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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소장 중국본 문집류
작성자 이창숙 조회수 851
제목 저자 저자 소개
규장각 중국본도서 형성사 연구 연갑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규장각 소장 宋, 元, 明初 刊本 조사보고서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
규장각 소장 귀중본 유서 및 총서 해제 연구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규장각 소장 중국본 문집류 이창숙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규장각 소장 明末淸初 曆算書 박권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규장각 소장 중국본 문집류

  • 이창숙(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丘濬
    『瓊臺詩文會稿』(奎중3718)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

     丘濬(1418-1495年)은 字가 仲深, 號는 深庵․玉峰, 시호는 文莊이며, 海南島 瓊山 사람이다. 明代 초중엽의 名臣이자 理學家로서 海瑞와 함께 해남 출신으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弘治朝에 벼슬은 少保兼太子太保에 이르렀고, 戶部尙書와 武英殿大學士를 역임하였다. 그의 저술은 『大學衍義補』, 『家禮儀節』, 『世史正綱』, 『朱子學的』 등 매우 풍부하다. 南宋 眞德秀의 『大學衍義』를 보완한 『大學衍義補』는 조선에서도 널리 읽혔다. 사대부들이 희곡을 경시하던 시절에 그는 『五倫全備記』를 지어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명대 중기 이후 문인 희곡 창작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오륜전비기』는 유교 윤리를 선양하는 도덕교화극으로서 조선에서는 그 대사 부분만 언해하여 司譯院에서 漢語 교재로 쓰기도 하였다. 그의 희곡 작품에는 『投筆記』 등이 더 있다. 그의 문집으로서 규장각에는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와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이 1 질씩 소장되어 있다.
     구준의 문집은 생전에 이미 출간되었으며, 사후 자손과 후학들이 수 차례 재편집, 간행하였다. 『四庫全書』에는 『瓊臺詩文會稿重編』이 수록되었으며, 그 「提要」에 문집 간행 경위를 간략히 소개하였다. 그의 생전에 문인 蔣冕(1462-1532) 등이 스승의 詩와 散文을 나누어 각각 책으로 묶었다. 먼저 그의 詩篇을 모아 『瓊臺吟稿』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고, 이어서 記, 序, 表, 奏 등 산문을 모아 『瓊臺類稿』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 후 嘉靖 년간에 鄭廷鵠(1505-1563)이 『吟稿』와 『類稿』를 합치고, 자신이 얻은 寫本을 더하여 12 권으로 묶고 『瓊臺會稿』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1621년 무렵(天啓 초년)에 그의 후손 爾榖이 『類稿』의 2/10, 『會稿』의 3/10을 고르고, 여기에 『吟稿』를 합쳐 간행하여 『重編會稿』라고 하였다. 『重編會稿』가 바로 『瓊臺詩文會稿重編』이며, 분량은 『類稿』와 『會稿』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엄정하게 정화를 뽑아 수록하였으므로 구준의 저작을 충분히 개괄한다고 하였다.1)
      「제요」의 설명에 따르면 구준의 문집은 애초에 시가집 『경대음고』과 『경대유고』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후대에 이 둘을 합치고,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시문을 더하여 『경대회고』가 나왔다. 그 후에 다시 『경대유고』와 『경대회고』에서 일부를 가려뽑고, 최초의 시가집 『경대음고』를 모두 더하여 『경대시문회고중편』이 나왔다. 『경대시문회고중편』을 편집할 때 『유고』와 『회고』에서는 10분의 2, 3 정도만 뽑았으므로 자연히 그의 모든 시문이 실리지 않았다. 조선의 시인이 차운한 구준의 시 가운데 『瓊臺詩文會稿重編』에 실리지 않은 것도 있어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준다. 崔錫鼎(1647-1715)이 차운한 「題牧羊圖」 시는 『瓊臺詩文會稿重編』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림 1〉『瓊臺詩文會稿』(奎중3718)

     『瓊臺詩文會稿』(奎중3718)는 12책 24권이며, 조선 책의 표지로 개장되어 있다. 겉표지 제목은 “瓊臺會稿”라고 되어 있고, 겉표지 오른쪽 상단에는 책별로 각 책에 수록된 문체를 小字로 표기하였다. 겉표지 서명 다음에 제1책은 “序”와 “目錄”으로, 제2책부터는 “詩一”, “詩二” 등으로 내용을 밝혀 놓았다. 본문에는 제2책부터 권별 제목을 “瓊臺詩文會稿重編卷之一”, “瓊臺詩文會稿卷重編之二” 등으로 달아 놓았다. 따라서 이 책의 정식 명칭은 “瓊臺詩文會稿重編”이다.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은 9 책만 남아 있으며, 역시 총 24 권이다. 표지는 역시 모두 조선식으로 개장되어 있다. 각 책의 표지에 서명을 “邱文莊集”이라고 쓰고, 내용을 “詩” 등으로 표기하였다. 각 책마다 “共十冊”이라고 써 놓았으므로 원래는 10 책이었으며, 1 책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 9 책은 제1책 “邱文莊集一” “詩”부터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와 내용이 완전히 같으며, 사라진 1 책은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의 序와 目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四庫全書』에 수록된 『瓊臺詩文會稿重編』에는 序와 目錄이 없다.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은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와 완전히 동일한 판본이다.

    〈그림 2〉『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의 제1책에는 각 판본의 서문 10 편을 모두 실었다. 그 서문과 후대의 目錄書를 참고하면 구준 문집의 간행 경위를 더욱 상세히 추적할 수 있다. 먼저 그 서문의 작자와 제목, 작성 시기를 수록 순서대로 나열한다.
    1. 葉向高(1559-1627), 丘文莊公集序.
    2. 周延儒(1593-1643), 丘文莊公集序.
    3. 何喬新(1427-1502), 瓊臺類稿序. 弘治 五年 壬子 夏六月 庚子朔(1492년 6월 1일)에 작성.
    4. 陳熙昌, 瓊臺詩文會稿序. 天啓 癸亥(1623년)에 작성.
    5. 程敏政(1446-1499), 瓊臺丘先生文集序. 弘治 己酉 仲冬(홍치 2년, 1489년 12월) 穀旦에 작성.
    6. 王弘誨(1541-1617), 重刻瓊臺類稿序. 萬曆三十三年乙巳嘉平月(1605년 12월)에 작성.
    7. 李東陽(1447-1516), 瓊臺吟稿序
    8. 周希賢, 瓊臺吟稿序. 萬曆 戊子 仲春(만력 16, 1588년 2월)에 작성.
    9. 黃佐(1490-1566), 瓊臺會稿序. 嘉靖 壬子 季冬(1552년 12월)에 작성.
    10. 鄭廷鵠(1505-1563), 刻瓊臺會稿後序. 嘉靖 癸丑(가정 32년, 1553년) 八月 中秋에 작성.
    先生存時, 文人刻其所作詩什凡若干卷, 題曰吟稿. 續又裒其記序表奏凡若干卷, 題曰類稿, 行于世已七紀于玆矣.
    嘉靖癸丑八月中秋 가정 32년 1553
    또한 종손 丘爾穀이 『重編瓊臺會稿』를 편집하고 명사들에게 서문을 요청하는 글 「重編瓊臺會稿乞言引」이 실려 있다.

    11. 丘爾穀, 重編瓊臺會稿乞言引. 天啓元年 仲春 吉旦(1621년 2월 1일)에 작성.
     위의 각 서문에 보이는 시문집의 명칭은 “丘文莊公集”, “瓊臺類稿”, “瓊臺丘先生文集”, “瓊臺吟稿”, “瓊臺會稿” 등이며, 서문을 작성한 때는 1489년, 1492년, 1552년, 1553년, 1588년, 1605년, 1623년이다. 1489년에 쓴 程敏政의 「瓊臺丘先生文集序」와 1492년에 쓴 何喬新의 「瓊臺類稿序」, 1552년 12월에 쓴 黃佐(1490-1566)의 「瓊臺會稿序」와 1553년에 쓴 鄭廷鵠(1505-1563)의 「刻瓊臺會稿後序」는 각각 동일한 판본의 다른 서문다. 따라서 구준의 시문집은 1623년까지 총 5 회 간행되었다. 『四庫全書』에 수록된 『重編瓊臺會藁』(24卷)의 「提要」에는 그 요점만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경대음고』는 1492년이나 그 직전에 간행되었다. 李東陽(1447-1516)의 「瓊臺吟稿序」는 이 『경대음고』에 붙인 서문이다. 『사고전서』의 「제요」에 따르면 구준의 문인과 아들이 『경대음고』를 먼저 간행하고, 이어서 『경대유고』를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中國國家圖書館 소장 『瓊臺吟稿』의 서지 사항에는 2 책 10 권이며, 蔣雲漢이 弘治 5년(1492)에 출판하였다고 한다. 蔣雲漢은 蔣冕(1500년 전후 재세)과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동일인은 아니다. 장면은 廣西 全州 출신으로서 戶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文定이다. 장운한은 四川 巴縣 즉 지금의 重慶 출신이며, 福建布政使를 지냈다. 『사고전서』「제요」를 비롯한 목록서에는 모두 장면이 스승의 아들 敦과 『경대음고』를 편집하였다고 하였으니 중국국가도서관의 書誌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周希賢은 福建 蒲田 사람으로서 瓊州知府로 근무하던 萬曆 戊子年, 즉 만력 16년 서기 1588년 仲春에 「瓊臺吟稿序」를 작성하였다. 그는 “이 해 가을 구월, 동료 대부 동망봉이 『경대음고』를 보여 주며 서문을 부탁하였다(玆秋九月, 同寅董大夫望峰君以瓊臺吟稿示予, 且屬以序).”고 말하고, 간행의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대음고』는 초간본이 나온 이후 다시 간행되었음이 후대 목록서를 통해 확인되고, 그 간행 시기는 주희현이 서문을 쓴 이 때가 가능 유력해 보인다. 중국국가도서관에 소장된 10 권짜리 『경대음고』는 “弘治五年”이라고 간행 년대를 정확히 밝혀 놓았다. 따라서 1492년의 초판본은 10 권으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黃虞稷(1626-1692)이 1680년 무렵에 완성한 『千頃堂書目』에는 『瓊臺吟稿』가 “十二卷”이라고 하였다. 『明史・藝文志』에서도 “瓊臺類稿五十二卷, 詩十二卷”이라고 하였다. 『明史・藝文志』는 『千頃堂書目』을 근거로 작성하였으므로 “詩十二卷”이 바로 『瓊臺吟稿』이다. 그러므로 『千頃堂書目』과 『明史・藝文志』에 기록된 12 권짜리는 초간본과는 다른 판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12권짜리는 지금으로서는 주희현이 서문을 쓴 재간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주희현은 “知瓊州府事”로 있을 때 서문을 썼으니 『음고』재간본은 경주에 살던 후손이나 후학들이 간행한 듯하다. 이 점은 실물과 기타 자료를 통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위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瓊臺吟稿』와 『瓊臺類稿』의 간행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1492년, 홍치 5년, 初刊, 10 권. 李東陽의 「瓊臺吟稿序」.
     2. 1588년, 만력 16년, 再刊, 12 권. 朱希賢의 「瓊臺吟稿序」.

     『瓊臺類稿』는 1492년에 간행되었다. 何喬新(1427-1502)의 「瓊臺類稿序」와 程敏政(1446-1499)의 「瓊臺丘先生文集序」는 『경대유고』의 서문이다. 그런데 『경대유고』에는 산문뿐만 아니라 시가도 일부 들어 있었던 듯하다. 정민정은 “선생의 문인 한림 吉士 장면과 그의 아들 태학생 돈이 선생이 평생 지은 시문을 약간 권으로 편집하여(先生文人內翰蔣君冕及其嗣子太學生敦輯先生平日詩文爲若干卷)” 자신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밝혔다. 이 때에는 아직 서명을 “瓊臺類稿”라고 하지 않았던 듯하다. 하교신 역시 구준이 “그가 평생 지은 시문 『경대유고』를 내어 내게 교열하고 전할 만한 것을 선정하라고(嘗出其平生所作詩文曰瓊臺類稿者, 屬予校閱而定其可傳者) 부탁하였다”고 밝혔다. 하교신은 여러 달 걸려 “찬란하여 전할 만한 것 약간 권(定其灼然可傳者凡若干卷)”을 선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가가 빠지고 산문만 남았을 것이다. 1553년에 鄭廷鵠이 『瓊臺詩文會稿』를 편집할 때 『類稿』의 稿本에서 산문과 시가를 각각 202 편, 264 편을 더 얻었다고 밝혔다. 애초 구준이 편집한 『유고』고본에는 시가도 들어 있었으며, 그 분량도 간행본 『유고』보다 매우 많았던 것이다.
     하교신이 교열과 선정을 마치고 서문을 쓴 때가 1492년이다. 정민정은 하교신보다 서문을 3 년 먼저 썼다. 蔣冕과 丘敦이 문집을 편집하고 정민정에게 서문을 부탁하였을 때는 아직 “瓊臺類稿”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정민정은 서문의 제목을 “瓊臺丘先生文集序”로 하였을 것이다. 약 3 년 후 구준은 제자와 아들이 편집한 자신의 문집에 “瓊臺類稿”라고 이름을 붙이고, 하교신에게 교열과 재편집을 부탁하였다. 하교신은 작업을 마쳤을 때 마침 兩廣 지역으로 출정 가던 閔珪(1430?-1511)가 이를 보고서 반드시 간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구준은 하교신에게 서문을 부탁하고, 홍치 5년 즉 1492년에 『경대유고』를 간행하였다.
     『경대유고』는 1605년이나 그 직후에 다시 간행되었다. 구준과 동향으로서 南京禮部尙書를 지낸 王弘誨(1541-1617)는 1605년 12월(萬曆 33년 嘉平月)에 「重刻瓊臺類稿序」를 지었다. 그는 서문에서 “지금 공의 후손 문학 종이 각공을 모아 번각하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今公之聞孫文學𨛱始鳩工翻刻, 問序于予.)”고 하였다. 그는 또 이전에 『瓊臺詩文會稿』가 이미 나왔으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도 밝혀 놓았다. 『瓊臺詩文會稿』는 1553년에 鄭廷鵠이 간행하였다. 그는 1599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아 1605년에는 定城 文廟 동쪽에 尙友書院을 세웠다. 구준의 후손 종이 『경대유고』를 중각한 일도 왕홍회의 교육 사업에 힘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번각”하였다고 했으니 중각본은 초간본과 내용에 차이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千頃堂書目』에 『瓊臺類稿』가 “五十二卷”이라고 하였고,『明史・藝文志』에서도 “瓊臺類稿五十二卷”이라고 하였다. 『瓊臺類稿』는 처음부터 52권으로 간행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何喬新과 程敏政의 서문에는 “若干卷”이라고 하였으니 52권을 “若干卷”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대유고』의 간행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3. 1492년, 홍치 5년, 『瓊臺類稿』간행, 52 권. 程敏政, 「瓊臺丘先生文集序」. 何喬新, 「瓊臺類稿序」.
     4. 1605년 또는 그 직후, 『瓊臺類稿』重刻, 52 권. 王弘誨(1541-1617), 「重刻瓊臺類稿序」.

     『음고』와 『유고』가 나온 지 60년 후, 1553년에 鄭廷鵠(1505-1563)이 두 책을 합치고, 두 책에 수록되지 않은 구준의 시문을 더하여 『瓊臺會稿』를 편집, 출간하였다. 黃佐(1490-1566)가 이 책에 붙인 서문 「瓊臺會稿序」를 嘉靖 壬子 季冬, 즉 1552년 12월에 작성하였으니 정정곡은 1552년에 편집 작업을 마쳤고, 다음해에 출간한 것이다. 黃佐(1490-1566)는 廣東 香山 사람으로 南京 國子監祭酒 및 禮部右侍郞을 지냈으며, 시호는 文裕이다. 정정곡은 瓊山府 사람으로 字가 元侍이고, 號는 篁溪이며, 어릴 적에 구준의 증손 邱郊, 邱祁와 함께 海瑞의 할아버지 海貞範에게서 배웠다. 그는 邱郊와 邱祁에게서 구준의 手蹟과 문인들의 代錄을 얻어 보니 이미 간행된 두 책과는 매우 다른 것이 있어 이를 바로잡을 뜻을 세웠다. 弱冠에 郡學에 들어가서 구준이 서재에 소장했던 書目을 읽었고, 또 군학에 보관된 寫本을 보니 구준이 직접 교정한 것으로 『음고』『유고』두 책과 비교하니 篇章이 간요하였다. 이에 정정곡은 직접 초록하고, 간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후 1550년 무렵 江西督學副使가 되어 업무의 여가에 『瓊臺吟稿』와 『瓊臺類稿』를 다시 교감하고 합쳐서 『瓊臺會稿』12卷을 편집하였다. 그 과정을 「刻瓊臺會稿後序」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 “근자에 학정을 보는 여가에 광주 막료 담숭문에게서 『유고』번본을 얻어 다시 더하고 교정하여 기와 서 등 산문 202 편, 시와 부 등 운문 264 편을 얻고, 『음고』와 『유고』를 모으고 합쳐서 12 권을 만들고 南昌에서 각인하였다. 내가 고른 것은 없고, 선생이 직접 고른 것을 붙여 더하였다. 그러므로 정곡이 모았다고 한 것이다.(邇者, 視學之暇, 第取廣幕談君崇文所惠類稿藩本, 重加增定得記序諸體二百有二篇, 詩賦諸體二百六十有四篇, 會前二稿, 合爲十二卷, 刻之洪都. 非有所擇, 因先生所自定爲附益之, 故自鵠會也.)” 洪都는 江西省의 省會 南昌의 옛 이름으로서 정정곡이 근무하던 곳이다. 廣州와는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談崇文은 어떤 경로로 구준의 고본을 입수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海南島에서 가까운 廣州의 幕府에서 근무하였으니 그도 海南島나 가까운 광동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구준의 수고를 손에 넣었고, 이를 정정곡에게 제공하였다. “類稿藩本”이란 『類稿』의 “藩本”일 텐데 藩本이란 “繁本”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애초에 구준이 『類稿』를 만들기 위해 원고를 수합하여 놓은 초고본이었을 것이다. 이 번본을 다시 추리고 가려서 간행한 것이 『유고』이다. 정정곡은 이 번본 『유고』로부터 산문 202 편, 시가 264 편을 더 얻었다. 그는 구준의 시문을 추려낸 것 없이 고본에서 『음고』와 『유고』에 실리지 않은 것은 모두 다시 넣어 『회고』를 편집하였다. 1553년 정정곡이 『음고』와 『유고』를 합치고, 두 책에 실리지 않은 시가 264 편, 산문 202 편을 더하여 『瓊臺會稿』를 편집, 간행하였다.
     5. 1553년 『瓊臺會稿』간행. 黃佐 「瓊臺會稿序」, 鄭廷鵠 「刻瓊臺會稿後序」.

     『瓊臺會稿』가 나옴으로써 구준의 문집은 『瓊臺吟稿』, 『瓊臺類稿』, 『瓊臺會稿』가 공존하게 되었다. 1623년 구준의 玄孫 爾穀과 爾懿가 이 셋을 모아 합쳐서 『重編會稿』를 편집, 간행하였다. 이곡은 天啓 元年 仲春 吉旦, 즉 1621년 2월 1일에 「重編瓊臺會稿乞言引」을 썼으니 편집 작업은 1621년 초에는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이후 그들은 葉向高(1559-1627)와 周延儒(1593-1643)에게서 각각 「丘文莊公集序」를, 陳熙昌에게서 「瓊臺詩文會稿序」를 받아 간행하였다. 앞 두 사람은 서문 작성 시기를 밝히지 않았으나 진희창은 天啓 癸亥年, 1623년 봄에 지었으니 『경대시문회고중편』은 1623년에는 간행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6. 1623년 丘爾穀, 丘爾懿 『瓊臺詩文會稿重編』간행. 葉向高(1559-1627) 「丘文莊公集序」, 周延儒(1593-1643) 「丘文莊公集序」, 陳熙昌, 「瓊臺詩文會稿序」.

     『瓊臺詩文會稿重編』에 나란히 서문을 쓴 주연유와 진희창은 이후 전혀 다르게 삶을 마감하여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진희창은 廣州에서 淸軍에 항거하다 죽은 “嶺南三忠”의 한 사람인 陳子壯(1596-1647)의 아버지로서 그 역시 강직한 삶을 살았다. 그는 廣州 사람으로서 1597년(萬曆 25) 진사가 되었다. 서문을 쓴 다음해 1624년 吏科給事中일 때 그는 아들과 함께 환관 魏忠賢의 전횡에 맞서다가 부자가 같은 날 罷官,削籍되었다. 崇禎 초년에 위충현이 실각하고,진희창 부자는 복권되어 그는 옛 직관 吏科給事中,아들 子壯은 左春坊左諭德이 되었다. 진희창은 그 후 곧 세상을 떠났다. 주연유는 浙江 宜興 사람으로 字는 玉繩, 號는 挹齋이다. 스물 살 때 연이어 會元, 狀元으로 급제하였으며 修撰에 임명되었다. 崇禎이 즉위하자 禮部右侍郎이 되었다. 1643년 4월, 淸兵이 山海關을 들어오자 주연유는 출전을 자청하여 나가서는 거짓 捷報로 황제를 속이고 太師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나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自盡하라는 명을 받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丘濬은 평생 저술이 풍부하기로 손에 꼽힌다. 시문도 매우 많이 지었다. 이동양은 「瓊臺吟稿序」에서 그가 평생 지은 시는 10,000 편에 육박하나 『음고』에는 1/20만 남았다고 하였다. “평생 얻은 것이 10,000 편에 가까우나 자주 호사가들이 가져 가고, 만년에 남은 것을 모아 분류하여 편집하니 겨우 1/20뿐이었다.(平生所得近萬篇, 往往爲好事者取去, 晩乃掇其存者, 分類爲編, 殆二十之一而已.)”고 하였으니 『음고』에 실린 시는 500 편 남짓하였다는 뜻이다. 후손 爾穀은 편집의 과정을 이렇게 간략히 설명하였다. “『유고』에서 2/10를 뽑고, 『회고』의 3/10을 더하고, 『음고』를 더하여 모아서 새기고, 그 이름을 『중편회고』라고 하였다(遴類稿十之二, 增會稿十之三, 倂吟稿, 合刻, 顔其額曰, 重編會稿.)”고 밝혔다. 즉 『유고』에서 2/10, 『회고』에서는 3/10만 남기고는 모두 빼버렸다. 시집인 『음고』는 온전히 남겼으므로 주로 산문을 줄였다는 뜻이다. 앞에서 본 대로 『千頃堂書目』과 『明史・藝文志』에서 『유고』는 52 권, 『음고』는 12 권이라고 하였다. 권수로만 보면 산문이 시가의 4 배가 넘는다. 그런데 구이곡의 편집을 거쳐 산문은 대폭 삭제되었다. 현존 『瓊臺詩文會稿重編』24 권 가운데 시가는 권1부터 권6까지 6 권이고, 나머지는 산문이다. 시는 모두 약 760 편이다. 이 수는 이동양이 본 500 편에 鄭廷鵠이 따로 얻은 264 수를 합친 수와 거의 같다. 이로써 이곡이 『회고중편』편집은 이전의 3 가지 시문집에서 산문을 삭제하는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瓊臺詩文會稿』(奎중3718) 제1책에는 丘濬의 초상화, 「丘文莊公遺像」이 실려 있다. 紗帽를 쓰고 胸背가 달린 朝服을 입고 角帶를 두른 전형적인 明朝의 관리상이다. 필자는 이 초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책장이 일부 파손되었거나 목판이 일부 파손된 줄로 생각했다. 그림의 한 부분에 큰 흠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쪽 눈이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다. 조그만 책판에 판각한데다 線刻이 거칠고 투박하여 그림으로서의 가치는 쳐 줄 수 없지만, 이 오른쪽 눈 때문에 이 그림은 주인공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양 눈 주위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고,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둥글게 비어 있다. 구준은 眼疾에 걸려 1493년(홍치 6) 朝參을 면제 받았고, 이듬해에는 오른눈을 실명하였다. 그래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丘文莊公遺像」은 만년의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눈 없는 자신의 모습에 할 말이 많았을까. 「유상」 뒤에 「自贊」이 4 수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제3수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그림 3〉丘文莊公遺像

    아 이것은 그림이지 몸이 아니다. 몸이지만 기상은 아니다. 자연에서 나오지 않고 의지에서 나와서 그 몸의 닮음만 얻었지 그 마음의 진체는 얻지 못하였다. 그렇기는 해도 기상과 외모의 본질이 때때로 귀의한다. 조물주 도화의 가상이 다행에 세상에 남을 수 있으니 후세 사람들 가운데 이를 보는 자는 그래도 말하리라. “이 이는 경산의 구중심 씨라.”고 
    噫. 此影也而非形, 形也而非氣. 不出於自而然出於有意, 徒得其形之彷彿而不得其心之眞至. 雖然氣體之眞有時而歸之. 造物畵圖之假, 幸可存於人世, 後之人有見之者, 尙曰, 此, 瓊山之丘仲深氏. 
     글자를 새겨 찍는 목판에 초상화를 대략 새겼다. 그 때는 목판화라도 매우 세밀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기술이 이미 고도로 발달하였으니 후손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할아버지의 모습을 훨씬 세밀하고 정확하게 남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준이 말한 대로 그림이 아무리 실물을 베껴도 마음의 진체는 표현할 수 없다. 오히려 거칠고 투박한 선으로 잃어버린 눈을 없는 채 비워 놓아 傳神을 실현하고 있다. 눈은 마음의 창, 사람에게 있는 것 가운데 눈만큼 맑은 것이 없고, 傳神 寫照는 바로 阿堵, 여기 눈동자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 없는 사람의 없는 눈이 그의 정신을 전달해 준다.

     『瓊臺詩文會稿』(奎중3718)과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에는 장서인이 각각 여러 방 찍혀 있다. 『瓊臺詩文會稿』(奎중3718)에는 “帝室圖書之章”과 “集玉齋”가 찍혀 있어 대한제국 시기 황실에서 소장한 책임을 알려 준다. 『瓊臺詩文會稿重編』(奎중3719)에는 “帝室圖書之章”, “弘文館”, “摛文院”, “慕齋鑒定”, “宛平王氏家藏”이 찍혀 있다. “慕齋鑒定”은 朱文圓印, “宛平王氏家藏”은 白文方印이다. 완평 왕씨는 청초의 대신 王熙(1628-1703)이다. 그는 宛平 사람으로서 자가 子雍,호는 慕齋이며 順治 4년에 진사 급제하여 庶吉士가 되고, 檢討에 임명되었다. “慕齋鑒定”과 “宛平王氏家藏”은 이 책이 왕희의 소장품이었음을 말해 준다. 완평은 조선의 연행사절이 경유하는 곳이니 혹 연행사절을 통해 이 책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들어온 후 弘文館에서 보다가 摛文院으로 이관되었고, 다시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왕희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언제 어떤 경로로 조선으로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4〉慕齋鑒定 宛平王氏家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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