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八道郡縣地圖 팔도군현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09-111-v.1-3
  • 간행연도 : [18世紀(英祖 年間:1724-1776)]
  • 책권수 : 3帖,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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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 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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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북한강 북쪽의 가평군과 남양주시 수동면의 외방리·입석리·내방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가평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되어 있는 부분은 하천에 대한 표시이다. 첫째, 북한강의 본류와 지류가 매우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있는 超然臺오른쪽에서 들어와 陽根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이다. 그런데 마치 春川界와 洪川界 사이에서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 본류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일 뿐이다. 두 번째, 홍천계에서 양근계까지의 북한강이 실재와 매우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북한강은 서류하다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마치 서북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셋째, 이 부분에서 가평군은 실재로 홍천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 ≪해동지도≫의 지도 어디에도 가평과 홍천이 경계를 맞대고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없다. 네 번째, 조종천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이 실재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조종천의 굴곡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모는 이 지도에 표현된 것보다 훨씬 작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조종천의 하류가 마치 읍치에서 매우 가까운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재와 부합되려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을 형성하지 않고 바로 상류로 향하도록 그려져야 한다. 첫 번째를 제외한 세 개의 오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상호 연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종천 유역에는 縣倉이란 명칭이 붙어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조종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영평계에서 읍치를 지나는 가평천이 내려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만을 놓고 볼 때, 영평계 넘어 부분에도 가평천의 상류가 상당히 길게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짧은 구간에 해당될 뿐이며, 현재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대에 해당된다. (이기봉)

  •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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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부는 교동도와 일부 섬을 제외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高麗山(436m)이다. 강화는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이러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江都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읍치가 붉은색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이 고을이 ‘都’라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진과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불렀다. 이곳은 潮水의 영향으로 하루에 두 번 물길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다. 물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한자를, 그리고 물맛이 짜기 때문에 ‘鹽’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三南의 세곡선이 수시로 지나가는 해상운수의 길목일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국방상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이 반영되어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에는 수군이 파견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육군이 주둔하였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수많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와 돈대는 지도에서처럼 석축의 長城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淸軍에게 함락된 이후 방어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축성된 것이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모든 해안가에는 鎭堡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섬 전체가 하나의 견고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지도 아래쪽의 鼎足山城은 이름 그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솥처럼 생긴 지형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이곳에는 傳燈寺가 있었으며,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마니산사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강화도 주변의 섬은 이 지도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위치에서 대략적인 정확성만을 반영하고 있다. 이 중 현재의 석모도가 4개의 섬이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석모도는 밀물이 되면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썰물이 되면 모두 갯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席毛老(島)와 煤音(島)는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실재로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갯벌에 대한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3개의 섬이 潮水에 상관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기봉)

  •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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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부는 일제시대의 개성시, 개풍군의 영북면·북면·토성면·서면·남면·청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개성시 시내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松岳山(489m)이다. 지도 왼쪽에 金川界로부터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에는 梨浦·錢浦·碧瀾渡 등이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포구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습지 비슷하게 평평한 하천 지형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중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外港으로서 국내·해외 무역이 번성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개성에는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滿月臺가 표시되어 있다. 만월대는 고려의 主宮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높은 臺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위쪽에 鴨潭面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실재와 많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을 흐르는 論早川 유역에 개성의 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金川界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읍치 바로 밑의 養竹橋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鄭夢周(1337-1392)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善竹橋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밖에 고려의 왕도였기 때문에 수많은 王陵이 산재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조선의 왕릉들이 다른 지도에서 자세하게 표시된 것과 대조된다. (이기봉)

  •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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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덕양구의 오금동 동쪽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에 高峯縣·幸州(또는 德陽)·富原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고을 이름은 고봉현과 덕양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붙여졌다. 고양군의 땅에 합쳐진 부원현의 경우 원래 果州龍山處였다가,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 富原荒調鄕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언제부터 부원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處·鄕의 규모나 독자성이 縣에 맞먹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읍치 아래쪽에는 우리말 ‘기프내’의 한자표기인 深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곡릉천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곡릉천이 많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공릉천은 楊州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따라서 양주계 방향이 상류이며, 교하계 방향이 하류이다. 이 지도에는 마치 교하계 방향이 상류이며, 양주계 방향이 하류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고을의 경계선 밖에 있었던 富安三江面이 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지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 일대로서, 실재로는 한성부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는 淸나라의 使臣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묶게 되어 있었다는 碧蹄驛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 보이는 書院은 文峰書院이다. 閔純(1520-1592) 등을 배향하여 숙종 14년(1688)에 세워지고, 같은 왕 35년(1709)에 賜額 받았다. 기타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陵)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기봉)

  •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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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경기도 과천시, 속달동·둔대동·대야미동을 제외한 군포시, 박달동 일대를 제외한 안양시, 상도동·대방동을 제외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초구의 대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冠岳山(631m)이다. 지도 위쪽에는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 露梁(津)과 銅雀(津)이 표시되어 있다. 노량진은 우리말 ‘노들나루’에 대한, 동작진은 ‘동재기나루’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나루는 일반적으로 강 양편과 그 사이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노들나루와 동재기나루는 보통 한강 남쪽을 지칭했다. 읍치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2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良才驛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색의 작은 원은 이 지도책에서 찰방역에 대한 일괄적인 범례로 사용되었으며, 찰방이 파견된 역을 보통 ‘道’라고 불렀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양재천이며, 왼쪽의 하천(仁德川)은 현재 안양천으로 부르고 있다. 안양천 위에 있는 安養은 安養橋를 의미한다. 관악산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정확하게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한강변의 노량진 일대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愍節書院을 비롯하여, 鷺江書院·四忠書院 등이 밀집해 있었다. 淸溪山에서 冠岳山 방향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야트막한 언덕 정도임에 비해, 너무 굻게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밖에 이웃 금천현의 南面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이런 예는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기봉)

  •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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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남종면을 제외한 경기도 광주시 전체, 남양주시 조안면과 와부읍의 팔당리,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강동구, 의왕시, 안산시 시청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야목리·원리·송나리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黔丹山(685m)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읍치가 남한산성 위쪽인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 이후 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조 4년(1626)에 지도 위의 읍치인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고을의 격도 牧에서 留守府로 승격시켰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인조가 피난하여 2개월 가까이 후금에 대항하다가 항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인조가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던 三田(渡)가 지도 위쪽의 한강변에 표시되어 있다. 한강으로 합류되는 큰 지류로는 炭川(숯내)과 현재 경안천으로 부르는 小川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에 의해 이루어진 시화호의 일부이다. 이 지역은 안산시 동남쪽과 화성시 매송면 서쪽에 해당된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慶安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광주시 시내는 바로 이 경안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강변에는 이 지역 최대의 장시였던 松波나루와 廣津(광나루)도 보이고 있다. 良才驛은 이 고을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바로 아래쪽 書院이라고 쓰인 부분의 왼쪽에 있어야 한다. 서원은 고을이 큰 만큼 4개나 표시되어 있다. 기타 水原界와 果川界 중간 부분에 일반적으로 沙斤川으로 표시되던 하천의 명칭이 ‘사그내’라는 순 우리말의 발음에 가까운 沙斤乃로 적혀 있음이 재미있다. (이기봉)

  •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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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와 석모도 위쪽, 서도면의 주문도, 북도면의 장봉도 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에 읍치가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경기 水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경기 수영은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었으며, 인조 7년(1629)에 이 고을로 옮겼다. 수영이 설치되면서 고을의 格도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아래쪽의 注文島와 長峯島는 실재로는 강화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다. 이 두 섬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 두 섬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 부분에 나오지 않으며, 수영이 설치되면서 이 고을의 관할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을에는 현재 강화군 교동면 정도의 작은 면적에 4개의 面이 설정되어 있어, 면의 규모가 매우 작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면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규모나 구체적인 운영은 각 고을에 맡겨졌기 때문에 고을마다 규모가 달랐다. 섬 전체적으로는 중앙의 華蓋山(259m)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매우 낮은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섬의 모습은 지도와는 달리 남북보다는 동서로 2배 정도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기봉)

  • 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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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읍치는 교하면 교하리에 있었다. 長湍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金浦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한강이다. 임진강에 洛河라는 명칭이, 한강에는 學堂浦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각각 이 지역에서 임진강과 한강에 대해 부르던 별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그려져 있는 蟹岩은 地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해동지도≫의 교하군 지도에 임진강 건너의 풍덕 땅에 蟹岩이란 글자로만 나온다. 이 부근에는 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리는 一眉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이 지도의 작성자가 그것을 해암으로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해암은 없으며, 일미도만 표시되어 있다. 高陽界로부터 들어와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지도에는 金尺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金尺은 우리말 ‘쇠재’ 또는 ‘쇠자’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陵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 무덤이다. 영조 7년(1731)에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에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겨 왔다. 장릉이 있는 자리에는 원래 이 고을의 읍치가 있었는데, 장릉이 옮겨 오면서 파주시내 금릉동으로 옮겼다. 금릉동에서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겨온 시기는 地誌에서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이기봉)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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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관악구와 안양천 동쪽의 구로구 및 동작구의 대방동·상도동, 경기도 광명시의 대부분과 안양시의 박달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의 금청구청 근처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三聖山(478m)이었다. 지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서 지금의 안양천이 합류된다. 안양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大川이라고 나오며, 현재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는 ‘오목내’라고 불렀다. 지도에는 안양천이 과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한 듯이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는 과천의 경계를 넘어 훨씬 더 먼 곳에서 발원한다. 안양천변에 적혀 있는 歧溪橋는 歧灘橋의 誤記이며, 이 다리는 보기 드문 石橋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천 상류에는 오늘날의 안양시 이름과 동일한 安養驛이 보이고 있지만, 실재로는 安養橋의 誤記이다. 다른 기록에는 萬安橋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역시 보기 드문 石橋였다고 나온다. 長柱峴도 長栍峴의 誤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도가 현지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 위쪽으로는 楊花津이 큰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재의 위치는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이기봉)

  • 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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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시 시내·고촌면·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北城山이며, 지도 위에는 章陵이 있는 산이다. 읍치는 원래 古縣內라고 표시된 지역에 있었다. 인조 5년(1627)에 지도에 표시된 章陵을 읍치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 장릉이 옮겨옴에 따라 이 고을은 縣에서 郡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하면서 追尊된 원종의 무덤이다. 원래는 양주에 있었으며, 이곳으로 옮겨 온 5년 후(1632)에 章陵으로 追崇되었다. 고을의 서남쪽은 서해 바다와 접해 있으며, 동북쪽은 한강 하류에 연해 있다. 지도에는 서남쪽의 바다가 작게 표현되어, 쉽게 알아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한강은 地誌에 지도 위의 孤島라는 명칭을 따서 孤島江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에는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속자도 보이고 있다. ‘芦’는 글자 그대로 보면 ‘호’로 읽어야 하지만, ‘蘆’의 속자로 쓰였기 때문에 ‘노’로 읽어야 한다. 또한 지도 왼쪽의 ‘杻串’에서의 ‘杻’은 지명에서는 주로 ‘유’가 아니라 ‘축’으로 읽어야 한다. (이기봉)

  •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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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리·수화리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의 옛 남양면, 삼화리·유포리를 제외한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송산면·서신면,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 안산시의 대부도,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영흥면과 자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남양동(옛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飛鳳山이다. 읍치 위쪽에 표시된 仁川地는 인천의 월경지인 梨浦面 지역이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分鄕面이 그것이다. 분향면의 현재 위치는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로서 분명히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었다. 이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규장각에 남아있는 18세기까지의 地誌나 지도에도 분향면이 월경지라는 기록은 없다. 이 지도의 작성자도 그런 기록에 바탕을 두고 그렸기 때문에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분향면의 위치가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大部面에는 감목관이 파견된 곳임을 알려주는 황색의 작은 원과 牧(場)이라는 글씨가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580匹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花梁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永宗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永宗에는 원래 永宗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숙종 24년(1698)에 현재의 영종도로 옮겨갔다. 鎭堡와 같은 군사시설은 옮겨가면서 지명도 함께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도 오른쪽의 섬은 대략적인 위치나 크기만 표시한 것일 뿐, 완전히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기봉)

  • 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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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의 노동리·동중리·북삼리·무등리, 군남면의 남계리·황지리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朔寧界에서 들어와 積城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며, 楊州界에 합류되는 것은 그 지류인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에 橫江·澄波渡·楡淵渡·腐淵津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渡와 津은 모두 나루를 지칭하는 한자 명칭이다. 楡淵渡·腐淵津에서의 ‘淵’은 연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처럼 잔잔한 하천구간을 의미한다. 하천은 보통 물살이 빠르고 얕은 여울(灘)과 잔잔하고 깊은 구간(淵·潭·湖 등으로 표시됨)이 반복적으로 연속된다. 나루는 물살이 잔잔하고 깊은 구간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징파도가 징파강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징파도는 조선후기에 나루뿐만 아니라 포구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며, 임진강에서 商船이 일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상류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은 禾津面의 위치이다. 화진면은 양주계로부터 들어오는 한탄강 북쪽·임진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현재의 위치는 군남면 황지리와 남계리 일대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마전군 지도에서는 화진면의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시정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崇義殿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요 임금 8명과 신하를 함께 배향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올려주도록 한 곳이다. 세종 7년(1425)에는 조선의 왕실도 5대만 하도록 되어 있음을 기준으로 삼아, 제1대 태조(재위 918-943)·제8대 현종(1009-1031)·제11대 문종(1046-1083)·제24대 원종(1259-1274)에게만 제사지내도록 했다. 현재도 미산면 아미리에 존재하고 있으며, 작은 고을임에도 ‘郡’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기타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眉江書院이다. 남인의 거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워지고, 같은 왕 29년(1753)에 賜額 받았다. 이러한 서원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최소한 1750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기봉)

  •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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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인천광역시 부평구·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 부천시, 안양천 서쪽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桂陽山(394m)이다. 이 계양산의 위치는 地誌나 지도 어디에도 모두 읍치의 북쪽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실재로도 북쪽에 있다. 가장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안양천이며,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굴포천이다. 지도 왼쪽에는 서해 바다와 섬이 표시되어 있지만, 섬의 면적이나 위치 등은 다른 지도에서처럼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이 섬들은 둘레가 몇 백보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도 작성자가 왜 이렇게 크게 그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도책에서는 섬을 실재의 크기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는 사실이 참조된다. 이 지도는 정확성을 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면·산·봉수·역 등 아주 간단한 내용만을 싣고 있다. (이기봉)

  • 삭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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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의 연천군 삭령면·서남면과 중면의 북쪽 및 왕징면의 동쪽 일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내문면·인목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절반과 개성시 장풍군의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북한 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백로산리(옛 삭령리)에 있었다. 삭령군은 고려 예종 때 朔邑縣과 僧嶺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이름도 두 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嶺이 寧으로 바뀐 경위나 시기에 대해서는 地誌에서 찾을 수가 없다. 兎山界로부터 들어와 漣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孫廳灘이라고 적혀 있는데, 임진강의 이 구간에 대해 이 지역에서 부르던 명칭이다. 여기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역은 사람이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대의 신속한 이동도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地誌나 地圖의 작성에서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었으며, 해당 구간의 하천에 대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철원계와 평강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현재 역곡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강계로부터 직접 들어오지 않으며, 철원을 거쳐 들어온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며, 고을의 전체 모습 역시 비슷하다. 역곡천 변에 적혀 있는 江華坪은 철원의 넓은 평야가 연장된 곳으로서,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마방리 일대에 해당된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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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수원시, 오산시, 화성군의 태안읍·동탄면·정남면·봉담읍·팔탄면·향남면·장안면·우정면·양감면과 송나리·원리를 제외한 매송면, 평택시의 포승면·청북면·안중면·현덕면·오성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안녕리 일대였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鉢岾山이었다. 이 고을이 이렇게 크게 된 최초의 계기는 이 지역의 세력들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초기부터 많은 屬縣(縣·鄕·所·部曲)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屬縣들은 그대로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고, 그런 배경 때문에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고을의 越境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월경지의 상당부분이 主縣으로 존재했던 이 고을의 역사와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중간 부분에 振威界라 쓰여 있는 곳에도 수원의 땅이 있었다. 현재의 위치는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와 고덕면 동청리·당현리 일대이다. 또한 이 고을 안에 있었던 다른 고을의 월경지에 대한 표시도 정확하지는 않다. 이 부분은 다른 고을의 지도에 대한 해제 부분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지도 위의 읍치는 정조 13년(1789)에 지금의 수원시내로 읍치를 옮기기 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정조 13년(1789)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현재의 아산만이 보이고 있으며, 읍치 오른쪽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황구지천으로 불리고 있다. 황구지천 상류에는 柳川(버드내)이 적혀 있는데, 해당 구간에서만 불리던 명칭이다. 황구지천 역시 구간마다 매우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이 여러 地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는 숙종 20년(1694)에 宋時烈(1607-1689)을 配享하여 세웠으며, 다음 해에 賜額받은 梅谷書院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위쪽으로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彌勒堂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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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하중동·하상동을 포함한 시흥시의 남쪽 부분과 시청 서·북쪽의 안산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은 읍치 오른쪽의 修理山(475m)을 비롯하여 3-400m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은 야산지대에 불과하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형적 특징이 대략적이나마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舊草芝라는 표시가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 草芝梁營이 있었던 곳이다. 이 초지량영은 효종 7년(1656)에 강화군 길상면의 초지리로 옮겨갔으며, 草芝鎭이라 불리게 되었다. 營·鎭·堡와 같은 군사기지는 위치를 옮겨가면서 명칭 역시 대부분 그대로 가져간다. 다만 옛 초지량영은 현재도 안산시에 초지동이란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고을과 아래쪽 南陽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시화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에 있는 衣島(오이도)와 雙島(큰가리섬과 작은가리섬) 역시 방조제의 일부분이 되면서 육지화 되었다. 더 오른쪽에 있는 乭注(島)와 召勿(島)는 地誌의 내용과 비교해 보아도 많이 왜곡되어 있다. 돌주도의 경우 ≪여지도서≫에는 서쪽 40리에 있다고 나오며, 의도(오이도)는 서쪽 47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의도 오른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만 돌주도와 소물도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기봉)

  •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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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시 시내·금광면·미양면·대덕면과 북가현리·동평리·남풍리를 제외한 보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명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229.5m)이다. 읍치 아래의 하천이 안성천의 본류이며, 陽智界로부터 들어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한천이다. 고을 전체나 산세·하천의 모습이 실재와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몇 개의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 표시된 外山面은 안성의 땅이 아니었으며, 동쪽의 竹山에 속해 있었다. 이 지도책의 竹山 지도에도 外山面이 나오고 있는데, 편집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양지와의 경계선 부근에 표시된 其佐面은 읍치 바로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기좌면 자리에는 北佐面이 표시되어 있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18세기의 地誌나 地圖의 자료에는 모두 북좌면이 기좌면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편찬자가 기좌면과 북좌면의 유사성으로 인해, 북좌면을 생략하면서 범했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 그 오른쪽의 寶山은 죽산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산이 ‘북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재로는 동북쪽에 있는 것을 북쪽으로 표현하여 위치 비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이 지도에 나오는 面이 당시에 있었던 모든 面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님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기봉)

  • 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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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강상면·강하면·양서면·서종면·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과 북한강 남쪽의 외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평읍 양근리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위에 古邑으로 표시된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이후 영조 23년(1747)에 지도 위의 읍치 지역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의 양근군 지도는 읍치를 옮기기 이전의, ≪여지도서≫의 지도에는 옮긴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加平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이며, 新恩川 왼쪽으로부터 읍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남한강이다. 남한강에는 水運 상 중요한 여울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大灘은 우리말 ‘한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현재의 양서면 대심리 부근에 있었다. 한여울에는 큰 바위가 가운데에 있어 사공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 초에 이 바위를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었 있기도 하다. 남한강가에 있는 分院里의 위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幷灘 왼쪽에 표시되어야 실재에 부합된다. 이곳에 관용도자기를 굽던 司饔院의 分院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分院里란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도 광주시 남종면에 분원리 명칭으로 남아 있으며, 수많은 가마터가 발굴되고 있다. 북한강가에 있는 北面 지역은 고려 때 迷原莊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가평군 설악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縣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기타 작은 하천의 명칭까지도 하나하나 적어 넣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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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없음

  •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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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포천군 신북면의 덕둔리·삼정리·갈월리·금동리, 고양시 덕양구의 오금동과 지축동, 서울특별시 도봉구·노원구·중랑구와 은평구의 구파발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위쪽의 佛谷山(470m)이었다. 본 지도에는 양주목 뿐만 아니라 한성부의 都城과 城底十里를 모두 그리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이 지도에서의 한성부는 한강-古楊州面-三角山-延曙를 잇는 범위 안에 있었다. 본 지도는 한성부 중 都城 부분이 실재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교정되어 있다. 이 지도보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양주목 지도에는 도성 부분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두 지도가 비록 회화식 지도이기는 하지만, 본 지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 안에는 宮과 성균관 정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으며, 그 밖의 정보로는 현재 청계천으로 불리는 開川이 거의 유일하게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加平界로부터 북한강이 들어오며, 陽根界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강의 본류가 된다. 실재로 廣州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서도 한강이 연결되어 있지만, 본 지도는 양주의 영역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한강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蠶島·栗島 등이 크게 그려져 있다. 한강 남쪽 변에는 西江과 麻浦(삼개)를 비롯한 포구와 나루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상업이 발달한 지역임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실재로는 이 포구와 나루의 대부분이 한강의 북쪽 지역에 있었는데, 여백이 적어 남쪽 지역에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강으로는 현재 중랑천·왕숙천이 합류하고 있는데, 지도에는 각각 豆驗川·王宿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보이는데, 지도에는 大灘으로 적혀 있다. 한탄강의 ‘漢’은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의 음을 표현한 것이므로, 한자의 ‘大’와 자주 섞여 사용된다. ‘한탄’ 또는 ‘대탄’의 순우리말은 ‘한여울’이다. 대탄 부분은 실재와 비교하여 약간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大灘으로부터 壺知山까지의 한탄강 북쪽 부분이 양주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둘째, 한탄강의 지류인 哨村川이 積城界을 넘어 뻗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교정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平丘(驛)이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기호와 함께 지도 아래쪽 가운데쯤에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호는 이 지도책에서 주로 鎭堡를 표시하던 기호이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기봉)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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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시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定水山이다. 이 고을은 정종 1년(1399)에 수원의 양량부곡이 현으로 승격된 것이며, 태조 13년(1413)에 지도 위에 있는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겼다. 아울러 죽산의 陽良·高安·大谷·木岳·蹄村 등의 部曲을 새로 편입하여 지도 위와 같은 양지현이 만들어졌다. 面의 이름에 朱자가 들어가 있는 추계향은 용인시 시내의 일부와 양지면, 面의 이름에 古자가 들어가 있는 양량부곡은 안성시의 고삼면에 해당되는 큰 규모였다. 나머지 네 개의 부곡은 현재 1-2개의 里에 해당되는 작은 규모이며, 각각 고안면·박곡면·목악면·제촌면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한강의 지류인 탄천의 상류이며, 서남쪽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옛 추계향 지역과 양량·목악 부곡이 지나치게 넓게 연결되어 있다. 두 지역은 거의 떨어져 있는 듯 연결해야 실재에 가깝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제촌면 지역도 고안면과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여러 地誌에 이와 같은 사실이 모두 적혀 있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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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와 영등포구 양평동 일대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이었다. 고을 동쪽에는 한강이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며, 衿川界로부터 흘러들어와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안양천으로 불리고 있다. 한강에 표시된 孔岩은 글자 그대로 구멍이 뻥 뚫린 바위로서, 한강 가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현재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공암 근처에 있었던 孔岩津은 ‘金을 우연히 줍게 된 형제가 서로 다툴 것을 염려하여 금을 버렸다’는 옛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 아래쪽의 塩倉은 소금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며, 현재의 강서구 염창동 일대를 가리킨다. 그 오른쪽의 仙遊峯은 현재의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것으로서, 楊花津으로 더 알려졌던 곳이다. 기타 開花山이 있는 근처가 지금의 김포공항이 들어선 곳이다. (이기봉)

  •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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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목은 강천면과 금당천 동쪽의 북내면을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北城山이었다. 이 고을의 원래 이름은 驪興이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세종의 무덤인 英陵을 읍치 왼쪽의 북성산에 옮기면서 驪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뿐만 아니라 위쪽의 梨浦津 부근에 중심지가 있었던 川寧縣을 없애고 이 고을에 합하였으며, 고을의 格도 府에서 ‘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릉이 고을에 입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예가 될 수 있다. 英陵 오른쪽의 寧陵은 효종의 무덤이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약간 애매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와 陽根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 본류이다. 오른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오는 金塘川은 실재보다 조금 과장되어 있다. 하천의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지평에 걸쳐 있는 상류 또한 상대적으로 짧다. 반면에 아래쪽의 天民川(청미천), 이천 방향에서 내려오는 福川(복하천), 砥平界로부터 들어오는 新恩川 등은 다른 고을에 걸쳐 있는 상류가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훨씬 길다. 福川과 합류되는 것으로 그려진 華隱川(양화천)은 실재로는 복하천과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남한강변에는 많은 나루(津)가 표시되어 있는데, 단순히 나루만이 아니라 중요한 浦口의 기능을 가진 곳도 많았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이 梨浦津이며, 현재의 금사면 이포리에 있었다. 李重煥(1690-?)의 ≪擇里志≫에서도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梨浦는 우리말 ‘배개’에 대한 한자표기이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우리말의 발음을 따서 ‘白崖’로 기록하였다. 이포진 오른쪽의 沂川書院은 金安國(1478-1543)·李彦迪(1491-15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13년(1580)에 세워지고, 인조 3년(1625)에 賜額 받았다. 읍치 위쪽의 孤山書院은 李存五(1341-1371)·曺漢英(?-1670) 등을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기타 읍치 위쪽의 八大藪는 남한강변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숲으로서, 八長林이라고도 한다. (이기봉)

  • 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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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연천군 연천읍, 중면의 남쪽 부분, 황지리 남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朔寧界로부터 들어와 麻田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橫江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永平界에서 들어와 마전계에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大灘이라고 적혀 있다. ‘大’는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따라서 한자표기인 大灘·漢灘에 대한 순수 우리말 지명은 ‘한여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한탄강이 북류하면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거의 서류하면서 합류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행정구역의 경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되는 지점의 동북 부분은 실재로는 마전의 영역이었다. 또한 그 동쪽에 있는 한탄강 양쪽의 상당 부분은 양주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마전의 영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탄강의 유로가 잘못 표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와 ≪해동지도≫ 내의 연천현 지도에는 비록 회화식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이 밖에 읍치를 지나는 車灘은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더 먼 거리의 철원 땅에서 발원한 후 이 고을의 경계로 들어온다. (이기봉)

  • 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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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군 영중면·영북면·이동면·일동면·창수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왼쪽 위의 漣川界에 있는 하천은 현재 한탄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읍치 아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영평천이라고 한다. 이 지도에서는 이러한 하천의 표시가 약간 잘못 되어 있다. 영평천 중 동쪽에서 발원하는 부분은 金化界에 있는 白雲山 부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東國與地勝覽≫·≪輿地圖書≫에도 이 하천은 모두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이러한 地誌의 내용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아마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를 참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어 雨音山이란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 등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에는 동시에 나온다. 그런데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에는 우음산과 김화계 사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우음산 북쪽에 또 다른 유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탄강 본류 역시 최소한 烽이라 적혀 있는 부분까지는 철원과의 경계선을 타고 흐른다. 이것 역시 전체적으로는 ≪여지도서≫의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실재와 부합되게 하려면, 백운산 - 김화계 - 혜재참 부근 - 우음산이 연속적인 산줄기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평천의 상류도 이곳까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지도의 백운산에서 철원계-김화계 사이로 흘러가는 하천는 실재로는 없어야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다만 이 지도에서 북면으로부터 흘러나와 한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지나치게 백운산 가까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김정호가 이 하천이 백운산에서 발원한다는 지지의 내용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밖에 읍치 왼쪽의 玉屛書院은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효종 9년(1658)에 세워지고, 숙종 39년(1713)에 賜額 받았다. (이기봉)

  •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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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용인시 수지읍·구성면·포곡면·모현면·기흥읍·이동면·남사면과 마평동·운학동·해곡동을 제외한 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1413)에 龍駒縣과 處仁縣을 합하여 만들어졌고, 각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다가 龍仁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용구현의 중심지가 지도 위의 읍치 지역이며, 처인현의 중심지는 아래쪽에 古縣이라고 적혀 있다. 처인현은 원래 處仁部曲이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에 金允候가 몽골의 장수인 撒禮塔을 사살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인현은 현재 용인시 남사면과 이동면에 해당되어, 縣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部曲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용인 시내는 지도에 金岑(→岺)驛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고을의 유역권이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위쪽의 2개 하천은 모두 한강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탄천의, 오른쪽의 것은 경안천의 상류이다. 아래쪽의 2개 하천은 모두 안성천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오산천의, 오른쪽의 것은 진위천의 상류이다. 지도에는 각각 葛川·魚肥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두 공식명칭에서는 사라졌다. 기타 읍치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深谷書院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의 사림파로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 중종 14년(1519)의 乙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趙光祖(1482-1519)를 배향하였다. 효종 1년(1650)에 세워지면서 賜額 받았으며,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현재의 수지읍 상현리에 있었다. (이기봉)

  • 음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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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장호원읍·율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의 관성리·병암리·도신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고을 남쪽에 天民川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현재 淸美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읍치 왼쪽에 약간 보이는 하천은 복하천이라고 한다. 읍치 위쪽의 雪城山(290.5m)으로부터 왼쪽의 老城山(269m)까지 산줄기가 굻게 연결되어 있는데, 실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이 산줄기가 복하천과 청미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재로는 야산이나 둔덕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읍치까지의 脈勢를 중요하게 여겼던 회화식 군현지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산줄기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더 부정확하다. 天民川의 모습도 실재와 다른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천민천의 본류는 陽智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며, 가장 큰 지류는 지도에서와 달리 天民川이란 글씨 부근에 있는 충주와의 경계선을 타고 합류된다. 無極驛과 八聖山의 위치도 石院 부근에 그려 넣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石院은 보통 乭院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현재도 ‘돌원’이라고 부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근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실재의 모습을 더욱 왜곡하고 있다.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 바로 아래쪽에는 竹山界가 표시되어 있어야 현실에 더 부합된다. 읍치와 오른쪽 忠州界와의 사이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長湖院場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도에서 이 場이 표시되고 있지는 않으나, 거의 모든 지도에서 장호원의 또다른 기록 방식인 長海院이란 명칭이 발견된다. 이 지도에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음은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기봉)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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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 시내·부발읍·대월면·모가면·호법면·마장면·신둔면·백사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5리에 있었다’는 雪峰山(394.3m)이었다. 하천과 산줄기의 모습이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지금도 지도 위에 적혀 있는 것처럼 福河川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쪽에 獻海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현재 양화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실재로도 지도에서처럼 양화천의 상류 일부가 이 고을 남쪽에 거의 유사하게 걸쳐 있다. 면의 표시에서는 이 지도책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읍치에 있었던 邑內面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읍치 왼쪽에 보이는 五川面은 五川驛의 誤記이며, 母山面 부근에 葛麻洞面(또는 加麻洞面)이 적혀 있어야 합당하다. 지도에는 站도 2개나 적혀 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선조 30년(1597)부터 시작된 擺撥制度의 시행 결과를 보여준다. 파발제도란 변방으로 가거나 오는 공문서를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서 騎撥은 25리마다, 步撥은 30리마다 1개의 站을 두었다. 여기서 기발은 말을 타고, 步撥은 사람이 직접 달려서 급보를 전하는 것이다. 기타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阿川驛을 가리킨다. (이기봉)

  •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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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인천광역시 동구·중구·남구·연수구·남동구와 백령도·대청도·영흥도를 제외한 옹진군, 시흥시 시내인 옛 소래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의 蘇萊山(299.4m)이었다. 이 고을은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세조 6년(1460)에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라고 하여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蘇萊山이 2개나 표시되어 있어 하나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위쪽의 文學山도 실재로는 읍치 아래쪽(남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른 지도와 地誌에는 대부분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여러 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重林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은 찰방이 파견된 역에 대한 일률적인 범례로서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는 인천의 越境地인 梨浦面이 보이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浦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인천의 땅으로 완전히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화성시 옛 남양면의 문호리·수화리 북쪽과 비봉면의 삼화리·유포리 일대이다. 지도 오른쪽에는 수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영종도와 덕적도에는 파란색의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는 이 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일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永宗鎭은 숙종 24년(1698)에 이미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을 갖고 있는 獨鎭이 되었기 때문에 인천 관할 아래에 있지는 않았다. 영종진 아래쪽의 月尾島에는 行宮이 기록되어 있다. 行宮이란 임금이 행차했을 때 잠시 머무는 곳을 의미하는데, 왜 이곳에 행궁이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확실하지가 않다. 기타 읍치 왼쪽의 書院은 鶴山書院으로서, 숙종 28년(1702)에 李端相(?-1669)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이기봉)

  •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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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과 연천군의 왕징면·백학면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파주시·연천군에, 북한 쪽은 대부분 개성시 장풍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 쪽의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古邑 위쪽에 표시된 望海山이다. 본 고을은 조선 초기에 長湍·臨津·臨江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면 이름 중 長이 붙은 것은 장단현의, 江이 붙은 것은 임강현의, 津이 붙은 것은 임진현의 지역이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광해군 5년(1613)에 지도 위쪽의 古邑으로부터 옮겨왔다. 지도 아래쪽에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임진강 남쪽에 赤壁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의 근처에 臨津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한양에서 의주로 통하는 大路가 지나가며, 지도 위에는 이곳으로부터 개성으로 연결된 붉은색 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왼쪽에는 개성 시내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沙川이, 오른쪽에는 황해도의 金川에서 흘러오는 沙彌川이 표시되어 있다. 사미천 상류에는 일제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소남면·대남면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역권과 상관없이 황해도 금천에 속해 있었다. 읍치와 고읍 사이에 있는 桃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桃源驛을 의미한다. 驛 중에서 찰방이 파견된 경우를 道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도책에서는 이러한 道를 보통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지도에는 그러한 표시가 없다. 읍치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 해창에서 ‘海’라는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통해 밀물 때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기봉)

  • 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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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갈현리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 麻田界로부터 들어와 坡州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강변에는 腐斤津·新直浦·戎灘이 표시되어 있다. 津·浦·灘은 하천의 기능과 특징이 집약된 용어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의 적성현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신직포가 각각 新津江·神知江으로 표시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浦’는 우리말 ‘개(물가)’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浦口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단순히 넓은 모래사장 또는 습지가 펼쳐져 있는 물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고을의 고구려 때 이름은 七重縣이며, 통일신라 때의 이름은 重城縣이다. 고을 이름의 한자 의미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중요한 군사 방어지역으로서 인식되었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수많은 산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인식은 첫째, 6세기 중반 이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으며 둘째, 이 지역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임진강의 최 하류 지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戎灘에서의 ‘灘(여울)’은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구간은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군사들이 도보로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다. 임진강에서 최 하류 쪽에 있는 여울이 바로 이 고을에 있는 여울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융탄 하류 부분으로는 더 이상 ‘灘’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점 반감되게 되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紺岳(675m)은 조선의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기봉)

  • 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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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안성시의 죽산면·삼죽면 전체와 능국리를 제외한 일죽면, 보개면의 동평리·남풍리, 백봉리·고안리·박곡리를 제외한 용인시의 백암면과 학일리·목신리를 제외한 원삼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읍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淸美川이라 부르고 있으며, 과거의 기록에는 대부분 天民川이라고 나온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하천 유역에도 일부씩 걸쳐 있다. 왼쪽의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에, 안성 방향으로 뻗은 도로 끝은 안성천의 최상류에 걸쳐 있다. 진천과의 경계선에도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최상류 일부가 걸쳐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도 利川界와 陰竹界 사이에 양지의 월경지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陽智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지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面에 대한 표시이다. 近一面의 위치가 鼎倍山 근처에 있어야 더 합당하며, 川北二面은 川北一面 근처에 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川은 天民川을 의미한다. 南一面과 南二面도 읍치 동남쪽 방향에 있어야 한다. 南面 역시 外山面 지역에 표시되어야 하며, 山內面과 外山面은 없애야 한다. ≪戶口總數≫에는 마지막 부분의 문제점과 비슷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에는 山內面과 山外面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산내면에는 어떤 마을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산외면에 기록된 마을은 모두 남면의 마을과 동일하다. 남면이 산내면과 산외면으로 나누어진 시기가 있었던 듯하며, 만약 그렇다면 이 지도에서는 南面이란 명칭을 삭제해야 한다. ≪여지도서≫의 지지·지도와 ≪해동지도≫의 죽산부 지도에는 남면만 나오며, 산내면과 산외면은 나오지 않는다. 김정호의 ≪동여도≫에서는 면의 표시가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도에는 읍치나 바로 부근에 있었던 府內一面(또는 東部面·南部面)·府內二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고을 남쪽 부분의 동서가 더 넓어야 실재에 가깝다. (이기봉)

  •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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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양평군 지제면·양동면·청운면·단월면·용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섬강의 지류인 삼산천의 상류이며,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의 상류이다. 읍치 부근을 지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역시 한강의 지류인 흑천인데, 지도에는 田谷川·新川이라고 적혀 있다. 田谷川은 田谷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新川은 우리말 ‘신내’ 또는 ‘신내개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田谷 약간 상류에 있었던 黑川(거무내)으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시대에 하천의 구간마다 사용되던 다양한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雲谿書院이다. 趙晟(1492-1555)·趙昱(1498-1557) 형제를 배향하여 선조 27년(1594)에 세워지고, 숙종 40년(1714)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의 현재 위치는 용문면 덕촌리 서원말이며, 조욱이 많은 후학을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위쪽으로는 龍門山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30호인 거대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가 자리 잡고 있다. (이기봉)

  • 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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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용이동·죽백동·월곡동을 제외한 평택시 시내와 옛 송탄시, 진위면, 황구지리를 제외한 서탄면, 당현리·문곡리·동청리를 제외한 고덕면, 오성면의 안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釜山이다. 水原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황구지천·오산천이며, 龍仁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진위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奈川·兎峴川·長好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지역에서만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이러한 하천의 이름은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를 위해 명칭을 단일화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이 세 하천의 명칭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똑같이 적혀 있어, 두 지도가 서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나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세 하천의 명칭이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 陽城界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안성천 본류이다. 탄현면이나 고두면 지역에 수원의 땅이 있었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의 水原界라는 글씨도 더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만약 표시를 하려면 牙山界로 되어 있어야 한다. 古頭面의 경우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右頭面으로, 김정호의 ≪동여도≫에는 石頭(面)으로 되어 있다. 餘方面은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余方面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2개 모두 이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어, 이 지도가 기본적으로는 ≪여지도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기봉)

  • 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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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김포군 통진면·월곶면·대곶면·하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文殊山(376.1m, 比兒山이라고도 함)이었다. 고려 공양왕(재위:1389-1392) 때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童城縣과 守安縣의 흔적이 古童山城·守安古城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祖江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강의 이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으로 현재는 김포군 월곶면에 조강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고을과 강화와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부른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이 하루에 2번 바뀌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흐르는 물은 짠 바닷물이기 때문에 ‘鹽’이라는 글자가 붙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한양으로 통하는 水路의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경제적으로, 외적의 침입시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역이다. 이에 따라 강화도 방면으로는 수많은 鎭堡와 墩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고을 방향으로는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德浦鎭과 위쪽의 文殊山城만이 건설되어 있었다. 덕포진 아래쪽에 표시된 孫乭項은 보통 ‘손돌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원래는 덕포진과 거의 같은 위치에 표시되어야 한다. 손돌목은 지형적 요인으로 염하가 휘어지면서 가장 빠르게 흐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뱃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몽골의 추격병을 피해 달아나던 왕을 죽으면서까지 안전하게 염하를 건너게 했다는 손돌의 무덤이 있다. 이 손돌의 이야기는 ≪고려사≫에도 나오고 있으며, 뱃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손돌의 무덤을 지날 때마다 술을 따라 부으며 안전을 비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기타 도로가 마치 한강을 건너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김포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기봉)

  •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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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파주시 파주읍·파평면·법원읍·문산읍·광탄면·조리면·월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城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7년(1398)에 坡平縣과 瑞原郡을 합해 原平郡으로 만들어졌다. 세조 6년(1460)에 貞熹王后 尹氏의 본관이라고 해서, 이름과 고을의 격을 높여 坡州牧으로 만들었다. 옛 파평현의 읍치 지역이 지도에 坡平山·坡平面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豊德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의 이름이 붙게 된 臨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내내 임진강의 나루 중 가장 중요했던 곳으로 여겨졌다. 보통 문헌에는 臨津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간에서는 ‘임진나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임진나루의 현재 위치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임진강가였다. 임진강 하류에는 洛河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보통 임진강이라고 하면 임진나루 앞쪽의 하천 구간만을 의미하며, 각 구간마다 여러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廣灘이 쓰여 있는데, 현재 문산천으로 불리고 있다. 廣灘은 우리말 ‘너분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한자의 소리가 아닌 뜻을 따서 기록한 것이다. 읍치 위쪽의 梨川 역시 우리말 ‘배내’에 대해 한자의 뜻으로 표기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하천과 산줄기 및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재에 가깝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지도제작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아래쪽에는 恭陵·順陵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각각 조선 제8대 임금인 예종의 章順王后와 제9대 임금인 성종의 恭惠王后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이기봉)

  •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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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포천군 포천읍·화현면·군내면·가산면·소흘읍·내촌면, 갈월리·금동리 서북쪽을 제외한 신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읍치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탄강의 지류인 포천천이다. 지도에는 高橋川으로 적혀 있는데, 일제초기 하천 명칭의 단일화 과정에서 포천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왕숙천의 상류이며, 지도에는 交松川·地藏金川 등 2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전통시대에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원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花山書院은 ‘오성과 한음’으로 많이 알려진 李恒福(1556-1618)을 배향하여 인조 13년(1635)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龍淵書院은 역시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李德馨(1561-1613)과 趙絅(1586-1669)을 배향하여 숙종 17년(1691)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白鷺洲는 하천 가에 넓게 발달한 모래사장을 가리키는데, 현재의 위치는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일대이다.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는데,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은 원래 읍치 바로 북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서의 폭을 조금 좁게 표현하든지, 아니면 남북의 폭을 조금 넓게 표현하든지 해야 실재에 가깝다. 기타 우리말의 한자표기에 대한 예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몇 개 발견할 수 있다. ‘松隅’는 우리말 ‘솔모루’에 대한, ‘廣峴’은 우리말 ‘넓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기봉)

  • 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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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대성면·상도면·봉동면·중면·흥교면·임한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개풍군과 판문면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개풍군 풍덕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세종 24년(1442)에 海豊郡과 德水縣이 합해져 만들어졌으며, 두 고을의 이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豊德郡이 되었다. 지도에는 덕수현의 옛터가 古德水라고 적혀 있으며, ‘德’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명칭은 옛 덕수현의 범위를 알려준다. 이후 순조 23년(1823)에는 고을 자체가 사라지면서, 모두 개성의 땅에 속하게 되었다. 한강의 본류는 交河界로부터 들어오며, 坡州界로부터 들어오는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간다. 通津과 江華 사이에는 鹽河라는 중요한 물길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 자체가 풍덕부만 그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에 북쪽으로부터 흘러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예성강 본류이다. 지도 오른쪽에 적혀 있는 東江은 임진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호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지점에 적혀 있는 祖江도 이 지역에서 한강의 해당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이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기보다는 구간마다 다양하게 불렀는데,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다. 강화도에 적혀 있는 昇天浦는 浦口라기보다는 풍덕 방향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나루이다. 나루는 보통 한쪽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강의 양쪽에 동일한 명칭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천포 역시 풍덕의 땅에도 동일한 명칭의 나루가 존재한다. 지도에는 陵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神懿王后의 무덤이며, 厚陵은 조선의 2대 임금인 定宗의 무덤이다. (이기봉)

  • ▶충청도
  •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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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현재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은하면, 구항면, 서부면, 광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육지의 도로와 연결할 수 있는 곳인 현재의 결성면에 위치하고있으며, 현재도 그 성곽터가 남아있다. 이 지도에서 주로 그려진 것은 강, 바다, 산과 그 사이를 지나는 도로이다. 倉은 읍치가 있는 곳에 있으며, 수운에 닿기 편리한 바닷가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죽도가 보이는데 이 섬에서는 대나무가 공급되었다고 한다. 지도의 남쪽으로는 광천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특히 바다로 접어드는 하천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산은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지도의 북쪽에 있는 龍臥川은 臥龍川이라고도 부르며, 龍里와 龍湖里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청룡산의 북동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 지도에서는 지명이 표기되지 않았지만, 문헌에서는 枰山으로 추정되며 본 현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아래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곳은 지금의 廣川里로 추정되는데 과거에 이곳은 상업 유통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保寧界와 이어지는 도로가 보이는 곳은 현재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다. (이상균)

  •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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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통합시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공주라는 이름은 고을 북쪽 강가에 있는 산의 모습이 公자와 같아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읍치 북쪽 금강에 연한 공산성은 지도에는 雙樹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를 따라서 작은 성을 쌓고 강을 垓字로 삼았는데 지역은 좁지만 형세는 견고하다. 인조도 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피난한 적이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月城山으로 계룡산에서 뻗어온 맥이다. 이른바 금남정맥의 최북단에 해당한다. 전통시대의 자연인식에서는 산지를 연결된 맥의 형태로 파악하는데 공주의 경우는 북쪽은 강으로 막혀 있어서 남쪽에서 맥이 뻗어온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고을은 너른 범위에 걸쳐 있는데 살만한 곳으로는 첫째가 儒城이고 둘째가 敬天, 셋째가 利仁, 넷째가 維鳩라 했다. 지도에도 이들 지역이 유성창, 경천역, 이인, 유구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이인역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으며 논도 기름져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9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기도 했다. 고을 서북편의 茂城山은 차령의 서쪽 줄기가 맺혀서 된 것으로 土山이 빙 돌았고 그 아래에 유구역과 麻谷寺가 있다. 골짜기 안에 계곡물이 많으며 논이 기름지고 또한 목화·기장·조를 가꾸기에 알맞아 사대부와 평민이 여기 한번 살면 떠돌거나 이사해야 하는 근심이 적게 되어 낙토로 인식되었다. 남사고의 ≪十勝記≫에도 유구·마곡사 두 골짜기 사이를 피난할 만한 곳이라 하였다. 사대부들이 많이 살던 고을이라 滄江書院·道山書院·孔巖書院 등의 여러 서원도 볼 수 있다.(오상학)

  • 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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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錦山이다. 고을의 동쪽을 달천이 북류하여 충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花岩書院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고, 이황·노수신·김제갑·유근을 배향하였다가, 그 후 박세무·이문건·허후·이신의·김유형·박지겸·허조 등을 추배하였다.(오상학)

  • 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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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남포현의 읍치는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비인과 더불어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한다. 聖住山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 산중이 평탄하여 시내와 산이 밝고 깨끗하며, 물과 돌이 맑고 시원스럽다고 한다. 산에는 검은 옥이 나는데 벼루를 만들면 진귀한 물건이 된다.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죽었다고도 하며 시내와 물 사이에 살만한 곳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는 聖住寺가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절에는 최치원이 지은 大朗慧和尙의 탑비가 있었는데 지도에는 孤雲碑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九龍山으로 맥세가 해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읍치 남쪽의 古邑面은 과거 縣이 있던 자리였다. (오상학)

  •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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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영춘현과 더불어 충청도의 동부에 위치한 고을로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명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니, 그 청숙한 기운이 반드시 축적될 리 없다고 하였다. 단양팔경으로 유명하며 지도에도 옥순봉, 구담, 사인암, 도담 등의 경승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島潭은 세 바위가 못 가운데 뾰족하게 솟아 있고 그 위에는 푸른 절벽이 만길이나 되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서쪽의 可隱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고려말에 왜구가 침입해 왔을 때 인근의 제천, 청풍과 이 고을 주민들이 대피했던 곳이기도 하다. 造山面에 보이는 丹岩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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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은 현재의 당진군 당진읍, 석문면·고대면·정미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邑城은 正統 경신년에 쌓은 돌 성으로써, 둘레가 1천 9백 54척에 높이는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 읍치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지에 입지하며, 하천의 흐름과 같은 방향인 북쪽의 아산만을 향하여 트여있다. 현재 이 지역은 석문 방조제의 축조로 바다와는 차단되었으며, 도로 교통이 발달되었다. 섬은 難知島와 蒜島가 표시되어 있으며, 倉庫는 外倉과 西倉이 있다. 남쪽에는 興世驛이있으며, 봉수로는 중앙에 高山 봉수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沔川군 倉宅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海美의 安國山과 호응한다. 남부는 서산시와 예산군을 따라 내려온 가야산맥이 당진 부근까지 뻗쳐서 군내의 고지대를 이루며, 아미산(峨嵋山:350m)은 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남북의 분수령을 이룬다. 아미산 서쪽에는 이배산(利背山:243m), 다불산(多佛山:325m) 등의 잔구성 구릉이 발달했다.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산이 거의 없고 낮은 구릉과 넓은 평야지대로 되어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은 채운평야(彩雲平野)에 전개되어 있으며, 북쪽의 고대면(高大面) 용두리(龍頭里)·진관리(眞館里)를 잇는 풍요한 농업지대이다. (이상균)

  • 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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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는 예당저수지의 축조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다. 금북정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예산, 아래로는 청양과 연결된다. 면의 남서부에 임존산성이 있는 봉수산이 솟아 있으며, 대부분 지역이 150m 내외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중심부를 지금의 무한천인 京結川이 북류하고, 동부에는 지금의 新陽川인 達川이 서류하면서, 하천 유역에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이 지역 최대의 예당 저수지가 들어서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任存古城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높이 484m의 鳳首山과 그 동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으로, 일명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周留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韓山의 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즉,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한 부흥군은 최후의 거점지로서 이 성에서 黑齒常之 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신라군의 군량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각각 90여리쯤 떨어져 있어 백제가 수도를 公州와 扶餘로 천도한 뒤부터 수도방어의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후삼국시대 당시 王建과 甄萱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한다.(오상학)

  •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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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은 조선시대 1405년(태종5)에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을 합하여 덕산현이라 하였고, 1847년(헌종 13) 덕산군으로승격하였는데 1913년 예산군에 병합되었고 그 이름은 덕산면으로 남아있다. 지도상에서의 덕산은 현재 예산군 덕산면, 봉산면, 고덕면, 삽교읍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덕산읍 읍내리에 해당된다. 이 지도상에서의 특징적인 모습은 동쪽에 하천(삽교천)과 서, 남, 북에 산(가야산, 팔봉산, 상왕산, 덕숭산, 대덕산, 앵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읍치는 이러한 큰 사각형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 지역은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서쪽의 산지에서는 시내가 흐르고 동쪽에는 넓은 들판과 하천이 흐른다. 작은 하천들은 삽교천으로 모여들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동북쪽에 非方串에 倉이 보인다. 주변의 사찰로는 가야사, 수덕사, 서림사, 용연사, 수암사, 운암사 등이 유명하다. 이 지역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온천인데 약물터로 전해오다가 1926년 온천으로 개발되었다. 주변에 둘러싸인 산과 사찰, 그리고 온천,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忠義祠 등 국민관광지로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 지역은 덕산 송씨·황씨·고씨·오씨·문씨·장씨(蔣氏)의 관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상균)

  • 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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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지금의 남원천이 고을 내부를 북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고을 동쪽의 泛川面은 이 고을의 월경지로 어염의 수취를 위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서쪽의 蒙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1,314척이었다. 고을 북쪽의 蒼宅山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서쪽으로 당진의 高山 봉수와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의 槐臺吉串과 호응한다. 고을의 북쪽에는 牧場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倉宅牧場이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면천 읍성은 조선 초기 해안지역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며, 남문·동문·서문이 있다. 남문은 甕城을 동반하고 있으며, 문루가 남문과 서문에 있었다. 성벽에는 7개의 雉城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세종대까지는 읍성의 서북쪽에 있는 잣골의 蒙山城에 군창을 두고 있었으나, 세종 때에 마련된 종합적인 倭寇 대책으로서의 읍성 축조 계획에 따라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이다.(오상학)

  • 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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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에 해당하여 여러 산성들이 축조되기도 했다. 고을 북쪽에는 온조왕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표시되어 있다. 고을 서쪽의 鷲岩山에는 龍穴이 있는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한다. 이처럼 각 고을마다 1묘3단(향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뿐만 아니라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있었는데, 물이 고인 沼나 연못, 산정상의 움푹 패인 곳이 적격지로 인식되었다. 읍치 서북쪽의 聖居山은 고려 태조가 고을 서쪽 愁歇院에 거둥했다가 산이 성스러워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서원은 道東書院이다. 이 서원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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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이 곳의 지형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간저지를 흐르는 금강유역에 발달한 소규모의 침식분지이다. 문의라는 지명은 붓끝같이 생겼다는 문필봉에서 나온 것으로 義를 위하여 글을 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쪽으로 荊江에 임하였고 산에 울창한 빛이 적지만 강을 연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한다. 읍치의 동쪽 漏峙에는 두 개의 바위굴이 있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아홉 용이 살던 곳이라 하고 이곳의 마을 이름도 九巢라 하였다 한다. 西道面에는 두 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노강서원과 검단서원이다.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 鄭Ꜿ, 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오상학)

  • 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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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이중환의 ≪擇里志≫에 의하면, 가야산 앞뒤에 있는 내포 고을 가운데 산천이 가장 훌륭한데,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불린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唐山이다. 오서산에서 뻗어온 맥세가 길게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다. 읍치의 서쪽에 水營이 표시되어 있다. 본래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는데 1421년(세종 3)에 都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66년(세조 12)에 水軍節度使를 두었다. 충청도 수군의 총본부로 둘레가 3,174척이 되는 성곽도 축조되어 있었다. 이 성곽은 현재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수영의 옆에 표시된 永保亭은 水營 안에 있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다.(오상학)

  •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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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지금의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보은은 땅이 매우 메마른데, 館代는 속리산 남쪽과 甑項 서쪽에 위치하여 들이 넓고 땅이 기름져 가장 살만한 곳이고, 대추가 잘되어 대추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세조가 이곳 속리산의 법주사에 행차할 때, 벼슬을 내린 정이품송이 유명하며 이 곳에서 왕의 병이 치유되자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報恩이라는 지명을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馬老面에 있는 서원은 象賢書院을 말한다. 이 서원은 1549년(명종 4)에 창건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사액되었는데, 金淨·成運·成悌元·趙憲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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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공주와 더불어 금강 이남에 위치한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백마강가에 위치한 백제의 古都로 釣龍臺·落花岩·自溫臺·皐蘭寺는 모두 백제시기의 고적이며, 강에 다다르면 암벽이 기이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비좁아 평양·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쓰여 있다. 백제 때는 공주와 함께 일국의 도읍지였으나 조선시대의 부여는 감영이 있었던 공주에 비해 작은 고을로 전락하였다. 금강가에는 유서깊은 명소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과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釣龍臺도 보인다. 백마강 근처에  白江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白江 李慶輿, 愼獨齋 金集 등을 배향한 浮山書院이다. 읍치 동쪽에는 백제 충신 成忠과 階伯, 그리고 고려충신 李存吾 등을 배향한 義烈祠가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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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남포, 아래로는 서천과 연결된다. 면의 중앙부에 월명산이 있으며 북동쪽은 대체로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이다. 서부는 서해안에 근접하면서 점차 평탄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포와 더불어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읍치에는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둘레 1,168보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성 서쪽의 馬梁鎭(서면 마량리)은 水軍僉節制使의 진영으로 본래 남포현(보령시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鎭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 남포의 원래 진영이 배를 정박시키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오상학)

  •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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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인종 때 부성(富城)에 현령을 두었으나 1182년(명종 12)에 이속(吏屬)이 수령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읍치(邑治)를 지곡에서 오늘의 서산시로 옮겼다. 1284년(충렬왕 10) 주민인 정인경(鄭仁卿)의 공로로 다시 복군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셋이 합쳐져 서산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서산은 서산시 14개 동(읍내동·동문동·온석동·갈산동·잠흥동·수석동·예천동·석남동·죽성동·양대동·오남동·오산동·장동·덕지천동) 및 대산읍·성연면·지곡면·팔봉면·음암면·운산면·인지면·부석면, 태안군 안면읍·고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邑治)는 현재의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위치했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주위가 3천 7백 10척(약 1,200m)에 높이가 12척이며,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 성안으로 흘러 들었다고 한다. 지도상에서는 산들이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서 보인다. 봉수는 현재의 부춘산(187.6m)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倉은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한 개씩 있다. 서산은 서·남·북 3면이 모두 바다로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이 지역이 운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태안계와 경계하는 지점에 굴포(掘浦)라는 곳이 있으며, 안면串은 안면도가 되었던 것이다. 지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굴포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그 간격이 상당히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 한양으로 조운선이 다녔는데 육지에서 멀리 돌아서 다니면 풍랑에 위험하다하여 해안선에 가까이 접근하려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 증거가 굴포에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것이며, 안면도는 실제로 조선 인조 때 운하를 팜으로써 섬이 되었다. 조선시대 안면도는 송림으로 유명했으며 목장도 있었는데, 지금도 울창한 송림을 볼 수 있다. 지도상에서의 안면도는 산과 어촌명만 표시되어 있다. 죽도는 간월도의 남쪽에 있는데, 지도상에서는 간월도의 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서산지역은 해발고도 100~300m 내외의 낮은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완사면 및 구릉지들이 있을 뿐, 큰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한데, 여러 차례의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상당부분이 완만해졌다. (이상균)

  •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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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중앙에 烏石山(127m)이 있고, 북동부는 대부분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대이다. 남서부는 비옥하고 평탄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며, 길산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韓山·林川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그 옆에는 전선을 정박시키던 戰船廠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 해안의 장항면은 오늘날 장항선의 종착지로 유명한 장항이다.(오상학)

  • 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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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읍치는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금강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지금의 석성천이 水湯川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논산천이 흐르면서 금강과 합류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恩津과 더불어 들에 위치했으나 땅이 메말라 수재와 한재를 자주 당한다고 한다. 산간 계류가 풍부하지 못한 지형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도 산지는 해발 421미터의 태조봉에서 금강변의 파진산으로 내려온 맥세 정도만이 그려져 있다. 서쪽 하천가의 波鎭山은 기암절벽이 솟아 있고, 그 옆에 배를 대던 곳이 鳳頭津이다. 猪浦에는 江倉이 있었는데 고을의 세곡을 이곳에서 수합하여 서울로 운반하였다. 읍치 서쪽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尹文擧를 배향했던 蓬湖書院이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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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내포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아산, 아래로는 예산과 연결된다. 동쪽에 峙鶴山(135m), 서쪽에 鶴城山(183m)·孟山, 德巖山(261m) 등의 산지가 있고 대체로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북부의 곡교천과 오목천 유역은 탕정평야로 이어지는 비옥한 충적평야이다. 이 고을은 고려시대부터 인근 고을의 租稅를 거두어 해상으로 조운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1391년(공양왕 3)에 고을의 서쪽 獐浦에 성을 쌓고 溏城이라 이름짓고 근처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여 해상으로 조운하였던 것이다. 지도에도 북면의 강가에 창고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오상학)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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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은 현재의 아산시 염치읍, 인주면, 영인면, 둔포면, 음봉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위치했었다. 남쪽으로 온양, 신창과는 곡교천을 경계로 하였고, 동쪽으로는 천안과, 서쪽으로는 아산만과 면해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직산, 평택과 경계를 이루었다. 읍치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 공세창은 아산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고을들의 세곡을 이곳에 수납하였다가 漕運하여 서울로 나르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곳이다.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嘉靖 계미년에 비로소 집을 지으니 무릇 80간이었다고 한다.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동남쪽 방향으로는 忠武公祠宇가 있다. 이는 충무공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에 세워졌고 이듬해에 사액되었다. 봉수로는 연암산 봉수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천안의 대학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직산의 망해산과 호응한다. 현재 이 지역은 아산만 방조제의 축조로 바다와의 연계성은 거의 없어졌으며, 충청도와 경기도를 잇는 도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상균)

  •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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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읍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금강의 지류인 東津江이 흐르고 주변으로 산지가 지역을 감싸안고 있다. 북으로는 전의, 남으로는 공주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城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중앙을 지금의 연기천이 흘러가 東津에서 만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청주 赤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오상학)

  •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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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양촌면 일부, 벌곡면, 부적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연산면 연산리 부근에 있었다. 連山이란 지명은 산들이 연달아 뻗어간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고을의 동쪽으로 금남정맥의 줄기가 계룡산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이 마지막 격전을 치렀던 황산벌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백제군이 주둔했던 황성이 남아 있고 계백장군 묘도 전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산지가 많지만 땅이 기름지다고 했다. 이 지역은 다른 고을보다 서원이 비교적 많이 세워져 있었다. 龜山書院(연산면 오산리)은 1702년(숙종 28)에 창건되어 윤전, 윤원거, 윤순거를 배향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고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또한 休亭書院은 1700년(숙종 26)에 창건되어 유무 선생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忠谷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어 백제의 계백장군과 조선의 사육신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 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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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동쪽으로 조령을 넘으면 경상도 문경과 통한다. 鳥嶺은 일명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조령의 위쪽에 표시된 鷄立山은 계립령으로 보인다. 계립령은 속칭 마골재 또는 하늘재라고 불린다. ≪三國史記≫에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3)에 계립령을 처음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늘재는 전략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쟁탈전이 발생하였고 고려시대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고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령이 개척되면서 서서히 고개의 기능을 상실하여 지도에서도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령의 서북 사면에 있는 安保驛은 온천으로 유명한 지금의 수안보에 해당한다.(오상학)

  •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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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저산성 구릉지로 침식분지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족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다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 고 쓰여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옆에 있는 성황산이다. 남쪽의 龍化倉이 있는 곳은 고려시대 때 龍化縣이었다. 동면에 있는 重華寺는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화신리 天摩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法住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서 701년(효소왕 10) 사이에 義湘大師가 창건하고 龍華寺라 하였으며, 당시에는 南角山 기슭에 있었다. 그 뒤 화엄종의 대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260년(원종 1) 普覺國師가 중창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폐사되자 명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고 사찰명을 중화사라고 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休靜이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고, 이 절의 승려들은 모두 騎虛의 의승군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그 뒤 8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77년(숙종 3)에 중건하였고, 1797년(정조 21) 淨腎이 殿堂을 모두 중수하였다.(오상학)

  • 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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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본래 고구려의 乙阿旦縣이었는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고을의 속현으로는 於上川縣이 있었는데 지도 제작 당시에는 魚上川面으로 직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毗摩羅山에는 강을 끼고 난 절벽에 석벽을 파서 길을 만들었는데 아주 험하다고 한다. 이는 벼랑에 낸 棧道를 말하는 것으로 영남대로에도 문경에 兎棧이라는 대표적인 잔도가 남아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소재)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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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 들어와 919년(태조 2년)에 예산현이라 개칭하였다. 지도에서의 예산은 현재의 예산읍 중심부와 신암면, 오가면, 대술면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금오산 남쪽에 있는 邑治는 현재의 예산읍 예산리에 해당된다. 읍치에서 북쪽으로 2리 지점에 있는 金烏山이 鎭山이다. 지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것은 무한천이고 좌측을 돌아가는 것은 삽교천인데, 이들은 모두 북으로 흘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삽교천(揷橋川)과 그 지류인 무한천(無限川) ·곡교천(曲橋川) 등 3개 하천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는 예산군과 당진군의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고 부르는데, 옛날에는 內浦라고 불렀으며 쌀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예산군은 예산, 덕산, 대흥이 통합된 것으로써 과거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도에서 북쪽의 무한천 변에 위치하고 있는 浦倉은 현재의 예산읍 창수리에 해당하는데, 과거에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창고였다. 중앙부에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으로써 숙종 을유년(1705년)에 세웠고, 갑오년(1714년)에 사액 하였다. 지도상에 나타난 읍치의 위치를 보면, 뒤에는 진산인 금오산이 있고, 읍치의 앞으로는 무한천의 지류가 흐르며 그 앞으로는 望山이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도 산과 하천이 읍치를 에워싸고 있는 형상임을 볼 수 있다. (이상균)

  •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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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지역이 동남쪽으로 무주와 황간까지 길게 뻗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 이 고을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이들 속현이 면으로 편제되어 직촌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현이 있던 곳은 창고가 설치되어 있어서 여전히 지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15세기 후반 72곳이나 달했던 속현은 17세기에 이르러 거의 소멸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해발 494미터의 마성산이다. 읍치는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 郡東面의 表忠祠는 趙憲·金集·宋浚吉·宋時烈·趙完基 등을 배향한 사액서원이었다.(오상학)

  •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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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은 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했다. 현 아산시의중앙부를 西流하는 곡교천(曲橋川) 남안을 점유한 지역의 구행정구역은 1442년(세종 24) 이래 1914년까지 500여 년간 존속해온 온양군의 지역으로, 그 중심지역은 온양군의 읍내면이었다. 1914년 아산 ·온양 ·신창(新昌)의 3군이 아산군으로 통합되면서 온양면이 되어 ‘온양’이란 이름을 계속 지녀왔다. 본 지도에서는 구체적인 기관 등이 나타나 있지 않고, 전체적인 판도가 제시되어 있다. 읍 북쪽 2리 지점에 있는燕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가 있는 곳은 사방이 하천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천은 북쪽으로 흘러 곡교천에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溫泉은 읍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태조·세종·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御室이 있다. 서쪽, 남쪽,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 북쪽에서 곡교천으로 합하여 북동쪽으로 돌아가는 형상이 인상적이다. (이상균)

  • 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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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지금의 논산시 강경읍, 연무읍, 은진면, 가야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논산시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수운의 이점이 큰 고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바다 조수가 강경을 지나 들어오므로 들 가운데 여러 냇물과 골짜기에 배가 통하는 이익이 있다. 특히 강경은 큰 강이 조수와 통하나 물맛이 그리 짜지 않은데,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반쯤 짠물이 土疾을 고치는데 가장 좋다’고 쓰여 있다. 고을 서쪽의 금강변에는 江倉과 함께 江景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후기 금강 유역권에서는 가장 큰 포구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해산물과 육지의 각종 산물들이 이곳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읍치의 북쪽에는 이 고을의 명물인 觀燭寺의 미륵이 표시되어 있다. 관촉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는데, 은진미륵은 36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오상학)

  •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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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하면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迦葉山이다. 부용산을 분수령으로 세 개의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남사면에서 美湖川이 발원하여 富潤川과 草坪川을 합류해 진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동사면에서는 陰城川이 발원해 남류하면서 甲山川과 九安川을 합류해 음성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서사면에는 鷹川이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하곡평야를 이루고 淸美川과 합류해 남한강에 흘러든다. 고을의 다른 명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에는 가섭산에 봉수가 설치되어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주 望夷山 봉수에 응하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오상학)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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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산은 1414년(태종 14)에 石城과 합쳐서 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1646년(인조 24) 은진, 연산, 이산을 합쳐 하나의 현으로 하고, 恩山이라 명명하였다가 1656년(효종 7)에 각각 복구하였다. 1776년(정조 1)에 尼山을 尼城으로 고쳤고 1800년(순조 원년)에는 이성을 魯城으로 개명하였다. 지도에는 尼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776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산은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고 북으로 공주, 남으로 은진을 연결하는 직로 상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連山과 더불어 산지가 많지만 땅이 기름지다고 한다. 고을의 중심부를 노성천이 흘러가고 지금의 논산천이 남서쪽으로 흘러가 금강과 합류한다. 고을 남쪽에는 論山橋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 논산은 자그마한 취락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이 지역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사방으로 나 있는 국도와 호남선의 개통으로 논산은 공주나 부여를 제치고 이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것이다. 읍치의 옆에는 闕里祠가 표시되어 있다. 궐리사는 공부자가 생장한 마을이 궐리촌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공자의 유상을 봉안한 영당을 말한다. 1708년(숙종43) 공징로, 공사중 등이 재상 이경억을 따라가 공부자 유상 일체를 얻어왔고, 1758년(영조 34) 이제후 등의 상서로 이 때 가져온 공부자 유상일체가 노성의 궐리사에 봉안되었다. 궐리사는 국내에 오산과 노성의 2개소가 있다.(오상학)

  • 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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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임천은 고을 동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는 수륙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에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금강이고 북쪽에 접하고 있는 것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금천이다. 지도에 연맥의 형태로 표시된 산지는 해발 200미터 이내의 구릉성 산지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韓山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지도에도 금강변에 여러 나루터가 표시되어 있다. 동쪽의 鼓岩津은 일명 古多津이라고도 하는데, 석성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조수가 빠른 곳이다. 남쪽에 위치한 書院은 七山書院인데, 1687년(숙종 13)에 세워졌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여 亂後에 이 고을에 귀양왔던 兪棨(1607-1664)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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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본래 백제의 仇知縣이었는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청주에 예속시켰다. 고을의 중심부를 금강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동면에는 해발 459미터의 雲住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李城인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며 둘레가 1,184척이라 한다. 또 하나는 金伊城으로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528척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고을의 면적이 작은 만큼 지도에 수록된 내용도 면명, 주요산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오상학)

  •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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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동쪽에 계봉산, 서쪽에 칠갑산, 북쪽에 明德峰(320m)·대덕봉 등이 솟아 있어 대부분 지역이 기복이 심한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잉화천과 치성천이 남류하며 그 유역에 약간의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읍치 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되던 창고였다. 왕진은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중요 나루터였다. 고을 서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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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제천은 해발 250m 내외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하며, 강원도의 영월과 정선지방의 관문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고 쓰여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북쪽에 있는 龍頭山이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의림지는 제천의 대표적인 제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도 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헐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가는 고갯길로는 朴達峙가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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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남북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한 고을로 북쪽으로 강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지도에 보이는 外也串面·安中面·堰里面·慶陽面이 그것이다. 경양면은 경양현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 월경지들은 서해안의 어염 수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2,948척, 높이가 13척이었다. 고을의 북쪽 成歡은 붉은 색의 원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는 찰방이 파견된 역으로 인근의 신은, 김제, 광정, 일신, 경천, 평천, 단평, 유구, 김사, 장명, 영춘 등의 속역을 관장하였다. 남쪽의 성거산에는 온조왕의 도읍했다는 尉禮古城이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진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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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계룡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지류가 남쪽에서 돌아 나간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공주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연산, 남쪽으로는 진산과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고을에 있는 九峯山이 남쪽에 불끈 솟아서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의 東郊보다 낫고, 田地가 아주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가 조금 멀어서 서쪽으로 강경과 교역한다고 되어 있다. 지도에도 계룡산의 동쪽 가지인 錦繡山(해발 532미터)에서 뻗어온 九峯(해발 264미터)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 남쪽 진산과 접하는 곳에 있는 安平山은 일명 押岾山이라고도 한다. 고을의 내부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갑천이다. 지도에 보이는 逍遙亭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쇠퍼니(풀무집) 뒷산에 있었는데, 정자는 없어지고 정자 터만 남아 있다.(오상학)

  •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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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진천은 청주에 비해 들이 적고 산이 많다. 산골이 겹쳐졌고 또 큰 내가 많다. 그러나 모두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 바다와 겨우 100리 거리인 까닭에 생선·소금의 이익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 서북쪽에는 百源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봉수는 바로 所乙山烽燧이다. 소을산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려져 있다. 남쪽으로 청주 巨次大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에 응한다. 고을 북쪽 경기도 죽산현과의 경계에는 廣惠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원 옆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충청도의 신구관찰사가 印을 교대하던 곳이라 한다. 광혜원은 교통의 결절에 위치해 있어서 해방 이후 빠르게 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오상학)

  •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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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목천으로 빠지는 길이 충청도 경상도로 가는 길이고, 차령을 넘어 남쪽으로 가는 길이 호남대로이다. 또한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이런 지역적 특성은 지명에서도 보이는데 북쪽의 王字山은 고려 태조가 군대를 여기에 주둔시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도 여럿이 보이는데 廣德寺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652년(진덕여왕 6) 慈藏이 창건하였고, 832년(흥덕왕 7) 珍山이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의 하나로서, 사찰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8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가 있었다. 또한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萬藏閣 80칸, 千佛殿도 3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오상학)

  •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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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소백산맥 서사면의 산간분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현의 중앙을 南川이 북쪽에서 남류하여 금강에 합류하였다. 북쪽에 있는 酒城面은 이 고을의 월경지이다. 원래 酒城部曲으로 상주에 속해 있었는데 1390년(고려 공양왕 2) 監務를 둘 때 땅이 적다 해서 이곳에 붙인 것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己城山으로 여기에는 돌로 쌓은 산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2,091척이고 높이 8척, 성안에는 우물과 군창이 있었다 한다.(오상학)

  • 청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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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음성에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산수가 촌스러워 살 곳이 못된다고 평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이 북쪽에 頭陀山·訥文山, 동쪽에 鳳鶴山, 남쪽에 坐龜山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磻灘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曾子川이 현의 중앙부를 흘러 전체적으로 산간분지의 지형을 이루었다. 증자천의 옆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성현의 명칭을 자연물에까지 붙이고 있는데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인 유교의 영향력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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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청양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산간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牛山인데 일명 騎龍山이라 한다. 여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전해진다. 고을 동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 산 기슭에는 長谷寺가 馬谷寺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장곡사는 850년(문성왕 12)에 普照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중건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46년(충목왕 2)에 현재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상대웅전을 중수하고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를 지었다. 이 절은 다른 절과 달리 대웅전이 두 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읍치의 남쪽에 旧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금정역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다. 이 시기에는 홍주의 龍谷驛으로 옮겨가 있었다.(오상학)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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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하는데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그려 넣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靑山의 월경지인 酒城面이 끼어 들어가 있다. 읍치에는 청색의 정방형의 기호를 써서 병영을 표시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읍치는 서향인데 지대가 낮고 냇물은 높아 해마다 수재를 걱정하고, 또한 동쪽은 높고 북쪽은 낮아 은은한 살기가 있다고 한다. 읍치의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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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남한강과 접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수운의 이점이 있던 고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의 田賦를 이곳에서 수합하여 개성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宋處寬의 寒碧樓記에는 산천의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 남도의 으뜸이라 적고 있다. 한벽루는 강변에 있는 누정으로 제법 시원하면서 그윽한 경치가 있어서 당시 이름난 누각이었다. 그러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북쪽에는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로 잘 알려진 朴達峙가 표시되어 있다. 近西面의 嚴城遷은 험준한 산허리에 난 棧道이다. 이것은 지형적 장애를 극복하여 길을 만든 것으로 길의 폭도 좁고 험한 것이 특징이다. 황강역 우측에 보이는 서원은 黃江書院이다.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되었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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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받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면적이 큰 고을로 서쪽 안성, 목천까지 관할 구역이 뻗쳐 있다. 남한강을 통한 수운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대표적인 곳이 金遷과 可興이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편으로 흘러 나가므로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더불어 생선과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하다.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룰 정도였다. 가흥에는 창고를 설치하여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나르는데, 지도에도 창고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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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은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소태현(蘇泰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 와서 운주(運州)에 속하였다. 신라의 영토가 된 후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 소태현으로 계속이어지다가 1298년 태안으로 바뀌었다. 태안은 현재의 충청남도 태안읍, 태안읍 남면·근흥면·소원면·원북면·이원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邑治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5백 61척에 높이는 12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읍치의 뒤편으로는 백화산(284.1m)이 있는데 이는 한자가 의미하듯이 흰 돌 즉,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태안 지역의 산줄기들은 대부분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역은 왜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서 여말과 선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봉수는 백화산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서산군의 북산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도비산과 호응한다. 태안은 남·서·북의 3면이 바다와 접해있으며, 서산과 경계를 이루는 곳(굴포)은 남쪽과 북쪽에서 잘록하게 좁혀오는 지역으로써, 고려 인종때 이 곳을 파서 북쪽과 남쪽의 바다를 연결하려 하였으나 돌이 물밑에 깔려 있었고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다 메워버리므로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도에서 海倉은 읍치의 북쪽에 보이는 금굴산 밑에있었고, 다른 倉은 안흥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쪽에 보이는 안면도는 홍주·서산·태안의 세 곳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안면도의 남쪽은 서산땅이었으므로 구체적인 지명표기는 되어있지 않다. 본 지도의 맨 왼쪽 위에는 선갑도와 문갑도가 열 두 개의 섬들과 함께 있는데, 현재는 인천광역시 관할에 해당한다. (이상균)

  •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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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행정구역상 복잡한 변동이 있었다. 1398년(태조 7)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을 경기도에 이속시키면서 현령을 두고,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으나, 평택현은 그대로 충청도에 남아 있었다. 1424년(세종 6)에 진위현과 분속되었던 송장현이 1433년 다시 진위현에 합속되었다. 평택 중부에 수원부의 속현으로 영신현을 두었던 것은 犬牙相入에 따른 것이다.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로 환원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편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1596년(선조 29) 직산현에 이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평택현으로 복구되었다. 지도에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그려져 있다. 西面에 있는 서원은 褒義書院이다. 이 서원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城山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있는 성곽이다. 구릉 위에 위치한 토성으로 일명 農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양식을 도둑맞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神僧 道詵이 이곳의 생김새를 보아 축조했다고도 하며 임진왜란 때에 왜구가 들끓어서 농민들이 토성을 쌓고 스스로 보전하였다고도 한다.(오상학)

  •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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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한산군의 읍치는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 있었다. 한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을 흐르는 한산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부에 건지산·冠頭峰(140m), 남부에 鳳凰山(120m), 북부에 月城山(139m) 등의 구릉성 산지가 있으며, 북동부에는 余士川, 중앙부에는 단상천, 남부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어서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舒川·林川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지도에도 남쪽 강변에 瓦草浦, 竹山津 등의 포구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麒麟山으로 북쪽에서 뻗어 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 그려진 書院은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文獻書院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稼亭 李穀과 牧隱 李穡 두 분을 配享하기 위하여 1594년(선조 27)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1610년(광해군 2)에  韓山 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 해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오상학)

  •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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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美는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과 당진군 정미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해미면 읍내리에 있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축 읍성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그 둘레는 1,800(2천 6백 30척)m, 성의 높이는 5m, 성 안의 넓이는 6만 4350㎡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서·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우물이 여섯 개, 성 밖은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있는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1418년(태종 18)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으나, 그 후 병영은 청주로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는 방조제를 막아 간척하여 다소 바다에서 먼 내륙이 되었지만, 본 지도에서는 驛, 津, 倉이 읍치와 가까운 바닷가 포구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봄으로써 당시에 이 곳의 위치적인 중요성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지도의 북쪽에는 安國山 烽燧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서산군의 北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의 高山과 호응한다. (이상균)

  • 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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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금천이 고을을 감돌아 흘러간다. 서부는 산지, 동부는 구릉지대, 그리고 남부의 금천 유역은 범람원을 이룬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飛鴻山이다. 읍치의 길가에는 이 고을의 驛站인 宿鴻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의 옛날 이름은 非熊이었는데 태종 때 홍산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지관의 말이 있어서 숙홍으로 고쳤다고 한다. 上東面에 표시된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어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尹集·洪翼漢·吳達濟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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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995년(성종 l4)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1012년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홍주는 현재의 서산시 고북면·운산면, 당진군 합덕읍·신평면, 홍성군 홍성읍·홍북면·금마면·홍동면·장곡면, 청양군 화성면·남양면·비봉면, 보령시 청라면·천북면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있으며, 홍주읍성은 예부터 큰 고을이었고 여러 차례 격전을 치른 곳이었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주위가 4천 9백 15척에 높이는 15척이고, 그 안에 세 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홍주는 대체로 산악과 구릉으로 연결된 지대이나, 다만 금마천(金馬川) 유역의 평지만이 유일한 쌀농사가 되고, 대부분은 산악이 기복된 사이에 좁은 들판을 이룬다. 오서산(烏棲山:791m)은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지맥으로서 광천읍 남동쪽에 솟아 홍성·보령·청양의 경계와 하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오서산에서 발원하는 광천천(廣川川)은 광천읍 중앙을 관류하여 천수만으로 유입하고, 용봉산(龍鳳山:379m)·봉수산(鳳首山:484m)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금마천은 홍성읍·홍북면(洪北面)·금마면(金馬面)·홍동면(洪東面)을 거쳐 흐르면서 여러 지류를 합쳐 삽교천(揷橋川)에 합류, 아산만(牙山灣)으로 유입한다. 현재의 천북면에 위치하던 흥양곶은 당시에도 목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지금도 천북 목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봉수로는 흥양곶 봉수(興陽串烽燧), 고구성산 봉수(高丘城山烽燧)가 있으며, 역원으로는 세천역과 인후원이 있다. (이상균)

  • 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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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추풍령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충청도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간 고을이다. 서쪽으로는 영동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의 金川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추풍령의 모습이 도로와 함께 그려져 있다. 추풍령은 백두대간을 넘는 중요한 고개로 조령, 죽령 등의 고개와 달리 나지막한 고개인데, 임진왜란 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의병장 張智賢이 경상도 관찰사尹先覺의 裨將이 되어 부하 수천명을 거느리고 황간의 추풍령에서 왜군 2만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물리쳤으나, 다시 錦山 방면에서 진격하여 오는 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의 협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읍내면에 있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하여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時烈을 배향했다. 梅下面의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인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 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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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북쪽 지역은 금강 상류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공주와 옥천에 접해 있다. 고을의 동쪽에는 청주의 월경지가 끼어 들어가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족의 계족산(해발 423미터)으로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바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었는데, 봉수는 동으로 옥천군 環山과 응하고, 북으로는 문의현 所伊山과 응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산천이 조촐하고 깨끗하며 흙빛이 맑아 한양 동교와 같다. 들이 매우 메말라 논의 수확이 적고, 주민들은 오직 목화 심는 것으로 업을 삼는 바, 땅이 목화 가꾸기에 가장 알맞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암 송시열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북쪽 금강가의 荊角津은 일명 梨遠津이라고도 하는데, 근원이 전라도 무주현에 이르러 錦江이 되고, 서천군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이 지역에는 사대부가 많이 사는 고장답게 서원도 여럿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서면에 들어서 있는 서원은 崇賢書院이다.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창건되어 그 해에 사액을 받고 金淨·宋麟壽·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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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이곳의 지형은 속리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삼면으로 감싸고, 남쪽으로 흐르는 末訖灘이 금강과 합류하는 산간분지를 이루었다. 서쪽에 있는 何摩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북쪽의 皮盤嶺은 청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고갯길이 아홉 번 꺽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으로 통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만첩 산중에 위치한 고을로 楓溪村이 살만하다 한다. 고을의 남쪽 老城山은 무쇠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지도에는 관내의 면과 주요 산, 고개 등이 표시되어 다분히 소략한 편이다.(오상학)

  • ▶평안도
  • 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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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서면, 양가면, 청룡면, 용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운전군 북부지역 일대이다. 청북정맥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대정강과 접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박천, 서쪽으로는 정주, 북쪽으로는 태천과 접하고 있다. 평안도의 別右營將이 주재하던 고을로 영장은 太守가 겸하였고 속읍은 가산·박천이고 屬鎭은 古城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鳳頭山이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배치하여 풍수적 형국을 강조하였다. 읍치 서쪽에는 曉星嶺이 있는데, 그 위에는 옛날 별에게 제사지냈던 曉星臺가 있다고 한다. 효성령은 일명 西門嶺 또는 속칭 石門嶺이라고 하는데 깎아지른 석벽과 높고 험준한 봉우리로 옛날부터 유명하였다.(오상학)

  • 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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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강계군 전체와 위원군 봉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과거 폐사군 지역을 포괄하여 평안도 고을 중에서는 가장 넓은 곳 중의 하나이다. 부 동쪽으로 백두산까지는 폐사군 지역이다. 四郡은 세종 때 강계부에 예속시켜 백성을 옮기고 그 지역을 비워버렸다. 그리하여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목이 울창한여 인삼이 많이 산출되고 해마다 봄가을에 백성들이 산에 들어가 캐도록 허가하여 그것으로 貢物과 稅賦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곳이 인삼 산지로 가장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을의 영역은 압록강 지류의 유역권에 해당하여 인근 고을과는 분수계에 의해 구분된다. 강계부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鎭과 堡가 유난히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鎭이 압록강변에 위치한 滿浦鎭이다. 이 진은 돌로 쌓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병마첨절제사가 주재하였던 곳이다.(오상학)

  •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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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강동면, 승호읍 대부분, 봉진면, 고천면, 원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강동군 서부, 평성시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고을의 서쪽으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가고 북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과 닿아있다. 북으로는 成川, 동으로는 三登, 남으로는 祥原, 서로는 평양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동쪽에 있는 大朴山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유명한 강동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216년(고종 3) 몽고군에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강동 땅은 격렬한 전란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쫓겨온 거란족들이 약 2년간 서북 각지에서 만행을 자행하던 끝에 1218년 12월 강동성에 주저앉게 되자, 哈眞이 이끄는 1만 명의 몽고군과 完顔子淵이 지휘하는 東眞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려고 강동성으로 진군해 왔다. 이 때 고려는 서북면원수 趙沖과 서북면병마사 金就礪로 하여금 몽고·동진의 군과 연합해 5만여 명의 거란인을 격파하였다. 서쪽 강변에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오상학)

  •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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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강서군 강서면·성암면·잉차면 일부·대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대안구 북부, 강서구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북으로는 청남정맥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대동강을 끼고 있다. 1136년(인종 14)에 西京 경내를 나누어 梨岳·大垢·甲岳·角墓·禿村·甑山 등의 고을을 합하여 강서현으로 만들고 영을 두었으며, 1394년(조선 태조 3)에 증산을 나누어 따로 현령을 두었다. 이 고을에는 학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읍치 동쪽 이 고을의 진산이 舞鶴山이고, 남쪽으로 栖鶴山, 中鶴山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의 진산이 舞鶴이기 때문에 학의 알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鶴卵丘가 있었다고 하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이 고을에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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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개천군 봉동면 남쪽을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읍치는 개천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청남정맥의 서북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덕천, 남으로는 자산·순천, 서쪽과 북쪽으로는 영변에 접하고 있다. 고려초기에는 접경에 위치하여 鎭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중기 이후 영토가 압록강까지 확장됨에 따라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大林山이다. 고을 동쪽에는 釜淵을 독특하게 그렸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라 한다. 남쪽 끝에 마름모꼴로 표시된 金城鎭은 別將이 관할하던 진영이었다. 남쪽 대동강변의 無盡臺는 수려한 경치로 이름난 곳이며 殷山으로 넘어가는 대로의 나루터가 있기도 하다.(오상학)

  • 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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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정주군 환주면, 옥천면 일부, 안흥면 일부, 임포면 일부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동래강 서안, 동북부, 천대리를 제외한 곽산군 전 지역이다. 읍치는 곽산군 초장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접해 있는 고을로 북쪽으로는 청북정맥이 뻗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凌漢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가 6,913척이다. 고을의 동남쪽에는 任海鎭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別將 1명이 있어 左別士監營을 差啓한다. 그 남쪽에는 구성의 월경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어염을 얻기 위해 존속된 것이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地古介가 표시되어 있다. 고개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인데, 원래 북부지방의 방언으로 나중에 표준말로 굳어진 것이다.(오상학)

  •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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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구성군과 전체와 곽산군 염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구성시, 천마군 동남부, 선천군 북부, 곽산군 천대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대정강의 지류를 끼고 있다. 동으로는 태천, 남으로는 정주·선천·곽산, 서쪽으로는 의주에 접하고 있다. 구성부는 1455년(세조 1)까지 정주목에 속하였다. 이후 龜州가 요충지인데 정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도로 龜城郡을 두고 여연과 무창 2읍을 폐지하고 그 백성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1467년(세조 12)는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 고을은 군사적 요충지답게 여러 진영과 산성이 있었다. 고을의 서쪽에 安義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예전에 隨州에 속해 있다가 조선 세조 때 來屬되었다. 그 서쪽의 植松鎭은 만호가 주재하던 군영으로 지도에는 관문성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식송진 아래에 있는 片月城은 土城으로 安義 백성들이 이 곳으로 피난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쪽의 龍城里面은 정주 건너에 있던 월경지로 鹽倉이 세워져 있다. 이로 본다면 이 월경지는 어염을 얻기 위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오상학)

  • 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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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덕천군 덕천면, 풍덕면, 일하면, 성양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삼흥리를 제외한 덕천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청남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대동강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寧遠, 서쪽으로는 价川, 남으로는 順川, 북으로는 寧邊과 접하고 있다. 淸南右營이 설치되어 있던 고을로 營將은 군수가 겸하였고 속읍으로는 덕천, 자산, 영원, 개천, 맹산, 은산 등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長安山이다. 동쪽 三灘面에는 三灘이 있는데, 영원과 맹산의 물이 이곳에서 만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쪽 金城山에는 산성이 그려져 있다. 조선 태조 때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3,125척 높이가 8척이었다.(오상학)

  • 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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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옥천면을 제외한 맹산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중흥리를 제외한 맹산군 전체이다. 읍치는 맹산군 향교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남동 내륙에 위치한 고을로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함경도 영흥, 남으로 양덕, 서로는 순천, 북으로는 영원에 접하고 있다. 본래는 고려 鐵瓮縣으로 1019년(고려 顯宗 10)에 孟州로 개명되었다. 철옹현이라는 읍명은 고을의 동쪽에 있는 鐵甕城에서 유래한 것이다. 철옹성은 둘레가 650척으로 사면이 절벽이고 항아리의 입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영변의 철옹성과는 규모면에서 비교된다. 이 고을의 鎭山은 豆無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서쪽의 秀羅山으로 되어 있다. 풍수상의 주맥과 고을을 진호하는 개념인 진산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 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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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박천군 박천읍, 덕안면 대부분, 동남면, 청룡면 일부, 용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박천군 대부분 지역, 운전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박천군 봉흥리 일대에 있었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청천강과 대정강을 끼고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영변, 남으로는 안주, 서쪽으로는 가산과 접하고 있다. 박천군은 본래 高麗의 博陵郡으로 995년(성종 14)에 博州防禦使라는 군명을 얻었고,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박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大定江은 일명 博川江이라고도 하는데 安州의 老江과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古城(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북 嘉山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방어상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1741년(영조 17)에 새로 설치한 鎭營이다.(오상학)

  • 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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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벽동군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송연리를 제외한 평안북도 벽동군, 충만강 以東을 제외한 자강도 우시군 전 지역, 평안북도 동창군 회상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에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九峰山이다. 본래 여진족이 살던 땅인데 고려 공민왕 때 여진족을 축출하고 이어 1403년(태종 3)에 벽단과 음동을 합하여 벽동으로 고쳤다. 접경 지역에 위치한 고을의 특성으로 인해 압록강 연안에 여러 진보가 설치되어 있다. 위로부터 廣平·小坡兒·大坡兒·楸仇非·碧團·小吉號鎭 등이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다. 특히 남쪽의 林土鎭에는 관문성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고을의 각지에 창고도 많이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 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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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朔州府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삭주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접하고 있다. 삭주부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강남산맥으로 인하여 압록강 수계에 속하는 소삭주와 대정강 수계에 속하는 대삭주로 구분된다. 이것은 과거에 읍치가 남쪽의 대정강 유역 대삭주에 있었으나 영토가 확장되면서 1466년(세조 12)에 읍치를 압록강 유역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 고을도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각종의 관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압록강변에 있는 仇寧鎭는 원래 의주 땅인데 세종 때 來屬되었다. 兵馬萬戶가 주둔하였으며 의주의 청수진과 노상탄의 통로, 전량동의 통로를 방어하였다. 남쪽에 있는 天磨鎭은 효종 때 別將을 두었다가 1705년(숙종 31) 첨사진으로 만들고 의주 玉江鎭을 방어했다. 동쪽에 있는 幕嶺鎭은 1647년(인조 25)에 진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었다가 1674년(현종 15) 만호로 승격시켰다.(오상학)

  • 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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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과 거의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양특별시 강동군 일부에 해당한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畿를 나누어 成州(현재의 성천)에 속한 新城·蘿坪·狗牙 세 부곡을 합하여 三登縣으로 하였다. 남쪽으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능성강(지도에는 熊川江으로 표기됨)을 끼고 있고 북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과 접하고 있다. 동으로는 成川, 북으로는 江東, 남으로 황해도 수안, 서로는 상원과 접하고 있다. 면적이 매우 작은 고을로 이에 따라 지도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鳳頭山이다. 위쪽 黃林山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서쪽에서 읍치까지만 그려져 있고 그 외는 그려지지 않아 미완의 느낌을 준다.(오상학)

  •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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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삼화면, 대대면, 금곡면, 귀성면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와우도 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삼화리에 있었다. 삼화는 평안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청남정맥의 끝자락에 접하고 있다. 동으로는 龍岡에 접하고 있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1686년(숙종 12)에 防營이 설치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지도에도 여러 섬들이 그려져 있다. 남쪽의 虎島에는 水軍僉節制使영이 있었는데 세종 때 廣梁으로 옮겼다.(오상학)

  •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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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풍동면, 수산면, 천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과 일치한다. 평안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대동강의 지류와 접하고 있고 아래로는 해서정맥의 지맥이 뻗어 있다. 따라서 동부와 남부 지역이 높고 북부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경계를 따라 남강이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군의 중심부를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상원천 유역에는 상원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으로는 황해도 수안, 서로는 평양, 남으로는 황해도 황주, 북으로는 삼등, 강동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盤龍山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觀音山은 산 속에 굴이 있는데 모양이 觀音같다고 한다. 이 고을은 예로부터 뽕과 삼으로 유명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 土産條에도 기재되어 있다.(오상학)

  • 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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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선천군 전부와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북부를 제외한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안의 고을로 동쪽에는 鐵馬川이 흐른다. 동으로는 곽산, 서로는 철산,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구성에 접해 있다. 의주대로의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여러 관방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서쪽의 東林城은 옛 宣州城으로 고려시대 宣州 때의 치소이기도 하다. 과거 이곳에 5領과 5部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남쪽에 있는 劍山城은 1627년(인조 5)에 府使 孟孝男이 돌로 쌓았고, 그 후 1631년(인조 9)에 府使 閔涵增이 증축하였다. 일설에는 防禦使 林慶業이 증축하였다고 한다. 그 옆의 淸江城은 淸江鎭이 있던 곳으로 1678년(숙종 4)에 召募別將을 두었다가 영조 때에 僉使鎭으로 승격시켰는데 1769년(영조 45)에 철산부의 서쪽 林山城으로 옮겼다. 身彌島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문헌비고≫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500필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오상학)

  • 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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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대구면을 제외한 성천군 전 지역과 순천군 은산면 남쪽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성천군 대부분 지역, 회창군 대부분 지역, 북창군 일부, 강동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고구려 비류국의 수도이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이곳에서 피난한 적이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劒鶴山이다. 읍치 북쪽의 屹骨山에는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구려 시조 東明王이 부여로부터 남하하여 힘을 겨루어 굴복시킨 沸流國의 왕 松讓이 쌓은 성이라고 나와 있다. 읍치를 돌아 나가는 강은 佛流江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곧 沸流江이다. 일명 卒本川이라고도 하는데 물이 흘골산 밑을 지날 때 산밑에 있는 굴 속을 뚫고 沸騰하여 흘러가므로 비류강이라 했다 한다. 동남쪽의 白靈山 밑에는 箕子影殿이 있는데, 1696년(숙종 22)에 세우고 그해에 懸額하였다. 이 고을에는 곳곳에 창고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서북쪽의 溫水面에는 溫井이 보이고 동쪽의 靈臺山 부근에는 은을 캐던 銀店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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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동송면, 조운면, 검산면, 서해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서부를 제외한 숙천군 전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바다에 연해 있고 동쪽으로 청북정맥에 연결된다. 고을에는 淸南前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663년(숙종 4)에 永柔로부터 옮겨온 것으로 속읍은 숙천·영유·증산·순안 등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堂山이다. 읍치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通德川이다. 고려 태조 때 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通德鎭이라 했는데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고을의 동남쪽에 있는 虎田城은 흙으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9,7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서쪽 해안에는 간척과 관련된 수리시설인 補民筒도 보인다.(오상학)

  • 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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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원군 순안면·양화면·공덕면·동암면·한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평성군 동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남으로 평양과 접하고 있으며 의주가는 직로상에 위치해 있다. 동으로는 청남정맥이 닿아 있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을 나누어 楸子島·櫻遷村·龍坤村·禾山村과 합하여 順和縣을 만들어 서경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祥原에 예속시켰다. 1396년(고려 태조 5)에는 치소를 평양부 安定站으로 옮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서북방면에 있어서 군사·교통상의 요지였다. 군사상으로는 평양을 방어하는 외곽지대로 獨子山·大船串·西金剛山 등에 봉수가 있었고, 騎撥인 官門站이 있어 의주 지방의 상황을 남쪽으로 전달하였다. 읍치에 있던 安定驛은 평양·慈山·永柔·甑山·江東·成川 등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이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북쪽 法弘山에는 유서깊은 法興寺가 있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休靜이 승군을 집결시켰던 곳으로도 유명하다.(오상학)

  •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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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순천군 순천읍, 북창면, 선소면 일부, 내남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순천시 강포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殷山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읍치가 있는 서쪽 지역이 더 작다. 동쪽 지역은 고려시대 읍치가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龍淵堡 근처에 古邑이라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옛 이름은 精戎인데 읍치 부근에 있는 하천이 정융강이다. 순천에는 右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속읍으로는 順川·成川·江東·三登·陽德·兎城·龍洞 등이다. 고읍 터 근처에 있는 龍淵堡에는 別將이 파견되어 있었다. 고을의 동북쪽에 龍島面에는 官胎峴이 있는데 일설에는 군수가 이곳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오상학)

  •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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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안주군 대부분 지역, 개천군 중서면 서쪽 일부, 평안북도 박천군 일부, 영변군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안주는 청천강 남안에 위치하여 고려시대 이후 군사요충지로서 중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 평양과 더불어 의주대로의 길목에 위치한 큰 도회로 저자에 중국 물품이 풍부하다. 장사치로서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왕래하는 자는 많은 이익을 얻어 부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한다. 안주목의 鎭山은 읍치의 동쪽에 위치한 加頭山 또는 太子山인데, 지도에는 太子峰으로 나타나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청천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에는 하중도인 七佛島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百祥樓가 표시되어 있다. 누각 옆에는 칠불사가 있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고구려 때 수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강가에 이르렀을 때 스님 일곱에 앞에서 물을 건너는데 물이 무릎에도 차지 않았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도 스님들을 따라 공격해 가다가 선봉에 선 부대가 빠져 죽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을 후퇴시키자 스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지방 사람들이 부처님의 은덕으로 여겨 절을 짓고 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쪽 해안의 老江鎭은 해안을 방어하던 水軍僉節制使營이다.(오상학)

  • 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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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양덕군 전부와 성천군 대구면, 사주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양덕군과 신양군 전체에 해당된다. 원래 高麗의 陽岩·樹德의 兩鎭으로 1396년(태조 5)에 합하여 陽德縣으로 하였다.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하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포진하고 있는 산간 고을이다. 동으로는 함경도 고원, 서로는 성천, 남으로는 황해도 곡산, 북으로는 맹산현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隱于山인데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북서쪽의 載靈山의 정상에는 龍淵이 있어서 속담에 나무꾼, 사냥꾼이 떠들면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고 한다. 읍치의 서쪽 陽岩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938년(고려 태조 21)에 쌓은 石城이다. 고을 서쪽의 水德山城은 土城으로 983년(고려 성종 2)에 쌓았으나 당시는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북쪽에 위치한 兎城鎭은 1662년(숙종 3)에 屯을 설치하면서 둔 別將을 1665년(숙종 6)에 첨사로 승격시킨 육군 진영이다. 이 고을에는 온천도 있었는데 草川面 溫井과 다른 하나는 溫川面에 위치한 溫井이다. 현재도 양덕 온천은 명성이 높다.(오상학)

  • 영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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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영변군 대부분 지역,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영변군의 대부분 지역, 구장군 대부분 지역, 향산군 전 지역, 운산군 일부, 태천군 일부, 박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으로는 청천강을 끼고 있다. 본래 고려시대에는 撫州와 延州였는데 이후 무산현과 연산부로 바뀌었다. 1429년(세종 11년)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서 영변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고을의 서쪽에는 옛날 撫州가 표시되어 있고 남쪽 延山面은 연산부가 있던 곳이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남쪽의 藥山이다. 이곳은 철옹성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고을의 읍치가 이 성안에 있기 때문에 성을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산세를 따라 성을 쌓았는데 가파르고 험하여 철옹성이라 부르며, 평안도 일대에서 외적을 방어할 만한 곳은 오직 여기 뿐이다’고 기술되어 있다. 세종 때 옛 성터에 돌로 쌓았고 인조 때 수축하였다. 성의 서쪽에 위치한 藥山東臺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아름다워 관서팔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오상학)

  •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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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영원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영원군과 대흥군을 합친 것과 일치한다. 읍치는 영원군 문곡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내륙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寧遠鎭이었는데 1396년(태조 5)에 永淸에 합하여 永寧이라 칭했고, 1466년(세조 12)에 古寧遠 땅에 별도로 군을 두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快山이다. 원래의 읍치는 쾌산 옆에 있었는데 군이 설치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고읍이 있던 지역을 흐르는 강은 廣城川인데 부근에는 동굴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굴안에는 두개의 못이 있고 위로 오르는 듯한 형상의 石龍이 있다고 하는데 설명으로 보아 석회동굴의 石柱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寧城鎭은 이 고을의 중요 진영이다. 이곳에는 1641년(인조 19) 처음으로 別將을 두었다가 1666(숙종 7) 兵馬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1686년(숙종 27) 獨鎭僉使로 삼았으나 1828년(순조 28)에 혁파하였다.(오상학)

  •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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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청산면 북부·용호면·해소면· 검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원군 서북부, 숙천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평원군 삼봉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연한 고을로 동으로는 청남정맥과 접하고 있다. 1396년(태조 5)에 寧遠과 柔遠의 두 진을 합쳐서 永寧縣이라 일컬었다. 1423년(세종 5)에 永寧이라는 고을 이름이 永寧殿과 같다하여 그 이름을 永柔縣이라고 하였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米豆山이다. 읍치 북서쪽의 通海鎭은 通海縣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에 있는 臥龍祠는 1603년(선조 36)에 창건되어 제갈량을 배향하였는데 1668년(현종 9)에 臥龍이라 사액되었다. 이후 1750년(영조 26)에 三忠祠로 개명되었다. 이곳은 조선후기 河岸干拓이 활발하게 행해졌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 중앙의 德池筒, 남쪽의 元堂筒 등이 강가의 갯벌을 간척하여 만든 일종의 수리시설이다.(오상학)

  •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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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지운면, 다미면, 오신면, 양곡면, 용월면, 서화면, 해운면, 강서군 함종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항구구역 일부, 대안구역 일부, 용강군 일부, 온천군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용강군 옥도리 일대에 있었다. 龍岡縣의 옛 縣名이 黃龍城 또는 烏山인데, 황룡성은 황룡산성에서, 烏山은 烏石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북쪽 1리에 있는 烏石山이다. 烏石山에는 黃龍山城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옛날 黃龍國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의 다른 이름으로 安市城이라는 기록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데 요동에 있던 안시성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 해안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다. 물맛이 짠 해수 온천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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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용천군 북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서해안에 연해 있으며 청북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고을이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의주, 남쪽은 철산, 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동쪽에 위치한 龍骨山이다. 산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은 조선후기 국방강화의 일환으로 1624년(인조 2)에 신축되어 1704년(숙종 30)에 완성되었다. 고을 북쪽에 있는 良策館은 의주대로를 통해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고을의 서남쪽에는 彌串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1678년(숙종 4)에 설치되어 僉使가 파견된 군영이다.(오상학)

  • 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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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운산군, 창성군 일부, 영변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운산군 대부분 지역, 창성군, 태천군, 영변군, 구장군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운산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과 남으로 영변, 서쪽으로 태천, 북쪽으로 이산과 접해 있다. 읍치 북쪽으로는 溫井이 보이며 서쪽에는 藥水도 표시되어 있다. 이 약수는 물이 아주 차며 만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古延州가 표시되어 있다. 본래 고려 때 연주였는데 조선에 와서 영변에 합쳤다가 다시 떨어져 운산으로 합쳐진 것이다. 읍치의 동쪽에는 衛滿洞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淵王馮弘墓라고도 하는데 魏나라가 淵나라를 정벌하자 연왕은 이곳으로 도망와 살았다 한다. 남쪽 古雲山面은 고려 때 몽고족을 피해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 살다가 원종 때 육지로 나와 임시로 머무르며 살았던 곳이다.(오상학)

  •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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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독로강 이북을 제외한 위원군 전체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위원군 전체, 초산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과 접하고 있다. 본래는 理山郡의 都乙漢堡이다. 1443년(세종 25)에 堡가 사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대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강계와 이산 땅을 나누어 위원군을 두었다. 위원군의 읍치는 水災의 위험이 있어서 1743년(영조 19) 松峴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는 이전 읍치를 古邑으로 표시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北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압록강 변에는 여러 진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直洞堡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506년(중종 1)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천 척, 높이 18척이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곳에는 명나라 李成樑의 조상 무덤이 있다고 한다. 이성량의 아비는 위원 사람이었는데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중국 廣寧에 들어가 살다가 이성량을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 李如松은 항상 ‘나는 본디 조선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오상학)

  • 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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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순천군 은산면, 북창면, 선소면 일부, 신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 중앙부와 성천군 남옥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순천시 은산 노동자구 일대에 있었다. 북으로는 順川, 서로는 慈山, 남으로는 成川, 북으로는 价川과 접하고 있다. 대동강의 상류가 고을의 북서쪽을 감돌아 흘러간다. 은산현 명칭은 983년(고려 성종 2)에 興德을 殷州로 고쳐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 1414년(태종 14)에 慈山郡에서 분리하여 은산현으로 독립시켰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鎭江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고을 북쪽에 있는 天聖山에는 관음 삼봉이 있는데 속담에 동명왕의 麟馬 자욱이라 전한다. 負板山 아래에 있는 風穴에는 大風이 열흘에 두세 번 일어난다고 하는 곳이다. 풍혈 근처에는 은을 캐던 은점도 보인다.(오상학)

  • 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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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 용천군 양서면, 동하면 일부, 양광면, 삭주군 청수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신의주시, 의주군, 삭주군 서부, 천마군 동북부, 피현군 동부, 용천군 북부, 동림군 남삼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는 대중국 교류의 관문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松山이다. 접경 지대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이곳에도 국방관련 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압록강변을 따라 마름모 모양의 여러 진보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의주에는 防禦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속진으로는 청성, 청수, 방산, 옥강, 수구, 양하, 건천 등이었다. 고을 남쪽의 白馬山城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府尹 임경업에 의해 修築되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는 中江은 선조 때 장시를 설치하여 무역했던 유명한 곳이다. 이후 柵門과 더불어 대표적인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는 태조 이성계가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르다 회군한 곳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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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초산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초산군 대부분 지역, 자강도 우시군 가운데 충만강 以東地域, 동쪽 일부를 제외한 자강도 송원군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압록강을 끼고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지닌 고을이다. 1402년(태종 2)에 산양회·도을한·봉화대·등이언 등지를 합쳐 理州라 칭했는데 1413년(태종 13)에 통례대로 이산군으로 고쳤다. 1776년(정조 원년) 이산이 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楚山郡으로 개명하였다. 지도에는 이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정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에 있는 崇積山이다. 이 고을에도 압록강 연안의 다른 고을처럼 여러 관방시설이 들어서 있다. 압록강 아래쪽에 설치된 阿耳鎭은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국경지대를 연하여 설치된 7진 중의 하나이다. 鎭城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석축으로 1595년(선조 28)에 설치되었다. 이 곳은 압록강과 童巾江이 합류하는 곳으로 옛날부터 북방 외적의 침입로 중의 하나인 三賊路가 되므로 군사 요충지로 중시되었다.(오상학)

  •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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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자산부는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내남면 남부, 후탄면, 사인면 일부, 강동군 봉진면 일부, 순천군 은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대동강의 상류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청남정맥의 지맥이 뻗어 있다. 고을의 동쪽은 殷山, 서쪽은 順安, 남쪽은 평양, 북쪽은 개천과 접하고 있다. 연산군 때 이 고을 출신 宦官 金季敬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고을을 혁파한 적이 있었다. 지도에는 고을의 산천을 비롯하여 面名 창고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을의 북서쪽에는 이 고을 최고의 관방인 慈母山城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쌓은 석성으로 둘레가 12,733尺, 높이가 13尺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투 시에 지휘처로 사용하던 만자루가 성벽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만자루 자리는 대체로 성벽보다 높고 두껍게 돌을 쌓고 성벽 밖으로 볼록 나와 있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며 탐관오리를 징계한 명종 때의 俠盜 林巨正이 이 산성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때에는 인근 읍민 수만 명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던 기록도 있다.(오상학)

  • 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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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고안면·덕수면·남서면·갈산면·마산면·고덕면·대전면·임포면, 박천군 용계면 일부, 평안남도 안주군 연호면 노안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가산, 남쪽은 바다, 서쪽은 곽산, 북쪽은 구성과 접하고 있다. 원래 읍치는 고을 서쪽의 馬山面에 있었는데 1467년(세조 12) 현재의 지역으로 옮겼다. 고을이 해안에 연해 있어서 비교적 너른 평야도 펼쳐져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청북은 풍속이 어리석으며 무예를 숭상하는데 오직 정주만이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중국 사신 唐皐가 이름 지었다는 納淸亭이 있는데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높다.(오상학)

  • 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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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和府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동부와 해압면 남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중화부는 원래 고려 중엽까지 서경에 예속되었다가 1322년(고려 충숙왕 9)에 태조의 공신 金樂·金哲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郡人 林仲梁이 왜군에 항거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1592년(선조 25)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북으로는 대동강을 끼고 있고 남으로는 해서정맥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다. 북으로는 평양, 동으로는 상원, 남으로는 황해도 황주, 서로는 강서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淸凉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지도에는 청량사로 표기되어 있다. 남쪽의 駒峴에는 신구 監司가 교대하던 곳이 있었다. 읍치의 동쪽 龍山寺 부근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眞珠墓>라고도 한다. 동남쪽의 城山堡는 청색의 마름모꼴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봉황령을 넘어 善積에 도달하는 요해처로 당시 別將이 관할하고 있었다.(오상학)

  • 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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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적송면 남부, 쌍룡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증산군 남부, 서부의 일부, 북부의 일부를 제외한 증산군 일대이다. 청북정맥의 서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해안에 접해 있는 조그만 고을이다. 북으로는 영유, 남으로는 함종에 연결된다. 본래 강서현의 甑山鄕인데 1394년(태조 3)에 현으로 나누고 현령을 두었다. 고을의 진산은 國靈山인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국령천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의 兎山烽燧는 남쪽으로 함종현 草島에 응하고 북으로는 평양부 鐵和에 응한다.(오상학)

  • 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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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압록강과 연해있는 접경지대의 고을로 군사적으로 중시되던 곳이었다. 창성의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고을은 크게 북쪽의 압록강 수계와 남쪽의 대정강 수계로 나눠진다. 읍치는 압록강 수계에 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창성에는 평안도의 左防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소속된 진보는 昌州·博寀·甲岩·雲頭里·廟洞·於汀灘·大吉號里 등이었다. 압록강변에는 여러 진보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고개에도 관문이 축조되어 있다. 내륙쪽에 붉은 원으로 표시된 恃寨鎭은 兵馬同僉節制使가 주재하는 곳으로 1676년(숙종 2)에 萬戶로 승격되었다.(오상학)

  • 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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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철산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철산군 월봉리와 선주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용천, 남으로는 선천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熊骨山이다. 읍치의 남쪽에는 古邑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영조 때 일시적으로 이곳에 읍치를 옮긴 적이 있었다. 이 고을도 의주대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러 관방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서북쪽의 西林山城에는 1747년(영조 23)에 의주대로상의 서림성 옛 터에 石城을 쌓고 僉使를 파견하여 鎭을 설치하였는데 5년 뒤에 진을 혁파하고 獨鎭을 두어 中軍이 지키게 하였다. 고을 남쪽에 있는 宣沙鎭은 원래 선천부에 속하였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水軍僉節制使 겸 監牧官 1명이 주재하였고, 명청 교체기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갔다. 남쪽의 椵島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선사포 첨사가 겸하였다. 특히 이곳은 인조 때 명나라의 遼東都司 毛文龍이 웅거하면서 청군의 배후를 자주 교란시켜 명, 후금, 조선 사이의 중요한 외교적 문제가 되었던 현장이다.(오상학)

  • 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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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태천군 전부, 박천군 청룡면, 용계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태천군 대부분 지역, 운전군 일부, 박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는 청천강의 지류인 大定江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영변, 남으로는 가산, 서로는 구성, 북으로는 운산과 접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光化縣인데,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태천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473년(성종 4) 승려가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 縣으로 강등되었다. 고을의 서쪽 籠吾里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369자이고 속칭 姑城이라고도 한다. 읍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鮮于浹, 金翼序 등을 배향한 遯菴書院으로 보인다.(오상학)

  •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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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양시, 강서군 성대면·잉차면·반석면 일부·적송면 일부, 평원군 한천면 일부·덕산면·청산면 일부, 대동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승호구역의 일부와 삼석구역 동부 및 순안구역을 제외한 평양시내, 평성시 일부, 평원군 서남부, 대동군, 증산군 일부, 남포직할시 천리마 구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평양은 평안도의 감영이 있는 곳으로 기자가 도읍하였던 곳이기 때문에 九夷 중에서 풍속이 가장 개명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당시 조선시대에도 箕子 井田의 遺址와 기자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평양은 대동강이 흐르면서 빚어내는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하여 평양을 그린 회화식 지도가 많이 제작되기도 했다. 북부 지방의 가장 큰 도회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물산이 풍부하다. 특히 중국가는 사신을 따라가는 장사치 중에서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가 있었다.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으나 제방과 개울이 적어 밭농사만 일삼는다. 그러나 하류에 있는 벽지도는 강 복판에 위치하여 강물이 줄면 진흙이 드러나서 지방 사람들은 그 안에다 논을 만들어 1畝에 1種이나 수확한다고 한다. 지도에는 대동강변에 위치한 평양성과 거기에서 사방 방사선상으로 뻗어나간 도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錦繡山인데 이의 정상이 모란봉이다. 대동강변의 능수버들로 유명한 長林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 서쪽의 龍谷書院은 1658년(효종 9)에 창건되고 1683년(숙종 9)에 사액된 서원인데, 鮮于浹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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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강서군 함종면, 신정면, 수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증산군 남부지역과 남포직할시 수산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縣令이 관할하던 고을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中宮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또한 淸南後營이 있던 곳으로 관할하던 속읍으로는 江西·龍岡 등이었다. 함종의 鎭山은 동쪽에 있는 牙善山인데 지도에는 善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을 서쪽의 해안에는 鳳頭山이 그려져 있다. 바다를 베고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봉황이 높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풍경이 고을에서 제일이라 한다. 서쪽 해안의 二岳島는 조수가 밀려가면 육지가 된다는 섬인데 지도에도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오상학)

  • 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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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신풍면의 일부를 제외한 희천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송원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으로는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강계, 남으로는 영변·영원, 서로는 이산과 접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淸塞鎭이었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白山은 흰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산기슭에는 頭疊窟이 있다. 고을의 중앙 東江가에 있는 立石은 조그만 봉우리가 솟아 있는 모양이 송곳을 세워 놓은 듯하다고 한다. 읍치 북쪽에는 鳳丹城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산성으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서쪽에는 柔遠鎭이 표시되어 있다. 1623년(인조 1)에 鎭을 설치하면서 別將을 두었고, 1675년(숙종 1)에 兵馬同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남면에 있는 金仙臺는 옛날 휴정이 수도하였다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 많은 店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통해 조선후기 상업 유통의 일단을 파악해 볼 수 있다.(오상학)

  • 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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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은 북한강 북쪽의 가평군과 남양주시 수동면의 외방리·입석리·내방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가평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되어 있는 부분은 하천에 대한 표시이다. 첫째, 북한강의 본류와 지류가 매우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있는 超然臺오른쪽에서 들어와 陽根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이다. 그런데 마치 春川界와 洪川界 사이에서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 본류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일 뿐이다. 두 번째, 홍천계에서 양근계까지의 북한강이 실재와 매우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북한강은 서류하다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마치 서북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셋째, 이 부분에서 가평군은 실재로 홍천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 ≪해동지도≫의 지도 어디에도 가평과 홍천이 경계를 맞대고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없다. 네 번째, 조종천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이 실재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조종천의 굴곡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모는 이 지도에 표현된 것보다 훨씬 작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조종천의 하류가 마치 읍치에서 매우 가까운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재와 부합되려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을 형성하지 않고 바로 상류로 향하도록 그려져야 한다. 첫 번째를 제외한 세 개의 오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상호 연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종천 유역에는 縣倉이란 명칭이 붙어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조종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영평계에서 읍치를 지나는 가평천이 내려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만을 놓고 볼 때, 영평계 넘어 부분에도 가평천의 상류가 상당히 길게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짧은 구간에 해당될 뿐이며, 현재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대에 해당된다. (이기봉)

  •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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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현은 현재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은하면, 구항면, 서부면, 광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육지의 도로와 연결할 수 있는 곳인 현재의 결성면에 위치하고있으며, 현재도 그 성곽터가 남아있다. 이 지도에서 주로 그려진 것은 강, 바다, 산과 그 사이를 지나는 도로이다. 倉은 읍치가 있는 곳에 있으며, 수운에 닿기 편리한 바닷가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죽도가 보이는데 이 섬에서는 대나무가 공급되었다고 한다. 지도의 남쪽으로는 광천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특히 바다로 접어드는 하천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산은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지도의 북쪽에 있는 龍臥川은 臥龍川이라고도 부르며, 龍里와 龍湖里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청룡산의 북동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 지도에서는 지명이 표기되지 않았지만, 문헌에서는 枰山으로 추정되며 본 현의 鎭山이다. 지도에서 아래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곳은 지금의 廣川里로 추정되는데 과거에 이곳은 상업 유통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保寧界와 이어지는 도로가 보이는 곳은 현재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다. (이상균)

  • 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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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서면, 양가면, 청룡면, 용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운전군 북부지역 일대이다. 청북정맥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대정강과 접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박천, 서쪽으로는 정주, 북쪽으로는 태천과 접하고 있다. 평안도의 別右營將이 주재하던 고을로 영장은 太守가 겸하였고 속읍은 가산·박천이고 屬鎭은 古城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위치한 鳳頭山이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배치하여 풍수적 형국을 강조하였다. 읍치 서쪽에는 曉星嶺이 있는데, 그 위에는 옛날 별에게 제사지냈던 曉星臺가 있다고 한다. 효성령은 일명 西門嶺 또는 속칭 石門嶺이라고 하는데 깎아지른 석벽과 높고 험준한 봉우리로 옛날부터 유명하였다.(오상학)

  •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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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부는 교동도와 일부 섬을 제외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高麗山(436m)이다. 강화는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이러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江都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읍치가 붉은색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이 고을이 ‘都’라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진과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불렀다. 이곳은 潮水의 영향으로 하루에 두 번 물길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다. 물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한자를, 그리고 물맛이 짜기 때문에 ‘鹽’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三南의 세곡선이 수시로 지나가는 해상운수의 길목일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국방상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이 반영되어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에는 수군이 파견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육군이 주둔하였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수많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와 돈대는 지도에서처럼 석축의 長城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淸軍에게 함락된 이후 방어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축성된 것이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모든 해안가에는 鎭堡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섬 전체가 하나의 견고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지도 아래쪽의 鼎足山城은 이름 그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솥처럼 생긴 지형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이곳에는 傳燈寺가 있었으며,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마니산사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강화도 주변의 섬은 이 지도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위치에서 대략적인 정확성만을 반영하고 있다. 이 중 현재의 석모도가 4개의 섬이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석모도는 밀물이 되면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썰물이 되면 모두 갯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席毛老(島)와 煤音(島)는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실재로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갯벌에 대한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3개의 섬이 潮水에 상관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기봉)

  •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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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통합시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공주라는 이름은 고을 북쪽 강가에 있는 산의 모습이 公자와 같아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읍치 북쪽 금강에 연한 공산성은 지도에는 雙樹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세를 따라서 작은 성을 쌓고 강을 垓字로 삼았는데 지역은 좁지만 형세는 견고하다. 인조도 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피난한 적이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月城山으로 계룡산에서 뻗어온 맥이다. 이른바 금남정맥의 최북단에 해당한다. 전통시대의 자연인식에서는 산지를 연결된 맥의 형태로 파악하는데 공주의 경우는 북쪽은 강으로 막혀 있어서 남쪽에서 맥이 뻗어온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고을은 너른 범위에 걸쳐 있는데 살만한 곳으로는 첫째가 儒城이고 둘째가 敬天, 셋째가 利仁, 넷째가 維鳩라 했다. 지도에도 이들 지역이 유성창, 경천역, 이인, 유구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이인역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으며 논도 기름져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9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기도 했다. 고을 서북편의 茂城山은 차령의 서쪽 줄기가 맺혀서 된 것으로 土山이 빙 돌았고 그 아래에 유구역과 麻谷寺가 있다. 골짜기 안에 계곡물이 많으며 논이 기름지고 또한 목화·기장·조를 가꾸기에 알맞아 사대부와 평민이 여기 한번 살면 떠돌거나 이사해야 하는 근심이 적게 되어 낙토로 인식되었다. 남사고의 ≪十勝記≫에도 유구·마곡사 두 골짜기 사이를 피난할 만한 곳이라 하였다. 사대부들이 많이 살던 고을이라 滄江書院·道山書院·孔巖書院 등의 여러 서원도 볼 수 있다.(오상학)

  • 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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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계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강계군 전체와 위원군 봉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시중군, 전천군, 장강군, 성간군, 용림군, 위원군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과거 폐사군 지역을 포괄하여 평안도 고을 중에서는 가장 넓은 곳 중의 하나이다. 부 동쪽으로 백두산까지는 폐사군 지역이다. 四郡은 세종 때 강계부에 예속시켜 백성을 옮기고 그 지역을 비워버렸다. 그리하여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수목이 울창한여 인삼이 많이 산출되고 해마다 봄가을에 백성들이 산에 들어가 캐도록 허가하여 그것으로 貢物과 稅賦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곳이 인삼 산지로 가장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을의 영역은 압록강 지류의 유역권에 해당하여 인근 고을과는 분수계에 의해 구분된다. 강계부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鎭과 堡가 유난히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鎭이 압록강변에 위치한 滿浦鎭이다. 이 진은 돌로 쌓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병마첨절제사가 주재하였던 곳이다.(오상학)

  •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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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부는 일제시대의 개성시, 개풍군의 영북면·북면·토성면·서면·남면·청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개성시 시내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松岳山(489m)이다. 지도 왼쪽에 金川界로부터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에는 梨浦·錢浦·碧瀾渡 등이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포구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습지 비슷하게 평평한 하천 지형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중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外港으로서 국내·해외 무역이 번성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개성에는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滿月臺가 표시되어 있다. 만월대는 고려의 主宮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높은 臺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위쪽에 鴨潭面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실재와 많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을 흐르는 論早川 유역에 개성의 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金川界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읍치 바로 밑의 養竹橋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鄭夢周(1337-1392)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善竹橋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밖에 고려의 왕도였기 때문에 수많은 王陵이 산재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조선의 왕릉들이 다른 지도에서 자세하게 표시된 것과 대조된다. (이기봉)

  • 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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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錦山이다. 고을의 동쪽을 달천이 북류하여 충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花岩書院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고, 이황·노수신·김제갑·유근을 배향하였다가, 그 후 박세무·이문건·허후·이신의·김유형·박지겸·허조 등을 추배하였다.(오상학)

  •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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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강동면, 승호읍 대부분, 봉진면, 고천면, 원탄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강동군 서부, 평성시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고을의 서쪽으로 대동강의 지류가 흘러가고 북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과 닿아있다. 북으로는 成川, 동으로는 三登, 남으로는 祥原, 서로는 평양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동쪽에 있는 大朴山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유명한 강동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216년(고종 3) 몽고군에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강동 땅은 격렬한 전란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쫓겨온 거란족들이 약 2년간 서북 각지에서 만행을 자행하던 끝에 1218년 12월 강동성에 주저앉게 되자, 哈眞이 이끄는 1만 명의 몽고군과 完顔子淵이 지휘하는 東眞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려고 강동성으로 진군해 왔다. 이 때 고려는 서북면원수 趙沖과 서북면병마사 金就礪로 하여금 몽고·동진의 군과 연합해 5만여 명의 거란인을 격파하였다. 서쪽 강변에 있는 閱波亭은 본래 西江院이라 불렸으나 中宗의 駙馬인 宋宴이 열파정이라고 개칭하였다.(오상학)

  •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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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군은 덕양구의 오금동 동쪽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에 高峯縣·幸州(또는 德陽)·富原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고을 이름은 고봉현과 덕양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붙여졌다. 고양군의 땅에 합쳐진 부원현의 경우 원래 果州龍山處였다가,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 富原荒調鄕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언제부터 부원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處·鄕의 규모나 독자성이 縣에 맞먹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읍치 아래쪽에는 우리말 ‘기프내’의 한자표기인 深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곡릉천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곡릉천이 많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공릉천은 楊州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따라서 양주계 방향이 상류이며, 교하계 방향이 하류이다. 이 지도에는 마치 교하계 방향이 상류이며, 양주계 방향이 하류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고을의 경계선 밖에 있었던 富安三江面이 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지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 일대로서, 실재로는 한성부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는 淸나라의 使臣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묶게 되어 있었다는 碧蹄驛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 보이는 書院은 文峰書院이다. 閔純(1520-1592) 등을 배향하여 숙종 14년(1688)에 세워지고, 같은 왕 35년(1709)에 賜額 받았다. 기타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陵)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기봉)

  • 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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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남포현의 읍치는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비인과 더불어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한다. 聖住山은 이 지역의 명산으로 산중이 평탄하여 시내와 산이 밝고 깨끗하며, 물과 돌이 맑고 시원스럽다고 한다. 산에는 검은 옥이 나는데 벼루를 만들면 진귀한 물건이 된다.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죽었다고도 하며 시내와 물 사이에 살만한 곳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는 聖住寺가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절에는 최치원이 지은 大朗慧和尙의 탑비가 있었는데 지도에는 孤雲碑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九龍山으로 맥세가 해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읍치 남쪽의 古邑面은 과거 縣이 있던 자리였다. (오상학)

  •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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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강서군 강서면·성암면·잉차면 일부·대보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대안구 북부, 강서구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북으로는 청남정맥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대동강을 끼고 있다. 1136년(인종 14)에 西京 경내를 나누어 梨岳·大垢·甲岳·角墓·禿村·甑山 등의 고을을 합하여 강서현으로 만들고 영을 두었으며, 1394년(조선 태조 3)에 증산을 나누어 따로 현령을 두었다. 이 고을에는 학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읍치 동쪽 이 고을의 진산이 舞鶴山이고, 남쪽으로 栖鶴山, 中鶴山 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을의 진산이 舞鶴이기 때문에 학의 알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鶴卵丘가 있었다고 하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에 보이는 書院은 鶴洞書院으로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을 받았던 서원이다. 이 고을에 살았던 金泮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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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천현은 경기도 과천시, 속달동·둔대동·대야미동을 제외한 군포시, 박달동 일대를 제외한 안양시, 상도동·대방동을 제외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초구의 대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冠岳山(631m)이다. 지도 위쪽에는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 露梁(津)과 銅雀(津)이 표시되어 있다. 노량진은 우리말 ‘노들나루’에 대한, 동작진은 ‘동재기나루’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나루는 일반적으로 강 양편과 그 사이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노들나루와 동재기나루는 보통 한강 남쪽을 지칭했다. 읍치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2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良才驛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색의 작은 원은 이 지도책에서 찰방역에 대한 일괄적인 범례로 사용되었으며, 찰방이 파견된 역을 보통 ‘道’라고 불렀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양재천이며, 왼쪽의 하천(仁德川)은 현재 안양천으로 부르고 있다. 안양천 위에 있는 安養은 安養橋를 의미한다. 관악산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정확하게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한강변의 노량진 일대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愍節書院을 비롯하여, 鷺江書院·四忠書院 등이 밀집해 있었다. 淸溪山에서 冠岳山 방향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야트막한 언덕 정도임에 비해, 너무 굻게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밖에 이웃 금천현의 南面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이런 예는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기봉)

  •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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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영춘현과 더불어 충청도의 동부에 위치한 고을로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명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니, 그 청숙한 기운이 반드시 축적될 리 없다고 하였다. 단양팔경으로 유명하며 지도에도 옥순봉, 구담, 사인암, 도담 등의 경승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島潭은 세 바위가 못 가운데 뾰족하게 솟아 있고 그 위에는 푸른 절벽이 만길이나 되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서쪽의 可隱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고려말에 왜구가 침입해 왔을 때 인근의 제천, 청풍과 이 고을 주민들이 대피했던 곳이기도 하다. 造山面에 보이는 丹岩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되어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 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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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개천군 봉동면 남쪽을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도화리·광도리·봉창리를 제외한 개천군 전 지역이다. 읍치는 개천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청남정맥의 서북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덕천, 남으로는 자산·순천, 서쪽과 북쪽으로는 영변에 접하고 있다. 고려초기에는 접경에 위치하여 鎭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중기 이후 영토가 압록강까지 확장됨에 따라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大林山이다. 고을 동쪽에는 釜淵을 독특하게 그렸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라 한다. 남쪽 끝에 마름모꼴로 표시된 金城鎭은 別將이 관할하던 진영이었다. 남쪽 대동강변의 無盡臺는 수려한 경치로 이름난 곳이며 殷山으로 넘어가는 대로의 나루터가 있기도 하다.(오상학)

  •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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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부는 남종면을 제외한 경기도 광주시 전체, 남양주시 조안면과 와부읍의 팔당리,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강동구, 의왕시, 안산시 시청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야목리·원리·송나리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黔丹山(685m)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읍치가 남한산성 위쪽인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 이후 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조 4년(1626)에 지도 위의 읍치인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고을의 격도 牧에서 留守府로 승격시켰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인조가 피난하여 2개월 가까이 후금에 대항하다가 항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인조가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던 三田(渡)가 지도 위쪽의 한강변에 표시되어 있다. 한강으로 합류되는 큰 지류로는 炭川(숯내)과 현재 경안천으로 부르는 小川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에 의해 이루어진 시화호의 일부이다. 이 지역은 안산시 동남쪽과 화성시 매송면 서쪽에 해당된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慶安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광주시 시내는 바로 이 경안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강변에는 이 지역 최대의 장시였던 松波나루와 廣津(광나루)도 보이고 있다. 良才驛은 이 고을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바로 아래쪽 書院이라고 쓰인 부분의 왼쪽에 있어야 한다. 서원은 고을이 큰 만큼 4개나 표시되어 있다. 기타 水原界와 果川界 중간 부분에 일반적으로 沙斤川으로 표시되던 하천의 명칭이 ‘사그내’라는 순 우리말의 발음에 가까운 沙斤乃로 적혀 있음이 재미있다. (이기봉)

  •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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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은 현재의 당진군 당진읍, 석문면·고대면·정미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邑城은 正統 경신년에 쌓은 돌 성으로써, 둘레가 1천 9백 54척에 높이는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 읍치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지에 입지하며, 하천의 흐름과 같은 방향인 북쪽의 아산만을 향하여 트여있다. 현재 이 지역은 석문 방조제의 축조로 바다와는 차단되었으며, 도로 교통이 발달되었다. 섬은 難知島와 蒜島가 표시되어 있으며, 倉庫는 外倉과 西倉이 있다. 남쪽에는 興世驛이있으며, 봉수로는 중앙에 高山 봉수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沔川군 倉宅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海美의 安國山과 호응한다. 남부는 서산시와 예산군을 따라 내려온 가야산맥이 당진 부근까지 뻗쳐서 군내의 고지대를 이루며, 아미산(峨嵋山:350m)은 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남북의 분수령을 이룬다. 아미산 서쪽에는 이배산(利背山:243m), 다불산(多佛山:325m) 등의 잔구성 구릉이 발달했다.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산이 거의 없고 낮은 구릉과 넓은 평야지대로 되어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은 채운평야(彩雲平野)에 전개되어 있으며, 북쪽의 고대면(高大面) 용두리(龍頭里)·진관리(眞館里)를 잇는 풍요한 농업지대이다. (이상균)

  • 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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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정주군 환주면, 옥천면 일부, 안흥면 일부, 임포면 일부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동래강 서안, 동북부, 천대리를 제외한 곽산군 전 지역이다. 읍치는 곽산군 초장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접해 있는 고을로 북쪽으로는 청북정맥이 뻗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凌漢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가 6,913척이다. 고을의 동남쪽에는 任海鎭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別將 1명이 있어 左別士監營을 差啓한다. 그 남쪽에는 구성의 월경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어염을 얻기 위해 존속된 것이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地古介가 표시되어 있다. 고개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인데, 원래 북부지방의 방언으로 나중에 표준말로 굳어진 것이다.(오상학)

  • 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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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와 석모도 위쪽, 서도면의 주문도, 북도면의 장봉도 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에 읍치가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경기 水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경기 수영은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었으며, 인조 7년(1629)에 이 고을로 옮겼다. 수영이 설치되면서 고을의 格도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아래쪽의 注文島와 長峯島는 실재로는 강화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다. 이 두 섬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 두 섬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 부분에 나오지 않으며, 수영이 설치되면서 이 고을의 관할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을에는 현재 강화군 교동면 정도의 작은 면적에 4개의 面이 설정되어 있어, 면의 규모가 매우 작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면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규모나 구체적인 운영은 각 고을에 맡겨졌기 때문에 고을마다 규모가 달랐다. 섬 전체적으로는 중앙의 華蓋山(259m)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매우 낮은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섬의 모습은 지도와는 달리 남북보다는 동서로 2배 정도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기봉)

  • 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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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군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는 예당저수지의 축조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다. 금북정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예산, 아래로는 청양과 연결된다. 면의 남서부에 임존산성이 있는 봉수산이 솟아 있으며, 대부분 지역이 150m 내외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중심부를 지금의 무한천인 京結川이 북류하고, 동부에는 지금의 新陽川인 達川이 서류하면서, 하천 유역에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이 지역 최대의 예당 저수지가 들어서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任存古城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높이 484m의 鳳首山과 그 동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으로, 일명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周留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韓山의 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즉,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한 부흥군은 최후의 거점지로서 이 성에서 黑齒常之 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여 신라군의 군량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각각 90여리쯤 떨어져 있어 백제가 수도를 公州와 扶餘로 천도한 뒤부터 수도방어의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후삼국시대 당시 王建과 甄萱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한다.(오상학)

  •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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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구성군과 전체와 곽산군 염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구성시, 천마군 동남부, 선천군 북부, 곽산군 천대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대정강의 지류를 끼고 있다. 동으로는 태천, 남으로는 정주·선천·곽산, 서쪽으로는 의주에 접하고 있다. 구성부는 1455년(세조 1)까지 정주목에 속하였다. 이후 龜州가 요충지인데 정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도로 龜城郡을 두고 여연과 무창 2읍을 폐지하고 그 백성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1467년(세조 12)는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 고을은 군사적 요충지답게 여러 진영과 산성이 있었다. 고을의 서쪽에 安義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예전에 隨州에 속해 있다가 조선 세조 때 來屬되었다. 그 서쪽의 植松鎭은 만호가 주재하던 군영으로 지도에는 관문성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식송진 아래에 있는 片月城은 土城으로 安義 백성들이 이 곳으로 피난하였다고 전해진다. 남쪽의 龍城里面은 정주 건너에 있던 월경지로 鹽倉이 세워져 있다. 이로 본다면 이 월경지는 어염을 얻기 위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오상학)

  • 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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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읍치는 교하면 교하리에 있었다. 長湍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金浦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한강이다. 임진강에 洛河라는 명칭이, 한강에는 學堂浦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각각 이 지역에서 임진강과 한강에 대해 부르던 별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그려져 있는 蟹岩은 地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해동지도≫의 교하군 지도에 임진강 건너의 풍덕 땅에 蟹岩이란 글자로만 나온다. 이 부근에는 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리는 一眉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이 지도의 작성자가 그것을 해암으로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해암은 없으며, 일미도만 표시되어 있다. 高陽界로부터 들어와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지도에는 金尺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金尺은 우리말 ‘쇠재’ 또는 ‘쇠자’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陵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 무덤이다. 영조 7년(1731)에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에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겨 왔다. 장릉이 있는 자리에는 원래 이 고을의 읍치가 있었는데, 장릉이 옮겨 오면서 파주시내 금릉동으로 옮겼다. 금릉동에서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겨온 시기는 地誌에서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이기봉)

  • 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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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은 조선시대 1405년(태종5)에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을 합하여 덕산현이라 하였고, 1847년(헌종 13) 덕산군으로승격하였는데 1913년 예산군에 병합되었고 그 이름은 덕산면으로 남아있다. 지도상에서의 덕산은 현재 예산군 덕산면, 봉산면, 고덕면, 삽교읍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덕산읍 읍내리에 해당된다. 이 지도상에서의 특징적인 모습은 동쪽에 하천(삽교천)과 서, 남, 북에 산(가야산, 팔봉산, 상왕산, 덕숭산, 대덕산, 앵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읍치는 이러한 큰 사각형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 지역은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서쪽의 산지에서는 시내가 흐르고 동쪽에는 넓은 들판과 하천이 흐른다. 작은 하천들은 삽교천으로 모여들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동북쪽에 非方串에 倉이 보인다. 주변의 사찰로는 가야사, 수덕사, 서림사, 용연사, 수암사, 운암사 등이 유명하다. 이 지역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온천인데 약물터로 전해오다가 1926년 온천으로 개발되었다. 주변에 둘러싸인 산과 사찰, 그리고 온천,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忠義祠 등 국민관광지로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 지역은 덕산 송씨·황씨·고씨·오씨·문씨·장씨(蔣氏)의 관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상균)

  • 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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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덕천군 덕천면, 풍덕면, 일하면, 성양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삼흥리를 제외한 덕천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청남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대동강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寧遠, 서쪽으로는 价川, 남으로는 順川, 북으로는 寧邊과 접하고 있다. 淸南右營이 설치되어 있던 고을로 營將은 군수가 겸하였고 속읍으로는 덕천, 자산, 영원, 개천, 맹산, 은산 등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長安山이다. 동쪽 三灘面에는 三灘이 있는데, 영원과 맹산의 물이 이곳에서 만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쪽 金城山에는 산성이 그려져 있다. 조선 태조 때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3,125척 높이가 8척이었다.(오상학)

  •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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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관악구와 안양천 동쪽의 구로구 및 동작구의 대방동·상도동, 경기도 광명시의 대부분과 안양시의 박달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의 금청구청 근처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三聖山(478m)이었다. 지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서 지금의 안양천이 합류된다. 안양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大川이라고 나오며, 현재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는 ‘오목내’라고 불렀다. 지도에는 안양천이 과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한 듯이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는 과천의 경계를 넘어 훨씬 더 먼 곳에서 발원한다. 안양천변에 적혀 있는 歧溪橋는 歧灘橋의 誤記이며, 이 다리는 보기 드문 石橋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천 상류에는 오늘날의 안양시 이름과 동일한 安養驛이 보이고 있지만, 실재로는 安養橋의 誤記이다. 다른 기록에는 萬安橋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역시 보기 드문 石橋였다고 나온다. 長柱峴도 長栍峴의 誤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도가 현지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 위쪽으로는 楊花津이 큰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재의 위치는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이기봉)

  • 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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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지금의 남원천이 고을 내부를 북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고을 동쪽의 泛川面은 이 고을의 월경지로 어염의 수취를 위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서쪽의 蒙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1,314척이었다. 고을 북쪽의 蒼宅山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서쪽으로 당진의 高山 봉수와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도 양성의 槐臺吉串과 호응한다. 고을의 북쪽에는 牧場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倉宅牧場이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면천 읍성은 조선 초기 해안지역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며, 남문·동문·서문이 있다. 남문은 甕城을 동반하고 있으며, 문루가 남문과 서문에 있었다. 성벽에는 7개의 雉城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세종대까지는 읍성의 서북쪽에 있는 잣골의 蒙山城에 군창을 두고 있었으나, 세종 때에 마련된 종합적인 倭寇 대책으로서의 읍성 축조 계획에 따라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이다.(오상학)

  • 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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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산현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옥천면을 제외한 맹산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중흥리를 제외한 맹산군 전체이다. 읍치는 맹산군 향교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남동 내륙에 위치한 고을로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함경도 영흥, 남으로 양덕, 서로는 순천, 북으로는 영원에 접하고 있다. 본래는 고려 鐵瓮縣으로 1019년(고려 顯宗 10)에 孟州로 개명되었다. 철옹현이라는 읍명은 고을의 동쪽에 있는 鐵甕城에서 유래한 것이다. 철옹성은 둘레가 650척으로 사면이 절벽이고 항아리의 입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영변의 철옹성과는 규모면에서 비교된다. 이 고을의 鎭山은 豆無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輿地圖書≫에는 고을의 主脈이 읍치 서쪽의 秀羅山으로 되어 있다. 풍수상의 주맥과 고을을 진호하는 개념인 진산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 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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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시 시내·고촌면·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北城山이며, 지도 위에는 章陵이 있는 산이다. 읍치는 원래 古縣內라고 표시된 지역에 있었다. 인조 5년(1627)에 지도에 표시된 章陵을 읍치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 장릉이 옮겨옴에 따라 이 고을은 縣에서 郡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하면서 追尊된 원종의 무덤이다. 원래는 양주에 있었으며, 이곳으로 옮겨 온 5년 후(1632)에 章陵으로 追崇되었다. 고을의 서남쪽은 서해 바다와 접해 있으며, 동북쪽은 한강 하류에 연해 있다. 지도에는 서남쪽의 바다가 작게 표현되어, 쉽게 알아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한강은 地誌에 지도 위의 孤島라는 명칭을 따서 孤島江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에는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속자도 보이고 있다. ‘芦’는 글자 그대로 보면 ‘호’로 읽어야 하지만, ‘蘆’의 속자로 쓰였기 때문에 ‘노’로 읽어야 한다. 또한 지도 왼쪽의 ‘杻串’에서의 ‘杻’은 지명에서는 주로 ‘유’가 아니라 ‘축’으로 읽어야 한다. (이기봉)

  • 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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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에 해당하여 여러 산성들이 축조되기도 했다. 고을 북쪽에는 온조왕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표시되어 있다. 고을 서쪽의 鷲岩山에는 龍穴이 있는데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한다. 이처럼 각 고을마다 1묘3단(향교,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뿐만 아니라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있었는데, 물이 고인 沼나 연못, 산정상의 움푹 패인 곳이 적격지로 인식되었다. 읍치 서북쪽의 聖居山은 고려 태조가 고을 서쪽 愁歇院에 거둥했다가 산이 성스러워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읍치 동쪽에 표시된 서원은 道東書院이다. 이 서원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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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박천군 박천읍, 덕안면 대부분, 동남면, 청룡면 일부, 용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박천군 대부분 지역, 운전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박천군 봉흥리 일대에 있었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청천강과 대정강을 끼고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영변, 남으로는 안주, 서쪽으로는 가산과 접하고 있다. 박천군은 본래 高麗의 博陵郡으로 995년(성종 14)에 博州防禦使라는 군명을 얻었고,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박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大定江은 일명 博川江이라고도 하는데 安州의 老江과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古城(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북 嘉山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방어상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1741년(영조 17)에 새로 설치한 鎭營이다.(오상학)

  •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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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부는 북쪽 문호리·수화리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의 옛 남양면, 삼화리·유포리를 제외한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송산면·서신면,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 안산시의 대부도,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영흥면과 자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남양동(옛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飛鳳山이다. 읍치 위쪽에 표시된 仁川地는 인천의 월경지인 梨浦面 지역이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分鄕面이 그것이다. 분향면의 현재 위치는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로서 분명히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었다. 이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규장각에 남아있는 18세기까지의 地誌나 지도에도 분향면이 월경지라는 기록은 없다. 이 지도의 작성자도 그런 기록에 바탕을 두고 그렸기 때문에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분향면의 위치가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大部面에는 감목관이 파견된 곳임을 알려주는 황색의 작은 원과 牧(場)이라는 글씨가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580匹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花梁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永宗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永宗에는 원래 永宗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숙종 24년(1698)에 현재의 영종도로 옮겨갔다. 鎭堡와 같은 군사시설은 옮겨가면서 지명도 함께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도 오른쪽의 섬은 대략적인 위치나 크기만 표시한 것일 뿐, 완전히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기봉)

  •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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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이 곳의 지형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간저지를 흐르는 금강유역에 발달한 소규모의 침식분지이다. 문의라는 지명은 붓끝같이 생겼다는 문필봉에서 나온 것으로 義를 위하여 글을 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쪽으로 荊江에 임하였고 산에 울창한 빛이 적지만 강을 연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한다. 읍치의 동쪽 漏峙에는 두 개의 바위굴이 있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아홉 용이 살던 곳이라 하고 이곳의 마을 이름도 九巢라 하였다 한다. 西道面에는 두 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노강서원과 검단서원이다.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 鄭Ꜿ, 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오상학)

  • 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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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동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벽동군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송연리를 제외한 평안북도 벽동군, 충만강 以東을 제외한 자강도 우시군 전 지역, 평안북도 동창군 회상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에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九峰山이다. 본래 여진족이 살던 땅인데 고려 공민왕 때 여진족을 축출하고 이어 1403년(태종 3)에 벽단과 음동을 합하여 벽동으로 고쳤다. 접경 지역에 위치한 고을의 특성으로 인해 압록강 연안에 여러 진보가 설치되어 있다. 위로부터 廣平·小坡兒·大坡兒·楸仇非·碧團·小吉號鎭 등이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다. 특히 남쪽의 林土鎭에는 관문성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고을의 각지에 창고도 많이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 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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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전군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의 노동리·동중리·북삼리·무등리, 군남면의 남계리·황지리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朔寧界에서 들어와 積城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며, 楊州界에 합류되는 것은 그 지류인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에 橫江·澄波渡·楡淵渡·腐淵津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渡와 津은 모두 나루를 지칭하는 한자 명칭이다. 楡淵渡·腐淵津에서의 ‘淵’은 연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처럼 잔잔한 하천구간을 의미한다. 하천은 보통 물살이 빠르고 얕은 여울(灘)과 잔잔하고 깊은 구간(淵·潭·湖 등으로 표시됨)이 반복적으로 연속된다. 나루는 물살이 잔잔하고 깊은 구간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징파도가 징파강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징파도는 조선후기에 나루뿐만 아니라 포구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며, 임진강에서 商船이 일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상류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은 禾津面의 위치이다. 화진면은 양주계로부터 들어오는 한탄강 북쪽·임진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현재의 위치는 군남면 황지리와 남계리 일대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마전군 지도에서는 화진면의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시정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崇義殿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요 임금 8명과 신하를 함께 배향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올려주도록 한 곳이다. 세종 7년(1425)에는 조선의 왕실도 5대만 하도록 되어 있음을 기준으로 삼아, 제1대 태조(재위 918-943)·제8대 현종(1009-1031)·제11대 문종(1046-1083)·제24대 원종(1259-1274)에게만 제사지내도록 했다. 현재도 미산면 아미리에 존재하고 있으며, 작은 고을임에도 ‘郡’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기타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眉江書院이다. 남인의 거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워지고, 같은 왕 29년(1753)에 賜額 받았다. 이러한 서원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최소한 1750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기봉)

  • 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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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이중환의 ≪擇里志≫에 의하면, 가야산 앞뒤에 있는 내포 고을 가운데 산천이 가장 훌륭한데,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불린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唐山이다. 오서산에서 뻗어온 맥세가 길게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다. 읍치의 서쪽에 水營이 표시되어 있다. 본래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는데 1421년(세종 3)에 都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66년(세조 12)에 水軍節度使를 두었다. 충청도 수군의 총본부로 둘레가 3,174척이 되는 성곽도 축조되어 있었다. 이 성곽은 현재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수영의 옆에 표시된 永保亭은 水營 안에 있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다.(오상학)

  • 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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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朔州府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삭주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삭주군 동부, 대관군, 태천군 개혁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접하고 있다. 삭주부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강남산맥으로 인하여 압록강 수계에 속하는 소삭주와 대정강 수계에 속하는 대삭주로 구분된다. 이것은 과거에 읍치가 남쪽의 대정강 유역 대삭주에 있었으나 영토가 확장되면서 1466년(세조 12)에 읍치를 압록강 유역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 고을도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각종의 관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압록강변에 있는 仇寧鎭는 원래 의주 땅인데 세종 때 來屬되었다. 兵馬萬戶가 주둔하였으며 의주의 청수진과 노상탄의 통로, 전량동의 통로를 방어하였다. 남쪽에 있는 天磨鎭은 효종 때 別將을 두었다가 1705년(숙종 31) 첨사진으로 만들고 의주 玉江鎭을 방어했다. 동쪽에 있는 幕嶺鎭은 1647년(인조 25)에 진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었다가 1674년(현종 15) 만호로 승격시켰다.(오상학)

  •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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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부는 인천광역시 부평구·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 부천시, 안양천 서쪽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桂陽山(394m)이다. 이 계양산의 위치는 地誌나 지도 어디에도 모두 읍치의 북쪽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실재로도 북쪽에 있다. 가장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안양천이며,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굴포천이다. 지도 왼쪽에는 서해 바다와 섬이 표시되어 있지만, 섬의 면적이나 위치 등은 다른 지도에서처럼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이 섬들은 둘레가 몇 백보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도 작성자가 왜 이렇게 크게 그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도책에서는 섬을 실재의 크기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는 사실이 참조된다. 이 지도는 정확성을 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면·산·봉수·역 등 아주 간단한 내용만을 싣고 있다. (이기봉)

  •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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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지금의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보은은 땅이 매우 메마른데, 館代는 속리산 남쪽과 甑項 서쪽에 위치하여 들이 넓고 땅이 기름져 가장 살만한 곳이고, 대추가 잘되어 대추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기술되어 있다. 세조가 이곳 속리산의 법주사에 행차할 때, 벼슬을 내린 정이품송이 유명하며 이 곳에서 왕의 병이 치유되자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報恩이라는 지명을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馬老面에 있는 서원은 象賢書院을 말한다. 이 서원은 1549년(명종 4)에 창건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사액되었는데, 金淨·成運·成悌元·趙憲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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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등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상으로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과 거의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양특별시 강동군 일부에 해당한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畿를 나누어 成州(현재의 성천)에 속한 新城·蘿坪·狗牙 세 부곡을 합하여 三登縣으로 하였다. 남쪽으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능성강(지도에는 熊川江으로 표기됨)을 끼고 있고 북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과 접하고 있다. 동으로는 成川, 북으로는 江東, 남으로 황해도 수안, 서로는 상원과 접하고 있다. 면적이 매우 작은 고을로 이에 따라 지도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鳳頭山이다. 위쪽 黃林山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서쪽에서 읍치까지만 그려져 있고 그 외는 그려지지 않아 미완의 느낌을 준다.(오상학)

  • 삭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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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령군은 일제시대의 연천군 삭령면·서남면과 중면의 북쪽 및 왕징면의 동쪽 일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내문면·인목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절반과 개성시 장풍군의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북한 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백로산리(옛 삭령리)에 있었다. 삭령군은 고려 예종 때 朔邑縣과 僧嶺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이름도 두 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嶺이 寧으로 바뀐 경위나 시기에 대해서는 地誌에서 찾을 수가 없다. 兎山界로부터 들어와 漣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孫廳灘이라고 적혀 있는데, 임진강의 이 구간에 대해 이 지역에서 부르던 명칭이다. 여기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역은 사람이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대의 신속한 이동도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地誌나 地圖의 작성에서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었으며, 해당 구간의 하천에 대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철원계와 평강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현재 역곡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강계로부터 직접 들어오지 않으며, 철원을 거쳐 들어온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며, 고을의 전체 모습 역시 비슷하다. 역곡천 변에 적혀 있는 江華坪은 철원의 넓은 평야가 연장된 곳으로서,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마방리 일대에 해당된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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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공주와 더불어 금강 이남에 위치한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백마강가에 위치한 백제의 古都로 釣龍臺·落花岩·自溫臺·皐蘭寺는 모두 백제시기의 고적이며, 강에 다다르면 암벽이 기이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비좁아 평양·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쓰여 있다. 백제 때는 공주와 함께 일국의 도읍지였으나 조선시대의 부여는 감영이 있었던 공주에 비해 작은 고을로 전락하였다. 금강가에는 유서깊은 명소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과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釣龍臺도 보인다. 백마강 근처에  白江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白江 李慶輿, 愼獨齋 金集 등을 배향한 浮山書院이다. 읍치 동쪽에는 백제 충신 成忠과 階伯, 그리고 고려충신 李存吾 등을 배향한 義烈祠가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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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화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삼화면, 대대면, 금곡면, 귀성면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와우도 구역, 항구구역 서부, 강서구역 삼화리, 온천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삼화리에 있었다. 삼화는 평안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청남정맥의 끝자락에 접하고 있다. 동으로는 龍岡에 접하고 있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金堂·呼山·漆井을 합하여 삼화현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1686년(숙종 12)에 防營이 설치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지도에도 여러 섬들이 그려져 있다. 남쪽의 虎島에는 水軍僉節制使영이 있었는데 세종 때 廣梁으로 옮겼다.(오상학)

  •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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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부는 수원시, 오산시, 화성군의 태안읍·동탄면·정남면·봉담읍·팔탄면·향남면·장안면·우정면·양감면과 송나리·원리를 제외한 매송면, 평택시의 포승면·청북면·안중면·현덕면·오성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안녕리 일대였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鉢岾山이었다. 이 고을이 이렇게 크게 된 최초의 계기는 이 지역의 세력들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초기부터 많은 屬縣(縣·鄕·所·部曲)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屬縣들은 그대로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고, 그런 배경 때문에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고을의 越境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월경지의 상당부분이 主縣으로 존재했던 이 고을의 역사와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중간 부분에 振威界라 쓰여 있는 곳에도 수원의 땅이 있었다. 현재의 위치는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와 고덕면 동청리·당현리 일대이다. 또한 이 고을 안에 있었던 다른 고을의 월경지에 대한 표시도 정확하지는 않다. 이 부분은 다른 고을의 지도에 대한 해제 부분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지도 위의 읍치는 정조 13년(1789)에 지금의 수원시내로 읍치를 옮기기 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정조 13년(1789)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현재의 아산만이 보이고 있으며, 읍치 오른쪽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황구지천으로 불리고 있다. 황구지천 상류에는 柳川(버드내)이 적혀 있는데, 해당 구간에서만 불리던 명칭이다. 황구지천 역시 구간마다 매우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이 여러 地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는 숙종 20년(1694)에 宋時烈(1607-1689)을 配享하여 세웠으며, 다음 해에 賜額받은 梅谷書院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위쪽으로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彌勒堂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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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남포, 아래로는 서천과 연결된다. 면의 중앙부에 월명산이 있으며 북동쪽은 대체로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이다. 서부는 서해안에 근접하면서 점차 평탄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포와 더불어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읍치에는 세종 때 건립된 것으로 둘레 1,168보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읍성 서쪽의 馬梁鎭(서면 마량리)은 水軍僉節制使의 진영으로 본래 남포현(보령시 웅천읍 황교리)에 있던 鎭을 1656년(효종 7)에 옮겨온 것이다. 남포의 원래 진영이 배를 정박시키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오상학)

  •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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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풍동면, 수산면, 천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서남부와 서부 일부를 제외한 상원군과 일치한다. 평안도의 남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대동강의 지류와 접하고 있고 아래로는 해서정맥의 지맥이 뻗어 있다. 따라서 동부와 남부 지역이 높고 북부 지역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경계를 따라 남강이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군의 중심부를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상원천 유역에는 상원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으로는 황해도 수안, 서로는 평양, 남으로는 황해도 황주, 북으로는 삼등, 강동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盤龍山이다. 읍치 북쪽에 있는 觀音山은 산 속에 굴이 있는데 모양이 觀音같다고 한다. 이 고을은 예로부터 뽕과 삼으로 유명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 土産條에도 기재되어 있다.(오상학)

  •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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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군은 하중동·하상동을 포함한 시흥시의 남쪽 부분과 시청 서·북쪽의 안산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은 읍치 오른쪽의 修理山(475m)을 비롯하여 3-400m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은 야산지대에 불과하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형적 특징이 대략적이나마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舊草芝라는 표시가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 草芝梁營이 있었던 곳이다. 이 초지량영은 효종 7년(1656)에 강화군 길상면의 초지리로 옮겨갔으며, 草芝鎭이라 불리게 되었다. 營·鎭·堡와 같은 군사기지는 위치를 옮겨가면서 명칭 역시 대부분 그대로 가져간다. 다만 옛 초지량영은 현재도 안산시에 초지동이란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고을과 아래쪽 南陽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시화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에 있는 衣島(오이도)와 雙島(큰가리섬과 작은가리섬) 역시 방조제의 일부분이 되면서 육지화 되었다. 더 오른쪽에 있는 乭注(島)와 召勿(島)는 地誌의 내용과 비교해 보아도 많이 왜곡되어 있다. 돌주도의 경우 ≪여지도서≫에는 서쪽 40리에 있다고 나오며, 의도(오이도)는 서쪽 47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의도 오른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만 돌주도와 소물도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기봉)

  •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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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인종 때 부성(富城)에 현령을 두었으나 1182년(명종 12)에 이속(吏屬)이 수령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읍치(邑治)를 지곡에서 오늘의 서산시로 옮겼다. 1284년(충렬왕 10) 주민인 정인경(鄭仁卿)의 공로로 다시 복군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안군·서산군·해미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셋이 합쳐져 서산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서산은 서산시 14개 동(읍내동·동문동·온석동·갈산동·잠흥동·수석동·예천동·석남동·죽성동·양대동·오남동·오산동·장동·덕지천동) 및 대산읍·성연면·지곡면·팔봉면·음암면·운산면·인지면·부석면, 태안군 안면읍·고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邑治)는 현재의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위치했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주위가 3천 7백 10척(약 1,200m)에 높이가 12척이며,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 성안으로 흘러 들었다고 한다. 지도상에서는 산들이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서 보인다. 봉수는 현재의 부춘산(187.6m)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倉은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한 개씩 있다. 서산은 서·남·북 3면이 모두 바다로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이 지역이 운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태안계와 경계하는 지점에 굴포(掘浦)라는 곳이 있으며, 안면串은 안면도가 되었던 것이다. 지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굴포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그 간격이 상당히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 한양으로 조운선이 다녔는데 육지에서 멀리 돌아서 다니면 풍랑에 위험하다하여 해안선에 가까이 접근하려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 증거가 굴포에 운하를 뚫으려고 했던 것이며, 안면도는 실제로 조선 인조 때 운하를 팜으로써 섬이 되었다. 조선시대 안면도는 송림으로 유명했으며 목장도 있었는데, 지금도 울창한 송림을 볼 수 있다. 지도상에서의 안면도는 산과 어촌명만 표시되어 있다. 죽도는 간월도의 남쪽에 있는데, 지도상에서는 간월도의 위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서산지역은 해발고도 100~300m 내외의 낮은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완사면 및 구릉지들이 있을 뿐, 큰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굴곡이 심한데, 여러 차례의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상당부분이 완만해졌다. (이상균)

  • 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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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선천군 전부와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북부를 제외한 선천군 전체, 서부를 제외한 동림군 전체, 곽산군 동래강 서안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안의 고을로 동쪽에는 鐵馬川이 흐른다. 동으로는 곽산, 서로는 철산, 남으로는 바다, 북으로는 구성에 접해 있다. 의주대로의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라 여러 관방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서쪽의 東林城은 옛 宣州城으로 고려시대 宣州 때의 치소이기도 하다. 과거 이곳에 5領과 5部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남쪽에 있는 劍山城은 1627년(인조 5)에 府使 孟孝男이 돌로 쌓았고, 그 후 1631년(인조 9)에 府使 閔涵增이 증축하였다. 일설에는 防禦使 林慶業이 증축하였다고 한다. 그 옆의 淸江城은 淸江鎭이 있던 곳으로 1678년(숙종 4)에 召募別將을 두었다가 영조 때에 僉使鎭으로 승격시켰는데 1769년(영조 45)에 철산부의 서쪽 林山城으로 옮겼다. 身彌島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문헌비고≫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500필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오상학)

  •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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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시 시내·금광면·미양면·대덕면과 북가현리·동평리·남풍리를 제외한 보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명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229.5m)이다. 읍치 아래의 하천이 안성천의 본류이며, 陽智界로부터 들어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한천이다. 고을 전체나 산세·하천의 모습이 실재와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몇 개의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 표시된 外山面은 안성의 땅이 아니었으며, 동쪽의 竹山에 속해 있었다. 이 지도책의 竹山 지도에도 外山面이 나오고 있는데, 편집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양지와의 경계선 부근에 표시된 其佐面은 읍치 바로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기좌면 자리에는 北佐面이 표시되어 있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18세기의 地誌나 地圖의 자료에는 모두 북좌면이 기좌면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편찬자가 기좌면과 북좌면의 유사성으로 인해, 북좌면을 생략하면서 범했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 그 오른쪽의 寶山은 죽산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산이 ‘북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재로는 동북쪽에 있는 것을 북쪽으로 표현하여 위치 비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이 지도에 나오는 面이 당시에 있었던 모든 面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님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기봉)

  •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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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중앙에 烏石山(127m)이 있고, 북동부는 대부분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대이다. 남서부는 비옥하고 평탄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며, 길산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韓山·林川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그 옆에는 전선을 정박시키던 戰船廠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 해안의 장항면은 오늘날 장항선의 종착지로 유명한 장항이다.(오상학)

  • 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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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대구면을 제외한 성천군 전 지역과 순천군 은산면 남쪽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성천군 대부분 지역, 회창군 대부분 지역, 북창군 일부, 강동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고구려 비류국의 수도이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이곳에서 피난한 적이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劒鶴山이다. 읍치 북쪽의 屹骨山에는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구려 시조 東明王이 부여로부터 남하하여 힘을 겨루어 굴복시킨 沸流國의 왕 松讓이 쌓은 성이라고 나와 있다. 읍치를 돌아 나가는 강은 佛流江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곧 沸流江이다. 일명 卒本川이라고도 하는데 물이 흘골산 밑을 지날 때 산밑에 있는 굴 속을 뚫고 沸騰하여 흘러가므로 비류강이라 했다 한다. 동남쪽의 白靈山 밑에는 箕子影殿이 있는데, 1696년(숙종 22)에 세우고 그해에 懸額하였다. 이 고을에는 곳곳에 창고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서북쪽의 溫水面에는 溫井이 보이고 동쪽의 靈臺山 부근에는 은을 캐던 銀店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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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강상면·강하면·양서면·서종면·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과 북한강 남쪽의 외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평읍 양근리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위에 古邑으로 표시된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이후 영조 23년(1747)에 지도 위의 읍치 지역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의 양근군 지도는 읍치를 옮기기 이전의, ≪여지도서≫의 지도에는 옮긴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加平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이며, 新恩川 왼쪽으로부터 읍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남한강이다. 남한강에는 水運 상 중요한 여울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大灘은 우리말 ‘한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현재의 양서면 대심리 부근에 있었다. 한여울에는 큰 바위가 가운데에 있어 사공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 초에 이 바위를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었 있기도 하다. 남한강가에 있는 分院里의 위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幷灘 왼쪽에 표시되어야 실재에 부합된다. 이곳에 관용도자기를 굽던 司饔院의 分院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分院里란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도 광주시 남종면에 분원리 명칭으로 남아 있으며, 수많은 가마터가 발굴되고 있다. 북한강가에 있는 北面 지역은 고려 때 迷原莊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가평군 설악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縣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기타 작은 하천의 명칭까지도 하나하나 적어 넣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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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성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읍치는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금강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지금의 석성천이 水湯川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논산천이 흐르면서 금강과 합류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恩津과 더불어 들에 위치했으나 땅이 메말라 수재와 한재를 자주 당한다고 한다. 산간 계류가 풍부하지 못한 지형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도 산지는 해발 421미터의 태조봉에서 금강변의 파진산으로 내려온 맥세 정도만이 그려져 있다. 서쪽 하천가의 波鎭山은 기암절벽이 솟아 있고, 그 옆에 배를 대던 곳이 鳳頭津이다. 猪浦에는 江倉이 있었는데 고을의 세곡을 이곳에서 수합하여 서울로 운반하였다. 읍치 서쪽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尹文擧를 배향했던 蓬湖書院이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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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동송면, 조운면, 검산면, 서해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서부를 제외한 숙천군 전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바다에 연해 있고 동쪽으로 청북정맥에 연결된다. 고을에는 淸南前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663년(숙종 4)에 永柔로부터 옮겨온 것으로 속읍은 숙천·영유·증산·순안 등이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堂山이다. 읍치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通德川이다. 고려 태조 때 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通德鎭이라 했는데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고을의 동남쪽에 있는 虎田城은 흙으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9,710척이고 높이가 13척이었다. 서쪽 해안에는 간척과 관련된 수리시설인 補民筒도 보인다.(오상학)

  •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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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없음

  • 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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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내포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아산, 아래로는 예산과 연결된다. 동쪽에 峙鶴山(135m), 서쪽에 鶴城山(183m)·孟山, 德巖山(261m) 등의 산지가 있고 대체로 구릉지대로 되어 있다. 북부의 곡교천과 오목천 유역은 탕정평야로 이어지는 비옥한 충적평야이다. 이 고을은 고려시대부터 인근 고을의 租稅를 거두어 해상으로 조운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1391년(공양왕 3)에 고을의 서쪽 獐浦에 성을 쌓고 溏城이라 이름짓고 근처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여 해상으로 조운하였던 것이다. 지도에도 북면의 강가에 창고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오상학)

  • 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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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안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원군 순안면·양화면·공덕면·동암면·한천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평성군 동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남으로 평양과 접하고 있으며 의주가는 직로상에 위치해 있다. 동으로는 청남정맥이 닿아 있다. 1136년(고려 인종 14)에 西京을 나누어 楸子島·櫻遷村·龍坤村·禾山村과 합하여 順和縣을 만들어 서경에 예속시켰다가 후에 祥原에 예속시켰다. 1396년(고려 태조 5)에는 치소를 평양부 安定站으로 옮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서북방면에 있어서 군사·교통상의 요지였다. 군사상으로는 평양을 방어하는 외곽지대로 獨子山·大船串·西金剛山 등에 봉수가 있었고, 騎撥인 官門站이 있어 의주 지방의 상황을 남쪽으로 전달하였다. 읍치에 있던 安定驛은 평양·慈山·永柔·甑山·江東·成川 등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이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북쪽 法弘山에는 유서깊은 法興寺가 있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休靜이 승군을 집결시켰던 곳으로도 유명하다.(오상학)

  •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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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포천군 신북면의 덕둔리·삼정리·갈월리·금동리, 고양시 덕양구의 오금동과 지축동, 서울특별시 도봉구·노원구·중랑구와 은평구의 구파발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위쪽의 佛谷山(470m)이었다. 본 지도에는 양주목 뿐만 아니라 한성부의 都城과 城底十里를 모두 그리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이 지도에서의 한성부는 한강-古楊州面-三角山-延曙를 잇는 범위 안에 있었다. 본 지도는 한성부 중 都城 부분이 실재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교정되어 있다. 이 지도보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양주목 지도에는 도성 부분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두 지도가 비록 회화식 지도이기는 하지만, 본 지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 안에는 宮과 성균관 정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으며, 그 밖의 정보로는 현재 청계천으로 불리는 開川이 거의 유일하게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加平界로부터 북한강이 들어오며, 陽根界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강의 본류가 된다. 실재로 廣州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서도 한강이 연결되어 있지만, 본 지도는 양주의 영역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한강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蠶島·栗島 등이 크게 그려져 있다. 한강 남쪽 변에는 西江과 麻浦(삼개)를 비롯한 포구와 나루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상업이 발달한 지역임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실재로는 이 포구와 나루의 대부분이 한강의 북쪽 지역에 있었는데, 여백이 적어 남쪽 지역에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강으로는 현재 중랑천·왕숙천이 합류하고 있는데, 지도에는 각각 豆驗川·王宿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보이는데, 지도에는 大灘으로 적혀 있다. 한탄강의 ‘漢’은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의 음을 표현한 것이므로, 한자의 ‘大’와 자주 섞여 사용된다. ‘한탄’ 또는 ‘대탄’의 순우리말은 ‘한여울’이다. 대탄 부분은 실재와 비교하여 약간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大灘으로부터 壺知山까지의 한탄강 북쪽 부분이 양주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둘째, 한탄강의 지류인 哨村川이 積城界을 넘어 뻗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교정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平丘(驛)이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기호와 함께 지도 아래쪽 가운데쯤에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호는 이 지도책에서 주로 鎭堡를 표시하던 기호이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기봉)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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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은 현재의 아산시 염치읍, 인주면, 영인면, 둔포면, 음봉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위치했었다. 남쪽으로 온양, 신창과는 곡교천을 경계로 하였고, 동쪽으로는 천안과, 서쪽으로는 아산만과 면해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직산, 평택과 경계를 이루었다. 읍치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는 공세창은 아산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고을들의 세곡을 이곳에 수납하였다가 漕運하여 서울로 나르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곳이다.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嘉靖 계미년에 비로소 집을 지으니 무릇 80간이었다고 한다. 지도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동남쪽 방향으로는 忠武公祠宇가 있다. 이는 충무공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706년(숙종 32)에 세워졌고 이듬해에 사액되었다. 봉수로는 연암산 봉수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천안의 대학산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직산의 망해산과 호응한다. 현재 이 지역은 아산만 방조제의 축조로 바다와의 연계성은 거의 없어졌으며, 충청도와 경기도를 잇는 도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상균)

  •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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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군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순천군 순천읍, 북창면, 선소면 일부, 내남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순천시 강포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殷山을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읍치가 있는 서쪽 지역이 더 작다. 동쪽 지역은 고려시대 읍치가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龍淵堡 근처에 古邑이라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옛 이름은 精戎인데 읍치 부근에 있는 하천이 정융강이다. 순천에는 右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속읍으로는 順川·成川·江東·三登·陽德·兎城·龍洞 등이다. 고읍 터 근처에 있는 龍淵堡에는 別將이 파견되어 있었다. 고을의 동북쪽에 龍島面에는 官胎峴이 있는데 일설에는 군수가 이곳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오상학)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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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시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定水山이다. 이 고을은 정종 1년(1399)에 수원의 양량부곡이 현으로 승격된 것이며, 태조 13년(1413)에 지도 위에 있는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겼다. 아울러 죽산의 陽良·高安·大谷·木岳·蹄村 등의 部曲을 새로 편입하여 지도 위와 같은 양지현이 만들어졌다. 面의 이름에 朱자가 들어가 있는 추계향은 용인시 시내의 일부와 양지면, 面의 이름에 古자가 들어가 있는 양량부곡은 안성시의 고삼면에 해당되는 큰 규모였다. 나머지 네 개의 부곡은 현재 1-2개의 里에 해당되는 작은 규모이며, 각각 고안면·박곡면·목악면·제촌면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한강의 지류인 탄천의 상류이며, 서남쪽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옛 추계향 지역과 양량·목악 부곡이 지나치게 넓게 연결되어 있다. 두 지역은 거의 떨어져 있는 듯 연결해야 실재에 가깝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제촌면 지역도 고안면과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여러 地誌에 이와 같은 사실이 모두 적혀 있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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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읍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금강의 지류인 東津江이 흐르고 주변으로 산지가 지역을 감싸안고 있다. 북으로는 전의, 남으로는 공주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城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중앙을 지금의 연기천이 흘러가 東津에서 만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청주 赤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오상학)

  •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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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안주군 대부분 지역, 개천군 중서면 서쪽 일부, 평안북도 박천군 일부, 영변군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청천강 이북지역을 제외한 안주시 전 지역, 문덕군, 박천군 청산리와 영변군 연화리와 서화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안주는 청천강 남안에 위치하여 고려시대 이후 군사요충지로서 중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 평양과 더불어 의주대로의 길목에 위치한 큰 도회로 저자에 중국 물품이 풍부하다. 장사치로서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왕래하는 자는 많은 이익을 얻어 부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한다. 안주목의 鎭山은 읍치의 동쪽에 위치한 加頭山 또는 太子山인데, 지도에는 太子峰으로 나타나 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청천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에는 하중도인 七佛島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百祥樓가 표시되어 있다. 누각 옆에는 칠불사가 있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고구려 때 수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강가에 이르렀을 때 스님 일곱에 앞에서 물을 건너는데 물이 무릎에도 차지 않았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도 스님들을 따라 공격해 가다가 선봉에 선 부대가 빠져 죽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을 후퇴시키자 스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지방 사람들이 부처님의 은덕으로 여겨 절을 짓고 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쪽 해안의 老江鎭은 해안을 방어하던 水軍僉節制使營이다.(오상학)

  • 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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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와 영등포구 양평동 일대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이었다. 고을 동쪽에는 한강이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며, 衿川界로부터 흘러들어와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안양천으로 불리고 있다. 한강에 표시된 孔岩은 글자 그대로 구멍이 뻥 뚫린 바위로서, 한강 가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현재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공암 근처에 있었던 孔岩津은 ‘金을 우연히 줍게 된 형제가 서로 다툴 것을 염려하여 금을 버렸다’는 옛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 아래쪽의 塩倉은 소금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며, 현재의 강서구 염창동 일대를 가리킨다. 그 오른쪽의 仙遊峯은 현재의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것으로서, 楊花津으로 더 알려졌던 곳이다. 기타 開花山이 있는 근처가 지금의 김포공항이 들어선 곳이다. (이기봉)

  • 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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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양촌면 일부, 벌곡면, 부적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연산면 연산리 부근에 있었다. 連山이란 지명은 산들이 연달아 뻗어간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고을의 동쪽으로 금남정맥의 줄기가 계룡산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이 마지막 격전을 치렀던 황산벌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백제군이 주둔했던 황성이 남아 있고 계백장군 묘도 전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산지가 많지만 땅이 기름지다고 했다. 이 지역은 다른 고을보다 서원이 비교적 많이 세워져 있었다. 龜山書院(연산면 오산리)은 1702년(숙종 28)에 창건되어 윤전, 윤원거, 윤순거를 배향했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고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또한 休亭書院은 1700년(숙종 26)에 창건되어 유무 선생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忠谷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어 백제의 계백장군과 조선의 사육신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 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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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양덕군 전부와 성천군 대구면, 사주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양덕군과 신양군 전체에 해당된다. 원래 高麗의 陽岩·樹德의 兩鎭으로 1396년(태조 5)에 합하여 陽德縣으로 하였다.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하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포진하고 있는 산간 고을이다. 동으로는 함경도 고원, 서로는 성천, 남으로는 황해도 곡산, 북으로는 맹산현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隱于山인데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북서쪽의 載靈山의 정상에는 龍淵이 있어서 속담에 나무꾼, 사냥꾼이 떠들면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고 한다. 읍치의 서쪽 陽岩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938년(고려 태조 21)에 쌓은 石城이다. 고을 서쪽의 水德山城은 土城으로 983년(고려 성종 2)에 쌓았으나 당시는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북쪽에 위치한 兎城鎭은 1662년(숙종 3)에 屯을 설치하면서 둔 別將을 1665년(숙종 6)에 첨사로 승격시킨 육군 진영이다. 이 고을에는 온천도 있었는데 草川面 溫井과 다른 하나는 溫川面에 위치한 溫井이다. 현재도 양덕 온천은 명성이 높다.(오상학)

  •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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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목은 강천면과 금당천 동쪽의 북내면을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北城山이었다. 이 고을의 원래 이름은 驪興이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세종의 무덤인 英陵을 읍치 왼쪽의 북성산에 옮기면서 驪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뿐만 아니라 위쪽의 梨浦津 부근에 중심지가 있었던 川寧縣을 없애고 이 고을에 합하였으며, 고을의 格도 府에서 ‘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릉이 고을에 입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예가 될 수 있다. 英陵 오른쪽의 寧陵은 효종의 무덤이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약간 애매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와 陽根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 본류이다. 오른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오는 金塘川은 실재보다 조금 과장되어 있다. 하천의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지평에 걸쳐 있는 상류 또한 상대적으로 짧다. 반면에 아래쪽의 天民川(청미천), 이천 방향에서 내려오는 福川(복하천), 砥平界로부터 들어오는 新恩川 등은 다른 고을에 걸쳐 있는 상류가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훨씬 길다. 福川과 합류되는 것으로 그려진 華隱川(양화천)은 실재로는 복하천과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남한강변에는 많은 나루(津)가 표시되어 있는데, 단순히 나루만이 아니라 중요한 浦口의 기능을 가진 곳도 많았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이 梨浦津이며, 현재의 금사면 이포리에 있었다. 李重煥(1690-?)의 ≪擇里志≫에서도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梨浦는 우리말 ‘배개’에 대한 한자표기이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우리말의 발음을 따서 ‘白崖’로 기록하였다. 이포진 오른쪽의 沂川書院은 金安國(1478-1543)·李彦迪(1491-15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13년(1580)에 세워지고, 인조 3년(1625)에 賜額 받았다. 읍치 위쪽의 孤山書院은 李存五(1341-1371)·曺漢英(?-1670) 등을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기타 읍치 위쪽의 八大藪는 남한강변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숲으로서, 八長林이라고도 한다. (이기봉)

  • 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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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동쪽으로 조령을 넘으면 경상도 문경과 통한다. 鳥嶺은 일명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조령의 위쪽에 표시된 鷄立山은 계립령으로 보인다. 계립령은 속칭 마골재 또는 하늘재라고 불린다. ≪三國史記≫에 158년(신라 아달라 이사금 3)에 계립령을 처음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늘재는 전략요충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쟁탈전이 발생하였고 고려시대에서도 이 지역의 주요 고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령이 개척되면서 서서히 고개의 기능을 상실하여 지도에서도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령의 서북 사면에 있는 安保驛은 온천으로 유명한 지금의 수안보에 해당한다.(오상학)

  • 영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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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변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영변군 대부분 지역,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영변군의 대부분 지역, 구장군 대부분 지역, 향산군 전 지역, 운산군 일부, 태천군 일부, 박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으로는 청천강을 끼고 있다. 본래 고려시대에는 撫州와 延州였는데 이후 무산현과 연산부로 바뀌었다. 1429년(세종 11년)에 연산과 무산을 합쳐서 영변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고을의 서쪽에는 옛날 撫州가 표시되어 있고 남쪽 延山面은 연산부가 있던 곳이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남쪽의 藥山이다. 이곳은 철옹성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고을의 읍치가 이 성안에 있기 때문에 성을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산세를 따라 성을 쌓았는데 가파르고 험하여 철옹성이라 부르며, 평안도 일대에서 외적을 방어할 만한 곳은 오직 여기 뿐이다’고 기술되어 있다. 세종 때 옛 성터에 돌로 쌓았고 인조 때 수축하였다. 성의 서쪽에 위치한 藥山東臺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아름다워 관서팔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오상학)

  • 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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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현은 연천군 연천읍, 중면의 남쪽 부분, 황지리 남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朔寧界로부터 들어와 麻田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橫江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永平界에서 들어와 마전계에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大灘이라고 적혀 있다. ‘大’는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따라서 한자표기인 大灘·漢灘에 대한 순수 우리말 지명은 ‘한여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한탄강이 북류하면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거의 서류하면서 합류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행정구역의 경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되는 지점의 동북 부분은 실재로는 마전의 영역이었다. 또한 그 동쪽에 있는 한탄강 양쪽의 상당 부분은 양주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마전의 영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탄강의 유로가 잘못 표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와 ≪해동지도≫ 내의 연천현 지도에는 비록 회화식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이 밖에 읍치를 지나는 車灘은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더 먼 거리의 철원 땅에서 발원한 후 이 고을의 경계로 들어온다. (이기봉)

  • 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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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저산성 구릉지로 침식분지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족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다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 고 쓰여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옆에 있는 성황산이다. 남쪽의 龍化倉이 있는 곳은 고려시대 때 龍化縣이었다. 동면에 있는 重華寺는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화신리 天摩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法住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서 701년(효소왕 10) 사이에 義湘大師가 창건하고 龍華寺라 하였으며, 당시에는 南角山 기슭에 있었다. 그 뒤 화엄종의 대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260년(원종 1) 普覺國師가 중창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폐사되자 명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고 사찰명을 중화사라고 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休靜이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고, 이 절의 승려들은 모두 騎虛의 의승군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그 뒤 8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77년(숙종 3)에 중건하였고, 1797년(정조 21) 淨腎이 殿堂을 모두 중수하였다.(오상학)

  •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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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영원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영원군과 대흥군을 합친 것과 일치한다. 읍치는 영원군 문곡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내륙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대동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寧遠鎭이었는데 1396년(태조 5)에 永淸에 합하여 永寧이라 칭했고, 1466년(세조 12)에 古寧遠 땅에 별도로 군을 두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快山이다. 원래의 읍치는 쾌산 옆에 있었는데 군이 설치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고읍이 있던 지역을 흐르는 강은 廣城川인데 부근에는 동굴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굴안에는 두개의 못이 있고 위로 오르는 듯한 형상의 石龍이 있다고 하는데 설명으로 보아 석회동굴의 石柱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寧城鎭은 이 고을의 중요 진영이다. 이곳에는 1641년(인조 19) 처음으로 別將을 두었다가 1666(숙종 7) 兵馬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1686년(숙종 27) 獨鎭僉使로 삼았으나 1828년(순조 28)에 혁파하였다.(오상학)

  • 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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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현은 포천군 영중면·영북면·이동면·일동면·창수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왼쪽 위의 漣川界에 있는 하천은 현재 한탄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읍치 아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영평천이라고 한다. 이 지도에서는 이러한 하천의 표시가 약간 잘못 되어 있다. 영평천 중 동쪽에서 발원하는 부분은 金化界에 있는 白雲山 부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東國與地勝覽≫·≪輿地圖書≫에도 이 하천은 모두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이러한 地誌의 내용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아마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를 참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어 雨音山이란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 등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에는 동시에 나온다. 그런데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에는 우음산과 김화계 사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우음산 북쪽에 또 다른 유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탄강 본류 역시 최소한 烽이라 적혀 있는 부분까지는 철원과의 경계선을 타고 흐른다. 이것 역시 전체적으로는 ≪여지도서≫의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실재와 부합되게 하려면, 백운산 - 김화계 - 혜재참 부근 - 우음산이 연속적인 산줄기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평천의 상류도 이곳까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지도의 백운산에서 철원계-김화계 사이로 흘러가는 하천는 실재로는 없어야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다만 이 지도에서 북면으로부터 흘러나와 한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지나치게 백운산 가까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김정호가 이 하천이 백운산에서 발원한다는 지지의 내용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밖에 읍치 왼쪽의 玉屛書院은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효종 9년(1658)에 세워지고, 숙종 39년(1713)에 賜額 받았다. (이기봉)

  • 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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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본래 고구려의 乙阿旦縣이었는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고을의 속현으로는 於上川縣이 있었는데 지도 제작 당시에는 魚上川面으로 직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서쪽에 있는 毗摩羅山에는 강을 끼고 난 절벽에 석벽을 파서 길을 만들었는데 아주 험하다고 한다. 이는 벼랑에 낸 棧道를 말하는 것으로 영남대로에도 문경에 兎棧이라는 대표적인 잔도가 남아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소재)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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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유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청산면 북부·용호면·해소면· 검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원군 서북부, 숙천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평원군 삼봉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연한 고을로 동으로는 청남정맥과 접하고 있다. 1396년(태조 5)에 寧遠과 柔遠의 두 진을 합쳐서 永寧縣이라 일컬었다. 1423년(세종 5)에 永寧이라는 고을 이름이 永寧殿과 같다하여 그 이름을 永柔縣이라고 하였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米豆山이다. 읍치 북서쪽의 通海鎭은 通海縣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에 있는 臥龍祠는 1603년(선조 36)에 창건되어 제갈량을 배향하였는데 1668년(현종 9)에 臥龍이라 사액되었다. 이후 1750년(영조 26)에 三忠祠로 개명되었다. 이곳은 조선후기 河岸干拓이 활발하게 행해졌던 곳이기도 하다. 고을 중앙의 德池筒, 남쪽의 元堂筒 등이 강가의 갯벌을 간척하여 만든 일종의 수리시설이다.(오상학)

  •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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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현은 용인시 수지읍·구성면·포곡면·모현면·기흥읍·이동면·남사면과 마평동·운학동·해곡동을 제외한 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1413)에 龍駒縣과 處仁縣을 합하여 만들어졌고, 각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다가 龍仁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용구현의 중심지가 지도 위의 읍치 지역이며, 처인현의 중심지는 아래쪽에 古縣이라고 적혀 있다. 처인현은 원래 處仁部曲이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에 金允候가 몽골의 장수인 撒禮塔을 사살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인현은 현재 용인시 남사면과 이동면에 해당되어, 縣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部曲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용인 시내는 지도에 金岑(→岺)驛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고을의 유역권이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위쪽의 2개 하천은 모두 한강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탄천의, 오른쪽의 것은 경안천의 상류이다. 아래쪽의 2개 하천은 모두 안성천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오산천의, 오른쪽의 것은 진위천의 상류이다. 지도에는 각각 葛川·魚肥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두 공식명칭에서는 사라졌다. 기타 읍치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深谷書院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의 사림파로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 중종 14년(1519)의 乙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趙光祖(1482-1519)를 배향하였다. 효종 1년(1650)에 세워지면서 賜額 받았으며,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현재의 수지읍 상현리에 있었다. (이기봉)

  •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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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 들어와 919년(태조 2년)에 예산현이라 개칭하였다. 지도에서의 예산은 현재의 예산읍 중심부와 신암면, 오가면, 대술면 일대에 해당된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금오산 남쪽에 있는 邑治는 현재의 예산읍 예산리에 해당된다. 읍치에서 북쪽으로 2리 지점에 있는 金烏山이 鎭山이다. 지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것은 무한천이고 좌측을 돌아가는 것은 삽교천인데, 이들은 모두 북으로 흘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삽교천(揷橋川)과 그 지류인 무한천(無限川) ·곡교천(曲橋川) 등 3개 하천 유역에 형성된 충적평야는 예산군과 당진군의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고 부르는데, 옛날에는 內浦라고 불렀으며 쌀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예산군은 예산, 덕산, 대흥이 통합된 것으로써 과거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도에서 북쪽의 무한천 변에 위치하고 있는 浦倉은 현재의 예산읍 창수리에 해당하는데, 과거에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창고였다. 중앙부에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으로써 숙종 을유년(1705년)에 세웠고, 갑오년(1714년)에 사액 하였다. 지도상에 나타난 읍치의 위치를 보면, 뒤에는 진산인 금오산이 있고, 읍치의 앞으로는 무한천의 지류가 흐르며 그 앞으로는 望山이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도 산과 하천이 읍치를 에워싸고 있는 형상임을 볼 수 있다. (이상균)

  •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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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지운면, 다미면, 오신면, 양곡면, 용월면, 서화면, 해운면, 강서군 함종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남포직할시 항구구역 일부, 대안구역 일부, 용강군 일부, 온천군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용강군 옥도리 일대에 있었다. 龍岡縣의 옛 縣名이 黃龍城 또는 烏山인데, 황룡성은 황룡산성에서, 烏山은 烏石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의 鎭山은 현의 북쪽 1리에 있는 烏石山이다. 烏石山에는 黃龍山城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옛날 黃龍國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의 다른 이름으로 安市城이라는 기록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데 요동에 있던 안시성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 해안에는 溫井이 표시되어 있다. 물맛이 짠 해수 온천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음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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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죽현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장호원읍·율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의 관성리·병암리·도신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고을 남쪽에 天民川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현재 淸美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읍치 왼쪽에 약간 보이는 하천은 복하천이라고 한다. 읍치 위쪽의 雪城山(290.5m)으로부터 왼쪽의 老城山(269m)까지 산줄기가 굻게 연결되어 있는데, 실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이 산줄기가 복하천과 청미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재로는 야산이나 둔덕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읍치까지의 脈勢를 중요하게 여겼던 회화식 군현지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산줄기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더 부정확하다. 天民川의 모습도 실재와 다른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천민천의 본류는 陽智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며, 가장 큰 지류는 지도에서와 달리 天民川이란 글씨 부근에 있는 충주와의 경계선을 타고 합류된다. 無極驛과 八聖山의 위치도 石院 부근에 그려 넣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石院은 보통 乭院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현재도 ‘돌원’이라고 부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근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실재의 모습을 더욱 왜곡하고 있다.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 바로 아래쪽에는 竹山界가 표시되어 있어야 현실에 더 부합된다. 읍치와 오른쪽 忠州界와의 사이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長湖院場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도에서 이 場이 표시되고 있지는 않으나, 거의 모든 지도에서 장호원의 또다른 기록 방식인 長海院이란 명칭이 발견된다. 이 지도에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음은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기봉)

  •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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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지역이 동남쪽으로 무주와 황간까지 길게 뻗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 이 고을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이들 속현이 면으로 편제되어 직촌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속현이 있던 곳은 창고가 설치되어 있어서 여전히 지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15세기 후반 72곳이나 달했던 속현은 17세기에 이르러 거의 소멸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해발 494미터의 마성산이다. 읍치는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 郡東面의 表忠祠는 趙憲·金集·宋浚吉·宋時烈·趙完基 등을 배향한 사액서원이었다.(오상학)

  •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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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용천군 북부를 제외한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용천군 남부 지역, 염주군 동부 지역, 피현군 서남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서해안에 연해 있으며 청북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고을이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의주, 남쪽은 철산, 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동쪽에 위치한 龍骨山이다. 산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은 조선후기 국방강화의 일환으로 1624년(인조 2)에 신축되어 1704년(숙종 30)에 완성되었다. 고을 북쪽에 있는 良策館은 의주대로를 통해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고을의 서남쪽에는 彌串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1678년(숙종 4)에 설치되어 僉使가 파견된 군영이다.(오상학)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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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이천시 시내·부발읍·대월면·모가면·호법면·마장면·신둔면·백사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5리에 있었다’는 雪峰山(394.3m)이었다. 하천과 산줄기의 모습이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지금도 지도 위에 적혀 있는 것처럼 福河川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쪽에 獻海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현재 양화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실재로도 지도에서처럼 양화천의 상류 일부가 이 고을 남쪽에 거의 유사하게 걸쳐 있다. 면의 표시에서는 이 지도책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읍치에 있었던 邑內面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읍치 왼쪽에 보이는 五川面은 五川驛의 誤記이며, 母山面 부근에 葛麻洞面(또는 加麻洞面)이 적혀 있어야 합당하다. 지도에는 站도 2개나 적혀 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선조 30년(1597)부터 시작된 擺撥制度의 시행 결과를 보여준다. 파발제도란 변방으로 가거나 오는 공문서를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서 騎撥은 25리마다, 步撥은 30리마다 1개의 站을 두었다. 여기서 기발은 말을 타고, 步撥은 사람이 직접 달려서 급보를 전하는 것이다. 기타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阿川驛을 가리킨다. (이기봉)

  •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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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은 현재의 아산시,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했다. 현 아산시의중앙부를 西流하는 곡교천(曲橋川) 남안을 점유한 지역의 구행정구역은 1442년(세종 24) 이래 1914년까지 500여 년간 존속해온 온양군의 지역으로, 그 중심지역은 온양군의 읍내면이었다. 1914년 아산 ·온양 ·신창(新昌)의 3군이 아산군으로 통합되면서 온양면이 되어 ‘온양’이란 이름을 계속 지녀왔다. 본 지도에서는 구체적인 기관 등이 나타나 있지 않고, 전체적인 판도가 제시되어 있다. 읍 북쪽 2리 지점에 있는燕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읍치가 있는 곳은 사방이 하천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천은 북쪽으로 흘러 곡교천에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溫泉은 읍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태조·세종·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御室이 있다. 서쪽, 남쪽,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 북쪽에서 곡교천으로 합하여 북동쪽으로 돌아가는 형상이 인상적이다. (이상균)

  • 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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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운산군, 창성군 일부, 영변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운산군 대부분 지역, 창성군, 태천군, 영변군, 구장군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운산군 구읍리 일대에 있었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과 남으로 영변, 서쪽으로 태천, 북쪽으로 이산과 접해 있다. 읍치 북쪽으로는 溫井이 보이며 서쪽에는 藥水도 표시되어 있다. 이 약수는 물이 아주 차며 만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古延州가 표시되어 있다. 본래 고려 때 연주였는데 조선에 와서 영변에 합쳤다가 다시 떨어져 운산으로 합쳐진 것이다. 읍치의 동쪽에는 衛滿洞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淵王馮弘墓라고도 하는데 魏나라가 淵나라를 정벌하자 연왕은 이곳으로 도망와 살았다 한다. 남쪽 古雲山面은 고려 때 몽고족을 피해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 살다가 원종 때 육지로 나와 임시로 머무르며 살았던 곳이다.(오상학)

  •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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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는 인천광역시 동구·중구·남구·연수구·남동구와 백령도·대청도·영흥도를 제외한 옹진군, 시흥시 시내인 옛 소래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의 蘇萊山(299.4m)이었다. 이 고을은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세조 6년(1460)에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라고 하여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蘇萊山이 2개나 표시되어 있어 하나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위쪽의 文學山도 실재로는 읍치 아래쪽(남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른 지도와 地誌에는 대부분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여러 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重林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은 찰방이 파견된 역에 대한 일률적인 범례로서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는 인천의 越境地인 梨浦面이 보이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浦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인천의 땅으로 완전히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화성시 옛 남양면의 문호리·수화리 북쪽과 비봉면의 삼화리·유포리 일대이다. 지도 오른쪽에는 수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영종도와 덕적도에는 파란색의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는 이 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일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永宗鎭은 숙종 24년(1698)에 이미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을 갖고 있는 獨鎭이 되었기 때문에 인천 관할 아래에 있지는 않았다. 영종진 아래쪽의 月尾島에는 行宮이 기록되어 있다. 行宮이란 임금이 행차했을 때 잠시 머무는 곳을 의미하는데, 왜 이곳에 행궁이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확실하지가 않다. 기타 읍치 왼쪽의 書院은 鶴山書院으로서, 숙종 28년(1702)에 李端相(?-1669)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이기봉)

  • 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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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현은 지금의 논산시 강경읍, 연무읍, 은진면, 가야곡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논산시 은진면 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수운의 이점이 큰 고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바다 조수가 강경을 지나 들어오므로 들 가운데 여러 냇물과 골짜기에 배가 통하는 이익이 있다. 특히 강경은 큰 강이 조수와 통하나 물맛이 그리 짜지 않은데,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반쯤 짠물이 土疾을 고치는데 가장 좋다’고 쓰여 있다. 고을 서쪽의 금강변에는 江倉과 함께 江景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후기 금강 유역권에서는 가장 큰 포구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해산물과 육지의 각종 산물들이 이곳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읍치의 북쪽에는 이 고을의 명물인 觀燭寺의 미륵이 표시되어 있다. 관촉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는데, 은진미륵은 36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오상학)

  •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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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원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독로강 이북을 제외한 위원군 전체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위원군 전체, 초산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과 접하고 있다. 본래는 理山郡의 都乙漢堡이다. 1443년(세종 25)에 堡가 사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대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강계와 이산 땅을 나누어 위원군을 두었다. 위원군의 읍치는 水災의 위험이 있어서 1743년(영조 19) 松峴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는 이전 읍치를 古邑으로 표시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北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압록강 변에는 여러 진보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直洞堡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1506년(중종 1)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천 척, 높이 18척이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곳에는 명나라 李成樑의 조상 무덤이 있다고 한다. 이성량의 아비는 위원 사람이었는데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중국 廣寧에 들어가 살다가 이성량을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들 李如松은 항상 ‘나는 본디 조선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오상학)

  •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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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과 연천군의 왕징면·백학면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파주시·연천군에, 북한 쪽은 대부분 개성시 장풍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 쪽의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古邑 위쪽에 표시된 望海山이다. 본 고을은 조선 초기에 長湍·臨津·臨江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면 이름 중 長이 붙은 것은 장단현의, 江이 붙은 것은 임강현의, 津이 붙은 것은 임진현의 지역이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광해군 5년(1613)에 지도 위쪽의 古邑으로부터 옮겨왔다. 지도 아래쪽에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임진강 남쪽에 赤壁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의 근처에 臨津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한양에서 의주로 통하는 大路가 지나가며, 지도 위에는 이곳으로부터 개성으로 연결된 붉은색 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왼쪽에는 개성 시내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沙川이, 오른쪽에는 황해도의 金川에서 흘러오는 沙彌川이 표시되어 있다. 사미천 상류에는 일제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소남면·대남면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역권과 상관없이 황해도 금천에 속해 있었다. 읍치와 고읍 사이에 있는 桃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桃源驛을 의미한다. 驛 중에서 찰방이 파견된 경우를 道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도책에서는 이러한 道를 보통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지도에는 그러한 표시가 없다. 읍치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 해창에서 ‘海’라는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통해 밀물 때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기봉)

  •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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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하면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迦葉山이다. 부용산을 분수령으로 세 개의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남사면에서 美湖川이 발원하여 富潤川과 草坪川을 합류해 진천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동사면에서는 陰城川이 발원해 남류하면서 甲山川과 九安川을 합류해 음성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서사면에는 鷹川이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하곡평야를 이루고 淸美川과 합류해 남한강에 흘러든다. 고을의 다른 명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에는 가섭산에 봉수가 설치되어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주 望夷山 봉수에 응하는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오상학)

  • 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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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산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순천군 은산면, 북창면, 선소면 일부, 신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 중앙부와 성천군 남옥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순천시 은산 노동자구 일대에 있었다. 북으로는 順川, 서로는 慈山, 남으로는 成川, 북으로는 价川과 접하고 있다. 대동강의 상류가 고을의 북서쪽을 감돌아 흘러간다. 은산현 명칭은 983년(고려 성종 2)에 興德을 殷州로 고쳐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 1414년(태종 14)에 慈山郡에서 분리하여 은산현으로 독립시켰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鎭江山이 이 고을의 鎭山이다. 고을 북쪽에 있는 天聖山에는 관음 삼봉이 있는데 속담에 동명왕의 麟馬 자욱이라 전한다. 負板山 아래에 있는 風穴에는 大風이 열흘에 두세 번 일어난다고 하는 곳이다. 풍혈 근처에는 은을 캐던 은점도 보인다.(오상학)

  • 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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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갈현리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 麻田界로부터 들어와 坡州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강변에는 腐斤津·新直浦·戎灘이 표시되어 있다. 津·浦·灘은 하천의 기능과 특징이 집약된 용어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의 적성현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신직포가 각각 新津江·神知江으로 표시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浦’는 우리말 ‘개(물가)’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浦口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단순히 넓은 모래사장 또는 습지가 펼쳐져 있는 물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고을의 고구려 때 이름은 七重縣이며, 통일신라 때의 이름은 重城縣이다. 고을 이름의 한자 의미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중요한 군사 방어지역으로서 인식되었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수많은 산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인식은 첫째, 6세기 중반 이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으며 둘째, 이 지역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임진강의 최 하류 지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戎灘에서의 ‘灘(여울)’은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구간은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군사들이 도보로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다. 임진강에서 최 하류 쪽에 있는 여울이 바로 이 고을에 있는 여울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융탄 하류 부분으로는 더 이상 ‘灘’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점 반감되게 되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紺岳(675m)은 조선의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기봉)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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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산은 1414년(태종 14)에 石城과 합쳐서 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1646년(인조 24) 은진, 연산, 이산을 합쳐 하나의 현으로 하고, 恩山이라 명명하였다가 1656년(효종 7)에 각각 복구하였다. 1776년(정조 1)에 尼山을 尼城으로 고쳤고 1800년(순조 원년)에는 이성을 魯城으로 개명하였다. 지도에는 尼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776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산은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고 북으로 공주, 남으로 은진을 연결하는 직로 상에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連山과 더불어 산지가 많지만 땅이 기름지다고 한다. 고을의 중심부를 노성천이 흘러가고 지금의 논산천이 남서쪽으로 흘러가 금강과 합류한다. 고을 남쪽에는 論山橋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 논산은 자그마한 취락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이 지역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사방으로 나 있는 국도와 호남선의 개통으로 논산은 공주나 부여를 제치고 이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것이다. 읍치의 옆에는 闕里祠가 표시되어 있다. 궐리사는 공부자가 생장한 마을이 궐리촌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공자의 유상을 봉안한 영당을 말한다. 1708년(숙종43) 공징로, 공사중 등이 재상 이경억을 따라가 공부자 유상 일체를 얻어왔고, 1758년(영조 34) 이제후 등의 상서로 이 때 가져온 공부자 유상일체가 노성의 궐리사에 봉안되었다. 궐리사는 국내에 오산과 노성의 2개소가 있다.(오상학)

  • 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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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 용천군 양서면, 동하면 일부, 양광면, 삭주군 청수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신의주시, 의주군, 삭주군 서부, 천마군 동북부, 피현군 동부, 용천군 북부, 동림군 남삼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고 있는 대중국 교류의 관문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에 있는 松山이다. 접경 지대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이곳에도 국방관련 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압록강변을 따라 마름모 모양의 여러 진보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의주에는 防禦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속진으로는 청성, 청수, 방산, 옥강, 수구, 양하, 건천 등이었다. 고을 남쪽의 白馬山城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에 의해 만들어지고 1646년(인조 24)에 府尹 임경업에 의해 修築되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는 中江은 선조 때 장시를 설치하여 무역했던 유명한 곳이다. 이후 柵門과 더불어 대표적인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는 태조 이성계가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르다 회군한 곳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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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부는 안성시의 죽산면·삼죽면 전체와 능국리를 제외한 일죽면, 보개면의 동평리·남풍리, 백봉리·고안리·박곡리를 제외한 용인시의 백암면과 학일리·목신리를 제외한 원삼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읍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淸美川이라 부르고 있으며, 과거의 기록에는 대부분 天民川이라고 나온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하천 유역에도 일부씩 걸쳐 있다. 왼쪽의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에, 안성 방향으로 뻗은 도로 끝은 안성천의 최상류에 걸쳐 있다. 진천과의 경계선에도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최상류 일부가 걸쳐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도 利川界와 陰竹界 사이에 양지의 월경지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陽智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지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面에 대한 표시이다. 近一面의 위치가 鼎倍山 근처에 있어야 더 합당하며, 川北二面은 川北一面 근처에 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川은 天民川을 의미한다. 南一面과 南二面도 읍치 동남쪽 방향에 있어야 한다. 南面 역시 外山面 지역에 표시되어야 하며, 山內面과 外山面은 없애야 한다. ≪戶口總數≫에는 마지막 부분의 문제점과 비슷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에는 山內面과 山外面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산내면에는 어떤 마을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산외면에 기록된 마을은 모두 남면의 마을과 동일하다. 남면이 산내면과 산외면으로 나누어진 시기가 있었던 듯하며, 만약 그렇다면 이 지도에서는 南面이란 명칭을 삭제해야 한다. ≪여지도서≫의 지지·지도와 ≪해동지도≫의 죽산부 지도에는 남면만 나오며, 산내면과 산외면은 나오지 않는다. 김정호의 ≪동여도≫에서는 면의 표시가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도에는 읍치나 바로 부근에 있었던 府內一面(또는 東部面·南部面)·府內二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고을 남쪽 부분의 동서가 더 넓어야 실재에 가깝다. (이기봉)

  • 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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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천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임천은 고을 동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는 수륙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에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금강이고 북쪽에 접하고 있는 것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금천이다. 지도에 연맥의 형태로 표시된 산지는 해발 200미터 이내의 구릉성 산지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韓山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지도에도 금강변에 여러 나루터가 표시되어 있다. 동쪽의 鼓岩津은 일명 古多津이라고도 하는데, 석성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조수가 빠른 곳이다. 남쪽에 위치한 書院은 七山書院인데, 1687년(숙종 13)에 세워졌고 1697년(숙종 23)에 사액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여 亂後에 이 고을에 귀양왔던 兪棨(1607-1664)를 배향하였다.(오상학)

  •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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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초산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초산군 대부분 지역, 자강도 우시군 가운데 충만강 以東地域, 동쪽 일부를 제외한 자강도 송원군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압록강을 끼고 청북정맥의 북사면에 위치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지닌 고을이다. 1402년(태종 2)에 산양회·도을한·봉화대·등이언 등지를 합쳐 理州라 칭했는데 1413년(태종 13)에 통례대로 이산군으로 고쳤다. 1776년(정조 원년) 이산이 왕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楚山郡으로 개명하였다. 지도에는 이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정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에 있는 崇積山이다. 이 고을에도 압록강 연안의 다른 고을처럼 여러 관방시설이 들어서 있다. 압록강 아래쪽에 설치된 阿耳鎭은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국경지대를 연하여 설치된 7진 중의 하나이다. 鎭城은 ≪大東地志≫에 따르면 석축으로 1595년(선조 28)에 설치되었다. 이 곳은 압록강과 童巾江이 합류하는 곳으로 옛날부터 북방 외적의 침입로 중의 하나인 三賊路가 되므로 군사 요충지로 중시되었다.(오상학)

  •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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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현은 양평군 지제면·양동면·청운면·단월면·용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섬강의 지류인 삼산천의 상류이며,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의 상류이다. 읍치 부근을 지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역시 한강의 지류인 흑천인데, 지도에는 田谷川·新川이라고 적혀 있다. 田谷川은 田谷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新川은 우리말 ‘신내’ 또는 ‘신내개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田谷 약간 상류에 있었던 黑川(거무내)으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시대에 하천의 구간마다 사용되던 다양한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雲谿書院이다. 趙晟(1492-1555)·趙昱(1498-1557) 형제를 배향하여 선조 27년(1594)에 세워지고, 숙종 40년(1714)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의 현재 위치는 용문면 덕촌리 서원말이며, 조욱이 많은 후학을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위쪽으로는 龍門山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30호인 거대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가 자리 잡고 있다. (이기봉)

  •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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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본래 백제의 仇知縣이었는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청주에 예속시켰다. 고을의 중심부를 금강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동면에는 해발 459미터의 雲住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李城인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며 둘레가 1,184척이라 한다. 또 하나는 金伊城으로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528척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고을의 면적이 작은 만큼 지도에 수록된 내용도 면명, 주요산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오상학)

  •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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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자산부는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내남면 남부, 후탄면, 사인면 일부, 강동군 봉진면 일부, 순천군 은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성시 대부분 지역, 순천시 서쪽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대동강의 상류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청남정맥의 지맥이 뻗어 있다. 고을의 동쪽은 殷山, 서쪽은 順安, 남쪽은 평양, 북쪽은 개천과 접하고 있다. 연산군 때 이 고을 출신 宦官 金季敬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고을을 혁파한 적이 있었다. 지도에는 고을의 산천을 비롯하여 面名 창고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을의 북서쪽에는 이 고을 최고의 관방인 慈母山城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쌓은 석성으로 둘레가 12,733尺, 높이가 13尺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투 시에 지휘처로 사용하던 만자루가 성벽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만자루 자리는 대체로 성벽보다 높고 두껍게 돌을 쌓고 성벽 밖으로 볼록 나와 있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며 탐관오리를 징계한 명종 때의 俠盜 林巨正이 이 산성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 때에는 인근 읍민 수만 명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던 기록도 있다.(오상학)

  • 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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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위현은 용이동·죽백동·월곡동을 제외한 평택시 시내와 옛 송탄시, 진위면, 황구지리를 제외한 서탄면, 당현리·문곡리·동청리를 제외한 고덕면, 오성면의 안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釜山이다. 水原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황구지천·오산천이며, 龍仁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진위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奈川·兎峴川·長好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지역에서만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이러한 하천의 이름은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를 위해 명칭을 단일화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이 세 하천의 명칭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똑같이 적혀 있어, 두 지도가 서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나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세 하천의 명칭이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 陽城界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안성천 본류이다. 탄현면이나 고두면 지역에 수원의 땅이 있었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의 水原界라는 글씨도 더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만약 표시를 하려면 牙山界로 되어 있어야 한다. 古頭面의 경우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右頭面으로, 김정호의 ≪동여도≫에는 石頭(面)으로 되어 있다. 餘方面은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余方面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2개 모두 이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어, 이 지도가 기본적으로는 ≪여지도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기봉)

  •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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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동쪽에 계봉산, 서쪽에 칠갑산, 북쪽에 明德峰(320m)·대덕봉 등이 솟아 있어 대부분 지역이 기복이 심한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잉화천과 치성천이 남류하며 그 유역에 약간의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읍치 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이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되던 창고였다. 왕진은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중요 나루터였다. 고을 서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 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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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목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고안면·덕수면·남서면·갈산면·마산면·고덕면·대전면·임포면, 박천군 용계면 일부, 평안남도 안주군 연호면 노안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정주군 전체, 곽산군 당상리 일부, 운전군 장수탄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가산, 남쪽은 바다, 서쪽은 곽산, 북쪽은 구성과 접하고 있다. 원래 읍치는 고을 서쪽의 馬山面에 있었는데 1467년(세조 12) 현재의 지역으로 옮겼다. 고을이 해안에 연해 있어서 비교적 너른 평야도 펼쳐져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청북은 풍속이 어리석으며 무예를 숭상하는데 오직 정주만이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중국 사신 唐皐가 이름 지었다는 納淸亭이 있는데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높다.(오상학)

  • 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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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부는 김포군 통진면·월곶면·대곶면·하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文殊山(376.1m, 比兒山이라고도 함)이었다. 고려 공양왕(재위:1389-1392) 때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童城縣과 守安縣의 흔적이 古童山城·守安古城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祖江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강의 이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으로 현재는 김포군 월곶면에 조강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고을과 강화와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부른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이 하루에 2번 바뀌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흐르는 물은 짠 바닷물이기 때문에 ‘鹽’이라는 글자가 붙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한양으로 통하는 水路의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경제적으로, 외적의 침입시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역이다. 이에 따라 강화도 방면으로는 수많은 鎭堡와 墩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고을 방향으로는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德浦鎭과 위쪽의 文殊山城만이 건설되어 있었다. 덕포진 아래쪽에 표시된 孫乭項은 보통 ‘손돌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원래는 덕포진과 거의 같은 위치에 표시되어야 한다. 손돌목은 지형적 요인으로 염하가 휘어지면서 가장 빠르게 흐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뱃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몽골의 추격병을 피해 달아나던 왕을 죽으면서까지 안전하게 염하를 건너게 했다는 손돌의 무덤이 있다. 이 손돌의 이야기는 ≪고려사≫에도 나오고 있으며, 뱃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손돌의 무덤을 지날 때마다 술을 따라 부으며 안전을 비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기타 도로가 마치 한강을 건너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김포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기봉)

  •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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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제천은 해발 250m 내외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하며, 강원도의 영월과 정선지방의 관문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고 쓰여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북쪽에 있는 龍頭山이다. 읍치 북쪽에 그려진 의림지는 제천의 대표적인 제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도 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헐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가는 고갯길로는 朴達峙가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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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和府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 동부와 해압면 남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중화부는 원래 고려 중엽까지 서경에 예속되었다가 1322년(고려 충숙왕 9)에 태조의 공신 金樂·金哲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郡人 林仲梁이 왜군에 항거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1592년(선조 25)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북으로는 대동강을 끼고 있고 남으로는 해서정맥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다. 북으로는 평양, 동으로는 상원, 남으로는 황해도 황주, 서로는 강서와 접하고 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淸凉山이 이 고을의 鎭山인데 지도에는 청량사로 표기되어 있다. 남쪽의 駒峴에는 신구 監司가 교대하던 곳이 있었다. 읍치의 동쪽 龍山寺 부근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眞珠墓>라고도 한다. 동남쪽의 城山堡는 청색의 마름모꼴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봉황령을 넘어 善積에 도달하는 요해처로 당시 別將이 관할하고 있었다.(오상학)

  •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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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목은 파주시 파주읍·파평면·법원읍·문산읍·광탄면·조리면·월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城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7년(1398)에 坡平縣과 瑞原郡을 합해 原平郡으로 만들어졌다. 세조 6년(1460)에 貞熹王后 尹氏의 본관이라고 해서, 이름과 고을의 격을 높여 坡州牧으로 만들었다. 옛 파평현의 읍치 지역이 지도에 坡平山·坡平面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豊德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의 이름이 붙게 된 臨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내내 임진강의 나루 중 가장 중요했던 곳으로 여겨졌다. 보통 문헌에는 臨津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간에서는 ‘임진나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임진나루의 현재 위치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임진강가였다. 임진강 하류에는 洛河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보통 임진강이라고 하면 임진나루 앞쪽의 하천 구간만을 의미하며, 각 구간마다 여러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廣灘이 쓰여 있는데, 현재 문산천으로 불리고 있다. 廣灘은 우리말 ‘너분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한자의 소리가 아닌 뜻을 따서 기록한 것이다. 읍치 위쪽의 梨川 역시 우리말 ‘배내’에 대해 한자의 뜻으로 표기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하천과 산줄기 및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재에 가깝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지도제작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아래쪽에는 恭陵·順陵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각각 조선 제8대 임금인 예종의 章順王后와 제9대 임금인 성종의 恭惠王后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이기봉)

  • 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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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남북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한 고을로 북쪽으로 강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지도에 보이는 外也串面·安中面·堰里面·慶陽面이 그것이다. 경양면은 경양현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 월경지들은 서해안의 어염 수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2,948척, 높이가 13척이었다. 고을의 북쪽 成歡은 붉은 색의 원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는 찰방이 파견된 역으로 인근의 신은, 김제, 광정, 일신, 경천, 평천, 단평, 유구, 김사, 장명, 영춘 등의 속역을 관장하였다. 남쪽의 성거산에는 온조왕의 도읍했다는 尉禮古城이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 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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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현은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적송면 남부, 쌍룡면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증산군 남부, 서부의 일부, 북부의 일부를 제외한 증산군 일대이다. 청북정맥의 서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서해안에 접해 있는 조그만 고을이다. 북으로는 영유, 남으로는 함종에 연결된다. 본래 강서현의 甑山鄕인데 1394년(태조 3)에 현으로 나누고 현령을 두었다. 고을의 진산은 國靈山인데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에 국령천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의 兎山烽燧는 남쪽으로 함종현 草島에 응하고 북으로는 평양부 鐵和에 응한다.(오상학)

  • 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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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현은 포천군 포천읍·화현면·군내면·가산면·소흘읍·내촌면, 갈월리·금동리 서북쪽을 제외한 신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읍치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탄강의 지류인 포천천이다. 지도에는 高橋川으로 적혀 있는데, 일제초기 하천 명칭의 단일화 과정에서 포천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왕숙천의 상류이며, 지도에는 交松川·地藏金川 등 2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전통시대에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원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花山書院은 ‘오성과 한음’으로 많이 알려진 李恒福(1556-1618)을 배향하여 인조 13년(1635)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龍淵書院은 역시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李德馨(1561-1613)과 趙絅(1586-1669)을 배향하여 숙종 17년(1691)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白鷺洲는 하천 가에 넓게 발달한 모래사장을 가리키는데, 현재의 위치는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일대이다.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는데,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은 원래 읍치 바로 북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서의 폭을 조금 좁게 표현하든지, 아니면 남북의 폭을 조금 넓게 표현하든지 해야 실재에 가깝다. 기타 우리말의 한자표기에 대한 예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몇 개 발견할 수 있다. ‘松隅’는 우리말 ‘솔모루’에 대한, ‘廣峴’은 우리말 ‘넓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기봉)

  • 진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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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계룡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지류가 남쪽에서 돌아 나간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공주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연산, 남쪽으로는 진산과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고을에 있는 九峯山이 남쪽에 불끈 솟아서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의 東郊보다 낫고, 田地가 아주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가 조금 멀어서 서쪽으로 강경과 교역한다고 되어 있다. 지도에도 계룡산의 동쪽 가지인 錦繡山(해발 532미터)에서 뻗어온 九峯(해발 264미터)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 남쪽 진산과 접하는 곳에 있는 安平山은 일명 押岾山이라고도 한다. 고을의 내부를 흐르는 하천은 지금의 갑천이다. 지도에 보이는 逍遙亭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쇠퍼니(풀무집) 뒷산에 있었는데, 정자는 없어지고 정자 터만 남아 있다.(오상학)

  • 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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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지역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창성군, 會上里를 제외한 동창군 전 지역, 삭주군 일부, 벽동군 송연리, 태천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압록강과 연해있는 접경지대의 고을로 군사적으로 중시되던 곳이었다. 창성의 명칭은 1402년(태종 2) 昌州와 泥城을 합친 것에 유래하였다. 고을은 크게 북쪽의 압록강 수계와 남쪽의 대정강 수계로 나눠진다. 읍치는 압록강 수계에 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창성에는 평안도의 左防營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소속된 진보는 昌州·博寀·甲岩·雲頭里·廟洞·於汀灘·大吉號里 등이었다. 압록강변에는 여러 진보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고개에도 관문이 축조되어 있다. 내륙쪽에 붉은 원으로 표시된 恃寨鎭은 兵馬同僉節制使가 주재하는 곳으로 1676년(숙종 2)에 萬戶로 승격되었다.(오상학)

  • 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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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대성면·상도면·봉동면·중면·흥교면·임한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개풍군과 판문면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개풍군 풍덕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세종 24년(1442)에 海豊郡과 德水縣이 합해져 만들어졌으며, 두 고을의 이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豊德郡이 되었다. 지도에는 덕수현의 옛터가 古德水라고 적혀 있으며, ‘德’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명칭은 옛 덕수현의 범위를 알려준다. 이후 순조 23년(1823)에는 고을 자체가 사라지면서, 모두 개성의 땅에 속하게 되었다. 한강의 본류는 交河界로부터 들어오며, 坡州界로부터 들어오는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간다. 通津과 江華 사이에는 鹽河라는 중요한 물길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 자체가 풍덕부만 그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에 북쪽으로부터 흘러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예성강 본류이다. 지도 오른쪽에 적혀 있는 東江은 임진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호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지점에 적혀 있는 祖江도 이 지역에서 한강의 해당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이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기보다는 구간마다 다양하게 불렀는데,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다. 강화도에 적혀 있는 昇天浦는 浦口라기보다는 풍덕 방향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나루이다. 나루는 보통 한쪽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강의 양쪽에 동일한 명칭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천포 역시 풍덕의 땅에도 동일한 명칭의 나루가 존재한다. 지도에는 陵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神懿王后의 무덤이며, 厚陵은 조선의 2대 임금인 定宗의 무덤이다. (이기봉)

  • 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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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진천은 청주에 비해 들이 적고 산이 많다. 산골이 겹쳐졌고 또 큰 내가 많다. 그러나 모두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 바다와 겨우 100리 거리인 까닭에 생선·소금의 이익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 서북쪽에는 百源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봉수는 바로 所乙山烽燧이다. 소을산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려져 있다. 남쪽으로 청주 巨次大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에 응한다. 고을 북쪽 경기도 죽산현과의 경계에는 廣惠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원 옆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충청도의 신구관찰사가 印을 교대하던 곳이라 한다. 광혜원은 교통의 결절에 위치해 있어서 해방 이후 빠르게 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오상학)

  • 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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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산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철산군과 대략 일치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철산군 전부와 동림군 서부, 염주군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철산군 월봉리와 선주리 일대에 있었다. 평안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용천, 남으로는 선천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熊骨山이다. 읍치의 남쪽에는 古邑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영조 때 일시적으로 이곳에 읍치를 옮긴 적이 있었다. 이 고을도 의주대로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러 관방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서북쪽의 西林山城에는 1747년(영조 23)에 의주대로상의 서림성 옛 터에 石城을 쌓고 僉使를 파견하여 鎭을 설치하였는데 5년 뒤에 진을 혁파하고 獨鎭을 두어 中軍이 지키게 하였다. 고을 남쪽에 있는 宣沙鎭은 원래 선천부에 속하였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水軍僉節制使 겸 監牧官 1명이 주재하였고, 명청 교체기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갔다. 남쪽의 椵島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선사포 첨사가 겸하였다. 특히 이곳은 인조 때 명나라의 遼東都司 毛文龍이 웅거하면서 청군의 배후를 자주 교란시켜 명, 후금, 조선 사이의 중요한 외교적 문제가 되었던 현장이다.(오상학)

  •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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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 보이는 목천으로 빠지는 길이 충청도 경상도로 가는 길이고, 차령을 넘어 남쪽으로 가는 길이 호남대로이다. 또한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이런 지역적 특성은 지명에서도 보이는데 북쪽의 王字山은 고려 태조가 군대를 여기에 주둔시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도 여럿이 보이는데 廣德寺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652년(진덕여왕 6) 慈藏이 창건하였고, 832년(흥덕왕 7) 珍山이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의 하나로서, 사찰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8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가 있었다. 또한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萬藏閣 80칸, 千佛殿도 3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오상학)

  • 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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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천현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태천군 전부, 박천군 청룡면, 용계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태천군 대부분 지역, 운전군 일부, 박천군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는 청천강의 지류인 大定江을 끼고 있다. 동으로는 영변, 남으로는 가산, 서로는 구성, 북으로는 운산과 접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光化縣인데,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태천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473년(성종 4) 승려가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 縣으로 강등되었다. 고을의 서쪽 籠吾里山에는 산성이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369자이고 속칭 姑城이라고도 한다. 읍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鮮于浹, 金翼序 등을 배향한 遯菴書院으로 보인다.(오상학)

  •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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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소백산맥 서사면의 산간분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현의 중앙을 南川이 북쪽에서 남류하여 금강에 합류하였다. 북쪽에 있는 酒城面은 이 고을의 월경지이다. 원래 酒城部曲으로 상주에 속해 있었는데 1390년(고려 공양왕 2) 監務를 둘 때 땅이 적다 해서 이곳에 붙인 것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己城山으로 여기에는 돌로 쌓은 산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2,091척이고 높이 8척, 성안에는 우물과 군창이 있었다 한다.(오상학)

  •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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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부는 해방 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양시, 강서군 성대면·잉차면·반석면 일부·적송면 일부, 평원군 한천면 일부·덕산면·청산면 일부, 대동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특별시 승호구역의 일부와 삼석구역 동부 및 순안구역을 제외한 평양시내, 평성시 일부, 평원군 서남부, 대동군, 증산군 일부, 남포직할시 천리마 구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평양은 평안도의 감영이 있는 곳으로 기자가 도읍하였던 곳이기 때문에 九夷 중에서 풍속이 가장 개명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당시 조선시대에도 箕子 井田의 遺址와 기자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평양은 대동강이 흐르면서 빚어내는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하여 평양을 그린 회화식 지도가 많이 제작되기도 했다. 북부 지방의 가장 큰 도회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물산이 풍부하다. 특히 중국가는 사신을 따라가는 장사치 중에서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가 있었다.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으나 제방과 개울이 적어 밭농사만 일삼는다. 그러나 하류에 있는 벽지도는 강 복판에 위치하여 강물이 줄면 진흙이 드러나서 지방 사람들은 그 안에다 논을 만들어 1畝에 1種이나 수확한다고 한다. 지도에는 대동강변에 위치한 평양성과 거기에서 사방 방사선상으로 뻗어나간 도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錦繡山인데 이의 정상이 모란봉이다. 대동강변의 능수버들로 유명한 長林도 표시되어 있다. 읍치 서쪽의 龍谷書院은 1658년(효종 9)에 창건되고 1683년(숙종 9)에 사액된 서원인데, 鮮于浹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청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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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음성에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산수가 촌스러워 살 곳이 못된다고 평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이 북쪽에 頭陀山·訥文山, 동쪽에 鳳鶴山, 남쪽에 坐龜山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磻灘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曾子川이 현의 중앙부를 흘러 전체적으로 산간분지의 지형을 이루었다. 증자천의 옆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성현의 명칭을 자연물에까지 붙이고 있는데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인 유교의 영향력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고지도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 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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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종부는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강서군 함종면, 신정면, 수산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증산군 남부지역과 남포직할시 수산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원래 縣令이 관할하던 고을이었는데 1721년(경종 1)에 中宮 魚氏의 貫鄕이라 하여 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또한 淸南後營이 있던 곳으로 관할하던 속읍으로는 江西·龍岡 등이었다. 함종의 鎭山은 동쪽에 있는 牙善山인데 지도에는 善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을 서쪽의 해안에는 鳳頭山이 그려져 있다. 바다를 베고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봉황이 높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풍경이 고을에서 제일이라 한다. 서쪽 해안의 二岳島는 조수가 밀려가면 육지가 된다는 섬인데 지도에도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오상학)

  • 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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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청양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산간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牛山인데 일명 騎龍山이라 한다. 여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전해진다. 고을 동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 산 기슭에는 長谷寺가 馬谷寺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장곡사는 850년(문성왕 12)에 普照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중건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46년(충목왕 2)에 현재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상대웅전을 중수하고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를 지었다. 이 절은 다른 절과 달리 대웅전이 두 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읍치의 남쪽에 旧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금정역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다. 이 시기에는 홍주의 龍谷驛으로 옮겨가 있었다.(오상학)

  • 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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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천군은 해방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신풍면의 일부를 제외한 희천군 전 지역에 해당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자강도 희천시, 동신군, 송원군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청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으로는 청천강을 끼고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강계, 남으로는 영변·영원, 서로는 이산과 접하고 있다. 본래 고려의 淸塞鎭이었다. 고을의 북쪽에 있는 白山은 흰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산기슭에는 頭疊窟이 있다. 고을의 중앙 東江가에 있는 立石은 조그만 봉우리가 솟아 있는 모양이 송곳을 세워 놓은 듯하다고 한다. 읍치 북쪽에는 鳳丹城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산성으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서쪽에는 柔遠鎭이 표시되어 있다. 1623년(인조 1)에 鎭을 설치하면서 別將을 두었고, 1675년(숙종 1)에 兵馬同僉節制使로 승격시켰다. 남면에 있는 金仙臺는 옛날 휴정이 수도하였다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 많은 店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통해 조선후기 상업 유통의 일단을 파악해 볼 수 있다.(오상학)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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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하는데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그려 넣었다. 고을의 남쪽에는 靑山의 월경지인 酒城面이 끼어 들어가 있다. 읍치에는 청색의 정방형의 기호를 써서 병영을 표시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읍치는 서향인데 지대가 낮고 냇물은 높아 해마다 수재를 걱정하고, 또한 동쪽은 높고 북쪽은 낮아 은은한 살기가 있다고 한다. 읍치의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 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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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남한강과 접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수운의 이점이 있던 고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의 田賦를 이곳에서 수합하여 개성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宋處寬의 寒碧樓記에는 산천의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 남도의 으뜸이라 적고 있다. 한벽루는 강변에 있는 누정으로 제법 시원하면서 그윽한 경치가 있어서 당시 이름난 누각이었다. 그러나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북쪽에는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로 잘 알려진 朴達峙가 표시되어 있다. 近西面의 嚴城遷은 험준한 산허리에 난 棧道이다. 이것은 지형적 장애를 극복하여 길을 만든 것으로 길의 폭도 좁고 험한 것이 특징이다. 황강역 우측에 보이는 서원은 黃江書院이다.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되었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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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받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면적이 큰 고을로 서쪽 안성, 목천까지 관할 구역이 뻗쳐 있다. 남한강을 통한 수운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대표적인 곳이 金遷과 可興이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편으로 흘러 나가므로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더불어 생선과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하다.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룰 정도였다. 가흥에는 창고를 설치하여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나르는데, 지도에도 창고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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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은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소태현(蘇泰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 와서 운주(運州)에 속하였다. 신라의 영토가 된 후부터 고려 충렬왕 때까지 소태현으로 계속이어지다가 1298년 태안으로 바뀌었다. 태안은 현재의 충청남도 태안읍, 태안읍 남면·근흥면·소원면·원북면·이원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邑治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해당한다.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5백 61척에 높이는 12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읍치의 뒤편으로는 백화산(284.1m)이 있는데 이는 한자가 의미하듯이 흰 돌 즉,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태안 지역의 산줄기들은 대부분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역은 왜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서 여말과 선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봉수는 백화산에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서산군의 북산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도비산과 호응한다. 태안은 남·서·북의 3면이 바다와 접해있으며, 서산과 경계를 이루는 곳(굴포)은 남쪽과 북쪽에서 잘록하게 좁혀오는 지역으로써, 고려 인종때 이 곳을 파서 북쪽과 남쪽의 바다를 연결하려 하였으나 돌이 물밑에 깔려 있었고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다 메워버리므로 공사를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도에서 海倉은 읍치의 북쪽에 보이는 금굴산 밑에있었고, 다른 倉은 안흥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쪽에 보이는 안면도는 홍주·서산·태안의 세 곳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안면도의 남쪽은 서산땅이었으므로 구체적인 지명표기는 되어있지 않다. 본 지도의 맨 왼쪽 위에는 선갑도와 문갑도가 열 두 개의 섬들과 함께 있는데, 현재는 인천광역시 관할에 해당한다. (이상균)

  •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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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행정구역상 복잡한 변동이 있었다. 1398년(태조 7)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을 경기도에 이속시키면서 현령을 두고, 1413년(태종 13)에는 현감을 두었으나, 평택현은 그대로 충청도에 남아 있었다. 1424년(세종 6)에 진위현과 분속되었던 송장현이 1433년 다시 진위현에 합속되었다. 평택 중부에 수원부의 속현으로 영신현을 두었던 것은 犬牙相入에 따른 것이다.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로 환원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편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1596년(선조 29) 직산현에 이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평택현으로 복구되었다. 지도에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고을로 그려져 있다. 西面에 있는 서원은 褒義書院이다. 이 서원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 읍치의 북쪽에 있는 城山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있는 성곽이다. 구릉 위에 위치한 토성으로 일명 農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양식을 도둑맞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축조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神僧 道詵이 이곳의 생김새를 보아 축조했다고도 하며 임진왜란 때에 왜구가 들끓어서 농민들이 토성을 쌓고 스스로 보전하였다고도 한다.(오상학)

  •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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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한산군의 읍치는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 있었다. 한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을 흐르는 한산천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부에 건지산·冠頭峰(140m), 남부에 鳳凰山(120m), 북부에 月城山(139m) 등의 구릉성 산지가 있으며, 북동부에는 余士川, 중앙부에는 단상천, 남부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어서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舒川·林川과 더불어 땅이 모시 재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 제일이고,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 못지 않다고 한다. 지도에도 남쪽 강변에 瓦草浦, 竹山津 등의 포구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麒麟山으로 북쪽에서 뻗어 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읍치의 북쪽에 그려진 書院은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文獻書院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稼亭 李穀과 牧隱 李穡 두 분을 配享하기 위하여 1594년(선조 27)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1610년(광해군 2)에  韓山 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 해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오상학)

  • 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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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美는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과 당진군 정미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현재의 해미면 읍내리에 있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석축 읍성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그 둘레는 1,800(2천 6백 30척)m, 성의 높이는 5m, 성 안의 넓이는 6만 4350㎡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서·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우물이 여섯 개, 성 밖은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있는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1418년(태종 18)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으나, 그 후 병영은 청주로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는 방조제를 막아 간척하여 다소 바다에서 먼 내륙이 되었지만, 본 지도에서는 驛, 津, 倉이 읍치와 가까운 바닷가 포구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봄으로써 당시에 이 곳의 위치적인 중요성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지도의 북쪽에는 安國山 烽燧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서산군의 北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의 高山과 호응한다. (이상균)

  • 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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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금천이 고을을 감돌아 흘러간다. 서부는 산지, 동부는 구릉지대, 그리고 남부의 금천 유역은 범람원을 이룬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飛鴻山이다. 읍치의 길가에는 이 고을의 驛站인 宿鴻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의 옛날 이름은 非熊이었는데 태종 때 홍산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지관의 말이 있어서 숙홍으로 고쳤다고 한다. 上東面에 표시된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어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尹集·洪翼漢·吳達濟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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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995년(성종 l4)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1012년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홍주는 현재의 서산시 고북면·운산면, 당진군 합덕읍·신평면, 홍성군 홍성읍·홍북면·금마면·홍동면·장곡면, 청양군 화성면·남양면·비봉면, 보령시 청라면·천북면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있으며, 홍주읍성은 예부터 큰 고을이었고 여러 차례 격전을 치른 곳이었다.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주위가 4천 9백 15척에 높이는 15척이고, 그 안에 세 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홍주는 대체로 산악과 구릉으로 연결된 지대이나, 다만 금마천(金馬川) 유역의 평지만이 유일한 쌀농사가 되고, 대부분은 산악이 기복된 사이에 좁은 들판을 이룬다. 오서산(烏棲山:791m)은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지맥으로서 광천읍 남동쪽에 솟아 홍성·보령·청양의 경계와 하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오서산에서 발원하는 광천천(廣川川)은 광천읍 중앙을 관류하여 천수만으로 유입하고, 용봉산(龍鳳山:379m)·봉수산(鳳首山:484m)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금마천은 홍성읍·홍북면(洪北面)·금마면(金馬面)·홍동면(洪東面)을 거쳐 흐르면서 여러 지류를 합쳐 삽교천(揷橋川)에 합류, 아산만(牙山灣)으로 유입한다. 현재의 천북면에 위치하던 흥양곶은 당시에도 목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 지금도 천북 목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봉수로는 흥양곶 봉수(興陽串烽燧), 고구성산 봉수(高丘城山烽燧)가 있으며, 역원으로는 세천역과 인후원이 있다. (이상균)

  • 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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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추풍령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충청도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간 고을이다. 서쪽으로는 영동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의 金川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추풍령의 모습이 도로와 함께 그려져 있다. 추풍령은 백두대간을 넘는 중요한 고개로 조령, 죽령 등의 고개와 달리 나지막한 고개인데, 임진왜란 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의병장 張智賢이 경상도 관찰사尹先覺의 裨將이 되어 부하 수천명을 거느리고 황간의 추풍령에서 왜군 2만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물리쳤으나, 다시 錦山 방면에서 진격하여 오는 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의 협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읍내면에 있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하여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時烈을 배향했다. 梅下面의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인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 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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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북쪽 지역은 금강 상류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공주와 옥천에 접해 있다. 고을의 동쪽에는 청주의 월경지가 끼어 들어가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족의 계족산(해발 423미터)으로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바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었는데, 봉수는 동으로 옥천군 環山과 응하고, 북으로는 문의현 所伊山과 응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산천이 조촐하고 깨끗하며 흙빛이 맑아 한양 동교와 같다. 들이 매우 메말라 논의 수확이 적고, 주민들은 오직 목화 심는 것으로 업을 삼는 바, 땅이 목화 가꾸기에 가장 알맞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암 송시열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북쪽 금강가의 荊角津은 일명 梨遠津이라고도 하는데, 근원이 전라도 무주현에 이르러 錦江이 되고, 서천군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이 지역에는 사대부가 많이 사는 고장답게 서원도 여럿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서면에 들어서 있는 서원은 崇賢書院이다.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창건되어 그 해에 사액을 받고 金淨·宋麟壽·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 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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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이곳의 지형은 속리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삼면으로 감싸고, 남쪽으로 흐르는 末訖灘이 금강과 합류하는 산간분지를 이루었다. 서쪽에 있는 何摩山이 고을의 진산이다. 북쪽의 皮盤嶺은 청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고갯길이 아홉 번 꺽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으로 통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만첩 산중에 위치한 고을로 楓溪村이 살만하다 한다. 고을의 남쪽 老城山은 무쇠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지도에는 관내의 면과 주요 산, 고개 등이 표시되어 다분히 소략한 편이다.(오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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