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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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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울 구경

 

 


 

 

 

내 고향 한성

 

통계청 국가정보포털(KOSIS)에 따르면 20208월 기준 서울에 주민으로 등록된 인구는 9,708,247명이다. 전국 인구 51,839,953명에서 서울 인구가 18.7%의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주민등록을 서울로 옮기지 않은 사람, 경기에 거주하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내는 사람 등을 고려하면 서울과 연관된 사람은 더 많다. 다만 갈수록 커지는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서울 공화국이라는 다소 씁쓸한 이름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현재 한국의 현실을 진단하려면 서울을 다룰 수밖에 없는지라, 서울에 대한 여러 교양도서가 출판되고 학술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역을 확장했다.

조선 후기의 인구를 가장 안전하게 추정하면 1,000만 안팎이고, 한성 인구는 20~30만 명이다. 인구 비중을 보면 현재 서울보다 조선의 한성이 약해보이지만, 조선을 움직이는 힘은 그 때도 서울에 집중됐다. 그런데 이러한 한성의 비중에 비하면 한성에 집중한 지리지는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대표적 관찬 지리지인 여지승람(輿地勝覺)은 한성에 대한 지리정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영조 때 국가 차원에서 간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한성부를 누락했다. 18세기 이래 한성을 배경으로 삼은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국가 차원에서 한성에 대한 지리정보를 재정비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을 문제로 여기던 한 사람이 한성의 다채로운 풍경을 전하는 책을 만들었는데 바로 한경지략(漢京識略)(가람고 915.11 Y9h)이다. 현재 남아있는 한경지략은 모두 필사본이며, 규장각 이외에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한 부씩 소장하고 있다.

한성 지리지 만들기에 나선 장본인은 유본예(柳本藝, 1777~1842)였다. 그의 아버지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된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었다. 아버지, 형 유본학(柳本學, 1770~1842), 그리고 본인까지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다. 유본예는 서얼 출신의 후예였기에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지만, 간혹 지방관을 지낼 때를 제외하면 줄곧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면서 지식을 쌓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던 듯하다. 그것은 유본예가 집안부터 접할 수 있었던 문풍(文風)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버지 유득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활동한 문인이었다. 또한 유득공은 훗날 유본예가 많이 참고했던 경도잡지(京都雜誌)(가람고 951.053 Y9g)라는 한성 풍속지를 남겼다. 정조 때 문체반정으로 성균관에서 쫓겨난 유생 이옥(李鈺, 1760~1815)은 유득공의 이종사촌으로, 유본예에게는 당숙(5)뻘이다. 그리고 유본예의 처숙부는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저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다. 단순한 인척이 아니라 유본예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러 가기도 했고, 훗날 한치윤이 죽은 뒤 유본예가 제문(祭文)을 쓸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한성에서 나고 자랐으며 생애 대부분을 보낸 유본예는 한경지략을 쓰기로 마음 먹은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도성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스무 살 무렵부터 경성(京城)의 옛일에 뜻을 두어 모든 책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은 일일이 베껴썼지만 책을 만들지는 못했다. 또한 20년 동안 궁궐 서적을 교감하는 직분을 맡아 분주하였기에 옛날에 했던 공부를 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근래 홀연히 상자 속에 있던 옛날 원고를 보니 죽순을 묶어둔 듯했다. 스스로 생각하니 흥분되었으며, 젊을 적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여 마침내 여지승람을 기준으로 삼아 5(五部, 한성부 행정구역 단위) 안으로 한정하여 다른 책을 보고 직접 보고 들은 것 외에는 더러 노인이나 박식한 여러 사람에게 질문했다. 마침내 몇 권 책을 만들어 한경지략이라고 이름지었다.”

한경지략()

 

 


 

 

 

한성은 어떤 도시입니까

 

서울은 어떤 도시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서울을 설명할 때 중요한 사실은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는 것이다. 세종특별자치시에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고 국무총리 이하 여러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이 옮겨가서 근무하고 있지만, 한국인이 국가의 주요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목하는 곳은 대체로 광화문(행정), 여의도(입법), 서초(사법) 세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울 하늘에서는 드론을 날리기도 쉽지 않다. 군사시설을 포함하여 국가 주요 시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항공법 등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이 지니는 경제적 비중을 간과한다면 곤란하겠지만, 서울은 엄연히 수도로서 국가권력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한성은 조선의 왕경(王京)이었다. 현대 한국의 서울보다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을 낮게 잡을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대동법(大同法) 시행 이후 국가의 물품 조달이 더욱 시장에 의존하게 되고 한성 인구가 급증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한성의 성격을 상업도시로 포착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지만, 조선 경제에서 최대 소비자는 국가이고 왕이었다. 결국 왕경이라는 한성의 특성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경지략여지승람과 비교해보면 궁궐을 기준으로 한 공간적 위계가 아닌 시선의 이동을 따라가며 책을 구성한 점에서 형식상 파격이었지만, 한성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규정하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유본예의 시선은 한성의 지리적 위치를 규정한 이후 궁궐 안에서 출발하여 밖으로 나갔고, 한경지략의 많은 분량은 궁궐과 부속 시설, 그리고 궁궐 안팎의 관청들을 소개하는데 쓰였다. 게다가 아래 <>와 같이 왕실의 살림살이에 직접 관계된다고 볼 수 있는 관청만도 여러 개였다.

 

한경지략에 기록된 왕실 생활 관련 관청

 

명칭

위치

역할

사복시(司僕寺)

중부 수진방(壽進坊)

어용 가마·말 관리

내자시(內資寺)

서부 인달방(仁達坊)

궐내 각종 식료품 공급

내섬시(內贍寺)

각 전궁(殿宮) 수요품 공급

사도시(司䆃寺)

북부 광화방(廣化坊)

궐내 미곡·장류 공급

제용감(濟用監)

중부 수진방

왕실 의복 관리

사재감(司宰監)

북부 순화방(順化坊)

어류·육류·소금·목재 등 공급

내수사(內需司)

서부 인달방

궐내 각종 물품·노비 관리

의영고(義盈庫)

서부 적선방(積善坊)

궐내 기름·꿀 등 물품 공급

사포서(司圃曙)

중부 수진방

왕실 소유 원포(園圃) 관리, 채소 공급

내시부(內侍府)

북부 준수방(俊秀坊)

궐내 음식 감독, 궐내 시설 관리

 

비고 : 순서는 한경지략에서 등장하는 차례를 따름.

 

왕의 눈에 띄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었다. 적어도 한경지략의 저자 유본예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 낙산공원에 가 보면 홍덕이 밭이라고 하는 터가 있는데, 그에 대한 고사가 한경지략에 다음과 같이 쓰였다.

 

낙산 아래에 있다. 효종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 나인[內人] 홍덕(弘德)이 포로로 잡혀 심양에 있었다. 김치를 잘 담아서 매일 식사에 올렸다. 효종이 즉위하고 홍덕도 본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김치를 담아 나인을 통해 바쳤다. 임금이 맛을 보고 어디서 났는지 묻기에 나인이 사실을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 바로 홍덕을 불러 후하게 상을 내리고자 했는데, 홍덕이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임금이 곧 낙산 아래 몇 경() 밭을 내려 보답했다. 이 밭은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이름을 홍덕전(弘德田)이라고 한다.”

한경지략2, 각동(各洞) 홍덕전

 

효종은 왕이 되기 전 병자호란 이후 청()에 잡혀가 인질 생활을 했다. 그때 위로가 됐던 김치 맛을 왕이 되고 다시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질 생활을 달래줬지만 그때는 이름도 몰랐던 홍덕이라는 옛 궁녀에게 무엇이라도 갚아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홍덕이 밭에 대해서는 한경지략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세기 자료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규장각 내 2종 소장)에 있다. 두 내용을 모두 유본예가 적었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병자호란의 쓰디쓴 기억, 그리고 그것을 견디고 왕이 된 뒤 은혜를 갚았다는 효종의 이미지가 홍덕이 밭으로 남은 셈이다. 홍덕이 김치를 해 드리며 그런 대가를 바랐을지는 모르지만, 뭇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대박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박이 실제로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은 먼 과거의 사건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유본예가 살던 시대와 비교적 가까운 영조 때의 일화를 살펴보자.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는 지금 그의 무덤과 함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하고 있지만, 원래는 남대문 밖 남관왕묘(南關王廟)와 마주보고 있었다. 양녕대군 후손 이지광(李趾光, ?~?)은 가난했다. 어느 날 관상쟁이가 사당 앞의 늙은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하니 영조가 남관왕묘에 행차했을 때 사당을 발견했고, 신하들에게 물어 양녕대군 사당인 줄을 알게 됐으며, 마침내 이지광이 관직을 받았더라 하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한경지략1, 사묘(祠廟) 양녕대군사(讓寧大君祠)) 이 글에서 유본예는 사람들이 그 일을 부러워한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지광은 양녕대군 봉사손(奉祀孫)이었므로, 단지 사당 앞 나무를 잘라서 덕을 본 것이 아니라 왕실로서 우대를 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지만 홍덕이 밭과 양녕대군 사당 앞 나무의 숨겨진 내막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당시 한성 사람들은 역시 왕의 눈에 띄어야 팔자를 고치는 줄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강에서 만난 나으리와 장삼이사

 

한경지략이 특별히 가치를 갖는 것은 기존 지리지에 포함됐던 내용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성에 존재하던 여러 동()과 한강 일대에 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저 한성에 대한 심심풀이용 콘텐츠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그곳에 한성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성은 왕경이기 때문에 왕을 둘러싸고 일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다. 기세 좋은 양반, 유본예 같은 중인서얼, 시장통이나 한성 주변 산천을 헤매며 살림을 꾸려가는 상민, 그리고 어딘가에 속한 노비까지, 다양한 군상이 한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 조각들을 조금씩 살펴보려고 하는데, 한강에서 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 관상에서 목이 잘릴 팔자라는 말을 듣고 평생 조심하며 살았지만 결국 운명 또는 저주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 인물 한명회(韓明澮, 1415~1487). 그는 세조 즉위와 이후 정권 안정화의 핵심 공신이자 왕실의 인척으로 막대한 권세를 누렸다. 공을 세우고 조용히 물러났다는 인상을 받고 싶었던 한명회는 한강 남쪽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한경지략1, 궁실(宮室) 압구정) 그 앞은 본래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세종이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내려 그 아들 쪽으로 전해졌다. (한경지략2, 산천(山川) 저자도) 1970년대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압구정동 모 아파트 단지는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퍼서 다진 자리 위에 서 있다. 지금은 압구정과 저자도 모두 사라졌고, 그만한 위세를 지닌 듯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이다.

압구정 부근에서 한강 남북을 이어주는 동호대교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양화대교가 나온다. 그곳에서 한강 북쪽으로 향하면 양화진이다. 지금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조선 후기 박해에 따른 순교지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조성된 곳으로, 종파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한경지략에서는 이곳이 양화도(楊花渡)라고 적혔다. 시를 짓기에 좋은 풍경을 지녔던지,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들러서 시를 짓곤 했다. 세종 때는 이곳에서 달구경을 하던 안평대군이 맏형인 세자(문종)가 보낸 좋은 귤과 시를 받고 나서 안견(安堅, ?~?)을 포함한 일행과 함께 바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경지략2, 산천 양화도)

그러나 압구정에서 양화도로 향하던 길에서 혹시 훈련장을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서 한성을 지키는 군부대인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병력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노량진(露梁津)일 것이다. 이곳은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릉)을 가기 위해서 한강을 건너는 장소이기도 했다. 노량진에 배들을 모아서 정렬하고 나무판으로 덮어 주교(舟橋), 우리말로 배다리라는 것을 만들어야 했다. (한경지략2, 산천 노량(露梁))

조선 사람들은 한강을 매우 세분화했는데, 그 중 용산강(龍山江)이나 서강(西江)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부근 지명으로 남아있다. 이곳은 지방에서 배로 올라온 세곡의 종착지로, 주변에서 적지 않은 장사꾼이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강 상하류의 목재상이 강가에 내려둔 나무를 도성 주민들이 지고 와서 땔감으로 팔기도 했다. 동대문 인근의 배오개[梨峴]는 채소, 남대문 인근의 칠패(七牌)는 어물을 공급하는 통로였다. 이렇듯 한강 일대에서, 그리고 여기에 쓰지 않았지만 한성 주변 육로상의 역원(驛院)을 거쳐 한성으로 식재료가 들어왔다. 이런 식재료로 남촌에서 술이 되고 북촌에서 떡이 되어 한성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한경지략2, 시전(市廛))

 

 

 

 

남겨진 과제

 

한경지략19세기까지 집성된 한성에 대한 인문지리정보를 전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하지만 한경지략은 당시 조선에서 굳어가던 경향분기(京鄕分岐), 즉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않았다. 더구나 한강 일대에서 전개된 독과점 상업과 그에 따른 1833년 쌀 폭동과 같은 문제적 상황도 기술하지 않았다. 유본예를 마냥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국정 운영을 책임지는 고위 관료가 아니라 각종 기록물을 기록하는 하급 실무관료였고, 서얼 후손이었기 때문에 대신 반열에 오르는 것을 꿈꿀 수 없는 처지였다. 한경지략서문에서 훗날 여지승람을 재편찬할 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국가 시책에 부응하려는 열망을 안고 있는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게다가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삶을 한성에서 보낸 한성인이었다. 그에게 충실한 기록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가 과연 유본예에게 현실에 대한 예리한 인식 없이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현대인은 집 근처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는커녕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지역에 대한 관심사항은 오로지 집값과 땅값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성찰은 이런 상황에서 제한되기에 십상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위키백과류를 한 번 검색해보고 그저 지나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발전이라는 대의는 공허하다. 많은 주민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지역에 대한 기본적 감각조차 없다면, 어떻게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할 것이며 지역 발전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역사를 비롯하여 많은 주제를 국가 수준에서 사고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고려했을 때 그런 습관을 근절하는 것은 어렵고 또 바람직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의 무대는 국가로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놓쳐서는 곤란하다. 국가의 행정조치를 맞닥뜨리기 전 이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 내가 들르는 여러 가게들 또한 삶의 무대를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내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인가? 유본예가 한경지략을 쓴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규장각에 근무하며 다양한 문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다양한 자료를 열람하고 생산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에 대한 답변까지 인공지능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다면, 내가 처한 지금 여기에 대한 소소한 관심부터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참고문헌

 

유본예, 장지연 옮김, 한경지략 - 19세기 서울의 풍경과 풍속, 아카넷, 2020.

유본예, 박현욱 옮김, 역주 한경지략 - 조선시대 서울의 역사지리지, 민속원, 2020.

 

김영진, 유득공의 생애와 교유, 연보, 대동한문학27, 2007.

김현정, 「『한경지략을 통해 본 19세기 서울인식, 도시인문학연구4-1, 2012.

김현정, 주목 받아 온 서울, 주목 받지 못한 지리지 : 유본예의 한경지략』」, 내일을 여는 역사75, 2019.

장지연, 「『한경지략을 통해본 19세기 한 서울인의 자의식, 서울학연구7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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