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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인석보 
세조의 애착과 집념을 볼 수 있는 책

 

 

 

박진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446년(세종 28) 4월 19일(음력 3월 24일)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가 52세로 승하하였다. 소헌왕후는 세종을 잘 보필하고 아들들을 잘 길러냈으며(장남: 문종, 차남: 세조, 삼남: 안평대군) 내명부를 훌륭히 통솔하여 매우 훌륭한 왕비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종의 소헌왕후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픔이 많았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친정아버지 심온과 작은아버지 심정이 처형당하는 등 친정의 가족들이 큰 화를 당하였다. 1444년에는 친정어머니 안씨와 5남 광평대군, 1445년에는 7남 평원대군을 잇따라 저세상으로 보냈다. 1446년 소헌왕후의 죽음에는 이런 일들이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소헌왕후를 깊이 사랑하고 극진히 예의를 갖추어 대하던 세종으로서는 소헌왕후의 죽음이 매우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죽은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종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일로서 불사佛事, 그 중에서도 특히 전경轉經[불경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양대군에게 ‘석보釋譜[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번역하도록 명했다.   왜 여러 아들들 중에서 수양대군에게 시켰을까?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8남 2녀 중에서도 수양대군은 특히 모친과 각별한 관계였던 듯하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곳도 수양대군의 저택이었다. 병마와 싸우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게 되었을 때 가장 아끼는 아들의 품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헌왕후의 수양대군에 대한 이러한 각별한 애정을 세종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한 일을 수양대군에게 시킨 것이 아닐까?
  수양대군이 이 일을 맡게 된 데에는, 어머니와의 각별한 감정적 관계라는 이유뿐 아니라, 좀 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전경轉經 사업이 한문 불경 그 자체의 간행이 아니라 한문 불전의 번역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 것과도 관련된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기 직전 여러 해 동안 새로운 문자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1443년에 일단 새로운 문자를 완성한 뒤 지난 3년 동안 이와 관련된 여러 사업을 벌여 오던 터였다. 이 새 문자 및 그것이 담고 있는 철학에 대한 해설서인 『훈민정음』을 만들게 했고, 『운회韻會』라는 운서(한자 발음 사전)의 한자 하나하나에 새 문자를 발음기호로 달게 하기도 했으며, 조선 건국의 왕업을 찬미한 책인 『용비어천가』를 짓되 여기에 한글로 노래를 지어 수록하게 하기도 했다. 죽은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경轉經을 하되, 한문 불경을 단순히 그대로 간행하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새로운 문자로 번역을 해서 간행하면 더 뜻 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로 표기하여 책을 만들려면, 불교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새로 만들어진 문자인 한글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했다. 이 일을 맡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는 아마도 당시의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뒤 첫 번째로 추진한 사업이 『운회』라는 운서에 한글로 음을 다는 것이었는데, 이 일을 1444년 음력 2월 16일 집현전의 하급관리들에게 시키면서, 이 일의 감독을 이 세 왕자에게 맡긴 것이다. 왕자들이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일의 감독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작업을 매우 비밀스럽게 추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끔은 아들들에게 자신의 창조물을 자랑 삼아 살짝 보여주었을 법하다. 그것은 추측이지만 아무튼 한글 창제 초기에 신하들보다 먼저 이 세 왕자가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수양대군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석보釋譜’ 번역 작업을 맡게 된 데에는 이런 실무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번역할 대상으로 많은 불전佛典들 중에서 ‘석보釋譜’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인가? 「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를 보면 불교 신자들이 여러 불경을 읽고 석가모니를 존경하나, 정작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자세히 그린 책을 번역하여 간행하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석보釋譜’의 번역·간행은 죽은 아내의 명복을 비는 일도 되고, 자신이 만든 한글의 유용성을 시험해 보는 기회도 되고,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널리 알리는 길도 되니, 일석삼조라 할 만한 일이었다.
  수양대군은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이 명을 받고서 이 임무를 매우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책으로 승우僧佑의 『석가보釋迦譜』와 도선道宣의 『석가씨보釋迦氏譜』가 있는데, 수양대군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그저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책을 대조하여 적절히 취사선택하였다. 게다가 이 두 책 이외의 기타 불전에서도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관련된 내용을 널리 취합하였다. 이렇게 취합한 내용은 (한문 불전으로부터 발췌했으니 당연히) 한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책의 제목은 『석보상절釋譜詳節[석가모니의 일대기 중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어떤 부분은 간략하게 한 것]』이라 하였다. 한문 원문은 싣지 않고 번역문만 실었는데도 총 24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번역 원고는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하였다. 갑인자로 인쇄된 책 중 현재 남아 있는 일부 책을 보면 주묵朱墨으로 정성스럽게 교정校正이 되어 있다. 당시 금속활자로는 많은 부수를 인쇄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은 부수만 인출印出하여 교정校正한 뒤, 많은 부수를 인쇄할 때에는 목판에 새겨 간행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석보상절』도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월인석보』 권1 권두에 실려 있는 「석보상절 서」. 『석보상절』 권1의 권두에도 실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상 사람들이 석가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이 책이 추천追薦[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일]을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석보상절』 전 24권 중 권1은 안타깝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간행된 『월인석보』의 권1이 남아 있는데, 그 권두에는 「훈민정음 어제 서문」, 「석보상절 서」, 「월인석보 서」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실려 있다. 이 중 앞의 둘은 『석보상절』 권1의 권두에도 실려 있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은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의 권두에 실렸던 것인데, 훈민정음 창제 취지를 간략히 천명한 뒤, 훈민정음의 각 글자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것을 『석보상절』의 첫머리에 왜 실었을까? 아마도 한글이 창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문자의 운용 방식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이 책을 읽기 전에 문자를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되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렇게 『석보상절』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널리 알린다는 목적뿐 아니라, 새로 만든 문자를 대량으로 시험 사용해 본다는 목적, 그리고 이 새 문자를 널리 보급한다는 목적까지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어제 서문」.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은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문 원문에 한자음과 구결을 달고 우리말로 번역까지 하였다. 

『석보상절』 권1의 첫머리에도 실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세종에게 바치자, 세종은 수양대군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죽은 어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이 이렇게까지 극진하게 애를 썼으니, 남편인 자기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석보상절』의 내용을 500여 수의 노래로 읊어 그 제목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하나의 달이 수많은 강에 비치듯이, 부처의 공덕이 수많은 중생의 마음에 비친다는 뜻을 담은 노래]』이라 하였다.

  『월인천강지곡』 역시 갑인자로 인쇄하였는데, 상·중·하 3권 중 상권만 남아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이 상권을 보면 매우 흥미롭게 교정되어 있다. “꽃”을 의미하는 당시 단어의 형태는 ‘곶’인데 당시 실제 발음은 ‘곳’처럼 났던 듯하다. 이 단어를 ‘곶’으로 표기할 것인가 ‘곳’으로 표기할 것인가는 현대의 언어학자들도 논란을 벌이는 문제인데, 세종은 전자, 수양대군과 신하들은 후자를 선호했던 듯하다. ‘숲’을 ‘숲’이라고 표기할 것인가, 아니면 소리 나는 대로 ‘숩’이라고 표기할 것인가도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현전본을 보면 ‘곶’으로 되어 있기는 한데, ‘ㅈ’의 수평 획의 먹색이 다른 부분보다 진하다. 즉 애초에는 ‘곳’이라고 인쇄하고서 나중에 수평 획을 도장 찍듯이 추가한 것이다. ‘숲’의 경우에는 ‘숲’이라고 되어 있기는 한데 받침 ‘ㅍ’ 부분에 물로 씻은 듯한 흔적이 있다. 즉 애초에는 ‘숩’이라고 인쇄했다가, 받침 ‘ㅂ’을 물로 씻어 지우고 그 위에 ‘ㅍ’을 도장 찍듯이 찍어 넣은 것이다. 아마도 간행할 책의 원고를 바탕으로 활자를 식자하여 활판을 만들고 인쇄하는 일을 맡은 실무자들은 ‘곳’, ‘숩’이라고 표기한다는 매뉴얼에 따라 작업을 한 듯한데, 이를 받아 본 세종이 노발대발하여 부랴부랴 ‘곶’, ‘숲’으로 수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의 학문적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아무튼 『월인천강지곡』의 편찬과 간행에 세종이 매우 신경을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소헌왕후의 죽음에 대한 아들과 남편의 애도의 뜻을 담은 특별한 책으로서, 이들의 편찬은 감동을 선사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수양대군에게 이 두 책은 정말 뜻 깊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책이고 아버지가 만든 문자를 사용하여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뭔가 마음속에 찜찜한 구석이 있었던 듯하다. 세종의 명을 받아 『석보상절』을 편찬할 때 정말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너무 급하게 작업을 하기도 했고 불교에 대한 지식이 그때는 상대적으로 일천하였기 때문에, 고치고 싶은 부분이 꽤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석보상절』을 대대적으로 손보리라 다짐하고 있었음직하다.
  그러던 중 1457년(세조 3) 9월 20일(음력 9월 2일) 세조의 장남인 세자(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로, 뒤에 다시 덕종德宗으로 추존됨)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조카 단종을 폐위하는 등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거쳐 왕위에까지 오른 세조로서, 아들의 죽음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떠올랐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버지와 내가 힘을 합쳐 편찬했던 그 책들! 요절한 내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책들을 다시 펴내야겠다!” 세조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참에 『석보상절』의 내용도 대대적으로 손보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1459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본한 책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월인천강지곡』의 500여 수의 노래를 내용에 따라 몇 수씩 묶어서 제시하고, 그 뒤에 그 노래들에 내용상 대응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싣는 식으로 편집되었다. 판심제版心題가 ‘월인석보月印釋譜’라고 되어 있어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지은 노래를 아들이 함부로 고칠 수는 없으니 『월인천강지곡』의 노래들은 수정 없이 그대로 전재轉載되었으나(한자와 그 음을 표시하는 한글의 위치만 바뀌었음), 자기가 만든 『석보상절』은 완전히 새로 쓰다시피 수정되었다. 똑같은 문장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월인석보』 권1 권두에 실려 있는 「월인석보 서」. 

어머니 소헌왕후가 죽자 아버지 세종이 자신에게 ‘석보釋譜’의 번역을 명했던 사실, 

이에 따라 『석가보』, 『석가씨보』 등의 책에서 내용을 발췌했다는 것 등을 밝히고 있다.

 

 

『월인석보』 권1의 본문 첫 부분. 권두서명卷頭書名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병기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첫째 칸부터 썼고, 

(위 사진에는 안 나오나) 「석보상절」 부분은 첫 칸을 비워 두고 둘째 칸부터 썼다.


 

  그리고 불교에 대한 세조의 공부가 깊어지고 넓어진 흔적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월인석보』 권11은 『법화경』을 번역한 부분인데, 여덟 왕자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법화경』의 내용과 별로 상관도 없는 팔식八識에 대해, 그리고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해 수십 장에 걸친 자세한 협주夾註가 삽입되었다.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 법장法藏의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등의 여러 불전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서 번역한 것이다. 자기가 어떤 분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서 잘 알고 있으면, 적절한 기회가 오기만 하면(어쩔 때는 별로 적절한 기회가 아닌데도)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팔식八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이 장황한 협주는 세조의 그러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과욕이라면 과욕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세조가 『월인석보』를 만드는 데 얼마나 신경을 쓰고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활자로 인쇄된 것과 달리 『월인석보』는 애초부터 목판에 새겨서 간행되었다. 당시의 활자 인쇄 기술상 많은 책을 찍어 내기 힘들었음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목판본은 그보다 훨씬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 때문에 너무 시간을 끌 수 없어서 비교적 급하게 만들어진 것에 비해, 『월인석보』는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빈다는 취지가 있기는 했지만)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더 공을 들여 만든 것이다. 『석보상절』은 활자본의 특성상 많이 찍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도 매우 적다. 초간본은 권6, 9, 13, 19, 20, 21, 23, 24만 남아 있고, 16세기에 목판으로 복각한 것으로는 권3, 11만이 남아 있다. 그에 비해 『월인석보』는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초간본은 권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3, 25가 남아 있고, 후대의 복각본은 권4, 21, 22도 남아 있다. 후대에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한글 문헌을 간행할 필요가 있으면 『석보상절』보다는 『월인석보』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노력 덕분에 내용이 더 정제되고 향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전본들 중 『월인석보』 권25는 1995년에야 발견되었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에는 『석보상절』 권24에 석가모니가 죽은 뒤의 일들이 서술되어 있어서 이것으로 전편이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석보상절』과 마찬가지로 『월인석보』도 총 24권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월인석보』 권25의 발견으로 그러한 추정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석보상절』은 애초의 추정대로 총 24권으로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인석보』 권 25에는 『석가보釋迦譜』의 내용도 있으나, 『법원주림法苑珠林』 「법복편法服篇」, 『경율이상經律異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석문장복의釋門章服儀』, 『율상감통전律相感通傳』 등에서 승려들이 입는 가사袈裟에 대한 내용 등 석가모니의 일생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역시 세조가 과욕을 부린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가 공부하여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추가하여 책을 더 풍부하고 완벽하게 만들려는 세조의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책의 내용상 통일성·일관성이 오히려 훼손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나, 이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세조실록』 1468년(세조 14) 5월 1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재신·제장諸將과 담론談論하며 각각 술을 올리게 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명하여 8기妓에게 언문 가사諺文歌辭를 주어 부르도록 하니, 곧 세종世宗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었다. 임금이 세종을 사모하여 묵연默然히 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을 불러 더불어 말하고, 한참 있다가 눈물을 떨구니, 노사신도 또한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좌우가 모두 안색이 변하였는데, 명하여 위사衛士와 기공인妓工人을 후하게 먹이게 하였다.”

 

 

세조는 만년에 더욱 더 불교에 귀의하였다. 장남을 일찍 여의고 둘째 며느리(한명회의 딸)와 손자가 세상을 떠나는 등 가족들에게 불행한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게 되자,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잔인한 행위로 인한 인과응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더 이상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죽음에 임해 자기가 만든 『석보상절』과 아버지가 만든 『월인천강지곡』, 이 두 책을 합편한 『월인석보』도 함께 떠올랐을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의 한글 노래를 부르게 하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짓는 세조 말년의 모습이 내 눈 앞에도 선하게 그려진다. 그토록 강인하고 때로 잔인했던 사람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이다. 세조는 어머니와 똑같이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월인석보』를 펼쳐들고 읽을 때면, 아버지 세종, 어머니 소헌왕후와 관련하여 세조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느꼈을 감정·고뇌·그리움이 묻어나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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