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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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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공신이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 

- 조선시대 공신과 공신회맹제

 

 


사진 : 會盟謄錄(12872)

 

 

 

특정한 공적이나 일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보통 일등공신이라고 표현한다. 언론이나 미디어,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기에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표현은 매우 오래된 역사적 연원을 가진 말이다. ‘공신이란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관료에게 내려지는 칭호이며, 일등공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공이 뛰어난 사람들(보통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을 지칭한다. 이러한 공신들에게는 국가로부터 상당한 보상이 내려졌으며, 본인은 고위관료로서의 안정적인 미래가, 가문은 대대로 공신자손으로서의 혜택이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공신들끼리의 특별한 회합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대부분 국왕이 함께 자리하여 공신들과 함께 맹약을 주고받았다. 이것이 공신회맹제이다.

 

 

 

 

조선시대의 공신’, 이들은 누구인가 


공신은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관료에게 내려지는 칭호로, 조선시대 이전 중국과 한국의 여러 왕조에도 존재해 왔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이후, 새로운 왕조 건설에 동참했던 공신들 상당수가 역모 등의 혐의로 처벌되어 토사구팽이란 유명한 고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도 건국 이후 여러 차례 공신을 선정한 일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 30번의 공신을 선정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공을 세웠던 것일까? 가장 유명한 것은 조선을 건국한데 공로가 있는 개국공신이었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성공한 이후 선정했던 정사공신’, 태종이 왕위에 즉위한 이후 선정한 좌명공신은 각각 정난과 국왕 즉위를 도운 신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 선조의 의주 피난길을 함께한 호성공신’, 반정으로 중종과 인조가 즉위한 이후 선정한 정국공신정사공신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가의 역모나 반란을 평정한 이후 공신이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선정된 진무공신’, 이인거의 난을 진압한 이후 선정된 소무공신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공신들은 대부분 건국, 국가적 위기 극복 등을 이유로 선정되었다.

독특한 경우로 공신이 선정된 예도 있는데, 선조대 선정된 광국공신을 들 수 있다. 이 공신은 100여 년 이상 동안 조선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종계변무사안을 해결한 공으로 선정되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황실에서 이성계가 고려 말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어, 조선 측에서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일을 일컫는다. 선조대에 드디어 이 종계변무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 공으로 19명의 광국공신을 선정하였다오늘날의 시각에서 왕실의 족보 오류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실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다.

 

 

 

 

 

일등공신이란 

 

위에서 본 것처럼 국가적인 공로나 위기극복 이후 공신을 선정할 때, 보통은 등급에 따라 공신들을 3-4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보통 이를 일등공신, 이등공신, 삼등공신 등으로 부른다. 따라서 같은 공신이라 하더라도 등급에 따라 특전이나 예우에 차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은 모두 55명이었다. 선정 당시에는 43명이었으나, 이후 추가로 공신에 추록된 사람까지 포함된 수이다. 이 중 일등공신은 모두 20명이었고, 이들에게는 좌명개국공신이란 칭호가 내려졌다. 이등공신은 모두 13명이었고, 이들에게는 협찬개국공신이란 칭호가 내려졌으며, 삼등공신은 모두 22명으로 이들에게는 익대개국공신이란 칭호가 내려졌다. 이처럼 공신의 선정은 보통 공훈에 따라 1-3등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예외도 많았다. 태종대 정사공신의 경우 이등공신까지만 선정한 반면, 태종대 좌명공신이나 성종대 좌리공신등은 4등급으로 나누어 사등공신까지 존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신들 사이에서도 등급이 존재했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등급이 높을수록 대우 역시 후하게 내려졌다.

 

 

 

 

공신의 특혜

 

공신이 되면 각종 정치적, 경제적 특혜가 뒤따랐다. 우선 공신에 선정되었던 사실 자체가 국왕의 신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공신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기 마련이었다. 또 국가에서는 전각을 세우고 공신들의 초상화를 전시하여 우대하기도 하였다. 본인의 정치적 지위 뿐 아니라 아들, 사위 등 후손들의 관직 진출이 보장되었는데, 공신의 등급이 높을수록 많은 수의 후손에게 관직을 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공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에게도 고위 관직이 내려졌고, 이미 사망한 경우에는 관직을 추증하기도 하였다. 공신이 사망한 경우 적장자에게 공신의 특혜가 세습되었으며, 죽은 공신에 대한 장례에서도 일반 관료들이 누리기 어려운 각종 특혜가 제공되었다.

경제적 보상으로는 토지와 노비의 하사를 들 수 있다. 개국공신의 예를 들어보면, 일등공신에게는 공신전 토지 200, 노비 25구를 내려주었다. 이와 더불어 식실봉 300호도 내려주었는데, 식실봉은 노비와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즉 특정 공신의 식실봉으로 정해진 가호는 국가에 내야 할 각종 세금을 국가가 아닌 공신의 집으로 납입하는 것이다. 즉 일반가호 300호에 대한 세금징수권을 공신에게 이양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국가의 가장 높은 관직이 받은 과전(토지)150결 정도였음을 상기하면, 공신으로서 받는 경제적 보상이 막대하게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경제적 보상의 경우 공신이 선정되던 국가의 사정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조선 초의 공신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후기의 공신에 비해 훨씬 컸다.

 

 

 

 

공훈의 삭제, 공신 선정 취소

 

이처럼 공신은 한 번 선정되면 개인 뿐 아니라 가문에도 상당한 영예와 특전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공신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번 공신으로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이후 역모나 정치적 사안에 연루되면 공신의 지위를 잃고, 받았던 온갖 특전을 반납하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조선 최초의 공신인 개국공신들 중 상당수는 이후 왕자의 난 와중에 사망하였고, 사후에도 공신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무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선정되었던 고언백의 경우,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심복이란 이유로 공신의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이처럼 공신에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이후 국가에 죄를 짓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신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공신의 대열에서 제외되었다가 이후 정치 지형이 변화하면서 다시 공신의 대열에 복권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전체 공신 선정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도운 신료들에게 광해군 즉위 이후 내려준 위성공신’, 광해군대 임해군 사사 사건에서 공을 세운 이들인 익사공신’,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사사한 사건인 계축옥사에 가담한 사람들인 정운공신’, 광해군대 김직재의 옥사를 처리하는데 공을 세웠던 형난공신등은 모두 인조반정 이후 공신선정 자체가 취소된 사건이었다. 즉 위에서 언급된 공신 선정 이유들은 모두 광해군과 북인이 주도한 사건이었는데, 해당 사건에 대한 평가가 국가에 대해 공을 세운 일이 아니라 정치를 어지럽히고 강상윤리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비단 공신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광해군대 잘못된 정치를 적극 도운 사람들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거나 최소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길은 완전히 막히게 되는 것이었다.

또 격화된 당쟁으로 인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뒤집히면서 공신 선정이 취소되기도 하였다. 노론과 소론 사이 당쟁이 격렬했던 경종대에 세제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의 4대신이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은 노론과 소론 입장에서 각각 역사적 평가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경종대 집권세력인 소론은 이 사건을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지켜낸 사건으로 평가하여 공신을 선정하였지만(부사공신), 노론 입장에서 이 사건은 소론에 의한 노론의 탄압이었다. 경종 사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부사공신은 공신 선정 자체가 취소되었다. 이처럼 공신 선정과 유지는 당대의 평가 뿐 아니라 이후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단히 달라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공신들의 동맹 맺기, 공신회맹제

 

위에서 설명한 공신들은 한 가지 특별한 의식을 치렀는데, 바로 공신회맹제란 것이었다. 공신회맹제는 공신에 선정된 이들을 불러 황하(黃河)가 허리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될 때까지영원히 그들의 공훈을 잊지 않겠다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한편으로, 공신들끼리 영원히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서하는 자리였다. 특히 공신회맹제에서는 이러한 맹서를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고, 참석자들의 피를 모아 나누어 마시는 삽혈의식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공신회맹제에는 대부분 국왕이 직접 참석하였다. , 국왕이 신료들과 함께 피를 나누어 마시고’, ‘영원한 동맹을 맺는다는서약을 하늘과 땅에 직접 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에는 공신의 가문들이 단순히 국가와 왕실을 떠받들고 섬긴다는 의미를 넘어, 국가의 왕실과 영원히 동맹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울러 공신회맹제는 특정 공신들의 모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국가의 공신이었던 이들까지 모두 참석하는 특징이 있었다. , 새롭게 공신 선정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공신회맹제가 새로 기획된다면, 새로 선정된 공신들 뿐 아니라 과거의 공신들까지 모두 모여 회맹제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만일 과거 공신들 중 이미 사망한 사람이 있는 경우, 적장자로서 해당 공신을 세습한 후손이 의식에 참석하였다.

따라서 이 공신회맹제는 단순히 공신들을 대우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현재와 과거, 국가에 충성했던 이들을 모아 동맹의 의식을 치르는 것은 현재 국왕의 정치를 적극 돕고 보호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의 국왕은 때에 따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를 근거로 공신을 새로 선정하고, 대대적으로 공신회맹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원인 때문이었다.

 

 

 

 

규장각에 소장된 회맹등록의 내용

 

이러한 의미를 가진 공신회맹제의 거행 사항에 대해 기록한 책이 바로 회맹등록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회맹등록에는 인조대부터 경종대까지 네 차례 거행된 공신회맹제의 전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628(仁祖 6)의 소무, 영사공신회맹제, 1646(仁祖 24)의 영국공신회맹제, 1680(肅宗 6)의 보사공신회맹제, 1772(景宗 2)의 부사공신회맹제가 그 대상이다

소무공신(昭武功臣)은 인조 5년 이인거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고, 영사공신(寧社功臣)은 인조 6년 유효립의 역모를 다스린 공이 있어 선정된 공신들이다. 보사공신(保社功臣)은 숙종 6년 삼복의 옥을 고변한 공으로 선정된 공신이고, 부사공신(扶社功臣)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종 2년에 신임옥사 처리과정에서 선정된 공신으로, 영조대 이후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선정 자체가 취소되었다.

이 책에는 공신회맹제의 준비 과정 및 시행과정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사 전 녹훈도감과 봉상시가 주관하여 길일을 선택하고, 회맹제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며, 제단을 설치한다. 회맹제에는 새로운 공신과 옛 공신, 그리고 옛 공신들의 적장자들이 참석하는데 공신들 외에도 제사의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과 내시부 내시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공신들은 현재 직책을 가진 경우에는 관복인 조복을 입었고, 직책이 없는 사람들은 흑단령을 입고 회맹에 참석하였다. 회맹제가 끝나면 음복연이 베풀어지고, 쓰였던 제물은 공신들에게 분배되는데, 책에는 분배된 내용까지 매우 소상히 기재되어 있다.

 


사진 : 會盟謄錄(12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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