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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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 (奎12729)
작성자 신승운 조회수 249

1.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중종실록(中宗實錄)》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中宗)의 재위 기간(1506년 10월 ~ 1544년 11월)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그러나 제105권에는 인종(仁宗)이 즉위한 1544년 11월 16일부터 12월 말일까지의 기사가 합편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實錄)》이며, 모두 105권 102책으로 활판 간행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은 다음 왕인 인종(仁宗) 때에 그 편찬이 계획되었으나, 당시 대•소윤(大小尹)의 정쟁이 격렬하였고 인종도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에도 을사사화(乙巳士禍)와 같은 큰 정변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명종 원년(1546) 가을에 비로소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두고, 《인종실록(仁宗實錄)》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5년(1550) 10월, 시작한 지 5년 만에 재위 39년간의 기록을 실은 총 1백 5권이 완성되어 각 사고에 봉안(奉安)되었고, 이듬해 3월에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洗草)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의 기년법(紀年法)은 역대 실록의 원칙인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세조와 같이 즉위년 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채용하였는데, 이는 중종도 세조와 같이 폐위된 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축물하면서 개막된 중종대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무오사화로 꺽인 사관의 기개를 다시 살리는 일이었다. 연산군의 혹심한 사관 탄압은 사관의 필봉을 꺽었다. 춘추필법은 무너졌으며 위축된 사관의 기록활동, 즉 사초 작성을 다시 복구하기 위한 노력이 중종대에 본격화 되었다.

1507년(중종 2년)에 사관 김흠조는 무오사화 때 사관으로 죽은 사람은 모두 봉작, 증직 시키고 다시 춘추필법을 세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또 대신들도 무너진 사관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방안을 강구했다. 국광의 사초 열람은 비단 사관들뿐만 아니라 대신들 자신에게도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수 있음을 실제 체험했기 때문이다.

중종년간에는 연산군대처럼 대신들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초를 열람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무오사화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고 난 후에야 지배계급은 국왕과 대신의 사초 열람을 방지하는데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금지되었던 사초의 열람은 당파의 정쟁이 격화된 조선 후기에 다시 심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사초 자체를 수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편찬된 실록을 닷 ㅣ개정하여 개정판 실록을 만들었다. 자신의 당파가 집권하면 상대 당파가 편찬한 실록을 불신하고 자신의 당파에 유리하게 개정판 실록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이 현종실록《에는 》현종수정실록《이 》숙종실록《에는 》숙종실록보궐정오《가 》경종실록《에는 》경종수정실록《이 개정판으로 만들어졌다. 이들 개정판 실록은 사초를 직접 수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편찬된 실록과 그 근거자료인 사초에 대한 열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종년간의 실록 고출에 대한 다양한 사례는 조선왕조가 문치주의를 바탕으로한 유교이념을 바탕으로한 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학사상은 논리보다는 선례(先例)를 중요시 여긴다. 논리보다 선례를 중요시 여기는 상고주의(尙古主義)는 옛 것을 숭상하는 경향이다. 옛거을 숭상하기 때문에 유학에서 역사는 소중하며 현재의 논리보다 과거의 선례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유교적 사유에서는 논리성, 필연성보다 오히려 옛날의 선례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행동이나 주장을 할 때 고대의 선례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정당성은 한없이 증가된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도 선례가 없는 일이라면 설득력은 아주 줄어든다.

신하가 어떤 정책을 군주에게 주청할 때 고례와 고사를 열거할 수 있다면 이것의 설득력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군주가 신하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선례를 동원해야 한다. 때문에 조선왕조에서 능력있는 국왕은 자신이 일류 학자여야 했으며 호학군주로 평가되는 세종과 정조 같은 군주는 신하들과의 국정논의에서 선례를 충분히 동원하여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군주는 신하들이 제시하는 선례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논리보다는 선례를 중요하게 여긴 유교의식의 산물이었고 현재의 통치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후대에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도 실록은 필요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시대에 행해진 선례가 숱하게 인용되어 있으며 정책논의 중에 의견이 분분할 때는 사고에 실록을 꺼내 참고한 후 정책을 결정했다. 중종 년간에도 마찬가지의 사례들은 종종 발견된다. 실록 고출에 대한 중종년간의 다양한 사례 들은 다음가 같다.

중종 3년 1월 중종은 노영손(盧永孫)을 서반에 서용하여 중한 공로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나 병조의 관리가 두 번이나 정사를 치르면서도 전교를 받들지 않았다. 또한 사헌부의 장령(掌令) 이위(李偉)와 정언(正言) 김롱(金礱)이 노영손(盧永孫)은 비록 공이 크지만 미천한 신분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여러 달 동안 대간이 음가(蔭可)에 대해 논계했는데 대산은 전례가 있다고 하고 대간은 전례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영중추(領中樞) 노공필(盧公弼)이 실록을 상고하여 확인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대간은 실록을 상고할 필요도 없고 병조도 추고할 필요가 없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중종은 노영손을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간은 곧 음가에 대한 전례는 결코 상고할 수 없고, 병조는 추고할 수 있으나 노영손은 끝내 서용할 수 없다고 회계하였다. 곧이어 춘추관에서 실록에서 음직(蔭職)으로 가자(加資)한 예를 상고하여 개국(開國),정사(定社), 좌명(佐命), 정난(靖難), 좌익(佐翼), 적회(敵愾) 등의 공신은 모두 부모와 아내에게 증직(贈職)하고 그 아들은 3계급을 뛰어 음직을 주었으나 공신(功臣 )만은 그 부모와 처자에게 작을 주었음을 아뢰었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음가에 대한 일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속히 개정할 것을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대간이 여러 달 동안 복합상소(伏閤上疏) 함으로 말미암아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대간의 공론을 따를 것을 승정원에서 아뢰기도 하였으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 7년 11월 소릉(昭陵)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근원을 알아야 하므로 실록을 고찰하되 성종년간에도 의논이 있었으므로 이때의 일도 아울러 고찰하게 하였다. 지금껏 문종은 왕후가 없이 단위(單位)로 종묘에 향사되었기 때문에 검서관(檢書官) 소세양(蘇世讓)이 건의했고, 복위를 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8년 3월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중종 8년 3월 우의정 송일(宋軼) 등이 실록각을 열고 소릉(昭陵) 즉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호를 상고하여 아뢰었다. 소릉에 대한 추폐(追廢)의 논의는 선왕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대신의 그릇된 청에 못이기어 그리된 것임을 알고 드디어 소릉을 복위하여 국기로 하였다. 소릉의 복위는 처음 성종 9년 남효온이 상소하였으나 임사홍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다음은 연산군 1년 김일손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중종 13년 11월 말에 승정원에서 군적을 고치는 것은 대개 그해 봄에 시작하는데 이때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가을 추수 때에 시작할 것을 병조에서 청했다고 아뢰었다. 이를 위해 세조년간에 군액(軍額)을 감한 일을 명년 봄에 미리 실록을 상고하여 가을에 군적을 고칠 때 반영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중종 31년 7월 왕은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청에서 보감을 찬집할 수 있도록 실록을 상고하여 등사한 것을 찬집청으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홍무관 부제학 성륜(成倫) 등이 실록을 상고하는 것은 매우 중대하고 어려운 일인데 사고를 경소하게 개폐한다면 뒷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으므로 삼가야 한다고 아뢰었다. 곧이어 헌부, 홍문관, 간원에서도 청하였다. 왕은 폐조 때 있었던 경계할 일을 수집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록을 참고하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대신들과 상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날 실록을 상고하였으며 이로서 8월 8일 신묘일에는 성륜(成倫)이 당시에는 실록을 본 사람이 매우 많아 겸춘추(兼春秋)까지도 들어와 열람하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이어 여항의 우부우부(愚夫愚婦)도 말하기를 전에 실록각을 열어 큰 화가 일어났는데 이제 실록각을 열었으니 다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하고 물의가 흉흉한데 며칠째 상고하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폐조의 일은 고영할 필요가 없다고 아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집하기 위해 실록을 상고할 때 마침 대열(大閱)에 관해 상고할 필요가 있었다. 겸해 상고한 바 세종년간에 2년 거듭 대열한 기록이 있어 초록하여 보고하였다.

중종 36년 1월 도승지 한숙이 자성(慈城)을 폐지한 이유를 《정원일기(政院日記)》에서 상고하지 못했으므로 실록을 상고할 것을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신은 《정원일기(政院日記)》는 정원에서 왕명의 출납을 기록한 것이지만 실록은 정사의 잘잘못과 좋은 점관 나쁜점을 기록한 것인데 일이 있을 때마다 실록을 상고하게 된다면 페단이 끝이 없을 것이라 논하고 《정원일기(政院日記)》와 실록의 경중을 알지 못하고 애매하게 아뢴 도승지가 대단히 무식하다고 논평을 하고 있다. 이어 간원에서 실록을 상고할 필요가 없음을 아뢰어 대신 및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재상들이 상의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이와같은 중종년간의 사례들은 논리보다는 선례를 중요시 여긴 결과이고 후대 사람들에게 당대인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남겨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또한 후대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실을 기록해서 남겨두어야 했고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한 춘추관의 전후 관원은 다음과 같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심연원(沈連源)

지춘추관사: 윤개(尹漑), 상진(尙震), 신광한(申光漢), 김광준(金光準), 임권(任權), 정사룡(鄭士龍), 윤사익(尹思翼), 김인손(金麟孫), 최연(崔演), 안현(安玹), 송겸, 홍섬(洪暹) 등 12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박수량(朴守良), 송세형(宋世珩), 조광원(曺光遠), 김명윤(金明胤), 남세건(南世健), 강현(姜顯), 김만균(金萬鈞), 윤원형(尹元衡), 신영(申瑛), 김광철(金光轍), 나세찬(羅世纘), 정만종(鄭萬鍾), 유진동(柳辰仝), 박우(朴佑), 권찬(權纘), 송기수(宋麒壽), 조사수(趙士秀), 정유선(鄭惟善), 심광언(沈光彦), 채세영(蔡世英), 이찬(李澯), 임호신(任虎臣), 주세붕(周世鵬), 이명(李蓂), 한두 등 25인

편수관(編修官): 심통원(沈通源), 정언각(鄭彦慤), 원계검(元繼儉), 이세장(李世璋), 경혼(慶渾), 정유길(鄭惟吉), 홍담(洪曇), 박충원(朴忠元), 안위(安瑋), 노한문(盧漢文), 이원손(李元孫), 민기(閔箕), 김충렬(金忠烈), 장옥(張玉), 김반천(金半千), 윤현(尹鉉), 이영현(李英賢), 성세장(成世章), 박공량(朴公亮), 김개(金鎧), 김확(金擴), 남응룡(南應龍), 조광옥(趙光玉), 유강(兪絳), 김천우(金天宇), 백인영(白仁英), 윤우(尹雨), 민전, 이택(李澤), 남응운(南應雲), 이무강(李無彊), 송찬(宋贊), 윤옥(尹玉), 윤부(尹釜), 정유(鄭裕), 우상, 안방경(安方慶), 김주(金澍), 이사필(李士弼), 강위(姜偉), 홍춘년(洪春年), 남경춘(南慶春), 노경린(盧慶麟), 이건(李楗), 이추(李樞) 등 45인

기주관(記注官): 윤잠(尹潛), 임내신, 이영(李瑛), 고맹영(高孟英), 정준(鄭浚), 정종영(鄭宗榮), 박영준(朴永俊), 박대립(朴大立), 권벽(權擘), 이감(李戡), 이수철(李壽鐵), 함헌(咸軒), 이탁(李鐸), 강억(姜億), 원호섭(元虎燮), 윤춘년(尹春年), 권용(權容) 등 17인

기사관(記事官): 정순우(鄭純祐), 남궁침, 이억상(李億祥), 신여종(申汝悰), 이지신(李之信), 한지원(韓智源), 심수경(沈守慶), 허엽(許曄), 황준량(黃俊良), 강욱(姜昱), 임여(任呂), 김적(金適), 이우민(李友閔), 이언충(李彦忠), 이중경(李重慶), 이광진(李光軫), 고경허(高景虛), 기대항(奇大恒), 김규, 황호(黃祜), 최언수(崔彦粹), 민지, 이순효(李純孝), 김익(金瀷), 이문형(李文馨), 정사량(鄭思亮), 김질충(金質忠), 목첨(睦詹), 강사안(姜士安), 이지행(李之行), 강섬(姜暹), 유순선(柳順善), 이명(李銘), 김귀영(金貴榮), 유신(柳信), 이관(李瓘), 이희백(李希伯) 등 37인

 

2. 《중종실록(中宗實錄)》의 내용

 

중종(中宗: 1488~1544)의 이름을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며,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고, 1506년 9월 2일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뒤,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弊政)을 이어 즉위하여 전조에 행하여지던 각종 폐습을 혁파하고, 조종조(祖宗朝)의 옛 법도를 복구하기에 노력하였다. 중종은 왕의 전제적 권한의 행사를 피하고 유능한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우대하였다. 이에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의 소장 학자들이 크게 등용되었다.

중종도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치를 답습하였고, 소장 유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숭상 장려하고, 유교적 이상정치(理想政治)의 실현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미풍 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일반 민중의 유교 윤리적인 교양을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권선징악과 상부 상조를 그 정신으로 하는 향약(鄕約)을 8도에 시행하려던 시도라든가, 찬집청(撰集廳)을 두어 권선 징악의 서적을 찬수(撰修), 언역(諺譯)하게 한 일은 이를 뒷받침하는 조처였다. 또 서원이 본격적으로 설치된 것도 중종조에 시작된 일이었다. 반면 유교 이외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서는 탄압과 금지를 강화하였다. 국초부터 시행되어 오던 승과(僧科)의 폐지, 각도 혁폐사사(革廢寺社)의 전지에 대한 향교 귀속, 사찰의 중창 엄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도승(度僧) 조항 삭제, 사찰의 노비와 전지의 속공(屬公), 승려 금단 절목(僧侶禁斷節目) 제정,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이외의 사찰 철훼 및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등이 이러한 조처였다.

중종 대의 정치는 소강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정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듬해의 박경(朴耕)의 옥과 이과(李顆)의 옥을 비롯하여, 왕 14년(1519)에는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했고, 16년(1521)에는 송사련(宋祀連)의 고변, 22년(1527)에는 동궁 작서의 변[東宮灼鼠之變]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기묘 사화는 연산조의 무오•갑자 양대 사화에 이어 일어난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을 강행하여 노장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조광조 등은 종래의 과거제도를 바꾸어 현량과(賢良科)라는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건의 실시하고, 이를 통하여 그 일파가 대거 등용되었다. 이밖에도 반정 때의 위훈(僞勳)을 삭제할 것을 집요하게 촉구하였으므로 훈구파의 미움과 반발을 빚게 되었다. 이들 훈구파의 반발은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여,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모략으로 왕을 움직여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를 일망 타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사림파의 혁신적 정치는 중단되고, 사림파는 크게 그 세력이 꺾였다.

동궁 작서의 변은, 중종 22년에 세자로 있던 인종(仁宗)의 생일날 불에 탄 쥐가 동궁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이는 태어나자마자 모비를 여읜 세자를 저주한 것으로서 그 혐의는 세자의 서형(庶兄)인 복성군(福城君)과 그 어머니 경빈 박씨(敬嬪朴氏)에게로 돌아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에는 또 세자와 배 다른 아우인 명종(明宗)을 둘러싸고 그 외척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정쟁이다. 이 대•소윤의 대립은 후일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빚게 되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중국의 명조(明朝)와는 여전히 사대(事大)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쪽의 야인(野人)과 남쪽의 왜구(倭寇)는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충돌하게 되었다. 중종 7년(1512)에는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하였고, 18년(1523)에는 여연(閭延)•무창(茂昌)에 들어와 사는 야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또 25년(1530)에는 야인이 산양회보(山羊會堡)에서 변란을 일으켰으나, 곧 물리쳐 평정하였다. 남쪽의 왜에 대해서는 세종 때에 제포(薺浦)•부산포(富山浦)•염포(鹽浦)의 3포(浦)에 한하여 거주를 허용하여 왔는데,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소동을 그치지 않았다. 중종 5년(1510)에 이들 3포에 사는 왜인들이 대마도(對馬島)의 도왜(島倭)와 연결하여 변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3포왜란으로, 관군의 출동으로 즉시 진압되었으나, 동 17년에는 추자도(楸子島) 등지에, 39년(1544)에는 사량진(蛇梁津)에서 변란을 야기하는 등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었다.

남과 북의 이와 같은 왜구에 대비하여, 조정에서는 축성사(築城司)를 설치하였고, 뒤에 이를 비변사(備邊司)라고 개칭하였다. 처음에 하나의 임시 기구였던 이 비변사가 의정부의 기능을 능가하는 상설 기구로 변모하여 조선 왕조 말년까지 존속되었다.

이와 같은 내외 정세의 불안정 속에서도 중종 대에는 많은 문화적 업적이 있었다. 중종 4년(1509)에는 성종대에 이미 완성 반포되었던 《경국대전》과 새로 편성한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출판되었고, 37년(1542)에는 《속록》 이후의 수교(受敎)와 승전(承傳)을 정리하고, 이듬해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완성하였다. 6년(1511)에는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를, 9년(1514)과 13년(1518)에는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속동문선(續東文選)》을, 12년(1517)과 22년(1527)에는 《사성통해(四聲通解)》•《훈몽자회(訓蒙字會)》를, 25년(1530)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편찬 사업과 아울러 11년(1516)에는 주자 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동활자(銅活字: 丙子字)를 제조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언해하였다. 또 33년(1538)에는 성주 사고(星州史庫)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35년(1540)에 사고를 복구하고, 역대 실록을 등사(謄寫)하여 이를 봉안하였다.

중종은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승하하였다. 시호는 공희(恭僖), 존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묘호는 중종(中宗)이며,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3. 《중종실록》 총서

 

왕의 휘는 역(懌)이요,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둘째 아들이며, 모비(母妃)는 정현 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연산군(燕山君)이 사리에 어둡고 마음이 포악하여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추대했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청단(聽斷) 을 잘하였다. 제사를 삼가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공손하게 아랫사람을 대하고 너그럽게 간쟁(諫諍)을 용납하였다. 성심으로 중국을 섬겨 시종 변함이 없었고, 이단(異端)을 신봉하지 않았으며, 유람과 사냥,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완희(玩戲)와 사치한 일도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년에는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여 옛날 정치에 뜻을 집중하였으나, 신진(新進)만을 전임(專任)하였으므로 일이 과격한 것이 많아 뜻을 능히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뒤에 비록 여러 차례 간사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나, 능히 다시 개오(開悟)하였으니, 학문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39년 동안 재위(在位)하였고, 향년(享年) 5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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