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유형별, 지역별로 분류하여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지도

朝鮮地圖帖 조선지도첩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大4709-11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2帖,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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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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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지도첩(朝鮮地圖帖)〈古 4709-11〉 1책 앞표지입니다.

  • 강원도 (江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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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慶尙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군현은 큰 원으로 표현하였고, 군현명의 왼쪽에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오른쪽에는 서울로부터의 시간 거리가 적혀 있다. 그러나 高城에는 시간 거리가, 麟蹄에는 지방관의 등급과 시간 거리가 원의 밖에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原州에는 시간 거리가 아예 적혀 있지 않는 등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 바닷가에는 사각형의 기호 안에 高城, 三陟浦, 蔚珍, 越松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주기에 보면 鎭堡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중 삼척포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진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곳이다. 해안가에 수려한 경치가 그려져 있는 곳은 관동8경에 해당되는 곳이다. 동해에는 鬱陵島와 현재 독도를 표현한 것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于山(도)가 그려져 있다. 주기에는 우산도가 삼척의 동쪽에 있고, 울릉도는 평해의 동쪽 6日程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땅이 長이 100여리이고, 廣이 60리로서 사면이 石角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신라 지증왕 이후의 역사적 내용 등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다. 이밖에 주기에는 철원, 강릉, 삼척, 춘천 등의 고호가 기록되어 있고,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莊陵, 금강산에 관한 내용 및 그밖에 명승지에 관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체계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이기봉)

  • 경상도 (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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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慶尙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본 지도에 수록된 군현의 명칭 중 제작 시기의 상한을 추정할 수 있는 지명으로는 1767년(영조 43)에 山陰과 安陰에서 개칭된 山淸과 安義이다. 경상도의 지도는 본 지도책의 다른 도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조악한 제작 수준을 나타내주고 있다. 일단 지도의 제목인 慶尙道라는 문자가 바다와 구분되는 사각형 형태의 테두리도 없이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거제와 남해 및 의령 등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나 서울에서 걸리는 시간 거리 등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바닷쪽에 표시된 鎭堡는 조선후기의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전기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생략된 진보가 상당히 많으며, 부산 등은 사각형으로 표시하지 않아 진보인지 섬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래쪽의 주기는 조악한 제작 수준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쪽의 충청도와 황해도 등의 지도에는 察訪(驛), 鎭, 堡 등을 비록하여 주기의 항목에 검은색 사각형의 모양을 표시해주었는데 반해 본 지도에는 전혀 그런 표시가 없다. 따라서 주기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다.(이기봉)

  • 전라도 (全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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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忠淸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군현은 큰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상당히 조악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발견된다. 지도 가운데의 光州 위쪽의 원은 1600년(선조 33)에 長城에 합해지는 珍原이다. 소형 목판본 지도 계열에서는 이미 혁파된 珍原이 그대로 수록되는 경우가 있는데, 본 지도에도 진원을 수록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지우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위쪽의 礪山과 高山 위쪽에는 군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으로 표시된 것이 나타나고 있다. 각 군현의 명칭 왼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오른쪽에서 서울에서 걸리는 시간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全州, 茂朱, 龍潭 등 지방관의 등급과 시간 거리가 아예 생략되어 있는 군현이 상당수 나타나고 있다. 또한 咸平의 경우 시간 거리를 원 밖에 표시하기도 했다. 水營의 경우도 오른쪽은 左水營, 왼쪽은 右水營으로 기록해야 하지만 동일하게 水營이라고만 기록하여 놓았다. 진보의 경우도 빼먹은 곳도 있으며, 표시만 해놓고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은 등 목판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래쪽의 주기 역시 체계가 상당히 부족한데, 대표적으로 察訪驛이 3개로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지도에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것처럼 3개보다 더 많았다. 鎭의 경우도 堡처럼 검은색 사각형이 표시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구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이기봉)

  • 중국도 (中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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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형 목판본 지도책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중국도의 한 형식이다. 본 지도에 수록된 지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제작 당시인 청나라 때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행정지명을 들면 첫째, 寓公의 九州가 나오는데, 작은 원에 州가 표시된 것이 그것이다. 둘째, 작은 원에 한 글자만 쓰여 있는 것은 전국시대의 11국이다. 셋째, 큰 원에 省자가 들어가 있는 지명은 명나라 시대의 13성을 의미하며, 명나라의 수도였던 北京으로부터의 거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넷째, 작은 원 중에 당나라의 수도였던 長安과 洛陽이 표시되어 있고, 송나라의 수도였던 開封은 명칭만 적혀 있다. 본 지도가 명나라 위주의 지도였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수도였던 北京과 북경으로 옮기기 이전의 南京이 가장 큰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밖의 지명들도 청나라 이전의 것으로 본 지도가 지도 제작 당대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 학습을 위해 필요한 지도였음을 알려준다. 북쪽에는 만리장성이 성곽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黃河가 만리장성을 뚫고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현재의 황하는 山東省 북쪽 방향의 발해만으로 흘러나가지만 본 지도에는 산동성 남쪽으로 흐르게 그려져 있다. 현재의 황하가 흘러나가는 부분에는 古河道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원래 황하의 물줄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래쪽에 표시된 하천이 현재의 長江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자강 또는 양쯔강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지도에도 楊子江으로 적혀 있다. 본 지도가 명나라의 강역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바깥쪽 지역은 대략적인 방향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왼쪽 위에는 중앙아시어 서쪽 전체를 의미하는 西域國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 서역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해당 방향으로 가면 있다는 뜻이다. 오른쪽 위에는 女眞과 朝鮮國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천하총도 (天下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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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유행한 원형천하도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세계지도의 하나이다. 원형 천하도에 대한 현재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원형천하도는 17세기 이후 서구식 세계지도나 지리서를 통해 새로운 지리지식이 전래됨에 따라 이를 담아낼 수 없는 기존의 세계지도를 대체하고자 조선에서 새롭게 제작하였다. 원형천하도의 기본적인 구도인 내대륙-내해-외대륙-외해의 구조는 『산해경』을 기초 자료로 삼아 만들었다. 그리고 앞의 책에서 상당수의 지명을 따다 각각의 위치에 배치하였으며, 이외에 중국의 여러 史書에 보이는 실제 지명을 내대륙에 배치하고 신선 사상과 관련된 지명도 상당수 기입하였다. 가장 바깥쪽에 원형천하도의 명칭이 유래하게 된 원형의 모습은 둥근 지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 세계관인 天圓地方 사상에서의 하늘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지도에서도 원형천하도의 일반적인 구도와 내용이 적용되고 있다. 내대륙에는 중화적 세계관에 따라 中國이 가운데에 배치되었고, 동쪽에 조선이 그려져 있으며, 서쪽 아래쪽에는 西域諸國이 보이는 등 대부분 실재하는 나라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내해에는 오른쪽의 일본국 정도만 실재하는 국가이고 대부분 가상의 지명들이며, 외대륙과 그 밖의 지명들 역시 대부분 가상의 지명들이다. 지도의 위쪽 앞쪽에는 天地 사이의 거리와 별들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어 동서남북 四極의 거리와 여러 나라가 그 안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였다.(이기봉)

  • 충청도 (忠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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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忠淸道 지도와 거의 동일한 목판본 지도이다. 그러나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察訪驛과 鎭堡가 추가되어 있고, 수록된 산의 명칭 중 다른 것이 많으며, 군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지위(왼쪽)와 서울로부터 걸리는 시간(오른쪽)이 적혀 있는 점 등이 다르다. 아래쪽의 주기는 『동국여지승람』의 지도에는 전혀 없는 것으로 주요한 것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속리산의 운장대, 보령의 영보정, 청주의 화양동은 모두 절승지로서 산수가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사대부가 많이 산다. 이는 충청도에서 사대부가 가장 많은 곳을 지형적 측면에서 논한 것으로 당시에 가장 유명한 양반촌이 어디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察訪驛, 鎭堡, 山城 등 군사적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셋째, 居民이 수(219,768호)와 田의 양(255,208결) 등 조세와 관련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넷째, 水營에 배치된 전선의 종류와 수가 기록되어 있다. 넷째, 백제에 관한 역사가 상당히 많은 분량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성삼문과 목은 이색 등이 거쳐하던 곳이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영춘, 단양, 청풍, 제천 등이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어 산수가 절승이고 복지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일곱째, 온양에 온천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고, 청주에 관한 유래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주기의 내용은 당시에 이 지도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필요로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본 지도의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정보로는 주기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내용과 尼山이란 지명이 있다. 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때 사망한 南廷年과 李鳳祥에 관한 기록이 나오며, 尼山은 1776년(영조 52)에 尼城으로 바뀐다. 지도와 왼쪽에는 右道 33개가, 오른쪽에도 右道 21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것은 左道라고 해야 올바르다.(이기봉)

  • 평안도 (平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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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慶尙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군현은 큰 원으로 표현하였고, 군현명의 왼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오른쪽에는 서울로부터의 시간 거리가 적혀 있다. 그러나 義州와 平壤에는 두 정보 모두 생략되어 있고, 寧邊에는 두 정보가 원 밖에 표시되어 있는 등 일관성이 결여된 측면이 보인다.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에 표현된 것은 군사 기지인 鎭堡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찰방역으로 지도만으로는 두 정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지도의 아래쪽 주기에 鎭과 堡 및 管 등 파견된 무관의 지위에 따라 구분된 군사기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지도 위의 내용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군사기지인 管은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安州에는 兵營이 큰 사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다른 道의 지도에서 큰 원으로 표현하던 것과 다른 점이다. 위쪽의 압록강변에 있는 理山은 1776년(영조 52)에 楚山으로 변경되는데, 본 지도에는 변경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쪽 주기의 가장 첫머리에는 居民이 218,019호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平壤, 寧邊, 義州, 江界 등의 巨鎭에 관한 내용을 비롯한 군사적 정보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평안도 지역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 함경도 (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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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慶尙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군현은 큰 원으로 표현하였고, 군현명의 왼쪽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오른쪽에는 서울로부터의 시간 거리가 적혀 있다. 지도의 왼쪽에는 南道 13, 北道 9 등 군사적으로 재편된 함경도의 군현수 22개가 기록되어 있다. 함경도는 세종 때 두만강변의 六鎭이 개척된 이후 1684년(숙종 10)에 茂山, 1787년(정조 11)에 長津이 신설되면서 24개로 늘어난다. 그러나 본 지도에는 무산과 장진이 빠진 22개만 기록되어 있어 1684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본 지도책에 수록된 다른 道의 지도에 영조 때 바뀐 지명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과 대비되는 내용이다. 지도 위에는 작은 직사각형으로 표현된 지명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 있는데, 군사기지인 鎭堡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察訪驛을 의미한다. 본 지도만으로는 진보와 찰방역이 구분되지 않는데, 아래쪽의 주기에 진보가 자세하게 적혀 있어 비교 검토하면 구분할 수 있다. 함경도에는 병영이 2개 설치되어 있었는데, 남병영은 北靑에, 북병영은 鏡城에 있었다. 위쪽의 行營 경성에 있던 북병사가 겨울에 두만강이 얼어붙었을 때 머물면서 방어를 지휘하던 곳이다.(이기봉)

  • 황해도 (黃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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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忠淸道 지도와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 察訪驛과 鎭堡 및 새로운 산의 명칭 등 달라진 측면이 많다. 큰 원으로 표현된 군현에는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이 원 안의 왼쪽에, 서울에서의 시간 거리가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군현에서는 이와 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원 바깥에 쓰여 있는 경우도 많다. 참고로 監은 종6품의 현감이, 令은 종5품의 현령이, 守는 종4품의 郡守가, 府는 종3품의 都護府使가, 牧은 정3품의 牧使가 파견된 고을을 의미하며, 서울로부터의 거리는 예를 들어 五半의 경우 5일 반나절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金川郡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오른쪽 아래에 金川이 金泉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瓮津은 1719년(숙종 45)에 소강첨사진이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면서 縣에서 都護府로 바뀌는데, 본 지도에는 縣監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 주기의 앞쪽에는 察訪驛(3), 鎭(11), 堡, 山城 등 군사적 정보와 居民과 田의 행정적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 軍丁의 분포 상태, 구월산과 수양산 등 황해도와 관련된 역사적 전설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山城이 2군데나 적혀 있는 등 체계가 부족한 편이다.(이기봉)

  •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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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지도첩(朝鮮地圖帖)〈古 4709-11〉 1책 뒷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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