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 국가 조선의 『경국대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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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초등학교 사회 6-1] 1. 우리 민족과 국가의 성립 → (3)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 → [1] 정치 개혁으로 새로운 나라를 (바로가기)
[중학교 국사] Ⅴ. 조선의 성립과 발전 → 1. 조선의 성립 → [1] 조선을 세운 사람들의 국가 운영 방향은? (바로가기)
[고등학교 국사]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2] 근세 사회의 성립 (바로가기)
공손히 생각하건대, 세조(世祖)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중흥시키셨으니, 공이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을 겸하시어 문(文)이 밝혀지고 무(武)가 안정되며 예(禮)가 갖추어지고 악(樂)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히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고 제도의 정비를 확대하시며 일찍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역대 임금들의 깊고 두터운 은택과 웅대하고 아름다운 규범이 실려 있는 법전으로 『경제원육전(經濟元六典)』과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육전등록(六典謄錄)』이 있고 또 여러 차례 내린 교지(敎旨)가 있어서,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관리들이 용렬하고 어리석어 받들어 시행하는 데에 헷갈리니, 이는 진실로 법의 과조(科條)가 번거롭고 많으며 앞뒤가 서로 모순되어 하나로 크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참작하여 증감하고 정리하여 모순이 없도록 해서 만세토록 사용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을 만들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경국대전』 中 「경국대전서」 (奎貴 1864-v.1)
이어 영성부원군 신(臣) 최항(崔恒)·우의정 신 김국광(金國光)·서평군 신 한계희(韓繼禧)·우찬성 신 노사신(盧思愼)·형조판서 신 강희맹(姜希孟)·좌참찬 신 임원준(任元濬)·우참찬 신 홍응(洪應)·동지중추부사 신 성임(成任) 및 신 거정(居正)에게 명하시어, 여러 조목을 모아 상세히 살펴 채택해서 책으로 편찬하되, 번잡하고 쓸데없는 것은 삭제하며 정밀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힘쓰면서 모든 조치는 주상의 재결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영순군 신 이부(李溥)·하성군 신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출납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책이 완성되자 여섯 권으로 만들어서 올리니, 『경국대전』이라는 이름을 내리셨습니다.
『경국대전』 中 「경국대전서」 (奎貴 1864-v.1)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그 즉위교서에서 법전에 따른 법치주의를 표방하였다. 개국 후 조선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위정자의 이상과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법전 편찬에 진력하였다. 이는 고려 말 정치적 혼란과 행정체계 문란으로 인해 관제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위에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관제개혁은 국가가 개별분산적인 행정체계를 일원화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그에 걸맞는 법제의 정비가 아울러 추진되었다. 그 결과로 완성된 법전이 바로 『경제육전(經濟六典)』,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들이며, 특히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내내 통치 질서의 기본 틀이 된다. 조선은 왜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여기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위 『경국대전』의 서문에서는 왜 이 법전을 만들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법전 편찬에 착수하여 1397년(태조 6) 첫 번째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반포한 바 있다. 『경제육전』은 각 관청에 하달된 국왕의 명령 ‘수교(受敎)’를 그대로 수록한 일종의 수교 모음집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법전 편찬 방식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교는 점점 많아지므로 새로운 수교가 쌓이면 이를 증보한 법전을 다시 편찬해야 하고 이러한 작업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 『경국대전』 서문에서 거론된 『경제원육전(經濟元六典)』은 1397년(태조 6) 12월에 조준(趙浚)의 주도로 간행된 첫 번째 『경제육전』이며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은 이후에 『경제육전』을 증보한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내려진 수교를 모은 것이므로 이전의 수교와 이후 수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위 내용에서 여러 차례 내린 교지가 있어 관리들이 시행하는데 헷갈리고 법의 과조가 많아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뜻한다. 『경제육전』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들을 통해 대략의 조문의 일부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세조는 앞서 『경제육전』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여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준용할 수 있는 통일법전을 편찬하기로 하였다. 위 서문의 내용에는, 기존 법조문에서 중복된 내용은 삭제하고 서로 모순된 내용은 일관성 있게 정비하여 최종 내용은 세조가 직접 확인하여 법전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세조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여 당시 법조문을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우선 실생활과 관련성이 높은 호전(戶典)과 형전(刑典)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법전에 ‘나라를 경영하는 큰 법전’이라는 의미에서 『경국대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세조대에 시작한 법전 편찬 작업은 무려 30년 가까운 노력 끝에 개국 92년 만인 1484년(성종 15)에야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경국대전』은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4차례의 수정 간행이 이루어졌다. 이들 『경국대전』은 그 시행 연도의 간지에 따라 부르기도 한다. 1469년(예종 1)에 기축년에 편찬하여 이듬해 경인년(1470)부터 시행한 것을 ‘경인대전’, 경인대전을 수정·보완하여 1471년(성종 2) 신묘년부터 시행한 것을 ‘신묘대전’, 이를 수정하여 1474년(성종 5) 갑오년부터 시행한 것을 ‘갑오대전’, 이를 다시 수정・편찬하여 성종 16년(1485) 을사년부터 시행하고 이후 내용의 수정을 금지한 『경국대전』 최종본인 ‘을사대전’이 그것이다. 『경국대전』 완성까지의 오랜 시간과 수정 과정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법전을 편찬하기 위해 얼마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국대전』은 현재 을사대전만 남아있고 이전 단계의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신묘대전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신묘대전이 발견되면서 간행과 시행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던 예종대 편찬 『경국대전』은 위와 같은 단계로 정리될 수 있다. 『경국대전』은 만세토록 준용할 수 있는 법전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주요 사안에 대하여 논의와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체제는 위 서문에서 ‘여섯 권으로 만들어 올렸다’는 기록에서 짐작되듯,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전 체제에 따라 6개의 전(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전의 시작부에는 육조(六曹) 각각에 소속된 속아문(屬衙門)의 이름과 더불어 각 부처에서 담당하는 업무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전(吏典)」에는 내명부・외명부의 조직 및 품계, 중앙・지방 관서의 조직과 관직・관품 체계, 문관의 임용 및 인사에 관련된 규정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호전(戶典)」에는 호적이나 토지제도, 조세제도와 같은 국가 재정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禮典)」에는 과거제(科擧制), 오복제(五服制)에 근거한 친족제, 의례 관련 내용과 더불어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사용하는 각종 공문서의 서식(書式)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兵典)」에는 중앙과 지방의 군사 조직, 무과(武科), 무관의 인사, 군역(軍役), 군기(軍器)・병선(兵船)・봉수(烽燧)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형전(刑典)」에는 형률(刑律)은 『대명률』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규정과 함께 각종 소송 및 재판의 절차, 범죄와 그 처벌, 노비제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공전(工典)」에는 도로와 교량(橋梁), 각종 국가 건물의 관리와 보수, 수레・선박, 도량형, 중앙과 지방의 공장(工匠) 등에 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경국대전』의 편찬은 조선 건국 후 이전과 다른 국가 운영체제의 확립을 위한 새로운 법체계를 추구한 결과물이었다.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의 종합법전을 편찬하지 않고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왕법을 내려 통치했다. 때문에 법령 변화가 잦고 현실에서의 적용에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그에 반해 조선시대에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법전을 만든 것은 국가의 운영에 일정한 준칙을 세운 것이었다.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의 편찬과 반포로 같은 사안에 대하여는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 사회질서와 국가기강을 확립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요컨대 조선은 1397년(태조 6) 첫 번째 법전인 『경제육전』을 반포하였다. 이후 『경제육전』의 단점을 보완하여 두 번째 공식 법전인 『경국대전』이 편찬되었다. 『경제육전』이 수교를 그대로 수록한 법령모음집이라면, 『경국대전』은 하나의 규범 체계로 설정된 법전으로 고려와 조선의 시대를 가르는 법전이라 할 수 있다. 『경제육전』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책이 하나도 없는 반면, 『경국대전』은 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현전본이 남아 있으며 조선의 법치를 상징하는 자료로서 중요시된다.
『경국대전』은 육전의 체제를 갖추고 정치・사회・문화 등 국가의 전반적 사안에 대한 통치규범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법전이다. 법치주의에 기초한 국가경영의 상징적 징표였으며, 중앙집권체제 재정비 측면에서 신국가 조선의 국가적 성격을 법제적으로 압축하고 있었다. 세조대에 편찬을 시작하여 1484(성종 15)년에야 최종완성 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은 글자의 수정이 금지되었으며, 1746년(영조 22) 『속대전(續大典)』이 편찬될 때까지 조선의 기본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까지도 『경국대전』은 폐기되지 않고 후대의 법전에 계속 수록되면서 명실상부하게 조선 최고의 법전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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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일, 1986, 『經國大典 硏究』, 과학・백과사전출판사(1990, 신서원 영인본) 윤훈표・임용한・김인호, 2007, 『경제육전과 육전체제의 성립』, 혜안 오영교 편, 2004, 『조선건국과 경국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朴秉濠, 1974 「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양혜원, 2017, 「『經國大典』 개정판본의 시행 단계 재검토 - 보물 제1521호 『經國大典』 간행년 판정을 중심으로-」, 『규장각』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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