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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서 만나는 자하 선생

 

 

 

고연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자하산방과 자하연


   조선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이 우의정에서 물러나 83세의 나이로 관악산 정상에 올랐다. 조선후기 삼정승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70대에 관악산에 오르면서 유람기 첫 구절에 일찍이 83세 노인도 오른 곳이라 했다. 그러나 영주대靈珠臺 정상(오늘날 연주대가 있는 곳)으로의 막바지에 이르러 엉금엉금 포복자세로 진땀을 뺀 후, 체제공은 예전에 허목은 가볍게 올랐는데 지금의 자신은 고생이 심했다고 유람기를 마무리했다. 은근히 힘겨운 등정이지만, 옛 문인들도 관악산 정상에서의 만족을 위해 산에 올랐다. 
   관악산 정상에서 내려오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네 개의 ‘자하동紫霞洞’이 펼쳐졌다. 붉은 보랏빛 노을을 뜻하는 ‘자하紫霞’란 말은, 신선이 사는 선경을 일컫는 말이었다. 자하동이란 신선경 같은 동네를 뜻한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의 개성특급시 송악산 자락의 만월대 뒤로 자리한 자하동이 유명했다. 조선시대 한양 선비들에게는 관악산 자하동이 가볼 만한 곳이었다. 동서남북 네 개의 자하동 중 북자하동北紫霞洞은 떨어져 내리는 폭포와 흘러가는 물 풍경으로 경관이 일품이었다. 북자하동 계곡은 오늘날 서울대학교 정문에서 ‘자하연紫霞淵’에 이르는 일대였다. 
   북자하동에는 조선후기 시인이며 예술가인 신위申緯(1769-1847) 집안의 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산 신씨 집안에서는 17세기 언제쯤 이미 이곳에 별장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채제공의 유람기를 보면, 그가 관악산에 오르기 전 이르러 쉰 곳이 북자하동 신씨申氏네 별장이었다. 채제공은 그곳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산에서 흘러내린 개울 위로 숲을 이룬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그 그윽함의 근원을 알 수 없구나. 정자 아래 바위에 이르러보니 날아오르는 물거품 아래 깊이 쌓인 녹색물이 출렁이며 흘러가는데 자하동 어귀를 돌아 멀리 가더라.” 신위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책을 읽고, 후에 <자하산장도紫霞山莊圖>란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며,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도 늘 이곳을 그리워했다. 신위의 호號 ‘자하’는 북자하동 자하산장에서 비롯한다. 
   나는 이 년 남짓 규장각의 서화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다. 이따금씩 규장각을 나와 ‘자하연’에 올라본다. 자하연 언저리 어딘가의 자하산장을 그려보기란 쉽지 않다. 자하선생 신위는 문학사의 서술이나 예술사의 서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이다. 19세기 한문학의 변화를 설명할 때나, 한국미술사에서 김정희의 등장과 19세기 예술미학의 전개를 서술할 때 신위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규장각 속 자하 신위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한다. 규장각이 소장한 자료들 속에서 시인이며 화가이며 서법가이며 또한 전각연구자였던 신위의 다채로운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태운 뒤의 ‘분여록焚餘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古 3447-27)


   자하 신위의 문집들이 규장각에 전한다. 신위의 시문이 시기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16책(古 3447-27)은 신위 연구자라면 기본적으로 보아야 하는 책이며, 이미 수차례 영인되어 유포되었을 정도로 신위 문집 중 대표본이다. 이 외에도 규장각에는 여러 본의 신위 문집이 있다. 16책, 9책, 혹은 2책 등 다른 양태이다. 신위의 시문을 좋아한 후대인들이 일부만을 뽑아 만든 선집에 판각 혹은 필사한 것들이다. 
   이러한 신위 문집들 가운데 연구자의 눈길을 끄는 귀중본은 『경수당집警修堂集』 2책(古 3447-46)이다. 펼치면, ‘분여록焚餘錄’이란 제목의 네 권이 두 책에 실려 있다. ‘분여’란 ‘태우고 난 뒤’를 뜻한다. 신위의 연보를 쓴 김택영은 40세 이전의 신위 시詩가 불에 탔노라 단언했고, 대표 문집 『경수당전고』에는 40세 이후의 시문 5,000여 수가 실려 있다. 그런데 규장각 소장 『경수당집』(‘분여록’)에는 신위 나이 16세에서 40세까지의 시문 500여 수가 실려 있다. 신위가 스스로 “하루는 내 손으로 원고를 불사르고, 그 재는 빗자루로 쓸어버렸다.”고 했지만, 정작 신위가 태운 것은 16세 이전의 작품들이었다. 말하자면 ‘분여록’은 태우고 난 뒤 다시 탄생한 작품들이며, 『경수당전고』에는 실리지 않은 초년작들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분여록’은 오직 규장각에만 전한다. ‘분여록’의 시들은 신위의 전체 시작詩作에 비할 때 미약한 수량이지만, 신위의 예술세계가 풋풋하게 영글어가는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도인이 장난삼아 뜰의 바위 그리는 중, 

종이 위에 언뜻 비친 고죽 그림자. 

급히 일어나 찾아보니 간 곳 없고, 

달 지고 바람 불어 잠깐 새 사라졌네.

 

 

 이 시는 묵죽화에 몰두하던 소년 신위의 모습이다. 달빛으로 어린 대나무 그림자를 보았으니, 매가 토끼를 덮치듯 주저 없이 붓을 휘둘러 묵죽을 베껴내야 할 터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구름이 밀려와 대나무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림에 어지간히 마음을 빼앗긴 소년의 안타까운 모습이며, 유명한 묵죽화가 신위의 어린 시절 사연이 맛깔스럽다. 



가슴 속 푸른 매실[靑梅]


   신위의 대표 문집 『경수당전고』에 실린 시 5,000여수는 신위의 내면적 성숙과 예술적 지향을 모두 보여주는 보고寶庫이다. 이 문집의 전체상을 이 글에서 논하기는 어렵지만, 몇몇 시문을 들어 신위의 진모를 엿볼 수 있다.
   많은 양의 시문을 짓고 천재적 시인으로 평가받았던 신위가 추구했던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신위는 그것을 ‘유리시경琉璃詩境[유리 같은 시의 경지]’이라고 읊었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빈 맑은 마음, 즉 선심禪心의 지극한 경지를 누리는 세계라고, 신위는 스스로 그 뜻을 해석했다. 또한 이러한 시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신위는 그림을 그렸다. <시경도詩境圖>란 제목의 그림이다. 그 안에는 선비와 스님이 길 위에서 마주 보는 있었다는데, 아쉽게도 이 그림이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세상만사에서 벗어나 청담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그림임에 분명하다. 

   신위는 맑은 향을 피어놓고 서화의 묵향과 명품 차의 다향이 어울리는 일상을 향유하고자 했으며, 옛 골동품을 지극히 애호하고 수집했다. 고려시대 안향安珦의 고택에서 나왔다는 비색청자를 특별히 아껴 시로 읊었고, 그의 문집에는 각종각양의 골동품을 읊은 시가 적지 않다. 신위는 꽃을 사랑했다. 또한 기이하게 생긴 돌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좋아했다. 정원에 피어난 다양한 종류의 꽃들을 하나씩 묘사한 긴 시가 『경수당전고』에 여러 편 전하고, 돌에 대한 편벽된 애정을 표현한 시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신위의 시세계는 애틋한 정서와 남다른 기발함이 돋보인다고 평가받는다. 그 가운데 아내의 죽음 앞에 쓴 다음의 시구에서 신위의 시적 정서와 문학적 자질을 맛볼 수 있다.



가슴 속에 푸른 매실이 들어있는 듯해, 

이상하게 오랫동안 시큰거리네

 

 

 가슴 속 청매靑梅라는 시큰한 덩어리. 신위의 방대한 문집 중에서도 유난스럽게 읽는 이의 가슴까지 오랫동안 시큰하게 만드는 구절이다. 신위는 여린 마음에 학문과 감수성의 깊이가 남달리 깊었던 시인이다. 



꽃보다 화려한 인영印影


   신위는 인장印章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이 점은 규장각 소장본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에는 자필 서명의 역할이 커지면서 이름 석 자를 새긴 도장의 사용마저 미미해지고 있지만, 조선시대 신위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인장문화가 중국과 한국의 문인들에게 한창 인기였다. 그 시절의 인장은 개인의 신표라는 기본적 역할을 넘어서 글씨의 모양이나 새기는 도법刀法 및 인장 몸돌의 재질과 크기와 모양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감상되고 품평되던 예술품이었다. 인장의 내용을 보아도 개인의 호號나 위상의 표시 외에 고전의 시구나 문장을 여러 가지 모양새로 디자인하여 새겨 넣은 것이 다양했다. 
   신위 자신이 빈번하게 사용한 인장은 ‘자하紫霞’, ‘신위지인申緯之印’이고 ‘자하거사紫霞居士’, ‘한수사생漢叟寫生’도 있다. 또한 신위가 친애한 청나라 학자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의 인연을 보여주는 ‘소재蘇齋’, ‘묵연당墨緣堂’, ‘소재묵연蘇齋墨緣’ 등의 인장도 사용했고, ‘대아大雅’라는 시경의 편명도 인장으로 썼다. 흥미롭게도 ‘소재蘇齋’와 ‘대아大雅’는 추사 김정희도 사용한 인장이다. 당시의 인장은 개인의 선호와 인간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문화였던 것을 간취할 수 있다. 신위는 어느 날 사공도 24품(시품의 지극한 경지를 읊은 시)의 구절이 새겨진 인장 여덟 개를 얻어 기뻐하며 그의 아들에게 이들을 모각하도록 한 일이 있다. 인장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좌. 묵연당墨緣堂 신위 인장 (석인, 2.2 x 3.8cm) 
묵으로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의 당호를 새긴인장.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소재蘇齋 신위 인장 (석인, 1.5 x 2.4cm) 
소재는 청나라 학자 옹방강의 호로, 신위는 그와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 그의 호를 자신의 인장에 사용했다

 


   신위의 인장에 대한 관심과 안목은 널리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헌종 대(재위: 1834-1849)에 왕실의 인장들을 정리하여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제작하는 일을 신위가 도맡았다. 함께 일한 사람은 신위보다 27세 어린 조두순趙斗淳(1796~1870)이었다. 규장각에는 『보소당인존』이 다섯 본 전한다. 그 중 두 본은 중국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다섯 본 모두 신위가 편찬한 조선 책이다. ‘보소당’은 중국학자 옹방강의 호이지만, 동시에 헌종의 낙선재의 현판명이었다. 『보소당인존』 14책(古 2400-4)을 펼치면, 붉은 인영(印影, 인장을 찍어놓은 것)들 수백 방이 꽃잎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각각의 인영 곁에는 인장에 새겨진 전서의 뜻을 풀어놓고 인장의 재질이 돌[石]인지 옥玉인지 구리[銅]인지 밝혀놓았다. 금석문자에 능한 신위가 할 만한 일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보소당인보』와 국립민속박물관의 『보소당인존』에 실린 동일한 발문에 의거하면, “태조太祖 이후 여러 임금이 사용하던 인장들을 헌종대에 조두순과 신위가 모아 만든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이 인존에 실린 대개의 인장들은 신위와 같은 문인들의 도움을 받아 헌종대에 수집한 것이 많아 보인다. 『보소당인존』에는 중국 고대의 인장 ‘자손보지子孫保之[한漢나라의 옥인玉印]’에서부터 조선후기의 강세황, 성해응, 정약용, 김정희, 권돈인 등 문인들의 사인私印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古 2400-4)



   신위의 인장으로는 ‘석묵서루石墨書樓’, ‘소재묵연蘇齋墨緣’, ‘소재蘇齋’, ‘묵연당墨緣堂’ 등이 실려 있다. 가장 특이하여 눈에 드는 것은 고전의 옛 문구나 시구를 옮겨 만든 이른바 ‘사구인詞句印’들이다. 사구인 가운데 <인담여국人淡如菊>은 디자인의 독특함에 선뜻 눈에 든다. 이 인장은, 앞서 소개한바 신위가 얻었다는 사공도시품 8개 인장 중 하나이다. 또한 사구인들 가운데 가장 크고 특이한 모양새는 도홍경陶弘景 시의 인장이 아닐까 한다. “그저 저 스스로 즐길 뿐이죠, 감히 당신에게 가져다 드릴 수는 없네요.”라며 산중은거의 진정한 즐거움을 표현한 유명한 시구가 휘날리는 잎사귀 위에 잎맥처럼 적혀있으니 재미있다. 해당 인장이 오늘날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 전하고 있는데 자세히 비교해보면 역사박물관의 인장은 후에 새로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보소당인존』에 실린 인영과 거의 일치하는 인장 195개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종 때에 새로 새겨진 것들이다. 헌종 대 인장들과 인보는 화재로 불탔기 때문이다. 
   규장각에 전하는 『조선인보朝鮮印譜』(古 2400-2)는 책의 표지 제목만이 다를 뿐 『보소당인존』을 재편집한 책이다. 신위가 편찬한 『보소당인존』이 이후 조선의 인장문화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한양대 박물관 등지에는 『보소당인존』의 인영으로 만든 병풍이 전한다. 10폭 혹은 12폭의 대형 병풍을 활짝 펼치면 붉은 꽃잎들이 천지에 흩어져 내리는 듯하다. 
   신위는 정육鄭堉이 편찬한 『고금인장급화각인보古今印章及華刻印譜』에 서문을 요청받았다. 이 서문에서 신위는 인장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비록 고아하고 비속한 것들이 섞이는 병통이 없지는 않지만, 금석학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고금古今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신위는 이 서문에서 좋은 인장의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굳셀 것[勁], 모날 것[方], 고풍스러울 것[古], 그리고 어딘가 졸박할 것[拙]. 



미불米芾 서체와 ‘신사神似’


   규장각에 『신자하서첩申紫霞書帖』(古 2410-32)이 소장되어 있다. 아담하게 장황된 앨범식 서화첩이다. 겉장을 펼치면 굵은 매화 등걸의 <묵매墨梅> 한 폭, 이어서 열다섯 면에 걸쳐 송나라 미불의 글이 적혀 있고 “자하임미紫霞臨米[자하가 미불을 임모하다]”라는 글이 나타난다. 다음 장을 또 넘기면 넉 자의 예서 두 폭이 차례로 등장하고, 끝으로 베짱이 한 마리가 앉은 난초의 <묵란墨蘭> 한 폭이 나타나면서 마무리된다. 얼핏 보면, 신위의 소품 회화 두 폭, 신위의 임미불본, 그리고 예서 두 장으로 엮어진 귀중한 서화책이다. ‘신자하서첩’이라는 표제는 그러한 인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신위의 작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화첩 양면 두 폭 그림의 난이나 매화의 붓질에 신위의 필치가 묻어나지 않는다. 그림 화제인 ‘세외선향世外僊香[세상 너머 선계의 향기]’은 붓질이 생삽生澁하고, 관지 ‘청하淸霞[맑은 노을]’는 자하 신위에 의해 사용된 다른 예가 없다. 난초 그림에 쓴 ‘청하사생淸霞寫生[청하가 화조를 베껴 그리다]’의 필치는 서툴러 초라하다. 미불의 글씨를 임모한 15면 또한 초보자의 습작이다. 신위의 어릴 적 습작이라 양보해도, 습작 위에 ‘자하紫霞’나 ‘석묵루인石墨樓印’의 인장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인장의 각법마저 서툴다. 그렇다고 해서 규장각의 『신자하서첩』을 위작이라 밀어둘 일은 아니다. 이 작품은 신위의 ‘전칭작’으로서 나름의 가치를 보유한다. 하나의 위작은 그 작자의 오랜 명성과 많은 진작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서첩을 보면서 우리는 신위의 송나라 미불 글씨체 학습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신위의 서화첩을 소장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구와 문화적 분위기를 엿보게 된다. 

 

『신자하서첩申紫霞書帖』(古 2410-32) 중, 미불 글씨를 임한 15면 중 제15면. ‘자하임미’(자하가 미불을 베끼다)라는 네 글자와 ‘자하’, ‘석묵루인’의 인장이 찍혀있다. 한자 한자 임서한 붓질이 서툴고 인장의 각법은 노련하지 못하다.



   신위는 이 서화첩에서와 같이 수묵화 소품을 많이 그렸으며 그림에서 세밀함을 구하지 않았다. 신위는 “신사神似[정신을 닮게 그리다]는 스승으로 삼되, 형사形似[형태를 닮게 그리다]는 스승으로 삼지 않노라”고 하였고, “어찌 일일이 묘사할까. 구성과 설색은 나 자신을 따르리.”라고 하였다. 대상과 자신의 내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림을 구성하고 색도 베풀겠노라는 뜻이며, 대상의 외형적 모습과 색상을 베껴 그리느라 공력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회화이론은 북송대 소동파의 문인화론에서 지향했던 경지이다. 신위는 명나라의 문인화가 문징명文徵明의 그림을 보면서, “사기士氣와 원기院氣가 여기서 나뉜다.”고 감탄했다. 문인의 그림은 선비의 기운을 담아야지 전문적 화원화가의 솜씨를 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문자文字와 문학정신을 탐구한 문인의 입지에서 보는 그림의 가치였다. 
   이러한 신위의 태도는 곧장 김정희로 계승되었다. 진경산수화나 풍속화가 거부되는 19세기의 회화미학, 즉 문자文字의 기운이 넘치는 조형의 세계를 추구하는 회화예술의 등장은 신위의 예술론에서 탄탄하게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위가 보여준 시서화의 세계에 대하여 중국 원나라의 예찬倪瓚이나 명나라의 심주沈周가 아니라면 넘볼 수 없다는 평가가 있다. 어안이 벙벙해질 과찬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조선후기 예술사에서의 역할로 논하자면 그럴 만도 하다. 



자하연과 신위상


   규장각을 나서서 다시 자하연에 올라본다. 작은 동상으로 만들어진 자하선생 신위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비詩碑에 곁들어진 장식상이라지만, 지성의 전당 안에 그것도 최고 수준의 대학교 안에 인물상을 세운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라, 자하동의 인연으로 서울대학교 캠퍼스 중심에 동상으로 선 신위의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신위라는 인물이 그만하니 이색적인 것은 좋은데, 근대기 영웅상을 세우는 동상의 틀에 미니사이즈로 만들어진 예술가상이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부조화가 아무래도 문제이다. 서울대학교와 신위의 사이가 아직 서툴고 어색한 관계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신위 동상을 볼 때마다 드는 나의 생각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 중 누군가 신위 선생을 친숙하게 사귄 다음, 이왕이면 규장각 속 신위 선생과도 여러 번 만나본 다음 새로운 감각의 조각 작품을 다시 만들어보면 어떨까. 

 

서울대학교 자하연의 시비詩碑와 신위 동상.

 


참고자료

 


『보소당인존』 소재 신위의 ‘사구인詞印’ 중 일부.

‘인담여국人淡如菊’, ‘서피최성묵미농

書被催成墨未濃’


 


『보소당인존』 소재 중국고대인장 ‘자손보지子孫保之’


 


『보소당인존』 소재 도홍경 시구의 사구인. 

“그저 저 스스로 즐길 뿐이죠 당신에게 가져다 

드릴 수는 없네요[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도홍경 시구의 사구인. 시립역사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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