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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총보(類苑叢寶)』

김육이 편찬한 조선의 백과사전

 

 

 

이영주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유원총보類苑叢寶』는 1643년(인조 21) 김육金堉이 편찬한 유서類書이다. 김육은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대에 걸쳐 활동한 문인 학자로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동전을 유통시키는 등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실시하였고 실학 보급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원총보』의 편찬은 분명 그의 폭넓은 지적 관심에 의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왜란과 호란의 전란 이후에 서적이 부족하여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 문인들을 위해 펴낸 책으로 모두 47권이며 다양한 항목에 걸쳐 광범위한 정보를 수록하였다. 

 

 

김육이 편찬한 조선 시대의 백과사전 『유원총보類苑叢寶』 (奎 11475). 

47권 22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른바 ‘유서’란 인간과 관련된 여러 사물을 항목별로 나누고 고금의 서적에서 각 항목에 해당하는 내용을 선별하여 엮은 책으로 오늘날의 백과사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유서는 옛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혹은 요약하여 인용했다는 점에서 편집자가 여러 정보를 자신의 관점에 의해 정리하여 서술한 현대의 백과사전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유서는 한자문화권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서적 양식으로 중국에서 유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많은 양의 유서가 유통되었고, 또한 독자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편찬되었다. 
   기록으로 보아 최초의 유서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칙령으로 편찬된 『황람皇覽』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황제가 보기 위해 만든 책이다. 당시 문학을 좋아하여 저술에 힘을 기울였던 조비는 자신이 손쉽게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 이 책을 편찬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유서는 당대唐代에 들어 더욱 활발하게 간행되었으며, 왕명에 의해 편찬되거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 중 왕명으로 편찬된 것으로는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예문류취藝文類聚』(100권), 송나라의 『태평어람太平御覽』(1,000권), 명나라의 『영락대전永樂大典』(22,877권), 청나라의 『연감류함淵鑒類函』(450권), 『패문운부佩文韻府』(444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10,000권) 등이 있다. 또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는 송나라 축목祝穆의 『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171권), 원나라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韻府群玉』(20권), 명나라 팽대익彭大翼의 『산당사고山堂肆考』(228권)와 유안기兪安期의 『당류함唐類函』(200권)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유서가 간행되어 현재 알려진 것이 800여 종이나 된다. 
   방대한 규모를 가진 유서는 주로 궁중에 비치되었으나, 책의 권수가 적은 소규모 유서나 특정 분야의 정보만을 수록한 전문 유서는 일반 문인들도 소장하였다. 같은 한자문화권에 있으면서 중국과 다양한 방면에서 교류를 하였던 고려와 조선에도 이러한 유서가 유입되었다. 유서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1101년(고려 숙종 6)에 송나라로 사신 간 오연총吳延寵이 얻어온 『태평어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로 명・청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서가 조선으로 유입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중국 측에서 금령禁令을 통해 대외적으로 서적의 유출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러 유서가 유입되었는데. 그중 일반 문인들에게 유용하다고 판단된 『고금사문류취』, 『운부군옥』 등은 조선에서 다시 복각되어 유통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국왕 및 사대부들은 특히 『고금사문류취』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85년(성종 16)에 승정원의 승지들이 성종에게 상소하기를 “『고금사문류취』를 문사文士들이 모두 보고자 하나 권질卷帙이 지극히 많아서 중국에도 많이 없으며, 구입해 온 것이 적고 나라에 간직한 것도 한 질帙에 불과하니, 청컨대 먼저 인쇄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이후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8년 후에 교서관校書館에서 『고금사문류취』를 인간印刊해서 올리니, 90건을 문신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였다. 
   여러 유서가 중국에서 유입되고 그 중 일부는 복각되어 유포되기도 했지만, 수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게다가 대다수가 거질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소장하면서 참고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새로운 유서 편찬이 필요했는데 김육이 쓴 『유원총보』의 서문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수십 년 이래로 전란이 계속해서 일어나, 실어 나르는 소가 땀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서책의 양은 적어지고, 말에 기댄 채 시문을 지을 수 없는 수준으로 선비의 재주가 떨어졌으니, 어찌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자취를 두루 살피는 데는 축목의 『고금사문류취』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으니, 하물며 먼 지방의 선비임에랴!

아아, 내가 어찌 좋아서 이 일을 하였겠는가! 사고四庫의 서책이 전란으로 다 타버리고, 천금千金을 주고 중국에서 사오던 일도 길이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 학술도 피폐해졌는데, 특히 서적의 유실은 그 참담한 상황이 극에 이르렀다. 조정에 있던 방대한 서적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서적들이 모두 불에 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이후 서적의 재출간은 경제적으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방면의 서적을 새로 출간하기보다는 유용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유서의 보급이 시급하였다. 유서가 수많은 서적으로부터 핵심적인 내용만을 골라내어 항목별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소량의 서적으로 다수의 서적을 대체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서 보급을 중국에서의 구입에 의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유서를 간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의 서적을 공식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기회는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사신단을 통하는 것이 유일하였는데, 당시 명・청 정부는 조선의 사신단이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심히 통제하여 사실상 중국에서 유서를 구입할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는 김육 스스로도 체험한 일이다. 그는 1636년(인조 14) 6월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로 출발하여 12월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5월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여정을 일기로 쓴 『조경일록朝京日錄』이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서적구입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11월 6일 

내가 역관을 시켜 제독에게 서책을 좀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더니, 제독이 “사행使行 중에 서책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역관이 없다고 말하니, 제독이 “어찌 한 권의 서책도 없겠는가. 내가 먼저 보았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근사록近思錄』과 『도위집陶韋集』을 보여주었다.


12월 15일 

서책에 관한 일로 주사主事에게 공문을 올렸더니, 주사가 “이것은 모두 상주문을 올려 이미 정한 일이라서 변경하여 고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4월 10일

제독이 짐꾸러미 조사를 끝내고 “서책은 없는가?”라고 묻기에, “본국에서 가지고 온 『근사록』 등 몇 권뿐이고, 다른 책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유원총보』 권1 천도문天道門. 25개의 대분류 항목이 있으며 

그 아래에 650여개의 소분류 항목이 있다. 

여러 서적에 실린 관련 내용을 인용하고 작은 글씨로 출처를 적어놓았다.

 

 

   당시 사신단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중요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며 사전에 중국의 황제에게 서적 구입목록을 제출하도록 되어있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목록을 검토한 뒤 선별하여 책을 하사하였으며, 사신단 일행이 직접 서적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11월 6일자 일기에서는 김육이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허락을 구하였으나 제독이 이를 무시한 내용이 적혀있고, 12월 15일자 일기에서는 김육이 공식적으로 서적 구입에 관한 일을 제기하였으나 거절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듬해 4월 10일자 일기에서는 귀국할 때 짐꾸러미를 수색당하고 특히 서적에 대해 점검받은 사실을 말하였다. 조선의 사신단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서적을 구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명나라 조정의 통제와 감시로 실현하지 못하였고 이는 청나라가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육은 자신의 힘으로 유서를 편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김육은 어떠한 방식으로 『유원총보』를 편찬하였을까? 그가 쓴 서문을 살펴보자.

 

작년 여름에 내가 일이 한가한 부서府署에 있게 되어 비로소 이 책(『고금사문류취』)을 초록抄錄하면서 번잡스럽고 쓸 데 없는 것들은 빼버리고 그 요지要旨만을 남겼다. 아울러 『예문류취』, 『당류함』, 『천중기天中記』, 『산당사고』, 『운부군옥』 등의 여러 책에서 취하여, 그 표제標題에 따라 더하거나 뺐고 빠진 것은 보충하고 문장을 다듬었다.

 

김육은 당시 많은 문인들이 애용하였던 대표적인 유서인 『고금사문류취』를 기본으로 하였으며, 여타 유서를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우선 그가 주로 참고했다는 『고금사문류취』는 송나라 축목이 편찬한 것과는 다르다. 축목의 책은 전집前集 60권, 후집後集 50권, 속집續集 28권, 별집別集 33권이다. 그 후 원나라 부대용富大用이 신집新集 36권과 외집外集 15권을 보충하였고 또 원나라 축연祝淵이 유집遺集 15권을 보충했으며, 이를 누군가가 모아 합본을 만들었다. 그 유서가 1481년(성종 12)에 명나라 헌종의 하사로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육은 바로 이 책을 참고한 것이다. 

 

 

 

표. 『고금사문류취』와 『유원총보』의 대분류 항목 비교 

고금
사문
류취

전집

천도天道, 천시天時, 지리地理, 제계帝系, 인도人道, 사진仕進, 퇴은退隱, 선불仙佛, 민업民業, 기예技藝, 예술藝術, 악생樂生, 영질嬰疾, 신귀神鬼, 상사喪事

후집

인륜人倫, 창기娼妓, 노복奴僕, 초모肖貌, 곡채榖菜, 임목林木, 죽순竹笋, 과실菓實, 화훼花卉, 인충鱗蟲, 개충介蟲, 모충毛蟲, 우충羽蟲, 충치蟲豸

속집

거처居處, 향다香茶, 연음燕飮, 식물食物, 등화燈火, 조복朝服, 관리冠履, 의금衣衾, 악기樂器, 가무歌舞, 새인璽印, 진보珍寳, 기용器用

별집

유학儒學, 문장文章, 서법書法, 문방사우文房四友, 예악禮樂, 성행性行, 사진仕進, 인사人事

신집

삼사三師, 삼공三公, 성관省官, 도성都省, 성속省屬, 육조六曹, 추밀원樞密院, 어사대御史臺, 제원諸院, 제시諸寺, 제감諸監, 전사殿司, 제고국諸庫局

외집

동궁관東宮官, 목친부睦親府, 왕부관王府官, 절사節使, 통군사統軍司, 제사사諸使司, 제제거諸提擧, 노관路官, 현관縣官

유집

새로운 분류를 만들지 않고 기존 항목의 내용을 보충

유원총보

천도天道, 천시天時, 지도地道, 제왕帝王, 관직官職,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인륜人倫, 인도人道, 인사人事, 문학文學, 필묵筆墨, 새인璽印, 진보珍寶, 포백布帛, 기용器用, 음식飮食, 관복冠服, 미곡米穀, 초목草木, 조수鳥獸, 충어蟲魚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유원총보』는 대체로 『고금사문류취』의 분류 항목을 채용하면서도 일부는 삭제하거나 세분하였다. 이러한 분류 항목의 통합과 재배치를 통해 『유원총보』는 당시 조선 문인들에게 특히 필요했던 실제적인 정보를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금사문류취』는 책 제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각 항목과 관련된 사事와 문文을 함께 수록하였는데, 『유원총보』는 유명 작가의 문학작품에 해당하는 문文은 수록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보다 실질적이고 압축적인 정보 수록의 효과를 꾀하였다. 

   그리고 김육은 『고금사문류취』 이외의 다른 유명 유서에서 각 조목에 필요한 사항들을 보충, 보완함으로써 기존의 중국 유서보다 훨씬 더 종합적이고 완성도 높은 유서를 편찬하였다. 비록 『유원총보』는 47권밖에 되지 않아 수백 권에 달하는 중국의 대형 유서에 비하면 양적으로는 적지만 그 내용에서는 훨씬 더 집약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참고한 중국 유서의 내용을 초록함에 있어서 “번잡스럽고 쓸데없는 것들은 빼버리고 그 요지만을 남긴” 것에서도 연유한다. 실례를 하나 보자.



시장에서 나무를 옮기다[徙木於市] 

진나라 효왕이 공손앙으로 하여금 법령을 만들게 하고는 법령이 이미 만들어지자 사람들이 믿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수도의 시장 남쪽 문에 3장 높이의 나무를 세워두고는 백성을 모아놓고서 북문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자가 있으면 10금을 주게 하였다[秦孝公使公孫鞅定法令, 法令旣具, 恐人不信. 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 與十金].

나무를 옮기다[徙木] 

진나라 공손앙이 법령을 만들고 나서 사람들이 믿지 못할까를 염려하였다. 시장의 남쪽 문에 3장 높이의 나무를 세워두고는 북문으로 옮겨놓는 자에게 10금을 주게 하였다[秦公孫鞅, 定法令, 恐人不信, 乃立三丈之木於市南門, 徙置北門者, 與十金].

 

 

 앞의 문장은 『고금사문류취 속집』 권3 거처부居處部 관시關市 조의 것이고 뒤의 문장은 『유원총보』 권7 지도문地道門 관시關市 조의 것이다. 우선 『고금사문류취』의 거처부에 있던 조목을 『유원총보』에서는 대체로 지리에 관한 분류 항목인 지도문으로 통합함으로써 대분류의 항목수를 줄였다. 그리고 내용을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삭제했다. 『고금사문류취』의 원문 중 필자가 밑줄 친 부분이 『유원총보』에서 삭제된 부분으로 42자를 29자로 30%가량을 줄였다. 이러한 축약 과정이 의미 파악에 있어 약간의 장애나 오해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이 고사의 핵심 내용은 전혀 해치지 않았으며, 또한 원래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에 나오는 이 고사에 대해서 일반 문인들은 이미 숙지하고 있기에 오독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각 항목과 관련된 고사를 간단한 제목 아래 요약하여 인용하였다. 본고에서 인용한 <徙木> 항목이 보인다.


 

   위의 『유원총보』와 『고금사문류취』의 두 문장을 보고 혹 『유원총보』가 『고금사문류취』를 단순히 축소하였을 뿐이니, 일종의 표절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는 유서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유서는 궁극적으로 기존의 정보를 정리하여 알려주는 것이지 새로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금사문류취』의 해당 조항을 『사기』 「상군열전」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는데 『고금사문류취』는 『사기』 「상군열전」의 해당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유서 편찬의 목적이 독자들에게 이전의 정보를 간편하게 찾아 시문 창작이나 인간사에 활용하는 데 편의를 주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기존 글을 많이 축약한 『유원총보』가 거의 그대로 옮긴 『고금사문류취』보다 더 이상적인 유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문인의 시각에서 우리나라 문인을 위해 편집된 『유원총보』는 인조 연간 개간開刊된 이후 중간을 거듭한 것으로 보이며 문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대표적인 유서로 인식되었다. 조선 문인들이 『유원총보』를 언급한 기록은 여러 문집에 보이는데, 우선 1712년(숙종 38) 청나라에 파견된 사은부사謝恩副使 윤지인尹趾仁을 수행한 군관軍官 최덕중崔德中이 작성한 연행일기 중 1713년 2월 7일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맑음. 옥하관에 머물렀다. 

황제가 서책을 하사하자 통관이 매우 뽐내어 자랑하니 절로 우스웠다. 그 책을 가져다가 살펴보니, 『전당시全唐詩』가 20갑匣 120권인데 옛 시율詩律이고, 『연감유함淵鑑類函』이 20갑 140권인데 이것은 옛 일을 분류해서 모은 것으로 『유원총보』나 『문헌통고文獻通考』 같은 것이다.

 

 최덕중은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책이 유학 경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와 같은 문학작품이거나 유서와 같은 공구서인 것을 하찮게 보면서 청나라 황제가 내린 책을 자신이 이전에 보아 알고 있던 책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강희제 때 편찬된 방대한 규모의 『연감유함』을 『유원총보』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또 다른 예로 황현黃玹(1855∼1910)이 안중섭安重燮에게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자. 

 

편지를 받고는 서적 모으는 벽이 아직 나태해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사방 책의 세계는 넓어서 안개와 바다처럼 아득하니, 우리가 절약을 아무리 해도 이른바 재력이란 것이 거의 없어 자유자재로 구하기 어려우니 어찌 하겠습니까? 『고금사문류취』나 『유원총보』 같은 거질의 책은 몇 해 전에는 구할 수 있는 곳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으니 마땅히 듣는 대로 서로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편지글은 1883년(고종 20)에 쓰인 것인데, 당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유원총보』가 상당히 많이 유통되었으며, 여전히 수요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대표적인 유서인 『고금사문류취』와 동등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실 공히 대표 유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원총보』 서문 첫머리에서 김육은 “우리 동방은 본디 문헌文獻이 많아 징험徵驗할 수 있는 나라로 칭해졌으며, 또 대대로 중국과 교통交通하여 문장文章의 성대함이 중국과 어깨를 견줄만하였다.”라고 하여 문헌의 양과 문장의 성대함에 있어서 중국에 견줄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김육은 『유원총보』를 편찬함으로써 전란으로 인해 잠시 황폐해진 학문적 기반을 복원하고자 하였으며,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조선 문인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 문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었던 이러한 학문적 문화적 자부심으로 인해 『유원총보』는 조선을 대표하는 유서가 되었으며, 조선 문인들이 아끼고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고금
사문
류취

전집

천도天道, 천시天時, 지리地理, 제계帝系, 인도人道, 사진仕進, 퇴은退隱, 선불仙佛, 민업民業, 기예技藝, 예술藝術, 악생樂生, 영질嬰疾, 신귀神鬼, 상사喪事

후집

인륜人倫, 창기娼妓, 노복奴僕, 초모肖貌, 곡채榖菜, 임목林木, 죽순竹笋, 과실菓實, 화훼花卉, 인충鱗蟲, 개충介蟲, 모충毛蟲, 우충羽蟲, 충치蟲豸

속집

거처居處, 향다香茶, 연음燕飮, 식물食物, 등화燈火, 조복朝服, 관리冠履, 의금衣衾, 악기樂器, 가무歌舞, 새인璽印, 진보珍寳, 기용器用

별집

유학儒學, 문장文章, 서법書法, 문방사우文房四友, 예악禮樂, 성행性行, 사진仕進, 인사人事

신집

삼사三師, 삼공三公, 성관省官, 도성都省, 성속省屬, 육조六曹, 추밀원樞密院, 어사대御史臺, 제원諸院, 제시諸寺, 제감諸監, 전사殿司, 제고국諸庫局

외집

동궁관東宮官, 목친부睦親府, 왕부관王府官, 절사節使, 통군사統軍司, 제사사諸使司, 제제거諸提擧, 노관路官, 현관縣官

유집

새로운 분류를 만들지 않고 기존 항목의 내용을 보충

유원총보

천도天道, 천시天時, 지도地道, 제왕帝王, 관직官職,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인륜人倫, 인도人道, 인사人事, 문학文學, 필묵筆墨, 새인璽印, 진보珍寶, 포백布帛, 기용器用, 음식飮食, 관복冠服, 미곡米穀, 초목草木, 조수鳥獸, 충어蟲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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