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廣輿圖 광여도

  • 편저자 : [編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90-58
  • 간행연도 : [18世紀(英祖13-英祖52:1737-1776)]
  • 책권수 : 7冊,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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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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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 현내면, 거진읍, 죽왕면, 토성면과 속초시내 영랑호 주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白頭大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홍수 때 작은 하천을 통해 운반된 土砂가 만들어 놓은 潟湖가 해안가에 많이 보이고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花津浦는 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 지역의 석호 중 가장 크다. 해안가의 경치 좋은 곳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廣湖 근처의 淸澗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공간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 縣內面은 熱山廢縣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의 왼쪽에는 신라 때 창건되고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나옹화상에 의해 중수되어 지도 속 이름으로 고쳐진 乾鳳寺가 표시되어 있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기타 지도 왼쪽 백두대간 위에 인제로 넘어가는진부령, 미시령 등의 고개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간성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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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 현내면, 거진읍, 죽왕면, 토성면과 속초시내 영랑호 주변에 해당하며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의 白頭大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홍수 때 작은 하천을 통해 운반된 土砂가 만들어 놓은 潟湖가 해안가에 많이 보이고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花津浦는 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 지역의 석호 중 가장 크다. 해안가의 경치 좋은 곳에는 여러 개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廣湖 근처의 淸澗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유명했던 곳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공간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 縣內面은 熱山廢縣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의 왼쪽에는 신라 때 창건되고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나옹화상에 의해 중수되어 지도 속 이름으로 고쳐진 乾鳳寺가 표시되어 있다. 이 절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기타 지도 왼쪽 백두대간 위에 인제로 넘어가는진부령, 미시령 등의 고개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강릉부
    이미지

    강릉부는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백두대간이 지나가며 동서를 넘나드는 고개로는 大關嶺이 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영동·영서로 나누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동쪽의 작은 하천들은 동해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들은 한강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위쪽에 있는 內面은 지금의 홍천군에 속해 있으며 북한강 지류 홍천강의 상류이다. 동해안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香湖·鏡湖·楓湖가 보이고 있다. 풍호는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둘레 2.5km의 호수였지만 지금은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사라졌다. 향호는 주문진읍 향호리에 있고 경호는 강릉시내에 있는 경포호이다. 읍치에는 土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客舍와 衙(舍) 등으로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읍치 왼쪽에 있는 五峯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세워졌고 孔子, 朱子, 宋子(송시열)을 배향하였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松潭書院은 李珥(1536-1584)를 봉안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조선 5대 史庫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 慈藏法師에 의해 지어졌고, 고려 때 만들어진 국보 48호 9층석탑으로 유명한 月精寺가 그려져 있다. 기타 驛과 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강릉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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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부는 강릉시와 정선군의 임계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홍천군의 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백두대간이 지나가며 동서를 넘나드는 고개로는 大關嶺이 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영동·영서로 나누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동쪽의 작은 하천들은 동해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들은 한강 상류에 해당한다. 서쪽 위쪽에 있는 內面은 지금의 홍천군에 속해 있으며 북한강 지류 홍천강의 상류이다. 동해안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香湖·鏡湖·楓湖가 보이고 있다. 풍호는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둘레 2.5km의 호수였지만 지금은 모두 논으로 개간되어 사라졌다. 향호는 주문진읍 향호리에 있고 경호는 강릉시내에 있는 경포호이다. 읍치에는 土築의 읍성이 있었으며 客舍와 衙(舍) 등으로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읍치 왼쪽에 있는 五峯書院은 1556년(명종 11)에 세워졌고 孔子, 朱子, 宋子(송시열)을 배향하였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松潭書院은 李珥(1536-1584)를 봉안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조선 5대 史庫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 慈藏法師에 의해 지어졌고, 고려 때 만들어진 국보 48호 9층석탑으로 유명한 月精寺가 그려져 있다. 기타 驛과 面의 표시가 자세하다.(이기봉)

  • 고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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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고성군이다. 고을의 서쪽에는 金剛山이 있다. 금강산의 楡店寺 근처에서 발원한 南江은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남쪽까지 흐르며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동해와 만난다. 東流하는 작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潟湖가 많이 나타난다. 고을의 바닷가 쪽은 지금 海金剛이라 불리며, 금강산 쪽은 外金剛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확대·강조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三日浦는 주위 약 5.8km의 호수로서 關東八景의 하나였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의 정자가 四仙亭이다. 호수와 정자의 이름 모두 이곳의 절경에 끌려 삼일 동안 머물렀다는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유명한 네 화랑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쪽으로는 금강산의 4대 사찰에 해당하는 楡店寺와 新溪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두 사찰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여러 번의 화재 속에서도 계속 번창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탄 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주변에는 화려한 경치만큼 아름다웠던 海山亭과 帶湖亭이 표시되어 있다. 유점사 밑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고성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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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 수동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북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고성군이다. 고을의 서쪽에는 金剛山이 있다. 금강산의 楡店寺 근처에서 발원한 南江은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남쪽까지 흐르며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동해와 만난다. 東流하는 작은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潟湖가 많이 나타난다. 고을의 바닷가 쪽은 지금 海金剛이라 불리며, 금강산 쪽은 外金剛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매우 확대·강조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三日浦는 주위 약 5.8km의 호수로서 關東八景의 하나였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위의 정자가 四仙亭이다. 호수와 정자의 이름 모두 이곳의 절경에 끌려 삼일 동안 머물렀다는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유명한 네 화랑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쪽으로는 금강산의 4대 사찰에 해당하는 楡店寺와 新溪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두 사찰 모두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여러 번의 화재 속에서도 계속 번창해지만 한국전쟁 때 불탄 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주변에는 화려한 경치만큼 아름다웠던 海山亭과 帶湖亭이 표시되어 있다. 유점사 밑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관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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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東은 조선시대에 강원도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전체와 경상도 울진군 그리고 북한의 법동군·문천시·원산시·법동군·고산군·안변군·통천군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에 해당한다. 강원도는 총 26개의 고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사 소재지는 원주였다. 지도에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縣''으로 표시된 것은 고려와 조선 초에 다른 고을에 來屬된 廢縣들이다. 지도에는 驛의 표시가 자세한데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察訪驛인 춘천의 保安驛과 양양의 祥雲驛은 직사각형 안에 특별히표시하였다. 군사 시설로는 평해의 越松浦鎭과 북쪽 회양 부근의 烽燧 표시가 유일하다.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으며, 서쪽으로 수많은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산줄기 위에는 산과 고개의 표시도 자세하다. 백두대간 서쪽의 가장 북쪽으로는 臨津上流라 표시된 임진강이, 중간에는 龍津上流라 표시된 북한강이, 남쪽으로는 漢江上流라 표시된 남한강이 흐르며,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작은 하천들이 東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가고 있다. 동해안쪽으로는 潟湖에 해당하는 수많은 호수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릉 서쪽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이 지도에서 유일한 사찰표시인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기타 영월에 있었던 단종의 무덤인 莊陵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 백암온천으로 개발된 평해의 溫井과 서북쪽 伊川의 溫井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관동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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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東은 조선시대에 강원도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지금은 남한의 강원도 전체와 경상도 울진군 그리고 북한의 법동군·문천시·원산시·법동군·고산군·안변군·통천군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에 해당한다. 강원도는 총 26개의 고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사 소재지는 원주였다. 지도에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縣''으로 표시된 것은 고려와 조선 초에 다른 고을에 來屬된 廢縣들이다. 지도에는 驛의 표시가 자세한데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察訪驛인 춘천의 保安驛과 양양의 祥雲驛은 직사각형 안에 특별히표시하였다. 군사 시설로는 평해의 越松浦鎭과 북쪽 회양 부근의 烽燧 표시가 유일하다.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으며, 서쪽으로 수많은 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산줄기 위에는 산과 고개의 표시도 자세하다. 백두대간 서쪽의 가장 북쪽으로는 臨津上流라 표시된 임진강이, 중간에는 龍津上流라 표시된 북한강이, 남쪽으로는 漢江上流라 표시된 남한강이 흐르며,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작은 하천들이 東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가고 있다. 동해안쪽으로는 潟湖에 해당하는 수많은 호수들이 표시되어 있다. 강릉 서쪽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이 지도에서 유일한 사찰표시인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기타 영월에 있었던 단종의 무덤인 莊陵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 백암온천으로 개발된 평해의 溫井과 서북쪽 伊川의 溫井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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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 원남면, 원북면, 금성면, 창도면, 통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금화군과 창도군 일대이다. 북쪽 회양에서 들어온 북한강의 상류가 고을 동쪽을 지나 남쪽 낭천으로 흘러간다. 南大川(지금의 금성천)이 고을 서북쪽의 물을 받아 동남쪽으로 흘러 錢浦에서 북한강 본류에 합쳐진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쪽의 白亦山으로부터 고을의 鎭山 慶坡山을 거쳐 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의 모습이다. 南大川이 고을의 앞쪽을 휘감아 돌아가고, 강 건너에 자리잡은 南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樓閣과 亭子를 비롯하여 작은 섬과 다리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岐城面과 동쪽에 있는 通口面은 고려때 병합된 廢縣의 이름이 그대로 面으로 된 경우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와 驛의 표시가 자세하고, 지도 오른쪽의 金剛路를 통해 멀지 않은 곳에 金剛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금성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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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 원남면, 원북면, 금성면, 창도면, 통구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금화군과 창도군 일대이다. 북쪽 회양에서 들어온 북한강의 상류가 고을 동쪽을 지나 남쪽 낭천으로 흘러간다. 南大川(지금의 금성천)이 고을 서북쪽의 물을 받아 동남쪽으로 흘러 錢浦에서 북한강 본류에 합쳐진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쪽의 白亦山으로부터 고을의 鎭山 慶坡山을 거쳐 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의 모습이다. 南大川이 고을의 앞쪽을 휘감아 돌아가고, 강 건너에 자리잡은 南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樓閣과 亭子를 비롯하여 작은 섬과 다리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岐城面과 동쪽에 있는 通口面은 고려때 병합된 廢縣의 이름이 그대로 面으로 된 경우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와 驛의 표시가 자세하고, 지도 오른쪽의 金剛路를 통해 멀지 않은 곳에 金剛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김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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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김화읍, 서면, 근남면, 근동면, 근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 동·남쪽의 물을 받은 남대천이 고을 서쪽으로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겹겹이 감싼 전형적인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 있는 柳琳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平壤兵使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柳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忠烈祠도 이 고을에서 平壤監司로 있었던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고개의 표시를 ''古介''와 ''峴''으로 표시하여 두 가지가 당시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郵?은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종6품의 銀溪察訪이 머무는 곳으로서 生昌驛과는 구별짓고 있다.(이기봉)

  • 김화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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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김화읍, 서면, 근남면, 근동면, 근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다. 고을 동·남쪽의 물을 받은 남대천이 고을 서쪽으로흐르는 한탄강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겹겹이 감싼 전형적인 풍수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 있는 柳琳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平壤兵使로서 이 고을에서 승리를 거둔 柳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忠烈祠도 이 고을에서 平壤監司로 있었던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또한 고개의 표시를 ''古介''와 ''峴''으로 표시하여 두 가지가 당시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충열사 아래쪽에 있는 郵?은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종6품의 銀溪察訪이 머무는 곳으로서 生昌驛과는 구별짓고 있다.(이기봉)

  • 낭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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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현은 지금의 사내면을 제외한 화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북쪽 金城縣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의 춘천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곳에서는 북한강이 母津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지금 화천댐이 만들어져 파로호라 불리고 있으며, 水洞里 부근에는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다 중단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향교 아래쪽에 있는 牲山이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와 동쪽의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南向의 일반적 입지와는 다르다. 읍치 주변에 龍首와 龍池 등 龍과 관련된 지명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지도에는 面의 이름과 함께 중요한 마을의 이름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읍치 위쪽의 新邑里는 1570년(선조 3)과 1605년에 대 홍수가 발생하여 읍치를 잠시 옮긴 곳이며, 1633년(인조 11)에 지도에 나오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낭천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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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현은 지금의 사내면을 제외한 화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동북쪽 金城縣에서 들어온 북한강이 고을의 한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의 춘천으로 빠져나가는데 이곳에서는 북한강이 母津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지금 화천댐이 만들어져 파로호라 불리고 있으며, 水洞里 부근에는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다 중단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향교 아래쪽에 있는 牲山이다. 읍치는 서쪽에서 들어온 산줄기와 동쪽의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南向의 일반적 입지와는 다르다. 읍치 주변에 龍首와 龍池 등 龍과 관련된 지명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지도에는 面의 이름과 함께 중요한 마을의 이름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읍치 위쪽의 新邑里는 1570년(선조 3)과 1605년에 대 홍수가 발생하여 읍치를 잠시 옮긴 곳이며, 1633년(인조 11)에 지도에 나오는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삼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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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는 삼척시, 동해시의 옛 북평읍 지역과 태백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 지나가는 白頭大幹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葛夜山 밑에 石築의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읍성 안에는 客舍 건물의 표시가 실제 모습과 비슷하여 인상적이다. 읍성 왼쪽에 있는 竹西樓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많은 詩人·墨客들이 다녀간 곳이다. 五十川 가의 절벽 위에 지어져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지금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鎭營은 三陟浦鎭으로서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鎭營 왼쪽의 平陵驛은 종6품관인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관리하던 察訪驛이었다. 한편 삼척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 穆祖가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서 목조의 외가고을이라고 하여 1393년(태조 2)에 府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東山陵이 목조의 부모 무덤인 皇考陵과皇 陵으로서 목조가 이 고을에 살았던 터가 그 밑에 있었다 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의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표시되어 있다. 작은 연못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신라 때五岳의 하나인 北岳으로 여겨져 中祀에 기재되었던 太白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 삼척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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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는 삼척시, 동해시의 옛 북평읍 지역과 태백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서쪽으로 지나가는 白頭大幹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葛夜山 밑에 石築의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읍성 안에는 客舍 건물의 표시가 실제 모습과 비슷하여 인상적이다. 읍성 왼쪽에 있는 竹西樓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많은 詩人·墨客들이 다녀간 곳이다. 五十川 가의 절벽 위에 지어져 있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지금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鎭營은 三陟浦鎭으로서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鎭營 왼쪽의 平陵驛은 종6품관인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관리하던 察訪驛이었다. 한편 삼척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상 穆祖가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서 목조의 외가고을이라고 하여 1393년(태조 2)에 府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東山陵이 목조의 부모 무덤인 皇考陵과皇 陵으로서 목조가 이 고을에 살았던 터가 그 밑에 있었다 한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의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표시되어 있다. 작은 연못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 중요한 장소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신라 때五岳의 하나인 北岳으로 여겨져 中祀에 기재되었던 太白山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 안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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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 안협면, 동면, 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이다. 북쪽의 이천에서 들어온 임진강 본류가 고을의 서쪽을 흐르며, 西流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해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鎭山은 동북쪽의 평강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 뒤쪽에서 솟아난 晩景山이다. 읍치는 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안쪽의 작은 하천이 읍치를 감싸며 바깥쪽의 큰하천에 합류하는 등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 祭堂山 앞의 임진강 이름은 祭堂淵이며, 강가 바위 위에는 祭堂의 터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말에 北元 잔당인 ??(타타르) 부대가 침입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만여 명의 기병이 앞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을에서는 이후 이곳에 祭堂을 만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祭堂이 사라진 것을 보아 제사 자체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去京路'', ''鐵原去路''는 ''서울가는 길'', ''철원가는 길''이란 뜻이다.(이기봉)

  • 안협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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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이천군 안협면, 동면, 서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이다. 북쪽의 이천에서 들어온 임진강 본류가 고을의 서쪽을 흐르며, 西流하는 작은 하천들을 합해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의 鎭山은 동북쪽의 평강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읍치 뒤쪽에서 솟아난 晩景山이다. 읍치는 鎭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안쪽의 작은 하천이 읍치를 감싸며 바깥쪽의 큰하천에 합류하는 등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왼쪽 祭堂山 앞의 임진강 이름은 祭堂淵이며, 강가 바위 위에는 祭堂의 터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말에 北元 잔당인 ??(타타르) 부대가 침입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만여 명의 기병이 앞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아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고을에서는 이후 이곳에 祭堂을 만들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祭堂이 사라진 것을 보아 제사 자체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 보이는 ''去京路'', ''鐵原去路''는 ''서울가는 길'', ''철원가는 길''이란 뜻이다.(이기봉)

  • 양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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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현은 지금의 양구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동북쪽에서 발원한 서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입천이 합류하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의 합류점은 지금의 화천댐 파로호 위쪽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과장·확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하천이 읍치를 돌아나가며, 하천너머 남쪽으로 산줄기가 다시 겹겹이 이어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方山面은 조선 초에 병합된 方山廢縣이다. 그 옆에 있는 禁山은 나라에서 특별히 나무의 伐採를 금한 곳으로서 만약 벌채한 것이 적발될 경우에는 이 고을의 관리가 罷職까지 당했다. 그 오른쪽의 亥安面 역시 조선 초에 춘천으로부터 옮겨온 亥安所이다. 이곳의 물줄기는 실제로는 동남쪽의 인제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양구 西川의 상류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펀치볼로 이름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한 때는 운석이 떨어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지만 하천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盆地로 판명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분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지도화되어 나온다.(이기봉)

  • 양구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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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현은 지금의 양구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 동북쪽에서 발원한 서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수입천이 합류하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두 하천의 합류점은 지금의 화천댐 파로호 위쪽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읍치가 매우 과장·확대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동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하천이 읍치를 돌아나가며, 하천너머 남쪽으로 산줄기가 다시 겹겹이 이어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투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方山面은 조선 초에 병합된 方山廢縣이다. 그 옆에 있는 禁山은 나라에서 특별히 나무의 伐採를 금한 곳으로서 만약 벌채한 것이 적발될 경우에는 이 고을의 관리가 罷職까지 당했다. 그 오른쪽의 亥安面 역시 조선 초에 춘천으로부터 옮겨온 亥安所이다. 이곳의 물줄기는 실제로는 동남쪽의 인제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양구 西川의 상류로 잘못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어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펀치볼로 이름 붙여진 곳이기도 하다. 한 때는 운석이 떨어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지만 하천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盆地로 판명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분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지도화되어 나온다.(이기봉)

  • 양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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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남쪽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었던 雪嶽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색약수로 유명한 五色嶺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土築과 石築이 섞여 있었던 읍성이 있었음이 지도에도 보인다. 읍성의 오른쪽에는 東海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祀典에는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洛山寺와 150m 절벽 위에 지어졌다는 義相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서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도 689년(신라 문무왕 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靈穴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가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祥雲驛은 15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며 해안가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靑草湖·雙湖·浦麻湖 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고려 초에 병합된 폐현을 가리킨다.(이기봉)

  • 양양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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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남쪽의 속초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었던 雪嶽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색약수로 유명한 五色嶺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土築과 石築이 섞여 있었던 읍성이 있었음이 지도에도 보인다. 읍성의 오른쪽에는 東海廟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祀典에는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洛山寺와 150m 절벽 위에 지어졌다는 義相臺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서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도 689년(신라 문무왕 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靈穴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가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祥雲驛은 15개의 屬驛을 거느린 찰방역이며 해안가에는 潟湖에 해당하는 靑草湖·雙湖·浦麻湖 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洞山縣은 고려 초에 병합된 폐현을 가리킨다.(이기봉)

  • 영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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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영월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월읍 영흥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이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廢位된 후 유폐된 곳은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淸 浦이다. 청령포는 뒤로는 기암절벽에 의해 막혀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이다. 17세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영월 戶長 嚴興道에 의해 시체가 거두어져 魯山墓라 칭해졌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莊陵으로 개칭되었으며, 고을도 郡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장릉 앞쪽의 彰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엄흥도를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무덤 앞쪽의 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 義湘(625-702)에 의해 智德寺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726년(영조2)에 장릉의 陵寺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을의 서쪽에는 주천강이, 동쪽에는동강댐으로 유명한 동강이 읍치앞에서 만나 옥동천을 합류시키며 동남쪽 永春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錦江亭은 40m 위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주변을 조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서 지금도 영월읍 영흥 2리에 남아 있다.(이기봉)

  • 영월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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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영월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월읍 영흥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인 莊陵이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廢位된 후 유폐된 곳은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淸 浦이다. 청령포는 뒤로는 기암절벽에 의해 막혀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이다. 17세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영월 戶長 嚴興道에 의해 시체가 거두어져 魯山墓라 칭해졌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되고 莊陵으로 개칭되었으며, 고을도 郡에서 府로 승격되었다. 장릉 앞쪽의 彰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엄흥도를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무덤 앞쪽의 報德寺는 신라 문무왕 때 義湘(625-702)에 의해 智德寺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726년(영조2)에 장릉의 陵寺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을의 서쪽에는 주천강이, 동쪽에는동강댐으로 유명한 동강이 읍치앞에서 만나 옥동천을 합류시키며 동남쪽 永春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錦江亭은 40m 위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주변을 조망하기에 알맞은 곳으로서 지금도 영월읍 영흥 2리에 남아 있다.(이기봉)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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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는 강원도 삼척부에서 관장하였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한다. 이 섬은 본래 于山國으로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異斯夫가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 역사에 나오는 첫 기록이다. 1438년(세종 20)에 萬戶 南顥를 파견하여 70여명을 잡아오게 한 후 공식적으로는 빈 섬으로 남게 되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1697년(숙종 23)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준명, 최재홍 등이 울릉도를 답사하여 圖形과 특산물을 임금에게 헌납하였지만 이후에도 계속 空島 정책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인에 의한 채벌과어업이 성행하자 조선에서는 이민을장려하고 1895년에 島監을 설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倭船倉이 있었던 곳이 표시되어 있어 일본 어부의 출입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도 왼쪽의 ''刻板立標''와 오른쪽의 ''刻石立標''는 일본과의 소유권 분쟁 후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船泊可居라 표시된 곳은 지금 울릉도 군청소재지인 도동항 부근으로 보인다.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基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돌무덤으로 여겨지는 石葬도 써넣었다. 그리고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영향을 받아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坤·巽·艮·乾 등은 각각 서남·남동·동북·서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이기봉)

  • 울릉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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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는 강원도 삼척부에서 관장하였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해당한다. 이 섬은 본래 于山國으로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의 異斯夫가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한 것이 역사에 나오는 첫 기록이다. 1438년(세종 20)에 萬戶 南顥를 파견하여 70여명을 잡아오게 한 후 공식적으로는 빈 섬으로 남게 되었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1697년(숙종 23)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702년(숙종 28) 이준명, 최재홍 등이 울릉도를 답사하여 圖形과 특산물을 임금에게 헌납하였지만 이후에도 계속 空島 정책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인에 의한 채벌과어업이 성행하자 조선에서는 이민을장려하고 1895년에 島監을 설치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倭船倉이 있었던 곳이 표시되어 있어 일본 어부의 출입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도 왼쪽의 ''刻板立標''와 오른쪽의 ''刻石立標''는 일본과의 소유권 분쟁 후 조선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에 船泊可居라 표시된 곳은 지금 울릉도 군청소재지인 도동항 부근으로 보인다.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基地가 표시되어 있으며, 돌무덤으로 여겨지는 石葬도 써넣었다. 그리고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영향을 받아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坤·巽·艮·乾 등은 각각 서남·남동·동북·서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이기봉)

  • 울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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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근남면, 원남면, 서면,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주변의 평지가 확대·과장되어 있고서쪽의 산지 지역은 극히 소략하게 처리되었다. 고을 앞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두천천, 불영천, 왕피천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도에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보이는 安逸王山이며, 읍치는 작은 둔덕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佛影寺는 651년(신라 진덕왕 5)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聖留窟은 석회암 동굴로서 지금도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동굴이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興富庫는 興富驛이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울진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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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근남면, 원남면, 서면, 죽변면, 북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읍치주변의 평지가 확대·과장되어 있고서쪽의 산지 지역은 극히 소략하게 처리되었다. 고을 앞쪽을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두천천, 불영천, 왕피천으로 나누어지는데 지도에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보이는 安逸王山이며, 읍치는 작은 둔덕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佛影寺는 651년(신라 진덕왕 5)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다.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聖留窟은 석회암 동굴로서 지금도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동굴이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興富庫는 興富驛이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 원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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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다. 신라 때 北原小京이었으며 下代 혼란기에는 궁예가 부하로 있었던 양길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강원도 관찰사의 소재지였는데 지도에는 읍치에 營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에 치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지도에는 雉岳寺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치악산 동쪽의 물은 주천강에 모여 동남쪽 남한강 상류로 들어가고, 치악산 서쪽의 물은 섬강에 모여 서남쪽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주천강 유역은 주천폐현이 있던 자리로서 酒泉倉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12漕倉의 하나였다. 조선 초에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의 역할을 하였으나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원주의 田稅만 모으는 상태였다. 지금의 부론면 흥호리 창말에 해당한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신라 때 禪宗 9山의 하나였던 法興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는 義湘(625-702)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九龍寺도 보인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丹丘驛에는 察訪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읍치 위쪽의 胎峯은 고려 공민왕의 胎가 뭍힌 곳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오른쪽에 黃腸이란 이름으로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원주목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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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북내면 동쪽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다. 신라 때 北原小京이었으며 下代 혼란기에는 궁예가 부하로 있었던 양길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강원도 관찰사의 소재지였는데 지도에는 읍치에 營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에 치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지도에는 雉岳寺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치악산 동쪽의 물은 주천강에 모여 동남쪽 남한강 상류로 들어가고, 치악산 서쪽의 물은 섬강에 모여 서남쪽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주천강 유역은 주천폐현이 있던 자리로서 酒泉倉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12漕倉의 하나였다. 조선 초에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의 역할을 하였으나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이미 원주의 田稅만 모으는 상태였다. 지금의 부론면 흥호리 창말에 해당한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신라 때 禪宗 9山의 하나였던 法興寺가 표시되어 있고 그 왼쪽에는 義湘(625-702)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九龍寺도 보인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丹丘驛에는 察訪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읍치 위쪽의 胎峯은 고려 공민왕의 胎가 뭍힌 곳이다. 기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 지도 오른쪽에 黃腸이란 이름으로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이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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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일제시대의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이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이천군과 판교군 일대이다. 원래는 경기도에 속했으나 조선 태종 때 강원도로 이관된 곳이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 중의 하나로서 왕위에 오른 후 府로 승격시켰다. 蛇島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 본류는 안변의 경계 너머까지 이어져 있다. 防墻峙는 강가 옆으로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要衝地로서 한 명이 關門을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蛇島 옆에 있는 伊川舊鎭基는 이러한 要衝地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廢止되었다. 그 밑에 있는 溫井은 조선 세종이 行宮을 짓게 하고 다녀갈 정도로 유명한 온천이며 지금도 잘 개발되어 있다. 蛇島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으로서 평강을 지나 안변과의 경계선에서 흘러 들어온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城山 아래에 풍수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天遊堂·說雲亭 등의 유명한 정자까지 표시하였다.(이기봉)

  • 이천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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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일제시대의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이천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이천군과 판교군 일대이다. 원래는 경기도에 속했으나 조선 태종 때 강원도로 이관된 곳이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 중의 하나로서 왕위에 오른 후 府로 승격시켰다. 蛇島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 본류는 안변의 경계 너머까지 이어져 있다. 防墻峙는 강가 옆으로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要衝地로서 한 명이 關門을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蛇島 옆에 있는 伊川舊鎭基는 이러한 要衝地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며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이미 廢止되었다. 그 밑에 있는 溫井은 조선 세종이 行宮을 짓게 하고 다녀갈 정도로 유명한 온천이며 지금도 잘 개발되어 있다. 蛇島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으로서 평강을 지나 안변과의 경계선에서 흘러 들어온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城山 아래에 풍수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天遊堂·說雲亭 등의 유명한 정자까지 표시하였다.(이기봉)

  • 인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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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은 지금의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 일대에 있었다.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며 지금은 소양댐이 만들어져 읍치 앞까지 물에 잠겨 있다. 읍치는 양구 경계의 廣峙로부터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伏龍山 아래에 있는데 읍치 뒷산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온 소양강과 남쪽에서 흘러온 내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雪岳山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쪽에 있다. 설악산 위쪽에 보이는 深源寺는 1783년(정조 7)부터 백담사로 불리게 된 절로서 1988년에 전두환 부부가 1년 동안 유폐되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面과 驛뿐만 아니라 다른 강원도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마을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또한 고을의 동쪽으로 지나가는 백두대간 위에는 진부령, 미시령, 오색령 등 고개를 매우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기타 하천변에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를 돌아가는 벼랑길'이란 뜻이다.(이기봉)

  • 인제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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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은 지금의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인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 일대에 있었다. 북한강의 지류 소양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며 지금은 소양댐이 만들어져 읍치 앞까지 물에 잠겨 있다. 읍치는 양구 경계의 廣峙로부터 뻗어 내려온 고을의 鎭山 伏龍山 아래에 있는데 읍치 뒷산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북동쪽에서 내려온 소양강과 남쪽에서 흘러온 내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合江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雪岳山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읍치의 동쪽에 있다. 설악산 위쪽에 보이는 深源寺는 1783년(정조 7)부터 백담사로 불리게 된 절로서 1988년에 전두환 부부가 1년 동안 유폐되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面과 驛뿐만 아니라 다른 강원도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마을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또한 고을의 동쪽으로 지나가는 백두대간 위에는 진부령, 미시령, 오색령 등 고개를 매우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기타 하천변에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를 돌아가는 벼랑길'이란 뜻이다.(이기봉)

  • 정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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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조양강이 읍치 앞쪽을 감아 돌아 下 村에 이르고 지금의 사북읍·고한읍에서 내려오는 동남천과 만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하미촌 아래쪽은 동강댐 건설 논의로 널리 알려진 영월의 동강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飛鳳山 아래에 실제보다훨씬 확대·강조되어 있다. 또한 겹겹이 내려오는 산줄기와 휘돌아 가는 물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쪽의 餘粮驛에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그린 정선아리랑의 발생지 아우라지 나루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부터 서울 사람들의 땔감과 목재로 사용하기 위한 뱃사공들의 뗏목이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그 옆에 써 있는 花遷은 지금은 ''꽃벼루''라고 하는데 여기서 ''遷''은 강가의 벼랑길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략한 지도이지만 面뿐만 아니라 檜洞, 瓦坪, 熊洞, 下 村 등 중요한 마을도 표시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정선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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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다. 북동쪽에서 들어온 조양강이 읍치 앞쪽을 감아 돌아 下 村에 이르고 지금의 사북읍·고한읍에서 내려오는 동남천과 만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하미촌 아래쪽은 동강댐 건설 논의로 널리 알려진 영월의 동강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飛鳳山 아래에 실제보다훨씬 확대·강조되어 있다. 또한 겹겹이 내려오는 산줄기와 휘돌아 가는 물줄기의 모습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쪽의 餘粮驛에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그린 정선아리랑의 발생지 아우라지 나루가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부터 서울 사람들의 땔감과 목재로 사용하기 위한 뱃사공들의 뗏목이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그 옆에 써 있는 花遷은 지금은 ''꽃벼루''라고 하는데 여기서 ''遷''은 강가의 벼랑길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략한 지도이지만 面뿐만 아니라 檜洞, 瓦坪, 熊洞, 下 村 등 중요한 마을도 표시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철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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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탄강가에 있는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이기봉)

  • 철원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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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탄강가에 있는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이기봉)

  • 춘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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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는 춘천시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다. 북한강 중류에 있는데 지도의 왼쪽에 있는 吾梅江이 북한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지류소양강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鳳義山이며 읍치는 그 아래에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전세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北內面에서白鷺洲에 이르는 곳은 ≪擇里志≫에 ''토질이 단단하고 기후가 고요하다.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춘천 시내 우두동 일대이다. 그 옆에 있는 壯節公墓는 고려 태조 왕건의 휘하에 있었던 신숭겸(?-927)의 묘이다. 신숭겸의 원래 이름은 能山이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싸움에서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쳐 위기를 모면하게 한 인물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고려 초인 973년에 창건되었고 지금도 보물 164호 회전문이 있는 淸平寺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2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 강가에서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의 절벽길을 의미한다. 주기에 보이는 기린면은 이 고을의 越境地로서 고려 때 병합되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한다.(이기봉)

  • 춘천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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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는 춘천시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다. 북한강 중류에 있는데 지도의 왼쪽에 있는 吾梅江이 북한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지류소양강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鳳義山이며 읍치는 그 아래에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江倉은 소양강창으로서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의 전세를 모아 서울로 옮기는 漕倉이었다. 北內面에서白鷺洲에 이르는 곳은 ≪擇里志≫에 ''토질이 단단하고 기후가 고요하다.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춘천 시내 우두동 일대이다. 그 옆에 있는 壯節公墓는 고려 태조 왕건의 휘하에 있었던 신숭겸(?-927)의 묘이다. 신숭겸의 원래 이름은 能山이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싸움에서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쳐 위기를 모면하게 한 인물이다. 지도의 위쪽에는 고려 초인 973년에 창건되었고 지금도 보물 164호 회전문이 있는 淸平寺가 보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2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 강가에서 자주 보이는 ○○遷에서 ''遷''이란 강가의 절벽길을 의미한다. 주기에 보이는 기린면은 이 고을의 越境地로서 고려 때 병합되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한다.(이기봉)

  • 통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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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 벽양면, 임남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 남쪽과 고성군 북쪽 일부이다. 고을의 서쪽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에는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보다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산이 포근히 감싼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맨 위쪽에는 바닷가에 돌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叢石臺가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네 화랑이 이곳에까지 와서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四仙峰이란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이 보이며, 왼쪽에는 喚仙亭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瓮遷은 바닷가 벼랑길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기타 지도 전체적으로는 간결하지만 驛, 面, 寺刹, 倉, 다리 등 당시에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대부분 표시하였다.(이기봉)

  • 통천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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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 벽양면, 임남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 남쪽과 고성군 북쪽 일부이다. 고을의 서쪽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빠져나간다. 읍치에는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보다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산이 포근히 감싼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맨 위쪽에는 바닷가에 돌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叢石臺가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述郞, 南郞, 永郞, 安祥 등 신라의 네 화랑이 이곳에까지 와서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四仙峰이란 이름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이 보이며, 왼쪽에는 喚仙亭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瓮遷은 바닷가 벼랑길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기타 지도 전체적으로는 간결하지만 驛, 面, 寺刹, 倉, 다리 등 당시에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대부분 표시하였다.(이기봉)

  • 평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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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지도 위쪽의 分水岺은 지금의 추가령구조곡이 시작되는 곳으로서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간다. 옛날부터 이 통로는 철령과 함께 함경도와 서울을 잇는 요지였기 때문에 세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고 하며, 지도에는 그것이 三方路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고을의 要衝地적 성격 때문에 역원과 봉수의 표시가 자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에게 쫓겨난 弓裔王(?-918)이 이 삼방로 부근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며, ≪大東輿地圖≫에는 이곳에 궁예왕의 묘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은 이 분수령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동북쪽으로 올라가다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태백산맥이 되고, 또 하나는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를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지도에서는 읍치에 대한 표현이 특징적인데 분수령에서 읍치까지 계속 이어진 산줄기와 읍치를 포근히 감싼 山勢, 아래쪽의 案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 시작되는 곳이다.(이기봉)

  • 평강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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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지도 위쪽의 分水岺은 지금의 추가령구조곡이 시작되는 곳으로서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간다. 옛날부터 이 통로는 철령과 함께 함경도와 서울을 잇는 요지였기 때문에 세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고 하며, 지도에는 그것이 三方路로 표시되어 있다. 이런 고을의 要衝地적 성격 때문에 역원과 봉수의 표시가 자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에게 쫓겨난 弓裔王(?-918)이 이 삼방로 부근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며, ≪大東輿地圖≫에는 이곳에 궁예왕의 묘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은 이 분수령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동북쪽으로 올라가다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태백산맥이 되고, 또 하나는 지도 오른쪽의 산줄기를 따라 서울까지 이어진다. 지도에서는 읍치에 대한 표현이 특징적인데 분수령에서 읍치까지 계속 이어진 산줄기와 읍치를 포근히 감싼 山勢, 아래쪽의 案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매우 강하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오른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 시작되는 곳이다.(이기봉)

  • 평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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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다. 봉평면에서발원한 南大川이 북쪽에서 들어와읍치를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금의 평창강이다. 오른쪽미탄면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창리천이며, 동면에는 영월의 동강이 한가운데를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잘 구별되어 표시되지 않았다. 미탄면과 동면은 실질적으로는 남동쪽으로 훨씬 깊숙이 뻗어 나가는데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기 위해 잘 표현하지 못했다. 읍치는 평창강에 의해 감싸여 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훨씬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왼쪽 鎭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강 건너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南山 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나무를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왼쪽과 위쪽으로 강릉과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평창읍 위쪽의 평창군대부분이 당시에는 강릉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14년의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평창으로 편입되었다.(이기봉)

  • 평창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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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다. 봉평면에서발원한 南大川이 북쪽에서 들어와읍치를 휘감고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금의 평창강이다. 오른쪽미탄면에 있는 하천은 지금의 창리천이며, 동면에는 영월의 동강이 한가운데를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잘 구별되어 표시되지 않았다. 미탄면과 동면은 실질적으로는 남동쪽으로 훨씬 깊숙이 뻗어 나가는데 직사각형의 지도 모양에 맞추기 위해 잘 표현하지 못했다. 읍치는 평창강에 의해 감싸여 있는데 다른 공간에 비해 훨씬 확대·과장되어 있다. 또한 왼쪽 鎭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겹겹이 쌓여 있고, 강 건너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南山 등의 형세로 보아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위쪽의 黃 山은 나라에서 쓸 나무를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지도 왼쪽과 위쪽으로 강릉과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평창읍 위쪽의 평창군대부분이 당시에는 강릉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914년의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평창으로 편입되었다.(이기봉)

  • 평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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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 있는 강원도 관할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과 향교가 있는데 서쪽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매우 풍수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던 越松浦鎭이 石築의 성곽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모래사장의 소나무 숲에 지어졌다는 越松亭과 멀리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는 望洋亭이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정 옆에는 바닷바람에 의한 모래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松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흥미롭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토산품으로 나오는 竹箭이 생산되던 箭竹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白岩山 밑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가장 유명한 온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백암온천이 개발되어 있다.(이기봉)

  • 평해군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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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후포면, 온정면, 기성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에 있는 강원도 관할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과 향교가 있는데 서쪽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매우 풍수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던 越松浦鎭이 石築의 성곽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모래사장의 소나무 숲에 지어졌다는 越松亭과 멀리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는 望洋亭이 그려져 있어 뛰어난 경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월송정 옆에는 바닷바람에 의한 모래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예상되는 松田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흥미롭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이 고을의 토산품으로 나오는 竹箭이 생산되던 箭竹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읍치 왼쪽의 白岩山 밑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가장 유명한 온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백암온천이 개발되어 있다.(이기봉)

  • 홍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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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홍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모양의 직사각형에 맞추기 위해 남북이 길게 그려졌다. 고을의 남·동·북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홍천강에 모여 서쪽의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들어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홍천강 가에는 觀水堂과 泛波亭이 그려져 있어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水墮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 번 重創을 거듭하여 번창하였다. 지금은 1364년에 만든 종과 한 책 두 권으로 된 月印釋譜 제 17·18권의 원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홍천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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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홍천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세로 모양의 직사각형에 맞추기 위해 남북이 길게 그려졌다. 고을의 남·동·북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홍천강에 모여 서쪽의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들어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홍천강 가에는 觀水堂과 泛波亭이 그려져 있어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水墮寺는 신라 때 창건한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 번 重創을 거듭하여 번창하였다. 지금은 1364년에 만든 종과 한 책 두 권으로 된 月印釋譜 제 17·18권의 원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이기봉)

  • 회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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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회양군과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 일대이다. 북한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북한강 本流이다. 또한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북한강의 지류 금강천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유명한 金剛山이 그려져 있는데 기암절벽과 正陽寺·表訓寺·長安寺 등의 古刹 표시가 자세하다. 조선시대 때 함경도로 가는 통로 중 지도 위쪽에 보이는 鐵嶺이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다. 따라서 옛날부터 이곳에 關門을 세워 동북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철령 아래쪽의 銀溪驛은 1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義?嶺 아래에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德津溟(所祠)는 德津의 동쪽 봉우리에 있는 제단으로서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고, 祀典에는 小祀로 기록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嵐谷·長陽·水入·文登·和川은 이 고을의 屬縣으로 있다가 병합된 고을의 흔적이다. 기타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함을 알 수 있으며 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회양부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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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회양군과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 일대이다. 북한강의 최 상류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지도의 오른쪽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읍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북한강 本流이다. 또한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북한강의 지류 금강천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유명한 金剛山이 그려져 있는데 기암절벽과 正陽寺·表訓寺·長安寺 등의 古刹 표시가 자세하다. 조선시대 때 함경도로 가는 통로 중 지도 위쪽에 보이는 鐵嶺이 가장 중요한 要衝地였다. 따라서 옛날부터 이곳에 關門을 세워 동북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철령 아래쪽의 銀溪驛은 1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 義?嶺 아래에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德津溟(所祠)는 德津의 동쪽 봉우리에 있는 제단으로서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를 지냈고, 祀典에는 小祀로 기록된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嵐谷·長陽·水入·文登·和川은 이 고을의 屬縣으로 있다가 병합된 고을의 흔적이다. 기타 고개와 봉수의 표시가 자세함을 알 수 있으며 주기를 보면 논이 거의 없는 밭농사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 횡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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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다. 北川으로 표시된 남한강의 지류 섬강이 읍치 아래쪽에서 前川을 합하여 서남쪽 원주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오른쪽 屯內面에 보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 주천강의 상류이다. 泰坡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 밑에 풍수적으로 표현된 읍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뒤쪽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鼎金山과 鴻頭山은 실제로는 읍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산으로서 읍치에 가까운 형국뿐만 아니라 먼 형국에서도 풍수적임을 보여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가 확대·과장되다 보니까 북천보다 작은 前川이 더 크게 그려져 다른 지역의 위치나 방향에 대한 약간의 왜곡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천과 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보이는 寒江臺는 조선 광해군 때 寒江 鄭逑(1543-1620)가 잠시 은거하면서 낚시를 즐기던 섬강 가의 盤石이라 한다. 지금은 횡성읍 반곡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安興驛은 지금의 안흥면 소재지로서 ''안흥찐빵''의 발생지이기도 하다.(이기봉)

  • 횡성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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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다. 北川으로 표시된 남한강의 지류 섬강이 읍치 아래쪽에서 前川을 합하여 서남쪽 원주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오른쪽 屯內面에 보이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 주천강의 상류이다. 泰坡山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산줄기 밑에 풍수적으로 표현된 읍치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읍치 뒤쪽에 풍수적으로 그려진 鼎金山과 鴻頭山은 실제로는 읍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산으로서 읍치에 가까운 형국뿐만 아니라 먼 형국에서도 풍수적임을 보여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읍치가 확대·과장되다 보니까 북천보다 작은 前川이 더 크게 그려져 다른 지역의 위치나 방향에 대한 약간의 왜곡이 나타나게 되었다. 북천과 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보이는 寒江臺는 조선 광해군 때 寒江 鄭逑(1543-1620)가 잠시 은거하면서 낚시를 즐기던 섬강 가의 盤石이라 한다. 지금은 횡성읍 반곡리에 있다. 지도 위쪽에 보이는 黃 山은 나라에서 쓸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封山이다. 기타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安興驛은 지금의 안흥면 소재지로서 ''안흥찐빵''의 발생지이기도 하다.(이기봉)

  • 흡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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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이다. 고을의 鎭山은 博山이며, 읍치와 향교는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侍中臺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호수와 바다 사이 소나무 길을 끼고 있는 우뚝 솟은 절벽바위라고 한다. 바다 쪽으로는 7개의 작은 섬이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의 이름은 七寶였는데 조선 세조 때 巡察使 한명회(1415-1487)가 이곳에서 구경하다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侍中臺로 고쳤다고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단한데 800호도 안 되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이기봉)

  • 흡곡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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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이다. 고을의 鎭山은 博山이며, 읍치와 향교는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투영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읍치 위쪽으로 보이는 侍中臺는 關東八景의 하나로서 호수와 바다 사이 소나무 길을 끼고 있는 우뚝 솟은 절벽바위라고 한다. 바다 쪽으로는 7개의 작은 섬이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원래의 이름은 七寶였는데 조선 세조 때 巡察使 한명회(1415-1487)가 이곳에서 구경하다가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侍中臺로 고쳤다고 한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간단한데 800호도 안 되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이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