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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초상화
 - 군현지도郡縣地圖 -

 

양보경 (성신여대 지리학과)

한국 지도의 보물창고, 규장각과 군현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은 우리나라 지도의 보물창고이다. 규장각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유형의 지도들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의 고지도 유형 중 군현지도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기본 단위였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로서, 군현도郡縣圖 또는 읍지도邑地圖로 불리었다. 흔히 ‘군현’으로 줄여 부르는 부·목·군·현은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읍격邑格이 폐지되어 군郡으로 통일된 이후, 현재 시·군으로 그 골격이 유지되고 있으며, 한국의 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면에서 근간을 이루는 행정단위이자 문화단위이다. 군현 즉 지방을 단위로 만든 군현지도의 발달은 조선 후기의 지도 제작에서 보이는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이다. 군현지도가 발달했다고 표현한 것은 군현지도의 양적 증가, 군현지도 제작과 이용 주체의 다양화, 지도 제작 기법, 지도 형태 등 외형적인 변화 등 여러 면에서 조선 후기 군현지도의 내용과 형태에 발전적인 측면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군현지도도 기준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작 주체에 따라 관찬官撰과 사찬私撰, 표현양식에 따라 회화식과 기호식, 판종에 따라 목판본과 필사본, 축척에 따라 대축척과 소축척 지도, 그리고 축척의 적용 여부에 따라서 구분하는 등 여러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지도의 형태에 따라 단독 군현지도, 군현지도집, 지지地志에 포함된 군현지도의 3종류로 구분하여 조선 후기의 군현지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단독 군현지도

  단독 군현지도란 한 군현의 지도가 한 종으로 독립적으로 제작된 지도를 말한다. 단독 군현지도는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을 그린 도성도都城圖는 대표적인 단독 군현지도이다. 한양으로 천도가 결정된 1394년 9월에 태조 이성계는 권중화權仲和,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을 보내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조정, 시장, 도로 등의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에 권중화 등은 궁궐을 세울 터를 살피고 지도에 그려 바쳤다[『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9월 병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군현지도 특히 단독 군현지도의 제작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세종대에 이어 1453년(단종 1)에도 수양대군[후의 세조]은 정인지에게 조선도朝鮮圖, 팔도각도八道各圖, 주부군현각도州府郡縣各圖 등을 만들도록 지시하였으며, 정인지의 천거로 양성지梁誠之가 이 사업을 관장하였다[『단종실록』 권8, 단종 원년 10월 경자]. 
  1630년에 편찬된 경상도 선산善山의 읍지邑誌인 『일선지一善志』의 첫머리에는 1477년(성종 8)에 김종직金宗直이 선산부사로 재임 시에 쓴 선산지도에 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지輿地에 지도가 있음은 매우 오래되었다. 세계에는 세계지도가 있고, 나라에는 국가의 지도가 있으며, 읍邑에는 읍의 지도가 있는데 읍지도는 수령에게 매우 긴요한 것이다. 대개 산천의 넓이, 인구의 많고 적음, 경지의 증가와 축소,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읍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략) 화공에게 명하여 산천, 마을, 창고, 관청, 역원 등을 한 폭에 그리게 하고, 인구, 경지, 거리 등을 써넣게 하여 벽에 걸게 하니 읍 전체의 봉역封域이 확연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세금을 정하고 거둘 때마다 먼저 그 문적을 보고 다음에 이 지도를 보아 정해 주면 백성들이 조그마한 베풂을 입으며, 강하고 교활한 자들이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군현의 수령이 지역의 통치와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그 지방의 지도를 그려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김종직이 만들었던 지도는 지리지를 만들기 위해 만들었던 지도는 아니다. 화공에게 명하여 그렸으므로 회화식 지도였으며, 여백에는 인구, 경지, 거리 등 주기를 기록한 대형 지도로 추정된다. 지도첩이나 지도책에 포함된 지도들이 책이나 종이의 크기에 제한을 받아 내용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는데 비하여, 이렇게 단독으로 작성된 지도는 한 고을을 매우 상세하게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이 글은 군현지도가 지녔던 중요한 기능을 잘 알려 준다. 군현지도는 행정과 통치의 수단이며 자료로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지역을 구체적이고 공간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으로 군현지도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조선 후기로 이어졌다. 19세기 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군현지도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수령은 취임한 지 10일이 지나거든 노숙한 아전으로서 글을 잘 하는 자 몇 사람을 불러 그 고을의 지도를 작성케 하되 주척周尺 1척의 길이로 10리가 되도록 할 것이다. 가령 그 고을의 남북이 백리요 동서가 80리라면, 지도의 지면의 길이가 10척이요 너비가 8척이 되어야 이에 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읍성邑城을 그리고 다음에 산림, 구릉, 천택川澤과 개천의 형세를 더듬어 묘사하고 다음에 촌리村里를 그린다. 1백 가家가 있는 마을은 △표 1백 개를 그리며(삼각형은 지붕을 본뜬 것이다-원주原註) 10가가 있는 마을은 △표 10개를 그리고 3가가 있는 동네는 △표 3개를 그려 넣는다. 비록 산 아래의 외진 곳에 단지 1가가 있더라도 역시 △표 하나를 그린다. 도로의 구석구석까지도 각기 본래 형태대로 그릴 것이다. 이 지도를 엷은 빛깔로 채색하되 기와집은 푸르게, 초가는 누르게 할 것이며, 산은 초록으로 물은 청색으로 하고 도로는 붉은 벽돌 색을 입힐 것이다. 이를 정당政堂의 벽에 걸어 두고 항상 살펴본다면 온 고을 백성들의 주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을 것이요, 공문서를 띄우거나 사람을 보낼 때에도 그 멀고 가까움과 가고 돌아옴을 모두 손바닥 보듯 할 것이니, 이 지도를 만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의 지면이 널찍해야만 자세히 기재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주척 1척으로써 10리를 삼는 것이다.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호적戶籍」: 다산연구회 역주, 1981, 『譯註 牧民心書 Ⅲ』, 창작과 비평사, 81~82쪽].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한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그 지역의 대형 군현지도를 제작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다산의 이 글은 지방 행정에 군현지도를 활용하는 구체적 방법과 지도 제작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군현지도가 가진 정보 제공의 역할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단독 군현지도 중 다음과 같은 몇 지도들은 조선 후기 군현지도의 특징을 보여 준다.

 

예술성 높은 국토의 초상화, 회화식 군현지도

  단독 군현지도들은 대부분 지역의 모습을 산수화식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회화식 지도 중에는 대형 지도가 많다. 큰 도시나 군사상의 요충지에는 8폭 이상 병풍으로 만든 회화식 지도들도 있었다. 8~10폭 병풍으로 이루어진 여러 종의 평양지도平壤地圖들은 지도를 제작하던 시기의 지역 구조는 물론이고, 당시 화원들의 회화적 역량과 기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지도들은 왕실과 국가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지도가 정보를 제공하면서 아울러 예술품으로 감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이후 단독 군현지도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달과 함께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역으로 화원들에게 맡겨지던 지도 제작의 경험이 축적되어 진경산수화의 발달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대동강에 떠있는 배 모양이라는 풍수적 형국으로 평양을 그린 『기성전도箕城全圖』, 복숭아꽃이 만발한 전주성과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의 신성함을 흰색의 학이 노니는 모습으로 나타낸 『전주지도全州地圖』(그림 1), 함흥의 풍광을 10폭 병풍에 담은 『함흥지도咸興地圖』 등은 그대로 예술품이며, 지역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린 국토의 초상화이다.
  조선 지도의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있는 회화식 지도는 사실상 군현지도 제작의 증가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지도나 도별지도는 수록할 정보의 양이 많고 대상 지역의 규모가 너무 넓어 회화식으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군현지도는 그리는 대상 지역의 규모와 자연적 배경이 회화식 표현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회화식 지도의 장점은 예술성이 높다는 점 외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지역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며, 그 지역의 특성을 잘 반영해 주는 점에 있다. 회화식 지도는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 지역의 구조와 배치를 확연하게 알려 준다. 뿐만 아니라 기호식 지도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역이나 현상의 전체적인 경관과 분위기, 인상까지도 조망해 주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회화식 지도는 누구에게나 쉽게 낯선 고장을 안내해 주는 친근감이 있어 널리 활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생략하고, 강조하고 싶은 내용, 알리고 싶은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회화식 지도, 즉 그림지도는 지도가 일반에 가장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지도 양식이다. 기호에 대한 지식, 설명이 필요 없이 지역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으며, 예술적 감동까지 줄 수 있어 감상을 위한 예술품으로 지도가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 회화식 단독 군현지도 『전주지도』 (古 4709-46).


판각의 아름다움, 목판본 군현지도

  단독 군현지도에서 보이는 또 다른 두드러진 변화는 18세기 중엽 이후 군현지도의 보급과 수요의 증가에 따라 나무판에 지도를 새겨 여러 장을 인쇄해 낼 수 있는 목판지도들이 제작된 점이다. 1709년(숙종 35)에 제작한 제주도 지도인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竝序』(그림 2)는 제주도에서 일찍 대형 목판지도가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현전하는 목판본 군현지도는 대부분 서울의 지도이다. 19세기 이후의 서울의 목판지도로 『수선전도首善全圖』, 『수선총도首善總圖』, 『경조전강京兆全疆』 등 여러 종류가 전하고 있어 목판지도의 제작이 점차 활성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를 비롯하여, 이들 목판지도는 민간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민간 목판지도의 대량 보급은 군현지도를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많았으며, 지도의 사용처가 군사·행정적인 측면을 넘어 일반 사대부층의 삶에도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림 2. 목판본 제주지도, 『탐라지도병서』 (古軸 4709-87).


한글본 군현지도

  군현지도의 보급과 대중화를 반영하는 또 다른 측면이 한글본 군현지도 또는 국한문을 함께 쓴 국한문 병용 군현지도의 편찬이다. 이 지도들은 지도 이용 계층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군현지도가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 준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슈션젼도』는 목판본 『수선전도首善全圖』를 저본으로 하여 필사한 한글본 서울 지도이다. 한자를 모르는 계층도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은 지도의 보급과 기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01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는 전통적인 도성도의 양식과 내용을 따르고 있으나, 한글과 한문을 병용하여 이용자층을 넓힐 수 있도록 제작된 점이 큰 특징이다. 

국한문병용 『한성부지도』. 이 지도는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왕립 아시아학회 기관지인『TRANSACTION』에 기고한 HAN-YANG(SEOUL, 1902)에 처음 소개되었다. 제작자와 원본의 소장처가 분명치 않으나, 궁궐과 산수를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지명에 한자와 한글을 병용하였다(경세원편집부 편, 1998 『한성부지도』, 경세원)


지도 정보의 축적,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

  군현지도집은 전국 또는 도 단위로 소속 군현의 지도를 모아 놓은 지도집이다. 대상 규모에 따라 전국 모든 군현의 지도를 한 종의 지도책이나 지도첩에 수록한 전국 군현지도집과, 도별로 별도의 지도책이나 지도첩을 만들어 도별 지도집으로 이름을 붙인 도별 군현지도집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도의 내용과 제작 방법에 따라 군현지도집을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으니, 일정한 축척을 적용하여 만든 ‘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과, 축척을 균일하게 적용하지 않고 일정한 크기로 각 군현을 그린 ‘비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이 있다. 

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군현지도집은 비교적 일정한 크기의 방안方眼을 바탕에 그림으로써 축척을 적용하여 그린 군현지도 모음집이다. 방안으로 축척을 나타냈으므로 방안지도方眼地圖, 또는 옛 문헌의 표현을 빌어 경위선표식 지도, 선표도線表圖, 방안좌표지도方眼座標地圖 등으로 불러 왔다. 이밖에도 계란界欄, 방격方格, 방괘方罫, 획정劃井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지역의 크기에 따라 군현마다 지도의 크기가 모두 다르며, 지도첩地圖帖 형태로 제작된 것이 많다. 규장각에 소장된, 이른바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로 알려져 있는 도별 군현지도집이 이 유형의 대표적인 지도이다. 이들 지도는 1리 방안 위에 지도를 그렸는데, 방안의 크기는 7.0~8.5mm 내외이다(그림 3). 따라서 방안의 크기로 축척을 나타냈으니, 약 1:53,000~1:64,000의 대축척지도이다. 예를 들어 6첩 71매의 지도로 구성된 『영남지도嶺南地圖』에 포함된 개별 군현지도는 세로 108cm 가로 82~89cm 내외로 도폭의 크기가 일정하다. 그러나 설명 부분을 제외한 지도 부분의 크기는 세로 15cm 가로 23.3cm의 소형지도부터 세로 82.8cm 가로 82.8cm의 「진주지도」까지 모두 다르다. 1747년(영조 23)~1750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들은 조선 후기에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에서 제작, 소장했던 지도로 보인다. 현대의 기본도가 1:50,000 지도임을 생각해 볼 때 비변사지도는 축척이 매우 크고, 내용이 자세한 대축척지도인 셈이다. 이 정도 규모의 지도는 개인이 편찬하기 어려우며, 국가나 관청에서 제작한 대표적인 관찬지도라 할 수 있다.

그림 3. 1리 방안군현지도인 『비변사인방안지도』 「대구大邱」 지역(奎 12154).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지도朝鮮地圖』(7책),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3책),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3책), 『팔도지도八道地圖』(8책) 등은 20리 방안에 그린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의 군현지도는 20리 방안 위에 그렸으므로 1리 방안지도 보다 크기가 작고 내용이 상세하지 않다. 그러나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책자에 그려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만든 정돈된 지도책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그림 4). 1리 방안지도가 주기를 많이 기록하여 지지적인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20리 방안 지도들은 대부분 주기 없이 지도로만 구성되어 있어 매우 정돈되고 세련된 지도책 형태이다. 
  20리 방안 군현지도집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의 모든 군현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그린 점이다. 이 지도들은 20리를 약 4.1cm로 나타내, 모든 군현지도를 같은 축척으로 그림으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써 전국의 각 군현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도 경위선표식 지도가 제작되었다.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靑邱圖』의 「제문題文」과 「범례凡例」에서 최한기崔漢綺와 김정호는 다 같이 정조대의 경위선표식 지도를 언급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전국 군현에 지도를 그려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 지도는 전국을 경선經線 154, 위선緯線 280여개의 경위선표經緯線表로 나눈 지도였다고 하였다. 정조대 경위선표식 지도는 10리 간격의 방안 위에 그려진 10리 방안의 경위선표식 군현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18세기에 1리, 20리, 10리 방안을 가진 경위선표식 지도가 국가 주도로 여러 차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민간에서 이들 지도를 전사한 필사본들이 모사되고 있었음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팔도지도』의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축척형 군현지도집은 한 도폭 안에서, 그리고 모든 군현지도에 비교적 일정한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는 노력을 엿보게 한다. 지도 안에 1리, 혹은 10리, 20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리게 되면, 지역과 지역 간의 거리 파악이나 방위, 위치 등이 더욱 정확하고 정교하게 된다. 축척의 적용, 대축척지도, 전국을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18세기 중후반에 여러 종 제작된 ‘경위선표식 군현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림 4. 20리 방안지도인 『팔도군현지도』 중 경기도 「광주廣州」 지도(古 4709-111).


그림 4. 20리 방안지도인 『조선지도』 중 함경도 「갑산」 지도(奎 16030).


비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

  이 형태의 군현지도집은 군현의 크기에 상관없이 동일한 크기의 책자에 일정한 크기로 전국의 군현을 그려 모아 놓은 지도집이다. 이 유형의 지도집들도 도별로 분책되거나 군현수가 적은 도가 한 책에 묶여져 3~8책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해동지도海東地圖』(그림 5), 『여지도輿地圖』,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여지도』 등의 지도책이 그 예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도집에 수록된 군현지도들은 지도의 크기가 같으므로 군현마다 축척이 상이하다. 또 지도 안에 표시된 현상들의 방위, 거리, 면적, 위치 등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정교하거나 정밀한 지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도책의 크기가 작아서 열람이나 휴대에 편리하다. 이 때문에 관찬으로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많이 전사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형태의 ‘비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들은 전국 모든 군현을 비교적 작은 크기의 지도책에 그림으로써 이용에 매우 편리한 장점을 지니며, 군현지도의 보급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지지적地志的인 내용을 지도의 뒷면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지지를 지도의 부록으로 활용하여, 지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각 지역에 대한 역사·사회·경제적인 내용까지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서 살펴 볼 지지 중에 포함된 군현지도가 지지의 부도라 한다면, ‘비경위선표식 군현지도집’의 군현지도는 지도가 주이고 지지가 지도의 부록 역할을 하도록 만든 지도집이다. 

그림 5. 『해동지도海東地圖』 중 경기도 「광주廣州」 지도 (古大 4709-41).


  국가적인 사업에 의해 전국적으로 다시 군현지도가 제작된 것은 1872년(고종 9)이다.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를 겪은 후 1872년 대원군 집정기에 만들어진 이 지도는 군현지도(그림 6) 외에도 군현에 소속된 군사시설인 진보鎭堡, 목장牧場, 성城의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조선 말기 전국 각 지역의 모습이 담긴 회화식 지도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도별로 수합된 군현지도는 경기도 40장, 충청도 52장, 전라도 84장, 경상도 104장, 강원도 28장, 황해도 42장, 평안도 85장, 함경도 24장으로 총 459장이다. 이 지도들은 크기가 매우 크고, 군현마다 지도 크기가 조금씩 상이하여 일정한 축척이 적용된 정확한 지도는 아니다. 그러나 지도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다. 개항 이후 급격하게 변화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전국 각 군현의 모습을 초상화처럼 보여 주는 지도로서, 지명이나 문화재 등 조선 후기 지역 사회의 이해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 예전처럼 감영이나 중앙에서 화원들이 다시 옮겨 그리거나 정서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각 군현에서 그린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정돈된 상태의 지도는 아니지만, 획일적이 아닌 각 지역의 지도 제작 솜씨와 지방의 정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재미도 있다. 

그림 6. 1872년 지방지도 중 전라도 「광주光州」 지도(奎 10497).


그림 6. 1872년 군현지도, 「동래東萊」 지도(奎 10512 v.2(4)).


지지地志에 포함된 군현지도

  조선 전기에는 국가 주도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전국지리지全國地理志가 편찬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 각 지방에서는 군현 단위의 지리지인 읍지邑誌들이 편찬되어 지방에 관한 자료들이 지역 단위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읍지에 그 지방의 지도를 첨부하여 지지의 내용을 시각적, 공간적으로 도시圖示함으로써 군현지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원본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는 평안도 평양의 읍지인 『평양지平壤志』이다. 이 책에는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그림 7)와 「평양폭원총도平壤幅員總圖」 등 두 폭의 목판지도가 들어 있다. 이 지도는 읍지 속에 포함된 간략한 형태의 지도로서, 독립된 지도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군현지도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17세기 이후 많은 지역에서 읍지의 편찬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읍지도의 첨부도 증가하였다.

그림 7. 『평양지』(古 4790-2) 권두 수록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읍지와 읍지에 첨부된 군현지도의 대표적인 사례가 18세기 중엽에 전국 각 군현에 읍지 편찬을 명하여 완성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여지도서』는 이전의 읍지들이 각 지방별로 편찬됨으로써 일관성과 공시성共時性이 결여된 단점을 극복한 전국 읍지이다. 이 책에는 전국 군현의 읍지 앞에 모두 지도를 수록하였다. 이처럼 18세기 중엽 영조대에는 군현지도의 큰 흐름이 『여지도서』로 정리되어, 이후 지리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읍지에 지도를 첨부하는 현상은 18세기 이후 일반화되어, 19세기에 편찬된 대다수의 읍지들, 예를 들면 1832년경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20책, 1840년대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51책, 고종대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 34책을 비롯한 많은 도별 읍지, 그리고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전국 각 군현의 읍지에도 대부분 군현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지지에 포함된 군현지도들은 기본적으로는 지지의 부도로서의 성격을 지니지만, 단독 군현지도 못지않게 상세한 지도들도 상당수 있다. 지지 중의 군현지도는 단독 군현지도나 군현지도집에 포함된 지도들에 비하여 지역에서 그린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지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거나, 지역 간의 비교 등을 할 때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지도들은 조선 후기의 활발한 지지의 편찬, 보급에 따라 일반인들의 지역에 대한 공간적 파악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 지지를 편찬하면서 만들었던 지도 제작의 경험이 단독 군현지도나 군현지도집에 포함된 지도 제작과 상호 보완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지역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일차적인 가치가 있다. 군현지도는 지방 각지에서 사람의 삶의 구조 변화에 따른 지역의 변모,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중시하였거나 필요로 하였던 내용들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지도이다. 조선 후기의 군현지도에 도로, 나루터[津渡], 장시, 점막店幕, 창고 등을 상세하게 표시한 것은 당시 상업 유통 경제의 증가, 도로 이용의 증가 등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역적인 변화가 없었더라도 지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필요하다고 새롭게 인식한 내용을 지도에 그리거나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의 생각은 지도에 스며들어 있으니, 군현지도는 옛 시대의 우리 국토 각 지역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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