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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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靑邱要覽 청구요람

  • 편저자 : [金正浩(朝鮮) 作]
  • 청구기호 : 古4709-21A-v.1-2
  • 간행연도 : [19世紀 後半-20世紀 初(高宗 年間:1863-1907)]
  • 책권수 : 2冊,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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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가 만든 《청구도》의 이본은 현재 10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3개의 유형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본 《청구요람》(고4709-21A)은 건·곤 2권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총 29층, 동서로는 22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건권에는 홀수층이, 곤권에는 짝수층이 수록되어 있다. 각 층판의 면은 남북 100리와 동서 70리의 동일한 크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책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31.5cm×21.5cm이다. 이 중 제26층과 제27층에는 아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건권의 맨 앞쪽에는 갑오년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1803-1879)가 쓴 《청구도》의 서문인 ‘청구도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청구도제’의 중간에 몇 문장이 다르게 쓰여 있는데, 조협승이 최한기가 소장하고 있는 《청구도》를 보고 감탄하여 종유자인 한승이와 한병화에게 모사하여 완성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청구도제’의 문장 끝에는 “을미팔월조협승서”로 기록되어 있어 1895년(고종 32)에 조협승이 최한기가 쓴 서문을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꾸민 것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청구도제’의 끝에는 대부분 최한기가 쓴 것이 명기되어 있다.
《청구요람》에는 김정호의 ‘청구도범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본 지도책의 것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최한기가 소장하고 있던 김정호 《청구도》 최종본의 원본에 가깝다고 판단된다. 몇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줄기로 표현하지 않고 단지 산의 봉우리만 그려 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도 동일하게 되어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산줄기로 표현한 것이 있다. 둘째, 동방제국도·삼한도·한사군도·삼국도는 여러 사람의 고증이 온당치가 못해 삭제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본 지도책에는 앞의 지도들이 없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동방제국도와 사군삼한도 및 삼국도가 수록되어 있다. 셋째, 호구·전결·곡총·군정 등을 순종 무자년(1828) 비국도록을 기초로 기입해 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넷째, ‘경(京)’ 즉, 서울까지의 거리를 적어 넣는다고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모두 적혀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섯째, 서울은 특별히 중요하여 오부전도를 첫머리에 기록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책에는 있다. 《청구도》의 초기본 계통에는 오부전도가 없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지도는 ‘청구도범례’가 작성되면서 제작된 《청구도》의 최종본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본 지도책의 특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구도》의 앞쪽에는 색인도의 역할을 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뒤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신라구주군현총도〉, 고려시대의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색인도는 현재까지 전해진 지도책 중에는 《청구도》가 유일하기 때문에 김정호 스스로 창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청구도》에는 다양한 역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① 신라 이후 각 군현 명칭의 변화를 읍치 주위에 신라는 ‘라(羅)’로, 고구려는 ‘구(句)’로, 백제는 ‘제(濟)’로, 고려는 ‘려(麗)’로 구분하여 적고 있다. ② 고현의 명칭을 대부분 수록하고 있다. ③ 과거의 전투 기록 등 당시로서는 중요한 여러 역사정보를 해당 장소에 간략하게 적고 있다. 《청구도》에 수록되어 있는 지지적 내용 중의 하나는 자연지리적 정보가 간략하게 해당 장소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범례의 종류라는 측면에서 보면 《청구도》는 《조선지도》나 《해동여지도》 및 《조선도》 등에 비해 상당히 후퇴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꼭 그렇게 볼 수 없는 부분도 많다. ① 군현 읍치의 경우 세로로 길고 큰 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고유 명칭 두 자를 적어놓아 다른 군현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군현 사이의 격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사각형 아래나 오른쪽에 목(사), 부(사), (군)수, (현)감 등의 한자를 한 자씩 써넣었다. ② 진보의 경우 작은 정사각형을 통해 정보를 통일시켰지만 안쪽에 파견된 관리 명칭의 첫 글자를 넣어 등급을 구별하였다. ③ 병영, 수영, 통영, 각종 영은 세로 또는 가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명칭을 적어 넣었다. ④ 역·면·창·목장은 진보와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범례화시켜 혼동을 줄 수 있게 그려져 있지만 안쪽에 역·면·창·목이라는 글자를 써넣음으로써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감목관이 파견된 목장의 경우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목소’를 써넣어 구분하였다. ⑤ 해당 면에 읍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지역과 월경지처럼 어느 고을의 땅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 가로 또는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지’라고 표시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⑥ 봉수는 불이 타오르는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외에 도로가 홍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넷째, 청구도범례에 나타나 있는 지도식은 다른 지도책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 지도식을 《청구도》 자체를 그렸던 방법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지도식은 《청구도》를 그리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청구도범례에서도 각 고을에 지도를 나누어준 다음 교정하도록 하는 과정을 설명한 부분에 지도식이 나온다. 지도식은 사방을 12개의 방위로 나누고, 10리 간격의 원을 그려 위치를 바로잡아 나가도록 하는 방식이다. 본 지도책은 하천의 유로, 지명, 해안선, 섬 등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 계통과 상관 관계가 높다. 이 계통의 지도는 현재 규장각 이외에도 7개 정도의 지도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 지도책은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도서관의 《해동여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앞의 지도책이 군현별로 다르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책은 모두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모든 군현을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에서는 오사카부립도서관 소장의 《조선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조선도》는 범례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여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책은 군현과 진보에서 완전히 다른 기호와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 지도책이 앞의 7개 지도책과 내용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필사관계에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최한기가 작성한 ‘청구도제’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방안의 크기가 다르고 지도 위에도 그려져 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런 내용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위의 7개 지도책 중에서 《해동여지도》이다.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가 1770년 이전의, 《해동여지도》는 장진부의 설치(1787) 이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도》는 장진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반영되어 있지만 읍치의 위치나 경계선 등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본 지도책에는 후주부(1823)가 설치된 이후까지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앞의 지도책들을 그대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 변화 양상을 담아내려 노력하면서 편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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