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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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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 고려 말 유학자 이제현이 들려주는 고려시대 이모저모



사진 : 櫟翁稗說(0320-1)

 

 

 

역옹패설전서 <櫟翁稗說 前序>

지정(至正 () 순제(順帝)의 연호) 임오년(고려 충혜왕 복위 3, 1342) 여름에 비가 줄곧 달포를 내려 들어앉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벼루를 들고 나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벼룻물을 하여, 친구들 사이에 오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붙인 다음, 생각나는 대로 그 이어붙인 편지 뒷면에 적고서 끝에다 역옹패설(翁稗說)이라고 썼다. 대개 역() 자에 낙() 자를 붙인 그 자의(字義)는 본래 소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재목감이 못 되어 베어지는 피해를 멀리하는 것은 나무로서의 즐거움[木樂]이 되기 때문에 즐거울 낙() 자를 붙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벼슬아치로 종사하다가 스스로 물러나 옹졸함을 지키면서 호를 역옹()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재목감이 되지 못함으로써 수()할까 하는 뜻에서이다. () 자에 비() 자를 붙인 그 자의 역시 소리를 따른 것인데, 이를 뜻으로 살펴보면 돌피[]는 곡식[] 중에 비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았으나 장성하면서 그 배움을 폐지하였다. 지금은 늙었는데도 오히려 잡문(雜文) 쓰기를 좋아하여 그 부실한 것이 마치 비천한 돌피와 같다. 그러므로 그 기록한 것들을 패설이라 하였다.

至正壬午, 夏雨連月, 杜門無跫音, 悶不可袪, 持硯承簷溜, 聯友朋往還折簡, 遇所記, 書諸紙背, 題其端曰, 櫟翁稗說, 夫櫟之從樂, 聲也, 然以不材遠害, 在木爲可樂, 所以從樂也, 予嘗從大夫之後, 自免以養拙, 因號櫟翁, 庶幾其不材而能壽也, 稗之從卑, 亦聲也, 以義觀之, , 禾之卑者也, 余少知讀書, 壯而廢其學, 今老矣, 顧喜爲駁雜之文, 無實而可卑, 猶之稗也, 故名其所錄, 爲稗說云.

 

 

역옹패설후집 2

옛사람이 역사에 대하여 읊은 작품이 많이 있는데, 그 작품이 이해하기 쉽고 싫증나기 쉬운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만을 곧바로 서술하였을 뿐 새로운 뜻이 없기 때문이다.

古人多有詠史之作, 若易曉而易厭, 則直述其事, 而無新意者也...



 

 

 

역옹패설: 항간에 떠도는 말[稗說]로 쓰여지다

 

역옹패설은 이제현(1287-1367)이 저술한 수필문학비평일화집이다. 역옹패설에는 이제현의 서문을 통해 그 저작 동기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을 왜 저작하게 되었는가를 1342년 저술한 전집의 서문에서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전집의 서문에 따르면, 이제현은 여름에 비가 그치지 않아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저술한다. 이에 친구들 사이에 오고 간 편지 조각들을 이어 붙인 다음, 생각나는 대로 그 이어붙인 편지 뒷면에 기록하고서 그 끝에다 제목을 붙여 쓴 것이었다.

그 후에 쓰여진 후집의 서문에서는 이제현의 역옹패설서술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이제현에게 나무라기를, 전집(前集)은 왕조의 흐름과 지체 높은 인물들의 언행을 많이 실었지만, 말장난[滑稽]으로 끝이 났고, 나아가 후집(後集)에는 경전이나 역사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장을 꾸민 것 뿐이니, 품행이 단정한 선비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제현은 그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문장을 꾸미는 일을 옹호하였다. 이제현에 따르면 시경에도 북 치는 이야기가 있고, 춤추는 이야기가 있는데, 무료하고 답답함에 쓴 글에서 말장난이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제현의 주장에 따르면, 역옹패설은 가벼운 동기로, 가벼운 필체를 담아 쓰여진, 그러나 역사와 문학을 아우르는 비평적 저술이었던 것이다.

 

 

 

 

 

문학역사를 아우르는 문화비평으로서의 역옹패설

 

 


사진 : 역옹패설(0320-1) 001a~001b

 

 

역옹패설은 전집(前集)1·2, 후집(後集)1·2, 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집1은 서문을 빼고 총 16, 전집2는 총 43, 후집1은 서문을 제외하고 28, 후집 2는 총 25화로 총 113화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왕가의 역사부터 문학, 선대의 언행 등 다양한데, 전집에는 주로 수필류의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후집에는 시()에 대한 비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옹패설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만, 문학사적으로 역옹패설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에 이어서 나온 시화집으로 평가된다. 한국사의 시화집은 고려 무신란 이후 전대의 문학을 정리하면서, 문학 이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모색되는 것과 함께 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화집들은 무신정변 이후 문학 본래의 존재적 의미를 추구하던 임춘 이후 이인로(1152~1220)파한집, 최자(1168~1260)보한집과 이규보(1168~1241) 백운소설(白雲小說)은 그 초기의 글로 흔히 거론된다.

역옹패설은 이인로의 파한집에서 시도된 것 보다 진보된 저술로 평가된다. 파한집단계에서 나타난 비평은 인상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역옹패설에서는 문학작품이 하나의 비평 대상이자, 깊이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역옹패설속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 창작된 문학작품과 그 창작자들에 대해 비평적 안목에서 비평분석하게 되었던 것은, 이와 같은 고려 시대 문학사의 발전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속에서 고문(古文)과 그에 정통한 문장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이들의 글을 정리비평하였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의 곳곳에 한유유종원구양수 등 당송(唐宋)시대의 문인들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며 이들의 작품을 종류별로 나누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반복해서 읽어본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제현이 강조한 한유유종원 등은 당송대에 새롭게 일어난 문학적 유행인 고문 운동조류를 대표하는 문장가들이었다. 이들은 문장의 수식과 꾸밈보다는 본인의 진정한 뜻을 담아 낼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제현 또한 이들의 뜻을 중시하여 고려 에서도 비슷한 전통을 발견하고,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제현은 유종원한유의 작품이 지닌 내용과 형식을 고려 시대 문장가들의 글과 비교하여 비평하였다. 이제현이 주목한 고려 문장가들은 김인존, 김부식, 최유청 등이었는데, 이들 또한 이제현 이전의 대표적 고문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제현은 김부식 등의 문장이 모두 겉치레를 꾸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가를 이룬 것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는데, 이와 같은 부분에서도 이제현이 역옹패설을 통해 고문 전통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 충선왕과 자신 사이의 대화를 수록함으로써,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가 古文의 시대여야 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최근의 학자들이 모두 승려를 따라서 자질구레하게 문장을 꾸미는 방법만을 익힌다며 토로하고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물었다. 역옹패설에 나오는 이제현은 자신의 시대인 고려 말의 문화적 타락이 무신정변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고려 광종 이후 발전한 문물제도들이 의종 말년에 일어난 무신정변과 함께 모두 파괴되고 살아남은 선비들이 모두 절로 들어갔으니, 그 결과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자 해도 절에 가서 배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현은 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이 추진된다면, 고문을 멀리하여 문장이 타락하는 선비들의 풍조와 불교에 대한 추종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을 통해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가령 역옹패설의 전편 중에는 왕건의 이름에 대해 고려 의종대 김관의가 정리한 설명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그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아버지 융건(隆建) 모두 이름이 같은 문제에 대해, 김관의는 개국 이전에는 순박한 풍속을 숭상하여 혹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관의는 왕()씨 또한 도선이 송악산 남쪽에 있는 융건의 집을 보고, ‘기장[]을 심을 밭에 삼[]을 심었다.’ 하였다. 기장을 뜻하는 제()는 왕()의 방언과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태조가 왕씨(王氏)로 자기 성()을 삼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관의의 설명에 대해, 이제현은 역옹패설을 통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제현은, 작제건·융건 모두가 예법에 능통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이름을 아들손자에게 그대로 쓰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건()이라는 이름은 마치 신라의 마립간(麻立干)아간(阿干)대아간(大阿干)의 간()자와 같은 존칭어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씨에 대해서도, 아버지를 두고 아들이 성을 고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특히나 궁예 휘하에서 성을 왕()씨로 바꾼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 대신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라는 책에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王氏)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토대로, 고려 태조의 성이 본래부터 왕씨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역옹패설과 이제현

 

이제현의 역옹패설은 각종 사례들이 수록된 일화집으로서, 문학 비평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일면으로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직면했던 다양한 문제들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정리해보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저술이었다. 이것은 이제현이 현실정치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깊이 침잠하며, 당대 사회현실에의 대응과 극복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 산물이었다.

이제현이 역옹패설을 쓴 1342년은 이제현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였다. 이제현은 원나라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역대 왕의 측근으로서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였던 이제현이 관직에서 물러났던 것은 고려 조정의 혼란 때문이었다. 충숙충혜왕대는 왕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격렬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 국면이 국왕의 측근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만큼, 이제현과 같은 학자 관료들이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제현은 새로 등극한 충혜왕을 위해 원에 가서 그 정통성을 변론하는 활동을 하고 1등 공신에 봉해지기도 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조정은 국왕의 측근 인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2년여 동안 칩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쓴 글이 역옹패설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저술되었던 만큼, 이제현이 비 오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저술했다고 완곡하게 밝힌 저술 목적은, 사실 자신의 정치적 경륜을 펼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이다. 역옹패설은 그가 당대의 현실이 지닌 부조리함에 대해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그 진단과 비평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제현이 역옹패설을 저작한 또 다른 동기는, 당시까지 이어져 온 고려의 문학 전통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역옹패설은 역사왕가의 계보문학 평론 등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글이 서술되었는데, 여기에서 이제현의 문학적인 관점은 물론, 역사와 문명에 대한 이제현의 관심과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옹패설은 그야말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인 패설(稗說)’로서, 그 자체로서 이제현의 적극적인 주장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에 대한 짤막한 생각을 덧붙이는 역옹패설의 서술 속에서, 이제현의 14세기 고려의 정치역사문학에 대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참고문헌

 

원문 및 번역

  : 한국고전종합 DB 참조 https://db.itkc.or.kr/

 

이익주, 2003, 이제현 시대를 증언하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다,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1, 돌베개

김성룡, 2013, 해설, 역옹패설지식을만드는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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