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朝鮮八道地圖 조선팔도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09-54-v.1-10
  • 간행연도 : [18世紀 中盤-19世紀 初(正祖-純祖 年間:1776-1834)]
  • 책권수 : 10枚,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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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96.6×85.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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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강원도 지도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원주는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본 지도첩의 다른 지도에는 진보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찰방역이 작은 사각형으로 표현되었다. 본 지도에는 이런 구분이 생략되어 있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하지만 해안선과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다. 그렇더라도 본 지도와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가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가 본 지도에 있다. 위쪽의 通川 남쪽에는 荒(島)·沙(島)·楮(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앞의 지도책과 동일하다. 세 개의 섬은 실제 위치와 다르게 되어 있고 김정호의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는 교정된다. 기타 동해안에 표시된 섬들의 위치도 앞의 지도책들과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다. 아래쪽 蔚珍 부분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에서보다 훨씬 바다쪽으로 불쑥 튀어나간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앞의 지도책들에서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이 사실에 가까우며, 김정호의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도 사실에 가깝게 교정된다. 이런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두 계통의 지도는 상호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상당 부분에서 다른 점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앞의 통천 해안선이 앞의 지도책들보다 훨씬 단조롭게 되어 있으며, 기타 다른 부분의 해안선도 비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두 계통의 지도는 상호 관련이 있지만 후대의 것이 앞의 것을 참조하면서 교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타 앞의 지도책 계통에 대부분 그려져 있는 울릉도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이기봉)

  • 경기도(62.8×6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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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경기도 지도다. 군현의 경계와 面·倉 등 세세한 정보까지 아주 자세하게 그린 대형 도별 지도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留守府로서 지방관이 京과 같이 外職이 아닌 內職이었던 개성과 강화는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京畿水營이 설치되어 있던 喬桐의 기호를 일반 군현과 다르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 지도에서는 일반 군현과 동일하게 표현하였다. 진보는 황색의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했지만 색이 칠해져 있지 않은 곳도 많다. 또한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 獨鎭으로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던 서해의 德積鎭이 표시되지 않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驛이 대부분 표시되어 있는데,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察訪驛을 따로 구분하여 표현하지는 않았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하지만 해안선과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다.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과 윤곽이 동일하지만 군현의 경계와 면 등의 정보가 생략된 도별도인 《조선팔도지도》(고병912.51-J773)에 비해서는 훨씬 자세한 정보를 싣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가 앞의 지도들보다 더 정확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서해의 注文(島)나 長峯(島)는 본 지도의 위치보다 교동도와 강화도에 훨씬 가까이 그려져야 하며, 이 점에서는 앞의 지도들이 사실에 가깝다. 군현 경계가 월경지까지 아주 자세하게 그려졌지만 일부 오류인 곳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양의 分鄕面은 본 지도의 표현과 달리 수원의 영역을 넘어가 현재의 화성시 향남면 상신리 부근에 있던 월경지이다. 이런 오류를 범하다보니까 수원의 馬井面 지역이 실제로는 월경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월경지인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水原의 읍치 위치는 1789년(정조 15)에 옮겨가는 현재의 수원 시내가 아니라 옮겨가기 이전에 있었던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부근으로 그려져 있다. (이기봉)

  • 경상도(113.8×7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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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경상도 지도다. 1767년(영조 43)에 山陰과 安陰이 山淸과 安義로 개명되는데, 본 지도에는 개명 이후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어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대구는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병영·수영·통영은 파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현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하지만 해안선과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다. 그렇더라도 본 지도와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가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가 본 지도에 있다. 英陽 북쪽의 首比面을 흐르는 하천은 현재의 왕피천으로 울진을 거쳐 동해안으로 빠져나간다. 본 지도에는 사실과 다르게 낙동강의 상류로 표시되어 있는데, 앞의 지도들에서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淸道의 월경지로 표시된 外西面이 본 지도에는 대구의 角南面 북쪽인 현재의 청도천 상류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앞의 지도들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각남면 남쪽에 남류하는 하천의 최상류에 있다. 이밖에도 월경지의 표시가 앞의 지도들과 거의 동일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다른 것도 많아 후대의 것이 앞의 것을 참고하면서 많이 교정한 것으로 보인다. 월경지에는 소속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다. 星州와 大丘에는 坊이란 명칭의 행정단위가 많이 등장하는데, 面과 동일하게 쓰던 명칭이다. 坊은 주로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面 대신에 사용하던 명칭으로 경기 이남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기봉)

  • 전라도(110.0×85.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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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전라도 지도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전주는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병영과 수영은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은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흥양에서는 감목관이 파견된 목장임을 의미하는 牧官에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였다. 강진에 있던 兵營도 작은 다이아몬드 모양처럼 그려 兵營이란 문자가 없으면 진보와 구분하기 어려운 등 기호 표시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다. 섬과 해안선의 모습이 아주 자세하게 되어 있지만 섬의 위치는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위쪽의 蝟島가 해안선에서 지나치게 많이 떨어져 있으며, 珍島 왼쪽 위의 섬들도 실제는 진도 북쪽 방향에 위치시켜야 한다. 그보다 훨씬 서쪽이나 서남쪽에 있었던 흑산도와 홍도(조선시대 지도에는 紅衣島) 및 소흑산도(조선시대 지도에는 可佳島) 등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남쪽으로는 제주도와 추자도 등도 전혀 표시되고 있지 않은데, 원본에서부터 나타난 현상인지 아니면 필사본이나 기타 보관상에서 삭제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任實과 南原에는 面이 坊으로 적혀 있다. 坊은 주로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面 대신에 사용하던 명칭으로 경기 이남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안는 것이다. 본 지도에는 군현의 경계선이 상세하며 월경지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월경지에는 소속 군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예를 들어 완도에는 康津·靈岩·海南 3개의 군현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신안군에 해당되는 서남쪽 섬들의 대다수는 羅州의 월경지임에도 그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으며, 務安 서남쪽에는 경계 표시는 없으나 灵光의 이름이 적혀 있어 월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기봉)

  • 충청도(54.0×98.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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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충청도 지도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하지만 해안선과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다. 그렇더라도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가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가 본 지도에 있다. 해미현 서남쪽에 표시된 西面이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에도 동일한 위치에 있는데, 실제로는 정북쪽 塩率面 위쪽의 바닷가에 붙어 있어야 한다. 충주의 가장 서쪽에 있는 川歧面이 마치 木川이나 稷山과 아주 가까운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鎭川의 동쪽 경계선이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에 가까워야 사실에 가깝다.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에 묘사된 충주의 서쪽 경계선이 본 지도와 100% 동일하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실제를 완전히 왜곡한 이러한 오류가 두 지도 계통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통해 상호 관련성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쉽게 비교할 수 있는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본 지도에는 海美 안에 홍주와 서산의 월경지인 雲川面과 東巖面이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에는 홍주의 월경지는 서산과 해미 사이에, 서산의 동암면은 서산에 이어지면서 해미를 남북으로 가르는 곳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둘 다 오류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에서는 본 지도보다는 앞의 방인식 군현지도책의 내용이 사실에 더 가깝다. 해미의 염솔면 오른쪽에 瑞山이란 글씨가 적혀 있는데, 보통 월경지가 있다는 의미이지만 이곳에 서산의 월경지는 없었다. 이와 같은 측면들을 통해 볼 때 두 지도 계통 중 나중에 제작된 것이 앞의 것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기준에 맞게 교정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본 지도가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보다 오류가 더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기봉)

  • 평안도 북부(75.0×8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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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 속에 있다. 지도 뒤에 명칭이 〈江界之圖〉 로 되어 있는 벽동-초산-위원-강계-폐사군의 지도다. 원본 계통의 정상기 발문에서는 평안도의 동북쪽이 너무 넓어 함경남도의 삼수 서쪽에 붙여 그린다고 되어 있다. 본 지도는 평안도의 동북쪽인 古閭延과 古茂昌 지역을 함께 그리면서 평안도가 너무 넓어지자 일부를 떼어 독립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1776년(영조 52)에 理山이 楚山으로 개명되는데, 본 지도에는 개명 이후의 지명이 적혀 있다. 본 지도첩의 다른 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군사기지인 진보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그려 구분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지도와 달리 군현의 경계가 없고 동북쪽 압록강가에는 古茂昌이 古茂里로 잘못 적혀 있는 일부 미완성적인 측면도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본 지도에 그려진 최북단의 압록강 유로다. 원본 계통이나 초기 수정본 계통과 압록강의 유로가 전혀 다르며,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도 다르다. 따라서 독창적인 하나의 수정본 계통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다만 압록강 유로의 세세한 측면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의 것에 가장 가까워 상호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기봉)

  • 평안도[북부 제외](76.0×9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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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으로 벽동과 강계 이북을 제외한 평안도 지도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평양은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병영이 설치된 안주는 파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그러나 남쪽의 龍崗과 三和에 큰 원만 있고 붉은색이 칠해져 있지 않아 미완성적인 측면이 보인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해안에 있는 許沙鎭 같이 파란색이 칠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壬海(鎭)·老江(鎭)·廣梁鎭 등 기호가 표시되지 않은 진보가 많아 역시 미완성적인 측면이 많이 보인다. 다른 지도에서 작은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던 찰방역에 대한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고, 찰방역인 평양 근처의 大同驛은 아예 표시되지도 않았다. 군현마다 일률적으로 坊과 面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한 행정단위에 대한 다른 명칭이다. 坊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면에 대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삼남지방에서는 남원과 성주 등에서만 타나난다. 함경도에서는 面을 社라고 표현한다. 월경지를 포함한 군현의 경계선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질 정도로 많은 정보를 싣고 있다. 順川의 중심지는 원래 殷山 동쪽의 舊順川이라 적혀 있는 곳에 있었는데, 읍치를 본 지도의 위치로 옮기면서 원래의 중심지 지역이 월경지로 변하였다. 해안가의 雲山古面이란 월경지는 몽골 침입 때 내륙의 雲山 사람들이 섬으로 피난하였다가 해안가에 장기간 정착하면서 운산의 땅이 된 곳이다. 그 왼쪽에는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이유로 龜城의 월경지가 된 塩里坊이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이기봉)

  • 함경남도(141.6×8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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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 속에 있으며, 지도 뒤에 명칭이 〈함경도〉 로 되어 있지만 함경남도만을 그린 지도다. 1785년(정조 9)에 鎭으로 승격되는 長津이 승격되기 이전의 長津冊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00년(정조 24)에 利原으로 개명되는 利城도 개명되기 이전의 지명으로 적혀 있다. 원본 계통의 정상기 발문에 평안도의 동북쪽이 넓어 함경남도의 삼수 서쪽에 붙인다고 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함경남도만을 그렸다.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면적이 너무 넓어 北靑의 南兵營과 鏡城의 北兵營 2개를 설치했는데, 본 지도의 영역은 남병영의 군사적 관할 범위와 동일하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함흥은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병영이 설치된 북청은 파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표현하였지만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高山驛 등에 대한 기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진보는 압록강 본류와 그 지류인 현재의 장진강에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음이 한눈에 파악된다. 1787년 본 지도의 別害堡에 장진도호부가, 1823년(순조 23) 압록강가에 후주도호부가 신설되기 이전까지 최전방의 방어선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장진강이었기 때문이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해 상호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해안선과 하천의 유로 및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아 참조했다고 하더라도 많은 교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달라진 부분 중 쉬운 사례로서 본 지도의 文川 동쪽인 현재의 영흥만에 있던 호도반도 부분을 들 수 있다.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에는 호도반도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김정호의 《청구도》에서는 호도반도가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과 동일하게 그려졌다가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는 그려지지 않는다. 본 지도에는 社로 끝나는 행정단위가 많은 기록되어 있는데, 面에 대해 함경도에서 사용하던 명칭이다. (이기봉)

  • 함경북도(89.0×8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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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 속에 있으며, 지도 뒤의 명칭이 〈吉州七邑〉 이라고 되어 있지만 함경북도를 그린 지도다.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면적이 너무 넓어 北靑의 南兵營과 鏡城의 北兵營 2개를 설치했는데, 본 지도의 영역은 북병영의 군사적 관할 범위와 동일하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북병영이 설치된 鏡城과 병영의 겨울철 주둔지인 行營은 파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군사기지인 진보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輸城(驛)은 파란색 작은 사각형으로 표현하였다. 다만 진보 중 다이아몬드에 파란색이 칠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慶源 북쪽의 訓戎(鎭)에는 기호 자체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오류도 보인다. 다른 군현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나 군현 사이의 경계가 들쭉날쭉한 犬牙相入地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군현의 경계를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그러나 富寧 동쪽의 茂山 월경지에는 경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채 ‘茂山’이란 문구만 적혀 있다. 그 동북쪽의 견아상입지에는 ‘穩’이란 한 글자만 적혀 있는데, ‘穩城’의 영역이란 의미다.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방안식 군현지도책인 《조선지도》(규16030)·《팔도군현지도》(고4709-111)와 자세함과 정확성이 비슷해 상호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해안선과 하천의 유로 및 지명 그리고 그 위치가 다른 것이 많아 참조했다고 하더라도 많은 교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지도 계통 사이에 다른 부분 중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사례로 明川 동쪽의 해안선을 들 수 있다. 앞의 방안식 군현지도책 계통은 명천 정동쪽이 동해쪽으로 가장 멀리 튀어나가 있는 반면에 본 지도 계통은 동남쪽이 가장 멀리 튀어나가 있다. 이 부분의 실제 해안선은 거의 남북으로 일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두 지도 계통 모두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 부분이 실제의 해안선과 비슷해지는 것은 김정호의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이르러서다. 본 지도에는 社로 끝나는 행정단위가 많은 기록되어 있는데, 面에 대해 함경도에서 사용하던 명칭이다. (이기봉)

  • 황해도(71.0×8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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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수정본 계통 중 鄭厚祚(1758-1793)의 ‘海州新本’ 계통으로 연구되고 있는 지도첩의 황해도 지도다. 일반 군현은 붉은색 큰 원으로, 감영이 있는 해주는 붉은색 큰 사각형으로, 병영이 있는 황주는 파란색 큰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瓮津의 所江에 파란색 큰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것은 1719년(숙종 45)에 鎭에서 水營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파란색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은 노란색 작은 사각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해주 아래쪽의 섬에는 龍媒鎭이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채 진보 기호만 표시되어 있다. 바닷가의 진보에는 수군이, 내륙의 진보에는 육군이 주둔하였다. 군현마다 面이라 적혀 있는 곳도 있고, 坊이라 적혀 있는 곳도 있다. 坊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面 대신에 사용하던 명칭이며, 함경도에서는 일반적으로 社라고 불렀다. 해안가에는 海倉과 船所라는 명칭이 자주 기록되어 있다. 海倉은 일반 창고와 달리 대동법 시행 이후 漕倉制가 약화되면서 군현마다 자체적으로 전세를 모아 한양으로 나르기 위해 바닷가에 세워진 창고다. 船所는 군현이나 진보에 배치된 전선을 정박시키던 곳이다. (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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