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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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朝鮮地圖 조선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4709-38
  • 간행연도 : [宣祖25年(1592) 以前]
  • 책권수 : 1帖(5折), 圖
  • 판본사항 : 木版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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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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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지도(朝鮮地圖)〈古 4709-38〉 1책 앞표지입니다.

  • 강원도 (江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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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의 왼쪽에는 嶺西에 17개의 군현이, 오른쪽에는 嶺東에 9개의 군현이 속해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영서와 영동의 기준이 되는 嶺은 대관령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도에는 목판 제작 시에는 없던 각 군현의 소속 여부가 東과 西로 추가해 놓았다. 바닷가에는 사각형의 기호 안에 高城, 三陟浦, 蔚珍, 越松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주기에 보면 鎭堡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중 삼척포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진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곳이다. 주기에도 鎭堡가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조선 후기가 아니라 조선전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동해에는 鬱陵島와 현재 독도를 표현한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于山(도)가 그려져 있다. 주기에는 우산도가 삼척의 동쪽에 있고, 울릉도는 평해의 동쪽 6日程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땅이 長이 100여리이고, 廣이 60리로서 사면이 石角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신라 지증왕 이후의 역사적 내용 등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다. 주기의 뒤쪽에는 강원도 주요 지점의 역사적 유래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관동8경이 소개되어 있다.(이기봉)

  • 경기 (京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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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군현은 큰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명칭이, 오른쪽에는 서울에서 걸리는 시간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左右道의 소속 여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목판으로 제작될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에 첨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의 왼쪽에는 右道에 15개의 군현이, 오른쪽에는 左道에 22개의 군현이 속해 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경기도에는 총 38개의 고을이 있었지만 좌우도에 속한 것은 37개에 불과하여 1개의 차이가 난다. 이는 開城이 경기도에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행정 단위인 留守府였기 때문이며, 개성에 파견된 留守는 지방관에 속하는 외직이 아니라 내직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광주가 1623년(인조 1)에, 강화가 1627년(인조 5)에, 수원이 1793년(정조 17)에 유수부로 승격된다. 다만 광주는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부윤으로의 강등과 유수로의 승격이 이루어지며, 최종적으로 1795년(정조 19)에 유수부로 확정된다. 강화의 왼쪽에는 留守를 의미하는 留가 적혀 있으나 광주에는 府尹을 의미하는 尹이, 수원에는 都護府使를 의미하는 府가 기록되어 있다. 좌우도에 소속된 군현의 수 37개는 조선전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지도 위의 것은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밖에 작은 직사각형으로 표현된 정보는 察訪驛과 鎭堡를 의미하며, 기호로는 구분하기 어렵지만 육지의 것은 찰방역, 바다의 것은 진보로 이해하면 된다. 그밖에 山城이 표시되어 있는 정도이다. 지도의 아래쪽 주기에는 찰방역, 진보, 산성, 군영체제, 수영 등 군사 정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도성과 호구수, 전답 등 행정적인 정보가 일부 추가되어 있다. 지도 위에는 京과 개성, 강화, 수원, 광주, 교동 등에 주황색이 칠해져 있다. 이는 수도인 서울과 유수부로 승격된 4개의 고을, 경기 수영이 설치되어 있던 교동을 구분해 주기 위한 것이다. 지도에는 수원과 광주가 유수부로 표기되어 있지 않음을 통해 볼 때 지도의 이용자가 이용 당시의 상황을 중요하게 여겨 특별히 주황색을 칠해 넣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군현 명칭 부근의 左右道 소속 여부에서 개성, 광주, 수원, 강화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지도의 이용자가 이용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이기봉)

  • 경상도 (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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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본 지도에는 1600년대에 신설되거나 복설되는 漆谷, 慈仁, 順興, 英陽 중에서 가장 늦은 1683년(숙종 9)에 신설되는 영양만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에 山陰과 安陰에서 개칭되는 山淸과 安義가 기록되어 있어 최소한 1767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도의 왼쪽에는 右道에 31개, 오른쪽에는 左道에 40개의 군현이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합하면 71개가 된다. 그런데 경상도의 군현 수가 71개에 이르는 것은 앞서 언급한 4개의 군현이 모두 신설되거나 복설된 이후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는 1767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이전에 신설된 英陽을 표시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도의 군현 명칭 부근에 후에 추가된 左右道의 소속 여부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지도의 아래쪽 주기에는 察訪驛, 鎭과 堡 및 管, 山城, 民戶와 田結, 統營, 水營, 兵營, 監營 등 정치, 군사적인 정보가 가장 중요하게 들어가 있다. 다만 統營이 2개나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兵營을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경상도의 역사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고, 機張의 서울에서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機張이 機長으로 오기되어 있어 정밀하지 못한 측면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이기봉)

  • 전라도 (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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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의 가운데쯤 光州 위에는 1600년(선조 33)에 長城에 합해지면서 사라지는 珍原이 표시되어 있어 군현의 변화에 대한 검토가 미흡한 채 지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에는 珍原 위에 검은색의 굵은 원을 하나 그려놓았는데, 지도의 이용자가 상황의 변화를 인식하고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군현의 左右道 소속 여부에 대한 표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의 왼쪽에는 右道에 32개의 고을이, 오른쪽에는 左道에 21개의 고을이 속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목판으로 제작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현의 명칭 부근에 기록되어 있는 左右라는 글자는 목판본 제작 이후에 지도의 이용자가 필사로 첨가해 넣은 것이다. 전라도에는 조선전기에는 총 57개의 군현이 있다가 진원이 혁파되면서 56개로 줄어들었는데, 좌우도에 속한 것을 합하면 53개에 불과하다. 이것은 제주도의 3개 군현은 전라도에 속하기는 하지만 감영이 아니라 제주 목사에 의해 따로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개의 군현이 모자라는데, 이는 지도 위에 표시된 珍原이 혁파된 상태에서 좌우도에 속한 군현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본 지도 위에도 제주도의 3개 군현에는 左右의 기록이 없다.(이기봉)

  • 중국도 (中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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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반적인 내용과 형식은 소형 목판본 지도책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중국도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남쪽을 완전히 바다로 처리했고, 동쪽의 朝鮮國을 모양은 다르지만 완전하게 표시하는 등의 모습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 형식이다. 소형 목판본 지도책의 중국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은 제작 당시인 청나라 때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이다. 특히 본 지도가 명나라 때의 강역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것은 수도인 北京과 북경으로 옮기기 이전의 南京이 가장 큰 원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외에 첫째, 중간 규모의 원으로 표시되고 州자의 지명이 수록된 것이 寓公의 九州이다. 둘째, 가장 작은 원에 한 글자만 쓰여 있는 것은 전국시대의 11국이다. 셋째, 큰 원에 省자가 들어가 있는 지명은 명나라 시대의 13성을 의미하며, 명나라의 수도였던 北京으로부터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밖의 지명들도 청나라 이전의 것으로 본 지도가 지도 제작 당대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 학습을 위해 필요한 지도였음을 알려준다. 黃河가 崑崙山에서 발원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楊州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현재의 황하 하도는 山東省 위쪽에 표시된 古河道로서 황하의 유로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쪽의 하천은 현재 중국에서 長江이라 부르는 양쯔강 또는 양자강이다.(이기봉)

  • 천하총도 (天下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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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유행한 원형천하도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세계지도의 하나이다. 원형 천하도에 대한 현재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형천하도는 17세기 이후 서구식 세계지도나 지리서를 통해 새로운 지리지식이 전래됨에 따라 이를 담아낼 수 없는 기존의 세계지도를 대체하고자 조선에서 새롭게 제작하였다. 원형천하도의 기본적인 구도인 내대륙-내해-외대륙-외해의 구조는 『산해경』을 기초 자료로 삼아 만들었다. 그리고 앞의 책에서 상당수의 지명을 따다 각각의 위치에 배치하였으며, 이외에 중국의 여러 史書에 보이는 실제 지명을 내대륙에 배치하고 신선 사상과 관련된 지명도 상당수 기입하였다. 가장 바깥쪽에 원형천하도의 명칭이 유래하게 된 원형의 모습은 둥근 지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 세계관인 天圓地方 사상에서의 하늘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지도에서도 원형천하도의 일반적인 구도와 내용이 적용되고 있다. 내대륙에는 중화적 세계관에 따라 中國이 가운데에 배치되었고, 동쪽에 조선이 그려져 있으며, 서쪽 아래쪽에는 西域諸國이 보이는 등 대부분 실재하는 나라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내해에는 오른쪽의 일본국과 琉球國 정도만 실재하는 국가이고 대부분 가상의 지명들이며, 외대륙과 그 밖의 지명들 역시 대부분 가상의 지명들이다. 외해의 바깥쪽에 여러 문구가 적혀 있는데 첫째, 오른쪽 위에는 天地 사이의 거리가, 오른쪽 아래에는 별들의 크기가 적혀 있다. 둘째, 왼쪽 위에는 동서남북 四極의 거리가, 아래쪽에는 동서남북 사방의 거리가 적혀 있다. 아울러 나라들이 그 가운데 있다는 등의 내용도 보이고 있다. 외해의 바깥쪽에는 周易의 八卦에 해당되는 팔각형의 모습도 눈에 띈다.(이기봉)

  • 충청 (忠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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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에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표현 방식은 본 지도책의 경기도 지도와 동일하다. 지도 위에는 병영, 수영, 감영(공주)에 주황색이 특별히 칠해져 있다. 원래의 목판 지도에서는 이들 정보가 일반 군현과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지도의 이용자가 이들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칠한 것으로 판단된다. 충청도의 지명 중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뀌기 때문에 목판으로 제작될 때의 지도는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의 주기에는 앞쪽에 찰방역, 鎭과 堡, 산성, 호수, 전답의 양, 속오군, 수영 등에 과한 정치와 군사적인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뒤쪽에는 첫째, 백제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둘째, 성삼문, 이색이라는 대표적인 인물이 간단하게 수록되어 있다. 셋째, 영춘, 단양, 청풍, 제천 등의 산수에 관한 설명과 福地로서 인식되는 측면이 기록되어 있다. 넷째, 온양의 온천에 관한 정보, 청주의 간단한 내력이 적혀 있다. 다섯째, 사대부가 많이 사는 유명한 마을이 간단하게 적혀 있다. 여섯째, 충청도의 사방 경계에 접해 있는 고을, 永春과 庇仁의 서울까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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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 위쪽의 理山은 1776년(영조 52)에 楚山으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에 그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사각형으로 표현된 것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察訪驛(道로 기록되어 있음)과 군사기지인 鎭堡이다. 그러나 진보는 평안도가 북쪽으로 최전방에 해당되는 道이기 때문에 지도에 표현된 것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만 표시하였다. 아래쪽의 주기에는 鎭堡가 鎭과 堡 및 管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 종3품의 僉使와 정4품의 萬戶 및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곳을 의미한다. 지도 위에는 權管이 파견된 진보는 표시하지 않았고, 종3품의 첨사가 파견된 鎭과 정4품의 萬戶가 파견된 것 중에서 일부는 표시하지 않았다. 지도의 아래쪽 주기 마지막 부분에는 의주에 있는 義順館으로부터 北京의 다른 명치인 燕京까지 1,979리로, 의주로부터 한양(京)까지의 거리는 1,280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곳을 지나는 양국 사이의 사신로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로는 의주의 의순관이 국경을 넘나드는 관문이었음을 알려준다.(이기봉)

  • 함경도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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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도의 왼쪽에는 남도에 13개의 군현이, 오른쪽에는 북도에 9개의 군현이 속해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둘을 합하면 22개의 군현이 되는데, 조선후기에는 1684년(숙종 10)에 茂山이, 1787년(정조 11)에 長津이 신설되면서 24개의 군현이 된다. 따라서 목판본으로 제작될 당시의 본 지도는 무산과 장진이 신설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의 茂山에는 원래 鎭堡를 의미하는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는데, 후대에 원형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후대에 지도의 이용자가 茂山이 신설되었음을 인식하고 필사로 첨가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도 위의 무산은 鎭일 때의 위치이고 군현으로 승격되었을 때는 회령의 서쪽으로 옮겼다. 따라서 본 지도의 이용자는 무산의 신설 사실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군현의 명칭 왼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오른쪽에는 서울로부터 걸리는 시간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두만강변에 있는 군현의 경우 시간 거리를 기록할 때 현재 잘 사용되지 않는 ‘卄’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二十’을 의미한다. 군현의 명칭 주변에 기록된 南과 北은 목판본으로 제작할 때는 없던 것으로 후대에 南北道의 소속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필사로 첨가한 것이다.(이기봉)

  • 황해도 (黃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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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의 유로와 해안선 등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京畿道의 지도와 거의 동일한 소형 목판본 지도이다. 지도에 수록된 산은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앞의 지도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동국여지승람』에는 없는 정보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소형 목판본 지도로 변화할 때 어떤 정보가 추가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金川郡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오른쪽 아래에 金川이 金泉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瓮津은 1719년(숙종 45)에 소강첨사진이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바뀐다. 본 지도에는 縣監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所江에 水營 또는 行營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반해 주기에는 水營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 지도의 제작자는 지도 부분은 수영이 설치되기 이전의 것을 그대로 필사하면서 주기는 설치된 이후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록했다고 판단된다. 지도에는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정보가 나타나고 있는데, 육지의 것은 察訪驛인 반면에 바다의 것은 군사기지인 鎭堡를 의미한다. 鎭堡는 바다뿐 아니라 육지에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지도에는 표기하지 않았다. 주기에는 바다와 육지에 있는 진보를 모두 기록해 넣어 지도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타 본 지도책의 다른 道地圖 중 상당수의 지도에서 左右道의 소속 여부를 필사로 첨가해 넣은 반면에 본 지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기봉)

  •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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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지도(朝鮮地圖)〈古 4709-38〉 1책 뒷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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