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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유교의 큰 스승[儒宗]'

- 이색이 걸어온 삶의 여정, 목은집

 

 


사진 : 牧隱集(4277-v.1-25)

 

 

목은시고6, 즉시 짓다 <卽事>

 

선광과 홍무 두 용이 함께 나는지라 / 宣光洪武二龍飛

외국의 외로운 신하는 두 줄기 눈물 뿌리네 / 外國孤臣雙淚揮

눈 깊은 변새 북쪽은 자주 조회하는데 / 塞北雪深朝覲數

하늘 너른 바다 남쪽은 왕래가 드물구나 / 海南天闊往來稀

푸른 산 이곳은 중들이 많이 점령하였고 / 靑山是處僧多占

명월 아랜 까치가 의지할 가지도 없어라 / 明月無枝鵲可依

병석에 누운 늙은이는 맘이 유독 괴로워 / 臥病老生心獨苦

모든 것을 역사에 맡겨버리고만 싶다오 / 願從靑史得羈縻

 

 

목은시고17 성균관을 생각하며 읊다 <有懷成均館>

 

태학의 세월이라 소년 시절 기억하노니 / 璧水光陰記少年

빙 두른 팔재에 글 읽는 소리 이어질 제 / 八齋環列誦聲連

당에 올라 찌 뽑아 강하기 가장 두려웠으니 / 升堂最怕抽籤講

발음이 틀려 뜻을 전하지 못한 때문이었네 / 爲是音訛意莫傳

 

당시의 다른 이들은 다 참다운 유자였기에 / 當時諸子摠眞儒

자세한한 곳 설명하는데 어찌 머뭇거리겠는가 / 說到精微肯囁嚅

유독 이 목은 늙은이는 입을 길게 닫고서 / 獨有牧翁長閉口

마른 나무 뿌리처럼 중당에 우뚝 앉았었네 / 中堂兀坐似枯株

 

 

 

 

 

목은집과 저자 이색 : 고려원을 잇는 엘리트로서의 생애

 

목은집은 고려말을 대표한 유학자이자 문장가, 개혁 관료였던 목은 이색(1328~1396)의 문집이다. 이색은 가정 이곡(1298-1351)14녀 중 외아들로 외가인 경상북도 영해에서 태어났다. 이색의 가문 한산 이씨는 대대로 호장(戶長)직을 이어오다가, 이곡 대에 이르러 원()의 과거에 합격하면서 명문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이색 또한 고려의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사회적 지위를 굳힌 집안이었다.

이색이 충숙왕 15년에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영해부(寧海府-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괴시(槐市-호지말) 마을이다. 그는 외가에서 2세 때까지 자라다가 고향 한산(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본가로 돌아와 성장하였다. 이색은 원() 유학 이전까지 사찰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8세 때 한산 숭정산, 14세에 교동 화개산, 16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묘련사에서 공부했고, 감악산청룡산대둔산 등에서도 독서하였다.

이색은 부친 이곡의 배경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유학자이자 관인으로 성장하였다. 충혜왕 2(1341)에 김광재가 시관(試官)이었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세때 음서로[父蔭] 별장(別將)이 되었으며, 이곡의 요청에 따라 충목왕 4(1348) 4월 고려에 있는 이공수의 사신길에 동행해 원() 관료의 아들 자격으로 원()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3년간 머물렀다. 그 후 충정왕 3(1351) 부친 이곡이 사망하여 고려로 돌아온 뒤, 공민왕 2(1353) 이제현과 홍언박 문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공민왕 2(1353) 가을에 안보(安輔, 1302-1357)가 시관(試官)이었던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원에 회시(會試)를 보러 가서 공민왕 33월 원() 제과에 제2갑 제2명으로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應奉翰林文字)를 제수받았고, 고려에 돌아와서는 전리정랑 예문응교(典理正郞 藝文應敎)를 제수받았다. 이후 공민왕 4년에는 또다시 원나라로 가서 한림원경력(翰林院經歷)에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하다가, 공민왕 51월 모친의 병환을 맞아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이색은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성균관 중영(重營)으로 시작된 학문 부흥을 주도하였다. 공민왕 12년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 儒學提擧)를 제수받고, 동시에 직제학 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 同知春秋館事)를 제수하고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관료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색은 우왕대 이후 신왕조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성계 세력에 맞서 고려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국운이 기울자 창왕을 명에 입조시켜 힘을 얻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후 공양왕대에 창왕을 옹립하고, 불교에 아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이색은 정도전 세력과의 대립을 통해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결국 정몽주가 암살되고 이성계정도전 계열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어 결국 고려의 멸망을 맞이하였다. 이색의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색은 조선왕조 개창 후, 논죄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면된다. 태조 이성계는 이색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고 왕에 오른 후에도 특별히 예우하고자 하였다. 이색은 고려가 결국 멸망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받아들였지만, 조선왕조에는 마지막까지 출사하지 않는 것으로 고려에 대한 의리를 다했다. 이색은 태조 5(1396) 5월에 여흥의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은집의 구성

 

 


사진 : 목은집목차 (4277-v.1-25) 1001a~001b.

 

 

목은집1404년에 편찬간행되었고, 권근(權近)과 이첨(李詹)이 서문을 썼다. 그 후 인조 4(1626)에 이색의 10대손 이덕수가 전라도 순천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간행하였다. 목은집은 시가 실려있는 목은시고와 산문이 실려있는 목은문고로 나뉘는데, 각각 시고(詩藁) 35, 문고(文藁) 20권에 목록 3권으로 도합 5829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다. 그에 더해 목은시고의 앞에 연보(年譜), 행장(行狀), 신도비문(神道碑文), 화상찬(畫像讚) 등 이색의 전기적 자료가 실려있다.

목은집, 특히 목은시고에는 이색의 생애 전반에 걸친 글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중 대부분은 주로 50대 초중반인 우왕 전반기(3-9, 1377-1383)의 글들이다. 성리학자이자 개혁 관료로서 가장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공민왕대(1352-1374), 말년의 조선왕조 개창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기 시기의 글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목은시고의 제1권에는 사부(辭賦) 형식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2권에서 제35권까지는 시 작품인데 4,360여편의 많은 양이다. 이들은 대체로 지어진 연대순에 맞추어 작성되었다. 대략적으로 그 연대를 나열하면, 1348~1377년에 지어진 시는 권2~6사이에, 1378년에 지어진 시는 권7~13, 1379년에 지어진 시는 권13~211380년에 지어진 시는 권21~27, 1381년에 지어진 시는 권27~31, 1382년에 지어진 시는 권31~33, 1383~1392년 지어진 시는 권33~35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목은문고는 전 20권으로 시고와 달리 산문의 갈래에 따라 분류되었다. 우선 권1~6 사이에는 기문(記文), 다시말해 기록적 성격을 갖는 글이 수록되어있다. 목은집에는 누정기(樓亭記)형식으로 쓰여진 글들이 많다. 누정기란 특정 건축물에 대해 쓴 글을 말하는데, 저자가 그 건축물에 올라서 겪은 감상이나, 그에 얽힌 일화 등을 기록한 것이다. 목은집의 누정기 중에서는 영광신루기(靈光新樓記)서경풍월루기(西京風月樓記)와 같이 지방 관아에 부설된 건축물에 대해 쓴 기록도 있고, 인각사무무당기(麟角寺無無堂記), 혹은 오대산상원사승당기(五臺山上院寺僧堂記)와 같이 사찰에 속한 건축물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가장 많은 경우는 훤정기(萱庭記)영모정기(永慕亭記)와 같이 사대부 생활과 관련된 글이다. 누정기 외에도 둔촌기(遁村記)양촌기(陽村記)와 같이 제자 등의 호()에 대해 쓴 글도 여럿 있는데, 이처럼 이색의 학파 내 인적 교류의 수단으로도 기문이 널리 쓰여졌다.

7~9사이에는 서문(序文), 다시 말해 서책 등의 서두에 붙이는 글이 수록되었다. 그 중에서는 익재선생난고서(益齋先生亂藁序), 급암시집서(及庵詩集序), 동안거사이공문집서(動安居士李公文集序), 농상집요후서(農桑輯要後序), 주관육익서(周官六翼序)등 당대의 중요한 지적 성과에 대한 이색의 의미 부여와 비평이 주목된다.

10에는 설(), 즉 가볍고 짧은 이야기 형식의 글이 수록되었다. 그중에서는 직설삼편(直說三篇)여러 주제에 대해 쓴 경우도 있지만, 백공설(伯恭說)이나, 중지설(仲至說)같이 제자나 후배 또는 친지에게 자()를 지어 주고 붙인 글이 다수를 차지한다.

11~12에는 표()()()()과 같이, 특정 물건에 붙인 글들이 수록되었다. 이숭인을 위해 지어 준 관물재찬(觀物齋讚), 김구용을 위해 써 준 척약재명(惕若齋銘)이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13에는 제발(題跋), 즉 책이나 작품, 혹은 문서의 후미에 붙인 글이 수록되었다. 주로 서도은시고후(書陶隱詩藁後), 제척약재학음후(題惕若齋學吟後), 서증도가후(書證道歌後)과 등이 주목된다.

14~19에는 비지(碑誌), 즉 비석 등에 쓰여진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 전주이씨이거삭방이래분묘기(全州李氏移居朔方以來墳墓記)등이 주목된다.

20에는 전기류(傳記), 즉 이색과 친교가 있었던 인물들을 전()의 형식으로 쓴 글들이 수록되었다. 이색의 소년 시절 시에 대해 가르쳐 준 스승을 다룬 송씨전(宋氏傳), 동창생으로 요절한 인물에 다룬 오동전(吳仝傳), 중국에 갔으나 행방이 묘연해진 인물에 대해 다룬 박씨전(朴氏傳)등이 주목된다.

 

 

 

 

격변기 지식인이색의 선택과 좌절

 

고려와 원()을 잇는 대표적인 지식인 엘리트로 성장한 이색의 삶은 고려로 귀국한 이후로 격변을 맞이한다.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했던 두 기둥이었던 원 제국과 고려 왕조 모두의 붕괴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색은 원의 멸망을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대세로 등장한 명()의 우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색은 원의 국운이 다했다는 점과, 명에게 새로운 천명이 도래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명과의 사대관계를 각별히 강조하는 입장에 서서 대명 외교를 주도해갔다. 우왕대 벌어진 최영의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반대 노선에서 활동하였다. 이색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였다. 명에 대한 사대 외교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요동 정벌은 명분질서를 어기는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즉위시키는 데에도 동의하였다. 우왕의 폐위는 北伐, 곧 요동 정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색은 창왕 즉위 후 이성계 세력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명과의 사대질서를 강화하여 왕조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색은 원 제국의 질서를 기반으로 큰 명성을 얻은 유학자였고, 그만큼 원의 멸망을 안타까워했지만, 새로운 중화의 지배자인 명의 등장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여 이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고려 왕실에 대해서만큼은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창왕 원년(1389) 4월에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던 정도전 등은 권세가들의 토지 탈점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는 명분으로 토지제도의 개혁을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제기하였다. 조준 등이 급진적인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할 때, 이색은 토지제도의 전통적인 법을 가벼이 고쳐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하였다. 이성계정도전윤소종 등은 조준의 의견에 동의하였고, 우현보변안렬유백유 등은 이색의 의견을 따랐다. 이색은 정도전 등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제도개혁에 맞서 온건하고 점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지배질서의 근거가 되는 예제 시행과 관련해서, 고려의 유()()() 3교가 결합된 예제(禮制) 대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하려 하였지만, 이를 실행할 때에는 과거의 습속도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색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왕조 교체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이 이색의 삶이었다.

이색의 문집 목은집에는 이러한 이색이 겪었던 격변기적 현상, 그리고 그 격변에 적응하고자 했던 이색의 노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찬란했던 시기의 당사자였던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한 등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야말로 목은집격변기 지식인의 절절한 흔적인 것이다.

 

 

 

 

 

 

 

 

 

참고문헌

 

신용남, 1991, 목은고, 한국문집총간 해제

임형택, 2000, 「『목은집(牧隱集)해제(解題)

(이상 한국고전종합 DB 참조 https://db.itkc.or.kr/)

 

목은연구회, 1996, 목은 이색의 생애와 사상, 일조각

도현철, 2011, 목은 이색의 정치사상 연구, 혜안

이익주, 2013,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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