表』, 『중성신표中星新表』, 『항성출중입표恒星出中入表』), 표준화된 시각을 물시계에 적용하는 방법(『태양경루표太陽更漏表』) 등 천문학의 이론과 실용에 관련된 각종 지식을 망라한 저술을 남겼다. 나아가 남병길은 오늘날에는 미신으로 치부되는 선택選擇, 즉 길한 날짜와 시간을 잡는 방법에 관한 책도 두 가지(『선택기요選擇紀要』, 『연길귀감涓吉龜鑑』)나 저술하였다. 당시의 천문학이 술수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관상감에서는 천체 관측과 역법 계산 같은 천문학 지식 이외에도, 오늘날 풍수지리風水地理로 알려진 지리학地理學과 함께 국가와 왕실의 주요 행사에 택일을 하고 길흉을 점치는 명과학命課學까지 모두 담당하였다. 특히 국왕의 즉위나 장례 같은 각종의 의례적 행사에 흉일凶日과 흉시凶時를 피하고 길일吉日과 길시吉時를 잡는 선택選擇은 천문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역법 계산을 통해 정해진 날짜와 시간 가운데 행사에 길한 것을 고르는 것이 바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남병길이 남긴 천문학 분야의 연구는 거의 모두 관상감에서 수행하는 역법 계산과 표준시간을 정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역법 계산 분야에서 대표적인 책은 『시헌기요』와 『추보첩례』를 꼽을 수 있는데, 전자가 천문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교과서라면, 후자는 원리를 계산에 적용하는 매뉴얼(계산서)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헌기요』는 시헌력법에 적용된 서양천문학의 개념과 원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지반경차地半徑差나 대기굴절차大氣屈折差 같이 관측 오차가 발생하는 원인, 각 천체들의 궤도 운동의 특성 등을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항상 서양에서 전해진 구면삼각법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추보첩례』는 역법 계산에 사용되는 각종 계산을 작업의 진행 순서에 맞춰 단계별로 적어놓은 계산 매뉴얼이다. 이 책에는 천문학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고, 각종 수표와 산술식을 적용하여 매 계산 단계별로 원하는 수치를 얻어내는 방법만을 기술하였다. 때문에 『시헌기요』와 『추보첩례』는 상호 보완적인데, 남병길은 『추보첩례』 같은 간편한 매뉴얼만 사용하다보면, 천문학 자체의 이론적인 이해가 소홀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시헌기요』를 함께 편찬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시헌기요』(奎 1739). 남병길이 철종대에 관상감觀象監 제조로 있을 때 시헌력법時憲曆法의 요점을 따서 조선의 실정을 참작해서 그것을 26항목으로 정리하고 거기에 역법연혁曆法沿革을 더해서 만든 역법曆法 교과서이다.


 

  천문학적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역법 계산에 적용하여 계산을 하면, 그 결과로 연年·월月·일日·시時라는 시간주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세차운동(지축의 변화 때문에 항성의 위치가 기준점에서 매년 50초 정도 이동하는 것) 때문에 항성을 기준으로 한 서울 기준의 지방시가 조금씩 부정확해진다.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항성의 위치를 최신의 값으로 변환하고 이 위치에 따라서 서울 기준의 시각을 다시 정하는 일이 필요한데, 남병길은 이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인 『성경』은 300개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1,449개의 별에 대해 중국에서 들여온 측정치를 가지고 1861년의 위치로 환산하여 성도와 함께 별의 좌표를 수록한 것이다. 서울 기준의 정확한 지방시는 정확한 항성의 위치를 기준으로 정해지는데, 이런 작업의 결과가 『중성신표』, 『중수중성표』, 『태양출중입표』, 『태양경루표』 등이다. 모두가 서울 기준의 표준시각을 확정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렇게 서울 기준의 표준시각이 정해지면, 그 가운데 어떤 날짜와 어떤 시각이 길하고 흉한지를 판단하고 길한 쪽을 택하는 것이 바로 선택이다. 표준시각을 정하는 연구를 한 다음 남병길이 착수한 분야가 선택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선택기요』와 『연길귀감』이 이런 연구의 결과이다. 특히 『선택기요』는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천문학의 교과서격인 『시헌기요』와 짝을 이루고 있다. “기요紀要”라는 말은 ‘중심이 되는 요점’이라는 뜻인데, 천문학의 요점을 이해하고 나면 천문학에서 얻어진 시간의 길흉을 따지는 선택의 요점도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남병길이 일용日用의 일에 택일하는 대본으로 쓴 책인 『선택기요』(奎 4120).



천원술天元術과 차근방借根方에 대한 연구


  남병길의 천문학 연구가 관상감에서의 공적인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진 것인데 비해, 그의 수학 연구는 자유로운 개인 연구의 성격이 짙다. 남병길은 수학 연구에서도 당대 제일이었는데, 주요한 업적은 조선 수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방정식 풀이법에 관한 것이다. 동아시아 수학에서 전통적인 풀이법은 중국의 송대와 원대에 발전한 천원술天元術이라는 것이다. 미지수를 원元이라고 두고 근을 구하는 방법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문제에서 주어진 관계를 만족시키는 다항식을 세우고, 계수들만으로 대수적인 계산을 하여 해를 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서양으로부터 차근방借根方이라는 새로운 방정식 풀이법이 전해졌다. 이 방법에서는 근을 미지수로 놓고 등호의 양쪽에 조건을 만족시키는 방정식을 세워 근을 구한다. 오늘날의 풀이법과 같은데, 식을 세울 때 ‘근根을 빌렸다借’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천원술이 사라졌던 반면에, 조선 후기의 수학자들은 천원술의 전통을 잘 지켜서 이 방법에 매우 능숙하였는데, 이점이 당시의 중국 수학과 구별되는 조선 수학의 큰 특징으로 거론된다. 천원술과 차근방 양쪽을 다 이해하고 연구했던 남병길은, 초기에는 서양의 차근방을 중시하였지만, 수학 연구가 깊어지면서 전통적 풀이법인 천원술을 중시하게 되었다. 남병길의 『집고연단緝古演段』과 『무이해無異解』가 방정식 풀이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중국의 고증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서양의 것보다는 전통적인 수학의 성취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병길은 전통 수학을 복원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오래된 동양수학의 고전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의 원리를 재해석한 『구장술해九章術解』를 지었고, 전통 수학에서 구고법句股法이라고 불린 직각삼각형의 성질과 관련 문제에 대한 풀이법을 해설한 『유씨구고술요도해劉氏句股術要圖解』를 저술한 것도 이러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남병길이 원말元末 이예李銳의 산서算書인 『익고연단益古演段』을 

새로운 서양의 산법으로 해설한 산서算書인 『집고연단』(古 7090-9).



과학 연구의 지적 배경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 드러나는 남병길의 연구 수준은 당시의 일반적인 유학자들의 그것과 완전히 구별되기에, 그가 시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남병길의 연구는 이전부터 이루어진 조선의 지적 전통과 그가 활동하던 당시 지식계의 분위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남병길의 과학 연구는 우선 18세기 후반부터 형성되어 왔던 조선 학계의 지향을 잘 계승하고 있다. 조선의 학계, 특히 서울의 학계에서는 수학과 천문학 같은 정밀과학이 유학자 지식인으로서 추구할 만한 지식이라는 생각이 18세기 말부터 형성되어 왔다. 18세기 말 서울의 학계에서는 유학자들의 관심이 경전에 대한 연구와 자기 수양에 대한 관심 같은 유학의 전통적인 주제로부터 ‘사물의 실상과 수리적인 원리를 규명하는’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술로 확대되었다. 천문학・수학・지리학・농학 등이 이런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18세기 말의 홍대용을 비롯하여 서명응과 서호수 부자, 나아가 19세기의 홍길주 같은 탁월한 수학자들을 거명할 수 있다. 남병길의 경우는 이들보다 한 세대 정도 후에 활동하였지만, 선배들이 형성한 분위기를 이어서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 집중하였다. 형인 남병철은 이런 학문을 “성력산수지학星曆算數之學”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런 관심은 청나라 고증학파의 학술적 경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고증학에서는 천문학과 수학 같은 전문 지식이 유가 경전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으로 인식되었는데, 조선의 학자들도 이런 입장을 공유했던 것이다. 남병길의 말을 빌리면, 수학은 “격치格致의 실학實學”이었다.   남병길의 과학 연구가 시대와 함께 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다른 학자들과의 학술적 교류를 통해서, 그것도 중인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심화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병길과 교류한 중인 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천문학자 이준양李俊養(1817-?)과 수학자 이상혁李尙爀(1810-?)이다. 남병길은 1853년에 조선의 시각을 나타낼 때 기준이 되는 계절별 남중성을 새로 계산하여 표로 정리한 『중성신표中星新表』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의 교정을 이준양이 보았다. 또한 이준양은 전통적인 별자리 체계에 서양식 항성 관측 결과를 반영하여 별자리의 구성과 위치를 외우기 쉽도록 노래로 만든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1862)를 편찬하였는데, 이 과정에도 남병길의 권유와 협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병길은 관상감의 제조를 두 번이나 맡았고, 이준양은 그 관상감의 관원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관상감의 관원이자 우수한 중인수학자인 이상혁과의 관계도 주목된다. 이상혁은 벽걸이형 해시계에서 서울 기준의 해 그림자가 변화하는 수치를 계산하여 제시한 『규일고揆日考』(1850)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의 서문을 남병길이 썼다. 여기에는 역시 중인 출신으로 관상감의 관원이었던 김득언金得彦(1778-?)의 서문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남병길이 다양한 중인 출신 전문가들과 밀접히 교류하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규일고』(古 7300-2) 권두卷頭에 수록된 남병길(좌)과 김득언(우)의 서문.


 

  이상혁은 반대로 남병길의 『양도의도설』에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상혁과 남병길 사이의 밀접한 교류와 협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남병길은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문단의 인물들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여기에도 중인 출신의 지식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추사의 제자로서 의사였던 홍현보洪顯普(1815-?)는 1866년 무렵 남병길이 관상감 제조를 다시 맡아 천문학과 수학 저술의 편찬에 힘쓰던 시기에 조력하였으며, 여러 차례 남병길을 대신하여 책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천문추보天文推步의 산법算法으로 양도의기사量度儀器司를 만들어 천지天地의 높이와 해와 달의 운행을 추이推移하여 추측하는 법을 적은 책인 『양도의도설』(奎 7653). 위에 보이는 이상혁李尙爀의 서문 말미에 있는 “을묘중동乙卯仲冬”이란 기록을 통해 남병길南秉吉이 1855년(철종 6)에 간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연구를 기다리는 규장각 소장도서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 남병길이 남긴 업적은 실로 방대하다. 그리고 그의 연구가 19세기 조선 지식계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를 통해 19세기 조선과학사는 다시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에 관한 연구는, 수학사 연구자를 중심으로 하여 몇몇 책들이 번역되고 수학사적 의의가 탐색되고 있는 정도이다. 천문학에 대해서도 몇몇 연구가 있지만, 이것은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들을 생각해 볼 때, 겨우 첫발을 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남병길의 저술들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천문학(선택 포함)과 수학 분야의 저술로 대별되는데, 천문학과 선택에 관련된 저술은 관상감 제조로 재직하면서 지은 것이 많다. 때문에 개인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관찬서의 성격이 크고, 관상감과 관원들의 활동에서 꼭 필요한 지식을 정리하고 있다. 조선 왕조의 문화적 총화라고 할 수 있는 각종의 서적들이 대체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병길의 천문학 저술은 한두 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반면 그의 수학 저술은 관찬 도서적인 성격보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 관료로서, 나아가 천문 관서의 책임자로서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입장에 있었기에, 수학 관련 저술들도 거의 모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과학사 관련 자료들이 대부분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남병길의 저작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 과학사의 새로운 연구 주제를 개발하고, 이미 연구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해서는 규장각의 소장 자료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자료를 소장한 규장각이 실은 한국학의 미래를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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