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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사몽유록金華寺夢遊錄의 성격과 의미

 

 

 

이승복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허구적 설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형상화하는 몽유록夢遊錄은 16세기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하여 이후 하나의 독특한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았다. 꿈속의 일을 다루는 이른바 몽유양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나 소설을 비롯한 거의 모든 문학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몽유록은 대체로 현실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또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몽유록을 현실의 사건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교술敎述 장르로 파악하기도 하고, 꿈의 설정이라는 허구성과 시간적 순서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 곧 서사성을 지닌다는 점을 중시하여 교술적 서사로 규정하기도 하며, 아예 소설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몽유록은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자리를 정해 앉은 후 토론을 벌이고, 이어 시나 노래를 짓는 것을 보고나서 꿈에서 깨어난다는 일정한 구조적 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의 일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몽유록을 주인공형, 참여자형, 방관자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른 시기의 몽유록은 꿈을 통해 이상세계를 그려보거나 역사적 사건이 남긴 상처를 돌이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에서는 꿈에 최치원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대 문인들이 다스리는 문장왕국을 방문했다고 하여 관료 문인의 이상과 작자의 욕망을 형상화하는 한편 그러한 이상과는 거리가 먼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작자의 좌절감을 제시하였다.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에서는 꿈에 단종과 사육신이 만나 토론하고 시를 짓는 자리에 참석하였다고 하여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통해 유교 이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또 윤계선尹繼善의 『달천몽유록』에서는 꿈속에서 임진왜란 때 전몰한 사람들이 모여 신립申砬의 전술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원한을 토로하면서 시를 짓는 자리에 참석하였다고 하여 전란의 참상과 그에 대한 울분을 드러내는 한편 전몰한 사람들의 의리와 절개를 추모하였다. 그리고 작자를 알 수 없는 『강도몽유록』에서는 꿈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목숨을 잃은 10여 명의 여인들이 모여 사태를 그렇게 만든 남성들의 무능과 비리를 고발하고, 자기들의 죽음을 한탄하거나 가족들을 걱정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하여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하고 전란이 남긴 상처를 드러내었다.
  이처럼 이상세계를 그리거나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관심을 담아내던 몽유록은 조선후기로 오면서 그러한 관습을 유지하면서도 작자의 보다 다양한 관심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금화사몽유록金華寺夢遊錄』은 그러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금화사몽유록』의 작자와 창작 연도를 현재로서는 분명히 알 수 없는데 대략 17세기경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먼저 한문으로 창작되고 나중에 국문으로 번역되었으며, 20세기 초에는 국문 활자본으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많은 이본이 전해질 뿐 아니라 19세기에 문한명文漢命이 도교적 색채를 가미하는 방향으로 개작을 하기도 하고, 1840년 김제성金濟性이 소설적 변환을 가한 『왕회전王會傳』이라는 작품을 다시 쓰기도 했다는 사실에서 상당히 널리 읽힌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문본들은 제목이 ‘금화사몽유록金華寺夢遊錄’, ‘금화사기金華寺記’, ‘금화사창업연기金華寺刱業宴記’ 등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금화사몽유록’이라는 제목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또 국문본들에서는 ‘금산사몽유록’, ‘금산사창업연록’ 등의 제목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제목이 다양하지만 한문본과 국문본을 가리지 않고 이 작품을 통칭할 때에는 ‘금화사몽유록’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두 종의 한문필사본 『금화사몽유록』이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제목이 ‘금화산기金華山記’로 되어 있는데 21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면에 11행, 1행에 22자씩 균일하고 단정하게 필사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제목이 ‘금화사기金華寺記’인데 18장으로 되어 있고, 한 면에 14행, 1행에 20∼22자씩 씌어 있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이야기 단락의 구성을 비롯하여 세부적인 내용 전개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표현의 측면에서는 몇 가지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에 소장중인 『금화산기金華山記』(古 3478-2).


 

규장각 소장 『금화사기金華寺記』(가람고 294.352-G336).


  예를 들어 『금화산기』의 ‘금수지광錦繡之光’, ‘명시신命侍臣’, ‘서달유기徐達劉基’와 같은 구절이 『금화사기』에는 ‘녹야지광綠野之光’, ‘영근시令近侍’, ‘유기서달劉基徐達’로 되어 있는 것처럼 의미에 별다른 차이 없이 표현만 다르거나 인명의 순서만 바뀌어 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또 동방삭東方朔이 역대 영웅들의 재능에 따른 직책을 정하는 대목에서 『금화사기』에는 이정李靖을 부원수로, 이한초李漢超를 표기장군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금화산기』에는 빠져 있고, 『금화산기』에는 황충黃忠을 충무장군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금화사기』에는 빠져 있다. 이처럼 둘 중 어느 한 곳에는 제시되어 있는 구절이 다른 곳에는 없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의 차이로 인해 작품 전체의 성격이나 의미가 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좀 더 정밀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금화산기』와 『금화사기』의 표현이 상이한 곳을 현재 선본善本으로 알려져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금화사몽유록』과 비교해 보았을 때 『금화사기』가 국립중앙도서관본에 상당히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금화산기』와 『금화사기』 둘 다에 오류가 있지만 『금화사기』에는 오자와 탈자, 그리고 글자의 앞뒤 순서가 뒤바뀐 오류 등이 『금화산기』에 비해 비교적 많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원元나라 지정至正 말에 성허成虛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박학다식하고 기질이 초매하였다. 산천에 뜻을 두어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9월 어느 날 금릉金陵을 향해 가던 중 금산錦山에 이르러 가을 풍광을 구경하였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갈 곳을 몰라 배회하였는데 마침 앞뒤에는 기화요초가 덮여있고, 좌우로는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가 벌여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위에 금화사金華寺라는 큰 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선실禪室에 들어가 쉬다가 잠이 들었다.
  잠시 뒤 천군만마가 땅을 울리며 절로 들어오는데 가운데 황금 가마에 한고조漢高祖, 당태종唐太宗, 송태조宋太祖, 명태조明太祖가 타고 있었다. 황제들이 법당에 자리를 정해 앉을 때 명태조가 이 자리는 천하를 통일한 황제들의 자리라며 사양하다가 한고조의 권유로 자리에 앉는다. 명태조가 사양한 것은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원나라 말로 명태조가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황제들이 거느리고 온 문무제신들이 동서로 나눠 자리하고 장량張良, 위징魏徵, 조보趙普, 유기劉基는 황제들 옆에 시립하도록 한다. 

 

 

꿈속의 잔치가 시작되는 부분의 내용을 담은 『금화산기』의 한 면.

 

 

  한고조가 풍경이 좋고 군신이 모두 모였으니 잔치를 베풀자고 한다. 이어 한고조가 자기가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신하들의 공 때문이지 자기가 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며 자기 신하들의 공을 일일이 거론한 후 다른 황제들도 각각 신하들의 공을 이야기하도록 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당태종이 중흥주中興主를 불러 같이 즐기자고 하여 한고조는 광무제光武帝와 소열제昭烈帝를, 당태종은 당숙종唐肅宗을, 송태조는 송고종宋高宗을 청한다. 잠시 후 중흥주들이 시위신들과 함께 도착하여 동루에 좌정한다.
  장양이 여러 신하들이 서로 뒤섞여 있으니 반열班列을 정하자고 하여 번쾌樊噲로 하여금 남루 아래에 깃발을 꽂고 상재相才가 있는 사람은 홍기紅旗 밑에,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은 흑기黑旗 밑에, 충의지사忠義之士는 황기黃旗 밑에, 용략지사勇略之士는 백기白旗 밑에, 지모지사智謀之士는 청기靑旗 밑에 모이게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위징이 재능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천거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며 공평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려 신하들의 우열을 가리자고 한다. 한고조가 누가 좋겠느냐 묻자 위징은 황제들이 각각 추천하자고 한다. 이에 한고조는 소하蕭何, 당태종은 이정李靖, 송태조는 조보, 명태조는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한다. 조보가 제갈량은 통일의 공이 없어 적당치 않다고 하자 송태조는 성패로 영웅을 논할 수 없다며 제갈량을 불러 반열을 정하라 한다.
  제갈량이 누차 사양하다가 결국 임무를 맡아 반열을 정하려 할 때 진시황秦始皇, 진무제晉武帝, 수문제隋文帝, 초패왕楚覇王의 격서가 도착한다. 한고조가 물리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송태조가 좋게 대우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고, 제갈량이 진시황은 동루, 초패왕은 서루로 보내면 조용해지리라고 한다. 이에 왕희지王羲之를 불러 백기에 붉은 글씨로 중흥자는 동루로, 패자覇者는 서루로 가고 창업주가 아니면 법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쓰게 하여 문밖에 세운다.
  이윽고 진시황이 좌우에 신하들을 이끌고 도착하여 곧장 법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제갈량이 막아서서 진시황이 창업주가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이사李斯가 권하여 진시황이 참고 동루로 간다. 또 초패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잔치의 주관자가 누구냐고 물어 제갈량이 한고조가 당・송・명 창업지주를 위해 연 태평연이라 하자 초패왕이 법당으로 향하면서 자기는 한고조를 어린아이로 볼 따름이라고 한다. 그러자 제갈량이 대왕은 혈기의 분忿으로 여러 사람의 시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설득하여 서루로 가게 한다.
  제갈량이 신하들의 반열을 정하기에 앞서 이 중에 패역난국자悖逆亂國者가 있으면 모두 물러나라고 하자 왕망王莽, 동탁董卓 등 십여 명이 물러간다. 제갈량이 자기가 재주가 없으면서도 황명을 받들어 영웅의 우열을 분별함에 조금의 사혐이 없을 것이라 맹서하고 반열을 정하려 할 때 한무제漢武帝, 당헌종唐憲宗, 진원제晉元帝, 송신종宋神宗과 진승陳勝, 조조曹操, 원소袁紹, 손책孫策, 이밀李密 등이 잔치에 참여하려 한다. 이에 한고조가 진승, 조조, 손책이 호준지사豪俊之士라 하자 이밀과 원소는 자기들이 누대 왕후王侯로 일시 맹주이니 어찌 영웅이 아니냐며 항거하지만 경청敬靑이 큰소리로 꾸짖자 두 사람이 물러간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자 한무제, 당헌종, 진원제, 송신종은 시종신들과 함께 동루로 가고, 진승과 조조는 서루로 간다.
  그제야 제갈량이 장량, 위징, 조빈曹彬, 유기를 비롯해 그날 모인 황제들의 신하 가운데 1인씩을 들어 먼저 14명을 평하고, 이어 각 깃발마다 등급을 셋으로 나눠 신하들을 평하면서 반열을 정한다. 홍기에는 소하, 곽광霍光, 장손무기長孫無忌, 방현령房玄齡을, 흑기에는 한신韓信, 마원馬援, 서달徐達을, 황기에는 기신紀信, 장순張巡, 관우關羽를, 청기에는 진평陳平, 이정李靖, 주유周瑜를, 백기에는 조운趙雲, 경감耿弇, 장비張飛, 위지공尉遲恭을 제1로 하였다. 그러자 강유姜維가 눈물을 뿌리며 제갈량에게 제자를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하자 제갈량이 강유의 충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항복했다는 이름이 천추에 흐르니 절의를 지켜 죽은 것만 못하다 한다. 반열이 정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제갈량을 칭찬하였다. 

 

제갈량이 각 황제의 신하들을 평가하며 반열을 정하는 내용이 담긴 『금화산기』의 한 면.

 


  당태종이 혼자 즐기는 것이 함께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며 동서루의 사람들을 청해 같이 즐기자고 한다. 이에 동서루의 여러 제왕帝王들이 법당으로 올라와 동서로 나눠 앉고 근신 1인씩을 옆에 시립하게 하는데 진승, 조조, 손책은 말석에 앉았다. 이어 가무를 베풀고 술이 반쯤 취했을 때 한고조가 천지는 무궁하고 인생은 유한하며, 나라의 장단長短과 사람의 수요壽夭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자 모두 처연해 한다. 이때 서쪽에 앉은 초패왕이 큰소리로 홍문연鴻門宴과 해하垓下 싸움을 거론하며 오강烏江의 한을 잊을 수 없다고 하자 동쪽의 한 황제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고조가 흥망과 승패를 논하지 말고 쾌사快事를 이야기하자고 한다. 진시황이 먼저 자기의 세 가지 쾌사를 이야기하고, 한고조는 자기에게 무슨 쾌사가 있겠느냐며 경포黥布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향에서 잔치하면서 「대풍가」를 지어 부른 일과 낙양 남궁에서 아버지인 태공太公에게 헌수하자 태공이 기뻐했던 두 가지 일을 꼽았다. 그 말을 들은 명태조가 자기는 부모가 없어 헌수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자 한고조가 그 효성을 칭찬한다. 한고조가 당태종과 송태조도 쾌사를 이야기하라고 하자 당태종은 세 가지 일을, 송태조는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하고, 조조가 또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뒤를 이어 한고조가 명태조에게 나라가 당우唐虞가 아니고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닌데 어찌 진선진미하겠느냐며 여러 황제들을 논평하라고 한다. 명태조가 사양하다가 먼저 기상을 살핀 뒤에 시비를 논하겠다며 광무제, 진시황, 한무제, 소열제, 당태종, 당헌종, 수문제, 송태조, 송신종, 초패왕, 조조의 기상을 각각 여덟 자씩으로 논한 다음 진시황과 한고조를 비롯한 16명의 잘못을 들어 비판한다. 그러자 초패왕이 고금 제왕의 시비에 자기가 어찌 참여하지 못하겠느냐고 하자 명태조가 부끄러운 말을 듣는 것이 무익하리라고 한다. 하지만 초패왕이 굳이 듣겠다고 하여 명태조가 열 가지 잘못을 나열하자 초패왕이 만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띤다. 명태조가 용렬한 재주와 어리석은 식견으로 시비를 논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칭찬한다. 이어 명태조가 자기가 도읍을 정하려 하는데 어디가 좋겠느냐고 묻는다. 한고조가 금릉을 천거하며 이미 금릉에 뜻을 두고 있지 않느냐고 하자 명태조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명태조가 한고조의 명을 받아 여러 황제들을 논평하는 내용이 담긴 『금화산기』의 한 면.

 


  한고조가 신하들에게 명해 춤추고 노래를 짓게 함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여러 황제들이 동락同樂의 뜻이니 좋다고 한다. 이에 신하들을 3대로 나눠 제1대의 장양, 소하, 한신, 진평, 기신, 제2대의 마원, 가복賈復, 제갈량, 관우, 조운, 제3대의 이정, 장손무기, 장순, 허원許遠, 서달의 순으로 15명이 노래를 지어 부른다. 신하들은 노래를 통해 자기의 행적이나 공업을 드러내기도 하고, 여한을 토로하기도 하면서 간혹 잔치의 즐거움이나 의미를 덧붙이기도 한다.
  노래가 끝나자 한무제가 한고조에게 예전에 자기가 동방삭과 고금 성현의 상당직相當職을 논한 적이 있는데 오늘 다시 여러 신하들의 알맞은 직책을 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여 동방삭으로 하여금 신하들의 상당직을 정하게 한다. 이에 동방삭이 제갈량을 좌승상, 소하를 우승상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70여 명의 상당직을 정하자 모든 사람들이 대소大笑하며 인물과 벼슬이 부합한다고 한다. 이어 한고조가 오늘의 일을 시로 지어 후세에 전하고 싶지만 지을 사람이 없다고 하자 송태조가 한유韓愈를 추천하여 한유가 오언시를 지어 잔치의 성대함을 길게 노래한다.
  홀연 이때 좋은 잔치에 청하지 않으니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가 금산에서 죄를 묻겠다는 원태조元太祖의 글이 도착한다. 송태조가 놀라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진시황이 개미 같은 장수들과 오합지졸을 어찌 두려워하느냐고 한다. 잠시 후 먼지가 하늘을 덮고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면서 원태조가 이끄는 수만 명의 군대가 산과 들에 가득 몰려온다. 한고조가 누가 막겠느냐고 하자 진시황과 한무제가 자원하여 군사 백만과 장군 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대파하고 돌아온다.
  날이 장차 새려 하고 산새가 지저귀자 제왕들이 대취하여 부축을 받으며 돌아가는데 한고조, 당태종, 송태조가 명태조에게 사해를 통일할 날이 멀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진 뒤에 오늘 놀던 것을 생각하여 구천의 혼을 위로하라 하고 돌아갔다. 추풍낙엽 소리에 성허가 잠에서 깨니 꿈속의 일이 역력하여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였다. 

 

원태조의 군사를 크게 물리치고 잔치가 끝날 때, 한고조・당태종・송태조가 명태조에게 이르는 말은 결국 명明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이 작품이 꿈속의 인물들이 좌정하여 토론을 벌이고 시나 노래를 짓는 몽유록의 일반적인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고, 꿈꾸는 사람이 꿈속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목격한 것으로 되어 있어 방관자형 몽유록으로 분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 시대의 다른 작품들보다 좌정과 토론 과정이 길고 복잡해졌으며, 짧기는 하지만 원태조와의 전쟁 장면이 삽입됨으로써 서사성이 확대되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차이는 앞 시대의 작품들이 이상세계를 그리거나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관심을 담아낸 데 비해 이 작품은 우리가 아닌 중국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앞의 줄거리 요약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중국 역사에 대한 작자의 해박한 지식과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의 의미를 중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서 찾기도 하고, 왕도·덕치·절의의 강조와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이상적 정치 구도의 제시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사항을 주목하여 이 작품의 성격과 의미를 당시 우리의 현실과 관련지어 좀 더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원나라 말기로 아직 명나라가 건국되기 전이고, 공간적 배경은 명나라가 도읍할 금릉, 곧 남경 지역이다. 그리고 한유가 지은 시 속에는 세상일이 그릇되었다고 하여 한족의 정통 왕조가 무너지고 원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 대한 비탄과 함께 앞으로 명나라가 화려한 빛을 드날릴 것이라는 기대가 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아직 나라를 세우지 않은 명태조가 창업주의 한 사람으로 직접 등장하여 제왕을 논평하기도 하고, 한고조에게 도읍지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한⋅당⋅송의 창업주들로부터 천하 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는 이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한족의 정통 왕조를 기대하는 것으로 명나라 건국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이 작품이 창작되던 당시 우리의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정확하게 17세기의 어느 시점에 창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에서는 일본과 청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해지면서 북벌이 논의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명의 회복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중국의 역사와 영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전후의 혼란을 정비하면서 유교 이념의 실현에 대한 관심 역시 커졌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할 때 청에 대한 적개심의 팽배와 대명의리론의 제기라는 17세기 조선의 상황과 분위기가, 시간적 배경을 원나라 말로 앞당겨 이민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명의 건국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면서 그 정통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작품으로 형상화되면서 중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기도 하고, 왕도·덕치·절의와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이상적 정치 구도에 대한 관심이 제시되기도 했던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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