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1872년지방지도

  •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겪은 조선사회는 18세기 영·정조대에 이르러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각종의 문물 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서 중심 산업인 농업부문의 생산력이 높아지고 이와 더불어 상품유통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실학을 비롯한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예술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지도제작에서도 이 시기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사회는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의 안정이 위협받게 되었다. 관료사회의 부패는 정상적인 국가 정책의 집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외척의 세도정치를 일소하고 당쟁을 타파하며,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특히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정, 군제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기의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지방의 실정 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 1871년에는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조선시대 관찬지도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총 459매의 1872년 지방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때 제작된 지도들은 군현지도뿐만 아니라 영·진보·목장·산성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한 시기에 제작되어 수합된 지방지도로는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지도는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작되어 수합되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제작 원칙 하에 체계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지도보다 큰 규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도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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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 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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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지도 杆城地圖,간성군은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거진읍, 죽왕면, 토성면, 현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간성읍 상리와 하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백두대간의 준령이 포진해 있는 서쪽을 상단으로, 동쪽의 바다를 하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외곽에 산을 둥그렇게 그려 인접 지역과 분리하였고 읍치는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공간임을 강조하였다. 읍치의 동쪽에는 水口가 그려져 있는데 풍수적 사고가 지도에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에는 돌로 축조된 성곽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많이 훼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청 건물을 그리지 않고 단지 글자로 표시하였다. 대부분의 지명을 원이나 직사각형 내부에 기입하였다. 面뿐만 아니라 洞里의 이름도 일부 표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고개 밑의 마을들이다. 해안에 연해 있는 津名이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또한 군사적 시설물로서 읍치 남쪽의 산성과 해안가의 봉수가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읍내와 더불어 동남쪽과 동북쪽 지역에 장시가 개설되어 상업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 강릉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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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부지도 江陵府地圖,조선시대 강릉부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 연곡면, 성산면 구정면, 강동면, 왕산면, 옥계면, 주문진읍, 평창군의 방림면, 대화면, 진부면, 도암면, 봉평면, 용평면, 내면, 정선군 임계면 그리고 동해시 묵호와 망상 일대까지 포괄했던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명주동 일원에 있었다. 산지와 하천, 바다를 모두 청색으로 채색했는데 하천의 유로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산지는 기암괴석을 강조하여 독립된 형태로 그렸는데 대부분 명칭이 빠져 있다. 읍성으로 둘러싸인 읍치에는 동헌과 객사 건물이 그려져 있고, 향교도 중요한 건물로 부각되어 있다. 滿月, 麒麟, 長嶺, 象王, 智爐 등 다섯 개의 臺로 이루어진 오대산의 모습이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대산에는 1606년(선조 39)에 설립된 史庫의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홍선으로 도로를 표시하였는데 노변에 위치한 驛과 대관령을 비롯한 고개의 명칭도 기입되어 있다. 동해안의 바닷가 근처에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경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경포대와 경포호의 모습도 보인다. 동남쪽의 安仁津에는 萬戶鎭이 설치되었으나 1490년(성종 21) 襄陽의 大浦로 옮겨졌다. 普賢寺 위쪽에는 산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옥계면과 대화면에 개설된 장시를 통해 이 지역 상업활동의 일단도 엿볼 수 있다.

  • 고성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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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지도 高城郡地圖,고성군은 현재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일대에 해당하는데 남쪽의 일부 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남한 지역에 걸쳐 있다. 금강산을 끼고 있는 고을로 해변의 삼일포, 해금강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도에는 산지와 하천, 바다가 모두 청색으로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다. 보통의 군현지도와는 달리 산봉우리를 지도의 중심으로 향하도록 그린 점이 독특하다. 읍치에는 사직단, 여제단, 衙舍와 客舍 등이 글자로만 표기되어 있다.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는데 역의 이름이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수려한 경치를 지닌 삼일포의 四仙亭, 永郞湖, 鑑湖 등은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금강산에는 계곡과 사찰의 이름도 비교적 상세하다. 읍치의 東里와 西里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금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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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지도 金城地圖,금성현 지역은 현재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으로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김화군 동쪽지역과 창도군의 서쪽, 북쪽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김화군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김화군 遠東面, 遠南面, 任南面, 遠北面, 金城面, 岐梧面, 通口面 일대이다. 금성은 김화에서 회양을 지나고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이다. 흑색으로 산지를 독립된 형태로 표현하였다. 고을의 중심공간인 읍치를 주변지역보다 크게 확대시켜 그 내부에 동헌을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을 그려 넣었다. 주변지역에는 면명만 표기하고 마을 이름은 빠져 있어 전반적으로 소략한 느낌을 준다. 각 면에 설치된 창고는 면의 첫 글자를 따서 표기하였는데, 예를 들면 通口面의 경우는 通倉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처럼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주요 나루터에는 나룻배와 사공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 김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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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지도 金化地圖,김화현은 현재 휴전선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되어 휴전선 이북은 북한의 강원도 김화군에 속해 있고 이남은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에 속해 있다. 북한의 김화군 서쪽 지역과 남한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서면 일대가 조선시대 김화현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금의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일원이 된다. 김화현은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산간 고을이지만 함경도와 영동 지방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하여 길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는 남대천이 감돌아 흐르는 김화의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고을 내의 산은 연맥보다는 독립된 모습으로 그렸는데 암벽의 모습을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고을의 동쪽에 있는 七臺巖의 우뚝 솟은 모습이 이채롭다. 읍치에는 客舍를 비롯한 관아 건물도 그려져 있는데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뿐만 아니라 측면의 모습도 그려져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읍치의 남쪽에는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전사한 평안감사 洪命?를 배향한 忠烈祠가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하단에는 蒼巖도 독특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집을 짓고 소요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고을의 북쪽에는 산성의 모습도 보이지만 이 시기에는 성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 낭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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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지도 狼川地圖,낭천현은 서로는 金化, 남으로는 春川, 동으로는 楊口와 접해있는 고을로 지금의 화천군 화천읍, 간동면, 상서면, 사내면, 하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화천읍 신읍리 일원에 있었다. 狼川縣은 1902년(광무 6) 華川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소멸된 지명이 되어버렸다. 지도는 읍지에 실리는 附圖처럼 규격이 작고 소략한 형태로 되어있다. 북한강의 강줄기를 청색으로 강조했으며 산지는 연봉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읍치는 건물 옆에 ‘邑’이란 글자를 표기하여 나타내었다. 주변 지역은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다르게 面名을 표기하지 않고 주요 里名을 표기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牲山인데 지도에는 그다지 강조되어 표현되지는 않았다. 낭천현의 읍치는 북한강변에 위치하여 홍수 때마다 옮기곤 했는데 지도에서 보이는 新邑里가 수재를 당했을 때 새롭게 읍치로 개척되었던 곳이다.

  • 삼방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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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방진지도 三防鎭地圖,삼방진은 평강현에 위치한 중요한 關防으로서 안변에서 분수령을 지나 철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다. 깊은 수심을 지닌 남대천과 그 옆의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사람들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지닌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關門을 설치하면 만명의 장부라도 열 수 없는 곳으로 평가되어 일찍부터 축성하기도 했다. 三防이란 세 곳의 관문을 이르는데 첫째는 안변부와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것이고, 둘째는 이로부터 북쪽 10리에 있는 木防이고, 셋째는 그 아래쪽 10리에 있는 것이다. 지도에는 이러한 三防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험준한 절벽의 모습이 독특하다. 지도에 보이는 삼방진은 1867년(고종 4)에 다시 설치된 것으로 別將이 이를 관할케 하였다. 삼방에서 추가령, 분수령을 따라 평강 읍내로 이어지는 도로가 홍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鎭地에는 鎭衙와 軍器 등이 건물이 표시되어 있고 성의 모습과 砲樓도 보이고 있다.

  • 삼척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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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지도 三陟府地圖,삼척부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동해시와 더불어 삼척시 미로면, 하장면, 신기면, 노곡면, 근덕면, 원덕면, 가곡면, 도계읍 그리고 태백시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삼척시 성내동 일원에 있었다. 본래 悉直國으로 신라 婆娑王 때 병합되었다. 지도는 삼척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였는데 특히 산지의 표현은 산줄기 중심의 전통적인 지형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동해로 흘러드는 五十川은 물길의 근원까지 가려면 거의 50여번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서도 오십천의 물줄기와 도로가 교차되면서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지세가 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고 서쪽이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면의 이름과 해안의 津名이 비교적 상세하나 洞里의 이름은 표시되지 않았다. 石城으로 둘러싸인 읍치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竹西樓를 비롯한 門樓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읍치의 동쪽 해안에는 鎭營이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三陟浦鎭에 해당한다. 1520년(중종 15)에 축성되었으며 水軍僉節制使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세워졌던 봉수대는 이 시기 대부분 허물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쪽 태백산 아래에는 낙동강의 발원지인 黃池가 그려져 있고 동쪽 해안에는 울릉도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 삼척진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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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진영지도 三陟鎭營地圖,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삼척부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단지 산줄기의 세부적인 표현과 鎭營의 모습, 주요 지명의 옆에 鎭營으로부터의 거리를 병기한 점 등이 다르다. 三陟鎭城은 1520년(중종 15)에 둘레 900척으로 축성되었고 右營將을 겸하던 水軍僉節制使가 진영을 관할하고 있었다. 진영 내부에는 火藥庫, 軍器庫 등의 건물과 더불어 東海碑閣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동해비는 1661년(현종 2)에 삼척부사 許穆(1595-1682)이 세운 것이다. 당시 삼척은 海波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정라진 앞의 만리도에 척주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후 비가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1710년(숙종 36) 이를 模寫하여 현재의 정상동 육향산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 지금의 북평과 삼척 읍내에는 시장도 개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안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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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지도 安峽縣地圖, 안협현은 남으로는 경기도 삭령군과 접하고 북으로는 이천도호부에 이르는 조그만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1914년에 병합된 伊川郡의 안협면, 동면, 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북쪽 지역 舊安峽面과 이천군의 남쪽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구 안협면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지도는 영조대의 지리지인 ?輿地圖書?에 실려 있는 지도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를 기초로 다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의 진산인 萬景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읍치를 감싸고 있고, 客舍, 衙舍, 倉庫 등이 독특한 지붕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변의 각 面에는 마을 이름도 일부 표기되어 있다. 만경산의 古城과 고을 남쪽의 擧城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많이 파손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지도와 달리 도로가 그려지지 않아 지도로서는 미흡한 느낌을 준다.

  • 양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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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지도 楊口地圖,양구현은 지금의 양구군 일대에 해당하는데 북쪽의 수입면은 북한 지역에 편입되어 있다. 읍치는 양구읍 중리 일원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飛鳳山으로 읍치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을 북한강의 지류인 서천이 휘돌아 나가고 있다. 지도는 다른 군현의 지도보다 규격이 작으며 ?여지도서?에 수록된 지도와도 유사하여 邑誌의 附圖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산지와 하천을 청색으로 채색하였는데 산지에는 수목도 그려 넣었다. 읍치는 주변 지역과 동일한 비율로 그려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주변 지역에는 고을 소속의 각 面과 일부의 洞名도 표기되어 있다. 읍치 북쪽의 方山面은 원래 方山縣으로 이 고을의 속현이었고, 위쪽 亥安倉이 위치한 곳은 亥安面으로 원래는 亥安所였다. 이곳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黃腸木을 생산하는 封山도 있었는데 좌측의 天尾禁山, 沙汰洞의 禁山 등이 그것이다.

  • 양양읍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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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읍지도 襄陽邑地圖,襄陽府는 현재의 속초시와 양양군 양양읍, 강현면, 서면, 손양면, 현북면, 현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읍치는 양양읍 성내리 일원에 있었다. 양양은 설악산을 끼고 동해에 연한 고을로 산과 해안의 경치가 수려하다. 고을의 진산인 설악산을 위쪽에 배치하여 그렸는데, 여기에서 뻗어 내린 산지의 모습이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客舍, 太平樓를 비롯한 관아 건물과 문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래 돌로 쌓여진 읍성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너지고 동?서?남의 세 문만 남아 있었다. 주변 지역에는 고을 소속의 각 面과 洞里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아래쪽에는 東海廟, 洛山寺, 祥雲館 등이 부각되어 그려져 있다. 동해묘는 동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묘인데, 동해신에 대한 제사는 고려 이후 祀典에 中祀로 등재되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곳은 서해의 풍천, 남해의 나주(지금의 영암)와 함께 우리나라 삼해의 해신에게 국태민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왕이 친히 향축을 내려 보내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洛山寺와 義相臺, 觀音屈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준과 하륜이 잠시 은거했다 해서 이름 붙여진 河趙臺의 특색있는 모습도 보인다.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靑草湖와 현재는 매립되어 농경지로 변해버린 雙湖 등의 호수도 그려져 있으며 설악산 五色嶺 아래에는 지금도 유명한 五色藥水가 표시되어 있다.

  • 영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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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지도 寧越地圖,영월부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월읍 영흥리 일원에 있었다. 영월은 동서로 길게 늘어진 고을로 곳곳에 석회암 지형이 산재해 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협곡이 많다. 지도는 邑誌에 실려 있는 附圖처럼 작은 규모로 그려져 있다. 風水의 山圖的인 양식을 가미하여 독특하게 표현하였는데 산지가 검은 색으로 맥을 강조하여 표현되어 있다. 동강과 서강이 고을을 돌아 永春 방면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읍치에는 각종 관청 건물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영월은 단종이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던 곳으로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유적이 보이고 있다. 단종이 승하하자 이곳의 戶長 嚴興道가 鉢山의 기슭에 장사지냈는데 1698년(숙종 24)에 이르러 왕릉으로 追封되었다.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비가 읍치에 표시되어 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淸?浦를 비롯하여 동강변에는 단종 승하시 순절한 시녀들을 제사지내던 愍忠祠도 보인다. 특히 동강 상류에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於羅淵이 회화적으로 표현된 모습이 이채롭다. 그 밖의 인문적 요소로는 주변 지역에 설치된 창고가 그려져 있으며 읍치 위쪽에는 黃腸木을 가꾸던 黃腸山도 보이고 있다.

  • 울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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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지도 蔚珍縣地圖,울진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북면, 서면, 근남면, 원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원래 강원도에 속해 있었던 고을인데 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고을의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큰 줄기가 태백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낙동정맥이 되는데 울진은 낙동정맥을 서쪽에 끼고 동해안에 연한 고을이다. 해안의 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역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데 고을의 전 지역이 청색으로 채색된 산들로 덮여있다. 읍치에는 官舍를 비롯하여 여제단, 성황단, 사직단 등의 三壇과 문묘가 있는 향교가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는 面이나 洞里의 명칭이 없고 일부 사찰명이 있는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동쪽 해안가에는 울릉도를 그려 넣었는데 뱃길로 천여리라는 주기로서 거리를 표시하였다. 읍치와 북쪽의 興富, 서남쪽의 梅野에는 장시도 보이고 있다.

  • 원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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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지도 原州牧地圖,원주목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문막읍, 부론면, 귀래면, 판부면, 신림면, 호저면, 흥업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원주시 일산동, 중앙동 일원에 있었다. 조선시대 1395년(태조 4)에 강원도 監營을 이곳에 두었는데 1895년(고종 32) 23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춘천에 觀察府를 둠으로써 원주에 있던 강원 감영은 폐지되었다. 지도는 조선시대 원주를 풍수의 山圖적인 기법으로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鎭山인 치악산을 지도의 위쪽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동쪽이 지도의 상단이 되었다. 치악산은 산세가 험준하여 예로부터 산성이 축조되었는데 지도에서도 金臺山城, ?原山城 등이 보이고 있다. 또한 太宗臺와 橫指岩 등도 설명문과 같이 표시되어 있는데 태종과 그의 스승 元天錫과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읍치에는 관찰사가 집무하던 營門과 목사가 집무하던 本官이 길을 사이에 두고 따로 그려져 있다.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홍선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察訪驛이었던 丹邱驛에는 찰방관사도 보인다. 주변의 各面에는 사찰, 창고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서쪽 섬강가의 文幕浦口, 興原江과 蟾江이 만나는 서창 부근, 左邊面의 東倉 부근에는 장시가 개설되어 고을의 상업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이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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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지도 伊川地圖,이천부는 강원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이천군 읍내면, 학봉면, 용포면, 산내면, 판교면, 방장면, 고미탄면, 안협면, 동면, 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북한의 강원도 이천군 북쪽 지역과 판교군 일대에 해당한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데, 토양이 메말라서 경지의 대부분이 밭으로 이루어진 고을이다. 지도에는 고을을 관통하는 임진강과 주변의 산지가 거친 필체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인 府內를 특별히 부각시키지 않고 주변 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다. 하천과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는데 하천은 더 굵게 그렸다. 德津 근처에는 하중도인 蛇島가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淸浦面의 廣腹洞은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로 주변에 물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이 고을에서 유일하게 관개에 의한 벼농사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북쪽의 把守院은 병자호란 때 적군이 이곳을 넘어 침입했기 때문에 이후 여기에 防守軍을 두고 院宇와 把守를 설치했던 곳이다. 그 북쪽에는 황장목을 장양했던 封山이 禁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葛山과 九里에는 온천도 보이고 方丈面의 黑石場, 서쪽의 支石場 등의 장시도 개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인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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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지도 麟蹄縣地圖,인제현은 지금의 인제군 인제읍, 북면, 서화면, 북면, 남면, 상남면, 기린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인제읍 합강리, 상동리 일원에 있었다. 곳곳에 높은 산들이 포진해 있어서 평지가 매우 적다. 고을의 중앙을 내린천이 흘러나가며 소양강과 합류한다. 흑색으로 산지를 표현하였는데 봉우리에 마치 전봇대 모습을 그려 수목을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附圖인 東覽圖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도의 외곽에 사방 경계를 표시하였다. 읍치를 주변 지역에 비해 확대시켜 강조하였는데 客舍와 官舍를 비롯하여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 문묘의 3단 1묘를 그려 넣었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의 伏龍山이며 동남쪽의 설악산에는 백담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도 그려져 있다. 동쪽의 寒溪洞은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계곡인데 수려한 경치가 嶺西 지역에서 제일로 꼽히던 곳이다. 읍치 동쪽의 合江亭은 인제읍 합강 2리에 있는 정자로서 소양강 상류인 내린천이 기린 방면에서 흘러내리고 서화강이 한계천과 원통에서 합류된 데서 연유하여 命名된 것이다. 이 정자는 현감 李世億(재임기간: 1675~1677)이 1676년(숙종 2)에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정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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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지도 旌善地圖,旌善郡은 지금의 정선군 정선읍, 북평면, 북면, 동면, 신동읍, 남면, 사북읍, 고한읍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원에 있었다. 정선은 백두대간이 종관하는 영서산악지대로 전역에 걸쳐 산지가 중첩되어 있고 남한강 상류 계곡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경지도 대부분이 旱田이고 水田은 매우 적다. 지도는 다른 군현에 비해 규격이 작게 그려졌지만 수록된 내용은 비교적 풍부하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는데 단지 ‘郡內’라고 표기하였다. 고을의 진산인 飛鳳山에 이르는 내맥이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주변지역에는 面의 명칭이 생략되고 대신에 마을 이름이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桐江은 본래 大陰江인데 ?陰?자를 꺼려하여 개명한 것이다. 동북쪽 餘糧驛 위쪽에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은 아리랑의 발상지로 전해오는 아우라지이다.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대로와 소로를 굵기로서 구분하였고 군사적 요충이 될만한 곳에 ‘隘口’라 표시하였다.

  • 철원구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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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구방지도 鐵原九坊之圖,해방전 행정구역으로는 철원군 동송면, 서변면, 갈말읍, 어운동면, 북면, 신서면, 무장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묘장면, 북면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부 지역은 비무장지대와 북한 지역에 편입되어 있다. 궁예가 도읍으로 삼았던 곳으로 한탄강이 고을을 가로지르며 흘러가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고을이다. 1746년(영조 22) 춘천에 있던 防營을 이곳으로 옮겨 9개의 고을을 관장하였다. 지도는 고을내의 9개의 面과 그에 소속된 동리를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하였다. 방위도 표시되어 있는데 ‘南北’ 대신에 ‘子午’라는 간지를 사용하였다. 남쪽은 높은 산지로 덮여 있고 북쪽으로 평야가 발달한 지역의 특성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산지와 하천 모두를 청색으로 묘사하였는데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주변지역에 비해 읍치를 확대하지는 않았지만 客舍, 衙舍, 吏廳 등의 관청 건물을 그려 넣었다. 북쪽에는 궁예가 도읍했던 弓王古都도 그려져 있는데 내외성의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을의 남쪽 한탄강 중류에는 철원8경의 하나인 고석정도 보인다. 고석정은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놀던 유서깊은 곳으로, 절벽 아래 굽이쳐 흐르는 강심에서 10여m나 위로 높이 솟은 석벽과 그 위의 세 칸 남짓한 자연 석굴이 절경을 이룬다. 그 밖에 도로변에 위치한 역원과 창고, 그리고 사찰 등도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 춘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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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지도 春川府地圖,춘천부는 현재 춘천시 북산면, 산북읍, 동면, 동내면, 신동면, 남면, 서면, 사북면 그리고 화천군 사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춘천시 요선동 일원에 있었다. 춘천은 강원도 내륙에 위치한 분지로 고을의 내부를 소양강이 관통하고 있다. 과거 맥국의 古都로서 牛首州, 朔州 등으로 불리다 1413년(태종 13)에 春川으로 되었다. 1895년 지방행정 개편 때 관찰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강원도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다소 소략하게 그려졌는데 邑誌에 수록된 지도와 구도, 모습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중심에 동헌을 비롯한 관청 건물을 상세하게 그렸으나 주변은 面名을 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특히 동헌, 객사뿐만 아니라 府使의 관사인 內衙, 아전들의 근무처인 作廳 그리고 捕廳, 詳定(廳) 등 다양한 건물이 그려져 있다. 聞韶閣은 일명 邀仙堂으로도 불리는데 1573년(선조 6)에 府使 成義國이 세운 것이다. 府內에는 노란색의 집 지붕을 그려 장시를 표시했으며 서남쪽의 門岩은 회화적으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남쪽 산들의 봉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게 그려진 것도 회화식 지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통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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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지도 通川地圖,통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통천군 순령면, 군내면, 벽양면, 임남면, 답전면, 학일면, 학이면, 학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북쪽 지역(舊臨南面)과 통천군 일원이다. 지도는 회화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과거 통천의 모습을 고졸하게 표현하고 있다. 관아가 있던 읍내에는 빙 둘러가면서 산을 그려 고을의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邑倉 이외에는 관청 건물을 거의 그려 넣지 않았다. 동쪽의 해안에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서, 우뚝 솟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叢石亭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서쪽에는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峻嶺들을 연이어 그려 산세 또한 웅장함을 엿보게 한다. 남쪽 부분의 百鼎峰, 瓮崖, 門巖 등은 그 이름에 걸맞게 솥, 항아리, 문 모양을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특히 백정봉은 산정부에 백여 개의 작은 우물이 있어서 百井峰이라 표기하기도 하는데, 비가 내려도 우물이 차지 않고 가물어도 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바다에 그려진 卵島는 서쪽을 제외하고 동?남?북쪽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마다 3, 4월에 海鳥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알을 낳고 번식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도로는 검은 선에 홍선을 덧칠해서 표현하였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읍내와 북쪽과 남쪽의 나루터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평강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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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지도 平康地圖,평강현은 철원 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분수령을 넘어 함경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강군 군내면, 현내면, 고삽면, 남면, 서면, 목전면, 유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북한 강원도 평강군과 세포군 일대이다. 지도는 읍치와 주변지역을 동일한 축척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산지는 독립된 산의 형태로 그렸는데 읍치의 主山인 虎岩山에는 암벽의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다. 직사각형 속에 면 이름을 표기하였는데 옆에 소속 마을 수도 병기하였다. 읍치에는 관청 건물을 그리지 않고 단지 衙舍, 客舍 등의 글자만 기입하였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이곳에 黃腸封山이 네 군데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지도상에서도 북쪽 고삽면과 유진면에 禁山이라 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봉수의 표시도 상세한데 조응관계도 기재하였다. 서북쪽에는 三防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1867년(고종 4)에 鎭을 설치하고 別將을 둔 것이다. 이 고을에는 산성이 곳곳에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궁예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는데, 궁예가 사냥가서 잠시 쉬었던 憩峴, 궁예가 변란을 듣고 도망할 때 갑옷을 버리고 달아난 곳인 甲棄川 등이 대표적이다.

  • 평창군오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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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오면지도 平昌郡五面地圖,평창군은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미탄면 일대에 해당하는 비교적 작은 고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면적이 작지만 縣이 아닌 郡으로 된 것은 穆祖 孝妃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읍치는 평창읍 중리, 하리 일원에 있었다. 고을은 높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고 평창강이 내부를 곡류한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가미하여 고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산에는 수목까지도 그려 넣었고 주변의 각 마을에는 황색의 초가집을 그려 표현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魯山인데 산의 정상에는 城隍祠가 자리잡고 있다. 읍치에 있는 國舅祠宇는 穆祖의 妃 孝恭王后의 부친인 千牛衛長史 李肅과 모친인 突山郡夫人 鄭氏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읍치 동북쪽에 있는 斗滿山은 黃腸封山으로 지도상에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 앞과 후평리 강변에는 송림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 홍수해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지도의 하단 여백에는 馬池津에 있는 동굴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응암굴로 불리는데 상굴과 하굴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군수 權斗文이 이 동굴로 피난하였는데, 끝내 탄로나 잡혀가게 되자 그의 妾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했고 參奉 智士涵과 出身 禹應民 등은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평해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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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지도 平海郡地圖,평해군은 지금의 경북 울진군 평해읍, 기성면, 온정면, 후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원래 강원도에 속해 있었는데 1962년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에 있었다. 서쪽은 낙동정맥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동쪽 해안에는 충적평야가 다소 넓게 펼쳐져 있다. 남대천이 고을의 중앙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간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다른 군현지도와는 달리 方格을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 방격은 정방형이 아닌 직사각형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격자에 대한 실제거리의 표시가 없는 점으로 보아 축소 또는 확대 모사 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는 비교적 소략하게 그려져 面名, 누정과 사찰 등이 수록된 정도이다. 읍치에는 읍성도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知郡事 金乙權이 쌓은 것이다. 동쪽 해안의 월송정이 있는 곳에도 성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水軍萬戶가 지키던 越松浦鎭城으로 1555년(명종 10)에 쌓은 것이다. 뛰어난 절경으로 이름난 越松亭, 望洋亭 등의 정자가 그려져 있으며 북쪽에는 지금의 백암온천으로 널리 알려진 溫井도 보인다.

  • 홍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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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지도 洪川地圖,洪川縣은 지금의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두촌면, 화촌면, 북방면, 서면, 남면, 동면, 서석면, 내촌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 일원에 있었다. 홍천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강원도의 내륙산간 지역으로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을의 중앙부를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이 흘러간다. 산지는 봉우리를 연속하여 그려 전통적인 산줄기 중심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인 石花山 아래에는 향교와 縣衙, 倉庫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림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과 면 소속의 마을 이름이 비교적 소상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로를 홍선으로 표시하였고 도로변에는 역원명도 기재되어 있다. 읍치 남쪽 남산 너머에는 羽嶺이 보이는데, 鶴들이 이 고개를 넘어갈 때 날개가 떨어졌던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그 옆에는 大彌山城古址도 보이는데 원래 돌로 쌓은 성이지만 이 시기에는 퇴락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黃腸封山이 두 군데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남쪽의 淸凉里에 禁山이 표시되어 있다. 창고는 동서남북의 四倉과 읍내의 司倉, 賑倉 그리고 西倉 옆에는 大同米를 관리하던 大同倉도 표시되어 있다.

  • 회양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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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지도 淮陽府地圖,회양부는 강원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철령을 사이에 두고 함경도와 접하고 있으며, 곳곳에 많은 고개들이 포진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부내면, 상초북면, 하초북면, 난곡면, 안풍면, 사동면, 장양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 회양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읍치를 주변 지역보다 크게 그려 강조하였는데 동헌 이외에 작청, 향청, 장청 등의 건물도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義館嶺인데 祀典에 小祀로 등재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서쪽의 德津溟도 국가에서 小祀를 지내던 곳이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철령으로 통하는 북관대로는 굵게 강조하였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이 되므로 성을 쌓고 방비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거의 퇴락하여 흔적만 남아 있음을 옆에 注記하였다. 나루터에 배와 사공의 모습이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무엇보다 창고의 표시가 상세하고 읍치에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서쪽의 산지에는 봉수대가 집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수려한 경치를 지닌 금강산의 아래쪽에는 黃腸木을 장양하던 黃腸封山도 보이고 있다.

  • 횡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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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지도 橫城縣地圖,횡성현은 지금의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청일면, 갑천면, 공근면, 서원면, 우천면, 강림면, 안흥면, 둔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읍하리, 읍상리 일원에 있었다. 횡성은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평창, 서쪽은 경기도, 남쪽은 원주, 북쪽은 홍천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남동부는 치악산을 비롯한 높은 산지로 둘러 싸여 있으며, 중앙부는 섬강이 흐르면서 횡성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산지는 담채로 고졸하게 묘사하였으며 사직단 부근에는 울창한 송림도 그려 넣었다.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부각시켰으며 관청 건물도 상세하게 그렸다. 지도에는 鴻頭山이 主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輿地圖書?에는 馬山이 주산으로 되어 있다. 또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馬山이 鎭山으로 기재되어 서로간에 차이가 나고 있다. 주변 지역은 면 이름이 표기되고 창고가 그려진 정도로 다소 소략하다. 도로변에는 驛을 그려 넣었는데 그 옆에는 숙소에 해당하는 館舍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북쪽 泰岐山에는 黃腸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황장목을 장양하던 봉산이었다.

  • 흡곡현산천관방요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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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산천관방요애지도 ?谷縣山川關防要?之圖,흡곡현은 강원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동쪽으로는 동해안에 이르고 남쪽은 통천, 서북쪽은 함경도 안변과 맞닿아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통천군 흡곡면, 학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북한 강원도 통천군의 북쪽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풍수의 山圖와 유사한 양식으로 산지의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山川關防要?之圖’라는 지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지도로 좌측의 地誌로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鐵嶺에서 秋池嶺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위쪽에 배치되고 동쪽과 북쪽에 있는 동해 바다가 아래쪽에 있다. 바다에는 파도 무늬도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縣城을 비롯하여 여러 산성이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와 庫底에는 시장도 개설되어 있다. 읍치 부근에는 호수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석호인 侍中湖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는 관동십경의 하나로 강릉 경포대에 비견되는 侍中臺가 있다. 그리고 동북쪽의 霜陰遷은 관동지방 첫 관문으로 이 지역 최고의 군사 요충지이지만 이 시기에는 안변에 속해 있었음을 注記에서 지적하고 있다.

  • ▶경기도
  • 가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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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현지도 加平縣地圖,가평현은 설악면을 제외한 가평군 전체와 남양주시 구동면 일부에 해당하였다. 읍치는 지금 가평읍 읍내리이니, 현재까지 변동이 없다. 다만 경춘선 철도 개통 이후, 약간 남쪽으로 시가지가 이동하였다. 下面에 縣倉이라는 창고가 보이는데, 이곳에는 朝宗縣이 위치하였으며, 지금의 상면, 하면을 관할하였다. 조종은 1396년 가평에 통합되었다. 하면에서 조종천을 조금 내려가면 大報壇古址라는 기술이 있다. 조종암이라고도 불린다. 병자호란 패배의 한을 안고, 宋時烈은 명나라 황제(의종)에 대한 모정을 표시한 ‘思無邪’, ‘日暮途遠至痛在心‘ 등의 글씨를 군수를 하여금 이곳에 새기게 하였다. 대보단이라고 하면 서울 비원 후방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오랑케의 눈에 안 띄는 이곳 가평의 오지에서도 묵묵히 제사를 지내 온 것이다. 內西面에는 中宗大王의 태봉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도 당시의 태봉비가 남아 있다. 태봉이 생김으로써 가평현은 한 때 군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通京路, 즉 서울로 나가는 길목은 지금의 경춘국도인데, 淸平店이라는 주막점이 있는데, 지금 청평은 가평 버금가는 큰 고을이 되었다.

  • 강화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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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부전도 江華府全圖,강화부는 옛 교동부 지역을 제외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해당한다. 읍치(府內)는 지금의 강화읍내에 해당한다. 지도에 읍성이 보이지만 지금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성곽은 고려 때 몽고 침략에 따라 도성을 강화로 옮길 때 토성을 쌓았다가 조선조에서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읍성 안에는 동헌, 향교, 고려궁터, 외규장각 터 등 문화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지도에서 보이듯이 육지(통진)에서 강화로 건너는 나루는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지금 48번 국도가 다니는 甲串鎭나루, 또 하나는 廣城鎭나루였다. 광성진을 강화수도를 따라 鎭堡와 성벽이 연이어 구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이 한강으로 연결되어, 수도의 방위와 직결되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墩臺는 섬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寅火鎭(지금의 인진나루)에서는 교동으로 가는 배편이 있었다. 강화도 주변은 수심이 낮아 물만 막으면 농토가 생긴다. 그래서 간척사업이 조선시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 지도를 보아도 東頭堰, 嘉陵浦堰, 長池浦堰 등 완성된 혹은 축조중인 간척지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摩尼山 정상에는 단군시대 이래 春秋에 제사를 지내 왔다는 塹星壇이 보고 그 외에도 몇 군대 정상에 제단이 확인된다. 鼎足山城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성내에는 傳燈寺가 자리잡고 있고 史庫도 있었다.

  • 개성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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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전도 開城全圖,고려의 서울이었던 松都 開京은 태조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 간 뒤에도 개성부를 두었다. 분단전의 개성시와 개풍군, 장단군의 대남면, 소남면에 해당하였다.  滿月臺는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본래 후삼국시대의 태봉국의 왕궁으로 이용되었다가 고려가 건국하면서 왕궁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善竹橋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살해된 곳이다. 다리에 핏자국이 남고 여기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솟아나 善竹橋라 불렸다. 옆에 보이는 碑閣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세워졌으며,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쓰여 있다. 成均館은 본디 992년에 창설된 國子監이었다. 최초의 대학으로서 국자학, 대학, 시문학, 륜학, 서학, 상학 등 6개의 학과가 있었다. 지금 북한이 고려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子男山에는 지금 김일성의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산 중턱의 觀德亭은 1789년에 開城관량들이 세우고, 활궁연습장으로 한 곳이다.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내부에 금단청이 그려져 있다. 고을 동북쪽에는 고려가 방어상 지은 大興山城이 보이고, 북문 밖에는 朴淵(폭포)도 표기되어 있다. 대흥산성 외에도 관문이나 鎭이 많은 것을 보면 고려가 얼마나 수도방비에 신경을 썼는지 알 만하다.

  • 고양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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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지도 高陽郡地圖,고양군은 덕양구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금의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하였다. 지금 여기에 교양항교와 碧蹄館 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도 격전지가 되었다. 벽제관은 지도에는 없지만 중국 사신이 여기까지 다다르면 하루 밤을 자고 정장을 해서 한양으로 올라섰다는 곳이다. 지도는 그림보다 글 위주로 그려져 있으며, 역원이나 왕릉 등은 거의 생략되고 간략하게 그려졌다. 하천을 점선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중국 사신이나 燕行使도 惠陰嶺에서 읍내, 望客峴, 礪石峴을 거쳐 서울로 갔다. 망객현은 이름 그대로 중국의 손님을 바라보았다는 데서 붙인 고개이며, 지금은 서울시 火葬場이 되어 있다. 한강(大江)을 따라 벌판에는 지금은 일산신시가지가 펼쳐져 있는데, 당시는 벌판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鼎鉢山은 지금 신도시의 중앙공원이 되어 있다. 또 남쪽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權慄장군이 일본군 石田三成을 패배시킨 장소로 당시부터 ‘權都元帥勝戰碑’가 있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禿山烽燧, 鹽浦烽燧, 高峯烽燧 등 관내 봉수의 위치와 연결관계도 강조되어 있다.

  • 과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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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지도 果川地圖,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시 서초구와 동작구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관문동이었고, 관아 터는 현재의 과천초등학교 자리인데, 지금도 객사(지도상의 행궁과 인접하였다)의 주춧돌이 교정에 남아 있다. 冠岳山을 주산, 淸溪山을 안산으로 여기는 과천읍은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였으며, 관천읍내는 읍취락인 동시에 교통취락의 역할이 컸다. 지도에 行宮이나 행궁터가 보이는 것은 정조대왕의 초기 헌릉원행 등 왕의 행차가 잦은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향교는 지금도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남아 있다. 南泰嶺은 본디 여우고개라 했으나 정조대왕이 수행원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속된 이름을 꺼내지 못했던 수행원이 ‘남태령’이라 답한 데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다. 서울에 올라가는 관문이었기에, ‘남태령에서 긴다’ ‘과천에서 긴다’는 말이 행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과천시가 최근 ‘남태령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삼남대로는 이 고개에서 지금의 동작대로를 따라 북상해 銅雀津(동재기나루)에 이르러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들어갔다. 軍浦場은 이름 그대로 현 군포시의 기초가 된 장터거리인데, 지금도 ‘구장터’라는 취락명이 남아 있다. 기타 鷺粱津을 거치는 시흥로, 漢江津과 良才川橋를 거치는 영남대로 등이 보인다.

  • 광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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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전도 廣州全圖,광주는 남종면을 제외한 광주시와 남양주시 와부읍, 조안면, 하남시, 서울시 강남, 송파, 강동구 의왕시, 안산시 일부, 화성군 매송면 일부에 해당한다. 彦州面은 지금 강남구 일데, 中臺面은 송파구, 구천면은 江東區, 東部/西部面은 하남시, 儀谷/旺倫면은 의왕시에 해당한다. 지금 광주시청 소재지는 경안동에 있지만 조선시대 읍치는 南漢山城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도에서도 남한산성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리고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丙子胡亂 때 仁祖왕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농성을 하다가 항복하였는데, 그 사이 산성 주변에서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지도상에는 당시의 전적지와 유래를 일일이 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慶安驛 남쪽 大雙嶺에서는 ‘병자 때 慶南 左右兵士 戰亡處’라 표시하여, 산성 주변 두 군데에 ‘丙子胡兵 埋伏 掩殺處’라고 기록하고 있다. 壬辰倭亂 때 전적지도 보인다. 지도에는 역과 擺撥, 酒幕村까지 정확히 표시하고 있으며, 산줄기 표시는 생략되었으나 고개의 존재는 상세히 알려 주고 있다. 실용성을 중시한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松坡, 栗木倉 등 ‘파발’ 표시가 유난히 많은데, 한양 광희문에서 경안, 이천을 거쳐 충주로 가는 길은 영남대로의 擺撥路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 주막과 파발이 으레 함께 있었음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 교동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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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지도 喬桐府地圖,교동부는 강화군 교동도와 석모도 북부 및 그 부수 섬들에 해당하였다. 교동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구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는 섬으로, 짧은 면적이면서도 水師가 상주하여, 수군의 중요 기지였다. 지도에서 보듯이 황해도 연안, 백천, 경기도 풍덕, 강화 등에 둘러싸이고 있다. 지금도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선이며, 군사적 중요도는 옛날과 마찬가지이다. 섬에 평야가 많아 평탄하게 보이지만 이는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개펄의 간척사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간척되기 전에는 섬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다시피 했었다. 읍은 전략요충지답게 읍성를 가지고 있는데, 성곽과 남문의 홍예는 지금도 남아 있다. 또 읍의 동북쪽 華蓋山 밑에는 교동향교가 현존한다. 남문을 나와 바닷가에 禦邊亭이란 곳이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교동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어변정 앞바다에서 출항하였다고 한다. 또 강화도와의 도선은 읍 동남쪽의 ‘東津’에서 출항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나루터가 남아 있다. 읍 동쪽10리에는 고읍리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고구려시대의 읍 터이다. 당시의 토성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석모도가 강화보다 크게 그려져 있는데, 양 섬의 교류를 알 수 있다.

  • 교하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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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군지도 交河郡地圖, 교하는 파주시내와 교하면, 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하여 읍치는 교하면 소재지에 있었다. 衙洞里는 지금의 파주시내에 해당한다. 지도상의 교하읍내로 옮겨오기 전 교하읍치가 이곳에 위치하였다. 지금도 交河鄕校는 아동리 옆 金城里에 있다. 아동리 위의 冶洞里는 자연취락명을 풀무골이라고 하는데, 대장간이 모여 있어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도상에 보이는 鰲頭山城墟는 지금 통일전망대가 있는 자리이다. 海水要衝關防隘口라고 써 있듯이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을 바라보는 요지에 있다. 深岳山(현 심학산) 역시 요충지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곳은 태조3년(1394) 교하에 병합된 深岳縣이 있었던 터이다. 東牌里에 있는 ‘揷橋場’은 심악현 지구의 상업중심지였으며, 지금도 장터라는 취락명이 남아 있다. 黔丹寺는 지금 통일전망대 아래 금단산에 있는 금단사이다. 읍내를 거쳐 한강으로 나가는 곡릉천은 멀리 도봉산에서 발원하여, 고양, 봉일천을 거쳐오는 강이다. 포구 이름이 많이 보이듯이 배가 바로 올라 왔다. 교하읍내에 인접해서 下支石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일대에서는 선사시대 고인돌과 집터가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 김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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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지도 金浦地圖,김포는 김포시 김포동과 고촌면, 양촌면과 인천시 서구 검단동 일대에 해당한다. 또 일부는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관아 자리는 지금의 김포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읍내에는 향교도 남아 있는데 이 향교는 예전에 章陵 자리에 있었다가 왕릉이 생기면서 걸포동에 그리고 현위치에 두 번 옮겨졌다. 지도에 그려진 향교는 현 위치인데, 걸포동에는 지금도 ‘향교말’이라는 자연취락이 있다. 장릉은 인조의 생부인 元宗과 그의 비 인헌황후 구씨의 능이다. 향교 옆에는 古縣內面이라 적어 있어서 예전 현소재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김포가 시로 승격되면서 다시 이 부근에 시청이 옮겨왔다. 읍 뒷편에는 牛渚書院이 보이는데, 趙憲선생을 奉祀하기 위하여 인조26년(1648)에 창건되었다. 우저서원 뒤에 보이는 奉陵寺는 지금은 金井寺라고 불린다. 원래 장릉을 지키는 陵寢寺였다. 지도 윗쪽에 보이는 馬山面, 蘆長面, 黔丹面 등은 지금 인천광역시의 관할이다. 서해 바다 위에 그려진 栗島 일대는 김포매립지가 되어 있는데, 매립지 이름으로만 여기가 김포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도에는 율도만 김포땅이며, 주변 수로는 통진과 부평의 관할임을 주기하고 있다. 한강가에 보이는 甘巖은 교하 방면으로 건너는 나루터였다.

  • 남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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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지도 南陽地圖,남양은 화성시의 문호리를 제외한 남양면, 삼화리를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안산시 대부도, 영흥도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 화성시 남양동 소재지이다. 최근 화성시청이 남양읍치 근처로 옮겼다. 지금 남양향교는 읍치 서쪽 글판이마을에 위치하는데, 1891년까지는 시청 장향인 역골의 남양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지도상에는 당연히 이 위치에 향교가 그려져 있다. 역골이라고 함은 조선중기까지 海門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문역은 마도면 석교리 역말(지도상의 文坂峴 부근)쪽으로 옮겨갔다. 서울, 수원, 안산 방면에서의 길이 남양에 접어드는 장소에 南陽初境이라고 써 있는데, 초입에 長?店(현 장승동)이라는 주막촌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매송면과 비봉면의 경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舞鳳山 아래 鳳林寺는 고려말 창건으로 전해지는 사찰로 목재 阿彌陀佛坐像으로 유명하다. 대부도로 건너 갈 때에는 馬山浦(현 송산면 고포리)를 이용하였다. 지도에는 밀물이면 바닷길, 설물이면 개펄이 됨을 주기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경로로 연육교가 생겨서 마산포는 나루터의 역할을 상실했다. 화량만에 위치한 花梁鎭衙는 포곡식 성곽으로 京畿水軍節度監營이 인조7년에 교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서해 방어의 거점이었다. 지도에는 없지만 화량만 건너편 念佛山 줄기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唐城이 존재한 것으로도 이 지역이 경기도 앞바다의 전략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 대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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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지도 大阜地圖,영종지도와 함께 1872년에 제작된 營鎭지도 중 하나이다. 대부도는 서해안에서는 가장 큰 섬이며, 전체가 나즈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서 대부도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주, 고려시대에는 남양도호부, 조선시대에는 남양군에 속하였다. 오래 옹진군의 일부로 있었다가 1994년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官舍 뒤에 솟아 있는 산은 黃金山이며, 표고 166미터가 된다. 선재도를 거쳐 덕적도에 이르는 대부도 서쪽 섬들은 일찍이 18세기부터 서해안 해방의 거점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지도에는 대부도의 서남쪽에 산재한 여러 섬들의 소속과 수로상의 거리가 파악되어 있다. 무인도의 경우에는 ‘無人戶’라는 표시가 있다. 특히 선재도와 영흥도 사이가 ‘內洋水路’이며, 영흥도와 소흘도 사이는 異樣船들이 지나간 자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나 내양수로와 연결되는 서남쪽의 楓島와 五排島는 이미 서양 선박들이 정박한 바 있는 곳이라 내양 방어도 긴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영종도와 대부도는 삼남 수로를 통한 서양 선박의 위협 가능성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중시되었다.

  • 마전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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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지도 麻田郡地圖,마전은 연천군 마산면과 왕징면 일부, 군맘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미산면 마전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교통로가 일체 생략되어, 다만 津渡의 위치만을 명시하고 있다. 향교마저 한국전쟁 때 없어져 읍취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읍 서방에 보이는 崇義殿은 조선 태조6년(1397)에 세워진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조 충신 16공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본디 이곳은 왕건의 願刹이었던 迎巖寺 터이다. 지도에도 숭의전 위에 寺垈라고 적혀 있다. 숭의전 옆에 貢稅倉이 보이는데, 세곡을 비롯한 화물수송이 주로 임진강 수운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강 건너 적성 측에 三和里라는 마을 하나만 마전 소속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임진강이 크게 마전쪽으로 사행하고 있다. 지금도 삼화리는 파주가 아닌 연천군 소속이다. 마을 안의 宿字堤堰은 농업용으로 지어진 못으로, 지금은 삼화방죽이라 불리고 있다. 방죽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새우개라고 하는데, 이것이 삼화리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 부평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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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지도 富平府地圖,부평은 인천시 부평구, 계양구, 서구의 일부, 부천시, 서울시 구로구 일부에 해당한다. 지금의 부평거리는 일제시대에 부평이 공업화되면서 생성된 거리이며, 본디 부평읍은 지금의 계양구청 주변에 있었다. 계양구는 주산인 桂陽山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상에도 보인다. 지도에는 읍내의 건물배치 등은 모두 생략되어, 산줄기, 물줄기 그리고 교통로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어떤 간략한 도식이라도 社倉 표시가 빠지지 않는 것은 대원군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읍지도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읍치 방향은 남향으로 일치하지만 한강 물은 사실 계양산 뒤에 위치해야 함으로 이 부분만 왜곡되어 있다. 한강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것은 물자유통 측면에서 사실상 부평의 문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杏湖란 대안인 幸州山城 앞의 강폭이 넓어진 부분을 가리킨다. 여기서 강물이 掘浦川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 온 것이다. 지금 굴포천에서 계양산 뒤쪽을 지나 서해로 연결하는 경인운하가 건설중에 있다. 굴포교는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길목에 놓인 다리이다. 한양과 부천을 잇는 교통로는 지도에도 있듯이 楊花津에서 大橋(한다리)를 지나는 경로이다. 또 仁川으로 가는 길은 읍을 지나가는 길과 시흥 쪽에서 梧丁面을 지나 星峴을 넘어가는 경로가 있었다. 서해안도 그려져 있는데, 섬마다 사람의 유무를 표시하여, 또 배가 항행가능한 뱃길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뱃길 따라 행정경계까지 표시하여, 수로 정보제공도 상세하다.

  • 삭녕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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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지도 朔寧郡地圖,삭녕은 분단전의 연천군 삭령면, 중면, 왕징면 일부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내문면, 인목면에 해당한다. 고구려 小邑豆縣을 삼국통일 후 朔邑으로 고치고, 고려에 이르러 현종9년(1018) 東州(鐵原)에 예속시키고, 예종1년(1106) 僧嶺縣 監務를 겸하여 삭령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神懿王后의 外鄕이라 하여 知郡事로 승격시키고, 고종32년(1895) 삭령군으로 승격되었다. 읍치는 일제시대까지 삭녕면 소재지였는데, 지금은 비무장지대 내에 있어 거리는 소멸하였다. 동헌 건물은 詠恩堂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東邊里(동켠말)에는 읍내장이 있었는데,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의 물산의 집산지였다고 한다. 읍 동쪽에 古邑基라고 있는데, 僧嶺縣이 있었던 터이다. 승령현은 태종 때 삭령에 병합되었다. 또 읍의 동남쪽에 있는 城山은 삭녕읍의 옛 터이며, 세종23년에 현 위치에 이전했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산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羽化亭津은 읍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여, 임진강변의 교통요지였다. 나루터에는 비석군과 주막촌이 있었다. 이 길은 파주 梨川(배내)에서 의주로와 합류하였다. 防築이란 저수지를 의미하여, 조선시대에도 곳곳에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들어졌다.

  • 수원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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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지도 水原府地圖,수원은 수원시, 오산시, 옛 남양과 광주 영역을 제외한 화성시와 평택시 포승면, 청북면, 안중면, 현덕면, 오서면에 해당한다. 읍내는 원래 태안읍 송산리의 花山 아래 존재하였다가 正祖13년 현재의 八達山 東麓으로 옮겨,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華城이 축조되었다. 화산에는 정조의 아버지 思悼世子의 묘인 顯隆園이 축조되었고, 정조는 서울에서 정사를 취하면서도 자주 이곳을 다녔다. 화성 안에 보이는 和成 行宮은 그 행차 때 사용되었는데, 최근 수원시의 손으로 복원되었다. 또 광주와 경계 遲遲臺고개에는 지지대 비각이 보이는데, 정조가 이 고개에서 부친의 묘를 내려다보면서 석별하니 행차가 전혀 전진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오는 지명이다. 정조가 붕어하고 나서 헌륭원 옆에 묘가 축조되었는데, 그것이 健陵이다. 지금도 이 고개 마루에 서면 화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지지대에서 화성을 지나 大皇橋에서 정조의 행차로와 갈라져, 진위방면으로 가는 길이 三南大路이다. 진위와 경계에 있는 장터는 오뫼장, 지금의 오산시이다. 팔달산 서쪽에 보이는 방축은 지금의 西湖, 그 상류의 방축은 지금의 일왕저수지로 보인다. 이 지도에는 각 면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데, 남쪽 수변에 월경지를 많이 볼 수 있다. 선착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포구가 월경지에 잘 포함되는 것은 월경지의 생성 유래가 다분히 경제적 원인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시흥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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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흥현지도 始興縣地圖,시흥현은 대략 지금의 서울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관악구, 광명시 정도에 해당한다. 果川과 같이 冠岳山을 주산으로 여기는데, 관악산이 읍치의 동쪽에 위치하지만 지도상 북쪽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글 위주로 다른 지도처럼 산 외에 그림 표시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읍치의 소재지는 지금의 금천구 시흥본동에 해당하는데, 오래된 은행나무가 옛 고을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시흥은 일명 ‘은행고을’이라고도 하였다. 읍 앞의 店幕이라 표시된 주막촌을 지나가는 길은 정조대왕이 헌륭원 행차 때 이용한 대로이며, 행차 때는 한강 鷺梁津에 배다리를 띄우는 외에, 작은 내에는 돌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길 동쪽에 보이는 萬安橋는 대표적인 석축교이며, 최근 안양시가 복원해 놓았다. 정조는 지금의 동작구 상도동쯤에 이르러 주변이 너무 한적해서 겁이 난 행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長丞을 한 쌍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지금 대방장승이 자리잡은 장승백이의 유래인데, 지도상에도 長牲峴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영등포는 한강가의 작은 포구취락으로 그려져 있다.

  • 안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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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지도 安山郡地圖,안산은 시흥시의 하중동, 하상동 남쪽 부분과 안산시의 시청 서북쪽 지역에 해당한다. 도폭은 지도 자체보다 설명문에 비중이 두어져 있으며, 또 설명의 내용을 지도에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안산군이 본디 고구려의 獐項口縣이었다가 신라 景德王 때 獐口縣이 되어, 고려초에 현 명칭이 되었다는 기술이 있는 한편 지도에도 그 내용을 적고 있다(지도에는 고구려가 ‘고려’로 되어 있다). 지금의 안산시가지는 80년대에 ‘반월신도시’로서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옛 안산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지금도 안산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아 터가 농지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 택지조성이 이루어졌다. 주산인 修理山 옆 修巖峯은 고을 동쪽에 있는데, 지도상에는 북쪽으로 그려져 있다. 수리산 좌측의 봉우리는 수암봉으로 보이며, 이것이 현 수암동의 유래이다. 남쪽 해안지역은 지금 시화공단으로서 매립이 되어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바다 위에 있는 烏耳島는 지금은 육지가 되어, 시화방조제의 입구가 되어 있다. 오이도 위 正旺山에는 봉수대가 그려져 있는데, 南陽 海雲山 봉수와 仁川 城山烽燧에 연계되어 있다고 적고 있어서, 당시 서해안을 따라간 봉수로를 알 수 있다.

  • 안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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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지도 安城地圖,안성은 안성시내, 보개면, 금광면, 미양면, 대덕면에 해당한다. 산줄기, 물줄기, 도로 외는 거의 글로만 표시되어 있다. 산세도 풍수 원리에 맞게 꾸며지고 있으며, 동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산허리에 안기게 표현되었다. 안성 읍치는 현 안성시내와 일치한다. 주산은 飛鳳山이며, 남쪽을 안성천(지도상의 影鳳川)이 지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이다. 비봉산 정상에는 축조연대 불명인 산성이 남아 있다. 지금은 국도 우회로가 터널로 비봉산을 관통하고 있다. 읍내에는 안성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보개면 양복리에 안성객사가 이전, 보존되어 있다. 읍 앞에 記功碑閣이라고 보이는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都巡武士 吳命恒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지금은 비각은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으며, 안성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비각 아래에는 장터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 지역이 지금도 안성시의 중심 상가이다. 비봉산 동쪽에 보이는 驛村은 대동지지상의 康福驛인 것으로 보인다. 瑞雲山은 지금도 관광지로 이름난 곳인데, 靑龍寺를 비롯한 사찰과 암자가 많은 영산이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계남 장군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 양근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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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지도 楊根郡地圖,양근은 양평군 양평읍, 강상면, 강하면, 서종면, 옥천면과 광주군 남종면, 가평군 설악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원래 지금의 옥천면에 있었으나, 1747년에 현 위치(葛山)로 옮겨갔다. 구읍 지역은 지도상에서도 古邑面이라고 쓰여져 있다. 신 읍내는 한강가에 있어 포구장터를 겸하고 있다. 주산은 멀리 龍門山에 구하고, 안산은 한강 넘어 白屛山이다. 용문산 밑에는 舍奈寺를 그리고 있다. 지도에는 향교 표시가 보이는데 이 양근향교는 오늘까지도 이전되지 않고 구읍에 자리잡고 있다. 도로는 빨간색으로 굵게 그려져 있다. 광주와 경계인 兩水頭(양수리)에서 지평 방면으로 가는 길이 三大路, 즉 대관령을 거쳐 강원도 강릉, 평해 방면으로 가는 關東大路이다. 지금의 6번 국도에 해당한다. 양수리에는 나루가 두 개 그려져 있지만 대동지지를 보면 상류 쪽의 龍津을 정식 경로로 하고 있다. 지도에는 주막촌(店幕) 표시가 기술되어 있다. 읍지도에 따라 주막 표시는 있거나 없거나 하여, 통일성이 결여된다. 도로와 함께 수로도 상세히 그리고 있다. 남한강, 북한강 상에 나타나는 여울들을 하나씩 묘사하고 있다. 지도에는 9개 면을 표시하고 있는데, 모든 면을 산줄기를 등지게 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양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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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지도 陽城地圖,양성은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공도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금의 안성시 양성면 소재지에 있다. 지금은 양성향교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표시는 대부분 글씨로만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읍치가 어디인지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읍취락을 舊邑과 新邑으로 나누어 표기하고 있는데, 현 면소재지의 취락명인 ‘구읍내’와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산 天德山에 있는 淸源寺는 고려시대의 발원이며, 당시의 7층석탑이 남아 있다. 武?城은 雲峀菴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는 전설이 있지만 성은 암자보다 훨씬 오래된 고대식 축성이다. 운수암은 장씨부인이 영조26년(1750) 창건하여, 대원군이 현판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운산 서쪽을 남북으로 지나는 길은 삼남대로이다. 素湖場基는 대동지지에는 素沙店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안성천의 포구장터이자 지역 상업중심지였다. 현 원소사마을에는 大同法施行紀念碑가 남아 있다. 안성천을 건너는 牙橋는 畿湖交界, 즉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였다. 소사벌이라 불리는 이 일대는 청일전쟁 때 한양에서 내려온 일본군과 아산에서 상륙한 청군의 첫 교전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德峯書院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忠正公 吳斗寅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21년(1695) 창건된 서원이다.

  • 양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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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지도 楊州地圖,양주는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와부읍과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 전곡읍, 청산면, 고양시 덕양구 일부, 서울시 은평구 일부,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일대에 해당한다. 邑治가 있는 것은 지금의 양주읍(구 주내면)객문동인데, 지금은 일개 자연취락에 불과하다. 주산 佛國山 중턱에 보이는 白華菴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양주군청은 최근에 구읍 근처에 옮겨왔는데, 원래 議政府시내에 있었다. 의정부는 議政府店이라는 일개 주막촌이었지만 양주, 연천 방면의 길과 祝石嶺을 거쳐 함경도 방면으로 가는 二大路의 분기점이어서 일찍부터 번창하였다. 의정부에서 한양 방향으로 조금 가면 樓院店이라는 마을이 있다. 다락원이라고도 하는데, 한양 초입으로 육의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서 광주 송파장과 함께 번창했던 장터거리이기도 하였다. 읍치 동쪽에는 古州內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燕山君10년(1504)까지 여기가 양주 읍치였다. 또한 조선이 도읍을 양주땅이던 한양으로 정한 다음 한동안 대동리로 양주 고을을 이전시켰는데, 그것이 지도상에 보이는 古楊州面 표기이다. 또 서북쪽에는 縣內라는 표기도 있지만 여기에는 1018년까지 沙川縣이라는 별개 행정구역이 있었다. 일대에는 조선조의 능묘가 많이 보이지만 태조 묘가 있는 九陵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光陵앞에 光陵川이라는 시장촌이 보이는데, 지금도 ‘광릉내’라는 마을이 있다.

  • 양지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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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지도 陽智縣地圖,양지는 용인시내 일부와 양지면, 원삼면 일부, 백암면 일부, 안성군 고삼면, 일죽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양지면 소재지에 있었다. 본디 水州(水原)에 딸린 陽良部曲이었는데, 1399년(정종1) 양지현으로 승격되고, 1413년(태종13) 廣州 소속 高安 大谷 木岳 蹄村 등 4개 부곡을 합병하였고, 1914년 용인군에 편입되었다. 종종 주변의 속현으로 전락하곤 했었으며, 면적도 비교적 작은 약소현이었다. 지도상에는 위의 4개 부곡 중 3개가 면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중세의 부곡개념이 근세의 면 단위의 기초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아가 있는 곳은 예전의 양지면사무소 자리이며, 지금은 청소년회관이 되어 있다. 용인군지에 따르면 80년대까지도 동헌건물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언덕 위에 양지향교 건물만 볼 수 있다. 지도에는 관아 등 건물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의 건물배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폭의 왼쪽(서쪽) 용인계에서 읍내를 거쳐 죽산방면으로 나가는 길이 경상도 방면으로의 대동맥인 영남대로였다. 관아 외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祈雨壇, 무기를 보관하던 軍器庫, 서낭당, 獄舍, 社稷, 碑閣 등이 보인다. 배산임수의 이상적인 읍 배치이지만 지금은 마을 뒤에 영동고속도로가 뚫려서 기맥은 잘리고 말았다.

  • 양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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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지도 陽川縣地圖,양천현은 현 서울시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의 소재는 지금의 양천구에 있지 않고 현재의 강서구 가양동 자리이다. 지금도 향교가 남아 있다. 지도상에 主山이라 표시되어 있는 것이 지금의 宮山이다. 양천초등학교 자리가 옛 관아 자리로 추정된다. 읍치 뒤를 흐르는 한강을 ‘北大江’이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한강변의 다른 군현도보다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배산임수의 형세를 선호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 동쪽 楊花津에서 읍을 거쳐 김포 방향으로 가는 大路는 道路考에 나오는 江華방면 六大路이다. 이 길은 서해안 군사상 중요한 도로여서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로로 분류되어, 지도상에 다리들이 보이듯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開花山에서 대로는 산 북쪽 길과 남쪽 길 두 갈래가 되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북쪽 길만 표시되어 있다. 또한 間浦津(현 안양천 인공폭포부근)에서 남으로 갈라지는 길은 부평, 인천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도상에는 祈雨處(기우대)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개화산, 또 하나는 雨裝山이다.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를 때 반드시 우의를 입었다고 하는데, 우장산 이름도 거기에 연유되었다고 한다.

  • 여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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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목지도 驪州牧地圖,여주는 강천면과 북내면 일부를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 개군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 여주군 소재지와 동일한 위치이다. 驪興鄕校도 같은 위치에 현존한다. 읍 누문은 迎月樓라고 하는데 철거 위기에 처한 1925년 지도상의 馬巖 위에 옮겼다. 한강 건너 州津은 읍내로 건너는 나루터의 의미로, 여주나루란 이름으로 최근까지 이용되었다. 읍 서쪽에는 세종의 英陵과 孝宗의 寧陵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능의 주산도 표시하고 있는데, 영릉은 남쪽의 北城山, 녕릉은 한강 넘어 ?揖山에 전혀 다른 장소에 위치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능의 동서 입구에는 東洞口, 西洞口라고, 산줄기에 둘러싸인 땅임을 강조하고 있다. 金沙面에 古川寧縣基라는 표기가 있는데, 천녕은 고구려의 述川縣에 발단하였는데, 조선 예종 때 여주에 병합되었다. 현 옆의 梨浦津은 남한강의 대표적인 포구였다. 대안에 보이는 婆娑城은 신라 파사왕 때 축조된 것으로 한강이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遊僧을 모아 수축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남한강 유역이 일본군의 주요 진격로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 역사에 대해서도 지도상에서 상세하게 적고 있다.

  • 연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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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지도 漣川縣地圖,연천은 연천군 연천읍과 중면, 황지리 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한다. 원래 읍치는 君子山 북쪽인 읍내리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경원선 철길 건너편인 차탄리에 위치하고 있다. 車灘(수레여울)은 서울에서 철원 방면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장터마을이었다. 서울(京城)에서 양주를 거쳐오는 길이 한탄강(摩呵川)을 건너면 연천현이다. 이 나루터는 大灘 혹은 한여울이라고도 하는데, 경치가 수려해서 지금은 유원지까지 있다. 通峴店은 지금의 통현리 통재마을에 있었던 주막촌이며, 袈裟坪은 지금의 전곡에 해당한다. 길은 하나 더 開城府로 통하는 길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가 서울보다 개성의 세력권임을 짐작케 한다. 縣內面 古文里에 漣州古基란 기술이 보이는데, 구읍임을 알리는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지도에 보이는 五峯寺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위치를 바꾸어 재건되었다. 지금 원 절터에는 부도만이 남겨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이 다른 읍지도에 비해 숙련자가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건물들의 그림도 하나씩 차이를 보이며 아주 사실적이다. 관내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를 조선 전기식 형식인 水波描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무이산 아래에 있는 書院古基는 고종5년(1868)에 革罷된 臨?書院을 가리키고 있다.

  • 영종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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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종지도 永宗地圖,영종진은 현 인천시 영종도와 용유도, 무의도와 그들에 부수된 섬들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漢山州에 소속되었고 고려시대에는 仁州에 속했으며 이 때 자연도라 불렀다. 영종이란 이름은 원래 남양부에 있었던 군사 요충지 이름이었던 것을 전용한 것이다. 효종 때는 남양도호부 영종진, 고종 때는 인천부에 속했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한다. 개화기에는 운양호사건 등 역사의 주무대로 올랐을 정도로 중요한 군사지대이다. 지도상의 萬歲橋는 지금 월미도에서 오는 선착장에 있었다. 이 선착장에는 예전에 작은 섬이 있었는데, 이것이 永宗鎭이었다. 효종4년(1653)에 남양부에 있던 영종진을 이 섬에 옮겨놓고 이름도 영종도로 바꾸었다. 이 때 본섬인 자연도에는 국영목장이 있어 영종진에는 僉使가 있었는데, 監牧官을 겸직하고 있어 두 섬 왕래를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현종4년(1663)에 이 다리를 개설하였다. 지금도 마을 이름은 구읍리이다. 白雲山은 영종도의 주산이고, 산 아래에는 紫燕縣監古基라고 되어 있어 이곳이 자연현 시대의 읍내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도 구읍에 인접해서 社倉, 場市 등이 표기되어 있으며, 구급을 둘러싸고 토성이 분포되어 있다. 바다에는 부평지도처럼 해로가 그려져 있어 수로 이용시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 영평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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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군지도 永平郡地圖,영평은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해당한다. 본디 永興縣이라 하였으나 1394년(태조3) 영평군으로 개칭되었다. 지도 중앙에 衙舍와 社稷壇, 鄕校 가보이는 곳이 읍내인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건물 배치 등은 알 수 없다. 이곳은 지금은 작은 한 자연취락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43번국도 길가인 양문리, 즉 지도상의 梁文驛 자리로 이동하였다. 양문역 아래 白露洲의 奇巖들은 지금도 건재하여 일대는 유원지가 되어 있다. 그 아래 萬歲店 주막촌 옆에는 대동지지에도 나오는 만세교가 도로교가 되면서 이름을 남겨 있다. 만세교에서 계속 북진하는 길에는 ‘北關大路’라고 있는데, 한양에서 함흥을 거쳐 함경도 두만강 하구의 西水羅浦까지 2천리길을 가는 2大路, 일명 慶興路이다. 경원선 철도와 국도가 철원경유로 생기면서 이 경로는 쇠퇴하였다. 대로변에는 ‘翼宗大王 胎室’이라는 기술이 보인다. 태실이나 태봉이란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인데, 익종은 조선 22대 純祖의 세자이다. 이곳은 918년 왕건군과 궁예군이 마지막 전투를 치른 전적지이기도 해서, 지도에는 없지만 태실 위에 ‘태봉산성’이 남아 있다. 김화방면으로의 길목, 갈비로 유명한 二東面 쪽에는 계곡으로 이름난 白雲寺도 보인다.

  • 용인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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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지도 龍仁縣地圖,용인은 양지면, 원삼면, 백암면을 제외한 용인시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용인읍은 지금의 구성면에 있었다. 관아는 지금의 구성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향교는 자리를 옮기면서 현존하고 있다. 원래 향교는 하마비리에 있었다. 지도에도 下馬碑의 표시가 보인다. 지금의 용인시내는 지도상 水餘面의 場基라고 써 있는 부분이다. 金良場이라는 장터거리였는데, 이 일대가 용인의 상업적 중심지가 되면서 일제시대에 아예 군청이 옮겨왔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경안천을 따라 수로교통도 존재하였다. 지도에는 고유명사는 언급이 없는 곳도 많으나 장터나 역촌 등이 하나씩 기재되어 있다. 水眞面의 豊德川장, 읍내의 北洞場, 駒興面의 구흥역, 수여면의 金嶺驛 등이다. 險川에서 김량장 방향으로 가는 ‘向京大路’는 한양에서 영남지방으로 가는 영남대로이다. 負兒山 아래 縣內面이 있는데 예전 處仁縣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다. 용인은 1413년에 龍駒縣과 처인현이 합병되어서 생긴 현이다. 지금의 이동면 서리에 해당한다. 옛 현내 자리 주변에서는 최근 고려시대의 백자요지가 발견되어, 사기막골이라고도 불린다.

  • 음죽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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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지도 陰竹縣地圖,음죽현은 이천시 설성면, 장호원읍, 율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雪城山 동쪽 기슭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지금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향교도 남아 있고, 설성산에는 산성터도 남아 옛날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음죽읍내는 본디 東向이었지만 이 지도에는 남향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읍내 이외의 위치관계는 실제 방향과 거의 합치하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읍내 부분만 비틀어지게 되어 있는 셈이다. 이 지역의 현재의 중심지는 天尾川(현 淸渼川)가의 長湖院인데, 지도상에도 長院場市라고 표시되어 있어 당시부터 포구장터이자 주막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천방향에서 장원장시를 통해서 충주방면으로 나가는 길이 竹嶺大路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길이 대동지지에 나오는 ‘去奉化五大路’이다. 영남북부방면의 대동맥이자 영남대로의 擺撥路이기도 해서 지도상에도 강마다 돌다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도 남단에는 동서방향에 다니는 鳥嶺大路라는 표시가 있는데, 이것이 ‘去東萊四大路(영남대로)’이다. 길가에 館村이라고 있는데, 공무여행자의 행차가 있을 시 사용된 여관이다. 이 지도에는 공공건물에 대해서는 빨간 벽으로 표시하여, 군청색 지붕은 기와, 황토색 지붕은 초가인 것으로 추정된다.

  • 이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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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지도 利川府地圖,이천은 이천시내, 부발읍, 대월면, 모가면, 호법면, 마장면, 신둔면, 백사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와 마찬가지이다. 읍내의 중심에 行宮이 크게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에 客舍가 있는 것이 숙소의 계층을 말해 준다. 이천향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주막 등은 서술이 아예 없고, 다리도 이름만 적고 그림 표시가 없어 전체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廣峴에서 읍내를 거쳐 음죽방면으로 가는 길이 영남대로의 파발로이자 竹嶺을 넘어 봉화로 가는 五大路이다. 파발로답게 이천 관내에도 高尺, 大浦, 素沙 등 3개 擺撥站(撥所站)이 표시되어 있다. 이천부내를 관류하는 福河川은 큰 강은 아니나 당시에는 배도 소항하는 물자유통의 간선이어서, 이렇게 넓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면들의 이름을 보면 구 면은 두 개씩 합해서 하나의 면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新洞面과 屯知山面이 신둔면, 麻田洞面과 長水旺面이 마장면, 夫毛谷面과 鉢山面이 부발면(읍), 大陽面과 月良村面이 대월면으로, 暮山面과 加麻洞面이 모가면으로 하는 식이다. 지도에는 府內場, 吾川場, 郡梁場 등 3개 장터가 있지만 이천시내 장터를 제외하면 이제 정기시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 인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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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지도 仁川府地圖,인천부는 인천시 동구, 중구, 남구, 연수구, 남동구와 시흥시 구 소래읍 구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금의 문학동이다. 개항 후에 항구도시로 생긴 인천은 지도상의 濟物浦이다. 이 당시도 월미도 영종도 등으로 건너는 포구로서, 한양길과 읍내길 두 길이 모일만큼 중요한 포구였다. 예전에는 萬戶도 있었다. 부 건물과 인천향교는 최근에 월드컵에 맞추어 복원 정비되었다. 진산인 文鶴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府使 金敏善이 士民을 이끌고 항쟁하였다는 기술이 지도중에 보인다. 주산인 衙後山은 지금 관교공원으로서 정비되어 있다. 주안면에는 石巖場이라는 장터가 보이는데, 이것이 지금의 석바위시장의 기원이라고 추측된다. 읍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로는 星峴이 이용되었는데, 지금의 남동구 만수동 동인천고등학교 뒷고개이다. 경인선 철도와 경인국도가 생기면서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다. 바닷가에 있는 포구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놓았으며, 실제 지형과 맞게 나팔형으로 파고 들어가게 그려 놓았다. 이들은 현재 거의 매립되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장단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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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지도 長湍府地圖,장단부는 분단전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에 해당한다. 장단읍내는 지금 폐허가 되었다. 읍내 서쪽에는 板門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공동관리구역이 있는 판문점 자리이다. 판문교를 거쳐 開城 방면으로 가는 길이 평양을 해서 北京으로 뻗어나가는 義州大路이다. 길가의 요소요소에는 ‘撥所’라고 있는데, 이것은 擺撥馬를 갈아타는 파발막이다. 그러나 임진나루 가까이에 있는 발소는 東坡驛 자리이며. 별도로 역 표시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동파역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1번국도와 경의선 철도는 의주대로보다 서쪽을 지나고 있다. 최근 경의선은 임진강을 건너 남방한계선 직전인 都羅山驛까지 연장되어, 도라산 전망대 방문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지도에도 도라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전망대 대신 烽燧臺가 그려져 있다. 멀리 바라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은 입지특성을 보인다. 기타 자연경관으로서는 皐浪浦나 鳳凰岩 등 임진강가의 기암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고려 開京과 인접 지역이었기에, 敬順王陵 등 왕릉들이 전체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읍내에는 얼음을 저장하던 氷庫 모습도 보인다.

  • 적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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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지도 積城地圖,적성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지도는 수묵화를 활용해서 미적으로 꾸미면서 장터, 역터, 嶺路, 마을, 비석, 폭포 등 상세하게 정보를 담고 있다. 다만 읍치가 북향인 영향으로 남북이 정반대가 되어 있다. 적성 읍치는 지금의 적성면내가 아니라 고개(지도상의 望峴을 넘은 자리(舊邑里 읍내마을)에 있었다. 지금 읍치의 흔적은 거의 없고 향교마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적성 영역이 지금의 양주군 남면과 연천군 전곡읍과 백학면의 일부까지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내에서 十二灘(현 紺嶽山계곡)을 지나 雪馬嶺(설머치)를 넘어 光水院, 湘水驛(상쉬마을)에 이르는 지역인데, 이 지도에서도 지형상 양주의 세력권임을 알 수 있다. 읍내에서 임진강 건너편 일대도 적성의 영역이었는데, 강가는 ‘赤壁’이라 불린 벼랑에 막혀, 神智江(신시개)라는 포구에서 건널 수 있게 되어 있다. 紺嶽山은 적성의 주산이며, 예로부터 京畿五嶽의 하나로 불리어 왔다. 정상의 비석에는 薛仁貴碑沒字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이 비에는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 설인귀비가 아닌가 전해지고 있다. 북한산처럼 예로부터 영산으로 알려져, 무속신앙을 위한 祭堂이 정상에 보인다. 지도에 보이는 鳳菴寺나 法輪寺 등 이름난 절도 많다.

  • 죽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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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지도 竹山地圖,죽산은 안성군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과 일부를 제외한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에 해당하여,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양지쪽에서 좌찬역, 분행역을 거쳐 영남방향으로 가는 길목의 ‘距嶺南大路’라는 표시에 나타나듯 한양에서 동래로 향하는 四大路(영남대로)였다. 죽산천상에 놓인 ‘嶺南橋’이름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좌찬역은 지금의 좌항마을. 양지에서 좌전고개를 넘어 청미천 수계 초입에 있다. 분행역 위의 ‘大橋’ 부근에는 지금도 ‘한다리’라는 마을이 있다. 대교 위의 ‘排觀場’은 지금도 ‘白巖場’으로서 존재하여, 우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또 하나의 장터는 죽산읍취락에 있는 읍내장이다. 읍내의 동쪽에 보이는 성곽은 竹州山城인데, 고려시대 몽고군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도 활용되어서, 죽산이 전략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남로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죽주산성에서 하룻밤을 자기도 하고 대외교류를 위한 시설이기도 했다. 죽주산성은 현재 일부 성벽만 남아 있다. 산성 아래에 보이는 ‘塔’은 고려시대의 대찰이었고 조선시대에 헐린 奉業寺라는 절에 있었던 탑이다. 절터에는 지금도 터와 당간지주가 남아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 지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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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지도 砥平縣地圖,지평은 양평군 지제면, 양동면, 청운면, 단월면, 용문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평면 소재지에 있었다. 栢峴에서 읍내를 거쳐 松峙(솔티고개)로 가는 길이 大關嶺을 거쳐 강원도로 가는 關東大路이다. 송치를 넘으면 이제 강원도(원주)였다. 지도의 彌智山은 지금 주말 관광지로 이름난 龍門山이며, 산허리에 보이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神堂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寶山亭은 高麗末 務安朴氏의 선조인 諫議大夫 松林公이 政界 혼란을 피해 이곳에 낙향, 詩會場으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鳳凰臺는 봉황정이라고도 하는데, 南原梁氏의 선조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黑川이 휘감는 언덕 위에 있어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도에는 관내의 역과 장터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장터 중에서 曲水場은 지평과 여주 양쪽에 판을 펼칠 정도로 성하여 중앙선이 개통되기까지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타 釜淵場은 지금 양동면 소재지, 田谷場은 龍門面 전곡인데, 장대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은 흑천의 나루이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 진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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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지도 振威縣地圖,진위현은 평택시 진위면, 서타면, 고덕면, 옛 송탄시와 평택시내에 해당한다. 지도 중심에 보이는 진위읍내는 지금 진위면 봉남리에 해당하여, 동헌은 지금의 진위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관아 건물들이나 社稷壇은 모두 헐리고 향교 건물과 鐵造如來坐像으로 알려진 萬奇寺만 남아 있다. 고을 배후에는 진위의 주산인 舞鳳山이 그려져 있다. 도폭에 보이는 ‘대로’는 삼남지방에 가는 대동맥인 ‘삼남대로’로, 지도상의 칠원점(칠괴동 원칠원마을)은 춘향전에도 나오는 대표적인 주막촌이었다. ‘춘향전’에서는 진위읍내에서 칠원까지 대백치, 소백치의 두 고개를 넘게 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생략되어 있다. 서남쪽 아산만에 연결되는 수로변에는 포구와 세창들이 늘어서 있다. 구 평택(팽성읍)쪽으로 건너는 포구인 동시에, 이 지역 세곡들을 중앙으로 반출하는 요로이기도 했다. 지도 남단에 보이는 행정구역 丙坡面은 1905년 경부선 평택역이 위치하면서 이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송산면과 일탄면은 나중에 송탄시가 되어, 이들의 공간구조 변화로 인하여 진위 옛고을은 몰락하게 되었다.

  • 통진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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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지도 通津府地圖,통진은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지금의 월곶면 군하리 면소재지이다. 교통로는 육로와 수로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체계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지역 교통망의 특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개펄의 위치를 상세히 그리고 있어서, 수로 이용에도 배려하고 있다. 통진은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부내를 대로가 관통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화로 건너는 나루는 甲串津인데, 통진쪽은 문수산성을 거치게 되어 있다. 文殊山城은 숙종20년(1694)에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으로 축성 당시에는 북문, 서문, 남문이 있었으나 병인양요때 병화로 소실되어, 지금 단계적으로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나루터에는 棧橋가 성문에서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조선초기 박신에 의하여 선착장에 석축로가 축조되어 1920년경까지 사용되었다. 석축로는 지금도 남아 있다. 德浦鎭은 서해로부터 서울로 진입되는 어구인 孫石項(손돌항)에 천연의 요새를 이용한 군사요충지로 수군첨사가 지휘하였다. 祖江浦는 풍덕으로 나가는 나루터이지만 풍덕 쪽에도 같은 조강이란 지명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조강포 동쪽에 女妓峰이라는 봉우리가 보이는데, 지금 통일전망대가 되어 있는 愛妓峯이다.

  • 파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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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지도 坡州地圖,파주는 파주시 파주읍, 파평면, 법원읍, 문산읍, 광탄면, 조리면, 월롱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파주시 파주리에 있었다. 임진강을 앞에 둔 파주는 서울의 북쪽의 관문이었다. 읍이 원래 동향인데 지도에도 남향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그려져 있다. 주산 성산 봉우리에 三井이라고 세 개 우물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 전해지는 전설에는 ‘장사우물’과 ‘전대우물’의 두 가지라고 한다. 고양 惠陰嶺에서 임진강에 이르는 길이 중국으로 이어지는 義州大路인데, 지도상에서는 특별한 표시 없이 다른 도로와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 대로 따라 보이는 彌勒峴에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龍尾里 미륵불이 있다. 읍의 물자거래의 요충은 읍 북쪽의 西作浦(서적개)와 汶山浦였다. 특히 문산포는 큰 포구장터로 발달하였다. 임진강 나루터에는 관문이 보인다. 서울이 수도였던 동안, 임진강은 항상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한국전쟁 때도, 임진강의 상실은 곧 수도 서울의 상실을 의미했을만큼 중요한 곳이었기에, 수비도 단단했다. 지금은 건너편이 민통구역이라 건너는 사람도 없고 작은 어촌에 불과하다. 관 옆의 花石亭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 포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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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지도 抱川縣地圖,포천은 포천군 포천읍, 화현면, 군내면, 가산면, 소흘읍, 내촌면, 신북면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이다. 지금은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하다. 지도상의 半月山이 현 淸城山인데, 지금 산성(반월산성)의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구읍에는 지금도 포천향교가 남아 있다. 현 포천읍내는 신읍이라 불리는데, 지도에도 있듯이 安奇驛이라는 역터였다. 역을 지나가는 일직선의 길은 通北大路라는 표시가 있는 것처럼 관북지방 즉 함경도로 나가는 二大路였다. 대로 따라 내려가면 上松隅場, 下松隅場이라는 장터거리가 보이는데, 지금의 소흘읍 소재지이다. 지금도 5일장이 선다. 다른 읍지도에 없는 특징으로서, 강의 원류지에 하나씩 泉源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포천읍이나 麟坪(平)大君 墓所 등에 실제 형세와 다른 풍수의 상징적인 형세로 그리는 등, 지도로서의 실용성을 유지하면서 그림으로서 전체의 아름다움을 고려한 디자인이 되어 있다. 또한 건물등을 그림을 이용하지 않고 글씨로 처리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白沙 李恒福이 배향되었던 화산서원이 혁파된 것은 고종5년(1868)이었는데, 이 지도에는 加山面 華峯 아래 ‘白沙書院舊址’라고 하여 그 사실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 풍덕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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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지도 豊德府地圖,풍덕은 분단전의 개풍군 광덕면, 대성면, 흥교면, 임한면, 중면, 상도면, 봉동면에 해당한다. 읍치인 풍덕리는 지금도 북한의 행정구분상 개풍군의 읍소재지이다. 백제의 땅을 고구려가 차지하여 貞州라 하였고, 고려 현종 때 개성의 領縣이 되었다. 세종24년(1443) 德水縣과 합하여 풍덕군이 되었다. 이후 개성으로 예속 독립을 반복하면서 지금은 경기도 개풍군에 속한다. . 주산은 鳳凰山이다. 古都里는 昇天府의 옛 터이며, 德水縣의 옛 터는 읍의 동쪽 30리인 如尼山 밑에 德水基址로서 표기되어 있다. 한강은 풍덕과 강화, 통진 사이에서는 祖江이라 불린다. 풍적에서 통진으로 가는 길목에는 祖江津이 있다. 그런데 강 건너 통진쪽에도 조강진이 있고, 양쪽에 조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강화 쪽으로도 읍 남쪽에 昇天津이 보이고, 강화측에도 역시 승천진이 있다. 나루 지명이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항로와 그에 부수된 취락까지 포함한 개념임을 일깨워 준다. 개성-풍덕-승천진의 경로는 몽고 내수 때 왕의 피신길이기도 했다. 지도에는 교통로가 일체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다리의 위치로 대략 추정할 수 있다. 대신 면 경계는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군사적 측명보다 행정적 측면이 잘 나타난 지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경상도
  • 가덕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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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덕진도 加德鎭圖,가덕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의 동선동 일대이다. 1546년(명종 1)에 鎭을 설치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성이 왜군에게 함락된 후 安骨城으로 옮겼다. 이후 1656년(효종 7) 통제사 柳爀然의 狀啓로 本島로 돌아왔다. 지도 제작 당시는 水軍 僉使鎭으로 완연한 성곽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과 이 시기 설치되는 砲手廳, 火砲手廳 등도 그려져 있다. 해안의 船所인 禦變亭 부근에는 斥邪碑도 그려져 있다. 1871년 辛未洋擾를 겪은 후 그해 4월에 서울과 전국 각지의 都會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했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 지도에도 척화비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도회가 아닌 중요 군사기지에서도 척화비를 건립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해안의 선창에는 배의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戰船 2척, 兵船 2척, 伺候船 4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읍성의 동문 주변에는 민가를 빽빽하게 그려 大村임을 나타내었고 그 외곽에는 논밭의 배미를 그려 경지를 표시한 점이 특이하다.

  • 가배량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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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배량진지도 加背粱鎭地圖,가배량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에 있었던 水軍 萬戶鎭이다. 이곳은 본래 경상도 우수영이 있었던 烏兒浦로서 1604년(선조 37) 우수영을 固城으로 옮기자 여기에 진을 설치하였다. 원래 둘레 2,620尺의 성곽이 있었으나 지도제작 당시에는 거의 허물어져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艮坐’ 즉 서남향으로 배치된 鎭基의 坐向이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는 각종 관아 건물과 민가, 그리고 수목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도로의 아래쪽에는 당시 신설된 砲手廳도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栗浦鎭地圖와 표현 양식이 유사하여 동일인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해안의 어변소에는 배를 매어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배도 크기에 따라 戰船, 兵船, 伺候船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 가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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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진지도 架山鎭地圖,가산진은 지금의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소재하고 있었다. 가산산성은 준험한 산지에 자리잡고 있고 남북으로 대로와 접해 있어서 내륙 방어의 요충지였다. 본래 公山古城이 있었던 곳으로 1640년(인조 18) 內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710步였다. 1700년(숙종 26) 둘레 3,754보가 되는 외성을 쌓고 1741년(영조 17)에 中城도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602보였다. 이곳에는 종9품인 別將을 두어 수호케 했다. 지도에는 기암절벽, 성첩, 수목까지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전문 화원의 작품을 방불케 한다. 내성과 중성에는 鎭衙 건물을 비롯하여 가산진에 속해 있던 고을인 義興, 新寧, 軍威, 河陽의 軍餉을 보관하던 창고도 그려져 있다. 외성 안에는 1701년 경상 감사의 명에 의해 건립되어 僧倉米를 보관하던 天柱寺도 보인다. 甕城으로 이루어진 外城門 밖의 水口에는 造山을 만들어 裨補했던 당시의 풍수지리적 환경인식을 엿볼 수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이 지역의 형세에 대해 묘사한 글도 실려 있어서 지도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 개령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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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현지도 開寧縣地圖,개령현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開寧面, 農所面, 牙浦邑, 南面 일대로 읍치는 개령면 동부리에 있었다. 경상 북부, 낙동강 以西 지역에서는 비교적 큰 고을인 尙州, 金山, 善山, 星州의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고을이다. 甘川이 고을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이를 경계로 남북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지도의 구도는 ?輿地圖書?나 여러 읍지에 실려 있는 지도와는 달리 남쪽을 상단으로 잡아 강 이북에 있는 읍치에서 고을을 내다보는 視點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간단한 고을의 연혁과 중요 지역과의 거리를 注記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甘文山인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읍치의 남쪽 강변에는 南藪도 그려져 있는데, 金淑滋가 현감이었을 때 ?畢齋 金宗直이 수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읍치에는 동헌을 비롯한 관청 건물이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은 면 이름만 표기되고 소속 마을의 이름은 전혀 표기되지 않았다. 각 면마다 사창이 노란색의 草屋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당시 社倉制의 전면적 실시를 엿볼 수 있다. 고을의 동쪽에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으나 기타 인문적 사항은 소략한 편이다.

  • 개운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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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운진지도 開雲鎭地圖,개운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공단 부근에 있었다. 1592년(선조 25)에 울산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鎭의 수장으로는 무관 종4품의 萬戶를 두었다. 지도는 개운진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근의 부산진, 두모진, 왜관까지 같이 그려 개운진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매우 소략하다. 북쪽으로는 부산진의 옛터가 있으며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전사한 鄭撥을 제사지내던 제단도 그려져 있다. 개운진을 비롯하여 당시 동래부 소속의 진보였던 釜山鎭, 多大鎭, 豆毛鎭, 西平鎭과 左水營 지도는 동래부지도와 표현 양식이 동일하다. 특히 각 진보의 지도는 동래부지도를 토대로 해당 지역을 확대하여 그린 정도인데 동래부지도를 제작할 때 소속 진보의 지도도 동일한 제작자가 일괄적으로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하단에는 倭館도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1709년(숙종 35)에 府使 權以鎭이 왜인들의 출입 통제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세운 設門과 석성, 연회를 베풀던 宴大廳, 일본 사신이 진상물을 바칠 때 肅拜하던 객사 등도 보인다.

  • 거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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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부지도 巨濟府地圖,거제부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일대로 읍치는 거제면 서정리에 있었다. 거제도의 모습을 회화식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여지도서?나 기타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는 표현 기법이나 수록된 내용 등이 확연히 다르다. 산지의 표현은 산수화풍으로 그려 산의 봉우리, 암벽, 수목까지도 세밀하게 그렸다. 하천은 다른 지도와는 달리 청색으로 그리지 않고 흑색의 점선으로 표현하였다. 내륙지방이 아닌 섬이기 때문에 대하천이 드문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거제도는 남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많은 진영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부터 助羅浦鎭, 玉浦鎭, 知世浦鎭, 栗浦鎭, 加背梁鎭, 永登鎭, 長木鎭 등이 섬을 둘러가면서 설치되어 있다. 고을의 주산인 鷄龍山 자락에 뻗어 내려 형성된 읍치에는 동헌, 객사, 향교 등 주요 건물이 부각되어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은 面 아래의 마을까지도 자세히 표시하였는데 밀집된 집 모습을 그려 마을을 표현하였고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注記하였다. 아울러 면 단위별로 설치된 사창도 볼 수 있다. 군사 기지인 각 鎭堡의 船所에는 배의 모습을 그려 부각시키기도 했다. 거제의 治所는 여러 번 옮겨졌는데 1432년(세종 14)에 서쪽의 沙等城에서 북쪽의 古縣으로 이주했다. 그 후 1664년 고현에서 지금의 장소로 다시 옮긴 것인데 지도에도 과거의 읍치는 성첩을 그려 강조하였다.

  • 거제영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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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영등진지도 巨濟永登鎭地圖,영등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둔덕면 학산리 영등포 일대이다. 본래 1392년(태조 1)에 固城의 舊所非浦에 처음 설치했다가 1592년에 수영 옛터로 옮겼다. 이후 1623년(인조 1)에 이곳으로 옮기고 萬戶를 두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革罷하여 所乙非浦로 옮겼다. 1756년 이곳이 해안방어의 요충지여서 다시 이곳으로 移設하자는 통영의 狀啓를 받고 논의한 후 이듬해 移設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거제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인 見乃梁의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많은 漕運船들이 정박하기도 했던 곳이다. 鎭營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砲手廳도 보인다. 종4품의 萬戶가 집무하던 동헌은 ‘卯坐’라는 좌향도 표시하였다. 배를 정박시키는 선창에는 戰船과 伺候船이 크기를 달리하여 그려져 있다. 동북쪽의 見乃梁洞에는 漕倉이 설치되어 있고, 임란 때 왜적이 쌓은 倭城과 기와를 굽던 瓦所도 표시되어 있다.

  • 거제장목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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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장목포진지도 巨濟長木浦鎭地圖,장목포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에 있었던 鎭으로 남해안 해로의 중요한 길목인 見乃梁으로 향하는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훈련도감의 屯田이 있었던 곳으로 1655년(효종 7) 統制使 柳赫然이 둔전을 설치하여 무관 종9품의 別將을 두었다. 鎭基에는 성곽이 없었고 다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었다. 鎭基의 좌향은 正西쪽에 해당하는 ‘卯坐’로 되어있다. 殿牌를 안치했던 객사만은 다른 구역에 위치해 있는데 앞에는 홍살문을 그려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위쪽 지역의 永登浦를 비롯하여 주변 마을도 비교적 자세히 그려 놓았다.

  • 거제장목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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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장목포진지도 巨濟長木浦鎭地圖,장목포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에 있었던 鎭으로 남해안 해로의 중요한 길목인 見乃梁으로 향하는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훈련도감의 屯田이 있었던 곳으로 1655년(효종 7) 統制使 柳赫然이 둔전을 설치하여 무관 종9품의 別將을 두었다. 鎭基에는 성곽이 없었고 다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었다. 鎭基의 좌향은 正西쪽에 해당하는 ‘卯坐’로 되어있다. 殿牌를 안치했던 객사만은 다른 구역에 위치해 있는데 앞에는 홍살문을 그려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위쪽 지역의 永登浦를 비롯하여 주변 마을도 비교적 자세히 그려 놓았다.

  • 거제지세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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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지세진지도 巨濟知世鎭地圖,지세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일대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玉浦城 밖으로 진을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지도는 지세진과 助羅浦舊鎭을 같이 그렸다. 실제의 면적은 구조라포가 크지만 지세진을 더 크게 그렸다. 움푹 들어간 만을 둘러가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진영에는 관아 건물과 민가들을 그려 넣었으며 船所에는 전선도 그려져 있다. 灣의 안쪽에는 뱃사공들이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전해지는 公水嶼도 보인다. 舊助羅鎭은 본래 수군 萬戶를 두었는데 1604년(선조 37) 玉浦로 이전하면서 혁파된 것이다. 지도에서는 수정봉성이라고도 불리는 구조라성의 모습만 완연히 남아있다. 구조라의 동남쪽에는 이전의 瞭望處였던 助羅望도 보인다.

  • 거창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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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부지도 居昌府地圖,거창부는 지금의 경남 거창군 거창읍, 고제면, 웅양면, 가북면, 주상면, 남하면, 남상면, 가조면 일대로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다. 거창은 덕유산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접해 있는 지역으로 瀯川(지금의 황강천)이 휘돌아 나가면서 제법 넓은 들판도 펼쳐져 있는 고을이다. 전체적으로 다소 소략하게 그려진 군현지도이다. 산천을 청색으로 표현하였는데 산의 모습을 흡사 제비 날개처럼 그린 점이 이채롭다. 거창의 읍치는 다른 군현과는 달리 고을의 중심에 있지 않고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이는 아마도 고을의 중앙 지역이 산지가 많아 읍치로서는 부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가조면이 있는 곳은 고려시대 屬縣이었던 곳으로 다소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치에는 社稷壇, ?祭壇, 城隍壇, 그리고 향교의 一廟三壇이 다 갖추어져 있다.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이 그려져 있지 않은 대신에 고을 수령이 임금이 계신 궁궐을 상징하는 殿牌를 모시고 삭망으로 向闕望拜하는 한편 중앙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던 客舍 건물이 강조되어 그려졌다. 당시 증설된 砲手가 番上하던 砲廳도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는 面名과 사창만을 표시하였고, 그 밖에 인문적 요소로서 사찰, 누정 등을 그렸고 읍내에는 장시도 표기하였다.

  • 경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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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지도 慶山地圖,경산현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압량면, 남산면, 남천면 일대로 읍치는 경산시 삼남동, 삼북동에 있었다. 大邱府 옆에 인접한 작은 고을로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 당시 일시적으로 대구부에 병합되기도 했다. 지도는 ?여지도서?나 다른 읍지에 수록된 지도처럼 남쪽을 상단으로 배치했으나 구체적인 모양과 내용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이 시기 새롭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산지의 표현이 다른 지도와 달리 독특함을 띠고 있는데 개별 산의 봉우리를 뾰족하게 연결시켜 그렸으나 전체적으로 맥을 강조하여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지도의 중앙에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를 그렸는데 그 안에 객사와 장시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 읍성은 돌로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1,200척으로 읍성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동서남북의 4문 가운데 서문에만 樓가 있는 점도 독특하다. 읍성 외곽의 주변 지역에는 면명과 소속 洞里가 해당 위치에 그려져 있다. 또한 官門으로부터의 거리를 기재하여 거리 파악을 용이하게 해 주고 있다.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각 面에는 社倉이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 기타 인문적 요소로는 사찰이 표시되어 있고, 지도의 하단에는 萬曆 초에 縣令 尹希廉이 창건했던 孤山書院이 훼철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 경상좌수영영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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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좌수영영지도형 慶尙左水營營址圖形,水軍節度使營인 좌수영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최초 동래의 부산포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울산의 開雲浦로 이설하였다가 1592년(선조 25) 동래부 남촌으로 옮겼다. 또한 인조 때 戡蠻夷浦로 옮겼다가 1652년(효종 3)에 다시 이곳으로 이설하고 1670년(현종 11) 항구를 돌로 쌓아 재정비하였다. 지도는 이러한 수영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성곽을 비롯하여 주변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辛坐乙向’이라는 진영의 좌향이 표기되어 있는데 대략 동서 방향에 해당한다. 성곽은 9,190척이나 되는 비교적 큰 규모인데 내부에는 객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과 수군절도사 다음의 관직인 정4품 虞侯가 머물던 虞侯營도 별도로 그려져 있다. 강변에는 船艙을 비롯하여 戰船도 그려져 있는데 虞侯의 선창도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의 海門 근처에는 1592년 長?에서 옮겨온 包伊鎭의 모습도 보인다.

  • 고령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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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현지도 高靈縣地圖,고령현은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일대로 읍치는 고령읍 헌문리, 쾌빈리에 있었다. 낙동강과 會川이 남쪽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 대신에 서쪽을 위로하여 그려졌다. 이는 아마도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산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산줄기는 연맥을 강조하여 다소 거칠게 그렸고 하천은 굵기를 달리하여 대소를 구분하였다. 특히 美崇山에서 고을의 진산인 耳山으로 뻗어 내린 맥세를 매우 강조하였다. 邑治에는 三壇一廟를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을 상세히 그렸다. 특히 獄은 울타리를 그려 격리된 공간임을 표현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과 소속 마을을 비교적 상세히 표시하였다. 당시 설치된 사창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선으로 그려진 도로변에는 역과 점막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읍내에는 邑市가 형성되어 있다. 이외에 읍치 동쪽의 望山烽臺, 상동면의 碧松亭, 숭의산 밑의 盤龍寺 정도가 부가적으로 그려져 있다.

  • 고성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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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부지도 固城府地圖,고성부는 현재의 경남 고성군 지역으로 고성읍, 영오면, 개천면, 구만면, 회화면, 동해면, 마암면, 대가면, 삼산면, 거류면, 하일면, 하이면, 상리면과 통영시 일대가 여기에 속한다. 고성의 읍치는 지도의 중앙에 그려진 읍내면(지금의 고성읍 성내리)에 있었으나 후대에 통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사직단, 여제단 등의 제단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도는 회화식 기법을 사용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 동리도 표시하였다. 남쪽의 春元面에 있는 통영 성내에는 統制使營과 固城府의 관아 건물이 분리되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병영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轅門도 성벽과 함께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天王烽, 牛山烽, 外曲山烽 등의 봉수와 南村鎭, 唐浦鎭, 船津, 舊所非浦 등에 그려진 戰船들을 통해 이 지도의 군사적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舊邑基와 背屯驛 근처, 光二面의 塘洞에는 장시가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기타 통영의 紙所가 설치되어 있었던 安井寺를 비롯한 여러 사찰도 표시되어 있다.

  • 곤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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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지도 昆陽地圖,곤양군은 지금의 경남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서포면 일대와 하동군 진교면, 금남면 일부 지역을 포괄하고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이전 시기 제작된 군현지도와 뚜렷한 관련을 파악하기가 어려워 이 시기 새로이 제작된 지도로 보인다. 산지의 표현은 峰巒을 연속으로 그려 이어지는 맥세를 강조하였다. 읍성으로 둘러싸인 읍치 공간에는 동헌, 객사, 사창, 군기고 등의 관청 건물과 더불어 四大門도 뚜렷하게 그려 넣었다. 주변 지역에는 각면과 소속 마을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해당 위치에 표시하였다. 또한 홍선의 도로와 더불어 읍치로부터의 거리를 주기하여 상대적인 위치를 쉽게 파악하도록 배려하였다. 북쪽의 所谷面에는 世宗과 端宗의 태를 안치한 胎室이 그려져 있고, 松亭村, 東鼎洞, 辰橋村에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왼편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던 곳인 노량진이 표시되어 있는데,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수운의 중요한 통로로 많은 연해 여러 고을의 稅穀船이 이곳에 모여 서울로 운항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옆에는 船鎭과 더불어 戰船까지 그려져 있는데 해방의 요충지로서 중시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 구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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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산진지도 龜山鎭地圖,지도에 그려진 지역은 지금의 경남 마산시 구산면을 포함하여 마산시 현동, 덕동동, 가포동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당시 漆原의 越境地였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鎭基는 마산시 덕동동 일대로 추정된다. 마산만 입구에 위치하여 안쪽으로 향하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닌 곳이다. 구산진은 1614년(광해군 6)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僉使를 두었다. 그후 1668년(현종 9)에 혁파했다가 1673년(현종 14)에 復設했다. 당시 이곳에는 水軍同僉節制使 1명을 두었는데 左漕倉領運差使를 겸했다. 鎭基에는 ‘亥坐巳向’의 坐向 표시와 더불어 각종 관청 건물도 그려져 있는데 당시 국방 강화책으로 설치되는 砲手廳도 보인다. 육로와 해로를 굵은 홍선으로 그려 인근 지역과의 연결 관계를 쉽게 파악하도록 했다. 주변의 오목한 만에 위치한 水晶浦, 藍浦, 架浦 등에는 ‘船泊處’라 표기되어 있는데 각종의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창이 설치된 수정포에는 많은 민가를 그려 이 지역의 大村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구소비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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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소비진도 舊所非鎭圖,구소비진은 지금의 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일대에 있었다. 처음에는 權管을 두었다가 1491년(성종 22)에 성을 쌓았다. 1604년(선조 37) 거제의 水營 옛터로 옮겼다가 1606년 다시 이곳으로 移設하여 別將 1명을 두었다. 이곳은 깊숙한 두 개의 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鞍馬島(지금의 안장섬)가 海門을 막고 있어서 해안 기지로서는 매우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지도는 진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회화식으로 표현하였는데 매우 소략한 편이다. 당시 鎭城은 많이 훼손되어 성문도 없어진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의 건물과 별장이 기거했던 內衙도 그려져 있다. 船所에는 배의 모습도 종류별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 군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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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위지도 軍威地圖,군위현는 지금의 경북 군위군 군위읍, 소보면, 효령면 일대로 읍치는 군위읍 동부리, 서부리에 있었다. 경상도 내륙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로 위천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평지가 펼쳐지기 때문에 ‘子午谷’이라 칭했던 곳이다. 지도에서는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위천의 모습이 청색으로 굵게 강조하여 표현되었다. 방위는 ‘東西南北’의 글자를 쓰지 않고 ‘子午卯酉’의 干支로 표시하였다. 주변의 산들은 봉우리를 외곽으로 향하게 그렸고 지명의 표기도 봉우리의 방향과 같게 하였다. 고을의 진산인 馬井山 자락에 읍치가 그려져 있는데, 여러 관청 건물을 상세하게 그렸다. 그 중 殿牌를 모신 객사를 가장 크게 그려 강조하였고, 당시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砲手廳도 볼 수 있다. 또한 동쪽에는 斥洋碑도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斥倭攘夷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과 소속 마을을 표시하였고, 사창도 집 모양의 기호로 표현하였다. 읍치의 남쪽에는 임진왜란 시 전사한 의병장 張士珍의 비와 孝令面에는 신라 金庾信 장군의 사당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김유신이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고을의 서쪽에 花場基, 남쪽에 孝場基 등의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김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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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산지도 金山地圖, 金山郡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어모면, 봉산면, 대항면, 감천면, 조마면 일대로 읍치는 김천시 교동 일원에 있었다. 추풍령을 통해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이다. 산천은 청색 담채를 사용하여 그렸는데, 산을 환포형으로 그려서 고을 내부 공간을 부각시켰다. 특히 黑雲山에서 읍치의 아사와 객사로 뻗어 내린 지맥을 화살표 모양으로 그린 것은 風水的 관념이 지도에 반영된 대표적인 보기이다. 하천은 甘川과 南川(지금의 直指川)이 합류하면서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중심인 읍치를 크게 그려 강조하였고 주변 지역은 면 이름과 읍치로부터의 거리만을 기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군기고 등과 더불어 대원군 집정기 국방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던 포수청이 그려져 있다. 이 포수청은 1871년 郡守 李俊永이 세운 것이다. 서쪽 황악산에는 고려 때 林民庇가 편찬한 大藏堂記가 있었던 直指寺와 여러 암자가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恭靖大王인 定宗의 태를 봉안한 胎室도 그려져 있다. 黃嶽山의 남쪽에는 孔子洞, 周公洞, 伯魚洞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 祭器인 ?? 등이 출토되어 과거 향교의 자리로 추정되었던 곳이다. 각 지역에 이르는 도로는 홍선으로 그려졌으며 추풍령 밑의 추풍장과 더불어 찰방역이었던 金泉驛에도 장시가 표시되어 있다. 장시의 성장이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湧金門, 鳳凰臺 등의 누대와 사찰, 봉수 등도 그려져 있다.

  • 금오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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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성지도 金烏山城地圖,금오산성은 지금의 경북 구미시 남쪽 지역 금오산에 위치해 있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부터 옛 성터로 전해 내려왔는데 고려말에는 善山, 仁同, 開寧, 星州의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서 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곳이 지니는 지형상의 이점으로 인해 몇 차례의 수축을 거치면서 이 지역 국방의 요충지로 기능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낙동강 동편 인동의 天生山城과 더불어 내륙방어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는데, 1595년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그 이듬해 善山府使 裵楔에 의해 본격적으로 修築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都體察使 李元翼이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기도 했다. 이후 인조 때 외성을 수축하고, 1735년 영조 때에는 선산부가 右兵使營 관하의 獨鎭으로 승격되면서 善山都護府使가 兵馬僉節制使 金烏山城別將을 겸하게 되었다. 지도는 당시 산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성 안에는 각종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연못과 우물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특히 당시 이 鎭의 속읍이었던 金山, 開寧, 知禮 세 고을의 군기고, 화약고, 창고 등도 여러 개 보인다. 지도의 하단 여백에는 이들 속읍이 관할 점유하고 있던 성첩, 건물등이 자세히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 금정산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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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성진지도 金井山城鎭地圖,금정산성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금정산에 위치하고 있다. 종9품의 別將이 관할하던 산성으로 1703년(숙종 29) 始築하고 이후 몇 차례 개축하였다. 성 주위가 60,908尺이나 되는 대규모의 산성으로서 해안에서 올라오는 적을 차단하는 중요한 關防이었다.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임란, 호란을 겪으면서 국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여러 차례 대두되었으나 1701년 경상 감사 조태동의 청에 의해 비로소 축성하게 되었다. 남쪽으로 험한 절벽과 내부에는 비교적 너른 땅도 있어서 산성으로서는 천부적인 조건을 지니고 있다. 내성과 외성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성안에는 촌락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國淸寺, 淨水菴, 彌勒菴 등의 사찰도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 산성의 방어에 僧軍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金井鎭의 관아 건물과 더불어 내성에는 종이를 만들던 紙所도 그려진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鎭營의 남쪽에는 案山을 그렸는데 진영을 배치할 때 풍수적인 관념도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기장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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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지도 機張地圖,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대로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에 있었다. 한반도의 동남쪽 끝 해안가에 위치한 고을로 아래로는 동래, 위로는 울산으로 연결된다. 지도에는 회화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산지는 바위, 수목 등을 세밀하게 그려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고 바다는 水波描를 사용하여 강조하였다. 지도의 중앙에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가 그려져 있는데 안에는 객사, 동헌 등의 관아 건물도 표시되어 있다. 주변 지역은 각 면과 소속 마을들이 표기되어 있으며 황색의 草屋으로 사창도 표시하였다. 읍치로부터 이어지는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으며 거리를 注記하였다. 군사적 내용으로는 북쪽의 阿?烽, 남쪽의 南山烽, 남쪽 해안의 舟師에 있는 戰船 정도가 그려져 있다. 해안의 형승으로서 侍郞臺, 三聖臺, 黃鶴臺, 鴛鴦臺 등도 표시되어 있다. 남쪽에 있는 頭毛浦에는 수군 萬戶가 있었는데 1629년(인조 7)에 동래로 이설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射亭으로 쓰였던 읍성 남쪽의 觀德亭과 북쪽의 長安寺, 남쪽의 安寂寺 등의 사찰도 그려져 있다.

  • 남촌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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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촌진지도 南村鎭地圖,남촌진은 지금의 경남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에 있었던 진이다. 1614년(광해군 6)에 府의 서쪽 道善部曲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1619년(광해군 11)에 이곳으로 옮겨와 무관 종9품의 別將을 두고 統營舟師에 專屬시켰다. 지도는 남촌진의 모습만을 간결하게 회화적 수법으로 그렸다. 鎭基에는 동헌을 비롯한 각종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 시기 설치된 砲手廳도 보이고 있다. 해안의 船所는 禦邊亭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여타의 萬戶鎭과 마찬가지로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남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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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지도 南海地圖,南海縣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에서 창선면을 제외한 지역으로 읍치는 남해읍 서변리, 동변리, 북변리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창선도는 진주목에 속해 있었다. 남해는 경상도 남해안의 서쪽에 있는 고을로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하동을 사이에 두고 있는 노량해협은 이 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로도 유명하다. 지도에는 고을의 주맥인 望雲山 자락에 위치한 읍치를 비롯하여 주변 지역의 모습이 비교적 소략한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1459년(세조 5)에 축조된 성곽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관청 건물들은 생략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이 고을이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여러 진영과 성곽, 봉수 등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쪽 僉使가 머물던 彌助鎭, 수군 萬戶의 平山鎭 등이 당시 전선이 배치된 수군 기지였다. 이전에 진영이었으나 1751년(영조 27)에 혁파된 尙州浦와 曲浦 진영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읍치의 동쪽 해안에 있는 船所에는 왜군이 쌓은 天南臺와 1599년(선조 32)에 명나라 장수 張良相이 건립한 東征磨崖碑도 그려져 있다. 노량해협과 더불어 창선도를 사이에 두고 있는 只簇津, 전라도 순천과 연결되는 湖浦津이 중요한 關防으로 표시되어 있다.

  • 남해평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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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평산진지도 南海平山鎭地圖,평산진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 남면 평산리에 있었던 수군 萬戶鎭이다. 처음에 加石에 설치했었는데 이후에 신라시대 존속했던 平山縣 옛터로 옮긴 것이다. 지도의 전반적인 표현양식은 彌助項鎭 지도와 유사하여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1,558척의 鎭城 내부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하여 군기고, 화약고, 射夫廳, ?廳 등의 군사와 관련된 관청들이 그려져 있다. 船所 옆에는 각종의 집기를 보관해 두는 什物庫도 보이며, 선창에는 크기가 다른 배의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1871년 ?영남읍지?에는 당시 戰船 1척, 兵船1척, 伺候船 2척과 이들에 딸린 군사로는 能櫓軍 145명, 射夫 28명, 火砲手 10명, 砲手 34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다대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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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대진지도 多大鎭地圖,다대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던 僉使鎭으로 동래에서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鎭이다. 왜적이 침입하는 첫 길목이 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곳이다. 원래는 무관 종4품의 萬戶營이었으나 木島의 왜적을 물리친 공로가 인정되어 후에 정3품의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1654년(효종 5)에는 첨사가 목장의 監牧官도 겸임하였다. 鎭基의 뒷산에 ‘主山’이란 표시와 ‘子坐午向’이란 坐向을 통해 당시 풍수적인 환경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객사 위쪽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전몰한 僉使 尹興信을 제향하던 제단도 그려져 있다. 해안가에는 선창이 그려져 있는데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戰船 2척, 兵船 2척, 伺候船 4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선창의 남쪽에는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놓은 南林이 그려져 있는데 선창을 보호하고 南方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 언저리 沒雲臺 옆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밑에서 용맹을 떨친 鄭運 장군의 순의비도 그려져 있다.

  • 단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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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성현지도 丹城縣地圖,단성현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일대로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호남에서 팔랑치를 넘어 진주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이다. ?여지도서?나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는 뚜렷한 관련을 찾을 수 없다. 산천의 표현 가운데 채색이 여타의 지도와 다른데 산지를 청색, 하천을 흑색으로 처리하였다. 산지는 峰巒을 연속하여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다. 읍치는 동서쪽 구석에 다른 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 특별히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이곳의 읍치는 군현의 변동에 따라 몇번의 이동이 있었다. 임란 이후 선조 때 고을이 쇠잔하여 산청현에 합속했다가 1613년(광해군 5) 土民들의 소청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復邑되었다. 그후 1702년(숙종 28) 北洞面의 古邑垈村으로 읍치를 옮겼다가 1731년(영조 7) 다시 지금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면과 소속 마을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면별로 설치된 사창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아로부터의 거리는 주기하지 않았다. 대신에 지도의 여백에 사방 경계까지의 道里와 邑治의 坐向, 그리고 장시, 봉수, 관방에 대해 주기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기타 역, 봉수, 사찰 등이 일부 표시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요소들은 거의 표현되지 않은 소략한 지도이다.

  • 당포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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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포진도 唐浦鎭圖,당포진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 있었던 水軍萬戶鎭으로 조선시대에는 固城에 속해 있었다. 동쪽의 三千鎭과 더불어 영남 서부 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鎭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 1488년(성종 19)에 다시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게 함락되었다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탈환되었던 성이다. 당시 성의 둘레는 1,455척이었다. 지도는 鎭基를 중심으로 회화적 기법을 활용하여 산지의 암벽과 수목을 비롯하여 경지의 모습까지도 표현되어 있다. 鎭城 밖에는 대원군 집권기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砲手廳과 火砲廳이 그려져 있고 船所에는 還穀庫도 보인다. 통상 성곽의 내부에 있는 客舍가 여기에서는 船所가 있는 해안가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지도의 상단에는 인근 지역과의 道里와 鎭의 현황을 간단하게 주기해 놓았다.

  • 독용산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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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용산성도 禿用山城圖,독용산성은 지금의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독용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성산가야 때 처음으로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1675년(숙종 원년)에 慶尙監司 鄭重徽가 조정에 보고하여 牧使 李時顯이 改築하였는데 둘레가 4,581步, 옹성 1, 砲樓 4, 溪 3, 泉 2개가 있었다. 당시 守城將은 牧使가 겸하고 있었고 別將 1인을 두었다. 이곳의 속읍은 星州, 高靈이었는데 성안에도 이들 고을의 군기고와 군향창이 설치되어 있다. 지도는 산성의 모습을 수묵 담채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鎭舍의 모습을 건물 윤곽만 그려 표현하였는데 구체적인 건물 명칭은 없다. 鎭基의 좌향은 ‘酉坐’라 표시되어 동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사대문과 堡樓, 將臺 정도가 성의 시설물로서 그려져 있다. 승병들이 머물렀던 安國寺, 太平岩 등의 사찰과 성 외부의 마을도 표시되어 있다.

  • 동래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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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지도 東萊府地圖,동래부는 지금의 부산광역시에서 기장군과 낙동강 以西 지역을 제외한 일대로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 인근에 있었다. 일본과 가장 가까워 당시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왜란 시에는 가장 먼저 침공을 받기도 했다. 지도는 ?여지도서?나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구도는 대략 유사하나 내용이나 구체적인 표현 기법들은 서로 다르다. 산지는 다소 맥세를 강조하는 기법으로 표현하였는데 고을의 진산인 輪山에서 읍치로 내려오는 줄기를 상대적으로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翼城, 甕城으로 이루어진 모습과 성을 둘러가면서 세워진 망루의 모습이 성내의 관아 건물과 더불어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지역은 왜적 방어의 최전방 기지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읍성 이외에도 해안에 左水營, 釜山鎭, 多大鎭 등의 진영이 있으며, 북쪽 金井山에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지도에서도 이들 성곽과 관청 건물, 그리고 해안의 선박이 정박해 있는 곳까지 상세히 그려져 있다. 남쪽 絶影島 근처에는 왜인들이 교역을 했던 倭館이 그려져 있는데 1678년 豆毛鎭 밑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709년에는 왜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성을 쌓아 設門을 만들었는데 지도에서도 守門과 더불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주변의 각 面에는 마을 명칭을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하였으며 중심 마을에는 사창도 표시하였다. 읍치의 동편에는 임진왜란 시 순절한 동래부사 宋象賢과 釜山僉使 鄭撥을 배향한 忠烈祠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와 龜浦, 釜山鎭에는 장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읍성 안에는 米廛도 표시된 점이 이채롭다. 기타 봉수, 누정, 사찰, 역원, 교량 등도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의 북쪽에는 溫井도 건물과 함께 그려져 있다.

  • 두모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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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모진지도 豆毛鎭地圖,두모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위치해 있었던 萬戶鎭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機張의 두모포에 있었는데, 왜란 후 부산의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경상좌도의 수군을 부산 지역으로 집결시킬 때인 1629년(인조 7)에 부산포로 옮겨왔다. 그 당시 두모진의 위치는 지금의 동구 좌천동 해안이었다. 지도에서 보이는 두모진에는 원래 왜관이 있었던 곳이다. 1678년(숙종 4)에 왜관을 남쪽의 절영도 부근 해안가로 옮기게 되자, 2년 뒤에 부산진 근처에 있던 두모진을 舊倭館이 있던 지금의 장소로 이설했던 것이다. 이 지도는 開雲鎭地圖와 형상과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두모진 지역도 인근의 개운진, 부산진 등지와 동일한 비율로 그렸기 때문에 매우 소략하다. 왜관이 위치한 곳에 땔감을 진공했던 柴炭所, 絶影島에 목장의 말을 몰아 가두던 驅馬所, 두모진 위쪽의 赤松亭, 倭塚碑 등이 추가된 정도이다.

  • 문경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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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지도 聞慶地圖,문경현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문경읍, 산북면, 마성면, 가은읍, 농암면, 돌로면, 호계면, 산양면 일대로 읍치는 문경읍 상리에 있었다. 지도는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내용과 형태가 유사하여 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문경은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인 조령 아래에 위치한 영남의 관문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지도에서도 조령의 세 성과 幽谷驛을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를 굵은 홍선으로 강조하였다. 산지와 하천을 모두 청색으로 그렸는데 산지는 닭벼슬 모양으로 독특하게 그려 연맥을 강조하였다. 고을의 主山인 主屹山 아래의 읍치에는 관청 건물들을 그리지 않고 글자로만 표시하였다. 籠巖과 加恩, 乫伐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다. 북쪽의 戴眉山 밑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黃腸木을 생산하던 黃腸封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1680년에 봉해진 것이다. 남쪽의 龍沼 부근에는 兎棧이 그려져 있는데 토끼가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棧道로 이 고을의 중요한 관방이었다. 그 옆에는 姑母城이 축조되어 있지만, 임진왜란 시에는 이곳을 방어하지 않아서 왜적이 쉽게 서울로 침공할 수 있었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에는 幽谷驛이 크게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 屬驛을 18개나 거느린 察訪驛이었다.

  • 미조항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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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항진지도 彌助項鎭地圖,미조항진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에 있었던 僉使鎭이다. 1486년(성종 17)에 설치했는데 이후 왜구에게 함락당하자 혁파했다. 1522년(중종 17)에 다시 설치하고 석성을 쌓았는데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이었다. 석성의 둘레는 2,1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의하면 당시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진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성곽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酉坐卯向’이라는 鎭基의 좌향도 표시하였고 전패를 모셨던 객사는 殿閣으로 표기하였다. 선소의 해안에 배를 대던 선창은 堀港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토사를 파내 선착장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 미조항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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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항진지도 彌助項鎭地圖,미조항진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에 있었던 僉使鎭이다. 1486년(성종 17)에 설치했는데 이후 왜구에게 함락당하자 혁파했다. 1522년(중종 17)에 다시 설치하고 석성을 쌓았는데 원래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이었다. 석성의 둘레는 2,1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의하면 당시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진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성곽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酉坐卯向’이라는 鎭基의 좌향도 표시하였고 전패를 모셨던 객사는 殿閣으로 표기하였다. 선소의 해안에 배를 대던 선창은 堀港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토사를 파내 선착장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 밀양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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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부지도 密陽府地圖,밀양부는 지금의 경남 밀양시, 산내면, 단장면, 상동면, 산외면, 삼랑진읍, 부북면, 청도면, 무안면, 초동면, 성남면, 하남읍 일대로 읍치는 내일동에 있었다. 밀양은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비교적 큰 고을로,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이 고을을 휘돌아가면서 이뤄내는 경치가 수려한 곳이다. 지도에도 고을을 에워싸는 連峰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강줄기의 모습이 회화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지도에 수록된 정보는 소략한 편이다. 읍치에는 성곽이 그려져 있는데 1479년(성종 10)에 축조되었다. 현재의 밀양강(당시 이름은 凝川) 절벽 위에는 밀양 제일의 명물로 현재에도 잘 보존된 嶺南樓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주변지역에는 面이나 洞里의 표시가 전혀 없고 社倉, 烽臺, 場市 정도만 표시되어 있다. 장시는 낙동강 하류의 큰 나루였던 三浪津의 삼랑장을 비롯하여 서쪽 낙동강 연안의 守山場, 그 위쪽으로 水安場, 金谷場, 八風場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교통의 요지에 입지해 있는 고을의 특성으로 인해 상업활동도 제법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지도의 하단부에는 한양에서 동래로 가는 嶺南路 중에서 가장 험하기로 이름난 鵲院棧路가 벼랑 밑으로 그려져 있는데 당시 매우 중시되던 관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인공적으로 가꾼 林藪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지도에서도 栗林과 裨補藪인 長林이 부각되어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밀양강 동쪽의 龍頭山과 서쪽의 馬巖山이 두 마리 용의 모습이고 영남루 뒤편의 舞鳳山이 구슬이 되어 한 개의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 되자 율림에 조산을 만들어 이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長林은 비보림이면서도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현실적 기능도 아울러 지녔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 봉화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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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현지도 奉化縣地圖,봉화현은 지금의 경북 봉화군 봉화읍, 상운면, 명호면, 봉성면 일대로 읍치는 봉성면 봉성리에 있었다. 동쪽의 춘양면, 소천면, 재산면 등은 당시 안동의 월경지에 속했던 곳이다. 지도에서도 주변 고을의 월경지가 표시되었는데 동북쪽으로는 안동, 중앙부에는 순흥의 월경지가 각각 위치해 있다. 산지의 표현이 매우 독특한데 산봉을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기호화된 형태로 그려 연맥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지도에도 ‘江原道來龍’ ‘小白山主龍’ 등과 같은 풍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풍수적 지리인식이 지도에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靈山인 태백산을 크고 웅장하게 그려 강조하였다. 하천의 경우는 지류와 본류를 구분하고 있는데 본류인 낙동강의 경우는 수파묘까지 정교하게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고을의 진산인 金輪峯 아래에 있는 읍치에는 관청 건물을 상세히 그려 놓았다. 주변 지역에는 各 面과 소속 마을을 삼각형 3개를 그려 기호화된 형태로 표시하였고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기재하였다. 북쪽 黃腸封山이 있던 곳은 소나무를 그려 송림이 잘 가꿔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覺華寺 북쪽에는 1546년 창건하여 실록을 보관했던 史庫가 표시되어 있다. 物野面의 龜山書院, 文村里의 文溪書院, 北面의 文巖書院 등이 대원군 집권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부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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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진지도 釜山鎭地圖,부산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동남 해안의 최전방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원래의 부산진은 서쪽 開雲鎭이 들어선 곳에 있었다. 임진왜란 시 부산진을 함락한 왜적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동편에 부산진의 支城을 축성하였는데 이것이 지도에서 보이는 부산진성이다. 일본식으로 축성한 대표적인 성으로 1597년 고니시(小西行長)가 일시 주둔하기도 했고, 명나라 장수 萬世德이 진주한 적도 있어서 일명 ‘고니시성’ 또는 ‘萬公臺’라고도 부른다. 지도에서 보이는 만공단은 明將 만세덕을 추모하는 제단이었다. 왜란이 끝난 후 子城臺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관아를 정비하여 부산진 僉使營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부산진의 성곽은 남문보다는 서문이 정문의 역할을 하여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이곳을 통해 이루어졌다. 지도에서도 서문밖에 장시가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鎭의 동편에는 鄭公壇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시 부산진성에서 고니시의 군대에 맞서 장렬히 전사한 鄭撥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해안가에는 1614년(광해군 6)에 순찰사 權盼이 戰船 보관을 위한 船艙을 만들면서 파낸 토사로 언덕을 만들어 세운 永嘉臺도 그려져 있다. 남쪽의 豆毛鎭, 倭館의 모습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 분산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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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산산성지도 盆山山城地圖,분산산성은 지금의 경남 김해시 어방동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기 1377년(우왕 3) 부사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예전부터 있던 고산성을 보수?축성하였는데, 이후 1871년(고종 8) 金海府使 鄭顯奭이 개축하여 別將을 두었다. 분산성은 해안 방어의 요충지에 위치하면서 읍치와 인접하여 유사시 고을을 수호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어서 이 시기 개축한 것이다. 지도는 수묵 담채로 산성과 인근 지역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성곽의 내부에는 鎭衙를 비롯하여 창고, 우물과 연못, 그리고 숯과 소금을 보관했던 炭?, 鹽? 등도 그려져 있다. 성의 남쪽에는 打鼓峯이 있는데, 여기에는 북을 달아 놓고 유사시 이 북을 쳐서 府民들에게 알려 이 성으로 피난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 있는 竹島는 이 고을의 關?로서 水陣軍器가 들어서 있는데 전선과 병선, 각종의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 비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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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지도 比安地圖,비안현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비안면, 안계면, 구천면, 단밀면, 안사면, 다인면 일대로 읍치는 비안면 동부리, 서부리에 있었다. 고을의 모습을 회화적 수법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한 전형적인 그림지도이다. ?여지도서?나 각종의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표현 기법이나 내용이 달라 이 시기 새롭게 제작된 지도로 보인다. 지금의 위천인 錦江이 고을을 감싸며 돌아나가며 아름답게 펼쳐진 산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잘 묘사하였다. 읍치에는 동헌과 객사 건물을 그려 표현하였고 주변의 각면에는 지붕모양으로 마을을 표시하였는데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주기하였다. 무엇보다 이 지도에서 표현 양식상 가장 특징적인 점은 도로의 표현인데 대개의 그림지도에서 곡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여기서는 직선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18세기 이후 제작되는 군현지도책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데 회화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지도적인 요소가 부각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색채를 달리하여 大路와 間路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문묘가 있는 향교는 통상 읍치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 고을에는 북쪽 15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그 밖에 인문적 요소로서 각면의 사창, 역, 북쪽의 장시, 사찰 정도가 수록된 비교적 소략한 형태의 지도이다.

  • 사량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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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진도 蛇梁鎭圖,사량진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에 있었던 萬戶鎭으로 당시는 固城에 속해 있었다. 사량도는 上島와 下島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진주만을 향하는 초입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임진왜란 후 이곳에 진을 설치하고 萬戶를 두어 統營舟師에 전속시켰다. 지도에는 상도와 하도를 같이 그렸는데, 가운데 바다를 사이에 두고 視點이 서로 반대로 되어 있다. 상도에는 산의 모습을 명칭에 부합되게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동편에 ‘壬坐丙向’의 좌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진에는 각종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이 시기 설치된 砲手廳도 보이고 있다. 섬의 각지에 형성된 마을도 표현되어 있으며 두 섬을 왕래하는 나루터에는 津船도 그려져 있는데 선소에 있는 전선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 사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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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현지도 泗川縣地圖,사천현은 지금의 경남 사천시 사천읍, 사남면, 정동면 일대로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에 있었다. 사천은 남해안에 위치한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기름진 들판과 수려한 山峰이 어울려 있는 곳이다. ?여지도서?나 기타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는 특별한 연관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비교적 정교한 필치로 고을의 모습을 잘 묘사한 지도이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에는 옹성으로 이루어진 남문과 서문, 동문의 문루뿐만 아니라 내부에 객사를 비롯한 관청 건물과 민가를 빽빽하게 그려 넣었다. 특히 獄은 둥근 테두리를 쳐서 격리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서문과 동문의 문루는 원래 없었는데 1873년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주변 지역에는 각 면과 소속 마을들을 민가의 모습과 더불어 표현하였다. 고을의 남쪽 지역에는 晉州의 越境地가 있는데 지도상에 표시된 晉州末文面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서쪽 해안의 船鎭에는 餉倉, 什物庫 등의 건물과 戰船도 상세하게 그려 놓았다. 外倉이 있는 남쪽 끝 八場浦에는 西錦市라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고을의 넓이와 위치, 인구, 군총, 결총, 성곽, 진보, 봉수 등의 자료를 기재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 산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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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지도 山淸地圖,산청현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 산청읍, 차황면, 생초면, 오부면, 금서면, 삼장면, 시천면 일대로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 일원에 있었다. 산청은 지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고을로 남강의 상류인 鏡湖水가 고을을 휘돌아 나가고 있다. 지도는 1871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윤곽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여 이 지도를 토대로 다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단지 사창이 첨가된 정도인데 1872년 당시 지도제작이 사창제의 실시와 긴밀한 연관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산지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달리 연맥으로 그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그렸는데 일부 산에는 수목을 그려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고을의 진산인 東山 서편에 읍치가 들어서 있는데 객사, 읍창 등의 관청 건물과 斥和碑를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면을 표시하지 않고 里로 표시하였는데 ?영남읍지?의 지도에는 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지의 坊里條에 里로 표기되어 있어서 이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도로의 표현이 독특한데 곡선 대신에 직선으로 그렸으며, 홍선과 청선으로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다. 또한 고개의 險隘는 홍색의 반지 모양을 그려 강조하였다. 강 서편에는 春羅臺가 부각되어 그려져 있는데, 명종 때 弘文館 典翰을 지낸 德溪 吳健의 遺址이다.

  • 삼가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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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현지도 三嘉縣地圖,삼가현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가회면, 대병면, 쌍백면, 신원면 일대로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독특한 표현기법을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지도이다. 산지의 표현은 풍수의 山圖적 양식을 가미하면서 흑색의 담채로 그렸는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읍치나 주변의 촌락에 연한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판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명당판 바깥쪽 촌락이 없는 곳에는 물결 무늬를 그려 넣은 점이 독특하다. 읍치에는 객사, 아사 등의 관청 건물과 민가들을 빽빽하게 그려 넣었고, 주변 지역에는 소속 동리에 민가들을 그려 마을을 표현하였다. 면 경계는 표시하기 어려워 대신에 가는 홍선을 연결하여 구분한 점도 특징적이다. 규장각 소장의 1871년 ?영남읍지?에도 지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전체의 구도나 표현 기법이 다소 유사하다. 그러나 향교가 서쪽의 사직단 옆에 표시되어 있으며 1872년 지도에 향교가 그려진 자리에는 ‘鄕校舊址’로 표기되어 있다. 1895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에서도 서쪽에 표시되어 서로 차이가 나고 있다. 岳堅山, 黃梅山 등에는 산성도 남아 있는데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사람들이 屯守했던 곳이라는 注記도 덧붙여 놓았다. 대로를 따라서는 당시 형성된 店幕이 그려져 있으며 古縣面에는 4, 9일에 개시되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기타 각 面에 설치된 社倉, 그리고 일부 지역의 제언, 사찰, 정자 등도 표시되어 있다.

  • 삼천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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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진지도 三千鎭地圖,삼천진은 지금의 통합 사천시에 있는 삼천포가 아니고 통합 통영시 산양면 신전리에 있었던 萬戶鎭이다. 본래 사천현(구 삼천포시)에 있었으나 1619년(광해군 11)에 이곳 미륵산 밑으로 옮기고 삼천포라 칭했던 것이다. 대체로 진을 옮기게 되면 옮겨간 지역에서도 원래의 鎭名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 사천의 삼천포 지명만 남아 있고 이곳에는 삼천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진텃골이라는 마을 이름만이 남아 있어 당시 鎭基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삼천진지도(도서번호:奎10513)는 1872년 제작?수합된 경상도 지도첩에 있지 않고 통영지도와 같이 별도로 보관된 것이다. 그러나 표현양식, 지명, 주기 등으로 볼 때 1872년에 다른 鎭堡의 지도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추가한 것이다. 지도의 표현 양식은 평산, 미조항, 적량진 등의 지도와 거의 유사하여 동일 제작자에 의해 일괄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鎭基는 ‘丙坐壬向’의 좌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둘레는 40리였다. 각종의 관아 건물을 상세하게 그렸고 이 당시 설치된 砲手廳도 보인다. 주변지역의 촌락도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는 경지의 모습도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 서평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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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진지도 西平鎭地圖,서평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萬戶鎭이었다. 원래 동래부 치소 남쪽에 있었는데 1592년(선조 25) 다대포에 합쳤다. 이후 원래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다대포로 옮긴 것이다. 지도는 다대진지도와 모습과 내용이 비슷한데 단지 서평진 부분만을 덧붙였을 뿐이다. 서평진에는 ‘亥坐巳向’이라는 좌향 표시만 있을 뿐 매우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선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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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부지도 善山府地圖,선산부는 지금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 해평면, 산동면, 도개면, 옥성면, 무을면, 고아면 일대로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 인근에 있었다. 경상도의 내륙에 위치하여 사방의 각 지역으로 길이 뻗어 나가는 교통의 요지이고, 낙동강 수운의 이점도 지니고 있는 고을이다. 고을의 주산인 비봉산 아래의 읍치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읍성은 본래 麗末에 知軍 李得辰이 흙으로 쌓은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이 심해지자 府使 趙斗壽가 돌로 다시 쌓았다. 읍성 안의 斥洋碑, 서문 밖에 그려진 砲士廳 등이 당시 국방 재정비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주변의 각면에는 사창이 설치된 중심 마을만 표기되어 있다. 서남쪽에는 중요한 關?였던 금오산성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은 고려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곳으로 1410년(태종 10)에 크게 수축했으나 외적의 침입이 없자 점차 폐허가 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여러 번 개축하였다. 외성과 내성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외성은 1638년 監司 李命雄과 府使 李恪이 쌓은 것이다. 지도에는 인근의 金山, 開寧, 知禮 등 고을의 군향창과 군기고, 연못과 우물, 그리고 道詵이 수도했다는 道詵窟도 그려져 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고을 특성으로 인해 장시의 발달도 두드러진다. 邑市를 비롯하여 北熊谷面의 長川市, 上古尾面의 九尾市, 서쪽 安谷驛 근처의 安谷市, 新谷面의 甫通市, 海平面의 海平市 등 비교적 많은 장시가 개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지도에는 古蹟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도 많이 나타나 있는데, 주인을 위해 끝까지 忠義를 지녔던 일화가 전해오는 義狗塚과 義牛塚도 표시되어 있다. 吉再, 金宗直 등을 배향했던 東內面의 金烏書院은 대원군 집권기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던 47개 서원중의 하나로 지도에서도 여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에 길게 형성된 冬至藪는 金宗直이 甘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심어 가꾼 것으로 안쪽 千餘 石落의 토지가 300여년 동안 이 혜택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남쪽의 낙동강 변에는 吉再의 충절을 기리는 砥柱碑도 보이고 있다. ‘砥柱’는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石山으로 탁류중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아 세욕에 물들지 않는 굳센 절개를 상징한다. 길재는 고려 왕조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노모를 모시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던 인물이다.

  • 순흥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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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지도 順興府地圖,순흥부는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일대로 읍치는 순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소백산 기슭에 위치한 고을로 읍치 동쪽으로 흐르는 竹溪와 서쪽의 소백산이 어우러져 山高水淸한 풍광을 지닌 곳이다. 순흥은 세조 때 여기에 귀양왔던 錦城大君과 府使 李甫欽의 단종 복위 밀모로 인해 혁파되어 주변 고을에 割屬되었다가, 1668년(숙종 9) 고을 사람들의 소청에 의해 복구되었다. 지도는 풍수의 山圖에서 볼 수 있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맥세를 강조하였는데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다. 소백산에서 뻗어 내린 맥이 고을의 진산인 飛鳳山에 연결되는데, 그 아래에 있는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단지 ‘邑基’라고 표기하였다. 고을 내부를 흐르는 하천은 흑색의 점선으로 그린 점이 독특한데 이는 목판본 山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주변 지역에는 各 面과 면 소속의 대표적인 촌락이 원 내부에 표시되어 있다. 순흥은 과거 군현의 혁파로 인해 인접 고을에 월경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서쪽 竹嶺 바로 밑에 昌樂 察訪驛이 있는 昌樂面과 동북쪽의 文殊山이 있는 지역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월경지의 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동쪽의 獐洞市, 浮石寺 근처의 召川市 등의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동쪽에는 周世鵬이 창건한 것으로 유명한 紹修書院이 표시되어 있고 그 밖에 浮石寺를 비롯한 사찰과 봉수 등이 표시된 정도이다.

  • 신령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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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지도 新寧地圖,新寧縣은 지금의 경북 영천시 신녕면, 화산면과 화북면, 화남면 일부 지역으로 읍치는 신녕면 화성리에 있었다. 이 지도는 읍지의 附圖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크기도 작고 담고 있는 내용도 매우 소략하다. 고을의 주산인 花山을 비롯한 산지의 표현이 독특하며 하천은 단선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관청 건물을 그리지 않고 단지 객사, 향교 등으로 표기하였다. 주변에는 면 이름과 사창을 표시하였다. 중심과 주변이 거의 동일한 축척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도면의 크기가 작아 읍치를 상대적으로 확대하기 어려운 것에도 기인한다. 1551년 현감 黃俊良이 건립한 環碧亭과 竹西樓 등의 樓亭도 표시되어 있다. 그 밖에 富貴寺, 佛窟寺, 修道寺, 鳳林菴 등의 사찰이 표기되어 있고 읍치의 서쪽에는 당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長水 察訪驛도 나타나 있다. 1872년의 경상도 지도 가운데는 가장 작은 크기로 그려진 지도에 해당한다.

  • 안골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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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골진지도 安骨鎭地圖,안골진은 지금의 경남 진해시 안골동에 있었던 수군 만호진이다. 부산 앞바다를 거쳐 남해안 서쪽으로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는 요충에 위치해 있다. 한 때 경상 우수영이 있었던 자리로, 이로 인해 수군 만호를 둔 것이다. 晴川과 新門이 인근에 있으나 이 당시는 혁파되어 있었다. 원래 陸鎭의 召募鎭이었던 청천진은 김해 청천면에서 충훈부의 별장이 있던 안골포의 북쪽에 1656년에 이설하여 수군진으로 개편하여 별장이 주둔하였으며, 역시 육진이었던 신문진도 김해 유하면에서 청천진과 함께 이설하여 수군 별장이 주둔하였으나 1862년(철종 13)에 廢鎭되었다. 안골진에는 1490년(성종 21)에 세워진 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훼손이 심해 지도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다. 주변 지역에 비해 鎭基를 크게 확대시켜 각종 관아 건물을 그려 넣기도 했는데 이 시기 설치되는 砲手廳도 보인다.

  • 안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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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의현지도 安義縣地圖,안의현은 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로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에 있었다. 안의는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남쪽 줄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려한 계곡과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다른 군현의 지도에 비해 구도와 표현 기법이 독특하다. 고을의 외곽 지역을 직사각형의 형태로 둘러가면서 산줄기를 그렸고 그 내부에도 다소 유형화된 모습의 산들을 담채로 표현하였다. 고을 내부를 관통하는 하천은 거의 비슷한 굵기로 다소 거칠게 그려 넣었다. 고을의 主山인 鎭城山을 진하게 강조하였고, 읍치에는 정형화된 형태의 집 모습으로 관청의 건물을 표시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각 면 소속의 마을을 표시하였는데, 일종의 기호를 사용하여 촌락을 표시하고 읍치에서의 거리도 注記하였다. 지도에는 도로의 표시가 없는데 거리 주기가 이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다. 동쪽 지금의 위천천에는 搜勝臺가 강조되어 그려져 있는데, 원래 愁送臺라 불리다가 퇴계 이황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와 글이 이곳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農桑漁樵’라는 村居의 네 가지 즐거움에서 이름을 딴 四樂亭과 樂水亭 등의 정자도 눈에 띈다. 또한 隱身菴, 普賢菴, 靈覺寺 등의 사찰도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와 古縣面, 西上面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지도에 비해 전반적으로 군사적 성격은 매우 약하다.

  • 양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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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지도 梁山地圖,양산군은 지금의 경남 양산시 중 웅상읍을 제외한 지역으로 읍치는 중부동 일대에 있었다. 양산은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로의 육로와 낙동강 수로의 길목에 위치한 고을이다. 당시 양산은 낙동강 하류 三叉江의 三角洲 지역에 형성된 柳島, 麥島, 桃島 등의 河中島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동서로 포진해 있는 험준한 산지의 모습을 산수화풍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圓寂山에서 고을의 主山으로 뻗어 내린 맥은 풍수의 山圖的 技法을 사용하여 부각시켰다. 읍성을 작게 그렸기 때문에 내부에는 관청 건물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시기에 이르러 門樓가 훼손되고 성벽도 많이 파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 지역에는 황색의 집을 겹쳐 그려 마을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도와 달리 面名은 표시되지 않았다. 察訪驛이었던 黃山驛과 읍성의 서쪽 지역, 고을 서남부의 勿禁津에는 장시가 표시되어 있는데,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에 장시가 입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남쪽 끝에는 낙동강 하류의 유명한 포구였던 龜浦가 건물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의 鷲棲山 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팔도 사찰의 宗刹로 칭해졌던 通度寺가 여러 건물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 언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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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현지도 彦陽縣地圖,언양현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언양읍, 상북면, 삼동면, 삼남면 일대로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에 있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내용과 모습이 거의 일치하여 이를 토대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사창이 첨가된 정도이다. 지도는 읍지의 附圖와 유사한 형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다소 소략하다. 고을의 진산인 高獻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강조되어 표현되었고 읍치를 돌아 나가는 南川이 부각되었다. 정방형의 성곽이 그려진 읍치에는 관아 건물도 그려졌으나 건물 명칭은 표시되지 않았다. 읍성은 원래 土築이었으나 1560년 현감 李聃龍이 돌로 改築한 것이다. 주변 지역에는 마을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面名은 빠져 있다. 도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다만 사방 경계 지역에 읍치로부터의 거리만을 注記해 놓았다. 迦智山 밑의 石南寺, 燃燈菴 등의 사찰을 제외하면 다른 요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영덕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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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현지도 盈德縣地圖,영덕현은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덕읍, 지품면, 달산면, 강구면, 남정면 일대로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부근에 있었다. 동해 연안에 위치한 고을로 고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여지도서?나 기타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내용과 양식이 다르다. 읍치 공간을 크게 확대하여 부각시켰는데 성곽의 모양과 내부에 위치한 관아 건물이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곽의 동문과 남문은 방어에 유리한 甕城의 구조로 되어 있고 서문은 문루로만 되어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면 소속의 마을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고 유형화된 산의 모양을 옆에 그려 넣었다. 관내를 흘러 나가는 五十川은 굵은 선으로 연하게 표현하였다. 주변 지역과 연결되는 도로는 가는 흑선으로 그리고 ‘道’라고 표기한 점이 독특하다. 도로변에는 酒登驛, 南驛 등의 역도 표시되어 있다. 中南面의 烏浦에는 전에 水軍 萬戶가 있다가 후에 혁파되었는데, 지도에도 변화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읍내에는 장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上場과 下場으로 구분된 점이 독특하다. 그 밖에 사찰, 사창 등이 그려져 있는 정도이다.

  • 영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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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현지도 靈山縣地圖,영산현은 지금의 경남 창녕군 영산면, 계성면, 도천면, 장마면, 길곡면 일대로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에 있었다. 다소 소략하게 그려진 지도로서 ?여지도서?에 실린 지도와 구도가 비슷한 듯하나 구체적인 모습은 상이하다. 고을의 진산인 靈鷲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를 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특히 읍치 주변을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판으로서 읍치가 지니는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영산현에는 원래 읍성이 있었으나 관리가 소홀하여 오래 전에 훼손되었는데 지도상에도 읍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읍치에는 客舍, 軍器, 司倉, 賑倉 등의 관청 건물과 당시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세워지는 砲手廳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 各 面을 표기하고 옆에 社倉을 그렸으나 소속 洞里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관내의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고 길가에 있는 一門驛, 溫井驛 등의 역도 표시하였다. 특히 봉수는 홍색의 직선으로 照應 關係를 나타낸 것이 눈길을 끈다. 다른 지도와 달리 제언과 연못이 자세히 표시된 것도 특징적이다. 남쪽의 낙동강가에는 忠翼公 郭在祐의 精舍였던 忘憂亭이 표시되어 있고 그 옆에는 賦稅를 거두어 들이던 곳인 松津도 도로의 끝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밖에 북쪽 지역에 法華菴을 비롯한 몇 개의 암자가 그려져 있다.

  • 영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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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현지도 英陽縣地圖,영양현은 지금의 경북 영양군 일대로 이 가운데 석보면은 당시 寧海에 속해 있었다.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해당한다. 경상 동북부 산간 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평지가 적은 지역의 특성이 지도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조선초기부터 寧海에 합속되어 내려오다 1676년(숙종 2)에 復設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영해로 복속되었다. 그후 1683년(숙종 9)에 읍민의 상소로 다시 복설하여 현감을 두게 된 것이다. 고을의 鎭山으로 동해의 일출과 월출을 볼 수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日月山이 크게 부각되어 그려졌다. 고을의 主山인 芍藥山 아래의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세워진 別砲廳과 斥邪碑閣이 눈길을 끈다. 주변 지역에는 各面 소속의 마을 이름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고을 앞을 돌아나가는 將軍川과 더불어 작은 하천들도 세밀하게 그렸는데, 琵琶潭, 送迎潭 등의 河中湖도 표시하였다. 송영담은 도로변에 위치하여 읍민들이 작별을 고하는 장소로 인해 이름 붙여졌고, 비파담은 옛날 비파를 타던 여자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女妓峯 아래에는 靈穴泉이 있는데 물의 청탁으로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그 밖에 立巖, 招仙臺, 仙遊窟 등의 절경이 다수 표시되어 있고 項池, 蓮池 등의 연못도 그려져 있다.

  • 영일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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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현지도 迎日縣地圖,영일현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연일읍, 대종면, 오천읍, 동해면 일대로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에 있었다. 바다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예로부터 왜적들이 왕래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는 산수화풍으로 고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읍치와 각 마을들을 비스듬히 공중에서 내다보는 조감도식으로 그려 한눈에 쉽게 파악되도록 하였다. 산은 입체감을 살려 표현하였으며 특히 수목을 상세히 그려 넣었다. 읍치는 원래 형산강 남쪽에 있었는데, 장마 때 수해를 많이 입기 때문에 1870년(고종 7) 지대가 높은 북쪽의 大岑里로 이전하였다. 지도에도 新邑으로 표시되어 있고 관청 건물들을 빽빽하게 그려 넣었다. 주변의 각 面에는 황색의 집을 겹쳐 그려 촌락을 표시하였고 동리의 이름도 옆에 첨가하였다. 홍선으로는 도로를 표시하였으며 냇가에는 다리도 그려 넣었다. 읍치의 내부와 읍치의 남쪽 지역, 그리고 포항진에 있는 장시를 통해 당시 상업적 양상도 엿볼 수 있다. 서남쪽의 大王巖과 三僧巖, 동남쪽의 魚龍臺, 바닷가의 大嶼臺 등 기우제를 지냈던 곳을 자세하게 표시한 점도 특징적이다. 各 面別로 설치된 社倉과 촌락 주변의 연못도 그려 넣었으며 강가의 나루터에는 배도 그려 넣었다.

  • 영천군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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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전도 永川郡全圖,영천군은 지금의 경북 영천시 금호읍, 청통면, 대창면, 북안면, 고경면, 임고면, 자양면 일대로 읍치는 성내동 인근에 있었다. 금호강이 고을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모습을 잘 묘사한 지도이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면서도 산수화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수목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고을의 진산인 母子山에서 읍치로 뻗어 내린 맥은 고을의 주맥으로서 강조되었다. 읍치 공간은 주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큰 축척을 적용하여 관청 건물과 민가를 그려 넣었다. 읍치에는 원래 1591년에 건립된 읍성이 있었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근근히 남아 있는 모습을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고을의 주변 지역에는 각 面을 배치시켰으나 그 이하의 마을은 대표적인 것들만 표시하였다. 서쪽의 八公山 자락에는 1545년 仁宗大王의 태를 봉안한 胎室을 그렸는데 풍수의 산도적인 형식으로 명당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도로를 따라서 장시들도 개시되어 있는데 慈川面의 中溪洞場, 阿川面의 杏花村場, 紫陽面의 檢丹洞場, 동쪽의 黑石場, 남쪽 毛沙面의 倉村場, 明珠洞場 등으로 다른 군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 남쪽에는 曺好益을 배향한 道岑書院, 읍치 위쪽에는 정몽주를 배향한 臨皐書院이 있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을 흐르는 南川가에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 버드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祭壇 바로 위쪽에는 永陽君 李大榮의 묘와 더불어 여러 사찰들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서 문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부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편의 蘇山烽臺, 서편의 城隍烽臺와 같은 몇 개의 봉수만이 군사적 관심의 일단을 보여줄 뿐이다.

  • 영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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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지도 榮川郡地圖,영천군은 지금의 경북 榮州市, 長壽面, 文殊面, 平恩面, 伊山面 일대로 읍치는 영주동에 있었다. 고을은 앞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으로는 소백산을 향하고 있고, 남으로는 鶴駕山을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龜溪가 흐르고, 沙川이 동쪽을 감싸 돌고 있다. 지도는 회화식을 가미하여 영천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 시기 제작된 다른 지도와 비교했을 때 다소 소략한 느낌을 준다. 고을의 중심 공간인 邑治를 부각시키지 않고 주변 지역과 동일한 비율로 그려져 있다. 산지는 連脈의 형태로 그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산봉우리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그렸다. 읍치의 북쪽에는 고을의 鎭山이 되는 鐵呑山이 그려져 있는데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또한 서쪽 ?甫山 산록에는 1750년(영조 26) 元孫 아기씨의 태를 봉안했던 곳이 胎峯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상을 지닌 東龜臺, 西龜臺도 그려져 있다. 하천은 청색으로 거칠게 그려져 있으나 이름은 빠짐없이 표기되었다. 읍치의 주변지역에는 각 면과 소속 마을을 표기하였으며 읍치에서의 거리를 표시하여 지역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읍치의 邑市를 비롯하여 서쪽의 盤邱市, 동남쪽의 迂川市가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 유통경제의 상황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은 林藪가 잘 조성되어 있는데 防害藪, 德山藪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덕산수는 본 고을이 水災가 많아 河崙이 고을을 다스릴 때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꾼 숲이다.

  • 영해읍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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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읍지도 寧海邑地圖,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영양군 석보면 일대로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다. 지금의 경상도 울진군은 조선시대에 강원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영해는 당시는 경상도의 동북부 맨 언저리에 위치한 고을이었다.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가로막혀 있고 동해로 흘러드는 松川을 중심으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도는 산지로 둘러싸인 서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는데 방위를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읍치에는 성곽과 관아의 건물을 그렸으며, 주변 지역에는 各面과 所屬 洞里를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하였다. 동쪽 해안의 丑山浦에는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과거 水軍 萬戶가 있었다. 옆에는 元帥 尹可觀의 축성 사실과 관련한 權近의 西門樓記를 요약하여 수록하였다. 그 위쪽에 있는 柄谷에도 萬戶鎭이 있었으나 당시 폐지되어 있었다. 이 고을의 해안방어 기능이 이 시기에 이르러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거무역리에 있는 명사 20리는 ‘鯨浦十里’로 표기되어 있다.

  • 예안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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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현지도 禮安縣地圖,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도산면, 녹전면 일대로 읍치였던 동부리, 서부리 지역은 1973년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위쪽의 봉화 청량산을 돌아 흘러 내려오는 낙동강과 주변 첩첩한 산들이 엮어내는 풍광이 사뭇 아름다운 곳으로 퇴계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으로도 유명한 고을이다. 지도는 ?여지도서?나 기타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는 특별한 연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산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산은 연맥을 강조하기보다는 독립적인 형태로 담채를 사용하여 그렸다. 靈芝山에서 뻗어 내린 宣城의 남쪽에 읍치가 형성되어 있는데 衙舍, 客舍, 鄕廳, 軍器庫 등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다. 옆에 있는 斥邪碑閣을 통해 당시 대원군 집정기의 斥倭攘夷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과 소속 마을의 지명을 표기하였는데 적색의 원내에 기재한 것이 특이하다. 예안은 조선 성리학의 거두였던 퇴계 이황이 출생, 거주했던 곳으로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림들이 운집했던 곳이다. 당시 도산서원을 비롯한 많은 서원이 있었지만 도산서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된 사실이 지도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고려의 禹倬을 배향한 易東書院, 李賢輔를 배향한 汾江書院, 북쪽의 淸溪祠, 동쪽의 景賢祠 등이 모두 훼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도로는 굵은 홍선으로 그렸고 경계 지역에만 읍치로부터의 거리를 注記하였다. 그 외에 각 면별로 설치된 社倉과 주변에 있는 사찰, 누정 등이 그려져 있다.

  • 예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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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지도 醴泉郡地圖,예천군은 지금의 경북 예천군 예천읍, 용문면, 유천면, 감천면, 보문면, 호명면 일대와 문경시 동로면, 의성군 다인면 지역을 포괄하며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에 있었다. 과거 多仁縣이 예천의 월경지로서 龍宮縣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 지도에는 이러한 거리관계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산지는 담채를 사용하여 連脈을 부각시켰고 하천은 ‘來去’를 표시하여 흐름의 방향을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황색의 큰 원으로 읍치를 강조했으나 관청 건물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주변의 각 면에는 소속 마을을 자세히 표시하였는데 색깔을 달리하여 면을 구분한 것이 독특하다. 면?마을?사찰?역 등의 인문적인 내용을 지붕 모양으로 기호화하여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城池의 모습도 보이고 있는데, 황장목을 장양하기도 했던 북쪽의 黃腸鵲城, 고을의 주산인 德鳳山에 있는 黑鷹城, 仙洞에 있는 氷城 등이 城堞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당시 상업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장시도 다수 표시되어 있는데, 남쪽의 深川과 水山驛, 位羅谷面의 ?川, 동쪽의 普門面, 渚谷面의 上金谷 등에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시는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데, 정기시의 한 유형인 장시(5일장)의 변화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왕비와 태자의 胎를 안치했던 龍門寺를 비롯하여 普門寺?天柱寺?仙岳寺?大谷寺?東岳寺?西岳寺 등의 사찰도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 옥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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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포진지도 玉浦鎭地圖,옥포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위치한 萬戶鎭으로 1488년(성종 19)에 축성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한 옥포대첩이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592년 4월 경상 우수사 元均이 왜군에 패하자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옥포진성에서 왜적에 끝까지 항거하던 만호 이운용과 더불어 옥포 앞바다에서 왜군을 포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유래를 지닌 성이지만 지도제작 당시는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관리가 소홀하여 성첩과 문루의 훼손이 심했던 상황임을 지도 여백의 古蹟條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지도는 환포형으로 그렸고 특히 鎭基로 이어지는 맥세의 표현이 풍수의 山圖적인 수법을 따르고 있다. 특히 포구의 입구를 關鎖된 모습으로 그린 점은 풍수적 환경인식의 또 다른 표현으로 풀이된다. ‘동서남북’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鎭基의 배치를 고려해서인지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았다.

  • 옥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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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포진지도 玉浦鎭地圖,옥포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위치한 萬戶鎭으로 1488년(성종 19)에 축성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한 옥포대첩이 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592년 4월 경상 우수사 元均이 왜군에 패하자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옥포진성에서 왜적에 끝까지 항거하던 만호 이운용과 더불어 옥포 앞바다에서 왜군을 포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지도에는 海鎭으로서의 요충지적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바다 쪽의 입구가 실제보다 훨씬 좁게 표현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옥포진지도가 2장 있는데 다른 지도는 규10512 v.8-12의 옥포진지도가 그것이다. 두 지도는 같은 지역을 그렸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본 지도가 산의 표현에 산수화적인 기법을 사용했음에 반해 앞의 지도는 풍수의 山圖적인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본 지도가 北을 위쪽으로 하였음에 반해 앞의 지도는 西를 위쪽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 鎭城 내의 도로와 건물 배치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본 지도와는 달리 앞의 지도에는 여백에 古蹟이 적혀 있다. 두 지도를 비교함으로써 같은 지역에 대해서도  기법과 내용에서 지도 작성자 또는 작성 시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용궁현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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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현지지도 龍宮縣之地圖,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 풍양면, 지보면, 개포면 일대로 읍치는 용궁면 읍부리에 있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형식과 구도가 유사하여 이를 토대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832년에 작성된 ?慶尙道邑誌(규장각 소장)?에 수록된 용궁현지도에는 읍치가 舊邑面에 그려져 있다. 원래 읍치는 鄕石里에 있었는데 1856년(철종 7) 큰 장마로 縣廳이 떠내려 가자 이듬해 현감 李允秀가 읍치를 抱琴山 밑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을의 鎭山도 竺山에서 抱琴山으로 바뀌게 되는데 읍지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소 서북쪽에 치우쳐진 읍치는 확대 과장하여 그리지 않고 단지 ‘邑治’만을 표기하였다. 그러나 社稷壇, ?祭壇, 城隍壇, 鄕校 등의 三壇一廟는 표시되어 있다. 주변의 각 면에는 소속 마을의 이름도 비교적 상세히 표기되어 있다. 읍치와 知保驛이 있는 곳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의 남쪽 城底里에는 해바라기 모양의 성첩을 그렸는데, 과거 龍飛山城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쇠미해졌다. 지도의 하단에는 戶口, 인근 고을까지의 道里를 주기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 울산목장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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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목장지도 蔚山牧場地圖,울산목장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동구 지역 일대에 해당한다. 1651년(효종 2)에 목장에 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3,626步였다. 이후 1654년(효종 5)에 監牧官을 동래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듬해 3월에 馬城을 쌓았는데 鹽浦江에서 美浦까지 1,913把였다. 지도에서도 이 마성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감목관이 관할하던 屬場으로는 長?의 冬乙背串 목장이 있었다. 지도는 흑색의 담채를 사용하여 환포형으로 산지를 그렸고, 강과 바다는 청색으로 표현하여 고졸한 맛을 풍겨준다. 감목관의 치소인 官基는 건물을 전혀 그리지 않고 단지 붉은 원안에 글자로만 표시하였다. 주변지역에는 각종의 지명들이 홍색의 직사각형 내에 표기되어 있고, 도로는 흑색으로 그렸는데 ‘路’라 표기하여 도로임을 나타내었다. 이 지역의 사찰로 官基 위쪽의 東竺寺와 목장 근처의 月峰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들 사찰에서 養馬祭를 지내기도 했다.

  • 울산서생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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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서생진지도 蔚山西生鎭地圖,서생진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서생면 서생리 일대에 있었다. 서생진은 지금의 회야강인 鯉魚江 하구에 위치하여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진입하는 왜적을 막는 요충지였다. 처음에는 북쪽에 자리잡아 萬戶를 두었으나, 이후 1592년(선조 25)에 倭城 남쪽으로 이설하여 水軍同僉節制使를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성곽이 견고하여 이곳으로 옮기고 大鎭으로 승격한 것이다. 지도에는 산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성곽과 내부의 관청 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이 세밀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각 마을에는 거주하던 家戶의 數도 기재해 놓았다. 남문 근처에는 場市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戰船이 정박해 있는 舟師里는 해운을 이용할 수 있는 포구적인 특성으로 이 지역의 大村으로 성장해 있다.

  • 웅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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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천현지도 熊川縣地圖,웅천현은 지금의 경남 진해시 일대로 당시 웅천의 읍치는 진해시 중심가가 아니고 동쪽 성내동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한말 이후 복잡한 행정구역의 변천을 겪은 곳이다. 조선시대 진해현은 이곳이 아니라 지금의 마산통합시 진동면이 중심지였다. 1910년 마산부제가 실시되고, 1912년 웅중면과 웅서면을 포함하여 마산부 진해면으로 개편되면서 원래 웅천의 지명은 진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웅천은 동남 해안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위쪽으로는 비교적 험준한 산들이 줄을 잇고 있다. 남쪽 해안으로는 진해만을 거쳐 서부 경남으로 통하는 해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국방상 요지였던 곳이다. 고을의 주산인 熊巖과 天子峯, 동쪽의 寶盖山, 서쪽의 大峙, 小峙 등 산과 고개가 험준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읍치 공간은 상대적으로 확대시켜 그렸는데 정방형의 성곽이 잘 표현되어 있다. 관청 건물은 동헌과 객사만 그려져 소략한 편이다. 주변의 지역에는 각 면에 설치된 社倉과 주요 마을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쪽 해안의 薺浦에는 1398년(태조 7)에 右水營을 설치하였으나 그 후 창원의 合浦로 옮기고 僉使鎭을 설치했다. 安骨鎭, 加德鎭, 天城堡 등도 당시 중요한 관방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晴川鎭과 新門鎭 등은 당시 혁파되어 있었다. 원래 陸鎭의 召募鎭이었던 청천진은 김해 청천면에서 충훈부의 별장이 있던 안골포의 북쪽에 1656년에 이설하여 수군진으로 개편, 별장이 주둔하였으며, 역시 육진이었던 신문진도 김해 유하면에서 청천진과 함께 이설하여 수군 별장이 주둔하였으나 1862년(철종 13)에 폐진되었다. 봉수도 자세히 그려져 있고, 외남산에는 古倭城도 성첩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 군사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그 밖에 읍치와 동쪽의 夫人堂에는 장시도 들어서 있다.

  • 율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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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포진지도 栗浦鎭地圖,율포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동부면 율포리에 있던 鎭으로 무관 종9품의 權官이 수장으로 있던 곳이다. 1664년(현종 5)에 舊水營으로 옮겼다가 1688년(숙종 14) 統制使 李世顯의 장계로 加羅山 아래로 옮긴 것이다. 옛날 자리에는 성이 있었으나 지도 제작 당시의 터에는 성이 없다. 지도의 표현 양식이 加背梁鎭 지도와 유사하여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巳坐’라는 鎭基의 좌향으로 볼 때 서북쪽으로 향하여 鎭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이 시기 설치된 砲手廳도 눈에 띈다. 해안의 禦邊所에는 배의 모습도 크기를 달리하여 그려져 있다. 당시 이곳에 있던 전선에 딸린 군사는 翰船旗牌官 5명, 都訓導 1명, 左右捕盜 2명, 射夫 18명, 火砲手 10명, 砲手 24명, 舵?碇手 3명, 能櫓軍 1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의령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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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현지도 宜寧縣地圖,의령현은 지금의 경남 의령군 지역으로 읍치는 의령읍 서동리 일원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을 감싸 나가는 南江이 咸安과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북쪽은 산지로 둘러 싸여 있다. 산지는 봉만을 중첩시켜 표현하였는데 고을의 案山인 남쪽의 龜龍山에는 竹田의 모습과 수목도 그려져 있다. 鳳德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읍치를 주변 지역보다 확대하여 강조하였다. 읍성은 1589년(선조 22)에 知縣 李?가 축조한 것인데 지도제작 당시에도 비교적 잘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곽 내부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을 그려 놓았고, 서문 밖에는 생원?진사들이 모여 강학하던 司馬齋로 그려져 있다. 남문 밖 도로변에는 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진 斥邪碑도 볼 수 있다. 주변 지역에는 마을이 관아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面 밑에 리가 표시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里밑에 소속 洞을 표기하여 里를 面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읍치와 북쪽의 外洞에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동남쪽 남강변의 鼎巖洞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오는 상선들이 정박하던 큰 나루였는데 솥 모양의 鼎巖을 부각시켜 표현하였다.

  • 의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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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지도 義城地圖,의성현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의성읍, 단촌면, 안평면, 봉양면, 금성면, 가음면, 춘산면, 사곡면, 옥산면 지역으로 읍치는 의성읍 도동리 일원에 있었다. 경북 내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고을로 대부분 지역이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의성은 본래 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여 경덕왕 때 그의 次子를 봉하고 聞韶郡으로 삼았는데 지도에서도 옛 이름인 聞韶로 표기하였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 달리 地志와 地圖가 결합된 양식을 띠고 있다. 읍치 공간을 주변지역보다 크게 확대하였는데 관아 건물의 배치가 매우 상세하게 그려진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서북쪽의 空缺을 막기 위해 長養된 裨補藪와 남쪽 金城山의 火氣를 鎭壓하기 위해 세운 石龜를 통해 당시인들의 풍수적 환경 인식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당시 세워진 洋夷斥和碑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의 去思碑, 孝子閣까지도 그려 넣었다. 召文面에는 경덕왕릉과 현재 국보 77호로 지정된 오층석탑도 뚜렷하게 그려져 고적에 대한 관심이 지도에서도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남쪽 金城山의 고성과 동쪽의 黃山山城 등이 성첩으로 표시되어 있고, 城山烽燧, 馬山烽燧 등의 봉수도 횃불 모양 그려져 있어서 군사적인 성격도 보이고 있다. 동북쪽 黔谷面의 泥芳市, 서쪽 金磊面의 桃李院市 등과 더불어 남쪽에도 장시가 개시되어 있는데 一日市, 六日市 등으로 분화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그 밖에 제언, 사찰, 교량, 경승 등도 그려 넣어 이 시기 지도로서는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의흥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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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현지도 義興縣地圖,의흥현은 지금의 경북 군위군 의흥면, 고로면, 산성면, 우보면, 부계면 일대로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은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여 이를 토대로 수정,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였지만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동헌, 객사 등의 관청 건물이 표시되어 있고 주변 지역에는 각 면과 그 소속의 마을 이름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특히 제언이 자세하게 수록된 점이 특징적이다. 동북쪽에는 1709년(숙종 35)에 兵使 尹淑이 쌓은 華山城이 그려져 있는데 虹霓 모습을 그려 성문을 나타내었다. 또한 팔공산 방면의 吐乙峴烽燧, 甫只峴烽燧, 繩木烽燧 등의 군사적 내용도 보인다. 동북쪽의 麟角寺 맞은 편에는 병풍같은 절벽이 있는데 현감 朴聖漢이 石臺를 증축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지만 四界里數는 표시하지 않았다. 읍치의 도로변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인동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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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지도 仁同地圖,인동부는 지금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 기산면, 북삼면, 석적면 일대와 구미시 관내 지역 중에서 낙동강 이동 지역에 해당한다. 인동의 읍치는 현재 구미시 인의동 지역이다.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강 연안에는 평야가 다소 펼쳐져 있고 동서쪽으로는 天生山, 鈴巖山, 捿鎭山 등의 산들이 포진해 있다. 인동은 원래 縣이었는데 1604년(선조 37) 天生山城을 수축하면서 府로 승격되었다. 읍의 主山인 玉山 아래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당시 설치되었던 別砲廳도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또한 읍치 앞 도로변에는 斥邪碑도 그려져 있다. 주변의 각 면에는 소속 마을도 집 모습을 그려 표시하였는데 색채를 달리하여 면을 구분하였다. 동쪽의 天生山城은 신라 赫居世가 始築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때 郭再祐가 왜구를 대파했던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 서쪽의 吳太洞에는 冶隱 吉再를 배향한 吳山書院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1871년에 훼철되어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에 1780년(정조 4)에 세워진 砥柱碑만이 표시되어 있다. ‘砥柱’는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석산으로 탁류중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아 세욕에 물들지 않는 굳센 절개를 상징한다. 이 비석은 이 고을의 인물인 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이 밖에 件臺山烽, 朴執山烽 등의 봉수가 붉은 깃발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제언도 둥근 원으로 그려져 있다.

  • 인동천생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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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천생산성지도 仁同天生山城地圖,천생산성은 지금의 경북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천생산에 위치해 있다. 천생산의 8부 능선을 가로지르며 축성된 천생산성은 낙동강을 끼고 절험한 산중에 축조되어 병란 시 인근 주민을 대피시켜 항쟁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당시 서남쪽의 금오산성과 동남쪽의 가산산성과 더불어 영남 일원의 중요한 산성으로서 기능하였다. 사방이 하늘이 만들어 준 것처럼 깍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天生’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신라 赫居世가 최초로 쌓았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郭再祐가 이곳에서 왜적을 대파하기도 했다. 이후 1601년(선조 34) 郭再祐가 察理使가 되었을 때 외성을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3,612尺이었다. 지도에도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성의 모습이 잘 부각되어 있는데 지형 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성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내성 안에는 天雲閣, 軍器, 將臺, 창고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고 나무도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산성의 외곽을 환포형의 산줄기로 처리하여 내부의 산성을 부각시킨 표현 기법이 독특하다.

  • 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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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지도 慈仁地圖,자인현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 일대로 읍치는 자인면 동부리, 서부리에 있었다. 자인은 대구와 경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고을로 고려 현종 때 경주의 屬縣이 된 채로 내려오다가 1637년(인조 15)에 비로소 縣監을 두었다. 산지는 청색을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암석, 수목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고을의 주산인 到天山을 진하게 강조하였고, 그 아래에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 객사, 향교 등을 표시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사창이 설치된 마을 이름만이 표기되고 다른 洞里들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琴湖江의 지류인 烏沐川의 상류는 觀瀾川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하천의 명칭은 상류, 중류, 하류 등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던 데서 기인한다. 金鶴山 밑에는 大興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신라의 고찰로서 임진왜란 시 파괴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僧 守機가 복구한 절이다. 中庵, 上庵, 玉泉庵 등 다섯 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던 비교적 큰 절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읍내에는 장시도 표시되어 있으나, 전반적으로 매우 소략한 형태의 지도이다.

  • 장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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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지도 長?縣地圖,장기현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일대로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다.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장기곶 아래쪽 지역이다. 해안과 하천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덮여 있는데 지도에서도 이 같은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興海郡地圖와 그린 수법이 유사하여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읍치는 주변 지역과 비슷한 비율로 그려 특별히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북문과 동문을 표기하여 성곽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정도이다. 주변 지역에는 각 면 소속의 동리를 원내에 표기하였고 중심 마을에는 사창을 표시하였다. 지금의 구룡포인 士羅津 위쪽의 冬乙背串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목장의 경계와 牧場館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말 787필을 사육하고 있었다. 도로는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고, 교통의 결절을 형성하는 읍치의 下城里와 해안의 포구가 있는 滄洲洞에는 장시도 개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읍치의 남쪽 南川변에는 林藪가 그려져 있고, 해안가에는 봉수도 보인다.

  • 적량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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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량진도 赤梁鎭圖,赤梁鎭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에 있었던 水軍 僉使鎭으로 당시에는 晉州에 속해 있었다. 창선도는 只簇나루를 통해 남해와 연결되고 북쪽의 大芳나루를 통해서는 진주와 연결되는 해로의 요충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에는 만호진이었으나 1688년(숙종 14)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표현 양식은 미조항진, 평산진, 삼천진 지도와 매우 유사한데 동일 제작자에 의해 이들 진보의 지도들을 일괄적으로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창선도 지역 가운데 진이 있던 곳을 확대하여 부각시켰고 鎭城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을 상세히 그려 넣었다. 大芳山烽, 晉州角山烽 등의 봉수와 더불어 長串山에는 瞭望坮도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적량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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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량진도 赤梁鎭圖,赤梁鎭은 지금의 경남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에 있었던 水軍 僉使鎭으로 당시에는 晉州에 속해 있었다. 창선도는 只簇나루를 통해 남해와 연결되고 북쪽의 大芳나루를 통해서는 진주와 연결되는 해로의 요충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에는 만호진이었으나 1688년(숙종 14)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표현 양식은 미조항진, 평산진, 삼천진 지도와 매우 유사한데 동일 제작자에 의해 이들 진보의 지도들을 일괄적으로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창선도 지역 가운데 진이 있던 곳을 확대하여 부각시켰고 鎭城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을 상세히 그려 넣었다. 大芳山烽, 晉州角山烽 등의 봉수와 더불어 長串山에는 瞭望坮도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 전라좌도섬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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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좌도섬진진지도 全羅左道蟾津鎭地圖,섬진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었던 鎭이다. 1603년(선조 36)에 통영에서 都廳을 설치하고 募軍을 두었다. 그후 1705년(숙종 31)에 전라도 巡使 閔鎭遠과 巡撫使 權尙游, 統制使 吳重周 등이 이곳이 국방의 요충지가 됨을 장계하여 진을 설치하고 종8품의 別將을 두었는데 통영에서 관할하였다. 섬진진은 지리적으로는 전라도 광양현에 있으면서도 統制營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도도 전라도가 아닌 경상도 지도첩에 끼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살려 섬진진과 주변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산지의 경우는 연맥을 강조하기보다는 單山을 주로 그렸다. 그러나 鎭基는 풍수의 山圖처럼 산에서 뻗어 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독특하게 그렸다. 다른 지도와 달리 도로를 쌍선으로 그렸는데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특히 이 지도에서는 섬진강을 따라서 장시의 현저한 발달을 볼 수 있다. 영남과 호남의 접경에 있는 花開場,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岳陽洞의 장시, 그리고 하류 지역의 장시들인데 5일장이 아닌 10일장으로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섬진진이 설치되게 된 경위와 섬진진 바로 앞의 豆?場이 폐지되면서 생기는 경제적 기반의 상실, 그리고 인근 마을들이 진에서 이탈되면서 鎭勢가 조잔해진 당시의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 제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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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포진지도 薺浦鎭地圖,제포진은 지금의 경남 진해시 제덕동에 해당한다. 당시는 웅천현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본래 1398년(태조 7)에 右水營을 설치하였는데, 후에 창원의 合浦로 옮기게 되자 첨사를 두어 安骨, 蛇梁, 唐浦, 永登, 玉浦, 助羅浦, 平山浦, 赤梁鎭 등을 관할하게 하고 석성을 쌓았다. 그리고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와 더불어 1426년(세종 8) 개항하고 왜인들에게 교역을 허가했다. 이 때 남문밖에 倭館을 설치하여 교역과 倭使를 접대하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는 왜인 60명에 한하여 거류하도록 하였는데 점차 그 수가 늘어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결국 1510년(중종 5)에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安骨城으로 옮겼다가 1625년(인조 3)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萬戶를 두었다. 鎭의 치소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과 이 시기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砲手廳도 그려져 있고 船所에는 전선의 모습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鎭基의 동쪽으로는 과거 水營이 있던 곳도 표시되어 있으며 웅천현 읍치의 남쪽에는 場市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조라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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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라진지도 助羅鎭地圖,조라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 옥포진성 밖에 있었던 萬戶鎭이다. 본래 지금의 일운면 구조라리에 있었던 것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구조라포에 있을 때는 거제도 일곱 목장의 收稅上納을 관장했으나 이곳으로 옮긴 후에는 진주의 昌善島 목장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지도는 玉浦鎭地圖와 동일한 구도를 취하고 있으나 산지의 세부적인 표현 기법은 다르다. 성곽이 축조되어 있지 않았던 鎭基에는 東軒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고 당시 설치된 社倉도 보인다. 또한 해안에는 대원군 집권기에 砲手들이 入番했던 砲廳도 그려져 있다.

  • 조라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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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라포진지도 助羅浦鎭地圖,조라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 옥포진성 밖에 있었던 萬戶鎭이다. 본래 지금의 일운면 구조라리에 있었던 것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구조라포에 있을 때는 거제도 일곱 목장의 收稅上納을 관장했으나 이곳으로 옮긴 후에는 진주의 昌善島 목장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조라진에 대한 지도가 2장 있는데 다른 지도는 규10512 v.8-11이 그것이다. 두 지도는 같은 지역을 그렸지만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 지도는 다른 지도에 비해 산에 대한 묘사가 정밀하고, 색의 표현이 더 강하여 보다 산수화적인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鎭 안에는 본 지도가 다른 지도에 비해 使令廳 등이 더 있으며, 건물의 위치 표시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밖에 본 지도에는 다른 지도에 있는 고적에 대한 서술이 없다.

  • 조령진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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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령진산도 鳥嶺鎭山圖,조령진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위치한 중요한 關防이었다. 조선시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관방 가운데는 가장 중시되던 곳으로 서울에 동래까지 이어지던 영남대로도 이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의 방어를 소홀히 하여 왜군이 서울까지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관방으로서 조령이 지니는 중요성을 재인식한 조정은 세 관문으로 이곳을 정비하게 된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고, 영조 때에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守城將을 겸하였다. 1594(선조 27)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제2관문은 중성이라고도 하는데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이 성을 개축하였다. 제3관문은 새재 정상에 北敵을 막기 위해 선조때 쌓고 1708(속종 34)에 중건하였다. 지도는 제목에서 山圖라고 표기한 것처럼 풍수의 산도적인 양식으로 독특하게 그렸다. 조령의 來脈을 표시한 것과 水口의 關鎖를 그린 점 등이 풍수적인 환경인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대로상에 형성된 安富驛, 찰방역인 幽谷道, 그리고 조령진에는 草谷店도 보이고 있다. 조령진의 북쪽에는 영남 감사의 交印處였던 交龜亭도 그려져 있다.

  • 지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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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지도 知禮地圖,지례현은 지금의 경북 김천시 지례면, 증산면, 대덕면, 부항면, 구성면 일대로 읍치는 지례면 상부리에 있었다. 사면이 준령으로 둘러싸여 있고 甘川이 고을의 중심부를 흘러 나가고 있다. 산줄기는 청색, 하천은 흑색 담채를 사용하여 그렸다. 산줄기는 연맥을 강조하여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고 하천은 ‘水’라는 표시도 덧붙였다. 읍치 공간은 다소 확대시켜 그렸는데 각종의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렸다. 주변의 각면에는 일부 洞里의 이름도 표기하였다.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고 다리의 모습도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남면의 弓乙山에는 1660년(현종 1)에 淑明, 淑敬公主의 태를 봉안했던 胎峯이 표시되어 있다. 1609년 主簿 朴景淳과 士人 鄭升龍 등이 건립하여 후생을 강학했던 곳인 서면의 寒松亭과 李末丁이 건립한 芳草亭도 그려져 있다. 장시는 사방의 도로가 모여드는 읍치에 방형으로 부각시켜 표시하였다.

  • 지세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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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세진지도 知世鎭地圖,지세진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선창 부근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玉浦로 진을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지도는 지세진과 助羅浦舊鎭을 같이 그렸다. 助羅鎭은 구조라리 수정 마을 근처에 있었다. 본래 수군 萬戶를 두었는데 1604년(선조 37) 玉浦로 이전하면서 혁파된 것이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지세진을 그린 지도가 2장 있는데 다른 한 장이 거제지세진지도(규10512 v.8-10)이다. 본 지도는 거제지세진지도와 같은 지역을 그렸음에도 색채와 지형의 전체적인 윤곽 표현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명은 본 지도가 훨씬 자세하며, 지명의 표기 방법에서도 두 지도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거제지세진지도에는 鎭城 안에 각종 관아와 민가가 들어서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僉使舊城으로만 표시되어 있고 관아와 민가는 성밖에 그려져 있다. 이러한 두 지도의 비교를 통해 지도 작성자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같은 지역도 다르게 표현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진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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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지도 眞寶地圖,진보현은 지금의 경북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 일대로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지역에 있었다. 낙동정맥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현재는 임하댐의 건설로 인해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산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비교적 간략하게 그렸다. 산지는 읍치에서 바라보는 視點으로 그려 환포형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하천은 來去의 방향을 옆에 주기하였다. 읍치에는 객사, 향교 등만 간략하게 그렸고, 주변 지역에는 면과 소속의 주요 洞里를 표시하였는데 읍치로부터의 道里도 注記하였다. 고을의 鎭山인 南角山 밑은 과거 邑治였는데 동서남북의 창고가 한곳에 입지해 있는 점이 특이하다. 東面의 葦井山 밑에는 泉石이 표시되어 있는데, 절경을 지닌 곳으로 이곳에 있는 작은 못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 밖에 봉대, 사찰도 일부 표시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소략한 지도에 속한다.

  • 진주목장창선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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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장창선도지도 晋州牧場昌善島地圖,창선도는 지금의 경남 남해군 창선면 지역으로 당시에는 진주목에 속해 있었다. 창선도는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는데 隊芳山의 서쪽을 栗島라 하고 북쪽을 昌善, 동남쪽을 興善이라 했다. 당시 목장은 興善에 있었기 때문에 興善島牧場이라고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흥선현으로 현감을 두기도 했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목장을 설치하고 國馬를 방목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의하면 당시 말 470필이 사육되고 있었다. 이곳의 마정은 監牧官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경작과 折草, 사적인 우마 방목을 금지하기 위해 별도로 監官 2명을 두기도 했다. 지도는 창선도 일대를 비교적 소략하게 그렸는데 감목관 치소를 원으로 강조하여 표현했다. 말의 封進을 위해 點馬를 했던 點馬場도 부각되어 있으며 그 위쪽에는 매년 봄, 가을로 養馬祭를 지냈던 祭馬堂도 표시되어 있다. 또한 섬의 중앙부에는 장시도 볼 수 있는데 목장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해지면서 상업활동이 활발해져 가는 당시 도서지역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 진해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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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현지도 鎭海縣地圖,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진해시가 아니고 마산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동면 진동리에 있었다. 남해안에 위치한 작은 고을이어서 역사적으로 置廢를 거듭하였다. 1601년(선조 34)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고을이 너무 피폐하여 咸安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고, 1627년(인조 5)에 昌原에 편입되었다가 1629년에 다시 함안에 移屬되었는데 1639년 고을 사람들의 소청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던 것이다. 지도는 ?여지도서?나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한 구도를 지니고 있어서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쪽 艅航山을 비롯한 산지는 회화적 기법으로 세밀하게 그렸다. 둥근 성곽이 있는 읍치는 문루와 더불어 내부의 관아 건물과 민가도 그려 넣었다. 성곽은 둘레가 446척으로 읍성으로서는 매우 작은 규모이다. 남문의 앞에는 洋夷斥和碑를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특히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하천과 구분하기 위해 ‘道’라고 표기한 점이 이채롭다. 고을의 서쪽 禦邊亭은 당시 船所였는데 戰船도 그려져 있다. 倉浦里와 內浦里에는 二日場市와 七日場市가 표시되었는데 보통의 5일장과는 달리 10일장으로 개설된 점이 특이하다. 읍치의 동쪽과 서쪽의 하천변에는 숲도 잘 가꿔져 있음을 볼 수 있다.

  • 창령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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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령지도 昌寧地圖,창녕현은 지금의 경남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 성산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일대로 읍치는 창녕읍 교상리에 있었다. 서남쪽으로는 낙동강이 감싸돌고 동쪽으로는 산세가 제법 장대한 火旺山이 버티고 있다. 지도에도 고을의 鎭山인 화왕산을 크게 강조하여 기골이 웅장하게 묘사하였다. 전반적인 지도의 양식과 표현기법이 玄風地圖와 같아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읍치는 붉은 색의 원으로 부각시켰고 옆에는 객사와 진창, 사창, 남창, 북창 등의 창고를 집중적으로 그려 놓았다. 주변 지역에는 노란색의 원에 면만을 표기하고 소속의 마을은 빠져 있다. 그러나 면 단위로 설치된 사창은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표시되고 있다. 화왕산에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들어가 싸웠던 화왕산성이 그려져 있는데 성문과 더불어 龍潭도 눈에 띈다. 용담은 화산의 분화구라고도 하는데 昌寧曺氏 得姓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읍치의 內市, 북쪽의 大見市 등의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지도에서는 龍湖, 木浦, 沙浦, 牛浦 등의 습지가 湖沼처럼 표시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 지역은 남한 최대 규모의 내륙습지로서 1998년 람사협약에 등록되기도 했다.

  • 천성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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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성진도 天城鎭圖,천성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의 천성동 일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熊川縣에 속해 있었다. 1544년(중종 39)에 진을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함락된 후 安骨城으로 옮겼다가 1656년(효종 7)에 다시 이곳으로 移設하여 水軍 萬戶로 수비케 하였다. 이 지도는 加德鎭圖와 표현 기법이 유사하여 같은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천성진의 좌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까닭에 동쪽을 상단으로 잡아 그렸다. 천성진이 크게 확대되어 중앙에 그려져 있는데 성곽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상세하고 당시 해변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되는 砲手廳도 눈에 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는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산지는 조감도식으로 그려 봉우리들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일부에는 수목까지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인근 지역까지의 道里를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 청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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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지도 淸道地圖,청도군은 지금의 경북 청도군 일대로 읍치는 청도읍에 있지 않고 화양읍 동상리, 서상리 지역에 있었다. 淸道는 산천이 淸麗하고 大道가 사방으로 통하는 까닭에 이름 지어진 것이다.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다양한 정보들이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 산천은 청색의 담채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외곽을 환포형의 산지로 그려 구분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鰲山인데 자루모양으로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읍성이 있는 읍치 공간을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켰는데, 동헌, 객사, 군기 등의 관청 건물과 읍성 밖에는 三壇一廟인 사직, 성황, 여단, 향교를 집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은 임란 이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인데 이곳이 동래에서 올라오는 直路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사창도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고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주기하였다.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으며 당시 13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던 省峴道 察訪驛과 남쪽의 楡川驛館 등도 도로 옆에 표시되어 있다. 길을 따라 孔巖?口, 佛巖?口, 趙坪?口 등의 험로도 표시되어 있다. 또한 동북쪽의 東倉場, 大川場, 省峴道 옆의 省峴場, 서남쪽의 九佐場, 읍치의 邑場 등의 장시가 비교적 많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군사적 내용으로는 봉수대가 성첩과 같은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고, 雲門山의 地龍山城, 中南面의 烏惠山城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 정자, 기우단 등도 수록되어 있다.

  • 청송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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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지도 靑松地圖,청송부는 지금의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부남면, 현동면, 현서면, 안덕면 일대로 읍치는 청송읍 송생리, 월막리 지역에 있었다. 청송은 낙동강 동쪽에서 밑으로 내려 뻗은 낙동정맥의 서편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로 낙동강의 지류인 지금의 용천천이 관내를 흘러 나가고 있다. 북쪽에 있는 放光山이 고을의 진산이 되는데, 읍치는 이 산밑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삼았다. 산지는 환포형으로 그리면서도 연맥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지금의 주왕산이라 불리는 周房山에는 鶴巢臺, 남쪽의 屛巖에는 旅軒 張顯光이 遊憩했던 데서 연유한 旅軒臺, 그리고 남천가에는 賢妃岩, 龍汀岩 등의 기암절벽도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쪽에는 松生古縣이 표시되어 있는데, 청송은 松生縣을 합속하여 세조 때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동남쪽의 安德古縣은 청송의 屬縣으로 세종 때 來屬되었다. 읍치 남쪽 普門寺 옆에는 高麗國文林郞衛尉丞沈弘孚의 묘가 ‘沈墓’로 표시되어 있다. 沈弘孚는 세종의 왕비 昭憲王后와 명종의 왕비인 仁順王后의 遠祖였다. 다른 지도와 달리 도로가 표시되지 않고 읍치로부터의 거리만이 注記되었다. 府南面의 涑水場, 縣東面의 川邊場, 縣西面의 和日場 등의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 청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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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하지도 淸河地圖,청하현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청하면, 송라면 일대로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동해 바다를 연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의 산줄기가 연이어 있는 작은 고을이다. 전체적으로 산줄기의 맥세를 강하게 부각시켜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고을의 진산인 呼鶴山에서 뻗어 내린 자락에 읍치가 이루어져 있는데 황색의 원내에 ‘邑’을 표기했을 뿐 관청의 건물들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원래 읍치에는 1427년(세종 9)에 현감 閔寅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성곽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유실되었는데 지도에서도 東門里라는 지명만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는 찰방역인 松羅道도 크게 표시되어 있다. 동쪽 해안의 介浦에는 ‘古萬戶基’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찍이 이곳에 만호진을 두었으나 海門이 광활하여 항상 風患이 있었기 때문에 영일현 지경의 通洋浦로 이설하였다. 장시도 볼 수 있는데 읍장시와 館洞場市, 그리고 外三洞의 장시가 보인다. 관동장시는 원래 외삼동에서 3?8일장으로 개시되었는데 당시 8日市만을 館洞으로 移設했던 것이다. 관내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흑색의 쌍선으로 그렸는데 대로와 소로로 구분하였다.

  • 초계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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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계군지도 草溪郡地圖,초계군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 쌍책면, 청덕면, 적중면, 덕곡면 일대로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에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나 안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분지형의 지역이다. 사방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여덟 갈래가 되는데 이들이 黃芚江으로 합쳐지고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 나간다. 산지는 환포형으로 그려 연맥을 강조하였다. 고을의 주산인 丹鳳山 밑에는 향교, 객사, 아사를 비롯한 각종의 관아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그려 부각시켰다. 주변 지역에는 面名과 사창만을 표시하고 소속 마을은 수록하지 않았다. 읍치의 전면에는 넓은 뜰이 펼쳐져 있는데 동서 20리, 남북 10리로 주기되어 있다. 교통의 요지인 읍치와 魚鹽을 실은 배가 모여들던 낙동강변의 三鶴津 부근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남쪽 彌陀山의 봉수대, 留鶴寺 등이 표시된 정도로 다소 소략한 지도이다.

  • 칠곡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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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지도 漆谷地圖,칠곡부는 지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가산면, 지천면 일대와 대구광역시 북구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당시 칠곡의 읍치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칠곡은 고려 현종 때 星州에 합속되어 내려오다가 조선시대 1640년(인조 18) 架山에 성을 쌓고 漆谷都護府를 두어 군위, 의흥, 하양, 신녕 등의 네 고을을 架山鎭管 소속으로 삼았다. 그후 1819년 경상도 암행어사의 장계로 인해 八?面으로 읍치를 옮기고 산성에는 別將을 두었다. 가산산성은 팔공산에 위치한 천험의 요새로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 때 경상감사 李命雄의 장계로 축성한 것인데 낙동강 건너 선산에 金烏山城과 더불어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던 중요한 산성이었다. 내성, 중성, 외성의 삼중 구조를 지닌 가산성은 거의 100여년에 걸쳐 축성되었다. 당시로는 큰 役事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축성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도는 이 같은 지역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산성이나 읍치의 모습을 그린 솜씨가 정교하다. 가산산성의 각종 기암절벽, 수목, 성첩과 문루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내성이 축조된 북쪽에는 架巖과 穴泉이 그려져 있는데, 혈천은 신라 때 道詵이 地氣를 잡기 위해 鐵馬鐵牛를 넣고 묻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구멍이다. 산성 내부에는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연못과 우물도 상세히 표시하였다. 옹성 구조로 된 외성의 남문 앞에는 수구막이 역할을 하도록 인공으로 만든 造山도 그려져 있다. 산성 밑의 읍치는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변에 위치해 있는데 관청 건물을 비롯하여 민가도 빽빽하게 그려 놓았다. 특히 읍치 앞의 길가에는 洋夷碑閣도 뚜렷하게 그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 고을은 영남로의 길목에 위치한 연유로 장시의 발달도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데 읍치와 上枝面, 巴彌面 심지어 외성 안에도 장시가 개설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외성 남쪽에는 塼塔으로 유명한 松林寺, 上枝面에는 신라 鳳城君의 태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胎峰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 칠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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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지도 漆原地圖,칠원현은 지금의 경남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 일대와 칠원의 월경지였던 지금의 마산시 구산면 일대를 포괄한다.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북쪽은 낙동강에 연해 있는 저지대이고 남쪽으로 고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지도는 남쪽을 위쪽으로 잡아 배치하였기 때문에 남해안이 북쪽, 낙동강이 남쪽에 그려져 있다. 낙동강은 昌原江, 靈山江, 咸安江 등으로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표기된 점이 이채롭다. 남쪽 해안의 월경지인 구산면 사이에는 창원이 위치해 있는데 지도에서는 창원의 地境을 경계로 표시하여 구분해주고 있다. 산봉우리의 모습을 그려 산지를 표현하였는데 봉우리가 향하는 방향은 제각각이어서 특별한 원칙은 없어 보인다. 하천과 바다에는 곡선으로 물결의 흐름을 표시하여 회화적 수법도 가미하였다. 성곽이 그려진 읍치에는 관청 건물을 생략하여 그리지 않았다. 주변 지역에는 사창을 주로 표시하였고 면 소속의 마을은 거의 기재하지 않아 소략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이 지도에는 열녀, 효자 등의 旌閭閣이 자세히 수록된 점이 특징적이다. 읍치 남쪽에는 愼齋 周世鵬을 배향한 德淵書院이 1871년에 훼철된 사실도 반영되어 있다.

  • 통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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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지도 統營地圖,통영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문화동, 태평동 일원에 있었던 水軍統制使營으로 조선후기 수군의 총본영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시 이순신 장군이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쳐 통제사를 제수받은 것이 시초이다.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는데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전란 후 여러 곳을 옮겨다녔는데, 거제도 烏兒浦, 고성현 春元浦 등지를 거치다가 1601년(선조 34) 體察使 李德馨의 장계로 1604년(선조 37) 統制使 李慶濬의 지휘 아래 고성현 頭龍浦로 옮기게 되었다. 그후 1678년(숙종 4) 尹天賚 통제사 때에 營門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 지도는 1872년 제작된 경상도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三千鎭地圖와 함께 따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지만 표현 양식,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1872년 군현지도 제작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巨濟?固城?泗川?南海에 이르는 지역을 회화식으로 그렸는데 특히 조감도식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역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밀하게 그린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교한 솜씨로 보아 전문 화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통영에서는 畵師軍官 한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지도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우선 산천, 바다, 도서 등의 자연적인 지형이 산수화풍으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회화식 지도에서 나타나는 방위의 혼란이 이 지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즉, 산의 봉우리를 지도의 상단인 북쪽을 향하게 그리고 조감도식으로 위에서 사선적으로 투시함으로써 일관된 방위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축척에 있어서 중심부와 주변부에 차별적인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중심 공간인 통영이 상당히 부각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강한 집중력을 유발시키고 있다. 통제사영이 있는 성곽 내부 공간은 다양한 관아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는데 객사인 洗兵館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안과 성밖에는 지붕 모양을 빽빽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촌락의 밀도를 표현하고 있다. 바다의 포구에는 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각종의 전선과 더불어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米廛이 들어선 해안가에는 帆船도 그려져 있다. 이 시기 통영이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 활동의 요지로도 부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수가 있는 海口에는 柵門과 같은 것이 그려진 점도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통영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주는 지도이다.

  • 통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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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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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진지도 浦項鎭地圖,포항진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항구동 일대에 있었던 僉使鎭이다. 1731년 경상도 관찰사 趙顯命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倉鎭을 설치하고 종9품의 別將 1명을 두었다. 이 시기 포항진은 영일을 비롯하여 인근의 흥해, 청하, 장기의 세곡 수송을 담당하는 漕倉과 군사적인 鎭의 기능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해수의 작용으로 인해 진의 부지가 축소되었고 진의 위치상 인근 고을과의 道里가 고르지 못하여 세곡 수송에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1784년(정조 8)에 포항창진은 폐지되어 영일 지역의 ??倉으로 규모가 축소된 채 운영되었다. 그러던 중 경상감사 金世鎬가 浦項津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의 도회지만 別將이 혁파된 뒤 주민이 離散하여 변경의 형편이 허술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鎭將의 復設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1870년(고종 7)에 포항진의 설치를 결정하고 水軍 僉使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포항진은 세곡 수송을 주된 업무로 했던 전시기와는 달리 해안 방어라는 군사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었다. 지도는 새로 설치된 포항진의 모습을 회화적 수법으로 묘사하였다. 특히 산지의 모습은 흡사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인 포항에는 배도 그려져 있는데 전선이 아닌 帆船으로 그려진 점이 눈길을 끈다. 상업활동이 활발한 포구의 특성으로 인해 많은 바다 배들이 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지 鎭基의 위쪽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해안가에는 비석이 그려져 있는데 대원군 집권기에 세워졌던 척화비로 보인다.

  • 풍기군팔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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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군팔면지도 豊基郡八面地圖,풍기군은 지금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안정면, 봉현면과 예천군 상리면, 하리면 일대로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에 있었다.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접경 지역에 있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는 山圖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다. 북서쪽의 竹嶺山과 찰방역이었던 昌樂道 일대는 順興의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공간은 주변 지역과 비슷한 축척으로 그렸는데 관아 건물을 그리지 않고 사직단, 여제단, 향교, 창고만을 표시하였다. 주변지역에는 面과 면 소속의 마을들을 비교적 상세히 수록하였고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注記하였다. 서쪽의 鳴鳳山에는 景慕宮胎室과 文宗大王胎室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문종의 태실이 屬縣이었던 殷豊縣에 봉안되자 은풍현과 당시 基川縣을 합하여 고을 이름을 豊基라 하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경모궁태실은 1735년에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태를 봉안한 것이다. 읍치와 과거 은풍현의 중심지에는 장시가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읍치의 북쪽 後川가에는 명종 때의 문관인 黃俊良이 소요하던 錦仙亭도 그려져 있다. 아울러 읍치의 남쪽 하천변에는 인공림인 植松도 보인다.

  • 하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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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현지도 河陽縣地圖,하양현은 지금의 경북 경산시 하양읍, 와촌면, 진량면 일대로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지역에 있었다. 1871년의 ?영남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내용과 모양이 유사하여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단지 사창이 첨가된 점이 다르다. 지도는 읍지의 附圖 형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매우 소략하다. 산지와 하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산은 연맥을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하나씩 그렸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객사, 사창, 향교 등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는 面만을 배치하였을 뿐 소속 마을은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環城寺, 元曉菴, 佛窟寺, ?本菴 등의 사찰은 건물 모습과 함께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琴湖江변에 있는 匙山烽燧 정도가 표현되어 있다.

  • 함안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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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군지도 咸安郡地圖,함안군은 지금의 경남 함안군 함안면, 가야읍, 여항면, 군북면, 법수면, 대산면, 산인면 일대로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다. 함안은 6가야중 阿羅伽倻國이 있었던 곳으로, 신라 법흥왕 때 멸망하였다. 지도는 다른 군현과는 달리 남쪽을 위쪽으로 배치하여 그려졌다. 북쪽으로는 南江에 연해 있어서 평야가 발달하고 남쪽으로 艅航山, 匡廬山 등의 산으로 고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고을의 진산인 여항산과 읍치의 坐向을 고려하여 지도의 구도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에는 관청 건물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고 洋夷斥和碑만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 면과 소속 마을들을 표시해 놓았다. 현재의 가야읍에 해당하는 山外面에는 大坪이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가야벌을 말한다. 이곳은 가야국 시절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관내에서 토지가 가장 비옥한 곳으로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주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굵기를 달리하여 대로와 소로를 나타내었다. 장시는 邑市와 內代山面의 平林市, 安道面의 郡北市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도로변을 따라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북쪽에는 執義 趙參이 세웠던 無盡亭과 북쪽의 合江亭, 岳陽樓 그리고 향교 옆에는 군수 張齋斗가 창건한 養士齋도 표시되어 있다.

  • 함양군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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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지지도 咸陽郡之地圖,함양군은 지금의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전면, 병곡면, 지곡면, 소동면, 유림면, 휴천면, 마천면 일대로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원에 있었다. 八良嶺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 운봉현과 접하고 있다. 산지의 표현은 峰巒을 연결시켜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다. 읍치는 크게 그려 부각시키지 않고 주변 지역과 비슷한 비율로 그렸다. 원래 읍치는 동쪽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으로 관아가 불에 타버리자 1380년 文筆峯 아래로 옮기고 토성을 쌓았다. 이후 1729년(영조 5) 府使 金洗가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 동리도 비교적 상세히 표시하였다. 당시 각 면별로 설치되는 社倉을 비롯하여 義倉, 任倉, 德倉, 東倉, 西倉, 南倉 등의 창고도 해당 위치에 기재되어 있다. 찰방역인 沙近道가 있었던 사근면에는 古山城이 성첩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산성은 1400년 監務 張?哲이 성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왜구에 의해 함락된 이후 거의 피폐해졌는데, 성종 때 다시 수축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관리가 안되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이 지역도 읍내장을 비롯하여 沙近場, 玉女場, 介坪場 등의 정기시가 개시되어 있다. 읍치 동쪽 ?溪에는 1552년(명종 7)에 姜翼이 창건한 ?溪書院이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함창현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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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현여지도 咸昌縣輿地圖,함창현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 함창읍, 공검면, 이안면 일대로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에 있었다. 함창은 면적으로는 작은 고을이지만 교통의 요충지로서 물자나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과거 낙동강 연안에 형성된 6가야 중의 하나인 古寧伽倻國으로 지도에서도 당시 시조의 묘라 전해지는 왕과 왕비의 묘가 표시되어 있다. 산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그렸는데 산줄기는 맥세를 강조하여 다소 거칠게 표현하였다. 특히 이 지도에는 제언의 표시가 자세한데, 삼한시대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恭儉湖는 크게 표시되었다. 공검지는 현재 공검면 양정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려 명종 때 司錄 崔正汾이 옛터대로 다시 수축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토사가 쌓이고 매립되면서 면적이 계속 줄어들었는데 1964년에 이르러는 2천여평 정도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4천여평으로 확장하였다. 고을의 동쪽 德通驛을 지나는 도로가 당시 영남대로였는데 尙州 洛東驛으로 이어진다. 영남로변에 위치한 孤山에는 1604년에 왕자의 태를 봉안한 胎封이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縣內面의 舊鄕場, 남면의 下赤之場 등의 장시를 통해 당시 상업적인 양상도 엿볼 수 있다.

  • 합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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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군지도 陜川郡地圖,합천군은 지금의 경남 합천군 합천읍,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용주면, 대양면, 율곡면 일대로 비교적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다. 당시의 읍치는 지금의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산지는 회화적 수법으로 세밀하게 그렸는데 남쪽에는 수목의 모습도 보인다. 고을의 진산인 北山은 邑主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관청 건물과 향교의 모습을 그려 넣었고 京都?巡營?兵營?統營까지의 거리를 注記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각면을 표시하였는데 옆에는 戶數도 기재한 점이 독특하다. 당시 상업적 면모를 보여주는 장시는 邑場, 陶沃場, 冶爐場 등으로 도로변에 형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누정, 비석 등 문화적 요소들이 상세하게 수록된 점이 특징적이다. 上北面에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駐鶴亭이 표시되어 있고, 崇山面 志同巖 아래에는 金宏弼과 鄭汝昌이 遊憩했던 詠歸亭이 그려져 있다. 최치원은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고적이 많이 표시되어 있는데 題時石, 學士臺 등이 그것이다. 般若寺舊址의 고려 元景和尙碑, 海印寺의 四溟大師事蹟碑, 읍치 남쪽의 戊申平亂事蹟碑 등의 비석도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장군 允忠이 大耶城을 공격하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충신 竹竹의 비각도 그려져 있다. 龍洲面에는 임진왜란 시 왜적이 고을로 침입해 오자 鄕人 權玉剛이 공자의 位版을 봉안했는데, 그곳이 孔子巖으로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 현풍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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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풍지도 玄風地圖,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구지면, 유가면, 논공읍 일대로 읍치는 현풍면 부리에 있었다. 동쪽은 琵瑟山을 비롯한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은 낙동강을 낀 저지 평야가 펼쳐진 비교적 조그만 고을이다. 동쪽 방향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한 점이 독특하다. 읍치인 縣內面에는 객사, 향교 등과 더불어 大同倉, 賑倉, 邑倉, 社倉 등의 창고가 상세히 그려져 있어서 지도제작의 목적이 지방 재정의 파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주변 지역은 면만을 표시하여 소략한 느낌을 준다. 郭再祐가 정유왜란 때 쌓은 石門山城을 비롯하여 水門山城, 草谷山城 등의 산성도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서쪽의 낙동강변에는 道東書院이 그려져 있는데, 1604년(선조 37) 건립되어 寒喧堂 金宏弼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지만 지도에는 여전히 표시되어 변화된 상황이 제대로 반영이 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로를 따라 龜川市, 車川市 등의 정기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흥해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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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해군지도 興海郡地圖,흥해군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로 읍치는 성내리에 있었다. 영일만 위쪽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중앙부에는 曲江이 동해로 흘러 나가고 있다. 주변을 둘러싸는 산지의 모습이 회화적으로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읍치 공간은 확대하지 않고 주변 지역과 비슷한 축척으로 그렸다. 읍치에는 둥근 형태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단지 남문과 북문만을 표시하였다. 예로부터 왜적의 침입이 잦아 주민이 안정되지 않자 성곽을 축조하여 이에 대비케 한 것이다. 주위가 1,493尺으로 읍성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에 해당한다. 주변의 지역에는 각 면 소속의 마을을 원 안에 표기하여 해당위치에 배치하였다. 도로는 황색으로 채색하였는데 대로와 소로로 구분하였다.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지점인 余川里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동남쪽 해안의 豆毛浦와 동북쪽의 漆浦에는 과거 萬戶鎭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東萊로 옮겨 지도에는 터만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는 北川藪라는 林藪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郡守 李得江이 수재를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동쪽 南川가에는 書院里가 있는데 이는 晦齋 李彦迪을 배향했던 曲江書院이 있던 곳이다. 당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어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 ▶전라도
  • 강진신지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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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신지도진지도 康津新智島鎭地圖, 신지도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완도군 신지면에 해당하며 완도의 동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강진군에 속해 있었으며 원래 사복시 관할의 목장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681년(숙종 7)에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므로 萬戶鎭을 설치하였다. 지도는 북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시점을 취하여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인근의 완도나 청산도는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표시되었기 때문에 작게 축소되어 그려졌다. 관아가 있던 곳은 산지를 환포형으로 둥글게 그려 부각시켰다. 객사, 동헌을 비롯한 각종의 관청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해안에는 전선, 병선, 사후선, 진선 등 각종 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완도로 통하는 길목인 長項串의 나루터에는 店이 그려져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동쪽 지역에는 이 지역의 관방처로서 墩臺도 그려져 있다. 그 옆의 만입된 곳에는 鳴沙場이라는 모래사장도 그려져 있다.

  • 강진현고금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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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현고금도진지도 康津縣古今島鎭地圖, 전라도 康津縣에 있던 古今島鎭을 그린 지도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완도군 고금면에 해당한다. 고금도진은 1598년(선조 31)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募民屯耕하면서 왜선을 격파했고 明將 陳璘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군을 제압하는데 일조를 하여 명나라까지 알려졌던 곳이다. 1681년(숙종 7) 이곳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임이 인정되어 진을 설치하고 水軍同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표현 양식을 보면 회화적 수법을 가미하였는데, 녹색의 농담을 살려 산세의 입체감을 나타냈다. 주변 섬의 모습은 정면으로 투시한 산을 그려 나타냈다. 진의 중심에는 각 관청 건물의 배치와 船所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주변의 동?서?남?북면에는 소속 촌?리를 색채를 달리하여 표시하였다. 방위는 지도의 위쪽이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된 점이 독특하다. 또한 진의 중심을 기준으로 해서 동서로 산의 방향이 서로 반대로 되어 있다. 이는 회화적인 수법을 가미한 지도에서 많이 보이는 것으로 여러 방향에서 투시함으로써 지역의 모습을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고금도진의 간략한 建置沿革과 군사?행정적으로 중요한 관련을 지니는 지역인 康津縣?全羅左右水營?兵營?京城까지의 里數가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 강진현마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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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현마도진지도 康津縣馬島鎭地圖, 마도진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에 위치했던 수군 만호진이다. 마도진은 원래 강진현 백도면 완도의 북쪽에 있었으나 선박처로서 불편하다 하여 대구면 마량으로 옮긴 것이다. 남쪽 고금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가에 위치하여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지도는 마도진성과 주변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진성은 보통의 성문과는 달리 남북으로 통하게만 만들어 동문과 서문이 없다. 북문과 남문을 통하는 길을 굵게, 그 밖의 도로는 가늘게 그려 대로와 소로로 구분하였다. 성안에는 홍살문의 표시와 더불어 객사, 동헌 등의 관청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해안의 船所에는 각종의 배가 그려져 있고 고금도 사이의 바다에는 경상도 三倉의 조운선을 호송하는 곳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마도진의 연혁과 주변지역과의 거리를 주기하였다. 그러나 주기에는 진이 설치된 구체적인 연도가 없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이곳의 전선이 경상도 노량으로 싸움을 나간 틈을 타 왜선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文蹟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 강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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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현지도 康津縣地圖, 강진현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금의 전남 강진군 강진읍, 군동면, 대구면, 도암면, 병영면, 성전면, 옴천면, 작천면, 칠량면과 완도군 완도읍, 고금면, 약산면, 신지면, 청산면, 군외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서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에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하여 만들었는데 탐진현의 치소에 읍치를 두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영이 들어서 있었다. 지도에도 읍성과 위쪽 병영의 성곽이 그려져 있다. 병영의 동북쪽에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피난했던 修仁山城도 보인다. 지도에는 읍치뿐만 아니라 주변의 면과 소속되어 있는 마을들이 색채를 달리하여 상세하게 표시되었다. 고을의 해안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한 많은 군사기지들을 볼 수 있는데, 馬島鎭, 靑山鎭, 加里鎭과 더불어 薪智鎭, 古今鎭 등이 그것이다. 특히 도서 지방에는 배가 다닐 때 참고하기 위해 수심도 표기해 넣었다. 아울러 봉수도 붉은 색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옆에는 조응관계도 주기하였다. 대로변에는 店幕과 장시까지도 표시되어 상업 유통의 일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금진의 동쪽에는 임진왜란 때 중국의 關羽를 모시기 위해 세웠던 關王廟도 보이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강진현의 연혁과 읍성의 개축 사실을 적어 놓았다.

  • 고부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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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군지도 古阜郡地圖, 고부군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부군은 전라도의 동진강 유역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정읍, 서로는 흥덕과 연결된다. 평지에 우뚝 솟아 일명 瀛洲山이라 불리는 斗升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고, 고을의 서쪽을 감싸 돌아나가는 고부천과 동쪽을 돌아 나가는 정읍천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潮水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는 수심도 표시하였다. 멀리 있는 산지는 청색을 사용하여 원근을 구분하기도 했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원형으로 그려진 獄의 모습이 이채롭다. 특히 향촌의 양반이 수령을 보좌하던 기관인 향청의 모습이 다른 고을과 달리 倉庫와 같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 마을명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원래는 富安鄕이었는데 지도에는 거리감이 없이 바로 인접한 지역으로 그려져 있다. 주변의 면 지역에는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된 사창의 모습도 보인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도로변에 들어선 점막과 장시도 다수 볼 수 있다.

  • 고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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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현지도 高山縣地圖,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고산은 지리산 북쪽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계룡산 쪽으로 뻗어 가는 錦南正脈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유역권으로는 동진강 유역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읍치 공간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표현되었는데, 동헌?객사 등의 주요 건물과 더불어 수령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冊室, 及唱이 머물던 吸唱廳이 동헌 옆에 그려져 있다.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 촌명이 색채를 다르게 하여 표시되어 있다. 북쪽 雲梯山 아래는 雲梯廢縣이 있던 곳으로 雲梯라는 촌명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산지는 녹색을 사용하여 환포형으로 그렸는데 암벽의 모습도 부각시켰다. 인문적 요소로는 무엇보다 사찰이 상세하게 그려졌는데, 용계원 서쪽의 花岩寺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절로 檀香木으로도 유명하다. 읍치에는 밀집된 가옥을 그려 장터를 표시했고, 남쪽의 대로변에는 延鳳店이라는 점막도 보인다.

  • 고창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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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현지도 高敞縣地圖, 고창현은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부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정읍, 아래로는 영암과 연결된다. 지도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흡사 꽃이 피는 모습으로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의 半登山인데 신라 말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도적이 웅거하기도 했다. 지도는 고창천이 흘러나가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창천의 하류는 조수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밀물 때는 수심이 7尺5寸이고 썰물 때는 3尺5寸이라 기록되어 있다. 읍성은 보통의 고을과는 달리 산사면에 위치해 있어 방어적 기능이 강조되어 있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과거 고창의 지명이 牟陽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석성이며 둘레가 3,080尺, 높이가 12尺, 내부에 못이 2군데 샘이 네 곳 있었다. 이 읍성은 현재에도 잘 남아 있으며 성안의 일부 주요 관청 건물도 복원되어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북문에는 장시가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전면에는 대원군 집정기 砲軍의 증설과 관련된 火砲廳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고을의 간단한 연혁과 주요 지역과의 거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 곡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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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현지도 谷城縣地圖, 곡성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곡성읍 읍내리에 있었다. 곡성은 지리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로, 읍치의 뒤편으로 動樂山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섬진강의 지류인 ?子江이 유유히 고을을 감싸며 돌아나간다.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치에는 당시 존재했던 각종의 관청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文廟가 있던 향교(지도상에는 校宮)에는 뒤편의 산을 환포형으로 그려 신성함을 표현해 주고 있다. 관청 건물 중에서는 감옥인 刑獄이 장시가 있는 저자거리 전면에 위치해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를 그려 격리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특히 산봉우리의 방향이 지도의 상단과 하단이 반대로 되어 있는데, 회화식 지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는 내부의 氣韻을 중시하는 동양의 산수화적 전통에 기인하는 것으로 지역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드러내 주는 효과가 있다. 竹谷面의 남쪽 鳳頭山 밑에는 孝寧大君의 影臺가 위치해 있고, 그 옆에는 고려초기 대찰이었던 泰安寺가 그려져 있다. 태안사는 九山禪門의 하나인 桐裏山派의 중심 사찰로 慧徹國師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사찰의 건물과 더불어 부도탑도 그려 부각시켜 놓았다.

  • 광양현섬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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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현섬진진지도 光陽縣蟾津鎭地圖, 섬진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었던 鎭이다. 섬진강 하류 영남과 호남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서 1603년(선조 36)에 통영에서 都廳을 설치하고 募軍을 두었다. 그 후 1705년(숙종 31)에 전라도 巡使 閔鎭遠과 巡撫使 權尙游, 統制使 吳重周 등이 이곳이 국방의 요충지가 됨을 장계하여 진을 설치하고, 종8품의 別將을 두어 통영에서 관할케 하였다. 지도는 산줄기가 뻗어오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회화적 기법을 살려 섬진진과 주변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산지의 경우 섬진강을 경계로 봉우리의 방향이 다르다. 鎭基는 풍수의 山圖처럼 산에서 뻗어 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독특하게 부각시켰다. 진기에는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고 그 앞의 선소에는 防船과 津夫船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진부선의 경우 뗏목과 비슷하게 그려진 점이 독특하다. 섬진강을 따라 장시의 현저한 발달도 볼 수 있다. 영남과 호남의 접경에 있는 花開場,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岳陽洞의 장시, 그리고 하류 지역의 장시들인데 5일장이 아닌 10일장으로 분화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상단의 여백에는 섬진진의 연혁을 수록하였다.

  • 광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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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현지도 光陽縣地圖, 광양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섬진강이 감싸도는 풍광이 수려한 고을로 땅은 남해에서 끝나고 산은 지리산을 연하고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회화식을 가미하여 고을의 모습을 수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켜 성곽과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려 넣었다. 성곽 내에는 수령의 집무처인 衙舍와 殿牌와 闕牌를 모셔둔 客舍가 강조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서 일종의 사설 숙박시설인 店幕이 다수 형성된 것도 엿볼 수 있다. 읍성의 외곽에는 토지와 곡식신에 제사를 지냈던 社稷壇,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에 제사를 지냈던 ?祭壇,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城隍堂이 그려져 있으며 문묘가 있던 향교도 부각되어 표현되었다. 또한 읍치의 북쪽 白鷄山 밑에는 우리 나라 풍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道詵이 기거했던 玉龍寺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탑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성 밖의 하천을 끼고 西藪와 南藪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裨補林에 해당한다. 당시 서쪽 방향과 남쪽 방향이 풍수적으로 虛한 곳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공림을 조성하여 허한 기운을 보충했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와 더불어 실지 하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실용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 지역의 草南里에는 봉화대를 붉은 불꽃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옆에는 붕수지기의 집도 그린 점이 이채롭다. 동쪽의 玉谷面과 성안에는 장시가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성안 구석에는 감옥을 원 모양으로 독특하게 표현하여 격리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 광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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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지도 光州地圖, 광주목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와 담양군 대전면 가운데 행성리?성산리?갑향리를 제외한 전지역, 담양군 수북면 두정리?궁산리?주평리 3개리, 신안군 하의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옛 성내면 지역으로 지금의 광주시 동구 광산동, 궁동, 금남로 1,2가, 장동, 충장로 1,2,3,4,5가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흡사 한 송이의 꽃이 활짝 핀 모습으로 산봉우리를 그리고, 가운데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邑治를 배치하였다. 현대 지도와는 다르게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고을의 鎭山인 무등산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등산의 3대 石臺라 불리는 瑞石, 立石, 廣石臺의 수려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무등산 유일의 폭포인 용추폭포가 부서지는 포말과 함께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읍성의 내부에는 衙舍와 客舍를 비롯한 각종의 관청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읍성의 북쪽에는 저수지 역할을 했던 金橋防築이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고 하천 변에는 범람 방지를 위해 인공으로 조성한 버드나무 숲도 보인다. 읍치 동편에 위치한 景陽驛은 여섯 개의 屬驛을 거니린 察訪驛이었는데 지도에도 여러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다. 광주는 양반들이 세거했던 큰 고을이어서 서원들이 여럿 있었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거의 없어지고 서쪽의 褒忠祠만 남아 있다. 포충사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했던 서원이었다.

  • 구례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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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현지도 求禮縣地圖,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 부분, 토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구례읍 鳳東里 일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웅장한 지리산이 포진해 있고 섬진강의 푸른 물이 서남쪽을 감돌아 나가는 고을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를 둘러싼 산의 모습은 중심에서 조망하여 입체감을 살리는 회화적 수법을 사용하였다. 고을의 主山은 鳳性山인데 나는 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과 같다고 옆에 注記되어 있다.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城堞을 흰색으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성안에는 殿牌를 奉安했던 객사 건물인 鳳城館이 부각되어 있고, 수령이 집무하던 東軒을 비롯한 다른 건물들도 상세하다. 특히 성 안의 사방 외곽에 논을 그려 놓은 점이 독특하다. 성내의 장시와 더불어 북문 위로는 대촌이 형성되었음도 주목된다. 현내의 面?里, 村?洞 이름이 상세하고 각 村里는 가옥의 지붕을 3-5개씩 그려 기호적으로 표현하였다. 社倉?坪?樓亭?寺刹?堂 등의 인문적 요소들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진 반면, 烽臺?山城?鎭堡 등과 같은 관방과 관련된 요소가 없는 것으로 보아 군사적인 면보다는 다른 면이 더 중시되었던 지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읍치 남쪽 龍頭里의 龍湫에는 마치 폭포수와 같이 물결을 그린 점이 이채롭다. 고을의 유명 지역에는 간단한 설명을 수록하고 있는데, 동쪽의 沙圖里에는 명승 道詵이 異人을 만나 모래로 산천을 그렸다는 전설이 쓰여 있다.

  • 군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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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진지도 群山鎭地圖, 군산진은 전라도 沃溝縣에 위치한 수군 진영으로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장미동 일원에 해당한다. 군산은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수운의 요충지이다. 원래 萬頃에 소속되어 있던 古群山島에 있었는데 해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1701년 이곳으로 옮겼다. 1710년에는 萬戶鎭에서 僉使鎭으로 승격시켜 漕運의 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能櫓軍 245명, 漕船 19척, 漕軍兼砲手 304명, 稅捧 19,000석 등이 있었다. 지도는 바다가 위치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여 군산진과 전면의 島嶼까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그렸다. 鎭基 둘레의 산을 둥글게 그려 내부 공간을 부각시켰다. 특히 이곳은 조운을 담당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세업무를 담당하던 捧稅廳, 稅米를 보관하던 稅庫, 漕軍들을 관할하던 漕復廳, 사공을 관할하던 沙工廳 등은 다른 고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건물들이다. 강 연안에는 조운을 담당하던 배를 그려놓기도 했다. 금강 하구의 內海門에 위치한 海望亭에는 적의 침입을 관찰하던 望臺가 있었다.

  • 금구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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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현지도 金溝縣地圖, 금구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전주와 김제 사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산지 서쪽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는 산지가 포진해 있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주변지역의 색채는 대략적으로 五方色을 따르고 있다. 읍치의 주변으로 산을 둥그렇게 그려 내부 공간을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북쪽의 蓮塘에는 이름에 걸맞게 연꽃을 그려넣은 점이 이채롭다. 고을의 진산은 鳳頭山인데 산의 모양이 봉황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읍치의 북쪽에는 울창한 송림이 잘 가꾸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松城’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동쪽에 있는 母岳山은 이 지역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 있는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眞表律師가 중건하여 5교의 하나인 法相宗의 도량이 되었던 곳이다. 후백제 때에는 전주에 도읍한 견훤에 의해 중요한 사찰로서 인정되었으며, 견훤이 넷째 아들 金剛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첫째 아들 神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가두었던 절로도 유명하다. 지도에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의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水流面의 九成書院, 六松祠, 東面의 雙溪祠 등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면 단위 지역에 세워진 사창도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에서는 각 면마다 세워지지 않고 5개의 면을 합하여 세워진 사실이 특이하다.

  • 금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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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지도 錦山郡地圖, 금산군은 지금의 충남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전북 무주군 부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금산읍 중대리 일대에 있었다. 금산군은 역사적으로 전라북도에 속했다가 1963년에 충청남도로 이속되었다. 금산군은 금남정맥이 경유하는 산간분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발고도가 높다. 읍치에는 관청 건물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다른 지역과 달리 객사가 따로 떨어져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다른 관아 건물들은 동헌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지만 座首가 머물던 鄕廳은 길 건너에 있는데 당시 수령권의 강화와 관련지어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주변지역에 이르는 도로망이 대로와 소로로 구분하여 상세히 그려져 있다. 북쪽에 위치한 濟源驛은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어서 강조되어 있고 그 전면에는 장시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로를 따라 길손들이 머물던 곳인 酒店도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 김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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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군지도 金堤郡地圖, 김제군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제시 교동, 요촌동 일원에 있었다. 김제군은 김제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평지 고을로 남쪽의 원평천과 북쪽의 신평천이 서해로 흘러간다. 고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벽골제로 예로부터 이름난 곳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벽골제는 백제 때 처음 제방이 축조되었고, 790년(신라 원성왕 6년) 侍中 金宗基가 전주 등 7읍 인민을 징발하여 증축한 바가 있고, 고려 현종과 인종 때 修築한 후 폐해졌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수축하였고 후에 다시 폐해졌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또한 수축하였는데, 제방의 길이가 2,600步, 둘레가 60리이다. 지도에도 남쪽에 뚜렷하게 제방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관리의 소홀로 인해 저수지의 기능이 많이 상실된 상태임을 엿볼 수 있다. 산지는 당채를 사용하여 풍수의 山圖적인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하천에는 다리도 상세하게 그려 넣었으며 潮水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는 수심까지도 표시하였다. 읍치 북쪽의 僧伽山에 있는 興福寺에는 삼층석탑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 나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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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지도 羅州地圖, 羅州牧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의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 의 경현동과 교동지역에 있었다. 羅州牧은 인근 務安縣의 地界를 넘어 서쪽 해안의 도서를 越境地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지도에도 해안의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무안현 境內에 있던 三鄕面도 나주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다. 이들 월경지는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로소 인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성곽이 있었던 읍치에는 주변의 산을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으며 각종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려 넣었다. 읍성의 동문 근처에는 당간인 木檣과 石檣의 모습까지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이들 당간은 나주의 지형이 行舟形이기 때문에 이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진다. 현재에도 석당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각 성문은 방어에 용이한 甕城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당시 右營에 해당하는 鎭營은 남문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에는 戰船, 商船, 그리고 나룻배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 나주지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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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지도진지도 羅州智島鎭地圖, 지도진은 전라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군사 진영으로 현재는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 해당하는데 최근 간척사업으로 무안군의 해제면과 연륙되어 있다. 진영은 지도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1682년(숙종 8)에 처음으로 진을 설치하여 水軍萬戶를 두고 司僕寺別將을 겸하게 하였다. 이곳은 특이하게 사람들은 나주목에 속해 있지만 땅은 사복시 소속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萬戶는 봄, 가을로 실사하여 풍흉에 따라 세금을 거두어 사복시에 바쳤던 것이다. 지도의 여백에 기재된 당시 이곳의 상황을 보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舟師와 能櫓軍이 209명 등이 있었다. 지도는 진영을 확대하여 부각시켰고 주변의 지역은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북쪽의 鐵馬山에는 咸平瓮山內脈이라 하여 당시인들의 풍수적 지형 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 바다를 건너서도 맥이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鎭營에는 관청 건물과 火藥庫도 보이며 다른 군현에서 보기 힘든 關王廟가 눈길을 끈다.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關羽의 목상을 안치하고 제사하는 사당으로 이는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토벌하러 왔던 명나라 조사들에 의하여 전래된 것으로 명나라 군사들이 왜군들과 싸울 때 관우의 음조에 승리한 것이라 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러한 관우의 숭배는 민간신앙으로도 이어져 巫俗에서는 關聖帝君이라 하여 장군신으로 모셔지기도 했고, 關聖敎라 하여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나기도 했다.

  • 나주지방흑산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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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지방흑산도지도 羅州地方黑山島地圖,지도의 원 제목은 ‘全羅右道羅州地方黑山島地圖’이다. 흑산군도는 전라도 서해안의 도서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들로 당시는 인근 고을이 아닌 나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처럼 다른 고을의 경역을 넘어 존재하던 월경지가 이 당시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해당한다. 지도는 大洋이 있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각 섬들의 상대적인 위치는 다소간의 오차가 있다. 서북쪽에 보이는 紅衣島는 비경으로 이름난 홍도에 해당한다. 서남단에 있는 可佳島는 서남해안의 끝단에 있는 섬으로 중국을 왕래하던 선박이 정박하던 곳이며 지금의 소흑산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도의 동쪽에는 소흑산도가 따로 그려져 있는데 이 섬은 지금의 우이도에 해당한다. 이처럼 현재의 지명과 과거의 지명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지도를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지도는 대흑산도와 소흑산도를 중심으로 부근의 도서를 둥글게 배치하였고 봉우리의 방향도 각각 다르다. 대흑산도에는 ‘山色黑 水色蒼’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섬의 산색을 소흑산도와 달리 흑색을 사용하여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대흑산도와 소흑산도에는 똑같이 衙舍가 그려져 있고 마을명도 鎭村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 두 지역이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 낙안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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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군지도 樂安郡地圖, 낙안군은 지금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서부와 보성군 벌교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남내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 지역은 남해안에 연해 있다. 남해안을 동서로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바다에 면해 있어 수운도 편리할 뿐 아니라 순천만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해안방어에도 유리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성 북쪽에 우뚝 솟은 金錢山이다. 읍치에는 방어적 성격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92척, 높이가 8척이다.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성안은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남문 쪽에는 林藪도 잘 가꾸어져 있다. 성안 객사의 뒤쪽에는 別砲廳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증설된 砲軍을 관할하던 관청이다. 남쪽의 벌교는 교통의 요지로 여러 섬으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곳이다. 사람과 물자들이 운집하던 곳인데 지도에도 장시가 그려져 있다. 동남쪽의 船所는 1687년(숙종 13) 보성의 龍頭浦에서 옮긴 것이다. 정규 鎭營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군기고, 화약고 그리고 전?병선 등을 완비하고 있는 방어 기지라 할 수 있다.

  • 남도진여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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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진여지도 南桃鎭輿地圖,남도진은 진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水軍萬戶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해당한다. 해안으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진영으로 성곽의 둘레는 1,040尺이었다. 지금도 성곽이 잘 남아 있는 편이지만 전체 진영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도에는 진영의 모습과 인근 도서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진영을 바다로 둘러싸인 섬처럼 그려 자칫 섬으로 오인할 수 있다. 진영 외부 진도 지역을 지도에서 제외시켜 바다처럼 청색으로 채색하였다. 홍선으로 그려진 대로가 진도 중심지로 이어지는 육로이다. 산의 봉우리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는데 다소 투박한 느낌을 준다. 주변의 여러 섬에도 墩臺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지역이  해상방어의 요지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남원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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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부지도 南原府地圖, 남원부는 지금의 전북 남원시 가운데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야영면을 제외한 전지역과 장수군의 번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 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오방면 북쪽 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백두대간상에 있는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읍치는 현재의 남원 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는 아름다운 색상, 정교한 필체, 풍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고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읍성을 중심으로 산들을 둥글게 배치하여 중심공간을 부각시켰고 주변지역의 마을들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정방형의 읍성이 문루와 함께 잘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정유재란 때 10만 왜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읍성의 서문 밖에는 1599년 명나라 都督 劉綎이 건립한 관왕묘가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내원하여 왜군을 격퇴시킨 것은 關羽의 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왕묘를 세웠던 것이다. 남문 밖에는 소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광한루와 오작교도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동쪽의 蓼川가에는 고을의 裨補林이면서 수해 방지의 기능을 지녔던 東林의 모습도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 남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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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현지도 南平縣地圖, 남평현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일대에 있었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위로는 광주, 서로는 나주와 연결된다. 지도는 남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산줄기의 來脈을 표현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산지의 표현도 흡사 풍수의 산도처럼 맥세를 강조하여 연결시켜 그렸다. 읍치의 강 연안에는 十里松이라는 林藪가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현감 禹成이 식재한 것으로 읍치를 범람으로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는 주요 관청 건물이 모식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무엇보다 지석강을 건너는 다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도로를 따라서 형성된 점막도 표시되어 있고, 道川面과 읍치에는 장시의 모습도 보인다. 고을의 남쪽에는 종이를 만들던 紙所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고을의 연혁과 주요 지역과의 거리가 수록되어 있다.

  • 능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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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주목지도 綾州牧地圖, 능주목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원에 있었다. 능주는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있으면서 영산강의 상류인 지석강을 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雲山이다. 지도는 당채를 많이 사용하여 색채감이 풍부하다. 산지는 산의 맥세를 강조하면서도 입체감있게 표현하였다. 특히 ‘和順廣峙來龍’이라 하는 것과 같이 산을 龍으로 인식하는 풍수적 지형인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이 지역을 관통하여 흐르는 하천은 영산강의 상류로서 暎碧江이라 불리고 있었다. 고을의 서쪽 虎巖面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가 여러 탑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운주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지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배와 같아서 돛과 사공을 상징하는 많은 탑과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과 같은 사찰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폐사되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남쪽 道林面의 雙峰寺에도 석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국보 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철감선사탑으로 보인다. 읍치의 동쪽 寒泉面에는 조광조가 머물던 天日臺가 그려져 있다. 읍치의 운산 기슭에는 壬亂功臣인 崔慶會, 曺顯, 文弘獻을 모신 三忠閣이 지붕이 세 개로 표현되어 있다.

  • 담양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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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부지도 潭陽府地圖, 담양부는 지금의 전남 담양읍, 봉산면, 무정면, 대덕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담양읍 객사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위로는 순창, 아래로는 창평에 이어진다. 지도는 안에서 밖으로 바라보는 시점을 사용하여 흡사 한송이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지역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읍치와 동북쪽의 金城山城을 확대시켜 자세히 그렸고 나머지 지역은 축소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書員廳, 討印廳, 軍牢廳, 旗鼓廳, 訓導廳 등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보기 힘든 건물도 보인다. 객사의 三門에 그려진 태극 문양이 선명하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당간과 석탑도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현재 남아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북쪽에 위치한 金城山城은 石城으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1653년(효종 4)에 重修하였는데,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성내에 있는 補國寺의 승과 담양, 순창, 옥과, 창평, 동복 등의 고을이 유사 시 산성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지도에도 해당 고을의 軍餉倉이 그려져 있다. 특히 내성에는 장독의 모습으로 표현된 醬庫와 鹽庫까지 그려져 있는데, 장과 소금은 산성에서 유사 시를 대비하여 비축한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 향교 옆에는 柳希春(1513-1577)을 배향한 義巖書院이 있었는데 당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 대정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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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군지도 大靜郡地圖, 대정현이 대정군으로 표기된 것을 볼 때 1895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이후 지도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대정군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덕면 지역과 서귀포시 가운데 서쪽 지역(강정동 이서)에 해당한다. 읍치는 대정읍 보성리, 인성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이 지역의 중심지는 해안의 모슬포 지역으로 읍사무소도 이 곳에 위치해 있다. 지도는 보통의 회화식 군현지도와 달리 읍치를 확대하여 표현하지 않고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다. 산간 지역에는 목마장이 있었는데 7소장과 8소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서쪽 지금의 신도리에는 소를 키웠던 毛洞場이 경계선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읍성의 모습을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성안에는 衙舍, 客舍라는 표시만 있고 관청 건물은 전혀 그리지 않았다. 남쪽의 單山 아래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지도에는 ‘文廟’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명산으로 이름난 산방산이 독특하게 그려져 있으며 현재 ‘용머리’라 불리는 해안의 절경에는 ‘龍頭’라고 표기되어 있다. 귤을 재배하여 국가에 공납하던 果園은 원 안에 ‘果’라는 글자로 표시하였다. 다른 지도와 달리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대신에 중산간 지대의 ‘上大路’, 해안 저지대의 ‘下大路’ 등으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 동복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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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현지도 同福縣地圖, 동복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동복천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며 곳곳에 비경을 이루었지만 현재는 동복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었다. 지도에도 瓮城山, 赤壁, 勿染亭의 기암절벽이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다. 옹성산은 산의 세 바위가 독과 같이 솟아 있어서 붙여진 것인데 지도상에도 독처럼 묘사되어 있다. 적벽 위쪽에 있는 물염정은 중종 명종 대에 성균관 전적 및 구례?풍기군수를 역임한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을을 진호하는 鎭山은 동쪽에 있는 母后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蘿茵山이었는데 고려 공민왕이 여기에 피난할 때 이 산의 덕이 母后와 같다 해서 모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읍치의 사직단 아래에는 ‘書院舊基’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道源書院이 있었다.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는데 崔山斗, 鄭逑 등을 배향하였다. 內北面의 水村에는 고려시대 縣이 있었고 瓦村은 과거 所였던 곳이다.

  • 만경현고군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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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현고군산진지도 萬頃縣古群山鎭地圖, 고군산군도는 만경강, 동진강 하구 서쪽 해안에 위치한 섬들로 지금의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소속되어 있다. 진영이 설치되었던 선유도를 중심으로 장자도, 무녀도, 신시도, 곶리도, 횡경도 등의 섬들이 포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로 향하는 무역항로의 기항지이자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들이 이곳에 정박하면서 바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지도는 고군산도의 모습을 중심에서 밖으로 향하는 시점으로 둥글게 묘사하였다. 진의 모습이 그려진 섬이 지금의 선유도인데 원래의 지명은 群山島였다. 조선초기부터 이곳에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으나 세종 때 옥구현 북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같이 이동하게 되자 이곳의 지명은 古群山島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의 고군산진은 1624년에 다시 설치되어 別將과 防牌船 1척을 두었고 1637년에 戰船을 두었다. 이어 1675년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고 1781년에 營將을 두었다. 특히 이곳은 인근의 法聖?群山?蝟島?黔毛浦 등의 진에서 操鍊하던 곳이다. 지도에는 진영의 관청 건물과 해안의 선박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길게 이어진 明沙十里도 선명하다. 특히 해로의 표시가 상세한데 조운선과 상선의 해로를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선유도의 羅莫里에 있는 望主巖은 이곳에 귀양왔던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던 데서 연유한 지명이며, 그 아래의 五龍堂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제신당으로 이곳을 왕래하는 선박의 안전을 기원했던 곳이라 한다.

  • 만경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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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경현지도 萬頃縣地圖, 만경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진봉면, 광활면,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과 부안군 동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일대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이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통일된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성곽의 표현에서는 서양 원근법의 영향도 엿보인다. 일반적으로 향교는 읍성의 외부에 있는데 여기서는 읍성 내부에 들어서 있다. 읍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2척이었는데 지금의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읍성 내부 內衙의 옆에는 다른 군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閣이 그려져 있는데 ?祭壇과는 별도로 성안에서 致祭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읍치의 동쪽에는 菱堤라는 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8,100척인데 지금도 이 일대의 가장 큰 저수지로 기능하고 있다. 고을 북서쪽 해안의 火浦에는 海倉과 稅大同庫가 그려져 있는데 稅米를 조운하던 포구였다. 하천을 따라서 潮水의 영향을 수심으로 표시하여 배의 통행에 참조하도록 했다. 남쪽 南浦 부근에는 商船도 그려져 있는데 수로를 통한 물자의 교류가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 무안목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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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목포진지도 務安木浦鎭地圖, 목포진은 조선시대 務安縣에 속해 있었던 해안 방어 기지로서 1439년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개항되면서부터는 항구도시로서 급성장하였다. 지도는 개항 이전 목포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진 유달산의 모습을 부각시켰으며 지금은 連陸된 남쪽의 三鶴島도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 정4품의 武官인 수군 萬戶가 관할하던 鎭은 원형의 성곽을 중심에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鎭城의 내부에는 殿牌를 모셨던 客舍와 만호의 청사인 衙舍가 중요한 건물로서 표현되어 있으며 그 밖의 부속 건물로 將廳, 使令廳, 吏廳, 軍器庫, 倉庫 등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에는 船所인 禦變亭의 모습과 더불어 각종의 수군 선박이 표시되어 있고 유달산의 정상부에는 붉은 색으로 봉수를 그려 중요한 군사 기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변 지역과 연결되는 길은 홍선으로 그렸는데 동쪽 觀海洞 근처에는 酒幕도 표시되어 있다. 남쪽의 바다에는 稅穀船의 항로도 표시하였으며, 나루터에는 일반인이 이용하던 나룻배를 독특한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 무안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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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현지도 務安縣地圖, 조선시대 무안현은 지금의 목포시를 포함하여 무안군 무안읍, 일로읍, 몽탄면, 청계면, 현경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무안군 소속의 삼향면은 당시 나주목에 속한 월경지였기 때문에 무안현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서쪽의 해안에는 炭島 이외의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데, 압해도를 비롯한 이 지역의 여러 섬들은 당시 나주목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해안을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영산강이 유유히 감싸도는 고을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회화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내면은 다른 지역보다 크게 확대하여 성곽과 그 내부의 다양한 관청 건물까지 상세하게 그려 넣었다. 殿牌를 안치하고 向闕望拜하면서 사신의 숙소로도 쓰였던 客舍와 수령의 집무처인 衙舍는 다른 건물들보다 강조되었다. 읍성 밖에는 문묘가 있는 향교와 더불어 제사를 지냈던 곳인 社稷壇과 ?祭壇에는 홍살문을 그려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었다. 지금의 목포시 중심지는 남쪽 해안가에 그려진 목포진 일대였는데 당시는 일종의 해안 방어 기지였다. 해바라기 모양으로 성첩을 강조하였으며 해안에는 암초를 그리고 그 옆에 關防이라 표기하여 군사적인 요충지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서쪽의 유달산에는 횃불 모양의 봉수대를 그리고 옆에는 조응 관계도 주기하였다. 남쪽의 僧達山 밑에는 724년 서역의 僧인 ?明이 창건한 法泉寺를 비롯하여 원당산 밑의 石佛堂 등이 탑과 함께 그려져 있다.

  • 무장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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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현지도 茂長縣地圖,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서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으로 고창, 남쪽으로는 영광에 이어진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진 고을로 지도에도 둥그런 고리의 형태로 과거의 폐현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현재도 읍성의 일부와 부속 건물로 객사와 남문루가 남아 있다. 읍성 안의 관아 건물의 중심은 殿牌를 봉안했던 객사로 지도에도 중심에 그려져 있으며 이곳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맥세를 뚜렷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동북쪽의 禪雲山에는 이 지역의 대찰인 선운사가 여러 암자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선운사는 금산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전북도내 2대 본사로서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이 절은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는 한 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를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때의 사찰폐쇄령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吾里面의 田稅倉과 冬音峙面의 大同倉은 이 지역의 주요한 세곡창으로서 조운선이 정박하던 곳이기도 하다.

  • 무주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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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부지도 茂朱府地圖, 무주부는 지금의 전북 무주군 중에서 부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무주는 조선 태종 14년(14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여 만든 고을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 백두대간과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잘 부각되어 있다. 특히 준험한 적상산성의 모습이 입체감 있게 확대 묘사되었다. 금강 상류인 남대천이 고을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이 하천을 중심으로 시점이 반대로 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작은 지역을 표현하는 회화식 지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이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그려져 있고 寒風樓, ?翠樓 등의 누각도 보인다. 읍치의 전면 하천 변에는 범람을 방지하기 위해 쌓았던 제방도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적상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史閣을 창건하여 1618년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別將을 두어 守城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곳도 다른 산성과 유사하게 사찰의 僧軍을 산성 방어에 활용하였는데 護國寺가 이를 담당하던 사찰이었다.

  • 법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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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진지도 法聖鎭地圖, 법성진은 지금의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진내리 일원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었다. 법성포 일대는 굴비로 유명한 곳으로 매년 봄 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바다 위에서 조기를 팔고 사던 波市田이 성황을 이뤘던 곳이며,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와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大西湖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1514년(중종 9)에 진을 설치하고 수군만호를 두었다. 1708년(숙종 34)에 僉使로 승격시키고 1789년(정조 13)에는 영광군의 진량면을 분할하여 獨鎭을 두고 세곡의 漕運을 관리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법성창이 있었는데 인근 12개고을의 전세와 大同米를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창고이다. 지도에는 법성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진영에 있던 성곽은 1514년(중종 9)에 쌓은 것으로 당시 둘레가 1,688척이었다. 주요 관청 건물과 더불어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도 그려져 있다. 세곡선이 왕래하던 수로는 육로와 다른 색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진영의 동쪽으로는 제방을 쌓아 간척을 했던 사례도 보이고 있는데 간척지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 보성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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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군지도 寶城郡地圖, 보성군은 지금의 전남 보성군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으로는 호남정맥이 뻗어나가고,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고을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고을의 동남쪽이 바다와 연해 있어서 바다를 통한 교류도 이루어졌던 곳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북쪽에 있는 德山인데 강조되어 그려졌다. 읍치에는 원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단지 흔적만 남아 있던 상태였다. 읍성의 내부를 보면 북쪽 부분에는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고 남쪽 부분은 민가가 밀집하여 지역별 분화 현상을 다소 볼 수 있다. 고을의 동남쪽 해안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득량면 해평리 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곳이다. 고을 북쪽의 중봉산에는 大元寺가 그려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때 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지도에는 탑이 두 개가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극락전만 보전되어 있다.

  • 부안검모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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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검모포지도 扶安黔毛浦地圖,검모포는 서해안 곰소만의 입구에 있었던 수군 진영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1723년 金說院坪으로 진을 옮겼지만 앞서의 鎭誌가 없어서 상고할 수가 없으며 지난 을묘년(1855) 4월에 巡撫使 權公의 분부로 우수영과의 합동 훈련차 배를 끌고 칠산도로 가다 배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誌筒과 文案들이 불에 타버려 진의 연혁에 대해서는 고찰할 길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진영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변산에서 뻗어온 主山의 표현을 통해 당시 풍수적 지형인식을 엿볼 수 있다. 진영의 전면에 있는 紅島, 虎島 등의 명칭을 통해 이곳이 간척을 통해 확보된 땅임을 알 수 있다. 아래쪽 해안의 熊淵은 우리말 지명인 ‘곰소’의 한자표기이다. 지형이 곰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진의 동쪽 과거 진영이 있었던 곳이 舊鎭이라 표기되어 있다. 하천변의 船所에는 전선, 병선, 사후선 등의 배가 그려져 있는데, 조수가 들어오면 수심 5척이 되고 썰물 때는 육지가 되어 조수의 강한 영향을 받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 부안위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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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위도진지도 扶安蝟島鎭地圖, 위도진은 부안의 서쪽 바다에 위치한 진영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해당한다. 청어잡이로 유명한 곳이며 매년 봄, 여름으로 京外의 상선들이 운집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위도는 성균관에서 절수한 곳으로 田稅 및 특산물에 대한 세금을 거두었고, 1681년 부안 金夢斗의 상소로 그를 萬戶에 임명하고 다음 해 僉使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지도는 남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는데, 진영이 산의 북쪽에 위치하여 來脈을 표현하는 데 불편해서 방위를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선소인 禦邊亭에는 전선, 병선, 사후선 등이 다른 지도와 달리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주변의 섬에는 수심을 표기하였는데, 서해안과 같은 조석간만의 차가 큰 곳에서는 수심 자료가 배의 통행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남쪽의 石九味에는 망을 보던 瞭望臺의 모습도 건물의 모양과 함께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 순창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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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창군지도 淳昌郡地圖, 순창군은 지금의 전북 순창군 관할 가운데 영계면을 제외한 순창읍, 구림면, 인계면, 적성면, 유등면, 풍산면, 팔덕면, 금과면, 쌍치면, 복흥면 지역이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동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고을이다. 고을을 돌아 나가는 하천은 섬진강의 상류로서 지도에서는 金灘, 赤城江, 萬水灘 등으로 표기되어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이 내륙에 위치한 연유로 조수의 영향이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는데 回文山, 栢芳山 등은 봉우리가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쪽의 赤城面과 북쪽의 福興面은 과거 적성현과 복흥현이 있었던 곳으로 여전히 지명에 남아 있다. 右部面에는 歸來亭이 그려져 있는데, 1457년(세조 2년)에 申末舟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申末舟는 신숙주의 동생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단종 양위 후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내려와 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살았다. 홍선의 도로 위에 읍치로부터의 里數가 5리 단위로 표시된 점은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도로를 10리 단위로 끊어서 점을 찍기도 했다.

  • 순천고돌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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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고돌산진지도 順天古突山鎭地圖, 고돌산진은 지금의 전남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일대에 해당한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뱃길의 길목에 위치한 진영이다. 원래 수군 만호를 두었는데 중종 때 만호를 혁파하여 權管을 두었고, 1522년에 다시 召募別將을 두었다. 고돌산진의 서남쪽에는 선조 때 曲華牧場을 설치하였는데 지도에도 曲華牧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북쪽에는 목장의 분계성도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원형의 鎭城 내부에는 여러 관아 건물이 포진하고 있고 관청의 물자를 놓아 두던 船倉什物庫는 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松田도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60리에 걸쳐 있다고 한다. 남해안의 대표적인 소나무 장양처라 할 수 있다. 주변 지역의 해안을 따라 곳곳에 瞭望臺가 설치되어 있고 남쪽에는 白也烽臺가 그려져 있는데 조응관계도 주기해 넣었다.

  • 순천방답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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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방답진지도 順天防踏鎭地圖, 방답진은 지금의 전남 여수시 돌산읍에 해당하며 진영은 돌산읍 죽포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에서 경상도로 가는 수로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중종 때 적이 침입하는 길목이 되므로 이곳에 僉使鎭을 설치하였다. 북쪽으로는 좌수영과 고돌산진과 연결된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1389년 琉球國 사신이 이곳 앞 바다로 온 적이 있다고 한다. 돌로 쌓은 鎭城이 있는데 둘레가 694步였다. 성곽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이 시기 포군의 증설과 관계있는 砲廳도 보이고 있다. 해안의 선소에는 각종 전선들이 즐비하게 그려져 있다. 선소는 통상 禦變亭이라 표기하는데 이곳에는 ‘撫劍亭’이라 표기된 점이 이채롭다. 동남쪽 끝단에는 向日菴이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낙산사의 홍연암,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한국의 4대 관음기도처 중의 하나이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이 향일암은 644년(백제 의자왕 4년) 원효대사가 원통암으로 창건하였다. 기암절벽위에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의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해 수평선의 일출광경이 특히 장관을 이루어 1715년(숙종 41) 인목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하였다.

  • 순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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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부지도 順天府地圖, 순천부는 지금의 전남 순천시, 별량면 동부, 쌍암면, 서면, 송광면, 월등면, 주암면, 해룡면, 황전면과 여수시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의 동쪽 경상도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여수반도에서 돌산도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걸쳐있다. 해안에는 左水營, 古突山鎭, 防踏鎭 등의 진영이 포진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었다. 지도에는 해안의 도서를 비롯하여 고을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원형의 읍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3,383尺이다. 남문 밖에는 八馬碑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부사의 임기 만료 시 여덟 필의 말을 백성들로부터 받던 폐단을 없앤 府使 崔碩의 고사를 기려 세운 비석이다. 呂水面 남쪽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은 성종 11년(1480) 수군절도사를 두었는데, 지지에 따르면 성 둘레가 3,336尺, 옹성이 9개, 성문이 4개, 우물이 7개이다. 지도에는 수영의 2인자인 虞侯의 청사도 그려져 있다. 해안에는 다른 지도에서는 보기 힘든 거북선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조계산 서쪽에 위치한 松廣寺는 신라 말엽 혜린대사가 창건한 우리 나라 三寶 寺刹의 하나이다. 조계사 동쪽에 위치한 선암사는 末寺를 거느린 본산으로 雲岩寺, 龍岩寺와 더불어 호남의 三岩寺라고 한다.

  • 여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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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부지도 礪山府地圖, 여산부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과 논산군 연무읍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산면 여산리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다. 지도의 방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동쪽의 天壺山이 고을의 주맥이 된 데서 기인한다. 문묘가 있는 향교의 전면에는 홍살문과 함께 하마비도 그려 신성한 공간임을 표현하고 있다. 읍치의 관아 건물에는 이 시기 포군의 증강과 관련된 別砲廳도 보이고 있다. 읍치 앞 하천변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숲도 그려져 있다. 읍치 북쪽 충청도와의 접경 지역에는 皇華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전라도의 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던 곳으로 당시 정자는 없고 비석만 남아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고을 북쪽을 흐르는 금강에는 당시 조선 3대 포구의 하나였던 江鏡浦도 보인다. 근처의 黃山里에는 臨履亭, 八卦亭 등의 정자가 그려져 있다. 팔괘정은 김장생이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이후 송시열과 같은 이도 이곳에서 강학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경치가 일품으로 현재 복원되어 남아 있다. 고을 서쪽의 西三面에는 斗池堤가 표시되어 있고 그 옆에 ‘順和宮作畓’이라 하여 논 비슷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순화궁에서 이곳을 절수하여 제언을 쌓아 堰畓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영광군다경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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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다경포지도 靈光郡多慶浦地圖,다경포는 현재 전남 무안군 운남면 지역에 해당하며 진영은 운남면 성내리에 있었다. 전라도 서해안 연안 항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압해도와 마주보고 있다. 1515년(중종 10)에 성을 쌓았는데 당시 둘레는 980척이었다. 수군 만호가 관할하는 진영으로 지도에는 진영의 모습이 성곽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내의 관아 건물이 소략하게 그려져 있지만 선소의 선박은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육로는 홍선으로 그리면서도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고, 해로는 흑선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각 도서에는 진영으로부터의 거리를 수록하여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도록 배려하였다. 동쪽의 高林烽臺는 흡사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 영광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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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지도 靈光郡地圖, 영광군은 지금의 전남 영광군 영광읍, 백수읍, 홍농읍, 군남면, 낙월면, 대마면, 묘량면, 법성면, 불갑면, 염산면과 장성군 삼계면, 무안군 망운면, 진하면, 신안군 임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 일대에 있었다. 영광은 서해안에 접하여 완만한 평지가 펼쳐 있다. 고을 내부를 瓦灘이 돌아 서해로 빠져 나간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돌로 쌓여진 읍성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469尺, 높이 6尺이다. 사대문 가운데 서해쪽의 서문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방어의 필요성으로 인해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母岳山 기슭에 자리잡은 佛甲寺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절 이름을 불갑사라 했다고 한다. 이 고을 제일의 명찰로서 당시에도 海佛菴, 佛影臺, 餞日菴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서북쪽 해안의 法聖鎭은 처음에는 수군 만호가 배치되었으나 1708년(숙종 34)에는 水軍僉節制使로 승격시키면서 진량면을 분할하여 獨鎭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법성창이 있었는데 인근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합하여 서울로 조운하였다. 九水面의 해안에는 風沙라는 砂丘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지금의 모래미 해수욕장에 해당한다.

  • 영광임자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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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임자진지도 靈光荏子鎭地圖, 임자진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신안군 임자면에 해당한다. 진영은 임자면 진리에 있었다. 임자진은 1784년 巡撫御史의 書啓로 인해 진을 설치했는데 이 지역이 사복시 둔토였기 때문에 감목관을 겸하게 했다. 아울러 나주목장에서 관장하던 慈恩島의 토지와 인민을 병속시켰다. 1834년(갑오년) 우수영의 啓聞에 따라 육지의 함평, 영광의 경계에 있는 珍下山面을 專屬시키고 자은도는 나주목장에 귀속시켰다. 당시 임자진의 상황은 다른 수군 진영과 마찬가지로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고 能櫓軍 209명이 있었다. 지도에도 당시 배치되었던 선박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전선과 병선은 실제의 전투에 사용하고 사후선은 ?望의 기능을 각각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의 북쪽 三峯에는 靈光次音山來脈이라 표기되어 있고 읍치 남쪽의 산에는 案山 등을 통해 풍수적 사고가 지형 인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북쪽 해안의 沙場은 현재의 도찬리에 있는 대광해수욕장에 해당한다.

  • 영암군이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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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이진진지도 靈巖郡梨津鎭地圖, 이진진도 어란진과 마찬가지로 영암의 월경지에 해당하는 군사 진영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일대에 해당한다. 최초 1597년에 진을 설치하여 權管을 두었다가 1627년(인조 5)에 수군 만호진으로 승격시켰다. 이진진은 삼남대로의 끝 지점으로 제주가는 배가 떠나던 포구이기도 했다. 지도에는 군사 진영인 이진진의 모습만이 강조되어 그려졌다. 제주로 향하던 배는 진영 동쪽의 古達梁鎭에서 출발했는데 당시는 영암의 南倉이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영을 중심으로 인근의 도서들을 환포형으로 배치하였고 완도, 제주 등의 큰 섬들도 크기를 축소하여 상대적인 위치만 표현하였다. 진영 남쪽의 섬들은 각각 소속 진영이 다른데 윤선도가 거주했던 보길도는 당시 어란진에 속해 있었다.

  • 영암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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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지도 靈巖郡地圖, 영암군은 지금의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서면, 덕진면, 도포면, 미암면, 삼호면, 서호면, 시종면 서부, 신북면, 학산면과 해남군 북평면, 송지면, 옥천면, 북제주군 추자면 그리고 완도군 노화읍, 보길면, 소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남풍리 일대에 있었다. 영암은 남쪽으로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이 포진하여 있고, 위로는 영산강 유역의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고을이다. 월출산은 신라 때부터 小祀를 지냈던 명산으로 지도에도 기암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산의 서쪽에 위치한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기도 하다. 다만 도갑사 입구에 1090년(선종 7)에 만들어진 국장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고 11세기 후반에 번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읍치의 북쪽에는 나주와 진도의 월경지가 작은 영역으로 구분하여 표시된 점이 이채롭다. 읍성의 남문 밖에는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府君堂이 그려져 있다. 부군당은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을 모신 제당인데 지역마다 모시는 신은 다를 수 있다. 서쪽 해안에는 梨津鎭, 於蘭鎭 등의 진영이 그려져 있다. 그 옆의 古達梁鎭은 원래 수군 만호진이었으나 1522년에 강진의 가리포로 옮겨간 상태였고, 당시 제주로 가는 사객들의 바람을 기다리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 영암지방어란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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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지방어란진지도 靈巖地方於蘭鎭地圖,어란진은 영암의 월경지로 해남현 너머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일대에 해당한다. 수군 만호진으로 원래는 해남에 속해 있었다. 당시 鎭城의 둘레는 1,478척이고 우물이 두 군데 있었다. 지도는 어란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도서를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남쪽의 제주도와 추자도까지 그렸는데 크기를 매우 축소시켜 상대적인 위치만 나타내고 있다. 동쪽의 갈두는 현재의 땅끝마을(토말)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영남의 조운선과 팔도의 상선이 지나는 곳으로 매우 험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 옆에 ‘水路關防’이라 표기되어 있다. 선소에 정박한 배에는 다른 곳과 달리 防牌船 1척이 추가되어 있음을 상단의 기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達摩山에 있는 美黃寺는 우리나라 불교의 해로 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신라시대 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옛날에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동이나 있었던 巨刹이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건물이 없어지고 대웅전 정도가 남아 있는데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영암추자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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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추자도지도 靈巖楸子島地圖, 한반도와 제주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추자도는 상?하추자, 횡간도, 추포도 등 4개 유인도와 38개 무인도를 합쳐 42개의 군도로 형성되어 있다. 1271년(고려 원종 12년)까지 후풍도라 불리웠으며 전남 영암군에 소속될 무렵부터 추자도로 불리웠다. 1896년 완도군으로 편입되었고 1910년에는 제주도에 편입된 후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 실시로 북제주군에 소속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면에 해당한다. 지도에는 상추자, 하추자를 비록하여 인근의 도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추자상도에는 최영장군 신당이 그려져 있는데, 추자도는 고려말 이래 왜구(倭寇)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그 고통이 컸기 때문에 고려말 왜구 토벌에 공로가 많았던 장군의 사당을 지어 모심으로써 왜구로부터의 환란을 면해보려는 국토수호신적 의미에서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 현재 신당이 복원되어 관광 명소로 기능하고 있다. 주변의 섬 사이가 좁아 관방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상추자와 하추자 사이는 매우 좁아 海門으로 기능하고 있다.

  • 옥과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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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과현지도 玉果縣地圖, 옥과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삼기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섬진강의 지류인 옥과천 유역에 평지가 펼쳐져 있고 나머지 지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반영되어 험준한 산지의 표현이 강렬하다. 고을의 진산인 雪山(해발 522미터)에서 뻗어오는 맥세를 강조하기 위해 설산이 위치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설산에서 뻗어 내린 맥세는 읍치의 內衙와 鄕校에서 강하게 뭉쳐있다. 읍치에는 여러 관아 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단일 시점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유명한 고사가 있는 곳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수록하기도 했다. 사직단 아래의 ?木洞 古址에는 河西 金麟厚에 얽힌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注記에 의하면, 그가 이곳의 知縣으로 있을 때 마을의 두 사람이 감나무 하나를 놓고 다투자 김인후가 감나무 아래에서 종일토록 소요하다 돌아가자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감동하여 서로 양보하니 이로 인해 河西?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한다. 只佐谷面의 ‘揷亭店’은 옛날에 도사가 두 그루의 홰나무를 손으로 꽂은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 하는데, 그 옆에는 홰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남쪽의 聖德山에는 觀音寺가 탑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백제 분서왕 3년(300) 성덕보살이 전남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봉안하여 창건한 남한 제일의 백제 고찰로 알려져 있다.

  • 옥구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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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구현지도 沃溝縣地圖, 沃溝縣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시내와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옥구읍 상평리에 있었다. 서해안의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고을의 남쪽과 북쪽에서 금강과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지도는 두 개의 큰 하천과 서해 바다에 둘러싸인 고을의 모습을 고졸하게 표현하였다. 읍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읍치를 둘러가며 둥글게 산들을 그려 넣었다. 읍치에는 원래 돌로 쌓은 성곽이 있었는데 이 시기 거의 훼손되어 지도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접경에 위치해 있어서 수상교통의 요지가 된다. 지도에도 연안 항로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수심도 아울러 표시되어 있다. 서쪽의 筽食島는 삼남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곳으로 섬안은 평온하여 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 관방의 요충지로 삼을만한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 일대가 간척되어 육지와 붙어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고을 남쪽 長面의 九政里는 과거 澮?縣이 있던 곳이다. 회미현은 본래 백제 夫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 개명한 것이다. 북쪽의 群山鎭에는 인근 7개읍의 세곡을 조운하던 漕倉이 있는데 군산진의 僉使가 計量을 감독하였다. 서쪽 해안의 紫泉臺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전해지는데, 지세가 넓고 편편하다. 서쪽 雪琳山의 隱寂寺에는 소정방과 김유신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석탑도 그려져 있는데 현재 경내에 5층석탑이 남아 있다.

  • 용담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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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현지도 龍潭縣地圖, 용담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최근 용담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수몰된 지역이기도 하다. 평지가 적은 산간 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로 지도에도 회화식 기법을 활용하여 산의 입체감을 부각시켜 표현하였다. 남쪽의 珠?山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산으로 이 산에서 북쪽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이 된다. 서남쪽의 九峯山은 지명에 어울리게 아홉 봉우리를 그린 점이 이채롭다. 동북쪽의 城峙에는 石棧이 있는데, 고려 때 왜적이 고을을 침략하자 현령 皮元亮이 廉君利, 高允德 등과 함께 현의 남쪽에 울타리를 세워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아 놓고서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돌을 떨어뜨려 적을 분쇄하고자 하였다. 이에 적이 방비가 튼튼함을 알고 물러갔다고 한다. 고을의 一西面에 있는 하천은 朱子川이고 一南面에 있는 하천은 程子川이다. 이외도 顔子川이 더 있어서 이를 三川이라 했고 이들을 모신 三川書院도 있었다. 朱子川가에 있는 臥龍巖과 半日岩 등은 뛰어난 경치로 이름난 곳이다. 특히 반일암에는 험준한 절벽 사이로 난 棧道도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의 天皇山에는 崇岩寺가 그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天皇寺가 바로 이 절인데, 신라 헌강왕 때 道人 無染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 용안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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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현지도 龍安縣地圖, 용안현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용안면과 용동면에 있었던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용안면 교동리에 있었다. 용안은 북쪽으로는 충청도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咸悅, 동쪽으로는 礪山에 이어진다. 금강에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읍치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용안 읍성은 둘레가 4,240척이고 성안에 우물이 5개, 연못이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도제작 당시에는 대부분 붕괴되어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고을의 하천변으로는 많은 제언이 축조되어 있고, 다른 고을의 지도와는 달리 洑가 직접 그려져 있기도 하다. 지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堤는 고여 있는 물이고 洑는 흐르는 물을 막아 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고을 북쪽 蘭浦에는 稅倉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초에 得成倉(그 이전에는 德成倉이라 불렀음)이 있었던 곳으로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여기로 옮겼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群山倉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는 여기에서 거두어 서울로 조운하였다. 현재 용안면의 부곡천 하류에 난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 운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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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봉현지도 雲峯縣地圖,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하며, 문화적으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보인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害處였다. 지도에도 사방을 둘러가면서 산지가 그려져 있는데 동쪽의 八良峙를 통해 경상도와 이어지고 서쪽의 女院峙를 통해 남원과 연결된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미쳤던 곳으로 고을의 곳곳에 이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편의 荒山은 고려 우왕 때 왜적이 함양, 운봉을 노략질하자, 인월역에 주둔한 왜적을 이성계가 섬멸하였던 곳이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 운봉현감 박광옥이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지도에도 花水山 밑에 비각이 보이고 있다. 또한 동쪽에도 당시의 왜적의 혈흔이 남아 있다는 血巖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에는 선종 9산의 하나로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가 탑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이성계의 황산대첩, 임진왜란, 정희량의 난 때 운봉 지역과 관련된 고사를 상세하게 수록하였다.

  • 익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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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군지도 益山郡地圖, 익산군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삼기면, 금마면, 춘포면, 팔봉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동고도리 일대에 있었다. 익산은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한 때 백제 무왕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이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들이 남아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支山인데 다른 산에 비해 낮은 편이다. 북쪽에 彌勒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 있는 箕準古城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準王이 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배를 타고 들어와 성을 쌓고 馬韓을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미륵산 전면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가 있지만 지도에는 표시가 되지 않고 단지 탑만 그려져 있다. 읍치의 서쪽 報德山에는 토성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고구려 유민 劒牟岑이 安勝을 임금으로 삼아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報德王란 칭호를 얻어낸 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報德城으로 불린다. 읍치 아래쪽에도 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현재 보물 4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5층 석탑으로서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그 옆에는 石人이라는 석불상이 있는데 현재 국보 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에는 王后, 王前, 王川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데, 지도 상단의 주기에는 馬韓 때의 內宮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또한 읍치 서쪽에 능 2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雙陵으로 ?고려사?에 의하면 고조선의 武康王과 왕비의 능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 임실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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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현지도 任實縣地圖, 임실현은 지금의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상류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호남정맥을 넘어 전주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 순창과 이어진다. 고을의 별칭은 雲水라고 하는데 武庫의 남쪽에 雲水井이 있어서 유래한 것이다. 고을의 서남쪽의 九皐面은 고려시대 郡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來屬되었다. 平地村이 원래 郡基이지만 현이 되면서 龍腰山 아래로 옮긴 것이다. 산지는 청색과 녹색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면서도 시점이 비교적 통일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龍腰山으로 지도에서도 북쪽에서 용요산으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고을을 감돌아 나가는 烏院江에는 다리가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일부의 다리는 겨울에만 사용되고 물이 불어나는 여름에는 나룻배를 이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홍선의 도로에는 고개에 있는 隘口의 표시가 상세하다.

  • 임치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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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치진지도 臨淄鎭地圖, 임치진은 지금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다. 당시는 咸平縣 소속이었다. 서해안의 해제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연안 항로의 요충이 되기도 했다. 지도 하단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三韓의 古鎭이라 전해지지만 남아 있는 文蹟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임자진과 지도진이 설치되었을 때 조그만 성에 불과했는데 몇 개의 마을과 전선, 군졸들을 劃屬하여 진을 만들었다 한다. 지도에는 임치진의 모습이 진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주변의 도서들은 상대적인 위치 파악을 위해 축소하여 그렸다. 船所는 함평과 임치진의 것이 별도로 그려져 있고, 전선도 별도로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영의 전면에 있는 해안에는 둑을 쌓아 간척한 흔적도 보이고 있다.

  • 임피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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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피현지도 臨陂縣地圖, 임피현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대야면, 개정면, 성산면, 나포면, 서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피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임피는 북으로 수상 교통의 관문인 금강 변의 羅浦津과 西浦津을 끼고 있고 남으로는 남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포진한 形勝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고을의 중심 공간으로서 읍성이 있는 縣內面을 상대적으로 확대시켜 자세히 그렸고, 주변에 각 面과 소속 마을을 배치시켜 놓았다. 산지의 표현은 흡사 활짝 핀 꽃봉오리와 같이 묘사하였다. 지도의 중앙에는 읍성의 모습을 城堞과 함께 세밀하게 그렸는데, 이 읍성은 1410년 崔潤德이 전라도 巡問使가 되었을 때 장정 1만 7천여명을 동원하여 40일만에 쌓았다고 한다. 해안의 방어를 목적으로 했던 성이기 때문에 문은 남쪽으로 하나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군현에서는 향교가 통상 성곽밖에 위치해 있는데 이 고을에는 성곽 내부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上北面에 있는 海倉은 고려시대 漕倉인 鎭城倉이었다. 당시에는 창고 주위로 土城이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10여리었다고 한다. 동북쪽에 있는 公主山은 公州山이라고도 표기하기도 하는데 公州로부터 떨어져서 이 같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 아래의 羅浦에는 배들이 운집하는 곳인데 당시 민가들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 장성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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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부지도 長城府地圖, 장성부는 지금의 전남 장성군 장성읍, 남면,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 대부분, 서삼면, 진원면, 황룡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장성군 장성읍 聖山里에 있었다. 장성부는 영산강 유역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으로는 노령을 넘어 정읍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광주에 연결된다. 조선 초에 원래 長城縣과 珍原縣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두 고을이 衰殘하자 1599년(선조 23)에 합쳐서 長城縣으로 만들었다. 이후 1655년(효종6)에 장성현이 입암산성의 主鎭管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內東面에는 진원현의 읍치가 있었는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북쪽으로 노령과 白巖山의 산지가 포진해 있고 黃龍江이 고을의 남쪽을 흘러 나주의 영산강에 이른다. 지도에도 이 지역 최고의 요해처인 노령의 모습과 이를 지키는 笠巖山城이 잘 표현되어 있다. 笠岩山城은 조선 초까지는 석성 터만 남아 있던 곳인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대대적으로 修築되었다. 백암산에는 지금의 백양사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 그려져 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淨土寺로 불려졌다. 지도에도 정토사로 표기되어 있고 여러 암자들이 같이 포진해 있다. 읍치 북쪽의 靑巖道는 속역 11개를 거느린 찰방역으로 원래 나주에 있던 것이 옮겨온 것이다. 고을 서남쪽 文章山 아래에 있는 金河西書院인 필암서원은 河西 金麟厚를 배향한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서원이었다.

  • 장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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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현지도 長水縣地圖, 장수현은 지금의 전북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 고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로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북쪽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원래 이 지역에는 조선초기까지 長溪縣과 長水縣 두 고을이 있었는데, 1414년(태종 14)에 장계현을 병합하여 장수현으로 만들었다. 지도에서도 水內, 水西, 水南 등은 장수현에 속했던 지역이고, 溪北, 溪內, 溪南 등은 장계현에 속했던 지역이다. 지형적으로도 두 지역이 분지의 형태로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靈鷲山이 고을의 진산인데 무주의 덕유산에 뻗어온 산줄기이다. 그 위쪽에는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도 안의로 이어지는 六十嶺이 보인다. 육십령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간 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읍치 서쪽의 新光寺는 지금의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1849년(헌종 15)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또한 읍치의 서남쪽에는 合米城古址가 표시되어 있는데, 합미성은 후백제 때 축성된 것으로 전하는 성이다.

  • 장흥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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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부지도 長興府地圖, 장흥부는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량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 웅치면, 회령면 그리고 완도군 금당면, 생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 일대에 있었다. 장흥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탐진강이 고을을 돌아 나간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산의 봉우리와 기암절벽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장흥부 읍성을 長寧城이라고 부르는데, 지지에 따르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4척, 높이가 8척이다. 이 성은 보통의 읍성과는 달리 평지성과 산성을 겸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천연의 암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 정상의 봉수대에는 조응관계를 자세히 수록하기도 했다. 북쪽 迦智山 아래쪽의 寶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碧沙道는 9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으로 1520년에 만든 것이다. 남쪽 해안가에 있는 회령진성은 1490년(성종 21) 4월에 축조된 萬戶鎭城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水軍 鎭營이었다. 동쪽 해안의 海倉에도 전선, 병선 등이 정박하고 있는데 돌로 쌓은 방파제를 그린 점이 이채롭다.

  • 장흥부회령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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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부회령포진지도 長興府會寧浦鎭地圖, 회령진은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일대에 해당한다. 서쪽의 강진만에서 동쪽의 보성만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과거 회령진은 장흥에서 동쪽으로 60리 떨어진 회령면 揮羅浦에 있었는데 이후 남쪽의 大興面 扇子島로 옮기고 옛 명칭인 회령진이라 했다. 원래 장흥부가 좌도에 해당하므로 자수영에 속했으나 우수영에 속했다가 다시 좌수영으로 환속되기도 했다. 당시 主鎭管은 蛇島鎭이다. 지도는 회령진의 모습을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이 지역의 명산 천관산에서 뻗어 나온 맥세가 진영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성곽이 축조된 진영의 모습과 전선이 정박해 있는 선소의 모습도 상세하다. 특히 선창에는 돌로 쌓은 石墩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진영 주변에는 여러 섬들이 있는데 萊德島와 老力島 등은 인구와 토지가 풍부하고 비옥하여 진을 설치할 때 수군병사들을 여기서 충당하였다. 지도에 그려진 다른 여러 섬들이나 촌락에는 소속을 표시하기도 했다. 진영의 북쪽에는 松田도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소나무를 장양하기에 적합하여 당시 松田處가 12군데 있었다.

  • 전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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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지도 全州地圖, 전주는 지금의 전북 전주시 삼례읍, 봉동읍과 완주군 용진면?소양면?상관면?구이면?이서면, 익산시 익산 시내?오산면?왕궁면, 김제군 금산면 일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일부를 포함하는 호남의 大都會였다. 읍치는 전주시 경원동, 중동, 풍남도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貫鄕이자 전라 감영의 소재지였다. 전라북도의 중앙부를 북동으로부터 남서로 뻗어있는 노령산맥의 지류인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그리고 완산 칠봉 등이 시가지의 동?남?서방에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다. 전주 읍치는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방 전주천 변에서 북서방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이다. 읍치에는 석성이 축조되어 있고 4대문의 문루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남쪽의 豊南門만 남아있다. 객사의 북쪽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造山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북문이 뚫여 있어서 객사의 안정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만든 裨補物로 해석된다. 성곽 내부에는 감사의 집무처인 宣化堂을 비롯한 각종 관청이 포진해 있다. 읍성의 남동쪽에는 慶基殿이 그려져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이다. 읍치 바깥쪽 동남쪽에는 梧木臺가 그려져 있는데, 오목대는 고려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유명하다. 읍치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이다. 읍치 동남쪽의 寒碧堂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서 全州八景의 하나로 꼽았던 곳이다.

  • 정읍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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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현지도 井邑縣地圖, 정읍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시내와 북면, 입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읍시 연지동, 미창동 일대에 있었다. 정읍은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泰仁, 남으로는 노령을 넘어 長城과 연결된다. 지도는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노령은 이 지역의 관문으로 남쪽 지역으로 연결되는 호남대로의 길목에 해당한다. 이 길목을 지키는 관방으로서 笠巖山城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동남쪽 지금의 내장산에는 이 지역의 名刹인 靈隱寺와 末寺인 여러 암자들이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의 茅川에는 ‘考巖書院毁基’라는 표시가 있다. 고암서원은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1695년(숙종 21) 송시열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해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그러나 지도제작 당시는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정의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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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군지도 旌義郡地圖,旌義縣이 旌義郡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지도는 1895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대정군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표선면, 남원읍과 서귀포시 가운데 시내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제주군 성산읍 성읍리에 있었다. 원래는 동쪽의 水山鎭 부근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읍성, 민가 등이 보존된 민속마을이 남아 있다. 중산간에 설치되었던 牧馬場으로는 9소장, 10소장이 이 지역에 있었고, 녹산장과 같은 광활한 산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읍치지역과 주변지역을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기 때문에 객사, 아사, 문묘 등의 표기만 보인다. 동쪽의 성산 일출봉은 봉우리의 모습을 다소 독특하게 표현하였고, 그 옆에는 지금의 신양해수욕장에 해당하는 모래사장의 표시도 보인다. 서쪽 西歸鎭은 현재의 서귀포시 시내에 해당한다. 그 서쪽 法還里 근처에는 大畓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제주도는 화산암 토양으로 이루어져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지만 이 지역은 풍부한 용수를 이용하여 벼농사가 행해지던 곳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천지연폭포, 정방폭포에는 ‘天帝淵’, ‘正方淵’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중산간 지역 西衣貴 근처에는 衣貴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성읍에서 서귀로 가는 길가에 있어서 나그네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院이었다.

  • 제주삼읍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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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삼읍전도 濟州三邑全圖, 제주도를 그린 지도로 조선시대의 제주도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지도의 제작시기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 달리 1872년이 아니다. 大靜, 旌義 등의 고을이 縣이 아닌 郡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95년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전라도에 속해 있었고 해방 이후 도제 실시와 함께 분리되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독특한 문화와 풍속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는 변방에 있으면서도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지도제작이 활발하여 지금도 제주도의 다양한 지도가 남아 있기도 하다. 지도는 육지부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 남쪽이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주위에 干支로 된 24방위를 배치한 점이 독특하다. 제주도와 같이 육지부에 인접한 섬이 아닌 경우에는 섬의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방위와 주변 지역을 일부 그려 넣기도 했다. 남쪽으로는 중국뿐만 아니라 安南國, 暹羅, 滿剌加, 占城 등의 동남아시아 나라들도 그려져 있다. 기생화산인 오름의 모습을 자세히 그렸고 중산간 지대에는 10개의 목마장을 경계와 함께 표시하였다. 各面에 소속된 마을들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인접한 面과 구분한 점도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군현의 이름과 해안의 鎭名이 붉은 색으로 강조되어 표시되었다. 특히 해안의 봉수대와 포구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한라산의 靈室에는 많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五百將軍이 그려져 있다.

  • 제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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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지도 濟州地圖, 조선시대의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 지역과 북제주군 조천읍, 구좌읍, 애월읍, 한림읍, 한경면, 우도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주 시내 일도동, 이도동 일대에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관덕정과 같은 일부 건물이 남아 있고 목관아지가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지도는 제주삼읍전도처럼 한라산이 있는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지도의 하단에는 남해안의 고을과 포구, 도서들을 배치하여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해안의 鎭과 포구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禾北鎭의 別刀浦와 朝天鎭의 朝天浦는 육지와 교류하던 관문에 해당한다. 해안에 상세하게 표시된 煙臺와 烽燧 등을 통해 지도의 군사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서쪽의 上貴里에는 ‘土城’이라는 표시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삼별초군이 몽고를 상대로 항거했던 곳이다. 읍치의 남쪽에는 高?梁?夫 三姓의 탄생 신화가 남아 있는 삼성혈의 모습이 보이고 그 남쪽 三義陽岳에는 산천제를 지냈던 山川壇도 표시되어 있다. 중산간 지대에는 많은 목마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1, 2, 3, 4, 5, 6소장이 있었다. 동쪽과 서쪽의 上大路에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원취락도 표시되어 있는데 濟泉院과 利往院이 그것이다. 이 주변에는 生水, 寺泉과 같은 水處가 표시되어 있다. 제주도는 화산암 토양으로 이루어져 물이 귀하기 때문에 촌락의 입지에 용수가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의 분화구에 있는 백록담은 지명처럼 흰색으로 표현한 점이 이채롭다.

  • 진도부금갑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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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부금갑진지도 珍島府金甲鎭地圖, 금갑진은 진도의 남쪽에 위치한 수군 진영으로 1431년(세종 13)에 창설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해당한다. 수군 만호가 관할하던 진영으로 석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鎭城은 1431년(세종 13)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1,050척, 높이 11척이었다. 지도에는 진영의 모습과 주변 도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금갑진에 소속된 마을은 金甲里 하나로 다른 진영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다. 주변의 도서에는 진영으로부터의 거리와 수심이 표시되어 있다. 성곽 내부에는 여러 관청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환자곡을 쌓아 두던 還庫도 보인다.

  • 진도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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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부지도 珍島府地圖,진도군은 지금의 전남 진고군 진도읍, 고군면, 군내면, 의신면, 임회면, 조도면, 지산면과 해남군 삼산면 서부,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월악리?만수리?태간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 읍치는 古郡內面에 있었는데 지도에도 古城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을은 애초 郡守가 주재하던 郡이었는데 1866년(고종 3) 府로 승격시키고 防禦營을 만들어 監牧官을 겸하게 하였다. 지도에는 진도뿐만 아니라 육지부의 해안 마을도 진도부에 속해 있는데, 이는 진도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도는 남해안에 위치한 섬이라서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이 때마다 육지부의 月阿只, 命山里, 三村面 등에 피난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이들 지역이 진도의 소속이 된 것이다. 진도는 서남해안의 길목에 위치한 섬으로 조선시대에는 서해안 방어의 중요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 지역의 관문인 鳴洋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격파했던 명량해협이다. 읍성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자세한데 특히 수령이 직무를 보던 衙舍와 望闕禮를 행했던 客舍가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특히 이 시기 砲軍의 증설과 관련된 火砲廳의 모습도 보인다. 고을의 남쪽에는 당시 해안방어기지였던 金甲鎭, 南桃鎭이 성과 함께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해안의 도서와 내륙 하천 연안에는 밀물과 썰물 때의 수심도 아울러 기재하였다. 읍성 서남쪽의 船所에는 각종 선박의 모습도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특히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는데 그려진 형상은 다른 배와 유사하다.

  • 진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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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군지도 珍山郡地圖, 진산군은 지금의 전북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는데 비교적 면적이 작은 고을이다. 읍치는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상류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錦山에 연결된다. 백제 시기의 珍同縣과 고려의 猿山鄕 지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고을이기 때문에 珍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지도는 고을의 鎭山인 大芚山이 위치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녹색으로 峰巒을 그려 연맥을 강조하였고 來脈을 옆에 표기하기도 했다. 1393년(태조 2) 고을 사람 陳舜道의 건의에 따라 태조 이성계의 胎를 영흥부에서 옮겨 봉안하고 고을을 縣에서 州로 승격시켰다. 지도상에도 고을의 동쪽 萬?山에 태조 이성계의 태실과 비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歡壽阿只氏의 胎室이 그려져 있지만 태조의 태실만큼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이 지역은 칠백의총이 있는 금산과 인접한 지역으로 지도에도 重峯 趙憲을 모시던 사당이 표시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왕림하기도 했는데 그의 필적이 새겨진 甲巖의 모습도 보인다. 고을 남쪽의 淸澄淵은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용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 진안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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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현지도 鎭安縣地圖, 진안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의 사이 고지대에 위치한 산간 고을로 북쪽은 금강 수계, 남쪽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한다. 지도는 산지가 많은 고을의 특성을 회화식 기법을 가미하여 표현하였다. 鎭山인 富貴山이 위치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특히 이 지역의 명산으로 손꼽는 馬耳山의 모습이 독특하다. 馬耳山(685m)은 마치 말의 두 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암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되었던 산이다. 신라에서도 西多山이라 하여 小祠를 지냈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행해졌다. 1413년(태종 13) 태종이 남행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이 산에는 신라 헌덕왕 6년(681) 慧鑑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金堂寺가 그려져 있고 修行屈, 華嚴屈, 鳳頭屈 등의 모습도 이채롭다. 읍치의 북쪽 上道面에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 후 이곳을 지날 때 석공을 시켜 길을 뚫게 했던 銘峴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 마령면은 馬靈縣이 있던 곳으로 섬진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하는 곳이다.

  • 창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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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현지도 昌平縣地圖,창평현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수북면,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평면 창평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는 산지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영산강 상류를 따라 담양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섬진강 지류를 따라 동복에 연결된다. 지도 위쪽의 장북면과 장남면은 長平部曲의 자리로서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일대이고, 甲鄕面은 甲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대전면 갑향리 일대로서 모두 창평의 越境地에 해당한다. 담양 고을을 넘어 위치해 있지만 군현의 경계가 표시되지 않아 흡사 인접한 지역처럼 보인다. 산지는 峰巒을 연결시켜 맥세를 강조하였고 산을 行龍에 비유하는 등 풍수적 지형인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 북쪽의 龍龜山에는 龍興寺와 毓祥宮願堂이 그려져 있는데, 육상궁은 영조의 모친 崔淑賓을 모신 사묘이다. 영조의 모친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영조를 낳았는데, 용흥사와 夢仙山 등의 지명의 모두 영조의 탄생과 관련된다. 古縣面에는 息影亭, 瀟?園 등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이 그려져 있다. 소쇄원은 梁山甫(1503~1557)가 은사인 정암 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別墅庭園이다. 息影亭은 1560년(명종 15) 棲霞堂 金成遠(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인 石川 林憶齡(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 청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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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진지도 靑山鎭地圖,청산진은 지금의 전남 완도군 청산면에 위치했던 수군 진영으로 남해안 방어의 전초 기지였다. 진영은 청산면 당낙리 일대에 있었다. 본래 康津에 속해 있었으나 영조 때에 延齡宮에서 절수했다. 이어 1866년 獨鎭을 만들고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守防將을 겸하게 하였고 우수영 관할하에 있었다. 지도는 청산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도서를 배치시켰다. 진영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1871년 僉使 朴鼎熙가 쌓은 것이다. 鎭城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첨사의 명령을 전달하던 吸唱廳도 보인다. 주변의 島嶼에는 진영으로부터의 거리와 수심, 그리고 소속처를 표시하였다. 도서의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것에 그쳤기 때문에 면적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 태인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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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현지도 泰仁縣地圖, 태인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金溝, 남쪽으로는 井邑과 연결된다. 고을의 안쪽을 동진강의 상류가 돌아나간다. 지도는 연맥을 중시하는 풍수의 山圖적 기법을 사용하여 읍치를 중심으로 명당의 형국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면서도 산지를 회화식으로 세밀하게 그려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披香亭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披香亭은 신라 말 정강왕 때 孤雲 崔致遠이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세웠다 하며, 그 뒤 여러 번 증수하였는데 기둥이 33개이고 29평의 웅장한 건물로 동서쪽에 연못이 있다. 읍치 동쪽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 아래에서도 훼철되지 않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서남쪽 경계의 동진강 상류에는 당시 潮水가 進退하던 곳이라 기재되어 있다.

  • 함열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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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현지도 咸悅縣地圖,  함열현은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함열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접해 있으며 위로는 龍安, 아래로는 臨陂에 연결된다. 고을의 중심을 돌아나가는 함열천을 중심으로 평지가 펼쳐져 있다. 고을의 진산인 咸羅山이 있는 서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東二面의 龍山에는 성터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1440년(세종 22)에 읍치를 옮기려고 쌓았던 성인데 읍치의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을 북쪽 금강변에는 聖堂倉의 여러 건물들과 배들이 그려져 있다. 聖堂倉은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得城倉이 수로가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종 때 海倉이 있는 皮浦로 옮겼다가 1487년(성종 18)에 이곳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함열 등 인근 8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던 漕倉이었다. 지도에도 조세업무를 관장하던 聖堂捧稅廳을 비롯하여 沙工廳, 倉庫와 선박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선박의 순항을 기원하던 곳으로 보이는 順風堂의 모습도 보인다.

  • 함평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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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평현지도 咸平縣地圖, 함평현은 지금의 전남  함평군 관내에서 엄다면, 학교면을 제외한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 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서쪽으로 서해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靈光, 남으로는 務安에 연결된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회화적 기법을 가미하여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관아의 모습과 해안가 선박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옆을 흐르는 穎水변에는 영수헌이 그려져 있다. 穎水軒은 1455년(단종 3)에 潁波亭 李岸이 세운 것인데,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807년(순조 7)에 새로 지었다. 영수 건너편의 향교는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달리 聖廟라고 표기되어 있다. 함평만의 孫佛面 해안에는 海倉이 있는데 지금의 손불면 석창리 일대에 해당한다. 田稅庫와 大同庫가 그려져 있고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던 稅船의 모습도 상세하다. 읍치 북쪽의 龍泉寺는 신라 성덕왕 11년(721)에 세워져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0년(선조 33)에 다시 세웠다. 여기에는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돌우물이 있고 석등과 해시계가 유명하다.

  • 해남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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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현지도 海南縣地圖, 해남현은 지금의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문내면, 북일면, 산이면, 삼산면 서부, 현산면, 화산면, 화원면, 황산면과 신안군 비금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채색을 가미하여 고을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산지는 녹색과 청색을 사용하여 수목과 암벽을 표현하였고 전체적으로 흡사 꽃이 피듯한 구도로 邑治가 있는 내부공간을 강조하였다. 특히 읍성의 남문 밖 남천에는 무지개 모양의 虹橋가 그려져 있다. 이 다리는 수령 金敍九가 축조한 것으로 그 옆에는 聽流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도에 그려진 廳流碑는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서쪽 장내면, 지금의 진도대교 상단에는 우수영이 포진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방어용 성곽과 더불어 여러 관청 건물이 상세하고 해안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각종 병선의 모습도 잘 그려져 있으며 東門 밖에는 이순신 장군의 대첩비가 그려져 있다.

  • 화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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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현지도 和順縣地圖, 화순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화순읍, 동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가는 산지에 위치한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 영산강의 지류인 화순천이 고을을 감돌아 나간다. 지도는 화순의 모습을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하였는데 전라도의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세밀한 정도가 떨어진다. 광주 서석산 남쪽에서 뻗어온 주맥이 고을의 진산인 羅漢山이 되는데, 여기에서 내려가는 용맥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울타리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양반들이 수령을 보좌하던 鄕廳이 다른 건물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이 고을의 土産物 중에서 鐵이 유명한데 동면에는 鐵場도 보이고 있다. 지도 상단에는 건치연혁과 주요 지역과의 거리가 수록되어 있다.

  • 흥덕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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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현지도 興德縣地圖, 흥덕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면 남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에 있었다. 서북쪽으로 해안과 접해 있으며 위로는 부안, 고부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茂長과 연결된다. 지도는 전라도의 다른 군현지도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다. 지도의 상?하단으로 郡名?社倉?程道 등이 수록되어 있으나 보는 방향이 서로 반대로 된 점이 특이하다. 고을의 주맥은 부안 변산에서 뻗어 온 培楓峴인데 산이 아니고 고개이다. 곰소만으로 들어가는 갈곡천의 모습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천의 하류에는 沙浦가 있고 그 옆에는 창고가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사포는 沙津浦라고도 하는데 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동지지?에는 鹽盆과 漁箭이 있고, 商船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창에서는 흥덕현의 田稅穀과 大同米가 수납되어 私船에 의해 경강에 상납되기도 했다. 서쪽에 있는 壺巖을 흡사 병처럼 그린 점이 이채롭다.

  • 흥양사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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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사도진지도 興陽蛇渡鎭地圖, 사도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일대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1789년 官舍의 화재로 인해 관련 서류들이 불타 건치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지도는 회화식 기법을 사용하여 진영과 주변도서를 묘사하였다. 진영의  주맥이 되는 八田山의 모습이 강렬한데, 현재 八影山이라 부른다. 진영의 성곽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포진해 있는데, 射夫를 관할하던 射夫廳도 보이고 있다. 진영 앞의 선소에는 돌로 쌓여진 선창의 모습이 선명하고 각종 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이곳에는 다른 진영과는 달리 전선, 병선이 2척씩 있었다. 서북쪽의 팔전산 기슭에는 이 지역의 명찰인 楞伽寺가 그려져 있다. 능가사는 삼국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팔영산 하단부에 있는 평지형 사찰로 일명 보현사라고도 전한다.

  • 흥양현녹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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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녹도진지도 興陽縣鹿島鎭地圖, 녹도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일대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다. 현재 이곳에는 鹿島라는 지명이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전면에 小鹿島가 있다. 아마도 진영이 있었던 곳은 녹도라는 섬이었는데 오래 전에 간척으로 인해 고흥의 본섬과 붙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녹도진의 연혁에 관한 문적은 1587년 왜군의 침입으로 인해 바다에서 유실되었다고 상단에 쓰여져 있다. 지도에는 帳機山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고 鎭城 내부와 선창의 모습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해안에는 조운선이 통과하는 수로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진영의 북쪽에는 牧場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道陽牧場으로서 여기에 파견된 監牧官은 小鹿島, 折?島, 示山島, 羅老島 등에 설치된 목장도 관할하였다.

  • 흥양현발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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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발포진지도 興陽縣鉢浦鎭地圖, 발포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일대에 있었던 수군 진영이다. 전라 좌수영 산하의 수군 진영으로 건치연혁에 대해서는 1834년 동헌의 실화로 문적이 소실되어 알 수 없다고 지도 상단에 기재되어 있다. 지도에는 진영의 모습이 회화적 기법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성밖의 빽빽한 민가의 모습은 다른 진영의 지도에서는 보기 힘들다. 鎭城은 1490년(성종 21)에 축성되었고 전하며 1589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 때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했다. 선소에는 선박의 모습과 함께 방파제에 해당하는 石墩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軍兵의 상세한 내역이 수록되어 있는데, 戰船軍兵은 166명, 兵船軍兵은 52명, 伺候船에는 格卒 6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병선은 전선을 축소한 형태로 판단되며 전선처럼 전투를 위해 제조되었던 선박으로 보인다. 발포진은 현재 복원되어 이순신 장군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 흥양현여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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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여도진지도 興陽縣呂島鎭地圖, 여도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일대에 있었던 수군 진영으로 수군만호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도진은 남쪽으로 팔영산을 등지고 있으며, 전방에 元珠島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계도, 그리고 동쪽으로 項島에 둘러싸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지도는 진영의 모습을 회화적 기법으로 묘사하였는데 南山에서 鎭城으로 뻗어내린 맥세가 강렬하다. 선소에는 戰船과 兵船 등의 모습이 선명하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전선의 군졸은 171명, 병선의 군졸은 55명으로 세 배 이상의 차이가 나고 있다. 원형으로 축성된 鎭城은 1491년(성종 2)에 축성된 것으로서 그 둘레가 1,320尺, 높이가 15尺이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 흥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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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양현지도 興陽縣地圖, 흥양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흥읍 옥하리, 행정리, 서문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의 고흥반도에 위치해 있어서 해안 방어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도에도 위쪽으로부터 呂島鎭, 蛇渡鎭, 鉢浦鎭, 鹿島鎭 등이 포진해 있다. 흥양현은 원래 장흥부에 딸린 高伊部曲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11년 고을 아전 柳庇가 통역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이 있어 高興으로 이름을 고쳐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세종 때 장흥부의 南陽縣과 합쳐져 흥양으로 된 것이다. 비록 部曲에서 출발했지만 대강면으로 표시된 泰江폐현, 남양면으로 표시된 南陽폐현, 두원면으로 표시된 荳原폐현, 도양면으로 표시된 道陽폐현, 포두면 자리에 있었던 豊安폐현, 도화면으로 표시된 道化폐현 등을 거느린 큰 고을이었다. 읍치에는 성곽과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虹橋로 된 水口는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이 홍교는 1871년 읍성 수축 시 만들어진 것인데, 이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872년 지도제작 당시 새로운 사실을 즉각 반영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읍치 남쪽의 道陽面에는 牧場이 그려져 있다. 監牧官 1인이 파견되어 있었고 小鹿島, 折?島, 示山島, 羅老島 등에 설치된 목장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 ▶충청도
  • 결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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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지도 結城縣地圖,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은하면, 구항면, 광천읍, 서부면 일대.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지도의 상단은 바닷가인 서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도의 중앙에는 건치연혁이 서술되어 있고 주변의 각면에는 소속된 里와 인구수가 注記되어 地志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산지는 일관된 시점으로 그려져 있지 않으며 흡사 털을 그린 것처럼 독특하게 표현되었다. 하천을 청색으로 크게 그려 강조하였다. 이전 시기 제작된 읍지나 군현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와는 특별한 연관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1399년 읍치를 衡山 밑의 神衿城에서 옮겼는데 지도에는 과거 읍치를 성곽으로 표시하였다. 읍치에 그려진 성곽에는 東門 하나만 표시되어 있는데 방어적 성격이 강한 읍성임을 알 수 있다. 廣川面과 龍川面의 장시와 주요 도로상에 店들이 다수 그려진 것을 통해 이 시기의 상업 기능을 엿볼 수 있다. 社壇, 城隍壇, ?壇의 三壇을 비롯하여 기우제를 지냈던 雩所도 상세히 그려진 점이 특징적이다.

  • 공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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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목지도 公州牧地圖,지금의 충남 공주통합시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 1872년 충청도 군현지도 가운데 지도의 제목이 표기되지 않은 유일한 지도이다. 지도의 왼쪽에는 山川, 道里, 倉庫, 寺刹, 場市, 古蹟 등의 地志 항목이 기재되어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東西南北의 글자로써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천의 표현은 다른 군현의 지도보다 회화적 성격이 강한데 계룡산을 비롯한 산은 수목까지도 그려 넣었고, 강 연안의 절벽과 사찰의 건물 모양, 심지어는 강에 떠 다니는 배를 그리기도 하였다. 충청도의 監營과 右營이 있었던 읍치에는 지붕 모양을 그려 넣어 인구가 밀집해 있음을 나타내었다. 다른 지도와는 달리 洞里名이나 호구수를 기입하지 않고 단지 面名만을 해당지역에 표기하였다. 도로는 황색의 쌍선으로 표시하였고 다른 군현에서는 店으로 표시된 酒幕이 그려져 있다. 또한 좌측의 地志 항목에서는 場市 13곳으로 자세히 기재되어 있으나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고지도에서는 모든 사항이 반드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선별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읽는데 주의해야 한다. 지도 제작자의 의도와 지도 이용의 목적 여하에 따라 표현되는 정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남포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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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지도 藍浦縣地圖,지금의 충남 보령통합시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미산면, 외산면, 성주면 일대. 서해안에 연한 군현으로서 읍성이 축조되어 있다. 각면 소속의 동리명과 戶數가 주기되었으나 건치연혁은 빠져 있다. 산지는 細毛를 그려 연속하여 표현하였다. 성곽은 정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고 각문에는 甕城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성곽의 내부 공간은 관청의 건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홍선의 도로상에는 店과 大川市, 艮峙市 등의 장시가 표시되어 있다. 각지의 사창과 해안의 海倉, 南還倉 등의 창고가 그려져 있고 해안의 船所에는 防船, 兵船, 伺候船 등의 배를 그려 해안 방어의 기지임을 표시했다. 馬梁鎭은 터로 남아 있는데 相臣 李尙眞이 효종 때 배를 대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啓達하여 庇仁으로 옮기게 하였다. 新安面에 있었던 朱夫子院所는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음을 주기해 놓았다. 北面山外에는 崔孤雲碑와 塔, 水鐵佛이 그려져 있는데 원래 聖住寺가 있던 자리이다. 최고운비는 최치원이 撰한 朗慧和尙塔碑를 말하는데 현재도 이 비와 탑이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 노성현읍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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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현읍지도 魯城縣邑地圖,지금의 충남 논산통합시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 일대.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數, 道里 등이 주기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은 연맥을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으나 峰巒을 보다 기호화된 형태로 그린 점이 독특하다. 읍치에는 자세한 관청 건물을 그리지 않고 官舍, 客館 등의 건물만을 그려 넣었다. 도로를 흑색 쌍선에 황색으로 채색하여 강조하였으며 도로 주변에 장시와 점을 표시하였다. 점과 장시는 도로가 만나는 곳이나 나루터가 있는 교통의 요지에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지에 산재해 있는 제언도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古城이 있는 魯城山에는 성첩을 그려 강조하였다. 주변의 사창은 노란 지붕을 그려 표시하였다. 素沙面에는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 등을 배향했던 魯崗書院이 대원군 집정기 서원 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단양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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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군지도 丹陽郡地圖,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 여타 군현에 비해 회화성이 강한 지도로 지도의 상단에는 道里?還總?結總?軍總 등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했는데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하천보다는 산지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는데 산의 바위나 수목을 산수화적인 기법으로 잘 묘사하였다. 산봉우리가 향하는 방향은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 일종의 變動視點(variable perspective)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은 하천을 따라 절경이 펼쳐져 있는데 지도에서도 龜潭, 下仙巖, 敬天壁, 蒼壁, 島潭里의 三峰 등의 기암절벽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다른 군현처럼 各面 밑에 소속 동리면을 표기하지 않고 노란 지붕의 집을 그려 洞里를 표시한 점도 독특하다. 그러나 관청 건물은 청색의 지붕으로 그려 기와집과 초가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군현과는 달리 店幕이 표시되지 않고 단지 읍내와 北面에 市邊으로 장시를 표시한 것도 특징적이다.

  • 당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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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현지도 唐津縣地圖,지금의 충남 당진군 당진읍, 석문면, 고대면 일대. 고을의 건치연혁,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數가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과 비슷한 양식이다. 방위표시는 없으며 바다와 하천, 제언과 연못 등과 같은 물은 청색으로 표현하였다. 산지는 빗금을 사용하여 유형화된 형태로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三街場을 큰 홍색의 원으로 店은 상대적으로 작은 원으로 표시하여 위계를 나타내었다. 홍선으로 도로를 표시하였으며 다리도 특징적으로 그려 넣었다. 특히 제언은 다른 군현과 달리 陂 또는 洑로 표기된 점이 독특하다. 龍德洑와 石洑는 하천을 가로질러 그려져 있는데 하천수를 막아 관개에 이용하는 수리방식으로 사료된다. 金長生의 스승으로 예학에 뛰어났던 龜峰 宋翼弼(1534-1599)의 齋室과 墓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역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해안가의 경승지로서 암석이 솟아 흡사 문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石門도 표시되어 있다.

  • 대흥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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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지도 大興郡地圖,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신양면, 광시면, 응봉면 일대. 고을의 건치연혁과 道里,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數 등이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과 동일한 양식이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였으나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는데 흡사 머리털을 그린 것처럼 가는 선을 겹쳐 그렸다. 鳳首山에 있는 백제 때의 고적인 任存城은 흰 성첩으로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邑場, 光時場, 新陽場 등은 大紅圈으로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店들은 小紅圈을 사용하여 위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도로도 홍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굵기를 달리하여 대로와 소로를 구분하였다. 또한 高麗 胎室, 顯宗大王胎室, 翁主胎室 등을 태를 보관했던 항아리의 모양으로 상징화시켜 산의 정상에 그려 넣었는데 이것도 크기를 달리하여 위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창고 건물, 사찰 건물 등을 유형적으로 표현하였는데 회화식을 가미하면서도 기호적 양식을 띠는 사례로 볼 수 있다.

  • 덕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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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군지도 德山郡地圖,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봉산면, 고덕면, 삽교읍 일대.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고을의 건치연혁, 각면 소속의 洞里名, 호구 등이 주기되어 있다. 방위의 표시는 없으며 산지는 細毛를 겹쳐 그려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홍선의 도로망을 따라 店이 표시되어 있으며 古縣內面의 大川場도 부각되어 있다. 非方串面은 德山縣의 越境地로서 중간이 낀 지역인 천안과 홍주의 지역은 그리지 않고 글자를 써서 나타내었다. 사창과 제언이 또한 상세히 표시되었다. 이 지역의 형승인 石門峰이 흡사 문과 같이 그려져 있다. 가야산 남쪽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南延君의 墓와 祭閣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남연군묘는 1868년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어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었는데 그와 관련되 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밑에 있는 胎封도 산봉우리에 부각시켜 표시하였다. 당시 경승지로 꼽았던 石門潭과 臥龍潭은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도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면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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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군지도 沔川郡地圖,지금의 충남 당진군 면천면, 송악면, 송산면, 신평면, 순성면, 합덕읍 일대.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고을의 건치연혁, 道里, 각면 소속의 동리명, 인구수 등이 주기되어 있다. 산은 읍치를 감싸는 환포형으로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다. 고을의 主山인 蒙山에는 성첩을 그려 과거 성이 있었음을 표시하였는데 沔州 때 읍치였던 곳이라 전해진다. 충청도에서 읍성이 있던 곳은 해안 지역의 군현들로서 해안 방어상의 필요에서 수축되었다. 沔川에도 성곽이 축조되었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이 시기에는 문루가 없어지고 성곽도 많이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군사적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관청 건물의 표현은 대부분 정면도의 양식을 띠고 있으나 수령의 숙소였던 內衙 건물만은 평면도로 그린 점 또한 독특하다. 아산만의 泛川浦는 고려시대 이 지역의 중요한 漕倉으로 기능했으나 토사가 쌓이면서 배를 댈 수 없어서 1478년(성종9)에 아산의 貢津으로 이전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泛斤市場을 비롯하여 각지에 店이 형성된 모습도 반영되어 있다. 東岳書院이 1870년(고종7)에 훼철된 사실도 지도에 기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入番하던 砲所가 해안의 요지에 그려져 있다.

  • 문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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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지도 文義縣地圖,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 고을의 연혁과 각면의 인구 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각면 소속의 동리명은 빠져 있다. 전체 구도상의 특징은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읍의 祖山격인 楮子山과 안산인 文景峰은 표기되어 있으나 읍의 주산인 養性山은 표기되지 않았다. 읍치 옆에는 장터가 그려져 있으나 도로상에 형성되는 店은 보이지 않고 있다. 1610년(광해 2)에 창건되어 圭菴 宋麟壽 등을 배향한 魯峯書院이 遺墟로 그려져 있는데 이 서원은 전면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던 1871년에 훼철되었다. 각면뿐만 아니라 사창, 제언, 주요 산과 고개 등에는 읍치에서의 거리를 주기하여 지도의 이해를 돕고 있다.

  • 문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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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지도 文義縣地圖,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 고을의 연혁과 각면의 인구 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각면 소속의 동리명은 빠져 있다. 전체 구도상의 특징은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여 읍치의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읍의 祖山격인 楮子山과 안산인 文景峰은 표기되어 있으나 읍의 주산인 養性山은 표기되지 않았다. 읍치 옆에는 장터가 그려져 있으나 도로상에 형성되는 店은 보이지 않고 있다. 1610년(광해 2)에 창건되어 圭菴 宋麟壽 등을 배향한 魯峯書院이 遺墟로 그려져 있는데 이 서원은 전면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던 1871년에 훼철되었다. 각면뿐만 아니라 사창, 제언, 주요 산과 고개 등에는 읍치에서의 거리를 주기하여 지도의 이해를 돕고 있다.

  • 보령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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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부지도 保寧府地圖,지금의 충남 보령통합시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주교면, 오천면  일대. 충청도 해안 방어 기지인 水營이 있던 지역으로 1871년(고종8)에 水營에 합속되면서 兼府使로 승격되었다. 지도의 상단에는 보령부와 수영에 대한 연혁을 비롯한 몇 가지 지지 항목이 주기되어 있고 各面에는 소속 동리명과 인구수도 기재되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청색의 담채를 사용하여 서로 연결시켜 그렸으며 점을 찍어 수목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천과 바다는 황색을 사용하여 채색한 점이 독특하다. 伏兵里, 軍入浦, 冠巖, 蟻坪, 高巒山, 王臺山 등과 같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 특정 지명은 그 지명의 유래를 옆에 주기하여 놓았다. 고을의 남쪽에는 大川市, 북쪽에는 瓮巖浦市 등의 장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노란색의 지붕을 그려 가옥이 밀집해 있음을 나타내었다. 주변 지역의 社倉, 堤堰 등도 상세히 그렸는데 이 지역 자체가 해안 방어와 관련된 요충지의 성격을 지니므로 樓亭, 寺刹 등과 관련된 문화 유적은 드문 편이다. 해안의 섬들은 보령에 속한 땅이 아니라 대부분 洪州와 庇仁의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 보은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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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군지도 報恩郡地圖,지금의 충북 보은군 보은읍,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탄부면, 삼승면, 수한면 일대. 이전 시기의 지도들과는 전체적인 구도, 산계와 수계의 표현을 달리하고 있어서 이 시기 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연혁과 각면 소속의 동리명, 인구수 등이 다른 지도와 달리 기재되어 있지 않다. 산지의 표현도 여타의 군현에 비해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검은 점을 찍어 수목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방위에 있어서도 東西南北의 글자와 乾坤艮巽의 4괘를 사용하여 八方을 표시하였다. 읍내에는 상세한 관청 건물의 배치를 표현하지 않고 단지 邑內라는 글자를 표기하였는데 지역의 중심부인 읍내와 주변 지역이 동일한 축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면에는 1866년 사창제의 실시를 반영하는 사창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인 三年山城과 栢峯山城 등이 그려져 있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많이 훼손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장시는 읍내가 아닌 元巖驛 부근과 旺未面 館基里에 형성되어 있는데 도로가 교차하여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입지하고 있다. 다른 군현의 지도에 통상 표시되고 있는 제언은 이 지도에서는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 부여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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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지도 夫餘縣地圖,지금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은산면, 규암면, 초촌면 일대로서 백제의 古都이다. 지도의 하단 여백에 고을의 연혁과 부여의 八景을 주기하여 地志로 지도를 보완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고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백마강을 연하고 있는 읍치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는데 전체적인 지도의 구도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충청도읍지》의 지도와 대략 유사하다. 산지는 풍수의 山圖에서 보이는 방식으로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天政臺, 落花岩, 自溫臺 등의 기암절벽은 회화식 기법으로 절경을 강조하였다.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平濟塔이 그려져 있다. 白江 李慶輿, 愼獨齋 金集 등을 배향한 浮山書院이 훼철된 상태로 그려져 있고, 백제 충신 成忠과 階伯, 그리고 고려충신 李存吾 등을 배향한 義烈祠도 마찬가지로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각지의 社倉, 길가의 店, 堤堰 등도 비교적 자세히 그려져 있다.

  • 비인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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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현지도 庇仁縣地圖,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 일대. 고을의 건치연혁과 서울?감영?병영?수영까지의 거리, 인구, 풍속 등을 기록하여 地志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각면에는 다른 군현지도에서처럼 소속 동리명과 인구수 등이 없이 단지 읍치로부터의 거리만 주기하였다. 또한 읍성으로 둘러싼 읍치는 상대적으로 축척을 크게 적용하여 관청 건물 등을 상세히 그리지 않고 단지 읍성을 표시하여 읍치를 나타냈다. 각면의 사창과 더불어 장시와 店 등은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표시되어 있다. 해안 지역에는 1763년 洪鳳漢의 건의에 의해 곡물 대여기관으로 세워진 濟民倉이 표시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는 폐지되고, 田稅와 大同米를 捧上하는 舒川의 海倉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兪起昌과 兪汝霖 부자를 배향한 淸節祠와 具滉을 배향한 ?山祠, 申崇謙 등을 배향한 栗里祠 등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一方面에 있는 鍾川店은 본래 鍾川場이었는데 장시 기능이 상실되면서도 店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해안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데 변화된 당시 현실을 파악해 볼 수 있다.

  • 서산군산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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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산천도 瑞山郡山川圖,지금의 충남 서산통합시 대산읍, 지곡면, 팔봉면, 성연면, 음암면, 인지면, 부석면 지역. 서해안 태안반도의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높은 산지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긴 하천이 덜 발달된 지역이다. 지도의 우측 하단에는 道里, 郡名, 古蹟 등의 地志 항목이 기술되어 있고 각면에는 소속 洞里名과 戶數가 주기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산지는 연맥으로 표현하면서도 회화적 수법으로 입체감을 살려 표현하였다. 여타 군현처럼 각지의 사창과 제언이 표시되었으며 홍선의 도로상에 흔히 볼 수 있는 店은 다 市로 표시되어 있다. 僉使鎭인 平薪鎭에는 관아 건물을 그려 표시하였는데 원래 望日山 아래 목마장과 같이 있다가 목마장이 남양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三吉山 밑으로 옮겼다. 서산의 관내에 있는 홍주의 월경지인 雲川面은 경계를 그어 구분해 놓은 점이 특이하다.

  • 서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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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지도 舒川郡地圖,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 읍치 공간을 지도의 중심에 배치하여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읍치가 지니는 중심성을 부각하였다. 읍의 主山인 烏石山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읍치를 둥글게 감싸 안고 있으며 성곽이 축조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읍성은 甕城이 17곳이나 되고 성내 곳곳에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어적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에는 읍치의 이동 상황이 잘 표시된 점이 특징적인데 백제 舌林郡이었던 때는 豆山面에 있었고, 신라 西林郡이었던 때에는 보다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 文章面에 위치했다. 고려 西州牧 시기에는 남쪽의 靈鷲山 정상에 있었으나 땅이 경사지고 험하여 세종 때 이곳으로 옮겼다. 주변 각면에 소속 동리명과 인구수가 주기되어 있으며 城底의 특정 지역에는 里 단위로 인구수가 기재되어 있다. 서해상의 開也島에는 당시 55戶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봄철이면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른 군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각지의 제언, 사창 등이 표시되어 있고 주요 도로에 위치하고 있는 다리를 노란색으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 석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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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지도 石城縣地圖,지금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 성동면 일대. 석성현의 간략한 연혁과 각 면에 소속 리명과 인구수 등이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들과 유사하다. 산지의 표현이 특징적인데 풍수의 山圖에서와 같이 환포형으로 읍치를 감싸게 그려 명당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는 백제의 태조가 놀았던 太祖山, 도사 田禹治가 독서하다 비결을 얻었던 波鎭山, 읍의 주산인 옥녀봉에는 삼한시대의 산성이 남아 있는 山城洞,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군사를 숨겼던 軍藏洞 등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지역을 부각시키고 있다. 각지에 산재해 있는 제언을 소상히 그려 넣었으며 도로를 따라 형성된 店들도 잘 그려져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尹文擧를 배향했던 蓬湖書院이 1868년에 毁撤된 사실도 반영되어 있다. 남북의 사창과 더불어 강 연안의 稅倉도 그려져 있다.

  • 신창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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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지도 新昌縣地圖,지금의 충남 아산통합시 신창면, 도고면, 선장면 일대.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형태를 띠는 지도이다. 남동쪽이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 공간인 읍치를 중심으로 환포형으로 산지를 그렸으며 주변에 각 동리를 표시하고 읍치에서의 거리를 주기해 놓았다. 읍치에는 다른 군현지도처럼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리지 않고 衙舍만 그려 표시하였다. 하천은 지류를 점선으로 표시하여 본류와 구분하였다. 社倉은 노란색 건물로 표시하였고 읍치에 있는 鶴城山은 성첩을 그려 과거 산성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동리의 지명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수록된 내용이 많지 않아 소략한 느낌을 주는 지도이다.

  • 아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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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현지도 牙山縣地圖,지금의 충남 아산통합시, 염치읍, 인주면, 둔포면, 영인면, 음봉면 일대.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數, 時起結數, 道里 등이 주기되어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였고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山圖에서의 표현법을 이용하여 환포식으로 그려 명당판으로서의 읍치 공간을 강조하였다. 靈仁山이 고을의 鎭山이 되며 북서쪽으로 水口가 잘 關鎖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을의 서쪽 해안가에는 湖西의 漕運을 위해 설치한 貢稅倉이 그려져 있는데 1523년(중종18)에 처음으로 창을 설치하였고 1631년(인조9)에는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 안에는 아산을 비롯하여 全義?木川?淸州?燕岐?天安?溫陽 등의 田稅倉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창이 설치된 후 백성들과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상당히 번창했던 곳이기도 하다. 홍선의 도로상에 형성된 店들과 사창, 제언 등이 표시된 점은 대략 다른 군현의 지도와 유사하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해안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것도 보이고 있다.

  • 연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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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현지도 燕岐縣地圖,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 읍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금강의 지류인 東津江이 흐르고 주변으로 산지가 지역을 감싸안고 있다. 충청도의 다른 군현의 지도처럼 간략한 고을의 연혁과 관내 각면에 속한 동리명, 인구수 등이 주기되어 있다. 하천을 짙은 청색으로 그려 산지보다 더 부각되는 느낌을 준다. 남쪽의 燕川所 부근에는 이전 시기의 지도에는 없었던 물줄기가 그려진 점이 독특하다. 읍내장을 비롯하여 각지에 형성된 店들이 이 시기 상업적 면모를 짐작케 해준다. 城山과 龍塘山, 轉月山, 松峴屈에 祈雨壇이 표시되어 있는데 각 군현에 하나씩 존재했던 사직단, 성황단, 여단 등과는 달리 관내 여러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北二面에 있는 鳳巖書院이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고 新興寺, 聖堂菴 등의 사찰도 폐찰이 되어 관내에는 사찰이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연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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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지도 連山縣地圖,지금의 충남 논산통합시 연산면, 두마면, 벌곡면, 양촌면, 부적면 일대. 산천이 雄麗한 지역의 특성이 잘 표현된 지도이다. 이 지역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이 마지막 격전을 치렀던 곳인 황산벌로 유명한 곳이다. 계룡산, 대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회화적 수법을 가미하여 그려져 있다. 고을의 鎭山이 되는 일명 黃山으로 불리는 天護峯에서 읍치로 뻗어 내린 맥이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방위 표시, 건치연혁, 각면 소속의 동리명, 호구 등이 주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홍선의 도로상에 형성된 店과 각면의 社倉, 그리고 지역에 산재된 堤堰 등은 다른 군현의 지도에서처럼 그려져 있다. 시장은 豆磨面과 읍내에 형성되어 있다. 外城面에는 1632년 창건되어 金長生, 宋時烈 등을 배향한 遯巖書院이 철폐되지 않고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둔산 연맥에는 고려 때 達里라는 土賊이 웅거해서 붙여진 達里城과 白石面의 산성 터에는 성첩을 그려 표시하였다. 읍치에 연한 하천가에 가마솥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원래 開泰寺에 있던 것으로 이 절이 폐찰된 후 큰 장마에 여기로 떠내려 왔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나다리와 더불어 3대명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 연풍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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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지도 延豊縣地圖,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상모면 일대. 산지의 표현 방식이 ?輿地圖書?나 ?湖西邑誌?와 유사하여 이들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의 戶口數를 주기한 것은 다른 군현과 유사하나 읍내를 제외한 각 동리명을 해당 지역에 배치시킨 것이 다르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했으나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삼각형의 봉우리를 연이어서 그렸는데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듯 그렸다. 하천은 청색으로 그렸고 백두대간의 준령에서 흘러내리는 ?玉瀑布는 굵게 그려 떨어지는 물줄기를 강조하였다. 龍游潭에도 암벽을 회화적 수법으로 그려 절경을 강조하였다. 또한 영남대로의 관문인 조령관은 집을 그려 부각시켰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고개였던 鷄立嶺에는 도로도 그려져 있지 않아 고개의 기능이 상당히 쇠퇴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조령이 영남 제일의 관문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시되면서 주변의 고개들을 폐쇄한 결과로 보여진다. 그러나 伊火峴, 松峴 같은 고개는 여전히 이 시기에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水回面의 水回市를 비롯하여 각지의 店을 통해 당시 상업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영동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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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지도 永同縣地圖,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 지도의 하단에 영동현의 연혁을 수록했고 各面에는 읍치에서의 거리와 소속 동리명, 호구수를 기재하여 지지가 결합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남북의 방위 표시에 따라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점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특히 산지의 표현은 山圖의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맥의 흐름을 강조하여 풍수적 관념이 지형 표현에서도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로와 면표시를 홍선으로 처리한 것 외에는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수묵 담채의 형식을 띠고 있다. 또한 경치가 수려한 기암절벽은 강조하여 표현하였는데 절벽 하나만 독자적으로 그리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산의 맥을 같이 그린 점이 독특하다. 읍치의 내부공간에는 관청 건물의 배치를 비교적 자세히 표시했고 邑場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상업 기능도 읍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節度使 張弼武 등을 배향했던 花岩書院이 1868년(고종5)에 毁撤되었는데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永同과 같은 내륙의 군현에서도 포군의 증설이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영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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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지도 永春縣地圖,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 일대. 이전 시기의 읍지나 군현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와는 구도나 내용이 다른 것을 볼 때 이 시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군현지도처럼 간단한 고을의 연혁과 각면에 소속된 里名과 인구수를 주기하였다. 산지의 표현은 풍수의 山圖에서처럼 맥세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관청 건물의 배치가 상세하며 도로는 굵은 홍선으로 표시하였다. 도로 주변의 店과 주변 지역의 사창, 사찰 등도 그려넣었다. 고구려 때 온달이 쌓았다는 古城은 사각형의 성첩을 그려 강조하였다. 赤壁, 石窟 등과 같은 景勝에는 형상을 자세히 주기해 놓기도 했다. 이 지역은 영월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회암 지대로서 석회 동굴이 많이 분포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 옥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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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지도 沃川郡地圖,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 이전 시기 제작된 읍지, 또는 군현지도책에 수록된 지도와 특별한 관련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고을의 간단한 연혁, 각면 소속의 동리명, 인구수등이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방위를 표시하고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를 환포형으로 그려 강조하였으며 내부에는 관청 건물들을 상세히 배치하였다. 도로망을 홍선으로 그렸으나 다리는 표시되지 않았다. 역원 표시가 강조되어 있고 각지의 사창, 제언, 사찰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읍내의 邑市, 동쪽의 舟巖市, 남쪽의 伊原市, 서쪽의 陽山市 등과 같이 다른 군현에 비해 장시가 비교적 활발하게 형성되어 있음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店은 다른 군현에 비해 적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이 지도에는 정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그려져 있는데, 강을 연하여 참봉 金鍾慶이 지은 淸風亭,  周夢得이 지은 獨樂亭, 疎江亭 등이 있고 重峯 趙憲의 유적지인 二止堂, 觀稼亭 등도 그려져 있는 것을 통해 당시 이 지역의 정자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군사적 항목으로서 봉수대도 표시하였는데 다른 군현과 달리 연결 관계를 상세히 주기하고 있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특히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入番하던 砲手廳도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옥천과 같은 내륙의 군현에서도 포군의 증설이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온양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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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지도 溫陽郡地圖,지금의 충남 아산통합시, 배방면, 송악면 일대.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湖西邑誌?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여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東西南北의 글자로 四方을 표시하여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환포형으로 그렸는데 회화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가 주기되었는데 글자의 방향은 통일되지 않고 대략 산봉우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한 지역을 단일한 시점으로 파악하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社倉, 堤堰, 店 등이 표시된 것은 다른 군현과 유사하다. 이 지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도로의 표현이다. 온천이 있는 서면에는 역대의 많은 왕들이 행차하여 온천욕을 했던 溫宮이 그려져 있는데 읍치를 가로질러 이곳까지의 도로를 굵은 홍선으로 강조하였고 ‘御路’로 표시하여 권위를 부각시켰다. 온궁에는 內宮을 비롯하여 碑閣, 湯室 등의 건물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기우제를 지냈던 곳인 圓澤은 원모양으로 독특하게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1634년(인조12)에 창건되어 이황, 조광조 등을 배향했던 靜退書院이 毁破된 사실도 주기되어 있다.

  • 은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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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지도 恩津地圖,지금의 충남 논산통합시 은진면, 가야곡면, 강경읍, 연무읍, 채운면 일대. 고을의 연혁, 거리 수치, 각면에 속한 동리명과 인구수들을 주기한 것은 다른 지도와 대략 유사하다. 산천의 표현이 강하게 부각되었는데 산지는 전통적인 풍수적 관념에 따라 맥세를 강조하여 읍치를 환포식으로 그렸다.  방위도 남쪽이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되어 읍치의 북쪽에서 관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한 고을의 지도 제작에 있어서 특정방향이 지도의 북쪽으로 설정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찰의 표현에서는 내부 건물의 상세한 배치를 그린 점도 특징적이다. 특히 般若山 밑에 있는 灌燭寺에 있는 미륵불은 크게 과장하여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읍내의 邑市를 비롯하여 교통의 요지였던 논산의 장시, 그리고 이 지역 최대의 포구였던 江景의 장시를 통해 당시 이 곳의 상업적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강경포가 있는 金浦面에는 戶數가 698호로 다른 면에 비해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음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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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지도 陰城縣地圖,지금의 충북 음성군 음성읍, 생극면, 감곡면, 금왕읍, 대소면, 상성면, 원남면 일대. 관아 건물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강조하였고 주변의 면에는 소속 리명과 인구수를 병기하여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주요 산과 하천에는 연결관계를 주기하여 이어지는 맥과 흐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고을의 진산인 迦葉山에서 뻗어내린 맥을 풍수의 산도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을 사용하여 강조하였다. 오두산, 수정산 등지에는 성첩을 그려 산성이 있음을 부각시켰다. 읍치 전방의 장시와 도로를 따라 형성된 店들은 당시 상업 발달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의 사창도 그려져 있어서 社倉制의 실시를 보여주고 있다.

  • 임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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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군지도 林川郡地圖,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세도면, 장암면, 충화면, 양화면 일대. 전체적인 지도의 구도는 ?輿地圖書?와 ?湖西邑誌?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여 이들을 참고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측 여백에 고을의 연혁과 서울, 監營, 兵?水營, 前營까지의 거리가 기재되어 지지와 결합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관내 각면에는 소속 동리명이 빠지고 인구수만 주기되었다. 산지의 표현은 맥세의 연결관계를 강조하는 風水圖의 기법에서 다소 탈피한 느낌을 준다. 표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도로의 표시에서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도로는 홍색의 단선으로 그리는데 여기서는 쌍선에 황색으로 채색하였다. 또한 굵기를 달리하여 대로와 소로를 구별한 점도 눈에 띤다. 읍의 鎭山인 聖興山에는 성첩을 그려 산성을 표시하였는데 이 성은 고려 태조 때의 명장인 庾黔弼이 지켰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郡民들이 사당을 짓고 그의 木像을 만들어 숭배하는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또한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頒詔했던 頒詔院과 선조대왕과 공주들의 胎室, 郡守 金載久가 심었다는 嘉林藪 등이 당시에 의미있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연해 지방을 필두로 설치되는 砲軍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해안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것도 보이고 있다.

  • 전의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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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지도 全義縣地圖,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 여타의 군현과는 달리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동리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산지의 표현은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수직의 선을 사용하여 산을 특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각종 관청 건물이 위치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과장해서 그렸다. 특히 관청 건물 가운데 수령의 숙소인 內衙나 鄕吏들의 근무처인 作廳은 ㄷ자 또는 ㅁ자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정면도와 평면도를 결합한 양식으로 그린 점이 독특하다. 동서남북의 사창과 읍내의 장시, 도로를 따라 형성된 店들이 홍색과 황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북면에는 書院舊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雷巖書堂의 터를 말한다. 이 서당은 숙종 때의 문신인 打愚 李翔이 강학했던 곳으로 그의 사후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이 서당의 남쪽에는 四觀亭이 있는데 李翔이 거처하면서 동쪽으로는 雲注山, 남쪽으로는 雲霑山, 서쪽으로는 甑山, 북쪽으로는 月昭山을 바라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정자이다.

  • 정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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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지도 定山縣地圖,지금의 충남 청양군 정산면, 장평면, 목면, 청남면 일대. 지도의 상단과 하단에는 건치연혁, 도로, 사방 거리와 중요 지점과의 거리, 각면 소속의 동리명과 인구 자료가 수록되어 地志와 地圖가 결합된 양식을 띠고 있다. 이 지도는 다른 군현지도보다 풍수의 山圖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기맥의 흐름을 강조하여 환포형으로 산지를 표현한 것과 더불어 간지와 주역의 괘를 결합한 방위인 24방위가 둥글게 외곽을 둘러가면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읍내의 명당수가 外水인 현재의 해미천과 이어지는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주변지역의 제언을 녹색의 원으로 사창을 노란색 지붕으로 기호화된 형태로 표현하였다. 세곡을 거둬들였던 捧稅倉에 위치한 遠海亭과 당시 진사 趙行源의 집이었던 夢?亭도 확연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인들이 지녔던 정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 제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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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지도 堤川縣地圖,지금의 충북 제천통합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일대.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의 지역으로 산지는 山圖의 기법으로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의림지 주변의 수목과 폭포, 그리고 읍치로 이어지는 각 봉우리는 보다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각면 소속의 洞里名과 戶口數가 주기되어 있으나 건치연혁은 빠져 있다. 홍선으로 그려진 도로상에 형성된 店과 各面의 社倉 등이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표시되어 있다. 제천 읍치의 입지는 역사적으로 변동이 있었는데 堤州 때의 읍치는 遠西面에 있었고 조선 태종 때 堤川으로 바뀐 이후의 읍치는 近右面에 있었던 것을 후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지도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그려진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등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지닌 저수지로 잘 알려져 있다. 저수지의 수위가 높기 때문에 이 곳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고 있다. 이 저수지의 물은 고도차를 이용하여 아래 지역에서 이용할 수 있었는데 바로 밑의 退堤는 이 물을 가두어 관개에 이용했던 대표적인 제언으로 볼 수 있다. 의림지는 진흥왕 때 于勒이 처음 쌓았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지도에서도 동쪽 지역에 우륵이 살았다는 于勒堂이 표기되어 있는데 후대인들이 이곳에서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또한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子岩도 그려져 있다.

  • 직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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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지도 稷山縣地圖,지금의 충남 천안통합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일대. 산지가 적고 비교적 넓은 들판이 있는 지역의 특성이 지도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는 상대적으로 큰 축척을 적용하여 부각시키고 있으며 주변에 산을 그려 읍치 공간의 소우주적 특성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읍치는 본래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도 왼쪽에 해안이 그려진 것은 본현의 월경지인 外也串面, 安仲面 등이 평택, 수원 등지의 해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월경지 사이에 있는 군현은 지도상에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면명 옆에 표기된 里數로서 실제의 위치를 판단해야 한다. 동서남북의 四方을 표기하여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각처에 산재해 있는 제언들이 상세히 그려진 점도 눈길을 끈다. 成歡驛에는 東軒, 作廳, 將廳 등의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 역은 6품 관직인 察訪이 관할하던 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에는 成歡市도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 교통의 요지에 시장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적들도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성거산에 있었던 天興寺 자리에는 銅檣과 석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재는 銅檣을 지탱했던 支柱만이 남아 있고 幢竿은 고종 때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진잠산천방리도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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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산천방리도로지도 鎭岑山川坊里道路之圖,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계산동, 성북동, 교촌동, 원내동 일대와 서구 지역.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양식으로서 지도 상단에는 연혁과 坊面?洞里數, 사방 경계, 장시, 사창 등의 항목이 기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회화적 요소가 덜 부각된 지도이다. 읍치 공간에는 건물을 그리지 않고 官舍, 客舍 등과 같은 글자를 표기하여 나타내어 주변지역과 거의 동일한 축척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지의 표현은 人자를 연결하여 그려 다소 기호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이 지도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전통적인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방색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중심 공간인 읍치에는 황색, 동면은 청색, 서면은 흰색, 남면은 홍색 계열, 북면은 흑색으로 면?리를 표시하여, 방위표시는 없지만 방향을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分水院에는 장시도 그려져 있다.

  • 진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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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현지도 鎭川縣地圖,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 전체적인 산계와 수계가 ?湖西邑誌?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여 둘 사이의 연관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 道里 등이 주기되어 있으나 고을의 건치연혁은 빠져 있다. 지도 상단의 전체 호구수에 볼 수 있듯이 戶가 5,169이고 口가 7,185로서 1戶당 2명이 안되는데 당시 호구 조사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지의 표현은 다른 군현보다 회화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데 峰巒과 수목을 다소 입체감을 살려 표현하였고 원경의 봉우리는 몰골법을 사용하여 그린 점이 독특하다. 회화적으로 산지를 그리면서도 읍치의 공간은 여전히 환포형으로 그려 내부 공간을 부각시키고 있다. 樹枝狀의 하천이 鵲川으로 모아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각지에 형성된 店은 紅圈으로 제언은 靑圈으로 표시하였다. 光惠院場, 石峴場, 閑川場 등의 장시도 표시되어 당시 상업 활동을 미루어 볼 수 있다. 都唐山城은 해바라기 모양의 성첩을 그려 강조하였다.

  • 천안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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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지도 天安郡地圖,지금의 충남 천안통합시, 풍세면, 광덕면 일대. 여타의 군현보다 회화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 지도이다. 특히 산지와 건물에서 부각되는데 산지는 山圖에서 보이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봉우리, 암벽뿐만 아니라 수목까지도 회화적 기법으로 그렸다. 관청 건물들은 지붕의 모양과 대들보, 창틀, 문의 태극 문양까지 정교하게 그린 점이 특징적이다. 東西南의 글자로써 방위를 표시했으며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호남과 영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던 이 지역의 특성이 도로에서 잘 드러나 있다. 車嶺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는 굵은 홍선으로 강조하였고 다른 도로는 얇은 선으로 그렸다. 또한 대로상에는 많은 店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읍내와 남쪽의 古豊西縣에 장시도 생겨 비교적 상업 기능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여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이런 지역적 특성은 지명에서도 보이는데 북쪽의 王字山은 고려 태조가 군대를 여기에 주둔시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고려 태조가 유숙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留麗王寺도 있다. 各面에는 소속 洞里名과 戶口뿐만 아니라 結總까지 주기하였고 각 사창에도 還米의 수량도 倂記하였다. 毛山面,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등은 천안의 월경지인데 지역에 인접한 것처럼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그려져 있다. 읍치의 관청 건물에는 砲手廳이 그려져 있는데 1869년(고종6) 砲手 40명을 뽑아 설치한 것인데 당시 군비 증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청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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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지도 靑山縣地圖,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 청성면 일대. 이전 시기 읍지에 수록된 지도와는 구도와 내용을 달리하고 있어 새로이 제작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상하단에 건치연혁과 도로, 교량에 대한 짤막한 기록도 기재되어 있다. 산지의 표현이나 글자의 방향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주변지역은 면내의 동리명과 함께 집을 겹쳐 그려 촌락을 비교적 자세히 표현하였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했으며 굵기를 달리하여 대로와 소로를 구별하였다. 동서남북의 방위표시와 함께 사방의 사창도 강조하여 그려 당시 사창제의 실시를 반영하고 있다. 보은과 청주 사이에 있는 월경지인 倉里, 店洞 등의 마을이 있는 酒城面 지역은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본읍과 붙여서 그렸다. 다만 사이에 약간의 여백과 중간에 끼인 보은군을 그려 넣었을 뿐, 경계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실지 지리적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같은 관내 지역으로 동일하게 취급했던 공간인식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청안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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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지도 淸安縣地圖,지금의 충북 괴산군 청안면, 증평읍, 도안면 일대. 지도 여백에 간단한 연혁과 각면에는 소속 里名과 인구수가 주기되어 있다. 산지를 그린 수법은 풍수의 山圖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하여 기맥의 이어짐과 뭉쳐짐을 강조하였다.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등의 三壇과 사창, 도로를 따라 형성된 店, 제언 등이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하단에 庚午년인 1870년의 호구가 2,805戶 10,646口로 기재되어 있다. 읍치의 남서쪽에는 허한 부분을 보충하는 일종의 裨補로서 造山을 만들어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또한 하천을 따라 비보숲도 조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숲은 홍수시 범람을 막아주는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 청양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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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지도 靑陽縣地圖,지금의 충남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비봉면, 대치면, 남양면 일대. 지도의 우변에는 연혁과 경도, 감영, 병영, 수영, 전영까지의 거리를 주기하여 지지를 결합하는 양식을 띠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이 많고 들이 적은 지역의 특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인 읍내면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 관청 건물의 배치를 상세히 표시했다. 산지는 붓의 텃치를 살려 맥의 연결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군현의 진산인 牛山에는 수목도 그려 진산이 지니는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주변에 배치한 각면에는 읍치에서의 거리와 소속 洞里數 및 戶數를 주기하였다. 교통로는 홍선으로 그렸고 곳곳에 주점을 표시한 것도 이채롭다. 하천의 다리도 그려 넣었고 고적은 홍색의 원에 내부를 청색으로 칠하여 표시했으며 다른 요소들보다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다. 방위표시는 없으며 향교가 西向으로 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단일한 시점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 읍내면의 읍치 전면에 장시가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사창을 표시하여 사창제의 실시를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역사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느낌을 준다.

  • 청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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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지도 淸州牧地圖,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통합시 덕산면 일대.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591년(선조24)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읍성을 둘러싸면서 산줄기가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숙종 때 다시 石築한 上黨山城이 포진하고 있다. 방위 표시는 없으나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각면 소속의 동리명과 戶數가 기재되어 있으나 건치연혁은 빠져 있다. 읍성의 내부에는 병영과 청주목 관아가 들어서 있고 中營은 읍성 남쪽에 위치해 있다. 각지의 제언과 사창이 표시되어 있으나 다른 군현에서 통상 보이고 있는 場市나 店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이 지역은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했는데 이들의 존폐 관계가 지도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읍성의 내부 龍頭寺 터에는 현재도 남아 있는 당간지주가 그려져 있는데 기원전 57년(漢 五鳳元年)에 세워진 것으로 주기되어 있다. 이 銅檣은 行舟形의 형국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졌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읍성 북쪽에는 北藪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숲을 장양하여 방어에 활용하기도 했다.

  • 청풍부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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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풍부팔면 淸風府八面,지금의 제천통합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관내 各面?江山?道里?烽臺?場市?倉舍?社倉?寺刹 등의 항목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중심에 원형의 구도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는 사각형의 종이에 맞게 지도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의 원은 소우주적 공간으로서 한 고을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방위는 東西南北의 글자로 표시하고 북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과거의 지도에서는 현재의 지도와는 달리 북쪽을 항상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지는 않고 매우 유동적으로 배치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시점에 의해 표현하는 변동시점과도 관련된다. 산지의 표현이 비교적 회화적 수법을 강하게 띠고 있는데 점을 찍어 수목을 표현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관내의 각 洞里를 원내에 표기하고 읍치로부터의 里數를 병기하였다.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는 寒碧樓와 1870년 府使 李稷鉉이 다시 세운 八詠樓가 고을의 중심 공간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獄인 囹圄가 해바라기 모양의 성첩으로 그려 격리된 공간임을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이 지도에서는 특히 당시 군비 강화와 관련된 사실도 엿볼 수 있는데 관청 건물 중에서도 訓練廳, 軍器庫, 砲手廳 등이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포수청은 당시 증강된 포군이 입번하는 장소였다. 포군은 1868년 이후 연해 고을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내륙의 고을에도 포군이 증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충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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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지도 忠州牧地圖,지금의 충북 충주통합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승강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數 등이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과 대략 유사하다. 산지는 봉우리를 이어 그려 맥을 강조하였다. 하천은 청색의 쌍선으로 그렸고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하였다. 1869년 세워진 읍성의 모습이 원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읍성 밖에는 鎭營과 連原察訪道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鄭逑를 배향한 사액서원인 雲谷書院, 金世弼, 盧守愼 등을 배향한 八峰書院이 전면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는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林慶業 장군을 배향한 忠烈祠는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다. 內倉場, 龍安場, 新塘場 등을 비롯한 장시와 長湖院店, 昆池岩店, 新酒幕店 등의 점막이 표시되어 당시 상업적 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향교 옆에는 당시 생원,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공부하고 정치를 논했던 司馬所도 그려져 있는데 다른 군현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1866년(고종3)에 各邑에서 사창을 설치하여 면의 社首 1인을 정하여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 사실도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창은 관내 15군데에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증강된 砲軍이 入番하던 砲手廳도 그려져 있다.

  • 태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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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지도 泰安地圖,지금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남면, 안면읍 일대. 서해안 반도상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灣과 串으로 인해 해안선이 긴 대표적인 지역이다. 각면 소속의 洞里名과 戶口를 주기하였으며 고을의 건치연혁 대신에 古蹟를 기술한 점이 다른 군현과 다르다. 산줄기를 연결하여 바다로 뻗어 나간 곶을 강조하였다. 하계망은 다른 군현과 달리 검은 점선으로 독특하게 표시하였는데 해안과 구분하기 위해 한 것으로 보인다. 僉使鎭이었던 安興鎭에는 성곽과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중시되었던 지역이다. 안흥진의 서쪽 小島의 전면에 關障項이 있는데 서해안 해로 가운데 험하기로 이름났던 곳이다. 삼남의 漕運船이 이곳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태안의 동쪽 지역에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남창에 호남, 영남의 세곡을 모아 육로로 북창에 운반하여 다시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운반하였으나 폐단이 심하여 중간에 폐지한 사실을 지도의 상단에 기술해 놓았다. 원래 연륙되어 있던 안면도는 굴착하여 섬이 되었는데 그 곳에 掘項이 표기되어 있다. 또한 섬이 태안, 홍주, 서산 등으로 쪼개져 소속되어 있는 점도 이채롭다.

  • 평택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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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지도 平澤縣地圖,지금의 경기도 평택통합시 팽성읍 일대.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을의 내력은 지도의 좌측 하단의 주기에 잘 서술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1871년에 간행된 ?湖西邑誌?의 ?彭城誌?에 실린 건치연혁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고을이 경기도와 충청도 여러 읍에 割屬되다 보니 다른 군현의 1개 면에 불과할 정도로 작아져 邑民이 부담하는 役이 과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民役은 인구와 토지에 비례해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군현 단위의 지역에 부과되기 때문에 적은 인구와 적은 면적을 지닌 읍에 사는 백성은 역의 부담이 더 컸던 것이다. 이 지도 역시 상대적으로 적은 면적을 그리다 보니 다른 지도에 비해 소략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른 군현처럼 각면에는 소속 동리명과 호구수를 주기하였다. 전체적으로 회화적 성격이 강한데 산들은 독립된 형태로 그렸고 산과 읍치에는 수목도 종류를 달리하여 그려 넣었다. 과거 邑基였던 彭城古基와 왜란 때 백성들이 쌓았다는 土城은 성첩을 그려 강조하였다. 洪翼漢, 吳達濟, 尹集 등의 三節士를 배향했던 사액서원인 褒義祠가 훼철된 사실도 반영되어 있다.

  • 한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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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지도 韓山郡地圖,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 일대. 모시로 유명한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土亭 李之?은 호서 제일의 形局으로 평하기도 했다. 또한 이 곳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水田의 비율이 旱田의 2배가 넘는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동리명이 주기된 것은 다른 군현과 유사하나 面別 호구수는 빠져 있다. 산지의 표현은 山圖의 표현 수법을 사용하여 명당으로서 읍치공간이 지니는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각지에 산재해 있는 제언과 각면의 사창, 그리고 읍치의 북쪽 新場을 비롯한 店들을 그린 것 등은 다른 군현과 대략 유사하다. 읍치의 북쪽 乾芝山 일대에 社稷壇, 城隍堂, ?壇의 三壇과 향교가 그려져 있는데 조선시대 이들의 입지는 통상 읍성 외부 공간에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의 원인을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한 고을의 행정기능과 제사기능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인 것으로 판단된다.

  • 해미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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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현지도 海美縣地圖,지금의 충남 서산군 해미면, 대호지면, 정미면, 운산면, 고북면 일대. 지도의 우측에는 연혁, 인구, 田賦 등을 비롯한 읍지에 보이는 地志 항목이 수록되어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각면에는 소속 동리명과 인구수가 주기되어 있다. 산지는 풍수의 山圖처럼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판으로 읍치 공간의 지니는 상징성을 부각하였다. 하천과 바다를 청색으로 표현하였고 특히 바다에는 검은 선으로 파도를 그리기도 하여 회화적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현재도 남아 있는 원형의 읍성이 잘 그려져 있는데 특히 무지개 모양의 누각이 있는 남문의 모습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읍치의 남쪽 천변에는 보호수인 邑藪가 그려져 있는데 범람 방지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시와 店도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읍내의 장시는 5일과 10일 개시하는데 장터가 개시일에 따라 서로 다른 구역에서 장이서는 점이 독특하다. 병인양요 이후 군비 확충의 일환으로 砲軍이 증강되는데 이들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설치되어 있고 읍성내에도 火藥庫가 보이고 있어, 연해지역 방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 홍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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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지도 鴻山縣地圖,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내산면, 구룡면, 남면, 옥산면 일대.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충청도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매우 유사하여 이 지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산지의 표현은 풍수의 山圖에서 흔히 보이는 방식을 사용하여 맥세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고을의 간단한 연혁, 관내 각면에 속한 동리명과 인구수 등을 주기한 점은 다른 군현의 지도들과 유사하다. 부여 백마강의 지류인 金川이 읍을 가로질러 흘러가는데 이 하천 하류의 넓은 들판은 홍수 시 물에 잠기기 때문에 당시 농경지로 개척되지 못하고 황무지로 남아 있는 사실이 주기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대규모의 경지개척은 하천제방이 정비되는 일제시기 이후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현의 북쪽 外山內面에 있는 萬壽山에는 無量寺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삼한시대의 사찰로 이후 김시습이 은거하다 죽었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당시 종이를 만들던 紙所와 인근에 下新里場市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製紙와 같은 일부 수공업이 사찰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었고 大刹 주변에 물품 교환이 활발해지면서 장시도 생겨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1621년(광해군13)에 창건되어 매월당 김시습을 배향한 淸逸祠가 1871년(고종7)에 훼철되었으나 1717년(숙종43)에 창건되어 三學士를 배향했던 사액서원인 彰烈祠는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홍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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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지도 洪州地圖,지금의 충남 홍성군 홍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화성면, 갈산면, 보령시 천북면, 안면도 일부 지역. 서해안의 대읍으로서 당시 27개의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海美 너머에 있는 雲川面, 德山 너머에 있는 合北面, 新北面, 新南面, 縣內面 등은 모두 월경지로서 읍치로부터 멀게는 120리에 걸쳐 있다. 그러나 지도상에는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 인접하여 그려 넣었다. 이러한 점은 회화식의 군현지도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도면에 표현된 전역이 동일한 축척이 적용되지 않는 데서 연유한다. 읍치 공간은 상대적으로 대축척을 적용하여 매우 과장되게 표현하였다. 다른 군현 지도처럼 각면 소속의 洞里名은 주기하였으나 호구나 건치연혁은 빠져 있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는 수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특정의 산들은 수목도 그려 넣었다. 지도의 방위 표시는 없으나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고 고을의 주산인 白月山을 위쪽으로 하여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 공간을 그렸다. 홍주의 읍치는 고려 海豊縣 이래로 빈번한 전란에도 불구하고 이전되지 않고 현 위치를 고수해 왔다. 성곽의 내부에는 牧 官衙 건물과 충청도의 前營이었던 洪州鎭管의 건물이 구분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의 19개 군현이 홍주진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성곽에는 남문이 없는데 邑基의 妨害處가 되어 만들지 않았고 대신에 나무를 심어 裨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東門 앞의 하천을 따라서도 숲을 장양한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범람을 막아주는 기능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각지의 社倉과 도로상에 형성된 店을 비롯하여 주요 제언도 표시되어 있는데 덕산에 위치해 있는 큰 제언인 合德蓮堤도 관내 제언으로 표시되었다. 龍谷場, 白野場, 巨山場 등의 장시도 표시되어 있다. 惠學書院과 魯隱書院 등은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표시되어 있다.

  • 황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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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지도 黃澗縣地圖,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추풍령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 읍치에서 관내의 주요 지역까지의 거리를 하단에 기록하여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나 내용은 ?호서읍지?에 수록된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또한 ?여지도서? 소재의 지도와도 전체 구도는 대략 비슷하여 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읍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켜 관청 건물의 배치를 표현했고 주변 지역은 면 이름만을 표기하였다. 임진왜란 시 추풍령에 진을 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던 張智賢을 추모하는 비석과 읍치의 서쪽 산록에 현감 李運永이 세웠다는 回櫂石이 그려져 이 지도의 문화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또한 현내의 장시(1,6장)와 남쪽의 둔덕장(2,7장)도 표현된 것을 통해 당시 이 지역의 상업 기능도 파악해 볼 수 있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이들이 입번하던 砲手廳이 읍치에 그려져 있고 梧谷面에는 신설된 砲手村도 나타나 있다. 특히 砲手村은 다른 군현에서 보기 힘든 것으로 砲軍들의 집단 거주지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을 통해 볼 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내륙의 군현에서도 포군의 증설이 일반화되었고 그들의 운영도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회덕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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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지도 懷德縣地圖,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 일대. 금강의 지류인 般岩川과 荊江이 고을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의 건치연혁과 각면 소속의 洞里名, 戶口를 주기한 것은 다른 군현과 유사한 양식이다. 산지의 표현도 다른 군현들처럼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의 수법을 활용하였다. 고을의 주맥인 鷄足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른 군현 지도처럼 도로를 홍선으로 그렸고 교통의 요지에 형성되는 시장과 점도 표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신탄진에 위치한 新灘市와 楊川市는 店보다는 큰 원으로 표시하여 위계를 나타내었다. 각지의 제언, 사창도 자세히 표시되었다. 특히 지도에서는 樓亭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 개인의 별장으로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비롯한 송씨 가문의 것이다. 宋浚吉이 건립한 同春堂, 飛來菴, 宋時烈의 별장인 杞菊亭, 南澗亭, 宋愉의 별장인 雙淸堂, 宋爾昌의 별장인 ?灝亭, 宋奎濂의 별장인 霽月堂, 鳳隱菴, 朴暹의 별장인 錦雲亭 등이 다른 지역과 달리 온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朴彭年?宋愉 등을 배향했던 靖節祠, 宋奎濂을 배향했던 美湖祠, 姜鶴年?姜世龜 등을 배향했던 龍湖祠 등은 전면적인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 이전인 1869년(고종6)에 훼철되었고 鄭光弼?金淨?宋麟壽 등을 배향했던 崇賢祠는 1871년에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회인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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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지도 懷仁縣地圖,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 회남면 일대. 지도의 하단에 건치연혁을 주기하여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동서남북의 각 면에는 소속 동리명과 읍치에서의 거리, 호구수를 주기하였다. 사방을 둘러 가며 산지를 그렸는데 흡사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山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였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輿地圖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忠淸道邑誌?에 수록된 지도 등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지도를 참고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각면의 동리명, 읍치에 있는 관청, 향교 건물과 같은 것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여지도서?에 수록된 지도는 산줄기를 단선으로 그렸고 지도의 방향도 읍치가 있는 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는 등,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글자의 표기 방향도 지도의 상단과 하단이 반대로 된 점과 峨眉山을 실지 눈썹처럼 그린 점도 이채롭다.

  • ▶평안도
  • 가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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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지도 嘉山郡地圖 (76cm×94cm)
    가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박천군 가산면·용계면·청룡면·서면·양가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가산면에 있었다. 지도 내부의 글씨와 地圖名의 방향이 다르게 적혀 있다. 지도 내부의 글씨를 기준으로 볼 때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고을 동쪽에 있는 大定江은 현재 대령강으로 부르고 있으며, 북에서 남으로 흘러와 청천강과 합류한 후 서남쪽 바다로 빠져나간다. 산과 같은 자연적인 지명인 경우에는 문자로만 표시하였고, 인문적인 정보는 작은 세모 형태를 첨가하여 구별하였다. 특히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마을의 경우에는 세모 모양을 많이 그려 혼란을 방지하도록 배려하였다. 실제로 대정강 건너편에도 가산 소속의 마을이 있었는데, 세모 표시와 설명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인문적인 정보 중 祈雨處가 자세함이 다른 지도와의 차이점이며, 烽燧와 섬에 대해서도 자세한 注記를 달아놓고 있다. 도로는 읍치에는 자세하게 표시한 반면 나머지 지역은 다른 고을과의 연결관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읍치에는 고을의 鎭山인 鳳頭山을 가장 화려하게 그려 부각시켰으며, 관아건물은 위치만 표시하였다. 기타 面은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간략하게 표시하였으며, 장시와 사찰 등의 정보도 수록하고 있다.(이기봉)

  • 갑암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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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암보지도 甲巖堡地圖 (54cm×82cm)
    갑암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갑암동에 있었는데, 1944년에 건설된 수풍댐 근처이다. 지도는 서북쪽이 아래, 동남쪽이 위로 향하도록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黃發里洞賊路가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렇게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요충지에 鎭堡를 설치하였다. 지도에는 이러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반영하여, 갑암보·파수·봉수 등만 간단히 수록하였으며, 중요지점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堡에는 從9品의 權官이 파견되었는데, 둘레 416尺(약 125m정도)의 작은 石城이 둘러쳐져 있었다. 성곽에는 국경의 첫 번째 要塞답게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瞭望亭이 높은 축대 위에 만들어져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이기봉)

  • 강계자성후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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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자성후주지도 江界慈城厚州地圖 (95cm×152cm)
    이 지도에서 표현한 지역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강계군·자성군·후창군에 해당된다. 강계를 제외하면 조선 세종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세운 閭延·慈城·茂昌·虞芮의 四郡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1455년(단종 3)에 여연·무창·우예3군이, 1459년(세조 5)에는 자성이 폐지되고, 주민을 모두 강계로 옮겼다. 이후 廢四郡으로 지칭되다가 1869년(고종 6)에 厚昌郡과 慈城郡이 새로 신설된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도의 오른쪽 여백주기에는 新設兩邑道里라고 적혀 있으며,厚州와 자성이 나오는데 후주가 후창이다. 지도에는 폐사군의 중심지를 '古○○'로 표시하여 구별하였다. 강계는 1401년(태종 1)에 창설되어 1403년(태종 3)에 都護府로 승격되었고, 四郡이 폐지된 후 북쪽 최전방 고을의 역할을 맡았다. 지도에는 자성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지도 왼쪽 중간 上土鎭 위쪽의 자상면·자하면에 중심지가 있었다. 세 고을의 경계선은 붉은 색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후주는 노란색 실선이 특별히 덧붙여져 있다. 지도의 위쪽과 왼쪽으로는 옅은 청색의 굵은 선으로 압록강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지류들은 같은 색의 얇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강계 읍치를 지나는 것은 현재 독로강으로, 자성 부근의 것은 자성강으로, 후주 옆의 것은 후주천으로 부르고 있다.  압록강 건너에는 청의 지명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침입이 예상되는 賊路들이다. 맞은 편 조선 땅에는 지도 위쪽의 압록강 상류로부터 '防三十五所'가 표시되어 있는데, 국경선 초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수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는데, 군사적 긴장이 높음 지역임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에 가끔 보이는 '坊'과 '社'는 이 지역에서 面에 대한 異稱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도로는 붉은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사이의 연결이 잘 되어 있다. 강계 아래쪽으로는 지금의 적유령산맥 명칭의 기원이 된 狄踰嶺이 보이고 있다. 이 적유령을 넘으면 희천 땅으로 중요한 관방처로서 관리되고 있었다. 지도 가운데 왼쪽의 滿浦鎭 압록강 건너편에는 皇帝陵과 五國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모두 金나라와 관련된 유적으로 나온다.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이 지역은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國內城으로 밝혀져 있다.(이기봉)

  • 강동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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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지도 江東縣地圖 (98cm×70cm)
    지도의 이름은 붙어 있지 않지만 成川·祥原·平壤과 접해 있다는 것을 통해 강동현임을 알 수 있다. 강동현은 삼등면과 정호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동군에 해당된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소략하게 그려져 있지만 面·場市·津·烽燧·樓亭·寺刹 등 기본적인 사항들은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읍치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를 安置한 秋興館(客舍)을 비롯하여 중요한 건물은 대부분 그려져 있다. 다만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 1廟 중 城隍壇만이 생략되어 있음이 의아스럽다. 산은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지도 가운데 위쪽에 있는 大朴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하천은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짙은 청색으로 그렸다. 지도 왼쪽에 흐르는 강이 大同江 본류인데, 이 지역에서는 고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西江이라고 불렀다. 지도 아래쪽의 강은 옛 기록에 能成江으로 나오며, 현재는 南江이라 칭한다. 도로는 하천과의 구별을 위해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기타지도 왼쪽에 보이는 漢王墓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古皇帝墓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이기봉)

  • 강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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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지도 江西縣地圖 (68cm×98cm)
    강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동진면·성암면·대산면·쌍룡면·보림면·잉차면·초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강서면에 있었다. 고을 남쪽으로는 대동강의 하류와 접해 있는데, 松江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舞鶴山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자세한 정보를 담기 위해 확대·과장하여 그렸다. 읍치 주변 산세는 풍수적인 의식이 반영된 듯하며, 객사인 鶴山館을 비롯하여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다. 읍치 왼쪽에는 鶴洞書院址가 표시되어 있어 평안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書院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벼슬이 大司憲에 이르렀다가 이 고을에서 생을 마감한 金泮(15세기초)을 配享하여 1686년(숙종 12)에 賜額받았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毁撤되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도에는 坊里와 같은 행정단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상호간의 구별을 위해 사각형의 크기를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坊은 평안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부르던 面에 대한 異稱이다. 里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 안의 경우는 '邑內'라고 표시하여 거리를 대체하고 있다. 아울러 읍치 내부를 비롯하여, 각 리에 이르는 길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정보는 오른쪽 위쪽의 여백주기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倉의 경우 이름과 소속 坊里가 기록되어 있어 지도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烽燧에 대해서도 지도에서 표시하지 않았던 자세한 내용을 싣고 있다. 기타 場市·寺刹·津浦 등의 기본적인 인문 정보가 들어가 있는 깔끔한 지도이다.(이기봉)

  • 개천군속금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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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속금성진지도 价川郡屬金城鎭地圖 (118cm×73cm)
    금성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내남면 신리 근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개천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鎭은 안주로부터 평양으로 가는 요해처에 설치되었다. 지도에는 방향을 八卦로 표시하였으며, 남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산에 대한 표현이 극히 자세한데, 중심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쪽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반적인 지도와 달리 鎭에 대한 축척을 다른 지역보다 크게 하지는 않았다. 鎭에는 중요 관아 건물과 민가를 표시하였는데, 건물의 모양과 색을 달리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의 대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지류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鎭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뻗어나간 도로가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특히 하천을 수시로 넘나드는 부분까지 자세하게 표시하여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지도 왼쪽 아래쪽에는 '新崖隅'라는 문자와 하천 변 벼랑의 모습, 그 사이를 지나가는 도로를 현실감 있게 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산과 하천, 그 사이를 넘나드는 도로에 대한 자세한 표현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정보를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개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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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지도 价川郡地圖 (117cm×74cm)
    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개천군 중 봉동면 남쪽을 제외한 지역과 순천군 내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개천군 조양면에 있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는데, 방향 표시가 북쪽을 의미하는 '坎'으로 되어 있다. 고을은 북쪽으로는 淸川江에, 남쪽으로는 大同江에 접해 있고 동쪽은 1,000m 정도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산에 대한 표현이다. 첫째, 동북(艮) 방향으로부터 들어온 산줄기가 고을 구석구석에 모두 연결되어 있어 고을의 내적 통일성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 산의 모습을 대부분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려 읍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는 다른 지역보다 縮尺을 크게 하여 상세한 정보를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고을의 鎭山인 大林山을 크고 웅장하게 표현하여 공간적 위엄성을 높이고 있다. 읍치에는 향교인 校宮과 객사인 館을 비롯하여 중요 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인접한 面끼리는 색을 달리하여 서로 구별을 쉽게 했으며, 아래에는 소속 里의 수를 적어 놓았다. 지도 왼쪽의 价州古城은 고려시대까지 읍치로서 기능하던 곳으로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을의 명칭이 价川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도로는 적색 실선으로 표시하여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으며,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10리마다 구간을 나누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사찰과 창고, 장시 등의 일반적인 인문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이기봉)

  • 고성진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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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진고적 古城鎭古蹟 (82cm×53cm)
    고성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에 있었다. 박천군의 지도와 표현 양식이 같아 동일인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鎭의 남쪽에는 淸川江이, 북쪽에는 大汀江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大汀江이 오른쪽 注記에는 大定江이라고 쓰여 있어 한자 표현이 한 지도에서도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대령강으로 불리고 있다. 大藏山을 매우 강조해서 그렸으며, 그 아래에는 鎭의 관아 건물 및 주변 지형을 아주 상세하게 그렸다. 이 지도를 통해 고성진의 관아가 지방관의 업무와 생활이 이루어졌던 衙舍와 內衙를 비롯하여 軍器庫·倉庫·將校廳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가도 草家三間이라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注記의 뒷부분에는 古城鎭이 설치된 이유가 나오고 있다. 병자호란(1636) 때 淸兵이 조선의 주요 防守處를 피해 남진한 곳 중의 하나가 바로 古城鎭 자리였다. 그래서 1648년(인조 26년, 戊子)에 처음으로 屯을 설치하여 別將을 파견하였으며, 33년 후인 1681년(숙종 7, 辛酉)에 鎭으로 승격시키고 종4품의 兵馬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이기봉)

  • 곽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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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지도 郭山郡地圖 (49cm×68cm)
    곽산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임포면·안흥면·옥천면에 해당된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황색·남색·흑색 3가지만 사용하여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의주에서 한성부로 가는 大路를 굵은 황색의 선으로, 중요 관아 건물이나 鎭은 흑색 테두리 속에 황색을 칠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 왼쪽의 雲興館은 驛이었으며, 읍치 바로 왼쪽의 永淸館은 客舍의 이름이었다. 산을 실제보다 훨씬 강조하여 표시하였기 때문에 해안가 고을임에도 평지가 많지 않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舍人峰인데, 조선 초기의 기록에는 凌漢山으로 나온다. 이곳에는 山城이 있었는데, 주기에서 보이듯 이미 頹落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지도에 표시한 것은 군사적 측면에 대한 배려가 많았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군사적 측면에 대한 배려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내용은 지도 왼쪽 아래쪽의 壬海鎭과 여기 저기에 烽燧가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을의 남쪽에 있는 바다와 서쪽의 東萊江이 비슷하게 표현되어 혼돈을 가져다준다. 다만 동래강 위로는 선천과의 경계에 다리가 표시되어 있어 바다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바닷가에는 內閣 즉, 奎章閣 소속의 宮房田인 '○○ '이 6개나 보이고 있다. 궁방전의 折受와 개발이 주로 해안가나 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조선후기의 상황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에는 龜城 坊이 보이는데, 이 고을 북쪽의 내륙에 있었던 龜城의 해안가 월경지였다. 바로 아래에는  釜 즉, 소금을 굽는 가마가 표시되어 있어 鹽業이 이곳에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주기의 嶺 浦口 부분에는 黃浦와 龜 浦가 大洋은 아니어도 상선이 자주 드나드는 곳임을 기록하고 있다. 기타 자주 옮겨 다닌 이 고을의 읍치가 지도에 모두 표시되어 있는데, 長利古墟→郭州墟→定襄古墟→邑의 순서이다.(이기봉)

  • 광량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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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량진지도 廣梁鎭地圖 (50cm×70cm)
    광량진은 일제시대의 용강군 귀성면 최광리에 있었다. 서쪽에는 서해가 있으며, 남쪽은 대동강 河口로서 지도에서처럼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串에 설치되었다. 지도 아래에는 大同江上流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바다는 파란색, 육지는 황색으로 표시하여 서로 쉽게 구별되도록 하였다. 鎭에는 3,260尺(약 978m)의 석성이 축조되어 있었으며,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다. 軍器庫 옆의 殿閣은 客舍를 의미한다. 기타 주변의 섬과 도로 등만 표시한 매우 소략한 지도이다.(이기봉)

  • 광평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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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평보지도 廣坪堡地圖 (70cm×50cm)
    광평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오북면 북상동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堡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강변에는 국경 초소 역할을 하였던 把守가 2개 보이고 있으며, 堡 왼쪽에는 비상사태 시 가장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던 烟臺(烽燧)가 표시되어 있다. 堡에는 둘레 564尺(약 170m)의 작은 石城이 있었는데, 지도에서는 검은 실선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기타 중요 지점으로의 도로가 황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작은 하천의 표시가 자세하다. 堡에는 종9품의 權官이 파견되었다.(이기봉)

  • 구성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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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지도 龜城府地圖 (54cm×82cm)
    구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구성군 전체와 정주군 임포면 일부에 해당된다. 지도 왼쪽 위쪽의 물줄기는 압록강의 지류인 삽교천의 상류이며, 읍성를 돌아 동남쪽으로 빠져 나가는물줄기는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이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모든 산줄기가 연결된 상태로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읍성은 실질적인 형태와 관계없이 산줄기와 물줄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읍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大縮尺으로 그려졌는데, 같은 축척을 적용할 경우 상세한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읍성은 둘레가 4,075步(약 7,300km)의 대형이며, 이 지도를 통해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 안에조차 풍수적 관념을 반영한 산줄기의 표현이 적용되고 있음이 이채롭다. 압록강 변의 의주·삭주를 넘어온 적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鎭과 고개·烽燧·도로의 표기가 상대적으로 자세하다. 반면에 행정적 내용은 坊과 거기에 설치된 社倉만을 표시하고 있는데, 坊은 이 지역에서 부르던 面에 대한 별칭이다. 이외에 場市와 사찰도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아래쪽에는 坊이 정주와 곽산 사이에 있는 海浦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坊은 평안도에서 보기 드문 越境地로서, 일제시대의 정주군 임포면 일부에 해당된다.(이기봉)

  • 구성속식송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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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속식송진도 龜城屬植松鎭圖 (53cm×82cm)
    식송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에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물줄기는 압록강의 지류인 삽교천의 상류이다. 鎭은 1680년(숙종 6)에 설치되었으며, 이웃한 안의진과 함께 압록강변의 의주·삭주를 넘어온 적을 2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진의 서쪽에는 좁은 골짜기를 연결하는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보인다. 鎭衙가 들어선 지역에는 중요 관아 건물과 민가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표현양식이 구성에 같이 속해 있던 안의진도와 같아 동일인이 그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쪽 주산으로부터 진아까지 산줄기가 겹겹이 이어져 내려온 모습, 남쪽 산을 진아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린 점 등은 풍수적 관념의 전형적인 반영이다. 북쪽의 獅子峯 왼쪽에는 전후좌우 모두 나라에서 수목의 보호를 위해 斫伐을 금지하던 禁山이었음을 표시하였다.(이기봉)

  • 구성속안의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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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속안의진도 龜城屬安義鎭圖 (53cm×82cm)
    안의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 탑동에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2개의 물줄기는 모두 압록강의 지류인 삽교천의 상류이다. 아래쪽이 삽교천의 본류이고, 위쪽이 그 지류에 해당되는데 그 사이에는 要害處인  城嶺이 있었다. 鎭은 숙종(1675-1720) 때 만들어졌으며, 義州·朔州 방면의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1차 저지선인 극성령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도에도 극성령에 關門이 만들어져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산의 표현이 수려한데, 산이 많은 지형과 방어를 중요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다. 아울러 北主峯인 天摩山으로부터 鎭衙까지 산줄기가 이어지도록 표현한 점, 진아를 중심으로 環抱型으로 그린 점을 통해 볼 때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이기봉)

  • 대길호리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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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길호리보지도 大吉號里堡地圖 (53cm×82cm)
    대길호리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주면 압록강변에 있었다. 지도는 동남쪽을 위로, 서북쪽을 아래로 향하도록 그렸다. 堡에는 둘레 700尺(약 210m)의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지도를 통해 사각형의 형태를 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쪽 압록강 건너편 청의 땅에는 木子士洞賊路가 표시되어 있고, 조선 땅에는 국경 임시 초소 역할을 했던 把守가 보인다. 왼쪽에는 行城의 하나였던 古林山城이 그려져 있으며, 그 위에는 봉수의 모습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기타 봉수와 파수를 비롯하여 양쪽의 다른 鎭堡 및 主邑인 창성으로 가는 도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대파아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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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파아보지도 大坡兒堡地圖 (70cm×50cm)
    대파아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음평동에 있었다. 堡에는 종9품의 權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둘레 약 480尺(약 144m)의 石城이 둘러쳐져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지도는 벽동군 소속의 다른 鎭堡 지도처럼 풍수적 형국의 山圖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산줄기의 방향과 堡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국경 초소인 把守와 비상 통신수단인 烟臺, 그리고 이곳으로 연결되는 도로 등 군사적 정보만 수록한 간략한 지도이다.(이기봉)

  • 덕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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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지도 德川郡地圖 (97cm×67cm)
    덕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잠도면과 잠상면을 제외한 지역이며, 읍치는 군무면(후에 덕천면)에 있었다. 邑治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고을 경계의 산들을 배치하고, 고을 안쪽의 산에 비해 과장되게 표현하여 고을의 내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내부의 산줄기는 읍치를 비롯하여 각 마을까지의 연결 관계만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방법은 大東輿地圖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의 여러 지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산의 힘을 중요하게 여기는 風水的 관념의 반영이다. 지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대동강의 상류이다. 산을 모두 연결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강의 오른쪽이 끊어진 것처럼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상류의 寧遠 방면으로부터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다. 아울러 남쪽의 孟山 방면으로부터도 큰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류는 남색의 얇은 실선으로 표시하여 본류와 구분하였다. 도로는 붉은 색 실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읍치로부터 각 지역 특히 고개로의 연결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고개에 대한 표기는 ‘嶺’뿐만 아니라 ‘古介’로도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고개에 대한 명칭이 한문과 우리말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里의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원안의 색을 통해 소속 면을 구별해주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대원군 집권기에 還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실시한 社倉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18세기의 기록인 ≪輿地圖書≫나 ≪戶口總數≫에는 덕천군의 面이 4개로 나오는데, ≪東輿圖≫를 비롯한 19세기의 기록에는 9개의 面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도 사창이 9개 나오고 있으며, 마을도 역시 9개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는 마치 풍수적인 형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중요한 관아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안의 遼源館은 客舍를 일컫는다.(이기봉)

  • 동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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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지도 東津地圖 (55cm×78cm)
    東津鎭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에 있었다. 이 지역은 북쪽에서 흘러 들어온 大同江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현재의 재령강과 만나 서북쪽으로 꺾여 서해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 지역을 急水門이라고 하는데 지형과 潮水의 차이 때문에 물살이 빨라 붙여진 이름이다. 동진진은 대동강과 제양강이 만나는 남쪽으로 반도처럼 불쑥 튀어 나간 지점에 설치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동진진이 지난(去) 丁卯년 즉, 1867년(高宗 4)에 新設된 것임이 기록되어 있다. 동진진이 설치되기 1년 전인 1866년에는 미국의 商船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불탄 사건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섬에는 이미 鐵島鎭이 설치되어 대동강 하구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진진이 새로 설치된 것을 통해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해 조선 정부가 얼마만큼의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징과 설치 목적을 반영하여 지도에는 대동강을 바라보는 남쪽이 위쪽을 향하도록 그려져 있다. 아울러 강가에는 津·浦와 중요 지형을 자세히 그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느낌을 강하게 비치고 있다. 지도 전체의 구도는 鎭의 중심지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배치되어 산과 지명이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관아가 입지한 지역을 확대·과장시켜, 중요 건물의 표시를 자세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기타 지도의 오른쪽에는 직선의 긴 防潮堤와 '水門' 등의 글자가 표시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간척사업이 이곳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이기봉)

  • 맹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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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지도 孟山縣地圖 (110cm×54cm)
    맹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면·원남면·동면·지덕면·애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맹산면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현재의 낭림산맥이 지나가며, 그 너머는 함경도의 永興이다. 고을 서쪽과 북쪽으로도 높은 봉우리들이 연속된다. 남쪽으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상류 일부가 걸쳐 있으며, 대부분의 물들은 서쪽의 德川에 있는 대동강 본류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고을의 지형적 특징을 반영하여 마치 산수화처럼 산을 화려하게 묘사하였다. 읍치는 뒷산으로부터 내려온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둘러쳐져 있는 형국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점이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중요한 관아 건물의 대부분이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大成殿을 聖殿으로 기록한 향교가 보이고 있으며, 왼쪽에는 客舍가 館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 실선에 검은 색 점선을 덧붙여 표시하였다. 주변의 산 이름은 頭尾山 이외에는 기록된 것이 없으며, 반면에 다른 고을과 연결되는 고개는 상대적으로 자세히 표시하였다. 寺刹은 이미 사라진 곳까지 표시할 정도로 자세하게 수록하였는데, 민간신앙으로서 꾸준한 명맥을 잇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기타 인문적 내용으로는 坊(面의 異稱)과 그곳에 설치된 社倉 만이 표현될 정도로 소략하게 다루어졌다.(이기봉)

  • 묘동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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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동보지도 廟洞堡地圖 (53cm×82cm)
    묘동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묘동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동쪽을 아래-위로 삼아 군사적 시설을 위주로 간단하게 그렸다. 아래쪽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馬廊洞賊路와 別利浦洞賊路가 표시되어, 적의 침입 예상통로가 파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반대편의 조선 땅에는 廟洞堡와 국경 초소 역할을 하였던 深浦洞把守가 설치되어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지도를 통해 묘동보에는 압록강변의 절벽을 방어벽으로 삼아 성곽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적의 침입 시 중요한 통신수단인 봉수를 가장 눈에 띄게 표시하여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산 정상 부근에 쌓은 축대 위에 지붕까지 겸비할 정도로 봉수가 잘 관리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이기봉)

  • 박천군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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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고적 博川郡古蹟 (84cm×53cm)
    박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동남면·덕안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박천읍에 있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쪽으로 그렸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현재의 대령강이, 남쪽으로는 청천강이 흘러 서쪽의 바다로 들어간다. 大嶺江에는 異稱인 大定江도 동시에 표시하여 기록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도는 전반적으로 축척에 관계없이 구체적인 정보를 자세하게 반영하고 있다. 산지의 경우 고을의 鎭山인 臥龍山으로부터 끊어짐이 없도록 하여, 고을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중요 지역의 경우 주변 산세에 대한 자세한 표현을 통해 인문적 정보의 바탕이 되는 지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海口에는 巖石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요한 관아 건물과 사찰 및 창고는 구체적인 구조까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렸다. 향교 왼쪽의 駐 閣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머물렀던 곳이며, 그 앞쪽의 日下樓에는 선조의 親筆 懸板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장시로서 舊津場市와 兩飛灘場市 두 곳이 표시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형태를 고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놓았다. 모두 도로변에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기둥과 지붕만 그려져 있어 假建物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료로만 보던 옛 장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廣通站撥舍에 기와 건물과 초가 건물이 동시에 있었음을 통해 院의 일반적인 모습도 짐작할 수 있다. 해안가의 堤堰에 많이 쓰이는 ‘○○筒'이 지도 왼쪽에 여섯 개나 표시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 중의 하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외에 도로와 교량, 고개의 표현도 상당히 자세한 편이다. 반면에 이미 사라진 長林驛이나 고려시대의 읍치였던 古城土地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행정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面里의 경우도 面의 이름만 간략하게 표현하는 등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이기봉)

  • 벽단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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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단진지도 碧團鎭地圖 (69cm×50cm)
    벽단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송서면 이서동에 있었다. 鎭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압록강을 넘어 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선의 역할을 하였다. 풍수적 형국을 표현한 山圖처럼 산줄기를 매우 강조하여 그렸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산줄기의 방향과 鎭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鎭에는 둘레 13,032尺(약 3,900m)의 큰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도에는 검은 실선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石城의 이와 같은 규모는 비슷한 지역에 있었던 다른 鎭堡에 비해 월등히 큰 규모로서 벽단진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지도에도 西門·南門·東門이 모두 표시되어 있어 성곽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 현재의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와 비상 연락 수단인 烽燧, 그리고 그런 곳으로 연결되는 도로만 표시한 아주 간략한 지도이다.(이기봉)

  • 벽동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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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지도 碧潼郡地圖 (72cm×52cm)
    벽동군은 일제시대에도 거의 그대로 평안북도 벽동군으로 남아 있었고, 읍치는 군부면(후에 송서면)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동남쪽으로는 현재의 강남산맥이 지나가고 있으며,서북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른다. 지도는 이와 같은 지형을 반영하여 남쪽을 위로, 북쪽을 아래로 그렸다. 전체적으로 복잡한 듯하지만, 하천은 청색, 도로는 황색으로 그려 서로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압록강을 끼고 있는 국경 요해지로서의 성격을 반영하여 군사적 시설을 가장 중요하게 그렸다. 압록강변에는 상류로부터 廣坪堡·小坡兒堡·大坡兒堡·楸仇非堡·碧團鎭·小吉號里堡 등을 비롯하여 현재의 국경 초소인 把守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비상 시 가장 중요한 통신수단인 烽燧와 강변 지형에 대한 파악도 잘 되어 있다. 지도 왼쪽 위쪽에는 현재의 강남산맥 방향의 최대 요해처에 만들어진 林土鎭이 보이고 있다. 이곳에는 창고 등과 달리 客舍 모양의 건물을 그려 넣어 지방관이 파견된 곳임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鎭堡를 비롯한 많은 군사 중심지에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邑治와 벽단진에만 성곽을 그려 넣어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반영하여 두 지역만 특별히 확대시켜 그렸으며, 성곽의 모양과 내부의 중요한 시설을 자세히 표시하였다. 이 지도를 통해 성곽 주변에 적의 성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垓字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에는 지방관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인 社稷壇·城隍祠·壇·鄕校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기타 場市·倉庫·發站 등의 인문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지도 왼쪽으로는 현재 忠滿江으로 불리는 童巾江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삭주부소속구령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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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소속구령진지도 朔州府所屬仇寧鎭地圖 (123cm×76cm)
    구령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 수풍동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鎭은 북서쪽으로부터 압록강을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1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청의 땅은 아래쪽에 '彼邊'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에 대한 표현 양식이 아주 독특한데, 삭주부 소속의 鎭堡는 모두 같은 양식으로 그려져 있어 동일인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강변에는 지형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실질적으로 이용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지도에는 鎭과 중요 지점과의 연결관계를 표현하는 도로 및 고개, 그리고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와 烽燧 등 군사적 정보만을 간략하게 담고 있다. 鎭에는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것 역시 생략되어 있다.(이기봉)

  • 삭주부소속막령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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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소속막령진지도 朔州府所屬幕嶺鎭地圖 (124cm×76cm)
    막령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 양산면 장하동에 있었다. 우선 지도안의 글씨나 산의 표시 방향과 지도 밖의 글씨 방향이 반대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는 鎭에서 북쪽에 있는 關門을 바라보는 형태로 그리고, 지도의 방향은 朔州府에서 남쪽의 鎭을 바라보는 형태로 배치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삭주부 소속의 鎭堡에 대한 지도의 표현 양식이 모두 같은 것을 통해 볼 때 동일인이 그린 것이다. 鎭은 압록강변의 창성 방면으로 침입한 적이 현재의 강남산맥 위에 있는 막령을 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1647년(인조 25)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지도를 통해 鎭의 남북 요해처에 防墻과 關門을 설치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방어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청천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대령강의 최상류이다.(이기봉)

  • 삭주부소속천마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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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소속천마진지도 朔州府所屬天摩鎭地圖 (124cm×76cm)
    천마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청계동에 있었다. 삭주부 소속의 다른 지도와 표현양식이 같아 동일인이 그린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지도안의 글씨 및 산과 외곽의 지도명 등이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점도 동일하다. 鎭은 의주로부터 현재의 강남산맥 위에 있는 大城峴·小城峴을 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653년(효종 4)에 처음 설치할 때는 이곳보다 더 남쪽에 있었으며, 1705년(숙종 31)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이 지도를 통해 두 고개 위에 防墻과 關門을 세워 방어하였으며, 鎭은 더 남쪽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대령강의 최상류이며, 鎭舍 옆에 있는 館舍는 객사의 異稱이다.(이기봉)

  • 삭주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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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주부지도 朔州府地圖 (124cm×76cm)
    삭주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청수읍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되며, 읍치는 삭주면에 있었다. 이 지도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표현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우선 지도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그 기준은 유역권이다. 오른쪽은 압록강 유역에 속하며, 왼쪽은 대령강의 상류인 창성천 유역에 속한다. 그러나 후자가 전자에 비해 훨씬 넓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며, 창성천이 실제로는 동남쪽으로 흘러나감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동북쪽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두 지역 모두 산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그려 내부의 성곽을 부각시키고 있다. 다만 압록강변 만큼은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듯 산의 방향과 모양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도 오른쪽의 성곽은 小朔州城이라고 불렸던 邑治이며,왼쪽은 大朔州城이라고 불렸던 古邑城이다. 두 성곽 모두 내부의 건물은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그렸음에 반해 성곽의 표현은 아주 자세하다. 양 유역권을 나누는 현재의 강남산맥 위에도 關門의 城郭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군사적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관아건물·창고·민가·봉수 등의 건물 모양이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상호 구별을 쉽게 하려는 지도 작성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압록강변에는 仇寧鎭을 비롯하여 국경 초소와 같은 把守, 烽燧 등을 자세히 그려 군사적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압록강 건너에는 淸의 땅임을 알려주는 '彼邊'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기타 場市가 세 군데나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 중요하게 인식되던 인문적 정보임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산양회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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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양회진지도 山羊會鎭地圖 (52cm×81cm)
    산양회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 운해천동에 있었다. 鎭은 鴨綠江 변에 위치하여, 서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막아내는 1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산을 위주로 그렸는데, 풍수적 개념의 主山이 지도 위쪽에 우뚝 솟아있다. 아울러 鎭衙가 들어서 있던 성곽이 확대·과장되어 있는데, 중요 시설의 자세한 내용을 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城郭이 특이하게 정육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성 위에 雉堞이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성곽 내부 및 把守·烽燧 등의 군사 시설과 本府로 표시된 楚山으로 가는 도로가 눈에 잘 띄도록 표시되어 있다. 압록강변에는 현재의 國境 哨所 역할을 했던 把守가 上·下로 두 개 보이고 있다. 건너편에는 만주 쪽의 압록강 지류 중 가장 큰 波猪江이 합류하고 있다.(이기봉)

  • 삼등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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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지도 三登縣地圖 (72cm×99cm)
    삼등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삼등면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坊과 소속 里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里만 표시되어 있다. 평안도 지역에서는 面을 坊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향해 그렸으며, 산과 강 및 도로의 표현이 단순 명쾌하게 되어 있다. 특히 도로의 경우에는 붉은 실선의 굵기를 달리하여 도로의 중요도를 표현하였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鳳頭山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요한 건물만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다. 홍살문 뒤쪽의 靑雲館은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가 安置된 客舍를 말하며, 읍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가운데가 높은 세 개의 건물이 붙어있는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그려 다른 건물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현재의 南江이며, 일제시대 이전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能城江으로 나온다. 그 왼쪽의 黃鶴樓는 능성강변의 赤碧에 만들어진 정자로서 이 고을에서 가장 유명했다. 기타 주기와 지도에 이미 사라진 寺刹까지 모두 기록된 것을 통해 崇儒抑佛을 주창했던 조선사회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삼화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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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지도 三和府地圖 (70cm×50cm)
    삼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진남포부와 용강군 삼화면·금곡면·신녕면·귀성면·대대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삼화면에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지도 오른쪽 위쪽의 여백에 坊의 이름을 적어 넣은 여러 색의 사각형이다. 지도에는 여백의 사각형과 같은 색의 圓 안에 里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며, 옆에는 방의 이름 중 첫 글자를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坊과 거기에 소속된 里의 분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坊이란 이 지역에서 부르던 面의 別稱이다. 그리고 봉긋봉긋 무덤처럼 솟아 오른 산에 대한 표현도 이채롭다. 산은 서로 분리된 듯하면서 연결되어 있으며, 봉우리가 없는 곳에서는 산과 같은 색을 칠하여 산줄기가 이어짐을 표현하고 있다. 고을의 主脈으로 알려진 花精山으로부터 邑治까지도 鄕校와 姑蘇山을 지나 계속적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보이고 있다. 아울러 지방관이 집무를 보던 府衙와 客舍인 牛山館 뒤에도 인위적으로 보호받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이 모두 풍수적 관념의 반영으로 여겨진다. 고을의 남쪽은 대동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이다. 왼쪽의 廣梁에는 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다. 지도에도 鎭衙와 戰船이 표시되어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위쪽의 灣은 소금 생산으로 유명했던 후대의 광량만으로, 이곳은 한반도에서 유명한 少雨地 중의 하나였다. 기타 창고와 사찰·포구가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왼쪽의 大唐頭烽燧에는 자세한 내용의 주기를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 상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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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지도 祥原地圖 (75cm×103cm)
    상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수산면·천곡면·풍동면에 해당된다. 고을의 지세는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은데, 지도에는 지대가 높은 동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상원천이라고 하며, 지도에는 祥原浦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으로 川·江만 쓴 것이 아니라 浦·津 등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상원천이 흘러 들어가는 綾江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이며, 옛 기록에는 주로 能成江이라고 적혀 있다. 산줄기의 표현 방법은 철저히 풍수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고을로 들어오는 방향이 동남쪽인데, 이 부분을 지도의 위쪽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고을 모든 곳으로 산줄기가 연결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지대가 낮은 곳까지도 작은 산줄기의 형태를 그려 넣고 있다. 아울러 중요 지점의 경우 우뚝 솟은 뒷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를 環抱形으로 그려 풍수적 명당처럼 표현하였다. 조선 초중기의 기록에 읍치는 지도 오른쪽 아래의 舊邑基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도 위의 읍치는 조선 후기에 옮긴 것으로 파악된다. 읍치의 이전으로 중요한 관아 건물의 대부분이 옮겨갔지만 鄕校는 구읍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읍치를 옮긴 고을의 경우 자주 나타난다. 읍치에 있는 館宇는 객사를 의미하며, 지도 아래쪽의 前邑基는 고려시대의 읍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다른 고을과 연결되는 경우만 붉은 색 실선으로 간략히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 아래쪽 新興院 옆에는 文興場市가 표시되어 있어 지도 작성자에게 중요한 인문정보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서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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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진지도 西城鎭地圖 (68cm×49cm)
    서성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에 있었다. 鎭은 압록강변의 초산과 현재의 적유령산맥·운산을 거쳐 안주·개천으로 향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영변에는 실제로 3중의 성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견고함이 대단하여 鐵甕城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본 지도에 나오는 성곽은 이 중 2개에 해당되며, 오른쪽으로는 영변의 읍치가 입지한 성곽이 더 있었다. 성곽은 素月 金廷湜(1903-1934)의 시 '진달래꽃'에도 나오는 藥山을 중심으로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을 최대한 반영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藥山城으로 알려진 왼쪽의 성곽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636년(인조 14)에 新築되었으며, 바깥쪽의 2개 성곽이 함락되더라도 마지막까지 항전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실제로 병자호란 때 淸軍이 영변성을 포위하였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성곽 안에는 장기적인 항전을 위한 여러 시설이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 먼저 倉庫가 표시되어 있는데, 鎭倉을 비롯하여 유사시 본 鎭에서 관할하게 되는 价川과 雲山의 창고도 보이고 있다. 장기적 항전에 필수적인 食水의 조달을 위한 연못(池)과 소금을 보관하던  庫도 표시되어 있는데, 약산성 안팎에 모두 배치되어 있다. 반면에 무기조달을 위한 武器庫(軍庫)와 火藥庫는 약산성 안에만 설치되어 있어 마지막 항전의 장소임을 실감할 수 있다. 성곽 안에 있는 寺刹은 성곽의 일상적인 보수와 유지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타 전쟁시 비상 통신수단이었던 烽燧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으며, 불을 피우는 烟屈의 수까지 자세히 표시하였다.(이기봉)

  • 선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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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진지도 宣沙鎭地圖 (49cm×68cm)
    선사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기봉리에 있었다. 원래는 정주군 안흥면 삼단리에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鎭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兼監牧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중국으로 향하던 배가 출발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관리하던 牧場은 身彌島·炭島 등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기르던 馬匹의 수까지 자세하게 표시하여 놓았다. 지도는 산세를 웅장한 산수화풍으로 그렸으며, 鎭衙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여 중심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土城이 동서로 길게 그려져 있으며, 철산부와 선사진의 경계임을 '府鎭界'로 표시해 놓았다. 이와 같은 토성의 축조는 監牧官이 파견되는 鎭의 경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鎭의 중심지에는 홍살문을 비롯하여 각종 관아건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명칭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鎭衙 아래쪽의 禦變亭은 일반적으로 船所라고 하며, 戰船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선사진에는 防牌船 2척, 兵船 1척, 汲水船 4척, 過涉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기록에 부합하는 총 9척의 배가 그려져 있으며, 아울러 가장 크게 그려진 2척의 배는 最大의 전선이었던 防牌船으로 볼 수 있다. 기타 해안가의 경제활동을 상징하는  場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烟臺(烽燧) 그리고 里와 도로 등 일반적인 인문적 정보가 망라된 아주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 선천부소속검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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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소속검산진지도 宣川府所屬釰山鎭地圖 (54cm×81cm)
    우리 나라에서 '釰'은 '劒'자와 동일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발음이 '일'로 되지만 이 지도에서는 '검'으로 읽어야 한다. 검산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 있었다. 선천부는 의주에서 안주-평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대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중요한 要害處로 인식되었다. 지도에 보이는 城郭은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627년(인조 5)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1631년(인조 9)에 林慶業(1594-1646)에 의해 增築되었다. 이 지도를 통해 산성이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內城과 外城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성의 둘레는 1,025步(약 1,845m)이며, 외성은 둘레 995步(약 1,791m)였다. 지도는 산줄기를 環抱形으로 그려 중심부를 부각시키고 있다. 성곽의 정보를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 안팎의 縮尺을 다르게 적용하였으며, 산의 색을 다르게 표시하여 遠近을 구별하였다. 성곽 내부에는 각종 관아 시설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다른 지도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鳥銃庫가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관아건물과 민가는 지붕의 색을 달리하여 구별하였는데, 민가는 모두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 밖의 溪水는 마치 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기록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산을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에 溪水의 出口가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그려진 점이 아쉽다.(이기봉)

  • 선천부소속동림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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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소속동림진지도 宣川府所屬東林鎭地圖 (54cm×78cm)
    동림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에 있었다. 鎭은 의주에서 안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要害處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까지는 宣州城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초에 선천의 읍치가 옮겨간 이후 성곽이 무너져 있다가 병자호란 이후 새롭게 修築되었다. 鎭에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둘레 17,562尺(약 5,270m)의 대형 山城이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山줄기를 성곽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겹겹이 그려 확대된 중심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중심부에 해당되는 성곽은 문과 장대 등을 아주 자세하게 표시하여 군사적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성곽 주변에 있지 않은 산줄기는 색을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縮尺을 달리한 지역의 遠近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상류와 하류를 애매하게 표시한 오른쪽의 淸江水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나간다. 성곽 왼쪽의 左峴關門은 의주에서 안주로 통하는 大路가 지나가던 곳으로서 고개 양쪽을 잇는 行城과 關門을 만들어 방어에 활용하였다. 관문 주위에는 요해처에 樹木의 斫伐을 금지하던 정책을 반영하듯 나무가 울창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砲를 설치했던 墩臺도 보이고 있다. 지도 왼쪽 위에도 天嶺城門이 그려져 있어 고개마다 겹겹이 방어 진지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선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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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지도 宣川府地圖 (84cm×52cm)
    선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선천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읍내면(후에 선천읍) 천북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읍치의 坐向을 고려하여 남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다.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주변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마치 고을 전체의 산세가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울러 읍치 주변의 산지만 초록색으로 채색하여 읍치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를 비롯한 중요 지점을 확대·과장시켜 그곳의 자세한 사항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에는 마치 현장에서 보고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각종 관아건물의 모습과 방향 및 위치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홍살문 뒤쪽의 館宇는 客舍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읍치 앞쪽(북쪽)으로는 민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색을 노랗게 함으로써 관아 건물과의 대비를 선명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민가가 기와가 아니라 초가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道路는 관아와 鎭에 연결되는 것을 제외하면 동남에서 서북으로 향하는 通燕京路만이 표시되어 있다. 燕京은 淸의 수도였던 北京에 대한 異稱으로 이곳이 청과 조선을 연결하는 요충지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오른쪽의 山鎭과 東林鎭이 설치된 산성은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東林鎭 남쪽의 左峴은 한성부에서 평양과 안주를 거쳐 의주로 통하는 최고 關門 중의 하나였다. 지도에서도 산성으로부터 뻗어내려 온 산줄기 중간에 左峴關門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군사적 필요에 의해 嶺隘의 樹木 斫伐을 금지하던 중앙의 원칙을 반영하듯 관문 주위에는 長林이 형성되어 있다. 지도 위쪽 왼쪽에는 높은 바다와 험한 벼랑이 바다 위의 큰 섬을 이루었다는 地誌의 표현처럼 身彌島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500필의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고 하며, 오른쪽의 炭島의 목장에서는 약 50필의 말이 사육되었다. 신미도 아래에는 大池 을 비롯한 3개의 堤堰이 보이는데, 조선후기 해안가 개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위쪽에는 禦邊浦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戰船이 정박하던 곳을 일컫던 용어이다. 이 전선들은 선천부사가 겸임했던 防營에 소속되어 있었다.(이기봉)

  • 성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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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지도 成川府地圖 (74cm×131cm)
    성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성천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성천면에 있었다. 마치 水墨畵를 보는 것처럼 산을 黃淸色 굵은 선으로 강조하여 처리한 것이 이채롭다. 지도는 읍치의 정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외곽지역보다 훨씬 大縮尺으로 그렸다. 읍치에는 각종 관아 건물이 그 구조까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지방관이 사무를 보던 東軒이 衙舍로 표현되어 있으며, 왼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또는 殿牌)가 安置된 客舍가 東明館으로 표시되어 있다. 동명관이란 명칭은 고구려의 시조인 東明聖王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성천부는 조선초기의 지리서인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처음으로 자리 잡았던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왼쪽의 沸流江이란 명칭도 동명성왕이 처음으로 자리 잡았던 하천 명칭과 동일하다. 비류강은 지도 왼쪽으로 빠져나가 대동강 본류에 합류하며, 아래쪽의 南江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명관 왼쪽의 屹骨城도 동명성왕이 비류강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토착세력을 구성하고 있던 沸流國王 松讓이 처음으로 세웠다는 속설이 여러 地誌에 지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들은 동명성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지역이 압록강 이북이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현재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다. 읍치에는 民家도 즐비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瓦家와 草家를 지붕 색을 달리하여 표현함으로써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읍치의 한가운데에 있는 九龍石橋도 흰색으로 표시하여 나무로 만들어진 다른 다리와의 구별을 쉽게 하고 있다. 이외에도 읍치 주변의 산에 있는 나무도 본줄기를 붉은 색으로 칠하여 자세히 표시하는 등 읍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鶴山 밑에 校宮이 표시되어 있는데, 鄕校의 별칭이다. 읍치가 아닌 지역의 경우 面의 별칭인 坊과 창고만 표시하였으며, 읍치로부터의 방향과 거리를 적어 넣어 축척을 달리한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기타 읍치로부터 坊을 비롯한 중요 지점까지의 도로를 淸色의 산과 대비되는 붉은 색 실선으로 표시하여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이기봉)

  • 소길호리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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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길호리보지도 小吉號里堡地圖 (70cm×50cm)
    소길호리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송서면에 있었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堡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사료된다. 산줄기가 서로 연결되며 環抱形으로 그려진 점, 堡城으로의 이어짐이 강조된 점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堡는 서북쪽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堡에는 둘레 254尺(약 76m)의 조그만 石城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도에는 검은 실선과 東·西·北門을 통해 알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 烽燧인 烟臺, 국경 임시 초소인 把守와 도로 등 군사적 내용만을 간략하게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 소파아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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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아보지도 小坡兒堡地圖 (70cm×50cm)
    소파아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오북면 북상동에 있었다. 벽동군 소속의 다른 鎭堡 지도와 마찬가지로 풍수적 관점을 강조한 山圖처럼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렸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게 했는데, 地勢와 堡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이다. 堡에는 둘레 425尺(약 127m)의 작은 石城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지도에는 東門·北門 등만 표시하여 암시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북쪽의 압록강변에는 현재의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2군데 표시되어 있다. 그밖에 堡로부터 중요 지점에 이르는 도로와 비상 통신수단인 烟臺 등 군사적 측면만 간략하게 그리고 있다.(이기봉)

  • 숙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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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지도 肅川府地圖 (98cm×69cm)
    숙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서해면·검산면·조망면·동송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숙천면에 있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과 고을 내부의 산을 다른 색으로 표시하여 구별하였다. 산은 바닷가의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 읍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에는 각종 관아 건물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데, 撥所를 제외하면 대부분 뒷산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獄 옆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造山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읍치 오른쪽 위의 舍朴山에는 '邑之祖山'이, 읍치 아래쪽 강 건너에는 '邑之案山'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풍수적 관념의 반영이다. 지도에는 도로가 황색의 이중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도로의 굴곡과 다리를 표현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방관이 제사를 주관하던  壇·社壇·城隍祠 뿐만 아니라 鬼堂·彌勒堂과 寺刹 등 민간에서 꾸준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던 신앙 장소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場市도 읍치에 3개, 지도 왼쪽의 海倉에 1개가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민간 경제활동도 중요한 파악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津의 경우에는 배를 그려 넣어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그 외에 面·烽燧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왼쪽 위쪽에는 老江鎭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 순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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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지도 順安地圖 (74cm×97cm)
    순안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공평면·양화면·자덕면·용흥면·동두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순안면에 있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으며, 산줄기를 부각시키고 있다. 고을은 동·서·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지도에도 主脈에 해당되는 慈母山으로부터 고을 곳곳에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邑治의 경우도 산줄기가 겹겹이 싸여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동헌에 해당되는 衙舍와 鄕校, 객사에 해당되는 安定館 등 중요한 관아 건물만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하천도 본류와 지류를 간략하면서도 눈에 잘 띄게 표시하였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평양에서 대동강과 합류되는 보통강의 상류로서 紫溪川·細沙川·靈溪川 등 이 지역에서만 부르던 고유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읍치 밖으로는 面·倉庫·院·撥所·寺刹·烽燧 등 기본적인 인문 정보를 간략하면서도 알아보기 쉽게 수록하였다. 도로는 홍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과의 연결관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기타 왼쪽에는 영유현을 넘어 서해와 접해 있는 월경지가 보이고 있으며, 慈母山에는 山城이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순천군용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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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용연진지도 順川郡龍淵鎭地圖 (107cm×61cm)
    용연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과 덕천군 봉인면 사이의 彌勒嶺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순천군 소속이었다. 이곳은 대동강 본류와 그 지류인 비류강을 연결하는 요해처로서 북쪽에서 남진하는 적에 대한 방어기지 역할을 하였다. 지도 위쪽의 三月江이 대동강 본류의 중류쯤에 해당되는 고유명칭이었다. 지도는 산줄기를 강조해서 표현하였으며, 봉우리의 모양을 외부로 향하게 그려 지역 내부를 돋보이게 하였다. 지도 가운데의 主邑古基는 조선초기부터 기능이 상실된 고려시대의 邑治가 있었던 옛터이다. 그러나 지도가 鎭이 설치된 장소가 아닌 主邑古基를 중심을 그려졌다는 점, 이미 사용하지 않던 성곽도 자세하게 표시한 점을 통해 볼 때 아직도 중요한 지점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鎭에는 중요한 건물이 화려한 주택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으며, 외부와 통하는 고개까지의 도로가 황색실선으로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기타 倉 앞에 '主邑'이 쓰여 있는 경우는 순천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용연진에서 관할하던 것이다.(이기봉)

  • 순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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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지도 順川郡地圖 (106cm×61cm)
    순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선소면의 일부·신창면과 덕천군 잠상면·잠도면 그리고 맹산군 옥천면·학천면·봉인면에 해당된다. 지도는 서북쪽을 위쪽으로 배치하였는데, 邑治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大同江으로 지도에는 靜戎津·三月江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명칭이 통일되기 이전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津·浦·江·川 등의 고유한 명칭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는 고을이 마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가운데 위쪽의 '价川界'로부터 아래쪽의 '銀山界'를 잇는 선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殷山縣이 끼어 있었는데, 지도 한가운데에 '越殷山界三十里'란 문구를 통해 이와 같은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초에 지금의 邑治로 옮겼으며, 옛 읍치는 지도 오른쪽의 龍島面에 '順州古基'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쪽의 雷封面을 흐르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에는 하천에 의해 단절되는 구간을 제외하면 산줄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형태로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아울러 邑治의 경우 마치 전형적인 풍수적 형국을 보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동남쪽으로는 지형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裨補樹가 조성되어 있었음이 이 지도를 통해 확인된다. 읍치에는 중요 관아 건물만 그려져 있으며, 지방관이 제사를 관장하던  壇·社壇·城隍壇·校宮(향교)은 모두 표시되어 있다. 기타 場市와 창고 및 사찰이 표시되어 있으며, 順州古基 왼쪽에는 요해처에 설치된 龍淵鎭이 보이고 있다.(이기봉)

  • 시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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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채진지도 恃寨鎭地圖 (53cm×81cm)
    시채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신창면에 있었다. 鎭의 서북쪽으로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가는데, 압록강 변의 창성 방면으로 침입한 적에 대한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지도에도 강남 산맥 위의 고개를 가장 자세히 표시하여 요해처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緩項嶺에는 關門을 설치하여 방어하였다. 아울러 요해처에 樹木 斫伐을 금지하던 禁令을 반영하듯 고개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鎭의 중요한 건물들이 그려져 있으며, 담장까지 자세하게 그려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緩項川은 대령강의 상류이다. 기타 도로는 鎭으로부터 각 고개에 이르는 것만 간략하게 표기하였고, 주변 지역과의 거리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이기봉)

  • 신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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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진지도 薪島鎭地圖 (127cm×76cm)
    신도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신도면 동주동에 있었다. 1678년(숙종 4)에 지도에 보이는 陸鎭 지역에 別將이 파견되었다가 후에 兵馬僉節制使營으로 승격되었으며, 1807년(순조 7)에는 島鎭 지역인 신도로 옮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날씨가 좋으면 島鎭에서 屯을 치고, 나쁘면 陸鎭에 머무르는 형식을 취했다. 鎭은 압록강 하구에 설치되어 淸과의 국경 최전방 기지 역할을 하였는데, 지도 위쪽 오른쪽과 아래쪽 왼쪽에는 '彼地'와의 水路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바다와 강은 藍色, 육지는 黃色으로 표현하여 서로 분명한 구별을 이루도록 하였다. 바다에는 작은 돌섬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였으며, 해안가에도 지형적 특징을 고려하여 그렸다. 이 지역에는 대부분 100m도 되지 않는 낮은 산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을 강조하여 표현하였으며, 육지와 섬 모두 鎭 주변의 산줄기를 環抱形으로 그려 풍수적 관념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島鎭 왼쪽의 主山과 오른쪽 바닷가의 正南山, 그리고 陸鎭 오른쪽의 主山과 왼쪽의 鎭眼山을 통해 地勢를 풍수적 형국과 맞추려고 노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眼山은 案山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관아건물과 창고 및 사찰은 실질적인 모습과 흡사하게 그렸으며, 烽燧는 불이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타 신지도에는 白鷺 이라는 堤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은 간척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명칭이다. 이를 통해 국경지역에서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아이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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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진지도 阿耳鎭地圖 (53cm×81cm)
    아이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 성서동에 있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主山을 배경으로 한 鎭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산 소속 진보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鎭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산을 그렸다. 이에 따라 鎭은 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으며, 확대·과장된 중심부분이 쉽게 부각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은 중심을 주변보다 大縮尺으로 그려 중심의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하는데 유리한 이점을 제공한다. 지도에도 중심부의 성곽과 도로, 중요 건물의 표현이 아주 자세한 반면에 주변 지역은 중요 지점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淸과의 경계선인 압록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나간다. 압록강변에는 지금의 국경초소인 把守가 4개나 표시되어 있어 군사적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鎭에는 5,784尺(약 1,785m)의 石城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압록강변의 많은 鎭堡 중에서는 중형 이상에 해당된다. 이 지도를 통해 石城이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서쪽 방면으로 이중의 성곽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성곽 왼쪽의 하천은 압록강의 지류인 충만강이며, 현재의 적유령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간다.(이기봉)

  • 안주목소속노강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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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소속노강진지도 安州牧所屬老江鎭地圖 (54cm×84cm)
    노강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안주군 연호면 서흥리에 있었다. 지도의 표현 양식이 安州牧地圖와 같아 동일인이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本鎭에 해당되는 安州牧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위쪽으로는 淸川江下流가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西海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西海에는 '十二監城門'이라는 문구와 12개의 섬이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노강진 서쪽에는 작은 섬들이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다만 거리는 한정된 지면을 고려하여 실제보다 가깝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게 그렸으며, 특히 해안가 절벽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鎭에는 평안도에서는 드물게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水軍 기지인 만큼 해안가에 대한 파악이 중요했음을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鎭이 설치된 지역에는 관아 건물이 그 구조까지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鎭館은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를 安置하고 지방관이 초하루와 보름에 望闕向拜하던 객사이다. 이러한 객사는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된 모든 곳에 건립되어 있었으며, 각 고을의 경우 고유한 명칭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절벽 위에는 바다를 감시하던 瞭望亭이 보이고 있다. 鎭에는 防牌船과 兵船이 각각 1척, 伺候船 2척, 汲水船 1척 등 총 5척의 戰船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輿地圖書≫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戰船이 정박하던 곳은 진이 설치된 지역이 아님을 이 지도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지도 위쪽의 下公三里에 戰船이란 문자와 배의 그림이 묘사되어 있는데, 里의 명칭 아래에는 유일하게 鎭屬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아마 진이 설치된 지역은 절벽이 많은 해안가이기 때문에 戰船의 정박이 어려웠으며, 潮水가 깊숙이 들어가는 하공삼리에 정박처를 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안주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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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지도 安州牧地圖 (99cm×138cm)
    안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안주군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고, 읍치는 안주읍에 있었다. 안주는 의주에서 평양을 거쳐 수도 한양으로 가는 요충지로서, 三重의 성곽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도에는 이 성곽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비해 축척을 확대시켜 표현하였다. 성곽은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축성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淸川江과 같은 자연하천을 垓字로 활용하였다. 아울러 이 지도를 통해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좌우에서 협공할 수 있는 雉가 11개나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內城이 가장 오래된 石築의 성곽으로서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043步(약 5,500m), 높이가 13척(약 4m)이다. 오른쪽 위의 성곽은 新城이라고 불리며, 둘레 410步(약 700m)의 石築이다. 오른쪽의 성곽은 外城으로서 土築이며, 둘레는 약 1,008步(약 1,800m)이다. 內城의 위쪽에는 평안도 兵馬節度使가 파견된 兵營, 아래쪽에는 안주목의 관아 건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민가는 지붕의 형태만 그려져 있는데, 내성에는 안주목 관아 앞쪽에 조금 보이고 있고 외성 내부에는 상당히 밀집해 있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성밖의 面 경계는 검은 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거리의 里를 일괄적으로 적은 후, 面에 속한 里를 합해 총수를 기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州內面의 경우는 소속 里의 이름 위에 특별히 '州'자를 표기하여 혼동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도로는 황색으로 표시하였는데, 중요도에 따라 굵기를 달리하여 표현하였다. 新城 안쪽에는 忠愍祠宇가 보이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때 평안도 兵使로서 淸兵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자결하여 영의정으로 追贈된 忠莊公 南以興(?-1627)의 위패를 配享하였다. 반면에 外城 오른쪽에는 乙支文德 등을 配享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毁撤된 淸川祠宇터가 보이고 있다. 기타 烽燧·撥所·寺刹·神堂 등 인문적 사항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수록하였으며, 지도의 아래쪽에는 老江鎭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 양덕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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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지도 陽德縣地圖 (95cm×68cm)
    양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양덕군 전체와 성천군 대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동양면에 있었다. 陽德縣의 명칭은 1396년(태조 5)에 통합된 陽岩과 樹德이란 고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를 고을 내부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 고을 안쪽 산줄기의 색과 구분하여 그림으로써 지역의 내적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艮(동북) 방향의 산줄기가 지도의 외곽선과 연결되어 있는데, 白頭大幹의 脈이 들어오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이 'ㄴ'자형을 취하고 있음에도 종이의 모양에 맞추기 위해 사각형으로 그렸다. 이에 따라 상당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는데 하천의 표현은 특히 심하다. 고을은 크게 2개의 하천 유역권으로 나뉜다. 지도 오른쪽의 大倫面과 邑治 및 溫泉面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상류이며, 나머지는 대동강의 또 다른 지류인 비류강의 상류이다. 아울러 하천의 굵기를 거의 구분하지 않아 상류와 하류의 구분이 애매하고, 서로 이어 그리지 않음으로써 혼돈을 주고 있다. 남강의 경우 위쪽과 아래쪽이 서로 분리되게 표현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위쪽이 발원지이며, 아래쪽으로 흘러 황해도의 谷山으로 빠져나간다.비류강의 경우 2개로 나누어져 있다. 아래쪽의 것은 明月嶺쪽에서 발원하여 下龍面쪽으로 흘러간다. 위쪽의 것은 載靈山쪽에서 발원하며, '北'자 있는 곳에서 끊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두 하천은 下龍面에서 합류하여 서쪽의 成川으로 흘러 나가나 이 역시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은 왜곡은 강줄기보다는 산줄기를 강조하여 표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에는 客舍인 館舍를 비롯하여 중요한 건물이 표시되어 있으며, 獄은 실제 모양에 맞게 둥근 담장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기타 面과 社倉, 場市가 표시되어 있고, 도로도 투박하나마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어정탄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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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정탄보지도 於汀灘堡地圖 (53cm×81cm)
    어정탄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어신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산을 지나치게 과장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매우 소략하게 처리했다. 서북쪽으로부터 오는 적을 막아야 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서북-동남을 아래-위로 향하게 했다. 아래쪽에는 鴨綠江이 남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건너편에는 '小阿坊賊路'란 표시가 있다. 압록강변의 鎭堡는 강 너머의 賊路 반대편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堡에는 石城이 있었는데, 지도를 통해 압록강변의 절벽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 내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은 瞭望臺가 가장 강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樓臺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만큼 최전방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이외에 국경 초소인 把守와 烽燧만이 표시되어 있는 점, 이웃하는 鎭堡와의 거리가 중요하게 기록된 것도 마찬가지이다.(이기봉)

  • 영변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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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지도 寧邊府地圖 (65cm×110cm)
    영변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영변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변면에 있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이곳에 있는 妙香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묘향산에는 최고봉인 毘盧峯 아래에 普賢寺를 비롯한 여러 사찰과 酬忠祠가 표시되어 있다. 수충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공을 세운 休靜(1520-1604)과 惟政(1544-1610)을 배향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였다. 지도의 오른쪽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은 청천강 본류이며, 읍치 아래쪽은 그 지류인 구룡강이다. 하천은 굴곡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변의 읍성은 鐵甕城으로 이름 붙여질 정도로 難攻不落의 성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四面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後金의 포위에도 함락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읍성 내에 세 개의 성을 더 쌓았다. 아래오른쪽은 新城이라고 하며, 그 왼쪽은 藥山城이라고 하는데 모두 1633년(인조 11)에 만들어졌다. 왼쪽은 北城이라고 하며, 1685년(숙종 11)에 만들어졌다. 지도에서는 里가 원 안에 표시되어 있는데, 이름의 맨 앞 자는 소속된 坊面 이름의 첫 자이다. 예를 들어 읍치 오른쪽의 '梧鳳巢'의 경우 '梧里坊의 鳳巢里'라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坊面과 소속 里의 경계를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의 색도 다르게 하여 더욱 분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각형 안에 기록된 사찰·교량·창고 등도 외곽선의 색을 서로 다르게 표시함으로써 소속된 坊面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산줄기의 경우 봉우리를 끊임없이 이어진 형태로 그려 고을의 통일성을 담보하고자 하였다. 기타 영변은 1429년(세종 11)에 두 고을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그 흔적이 지도 아래쪽의 古延州와 읍성 왼쪽 끝의 古撫州로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원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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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지도 寧遠郡地圖 (52cm×109cm)
    영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영원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원면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지금의 묘향산맥이, 동쪽과 동남쪽으로는 지금의 낭림산맥이 지나가는데 지도에도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외곽의 산을 고을 내부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안쪽의 각종 산줄기가 이어진 형태로 그려져 있어 지역의 내적 통일성이 강조되고 있다. 아울러 산줄기가 약한 곳도 계속적으로 이어 그린 점, 지도 오른쪽 아래에 '白頭山入脈'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대동강의 최상류인데,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방향이 약간 왜곡되어 있다. 面에 모두 倉庫의 이름이 붙어 있음이 특이하며, 실제 창고의 모양을 그려 넣음으로써 구별을 쉽게 하였다. 里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는데,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황색의 원을 표시하여 이용자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邑治는 지도 왼쪽에 보이며, 하천을 중심으로 중요 건물이 나누어져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표시된 館宇는 객사를 의미하며, 校宮은 향교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도로는 황색 실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북쪽의 희천과 동쪽의 함경도로 향하는 고개 길과의 연결 관계가 자세하다. 이외에 上市·下市·古市 등의 장시와 사찰, 현재도 溫泉으로 경영되고 있는 溫井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유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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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지도 永柔縣地圖 (53×80cm)
    영유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노지면·청산면·용호면·해소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유면(후에 평원면)에 있었다. 고을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데, 지도 아래쪽에는 西海가 보이고 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鎭山인 米豆山의 위치와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읍치 공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시대의 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인문정보가 가장 많은 읍치를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읍치에 있었던 中部面·東部面과 읍치 밖에 있었던 面을 비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같은 縮尺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읍치에는 각종 관아 건물이 비록 소박한 형식이기는 하지만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가장 중요하고, 넓은 면적을 차지하였던 東軒과 客舍(淸溪館) 및 鄕校는 담장의 모습까지도 현실감 있게 표시하였다. 동헌 오른쪽의 三忠祠 역시 담장까지 자세하게 표시되었는데, 조선시대에 書院이나 祠宇가 얼마나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곳에는 諸葛亮·岳飛·文天祥 등의 중국 인물을 配享하여 1668년(현종 9)에 賜額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毁撤되지 않은 47개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둥근 형태의 담장을 두른 刑獄과 塔을 상징적으로 그려 넣은 사찰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기타 지방관이 제사를 주관했던 社壇· 壇·城隍祠도 잘 표시되어 있다. 面에는 축척을 달리함으로써 나타나는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 읍치로부터의 거리를 적어 넣었다. 반면에 읍치에 있었던 중부면과 동부면에는 '邑內'라는 용어를 기록하여 遠近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面 왼쪽에는 소속된 洞里의 숫자를 적어 놓아 행정적인 파악을 쉽게 하였으며, 창고와 시장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위쪽에는 한양(京城)으로부터 의주로 가는 대로를 두 개의 검은 색 직선 속에 붉은 색을 칠하여 그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이기봉)

  • 용강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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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지도 龍岡縣地圖 (55cm×84cm)
    용강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지운면·다미면·오신면·양곡면·용월면·서화면·해운면과 강서군 함종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邑治는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1872년에 제작된 다른 지도에 비해 실제의 면적이나 거리, 방향에 대한 특별한 왜곡이 없도록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북쪽으로는 西海에, 동남쪽으로는 大同江 하류인 急水門에 접해 있는데 지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의 표현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洞里에 대한 기록이 독특하다는 점이다. 세로로 긴 사각형 안에 洞里를 기록하였는데, 面의 명칭 중 첫 글자를 앞에 넣어 소속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각 面의 一洞 옆에는 藍色의 '○'를 표시하여 面 사이의 구별도 쉽게 하였다. 아울러 지도 아랫부분에 있는 주기의 坊面條에 面의 이름을 기록하여 지도상의 里에 대한 표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지도 아래 오른쪽에 있는 '多下五'는 '多尾面의 下五洞'을 의미한다. 洞里의 명칭을 一·二·三과 같은 숫자, 上·下와 같은 방향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호간의 구별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측면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鎭은 가로로 긴 붉은 사각형, 寺刹은 가로로 긴 藍色 사각형, 場市는 세로로 긴 藍色 사각형으로 구분하였다. 읍치 내의 건물들도 客舍인 鰲山館은 가로로 긴 검붉은 사각형, 官衙는 세로로 긴 검붉은 사각형, 그 밖의 鄕校·城隍壇·社壇·訓練은 주황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하여 이용자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산줄기와 강줄기, 도로도 각각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浦口나 津·섬·봉수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다. 읍치 북쪽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黃龍山城은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이후의 조선시대 기록에 당 태종과 고구려 양만춘의 격전장이었던 옛 安市城으로 잘못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要塞地였다. 아래쪽의 주기에는 전라도 金馬郡에서 馬韓이라 칭했던 箕子의 52代孫 鮮于諒이 백제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龍城國의 도읍으로 삼았음을 기록하였다.(이기봉)

  • 용강황룡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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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황룡진지도 龍岡黃龍鎭地圖 (55cm×82cm)
    황룡진은 일제시대의 용강군 용강면 오석산(505m)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注記에는 황룡산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 산성의 둘레는 12,580尺(약 3,774m)으로 대형에 해당된다. 동쪽과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북쪽과 남쪽만이 점차 낮아지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문 방향에는 甕城을 만들어 놓아 이중 방어를 하고 있다. 그 좌우 산등성이에는 성곽을 오르는 적병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바깥쪽으로 약간 튀어 나가게 만든 雉城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견고한 요새이기에 注記에는 一夫가 萬夫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적혀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대부분의 地誌에서 이곳이 고구려의 양만춘과 당태종이 격전을 벌였던 安市城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현재는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울러 용강현 지역이 고구려 유리왕 시절의 黃龍國이 자리잡은 터라는 기록이 지속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산성 안에는 鎭舍를 비롯하여 유사시 이곳으로 피난하도록 되어 있는 本邑(龍岡)·咸從·三和의 倉庫가 보이고 있다. 아울러 서문 쪽에는 장기전에 필수적인 소금을 저장했던 埋 處도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으로는 유사시 군사 지휘 본부의 역할을 하였던 三邑將臺가 터로만 남아 있다. 이 將臺에는 평상시에는 黃龍寺를 설치하여 僧將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내용이 注記에 적혀 있다. 그러나 이미 頹落한 모습을 통해 이미 소홀하게 관리된 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鎭舍 오른쪽에는 箕子影殿墟가 표시되어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毁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箕子朝鮮의 시조로 알려진 箕子을 配享하여 1721년(경종1)에 만들어졌으며, 1725년(영조 1)에 賜額받았다.(이기봉)

  • 용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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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지도 龍川府地圖 (127cm×75cm)
    용천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양서면·양하면·양광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된다. 이 고을은 압록강변의 의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지도에도 군사적 측면을 가장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13,308尺(약 4,000m)의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지도를 통해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訓練廳을 제외한 관아 건물이 모두 성곽 안에 배치되어 있어 군사적 요새로서의 성격을 잘 갖추고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龍骨山城이 보이고 있는데, 역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성곽 안에는 각종 건물을 비롯하여 항아리로 표시된 저장 창고가 구비되어 있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지도의 왼쪽에는 彌串鎭이 보이고 있는데, 다른 지도에서는 薪島鎭이라고 표시하였다. 신도진은 육지와 섬에 동시에 존재하며, 기후가 좋을 때는 섬에서, 나쁠 때는 육지에서 적을 방어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도 오른쪽의 良策站에는 객사가 표시되어 있는데, 북쪽의 의주에서 동남쪽의 철산으로 가는 大路 상에 있어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烽燧에는 붉은 색 횃불 모양을 표시하여 쉽게 찾을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교량 역시 상세하게 표시하였다. 반면에 비군사적 측면에 대해서는 面과 場市, 倉庫 등만을 간략하게 표시하였다. 기타 바다와 강을 남색으로, 육지를 황색으로 표시하여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이기봉)

  • 우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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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현진지도 牛峴鎭地圖 (53cm×81cm)
    우현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 도원면의 우현령 아래에 있었다. 鎭은 북쪽 압록강변의 초산을 뚫고 넘어온 적을 2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1734년(영조 10)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鎭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鎭의 남쪽에는 현재의 적유령 산맥이 동서로 지나가며, 牛峴嶺(536m)을 넘으면 운산-영변-안주로 이어진다. 楚山 소속의 鎭堡 지도는 모두 같은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동일인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산을 鎭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 중심부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鎭이 설치된 중심부와 주변의 축척을 달리하여 鎭의 자세한 정보를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鎭에는 각종 관아의 대부분이 표시되어 있는데, 館宇는 객사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아울러 黃色 지붕의 초가로 이루어진 民家도 실질적인 모습에 가깝게 그렸다.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小縮尺을 적용하여 사실성이 떨어지지만 거리에 대한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이와 같은 단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창고와 민가를 구분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으며, 사찰의 경우에는 탑을 그려 넣어 상징성을 통한 이해의 증진을 도모하였다. 河川은 비슷한 굵기로 그려 넣어 상류와 하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표현하였다.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압록강의 지류인 충만강의 상류로서 남쪽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기타 要害處인 만큼 고개와 중요 지점을 연결하는 도로의 표현이 아주 자세하다.(이기봉)

  • 운두리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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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두리보지도 雲頭里堡地圖 (53cm×81cm)
    운두리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신평리에 있었는데, 압록강을 넘어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도는 서북쪽을 아래로, 동남쪽을 위로 그렸다. 지도의 아래 왼쪽 압록강 건너편에는 운두리보가 방어해야할 三叉洞賊路가 표시되어 있다. 堡에는 둘레 341尺(약 102m)의 조그만 石城이 있었는데, 압록강변의 절벽을 등지고 만들어져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기타 把守와 烽燧 등의 방어 시설과 이곳에 이르는 도로도 제법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산과 소하천 등은 극히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운산군위곡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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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위곡진지도 雲山郡委曲鎭地圖 (95cm×68cm)
    위곡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 월은동에 있었다. 지도의 북쪽으로는 현재의 적유령 산맥이 지나가는데, 압록강변의 1차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적에 대한 2차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鎭은 창성이나 초산 방면으로 침입한 적이 운산을 거쳐 영변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 북·서북쪽의 각 고개로부터 鎭을 거쳐 운산(本邑)으로 향하는 도로가 눈에 잘 띄도록 표현되어 있다. 각 고개에는 關防處에 樹木의 斫伐을 금지하던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반영하듯 도로변의 무성한 나무가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鎭은 북쪽으로부터 산줄기가 겹겹이 내려온 자리에 그려져 있으며, 그 남동쪽으로는 裨補樹로 추정되는 숲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鎭에까지 풍수적 형국을 적용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鎭에 場市가 표시되어 있어 산간 오지에까지 형성된 조선후기의 유통망을 실감할 수 있다.(이기봉)

  • 운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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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산군지도 雲山郡地圖 (96cm×69cm)
    운산군은 일제시대에도 평안북도 운산군에 해당된다. 고을의 북·서쪽으로는 지금의 적유령산맥이 우뚝 솟아 있는데, 압록강을 넘어 온 북쪽의 적을 막아내는 2차 저지선의 역할을 하였다. 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전략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어 북·서쪽 산과 고개에 대한 표현이 자세하고,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다른 고을과의 연결관계 등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지도 왼쪽의 위쪽에는 委曲鎭이 보이는데,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지도 왼쪽 위의 牛峴嶺과 車嶺의 북쪽 사면에도 각각 牛峴鎭과 車嶺鎭이 있었다. 아울러 要害處의 樹木 斫伐을 금지하였던 중앙 정부의 명령을 반영하듯 고갯길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묘사되어 있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藍色이 사용된 데 반해 도로는 黃色으로 표시하여 구별하기 쉽게 되어 있다. 읍치로부터 각 고개로 연결된 도로가 가장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역시 군사적 측면을 가장 부각시키고 있다. 북·서쪽의 높은 산지로부터 흘러든 여러 물줄기가 모여 고을의 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이며, 지도 아래 오른쪽 끝에는 鷲江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유명했던 藥水가 지도 왼쪽에 冷川(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운산온천으로 유명한 溫川(泉)이 지도 오른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 가운데에 白璧山이 그 이름처럼 흰색으로 특별하게 그려져 있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龍池가 있어 祈雨處로 알려져 있으며, 운산군의 鎭山이었다. 읍치는 이 백벽산으로부터 이어진 산줄기에 의해 포근히 감싸져 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읍치 오른쪽에 衛滿墓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增補文獻備考≫에는 燕王馮弘墓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지도 전체적으로는 소략한 느낌을 주지만 面·場市·倉庫·寺刹과 중요한 관아 건물 등 기본적인 인문 사항은 대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이기봉)

  • 위원군소속갈헌동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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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소속갈헌동보지도 渭原郡所屬乫軒洞堡地圖 (130cm×73cm)
    갈헌동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 서태면 봉풍동에 있었다. 위원군 소속의 鎭堡지도는 표현 양식이 모두 같아 동일인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堡에는 둘레 541尺(약 162m)의 작은 石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표현하였다. 성곽 안에는 위원군 소속의 다른 진보지도와 마찬가지로 관아 건물과 노란색 지붕의 민가를 상징적으로 표시하였으며,軍器庫만 특별히 기록하였다. 군사적 정보를 중요하게 여긴 지도답게,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압록강변의 把守와 고개 및 중요 지점으로 연결되는 도로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지도 왼쪽의 金江臺把守는 높은 절벽 위에 만들어져 있음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위원군소속오로량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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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소속오로량진지도 渭原郡所屬吾老梁鎭地圖 (129cm×74cm)
    위원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 봉산면 고보동에 있었다. 鎭에는 특별히 성곽을 설치하지는 않았으며, 지도에도 실선으로만 경계를 표시하였다. 鎭이 들어선 지역에는 관아건물과 노란색 지붕의 민가만을 간단하게 그려 넣었는데, 南門이 홍살문의 형태로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 국경의 요새답게 把守와 烽臺, 요해처인 隘口 등 군사적 시설만을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도로는 중요 지점과의 연결관계만을 표시하였으며, 주변의 鎭堡 및 主鎭(渭原)과의 거리를 특별히 기록하였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主山을 그려 넣었는데, 풍수적 관념이 이러한 국경지방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中把守 옆의 甑峯은 실제로 시루 모양처럼 그려 넣었음이 이채로우며, 압록강의 지류인 禿魯江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위원군소속짓동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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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소속짓동보지도 渭原郡所屬嗭洞堡地圖 (128cm×74cm)
    짓동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 서태면 이산동에 있었다. 위원 소속의 다른 鎭堡 지도와 같은 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鎭에는 둘레 1,000尺(약 300m)의 작은 石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압록강 건너편에는 彼邊楸木洞이 적혀 있으며, 그 옆에는 大賊路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 방향으로 적이 쳐들어온다는 뜻이며, 압록강변의 鎭堡는 바로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지점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정호가 만든 ≪東輿圖≫의 경우에도 압록강 건너편에 많은 洞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모두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지도에는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把守와 烽臺 및 각 고개와 중요 지점으로 연결되는 도로 등 군사적 정보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主山이 기록되어 있는데, 국경지방까지도 풍수적 관념 하에 주변 산세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金江臺烟臺는 같은 위원 소속의 갈헌동보지도에 把守로 적혀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이기봉)

  • 위원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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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지도 渭原郡地圖 (129cm×73cm)
    위원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위원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위원면에 있었다. 지도는 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전체적으로 황색 계통을 많이 사용하여 구별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읍치의 정보를 자세히 표시하기 위해 주변지역에 비해 大縮尺으로 그렸다. 읍치에는 향교인 校宮과 객사인 館所를 비롯하여 중요한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民家도 다수 표시하였다. 작고 혼란스럽게 그렸지만 지붕 색을 달리하여 초가와 기와 건물을 구분하는 등 나름대로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고을이 압록강변에 위치하여 국경 전초기지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읍치에는 둘레 4,047步(약 7,284m)의 대형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울러 이 지도를 통해 邑城이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城內에는 '九井一池'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食水의 공급이 성곽의 운영에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읍치를 확대·강조하여 그리다 보니 주변 지역에 대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지도의 위쪽과 왼쪽에 있는 압록강의 경우 동북쪽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방향이 약간 틀리게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 산줄기의 경우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향해 뻗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왜곡되어 있다. 읍치를 돌아 흘러나가는 하천은 위원강이며, 그 위쪽의 하천은 강계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독로강이다. 압록강변에는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듯 吾老梁鎭· 洞鎭·乫軒洞鎭을 비롯하여 국경 초소 역할을 하던 把守가 무려 16개나 표시되어 있다. 비상 통신수단인 烽臺의 정보도 자세하게 수록하였으며, 각종 고개와 중요 지점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표시가 자세한 것도 군사적 측면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비군사적 정보로는 각 坊面에 주로 설치된 倉庫와 場市·寺刹 정도에 불과하다. 기타 작은 지면에 많은 문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鎭·倉庫 등을 원의 크기와 색을 통해 구별해 주려한 점이 눈에 띈다.(이기봉)

  • 유원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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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원진지도 柔院鎭地圖 (80cm×50cm)
    유원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희천군 동창면에 있었다. 鎭의 북쪽으로는 지금의 적유령산맥이 지나가는데, 강계 방면의 압록강을 건너온 적에 대한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처음으로 종9품의 別將이 파견되었으며, 1675년(숙종 1)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바뀌면서 鎭이 되었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북쪽 방면에 대한 방비가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곳 중의 하나이다. 지도에도 북쪽 강계 방면의 중요한 고개인 道陽嶺과 甲峴嶺이 표시되어 있다. 이 고개의 북쪽으로는 강계 소속의 平南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로는 2개의 실선 속에 노란색을 첨가하여 가장 잘 보이게 하였으며, 入鎭路와 각 고개로 연결되는 것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 지도 안쪽의 하천은 청천강의 최상류이며, 산을 鎭舍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여 통일성과 안정감을 돋보이게 하였음이 이채롭다.(이기봉)

  • 은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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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지도 殷山縣地圖 (78cm×52cm)
    은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은산면·북창면 전체와 선소면의 일부 개천군 봉동면의 남쪽에 해당된다. 藍·赤·黃 등 몇 가지의 색만을 사용하여 지도 전체적으로 구별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다만 산지의 경우 남색과 황색을 동시에 사용하여 하천과의 구별을 쉽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낮은 지대 산줄기의 경우에는 남색만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높낮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산은 주로 읍치에서 보이는 방향으로 그려 넣어 중심부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천도 실제와는 다르게 고을을 감싸고 있는 듯이 그려 중심부를 부각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바깥쪽의 하천은 대동강 본류인데, 지도 왼쪽 아래에는 이 지역에서 부르던 명칭인 禹津江이 기록되어 있다. 대동강은 고을 북쪽 경계의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 경계를 타고 흐르며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고을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장선강인데, 아래쪽 順川 방향에서 들어오는 것은 남색이 삽입되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대축척으로 그려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남쪽으로부터 산줄기가 이어진 읍치 주변과 관아 밀집지역을 풍수적 형국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주요 건물의 명칭이 거의 모두 들어가 있으며, 붉은 색으로 형체만을 그려 넣었다. 刑獄의 경우에는 실제로 담장이 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상황을 현실감 있게 표시하였다. 건물의 명칭 중 校宮은 향교를 의미하며, 同昌館은 이 고을의 객사 이름이다. 읍치에 둘레 5,168尺(약 1,550m)의 土城이 있었음을 문장으로 기입하였다. 모든 門에 건물의 형체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기록에 의하면 토성은 이미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고을 외곽지역으로는 面의 異稱인 坊의 이름이 官門으로부터의 遠近 거리와 함께 쓰여 있다. 이외에 창고와 장시 등이 사각형 안에 구별되어 표시되어 있으며, 중요 지점으로의 도로는 황적색 실선으로 자세히 표시하여 놓았다.(이기봉)

  • 임토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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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토진지도 林土鎭地圖 (70cm×50cm)
    임토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관회면에 있었다. 마치 묘자리(山所)의 풍수적 형국을 표현한 山圖처럼 산줄기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산줄기의 방향과 鎭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鎭은 압록강의 지류인 東川의 상류 협곡에 설치되었다. 鎭의 북쪽으로는 동천과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에 벽동군 읍치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강남산맥이 지나간다. 압록강변의 벽동 방어선을 뚫고 들어온 적을 막아내는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기타 벽동군 읍치로부터 鎭을 통과하여 강남산맥 위의 甫里見子嶺으로 통하는 도로가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임해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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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해진지도 壬海鎭地圖 (49cm×70cm)
    임해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서호리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곽산 소속이었다. 다른 기록에는 '壬'이 '臨'으로 쓰여 있기도 하다. 지도에는 산줄기와 하천, 도로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의 아래쪽은 西海이다. 鎭 위쪽의 大路는 의주에서 안주-평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이며, 지도 위쪽에는 凌漢山 위에 만들어진 山城이 표시되어 있다. 능한산성과 임해진 모두 의주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정주 소속의 지역은 '定州'라는 문자를 병기하여 구분하였으며, 鎭 아래쪽의 龜 坊은 龜城府의 월경지이다. 지도 위쪽의 注記에는 鎭의 별장을 淸北出身으로만 뽑았다는 사실과 지도를 그릴 당시에는 군졸들이 흩어져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지 못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오고 있다.(이기봉)

  • 자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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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부지도 慈山府地圖 (120cm×56cm)
    자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사인면·후탄면에 해당된다. 고을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지형조건을 반영하여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동쪽의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가는 대동강 본류이며, 지도에는 禹津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강에는 노를 젓는 사공이 탄 나룻배를 그려 넣어 나루(津)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산줄기를 가장 강조해서 그렸는데, 표현방법이 풍수적인 관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 위의 성곽은 子母山城으로서 안주와 평양 사이의 중요한 關防處였다. 이 고을의 읍치는 1633년(인조 11)부터 1637년까지, 1703년(숙종 29)부터 1718년까지 자모산성에 있었다. 특히 후자의 기간에는 이 산성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을의 邑格이 郡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읍치에는 중요 관아 건물만 그려 넣었으며, 제언인 '筒'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중요한 것은 노란색 실선으로, 小路는 회색 점선으로 표시하여 구별하였다. 기타 坊(面의 異稱)은 붉은 색원을 그려 넣어 이해하기 쉽게 했으며, 지도 위쪽의 安國寺에는 탑까지 그려 넣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이기봉)

  • 자산자모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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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자모산성지도 慈山慈母山城地圖 (84cm×59cm)
    자모산성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자모산 일대에 있었다. 의주로부터 안주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要塞 중의 하나로서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 주기에 나와 있듯이 고려에서 처음으로 쌓았으며, 이후 유지만 남아 있다가 병자호란(1627) 직전인 1621년(광해군 13, 天啓 1)에 內城을 다시 쌓았다. 병자호란 이후 1633년(인조 11)과 1704년(숙종 3)에는 慈山 고을의 읍치로 설정되기도 하였다. 지도 왼쪽의 外城은 牛馬城이라고도 하며, 1703년(숙종 29, 康熙 42)에 만들어졌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地脈이 서북쪽인 烏德山으로부터 온다는 주기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내성의 둘레는 13里 81步,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7,000m 안팎의 대형 산성이다. 外城의 경우 지도에는 조금밖에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는 18里 241步,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10,000m 안팎의 규모였다. 산성은 산 정상 부근의 넓은 평지에 만들어져 있는데, 주기에도 나와 있듯이 바깥쪽으로는 험하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성곽은 지형의 굴곡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문은 크게 東·西·南門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暗門만이 보이고 있다. 砲樓는 주기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정확히 18개가 그려져 있으며, 성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전쟁 시 지휘소가 되는 將臺가 보이고 있다. 오른쪽과 아래쪽에는 성벽을 공격하는 적병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雉城이 각각 2개와 1개 보이고 있어, 매우 정교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장기간의 포위공격을 견디는데 가장 중요한 池塘이 주기에는 18개나 있었다고 나온다. 지도에도 서북쪽 하천의 水源이 성내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표시하여 물의 공급이 충분한 곳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기타 성내에는 鎭衙와 巡營 건물을 비롯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屬邑의 倉庫가 가장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정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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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지도 定州地圖 (50cm×68cm)
    정주목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정주군 정주읍·남서면·덕언면·갈산면·고안면·고덕면·대전면·마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정주읍에 있었다. 아래쪽에는 지도를 그렸고, 위쪽에는 고을에 대한 여러 정보를 기록하여 지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지도는 전반적으로 산과 하천을 투박하게 표현했지만 전반적인 이해에는 큰 지장이 없다. 지도 위쪽의 吉祥山은 龜城에서 들어오는 主脈이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정보를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주변 지역보다 大縮尺으로 그렸다. 주기에 의하면 읍성은 원래 둘레 9,700尺(약 2,910m)의 土築이었는데, 여러 번의 변화를 겪은 후 둘레 4,680步(약 8,424m)의 石築 성곽으로 바뀌었다. 성곽 내부에는 중요한 관아 건물만 표시되어 있으며, 성곽의 경우 水口까지 표시하는 세심한 묘사를 하고 있다. 聖蹟碑가 城外와 城內에 1개씩 보이고 있다. 전자는 태조 이성계가 읍치 오른쪽의  川江에서 元軍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사적을, 후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곳에 머물렀던 사적을 陰刻했다고 주기에 적혀 있다. 坊面은 노란색 원 안에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표시하였는데, 성 내외에 있는 것은 거리 대신에 城內·城外를 써넣었다. 아울러 龜城의 월경지였던  坊과 운산의 월경지였던 魚物坊에는 본 고을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거리를 표시하지 않았다. 烽燧와 烟臺도 검은 실선의 사각형 안에 표시하여 중요한 정보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미 폐지된 창고 역시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성내와 다른 고을로 연결되는 도로는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지도의 왼쪽에 있는 獐島에는 '鄭令相賜牌地'가 표시되어 있는데, '領議政 鄭○○가 왕으로부터 折受받은 땅'이란 의미이다. 조선후기에 해안가나 섬을 중심으로 宮房田이나 賜牌地가 늘어갔던 상황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場市는 주기에만 3개가 적혀 있는데, 거리와 소속 坊의 이름을 적어 놓아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이기봉)

  • 중화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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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부지도 中和府地圖 (98cm×68cm)
    중화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동두면·간동면·신흥면·양정면·해압면·당정면·고생량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중화면에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郡이었다가 1592년(선조 25)에 都護府로 승격되는데, 이 고을 사람 林仲梁이 의병을 일으켜 倭軍에 항거했기 때문이다. 고을은 동서로 길게 늘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지도에는 남북의 폭이 실제보다 더 넓게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에는 대동강 하류가 腰浦江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위쪽에 보이는 하천은 대동강의 支流인 곤양강이다. 산줄기는 邑治에서 바라보이는 環抱形으로 그려 고을의 통일성과 읍치의 중심성를 부각시키고 있다. 아울러 다른 고을의 산지는 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으며, 고을의 鎭山인 淸凉山이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청량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줄기가 강조된 풍수적 형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얼음 저장 창고였던 氷庫가 노란 초가지붕 형태로 그려져 있음이 이채롭다. 인문적 내용으로 독특한 것은 도로와 교량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는 점인데, 邑治로부터 각 面에 이르는 길이 특히 자세하다. 지도 위쪽으로부터 읍치를 거쳐 아래쪽의 駒峴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한양으로부터 평양을 거쳐 의주로 통하는 大路이다. 이 大路는 明·淸 등과 연결되는 使臣路인데, 이와 같은 중요성을 반영하듯 이 고을에 있었던 驛인 生陽館이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駒峴을 넘으면 황해도인데, 이곳은 평안도의 新舊 監司가 교대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場市도 네 군데나 표시되어 있어 지도 작성자에게 중요하게 인식되던 인문적 정보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지도 오른쪽에는 황해도로 넘어가는 요해처에 설치된 城山鎭이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으로는 고구려의 始祖로 알려진 東明王의 墓가 표시되어 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초기의 문헌부터 지속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러 地誌에 고구려 건국 신화의 무대가 대동강 일대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측면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현재는 대부분 부정되고 있는 내용들이다.(이기봉)

  • 중화성산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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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성산진도 中和城山鎭圖 (81cm×54cm)
    성산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鎭이 설치된 지역의 산줄기 방향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산줄기가 강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새가 하늘에서 바라보는 듯한 鳥瞰法으로 표현되어 있다. 鎭은 평양-중화 또는 강동-상원의 통로를 거쳐 황해도의 황주로 남하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지도에도 도로가 鎭으로부터 세 방향으로만 표시되어 있는데, 남하하는 적이 거쳐갈 수 있는 예상통로를 보여주고 있다. 기타 가운데에 있는 하천은 대동강으로 합류되는 황주강의 상류이며, 군사적 정보 이외의 인문적 정보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증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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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지도 甑山縣地圖 (52cm×81cm)
    증산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과 적송면 일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고을 동쪽의 산지로부터 서쪽 해변가로 산줄기가 뻗어 있으며, 사이사이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지도에는 산이 너무 강조되어 그려져 있어 연녹색의 하천이 상대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인다. 坊面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里가 集村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모든 마을이 산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마을 인근에는 대부분 숲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大東輿地圖≫에 우리 나라의 모든 지역이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된 양식이 이 지도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國靈山으로부터 연결된 衙後山을 배경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다. 客舍인 館宇와 鄕校인 校宮을 비롯하여 관아의 건물·민가·장시·도로·하천 등 인문적인 내용 거의 대부분을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읍치 왼쪽에는 '邑形行舟'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어, 지도 작성자가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려 애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주변의 산도 읍치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의 바다에는 돛을 편 帆船을 그려 넣어 배가 수시로 다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가 하천을 따라 깊숙이 들어온 곳에는 정박하고 있는 배를 그려 넣어 浦口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차령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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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령진지도 車嶺鎭地圖 (53cm×81cm)
    차령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 송면 차령동에 있었다. 鎭은 1734년(영조 10)에 현재의 적유령산맥 위에 있는 車嶺 북쪽에 설치되었고,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었다. 지도는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오는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鎭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산의 대부분이 鎭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鎭은 산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확대·과장된 중심부가 더욱 부각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鎭에는 중요한 관아 건물 대부분을 표시하고 있으며, 내부의 도로까지도 자세하게 그려 넣고 있다. 아울러 군사적 정보를 중요하게 여겨 鎭에서 각종 고개와 중요 마을에 이르는 도로의 표현이 아주 자세하다. 하천도 流路에 대해서는 자세한 편이지만 상류와 하류를 구분하는 등의 세심한 배려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들 하천은 압록강의 지류인 충만강의 상류이며, 지도 위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여 아래쪽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기타 차령에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건물로 상징화되어 표시되어 있으며, 아래쪽의 본부는 초산부를 의미한다.(이기봉)

  • 창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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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지도 昌城地圖 (76cm×127cm)
    창성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전체에 해당되며, 邑治는 府內面(후에 昌城面) 城豊洞에 있었다. 고을은 현재 강남산맥으로 불리는 산줄기를 분계점으로 서북쪽으로는 압록강 유역에, 동남쪽으로는 대령강 상류 유역에 걸쳐 있다. 지도에서는 왼쪽에 압록강과 그 지류가, 오른쪽에 대령강 상류와 그 지류가 그려져 있어 서남-동북 방향이 아래-위를 향하고 있다. 관계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淸나라와의 접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하여 내용적으로 군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압록강변에는 동북쪽으로부터 大吉號里堡·昌洲鎭·於汀灘堡·廟洞堡·雲頭里堡·甲巖堡를 비롯하여 현재의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아울러 압록강 건너의 청나라 땅에도 군사적 침입이 가능한 賊路의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였다. 압록강 유역에서 대령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여러 고개에도 關門인 防墻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지도의 가운데 위쪽에는 緩項嶺에 설치된 恃寨鎭이 보인다. 그리고 성곽이 설치된 邑治나 昌洲鎭, 當峨山城도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과장시켜 그렸다. 성곽의 굴곡, 문루 및 내부의 건물을 자세히 표시하여 유사시 긴요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외에 고개·도로·봉수·창고 및 옛 성터나 古堡의 표시가 자세한 것 역시 군사적 측면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坊面의 표시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는 등 군사적 측면 이외의 인문적 내용은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 다만 場市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그 중요성이 높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외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읍치 위쪽의 石隅部曲과 같은 '○○部曲'의 표현이다. 이 때의 部曲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나, 里 뒤에 붙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마을'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고 추정된다.(이기봉)

  • 창주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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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주진지도 昌洲鎭地圖 (54cm×81cm)
    창주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압록강변에 있었다. 지도에는 산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매우 소략하다. 창주진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 군사기지로서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다. 서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서남-동북을 아래-위로 향하게 그렸다. 지도 아래쪽 압록강 건너에는 大阿坊賊路와 瓦峴洞賊路 두 곳이 표시되어 있는데 반대편 조선 땅에는 이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게 마련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창주진이 설치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呂 岩把守가 설치되어 있다. 창주진에는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도를 통해 뒤쪽으로는 산의 지형을 이용하였고, 앞쪽의 평지방향에는 직선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곽 안의 昌靜館은 客舍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 또는 闕牌가 安置되어 있었으며, 지방관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向闕望拜하는 곳이다.(이기봉)

  • 철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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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지도 鐵山府地圖 (49cm×68cm)
    철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철산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철산면에 있었다. 府는 의주에서 수도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중요한 關防處이다. 지도에도 위쪽에 通灣大路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灣'은 의주를 가리킨다. 한양으로 가는 길은 지도 위쪽의 車輦館을 거쳐 左峴을 넘어간다. 이러한 요해처로서의 성격을 반영하듯 지도에는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가장 자세하다. 西林鎭은 1747년(영조 23)에 설치된 것으로서 둘레 2,485步(약 4,500m)의 대형 石城이 만들어져있었다. 서림진 안에 쓰여 있는 古州는 고려시대까지 邑治가 있었던 곳을 표시한 것이다. 그 오른쪽에는 驛인 車輦館이 다른 지도에 비해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車輦館 지역은 1751년(영조 27)부터 1770년(영조 45)까지 철산부의 邑治로서 잠시 기능하였다. 1770년에 다시 지도 상의 읍치로 옮겨갔지만 車輦館 위에 그려진 鄕校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오른쪽의 左峴에는 關門이 설치되어 요해처로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데, 고개 바로 아래의 선천 땅에는 東林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車輦館 아래쪽으로는 비록 鎭이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유사시를 위해 만들어 놓은 熊骨山城이 要塞의 형태로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직후인 1631년(인조 9)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1684년(숙종 10)에 둘레 2,445步(약 4.4km)의 石城으로 개축되었다. 이외에도 유사시 통신수단이었던 烽燧와 古城도 자세하게 표시해 놓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지도 아래쪽의 宣沙鎭은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이며, 지도에서처럼 戰船과 水軍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울러 監牧官을 겸했는데, 바로 아래쪽의  島에는 244필의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산줄기의 대부분이 읍치를 중심으로 環抱形로 배치된 점, 읍치 뒤쪽으로부터 산줄기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점 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서쪽과 남쪽의 바다 부분은 구별하기 어렵게 그려져 있다. 다만 섬을 표시하여 그곳이 바다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이기봉)

  • 철산서림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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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서림진지도 鐵山西林鎭地圖 (50cm×69cm)
    서림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서림동에 있었다. 鎭은 의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大路 상의 중요한 요해처이며, 1747년(영조 23)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지도에도 이 大路가 굵은 황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良策館·車輦館 등 주변 驛까지의 거리를 병기하고 있다. 鎭에는 둘레 2,485步(약 4,475m)의 대형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도에서는 城郭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산지를 성내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렸다. 성곽 주변에는 하천과 도로, 산의 전반적인 모양이 잘 살아있게 그리는 등 마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성곽 안에는 중요 건물의 이름을 검은 색 사각형 안에 그려 넣었으며, 전투 시 총 지휘소의 역학을 했던 將臺만 특별히 원안에 써넣었다. 아울러 이곳에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백성이 살고 있음을 人家라는 문자로 표현하였으며, 평상시 성곽의 보수와 유지에 도움을 주던 寺刹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 왼쪽에는 砲가 설치된 墩臺가 보이고 있다.(이기봉)

  • 초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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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산부지도 楚山府地圖 (53cm×81cm)
    초산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초산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초산면에 있었다. 이 고을은 조선 중기까지 理山이었다가 1777년(정조 1)에 楚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산부 소속의 鎭堡 지도와 표현 양식이 같아 동일인이 그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는 主山 아래에 입지한 邑治의 坐向을 고려하여 북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다. 고을의 남쪽으로는 현재의 적유령산맥이 지나가며,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른다. 읍치의 정보를 자세히 표현하기 위해 중심부와 주변부의 縮尺을 달리하여 그림으로써 사실의 왜곡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압록강의 경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쪽에서 들어오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울러 읍치 남쪽을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초남강이, 지도에 童巾江으로 표시된 왼쪽의 충만강보다 규모가 훨씬 작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상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게 그려져 있다. 읍치는 북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적에 대한 1차 방어 기지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둘레 3,905尺(약 1,170m)의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도에는 이 石城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각종 관아건물과 민가 및 도로를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가장 중요한 동헌은 주변 담장까지 그려 넣었으며, 獄에는 둥근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校宮은 향교에 대한 별칭이며, 館所는 客舍를 의미한다. 아울러 이곳에 中營이 설치되어 있었음이 지도를 통해 확인된다. 고을의 요충지적 성격을 반영하여 군사시설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압록강변에는 山羊會鎭과 阿耳鎭을 비롯하여 요즘의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남쪽의 적유령산맥 북사면에도 車嶺鎭과 牛峴鎭을 비롯하여 古面古城 등 군사적 시설을 가장 눈에 띄게 표시하였다. 도로와 고개 및 烟臺(烽燧) 등이 자세한 것도 군사적 측면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다. 기타 읍치의 남쪽으로는 주로 面에 설치된 倉庫를 자세히 표시하였으며, 읍치와의 거리를 함께 적어 놓았다.(이기봉)

  • 추구비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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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구비보지도 楸仇非堡地圖 (70cm×50cm)
    추구비보는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벽동군 벽동면 하서동에 있었다. 벽동군 소속의 다른 鎭堡와 표현 양식이 같아 동일인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줄기를 강조하여 그린 점, 堡의 坐向을 고려하여 남쪽을 위로 한 점 등은 벽동군 소속의 다른 지도와 동일하다. 다만 다른 지도에는 표시된 실선의 성곽과 각종 관아 건물이 생략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堡에는 실제로 둘레 400尺(약 120m)의 소형 石築 城郭이 있었다. 기타 압록강변의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다른 정보는 싣지 않고 국경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와 烟臺만을 간단하게 표시하였다.(이기봉)

  • 태천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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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지도 泰川縣地圖 (52cm×80cm)
    태천현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태천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태천면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고을 한 가운데를 거의 북-남으로 관통하는 大寧江을 중심으로 동북쪽을 위로 향하게 그렸다. 지도에는 대령강의 이름이 북쪽으로부터 北江·院灘·串赤江·大定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의 통일적인 관리를 위해 하천명을 정비하기 이전에는 지역마다 하천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지도 왼쪽의 內江과 南江도 현재에는 대령강의 지류인 川坊江으로 불린다. 읍치에는 지방관이 제사를 주관하는 社稷壇· 壇·城隍堂의 3壇과 鄕校인 1묘를 비롯하여 관아 건물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가 安置되어 있는 곳이다. 지방관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向闕望拜의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서 읍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건물 중의 하나이다. 각 面에는 면의 이름과 함께 대원군 집정기에 還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한 社倉도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고을에 하나밖에 없었던 장시인 院市도 지도 가운데 왼쪽에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노란색 선으로 그려져 있어 분명한 구별이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읍치를 중심으로 중요 지점까지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고개 역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기타 향적산에 있는 4개의 암자를 비롯하여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데, 유교 중심의 조선사회에서도 민간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이기봉)

  • 평양부보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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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보산진지도 平壤府堡山鎭地圖 (66cm×110cm)
    보산진은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伊老島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평양부의 관할 아래 있었다. 대부분의 地誌에 평양의 서남쪽 경계선의 대동강 섬 안에 설치되었다고 나오는데, 육지에 있었던 것처럼 그려져 있음이 의아스럽다. 鎭은 이곳을 통해 대동강을 건너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듯이 둘레 470步(약 846m)의 石城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도에는 山이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鎭의 뒷산과 앞쪽의 鎭南山을 비롯하여 양쪽에 산지를 배치한 것을 통해 풍수적 관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기타 지도 이름에는 '堡山鎭'이라고 기록한 반면에 지도에는 '保山鎭'이라고 표시한 차이점도 눈에 띈다.(이기봉)

  • 함종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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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지도 咸從府地圖 (70cm×100cm)
    함종부는 일제시대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신정면·수산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1721년(경종 1)에 경종의 宣懿王后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지도에는 산이 마치 실제의 산을 보는 듯 현실감 있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지도의 가운데 약간 위쪽에 있는 牙山峰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산의 형태가 그 모습이 어금니(牙)와 같다고 기록된 주기의 내용과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의 鷹巖山 역시 주기의 설명처럼 절벽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으며, 그 위에 天皇寺와 白雲寺가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산은 전반적으로 邑治에서 바라보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元脈'이란 용어,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표현된 방식 등을 통해 풍수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도로는 극히 소략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중요한 관아건물과 場市·봉수 등 기본적인 인문정보만 표시되어 있다. 寺刹의 경우는 舊基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는데, 國敎가 儒敎인 상황에서도 佛敎가 민간신앙으로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섬에 있는 '潮退則爲陸', 하천의 하류지점에 보이는 '海川交界'라는 2개의 표현을 통해 기호로 표시할 수 없는 부분은 문장을 넣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 희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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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지도 熙川郡地圖 (84cm×53cm)
    희천군은 일제시대의 평안북도 희천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읍내면(후에 희천면)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지금의 적유령산맥이,남쪽으로는 묘향산맥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지나간다. 동·서·북쪽의 물이 모여 청천강의 상류를 이루며 고을의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도 이와 지형적 특징이 잘 반영되어 그려져 있다. 도로는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 부분에서는 직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을의 북쪽은 압록강의 지류인 독로강 유역에 접해 있으며, 적유령산맥은 압록강을 건너온 적의 2차 저지선 역할을 하였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고개인 狄踰嶺이 지도 오른쪽 위쪽에 보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1623년(인조 1)에 설치된 柔院鎭이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읍치로부터 적유령까지는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여러 개의 撥所가 그려져 있다. 지도 왼쪽의 주기에는 읍치에 土城이, 적유령에 關門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頹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토성과 관문의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고을의 鎭山인 白山이 적유령 밑에 '邑主山'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에는 중요 건물만이 그려져 있다. 기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還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한 社倉이 가장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평안도에서 가장 유명한 산인 妙香山이 지도 아래쪽에 평범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함경도
  • 갑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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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산부지도 甲山府地圖,갑산부는 함경남도 북부 고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로는 삼수, 남으로는 단천?북청, 북으로는 혜산진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산남면, 동인면, 보혜면, 운흥면, 진동면 그리고 풍산군 이인면, 웅이면, 천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양강도 갑산군과 운흥군, 혜산시, 보천군, 삼지연군 등에 속해 있다. 지도는 지지와 결합된 양식을 띠고 있는데, 地誌가 상세하여 지도는 오히려 읍지의 附圖처럼 느껴진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고을 전체를 감싸고 그 내부를 虛川江이 흐르고 있다. 정방형의 읍성 내부에는 각종 관아 건물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당시 국방강화책으로 설치된 新砲廳도 보이고 있다. 여타 군현과는 달리 향교가 읍성 내부에 있는 점이 흥미롭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읍치의 동남쪽에 있는 天鳳山을 鎭山으로 기록했는데 지도에는 읍치 동쪽의 長平山을 읍의 主山으로 표시했다. 이는 鎭山과 主山이 동일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主山은 풍수리지의 용어로 고을의 주인되는 산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 鎭山은 고을을 鎭護해 주는 산으로 본래 풍수지리에서 쓰던 용어는 아니었다. 惠山鎭, 鎭東堡 등의 鎭堡는 직사각형 속에 건물을 그려 나타내었고 봉수는 산 정상에 불꽃 모습을 그려 표현하였다. 읍치의 서쪽에는 銅店도 표시되어 있고 철을 캐던 鐵穴까지 그려져 있다. 지도 주변으로는 건치연혁을 비롯하여 행정, 군사, 재정, 문화 등에 관한 항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 경성경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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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경내전도 鏡城境內全圖,경성부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해안 고을로 남으로는 明川, 북으로는 富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군, 청진시의 일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산지가 포진해 있는 서쪽을 지도의 상단에 잡아 배치하였고 지도의 외곽에는 당초문까지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해안의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으며 그 내부에는 경성부의 관아와 兵營이 그려져 있다. 주변에는 남부 지방의 面에 해당하는 社가 배치되어 있고 특히 倉庫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지도에는 절경들이 잘 표시된 점이 특징적이다. 윤관 장군이 잠시 머물렀다는 해안가의 元帥臺를 비롯하여 북쪽 산지의 仙景臺, 五馬臺, 남쪽의 水中臺, 立石, 臥岩 등의 기암괴석과 더불어 武溪湖, 東蓮塘, 西蓮塘 등의 湖沼도 표시되어 있다. 해안 저지를 따라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홍선으로 그려졌는데 북쪽 龍城社에는 輸站이 표시되어 있고 옆에는 撥所와 館舍도 그려져 있다. 이는 이 고을의 察訪驛인 輸城驛으로 22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해안에는 津, 仇味가 상세하며 鹽盆도 표시되어 눈길을 끈다. 고을내의 봉수는 산봉우리에 붉은 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 경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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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지도 慶源地圖,경원부는 함경도의 북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은 穩城, 동쪽은 慶興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안농면, 동원면, 아산면, 용덕면, 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새별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일부는 은덕군에 편입되어 있다. 지도는 흑색만을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고졸하게 묘사하였다. 甑山을 비롯한 산지의 모습을 강조하였으며 하천은 점선으로 표시하였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사용하여 특별히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대신에 ‘癸坐丁向’이라는 읍치의 坐向을 표시한 점이 특징적이다. 주변 지역에는 이 지역의 행정구역인 社가 표시되어 있고 일부 마을, 창고 등도 기입되어 있다. 두만강에는 하중도인 古珥島가 그려져 있는데 1666년(현종 7)에 물길이 갈라지면서 섬이 되었다고 注記되어 있다. 지금도 이 섬은 두만강에서는 가장 큰 하중도로 남아 있다. 또한 두만강변에는 접경지대가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방어기지인 把守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訓戎鎭, 安原堡 등의 鎭堡도 보이고 있다. 두만강 부근의 龍堂에는 古城이 있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穆祖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의 여백에는 고을의 연혁과 사방 경계의 道里가 수록되어 있다.

  • 경흥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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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흥지도 慶興地圖,경흥부는 두만강 하구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경원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노서면, 상하면, 웅기면, 신안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선봉군을 비롯하여 은덕군과 나진시에 일부 편입되어 있다. 지도는 서남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輿地圖書?에 수록된 지도와 구도와 방위가 유사하다. 고을내의 산지와 더불어 두만강 이북 중국 지역의 산지도 회화식을 가미하여 표현하였다. 경흥의 읍치는 확대하여 그리지 않고 단지 글자로 표시하였는데 옆에 亥坐巳向이라는 坐向을 병기했을 뿐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把守, 鎭堡 등이 배치되어 있고, 두만강 연안에 60여개의 砲幕도 설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고을은 태조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가 살던 곳으로 지도상에도 赤池 부근에 목조와 왕비의 릉인 德陵과 安陵의 옛 터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함흥부로 옮겼던 것이다. 度祖가 검은 용을 쏘았다는 赤池와 翼祖가 여진족의 공격을 피해 들어가 살았다는 赤島는 모두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鹿屯島는 원래 두만강의 三角洲였으나 토사가 쌓이면서 두만강 이북의 하안과 연륙되었는데 지도상에도 연륙된 녹둔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 고원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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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원군지도 高原郡地圖,고원군은 함경도의 남쪽 해변가 고을로 북쪽은 永興, 남쪽은 文川과 접해 있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군내면, 상산면, 산곡면, 수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영흥군의 남서쪽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으로 되어 있다.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하천을 황색으로 채색한 점이 이채롭다. 읍치를 크게 확대하여 관아 건물들을 그려 넣었는데 刑獄의 모습을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읍치에서 물줄기가 빠져 나가는 水口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造山이 그려져 있다. 이는 허점이 있는 땅을 보완해주는 풍수지리의 裨補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함으로써 내부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해준다. 원래의 읍치는 盤龍山 아래에 있었으나 永興과 거리가 가깝고 화재와 전염병 때문에 여러 번 옮겼다. 북쪽의 鳳化山, 熊望山 아래도 과거 읍치였는데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서쪽의 九龍山에는 九龍淵이 그려져 있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남쪽의 龍?洞도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각지의 창고가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馬踰嶺 아래에는 토기를 만들던 土器店도 표시되어 있다. 동쪽 해안가 부근에는 德池場市가 있어서 이 지역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 길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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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주지도 吉州地圖,길주목은 동해안에 연해 있는 고을로 북으로는 明川, 남으로는 端川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길성면, 웅평면, 동해면, 덕사면, 장백면, 영북면, 양사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길주군과 화대군 일부 지역이 과거 길주목 영역이다.함경도의 兵馬防禦使營이 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고을이었다. 산지는 山峰을 연결시켜 산줄기 중심으로 그렸고 하천은 흑선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와 주변 지역을 동일한 축척으로 그렸기 때문에 읍치에는 단지 ‘吉州邑’이라 표기하고 관아 건물은 그려 넣지 않았다. 坊面의 명칭은 표시되지 않았으나 倉庫만은 황색의 원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었다. 해안가에는 城津鎭이 붉은 원으로 강조되었는데 1614년(광해군 6)에 관찰사 崔瓘의 啓請으로 설치된 것이다. 성진진의 바로 앞에 있는 望德은 수려한 경치로 이름났던 곳이다. 또한 서북쪽의 西北鎭은 1673년(현종 14) 관찰사 南九萬의 啓請으로 將軍坡堡, 斜河北堡, 德萬洞堡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관북대로는 홍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곳곳에 撥所가 표시되어 있다. 臨溟川 부근의 臨溟館은 임명역에 있던 館舍이다. 그 옆에는 장시도 개설되어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지도에 수록된 내용으로는 사찰과 봉수 등이 상세하다.

  • 단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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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천지도 端川地圖,단천부는 동해에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吉州, 아래로는 利原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복귀면, 하다면, 신만면, 수하면, 북두일면, 남두일면, 광천면, 이중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함경남도 단천시와 허천군 일부 지역이 과거 단천군 지역이다. 지도는 조감도식으로 고을의 모습을 묘사하였는데 다른 군현의 지도와는 다르게 시점이 통일되어 있다. 특히 읍성으로 둘러진 읍치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내부의 각종 관아 건물이 상세하다. 읍성은 1449년(세종 31)에 축조되었고 이후 1733년(영조 9)에 다시 쌓은 것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북쪽의 道德山으로 읍치와 산줄기가 직접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무엇보다 고개의 표시가 매우 상세한 것이 특징적이다. 주변 지역에 각 社를 배치하였고 倉庫는 원 내부에 표기하였는데 社별로 채색을 다르게 하였다. 군사적 요소로서 봉수의 표시도 자세한데 붉은 색의 작은 원으로 표현하였다. 남쪽의 해안에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목장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목장은 豆彦台場으로서 ?輿地圖書?에 의하면 목장의 둘레가 35里, 당시 키우던 말이 57필, 이를 돌보던 牧子가 59명으로 면적에 비해 사육되던 말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다. 목장의 監牧官은 端川府使가 겸하고 있었다. 목장 옆에 그려진 龍淵은 수려한 경치를 지닌 곳으로 가뭄 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바다에 그려진 卵島는 물새들이 매년 봄에 이 섬에 들어와 알을 낳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덕원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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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부지도 德源府地圖,덕원부는 함경남도의 해안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남으로는 安邊과 북으로는 文川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덕원군 부내면, 북성면, 적전면, 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원산시로 편입되어 있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산지는 다소 거칠게 그려져 있다. 서쪽의 束高山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으로 산 정상부에는 萬景臺가 있다. 그 아래쪽에 萬景菴이 있는데 첩첩산중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하여 당시에는 學僧 몇 명만이 거주했던 암자였다. 그 옆에 위치한 馬息嶺은 《大東輿地圖》에는 馬樹嶺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개 위에는 태조 이성계가 말을 달리던 곳이 있다고 한다. 읍치를 주변지역보다 확대하여 그려 衙舍, 客舍, 倉庫 등의 건물도 그려 넣었다. 읍치 남쪽의 湧珠里에는 碑閣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穆祖가 전주로부터 삼척을 거쳐 정착했던 곳으로 이곳에 살면서 翼祖를 낳았다. 그 후 翼祖는 경흥부에 옮겨 살다가 난리를 피해 赤島에 들어갔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赤田社라 命名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繼室인 神德王后의 부친 慶安伯 康允成의 陵도 그려져 있다. 봉수도 표시되어 있는데 창고나 관아 건물과 똑같이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 명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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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지도 明川地圖,명천부는 함경북도의 해안가 고을로 위로는 鏡城, 아래로는 吉州에 접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상우북면, 상우남면, 아간면, 상가면, 하가면, 상고면, 하고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명천군, 화성군, 화대군 지역이다.본래 吉州의 明原驛인데 1469년(예종 원년) 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길주를 吉城縣으로 낮추고 長德山 북쪽 지역을 따로 떼어서 縣을 만든 것이다. 해안가 고을이지만 고을 전체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서도 산지의 모습이 정교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서쪽의 長白山을 비롯하여 甑峯, 수려한 경치를 지닌 七寶山 등이 바위의 모습까지 특색있게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원 안에 ‘邑’이라 표기하였고 客舍, 鄕校 등도 도형 안에 표시하였다. 주변의 각 社에는 창고의 표시가 상세하고 마을 이름도 일부 보인다. 군사적 요소로서 봉수도 표시되어 있는데 산 정상에 집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읍치 아래쪽에는 明原驛이 보이는데, 이시애의 군대가 패하여 이 역의 북쪽에 왔다가 부하인 李珠에게 사로잡혔던 곳이다. 군사 기지인 진보도 보이는데 松峯 위쪽의 在德堡는 이 시기 폐지되었고 上于社의 斜?洞堡는 남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순조 때에 재덕보가 斜?洞 근처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섬도 몇 개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卵島는 장끼가 많이 서식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 무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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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지도 茂山地圖,무산부는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위로는 회령, 아래로는 갑산과 접해 있다. 세종 때 이곳에 살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鎭을 설치했다. 1674년(현종 15)에 僉使鎭을 三峰坪으로 옮기고, 이후 1684년(숙종 10)에는 監司 李世華의 계청에 의해 都護府를 설치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 영북면, 풍계면, 동면, 계하면, 연상면, 연사면, 삼사면, 삼장면, 서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함경북도 무산군을 비롯하여 연사군, 양강도 대홍단군, 백암군, 그리고 삼지연군 일부 지역이 과거 무산부의 영역이다. 백두산의 모습이 강조되어 표현되었고 1712년에 세워진 정계비도 그려져 있다. ?脂峯은 지명에서처럼 분홍색으로, 長白山, 小白山의 모습은 흰색으로 채색한 것이 이채롭다. 읍치는 주변 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사용하여 특별히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각지의 창고는 노란색 원내에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두만강변의 봉수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무산은 내륙에 위치한 고을인데 동쪽에 바다가 그려져 있다. 이는 동쪽 해안의 海倉이 무산의 월경지이기 때문이다. 해산물을 공급받기 위해 이곳에 월경지를 존속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도상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이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그려졌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가 있다. 동북쪽의 豊山鎭은 본래 會寧府의 豊山堡로 1674년(현종 15)에 이속으로 옮기고 1684년(숙종 10) 무산부에 소속시켰다.

  • 문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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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군지도 文川郡地圖,문천군은 함경남도 해안가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은 德源, 북쪽은 高原, 서쪽은 평안도 陽德縣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도초면, 명효면, 구산면, 운림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천시와 천내군로 나뉘어져 있고 남쪽의 일부 지역은 원산시에 편입되었다. 높은 산지가 있는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바다를 지도의 하단으로 배치하였다. 담채와 황색을 사용하여 산지를 힘있게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 가운데 전패를 봉안했던 객사를 크게 부각시켜 그렸다. 주변 지역에는 황색 원 안에 社名을 표기하였다. 무엇보다 이 지도에서는 翼祖와 貞淑王后의 陵인 淑陵을 부각시킨 점이 특징적이다. 丁字閣, 碑閣, 齋室 등도 그려 넣었고 그 앞쪽에는 숙릉의 案山에 해당하는 蓮臺峯에 ‘淑陵內案’이라고 표기하였다. 동쪽 바다의 四訥島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함흥 감목관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石城이 축조되어 있고 관리하던 牧子가 220명이나 되는 꽤 규모가 큰 목장이었다. 동남쪽에는 驛站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良驥驛에 해당한다. 원래 高宗驛이었는데 세조 초기에 德寧驛을 이곳으로 합쳐 德宗驛이라 부르다가 성종 때 성종의 아버지 德宗의 廟號를 피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 부령읍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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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령읍지도형 富寧邑誌圖形,부령부는 함경북도의 해안 고을로 남쪽은 鏡城, 북쪽은 會寧과 접해 있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거면, 삼해면, 연천면, 석막면, 서상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부령군과 청진시 청암구역으로 되어 있다. 산지를 청색으로 채색하였는데 맥세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읍성이 축조된 읍치에는 각종 관아 건물을 표시하였는데 건물 모습은 그리지 않고 단지 글자로만 표시하였다. 衙舍와 客舍는 대표적인 관청 건물이기 때문에 사각형으로 표시했다. 북문 부근에는 얼음을 저장하던 氷庫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주변의 坊面에는 창고의 표시가 가장 상세하다. 도로는 흑색 점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撥所도 표시되어 있다. 남쪽 鏡城과의 경계 지역에는 資莊潭이 그려져 있는데 이 못은 물빛이 맑고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한 때 용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함경도에서는 드물게 서원도 있었는데 崇烈書院, 忠賢書院이 동남쪽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훼철되어 이 당시에는 터만 남아 있었다.

  • 북청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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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부지도 北靑府地圖,북청부는 동해안의 관북대로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여 위로는 利原, 아래로는 洪原으로 연결된다. 해방 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북청군 노덕면, 양가면, 양천면, 거산면, 신창면, 청해면, 평산면, 속후면, 양화면, 신포면, 후창면, 가회면, 하차서면, 상차서면, 이곡면, 성대면, 덕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신포시, 덕성군, 북성군 일원이다. 함경남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지도의 중심에는 정방형으로 축조된 읍성이 그려져 있고, 그 내부에는 객사, 아사를 비롯하여 병영(兵營), 중군(中軍)이 머물던 중영(中營) 등의 관청 건물과 더불어 창고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읍성은 1517년(중종 12)에 축성되었고 그 후 修築되기도 했다. 읍치 서쪽의 靈德山이 고을의 진산인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連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을의 주변부에는 행정구역상 面에 해당하는 社의 명칭이 읍치에서의 거리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봉수의 표시도 상세한데 봉수대를 여타의 지도와 달리 5개로 그려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위급 상황의 정도를 5단계로 나누어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에 火臺가 5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읍치 동쪽의 良家社에는 老德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1627년(인조 6)에 건립되어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다. 李恒福, 金德?, 鄭弘翼, 閔鼎重, 吳斗寅, 李尙眞, 吳道一 등을 배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던 함경도의 유일한 서원이다. 동쪽 해안가에는 侍中臺도 보이는데 고려 예종 시 侍中 尹瓘이 말갈족을 정벌할 때 이곳에 오른 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삼수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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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수부지도 三水府地圖,삼수부는 함경도 내륙의 고을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쪽으로는 甲山, 남쪽으로는 咸興,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古茂昌에 이른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읍관면, 별동면, 군인면, 강진면, 자서면, 삼서면, 관흥면 그리고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 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양강도 삼수군, 김정숙군이 과거 삼수부 지역이다. 三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물줄기 세갈래가 압록강에 합쳐지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1693년(숙종 19)에 右營將을 두고 府使가 겸임하였다. 지도에는 상세한 地誌를 같이 수록하고 있는데 甲山府와 유사한 양식으로 되어 있다. 지도는 내용이 소략하여 邑誌에서 볼 수 있는 附圖처럼 느껴진다. 읍성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크게 그렸다. 읍성은 1656년(효종 7)에 축조된, 砲樓까지 갖춰진 방어용 성곽이었다. 압록강 연안에는 봉수, 진보 등의 군사 시설이 다수 들어서 있다. 1511년(중종 6)에 설치된 乫波知鎭, 1489년(성종 20)에 설치된 仁遮外堡,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羅暖堡, 小農堡, 舊乫波知堡 등이 포진해 있다. 地誌의 軍摠 항목에는 砲軍이 別砲衛 40명, 新設砲衛 50명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군비 확충의 일환으로 포군의 증설되는 시대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안변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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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변부지도 安邊府地圖,안변부는 철령을 넘어 나타나는 함경도의 첫째 고을로 상당히 넓은 면적에 걸쳐 있었다. 아래로는 강원도 ?谷, 위로는 德源과 맞닿아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안변군 학성면, 안도면, 배화면, 서곡면, 문산면, 위익면, 신모면과 덕원군 풍상면, 풍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강원도 안변군과 고산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는 ?輿地圖書?에 실려 있는 附圖와 구도가 유사하다. 南大川을 비롯한 하천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산지는 고을 전역에 다소 거칠게 표현되어 있다. 읍치와 주변지역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졌으며 坊面과 驛院, 倉庫 등의 지명은 직사각형, 원 등의 기호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坊面인 社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옆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써 넣어 거리관계를 쉽게 파악하도록 배려하였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하였는데 강원도 흡곡에서 올라오는 대로와 철령을 넘어오는 대로가 이 지역의 간선로이다. 철령을 넘어서 高山驛과 南山驛이 들어서 있으며 역 근처에는 장시도 보이는데, 이 고을에서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읍치에 장시가 두 군데 개설되어 있고 남동쪽으로 縣坪場도 표시되어 있다. 그 옆 해안가에는 兵馬使가 잠깐 여기서 휴식하며 머물렀다 해서 이름 붙여진 元帥臺도 보인다. 해안에는 國島와 女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국도는 절벽이 鐵網과 같다고 해서 鐵網石이라 부르기도 했다.

  • 영흥부십삼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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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흥부십삼사지도 永興府十三社之圖,永興府는 함경남도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定平, 아래로는 高原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영흥군 홍인면, 복흥면, 순녕면, 억기면, 진평면, 고녕면, 호도면, 인흥면, 덕흥면, 장흥면, 횡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금야군과 요덕군으로 나뉘어졌고, 남서쪽 일부 지역은 고원군에 속해 있다. 함흥과 더불어 조선의 발상지로 국가적으로 중시되었던 지역이고 또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읍치를 큰 원속에 표기했을 뿐 특별히 부각시켜 그리지는 않았다. 단지 옆에 ‘七半’이라는 서울로부터의 일정과 ‘五部’라는 읍치의 행정구역을 표기했다. 읍치 서쪽에 고을의 진산인 聖歷山이 그려져 있다. 주변지역에는 13개의 社가 붉은 글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옆에는 각 社의 범위도 수록하였다. 이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산의 표현법이다. 조선 후기 지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산의 모습을 회화식으로 입체감있게 표현하거나 단순하게 기호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에서는 흡사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과 같이 그려 풍수의 山圖처럼 보이기도 하며, 산맥의 동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냈다. 산?고개?포구 등도 표시되어 있으나 교통로는 그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 창고의 표시가 가장 상세하여 지도제작의 목적이 지방 재정의 파악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엿보게 한다. 태조의 유적지를 비롯하여 묘지, 사찰 등도 상세하게 실려 있다. 順寧社에는 태조 이성계의 부친 桓祖의 舊邸인 本宮, 태조의 탄생지인 濬源殿 등을 볼 수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導尊墓는 태조의 외조인 崔閑奇의 묘인데 導尊峙에 있어서 導尊墓로 불리었다. 북쪽에 있는 直洞墓는 태조의 외증조인 崔終泰, 德化墓는 태조의 외고조인 崔之美의 부인 張氏墓이다. 동쪽 해안 內海라고 표기된 곳은 지금의 송전만에 해당하는데 柳島에는 소금을 생산하던 鹽板도 표시되어 있다.

  • 온성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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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성부지도 穩城府地圖,함경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고을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유포면, 영와면, 영충면, 미포면, 훈융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동쪽의 일부 지역을 새별군에 넘겨주고 남쪽 종성군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되었다. 지도는 담채를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고졸하게 표현하였다. 방어용으로 축조된 읍성은 당시에도 견고하게 남아 있었는데 甕城과 砲樓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읍성의 내부에는 衙舍와 鄕校를 비롯하여 肅敬堂, 纛堂 등의 건물도 보인다. 주변 지역에는 坊面에 해당하는 각 社가 표시되어 있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읍치를 축소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僉使鎭인 柔遠鎭을 비롯하여 1484년(성종 15)에 설치된 美錢鎭, 1442년(세종 24)에 설치된 永遠鎭, 1523년(중종 18)년에 설치된 黃拓坡堡 등이 국경수비의 전진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두만강변에 설치된 烽燧와 그 아래쪽에 설치된 烟臺도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하천을 청색으로 표현하였는데 대하천의 지류는 점선을 사용하여 그린 점이 이채롭다. 동쪽 해안에는 大草島, 小島 등의 섬도 그려져 있는데 이 고을의 월경지임을 알 수 있다. 대초도에는 목장도 표시되어 있는데 1511년(중종 6)에 端川으로 옮겼다가 1665년(현종 6)에 다시 설치된 것이다.

  • 이원현읍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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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현읍지도 利原縣邑地圖,利原縣은 함경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端川, 남으로는 北靑과 접하고 있다. 원래는 利城이었으나 정조 때에 利原으로 개명되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서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단천군의 서부 지역을 일부 병합하여 이원군으로 되어 있다. 고을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읍치를 주변 지역보다 크게 그려 강조하였고 내부의 각종 건물을 상세하게 그렸다. 원래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많이 훼손되어 문루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관아 건물 가운데 ?壇 아래쪽에는 新設砲衙廳이 그려져 있는데 이 무렵 국방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다. 주변 지역에 설치된 창고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도 산 정상부에 집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송림이 잘 가꾸어져 있다. 해안에는 學士臺, 雙石臺 등의 절경도 그려져 있다. 남쪽의 川椒島는 川椒가 이 섬에서 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기도 하다. 觀德亭, 浩浩亭 등의 정자도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는데 호호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터만 남아 지도에도 정자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의 여백에는 사방 경계지점에 위치한 고개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여 고을의 원근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장진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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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부지도 長津府地圖,장진부는 함경도의 내륙 산지에 위치한 고을로 원래는 咸興府의 漢厚仇非社였다. 1667년(현종 8) 別將을 두었다가 1785년(정조 9)에 僉使鎭으로 승격하였고 1787년(정조 11)에 최초로 府를 두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장진군 군내면, 상남면, 중남면, 구읍면, 신남면, 북면, 동하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 북쪽 지역은 평안북도 낭림군에, 남쪽 지역은 함경남도 장진군에 속해 있다. 지도는 산지와 하천을 청색으로 그렸는데 산지가 많은 지역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 山川, 道里, 撥站 등의 항목을 수록하여 지도와 地誌가 결합된 양식을 띠고 있다. 永德山 서쪽으로 포진한 읍치에는 각종 관아 시설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別砲軍이 番上하던 別砲廳도 보이고 있다. 주변의 각 社에는 무엇보다 창고의 표시가 상세하다. 도로를 홍색의 점선으로 그렸는데, 인접 고을로 향하는 주요 고개에는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같이 수록하였다. 이곳에는 江口堡, 神方堡 등의 鎭堡도 있었는데 이 시기 혁파되어 터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북쪽의 射仰峯 아래에는 납을 채굴하던 鉛店도 표시되어 있다.

  • 정평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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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부지도 定平府地圖,정평부는 함경남도의 해안 고을로 북으로는 咸興, 남으로는 永興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 주이면, 광덕면, 고산면, 장원면, 문산면, 귀림면, 춘유면, 선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남도 정평군과 일부는 함주군에 속해 있다. 지도는 서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는데 산지는 풍수의 山圖처럼 맥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국토의 北嶽이면서 고을의 鎭山이 되는 鼻白山이 읍치를 감싸고 있다. 비백산은 祀典에 中祀로 기재되어 봄, 가을에 제사지냈던 곳인데 지도에도 祭堂이 표시되어 있다. 衙舍에는 ‘艮坐’라는 坐向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서남향을 말한다. 읍치에는 원래 둘레 5,928척의 읍성이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훼손되어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주변의 각 社에는 창고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읍치로부터의 거리도 옆에 기재되어 있다. 도로는 홍선으로 그렸는데 다리의 표시가 상세하다. 서남쪽의 草原驛에는 草原館이 표시되어 있는데 高山道 察訪이 거주하던 곳이다. 함흥과의 경계 지역에는 地境場市, 播春社에는 播春場市가 각각 개설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동남쪽 宣德山이 있는 지역은 해안으로 길게 뻗은 串과 같은 곳으로 바다 건너 함흥에 속해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길게 해수가 그려져 있고 ‘廣浦’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廣湖에 해당한다. 또한 서쪽과 북쪽에는 함경도의 다른 고을과는 다르게 관개하던 堤堰도 표시되어 있다.

  • 종성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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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부지도 鍾城府地圖,종성부는 함경북도 북쪽 두만강과 연해 있는 고을로 남북으로 길게 동해안까지 뻗어 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종성군 오촌면, 주을온면, 주북면, 주남면, 어랑면, 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에 나누어져 병합되었다. 鍾城이라는 명칭은 북쪽의 童巾山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를 수묵 담채로 고졸하게 표현하였으며 두만강을 비롯한 하계망을 상세하게 그렸다. 무엇보다 산의 표현이 매우 흥미로운데 甑山, 矢巖, 配天峯, 童巾山 등이 이름에 걸맞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남쪽에 위치한 小白山으로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읍치는 주변 지역과 비슷한 축척으로 그려져 있는데 세종 때 쌓은 읍성이 있었다. 읍치의 동쪽으로는 咸鏡北道兵馬節度使의 行營이 보이는데 세조 때 설치된 것이다. 평시에는 鏡城에 있는 本營에 머무르다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이곳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위치상으로도 會寧, 鍾城, 慶源, 穩城 네 고을의 중앙에 해당하여 북방 수비에 좋은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두만강 변에는 국경 방어를 위한 파수가 표시되어 있고 防垣堡와 潼關鎭 등의 진보도 이곳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나타나 있다. 또한 봉수도 독특한 모습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접경 지역이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이 잘 부각되어 있다. 그 밖에 주변 지역에 설치된 창고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홍선의 도로변에는 驛站과 撥所도 기재되어 있다. 행영 서북쪽에는 鄭汝昌, 金尙憲 등을 배향했던 種山書院이 있었는데 이 시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 함흥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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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부지도 咸興府地圖,함흥부는 북쪽으로는 六鎭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바닷가 고을인 정평?영흥?문천 등을 거쳐 철령으로 통하는 요충에 위치하여, 행정?군사의 중심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문화적으로도 중시되던 곳이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주북면, 기곡면, 상기천면, 하기천면, 하조양면, 상조양면, 천원면, 천서면, 주서면, 주지면, 연포면, 삼평면, 운전면, 서호면, 동주동면, 북주동면, 덕천면, 덕산면과 신흥군 동고천면, 원평면, 가평면, 서고천면, 영고면, 하원천면, 상원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함흥시, 신흥군, 영광군, 함주군 지역이다. 고을의 특성이 지도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는데 읍성으로 둘러싸인 읍치를 주변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확대하여 표현하였다. 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에 축성된 것인데 이후에 개축을 계속하여 이 시기에도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읍성 내부의 관청 건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관찰사가 집무하던 宣化堂, 判官이 집무하던 貳衙인 本府, 客舍인 咸山館, 中軍의 머물던 中營 등의 주요 건물이 부각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발상지답게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표시되어 있다. 남문 밖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인 本宮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고 동편에는 그 조상의 陵寢도 산줄기를 따라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定和陵은 桓祖와 그의 비인 懿惠王后의 능이고, 義陵은 度祖, 純陵은 度祖의 비 敬順王后의 능이다. 정화릉 부근의 慶興殿은 태조의 옛 저택이며 定宗과 太宗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西雲田社에는 태조가 어릴 때 격구를 했던 擊毬亭도 그려져 있다. 또한 함흥에는 함경도의 중심지에 걸맞게 많은 장시가 개설되어 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읍성의 남문과 서문 앞, 上州西社, 上宣德社, 退湖社, 德山社, 東元平社, 上岐川社 등지에 장시가 표시되어 있다. 산지와 읍치의 언덕에 그려진 수목, 하천, 그리고 萬歲橋와 같은 다리의 모습은 회화적 묘미를 느끼게 한다.

  • 홍원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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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현지도 洪原縣地圖,홍원현은 북쪽으로는 北靑, 남쪽으로는 함흥과 접하고 있는 해안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경포면, 운포면, 용원면, 용천면, 호현면, 희현면, 학천면, 용운면, 보청면, 동퇴조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도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하며 남쪽의 일부는 낙원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지도는 회화식을 가미하여 고을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방위는 전통적인 간지를 사용하여 ‘子午卯酉’로 표기하였고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성에 둘러싸인 읍치를 상대적으로 부각시켰으나 내부에는 衙舍와 邑倉을 제외하면 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 지역에는 社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으며 창고도 붉은 고리모양으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서쪽의 咸關嶺에는 太祖大王勝戰碑閣이 보이는데, 일찍이 이성계가 원나라의 丞相 納哈出의 군사를 무찌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함경도의 대표적인 關防이기도 한데 수목을 장양하여 유사시 군사를 숨길 수 있도록 했다. 그 옆의 車踰嶺은 함관령보다 낮아서 본래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으나, 조정에서 방어의 목적으로 이곳을 통제하여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지도에도 舊路로 표시되어 있다. 해안의 穿島에는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서 이름지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이 일대 최고로 칭해졌다. 또한 馬養島에는 이름에 걸맞게 목장이 있었는데 咸興監牧에 속해 있었다.

  • 회령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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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령부지도 會寧府地圖,회령부는 두만강 밑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늘어져 동해안까지 이르는 고을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전의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벽성면, 운두면, 봉의면, 용흥면, 화풍면, 팔을면 일대에 해당한다. 현재는 함경북도 회령시로 되어 있다. 지도는 동남쪽의 해안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회화식을 가미하여 그렸는데 산지의 수목과 바다의 파도무늬가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두만강변의 鰲山인데, 읍치 남쪽 산지에서 뻗어 내린 지맥을 아래쪽으로 길게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 읍치에는 세종 때 축성된 읍성이 그려져 있고 내부에는 胡館도 보인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이 고을에 開市가 열리면서 중국 상인들이 자던 곳이다. 읍치 서쪽으로는 1509년(중종 4)에 처음 설치된 甫乙下鎭이 포진해 있는데 五國山城이 그려져 있다. 이 성은 雲頭城이라고도 하는데 金의 五國城으로 오인되었던 곳이다. 읍치의 동쪽으로도 세종 때 설치된 高嶺鎭이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皇帝塚과 侍臣塚도 그려져 있는데, 이는 청나라 穆克登이 조선과의 국경을 정할 때 이 무덤에서 ‘宋皇之墓’라는 글자가 출토되어 이후 皇帝塚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읍치의 남동쪽으로는 古豊山鎭도 보이고 있다. 두만강변에는 파수처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봉수 또한 잘 나타나 있다. 해안가에는 潟湖인 眞珠池도 그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진주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황해도
  • 강령현등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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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등산진지도 康翎縣登山鎭地圖,康翎縣의 巡威島에 설치되었던 登山鎭을 그린 지도로 지역의 모습이 회화식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등산진은 원래 고을의 동남쪽 45里경에 있었으나 1705년(肅宗乙酉年)에 첨사진으로 승격시켜 순위도로 옮겼고, 1822년(純祖壬午年)에는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獨鎭을 설치했다. 등산곶 쪽에는 과거의 진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상단은 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배치하였다. 전통시대의 지도들은 대부분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는 현대지도보다 방위의 융통성이 더 있었다. 지도의 왼편에는 鎭의 사회경제, 군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수록되어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양식을 띠고 있다. 지도에는 등산진 소속의 촌락 여섯 곳이 지붕 모양의 가옥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위진도에 있는 두 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마을은 육지에 있다. 鎭에는 각종 관청 건물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와 망을 보던 瞭望處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의 군사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서쪽의 麒麟島와 동쪽의 延坪島는 牧馬場이 있었던 곳이다.

  • 강령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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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령현지도 康翎縣地圖,강령현은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甕津, 아래로는 海州로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용연면?봉구면?흥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일찍이 1428년(세종 10년)에 永康과 白翎을 합하여 康翎縣으로 삼았다. 지도상에도 읍치 동쪽에 과거 永康과 白翎의 治所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모습을 공중에서 사선으로 내다보는 시점을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산지는 高低나 險夷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그렸다. 지도의 하단에는 사회, 경제, 군사와 관련된 내용을 수록하여 地圖를 보완해주고 있다. 읍치에는 東軒?客舍를 비롯한 각종의 관아 건물을 상세히 그려 넣었고 길을 따라 잘 가꾸어진 邑藪의 모습도 보인다. 특히 조선말기 향교에서 유생들을 모아 교육시켰던 장소인 養士齋와 민간에서 고용한 말을 관리하는 관청인 雇馬廳도 그려져 있다. 김정호의 ?大東地志?에는 5,725尺의 읍성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시기에 많이 훼손되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쪽과 서쪽의 섬들도 자세히 그렸는데 인근 海州나 瓮津에 속해 있기도 하다. 육로는 홍선, 해로는 청선으로 그렸는데, 해주 감영으로 이어지는 길은 大路라 표기되어 있고, 읍치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로 이르는 길목과 남쪽 삼거리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을의 동남쪽에는 牧場舊墟가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 목장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폐지하고 기르던 말들은 인근 연평도 목장과 기린도 목장으로 보내졌다.

  • 곡산부문성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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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부문성진지도 谷山府文城鎭地圖,文城鎭은 谷山府의 劍巖嶺 아래에 설치된 진으로 최초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축성하여 관문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서도 이곳이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중종 때에는 萬戶를 두었다가 1683년(숙종9)에는 僉使로 승격시켰다. 문성진은 황해도의 방어 기지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위로는 평안도 陽德에 이어진다. 지도에는 문성진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쪽으로 관문이 세워진 劍巖嶺이 그려져 있고 수목이 우거진 산지가 그려져 있다. 서북쪽에는 高天德이라 표기된 봉우리가 그려져 있는데 ?德?은 북부지방에서 언덕을 의미하는 방언이다. 진에는 客舍와 衙舍 건물이 그려져 있고, 그 전면에는 장시가 형성되어 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 시기 궁벽한 곳에 위치한 군사 기지에서도 상업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 곡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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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산부지도 谷山府地圖,곡산은 황해도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강원도 伊川, 북으로는 평안도 陽德, 동북쪽으로는 함경도의 安邊과 접하고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곡산군 곡산면?도화면?서촌면?운중면?동촌면?청계면?화촌면?멱미면?봉명면?상도면?하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세림리와 사현리 및 도전리 일부를 제외한 곡산군 전지역, 신평군 전지역, 연산군 대군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본래 고구려 十谷城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神德王后 康氏의 고향이어서 谷山으로 개명하고 府로 승격하였다. 대동강의 지류인 能成江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면서 평양까지 이어진다. 지도에는 상단과 하단에 建置沿革, 고을의 규모, 사방경계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충해주고 있다. 통상 회화식으로 그려진 군현지도에서는 읍치가 과장되어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사용하여 그렸다. 주변지역에는 각 坊과 그에 속한 里名을 서로 다른 색채를 사용하여 기입하였다. 산지는 峰巒을 이어 그리는 전통적인 연맥식으로 표현하였는데, 크게 부각되는 산은 청색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산맥과 하천의 표현 방식은 1871년에 작성된 규장각 소장의 ?海西邑誌?(奎12171)에 수록된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무엇보다 환곡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된 사창이 상세하게 표시되었으며 文城鎭 근처와 읍치의 서쪽에는 장시도 개설되어 있다. 지도의 북쪽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고적인 馳馬基와 馳馬道 碑閣이 그려져 있어서 지도의 문화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다.

  • 금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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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군지도 金川郡地圖,금천군은 개성에서 황주에 이르는 海西 直路에 위치한 고을로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면?고동면?산외면?서북면?우봉면?웅덕면?구이면?좌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강북리?강남리?양합리?용성리를 제외한 금천군 전체, 봉천군 신명리?황룡리?도산리?백석리?연홍리?능촌리, 평산군 예성리와 기탄리, 토산군 서쪽 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금천군은 군명이 자주 바뀌고, 읍치의 이동도 많았던 고을이다. 원래 牛峰縣이었는데 1651년(효종 2)에 江陰縣을 병합하여 金川郡으로 승격시키고 읍치는 吾早川의 남쪽에 두었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읍치를 猪灘의 남쪽으로 옮겼다가 1753년(영조 29)에 읍내의 水土가 나쁘다 하여 다시 오조천의 남쪽으로 옮겼다. 후에 다시 저탄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도 과거의 牛峰과 江陰의 치소가 각각 옥녀봉 북쪽과 助浦 근처에 있고, 제석산 아래 금천의 舊基와 영조 때 읍치였던 春鳴山 아래의 破邑基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상단에 道里, 坊里, 山川 등과 같은 地誌 항목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산지가 회화식으로 강하게 부각되어 있으며 예성강의 상류인 助浦江을 비롯한 하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읍치는 붉은 색 원으로 강조되어 있으며 객사?아사?사직?여단?향교 등의 주요 건물만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이 표시되어 있으나 소속 里名은 수록되지 않았다. 도로는 붉은 색의 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당시 개성에서 황주로 이어지는 해서직로는 동남쪽의 靑石鎭에서 올라와 읍치에서 平山으로 이어지는 대로이다. 특히 지도에서는 시장의 발달이 현저함을 볼 수 있는데 읍내장을 비롯하여 餠廛站 근처, 山外面?助浦?好賢面 위쪽 등에 개설되어 있다. 또한 당시 세워진 社倉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江陰舊基의 助浦에는 江倉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유명한 助浦倉(혹은 助邑浦倉)이다. 조포창은 황주, 서흥, 평산, 봉산, 곡산, 수안, 안악, 재령, 신계, 토산, 우봉, 강음 12읍의 전세를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漕運하였던 중요한 漕倉이었다. 그러나 1713년(숙종 39)에 혁파된 후로는 단지 금천의 세곡만 조운하였다. 助浦江의 위쪽에는 이괄의 난 때 이곳에서 戰亡한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 1694년 세워진 (愍)忠祠가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1871년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문화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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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지도 文化縣地圖,문화현은 황해도 서쪽 구월산 아래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문무면?용진면?산천면?궁흥면?문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삼천군 중?북부, 안악군 서부, 신천군 건산리?용산리?화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황해남도 신천군  건지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금의 삼천군 고현리에 있었으나 ?疫이 자주 돌자 1520년(중종 15)에 乾支山 남쪽으로 옮겼다. 고을의 鎭山은 건지산으로 지도에서도 읍치의 뒤편에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산천의 배치는 ?여지도서?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고, 1871년 작성된 ?海西邑誌?(규장각 소장)의 지도와는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이들 지도가 지도제작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상단에는 주요 지역의 道里와 建置沿革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 산지의 모습은 회화적인 특성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따라 동서남북에 위치한 산봉우리의 방향이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변동 시점을 사용하는 전통시대의 지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한 관청 건물과 사직, 향교, 성황당 등의 壇廟도 표시되어 있으나 ?壇은 다른 고을과 달리 읍치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지역에는 각 坊이 표시되어 있고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된 사창도 草屋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三聖祠는 桓因?桓雄?檀君에게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민간에서는 단군이 구월산에 도읍했다고 전하는데 이 곳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사당을 지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북쪽의 月精寺와 妙覺寺에는 잘 가꾸어진 잣나무 숲(柏子田)이 보인다. 그 옆에는 柳墓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문화유씨의 선조묘로 추정된다. 도로변에 있는 蠱巖場市, 宗達溫井場市와 같은 장시를 통해 상업적인 측면도 엿볼 수 있다.

  • 배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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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천군지도 白川郡地圖,경기도와 인접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예성강에 연해 있고 남쪽에는 바다와 접해 있다. 고려시대에는 경기도 소속이었다.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연백군 동부지역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역구도?추정리?수원리를 제외한 배천군 전지역에 해당한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위치한 雉岳山으로 최고봉은 望德峰이다. 산지를 호방하게 그렸고 하천과 바다는 청색으로 표현하였는데 동쪽에 있는 예성강의 폭을 그리지 않아 남쪽의 바다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읍치는 황색의 원으로 강조하였을 뿐이고 관청 건물들은 그려넣지 않았다. 남쪽의 교동과 강화는 축소하여 작게 그려 상대적인 위치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붉은 색 사각형에 坊面을 표기하였고 창고가 위치한 마을 이름도 기재하였다.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상세히 그려졌는데 대로와 소로를 굵기로서 구분하였다. 특히 하천을 통과하는 다리의 이름이 자세히 표기되어 있다. 남쪽의 兎山 아래에는 고려 重興殿의 터가 계단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의종 때 劉元度의 건의에 따라 이곳에 별궁을 지었는데, 풍수적으로 중흥할 땅이라는 해석에 따른 것이어서 중흥전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術家들의 반대로 궁실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 金谷坊에는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해주?연안?풍천?신천?장연?문화?강령?옹진?송화?장련?은률과 배천의 전세를 거두어 서울로 운반했던 곳인다. 그러나 이 당시는 배천의 전세만 거두어 조운하였다. 이 아래에는 고려시대 국제 무역항으로 명성이 높았던 碧瀾津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근처 潮水의 흐름이 빨라 대포구로는 성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예성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많은 포구가 발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택리지?에서는 이러한 자연 조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운의 잇점을 이용하여 무역에 종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雉岳 아래에는 고구려 때 쌓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山城이 그려져 있고, 서원도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李珥, 成渾 등을 배향한 文會書院으로 대원군 집정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 봉산군산산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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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산산진지도 鳳山郡蒜山鎭地圖,산산진은 개성에서 평산?서흥?봉산을 거쳐 황주에 이르는 海州 直路邊에 위치한 군사기지로서 1678년(숙종 4)에 설치되었다. 1682년에는 黑橋鎭을 棘城에 옮겨 합치고 僉使兼別中營將으로 승격시켰다가 후에 中營將은 폐지하였다. 원래 고려시대 때 棘城鎭이 있었던 곳인데, 극성이라는 이름은 正方山의 봉우리에서부터 朴排浦까지 防守軍을 두어 평지에 가시나무를 심었던 데서 유래한다. 고려 때 거란족과 홍건족이 모두 이곳을 통해 들어왔으나 우리의 군사가 전후에서 격퇴시켰다. 지도에는 토성으로 둘러진 산산진의 모습이 소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奇峯山을 북쪽 중앙에 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진의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조선후기 황해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길은 여섯이 있었는데 洞仙嶺을 통과하는 길이 직로가 되고, 지도에 보이는 산산진을 통과하는 길은 제일 서쪽에 위치해 있다. 도로변에는 閭里場垈가 표시되어 있는데 빽빽이 들어선 가옥을 통해 상업의 중심지임을 엿볼 수 있다. 奇峯山 동편에는 해서 직로의 관문에 있는 舍人館이 그려져 있다. 鎭 내의 관아 건물은 鎭衙, 館, 訓練 정도로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하단에는 대동강으로 합류되는 지금의 재령강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산산진의 연혁을 간략하게 기재하였는데, 과거 거란?홍건적 수만이 이곳에서 죽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자 문종이 글월을 짓고 중신을 보내어 제사지낸 후 ?壇을 세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 봉산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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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군지도 鳳山郡地圖,봉산은 개성에서 황주로 연결되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군사적 요충 지역이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선면?산수면?구연면?토성면?덕재면?쌍산면?기천면?초와면?서종면?사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동부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 재령군 삼강군 서부 일부지역, 구연리와 옥현리를 제외한 은파군 전지역, 린산군 석교리와 석연리 지역을 포함하는 범위이다. 읍치는 현재 봉산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남쪽의 ??城 근처에 있었는데 1523년(중종 18) 전염병이 많이 돌자 백운산 밑으로 옮겼다. 지도는 회화적 성격이 강한데 특히 산지나 건물의 표현에서 잘 드러나 있다. 건물 근처의 수목은 채색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그려진 점이 두드러진다. 서쪽에서 위쪽으로 흘러가는 月唐江(지금의 재령강)은 흡사 바다처럼 표현되어 있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답게 북으로는 해서 직로가 통과하는 舍人?이 우뚝 서 있고, 서쪽으로는 棘城과 蒜山鎭, 정방산성이 포진해 있다. 남쪽의 ??城은 762년 신라 경덕왕 때 쌓은 성으로 당시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수령이 근무하던 衙舍 옆에는 待鳳軒이 있는데,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을이 옮겨왔을 때 세워진 건물로 郡名이 鳳山이라서 대봉헌이라 하였다고 한다. 휴류성 위쪽의 別館은 민폐를 막고 고을의 水口를 關鎖하기 위해 郡守 具鼎煥에 의해 세워졌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고을답게 장시의 발달도 현저한데 邑場을 비롯하여 銀波站場?石橋站場?沙里院站場?蒜山鎭場?草浦站場 등의 장시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沙里院은 역원 취락에서 출발하여 해방 이후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한 사리원시의 모태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사창도 설치되어 있는데 각 坊面별로 있지 않고 동서남북의 네 곳에 세워졌다.

  • 서흥부대현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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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대현산성지도 瑞興府大峴山城地圖,海西正脈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 蒜山鎭까지 뻗어 가는 산줄기가 황해도의 제1방어선이 되는데, 대현산성은 이 방어선의 동쪽에 위치한 성으로 762년 신라 경덕왕 때 처음 쌓았고 조선에 들어와서 다시 개축하였다. 守城將은 瑞興府使가 겸하였고 別將 1인을 두었다. 지도에는 대현산성의 상황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가 제작되었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성 둘레가 3,880보이고 높이가 23척, 雉堞이 825곳, 城廊 51곳이 있었다. 또한 谷山?遂安?新溪?瑞興?兎山 등의 고을에서 각각 창고를 설치하고 軍餉을 보관했으며 軍器庫도 별도로 마련하였다. 지도에서도 다섯 고을의 군기고가 그려져 있다. 이외에도 將臺, 東標樓, 衙舍, 池, 우물 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와 창고가 표시되어 있다.

  • 서흥부선적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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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선적진지도 瑞興府善積鎭地圖,대현산성 서편에 위치한 군사기지로서 원래 萬戶鎭이었는데 1683년(숙종 9)에 新塘鎭과 합쳐져 僉使鎭으로 승격되었다. 城峴?禿峙?件隱嶺?東峴?自隱嶺 등과 같은 주요 고개를 防守하였다. 지도에는 선적진의 모습이 회화식으로 소략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선적진의 상황을 보면 衙舍?通引房?內衙?客舍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客舍?北倉 등의 건물만 그려져 있다. 특히 객사 건물에는 홍살문을 그려 신성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객사에는 殿牌를 안치하여 고을의 수령이나 鎭將이 삭망으로 예를 올렸다. 지도의 상단에는 당시 선적진의 상황과 연혁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

  • 서흥부소이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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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소이진지도 瑞興府所已鎭地圖,소이진은 善積鎭의 서쪽에 위치한 군사기지로 1680년(숙종 6)에 所已?凡汗 두 屯을 합하여 진을 설치하고 屯將을 만호로 승격시켰다. 인근의 작리령?자비령?여계령 등을 방어하였고, 兵馬萬戶 1인이 배치되었다. 지도에는 소이진의 모습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鎭將의 집무처인 衙舍와 더불어 西倉이 그려져 있고, 북쪽과 남쪽에는 烽臺도 보인다. 북쪽에 보이는 慈悲嶺은 ?嶺이라고도 하는데 서울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옛길이다. 한 때 사신들이 이길로 다녔으나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중국 사신들이 棘城 길을 경유함으로써 세조 때 폐지되기도 했다. 지도 상단의 주기에 의하면 당시 東軒 7간반, 內衙 12간, 行廊 4간 등이 있었다. 군사적 상황은 軍官 35인, 哨官 3인, 旗牌官 3인, 敎師 3인, 各色標下軍 37명, 牙兵과 戶保가 574명이었고 이외에 軍餉庫, 軍器庫 등이 있었다.

  • 서흥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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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흥부지도 瑞興府地圖,해주 직로가 경유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鳳山, 아래로는 平山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서흥군 신막읍?서흥면?도면?세평면?소사면?율리면?목감면?용평면?내덕면?매양면?구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양암리를 제외한 서흥군 전체, 린산군 상하리?다전리?석연리?석교리 지역, 봉산군 동쪽 부분, 연탄군 풍답리?신흥리?송죽리?장운리?성매리?두무리?문화리 지역, 수안군 상덕리 남동부, 린산군 북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서흥군 고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쪽에는 고을의 沿革?山川?坊里 등의 지지 항목이 기재되어 있어서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전통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특히 建置沿革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1424년(세종 6)에 명나라 조정에 들어간 宦者 尹鳳의 고향으로 인해 都護府로 승격했던 사실과 趙大立이 반란을 일으켜 府使 李宇柱를 죽였기 때문에 1671년(현종 12)부터 100년 동안 縣으로 강등시켰던 사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는 다른 군현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는데, 읍치의 모습이 중앙에 부각되어 그려져 있고 주변지역에는 坊도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봉산으로 이어지는 해주 직로는 굵게 표시하여 대로임을 나타내고 있다. 황해도 제1방어선에 위치한 입지적 특성으로 인해 善積鎭?所已鎭?大峴城 등의 방어기지가 들어서 있다. 무엇보다 장시의 발달이 현저한데 能里場?浦幕場?對賓場?德隅場?新塘場 등이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각 坊面에는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된 社倉의 모습도 보인다. 續命寺?歸眞寺 등의 사찰에는 석탑을 그려놓은 점이 이채롭다.

  • 송화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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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현지도 松禾縣地圖,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豊川, 서로는 長淵과 연결된다. 송화현의 명칭은 조선조 1408년(태종 8)에 고려 때의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하여 송화현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연정면?연방면?도원면?장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원당리와 명례리 일부를 제외한 송화군 전지역, 삼천군 남부지역, 황해남도 태탄군 공세리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는 읍치와 주변 지역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읍치에는 다른 군현지도에서 보이는 관청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지도의 상단에는 건치연혁?군명?관직 등을 기재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 산지는 연속된 맥의 형태보다는 독립된 형태로 표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墨山으로 일명 修證山이라고도 한다. 지도에서도 산 밑에 修證寺가 그려져 있다. 1871년에 작성된 ?해서읍지?에 의하면 토지가 다소 척박하여 뽕나무와 삼 재배로 업을 삼으나 백성들은 근면하다고 한다.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장시도 여럿 개설되어 있는데, 官門 앞의 邑場은 4?9일, 鳥川場은 6일(매달 3번), 錢山場은 3?8일, 公稅場은 2?7일로 개설되어 있었다. 고을 남쪽에는 溫井坊이 있는데 지금도 이 일대의 송화온천이 유명하다.

  • 수안군문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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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군문산지도 遂安郡文山地圖,문산진은 해서정맥을 넘어 평안도 祥原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원래 防垣鎭이 설치되어 있어서 인조 때 李适의 군대가 이곳에 와서도 감히 범하지 못했다. 1680년(숙종 6)에 文山과 聰明의 두 屯을 防垣의 洞口로 합쳐 옮기고 첨사로 승격시켰다. 이 지역의 주요 고개인 防垣嶺?明月嶺?蔓嶺?泥嶺?納老里嶺 등을 방어하였다. 지도는 문산진과 주변 지역의 모습을 소략하게 표현하였다. 이 지역의 중요한 관방이었던 防垣에는 관문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문산진에는 객사, 아사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는데, 객사는 정조 때 萬戶 徐有植이 改建한 것이고 衙舍는 만호 卞鍾翕이 重修한 것이다. 규장각 소장의 1871년 ?해서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民戶는 227戶였고 軍兵은 829명이었다.

  • 수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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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안지도 遂安地圖,수안군은 谷山과 황해도의 북동쪽 궁벽진 곳에 위치해 있는 고을이다. 예성강과 대동강 지류인 남강의 분수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산지가 많고 들이 적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율계면?대성면?대오면?천곡면?수구면?도소면?연암면?공포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산북리?주영리?석교리, 평원리 동부, 상덕리 남부를 제외한 전체, 연산군에서 대군리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연탄군 신금리와 오봉리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는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은 지역의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산지는 황해도의 서해안까지 이어지는 해서정맥에 해당하는데 이 산줄기를 넘어 평안도 祥原으로 가는 길이 굵은 홍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遼東山인데 북쪽의 彦眞山에 이어진다. 잘 알려진 지금의 언진산맥은 바로 이 산에서 따온 명칭이다. 하천은 지금의 남강에 해당하는 북쪽의 綾城江만이 청색으로 그려져 있을 뿐 다른 하천은 보이지 않는다. 읍치의 주변 지역에는 각 坊들이 읍치로부터의 거리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 고을에도 장시가 여럿 개설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871년 ?해주읍지?(규장각 소장)의 기록에 의하면 邑場은 1?6일, 栗里場 2?7일, 山陽場 2?7일, 位羅場 3?8일 등으로 개설되어 있었다. 동남쪽 良坡嶺 근처의 位羅鎭은 1680년(숙종 6)에 屯將을 萬戶로 승격시켜 설치되었는데, 지도제작 당시에는 黃州의 鐵島鎭에 병합되어 혁파되었다. 상단의 여백에는 건치연혁이 기재되어 있는데, 1653년(효종 4)에 노비가 주인을 죽여서 縣으로 강등되었던 사실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綱常倫理를 거역하는 범죄는 개인뿐만 아니라 고을에 연대책임을 물어 엄하게 다스렸던 것이다.

  • 신계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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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현지도 新溪縣地圖,예성강 유역 중에서도 상류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遂安?谷山, 아래로는 平山에 이어진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계군 신계면?고면?다율면?다미면?마서면?부여면?사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신계군 전지역, 곡산군 세림리와 사현리, 수안군 산북리?주영리?석교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고려의 新恩縣이었는데, 조선 1396년(태조 5년)에 俠溪縣을 신은현에 예속시키고, 1445년(세종 27)에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신계현이라 하였다. 지도에도 西里坊 근처와 水回坊에 신계현과 신은현의 터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에 있는 九峰山인데 봉우리도 이름에 어울리게 여러 개 그려져 있다. 산지와 하천이 모두 청색을 사용하여 고졸하게 묘사되어 있다. 흰 학이 마루턱에 깃들어 있어서 유래된 鶴巢峰과 수려한 경치로 이름난 降仙臺 등이 읍치 근처에 그려져 있고, 동쪽에는 胎를 안치한 태봉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선조 때 廢元孫의 태실이 있는데, 1599년(선조 32)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산의 명칭이 상세히 표기되어 있는 반면 하천의 명칭은 읍치 북쪽의 烏巢川 이외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동북쪽의 하천 상류에는 河中島인 孤島가 독특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객사, 아사를 비롯한 관청건물과 더불어 신미양요 이후 세워진 척사비도 보이고 있다. 척사비에는 비문도 쓰여져 있는데,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이란 비문이 선명하다. 주변지역에는 원 속에 각 坊面을 표기하였으며 社倉이 있는 마을의 이름도 수록하였다. 고을 동쪽의 秀林亭은 물가에 연해 있는데 낭떠러지가 천 자는 된다고 한다. 읍치 서북쪽의 光山鎭은 이 고을의 유일한 鎭堡였는데 암행어사의 書啓로 인해 辛卯年(1831년으로 추정)에 혁파되었다. 장시도 개설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북쪽의 甫音場?支石市, 남쪽의 上市?下市 등이 보이고 있다.

  • 신천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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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군지도 信川郡地圖,신천군은 황해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고을로 文化와 載寧 사이에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북부면?가산면?온천면?두라면?용문면?노월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남부(도락리?이목리?지남리?냉정리), 동부(건산리?용산리?화산리), 북부(마명리?오국리?덕성리)를 제외한 전지역에 해당한다. 지도는 규장각 소장의 1871년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내용과 표현 기법이 유사하여 이를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여 묘사되어 있고, 재령강의 지류인 淸川?婦貞川?龍水川?境地川 등의 하천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를 주변 지역보다 확대시켜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花山으로 읍치의 북서쪽에 그려져 있다. 읍치의 남쪽에는 造山도 보이고 있다. 조산은 고을의 허한 부분을 보완하는 裨補의 일종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다. 여기에는 보통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드는데 지도에도 수목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조산은 심리적 안정감을 줄뿐만 아니라 하천의 범람을 방지하는 실용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造山의 옆에는 좌우로 우물이 있는데 文井?武井이라는 이름이 이채롭다. 읍치에는 衙舍?客舍를 비롯하여 창고?軍器?訓練 등의 관청 건물이 그려져 있고 社壇??壇?城隍祠?鄕校의 三壇一廟도 그려져 있다. 읍치의 동쪽에는 溫井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유명한 신천온천이다. 서남쪽 陵洞坊에는 1588년(선조 21) 건립되고 1710년(숙종 36)에 사액된 正源書院이 대원군 집정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길가에 세워진 彌勒들을 통해 민간 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읍치에 있는 通雲亭은 1808년에 창건한 것이고 望美亭은 1871년 郡守 李錫應이 세운 정자이다. 서남쪽의 慈惠寺도 1871년 군수 이석응이 중수한 사찰이다.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시장도 볼 수 있는데, 읍치에 內場?塔街場?訓鍊場, 남쪽에 棗隅場이 있다.

  • 안악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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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지도 安岳地圖,안악군은 황해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북쪽은 대동강, 동쪽은 재령강과 접하고 있다. 재령평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하여 다른 고을에 비해 제법 넓은 뜰이 펼쳐져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안악군 안악면?용순면?대원면?문산면?안곡면?서하면?대행면?은홍면?용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천군 전지역, 안악군 서부와 남부를 제외한 지역을 포함한다. 지도에는 서쪽 구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모습이 조감도식으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고을의 북쪽을 돌아 서해로 흘러가는 대동강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1871년 작성된 ?해서읍지?(규장각 소장)에 실려 있는 지도와 표현기법?구도 등이 유사하여 이를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邑治는 주변의 面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고을의 鎭山은 楊山인데 읍치의 북쪽에 강조되어 있고, 각종 관청 건물과 壇廟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주변 지역에는 원 내부에 각 坊名을 표기하였는데, 初界와 終界를 표시하여 坊의 대략적인 범위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읍치 동쪽 재령강 연안의 桃串과 省草串에는 神祠가 있었는데, 고려 때 祀典에 실려 있었고 당시에도 군에서 봄, 가을로 제사지냈던 곳이다. 배를 통한 水運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강 연안의 포구와 나루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강가에 있는 기암절벽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북쪽 강가의 九絶壁은 기암 아홉 개로 이루어져서 붙여진 이름인데 절벽도 실제 아홉 개로 그려져 있다. 대동강과 재령강이 만나는 곳에 急水門이 있는데, 양옆의 東津과 鐵島에 성을 쌓아 평양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았던 곳이다. 북쪽의 대동강변에는 넘어오는 적을 감시하던 瞭望臺가 그려져 있다. 병인양요 이후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서 연해 지방을 필두로 砲軍이 증설되는데, 猪島에는 이들이 入番하던 砲軍直所도 그려져 있다. 북쪽 涉河坊에는 椒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冷井이라고도 하는데 맛이 시지만 병자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屹紅坊에는 溫井이 그려져 있는데 痼疾이 있는 사람에 효력이 있다고 한다. 장시의 발달도 볼 수 있는데 읍내의 上場?中場?新場을 비롯하여 북쪽 椒井浦와 東倉浦 등 교통의 요지에 장시가 들어서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중요 지역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첨가하여 지도를 보완해주고 있다.

  • 연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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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지도 延安地圖,연안부는 황해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경기도의 강화, 교동 해역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擇里志?에 의하면, 큰 산과 長川, 넓은 들판이 모였고 潮水가 통해 넓고 명랑한 것이 중국 江淮의 풍경과 같아서 살만한 곳이라 하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연백군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 전체, 청단군 흥상리?청정리?심평리 일대, 배천군 수원리?추정리?역구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으로 일명 鳳勢山이라고도 한다. 지도에는 읍성이 크게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산봉우리의 방향을 사방으로 향하게 하는 開花式 구도로 산지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내부의 중심공간을 부각시킬 때 사용한다. 황해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고을이 해안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읍성은 1555년(명종 10)에 쌓았는데, 1591년에 申恪이 이 고을을 지킬 때 修築하였다. 읍성의 내부에는 衙舍?客舍뿐만 아니라 勅使들의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勅庫와 심지어 북을 걸어두던 鼓樓 등도 그려져 있다. 남쪽의 南山에는 얼음을 보관했던 氷庫도 보인다. 읍치를 제외한 주변 지역은 작은 축척으로 그려져 坊名과 읍치로부터의 거리, 사창 등이 그려진 정도이다. 남쪽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저수지인 臥龍池가 그려져 있다. 일명 南大池라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겨울철마다 저수지의 얼음이 세로 혹은 가로로 갈라지는데 邑民들은 용이 경작하는 것(龍耕)이라 하여 그것으로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태종 때에 安魯生이 그 사실을 알리니 有司에게 명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치 서쪽에 있는 楓川橋는 海州大路로 통하는 다리인데 크게 부각되어 표현된 점이 이채롭다.

  • 옹진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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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진부지도 甕津府地圖,옹진부는 황해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동남면?북면?서면?용천면?가천면?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태탄군 은동리를 제외한 옹진군 전지역과 태탄군 옥암리, 남한의 옹진군 백령면과 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에는 군사 요충지답게 水軍節度使가 관장하는 水營의 本營과 行營을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래 현령이 다스리다가 1718년(숙종 44)에 所江鎭을 병합하여 水營으로 승격하고 水軍節度使를 두어 옹진도호부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강진에 영을 설치하여 行營이라 칭하고 옹진은 本營이라 했던 것이다. 수군절도사는 계절에 따라 본영과 행영에 번갈아 가면서 주둔하였다. 즉, 바람이 잔잔한 3월에서 8월 사이는 소강진 행영에 머물렀고 바람이 거센 9월에서 2월까지는 본영에 주둔하였다. 옹진부의 鎭山은 동쪽에 위치한 花山이다. 지도에서도 다른 산에 비해 우뚝 솟은 모습으로 강조되어 있다.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읍성의 모습이 독특하다. 읍성 내부에는 府使가 집무하던 制勝堂을 비롯한 각종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구석에는 獄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려 격리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객사의 전면에는 受降門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丁海冠이 왜적을 베고 세운 문이라 전해진다. 행영에도 節度使가 집무하던 宣威堂, 水軍虞侯(中軍)가 머물던 中營을 비롯하여 여러 관청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특히 성 밖에는 纛堂도 그려져 있다. 纛은 군대에서 가장 큰 깃발을 말하는데 둑당은 纛神에게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주변 지역에는 사창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본영과 행영에서의 거리도 병기되어 있다. 남쪽과 서쪽의 해안에는 소금을 생산하던 鹽場이 원의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 은율현구월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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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구월산성지도 殷栗縣九月山城地圖, 황해도를 가로지는 산줄기인 해서정맥이 서해안으로 뻗어 나가는데 그 한 가지가 북쪽으로 올라가 구월산에서 그쳤다. 구월산은 해발 954미터로 황해 서부에서는 가장 높다. 여기에 축조된 九月山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4,434步이다. 생김새가 큰 배와 같다고 하며 원래 남북으로는 길이 없고 동서로만 통행하였다. 동서의 길도 棧道로 이루어져 있어서 騎馬는 다닐 수가 없었다. 이후 성 북쪽에 조그만 石門이 만들어졌고 西門樓가 중건되기도 했다. 은율현감이 守城將을 겸하였고 守成別將은 서울에서 차출되었다. 지도는 험준한 구월산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어 표현되었다. 성 내부에는 객사와 別將衙門, 營倉이 그려져 있다. 또한 각 고을이 담당하고 있는 관할 지역인 信地가 그려져 있다. 유사시 각 고을에서 군사를 보내 지키던 곳이다. 營倉의 옆에는 醬을 저장하던 醬甕垣도 그려져 있다.

  • 은율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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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율현지도 殷栗縣地圖,은율현은 황해도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면?남부면?북부면?서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은율군 남부지역과 송화군 원당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風水의 山圖적인 표현 기법을 활용하여 산의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산줄기의 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바다가 있는 서쪽을 하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의 乾止山이다. 읍치에는 관청 건물과 壇廟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의 북쪽에는 장림이 가꾸어져 있었지만 당시에는 거의 없어지고 고목의 일부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연장선에는 고을의 허한 곳을 보완할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造山도 그려져 있다. 이것은 裨補의 일종으로서 이 고을의 水口를 關鎖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근처에는 기름진 벌판이 펼쳐져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논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수백 말을 수확했다고 한다. 청색 점선으로 그려진 漢川이 고을의 명당수가 되는데 1871년 ?海西邑誌?에 의하면, 이 하천변으로 많은 논들이 있는데 모래를 파서 도랑을 만들어 관개를 한다고 한다. 읍치의 동남쪽에는 文筆峯이 있는데 흡사 붓의 끝처럼 뾰족하게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북쪽 해안의 熊島에는 매년 解氷期 이후에 荒唐船을 追捕하기 위해 將卒들이 번을 섰던 곳이다. 이 섬에는 관에서 설치한 箭場도 보이고 있다. 또한 하천이 합류되는 해안가에는 소금을 만들었던 鹽井이 표시되어 있다. 동쪽의 九月山城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城池로서 성 주위가 14,3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산성의 모습이 큰 배와 같고, 길이 동서로만 나 있는데 험준한 棧道로 이루어져 있다. ?해서읍지?에는 이러한 은율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즉, “땅이 오곡에 합당하며 고을의 동쪽은 면화밭이 많고 고을의 서쪽은 논이 많아 풍요롭다. 북으로는 바다가 가까이 있어서 魚鹽의 산지가 되는데 고을이 비록 작으나 백성은 실로 의식이 족하다”라고 쓰여 있다.

  • 장련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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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련현지도 長連縣地圖,장련현은 황해도의 서북쪽 대동강 하구에 연해 있는 작은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일도면?이도면?북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은율군 북부지역에 해당한다. 지도는 1871년 작성된 규장각 소장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구도가 유사하여 이를 토대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방위 표시가 없는데 전체적인 구도로 보아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한 것이다. 산지를 開花式으로 표현하여 중심 공간인 읍치를 확대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衙舍?客舍를 비롯한 관청 건물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으나 건물의 이름은 거의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읍치의 좌향을 壬坐原이라 표시하였을 뿐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편의 鳳凰山인데 날이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북쪽의 二道坊에는 松串壇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阿斯津松串祠로서 祀典에 小祀로 실렸던 것인데, 봄?가을에 향축을 내려보내 제사를 지냈다. 서쪽의 道里坊에는 小金山이 있는데 과거 철을 캐던 곳이어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해안에 위치한 砧串浦는 荒唐船을 쫓아내던 이 고을의 대표적인 관방이다. 읍치 동북쪽의 大津浦는 평안도 三和로 가는 포구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關을 설치하여 장삿배들이 몰래 중국과 통하는 것을 금하였다. 南山 밑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鳳陽書院이다. 이 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세워졌고, 이듬해 賜額되었는데 朴世采를 배향하였다. 대원군 집정기의 서원 철폐 때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 장연금사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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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금사진도 長淵金沙鎭圖,金沙鎭은 황해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군사기지이다. 지도 상단의 注記를 보면, 이 지역이 서해의 요충관방이 되므로 1711년 순무사 朴大監이 이 지역에 巡審왔을 때 荒唐船이 왕래하는 요해처임을 파악하고는 조정에 글을 올려 僧鎭을 창설한 것이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을 승격하자는 水營의 보고에 따라 金沙鎭別將을 추천하여 임명하고 임기를 30朔으로 하였다. 지도는 금사진과 주변 지역을 간략하게 그렸다.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바다가 있는 서쪽을 지도의 하단으로 배치하였다. 서쪽 해안의 金沙寺는 해안 흰 모래가 금과 같은 이유로 이름이 붙어졌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근처의 바닷가 20리가 모두 모래 언덕인데 모래가 아주 자잘하여 금빛 같으며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매양 바람에 따라 모래가 쌓여서 산봉우리처럼 되는데 높아지기도 하고 깍이기도 하며 朝夕으로 위치가 옮겨지지만 모래 위에 있는 절만은 모래에 묻히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라고 하고 있다. 지도에도 백사장인 金沙汀과 모래 언덕(砂丘)이 그려져 있고 沙峯으로 표시되어 있다. 남쪽의 夢金浦는 이 지역의 유명한 포구로 ‘몽금포타령’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장연백령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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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백령진도 長淵白翎鎭圖,백령도에 설치된 진을 그린 지도. 백령도는 조선시대에 長淵縣에 속해 있었던 섬인데 지금은 인천광역시에 소속되어 있다. 황해도의 바닷길 關防으로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일찍이 고려시대에 진을 설치하고 현종 때 鎭將을 두었다. 그 후 혁파되었다가 조선 1609년(광해군 원년)에 진을 설치하고 水軍僉節制使를 두었다. 조선후기에는 중국에서 몰래 들어와 魚採하거나 무역하는 황당선이 이곳을 경유하기도 하여 이들을 잡는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 지도에는 백령도를 비롯하여 대청도?소청도, 그리고 황해도 해안 지방이 그려져 있다. 백령도에는 馬場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輿地圖書?에 의하면, 牧馬가 雌雄을 합쳐 78필이었는데 司僕寺에서 구획을 나누어 分養하고 가을 9월에 잡아들였다 한다. 당시 이 섬에 살고 있는 주민은 423戶였다.

  • 장연오차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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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오차진도 長淵吾叉鎭圖,오차진은 해서정맥의 산줄기가 장산곶으로 뻗어내린 남쪽 해안에 위치한 군사 기지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룡연군 五叉鎭里이다. 지도 상단의 注記에 의하면, 처음에는 舊鎭에 설치되었으나 1855년 진을 別西江浦로 옮겼다고 한다. 원래 萬戶이었으나 나중에 僉使로 승격되었다. 1871년의 ?해서읍지?에 의하면, 防船 1척, 二防船 1척, 兵船 1척, 俠船 3척, 舟師參操軍兵 203명, 旗牌軍官 42명, 別抄軍官 44명, 壯衛士 21명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는 오차진 주변 지역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쪽 끝에는 유명한 장산곶과 祭堂의 모습이 보인다. 주변의 촌락도 수록하였으며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그려 넣었다.

  • 장연조이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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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조이진도 長淵助泥鎭圖,助泥鎭은 장산곶으로 뻗어내린 해서정맥의 산줄기 북쪽에 위치한 군사 기지이다. 앞에는 夢金島가 막아 서 있고 안으로는 깊숙이 만입되어 수군 기지를 설치하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지니고 있다. 원래 召募屯地로서 別將을 두었는데, 1711년에 조정의 명에 의해 萬戶鎭을 설치하였다. 1871년의 ?해서읍지?에 의하면 防船 1척, 伺候船 1척이 있었다. 지도는 오차진도와 구도와 표현기법이 유사하다. 산줄기가 뻗어오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고 조니진 주변의 촌락을 표시하여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 장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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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연지도 長淵地圖,장연현은 황해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해서정맥의 산줄기가 장산곶까지 뻗어 있는 지역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장연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고,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룡연군?태탄군 서부,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대청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규장각 소장의 1871년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구도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여 같은 계보로 보인다. 지도의 방위는 산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장산곶까지 뻗어내린 해서정맥의 산줄기가 연맥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다른 지역과 동일한 축척이 적용되어 있는데 붉은 색의 원으로 강조했을 뿐이고 관청 건물과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해바라기 모양의 성첩을 그려 읍성이 있음을 나타내었는데, 이 읍성은 원래의 읍성이 훼손되어 1869년에 다시 수축한 것이다. 이 지역은 해안 방어의 요충으로서 군사기지가 여럿 들어서 있는데, 해안에는 金沙鎭?助泥鎭?吾叉鎭?白翎島鎭 등이 설치되어 있다. 장산곶 부근에 보이는 祭堂(長山串祠)은 祀典에 小祀로 실려 있는데,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어 제사지냈다. 장산곶은 조선시대 뱃길 가운데 가장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기도 한데, 지도에도 바위 섬이 그려져 있다. 장산곶 부근에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관리하는 松田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汪濟屯은 민간에서 전하기를 삼한시대 때 왕이 피난하여 강을 건넜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御營廳에서 屯을 설치한 곳이다. 그 서편에는 營倉과 軍庫가 그려져 있고 강 연안에는 水軍을 조련하는 水操處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의 서쪽 龍湖坊에는 龍井이 그려져 있다. 물의 깊이는 알 수 없으며 끌어다가 논에 물을 대는데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 재령장수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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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장수산성지도 載寧郡長壽山城地圖,장수산성은 재령강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강 유역으로 넘어오는 적을 차단하기 위한 산성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에 이르러 개축하였는데 성 주위는 5,318步이고 이 가운데 2,615步는 石壁이 험준하여 쌓지 않은 부분이다. 雉堞이 700步, 연못은 3곳, 우물 19곳이고 주관 감영의 속읍은 재령?신천?배천 등이며 영읍의 군기와 창고는 각각 4개가 있었다고 지도에 기재되어 있다. 지도에는 험준한 산세가 잘 표현되어 있고 산성 내부의 시설물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客舍?衙舍를 비롯한 관청 건물과 창고?군기고 등의 건물에는 칸수까지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산성 주변에는 懸菴, 妙音寺 등의 사찰도 그려져 있다. 특히 묘음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각종 사찰 건물과 碑閣, 탑 등도 그려져 있다. 懸菴이 위치한 天日峰 쪽에는 老僧岩이 마치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져 흥미롭다. 현암 밑으로 난 길은 벼랑 사이에 난 棧道로 雲棧이라 표시되어 있다. 성 남문 아래의 급류가 폭포처럼 역동적으로 형상화되어 지도의 회화적 흥취를 더해주고 있다.

  • 재령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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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령지도 載寧地圖,재령군은 재령강 유역에 발달한 재령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대표적인 고을이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율면?남율면?서호면?삼강면?청천면?은룡면?장수면?신원면?상성면?하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 전체, 신원군 북부, 황해북도 은파군 용연리?옥현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재령강이 흘러가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지도의 구도는 1871년 작성된 ?해서읍지?의 지도와 유사하여 같은 계열의 지도로 볼 수 있다. 산지는 회화식을 가미하여 암석과 수목까지 표현했으며, 재령강과 그 지류의 하천들은 흡사 나뭇가지처럼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옛 읍치는 長壽山 남쪽에 있었는데 1519년(중종 14) 지금의 劍山 아래로 옮겨왔다. 지도에는 객사인 館舍 뒤편에 主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각종의 관청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다른 고을 지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出身廳도 그려져 있다. 출신청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한 무예출신들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수령의 비서 업무를 보던 冊房도 다른 고을과 달리 上冊, 下冊으로 나눠져 있는 것도 이채롭다. 향교에는 입구의 홍살문을 비롯하여 명륜당, 東齋?西齋까지 그려 넣었다. 읍치 동쪽의 上栗坊에는 海倉과 收稅所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조세를 거두어 보관했다가 조운선에 선적한 후 재령강 수운을 이용하여 서해를 거쳐 서울로 운반되었다. 남동쪽에는 鐵峴鎭이 관청 건물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진은 訓練都監 소속으로 訓局將官 1人이 別將을 보내 鍊鐵을 본영에 수납케 하였다. 鎭軍 250명이 일인당 철 50근을 모아 본영에 납부하고, 만일 긴급한 일이 있으면 별장이 진군을 거느리고 장수산성에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읍치 북쪽에는 艾井이 그려져 있는데 ?輿地圖書?에 이에 얽힌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고려 말에 본도 按撫使 李自生이 이곳을 순시하다가 땅이 비옥하고 넓어 卜居할 만하다고 하자 그의 부하들이 물이 없음이 단점이라 하였는데, 이에 이자생은 쑥이 덮힌 곳을 가리켜 파도록 했더니 과연 물이 용출되었다 한다. 이에 읍민들이 여기에 모여 살면서 우물 이름을 艾井이라 했다. 鵲島에서 북쪽으로 余勿里坪과 같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강에 둑을 쌓아 확보한 대표적인 河岸 干拓地이다.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장시도 볼 수 있는데 고을의 중심인 읍치에 上場市와 下場市가 있고 靑石頭 부근의 新市와 더불어 新院倉 근처에도 장시가 개설되어 있다. 도로변에는 민간신앙과 관련된 미륵이나 장승도 볼 수 있는데 남쪽의 下柳坊 근처에는 石長承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 토산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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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산현지도 兎山縣地圖,토산현은 황해도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 경기도의 朔寧과 접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서천면?합탄면?외류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토산군 송세리?백화리?송천리?석봉리?문성리?미당리를 제외한 토산군 전지역, 강원도 철원군 부압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토산현의 서쪽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 상류지역에, 동쪽은 임진강의 지류인 萬東江 유역에 걸쳐 있다. 지도에 그려진 것처럼 두 하천의 분수계에 위치하여 산지가 많고 들이 적어 황해도에서는 한미한 고을에 속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고을의 鎭山이 兎山으로 되어 있는데, 읍치 북쪽의 兎峰이 이에 해당한다. 1871년의 ?해서읍지?에는 고을의 主山으로 松茸山이 기재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松茸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진산은 고을을 鎭護하는 산을 말하는 것이고 主山은 읍치의 풍수적 배치에서 중심되는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읍치에는 衙舍, 客舍를 비롯한 관청 건물을 그려 넣었다. 동쪽 강 연안에는 기암절벽으로 이름난 三聖臺도 그려져 있다. 주변 지역은 각 坊名과 사창이 그려진 정도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읍치 서쪽의 外縣內坊에는 龍巖이 있는데 흡사 용의 모습으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일설에는 용의 두 뿔이 있었는데 倭賊이 하나를 훼손시켰다고 전해진다. 읍치 동남쪽의 龍淵과 馬龍淵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이 寒微하여 개설된 장시도 다른 고을에 비해 적은데 읍치 서쪽에 梨邱場이 유일한 장시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상단에는 地誌 항목 중에서 道里와 古蹟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는데, 고적 항목에서는 西加洞坊에 元子 胎室이 있고 外縣內坊에는 황희 정승의 집터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 평산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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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부지도 平山府地圖,평산부는 개성에서 황주로 이어지는 해주 직로상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瑞興, 남으로는 金川과 연결된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산군 남천읍?평산면?금암면?서봉면?신암면?인산면?문무면?안성면?고지면?세곡면?적암면?마산면?용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기탄리와 예성리를 제외한 평산군의 전지역, 상하리?다전리?석교리?석연리를 제외한 린산군 전지역, 봉천군 동부를 제외한 전지역, 서흥군 양암리, 금천군 용성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황해 一道의 祖宗이 되는 滅惡山이 포진해 있어서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은 고을이다. 고을을 鎭護하는 鎭山은 멸악산이다. 지도에는 예성강의 지류와 산지가 어울려 있는 고을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古蹟?道里?社倉과 같은 地誌 항목을 수록하여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특히 古蹟 항목은 1871년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를 그대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고을과 달리 방위를 子午卯酉의 干支를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동북쪽 구석에 위치한 읍치는 주변 지역과 비슷한 축척으로 그려 특별히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관청 건물은 그려져 있지 않고 단지 향교만 나타나 있다. 읍치 동편에는 太白山城이 있는데, 이 산성은 의주대로변에 위치하여 육로를 방어함과 동시에 예성강을 거슬러 오는 적을 막아 조운선을 보호할 수 있는 유리한 곳에 입지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쌓았으며 후에 城隍山城이라 일컬었다. 조선조 영조 때 터를 넓히고 고쳐 쌓았다. 이 고을의 서원으로는 東陽書院과 九峯書院이 있었다. 동양서원은 1650년(효종 1)에 세워져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고, 구봉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건립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다. 그러나 지도에는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모두 훼철되어 있다. 積岩面에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溫泉은 돌난간으로 되어 있는 浴室을 갖추고 있는데, 물이 몹시 뜨겁다”고 한다. 고려 문종 이후 여러 왕들이 이곳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즐겼다고 전한다. 猪灘을 건너고 읍치를 경유하여 車踰嶺을 넘는 길이 해서 직로에 해당한다. 길가에 ?秀(館)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館舍이다. 도로를 따라 장시도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 붉은 원에 표시하였다.

  • 풍천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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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지도 豊川府地圖,풍천부는 황해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고을로 은율과 더불어 땅이 비옥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서 어염의 이익도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운유면?율리면?상리면?하리면?천동면?진봉면 일대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과일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도는 1871년 ?해서읍지?(규장각 소장)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다. 읍성이 있는 읍치를 상대적으로 부각시켜 그렸다. 지도에는 읍성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나 당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터만 남아있는 정도였다. 성안의 天使館과 皇華門은 朝天 사신들이 바닷길로 왕래할 때 머무르던 유적이다. 흔히 읍성의 내부에 설치되어 있던 獄이 이곳에서는 성밖 장시가 개설된 지역에 있다. 읍치 동쪽에는 향교가 있는데 유생들에게 먹일 식량을 저장하던 養士庫도 그려져 있다. 서쪽 해안의 西海壇은 西海神에게 봄?가을로 향축을 내려보내 제사를 지냈던 곳이고 그 옆의 椒島祠도 관에서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풍천에도 은율과 마찬가지로 造山이 조성되어 있는데 業淸江을 사이에 양 옆으로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지역이 가장 비옥한 땅인데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수백 말을 수확했다고 한다. 읍치의 남문 밖에는 下場市, 동문 밖에는 上場市가 개설되어 있고 동북쪽에는 石灘場市도 보이고 있다. 고을이 바다와 접해 있어서 해안 방어기지도 들어서 있는데 서쪽의 椒島鎭과 북쪽의 許沙鎭이 그것이다. 향교와 訓練 근처에 세워진 楫竹은 주요 건물의 표식 역할을 하기도 했다.

  • 풍천부초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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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초도진지도 豊川府椒島鎭地圖,초도진은 풍천부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군사기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리에 해당한다. 1701년(숙종 27)에 僉使鎭을 설치하여 감목관을 겸하게 하였다. 초도가 荒唐船이 왕래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므로 牧馬를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후에 1855년(철종 6)에는 초도의 첨사를 邊地를 履歷한 벼슬자리로 만들고 유명한 무신을 가려서 보낼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이 지역에 중국의 황당선과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하자 취해진 조치였다. 지도는 1871년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거의 같다. 진의 主山 아래에 관청 건물을 그렸고 남쪽에는 목장도 표시되어 있다. 섬 주위의 바다는 물결 무늬를 그려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북쪽의 勝戰峰과 남쪽의 羅里峰에는 瞭望處도 그려져 있다. 당시 초도진에서 보유한 선박은 防船 1척, 兵船 2척, 伺候船 2척, 俠船 1척 등이 있었다.

  • 풍천부허사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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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천부허사진지도 豊川府許沙鎭地圖,허사진은 풍천부의 해안에 위치한 군사기지로 1523년(중종 18)에 業淸江 萬戶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후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숙종 때 椒島에 첨사진을 설치하면서 두 邊將이 너무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 하여 혁파의 논의가 있었으나, 허사진도 요해처가 되므로 존속시켜야 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계속 이어졌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과일군 월사리에 해당한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琵琶串이 바다쪽으로 쭉 뻗어 나와 있으며 움푹 들어간 만입된 곳은 沙場으로 둘러싸여 물이 들어오면 마치 호수처럼 되는데 이곳에 진이 들어서 있다. 鎭基는 於芚峯에서 뻗어 내린 맥을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임을 표현하였다. 鎭의 동쪽에는 토사가 퇴적되던 곳으로 소금을 만들던 鹽井이 그려져 있다. 북쪽과 서쪽의 바다에는 파도무늬를 독특하게 그려 大洋임을 나타냈고 근해는 단지 청색으로 채색만 하였다.

  • 해주수양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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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수양산성지도 海州首陽山城地圖,수양산성은 최초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축조되었고 이후 조선에 들어와 1676년(숙종 2)에 개축되었다. 성 주위는 2,950步였다. 守城將은 해주의 判官이 겸하였고 別將 1인을 두었다. 지도의 주기에 의하면 당시 召募別將 1인, 守堞軍官 49인, 恒居部將 8인, 城吏 7인, 募軍 50명, 募僧 4명 등으로 되어 있었다. 지도는 이러한 수양산성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마치 진경산수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산?수목?건물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성안을 흘러 나가는 물이 성벽에서 떨어지는 모습도 역동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성 내부에는 衙舍를 비롯한 관청 건물과 인근 각 고을에서 관장하던 軍器庫도 그려져 있다. 산성 북쪽에는 隱寂寺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募僧 4명이 상주하였다. 성곽에는 인근 고을의 담당 구역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주는 남문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양산 아래에는 백이?숙재를 배향했던 淸聖廟가 그려져 있다.

  • 해주용매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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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용매진지도 海州龍媒鎭地圖,용매진은 해주의 남쪽 해안 용매도에 위치한 군사 기지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청단군 용월리에 해당한다. 白翎鎭管 소속으로 처음에는 해주의 下平倉面에 만호진으로 있다가 후에 용매도로 옮기졌고 1704년에는 첨사진으로 승격되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육지와도 통한다. 지도에는 용매진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주기에 의하면, 水軍僉使 1인, 軍官 3인, 人吏 15인, 鎭卒 30명, 防船 2척, 병선 1척, 俠船 3척 등이 있었다. 鎭에는 객사인 館舍?衙舍?軍器庫?火藥庫 등과 將軍堂?錦城堂 등의 사당이 그려져 있다. 특히 배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一防船?二防船, 戰船과 從船이 포구에 정박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 있는 楮尾浦가 육지에 해당하는데 섬에서 10리가 된다. 당시 조수가 나가면 걸어서 갈 수 있었던 곳이다.

  • 해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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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지도 海州地圖,해주목은 황해도의 감영이 있던 큰 고을로 해안에 연해 있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해주시와 벽성군을 합친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부를 제외한 전 지역, 벽성군 전 지역, 강령군 동부, 태탄군 동부, 신천군 남서부, 신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지도는 읍성이 축조된 읍치를 확대하여 부각시키고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축소하여 그렸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의 龍首山이다. 장방형의 읍성은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된 것인데, 1555년(명종 10)과 1591년(선조 24)에 중수하고 1747년(영조 23)에 개축하였다. 읍성 남문 앞에는 축성비도 그려져 있다. 이 비는 1804년 監司 李存秀가 건립한 것이다. 읍성의 내부에는 각종 관청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관찰사의 집무처인 宣化堂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연못 위에 그려진 芙蓉堂은 인조의 탄생지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차 왕비와 왕자들이 이곳에 머물렀는데 1595년에 인조가 태어났던 곳이다. 그 전면의 胎封碑閣은 인조의 誕降事蹟碑로 추정된다. 해주목사의 집무처인 본관은 위쪽 귀퉁이에 위치해 있다. 중군이 머물던 中營과 纛神을 모시던 사당인 纛堂도 그려져 있다. 靑丹驛은 7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인데, 다른 고을과 달리 읍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동쪽 靑丹倉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후에 읍성 안으로 옮긴 것이다. 읍치 뒤편과 동쪽 강가에는 수목의 모습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伯夷?叔齊의 고사가 전해오는 수양산에는 이들을 모신 淸聖廟가 그려져 있다. 그 북쪽에는 牛耳山堂이 그려져 있는데 국가의 祀典에 실려있는 神祀로서 봄, 가을로 향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읍치 동쪽의 廣石川은 경치가 수려하여 많은 정자들이 들어서 있고 林藪도 잘 가꾸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 제언의 일종인 築?도 표시되어 있다. 해안의 結浦는 結成浦라 부르는 곳인데 漕倉이 있던 곳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마치 호수처럼 되어 小洞庭이라 불렸다고 한다. 당시 많은 어선이 운집하였고 민가도 즐비하였던 곳이다. 아래쪽 해안에는 戰船과 官船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서쪽 해안의 黑頭浦에는 荒唐船을 追捕하던 追捕所도 그려져 있다. 해주는 황해도의 대도회라서 장시의 발달도 현저한데, 아래쪽의 靑丹場?地境場?通山場을 비롯하여 代陳坊과 三谷坊, 翠野亭 근처에도 장시가 개설되어 있다.

  • 황주정방산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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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정방산성지도 黃州正方山城地圖,정방산성은 황해도 제1방어선의 핵심에 위치한 산성으로 동쪽으로는 洞仙嶺, 서쪽으로는 棘城에 이어진다. 황해도의 산성 중에서 해주의 수양산성, 문화의 구월산성, 재령의 장수산성, 서흥의 대현산성 등은 매우 험준한 곳에 위치하여 적의 접근이 어려운 避兵地라 할 수 있는 반면에, 정방산성은 평안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평지에 위치한 棘城과 해주의 직로가 경유하는 洞仙嶺을 방어하는데 정방산성의 중요성이 있다. 정방산성은 1636년(인조 14)에 쌓은 성으로 밖은 평탄하고, 안은 험준하며 뒤에는 준령이 있고, 앞에는 큰 들을 접하고 있다. 동?서?북쪽이 험준한 산으로 막혀 있고 단지 남쪽으로 트여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남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정방산성의 모습이 회화적으로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암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지의 모습이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고 성안의 건물들도 상세히 묘사되었다. 특히 가곡으로 유명해진 성불사의 모습이 완연하다. 당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과 석탑, 그리고 사적비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이 밖에 安國寺?圓通菴?上院菴?兜率菴이 그려져 있고 성불사 위쪽에는 浮屠의 모습까지 보인다. 성안에도 人家가 들어서 있지만 사람의 왕래가 많은 남문 밖에도 인가가 밀집해 있고 장시도 개설되어 있다. 하천 변에는 숲을 장양하여 범람에 대비했던 長林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 황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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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지도 黃州地圖,황주목은 황해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평안도와 접한 고을이다.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여서 1593년(선조 26)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도 송림시, 황주군 황주읍?인교면?구락면?도치면?주남면?천주면?흑교면?청수면?구성면?영풍면?청룡면?삼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송림시?황주군?연탄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지도는 1871년 ?해서읍지?에 수록된 것과 내용과 구도가 유사하여 이를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산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성곽이 있는 읍치를 크게 부각시켜 그리고 주변지역은 축소하여 이중적 축적을 적용시켰다. 산지를 끼고 축조된 성곽에는 瓮城을 비롯하여 ??射穴?砲穴 등의 방어에 적절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성벽 아래에는 흙으로 쌓은 山坂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성곽의 내부에는 兵馬節度使가 머무르던 兵營과 兵馬虞候가 머무르던 中營 등의 군영을 비롯하여 목사가 집무하던 衙舍가 그려져 있다. 外東軒인 齊安館과 중앙에는 종각도 보인다. 읍치인 齋安坊에 동서남북의 4部가 있고 성밖에도 외남부?외서부?외중부 등의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下三道 지역과는 다른 행정구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읍성 밖에는 纛室도 그려져 있는데, 이는 군대의 가장 큰 기를 관장하던 纛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주변의 각 坊에는 다른 고을 지도와는 달리 소속 마을 이름도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 선으로 나타냈는데, 서남쪽의 棘城古址에서 읍성의 남문 앞을 경유하여 북쪽 평안도 中和로 이어지는 길이 의주로 향하는 대로이다. 이 대로변에 있는 南川里에는 장시도 개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도 하단의 鐵島는 대동강과 재령강의 합수 지점에 위치한 河中島로서 지도에는 마치 바다의 섬처럼 그려져 있다. 이곳은 하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빨라지는 곳인데 지도에서도 急水門이라 표기되어 있다.

  • 황주철도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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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철도진지도 黃州鐵島鎭地圖,철도는 재령강과 대동강의 합수 지점에 위치한 河中島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황주군 철도리에 해당한다. 철도진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은 후, 대동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강 서쪽의 東津鎭과 짝으로 그 해 11월에 설치된 첨사진이다. 지도에도 강폭이 좁아wu 물살이 빨라지는 급수문이 표시되어 있고 남쪽에서 흘러오는 재령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급수문 앞쪽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뒤쪽의 後津으로 해서 황주로 통한다. 지도의 방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산지는 회화식으로 그려져 입체감이 잘 드러난다. 대동강과 재령강에는 마치 풍경화처럼 돛단배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철도진의 간략한 연혁이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철도진에 원래 목장이 있었으나, 水草가 적어 성종 15년에 안악의 楮島와 풍천의 椒島로 목장을 옮기자 토지가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다. 당시 이곳의 軍總에는 총1,134명의 군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도진이 애초 이양선의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나 후에는 이곳을 지나는 장삿배로부터 비싼 세금을 거두는 등 민폐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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