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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 : 장악원의 음악가들

 

 


 

 

예나 지금이나 음악은 즐기기 위한 것인 동시에 의례와 행사의 일부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 의례에서 시연되는 악()은 장엄함과 엄숙함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자 유학적 관념을 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자에는 소리를 의미하는 세 글자가 있는데 성((()이 그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동물의 울음과 같이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걸러지지 않은 소리가 성()이라면, ()은 인간이 내는 보다 정제된 소리이고, ()은 이러한 소리가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어 군자에 경지에 달한 것을 의미한다. 모두 청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소음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분명한 소통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차이를 구분한 것이다.

예악(禮樂) 정치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조선은 예와 악의 상보적인 관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의례()에 적합한 악()을 골라 구현하거나 혹은 연주하지 않고 악기만을 늘어놓는 것[陳而不作]만으로도 이를 표상하고자 했다. 이것 또한 예기(禮記)로부터 전해진 개념인데, ‘()’이 사람들의 마음을 같게 하는 것이라면 ()’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같아지면 서로 친해지고[同則相親] 달라지면 서로 공경하게 되니[異則相敬] 예와 악은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유학적 가치관에서 예와 악은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나라에서는 담당 관청을 두어 의례에서 행해지는 음악과 노래, 춤을 연습하고 구현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이를 담당하였던 관청이 바로 장악원(掌樂院)이다. 국가와 왕실의 모든 음악을 담당한 장악원의 지위가 승정원, 사간원을 비롯한 삼사와 동일한 정3품이었다는 것 만으로도 예와 더불어 악을 중시한 조선사회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문과 출신의 관료들은 같은 관품이라 하더라도 삼사를 비롯한 승정원, 사간원과 같이 청요직에 해당하는 관청을 더욱 선호하였는데, 예악을 중시한 국가의 이상과 잡업으로 분류되는 악학(樂學)에 대한 현실의 대우 사이에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악원(掌樂院)

 

장악원은 궁중 음악을 담당한 조선 시대의 관청이다. 예조에 소속된 장악원은 궁중 연회와 의례에 동원되는 악사와 무동(舞童), 여기(女妓)의 연습과 선발, 이들이 사용하는 악기의 제조·구입 또는 수입된 악기의 연주법을 배우기 위해 외국에 파견되는 일까지 모두 도맡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장악원의 장()은 당연히 음악적 자질을 인정받은 전문가일 것으로 여겨지지만, 장악원의 최고 관직인 정()은 정3품의 문관이 담당하였다. 실제 음악 연주와 관련한 사람들은 문과 출신이 아닌 잡직 계열로,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은 장악원의 잡직 계열 정6품에 해당하는 전악(典樂)이었다. 즉 장악원은 문과 출신의 문신과 음악을 전공한 잡직 관원으로 구성되었으나 문신 관원이 보다 높은 지위에서 행정적으로 이들을 관할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장악원의 일 년은 의례를 위한 준비와 실연(實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일 년 동안 장악원이 고정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연주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길례(吉禮)인 제사의례인데, 왕이 친히 제사하는 종묘제와 사직제만 하더라도 일 년에 열 네 차례로 이미 한 달에 한 번 이상이다. 그 밖에 정월 초하루와 동지에 행하는 가례(嘉禮)와 때때로 왕이 직접 참석하는 양로연(養老宴) 역시 장악원이 참여하는 행사였으며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나 선농제·선잠제·문묘제 등에서도 실연하였으니 일 년 동안 많은 악대와 무희가 동원되어 적합한 음악과 춤을 선보여야 했다.

그렇다면 의례에 맞는 음악과 춤을 선정하고 여기에 참여할 악기와 연주자, 무동과 기녀를 배치하여 연습시키는 것은 장악원을 이끌어 가는 이들에게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 장악원에 소속된 이들은 어떻게 훈련하고 생활하였던 것일까.

 

 

 

 

장악원 소속 음악가들 : 전악, 악공, 악생, 관현맹인

 

1) 전악(典樂)

장악원에 소속된 음악가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은 정6품의 전악(典樂)이다. 전악은 비유하자면 요즘의 음악감독과 유사한 역할로, 실연(實演)을 위한 모든 준비와 진행을 담당하였다. 먼저 악공과 악생으로 선발된 이들의 연주 실력을 향상 시켜야 했고, 음악뿐만 아니라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였으며 연주가 펼쳐지는 무대의 전체적인 배치도 이들의 몫이었다. 악대가 연주할 때에는 박()을 쳐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박악사(執拍樂師)의 역할을 하였고, 그 외에도 집사전악(執事典樂, 음악연주 지휘), 감조전악(監造典樂, 악기 제작 감독), 대오전악(隊伍典樂, 대오 정렬 감독)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전악은 사신을 따라 해외에 나가기도 하였는데, 중국에서 가져온 악기를 연주하기 위한 주법을 배워오거나 악기를 구입해 오기 위해 사신단과 함께 중국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에는 전악이 악대를 이끌고 이들을 수행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왕의 국서를 전하는 사신이었으므로 이 행렬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전악과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악기 제작과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등 그야말로 악()의 구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총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는 취재를 통과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실력자만이 전악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는 ()’()’와 더불어 그만큼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2) 악생(樂生)과 악공(樂工), 관현맹인(管絃盲人)

경국대전에 규정된 장악원은 악사(樂師)와 악생·악공이 대략 800여명, 여기에 후보생까지 더해지면 약 980여 명에 이르는 제법 큰 관청이었다. 이곳에서는 어떠한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지에 따라 좌·우방으로 소속을 나누었는데,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을 전공하는 악생(樂生)은 좌방,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전공하는 악공(樂工)은 우방으로 구분된다. 악생과 악공은 국가 의례와 행사에서 실제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로, 자신이 전공하는 악기 외에 한 두 가지를 더 다룰 수 있는 이들이었다. 아악을 연주하는 악생은 양인 신분에서 선발되었고, 악생의 자제들 가운데서 충당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아악과 일무(佾舞)를 담당했고, 악공은 원칙적으로 공천(公賤)에서 충원하였으나 원하는 경우 양인 중에서도 지원이 가능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악공과 악생의 일부는 잡직으로 진출하여 장악원의 체아직, 즉 일년 중 임명된 몇 개월에 한하여 봉록을 받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장악원에 소속된 이들 가운데 체아직은 몇 자리 되지 않았고 후기에는 그마저도 대다수 봉족제로 유지되었다. 더욱이 공천으로 충당된 악공의 경우 악공적(樂工籍)에 올라 세습되었고, 50세가 지나야 악공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때문에 악생과 악공은 매우 힘든 업종으로 여겨졌는데, 전쟁을 치른 후 악공과 악생이 흩어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가 많았다는 이야기로 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악공과 악생의 숫자를 충원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아서, 만약 예정된 수를 채우지 못 할 경우에는 각 지방에 할당 인원을 보내 선발하는 식으로 조달하였다.

이렇게 봉족으로 생활하거나 간혹 잡직으로 나아가더라도 체아직이었기 때문에 항상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악생과 악공들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였을까. 특히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장악원으로 보내졌던 이들은 궐 안에서 생활을 유지하는 신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개 다른 집에 의탁하거나 태평관(太平館)이나 왜관(倭館)의 공터, 혹은 서울 오부(五部)의 근처에 거적을 치고 사는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민간에서 잔치가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 이들을 필요로 하였으므로, 민간에서 음악 활동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생계에 관련된 일들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장악원의 악생과 악공으로 소속되어 있는 만큼, 의례를 위한 연습도 수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장악원에서는 날짜를 정해 정기적인 연습을 하게 하였다.

장악원의 정기 연습’[習樂]은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매달 26으로 끝나는 날에 이루어졌다. 즉 매달 2·6·12·16·22·26일이 정기 연습일 이었다. 때문에 장악원 음악인들의 습악(習樂)을 이륙좌기(二六坐起) 혹은 이륙회(二六會이륙이악식(二六肄樂式)으로 불렸다. 이렇게 연습일을 지정해 둠에 따라 음악인들의 정기적인 연습시간이 확보됨과 동시에 이 날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자유롭게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정기적인 연습은 평상시의 실력 연마를 위한 것이라면, 의례를 앞두고는 실연을 위한 곡과 춤을 위한 집중적인 연습과 리허설이 필요했다. 이것을 습의(習儀)라고 하는데, 이는 의례를 배워 익힌다는 의미로, ()만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곧 구현하게 될 예식의 총체적인 부분을 점검하는 예행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악기 연주를 비롯한 가무와 전체적인 동선 등을 익히고 조정하는 것이었다.

악생과 악공 이외에 연주를 담당하는 이들로 관현맹인이 있었다. 이들은 시각 대신 예민한 청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에 장악원을 구성하는 연주자 집단이 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맹인에게 특정 직업군을 부여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악생과 악공에게도 그러하였듯 관현맹인들 역시 음악인이라는 직업은 고생하는 것에 비해 돈을 벌기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맹인들은 음악인으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음양학을 익혀 점을 치는 복서(卜筮)의 일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음악을 익히는 일은 고생을 면하기 어렵고, 점을 치는 일은 처자를 족히 봉양할 만하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크고 작은 일을 앞두고 길흉을 점치고 택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점을 치는 소경인 판수(判數)로 사는 것이 그나마 경제적인 걱정을 더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3) 무동(舞童)과 여기(女妓)

장악원에서는 악에 수반되는 춤도 관장하였다. 이때 궁중에서 정재(呈才)를 추는 남자 아이를 무동(舞童), 여성을 여기(女妓)라고 한다. 무동은 궁중의 각종 연향에서 춤과 음악을 담당하였는데, 남악(男樂)이라고도 불렸다. 춤에 따라 무동만 출 수 있는 것도 있는가 하면 여기만이 출 수 있는 것도 있었으므로 장악원에서는 두 계열 모두 선발해야 했다. 하지만 무동의 경우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8세에서 14세 이하의 남자 아이였다. 워낙 어려서 부모 곁을 떠나 수련을 하게 되는 만큼, 성과가 크지도 않을뿐더러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충원 자체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다른 봉족과 달리 차이나는 대우를 해 주기도 하였고, 나이가 차서 무동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된 이들 중에 음악에 소질이 있는 자를 악공으로 편입시켜 장악원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게 배려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음악과 가무를 익히다가 성장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져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무동 자신에게도 그리고 끊임없이 어린 무동을 충원해야 하는 국가에게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무동의 선발 문제는 늘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세종대에는 비첩(婢妾)이 낳은 자손 가운데 학생 및 백정의 보충군, 기녀로서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이, 기녀로서 7품 이하 관리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이 가운데 음율(音律)을 익힐만한 자, 또는 무녀(巫女)나 경사(經師)의 자손 가운데 8세 이상인 자를 조사하여 무동으로 선발하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하지만 무동 조달의 어려움이 심각해지자 세종 29(1447)에는 혁파되어 한동안 무동의 역할을 악공이 맡기도 하였으나, 다시 등장하여 정재를 담당하였다.

여성 음악인인 여기(女妓)는 여악(女樂)이라고도 하였다. 주로 연향에서 악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존재는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문제시 되어 갔다. 이들은 왕실의 연향 뿐만 아니라, 국왕의 환궁, 중궁의 하례와 친잠례에서 악무를 담당한 존재로, 연향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전기의 경우 대체로 모든 내·외연에 참여하였으나 성리학이 심화됨에 따라 여악폐지론이 현실화 되었고, 인조반정 이후로는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서 여악의 참여가 폐지되었다.

장악원은 조선의 예악정치를 구현하는 한 축을 담당하는 곳이었으나, 유학의 본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소속 관원들은 그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문과 출신으로 짜여진 관료사회의 한 켠에서 궁궐의 안팎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 궁관과 의관들과 함께 이들의 존재는 보다 현실적으로 조선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통로였다.

 

 

 

 

참고문헌

 

송지원, 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 한국음악연구43, 2008

송지원, 음악은 직업, 혹은 인격수양의 방편 조선의 음악가들, 조선 전문가의 일생규장각 교양총서 4, 글항아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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