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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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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급 공무원의 전쟁 경험기

- 강도일기

 


사진 : 江都日記(12400)

 

 

 

1636년 조선은 그야말로 초비상상황이었다. 2월 후금의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가 한양을 방문하여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조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교서를 전국 8도에 반포하였는데, 불행히도 평안도로 향하던 교서가 본국으로 귀국하던 용골대의 손에 넘어갔다. 4월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을 열었다. 조선의 사신들도 이 즉위식 현장에 있었는데 그들은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의 예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사신들은 홍타이지가 조선에 보내는 국서마저 귀국길에 버려두고 왔다. 외교적 방법으로 갈등을 타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졌고, 곧 청의 군사가 한반도에 들이닥칠 거라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청에서는 이런 불안감에 쐐기라도 박듯, 16361225일까지 왕자와 대신을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선, 전쟁을 대비하다

 

병자호란에 대한 기존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등장한 청은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가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그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며 깔보았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까지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고전쟁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도망쳐 고립된다.

그리고 끝까지 대의명분을 따지며 내부 갈등을 반복하다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설명을 따라가면 병자호란은 조선이 자초한 인재(人災)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 측이 가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피해를 입은 측이 피해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역사적 실제와도 거리가 있다.

앞서도 설명하였지만 1636년 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상대국의 최후통첩까지 받은 상황에서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실제로 조선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외교적 노력을 우선 살펴보면 16366, 조선 조정은 한 가지 문서를 청에 전달하고자 하였는데, 조선이 1627년 정묘호란의 결과로 맺어진 맹약을 잘 준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가 문서 접수를 거부하자 인조는 척화파 신료들의 반대를 뚫고 심양에 역관을 재차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성과가 없자 124일 추신사 박로를 파견하였다.

군사적 노력 역시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당시의 패배를 거울삼아 지구전 전략을 구사하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한양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위치한 대도시의 군민들은 근처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펼치고, 중앙의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한다는 방침이었다. 또 조선 남쪽의 4, 즉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의 속오군 병력을 빠르게 전선에 투입하려는 계획도 구축되었고, 4도 병력의 집결지로 채택된 남한산성의 성벽 수리와 군량 비축도 마무리해놓은 상황이었다.

파천 장소로 낙점된 강화도에도 전쟁 준비가 이루어졌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화약 4,000근을 들여보냈으며, 전쟁이 발발할 시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선박을 10월에 이미 김포 통진(通津 : 현재의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에 대기시켜 놓았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어한명(魚漢明, 1592~1648)은 당시 경기좌도수운판관(京畿左道水運判官)의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강화도 물자 운반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5급 공무원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계획이 틀어지다

 

128, 청군의 선봉대 300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1225일까지 왕자와 대신을 들여보내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최후통첩은 완벽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124일 박로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전쟁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홍타이지는 이미 1125일 조선으로 출정을 고하는 제사를 거행한 상황이었다. 1225일이라는 시한은 조선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청군의 선봉대는 한양으로 향하는 경로에 있는 모든 성들을 지나치고 한양을 향해 곧장 내달렸다. 소규모인데다가 빠른 속도로 진군하였기 때문에 한양에서 청군 선봉대의 진격을 알아챈 것은 1213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4일 청군 선봉대는 홍제원에 도달하였다. 강화도로 파천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 위한 조선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나마 일찍 강화도로 발길을 옮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및 일부 왕실 인사들은 계획대로 강화도를 향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군의 진격 소식이 알려지자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해두었던 프로세스들도 일부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강화도로 물자 운반의 책임을 맡았던 어한명 역시 1214일 통진에 도착하여 물자를 운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계획은 어그러지기 시작하였고, 강화도로의 물자 운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15, 지나가던 사람이 적병이 어제 벽제(경기도 고양시)에 당도하였고, 인조와 소현세자가 남한산성으로 행로를 바꾸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어한명은 대경실색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네 어찌 망령된 말을 하느냐? 오랑캐가 아무리 날아온다 하더라도, 어찌 벌써 도성에 당도할 수 있단 말이냐?”


 

어한명의 이 다급한 외침 속에는 당시 조선에서 느꼈던 당혹감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혹감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강화도로 보내지기로 하였던 물자들은 남한산성으로 목적지를 수정한 것인지, 혹은 전쟁의 빠른 전개로 목적지를 잃은 것인지 도착할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한명은 선택을 해야 했다. 완수할 수 없는 임무를 포기하고 피난을 갈 것인가? 혹은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 통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봉림대군 일행을 호송하는 새로운 임무를 담당할 것인가? 후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한명, 봉림대군과 조우하다

 

어한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봉림대군 호송 임무를 선택하였다. 다만 문제는 사람이었다.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배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노를 저을 격군이 부족했던 것이다. 어한명은 곧장 근처 마을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말했다.

 

 

지금 나라가 불행한 일을 당하여 궁궐의 행차가 곧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닷가에 살아서 필시 노 젓기에 익숙할 것이니, 수고스럽더라도 노를 젓도록 하라.”

 

 

하지만 곧 오랑캐가 들이닥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주민들은 듣고도 못들은 체 하며 도망칠 궁리만 하였다. 이에 어한명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희도 조선의 백성이 아니더냐? 나라에 큰 변고가 있는데 도망칠 궁리만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이냐

나루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상시 나그네가 해질녘에 강을 못 건너 발을 동동거릴 때도 인정상 도와주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궁궐의 행차가 변란을 당해 이곳에 당도하는데도 너희는 도울 생각이 없단 말이냐?”

 

 

이 말을 들은 주민들은 그제야 격군 임무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어한명을 도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60여 명의 사람을 모은 어한명은 다시 나루터로 와서 봉림대군 일행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옷을 입은 봉림대군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한명이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봉림대군은 물론 인평대군까지 함께 있었다. 봉림대군 일행과 눈물의 상봉을 마친 후, 봉림대군이 어한명에게 물었다.

 

 

언제쯤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한낮에 얼음이 풀려야 배를 띄울 수 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궁궐 노비가 봉림대군에게 아뢰었다.

 

 

밥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양식이 부족합니다. 아침식사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 조선의 왕자라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너무나 놀란 어한명은 곧바로 하인을 시켜 비축해둔 쌀 한 포대를 바치게 하였다. 이에 봉림대군은 어한명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네었다.

 

 

 

 

부정한 고관을 고발하다

 

그렇게 밥을 지어먹고 날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덕포첨사 조집이 배 몇 척을 끌고 왔다. 그 배들은 딱 보기에도 물자를 나르기 위해 어한명이 준비해놓았던 배들보다 견고해 보였다. 어한명은 곧장 봉림대군을 이 배에 옮겨 태우려고 하였는데, 그때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이란 인물이 어한명을 불러 세웠다.


 

조집이 가져온 배가 견고하니 우리 집의 식구들이 이 배를 타고 건널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우리 집 식구들이 탈 배를 빼앗아서 대군께 드리려고 하는가?"


 

아니, 봉림대군이 타야할 배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낼 수 있다니. 도대체 김경징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방자할 수 있단 말인가. 김경징은 1623년 인조반정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류(金瑬, 1571~1648)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방어 임무를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김경징은 이러한 권세를 등에 업고 봉림대군마저도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사진 : 강도일기의 일부분. 밑줄 친 부분이 김경징의 언사가 기록된 부분이다.

 

 

김경징의 이러한 언사에 격분한 어한명은 그에게 대들려고 하였지만 때마침 도착한 경기우도수운판관 윤개가 눈짓을 하며 그를 가로막았다. 어한명은 자리를 빠져나와 허탈한 마음에 모래사장 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이렇게 말하였다.

 

 

김경징은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면서도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처자식만을 돌보고 있네

김경징과 같은 이도 이러한데, 미관말직 관리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봉림대군 일행과 김경징 등은 곧 배를 띄워 강화도로 향하였다. 김경징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빈궁마마보다 빨리 배를 띄워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어한명은 김경징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고도 대항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행실을 기록에 남겨둠으로써 만세토록 역사의 평가를 받게 하였으니 어쩌면 복수에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김경징은 강화도에 들어가서도 수비에 힘쓰기는커녕 매일 술만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 청군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다. 강화성이 함락되는 순간에는 나룻배를 타고 도망쳐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이후 수비 실패에 대한 탄핵 여론이 일어나 사사되었다. 인과응보라 할 수 있겠다.

 

 

 

 

후일담

 

봉림대군 일행의 강화 입도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어한명은 본래 임무였던 물자 운반을 위해 통진에 3일 더 머물렀다. 19, 청의 정찰병이 통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어한명 역시 더 이상 물자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적병에 의해 가로막혔고, 강화도로 갈 수 있는 배들 역시 검찰사 김경징의 명으로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에 어한명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어한명이 향한 곳은 자신의 본래 근무지인 충주 가흥창이었다. 어한명은 청군의 감시를 피해 안산과 수원을 거쳐 원주 흥원창까지 이르렀고, 흥원창에서 배편으로 가흥창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계속 전황을 확인하던 어한명은 130일 인조의 항복으로 청군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접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한명을 맞이한 것은 파직 소식이었다.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러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한명은 변명 대신 은거를 택했고,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한명의 노력을 모두가 잊은 것은 아니었다. 훗날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이 16361215일 어한명의 노력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경연 자리에서 당시 수운판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화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수운판관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미 1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상황에서 5급 공무원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기억하는 이가 있었다고 한들, 이미 어한명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렇게 어한명은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하였지만 그가 남긴 기록이 그를 다시 세상에 호출하였다. 강도일기를 통해 1215일의 행적이 알려졌고, 1816년 어한명의 공로가 인정되어 좌참찬에 추증된 것이다. 18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참고문헌

 

어한명 저, 신해진 역, 강도일기, 역락, 2012.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구범진,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동양사학연구15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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