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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과 남공철

 

 

안순태 (서울대학교 기초연구원)


 

임금의 집안사람

 

아름다운 용모, 쇳소리 나는 목소리에 힘이 있으면서도 예스러운 필체를 구사하니 필시 신하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를 것이요, 나이는 상수上壽를 누릴 것이다.


 

남유용南有容 초상. 1748. 필자 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德壽)-005883-000).

 

 

상법相法에 조예가 있던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김조순金祖淳(1765-1832)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공철의 관상을 두고 한 말이다. 과연 남공철은 64세 되던 해(1823, 순조 23)에 신하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위인 영의정에 올랐고 81세라는 상수上壽를 누렸다. 
   남공철南公轍(1760-1840)은 스물다섯에 처음 관직에 나아가 일흔넷에 영의정을 사직할 때까지 근 50년 간 관직 생활을 했다. 몇 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부분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며, 정조조에서 순조조로 넘어가는 정치적 혼란기에도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나 유한준俞漢雋(1732-1811)과 같은 당대 문장가들은 물론 이덕무李德懋나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과 같은 서얼 문인들, 최북崔北이나 이단전李亶佃 등의 여항인 등과 폭넓게 교유하기도 했다. 남공철이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하며 폭넓은 교유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 배경과 모나지 않은 그의 성격 덕분이었다. 
   남공철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의령남문宜寧南門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 경화세족이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교유 및 혼인 관계 등을 통해 입지를 굳히며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하여 권세를 행하던 가문이다. 남공철의 고조부는 예문관 제학을 지낸 남용익南龍翼(1628-1692)이고, 부친은 홍문관과 예문관 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1698-1773)이다. 특히 남유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사부로, 어린 정조를 무릎에 앉혀두고 글을 익히게 했다. 정조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해 남유용 사후 그의 문집을 간행해 주기도 하고, 사부의 아들 남공철을 여러 차례 불러 그를 집안사람으로 대우하겠노라 했다. 순조가 아직 세자에 책봉되기 전부터 정조는 어린 순조에게 남공철을 잘 따르라 하며 정조 자신은 남공철을 벗처럼 여긴다고도 했다. 정조가 사부의 은덕을 갚는 길로 그 아들 남공철에게 총애를 쏟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규장각 초계문신


   남공철은 1760년(영조 36) 한양의 명례방明禮坊, 즉 지금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25세에 음직蔭職으로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명망 있는 집안에, 부친이 임금의 스승이었으니 그 덕에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는데도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33세 되던 해(1792, 정조 16)에 문과에 급제하고 그 해에 바로 규장각 초계문신에 뽑혔다.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는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선발하여, 규장각이 중심이 되어 그들을 교육시키는 인재 양성 제도였다. 학자 군주였던 정조는 젊은 신하들의 스승으로 자처했고 자신을 보필할 유능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규장각 초계문신 제도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실제로 정조는 매달 초계문신들을 접견하는 행사를 가졌으며 초계문신들에게 직접 학문을 강하기도 하고 시험을 보이고 상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 초계문신들에게는 휴가 때 특별히 말을 내어주도록 하는가 하면, 잡무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주었다. 이렇듯 당시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초계문신은 일반적으로 홍문관 벼슬을 거친, 문재文才 있는 젊은 신하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그런데 남공철은 홍문관 벼슬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전례 없이 곧바로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이제 막 문과에 급제한, 스승의 아들 남공철은 초계문신에까지 뽑히게 되면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남공철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 찬란한 30대를 보냈다. 자신의 인생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시기에 남공철은 규장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규장각 초계문신은 당시 엘리트라면 꼭 거쳐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김조순金祖淳·이상황李相璜·심상규沈象奎 등 나중에 순조조 정국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던 이들 모두 정조조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던 이들이다. 이들은 남공철이 관직 생활을 하며 젊어서부터 가깝게 지냈던 이들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규장각은 남공철이 10대 후반부터 사귀던 벗 이덕무李德懋나 유득공柳得恭 등이 검서관檢書官으로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남공철의 규장각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54세 되던 1813년(순조 13)부터 그 이듬해까지 남공철은 규장각 제학提學으로서 규장각 내각內閣에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교인校印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남공철 외에도 김조순, 김재찬金載瓚, 심상규, 서영보徐榮輔, 이존수李存秀 등 15인이 교인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던 인물들이다. 정조 사후 10여 년이 지나 젊은 시절 규장각을 중심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과, 그것도 초계문신으로 있던 규장각에서 자신을 총애하던 임금의 문집 교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개롭지 않았겠는가. 『동성교여집東省校餘集』은 바로 이때 교인 작업 틈틈이 이들이 지은 시 300여 편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1813년 여름 어느 날, 연꽃이 만개했을 때 흥에 취한 남공철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교인 작업에 참여했던 또 다른 벗들과 시를 짓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교인 작업을 마치게 되는 이듬해까지 300편이 넘게 지은 시가 모이게 된다. 교인 작업이 끝난 1814년(순조 14), 작업에 참여했던 15학사 중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막내 정원용鄭元容에 의해 편찬된 이 『동성교여집』은, 정조 재위 시 촉망받던 초계문신들이 중심이 되어 10여 년 만에 자신들이 모시던 임금의 문집을 교인하던 여가에 이루어진, 여러 모로 감개로운 시집이라 할 수 있다. 

 

『동성교여집東省校餘集』(규장각 청구기호 奎 5226). 

정조正祖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교인校印에 참여한 

15인의 규장각 각신들이 교인 작업의 여가에 지은 시를 모은 책이다.



붓끝으로 문집에 묻은 벗들


   남공철이 근 50년 동안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망 있는 그의 가문 덕분이기도 하지만 모나지 않은 그의 성격도 큰 몫을 했다. 당대에 누구보다 광범위한 교유 관계를 형성했던 남공철은 특히 전傳이나 묘지명墓誌銘과 같은 인물기사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 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것이 기이한 행적으로 유명한 화가 최북崔北에 대한 전傳인 <최칠칠전崔七七傳>이다.    <최칠칠전>에는 화가 최북이 금강산 구룡연에 갔다가 흥에 겨워 술을 마시고는 연못에 뛰어들려 했던 일화, 권세가와 바둑을 두다가 상대방이 한 수 무를 것을 청하자 바둑판을 뒤엎은 이야기 등 최북의 기이한 면모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글 외에도 의기 넘치는 젊은 벗 박남수朴南壽(1758-1787)와 인간적인 면모가 진하게 스며있는 박지원朴趾源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 일확천금을 노리고 은광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한 안명관安命觀(1725-1778)을 통해 허영심을 경계한 글 <동지중추부사안군묘지同知中樞府事安君墓誌> 등도 흥미롭다. 

 

『금릉집金陵集』(奎 1603) 소재 <최칠칠전崔七七傳>. 

기이한 행적을 보인 화가 최북崔北의 전傳이다. 

『금릉집』은 남공철이 손수 제작한 취진자聚珍字로 간행하였다.

 

 

   남공철이 벗들을 위해 써 준 글들을 보면 그가 신분이나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벗들과 사귀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성격이 얼마나 원만했는지도 잘 드러난다. 가령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긴 화가 최북이 남공철의 집에 찾아와 술주정을 하고 방 안의 책들을 마구 뽑는 난동을 부렸는데도 남공철은 최북을 탓하기는커녕 혹 돌아가는 길에 길거리에 쓰러지지나 않았나 걱정하는 대목(<답최북答崔北>),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혈기왕성한 박남수가 술에 취해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나 위인 박지원에게 대들고, 이에 박지원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함께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애쓰는 장면(<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 등에서 남공철의 원만하고 따스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남공철이 그저 사람 좋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남공철의 묘역이 있는 성남 금토동을 찾은 적이 있다. 우연찮게 대대로 그 마을에 살았다는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으로부터 전해들은 에피소드는 남공철의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그분은 ‘남 정승’으로 남공철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공철에 대해 그분이 전한 첫마디는 “대꼬챙이 같은 양반이었다지.”였다. 그분이 전해 준 에피소드는 이렇다. 후사後嗣가 없던 남공철은 지구芝耈를 양자로 들였는데, 어느 날 아들이 건넌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공철이 그 사실을 눈치 채고는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방자하게 행동할 수 있느냐!”라고 꾸짖었다 한다. 이후 남공철에 대해 이모저모를 더 알아가면서 그가 ‘대꼬챙이’ 같은 인물이었음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실록에서도 “여러 차례 공거貢擧를 맡았으나 뇌물이 행해지지 않았다.”고 전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면서 뿐만 아니라 이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인사권을 행할 때에도 남공철에게는 뇌물이나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즉에 그에게 그런 것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사이동이 있게 되면 이조판서의 집에는 으레 청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남공철의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김조순이, “이조판서의 집에선 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남공철이 벗들을 위해 써 준 흥미로운 글들은 대부분 20대 내지 30대의 젊은 시절에 지은 것들이다. 이는 40대 이후 관직이 높아지면서 글 짓는 일에 전념할 시간적 여유가 줄어든 결과다. 위의 재기 발랄한 글들은 대부분 그의 문집인 「금릉집金陵集」에 실려 있다. ‘금릉金陵’은 바로 남공철의 호號다. 남공철은 글씨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러한 관심이 활자에까지 이어져 손수 ‘취진자聚珍字’를 만들어 56세 되던 해인 1815년(순조 15)에 스스로의 문집을 처음 간행하기에 이른다. 그 문집이 바로 「금릉집」 이다.    남공철은 모두 네 차례 자신의 문집을 간행했다. 56세에 간행한 「금릉고」, 63세에 간행한 「영옹속고潁翁續藁」 66세 이후에 간행한 「영옹재속고潁翁再續藁」, 75세에 간행한 「귀은당집歸恩堂集」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분량이 가장 방대한 것은 처음 펴낸 「금릉집」이다. 어린 시절부터 56세까지의 글들을 가급적 많이 모아 24권 12책으로 간행했다. 「영옹속고」(5권 2책)와 「영옹재속고」(3권 1책)는 56세 이후에 지은 글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모은 글들의 기간으로 보나 문집의 규모로 보나 56세 이후 펴낸 문집들은 「금릉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규모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금릉집」에 수록된 글들이 훨씬 흥미롭다. 남공철은 기이한 벗들에 대한 글들을 주로 2, 30대에 많이 썼으며 40대 이후에는 관직이 높아지면서 주로 공적인 글들을 많이 썼다. 



은둔의 마을 둔촌遁村


   남공철은 74세에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이때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전별연을 열어 주었는데, 다음은 이때 그가 지은 시 <임금님의 은혜로 벼슬에서 물러나 쉬게 되어 기뻐서 짓다[蒙恩休致喜而有賦]>(「귀은당집」 권1)다.

 

 

산속에서 한가로이 노닐 계획 마음속에 두었더니 

십 년을 경영하여 비로소 이루게 되었네. 

어려운 때 용기 내어 물러나는 게 부끄럽지만 

흰머리로 물러나 눕는 것도 임금님 은혜라네. 

優游林壑風心存               十載經營始踐言 

縱愧急流能勇退               白頭歸臥亦君恩 

 

 

 임학林壑에서 한가로이 노닐 뜻을 품고 10년 전부터 준비를 하였다고 했지만, 사실 남공철이 귀거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남공철의 귀거래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남공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송대宋代의 문인 구양수歐陽修다. 

   남공철은 어려서부터 구양수의 시문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양수의 삶의 궤적에까지 흠모의 뜻을 보냈다. 구양수는 44세에 귀거래를 준비하기 시작하여 64세에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남공철 또한 구양수의 귀거래를 본받아 40세경부터 물러나 쉴 곳을 경영한다. 그곳이 바로 둔촌遁村, 즉 지금의 성남시 금토동이다. 남공철은 이곳에 우사영정又思潁亭과 옥경산장玉磬山莊을 짓고 틈이 나는 대로 찾아가 자신이 물러나 쉴 곳을 경영한다. 
   정자를 짓고 ‘우사영정’이라 편액한 것은 그가 평생 흠모하던 구양수가 44세부터 영수潁水로 귀거래하고자 한 것과 관계가 있다. 결국 정자와 산장을 마련해 두고 30년 넘게 기다려온 귀거래를 실현하게 된 기쁨을 위의 시와 같이 읊은 것이다. 남공철은 그렇게 평생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을 걷다가 무사히 귀거래를 이루게 된 것이 모두 임금의 은혜라는 뜻에서 자신의 당호堂號를 ‘귀은歸恩’이라 하고 그동안 간행했던 자신의 시문들 가운데 핵심적인 것들을 간략히 뽑고 노년에 이룬 시문들을 추가해 치사致仕한 이듬해에 「귀은당집歸恩堂集」 을 간행한다.
   이 「귀은당집」 (10권 5책) 역시 미려한 취진자로 간행하였는데, 문집을 간행할 때마다 남공철 자신이 직접 시문을 가려 뽑고 활자까지 제작하였으니 남공철의 문집 간행은 그의 활자에 대한 관심과 문예취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귀은당집歸恩堂集』(奎 5286) 자서自敍. 남공철의 필체다. 

남공철은 관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시문의 정수를 가려 1834년에 『귀은당집』을 간행했다.



문체반정의 소용돌이에서


   참신하고 재기 발랄하던 젊은 시절 남공철의 글들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이 이른바 정조의 ‘문체반정’이다. 이 문체반정 사건의 중심에 남공철이 있었다. 
   1792년(정조 16) 10월, 정조는 일대 문체 개혁을 단행한다. 당시 젊은 신하들 사이에서는 고동서화古董書畫 취미와 소품체小品體 산문이 유행하고 있었다. 고동서화 취미란 골동품이나 글씨, 그림 등을 감상하고 품평하고 수장하는 취미다. 소품체 산문은 패관소품稗官小品이라고도 하는데 그동안 주류로 여겨지던 정통 고문과는 달리 소설과 같은 기이한 이야기나 일상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가벼운 글이다. 정조는 바로 이 고동서화 취미와 소품체 산문을 문제 삼았고 시범 케이스로 남공철을 처벌했다. 그의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떼게 하고 반성문을 지어 올리게 하여 공개했다. 
   남공철이 누구인가. 정조 자신의 스승 남유용의 아들이고 마침 문체반정을 단행하던 그해에 문과文科에도 급제했으며 전례 없이 홍문관 벼슬을 거치지 않고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누가 보아도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정조는 남공철을 단죄함으로써 “이렇게 전도유망한 젊은 신하라도 문체가 바르지 못하면 처벌 받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려 했다. 그런데 속사정을 알고 보면 남공철은 그야말로 잘못 걸려든 케이스다. 
   물론 남공철이 고동서화 취미와 소품문을 즐겼던 것은 사실이다. 남공철이 귀거래를 계획하면서 광주廣州 둔촌遁村에 마련한 우사영정又思潁亭에는 고서 3천 권과 금석 유문 수십 종, 마시지도 않는 술, 타지도 않는 거문고, 두지도 않는 바둑판이 있었다. 마시지도 않는 술이나 타지도 않는 거문고, 두지도 않는 바둑판을 둔 것은 순전히 아취雅趣, 즉 고아古雅한 흥취를 위해서다. 취미가 대체로 그러한 편이긴 하지만 고동서화 취미는 특히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취미였다. 하지만 이러한 취미를 즐기던 것은 남공철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의 유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공철이 처벌받기 전에도 역시 전도유망한 젊은 신하였던 김조순이나 이상황李相璜 등이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적발된 일이 있고, 김조순이나 심상규와 같은 초계문신들은 대부분 고동서화 취미에 푹 빠져 있었다. 정조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고동서화 취미와 소품체가 대단한 악행을 일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조는 어째서 그걸 문제 삼았을까? 성리학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신하들도 자신처럼 조선을 이상적 유교 국가로 건설하는 데 힘써주길 바랐다. 그런데 고동서화 취미는 다분히 탈속적脫俗的인 분위기에서 향유되는 것이었다. 젊은 신하들 상당수가 현실의 번다함이 개입할 여지없이 고요한 경지에서 향香을 사르고 바둑을 두거나 비현실적인 소설을 읽고 연못과 정원을 조성하여 그것들을 가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그들은 고래古來의 고문古文이 추구하던 인의仁義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혹은 감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의 소품문을 애호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고동서화 취미와 소품문을 금하도록 엄단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처분의 시범 케이스로 남공철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문체반정은 남공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의 일은 남공철 자신에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남공철은 ??귀은당집歸恩堂集??에 자신의 행적을 세세히 정리한 「의양자연보宜陽子年譜」에 젊은 시절 겪었던, 잊을 수 없는 그 사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문체반정을 계기로 남공철의 문장은 자못 고문古文으로 기운다. 몇 년 뒤에는 자신을 질책하던 정조로부터 문장으로 칭찬을 듣기까지 한다. 겉으로 보기에 정조가 의도했던 대로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문화의 컨트롤 타워가 사라지고 문풍文風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순조가 등극하고 나서 정국은 문풍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을 겪는다. 그 와중에 남공철과 젊은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김조순金祖淳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남공철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벼슬이 높아지고 처리해야 할 공무가 무거워지면서 그는 젊은 시절에 지었던 참신하고 생기발랄한 글을 더는 내놓지 못했다. 



무상하기에 아름다웠던 삶


   명문가 태생으로 용모도 빼어났으며 수많은 벗들과 교유하고 성인이 된 이후 거의 평생을 관직 생활을 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천수까지 누렸으니 남공철의 삶은 과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하다. 
   남공철의 묘는 그가 인생 중반에 점쳐 두고 귀거래를 꿈꾸었던 둔촌遁村,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에 있다. 그는 모친의 묘 바로 아래에 묻혀 있는데 묘역에서 단연 눈에 띄는 비석이 있다. 바로 남공철 자신이 자기 삶에 대해 지은 자갈명自碣銘을 새긴 비석이다. 
   2001년에 내가 처음 그 묘역을 찾았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었다. 이곳이 남공철의 묘역임을 알아차릴 만한 어떠한 표식도 없었다. 그저 촌로村老가 가르쳐 준 방향을 따라 산에 올라 비석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보고서야 그것이 남공철의 묘임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남공철은 자식이 없어 지구芝耈를 양자로 들였지만 그마저도 후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형 공보公輔(1721-1748)는 달랐다. 그 자신은 일찍 죽었지만 자손들은 썩 잘되었다. 증손자 구순久淳은 김조순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조선후기의 유명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남병철南秉哲(1817-1863)·남병길南秉吉(1820-1869) 형제다. 조선 말엽에 이르기까지 그의 집안은 명문으로 손색이 없었다. 

 

남공철 묘역.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산자락 모친의 묘 아래에 묻혀 있다. 

그가 직접 쓴 자신의 묘갈명(墓碣銘)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조선후기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른 인물의 묘역이 200년도 채 안 지난 지금 이렇게 잡풀이 무성하고 초라해질 수가 있는 것일까. 너무나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에 당시 문화재청에 진정서를 보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내 진정서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둔촌 초입부터 대단한 관광지인 듯 남공철 묘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내걸렸고 남공철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까지 설치되었다. 묘역에도 이러저러한 안내판이 들어서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전혀 뿌듯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서를 낸 것을 꽤 후회하고 있었다. 
   남공철은 자신이 죽은 후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혀질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일반적으로 문집은 작자의 사후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간행되기 마련이었지만 남공철은 생전에 스스로의 문집을 여러 차례 스스로 간행했다. 아무도 자신의 문집을 제대로 돌보아 간행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고 잊혀지는 게 두려웠던 것일까, 혹은 벗들에 대한 기억을 적은 글들이 시간 속에 묻히는 게 안타까웠던 것일까. 
   남공철의 삶을 반추해 보고 그의 문집을 들여다볼 때마다 이런저런 의문이 든다. 삶의 덧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게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삶과 자족적인 삶,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근래에 내린 나의 답은 이렇다. 둘 중 하나가 정답일 수는 없다는 답. 인간은 땅에 두 발을 디딘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걷는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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