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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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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성리학의 리더십을 정리한 제왕의 교재

 

문형준(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사진 : 聖學輯要(2119-v.1-7)

영조 35(1759) 간행된 성학집요(2119), 영조 재위 연간에 성학집요는 경연 교재로 활용되었다.

 

 

 

 

이이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제왕학 교과서

 

 

 

이 책은 제왕이 학문할 때 근본이 되는 것과 말단이 되는 것, 정치를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으로서, 덕을 밝힘으로써 얻는 실제 효과와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실제 자취의 얼개를 모두 대충이나마 드러냈습니다. 작은 일을 유추하여 큰일을 파악하고 자기를 근거로 삼아 대상을 밝힌다면 온 세상의 도가 실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凡帝王爲學之本末, 爲治之先後, 明德之實效, 新民之實迹, 皆粗著其梗槪. 推微識大, 因此明彼, 則天下之道, 實不出此.

(성학집요』 『성학집요를 올리는 차자(進聖學輯要箚)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들라고 하면 이황과 이이가 나란히 거론된다.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국왕을 성리학적 성인으로 교육하기 위한 저술을 남겼다는 것이다. 특히 이이가 쓴 성학집요는 조선의 군주학을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이이는 1573년 조정에 출사하면서 성학집요를 구상했고, 1575년 책을 완성해서 선조에게 바쳤다.

기존의 유학 경전들이 있고, 그 외에도 왕(또는 황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재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남송의 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대학연의가 제왕들을 교육하기 위한 책으로 쓰였고, 가깝게는 선배 유학자인 이황이 올린 성학십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가 직접 국왕을 위한 성리학 교재를 쓴 데는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었다.

 

 

도는 오묘해서 형체가 없으므로 글로써 도를 표현하는데, 사서와 육경에서 이미 도를 밝히고 구비하였으니 사서와 육경의 글로써 도를 추구하면 이치가 다 드러날 것입니다. 다만 사서 육경이 너무 방대하여 요령을 얻기 어려워 선현이 대학을 내세워서 규모를 세웠는데 성현의 수많은 가르침이 모두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 책이야말로 요령을 얻는 방법입니다.

서산 진씨(진덕수)는 이 책의 요지를 미루어 넓혀서 대학연의를 만들었습니다. 대학연의는 경전을 널리 인용하고, 역사책을 두루 끌어들여서 학문의 근본과 다스림의 차례가 환하게 체계적으로 드러났으면서도, 임금의 몸에 중점을 두었으니 참으로 제왕이 도에 들어가는 지침입니다. 다만 권수가 너무 많고 문장이 산만하며, 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글과 같고 참다운 학문의 체계가 아니어서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좋지는 않습니다.

道妙無形, 文以形道, 四書六經, 旣明且備, 因文求道, 理無不現. 第患全書浩渺, 難以領要, 先正表章大學, 以立規模, 聖賢千謨萬訓, 皆不外此, 此是領要之法.

西山眞氏推廣是書, 以爲衍義. 博引經傳, 兼援史籍, 爲學之本, 爲治之序, 粲然有條, 而歸重於人主之身, 誠帝王入道之指南也. 但卷帙太多, 文辭汗漫, 似紀事之書, 非實學之體, 信美而未能盡善焉.

(성학집요서문())

 

 

이이는 제왕이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에서 두 가지를 문제로 들었다. 우선 첫 번째는 유학의 경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전공하는 학자들도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마당에, 최고 국정 운영자로서 하루하루가 바쁜 제왕이 시간과 공을 들여서 성리학의 이치를 탐구해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

성리학의 논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으로 한다. 먼저 자신을 수양한 후, 이를 외연으로 확장(가정-국가-천하)해 나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한 유학 경전이 대학으로, 성리학의 이론 체계와 정치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요점만 설명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정치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두 번째는 기존에 있던 교재인 대학연의의 단점이다. 첫 번째 문제를 인식했던 남송의 학자 진덕수는 대학의 체계에 따라 중국 역사의 사례들을 모아서 제왕들을 위한 교재인 대학연의를 지었다. 대학의 각 편에 부합한 역사적 선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려 말 한반도에 유입되어 조선 초기에 국왕의 제왕서로 애독되었다. 그러나 대학연의는 역사적 사례를 들고 있지 성리학의 이론 체계와 공부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은 과거의 사실이지 성리학의 강령은 아니며, 이이가 보기에 방향과 이념을 모르는 상태에서 방대한 사례집을 공부하면 대학의 요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이이는 자신이 직접 제왕의 성리학 교재를 편찬했다. 먼저 대학의 체계에 따라 핵심 용어를 제시해서 한 장으로 삼고, 여기에 유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례 대신, 유학의 핵심 경전들인 사서오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후대 성리학자들의 설명을 덧붙여서 편찬한 책이 성학집요였다.

 

 

이 책은 군주의 학문을 주로 논의하였으나 실제로는 상하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 중에는 널리 배워 차고 넘치지만 요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이 책으로 노력하고 요점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또 배우지 않아서 견문이 낡고 고루한 사람이라도 이 책으로 힘을 쏟는다면 공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에 빠르고 늦음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 모두에게 유익한 내용입니다. 이 책은 사서육경으로 들어가는 사다리입니다.

此書雖主於人君之學而實通乎上下學者之博覽而泛濫無歸者宜收功於此以得反約之術失學而孤陋寡見者宜致力於此以定向學之方學有早晚皆獲其益此書乃四書六經之階梯也

(성학집요서문)

 

 

이렇게 만든 성학집요의 본문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 통설(統說):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사물의 이치를 탐구(格物)해서 천하를 평정(平天下)하는데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대학중용의 내용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다.

(2) 수기(修己): 자기 수양과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유학이 자신을 수양하는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만큼 성학집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4장 궁리(窮理, 사물의 이치를 탐구)에는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 정가(正家): 가정을 올바르게 하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데, 국왕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일반적인 가정이 아니라 외척 문제와 세자 교육 등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왕실에서 바로잡을 사안들을 포괄하고 있다.

(4) 위정(爲政): 군주가 정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지침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식시무(識時務)와 안민(安民)에 이이의 시대 인식과 당대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주장이 담겨있다.

(5) 성현도통편: 유교적 이상을 구현했던 고대의 위대한 성현의 계통과 도()의 전승을 서술했다. 군주가 성인이었던 이상은 요----문왕/무왕-주공 단계에서 끝났으며, 그 뒤 공자에서부터는 재야의 학자로만 이어져 왔다는 유교의 이상적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사진 : 이이가 직접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한 성학집요의 목차. 대학의 강령에 맞추어 내용을 구성한 저자의 구상을 잘 보여준다.

 

 

 

 

이론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이도 이전에 선조에게 성리학 교재로 성학십도를 올린 이황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보편적 원리를 설명하고, 이를 군주가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차이점은 군주의 역할을 논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이황이 군주 개인의 도덕적 수신을 강조하는 데서 그쳤지만, 이이는 군주가 보여야 할 성인의 모습은 개인의 도덕성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자가 말했다. “몸을 다스리는 것과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으로부터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까지는 다스리는 도()이다. 정치의 강령을 세우고, 온갖 직책을 나누어 정비하며, 시대 상황(天時)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제도를 창제하여 법도를 세워서 온 세상의 일을 다 처리하는 것은 다스리는 법()이다. 성인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는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程子曰 治身齊家以至平天下者, 治之道也. 建立治綱, 分正百職, 順天時以制事, 至於創制立度, 盡天下之事者, 治之法也. 聖人治天下之道, 唯此二端而已.”

(성학집요통설)

 

 

이이가 말하는 성인은 자신의 도덕성을 완성하면서, 밖으로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도덕성을 완성하는 도()가 정치의 근본이라면, ()은 정치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를 두루 갖추어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황과 달리 이이는 구체적인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을 포함해서 책을 구상하고, 별도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이는 더 나아가 공부한 내용을 국왕이 실제 정치에서 응용해 백성들에게 효용을 베풀 것을 강조했다. 수기편, 정가편, 위정편은 모두 이론을 개괄한 총론에서 시작해 공효(功效)로 끝나는데, 단순히 군주 본인의 수양으로 끝나는 않고 백성에게 그 실제적인 효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이이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구성이다.

 

 

지금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질다는 소문이 났으면서도 백성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은 선왕의 도를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今有仁心仁聞, 而民不被其澤, 不可法於後世者, 不行先王之道也.

(성학집요위정 법선왕. 맹자를 인용한 구절)

 

 

 

 

시대의 흐름에 맞는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실제 정치를 수행할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까? 유학은 이럴 때 원론적으로는 옛 임금들이 이루어놓은 법(先王成憲)을 지키라고 한다. 하지만 이이는 국가가 처한 시대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이 생각건데, 시무는 한결같지 않아서 시대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데, 그 큰 요체를 간추려 보면 창업과 수성, 그리고 저 경장이라는 세 가지뿐입니다……이른바 경장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라는 전성기가 지나면 중도에 미약해지고, 법은 오래되면 폐단이 생깁니다. 그런데 안일에 젖고 낡은 방식을 그대로 따라 온갖 제도가 피폐하고 느즈러져서 날로 어긋나고 달로 잘못되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면 반드시 현명한 군주와 명철한 재상이 불끈하고 일어나 법도와 기강을 붙들어 세우고 어리석고 게으른 의식을 깨우치며, 낡은 인습을 깨끗이 씻어 묵은 폐단을 바로잡고 고쳐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대의 사회구조를 일신하는 것입니다.

臣按, 時務不一, 各有攸宜, 撮其大要, 則創業守成與夫更張三者而已……所謂更張者, 盛極中微, 法久弊生. 狃安因陋, 百度廢弛, 日謬月誤, 將無以爲國, 則必有明君哲輔, 慨然興作, 扶擧綱維, 喚醒昏惰, 洗滌舊習, 矯革宿弊, 善繼先王之遺志, 煥新一代之規模.

(성학집요위정 식시무)

 

 

이이는 국가의 발전단계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3가지로 제시했다. 첫 번째는 창업으로, 시대와 백성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나라를 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성으로, 어진 임금과 현명한 재상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 그 뒤에 나오는 왕과 현명한 신하들이 그 법규를 이어가는 단계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회는 변하고,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법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이 때 필요한 세 번째 조치가 경장으로, 시대 변화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법과 제도들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이는 자신이 살던 시기의 조선을 태조의 창업기와 세종~성종의 수성기를 지나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보고 있었고, 주요 현안들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했다. 특히 이이는 국가재정과 민생과 관련된 사안들에 대한 개혁안을 강조했는데, 이런 그의 관심사와 주장이 위정편의 안민장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조직은 기본적으로 관습과 규정을 찍어내고, 규정이 잘 짜진 조직일수록 구성원들은 무사안일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리더도 예외가 아닌데, 자신의 재임 기간에 개혁과 혁신을 한다고 일을 벌이기보다는 무난하게 지나가기를 원하기 쉬워진다. 이런 태도에 대해 이이는 무섭게 질타한다.

 

 

고루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잘못된 것을 그대로 지키며, 임시로 모면하고 세월만 보내며, 한 가지 폐단도 혁신하지 못하고 한 가지 법령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면서 한갓 말로만 간절하게 아침저녁으로 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라고 부르짖고 명령을 내린다면 이는 참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하니 어찌 말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若因陋守訛, 荏苒姑息, 一弊未革, 一政不擧, 而徒諄諄然朝號暮令曰 我欲安民云爾則是非誠心愛民也. 斯民也至愚而神, 豈得以口舌相欺乎 

(성학집요위정 안민)

 

 

이이에게 있어서 제왕이 성리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민생을 보장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례를 참고하거나 기존의 관행과 제도를 이어갈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는 정치를 하는 것이 국왕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조선시대 국왕의 일이 아닌,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리더의 역할이다.

 

 

 

 

참고문헌

 

이이 지음, 김태완 옮김, 2007, 성학집요, 청어람미디어

이정철, 2013,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비평사

한영우, 2013, 율곡 이이 평전, 민음사

이이 지음, 정재훈 옮김, 2014, 동호문답-조선의 군주론, 왕도정치를 말하다, 아카넷

권상우, 2019, 율곡 聖學輯要의 성왕론-大學衍義, 聖學十圖와 비교를 중심으로, 율곡학연구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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