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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소장 세계지도 읽기

 

 

오상혁 (제주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고지도는 과거에 존재했던 세계와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각자료이다. 고지도에는 당시의 지리적 지식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예술성 등이 반영되어 있고, 더 나아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과 관념, 종교적 믿음 등도 그 속에 담겨져 있다. 또한 고지도는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되며 지역 간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국내 최대의 고지도 소장처이다. 규장각 소장 고지도는 대부분 유일본으로서 정교한 양식과 뛰어난 회화성이 특징적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약 220여 종, 1,100여 책(첩), 6,000여 매(면)에 달하는 고지도가 독립된 형태로 전한다. 대부분이 채색필사본으로 되어 있고 목판본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제작 시기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있으며,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것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도 포함되어 있다. 유형별로는 세계지도世界地圖 24종, 전도全圖 53종, 도별지도道別地圖 20종, 군현지도郡縣地圖 53종, 외국지도外國地圖 32종, 관방지도關防地圖 13종, 기타 26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지도의 여러 유형 가운데 세계지도는 당대인들의 세계관과 문화교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에 따라 세계를 평평한 사각형의 형태로 묘사하였다. 조선에서도 천원지방의 관념에 따라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것은 1402년에 제작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 지도의 후대 사본은 4건이 전해지는데 모두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에는 일본 류코쿠대학에 소장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사본이 있는데, 작고하신 이찬 교수가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모사본(假 108)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말처럼 하나로 어우러진 땅混一疆理, 곧 세계를 그린 것으로 각국의 역대 도읍지를 같이 그린 지도이다. 지도에는 중앙에 중국이 포진하고 있고 동쪽으로 조선, 남쪽 바다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에는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세계지도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려진 모습이 객관적 실재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세계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Mappa Mundi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다소 왜곡된 형상을 띠고는 있으나 당시의 세계지도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을 온전하게 표현한 최초의 지도로 인정되고 있다.
   지도 하단에 수록된 권근의 지문誌文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두 장의 지도 즉,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기초로 하고 최신의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결합, 편집하여 만든 세계지도이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원나라 때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넓은 사라센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기초 자료의 확보와 성지순례・교역 등의 필요에서 지리학과 지도학이 발달하였다. 지도학은 로마시대의 선진적인 톨레미 지도학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칼리프의 후원에 의해 톨레미의 저서들이 번역되었다. 알 이드리시al-Idrish 같은 학자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을 기초로 원형의 세계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진적인 이슬람 지도학은 동서문화 교류에 의해 중국사회로 전파되었고, 중국에서 다시 이택민과 같은 학자에 의해 중국식 지도로 편집・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수록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습은 중국을 거쳐 들여온 이슬람 지도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에 그려진 나일강의 모습과 지명들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세계관은 서로 다르다. 이슬람 지도학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도학을 계승한 것으로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천원지방의 천지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부의 이슬람 지도에서 보이는 경위선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다. 지도의 형태도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아울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여전히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중국이고 조선은 중국 문화를 계승한 소중화小中華로 표상된다. 다만 16세기 이후 나타나는 경직된 대외인식과 달리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도에서도 반영되어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까지 자세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세계지도로 『화동고지도華東古地圖』를 들 수 있다. 인촌기념관 소장의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와 동일 계열의 사본이다. 지도 하단 범례의 ‘가정오년嘉靖五年’(1526)이라는 연대표시가 있고, 경상도 좌수영이 울산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526년에서 153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대표적인 세계지도인 『화동고지도華東古地圖』(古軸 4709-114).


   『화동고지도』는 1402년에 제작된『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는 다르게 아프리카・유럽・아라비아 등의 지역은 그려져 있지 않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만 표현하고 있다.『화동고지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16세기 초반의 양자기楊子器의 지도를 저본으로 삼고 최신의 조선지도를 추가하여 편집・제작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뤼순박물관旅順博物館에 소장된 양자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지도의 형태나 내용이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양자기 지도의 하단에 있는 명대의 위소명衛所名, 양자기의 발문과 범례는『화동고지도』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양자기의 지도에 없는 황하의 유로 변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황해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지도에도 황하와 장강長江의 유로를 상세하게 그렸는데 지도 여백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양자기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 미세한 차이가 나타난다. 황하의 북쪽 분류에서 차이가 뚜렷하고, 만리장성의 표시에서도 차이를 볼 수 있다. 양자기의 지도에 그려진 장성은 명대明代의 것이지만 그 경로가 불확실하고 요동반도의 변장邊牆까지 장성에 포함되어 있다. 반면『화동고지도』는 산해관山海關에서 난주蘭州까지 정확한 경로를 따르고 있고 난주에서 가욕관嘉峪關까지의 경로도 현대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그 밖에 산동반도의 윤곽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바다에 그려진 섬나라의 모습도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파도의 문양은 양자기의 지도처럼 마름모꼴의 정형화된 형태를 띠고 있으나 표현의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화동고지도』가 양자기 지도를 저본으로 제작했지만 최신의 정보를 추가하여 수정 제작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반도 부분은 양자기의 원도에는 뭉툭한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지만『화동고지도』에서는 최신의 조선 전도를 활용하여 그린 점이 특징적이다. 산지는 연맥으로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낙동강 동쪽의 낙동정맥이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주요 하천이 그려져 있고 군현명은 직사각형 내부에 표기되어 있다. 군현명 이외의 다른 인문적 요소는 보이지 않아 소략한 느낌을 준다. 1402년의『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 지도에 비해서는 수록된 정보의 양이 적다. 
   『화동고지도』는 16세기 조선의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도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가치가 있다. 16세기 이전 조선의 세계지도가 대부분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화동고지도』는 국내에 소장된 세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에 해당한다.『화동고지도』에서는 이전 시기『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지리적 세계가 크게 축소되었다. 교류가 거의 없었던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아라비아까지도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중국 전통의 직방세계로 회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주자성리학이 사회 운영의 원리로 정착됨에 따라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문화적 중화관인 화이관華夷觀이 지배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중화中華인 중국과 소중화小中華인 조선 이외에는 오랑캐인 이夷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세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곳은 중국과 조선 정도이며 그 주변의 나머지 지역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화동고지도』는 바로 이러한 세계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유교적 기준에 입각하여 의미 있는 지역을 선택적으로 그려냈던 대표적인 보기이다. 
   『화동고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상은 중국과 조선 및 주변 조공국에 한정되어 있지만 수록된 내용은 최신의 것들이다. 1526년에 양자기의 지도를 입수하여 바로 조선에서 다시 편집・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도가 당대 최신의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지명도 이전 시기의『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명대의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계망의 표시도 비교적 자세한데 본류와 지류의 구분도 가능하다. 특히 황하 유로의 변천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점은 최신의 정보를 지도에 반영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의 안정적인 지배가 계속되던 조선사회는 17세기를 거치면서부터 북경의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주로 북경에 거주하던 서양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의 천문・지리・역법 등의 서학서와 마테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의『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페르비스트[南懷仁, Ferdinand Verbiest]의『곤여전도坤輿全圖』와 같은 한역세계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서구식 세계지도는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까지 성리학적 화이론에 매몰되어 있던 지식인들에게 5대주로 구성된 세계지도는 자신의 세계관과는 합치될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지구설을 토대로 경위선이 그려진 지도는 천원지방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를 통해 점차 중국과 주변의 조공국 이외에도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 (『여지도輿地圖』(古 4709-78)에 수록).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는 조선에서 제작된 서구식 세계지도로 서양선교사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의『직방외기職方外紀??에 수록된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 지도는『여지도』라는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이외에도 중국지도, 연행로도燕行路圖, 아국총도我國總圖, 팔도도 등 여러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첩은 색채나 필사의 솜씨, 지질 등으로 보았을 때 국가기관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천하도지도」에 그려진 대륙의 윤곽은 「만국전도」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규격은 서로 다른데 「천하도지도」는 세로 50cm, 가로 103cm로『직방외기』에 수록된 「만국전도」보다 훨씬 크다. 또한 「만국전도」가 인쇄본인 데 비해 「천하도지도」는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되었다. 지도의 세부적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천하도지도」가『직방외기』에 수록된 「만국전도」를 직접적인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고 「만국전도」를 필사한 다른 사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천하도지도」는 마테오 리치의『곤여만국전도』와 같이 지도의 중앙경선을 태평양 중앙에 둠으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중앙 부분에 배치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유럽 중심의 구도를 태평양 중심의 구도로 바꾼 것이다. 남방의 대륙은 미지의 땅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오세아니아 대륙을 비롯한 남방이 탐험되기 이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만국전도」에는 없는 백두산과 울릉도의 모습이 보이고, 동해와 서해의 지명이 ‘소동해小東海’와 ‘소서해小西海’ 등으로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서구식 세계지도의 제작은 19세기에도 지속되는데, 1860년에는 1674년 페르비스트가 제작한『곤여전도坤輿全圖』를 조선에서 중간했다. 규장각에는 이 때 제작한『곤여전도』와 지도를 찍어낸 목판이 남아 있다. 목판은 3쪽 양면으로 모두 6면이다. 서반구와 동반구가 들어있는 지도 부분은 완전히 남아있는 반면, 양쪽에 지진, 인물, 강과 하천, 산악 등에 대한 해설 부분의 목판은 빠져있다. 

 

1860년 제작된 해동중간본 『곤여전도坤與全圖』(假 24) 판목 일부.


   페르비스트는 벨기에 출신 선교사로서 1658년 마카오에 상륙하여 포교에 전념하다가 1660년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들어온 아담 샬의 선교 사업을 계승하는 한편 청조淸朝에 임용되어 평생을 천문・역법 등 서양과학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이 사업과 병행하여 1672년에 그림이 같이 수록된 세계지리서인 『곤여도설坤輿圖說』을 편찬해 발간하였고, 1674년에 서구식 세계지도인 『곤여전도』를 판각했다.
   1860년 조선에서 『곤여전도』를 다시 제작한 배경에는 당시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1840년에 이어 1860년의 제2차 중・영 전쟁은 서양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되었는데, 이 사건은 베이징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에 의해 자세히 보고되면서 서양의 위협에 대한 위기의식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0년 『곤여전도』를 제작함으로써 조선은 세계의 지리를 파악하고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곤여전도』는 시점을 적도상에 둔 평사도법으로 동서 양반구를 분리하여 그린 것이다. 이 지도의 동반구에는 아세아[亞細亞, 아시아], 구라파[歐羅巴, 유럽], 이미아[利未亞, 아프리카], 서반구에는 남북아묵리가[南北亞墨利加, 남북아메리카]가 그려져 있고 묵와랍니가[墨瓦蠟泥加, 메가라니카, 미지의 남방대륙]는 양반구에 걸쳐 있다. 자오선은 양반구에 각각 9개씩 그어져 있고, 위선은 적도와 남북회귀선 및 극권極圈이 그어져 있을 뿐이다. 1569년판 메르카토르의 수정 세계지도를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도상의 지명 등은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를 주로 따랐다.
   『곤여전도』는 앞서 저술한 『곤여도설』을 세계지도와 결합한 것으로, 『곤여도설』에는 지도가 수록되어 있지 않아 각 지역을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있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대형 세계지도를 제작하고 지도의 여백에 『곤여도설』에 수록된 내용들을 그대로 주기로 옮겼다. 「지원地圓」, 「지체지원地體之圓」, 「지진地震」, 「해지조석海之潮汐」, 「해수지동海水之動」, 「풍風」, 「기행氣行」, 「강하江河」, 「산악山岳」, 「인물人物」 등과 각 대륙별로도 『곤여도설』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轉載하였다. 또한 『곤여도설』의 뒤편에 수록된 각종 동물이나 선박 그림도 대륙과 해양에 그려놓았다. 이처럼 『곤여전도』에 수록된 내용들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 비해 지문학地文學적인 내용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곤여전도』의 판목은 규격이나 판각의 솜씨로 볼 때 개인적 작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판목이 원래 조선의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분실로 이관되었고, 이 분실이 폐지되자 다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국가적 사업으로 『곤여전도』의 중간이 이뤄졌음은 분명하다. 이 조선판 『곤여전도』는 베이징의 초판과 거의 동일하나 단지 양반구의 직경이 143cm로 원도에 비해 약간 짧고 지명이나 주기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곤여전도』는 1674년 최초로 중국의 베이징에서 제작된 이후 1858년 중국의 광동廣東과 1860년 조선의 한양에서 중간되었다. 그러나 『곤여전도』의 목판은 조선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곤여전도 목판』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 차원에서 귀중한 지도 문화재로 평가된다.

 

1834년 제작된 최한기의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古 4709-15)


   19세기에는 보다 최신의 서구식 세계지도가 제작되는데, 1834년 최한기가 제작한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를 들 수 있다. 『지구전후도』는 중국 장정부莊廷尃의 『지구도』를 목판으로 중간한 동서반구도이다. 「지구후도地球後圖」의 좌측 하단에 간기刊記와 제작자가 표시되어 있는데, 태연재泰然齋는 최한기의 당호堂號이다. 이 지도는 양반구도로 되어 있는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와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주변으로 가면서 경선 간격이 넓어지는 『곤여전도』와 달리 등간격의 경선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의 반구도에서는 볼 수 없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적도와 황도, 남・북회귀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곤여전도』와 달리 오세아니아 대륙이 남극 대륙과 분리되어 이 지역이 탐험된 이후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오세아니아 대륙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의 탐험 결과로, 『지구전후도』에서도 오세아니아 대륙이 비교적 원형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인식과 관련하여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 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민간의 지식인들에게 더 많이 유포될 수 있었다. 특히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에서 제작・보급함으로써 지도의 대중화를 제고하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점은 현존하는 세계지도 가운데 『지구전후도』가 차지하는 수량적 비중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원형 천하도」(『지도地圖』(一簑古 912.5-J561)에 수록)


   서구식 세계지도가 일부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구식 세계지도를 해석하려 하였다. 당시까지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는 중국과 그 주변지역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신대륙・오세아니아 등은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포섭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지역은 가볼 수도 없고 실체의 확인도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였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려 했는데,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괴상하고 황당한 나라들로 이들 지역을 대체시켰던 것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눈이 하나 달린 사람들이 사는 일목국一目國, 몸뚱이가 셋인 사람들이 사는 삼신국三身國 등과 같은 기괴한 나라들로 그들 나름의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것이 원형의 천하도天下圖라 할 수 있다. 
   천하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모습으로 되어 있고 중심에서부터 내대륙, 내해, 외대륙, 외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에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시 실제로 존재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중앙에는 천지의 중심인 곤륜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내해와 외대륙에는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나라들이 표기되어 있다. 가장 외곽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에 각각 부상扶桑과 반격송盤格松이 그려져 있고, 내해의 일본국 밑에는 봉래蓬萊・영주瀛洲・방장方丈 등의 삼신산이 그려져 도교적인 성격도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실재와 상상의 세계가 섞여 있는 천하도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층에 광범하게 유포되었고 현재에도 필사본, 목판본을 통틀어 십여 종 이상이 남아 있어서 단일 지도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일찍부터 조선사회로 유입되어 일부 실학자층을 중심으로 유포되기도 했으나 그 양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서구식 세계지도의 역할을 원형의 천하도가 대신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밀려오는 19세기 후반에도 원형의 천하도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세계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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