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慶州都會[左通地圖] 경주도회[좌통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09-26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1帖(9折),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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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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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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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경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해동지도』는 남쪽을 위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 본 고을의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남쪽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서는 남쪽을 위로 그린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는 북쪽을 위로 그리는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에 기록된 초경과 종경 같은 거리 정보는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약간씩이라도 다르게 되어 있어 본 지도가 이용된 시기의 내용을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3,356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3,33○호로 나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元田畓은 모두 3,976결 정도로 동일하게 되어 있지만 세부 항목에서는 다른 수치를 보이고 있다. 본 지도에 표시된 지명과 하천의 유로는 모두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面의 명칭만 적어놓은 반면에 본 지도에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해동지도』에는 자세하게 그려져 있던 도로가 본 지도에는 모두 생략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琴湖江이 표시되어 있고, 읍치 왼쪽에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현재도 남천천으로 불리고 있다. 경산현의 읍성은 경산시 삼남동, 삼북동 일대에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금호강 북쪽에 있는 북면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괴전동과 용계동 일대에 있었다. (이기봉)

  •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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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를 비롯한 전체적인 구도는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경상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계가 깊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하천의 유로 중에서 일부 다른 곳도 보이는데, 경주의 형상강과 군위의 위천, 동래의 수영강 등이다. 또한 앞의 지도 여백에 빽빽이 적혀 있는 주기가 없고, 남해의 작은 섬들이 생략되었다. 더 나아가 각 군현의 유명한 산들이 북쪽의 일부를 제외하면 표기되지 않았으며, 도로의 표시도 없어졌다. 하천의 표기만 보면 본 지도가 『해동지도』보다 약간 자세하며, 수록된 정보의 양에서는 『해동지도』가 많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앞선 지도인지 확실하지 않다. 군현의 표기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는 좌우도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같게 처리했지만 본 지도에서는 좌도는 곤색 큰 사각형, 우도는 흰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주었다. 조선시대의 지도, 특히 목판본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지도에는 좌우도의 구별을 해주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좌도와 우두의 기준은 낙동강 본류와 그 지류인 문경의 영강을 연결시킨 선이다. 寧海와 盈德은 좌도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도와 같은 색을 칠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찰방역으로 여러 속역을 거느리면서 지역과 지역의 원활한 행정적, 군사적 교류를 주도하였다. 노란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수군의 군사기지인 鎭堡로서 경상도에서는 주로 해안가에만 설치되었다. 이들 진보는 모두 같은 급이 아니라 종3품의 僉使, 정4품의 萬戶, 종9품의 別將 등 파견된 무관의 등급이 3개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을 관리하는 것은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파견된 동래의 경상좌수영과 종2품의 경상우수영겸삼도통제사가 파견된 통영이었다. 경상도에는 정3품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된 병영이 2개 있었는데, 좌병영은 울산에, 우병영은 진주에 설치되어 있었다. 본 지도에는 경상도 전체를 관할하던 대구의 감영을 가장 큰 붉은색 원으로 표시하여 구분하였다. 통영과 수영 및 병영을 표시한 원 크기는 감영보다 약간 작으면서 같지만 통영만 특별히 붉은 색으로 칠해서 구분해주고 있다. 수록된 군현의 변천만으로 볼 때 본 지도는 1683년과 1767년 사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즉, 168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英陽縣이 표시되어 있고, 1767년에 山淸과 安義로 변하는 山陰과 安陰이 변경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적혀 있다.

  • 경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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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경주 지도와 내용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본 지도는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첫째,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다. 둘째,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본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셋째, 읍성 안의 정보가 본 지도보다 『해동지도』가 더 풍부하게 기록되었다. 넷째, 『해동지도』에는 지도에 없었던 동면, 남면, 북면, 서면 등의 명칭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해동지도』가 더 원본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기호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에는 인문 정보를 건물 모양과 이름을 적어넣는 형태로 표시하였다.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驛은 주황색 직사각형의 모양을 그려넣어 다른 정보와 구별해주고 있으며, 본 지도에서 추가된 面은 노란색 직사각형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따라서 기호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보다 더 진전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에 표시된 4개의 면은 단순히 방향의 측면에서만 설정된 것이고, 『해동지도』에는 후대의 기록에 나오는 면과 거의 동일한 명칭이 적혀 있다. 면에 대한 정보가 가장 자세하게 남아 있는 『여지도서』(1759년경)와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동서남북으로만 표시된 면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본 지도의 면에 대한 표시가 『해동지도』보다 더 오래된 형태의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다른 군현의 예에 해당되지만 분명히 고유 명칭의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 『여지도서』나 『호구총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지도의 주기에 기록된 호수인 18,929호는 『해동지도』의 17,064호보다 더 많다. 『여지도서』에는 17,219호로, 『호구총수』에는 18,251호로 나오고 있어 단순한 호수의 숫자라는 측면에서만 볼 때 본 지도는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도에는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과 동쪽의 대종천, 남쪽의 밀양강과 태화강의 상류 일부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서쪽의 영천 방향에 금호강, 북쪽의 영덕방향에 대서천, 동북쪽의 흥해방면에 곡강천, 동남쪽의 울산 방면에 동천강 등의 상류가 일부씩 걸쳐 있음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기봉)

  • 기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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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기장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면의 초경과 종경,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와 성곽의 둘레는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거의 동일하다. 『해동지도』의 주기에 있던 縣內面이 본 지도에는 없는데, 『해동지도』나 본 지도에 현내면이 없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의 주기에는 民戶가 3,171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2,887호로 나온다. 본 지도에 나오는 하천의 유로는 읍성 남문 밖에 하나가 생략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지명이라는 측면에서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있던 수많은 里의 지명을 비롯하여 여러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여기에다가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와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 없으면서 본 지도에 있는 것은 읍성 안의 倉舍가 유일한데, 본 지도첩에 있는 군현지도에는 거의 다 나오는 정보이다. 이와 같은 여러 요소들을 생각할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에는 封松山과 封山이 3개 기록되어 있다. 봉산은 조선후기에 전선의 선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과 토지이용을 제한하던 국용목재공급처였고, 주로 소나무를 공급했기 때문에 봉송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기장현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역에 해당되며, 읍성은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비록 회화식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하천의 흐름이 실제와 상당히 부합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대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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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대구부 지도와 전체 구도와 내용적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몇몇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르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통계 수치가 다르게 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대구부의 민호가 13,613호로 되어 있는데, 『해동지도』에는 12,922호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1759년경)에는 12,752호로,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13,413호로 나오고 있어 본 지도는 『호구총수』의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슷하게 그리면서도 통계정보라는 측면에서는 이용될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에는 『해동지도』에 있던 각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와 도로가 모두 생략되어 있다. 또한 『해동지도』에 비해 생략된 일부 지명도 나오고 있으며, 다르게 적혀 있는 지명도 일부 있다. 이런 차이점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해동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던 읍성이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구읍성은 1736년(영조 12)에 축조되기 때문에 『해동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본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읍성만 놓고 볼 때 본 지도는 『해동지도』의 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역, 사찰, 서원 등 건물이 있는 인문 정보의 경우 모두 건물을 표시하고 명칭을 적어두었다. 본 지도에도 대체적으로 『해동지도』의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驛과 面에 대해서는 적황색 직사각형과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지도의 왼쪽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굵은색 하천이 현재의 낙동강 본류이다. 동쪽에서 흘러와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금호강이며, 지도에도 琴湖江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전통시대에 낙동강은 상주의 낙동진 부근에서, 금호강은 대구부 읍치 북쪽 지역에서 부르던 명칭이었다. 낙동강과 금호강의 다른 부분에서는 해당 지역에서 부르던 고유명칭이 있었다. 지도 아래쪽에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의 밀양강 지류 중의 하나인 청도천 상류로서 현재의 청도군 풍각면, 각북면, 각남면 지역이다. (이기봉)

  • 동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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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동래부 지도와 내용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거리 통계를 제외하면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8,283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6,311호로 나온다. 『여지도서』(1759년경)에는 6,653호로,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7,007호로 나와 네 자료만 놓고 볼 때 본 지도의 호수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건물이 있는 인문 정보는 모두 동일하게 건물의 모양을 그려넣고 이름을 적어두었다. 본 지도도 상당수의 인문 정보는 『해동지도』와 동일하게 표현하였지만 군사기지인 진보와 행정정보인 면은 노란색 사각형 기호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표현 내용을 보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보인다. 『해동지도』에 面의 이름 다음에 적혀 있는 上端과 下端이란 해당 면의 위쪽과 아래쪽의 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제작자는 이런 측면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해동지도』에는 북면과 동면에 상단과 하단을 모두 적어놓았지만 본 지도에서는 상단이란 명칭을 생략하고 북면과 동면이라 적은 후 북면하단과 동면하단을 또 적어놓고 있다. 남면의 경우 『해동지도』에는 상단과 하단이 모두 보이지만 본 지도에는 남면이라고만 적어놓았다. 그러나 주기에는 상단과 하단의 구분 없이 면의 명칭을 올바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해동지도』의 주기에는 실제로는 없는 상단면과 하단면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어 지도의 제작자와 주기의 기록자가 다를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진보의 표현에서도 본 지도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진보 중에서 多大鎭에만 노란색 큰 원 모양을 표시하고, 釜山鎭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으며, 나머지는 노란색 작은 직사각형으로 그렸다. 다대진과 부산진만 종3품의 첨사가 파견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정4품의 만호나 그 이하가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구분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부산진에는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아 일관성이 결여되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없던 읍성이 본 지도에 표시된 것도 변화된 점이다. 동래읍성은 1387년(고려 우왕 13)에 처음으로 축조되며, 임진왜란 이후 피폐되어 있다가 1731년(영조 7)에 대대적으로 수축된다. 『해동지도』에 읍성이 표시되지 않은 것은 피폐해져 있던 상황을, 본 지도에는 수축된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기타 본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와 거리 표시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차이가 있다. (이기봉)

  • 밀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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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밀양부 지도와 전체 구도와 내용적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몇몇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르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다른 점이 있다. 面 등에 기록된 거리 정보는 변하기 어려움을 반영하여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통계 수치는 변화가 많은 것임을 반영하여 『해동지도』의 것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동지도』에는 元戶라는 항목에 49,978人이라는 인구가 적혀 있는데, 본 지도에는 51,515口라고 되어 있어 다르다. 『여지도서』(1759년경)에는 50,489구,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50,901구로 나와 본 지도의 것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나오는 도로와 거리 및 지지적 설명 등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지도에 나오는 남쪽, 동쪽, 북쪽에 있던 栗林을 비롯하여 몇몇 지명들이 빠져 있고 읍성 내의 건물들도 『해동지도』의 것이 더 자세한 편이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가 『해동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도 아래쪽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낙동강 본류이고, 북쪽에서 흘러나와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밀양강이다. 북쪽에 적힌 古弥面은 지도의 표현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현재의 운문면 운문호 부근에 있던 밀양의 월경지였다. 주기에는 고미면의 초경이 80리, 종경이 120리로 다른 면에 비해 월등히 멀게 적혀 있어 월경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기에는 水營封山이란 항목에 船材封山이 2개나 표시되어 있다. 봉산이란 조선후기에 주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과 다른 용도로의 토지 이용을 금지하여 설정한 산림이다. 수영봉산이란 이 봉산이 수영에서 관리되던 것임을 의미하며, 선재봉산이란 주로 전선의 선재를 조달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 (이기봉)

  • 양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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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양산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몇몇 측면에서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많은 차이가 나타나는 곳은 주기로서 『해동지도』에 비해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과 항목도 상당히 다르다. 면에 적혀 있는 거리 정보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것이므로 본 지도의 것이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나 기타 조세와 관련된 통계들은 『해동지도』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民戶가 4,011호로 나오는데,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2,468호로 현저하게 적게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2,179호로 나와 있어 본 지도의 것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본 지도에 나오는 하천과 지명은 『해동지도』에 모두 나오는 것이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동쪽에 부산으로 흘러가는 수영강의 최상류가 표시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수영강의 상류 일부에 양산군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가 사실에 더 가깝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해동지도』에는 면을 명칭만 적어넣었는데, 본 지도에서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본 지도첩의 다른 지도에서 驛을 주황색 직사각형으로 표시한 것에 비해 본 지도에서는 『해동지도』처럼 건물 모습만 그려넣었다. 아래쪽에 있는 黃山驛의 경우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여러 屬驛을 거느리던 찰방역이었음에도 특별한 표시가 없다. 읍성의 표현에서도 『해동지도』에는 3개의 문 모두 甕城이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본 지도에는 하나에만 그려넣었다. 지도에는 여러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 주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과 다른 용도로의 토지 이용을 금지하여 설정한 산림이다. 아래쪽의 大上同面과 大下同面이 표시된 섬은 지금의 낙동강 하구에 있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일대로서 거의 월경지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오른쪽의 左耳田面 지역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북구 일대였다. 기타 왼쪽 위의 낙동강가에 표시된 棧途는 강가에 있는 벼랑길을 의미하며, 군사 이동시 매복 공격이 쉬워 중요한 요해처로 인식되었다. (이기봉)

  • 언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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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언양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과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나 성곽의 둘레 등은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1,302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1,186호로 나온다. 본 지도에 그려진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읍성 안의 府倉을 제외하면 모두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던 면과 역에 본 지도에서는 노란색 큰 사각형과 주황색 작은 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구별을 쉽게 하도록 해주었다.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읍치는 언양읍 서부리와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읍성은 본 지도에 그려진 것처럼 사각형 모양으로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문 등이 없기는 하지만 옛모습의 기본적인 형태가 남아 있다. 본 지도에 표현된 하천은 모두 현재의 울산광역시 시내를 통과하여 동해로 빠져나가는 태화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가장 오른쪽에 표시된 하천은 현재의 대곡천으로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에 속해 있었던 울주군 두동면과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본 지도에서는 경주에서 흘러오는 모습을 간단하게 처리하여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려넣었다. (이기봉)

  • 영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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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영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과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나 성곽의 둘레 등은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 주기에 표시된 吉谷面이 본 지도의 주기에는 없다. 길곡면과 기곡면은 실제로는 같은 면에 대한 다른 표현인데, 『해동지도』의 주기를 쓴 사람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다른 기록에 나오는 길곡면을 새로운 것으로 이해하여 첨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4,900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4,208호로 나온다. 통계에 관한 내용은 지도가 제작되어 사용된 시기의 것을 반영하려 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臨津이 『해동지도』에 臨海淵津으로 나오고, 德峯의 위치가 약간 다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산줄기도 『해동지도』와 거의 동일한데, 가운데에 石泉山에서 忘憂亭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面의 이름만 적혀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만 본 지도첩의 다른 지도에 驛에 주황색 직사각형을 그려넣은 반면에 본 지도에 있는 溫井驛舘에는 『해동지도』처럼 집 모양만 표시하였다. 영산현에는 1573-1623년경에 축조된 읍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에는 성곽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읍성을 수축하지 않아 많이 퇴락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영산현의 읍치는 현재의 창령군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 왼쪽에는 낙동강과 그 최대 지류인 남강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기봉)

  • 영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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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영일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해동지도』에서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린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해동지도』에서는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기 때문에 서쪽을 위로 하여 그린 것으로, 본 지도는 일반적으로 북쪽을 위로 그리던 경향을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과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나 성곽의 둘레 등은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3,664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3,902호로 나온다. 지도에 표현된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북쪽에 보이는 하천이 현재의 형산강이며, 하류의 섬은 현재 모두 메워져 포항시의 시내가 되었다. 그 오른쪽에는 현재의 포항시 명칭이 유래된 浦項倉이 표시되어 있다. 1732년(영조 8)에 함경도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된 倉으로 別將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지도에는 본 지도첩의 다른 군현 지도와 달리 面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해동지도』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영일현의 읍성은 현재의 포항시 연일읍 남성리에 있었다. 1806년에 현재의 포항시 장흥동 지역인 注津 남쪽 지역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본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봉)

  • 울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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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울산부 지도와 내용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해동지도』와 비교했을 때 본 지도는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첫째,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다. 둘째, 『해동지도』에 있던 도로가 본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셋째, 太和臺를 비롯하여 『해동지도』에 있던 몇몇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본 지도의 주기에 있는 내용은 『해동지도』에 있는 것과 수치가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호수의 경우 본 지도에 있는 9,793호는 『해동지도』의 8,205호보다 많다.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호수가 8,587호로 되어 있어 만약 호수가 계속 증가했다고 보면 본 지도는 『해동지도』나 『호구총수』보다 더 늦은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주기에 기록된 호구와 전답 등의 통계는 『해동지도』의 것과 다르지만 면의 초경과 종경의 기록은 같다. 따라서 비록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서로 모사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지도의 이용을 위해 일부 부분에서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사실과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위의 萬里城臺(臺는 속자로 표기됨)라는 표기는 『해동지도』에는 萬里城基라고 되어 있다. 만리성은 신라 때 축조된 관문성으로 신라 이후에는 이용되지 않아 대부분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에 합치되는 것은 『해동지도』의 기록이다. 하천의 표현에서 경주계에서 흘러오는 동천강과 그 왼쪽의 태화강은 언양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사실에 부합된다. 가장 왼쪽의 하천은 현재의 회야강으로 모두 울산부의 경계 내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본 지도의 내용이 틀린 것이다. 『해동지도』에서는 회야강의 표현이 사실과 같게 되어 있다. 이런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필사자가 『해동지도』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 옮겨 그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기봉)

  • 자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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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자인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는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본 지도첩의 주기에 있는 面의 정보가 『해동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본 지도는 다르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지도와 주기에 적혀 있는 면의 명칭이 다르지만 본 지도에는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지도에 적혀 있는 면의 명칭은 본 지도와 같지만 주기에 적혀 있는 것은 『여지도서』(1759년경)나 『호구총수』(1789년경)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본 지도의 지도와 주기에 적혀 있는 면의 명칭에서 약간 다른 측면이 발견된다. 가장 앞쪽에 적혀 있는 知村面이 지도에는 加村面으로 되어 있고, 뒤에서 2번째의 加也旨面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에는 가야지면이 지도의 북쪽 지역에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자인면 가야리 일대에 있었다. 『해동지도』가 지도와 주기가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본 지도의 주기가 『해동지도』의 원래 주기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2,771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2,891호로 나온다. 본 지도에 나오는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해동지도』에 나오는 지명 중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여러 개 있으며, 왼쪽의 仇火里는 해동지도에 仇火驛으로 표시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이름만 표시되던 면에 본 지도에서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구별을 쉽게 하도록 해주었다. 자인현은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전체와 진량면의 남쪽 절반, 압량면의 가일리 남쪽 등에 걸쳐 있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자인면 동부리, 북사리 등에 있었다. (이기봉)

  • 장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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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장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의 초경과 종경 등 거리 정보는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동일하다.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2,042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1,892호로 나온다. 읍치 안의 倉舍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에 나온다. 그러나 가운데 위쪽의 長鬐界라는 문구는 본 지도가 장기현의 지도이기 때문에 쓸 수 없는 문구이다. 『해동지도』에는 이 부분에 長鬐縣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주기에도 장기현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원래 『해동지도』의 지도가 장기현이라는 명칭만 적혀 있고 주기가 없던 지도였다가 후에 주기가 첨가되면서 나타난 현생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의 제작자는 바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해동지도』의 장기현 문구를 장기계로 바꾸어놓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쪽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牧官이 머물던 牧舘舍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던 牧場城이 그려져 있다. 주기에는 조선후기에 주로 전선 제조용 선재를 공급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과 다른 토지이용을 금지시켰던 封山 1곳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 封松이라 적혀 있는 것이 바로 봉산이며, 전선 선재로는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봉송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장기현은 현재의 포항시 장기면과 구룡포읍 전부, 대부면의 대보리와 강사리, 동해면 상정리와 중산리 및 공당리 등에 해당된다. 장기현의 읍성은 장기면의 읍내리 산성에 있었으며, 현재도 읍성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이기봉)

  • 창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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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창녕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과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 등은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9,039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6,432호로 나온다. 지도에 그려진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해동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약간씩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하천의 유로로는 梨房面으로 흐르는 하천의 상류가 『해동지도』에는 2개로 되어 있다. 지명은 여러 군데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가운데쯤의 大招面이 『해동지도』에는 大招堤로 표시되어 있는데, 주기에는 대초면이 나오고 있어 본 지도가 맞는 것이다. 주기에는 高巖面이 맨 앞쪽에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없다. 『해동지도』에는 고암면이 읍치 왼쪽의 古弥堤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표시된 介朴村이 『해동지도』에는 介朴面으로 되어 있는데, 주기에는 개박면이라는 것이 없다. 그밖에도 읍치 아래쪽에 邑內松林破堤는 『해동지도』에 邑內松林堤破라고 되어 있다. 읍내의 송림제로서 현재는 파손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본 지도의 것이 틀린 것이다. 이와 같이 본 지도가 틀린 것도 있고, 『해동지도』가 틀린 것도 있어 서로 필사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어느 것이 원본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읍치의 倉舍만 제외하면 본 지도보다는 『해동지도』의 것이 더 많은 지명을 수록하고 있어 『해동지도』가 원본일 가능성이 높다. 아래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낙동강 본류이고, 읍치는 현재의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일대에 있었다. 본 지도는 동쪽을 위로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에서 왔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기봉)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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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청도군 지도와 전체 구도와 내용적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몇몇 측면에서 본 지도는 『해동지도』와 다르다. 본 지도의 주기는 『해동지도』의 여백에 있던 주기보다 양이 훨씬 적을 뿐만 아니라 항목을 비롯하여 내용적으로도 다른 것이 많다. 面 등에 기록된 거리 정보는 변하기 어려움을 반영하여 『해동지도』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통계 수치는 변화가 많은 것임을 반영하여 『해동지도』의 것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7,746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원호가 7,280호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1759년경)에는 원호가 7,210호로, 『호구총수』(1789년경)에는 7,525호로 되어 있어 본 지도의 것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지도 위의 내용은 『해동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하지만 읍성의 모습이 약간 다르다. 또한 읍성 안의 관아 건물은 『해동지도』에는 5개나 표시되어 있었는데, 본 지도에는 객사와 아사 등 중요 건물만 2개 그려넣었다. 『해동지도』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앞의 지도에는 面의 명칭만 적어넣은 반면에 본 지도에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 지도첩의 다른 지도에서 驛에 대해 적황색 직사각형의 기호를 사용하였음에 반해 본 지도에서는 『해동지도』에서처럼 그냥 건물 모습만 그려넣었다. 지도 위쪽의 楡川舘과 아래쪽의 省峴道가 역이었으며, 道라는 한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에만 사용되었다. 이런 역을 찰방역이라고 하며, 찰방이 파견되지 않은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중앙과 지방의 연결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본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보기 드물게 남쪽으로부터 오는 측면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에 그려진 하천은 밀양강의 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서쪽)의 상류 부분에는 大丘界라는 문구가 2개나 적혀 있다. 이곳은 현재 청도군 풍각면과 각북면, 각남면 지역으로서 그 위쪽의 外西面에 가려면 이들 지역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적어놓은 것이다. 외서면은 밀양시 청도면으로 청도군의 대부분이 밀양강 유역에 있는 것과 달리 바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청도천 상류에 있던 지역이었다. 산으로는 약간이라도 연결되어 있어 월경지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의 왕래라는 측면에서는 대구의 땅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월경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기봉)

  • 청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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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청하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과 사방경계에 관한 거리 정보, 성곽의 둘레 등은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해동지도』에 현내면의 초경과 종경이 각각 10리와 5리로 나오는데, 본 지도에는 1리와 5리로 바뀌어 있다. 현내면이라는 명칭에 맞으려면 초경이 10리가 아니라 1리인 것이 올바르다.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항목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1,253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1,779호로 나온다. 읍치 안의 倉舍를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해동지도』에 나온다. 다만 면의 명칭이 『해동지도』에는 이름만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구별하기 쉽도록 하였다. 본 지도첩에서 역의 경우 주황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 지도에 있는 松羅舘에는 『해동지도』처럼 집의 모양만 표시되어 있다. 송라역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속역을 거느리던 찰방역이었다. 읍성 안의 건물은 『해동지도』에 더 많이 표시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있던 많은 도로의 표시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청하현은 현재의 영덕군 청하면과 송라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성은 청하면 덕성리의 작은 둔덕 위에 있다. (이기봉)

  • 현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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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현풍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해동지도』와 다른 점이 나타나고 있다. 본 지도와 『해동지도』가 가장 다른 점은 주기에 있다. 面에 기록된 초경과 종경 같은 거리 정보는 시간적 변화에 의해 달라지지 않으므로 본 지도의 것과 『해동지도』의 것이 동일하다. 그러나 호수를 비롯하여 조세와 관련된 통계는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民戶가 5,668호로 되어 있지만 『해동지도』에는 元戶가 3,734호로 나온다. 『여지도서』(1759년경)에는 원호가 3,538호로, 『호구총수』에는 3,458호로 나와 본 지도의 것이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런 측면을 통해 볼 때 비록 『해동지도』와 내용적으로 비슷하지만 통계 수치라는 측면에서는 지도가 이용된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표시된 하천의 유로와 지명은 읍치의 司倉을 제외하면 모두 『해동지도』에 나오는 것이다. 다만 지도 위쪽의 玉島가 『해동지도』에는 玉浦로, 왼쪽의 金寺驛이 金寺堤로, 오른쪽의 沙背驛과 黃堤驛이 沙背澤과 黃堤澤으로 되어 있고, 『해동지도』에 있는 지명 몇몇이 생략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앞의 4개 지명은 본 지도가 아니라 『해동지도』의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面의 명칭이 里로 되어 있음이 특이한데, 진주 등 里로 되어 있는 경우가 몇군데서 보이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里에 명칭만 적혀 있지만 본 지도에서는 노란색 직사각형의 범례 기호를 사용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현풍현은 주로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전체와 논공읍 남쪽 지역에 해당된다. 오른쪽 북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흐르다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낙동강 본류이다. 그 건너 편에도 현풍현의 땅이 있었는데, 위쪽 지역은 현재의 고령군 개진면의 옥산리와 인안리 일대이고, 아래쪽 왼쪽은 고령군 우곡면의 예곡리와 객기리 일대이다. 현풍현의 읍치는 현재의 현풍면 부리 일대에 있었다. 낙동강변에 있는 浦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제언이 아니라 홍수 때 낙동강의 물이 넘쳐 형성된 배후습지에 해당된다. (이기봉)

  • 흥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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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 5책 흥해군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해동지도』는 서쪽을 위로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북쪽을 위로 그렸다. 본 고을의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서쪽이기 때문에 『해동지도』에서는 서쪽을 위로 그린 것으로 판단되며, 본 지도는 북쪽을 위로 그리는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고 있다. 대략적으로는 『해동지도』와 동일하지만 몇몇 측면에서 다른 점이 발견된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주기이다. 양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지도』의 주기는 본 지도의 것보다 훨씬 많고, 내용과 형식 역시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다. 시기가 바뀌어도 거의 변화할 수 없는 거리 정보는 본 지도와 『해동지도』의 것이 동일하지만 인구나 전결, 세입 관계의 통계 수치는 다르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본 지도에는 민호가 3,205호로 되어 있는 반면에 『해동지도』에는 3,335호로 되어 있어 지도 이용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명이란 측면에서는 曲江을 제외하면 본 지도에 나오는 것은 모두 『해동지도』에도 나온다. 그러나 『해동지도』에 나오면서 본 지도에 나오지 않는 지명은 꽤 많은 편이다. 더군다나 읍성 안의 정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해동지도』에 5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가장 중요한 객사와 아사만 표시되어 있다. 흥해군은 현재의 포항시 흥해읍과 시내의 북쪽 지역, 연일읍 중 형산강 북쪽 지역 등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현재의 흥해읍 옥성리에 평지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아래쪽에 보이는 하천이 지금의 형산강이고, 서쪽의 경주계로부터 흘러와 동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곡강천이다. (이기봉)

  •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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