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八道地圖 팔도지도

  • 편저자 : 鄭尙驥(朝鮮) 作
  • 청구기호 : 古軸4709-48-v.1-8
  • 간행연도 : [正祖14年(1790)]
  • 책권수 : 8軸,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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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100.3×6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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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강원도 지도다. 군현이 청색의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발문에 강원도를 청색으로 표시하라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다. 강원도를 청색으로 표시한 것은 수도인 한양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5방색의 左靑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강릉·삼척·고성·춘천에는 성곽의 모양이 사각형 바깥쪽에 표시되어 있어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춘천에는 읍성이 없었으며 영동 지방에는 양양·평해·간성·통천·울진 등에도 읍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착오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어떤 자료에 입각하여 이런 착오가 일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삼척의 鎭營이란 글자와 함께 푸른색 작은 원으로 표시된 三陟浦鎭을 제외한 푸른색 큰 원의 기호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察訪驛이다. 그러나 가장 남쪽 平海의 越松浦鎭이 빠져 있고, 북쪽 金城의 昌道驛은 찰방역이 아님에도 찰방역처럼 표시되어 있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금강산이 아주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음이 눈에 띄고, 산 안쪽의 유명 사찰이 寺가 생략된 채 2자의 이름만 적혀 있다. 오른쪽 위의 제목 부근에는 강원도와 관련된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원도가 鐵嶺關 동쪽에 걸쳐 있기 때문에 關東이라 칭하며, 추지령에서 대관령까지 남북 1,000여리에 걸쳐 큰 산줄기를 이루어 영동과 영서로 나누어진다고 되어 있다. 옛날에는 江襄(강릉과 양양)과 原襄(원주와 양양)으로, 지금은 原春(원주와 춘천)과 東界로 불리기도 한다고 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鬱陵島가 해안가에 가깝게 표시되어 있고, 于山島가 섬 표시는 없이 글자로만 쓰여 있다. 울릉도가 해안가에 가깝게 표시된 것은 실제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크기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혹 女于陵이라기도 하고 혹 羽陵이라기도 하며, 울진에서 바람을 타고 2일을 가면 도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일설에 평해와 삼척으로부터 순풍을 타고 1일 반이면 이를 수 있다고 하며, 수로의 길이는 20리다’라고 되어 있다. (이기봉)

  • 경기도·충청도(100.4×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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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제목은 오른쪽 위에 〈京畿道附忠淸道〉라 되어 있는데, 정상기의 발문에 면적이 작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함께 그려넣는다는 서술과 일치한다. 본 지도가 1790년에 필사되었지만 1776년에 尼城으로 개명되는 충청도의 尼山, 1789년에 華城으로 개명되는 경기도의 水原이 개명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의 아래쪽 여백에는 英宗丙申인 1776년(영조 52)에 尼山이 嗣聖(정조)의 이름(즉 祘)과 소리가 가까워 古號인 尼城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776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를 그대로 필사하면서 1776년에 바뀐 지명의 내용을 따로 기록해 넣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와 충청도의 군현을 각각 노란색의 사각형과 분홍색의 2중 사각형으로 표현했는데, 정상기의 발문에 경기는 純黃으로, 충청도는 紅白으로 그리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푸른색 작은 원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속역을 관장하던 察訪驛을, 푸른색 큰 원은 군사기지인 鎭堡를 의미하는데, 이 역시 정상기의 발문 내용과 부합된다. 그밖의 범례 표시도 정상기의 발문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오른쪽 위의 지도 제목 주위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연원에 관한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圻內라고도 하는 경기도는 漢南과 漢北 또는 左道와 右道로 나누어지는데, ‘한강 일대를 나누어 남북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湖西라고도 불리는 충청도는 三西(호서, 관서, 해서)와 三南(호서, 호남, 영남)의 하나인데, 제천의 의림지 서쪽에 있기 때문에 湖西로 불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는 옛날에 公淸(공주와 청주)과 公洪(공주와 홍주)이라 불리웠으며, 지금은 公忠(공주와 충주)과 洪忠(홍주와 충주)이라 불리기도 함을 기록해 놓았다. 지도의 아래쪽 왼쪽에는 청풍·단양·제천·영천은 內四郡으로 불리며 산수가 가장 기이하고, 황간·영동·청산·보은은 外四郡으로 불리며, 沔川·····庇仁을 內浦 13읍으로 부른다고 기록해 놓았다. 아울러 芿盆島가 홍주로부터 1,300여리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 中國과 멀지 않으며, 혹 田橫島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잘못되었다는 역사지리적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기봉)

  • 경상도(100.0×6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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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경상도 지도로 군현의 색이 전라도와 강원도 군현의 색이 반반씩 섞인 사각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발문에 경상도는 靑紅으로 하라고 되어 있는데, 한양을 중심으로 동쪽인 左靑과 남쪽인 南朱의 가운데인 동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본 지도가 선명한 청홍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맞추려 노력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1767년(영조 43)에 山淸과 安義로 개명되는 山陰과 安陰이 개명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왼쪽에는 英宗(즉 영조) 戊申년(1728)에 안음을 혁파했다가 복구했던 일, 丁亥년(1767)에 산음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산음과 안음을 산청과 안의로 개명하게 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본 지도의 필사자가 원본을 그대로 필사하면서 당시까지 변화된 내용은 여백의 주기에 서술하려 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對馬島가 그려져 있는데, ‘日本地’라는 문구를 써놓아 조선의 땅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그 아래쪽에는 부산에서 倭都까지 이르는 사신로의 여정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대마도가 중요한 경유지였기 때문에 지도에 그려넣은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의 38리가 조선의 380리에 해당됨을 앞쪽에 기록해 놓아 거리 단위의 혼돈을 방지하고자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 모두 푸른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구별하기 어렵다. 내륙에 표시된 것은 모두 찰방역이고, 해안가와 섬에 있는 것은 진보다. 가끔 安·尙·晋·密·固 등 한 글자로 쓰인 경우가 있는데, 각각 안동·상주·진주·밀양·고성 등의 越境地(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땅)나 犬牙相入地(연결되어 있지만 개의 이빨처럼 다른 군현 깊숙이 들어가 있는 땅)를 의미한다. 가장 위쪽에는 黃池 밑에 安涉이 기록되어 있는데, 安東과 三陟(涉은 陟의 오기임)의 경계 지대임을 의미한다. 왼쪽 위쪽에는 푸른색 큰 원과 恭儉地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찰방역이 아니라 삼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상주의 恭儉池(地는 池의 오기임)이다. 오른쪽 위의 지도 이름 부근에는 경상도가 조령과 죽령 남쪽에 있어 嶺南이라 부르게 되었고,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左·右道로 삼았음이 간단하게 적혀 있기도 하다. (이기봉)

  • 전라도(100.4×6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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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전라도 지도로 군현이 사각형 안에 황색과 홍색의 중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발문에 전라도를 純紅으로 표시하라는 것과 약간 다르게 되어 있는데, 다른 도가 발문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을 통해 볼 때 물감의 문제 때문에 색이 약간 다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전라도를 홍색으로 표시한 것은 수도인 한양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5방색의 南朱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본 지도가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임을 알려주는 지표로 알려져 있는 것이 가운데 오른쪽 左水(營) 남쪽의 섬 白也串과 제주도 남쪽에 표시된 호수이다. 白也串에서 ‘串’은 현대의 반도와 같은 지형을 의미하고 白也島는 아주 작은 섬이었으며, 제주도 남쪽에는 본 지도처럼 호수로 표시될 수 있는 지형이 없다. 이후의 수정본 계통과 김정호의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에서는 반도의 백야곶과 작은 백야도가 동시에 나오며, 제주도의 호수는 완전히 사라진다. 제주 남쪽에 호수가 표현되게 된 과정은 본 사이트의 《해동지도》·《여지도》·《광여도》·《지승》 등의 회화식 지도책에 나오는 제주 지도를 비교하면서 이해하면 좋다. 지도에는 주로 섬에 羅·康·長 등 한 글자로 쓰인 지명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羅州·康津·長興에 소속된 땅이라는 의미다. 현재의 소흑산도인 지도 왼쪽 아래의 可佳(島)에 ‘本州로부터 3,300여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여기서의 본주는 이 섬이 속해 있던 나주를 의미한다. 그 위쪽에는 ‘중국의 절강성 영파부 정해현에서 바람을 만나 3일이면 큰 바다로 나오고, 또 5일이면 흑산도에 이른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里山’은 ‘黑山’의 오기이다.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 모두 푸른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구별하기 어렵다. 내륙에 표시된 것은 모두 찰방역이고, 해안가와 섬에 있는 것은 진보다. 長興 옆에는 ‘兵’자만 써 있는데, 전라도 병영을 의미한다. 오른쪽 위의 지도 제목 부근에는 ‘전라도의 여러 읍이 김제의 벽골제 남쪽에 있는 것이 가장 많아서 湖南이라 불렀다’는 호남 명칭의 유래가 적혀 있다. 그 위쪽에는 옛날에 全南(전주와 남원), 全光(전주와 광주)으로 불리웠음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아래쪽 제주도에는 원나라 때 ‘명월포는 본주(제주도)가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배를 떠나보내는 장소(俟風處)였는데, 무릇 밤낮으로 7일이면 큰 바다를 건너 (원나라에 갔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제주도가 다시 고려의 땅이 된 이후 본토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주요 포구는 본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제주 읍치 오른쪽의 朝天舘으로 바뀌었다. (이기봉)

  • 평안도(101.8×67.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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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평안도 지도다. 군현이 흑색과 백색이 반반 섞인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발문에 평안도를 白黑으로 표시하라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다. 평안도를 흑색과 백색이 반반으로 표시한 것은 수도인 한양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5방색에서 북쪽의 흑색과 서쪽의 백색 중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본 지도가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가장 북쪽의 압록강 유로이다. 이 부분은 수정본 계통과 김정호의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까지 지속적으로 변한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이후 지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지점이니 본 사이트의 다른 지도와 비교하면서 살펴보기를 바란다. 정상기의 발문에는 평안도의 동북쪽이 넓어 함경남도의 지도에 붙인다고 되어 있는데, 평안도에 속한 古閭延과 古茂昌의 영역이 본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의 위쪽에는 세종 때 개척되었다가 세조 때까지 모두 폐해진 廢四郡 중 본 지도에 그려진 虞芮廢郡과 慈城廢郡의 사방 경계 및 유례가 간략하게 적혀 있다. 가운데 위쪽의 압록강변에 있는 理山은 1776년(영조 52)에 楚山으로 개명되지만 본 지도에는 개명되기 이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英宗(즉 영조) 丙申년(1776)에 理山과 嗣聖(즉 정조)의 이름이 소리가 가까워 고호인 楚山으로 개정한다는 주기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본 지도가 원본을 거의 그대로 필사하면서 이후의 지명 변화를 주기에 반영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지도 이름 근처에는 평안도가 鐵嶺關 서쪽에 걸쳐 있어 關西라 부르며, 청천강 일대를 중심으로 남북(淸北과 淸南)으로 나눈다는 짤막한 유래가 적혀 있다. 가운데 위쪽의 압록강 맞은편에는 ‘만포에서 강을 건너면 큰 무덤이 있는데, (금나라의 초대 황제인) 完顔皇帝墓라 전해진다. 큰 비석이 있고, 무덤 아래의 큰 연못에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금나라의 옛날 성이다. 혹 이것이 오국성의 송나라 황제묘라 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황후와 황자의 묘도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은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밝혀졌으며,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성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비정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고려 때 서북면(조선시대의 평안도)의 서경과 여러 성이 모반하여 원나라에 귀부했는데, 원은 서경을 동녕부로 삼았다. 이후 고려에 다시 돌아왔는데, 지금의 평양이다’라는 짤막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지도 왼쪽에는 한양으로부터 의주까지의 거리, 의주-만주-산해관-연경(북경)까지 이어진 사신로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군사기지인 鎭堡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장하던 찰방역이 모두 푸른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구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따라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본 사이트의 다른 지도를 참조하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군사기지인 鎭堡는 압록강변에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동서로 산줄기가 길게 이어진 청북정백 부근과 강계에서 남하하는 도로, 그리고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기봉)

  • 함경남도(100.6×6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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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함경남도 지도다. 군현이 흑색의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발문에 함경도를 흑색으로 표시하라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다. 함경도를 흑색으로 표시한 것은 수도인 한양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5방색의 北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정상기의 발문에 평안도의 동북쪽이 너무 넓어 함경남도에 붙여 그린다는 내용이 있는데, 본 지도의 왼쪽 위에 평안도의 땅인 古茂昌과 古閭延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쪽에는 세종 때 군현을 설치했다가 이후 폐지시킨 폐사군(여연·무창·우예·자성)이 모두 평안도에 속하며, 본 지도에 그려져 있는 閭延廢府와 茂昌廢郡의 사방 경계와 유래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 아래쪽에는 또 長津府가 ‘當佇 22년 丁未’에 설치되게 된 유래가 적혀 있다. 그러나 장진부는 1785년(정조 9)에 堡에서 鎭으로 승격되었고, 1787년(정조 9)에 다시 府로 승격되기 때문에 ‘당저 22년 정미’는 ‘당저 11년 정미’의 오기로 보인다. 본 지도 위에 표시된 長津은 府로 승격되기 이전에 長津柵이 있던 곳으로 장진부로 승격되면서 그 위쪽의 別害鎭으로 옮기는데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본 지도는 장진이 부로 승격되어 새로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장진책에서 별해진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 위의 지도 명칭 주변에는 함경도와 함경남도의 유래에 대해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함경도 전체가 鐵嶺關 북쪽에 걸쳐 있어 모두 關北이라 부르게 되었고, 함경도 중 磨天嶺 이남을 南關으로 했다고 되어 있다. 마천령은 가운데 오른쪽의 端川 동쪽에 摩天嶺으로 표시되어 있고, 北靑에 南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함경도의 남병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 가운데 아래쪽에는 고려시대 이후 함경도의 역사적 변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려 때 東界는 東北面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咸州大都督府에 오랫 동안 동여진이 웅거하였다. 후에 또 元의 영역에 들어가 哈蘭府로 칭해졌으며, 후에 고려에 귀속되었는데 지금의 함흥이다.’ 기타 위쪽에는 백두산과 天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조선시대의 지도와 지리지에 일반적으로 기록된 大池라고 표기되어 있다.

  • 함경북도(100.2×65.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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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함경북도 지도로서 정상기의 발문과 백리척, 필사자 이재 정윤형이 정상기의 아들 정항령의 지도를 필사하게 된 배경이 수록되어 있다. 정상기의 발문에는 일부 빼먹은 글자를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채워넣었으며,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해석문 전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지도 중에서 세상에 유행하는 것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인데, 필사본(模本)이나 목판본(印本)을 막론하고 모두 종이의 크기(闊狹)와 모양(方圓)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산천과 거리가 모두 서로 틀리게 되어 있다. 10여리의 가까운 곳이 간혹 수백리보다 멀게 그려져 있고, 수백리의 먼 곳이 간혹 10여리보다 가깝게 그려져 있다. 동서남북의 방향에 이르면 간혹 그 위치가 바뀌어 있어 그 길을 살펴 사방을 돌아다니고자 해도 근거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어두운 밤길을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이것을 괴롭게 여겨 드디어 이 지도를 만들었다. 무릇 산천의 험함과 평탄함, 거리의 멀고 가까움은 尺을 단위로 삼아 100리를 1척으로 하고 10리를 1촌으로 하였다. 한양(京師)으로부터 그것을 헤아려 사방에 이르면 충분히 전체의 지도가 하나로 통하는 것이 된다. 팔도의 형태, 길이와 모양을 확연히 알도록 하여 병풍처럼 편리하게 첩자(형태)로 만들 수 있도록 하였으니, 다른 지도들이 종이의 크기와 모양에 국한되어 서로 붙이고자 하여도 네 모퉁이의 경계가 결국 맞지 않는 것과 다르다. 다만 각 도를 나누되 팔도가 각각 하나를 이루게 해야 마땅하지만 함경도와 같은 경우는 드넓어서 한폭에 모두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남북 2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경기도(圻內)와 충청도(湖西) 같은 곳은 (땅의) 폭이 넓지 않아 함께 그릴 수 있기 때문에 두 도를 합해 그려 8첩의 수를 갖추게 하였다. 또 평안도(關西)의 동북 모퉁이는 매우 넓어서 해당 지도에 모두 그릴 수 없으니 이에 古茂昌 廢厚州 등의 땅은 함경남도의 왼쪽에 떼어 붙였다. 또 제주도, 울릉도, 흑산도, 홍의도, 가가도와 같이 멀리 떨어진 바다의 섬은 그 거리를 알수 없어 단지 소재한 방향을 분명히 하여 해당 지도의 끝 부분에 붙여 그려넣었다. 또 각 도가 나누어지는 곳에 산줄기와 물줄기가 있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두 번 그렸으니 이것 역시 진실로 그러한 형세이다. 간혹 합하여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름지기 하나는 그리고 하나는 없앨 줄 알아야 전체적인 형태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 尺을 사용하는 방법은 만약 평평한 곳은 1척으로써 100리를 헤아리가, 그 산골짜기와 물구비가 우회하거나 평평하지 않은 곳은 간혹 1척으로써 120-130리를 헤아려 정하는 것은 이치의 형세 상 그렇게 된다. 만약 채색을 하고자 한다면 경기는 純黃으로, 충청도는 紅白으로, 전라도는 純紅으로, 경상도는 靑紅으로, 황해도는 純白으로, 강원도는 純靑으로, 평안도는 白黑으로, 함경도는 純黑으로 한다. 산은 綠色으로, 하천은 靑色으로 한다. 홍선으로 수로와 육로의 대로를 긋고, 황선으로 (도별) 사방 경계선을 구별한다. 붉은 점으로 烽燧를 표시하고, 성가취 모양에 흰색을 남겨두어 산성을 표시한다. 감영이나 군현에 성이 있으면 바깥쪽에 백선을 칠하고, 역과 진보는 둘레를 치되 靑과 黃을 넣어 살짝 구별한다.(발문의 城은 成의 오기인듯) 이것이 모두 지도를 그리는 범례이니 이 지도를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본 지도는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의 위치 정보를 기본으로 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두만강 바깥쪽의 지명 거의 모두가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해동지도》·《지승》·《여지도》·《광여도》와 같은 그림지도 계통에 그대로 나오고 있어 본 지도의 제작에 중요 자료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 해설을 읽는 이용자들은 본 지도에 표기된 두만강 바깥의 지명을 앞의 그림지도 계통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아래쪽 明川의 오른쪽에 동해쪽으로 불쑥 튀어나간 부분은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의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실제 모습과 완전히 다르게 그려진 부분이다. 명천 동쪽의 馬乳山이 실제로는 동남쪽 멀리에 있는데, 이를 정동쪽에 표시하면서 이러한 오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오류는 이후의 수정본 계통을 거쳐 김정호의 청년시절 작품인 《청구도》에까지 지속되며,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시정되니 이용자들은 비교하면서 살펴보기 바란다. (이기봉)

  • 황해도(100.0×65.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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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기의 《동국지도》원본 계통의 황해도 지도다. 군현이 백색의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발문에 황해도를 백색으로 표시하라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다. 황해도를 백색으로 표시한 것은 수도인 한양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5방색의 右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읍성이 있는 군현은 성곽의 모양을 사각형 바깥쪽에 그려넣어 구별해 주었다. 瓮津에는 ‘瓮津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719년(숙종 45)에 왼쪽의 所江鎭을 승격시켜 水營을 설치하면서 옹진도호부사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겸했기 때문이다. 黃州의 성곽 오른쪽에 있는 ‘兵’은 이곳에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기지인 진보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이 모두 푸른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어 구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해주의 靑丹, 평산의 麒麟과 金郊는 찰방역이다. 재령의 栗串은 단순한 나루에 불과한데 진보인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진보이다. 황해도에 설치된 진보는 크게 2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서쪽의 해안가에 허사진·조니진·백령진·등산진과 소강의 수영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를 맡게 하였다. 북쪽으로부터 내륙을 통해 남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황주와 봉산-서흥 사이의 높은 산줄기에 산산진·동리진·선적진을 구축하였으며, 기타 적이 통과할 수 있는 요충지에 문산진·문성진·백치진 등을 설치하여 방어하였다. 가장 왼쪽의 백령도는 실제로는 장산곶의 남쪽에 있는데, 마치 서쪽의 바다 가운데 있는 것처럼 잘못 그려져 있다. 어떤 자료에 입각하여 이런 오류가 발생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동일한 오류가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위의 지도 이름 부근에는 황해도가 경기도 바다의 서쪽에 위치하여 해서로 불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