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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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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역사 연구의 자료가 되다

 

 

 


사진 : 고려사(高麗史)(7157)

규장각소장 고려사』 중 안정복 소장본.

 

 

모처럼 여러분이 규장각 홈페이지에 들어오셨으니 물어봅시다. 고려사란 무슨 책일까 

에이, ‘고려사(高麗史)’라고 했으니까 고려시대 역사책이겠죠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고려(918-1392)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기는 하니까. 하지만 고려시대역사책은 아니다. 고려사는 조선 초기에 왕명을 받들어 여러 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의 정사(正史)이며, 139권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한다. 고려사의 역사서술 형식은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이 지은 사기(史記)에서 비롯된 기전체(紀傳體). 기전체란 크게 통치자의 연대기인 기()와 지배층, 피지배층 중 유명한 인물의 전기인 전()으로 구성되는 문체를 말한다. 목록이 2권이고, 책머리에 고려세계(高麗世系)라고 고려 왕실의 유래를 붙였으며, 고려 국왕 32명의 연대기를 세가(世家) 46권으로, 법제, 풍속 등을 지() 39권으로, 연표인 표()2권으로, 마지막으로 고려 인물 1,008명의 전기인 열전(列傳)50권이다. 우왕과 창왕의 연대기는 열전에 들어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들을 신돈(辛旽, ?-1371)의 후예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신씨가 왕씨의 왕위를 찬탈했으니 역적이므로, 이들은 열전의 끄트머리 반역전(叛逆傳)에 실렸다.

,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 아직 가지 말고. 이렇게 끝낸다면 참 간단하지만, 실제 고려사내용과 편찬 과정을 들여다본다면 결코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우선 고려사편찬의 총책임자 직함과 이름부터 논쟁거리가 된다.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 정인지(鄭麟趾, 1396-1478)”로 적혀 있지만, 실제 고려사의 편찬 책임자는 김종서(金宗瑞, 1390-1453)였다. 책임자의 이름을 바꿔서 내야 했던 사연,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시 써!” 고려 475년을 두고 벌어진 밀당 57

 

500년 가까이 버틴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정총(鄭摠, 1358-1397)1392(태조 원년) 10월부터 1395(태조 3) 정월까지 편찬 완성한 편년체(編年體)고려국사(高麗國史)37권이 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죽은 뒤인 1414(태종 14) 5, 태종은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부분이 사실과 영 다르다고 하면서 하륜(河崙, 1347-1416), 남재(南在, 1351-1419), 이숙번(李叔蕃, 1373-1440),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에게 고려국사를 고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2년 만인 1416(태종 16) 총책임자 하륜이 숨을 거두며 중단된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고려 역사의 개수(改修)는 급물살을 탄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유관(柳寬, 1346-1433)과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교정하게 하였고, 그들은 1421(세종 3) 정월에 완성본을 올렸다. 이때 유관 등은 공민왕 이후의 기사 중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들, 그리고 고려 왕실에서 쓰던 용어들을 교정했다. 고려는 원 간섭기 이전엔 짐()이나 폐하(陛下)처럼 중국 황제들이 쓰던 단어를 왕실에서 사용하였는데, 이를 참칭(僭稱), 곧 분수에 넘치게 잘못 사용했다고 본 유관과 변계량은 새 고려사에서는 여()나 전하(殿下) 등으로 전부 격을 낮추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지적하고 당시의 용어를 복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오늘날 사관(史官)의 붓을 잡는 자가 이에 성인이 취하고 버리신 본래의 뜻을 엿보지 못할 바에야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바르게 기록하면찬미하고 비난할 것이 스스로 나타나서 족히 후세에 전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기려고 경솔히 뒷날에 와서 고쳐서 그 사실을 사라지게 할 것은 없느니라.

그 종()을 고쳐서 왕()으로 일컫는 것도 사실을 따라 기록할 것이며

(廟號)나 시호(諡號)도 그 사실을 없애지 말고범례(凡例)에 고친 것도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22, 세종 51229

 

 

이 명을 받들어 유관과 윤회(尹淮, 1380-1436) 등이 1424(세종 6) 8월에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참칭을 적을 수 없다는 변계량의 강력한 반대로 반포되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세종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고려사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용어를 고치지 말 것을 명해, 1438(세종 20) 3월부터 1442(세종 24) 8월에 이르기까지 4년간에 걸쳐 고려사전문(高麓史全文)이 편찬된다. 신개(申槩, 1374-1446)와 권제(權踶, 1387-1445) 등이 편찬했던 이 고려사전문1448(세종 30) 인쇄되었으나 반포되지 못하였다. 편찬자 권제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실을 왜곡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쯤 되면 그만둘 만도 하건만, 의지의 사나이 세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한 달 뒤인 1446(세종 28) 10, 세종은 고려사전문에 빠진 부분들을 교정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1449(세종 31) 정월에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 1390-1453) 등에게 다시 고려사를 고칠 것을 명하였다. 이들은 고려사의 문체를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바꾸자고 세종에게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이때 정한 편찬 원칙은 고려사앞머리의 범례에 실려 있다.

 

 

1. 세가. 사기를 상고하건대 천자(天子)는 기()라 하고 제후(諸侯)는 세가라 하였으니, 이제 고려사를 편찬함에 왕기(王紀)를 세가라 함으로써 명분을 바르게 한다. 무릇 왕을()이라 일컫고 폐하태후(太后)태자(太子)절일(節日)()()라 일컫는 따위는 비록 넘어서는 것이 참람되나 지금은 당시에 일컫던 바를 따라 그것을 적음으로써 사실을 남긴다.

1. . 고려의 제도법규는 사서에 많이 빠지거나 생략되었기에 이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및 여러 사람의 잡록(雜錄)을 모아 여러 지를 짓는다.

1. . 이제 고려사표를 편찬함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삼국사(三國史)를 따라 다만 연표만을 만든다.

1. 열전. 먼저 후비(后妃), 다음은 종실(宗室), 다음은 제신(諸臣), 끝은 반역으로 하고, 그 공적이 뛰어난 자는 비록 부자(父子)라도 따로 열전을 짓고 나머지는 각각 종류별로 덧붙인다.

1. 역대 사서는 본기열전지의 끝에 모두 논찬(論贊)이 있으나 이제 고려사를 편찬함에 원사(元史)를 따라 논찬을 짓지 않고 여러 선비들의 문집과 잡록에 실린 것으로써 사적(事蹟)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은 또한 뽑아 덧붙이며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그러나 세종은 기전체의 고려사를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고려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451(문종 1) 8월의 일이고, 이것이 인쇄에 부쳐진 것은 1454(단종 2) 10월이었다. 장장 560여 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이 단계에서도 직서가 전부 관철되지 못했다거나 하는 한계는 있지만, 오랫동안 사료를 수집하여 내용이 풍부해질 수 있었다. 국왕 중심의 서술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고려국사이래의 큰 현안이었던 인물 평가도 상당히 객관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없었더라면 아마 후대의 학자들이 고려 역사 속 많은 이야기를 놓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려사가 세상 빛을 보기까지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인쇄 직전, 조선의 정계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란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이로 인해 총책임자 김종서를 포함한 고려사찬수의 멤버 일부가 역적의 오명을 덮어쓰고 말았다. 그래서 부책임자 정인지가 고려사찬수의 최종 책임자로 실린 것이다. 이는 계유정난 이전에 인쇄되어 김종서의 이름이 실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경우와 대비된다.

 

 

 

 

 

읽고 메모하고,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자양분이 되다

 

꽤 장황하게 고려사의 역정을 소개했다(길었다.). 그러면 다시 규장각으로 돌아오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엔 모두 18종의 고려사가 소장되어 있다. 13975책에 달하는 완질(完帙)이 갖추어진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몇 책씩이 달아난 낙질(落帙)이나 일부 빠진 부분을 붓으로 베껴 채워 넣은 보사본(補寫本)이며, 달랑 한두 책만 남은 영본(零本)도 적지 않다. 그 모두가 귀중하지만, 여기서는 청구기호 규()7157고려사를 살펴보자.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안정복의 印記가 찍힌 고려사』 (7157, 권1)


 

이 책들의 표지를 넘기면, 첫 장 오른쪽 아래에 작은 도장이 찍혀있다. 글자를 읽어보니 안정복인(安鼎福印)’이다. 안정복, 동사강목을 지은 역사가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다. 고려사는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갖고 있어도 읽지 않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안정복도 설마 그랬을까? 고려사를 들춰보면 가느다란 붓으로 쓴 메모가 곳곳에 보인다. 빠르게 썼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내용들도 결코 허튼 것이 아니다. 예컨대 고려세계중 왕건의 선조로 언급되는 당 숙종(肅宗) 부분에 쓰인 메모를 보면.

 

 

 


사진 : 안정복의 메모 고려사』 (7157, 권1)

 
 

승람(勝覽).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당 선종(宣宗)이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너와

처음 개주(開州) 서쪽 포구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조수가 물러나 개펄이 물가에 꽉 차있자

따르는 자들이 배 안의 돈을 꺼내어

개펄 위에 깐 뒤에 뭍에 내리게 하니,

이로 인하여 이름을 전포라고 하였다. 개성부(開城府) 산천(山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이 내용을 찾아보니 권4의 개성부 상()에 나온다. ‘전포라는 지명의 유래인데, 여기서는 숙종이 아니라 선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사료 사이에 차이가 난다거나, 또는 어느 한쪽이 틀렸다거나 안정복 자신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는 잊기 전에 해당 쪽수 여백에다가 메모해두었다. 옛날에는 이런 메모를 차기(箚記)라고 하였다. 학자라면 으레 이렇게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안정복은 그 습관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안정복의 서재에는 초서롱(鈔書籠)과 저서롱(著書籠)이라는 궤짝들이 있었다. 남의 책을 빌려 베낀 것은 초서롱에, 떠오른 생각을 담아 자신이 지은 책은 저서롱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고려사는 인쇄본이므로 그 두 궤짝에 들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안정복이 차기를 남길 정도로 평소 즐겨 읽었던 수택(手澤)임에는 분명하다.

아까도 얘기했듯 안정복의 대표적 저작은 단군부터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역사를 강목체(綱目體), 곧 큰 뼈대인 강()과 세세한 사실인 목()으로 나누어 구성한 문체로 정리한 동사강목이다. 부록까지 20여 권에 이르는 동사강목중 고려를 다룬 부분은 절반을 넘는다. 안정복은 그가 구할 수 있던 자료를 거의 다 구해 동사강목편찬의 밑거름으로 썼다. 당연히 고려사또한 거기 포함된다. 아니, 고려사의 내용을 뼈대로 하여 묘지명이나 문집 등을 활용해 가감하고 안정복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 동사강목의 고려시대 부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정복이 갖고 있으면서 차기를 남겼던 이 규7157 고려사야말로 동사강목의 자양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책이 안정복 사후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확실히는 알기 어렵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촬영 유리건판 중에 안정복 소장 고려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되어 경성제국대학에 보관되던 게 쭉 내려온 게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노명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지식산업사, 2019

박종기,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2008

변태섭, 『『高麗史硏究, 삼영사, 1982

한영우, 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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