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도(輿地圖)〈古 4709-37〉 1책 앞표지입니다.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어, 산지는 하나의 연속된 산맥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정상기 지도 이전에 유행했던 《東覽圖》 유형의 독립된 산지와는 차별된다. 본 지도의 해안선 모습을 살펴보면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 가운데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수정본 계열 지도인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용면에 있어서는 원도 계열인 규장각 소장 《八道地圖(古4709-14)》에 비해 풍부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산맥과 하천으로 대표되는 자연적인 요소의 표현이 정상기의 원도 계열 사본들보다 훨씬 정교해졌으며, 산맥과 하천 중에서 10里가 넘는 것은 명칭이 없어도 모두 지도상에 그려 넣었다. 또한 인문적인 정보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본 지도에서도 《八道地圖(古4709-14)》에는 표현되지 않았던 烽燧, 面名, 驛站 등이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사본에 속하는 규장각 소장의 본 지도책은 原圖의 기본적인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이는 사본들이 정상기의 地圖를 그대로 전사한 것이 아니라 修正, 校補하여 필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원도 지도의 경우 같은 계열의 《八道地圖(古4709-14)》에는 그려지지 않은 ‘于山島’가 본 지도에는 鬱陵島의 서남쪽에 그려져 있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으나, 정상기의 原圖의 경우 경기도와 충청도를 한 장에 그리고 있으므로 본 지도와는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原圖와 마찬가지로 본 지도의 산지 표현 방식도 《東覽圖》와 달리 연속된 산봉우리를 그리고 채색을 해 산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군현의 표현은 취락의 계층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적색의 원으로 표시하였다. 대신 적색의 원 안에 군현의 品階를 나타내는 ‘牧·府·守令…’등의 한자가 표기되어 있으며, 郡縣名은 그 주변에 표기하고 있다.鎭堡와 驛站은 군현을 나타내는 원보다 작은 적색 원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각 군현 및 鎭堡·驛站을 잇는 도로가 적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바닷길(海路)로 표시되어 있어 도로망이 상세하다.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에 나타는 도로는 그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지도제작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정상기는 그의 지도 跋文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전도를 바탕으로 도별도를 제작하였으며, 이때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방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거리 수치에 입각하여 군현의 위치를 잡아 나갔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 시기 실측된 군현간의 거리가 직선 거리가 아니고 도로를 따라 축정된 거리이기 때문으로 반드시 도로망을 통해서만이 구체적인 지역간 거리를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 지도의 여백에는 이 지도책에 포함된 다른 도별도와 달리 각 군현간의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道路考가 수록되어 있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경상도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 양식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어, 한반도의 윤곽을 비롯한 전체적인 표현 형태가 비슷하다. 즉,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에 속하는 규장각 소장 《八道地圖(古4709-23)》, 《八道地圖(古4709-14)》, 《輿地圖(古4709-78)》, 《海東地圖(古4709-61)》의 경우 제작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윤곽 및 해안선 대부분이 거의 비슷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와 같이 정상기의 원도 계열의 지도와는 남해 부분 해안선 부분에 큰 차이가 보인다. 우선 거제도의 모습이 다른 사본들과 비교하여 加背粱鎭 아래쪽으로 길게 그려져 있고, 固城 부근 역시 해안선에 차이가 보인다.『新增東國輿地勝覽』에 固城의 진산인 無量山은 서쪽 10里에 위치하며, 佐耳山은 서남쪽 30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 지도에서는 무량산과 좌이산이 거의 평행선에 표시되어 있다. 그 결과 이 부분의 해아선이 다른 지도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南海 모양도 위에 제시한 다른 사본의 경우 彌助項이 昌善島 아래 부분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으나 본 지도는 昌善島 좌측 아랫부분에 彌助項이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와 《八道分圖(古915.1-P173)》의 경우 대부분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島嶼에 대한 인식은 《八道分圖(古915.1-P173)》에 비해 본 지도가 훨씬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八道分圖(古915.1-P173)》의 경우 남해의 14개의 섬이 그려져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는 거의 2배가 가까운 26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이 시기에 도서 지방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정교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轉寫되는 과정에 정보의 수정과 추가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八道分圖(古915.1-P173)》에는 그려져 있지 않는 對馬島가 본 지도에는 그려져 있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우측은 〈日本國圖〉이고, 좌측은 〈琉球國圖〉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지도책에 中國 지도와 함께 수록되어 있는 外國圖와 유사하다. 〈日本國圖〉는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으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실려 있는 일본 지도와는 차이가 있다. 남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고 혼슈의 7도와 규쥬의 서해도와 시코쿠의 四州를 그리고 그 외 對馬島, 一歧島 등의 여러 섬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규슈와 시코쿠 등의 섬이 다름 섬들에 비해 크기가 작게 그려져 있으며, 하계망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시기에 제작된 지도책에 수록되어 있는 〈日本國圖〉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산천이 본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행정구역만 표시되어 있으며, 각 도의 지명 옆에 소속 郡의 숫자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좌측의 〈琉球國圖〉에 유구국의 모습은 조선 후기 유구지도의 한 전혀을 이루었다. 지금은 일본의 한 지방 오키나와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유구국 즉 류쿠는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일본에 병합되어, 청일전쟁 이후 일본 영토로 확정되었다. 본 지도상에 류큐(琉球) 왕조는 독립된 왕국으로서 중국과 조공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 한국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활발한 교류를 보였던 국가였다. 조선과 유구국의 외교 관계는 1389년 고려 창왕 1년 박위가 병선 100척을 왜선 300여척을 불태우고 대마도를 정벌하던 해 8월 남쪽 섬나라인 유구국 중산왕 察道가 사신 玉之를 통해 방물을 보내오면서 시작된다. 이에 고려는 사신을 후히 접대하고 같은 해 전객령 김윤후를 유구국에 보내 보빙하였다. 이후 500여 차례 사신을 보내 온 주요 교류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유구와의 교류도 표류에 의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제주인들은 일찍부터 항해하는 일이 많았는데 태풍을 만나 중국, 일본, 유구, 안남지방에까지 표류했었다.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 민간에서 성행했던 많은 목판본 지도책은 물론이고 본 지도책에도 외국 지도로 일본과 유구 지도가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는 조선 후기에 유구와 교류가 거의 중단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유구는 가까운 나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日本國圖〉와 마찬가지로 〈琉球國圖〉 역시 이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실려져 있다. 그러나 후대에 민간에서 유행한 유구국 지도는 지도를 모사하는 과정에서 지도의 윤곽, 지명 등에 오자가 많아지고 모식화되었음을 보여준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다.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의 지도들을 보면, 原圖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지도들이 있는 반면에 原圖의 전체적인 한반도 윤곽과 표현 형태는 대부분 그대로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原圖의 오류를 수정하고 지명과 같이 후대에 변화된 내용을 수정한 계열의 지도들이 原圖 계열과는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여 傳寫되었다. 본 지도의 경우 역시 후자로 정상기의 原圖와는 다소 차이가 보인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전라도 부분이다. 본 지도의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해안 부분 대부분이 18세기 중엽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 19세기 초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 《海東地圖(古4709-61)》의 해안선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정상기의 原圖 계열을 따르는 사본의 제주도 지역을 보면 18세기에 제작된 초기 사본지도들 대부분은 旌義縣 서쪽 지역이 彎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후대 사본인 경우에는 彎이 아닌 호수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서쪽이 호수로 표현되었던 원도 계열 사본의 잘못까지도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표시된 ‘白也串’을 섬으로 그린 것은 《東國地圖》 原圖에서 범한 실수에 의한 것으로 초기 수정본 계열인 《八道分圖(古915.1-P173)》와 19세기 초에 제작된 《海東地圖(古4709-61)》 역시 이 부분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그렸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原圖 계열과 초기 수정본 계열에서 섬으로 잘못 표시한 白也串을 수정하여 섬으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또한 지도상에 그려진 섬의 개수만으로도 초기 수정본 계열인 《八道分圖(古915.1-P173)》에 비해 섬에 관한 정보가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잘못 그려졌던 白也串과 더불어 이 시기에 도서 지방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정교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지도의 경우 《海東地圖(古4709-61)》에는 그려져 있는 제주도 주변의 ‘牛島, 飛揚島, 楸子島가 생략되어 있다. (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어, 해안선을 비롯하여 전체적 윤곽 및 표현형태가 유사하다. 산지의 경우 주요 독립된 산으로 그린 《東覽圖》와 달리 연속된 산봉우리를 그리고 채색을 해 산맥의 형식으로 이어 그렸으며, 적색선으로 도로와 바닷길(海路)을 표시하고 있다. 이는 도로 이용이 증가하고, 도로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이 요구되던 시대적 변화상을 지도상에 반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 지도와 거의 유사한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와 비교해 보았을 때 안면도 부근의 섬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도서 지방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도는 계속적으로 筆寫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함으로서 수정·보완된다. 그리고 본 지도에는 《八道分圖(古915.1-P173)》에는 없는 ‘百里尺’이 지도 하단 여백에 그려져 있다. 백리척은 정상기의 《東國地圖》에서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도별 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된 오늘날 축척의 개념과 유사하다. 정상기의 백리척은 이를 표시하여 실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 당시까지의 조선전도 중 가장 큰 축척인 약 1:420,000의 대축척지도로 커짐에 따라 도로·봉수·지명 등을 상세하게 나타낸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의 윤곽 특히 북부 지방의 윤곽이 정확해진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의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으며, 《東國地圖》 유형 가운데에서도 原圖와 다소 차이가 있는 수정본 계열의 지도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본 지도와 정상기의 原圖 계열인 규장각 소장 《八道地圖(古4709-14)》와 비교해 보면, 우선 북쪽 지역의 국경선 부분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八道地圖(古4709-14)》의 경우 중강진에서 만포로 이어지는 압록강의 유로 부분이 다소 완만하게 나타나 있는 반면에,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우리나라 쪽으로 깊게 만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에서도 본 지도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같은 계열로 생각되는 《八道分圖(古915.1-P173)》와 본 지도를 비교해 보면, 《八道分圖(古915.1-P173)》의 경우 압록강 이북의 지명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압록강 이북의 지류 뿐만 아니라 지명까지도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義州 부근의 해안선 모습이다. 《八道分圖(古915.1-P173)》의 경우 이 부분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으며, 섬에 관한 정보 역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이 부분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으며, 다섯 개의 섬이 그려져 있으며 그 중 4개의 섬에는 도서명까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서한만 부분도 함경도 지도에서와 유사하게 섬에 대한 정보가 《八道分圖(古915.1-P173)》에 비해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지도를 傳寫함에 있어서 模本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부정확하거나 틀린 부분에 있어서는 수정을 하고, 필요한 정보 부분에 있어서는 계속적인 내용 추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島嶼에 관한 수의 증가는 이 시기에 도서 지방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정교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함경남북도와 량강도 일대의 지도이다. 지도의 전반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산지 표현은 하나의 연속된 산봉우리로 그리고 채색을 해 산맥의 형식으로 그리고 있으며, 각 군현을 잇는 도로는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정상기의 《東國地圖》 原圖와는 형식면에서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 즉, 原圖의 경우 도별도의 크기를 고려하여 함경도를 北道와 南道 두 장으로 나눠 그린 반면에, 본 지도는 한 장에 함경도를 그리고 있다. 이는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와 같이 原圖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정한 수정본 계열에서 나타나며 본 지도책의 경우 《八道分圖(古915.1-P173)》의 두만강 유역의 한반도 윤곽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德源 앞바다에 《八道分圖(古915.1-P173)》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섬들이 추가된 것처럼 부분적으로 내용이 추가되었다. 초기 수정본 계열을 轉寫한 것으로 생각되는 본 지도에는 原圖 系列의 寫本에 비해 풍부한 지리적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山川, 峴, 峙, 嶺 등과 같은 자연적 사상은 물론이고 山城, 寺, 郡縣內의 坊里, 일부 面名, 津, 亭子 등과 같은 정상기의 原圖 系列의 寫本에서는 거의 표현되지 않고 있는 방대한 인문적 요소까지 지도상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본 지도와 같이 原圖의 초기 수정본 계열 지도들을 살펴보면, 轉寫되는 과정에 정보의 수정과 추가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본 지도에 비해 먼저 제작된(1758년~1767년 사이) 것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와 비교해 보았을 때, 섬들을 포함하고 있는 해안 지역의 윤곽이 매우 자세해졌고 본지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두만강 이북 지역의 지명 역시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白頭山 부분에도‘大池’라 표기하고 여백에 그 둘레(‘周八十里’)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이미 한반도의 윤곽이 거의 확정되었으며 도서지방에 대한 인식도 매우 정교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양윤정)
본 사이트의 지도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의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을 따르고 있다. 산지는 하나의 연속된 산봉우리로 그리고 채색을 해 산맥의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는 정상기의 《東國地圖》 유형과 형식적인 면에서 한 가지 큰 차이점을 보인다. 정상기의 《東國地圖》 原圖에서는 지도의 크기를 고려하여 八道 가운데 상대적으로 면적이 작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한 장에 그리고 대신 상대적으로 면적이 큰 함경도를 북도와 남도로 나눠 그렸다. 그러나 본 지도에서는 충청도를 경기도와 구분하여 각각 한 장의 지도에 그리고 있다. 이는 정상기의 《東國地圖》 수정본 계열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규장각 소장 《八道分圖(古915.1-P173)》 역시 본 지도책과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군현은 군현의 크기와 상관없이 적색의 원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대신 원 안에 군현의 品階를 나타내는 ‘牧·府·守令…’등의 한자가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鎭堡와 驛站은 군현을 나타내는 원보다 작은 적색 원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각 군현 및 鎭堡·驛站을 잇는 도로가 적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바닷길(海路)로 표시되어 있어 도로망이 상세하다. 그리고 지도의 우측 여백에는 주요 군현간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어 지역간의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도의 하단 여백에는 정상기의 《東國地圖》에서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도별 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된 百里尺이 그려져 있다.(양윤정)
여지도(輿地圖)〈古 4709-37〉 1책 뒷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