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八道郡縣地圖 팔도군현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09-111-v.1-3
  • 간행연도 : [18世紀(英祖 年間:1724-1776)]
  • 책권수 : 3帖,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디지털 원문자료 제공

원문이미지 원문정보

규장각 자료 제공 서비스

열람신청 복제신청

+글자크게 -글자작게 인쇄인쇄 저장저장 오류신고오류신고 URL복사URL복사 서지다운로드서지다운로드

원문 텍스트가 구축된 경우 목차를 선택하면 원문 텍스트를 열람할수 있으며 재선택시 보고 있는 원문정보가 닫힙니다.
도별 목록

목차정보 모두열기 모두닫기

  • 가평
    이미지

    가평군은 북한강 북쪽의 가평군과 남양주시 수동면의 외방리·입석리·내방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가평읍 읍내리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되어 있는 부분은 하천에 대한 표시이다. 첫째, 북한강의 본류와 지류가 매우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에 있는 超然臺오른쪽에서 들어와 陽根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이다. 그런데 마치 春川界와 洪川界 사이에서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 본류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게 그려져 있다. 이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일 뿐이다. 두 번째, 홍천계에서 양근계까지의 북한강이 실재와 매우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북한강은 서류하다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마치 서북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셋째, 이 부분에서 가평군은 실재로 홍천과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 ≪해동지도≫의 지도 어디에도 가평과 홍천이 경계를 맞대고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없다. 네 번째, 조종천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이 실재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조종천의 굴곡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모는 이 지도에 표현된 것보다 훨씬 작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조종천의 하류가 마치 읍치에서 매우 가까운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재와 부합되려면, 북한강과 만나는 부분에서 굴곡을 형성하지 않고 바로 상류로 향하도록 그려져야 한다. 첫 번째를 제외한 세 개의 오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상호 연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종천 유역에는 縣倉이란 명칭이 붙어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조종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지도 위쪽의 영평계에서 읍치를 지나는 가평천이 내려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만을 놓고 볼 때, 영평계 넘어 부분에도 가평천의 상류가 상당히 길게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짧은 구간에 해당될 뿐이며, 현재 가평군 북면 적목리 일대에 해당된다. (이기봉)

  • 강화
    이미지

    강화부는 교동도와 일부 섬을 제외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高麗山(436m)이다. 강화는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이러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江都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읍치가 붉은색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은 이 고을이 ‘都’라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진과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불렀다. 이곳은 潮水의 영향으로 하루에 두 번 물길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다. 물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한자를, 그리고 물맛이 짜기 때문에 ‘鹽’이라는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三南의 세곡선이 수시로 지나가는 해상운수의 길목일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국방상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성이 반영되어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에는 수군이 파견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육군이 주둔하였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수많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진보와 돈대는 지도에서처럼 석축의 長城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淸軍에게 함락된 이후 방어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축성된 것이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모든 해안가에는 鎭堡와 墩臺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섬 전체가 하나의 견고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지도 아래쪽의 鼎足山城은 이름 그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솥처럼 생긴 지형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이곳에는 傳燈寺가 있었으며,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마니산사고도 설치되어 있었다. 강화도 주변의 섬은 이 지도책의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위치에서 대략적인 정확성만을 반영하고 있다. 이 중 현재의 석모도가 4개의 섬이 연결된 것처럼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석모도는 밀물이 되면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썰물이 되면 모두 갯벌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席毛老(島)와 煤音(島)는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과 달리 실재로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갯벌에 대한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3개의 섬이 潮水에 상관없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기봉)

  • 개성
    이미지

    개성부는 일제시대의 개성시, 개풍군의 영북면·북면·토성면·서면·남면·청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개성시 시내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松岳山(489m)이다. 지도 왼쪽에 金川界로부터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예성강 본류이다. 예성강에는 梨浦·錢浦·碧瀾渡 등이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포구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습지 비슷하게 평평한 하천 지형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중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外港으로서 국내·해외 무역이 번성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개성에는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안쪽에는 滿月臺가 표시되어 있다. 만월대는 고려의 主宮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높은 臺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위쪽에 鴨潭面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실재와 많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을 흐르는 論早川 유역에 개성의 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金川界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읍치 바로 밑의 養竹橋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鄭夢周(1337-1392)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善竹橋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밖에 고려의 왕도였기 때문에 수많은 王陵이 산재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조선의 왕릉들이 다른 지도에서 자세하게 표시된 것과 대조된다. (이기봉)

  • 고양
    이미지

    고양군은 덕양구의 오금동 동쪽 일부를 제외한 고양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덕양구 고양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에 高峯縣·幸州(또는 德陽)·富原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고을 이름은 고봉현과 덕양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붙여졌다. 고양군의 땅에 합쳐진 부원현의 경우 원래 果州龍山處였다가,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 富原荒調鄕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후 언제부터 부원현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處·鄕의 규모나 독자성이 縣에 맞먹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읍치 아래쪽에는 우리말 ‘기프내’의 한자표기인 深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곡릉천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곡릉천이 많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공릉천은 楊州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 방향으로 빠져 나간다 따라서 양주계 방향이 상류이며, 교하계 방향이 하류이다. 이 지도에는 마치 교하계 방향이 상류이며, 양주계 방향이 하류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고을의 경계선 밖에 있었던 富安三江面이 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 지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 일대로서, 실재로는 한성부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는 淸나라의 使臣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묶게 되어 있었다는 碧蹄驛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 보이는 書院은 文峰書院이다. 閔純(1520-1592) 등을 배향하여 숙종 14년(1688)에 세워지고, 같은 왕 35년(1709)에 賜額 받았다. 기타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무덤(陵)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기봉)

  • 과천
    이미지

    과천현은 경기도 과천시, 속달동·둔대동·대야미동을 제외한 군포시, 박달동 일대를 제외한 안양시, 상도동·대방동을 제외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초구의 대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과천시 관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冠岳山(631m)이다. 지도 위쪽에는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 露梁(津)과 銅雀(津)이 표시되어 있다. 노량진은 우리말 ‘노들나루’에 대한, 동작진은 ‘동재기나루’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나루는 일반적으로 강 양편과 그 사이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노들나루와 동재기나루는 보통 한강 남쪽을 지칭했다. 읍치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2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良才驛이 표시되어 있다. 붉은색의 작은 원은 이 지도책에서 찰방역에 대한 일괄적인 범례로 사용되었으며, 찰방이 파견된 역을 보통 ‘道’라고 불렀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양재천이며, 왼쪽의 하천(仁德川)은 현재 안양천으로 부르고 있다. 안양천 위에 있는 安養은 安養橋를 의미한다. 관악산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정확하게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한강변의 노량진 일대에는 사육신을 배향한 愍節書院을 비롯하여, 鷺江書院·四忠書院 등이 밀집해 있었다. 淸溪山에서 冠岳山 방향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야트막한 언덕 정도임에 비해, 너무 굻게 표시되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밖에 이웃 금천현의 南面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이런 예는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기봉)

  • 광주
    이미지

    광주부는 남종면을 제외한 경기도 광주시 전체, 남양주시 조안면과 와부읍의 팔당리, 성남시, 하남시,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강동구, 의왕시, 안산시 시청 동남쪽, 화성군 매송면의 야목리·원리·송나리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黔丹山(685m)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읍치가 남한산성 위쪽인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 이후 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조 4년(1626)에 지도 위의 읍치인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고을의 격도 牧에서 留守府로 승격시켰다. 병자호란(1636) 때에는 인조가 피난하여 2개월 가까이 후금에 대항하다가 항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인조가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던 三田(渡)가 지도 위쪽의 한강변에 표시되어 있다. 한강으로 합류되는 큰 지류로는 炭川(숯내)과 현재 경안천으로 부르는 小川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 아래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에 의해 이루어진 시화호의 일부이다. 이 지역은 안산시 동남쪽과 화성시 매송면 서쪽에 해당된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慶安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광주시 시내는 바로 이 경안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한강변에는 이 지역 최대의 장시였던 松波나루와 廣津(광나루)도 보이고 있다. 良才驛은 이 고을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바로 아래쪽 書院이라고 쓰인 부분의 왼쪽에 있어야 한다. 서원은 고을이 큰 만큼 4개나 표시되어 있다. 기타 水原界와 果川界 중간 부분에 일반적으로 沙斤川으로 표시되던 하천의 명칭이 ‘사그내’라는 순 우리말의 발음에 가까운 沙斤乃로 적혀 있음이 재미있다. (이기봉)

  • 교동
    이미지

    교동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와 석모도 위쪽, 서도면의 주문도, 북도면의 장봉도 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교동면 읍내리에 있었다. 지도에 읍치가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경기 水營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경기 수영은 남양의 화량진(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었으며, 인조 7년(1629)에 이 고을로 옮겼다. 수영이 설치되면서 고을의 格도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아래쪽의 注文島와 長峯島는 실재로는 강화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다. 이 두 섬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 두 섬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천 부분에 나오지 않으며, 수영이 설치되면서 이 고을의 관할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을에는 현재 강화군 교동면 정도의 작은 면적에 4개의 面이 설정되어 있어, 면의 규모가 매우 작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면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규모나 구체적인 운영은 각 고을에 맡겨졌기 때문에 고을마다 규모가 달랐다. 섬 전체적으로는 중앙의 華蓋山(259m)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매우 낮은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섬의 모습은 지도와는 달리 남북보다는 동서로 2배 정도 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기봉)

  • 교하
    이미지

    교하현은 파주시 시내(옛 금촌읍)와 교하면·탄현면, 조리면의 서쪽 일부에 해당된다. 읍치는 교하면 교하리에 있었다. 長湍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金浦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한강이다. 임진강에 洛河라는 명칭이, 한강에는 學堂浦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각각 이 지역에서 임진강과 한강에 대해 부르던 별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그려져 있는 蟹岩은 地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해동지도≫의 교하군 지도에 임진강 건너의 풍덕 땅에 蟹岩이란 글자로만 나온다. 이 부근에는 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리는 一眉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이 지도의 작성자가 그것을 해암으로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해암은 없으며, 일미도만 표시되어 있다. 高陽界로부터 들어와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공릉천이다. 지도에는 金尺津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金尺은 우리말 ‘쇠재’ 또는 ‘쇠자’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陵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 무덤이다. 영조 7년(1731)에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에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겨 왔다. 장릉이 있는 자리에는 원래 이 고을의 읍치가 있었는데, 장릉이 옮겨 오면서 파주시내 금릉동으로 옮겼다. 금릉동에서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겨온 시기는 地誌에서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못하다. (이기봉)

  • 금천
    이미지

    금천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금천구·관악구와 안양천 동쪽의 구로구 및 동작구의 대방동·상도동, 경기도 광명시의 대부분과 안양시의 박달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금천구 시흥동의 금청구청 근처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三聖山(478m)이었다. 지도 위쪽으로 한강이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서 지금의 안양천이 합류된다. 안양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大川이라고 나오며, 현재의 영등포구청 근처에서는 ‘오목내’라고 불렀다. 지도에는 안양천이 과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한 듯이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는 과천의 경계를 넘어 훨씬 더 먼 곳에서 발원한다. 안양천변에 적혀 있는 歧溪橋는 歧灘橋의 誤記이며, 이 다리는 보기 드문 石橋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천 상류에는 오늘날의 안양시 이름과 동일한 安養驛이 보이고 있지만, 실재로는 安養橋의 誤記이다. 다른 기록에는 萬安橋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역시 보기 드문 石橋였다고 나온다. 長柱峴도 長栍峴의 誤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도가 현지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편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 위쪽으로는 楊花津이 큰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실재의 위치는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이기봉)

  • 김포
    이미지

    김포군은 지금의 김포시 시내·고촌면·양촌면과 인천광역시 서구의 검단동(옛 검단면)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김포읍 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北城山이며, 지도 위에는 章陵이 있는 산이다. 읍치는 원래 古縣內라고 표시된 지역에 있었다. 인조 5년(1627)에 지도에 표시된 章陵을 읍치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읍치를 옮겼다. 장릉이 옮겨옴에 따라 이 고을은 縣에서 郡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하면서 追尊된 원종의 무덤이다. 원래는 양주에 있었으며, 이곳으로 옮겨 온 5년 후(1632)에 章陵으로 追崇되었다. 고을의 서남쪽은 서해 바다와 접해 있으며, 동북쪽은 한강 하류에 연해 있다. 지도에는 서남쪽의 바다가 작게 표현되어, 쉽게 알아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한강은 地誌에 지도 위의 孤島라는 명칭을 따서 孤島江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도에는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속자도 보이고 있다. ‘芦’는 글자 그대로 보면 ‘호’로 읽어야 하지만, ‘蘆’의 속자로 쓰였기 때문에 ‘노’로 읽어야 한다. 또한 지도 왼쪽의 ‘杻串’에서의 ‘杻’은 지명에서는 주로 ‘유’가 아니라 ‘축’으로 읽어야 한다. (이기봉)

  • 남양
    이미지

    남양부는 북쪽 문호리·수화리 일대를 제외한 화성시의 옛 남양면, 삼화리·유포리를 제외한 제외한 비봉면, 마도면·송산면·서신면,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 안산시의 대부도,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영흥면과 자월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성시 남양동(옛 남양면 남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飛鳳山이다. 읍치 위쪽에 표시된 仁川地는 인천의 월경지인 梨浦面 지역이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지도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分鄕面이 그것이다. 분향면의 현재 위치는 화성시 향남면의 상신리·하길리·구문천리로서 분명히 수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었다. 이 지도에는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규장각에 남아있는 18세기까지의 地誌나 지도에도 분향면이 월경지라는 기록은 없다. 이 지도의 작성자도 그런 기록에 바탕을 두고 그렸기 때문에 잘못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분향면의 위치가 월경지로 표시되어 있다. 大部面에는 감목관이 파견된 곳임을 알려주는 황색의 작은 원과 牧(場)이라는 글씨가 표시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580匹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花梁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永宗이란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永宗에는 원래 永宗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숙종 24년(1698)에 현재의 영종도로 옮겨갔다. 鎭堡와 같은 군사시설은 옮겨가면서 지명도 함께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도 오른쪽의 섬은 대략적인 위치나 크기만 표시한 것일 뿐, 완전히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기봉)

  • 마전
    이미지

    마전군은 연천군 미산면과 왕징면의 노동리·동중리·북삼리·무등리, 군남면의 남계리·황지리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미산면의 마전리 일대에 있었다. 朔寧界에서 들어와 積城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며, 楊州界에 합류되는 것은 그 지류인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에 橫江·澄波渡·楡淵渡·腐淵津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渡와 津은 모두 나루를 지칭하는 한자 명칭이다. 楡淵渡·腐淵津에서의 ‘淵’은 연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처럼 잔잔한 하천구간을 의미한다. 하천은 보통 물살이 빠르고 얕은 여울(灘)과 잔잔하고 깊은 구간(淵·潭·湖 등으로 표시됨)이 반복적으로 연속된다. 나루는 물살이 잔잔하고 깊은 구간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징파도가 징파강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징파도는 조선후기에 나루뿐만 아니라 포구로도 유명한 곳이었으며, 임진강에서 商船이 일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상류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은 禾津面의 위치이다. 화진면은 양주계로부터 들어오는 한탄강 북쪽·임진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현재의 위치는 군남면 황지리와 남계리 일대이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마전군 지도에서는 화진면의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시정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 보이는 崇義殿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요 임금 8명과 신하를 함께 배향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올려주도록 한 곳이다. 세종 7년(1425)에는 조선의 왕실도 5대만 하도록 되어 있음을 기준으로 삼아, 제1대 태조(재위 918-943)·제8대 현종(1009-1031)·제11대 문종(1046-1083)·제24대 원종(1259-1274)에게만 제사지내도록 했다. 현재도 미산면 아미리에 존재하고 있으며, 작은 고을임에도 ‘郡’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기타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眉江書院이다. 남인의 거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영조 26년(1750)에 세워지고, 같은 왕 29년(1753)에 賜額 받았다. 이러한 서원이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 지도는 최소한 1750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기봉)

  • 부평
    이미지

    부평부는 인천광역시 부평구·계양구, 검단동 일대를 제외한 서구, 경기도 부천시, 안양천 서쪽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桂陽山(394m)이다. 이 계양산의 위치는 地誌나 지도 어디에도 모두 읍치의 북쪽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실재로도 북쪽에 있다. 가장 오른쪽의 하천은 지금의 안양천이며,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굴포천이다. 지도 왼쪽에는 서해 바다와 섬이 표시되어 있지만, 섬의 면적이나 위치 등은 다른 지도에서처럼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이 섬들은 둘레가 몇 백보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지도 작성자가 왜 이렇게 크게 그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도책에서는 섬을 실재의 크기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는 사실이 참조된다. 이 지도는 정확성을 기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면·산·봉수·역 등 아주 간단한 내용만을 싣고 있다. (이기봉)

  • 삭령
    이미지

    삭령군은 일제시대의 연천군 삭령면·서남면과 중면의 북쪽 및 왕징면의 동쪽 일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내문면·인목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절반과 개성시 장풍군의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북한 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백로산리(옛 삭령리)에 있었다. 삭령군은 고려 예종 때 朔邑縣과 僧嶺縣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이름도 두 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만들어졌다. 嶺이 寧으로 바뀐 경위나 시기에 대해서는 地誌에서 찾을 수가 없다. 兎山界로부터 들어와 漣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孫廳灘이라고 적혀 있는데, 임진강의 이 구간에 대해 이 지역에서 부르던 명칭이다. 여기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역은 사람이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대규모 군대의 신속한 이동도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地誌나 地圖의 작성에서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었으며, 해당 구간의 하천에 대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철원계와 평강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현재 역곡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강계로부터 직접 들어오지 않으며, 철원을 거쳐 들어온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며, 고을의 전체 모습 역시 비슷하다. 역곡천 변에 적혀 있는 江華坪은 철원의 넓은 평야가 연장된 곳으로서,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 철원군 마방리 일대에 해당된다. 고을의 전반적인 모습은 실제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수원
    이미지

    수원부는 수원시, 오산시, 화성군의 태안읍·동탄면·정남면·봉담읍·팔탄면·향남면·장안면·우정면·양감면과 송나리·원리를 제외한 매송면, 평택시의 포승면·청북면·안중면·현덕면·오성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안녕리 일대였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鉢岾山이었다. 이 고을이 이렇게 크게 된 최초의 계기는 이 지역의 세력들이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 초기부터 많은 屬縣(縣·鄕·所·部曲)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屬縣들은 그대로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고, 그런 배경 때문에 큰 고을이 될 수 있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고을의 越境地가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월경지의 상당부분이 主縣으로 존재했던 이 고을의 역사와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중간 부분에 振威界라 쓰여 있는 곳에도 수원의 땅이 있었다. 현재의 위치는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와 고덕면 동청리·당현리 일대이다. 또한 이 고을 안에 있었던 다른 고을의 월경지에 대한 표시도 정확하지는 않다. 이 부분은 다른 고을의 지도에 대한 해제 부분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지도 위의 읍치는 정조 13년(1789)에 지금의 수원시내로 읍치를 옮기기 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최소한 정조 13년(1789)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현재의 아산만이 보이고 있으며, 읍치 오른쪽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현재 황구지천으로 불리고 있다. 황구지천 상류에는 柳川(버드내)이 적혀 있는데, 해당 구간에서만 불리던 명칭이다. 황구지천 역시 구간마다 매우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이 여러 地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방향에는 숙종 20년(1694)에 宋時烈(1607-1689)을 配享하여 세웠으며, 다음 해에 賜額받은 梅谷書院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위쪽으로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彌勒堂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안산
    이미지

    안산군은 하중동·하상동을 포함한 시흥시의 남쪽 부분과 시청 서·북쪽의 안산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산시 수암동에 있었다. 고을의 동쪽은 읍치 오른쪽의 修理山(475m)을 비롯하여 3-400m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쪽은 야산지대에 불과하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형적 특징이 대략적이나마 잘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舊草芝라는 표시가 있는데, 조선 초기까지 草芝梁營이 있었던 곳이다. 이 초지량영은 효종 7년(1656)에 강화군 길상면의 초지리로 옮겨갔으며, 草芝鎭이라 불리게 되었다. 營·鎭·堡와 같은 군사기지는 위치를 옮겨가면서 명칭 역시 대부분 그대로 가져간다. 다만 옛 초지량영은 현재도 안산시에 초지동이란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고을과 아래쪽 南陽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는 현재 시화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시화호로 바뀌었다. 지도 왼쪽에 있는 衣島(오이도)와 雙島(큰가리섬과 작은가리섬) 역시 방조제의 일부분이 되면서 육지화 되었다. 더 오른쪽에 있는 乭注(島)와 召勿(島)는 地誌의 내용과 비교해 보아도 많이 왜곡되어 있다. 돌주도의 경우 ≪여지도서≫에는 서쪽 40리에 있다고 나오며, 의도(오이도)는 서쪽 47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의도 오른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만 돌주도와 소물도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기봉)

  • 안성
    이미지

    안성군은 지금의 안성시 시내·금광면·미양면·대덕면과 북가현리·동평리·남풍리를 제외한 보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성읍 구포리·명륜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229.5m)이다. 읍치 아래의 하천이 안성천의 본류이며, 陽智界로부터 들어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한천이다. 고을 전체나 산세·하천의 모습이 실재와 상당히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몇 개의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 표시된 外山面은 안성의 땅이 아니었으며, 동쪽의 竹山에 속해 있었다. 이 지도책의 竹山 지도에도 外山面이 나오고 있는데, 편집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양지와의 경계선 부근에 표시된 其佐面은 읍치 바로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기좌면 자리에는 北佐面이 표시되어 있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18세기의 地誌나 地圖의 자료에는 모두 북좌면이 기좌면보다 더 북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편찬자가 기좌면과 북좌면의 유사성으로 인해, 북좌면을 생략하면서 범했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셋째, 그 오른쪽의 寶山은 죽산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산이 ‘북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재로는 동북쪽에 있는 것을 북쪽으로 표현하여 위치 비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이 지도에 나오는 面이 당시에 있었던 모든 面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님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기봉)

  • 양근
    이미지

    양근군은 양평군의 양평읍·강상면·강하면·양서면·서종면·옥천면과 광주군의 남종면, 가평군의 설악면과 북한강 남쪽의 외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평읍 양근리에 있었다. 원래의 읍치는 지도 위에 古邑으로 표시된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 있었다. 이후 영조 23년(1747)에 지도 위의 읍치 지역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지도는 그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해동지도≫의 양근군 지도는 읍치를 옮기기 이전의, ≪여지도서≫의 지도에는 옮긴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加平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북한강이며, 新恩川 왼쪽으로부터 읍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남한강이다. 남한강에는 水運 상 중요한 여울이 표시되어 있는데, 그 중 大灘은 우리말 ‘한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현재의 양서면 대심리 부근에 있었다. 한여울에는 큰 바위가 가운데에 있어 사공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 초에 이 바위를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었 있기도 하다. 남한강가에 있는 分院里의 위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幷灘 왼쪽에 표시되어야 실재에 부합된다. 이곳에 관용도자기를 굽던 司饔院의 分院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分院里란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도 광주시 남종면에 분원리 명칭으로 남아 있으며, 수많은 가마터가 발굴되고 있다. 북한강가에 있는 北面 지역은 고려 때 迷原莊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가평군 설악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國師 普愚(1301-1382)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縣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기타 작은 하천의 명칭까지도 하나하나 적어 넣었음이 눈에 띈다. (이기봉)

  • 양성
    이미지

    해제없음

  • 양주
    이미지

    양주목은 남면을 제외한 양주군, 조안면을 제외한 남양주시, 구리시, 동두천시, 연천군의 전곡읍·청산면, 포천군 신북면의 덕둔리·삼정리·갈월리·금동리, 고양시 덕양구의 오금동과 지축동, 서울특별시 도봉구·노원구·중랑구와 은평구의 구파발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읍치 위쪽의 佛谷山(470m)이었다. 본 지도에는 양주목 뿐만 아니라 한성부의 都城과 城底十里를 모두 그리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이 지도에서의 한성부는 한강-古楊州面-三角山-延曙를 잇는 범위 안에 있었다. 본 지도는 한성부 중 都城 부분이 실재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교정되어 있다. 이 지도보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와 ≪여지도서≫의 양주목 지도에는 도성 부분이 본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두 지도가 비록 회화식 지도이기는 하지만, 본 지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 안에는 宮과 성균관 정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으며, 그 밖의 정보로는 현재 청계천으로 불리는 開川이 거의 유일하게 보이고 있다. 오른쪽의 加平界로부터 북한강이 들어오며, 陽根界에서 남한강과 만나 한강의 본류가 된다. 실재로 廣州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서도 한강이 연결되어 있지만, 본 지도는 양주의 영역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한강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蠶島·栗島 등이 크게 그려져 있다. 한강 남쪽 변에는 西江과 麻浦(삼개)를 비롯한 포구와 나루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상업이 발달한 지역임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실재로는 이 포구와 나루의 대부분이 한강의 북쪽 지역에 있었는데, 여백이 적어 남쪽 지역에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강으로는 현재 중랑천·왕숙천이 합류하고 있는데, 지도에는 각각 豆驗川·王宿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이 보이는데, 지도에는 大灘으로 적혀 있다. 한탄강의 ‘漢’은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의 음을 표현한 것이므로, 한자의 ‘大’와 자주 섞여 사용된다. ‘한탄’ 또는 ‘대탄’의 순우리말은 ‘한여울’이다. 대탄 부분은 실재와 비교하여 약간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大灘으로부터 壺知山까지의 한탄강 북쪽 부분이 양주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둘째, 한탄강의 지류인 哨村川이 積城界을 넘어 뻗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교정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平丘(驛)이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기호와 함께 지도 아래쪽 가운데쯤에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호는 이 지도책에서 주로 鎭堡를 표시하던 기호이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기봉)

  • 양지
    이미지

    양지현은 지금의 용인시 시내의 마평동·운학동·해곡동, 양지면 전체, 원산면의 학일리·목신리 일대, 백암면의 박곡리·고안리·백봉리 일대, 안성시의 고삼면, 일죽면의 능국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지면 양지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定水山이다. 이 고을은 정종 1년(1399)에 수원의 양량부곡이 현으로 승격된 것이며, 태조 13년(1413)에 지도 위에 있는 광주의 秋溪鄕으로 읍치를 옮겼다. 아울러 죽산의 陽良·高安·大谷·木岳·蹄村 등의 部曲을 새로 편입하여 지도 위와 같은 양지현이 만들어졌다. 面의 이름에 朱자가 들어가 있는 추계향은 용인시 시내의 일부와 양지면, 面의 이름에 古자가 들어가 있는 양량부곡은 안성시의 고삼면에 해당되는 큰 규모였다. 나머지 네 개의 부곡은 현재 1-2개의 里에 해당되는 작은 규모이며, 각각 고안면·박곡면·목악면·제촌면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서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한강의 지류인 탄천의 상류이며, 서남쪽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옛 추계향 지역과 양량·목악 부곡이 지나치게 넓게 연결되어 있다. 두 지역은 거의 떨어져 있는 듯 연결해야 실재에 가깝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제촌면 지역도 고안면과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여러 地誌에 이와 같은 사실이 모두 적혀 있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이기봉)

  • 양천
    이미지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와 영등포구 양평동 일대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이었다. 고을 동쪽에는 한강이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며, 衿川界로부터 흘러들어와 합류되는 하천은 현재 안양천으로 불리고 있다. 한강에 표시된 孔岩은 글자 그대로 구멍이 뻥 뚫린 바위로서, 한강 가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현재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공암 근처에 있었던 孔岩津은 ‘金을 우연히 줍게 된 형제가 서로 다툴 것을 염려하여 금을 버렸다’는 옛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 아래쪽의 塩倉은 소금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며, 현재의 강서구 염창동 일대를 가리킨다. 그 오른쪽의 仙遊峯은 현재의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것으로서, 楊花津으로 더 알려졌던 곳이다. 기타 開花山이 있는 근처가 지금의 김포공항이 들어선 곳이다. (이기봉)

  • 여주
    이미지

    여주목은 강천면과 금당천 동쪽의 북내면을 제외한 여주군 전체와 양평군의 개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여주읍 여주 군청 주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北城山이었다. 이 고을의 원래 이름은 驪興이었는데, 예종 1년(1469)에 세종의 무덤인 英陵을 읍치 왼쪽의 북성산에 옮기면서 驪州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뿐만 아니라 위쪽의 梨浦津 부근에 중심지가 있었던 川寧縣을 없애고 이 고을에 합하였으며, 고을의 格도 府에서 ‘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릉이 고을에 입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예가 될 수 있다. 英陵 오른쪽의 寧陵은 효종의 무덤이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약간 애매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와 陽根界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 본류이다. 오른쪽의 原州界로부터 들어오는 金塘川은 실재보다 조금 과장되어 있다. 하천의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지평에 걸쳐 있는 상류 또한 상대적으로 짧다. 반면에 아래쪽의 天民川(청미천), 이천 방향에서 내려오는 福川(복하천), 砥平界로부터 들어오는 新恩川 등은 다른 고을에 걸쳐 있는 상류가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훨씬 길다. 福川과 합류되는 것으로 그려진 華隱川(양화천)은 실재로는 복하천과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남한강변에는 많은 나루(津)가 표시되어 있는데, 단순히 나루만이 아니라 중요한 浦口의 기능을 가진 곳도 많았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이 梨浦津이며, 현재의 금사면 이포리에 있었다. 李重煥(1690-?)의 ≪擇里志≫에서도 상업이 매우 번창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梨浦는 우리말 ‘배개’에 대한 한자표기이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우리말의 발음을 따서 ‘白崖’로 기록하였다. 이포진 오른쪽의 沂川書院은 金安國(1478-1543)·李彦迪(1491-15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13년(1580)에 세워지고, 인조 3년(1625)에 賜額 받았다. 읍치 위쪽의 孤山書院은 李存五(1341-1371)·曺漢英(?-1670) 등을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기타 읍치 위쪽의 八大藪는 남한강변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숲으로서, 八長林이라고도 한다. (이기봉)

  • 연천
    이미지

    연천현은 연천군 연천읍, 중면의 남쪽 부분, 황지리 남쪽을 제외한 군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연천읍 읍내리에 있었다. 하천에 대한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朔寧界로부터 들어와 麻田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橫江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永平界에서 들어와 마전계에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하천이 현재의 한탄강이다. 지도에는 大灘이라고 적혀 있다. ‘大’는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에 대한,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따라서 한자표기인 大灘·漢灘에 대한 순수 우리말 지명은 ‘한여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한탄강이 북류하면서 임진강에 합류하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거의 서류하면서 합류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행정구역의 경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되는 지점의 동북 부분은 실재로는 마전의 영역이었다. 또한 그 동쪽에 있는 한탄강 양쪽의 상당 부분은 양주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마전의 영역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탄강의 유로가 잘못 표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간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서≫와 ≪해동지도≫ 내의 연천현 지도에는 비록 회화식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이 밖에 읍치를 지나는 車灘은 이 지도에서 표현된 것보다도 더 먼 거리의 철원 땅에서 발원한 후 이 고을의 경계로 들어온다. (이기봉)

  • 영평
    이미지

    영평현은 포천군 영중면·영북면·이동면·일동면·창수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중면 영평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왼쪽 위의 漣川界에 있는 하천은 현재 한탄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읍치 아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영평천이라고 한다. 이 지도에서는 이러한 하천의 표시가 약간 잘못 되어 있다. 영평천 중 동쪽에서 발원하는 부분은 金化界에 있는 白雲山 부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東國與地勝覽≫·≪輿地圖書≫에도 이 하천은 모두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 지도의 작성자는 이러한 地誌의 내용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아마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를 참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어 雨音山이란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해동지도≫의 영평현 지도 등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여지도서≫의 지지와 지도에는 동시에 나온다. 그런데 ≪여지도서≫의 영평현 지도에는 우음산과 김화계 사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우음산 북쪽에 또 다른 유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탄강 본류 역시 최소한 烽이라 적혀 있는 부분까지는 철원과의 경계선을 타고 흐른다. 이것 역시 전체적으로는 ≪여지도서≫의 지도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실재와 부합되게 하려면, 백운산 - 김화계 - 혜재참 부근 - 우음산이 연속적인 산줄기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평천의 상류도 이곳까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결국 이 지도의 백운산에서 철원계-김화계 사이로 흘러가는 하천는 실재로는 없어야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오류가 상당히 시정되어 있다. 다만 이 지도에서 북면으로부터 흘러나와 한탄강에 합류되는 하천이 지나치게 백운산 가까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김정호가 이 하천이 백운산에서 발원한다는 지지의 내용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밖에 읍치 왼쪽의 玉屛書院은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효종 9년(1658)에 세워지고, 숙종 39년(1713)에 賜額 받았다. (이기봉)

  • 용인
    이미지

    용인현은 용인시 수지읍·구성면·포곡면·모현면·기흥읍·이동면·남사면과 마평동·운학동·해곡동을 제외한 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성면 언남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태종 13년(1413)에 龍駒縣과 處仁縣을 합하여 만들어졌고, 각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다가 龍仁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용구현의 중심지가 지도 위의 읍치 지역이며, 처인현의 중심지는 아래쪽에 古縣이라고 적혀 있다. 처인현은 원래 處仁部曲이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에 金允候가 몽골의 장수인 撒禮塔을 사살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인현은 현재 용인시 남사면과 이동면에 해당되어, 縣으로 승격되기 이전의 部曲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용인 시내는 지도에 金岑(→岺)驛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고을의 유역권이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위쪽의 2개 하천은 모두 한강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탄천의, 오른쪽의 것은 경안천의 상류이다. 아래쪽의 2개 하천은 모두 안성천의 지류로서 왼쪽의 것은 오산천의, 오른쪽의 것은 진위천의 상류이다. 지도에는 각각 葛川·魚肥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두 공식명칭에서는 사라졌다. 기타 읍치 왼쪽에 표시된 書院은 深谷書院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의 사림파로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 중종 14년(1519)의 乙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趙光祖(1482-1519)를 배향하였다. 효종 1년(1650)에 세워지면서 賜額 받았으며,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현재의 수지읍 상현리에 있었다. (이기봉)

  • 음죽
    이미지

    음죽현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장호원읍·율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의 관성리·병암리·도신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고을 남쪽에 天民川이라고 적혀 있는 하천은 현재 淸美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읍치 왼쪽에 약간 보이는 하천은 복하천이라고 한다. 읍치 위쪽의 雪城山(290.5m)으로부터 왼쪽의 老城山(269m)까지 산줄기가 굻게 연결되어 있는데, 실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이 산줄기가 복하천과 청미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재로는 야산이나 둔덕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읍치까지의 脈勢를 중요하게 여겼던 회화식 군현지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산줄기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더 부정확하다. 天民川의 모습도 실재와 다른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천민천의 본류는 陽智界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며, 가장 큰 지류는 지도에서와 달리 天民川이란 글씨 부근에 있는 충주와의 경계선을 타고 합류된다. 無極驛과 八聖山의 위치도 石院 부근에 그려 넣어야 실재와 부합된다. 石院은 보통 乭院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현재도 ‘돌원’이라고 부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 부근에 대해서는 이 지도보다도 실재의 모습을 더욱 왜곡하고 있다.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 바로 아래쪽에는 竹山界가 표시되어 있어야 현실에 더 부합된다. 읍치와 오른쪽 忠州界와의 사이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長湖院場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도에서 이 場이 표시되고 있지는 않으나, 거의 모든 지도에서 장호원의 또다른 기록 방식인 長海院이란 명칭이 발견된다. 이 지도에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음은 특이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기봉)

  • 이천
    이미지

    이천부는 이천시 시내·부발읍·대월면·모가면·호법면·마장면·신둔면·백사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이천 시내 관고동·창전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5리에 있었다’는 雪峰山(394.3m)이었다. 하천과 산줄기의 모습이 실재와 매우 흡사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를 지나는 하천은 지금도 지도 위에 적혀 있는 것처럼 福河川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쪽에 獻海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현재 양화천의 상류에 해당되며, 실재로도 지도에서처럼 양화천의 상류 일부가 이 고을 남쪽에 거의 유사하게 걸쳐 있다. 면의 표시에서는 이 지도책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읍치에 있었던 邑內面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읍치 왼쪽에 보이는 五川面은 五川驛의 誤記이며, 母山面 부근에 葛麻洞面(또는 加麻洞面)이 적혀 있어야 합당하다. 지도에는 站도 2개나 적혀 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선조 30년(1597)부터 시작된 擺撥制度의 시행 결과를 보여준다. 파발제도란 변방으로 가거나 오는 공문서를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시행된 것으로서 騎撥은 25리마다, 步撥은 30리마다 1개의 站을 두었다. 여기서 기발은 말을 타고, 步撥은 사람이 직접 달려서 급보를 전하는 것이다. 기타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阿川驛을 가리킨다. (이기봉)

  • 인천
    이미지

    인천부는 인천광역시 동구·중구·남구·연수구·남동구와 백령도·대청도·영흥도를 제외한 옹진군, 시흥시 시내인 옛 소래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의 蘇萊山(299.4m)이었다. 이 고을은 그렇게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세조 6년(1460)에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라고 하여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蘇萊山이 2개나 표시되어 있어 하나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위쪽의 文學山도 실재로는 읍치 아래쪽(남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다른 지도와 地誌에는 대부분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도 오른쪽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여러 개의 屬驛을 거느렸던 重林驛이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은 찰방이 파견된 역에 대한 일률적인 범례로서 사용되었다.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는 인천의 越境地인 梨浦面이 보이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浦部曲이라는 독자적인 행정단위였지만, 고려말 조선초를 지나면서 인천의 땅으로 완전히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화성시 옛 남양면의 문호리·수화리 북쪽과 비봉면의 삼화리·유포리 일대이다. 지도 오른쪽에는 수많은 섬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영종도와 덕적도에는 파란색의 다이아몬드 모양이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는 이 책에서 鎭堡에 대한 범례로서 일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永宗鎭은 숙종 24년(1698)에 이미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을 갖고 있는 獨鎭이 되었기 때문에 인천 관할 아래에 있지는 않았다. 영종진 아래쪽의 月尾島에는 行宮이 기록되어 있다. 行宮이란 임금이 행차했을 때 잠시 머무는 곳을 의미하는데, 왜 이곳에 행궁이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확실하지가 않다. 기타 읍치 왼쪽의 書院은 鶴山書院으로서, 숙종 28년(1702)에 李端相(?-1669)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왕 34년(1708)에 사액 받았다. (이기봉)

  • 장단
    이미지

    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과 연천군의 왕징면·백학면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파주시·연천군에, 북한 쪽은 대부분 개성시 장풍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 쪽의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古邑 위쪽에 표시된 望海山이다. 본 고을은 조선 초기에 長湍·臨津·臨江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면 이름 중 長이 붙은 것은 장단현의, 江이 붙은 것은 임강현의, 津이 붙은 것은 임진현의 지역이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광해군 5년(1613)에 지도 위쪽의 古邑으로부터 옮겨왔다. 지도 아래쪽에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交河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다. 임진강 남쪽에 赤壁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의 근처에 臨津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한양에서 의주로 통하는 大路가 지나가며, 지도 위에는 이곳으로부터 개성으로 연결된 붉은색 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왼쪽에는 개성 시내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沙川이, 오른쪽에는 황해도의 金川에서 흘러오는 沙彌川이 표시되어 있다. 사미천 상류에는 일제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소남면·대남면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역권과 상관없이 황해도 금천에 속해 있었다. 읍치와 고읍 사이에 있는 桃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桃源驛을 의미한다. 驛 중에서 찰방이 파견된 경우를 道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도책에서는 이러한 道를 보통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는데, 이 지도에는 그러한 표시가 없다. 읍치 아래쪽의 海倉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 해창에서 ‘海’라는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통해 밀물 때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기봉)

  • 적성
    이미지

    적성현은 파주시 적성면,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갈현리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적성면 구읍리에 있었다. 麻田界로부터 들어와 坡州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임진강 본류이며, 강변에는 腐斤津·新直浦·戎灘이 표시되어 있다. 津·浦·灘은 하천의 기능과 특징이 집약된 용어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해동지도≫의 적성현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신직포가 각각 新津江·神知江으로 표시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浦’는 우리말 ‘개(물가)’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浦口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단순히 넓은 모래사장 또는 습지가 펼쳐져 있는 물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이 고을의 고구려 때 이름은 七重縣이며, 통일신라 때의 이름은 重城縣이다. 고을 이름의 한자 의미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중요한 군사 방어지역으로서 인식되었다. 현재도 이 지역에는 수많은 산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인식은 첫째, 6세기 중반 이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으며 둘째, 이 지역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임진강의 최 하류 지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는 戎灘에서의 ‘灘(여울)’은 물살이 빠르고 얕은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구간은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군사들이 도보로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다. 임진강에서 최 하류 쪽에 있는 여울이 바로 이 고을에 있는 여울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융탄 하류 부분으로는 더 이상 ‘灘’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점점 반감되게 되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紺岳(675m)은 조선의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기봉)

  • 죽산
    이미지

    죽산부는 안성시의 죽산면·삼죽면 전체와 능국리를 제외한 일죽면, 보개면의 동평리·남풍리, 백봉리·고안리·박곡리를 제외한 용인시의 백암면과 학일리·목신리를 제외한 원삼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죽산면 죽산리에 있었다. 읍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현재 남한강으로 합류되는 淸美川이라 부르고 있으며, 과거의 기록에는 대부분 天民川이라고 나온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하천 유역에도 일부씩 걸쳐 있다. 왼쪽의 陽智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안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에, 안성 방향으로 뻗은 도로 끝은 안성천의 최상류에 걸쳐 있다. 진천과의 경계선에도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최상류 일부가 걸쳐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표시에서도 利川界와 陰竹界 사이에 양지의 월경지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陽智界가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 지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面에 대한 표시이다. 近一面의 위치가 鼎倍山 근처에 있어야 더 합당하며, 川北二面은 川北一面 근처에 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川은 天民川을 의미한다. 南一面과 南二面도 읍치 동남쪽 방향에 있어야 한다. 南面 역시 外山面 지역에 표시되어야 하며, 山內面과 外山面은 없애야 한다. ≪戶口總數≫에는 마지막 부분의 문제점과 비슷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기록에는 山內面과 山外面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산내면에는 어떤 마을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산외면에 기록된 마을은 모두 남면의 마을과 동일하다. 남면이 산내면과 산외면으로 나누어진 시기가 있었던 듯하며, 만약 그렇다면 이 지도에서는 南面이란 명칭을 삭제해야 한다. ≪여지도서≫의 지지·지도와 ≪해동지도≫의 죽산부 지도에는 남면만 나오며, 산내면과 산외면은 나오지 않는다. 김정호의 ≪동여도≫에서는 면의 표시가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도에는 읍치나 바로 부근에 있었던 府內一面(또는 東部面·南部面)·府內二面 등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고을 남쪽 부분의 동서가 더 넓어야 실재에 가깝다. (이기봉)

  • 지평
    이미지

    지평현은 양평군 지제면·양동면·청운면·단월면·용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지제면 지평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섬강의 지류인 삼산천의 상류이며, 남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의 상류이다. 읍치 부근을 지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역시 한강의 지류인 흑천인데, 지도에는 田谷川·新川이라고 적혀 있다. 田谷川은 田谷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新川은 우리말 ‘신내’ 또는 ‘신내개울’에 대한 한자표기이다.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田谷 약간 상류에 있었던 黑川(거무내)으로 이름이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시대에 하천의 구간마다 사용되던 다양한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읍치 왼쪽의 書院은 雲谿書院이다. 趙晟(1492-1555)·趙昱(1498-1557) 형제를 배향하여 선조 27년(1594)에 세워지고, 숙종 40년(1714)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의 현재 위치는 용문면 덕촌리 서원말이며, 조욱이 많은 후학을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위쪽으로는 龍門山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30호인 거대한 은행나무로 유명한 龍門寺가 자리 잡고 있다. (이기봉)

  • 진위
    이미지

    진위현은 용이동·죽백동·월곡동을 제외한 평택시 시내와 옛 송탄시, 진위면, 황구지리를 제외한 서탄면, 당현리·문곡리·동청리를 제외한 고덕면, 오성면의 안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釜山이다. 水原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은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황구지천·오산천이며, 龍仁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진위천이다. 지도에는 각각 奈川·兎峴川·長好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지역에서만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이러한 하천의 이름은 일제초기에 하천 관리를 위해 명칭을 단일화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이 세 하천의 명칭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똑같이 적혀 있어, 두 지도가 서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나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세 하천의 명칭이 적혀 있지 않거나 다르게 적혀 있다. 陽城界계로부터 들어오는 하천은 안성천 본류이다. 탄현면이나 고두면 지역에 수원의 땅이 있었음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쪽의 水原界라는 글씨도 더 위쪽에 표시되어야 하며, 만약 표시를 하려면 牙山界로 되어 있어야 한다. 古頭面의 경우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右頭面으로, 김정호의 ≪동여도≫에는 石頭(面)으로 되어 있다. 餘方面은 ≪해동지도≫의 진위현 지도에는 余方面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2개 모두 이 지도처럼 기록되어 있어, 이 지도가 기본적으로는 ≪여지도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기봉)

  • 통진
    이미지

    통진부는 김포군 통진면·월곶면·대곶면·하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월곶면 고막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文殊山(376.1m, 比兒山이라고도 함)이었다. 고려 공양왕(재위:1389-1392) 때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童城縣과 守安縣의 흔적이 古童山城·守安古城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祖江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강의 이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으로 현재는 김포군 월곶면에 조강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고을과 강화와의 사이에 있는 물길을 보통 鹽河라고 부른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이 하루에 2번 바뀌어 흐르기 때문에 ‘河’라는, 흐르는 물은 짠 바닷물이기 때문에 ‘鹽’이라는 글자가 붙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염하는 한양으로 통하는 水路의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경제적으로, 외적의 침입시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지역이다. 이에 따라 강화도 방면으로는 수많은 鎭堡와 墩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고을 방향으로는 푸른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德浦鎭과 위쪽의 文殊山城만이 건설되어 있었다. 덕포진 아래쪽에 표시된 孫乭項은 보통 ‘손돌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원래는 덕포진과 거의 같은 위치에 표시되어야 한다. 손돌목은 지형적 요인으로 염하가 휘어지면서 가장 빠르게 흐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뱃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몽골의 추격병을 피해 달아나던 왕을 죽으면서까지 안전하게 염하를 건너게 했다는 손돌의 무덤이 있다. 이 손돌의 이야기는 ≪고려사≫에도 나오고 있으며, 뱃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손돌의 무덤을 지날 때마다 술을 따라 부으며 안전을 비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기타 도로가 마치 한강을 건너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김포방면의 육로를 통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야 한다. (이기봉)

  • 파주
    이미지

    파주목은 파주시 파주읍·파평면·법원읍·문산읍·광탄면·조리면·월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파주읍 파주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城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7년(1398)에 坡平縣과 瑞原郡을 합해 原平郡으로 만들어졌다. 세조 6년(1460)에 貞熹王后 尹氏의 본관이라고 해서, 이름과 고을의 격을 높여 坡州牧으로 만들었다. 옛 파평현의 읍치 지역이 지도에 坡平山·坡平面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積城界로부터 들어와 豊德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현재의 임진강이다. 지도에는 임진강의 이름이 붙게 된 臨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내내 임진강의 나루 중 가장 중요했던 곳으로 여겨졌다. 보통 문헌에는 臨津渡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간에서는 ‘임진나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임진나루의 현재 위치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임진강가였다. 임진강 하류에는 洛河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보통 임진강이라고 하면 임진나루 앞쪽의 하천 구간만을 의미하며, 각 구간마다 여러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廣灘이 쓰여 있는데, 현재 문산천으로 불리고 있다. 廣灘은 우리말 ‘너분여울’에 대한 한자표기로서, 한자의 소리가 아닌 뜻을 따서 기록한 것이다. 읍치 위쪽의 梨川 역시 우리말 ‘배내’에 대해 한자의 뜻으로 표기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하천과 산줄기 및 고을 전체의 모습이 실재에 가깝게 그려져 있어, 당시의 지도제작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아래쪽에는 恭陵·順陵이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각각 조선 제8대 임금인 예종의 章順王后와 제9대 임금인 성종의 恭惠王后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이기봉)

  • 포천
    이미지

    포천현은 포천군 포천읍·화현면·군내면·가산면·소흘읍·내촌면, 갈월리·금동리 서북쪽을 제외한 신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군내면 구읍리에 있었다. 읍치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탄강의 지류인 포천천이다. 지도에는 高橋川으로 적혀 있는데, 일제초기 하천 명칭의 단일화 과정에서 포천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왕숙천의 상류이며, 지도에는 交松川·地藏金川 등 2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전통시대에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원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花山書院은 ‘오성과 한음’으로 많이 알려진 李恒福(1556-1618)을 배향하여 인조 13년(1635)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龍淵書院은 역시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李德馨(1561-1613)과 趙絅(1586-1669)을 배향하여 숙종 17년(1691)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白鷺洲는 하천 가에 넓게 발달한 모래사장을 가리키는데, 현재의 위치는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일대이다.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는데,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城山은 원래 읍치 바로 북쪽에 표시되어야 한다. 고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동서의 폭을 조금 좁게 표현하든지, 아니면 남북의 폭을 조금 넓게 표현하든지 해야 실재에 가깝다. 기타 우리말의 한자표기에 대한 예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몇 개 발견할 수 있다. ‘松隅’는 우리말 ‘솔모루’에 대한, ‘廣峴’은 우리말 ‘넓고개’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기봉)

  • 풍덕
    이미지

    풍덕부는 일제시대의 개풍군 광덕면·대성면·상도면·봉동면·중면·흥교면·임한면에 해당된다.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개성시 개풍군과 판문면에 걸쳐 있으며, 읍치는 개풍군 풍덕리에 있었다. 이 고을은 세종 24년(1442)에 海豊郡과 德水縣이 합해져 만들어졌으며, 두 고을의 이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豊德郡이 되었다. 지도에는 덕수현의 옛터가 古德水라고 적혀 있으며, ‘德’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명칭은 옛 덕수현의 범위를 알려준다. 이후 순조 23년(1823)에는 고을 자체가 사라지면서, 모두 개성의 땅에 속하게 되었다. 한강의 본류는 交河界로부터 들어오며, 坡州界로부터 들어오는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빠져나간다. 通津과 江華 사이에는 鹽河라는 중요한 물길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는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 자체가 풍덕부만 그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에 북쪽으로부터 흘러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예성강 본류이다. 지도 오른쪽에 적혀 있는 東江은 임진강에 대한 이 지역에서의 호칭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지점에 적혀 있는 祖江도 이 지역에서 한강의 해당 구간에 대해 부르던 명칭이다. 전통시대에는 하천의 명칭을 하나로 통일시키기기보다는 구간마다 다양하게 불렀는데,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다. 강화도에 적혀 있는 昇天浦는 浦口라기보다는 풍덕 방향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나루이다. 나루는 보통 한쪽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강의 양쪽에 동일한 명칭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천포 역시 풍덕의 땅에도 동일한 명칭의 나루가 존재한다. 지도에는 陵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齊陵은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神懿王后의 무덤이며, 厚陵은 조선의 2대 임금인 定宗의 무덤이다. (이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