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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합격을 위한 모두의 염원

 

 


 

 

 

 

글 읽는 자들의 유일한 취직처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과거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양반으로서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였지만, 양반으로 태어나 일을 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공적 통로가 공무원 즉 관료가 되는 길 뿐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남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각 가정에서는 아들 그리고 남편의 합격을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에 합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흔히 말하는 과거 장원급제라 함은 과거시험 가운데 문과의 일등을 말한다. 과거는 원칙적으로 총 9단계를 거치는 시험이다. 율곡 이이가 9번 장원급제하였다고 하는 九度壯元이라는 말은 대과의 일등을 아홉 차례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매 단계마다 장원으로 올라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이이 역시 모든 단계를 한 번의 낙방 없이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이이는 별시 초시에서 그 유명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을 하였으나 회시에서 떨어졌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기로 소문났던 이이에게도 어려운 시험이었던 만큼 과거에 합격하는 길은 좁고 고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어렵고 지리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지 조금 더 실감하기 위해 과거시험의 단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과거는 과목에 따라 小科文科武科雜科가 있다. 이 가운데 문반관료가 되고자 한다면 문과(혹은 大科)에 합격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과를 치르기 위해서는 먼저 小科를 통과해야 했다. 아니면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정기간의 수학을 인정받아야 했다.

小科는 감시사마시 또는 생진과라고도 불리는데 각각 初試覆試(또는 會試) 두 단계의 시험이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단계인 초시에서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후보 각각 700명을 선발하고, 2단계인 복시에서는 이들 중 각 100명만을 선발하여 생원 혹은 진사라는 칭호와 함께 성균관에 입할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생원과 진사는 과목에 따른 분류로 경학(經學)에 대한 시험을 통과하면 생원, 사장에 대한 시험을 통과하면 진사가 되었고 이들에게는 흰 종이에 합격 증서를 써 주었는데 이를 백패(白牌)라 한다. 大科는 원칙적으로 생원과 진사가 응시 대상자였다. 소과를 통과하여 각각 백 명만 선발하는 생원과 진사가 되었다면, 그리고 관료가 되고자 한다면 이제 大科에 도전해야 한다. 사실 조선에서는 생원과 진사 외에도 일반 유생인 유학(幼學)이 응시하는 것을 허용하여 언제나 전국적으로 응시자가 많았다. 때문에 이들을 모두 서울에서 시험을 치르게 할 수 없었으므로 소과와 문과의 초시는 항상 지방과 서울 각처에서 치러졌다. 지방에서 치러지면 향시, 서울에서 치러지면 한성시라 부르는데 응시자가 속한 지역에서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문과의 경우 소과와 달리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관시(館試)가 별도로 개설되었다.

대과는 총 7단계의 시험을 거쳐 33명의 신규관원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먼저 대과의 첫 관문인 초장은 다시 3단계의 시험으로 세분되고, 전국에서 총 240명을 선발한다. 이렇게 문과 초시에 통과한 240명은 몇 달 뒤 서울에 올라와 복시를 치르는데 이 복시 또한 3단계로 구성되고, 오직 33명만이 선발된다. 여섯 단계의 시험을 거쳐 선발된 33인은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부정 혹은 답안작성을 완성[成篇]하지 못하거나 문리에 전혀 맞지 않는 글을 작성하는 등의 큰 결격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신입 관료가 된다. 다만 아직 등차가 가려지지 않았는데, 최종 33인은 국왕이 친히 주관하는 전시를 통해 등차가 매겨져 비로소 장원급제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소과와 달리 붉은 종이에 합격 증서를 써 주는데 이를 홍패(紅牌)라 한다. 문과 합격자들은 총 3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은 甲科라 칭하고 3, 2등급은 乙科라 칭하고 7, 3등급은 丙科라 칭하고 23명이 해당된다. 시험 답안지[試券]에 이들의 석차는 으로 기록되는데, 예를 들어 一之一로 기록되었다면 갑과의 1등 곧 장원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지리한 과정과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비로소 관직사회에 진출할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이다. 수 많은 응시자들 가운데 합격자는 오직 33. 하지만 비록 이 서른 세명 안에 들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생원진사의 자격을 얻었다면, 免役의 특권이 주어져 일반 양인과 구분되는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시험이 응시기회 마저 많지 않았다는데 있다. 과거시험은 매년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는 3년마다 한 번씩 행해지는 시험이었다. 정기적으로 치러진 시험을 식년시(式年試)라 하고 이외에 국가에 경사가 있을 경우 개최하던 비정기 시험은 별시(別試)라 한다. 일단 소과와 대과 두 차례의 관문이 있고 세부적으로는 총 9단계의 시험이 치러지는 만큼 과정 자체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양반가의 남성들은 이러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기 위해 평생을 준비했다. 하지만 합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만 보더라도 생원진사시는 34.5, 문과는 36.4세로 모두 서른 다섯 전후인데, 이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오늘날과 달리 혼인연령이 낮았던 사회에서 서른 중반은 자식을 낳아 키워서 곧 아들과 함께 고사장에 들어갈 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더욱이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자리는 삼년에 한 번 오직 33명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니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합격자의 연령이 높아져 18세기 후반 문과급제자의 평균연령은 39.0세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합격연령을 보면 40대 이상의 급제자가 전체의 약 2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50~60대 합격자가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평생토록 이 과거시험에 매달렸다는 의미로, 이제 급제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꿈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양한 문자와 그림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남성 본인 뿐만 아니라 이들 곁에서 과거 공부하는 남편과 아들을 둔 어머니와 아내 역시 과거 응시를 위한 준비와 급제를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일상에서 마주하는 그림이나 생활용품 곳곳에는 과거 급제를 염원하는 마음이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대부의 일생을 그려 병풍으로 제작하는 평생도(平生圖)는 주로 돌잔치와 혼례를 거쳐 과거에 합격하여 복두에 어사화를 꽂고 시가를 행진하는 삼일유가(三日遊街), 한림겸수찬 행사 그리고 지방관 부임과 판서정승의 행차 그리고 회혼례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사대부의 이상적인 일생을 출생과 혼인, 과거급제, 영예로운 관직생활과 장수라는 키워드로 요약한 것이다. 비록 모두의 인생이 실제 이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대부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거쳐 대도시 지방관에 부임하고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꿈꾸었음을 알려준다.

일상적인 생활 용품 속에는 장수와 부귀, 강녕과 많은 자손을 뜻하는 康寧子孫衆多와 같은 글자를 새겨 넣어 복을 기원하였다. 복된 삶에 대한 기원을 담은 이러한 글자를 길상문자(吉祥文字)라 하는데 이 중에는 당연히 과거에 관한 것도 있다. 여성들이 사용하던 실패나 자수품 중에는 오자등과(五子登科)’, ‘오자출신(五子出身)’, ‘오자장원(五子壯元)’이라는 글귀가 자주 등장한다. ‘五子는 말 그대로 다섯 아들을 의미한다. 아들 다섯을 두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하물며 그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장원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 이렇게 다섯 아들이 등과한 경우에는 나라에서도 그 부모에게 은전을 내렸는데, 경국대전』 「예전에 의하면 다섯 아들이 등과한 경우 그 부모는 왕에게 보고되어, 해마다 쌀을 내려주며 돌아가신 뒤에는 관작을 올려주고[追贈] 국왕이 제문과 재물을 보내 제사를 지내준다[致祭]는 조항이 마련되어 있다(‘五子登科者之親, 啓聞, 歲賜米, 沒則追贈致祭’). 실제로는 1460(세조6) 안경(安璟)의 아들 관후, 인후, 중후, 근후, 돈후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서 은전을 베푼 일이 있었으나 이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 오자등과라는 글귀는 일종의 기념화폐와 같은 별전(別錢)에도 수복(壽福)강녕(康寧) 등과 함께 자주 등장하였다.

과거 급제에 대한 염원을 좀 더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등용문은 조선시대에도 그림과 조각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다. 황하 상류의 용문이라는 계곡에 높은 폭포가 있는데 여기를 뛰어오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이야기는 후한서』 「이응열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를 소재로 하여 하늘로 도약하는 잉어를 그린 그림을 약리도(躍鯉圖)’라 하는데 이러한 문양은 사대부들이 자주 사용하는 벼루나 연적, 필통, 그릇 등에 많이 활용되었다.

이 밖에 새우나 게와 같은 갑각류는 약리도에 같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쏘가리도 은유적인 상징물로 많이 활용되었다. 새우와 같은 갑각류(甲殼類)의 경우 이라는 글자가 급제자 가운데 일등급을 의미하는 과 같은 글자라는 점에서, 쏘가리의 한자명인 궐어(鱖魚)가 궁궐을 지칭하는 자와 발음이 같다는 점에서 이러한 상징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과거 보러 가는 길

 

식년시 혹은 그 사이 행해지는 별시가 있었다면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한 채비는 매년 치러지는 연례행사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지방에 고사장을 둔 향시가 치러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위였고, 따라서 향시 고사장은 각 도에 한 두곳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도의 좌우 혹은 남북분도에 설치되었는데 고시관과 응시자간의 상피(相避)를 위해 주로 두 곳에 설치하였으나, 황해도와 강원도는 인구가 적어 한 곳만 설치되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과거시험장은 집과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고, 이를 위한 채비는 여행준비나 다름없었다.

영조때 황윤석(黃胤錫)이 상경할 당시 가지고 갔던 물건을 보면 세면용품이나 의약품을 비롯하여 이불과 배게자리 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외지에 장기간 체류하기 위해 다양한 짐이 필요했던 만큼 짐꾼 노비가 동행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와 문방구류 이다. 이때 종이는 연습장이 아닌 시험 답안지로 쓸 시지(試紙)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자신의 답안지는 자신이 직접 마련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되는 것 중에 하나는, 많은 경우 서로 더 크고 좋은 품질의 종이를 마련해가기 위해 경쟁하였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심기일전하고 상경하는 만큼 자신이 쓸 답안지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여 마련하였던 것인데, 점점 정도가 심해졌는지 국가에서는 종이 질과 규격에 제한을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답안지 오른쪽에 4대조[, 祖父, 曾祖父, 外祖父]의 인적사항을 기재하게 되어 있는데, 급제자의 손을 빌려 작성하고 이를 복된 손[福手]’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종이 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붓들과 필낭, 벼루와 먹, 연적 등도 반드시 챙겨야 할 물건이었다. 요즘에도 여행용 물건의 경우 동일한 제품이라도 가볍고 작게 만들어 휴대성을 높여 제작하는데, 당시에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벼루의 경우 20cm가 넘는 다양한 무늬가 장식된 것들이었다면 여행길에 가져가는 것은 무늬가 없는 10cm이하의 작은 것들로 행연(行硯)이라 불렸다. 때로는 휴대용 문구함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유물가운데에는 나무로 짜인 상자 안에 붓, 벼루, , 연적을 넣고 종이 넣는 서랍이 별도로 있는 고급스러운 문구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래도 좀 더 부유한 이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험 후 절차

 

일반적으로 식년시의 기준은 복시에 있었다. 소과나 문과의 초시는 식년 즉 정규시험이 치러지는 전년도[上式年]8(소과)9(문과)에 개최된다. 그리고 초시 합격자에 한하여 각각의 복시가 식년의 봄에 치러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과에 응시하던 문과에 응시하던 일단 초시에 합격하였다면 이후로도 6개월간의 긴 시험기간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짐을 꾸리고 집을 떠나서 시험장에 들어가 각 단계의 시험을 치르고 드디어 소과 혹은 문과에 합격하여 생원진사 혹은 신입관료군이 되었다면 그야말로 가두행진을 할 만한 경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제출한 답안지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일단 각 시험에서 제출된 답안지는 10장씩 모아 한 축()을 만들고, 그 축마다 천자문으로 이름을 매긴다. 축 내의 한 장의 답안지에는 숫자를 매겨 표기한다. 예를 들면 답안지에 十地라고 되어 있다면 이것은 자축(字軸)10번째 답안지라는 것이다. 각각의 답안지는 上上부터 下下, 次上次中次下와 같은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최종시험인 문과 전시와 소과 복시의 합격 답안에는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 종이를 붙여 시험 종류와 등수가 기재되어 국왕에게 올려 졌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이렇게 합격자가 결정되면 방을 붙여 발표하고, 이들에게는 자신의 답안지를 돌려주었다. 따라서 현전하는 과거 답안지[試券]은 모두 과거 어느 한 단계의 합격답안으로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후손에게도 큰 영예였던 것이다. 반면 낙방한 답안지들은 시관 혹은 관서에 나누어 재활용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소과 합격자들에게는 백패가 문과합격자들에게는 홍패가 주어졌고 가두행진을 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해당 시험의 시관과 합격자명단을 정리한 방목(放牧)을 작성한다. 문무과 합격자를 하나로 묶어 문무과방목을 만드는데 이는 용호방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소과 합격자들의 방목은 사마(司馬)방목또는 연방(蓮榜)’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이 방목은 합격동기들 목록으로 일생동안 동방으로 우의를 다지는 기념물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박현순문양 하나도상 하나가 담은 반평생 과거 급제의 꿈 – 조선 사람의 과거와 함께 했던 물건들사물로 본 조선』 규장각 교양총서 11, 글항아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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