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東國輿圖 동국여도

  • 편저자 : [編者未詳]
  • 청구기호 : 古大4790-50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1帖(16折),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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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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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圖 앞표지입니다

  • 강화부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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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이름은 江華府圖이지만 강화부만이 아니라 수영이 설치되어 있는 喬桐과 永宗鎭 등 海防과 관련된 주변 지역을 자세히 그렸다. 강화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그 중요성이 더욱 강화되어 외직이 아닌 내직인 정2품의 留守가 파견되는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1629년(인조 7)에 月串鎭을, 1656년(효종 7)에 龍津鎭·寅火石鎭·昇天浦鎭·廣城堡를, 1676년(숙종 2)에 長串鎭을, 1706년(숙종 32)에 船頭浦堡를 신설하고, 1656년(효종 7)에 인천에 있던 濟物鎭과 안산에 있던 草芝鎭을 강화도로 옮겨와서 방어를 강화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남양에 있던 영종진을 현재의 영종도로 옮겨 강화의 수비를 돕게 했으며, 1694년(숙종 20)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군사가 염하를 건넜던 곳에 文殊山城을 쌓았다. 또한 1743년(영조 19)에 강화부성의 外城을 쌓았고, 교동에도 경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강화도와 그 주변은 해로를 통해 한양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고, 육로로 침입한 적이 한양을 함락시킬 위험이 있을 때 임시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했다. 지도에는 강화의 중성과 외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해안가와 여러 섬에는 진보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바다에는 해로의 통로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鹽河에는 밀물과 썰물 때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은 孫乭項(손돌목)이 표시되어 있다. 강화도의 鼎足山城에는 전국의 5곳에 설치되었던 史庫가 있으며, 본 지도에도 성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기타 왼쪽 위의 ‘兩西海路’는 해서(황해도)와 관서(평안도)로 통하는 해로란 뜻이고, ‘潮退爲草’와 ‘潮退成陸’은 밀물이면 해초밭이나 갯벌이 된다는 뜻이다. (이기봉)

  • 경강부임진도(47.0×12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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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江은 도성인 京城 부근의 한강을 일컫는 말이고, 臨津은 임진나루 부근의 임진강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지도의 이름인 京江附臨津圖는 한양 부근의 한강과 임진나루 부근의 임진강 지역을 하나로 붙여서 그린 지도라는 뜻이다. 본 지도첩의 지도들 대부분이 군사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군사지도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지도 역시 수도 한양의 주변 방어체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지도라고 판단된다. 대규모 외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력이 부족한 도성을 포기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된 곳이 본 지도에 모두 표시된 남한산성·북한산성·강화도이다. 또한 북으로부터 침입한 적이 도성으로 남하하는 마지막 관문이 임진강의 임진나루다. 이곳에는 1765년(영조 41) 別將의 臨津堡와 長山堡가 설치되었으며, 임진보에는 본 지도에서처럼 강을 따라 關門城이, 장산보에는 墩臺가 축조되었다. 坡州가 노란색 큰 원의 일반군현과 달리 주황색의 큰 원으로 그려진 것은 임진보와 장산보가 설치된 1765년(영조 41)에 장단에 있던 防營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성을 중심으로 한 수도 방위체제는 남한산성·북한산성·강화도와 임진나루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구축되었으며, 본 지도는 그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것이다. 수도의 방위와 관련되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대규모 적이 이동할 수 있는 육로와 수로이다. 본 지도에 京城을 중심으로 육로와 수로, 그리고 그것을 연결시키는 고개와 나루 등이 자세하게 그려진 것도 그것이 수도의 방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군사지도적 성격이 강하지만 도로 체계와 나루 및 한강변의 각종 포구와 창고를 자세하게 그렸기 때문에 당시 京城을 배후지로 하여 발달한 한강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기봉)

  • 관동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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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東은 鐵嶺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강원도의 별칭이다. 일반군현은 노란색의 큰 원으로, 감영이 있던 원주는 붉은색의 큰 원으로 표시하여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작은 원으로 표현했는데, 조선후기 강원도에는 2개의 진보가 있었다. 삼척에 營將이라 표시된 곳에 三陟浦鎭이, 평해에 越松이라 적혀진 곳에는 越松浦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보가 아니면서 작은 원으로 표현된 곳은 驛이며, 양양과 강릉 사이에는 祥雲驛이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채 작은 원만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작은 원이 표시되지 않은 역도 많다. 도로 사이에 2자로 쓰여졌으며 어떤 정보인지 구별하기 힘든 것은 거의 다 역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곳에 2자로 쓰였으면서 어떤 정보인지 알기 어려운 지명도 대부분 역이다. 역과 도로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본 지도는 완성품이라기 보다는 미완성품이며, 지도의 제작자가 정보를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왼쪽(북)에는 협곡이나 고개를 막아 세운 關門城이 防墻峙와 鐵嶺 두곳에 보이고 있다. 이런 지형은 적은 군사로도 대규모의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었다. 그밖에 金剛山이 겹쳐진 흰색으로 특별히 강조되어 있고, 동해안에는 侍中臺·叢石·三日浦·鏡浦 등 경승지가 그려져 있다. (이기봉)

  • 관서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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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西는 鐵嶺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평안도의 별칭이다. 군사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군사지도로 위치와 거리의 정확성보다는 군사적 요충지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일반군현은 노란색 큰 원으로, 감영인 평양과 병영인 안주는 붉은색 큰 원으로 구별해 주었다. 三和·昌城·江界가 일반군현이나 감영·병영과 달리 주황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모두 防營이 설치되어 인근의 군현과 진보의 군사기능을 관할하던 곳이다. 이를 통해서도 본 지도가 평안도의 군사적 재편 상황을 잘 반영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규모 외적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체제로 채택되어 수축되거나 신축된 대형산성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대형산성은 의주 방면에서 침입한 적이 남하하는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주변의 여러 고을이 한꺼번에 들어가 적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작은 원으로 표시했는데, 해안가에 있는 것은 대부분 수군기지이며 내륙에 있는 것은 모두 육군기지다. 압록강변에 빼곡하게 진보가 설치되어 있어 북쪽에서 침입한 외적의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진보가 많이 설치된 지역은 현재 강남산맥이라 불리는 청북정맥 주변이다. 청북정맥에는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통로가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협곡을 막아 세운 關門城과 중요한 고개, 그리고 통과 지점의 거리 등이 아주 자세하다. 청북정백의 남북의 중요 요충지에는 진보가 설치되어 있어 압록강을 건넌 적에 대한 제2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계 방면에는 남쪽에서 흘러와 압록강에 합류되는 禿魯江을 따라 진보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압록강을 따라 남하하는 적의 중요 통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진보가 아니면서 동일하게 작은 원으로 표시된 유일한 것은 寧邊 동쪽의 魚川驛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다. 평안도에는 어천역 이외의 찰방역으로 평양의 大同驛이 하나 더 있지만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기봉)

  • 기전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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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京畿와 畿甸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기전도는 경기도를 의미한다. 1794년(정조 18)에서 1796년(정조 20)에 걸쳐 현재의 수원시내에 축조된 華城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95년(정조 19)에 始興으로 개명되는 衿川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衿川을 黔川으로, 陽川을 楊川으로 잘못 기록한 오류도 보이고 있다. 고을 이름 오른쪽에 수도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적혀 있지만 지도 위에는 거리의 원근이 별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金浦는 한양으로부터 60리 거리에 있는데, 120리 거리의 陽智와 거의 같은 거리에 그려놓았다. 따라서 거리와 위치의 정확성보다는 산성을 비롯한 성곽과 진보 등 군사적 방어 시설, 수로를 포함한 도로와 주요 고개 등을 자세하게 그린 지도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대형산성 방어체제를 채택하면서 신축되거나 수축된 大興山城·北漢山城·南漢山城·文殊山城과 같은 대형산성을 강조했다. 또한 고대에 축조되어 고려전기까지 사용하다가 폐성되었던 중형의 반월산성(포천)·독성산성(수원)·죽주산성(죽산)·파사성(여주)도 잘 표현되어 있다. 독자적인 관할 구역을 가진 獨鎭이었던 永宗鎭이 주황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특별히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원으로 표시한 다른 진보는 이름이 표시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역시 獨鎭이었던 덕적도의 德積鎭이 표시되지 않은 단점이 있다. 임진강 하류에는 이곳이 가장 중요한 나루여서 鎭을 설치했던 臨津이 성곽과 3개의 墩臺와 함께 자세히 그려졌다. 통진과 강화 사이의 鹽河에 표시된 해로에는 물살이 강해 늘 위험했던 孫乭項(손돌목)이 표시되어 있고, 통진에서 강화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인 甲串津이 표시되었다. 각 지역으로 연결된 도로에도 중요 고개나 나루 및 마을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지역간 연결 관계를 중요한 정보로 취급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기봉)

  • 남북관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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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는 철령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다고 하여 關北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지역이 넓어 병영을 北靑의 남병영과 鏡城의 북병영 2개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가장 북쪽의 行營은 겨울철에 두만강이 얼어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 쉬워질 때 경성의 북병영이 주둔하면서 방어하던 곳이다. 본 지도에는 군사적 행정체계를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에 붉은색 큰 원의 감영·병영뿐만 아니라 防營이 설치되어 있던 吉州도 주황색의 큰 원으로 표시하여 노란색 큰 원의 일반군현과 구별해 주었다. 작은 원으로 표시된 진보는 일차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변에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어 두 강이 최전방의 방어선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두만강을 넘어 남하한 적을 막기 위해 회령-부령-경성-명천-길주의 주요 도로를 따라 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압록강 방면에서는 현재의 장진강을 따라, 그리고 현재의 부전령산맥인 백두대간의 남쪽에 집중되어 있다. 1822년(순조 22) 삼수 서쪽의 압록강변에 厚州가 새로 설치되기 이전까지 장진강은 최전방의 역할을 하였으며, 후주의 설치 이후 장진강변의 진보는 대부분 혁파되면서 압록강변으로 전진 배치된다. 1787년(정조 11) 長津鎭이 長津都護府로 승격되어 독자적인 관할 영역을 갖게 되었다. 이때 장진도호부는 원래의 위치에서 別害堡로 옮겨 설치되는데, 본 지도에는 별해보가 계속 나타나고 있어 앞의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1800년(정조 24)에 利城이 利原으로 바뀌는데, 본 지도에는 개명 이후의 이름이 적혀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백두산과 大池(현재의천지)가 강조되어 있고, 1712년(숙종 38)에 청과 조선 사이의 국경 확정 내용을 새겨넣은 정계비가 그 아래쪽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에 동쪽의 국경선으로 적혀 있는 土門江이 백두산 오른쪽 위에 적혀 있기도 하다. (이기봉)

  • 남한산성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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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과 주변 지역을 간략하게 그린 지도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일어나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과의 충돌이 현실화되자 1623년(인조 1)에 광주목을 정2품의 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이어 1626년(인조 4)에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성 안으로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에 있던 읍치를 옮겨 후금에 대한 항쟁의 의지를 높혔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0여일간 항쟁하다 항복하였다. 본 지도에는 남한산성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는데, 주변의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산성 안의 本府는 광주유수부의 관아 건물이 위치한 곳이며, 行宮은 유사시 왕이 피난하거나 陵幸할 때 머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산성의 동문 쪽은 지대가 낮아 甕城으로 방어력을 높혔으며, 아래쪽에는 성밖의 높은 지대에 설치한 포대인 墩(臺)가 표시되어 있다. 왼쪽으로 한강과 도성인 京城이 그려져 있고, 경성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도로와 나루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 松坡津과 남한산성 사이의 三田野 부근이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했던 三田渡다. 비문은 1639년(인조 17)에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졌다가 한강변의 범람으로 송파동으로 옮겨진 淸太宗功德碑로서 현재도 남아 있다. 이 비의 뒷면에는 몽고문자와 만주문자로, 앞면에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기봉)

  • 도성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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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부 관할 영역과 거의 일치하게 그린 지도로서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성곽 안쪽을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성곽 내부의 도로구조가 가장 선명하고, 성문에서 주변으로 이어진 도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곽 내부에는 昌德宮·昌慶宮·慶喜宮이 그려져 있고, 景福宮은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복원되지 못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밖에 社稷(壇)과 太廟(종묘) 및 太學(성균관)이 보이고, 사도세자의 사당으로 아들 정조에 의해 격상된 景慕宮이 창경궁 동쪽에 표시되어 있다. 경희궁 남쪽에 있는 현재의 덕수궁은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인조반정 이후 궁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성곽 안쪽에 기와 지붕 모양의 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서대문인 돈의문과 남대문인 숭례문 밖으로 기와와 초가로 이루어진 집들이 확장되어 있다. 인구 밀집지역이 성곽 서남쪽으로 확장된 이유는 청나라 방향의 서북쪽 지역과 삼남지방의 물산이 집중되는 서남쪽의 한강가와 연결된 주요 통로였기 때문이다. 돈의문 밖에는 사대주의의 가장 분명한 표상인 迎恩門이 보이는데, 1897년 독립협회에 의해 헐리고 독립문이 세워졌다. 그 왼쪽의 舘은 청나라의 사신이 머물던 慕華館이고, 아래쪽에 경기도 감사가 집무를 보던 畿營이 보인다. 성곽과 한강가에서 가장 많이 표시된 곳은 東廟·祭壇·南廟·南壇 등의 제사 공간이다. 남묘와 동묘는 임진왜란 때 관우의 영령이 왜병을 격퇴시켰다고 하여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로 각각 1599년(선조 32)과 1602년(선조 35)에 세워진 것으로 남관왕묘와 동관왕묘로도 불렸다. 南壇은 태조 때 環丘壇이란 명칭으로 만들어졌다가 세조 때 본 지도의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조선초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天祭)를 올리기도 했지만 제후국이라 하여 이후에는 風雲雷雨와 산천신 및 성황신에게 주로 제사하였다. 대한제국 때는 현재의 서울시청 앞 조선호텔 자리에 圓丘壇을 새로 짓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典牲暑는 조선시대 궁중의 祭享·賓禮·賜與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서이다. 한강가에는 龍山·麻浦(삼개)·東幕·漢江鎭·豆毛浦(두모개) 등 유명한 포구와 나루가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 관리에게 지급할 녹봉을 모아 관장하던 廣興倉 등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곡과 공물 등을 관리하던 창고가 한강가에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기봉)

  • 도성연융북한합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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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지도의 앞쪽에 도성도·연융대도·북한성도가 차례로 그려져 있는데, 세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합쳐서 그린 지도다. 앞의 3개 지도에는 내부 구조가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는 전체적인 흐름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도 가장 중요한 것만 그렸으며, 한강변에도 유명한 나루와 포구만 표시하였다. 도성도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적혀 있던 창고도 단지 ‘倉’이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1711년(숙종 37)에 북한산성이, 1719년(숙종 45)에 탕춘대성(후에 연융대성 또는 서성)이 축조되면서 조선후기 도성의 방어체제가 완성된다. (이기봉)

  • 북한성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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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형산성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대형산성이 대대적으로 축조되었으며, 특히 숙종과 영조 때 가장 많은 산성이 수축되거나 신축되었다. 양란을 거치며 한양의 도성이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결론이 분명해져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요새화하여 유사시 장기적인 항전의 중심지로 삼는다. 본 지도에 그려진 북한산성 역시 고대 이후 폐성되었다가 1659년(효종 10)에 수축되었고, 1711년(숙종 37)에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행하여 총 7,620보의 대형산성으로 탄생하였다.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白雲臺와 같이 축성할 필요가 없는 곳은 그대로 놔두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를 잇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총 13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東將臺·西將臺·南將臺가 있었다. 산성 가운데의 行宮은 유사시 임금이 머물며 장기 항전을 지휘하기 위한 곳으로 총 130칸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管城所는 북한산성을 담당하던 총융청의 관리가 집무를 보던 곳이다. 訓倉·禁倉·御倉은 각각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란 도성 수비 부대의 군량과 무기를 보관하던 곳이다. 또한 성곽 안에 10개의 사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일상적으로 성곽을 수리하며 관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기타 남쪽에는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가 碑峰에 그려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탕춘대성의 일부가 보인다. (이기봉)

  • 삼남해방도(47.0×12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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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南이란 조선의 남쪽에 있던 충청·전라·경상도를 의미하며, 三南海防圖라는 명칭에 걸맞게 본 지도는 삼남지방의 해안과 바다의 방어체제를 그렸다. 경상도의 울산에서 충청도의 당진까지의 해안을 실제와 다르게 직선에 가깝게 그렸다. 군사정보를 중심으로 그려진 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위치의 정확성보다는 군사기지의 연결관계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이다. 해안가에 접해 있는 군현과 군사기지 및 수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일반군현은 노란색의 큰 원으로 수영·통영·병영은 붉은색의 큰 원으로 표현하여 구별하였다. 濟州도 붉은색 큰 원으로 표현했는데, 독자적인 水軍防禦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는 작은 원의 기호를 사용했으며, 거의 빠짐없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해안에는 機船·晋船 등 ‘○船’이란 형식의 지명이 많이 표시되어 있는데, 앞쪽의 한자는 전선이 배치되어 있던 고을 이름의 첫 번째 글자다. 예를 들어 機船은 機張의 전선이, 晋船은 晋州의 전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많은 섬 사이를 지나는 수로가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으며, 중간 중간에 각 지점 사이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어 전선이나 세곡선의 항해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俟風止泊處’라는 문구도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바람이 심할 때 ‘바람이 그칠 때를 기다리며 정박하는 곳’이란 뜻이다. 충청도의 安興鎭 부근에는 ‘세곡선이 머물며 정박한다’는 뜻의 ‘稅船留泊’이 세 군데나 적혀 있다. 안흥진 앞바다를 비롯하여 밀물과 썰물에 의한 바닷물의 흐름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세곡선이 자주 난파되던 상황과 관련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안면도 동쪽 바다에서도 난파가 자주 발생하여 원래 串(현재의 半島)이었던 곳을 조선중기 어느 시기엔가 뚫어 섬으로 만들었지만 본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한 충청도 수영 아래쪽에 기록된 興良串은 말 그대로 섬이 아니라 串임에도 섬으로 표시한 오류도 보이고 있다. (이기봉)

  • 연융대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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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아래쪽에 표시된 한양 성곽의 북문인 彰義門과 주산인 白岳의 북쪽 그리고 가장 위쪽에 大南門이 표시된 북한산성 남쪽 지역을 그렸다. 이곳엔 1719년(숙종 45)에 북한산성과 한양의 성곽을 잇는 蕩春臺城을 쌓았다. 본 지도에 香爐峰에서 漢北門까지 연결된 성곽이며, 중간 쯤에 鍊戎西城이란 명칭이 적혀 있다. 1747년(영조 23)에 삼청동에 있던 摠戎廳을 옮겨오면서 그 부근의 탕춘대를 鍊戎臺라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성곽 동쪽에 총유청이 표시되어 있고, 그 위쪽에는 왕실이나 국가기관에서 사용할 종이를 제작하고 종이기술자(紙匠)들을 관리하던 造紙署가 보인다. 조지서는 1415년(태종 15)에 설치되어 1882년(고종 19)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하였다. 조지서는 조선초기부터 이곳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창의문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造紙署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북문 위쪽에는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하여 붙여진 洗劒亭이 있는데, 인조반정을 주도한 군대가 본 지도에 표시된 창의문을 통해 성곽 안쪽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그 위쪽에는 현재의 종로구 평창동의 이름이 유래된 총융청의 군량창고인 平倉이 표시되어 있다. 北壇은 厲壇으로 성황신과 여러 잡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기봉)

  • 영남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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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은 경상도의 별칭이다. 본 지도첩의 다른 도별 지도처럼 군사정보와 도로 및 수로가 가장 자세하게 그려진 군사지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수축되거나 신축된 加山山城(칠곡)·金烏山城(선산)·禿用山城(성주)·花山山城(신령)·金井山城(동래)·金城山城(삼가) 등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鳥岺(새재)에는 험준한 계곡을 횡단하여 쌓은 關門城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전락적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남쪽의 낭떨어지길에 축조된 姑夫(城)도 표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풍기의 竹岺이나 낙동강변의 낭떨어지길인 밀양의 鵲院阨路처럼 적은 숫자로도 많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요충지의 정보가 자세한 편이다. 경상도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군기지인 진보가 해안가와 섬에 빼곡히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은 원의 기호를 사용하여 한두개를 제외하면 빠짐없이 표시하였다. 내륙에 작은 원의 기호를 사용한 지명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다. 이렇게 군사정보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그렸지만 다른 지명에서는 오류도 보이고 있다. 山淸이 山靑으로, 인동 남쪽에는 古若木縣이 마치 하천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도록 若水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또한 하양 동쪽에 표시된 長水驛은 新寧 읍치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잘못 표시한 것이다. 낙동강의 최상류에는 강원도의 삼척에 속해 있던 黃池가 경상도의 땅에 있는 것처럼 강조되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기봉)

  • 팔도관해방총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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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道關海防摠圖는 육지와 바다의 방어를 의미하는 關防과 海防에 관한 팔도의 전체 지도란 의미로 본 지도첩이 군사지도를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주의 서쪽에는 만리장성의 끝인 山海關이 성곽 모양과 함께 표시되어 있으며, 그 동쪽에는 木柵의 표시와 함께 청나라의 첫 번째 수도였던 瀋陽과 鳳凰城·柵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은 책문까지는 조선군의 호위를 받고 그 이후부터 청나라 군사의 호위로 바뀐다. 지도 왼쪽에는 청나라 본토의 동쪽 해안이 간fir하게 그려져 있고, 해안가의 중요 도시와 황하 및 長江(양자강)의 하구가 표시되어 있다. 황하의 하구는 위쪽에는 古黃河口로, 아래쪽에는 今黃河與淮水合口로 적혀 있다. 황하의 하구 부근은 상류에서 내려온 많은 토사가 쌓이면서 유로가 많이 변화하는데, 본 지도는 산동반도 남쪽으로 하구가 형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선에는 수도인 한양과 각 도의 감영·수영·병영을 붉은색 큰 원으로 표시하여 강조하였고, 일반 군현은 작은 원으로 표현하였다. 統營은 경상도의 右水營이면서 충청·전라·경상도의 모든 수군을 총지휘하던 통제영이다. 황해도의 行營은 수군절도사를 겸하던 옹진도호부사가, 함경도의 行營은 鏡城에 주둔하던 北兵使가 주기적으로 옮겨가서 방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일반 군현이 빼곡히 표시되어 있지만 빠지거나 잘못 표기된 곳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경상도에는 동해안에 있던 寧海·盈德이 없으며, 興海와 丹城이 각각 興德과 丹陽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고, 梁山과 延日의 위치가 다른 곳에 표시되었다. 경기도에도 南陽과 竹山 등이 빠져 있고 위치가 잘못된 곳도 많은 등 도별로 틀린 부분이 여러 곳에 있다. 1800년(정조 24)에 개명되는 함경도의 利原과 충청도의 魯城이 표시되어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95년(정조 19)에 始興으로 개명되는 衿川이 개명 이전의 지명으로 적혀 있는 등의 오류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본 지도의 제작자가 자료를 꼼꼼하게 대조하면서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기봉)

  • 해서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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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西는 황해도의 별칭으로 황해도를 그린 지도다. 일반 군현은 노란색의 큰 원으로, 감영·수영·병영이 있는 고을은 붉은색의 큰 원으로 구별해 주었다. 전반적으로 군사와 도로 정보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형산성을 수축하거나 신축하여 대규모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본 지도에도 九月山城(은율)·首陽山城(해주)·長壽山城(재령)·正方山城(황주)·大峴山城(서흥)·太白山城(평산)·大興山城(개성) 등이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강조된 것이 작은 원으로 표시된 군사기지인 鎭堡다. 서해안의 진보는 거의 조선전기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황주 남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현재의 언진산맥 부근의 진보는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설치된 것이다. 서쪽에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는 부근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갯벌이나 습지이기 때문에 대규모 외적이 통과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대규모 외적은 현재의 언진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곳의 중요 통로마다 많은 진보를 설치하여 중요한 방어선으로 삼았다. 본 지도에도 언진산맥을 넘는 남북의 통로와 고개 이름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이곳의 방어적 중요성을 잘 표현하였다. 가장 서쪽의 棘城은 언진산맥 부근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평지에 세워진 것으로 가시가 많은 나무를 심어 방어력을 높혔다고 한다. 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옹진 왼쪽에 있는 所江을 감영·수영·병영과 동일한 붉은색 큰 원으로 표시하였다. 1719년(숙종 45)에 왼쪽의 所江(鎭)을 승격시켜 水營으로 삼아 옹진도호부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게 했기 때문이다. 옹진도호부사는 옹진 읍치와 소강에 번갈아 가면서 수군을 지휘했으며, 소강처럼 주기적으로 수사나 병사가 머물며 방어하던 곳을 行營이라 한다. 진보와 동일하게 작은 원으로 표시한 것 중 麒麟과 金郊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다. (이기봉)

  • 호남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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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은 전라도의 별칭이다. 본 지도첩의 다른 도별 지도처럼 군사정보와 도로 및 수로가 가장 자세하게 그려진 군사지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수축되거나 신축된 威鳳山城(전주)·笠巖山城(장성)·金城山城(담양)·赤裳山城(무주)의 대형산성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대형산성처럼 강조된 남원의 蛟龍山城과 同福의 甕城은 고대부터 존재하다가 고려후기 이후 폐성되었던 중형 산성으로 양란 이후 수축되어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인식되던 곳이다. 도로 중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질 수 있는 고개, 구례에 ‘石柱北’으로 표시된 곳과 같은 낭떨어지길도 자세하게 표시해 주었다. 해안가에 작은 원으로 표시된 곳은 수군이 주둔하던 鎭堡로서 古群山(鎭)을 제외하면 생략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표시하였다. 반면에 진보가 없는 섬은 위치가 잘못되거나 생략된 곳도 많다. 黑山島와 紅衣(현재의 홍도)는 실제보다 육지에 훨씬 가깝게 그렸으며, 그 아래쪽의 可佳(현재의 소흑산도)는 본 지도보다 훨씬 남쪽에 그려져야 한다. 제주도 역시 실제 위치보다 훨씬 육지에 가깝게 그려 정확성보다는 군사정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 목적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감영과 병영 및 수영은 붉은색 큰 원으로 그려 노란색 큰 원의 일반군현과 구별해 주었다. 제주도 일반군현과 달리 주황색의 큰 원으로 표현했는데, 독자적인 水軍防禦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에 표시된 작은 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다. (이기봉)

  • 호서도(47.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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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湖西는 충청도의 별칭이다. 1800년(정조 24)에 尼城에서 명칭이 바뀌는 魯城이 적혀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道에 수록된 내용을 통해 볼 때 군사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충청도에는 군사 정보 자체가 별로 없어 특별히 부각되는 느낌은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강화된 대형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를 위해 수축된 上堂山城(청주)·公山城(공주)과 1655년(효종 6)에 신축된 安興鎭城이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해안가에는 작은 원으로 표시된 안흥진 이외의 진보가 4개 표시되어 있고, 馬梁鎭이 남포에서 비인으로 옮겨간 사실도 제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소백산맥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도로를 비롯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고개가 상세하게 표시된 편이다. 내륙의 작은 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찰방역이지만 찰방역인 청양의 金井驛과 連源驛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일반군현은 노란색 큰 원으로, 감영과 병영 및 수영은 붉은색 큰 원으로 구별하여 표현하였다. 安眠島가 ‘島’라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섬이 아니라 串(현재의 반도)으로 그려져 있고, 홍주의 興良串이 실제로는 串(현대의 半島)임에도 불구하고 섬처럼 표현되었다. 두 측면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과 동일하여 정확성에서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기봉)

  •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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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國輿圖 뒷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