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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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東國輿地圖 동국여지도

  • 편저자 : [著者未詳]
  • 청구기호 : 想白古912.51-D717
  • 간행연도 : 憲宗15年(1849)
  • 책권수 : 1冊(22張), 地圖
  • 판본사항 : 木版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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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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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大關嶺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뉘는데, 지도 오른쪽에 嶺東에 9개의 고을이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원주는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원주는 감영을 오른쪽에 쓰면서 왼쪽에 지방관의 관직인 牧使의 ‘牧’과 한양으로부터 3일 걸린다는 ‘三’이 동시에 적혀 있다. 동해안에는 수려한 경치가 있는 곳에 세워진 유명한 정자와 호수가 많은데, 북쪽의 叢石亭으로부터 가장 남쪽의 月松亭까지 총 8개가 기록되어 있다. 수록된 지명의 내용은 본 지도가 제작되는 1800년 이후가 아니라 조선전기의 것이 수록되어 있다. 동해안에는 高城·三陟·蔚珍·月松의 4개 鎭堡가 표시되어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三陟浦鎭과 月松浦鎭만 남고 나머지 2개는 혁파되었다. 세로의 긴 둥근 사각형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며, 강원도에는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듯이 총 4개의 찰방역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 淮陽의 銀溪驛 찰방은 金城의 生昌驛으로, 홍천의 保安驛 찰방은 원주의 丹丘驛으로 옮겨간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는 조선전기의 정보를 바탕으로 지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기봉)

  • 강원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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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강원도도적입니다

  • 경기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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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계통의 소형 목판본 지도책 중의 경기도 지도다. 1795년(정조 19)에 衿川에서 바뀌는 始興이 개명 이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1822년(순조 22)에 혁파되어 개성에 합해지는 豊德이 수록되어 있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留는 외직이 아니라 중앙관직이나 수도인 한성부의 判尹과 같이 내직으로 취급받던 정2품의 留守가 파견되던 곳으로 경기도에는 개성-강화-광주-수원이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외직으로 牧은 정3품의 목사가, 府는 종3품의 도호부사가, 守는 종4품의 군수가, 令은 종5품의 현령이, 監은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된 고을이다. 喬桐에는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종3품의 도호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다른 고을과 달리 두 줄의 원으로 표시하여 구별해 주었다.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거리의 표시에서 半은 반나절, 一은 하루, 一半은 하루 반나절을 의미한다. 지도 왼쪽에는 右道 16관이라, 지도 오른쪽에는 左道 22관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지방관의 명칭이 왼쪽에 적혀 있는 고을이 우도이고, 오른쪽에 적혀 있는 고을이 좌도이지만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고을 다음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는 산은 여러 기록에서 중요하게 인식된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읍치 뒷산이나 鎭山인 경우도 있고 읍치에서 멀리 떨어지거나 진산이 아닌 경우도 있어 선택 기준이 애매하다. 수원의 光山이 光敎山의 오기인 것처럼 이름이 잘못되었거나 다른 한자로 기록된 것도 많다. 서해에 두 글자로 적힌 것은 군사기지인 鎭堡인데, 모든 진보가 기록된 것은 아니다. 기타 세로로 긴 곡선의 사각형으로 기록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察訪驛이다. 지도가 제작되던 시기에는 수원의 迎華驛에도 찰방이 파견되었지만 본 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기봉)

  • 경기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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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경기도도적입니다

  • 경상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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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계통의 소형 목판본 지도책 중의 경상도 지도다. 1600년대 경상도에서는 칠곡(1630)·자인(1637)·영양(1676)·순흥(1683)의 4개 군현이 차례대로 신설되거나 복설되는데 모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767년(영조 43) 山陰과 安陰에서 변경되는 山淸과 安義가 변경 이후의 이름으로 적혀 있어 전라도 지도와 달리 군현의 시대적 변화가 올바르게 반영되어 있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바닷가에 세로의 긴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북쪽의 丑山·漆浦·甘浦 등의 진보가 조선후기에는 모두 혁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어 군현과 달리 진보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左道 40관이, 왼쪽에는 右道 31관이 적혀 있다. 좌도와 우도의 구분은 수도인 한양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 지도의 동쪽이 좌도이고 서쪽이 우도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좌도에는 지방관의 관직을 오른쪽에, 우도에는 왼쪽에 표시하여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세로로 긴 둥근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거느리던 찰방역이다. 기타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대구와 병영 및 수영은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이기봉)

  • 경상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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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경상도도적입니다

  • 공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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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공면입니다

  • 도별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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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도별 통계입니다

  • 동국대총(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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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체를 그린 전도로서 전체적인 모양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 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수록된 산과 하천 및 바다의 종류가 다른 것이 있고, 백두산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에는 국가의 祀典에 기록된 제사처가 있는 산과 하천 및 바다가 선택되어 수록되었지만 민간으로 흘러나오면서 제작된 목판본 지도에는 당시에 중요하게 인식되던 지명으로 바꾸어졌다. 백두산은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별로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 지도는 조선후기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주도에는 동서가 7息이고 남북이 3息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1息은 30리를 의미한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조선 전체의 모습에 대한 간단한 주기가 붙어 있다. 조선(我國)은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향했으며(亥坐巳向), 남북으로 3,200리이고 동서로 1,230라고 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경성을 중심으로 정북의 함경도 穩城, 정남의 전라도 海南, 정동의 강원도 江陵, 정서의 황해도 豊川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행정단위를 京·유수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나누어 각각의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기봉)

  • 유구국(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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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沖繩縣) 지역인 琉球國의 지도다. 『태조실록』 태조 1년 12월 28일에 琉球國 中山王 察度가 신하를 자청하면서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조선 전기에는 상호 왕래가 빈번하였다. 1609년에 현재의 큐슈남부에 있던 시마즈씨(島津氏)의 침입을 받아 간접 지배하에 들어가며, 1879년 일본에 완전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으로 편제된다. 〈동람도〉 계통의 소형 목판본 지도에는 유구국 지도가 중국·일본과 함께 거의 대부분 수록되어 있어 조선후기 일반인들의 외국에 대한 인식 범위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 그려진 유구국의 모습은 조선전기 신숙주(1417-1475)가 1471년(성종 2)에 지은 『海東諸國記』의 〈琉球國之圖〉 를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다. 유구국은 본 지도와 달리 동북-서남 방향으로 섬들이 길게 이어진 오키나와 제도에 있었다. 國頭城이 있는 섬이 현재의 오키나와섬이고, 왼쪽 아래의 大島는 오키나와 섬과 거의 같은 크기로 동북쪽에 있는 섬이다. 따라서 본 지도의 왼쪽 위가 남쪽 방향이다.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 에는 본 지도보다 더 많은 섬과 거리 정보가 자세하게 담겨 있고, 좌우의 거리가 더 멀게 되어 있다. 소형 목판본의 지도책으로 옮겨 필사하는 과정에서 몇몇 부분이 바뀌고 간소화된 경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히 잘못 그려진 곳도 있는데, 오른쪽에 성곽 표시와 함께 商船所泊이라 적혀 있는 곳이다.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 에서 이 부분은 만입된 곳에 2개의 섬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본 지도의 같은 부분의 바깥쪽에 그려진 실선의 곡선이 그 흔적으로 판단된다. 소형 목판본 지도책에 수록된 유구국 지도의 거의 전부가 이와 같이 그려져 있어 초기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원본과 대조하여 교정하려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기봉)

  • 일본국(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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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지도로서 남쪽을 위로 그렸기 때문에 조선과 가장 가까운 對馬島가 오른쪽 아래에 그려져 있다. 가장 큰 섬이 혼슈(本州)이고, 오른쪽 西海道가 있는 섬이 큐슈(九州)다. 시코쿠(四國)는 土左州라고 쓰여 있는 섬으로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다. 都라고 적혀 있는 곳이 천황이 살고 있던 현재의 쿄토(京都)이고, 그 왼쪽의 江戶가 실질적 권력의 핵심인 토쿠카와 막부가 설치되었던 현재의 토쿄(東京)이다. 상징적인 최고의 권력과 실질적인 최고의 권력이 병존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都와 江戶에 모두 2개의 실선을 그어 한개의 실선으로만 그어진 다른 道와 구별해주고 있다. 또한 都에는 王姓이 源氏라고 적혀 있어 천황이 살고 있는 곳임을, 江戶에는 關伯所居라고 하여 천황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이양받아 행사하던 關伯이 살고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일본국 지도의 소형 목판본 계열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동일하다. 본 지도가 같은 계통의 다른 목판본 지도와 다른 점은 都에 六殿을 모두 쓰지 않고 有六殿이라고만 표현한 것이다. (이기봉)

  • 전라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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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계통의 소형 목판본 지도책 중의 전라도 지도다. 1600년(선조 3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황폐해진 長城과 珍原을 합해 장성 한 개의 고을로 만든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장성과 진원이 모두 나오고 있어 지도의 제작자가 조선전기의 자료를 그대로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도 좌우에는 우도 26관과 좌도 21관이 적혀 있지만 26관은 36관의 오류다. 진원이 장성에 합해지기 이전 전라도에는 57개가 있었는데, 26관을 36관의 오류로 보면 좌우도를 합해 57개가 된다.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전주와 병영 및 수영은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감영이 설치되어 있던 전주에는 감영을 왼쪽에 썼기 때문에 관직의 명칭과 거리를 모두 오른쪽에 기록하였다. 남해안과 서해안에는 군사기지인 진보가 세로의 긴 사각형 안에 적혀 있다. 완도와 흑산도 및 군산도는 진보와 모양이 달라 진보가 살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군산도에는 조선전기에는 군산진이, 조선후기에는 고군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군산진이 현재의 군산시로 옮겨가면서 군산도는 고군산도로 불리웠음에도 본 지도에는 조선전기의 명칭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세로의 긴 둥근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거느리던 찰방역이다. (이기봉)

  • 전라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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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전라도도적입니다

  • 중국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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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그린 지도로 南京과 13개의 省은 지도 제작 당시인 청나라가 아니라 이미 멸망한 명나라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그렸다. 각 省의 바깥 부분에는 북경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이 모두 명나라 때의 것은 아니며, 중국 고대의 지명이 다수 나타나고 있어 역사지리부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로의 긴 사각형으로 표현된 아홉 개의 州는 夏나라 禹王이 나눈 행정구역으로 조선에서 모범적인 시대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작은 원으로 표현한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했던 나라들이며,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수나라와 당나라 등에서 오랫동안 수도의 역할을 했던 長安과 洛陽이 세로의 둥근 사각형 안에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의 수도였던 開封이 河南省 오른쪽에 적혀 있지만 기호 표시는 되어 있지 않다. 그밖의 지명 대부분도 지도가 제작된 시기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것들이다. 하천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큰 楊子江이 검은색 선으로, 황하는 이름에 걸맞게 누런 색으로 덧칠해진 두 줄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다. 양자강은 현재 長江이라 불리고 있으며, 洞庭湖를 비롯하여 많은 호수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황하는 天地의 중심으로 여겨진 崑崙(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표시되었으며, 만리장성을 뚫고 泰山의 남쪽을 거쳐 황해로 빠져나간다. 현재의 황하는 태산이 있는 산동반도 북쪽을 지나 흐르는데, 본 지도에는 古河道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하의 하류는 고도의 차이가 거의 없는 평지이기 때문에 상류에서 실려온 엄청난 흙이 쌓이면서 물줄기가 자주 바뀌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이기 때문에 朝鮮·日本·琉球·蒙古·西域 등의 주변 지역은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이기봉)

  • 천하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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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세계지도로서 보통 ‘圓形天下圖’라 불리며, 서구식 세계지도에 자극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天圓地方의 천지관에 입각하여 그려졌으며, 원은 둥근 지구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표현한 것이다. 내대륙-내해-외대륙-외해의 구조는 《산해경》의 각 편명으로 이루어진 중심-주변의 동심원적 구조를 형상화시켰고, 각편에 수록된 지명을 정해진 방위에 따라 지도 위의 대응되는 지역에 배치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내대륙에는 中國·朝鮮國과 安南國 및 西域諸國 등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들이 표시되어 있고, 내해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는 日本國·琉球國 등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상상 속의 지명들로 채워져 있는데, 대부분 《산해경》에 나오는 것이다. 《산해경》 이외의 지명은 중국의 고전 史書와 도교 관련 서적에서 따왔으며, 신선사상과 관련된 것이 많다. 지도 왼쪽에 內五岳으로 기록된 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내대륙에 모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기록된 外五岳 중 천지의 중심인 崑崙山이 내대륙의 하천이 발원하는 곳에 표시되어 있고, 나머지 4개는 실제하지 않는 신선적 지명으로 내해의 동서남북에 있는 섬 속에 위치시켰다. 외오악 이외에도 不死藥이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발해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인식된 방장산·봉래산·영주산의 三神山이 내해의 동쪽에 배치되어 있다. 圓嶠山과 扶桑山도 신선적 지명으로 日月과 관련된 지명이기 때문에 해가 뜨는 곳인 동쪽에 위치시켰다. 기타 해가 뜨고 지는 동쪽과 서쪽에 神木을 그려넣어 인간의 세계가 아닌 신선의 세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기봉)

  • 충청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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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계통의 소형 목판본 지도책 중의 충청도 지도다. 1800년(정조 24)에 尼城에서 바뀌는 魯城이 개명 이후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공주와 병영인 청주 및 보령에 설치된 수영은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감영과 병영이 공주와 청주의 읍치에 있었던 반면에 수영은 보령의 읍치가 아닌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있어 따로 표시되었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주와 청주에는 감영과 병영을 한쪽에 적었기 때문에 관직 명칭과 시간이 모두 다른 한쪽에 합해져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右道 28관이, 오른쪽에는 左道 26관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관직의 명칭을 왼쪽에 적은 것이 右道, 오른쪽에 적은 것이 좌도이지만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다. 서해의 바닷가에는 군사기지인 鎭堡 6개가 세로의 긴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唐津과 波知에 설치되었던 진보는 조선후기에 이미 혁파되어 있었고, 馬梁(鎭)은 藍浦에서 庇仁으로 옮겼다. 따라서 본 지도의 제작자는 진보의 정보에서만큼은 조선전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수록했음을 알 수 있다. 세로로 긴 둥근 사각형에 기록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다. 현재의 금강에는 상류부터 荊江, 錦江, 白馬江이란 명칭 3개가 적혀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관리를 위해 본류와 지류 등에 각각 1개의 명칭만 사용하게 하기 이전에는 하천 구간만다 지역에서 부르는 하천의 명칭이 달랐다. 형강은 문의 지역에서, 금강은 공주 지역에서, 백마강은 부여 지역에서 부르던 금강의 명칭으로 이외에도 지역마다 상당히 많았다. 일제시대 이후 본류 전체를 공주의 금강을 따서 부르게 되면서 대부분의 이름이 사라졌다. (이기봉)

  • 충청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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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충청도도적입니다

  • 평안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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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6년(영조 52)에 理山이 楚山으로 변경되는데, 본 지도는 개명 이후의 지명이 적혀 있다.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평양과 병영이 설치된 안주는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三登의 왼쪽에 ‘七半’이라 적혀 있는 것은 7일 반나절 걸린다는 의미며, 오른쪽의 令은 종5품인 縣令이 파견되어 다스렸다는 의미다. 지도의 좌우에는 西道 20관과 東道 22관이 기록되어 있는데, 동도의 고을에는 지방관의 관직이 왼쪽에, 서도의 고을에는 오른쪽에 적혀 있다. 평양과 안주는 왼쪽에 감영과 병영을 기록하면서 지방관의 관직과 한양으로부터의 시간 거리를 모두 오른쪽에 써넣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세로의 긴 사각형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은 세로의 둥근 사각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해 주었다. 평안도에는 찰방역이 본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大同驛과 魚川驛 2개가 있었지만 진보는 본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훨씬 많으니 이용에 조심해야 한다. 현재의 대동강 본류에 상류로부터 順川江·眞江·大同江이란 3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관리를 위해 본류와 지류 등에 각각 1개의 명칭만 사용하게 하기 이전에는 하천 구간만다 지역에서 부르는 하천의 명칭이 많았다. 대동강은 원래 평양성의 남문인 대동문 근처에서 부르던 명칭이었지만 후대에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기봉)

  • 평안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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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평안도도적입니다

  •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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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표지입니다

  • 함경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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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4년(숙종 10) 백두산 동쪽에 무산이 신설되면서 함경도는 23관이 된다. 본 지도의 오른쪽에는 북도에 9관이, 왼쪽에는 남도에 13관이 기록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22관이다. 따라서 본 지도의 제작자는 무산이 신설되었다는 사실은 반영하면서 그 결과 22관이 23관으로 증가했다는 내용은 반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茂山 동남쪽에 茂山이란 지명이 또 기록되어 있는데, 鎭堡를 의미하는 세로의 긴 사각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래 茂山은 茂山鎭이었으며, 북쪽으로 이동하여 무산도호부가 되면서 과거의 무산진이 폐무산진이란 명칭으로 바뀌지만 이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밖에도 많은 진보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지만 내륙의 상당수가 조선후기에 들어 혁파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함흥 동쪽의 利原은 1800년(정조 24) 利城에서 바뀐 명칭이므로, 본 지도가 빨라도 1800년 이후에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다. 그러나 1787년(정조 11)에 신설되는 長津都護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지명의 시기적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일반군현은 한 줄의 원으로, 감영인 咸興 및 병영이 설치되어 있던 北靑과 鏡城은 두 줄의 원으로 표현하여 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하였다. 북쪽에 두 줄의 원으로 표시된 行營은 겨울이 되어 두만강이 얼었을 때 적의 침입이 쉬워지기 때문에 겨울 6개월 동안 경성의 북병영이 주둔하며 방어하던 곳이다. 고을 이름의 한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관직 명칭 중 한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양으로부터 걸리는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茂山의 오른쪽에 쓰여진 ‘卄二’는 22일을 의미하며, 왼쪽에는 도호부였기 때문에 ‘府’가 쓰여져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이기봉)

  • 함경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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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함경도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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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함경도도적입니다

  • 황해도(31.0×2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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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1년(효종 2)에 江陰과 牛峯을 합해 金川이 만들어지는데, 古江陰과 古牛峯이 표시되어 있다. 1719년(숙종 45) 왼쪽의 所江(鎭)에 水營을 설치하면서 그것이 있던 瓮津을 縣에서 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옹진에 水營이란 문자를 써넣어 이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만 지방관의 관직이 ‘監’으로 되어 있어 縣監에서 都護府使로 승격된 사실을 반영하지 않았다. 또한 所江을 鎭堡를 의미하는 세로의 긴 사각형 안에 기록하여 수영이 설치되었던 사실을 반영하지 않았다. 지도 왼쪽의 右道 15관과 오른쪽의 左道 19관을 합하면 34관이 된다. 그러나 강음과 우봉이 나누어져 있었을 때의 황해도에는 24관이 있었기 때문에 19관은 9관의 오류다. 또한 강음과 우봉이 합해져 금천이 되면서 23관으로 바뀌기 때문에 24관도 오류에 해당된다. 세로의 둥근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인데, 여기에서도 몇몇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후기 金郊驛이 혁파되고 平山의 북쪽에 있는 宝山驛으로 찰방역이 옮겨갔지만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한 麒麟驛은 평산과 재령 사이에, 靑丹驛은 해주와 연안 사이에 있어야 사실에 가깝다. 세로의 긴 사각형으로 표현된 것은 군사기지인 鎭堡다. 乫浦(鎭)는 조선후기에 이미 혁파되었음에도 수록되어 있고, 반면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鳳山과 瑞興 부근에 많은 진보가 신설되지만 이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어 본 지도의 제작자가 지명의 변화를 꼼꼼하게 검토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기봉)

  • 황해도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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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황해도도적입니다

  •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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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地圖 뒷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