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령현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아포읍·남면과 연평리·노곡리·봉곡리를 제외한 농소면, 보광리·삼성리 동쪽의 감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三國史記≫에 조분니사금 2년(231) 신라에 의해 병합된 甘文國의 땅으로 나온다. 고을의 鎭山이며, 읍치 북쪽에 표시된 甘文山은 이 지역의 과거 명칭이 지명에 반영된 것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甘川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나가 낙동강에 합류한다. 실재로는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서-정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 감천은 ≪新增東國與地勝覽≫과 ≪擇里志≫에 모두 관개가 가장 잘 이루어지는 하천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扶桑驛과 赤峴面이 있는 지역도 실재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는데, 마치 정남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의 德林書院은 김종직(1431-1492)·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세워졌으며,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이기봉)
거제부는 거제시 전체와 통영시 한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鷄龍山이다. 읍치는 원래 신현읍의 고현리에 있었던 古縣城이었는데, 숙종 37년(1711)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거제부는 뱃길로 일본과의 왕래가 쉬운 곳이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당시에 사용되지 않던 성곽이나 廢鎭堡의 경우 명칭과 원형의 성곽 모양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한 뒤 남해안과 섬 지역에 倭城을 쌓고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재침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는데, 거제도에도 여러 군데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3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성과의 구분을 위해 반원의 성곽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제작 당시에 사용되고 있었던 鎭堡는 주기에 8개가 기록되어 있으며, 배치된 戰船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다. 지도에는 건물의 모양과 鎭堡의 이름을 적어 넣어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待變亭 역시 戰船을 배치하여 관리하던 곳이라는 점은 다른 鎭堡와 마찬가지이지만 운영 주체가 거제부였다. 지도에는 읍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바다를 수시로 감시하던 瞭望도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見乃梁津은 통영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현재 이곳에는 거제대교가 만들어져 있다. 漆川島와 加助島에는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앞의 섬에는 祭享黑牛 49마리, 뒤의 섬에는 牧馬 77마리가 방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牧子軍이 각각 111명과 93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祭享黑牛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아마 특별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한산도에는 制勝堂이 표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1545-1598)이 堂을 짓고 웅거하면서 왜병을 물리쳤던 곳이라고 하며, 후에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란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주기에는 산의 이름과 읍치로부터의 거리, 둘레의 크기 등을 기록한 6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봉산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봉산이 있는 산의 이름을 기록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거창부는 거창군 거창읍·남상면·남하면·가조면·가북면·주상면·웅양면·고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8리에 있었다는 乾興山이다. 거창부는 지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이 황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그 지류인 가천천이다. 가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加祚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면의 이름 중 ‘加’자가 붙은 곳은 모두 이 가조현의 지역이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3壇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지내던 厲壇,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城隍壇, 곡식신과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社稷壇, 孔子를 비롯한 유교의 聖賢에게 제사지내던 文廟(향교의 대성전)가 그것이다. 지도에는 3壇의 위치에 제단 모양의 표시를 하여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다만 서쪽에 있었던 社稷壇에는 제단 표시만 있고, 명칭은 기재되지 않았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적황색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는데, 이 고을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기에는 고개의 험한 정도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道山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金宏弼(1454-1504)과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현종 1년(1660)에 세워지고, 같은 왕 3년(1662)에 사액 받았다. 浣溪書院은 金湜(1482-1520)을 배향하여 현종 5년(1664)에 세워지고, 숙종 6년(1680)에 사액 받았다. 褒忠祠는 李逑源을 배향하여 영조 13년(1737)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이 중 포충사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포충사에 배향된 이구원은 鄕所의 座首에 불과했는데,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기 때문에 大司憲으로 추증되었다.(이기봉)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시내·남천면, 압량면의 신대리-내리를 포함한 서북쪽,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고모동-삼덕동을 포함한 동쪽, 동구의 율하동·용계동·괴전동·금강동·내곡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삼남동·삼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맨 아래쪽의 馬巖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은 남쪽으로는 600m 정도의 산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천천이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특히 3단의 경우 산 중턱에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입지와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하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押梁驛이 있는 곳은 신라에 의해 정복된 辰韓 小國인 押督國의 옛 터로 알려져 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孤山書院은 선조 때 이황에게 孤山이란 이름을 받아 만든 서재였다. 인조 11년(1633) 李滉(1501-1570)과 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여 서원으로 바꿨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이 밖에 사찰도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을 표시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은 없다.(이기봉)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우곡면의 연리·월오리·도진리 서쪽, 개진면의 구곡리 서쪽, 성산면의 사부리, 덕곡면의 후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耳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이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에서는 회천과 안림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령현은 4-6세기 가야연맹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대가야 지역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대가야는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지도에는 梅林祠·道巖祠·靈淵祠·文淵祠 등 4개의 ''祠''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江倉은 이 고을의 稅米와 大同米를 운반하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이기봉)
고성현은 개천면·영오면·영현면을 제외한 고성군 전체, 한산면을 제외한 통영시 전체 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無量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慶尙右水營兼三道統制營인 統營이 표시되어 있다. 통영은 선조 26년(1593)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李舜臣(1545-1598)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통영 바로 옆에 있는 忠烈祠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현종 4년(1663)에 사액 받았다. 堀梁橋가 설치된 곳은 썰물 때면 섬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한 때 흙으로 메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시 파내어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들고 다리를 설치한 곳이다. 현재는 위·아래로 일제시대에 만든 해저터널과 충무교가 지나가고 있다. 통영 위쪽의 轅門은 통영과 외부와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통영에는 그 위상을 반영하여 戰船 8척, 兵船 7척, 伺候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적혀 있다. 고성 관할의 전선은 읍치 아래쪽의 船倉에 배치되어 있었다. 10개의 船材封山도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封山이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선재봉산은 전선의 선재로서 사용하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지역이다. 지도에는 4개의 眞木封山도 표시되어 있다. 眞木이란 참나무를 의미하며, 전선의 櫓·防牌·木釘에 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를 공급하던 선재봉산 또는 봉산과 구별하기 위해 진목봉산이라는 명칭을 특별히 기재한 것이다. 統倉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는데, 統營으로 조달되던 세미를 보관하며 운송하던 곳이다. 이 밖에 고성의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한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거제와 남해가 마치 거대한 대륙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고지도에서 가끔 나타나는 형식이다.(이기봉)
곤양군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곤명면·서포면과 하동군 금남면·금성면 및 진교면의 진교리·안심리·양포리·술상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3리에 있었다는 銅谷山이다. 昆陽郡은 세종 19년(1437)에 昆明縣과 金陽部曲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각각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였다. 이를 통해 部曲 역시 당시까지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縣 못지 않은 힘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陽面이 金陽部曲이 있던 곳이며, 위쪽의 주기에는 읍치로부터 ‘서쪽 40리’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 ‘동쪽 45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왼쪽 위쪽에는 이 고을이 郡으로 승격되고 유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世宗大王胎封과 端宗大王胎封이 표시되어 있다. 왕릉은 주로 한성 주변의 고을에 분포하고 있지만, 胎封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胎의 奉安을 통해 전국적인 지배자로서의 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확보하려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과 1개의 眞木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船材封山은 소나무(松木)를 戰船의 船材로서 사용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封山이라고 하면 선재봉산을 의미했다. 眞木은 참나무를 의미하며, 戰船의 櫓·防牌·木釘 등에 사용되었다. 진목봉산 위쪽에는 ‘進上靑大竹田’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해안가에는 이 고을에서 통영에 받치던 세미의 보관소인 統倉과 戰船을 정박시키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이 선소에는 이 고을에서 한양으로 田稅와 大同米를 실어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도 함께 있었다.(이기봉)
군위현은 지금의 군위군 군위읍·소보면·효령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군위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방향 표시가 현재와 같은 東西南北으로 되어 있지 않고, 子(북)·卯(서)·午(남)·酉(동)의 형식으로 적혀 있다. 고을은 실재로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정북-정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馬井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孝令縣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孝令面과 孝令倉은 옛 효령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붙여진 것이며, 현재도 군위군 효령면으로 남아 있다. 召召保部曲과 仍末谷部曲도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며 이 고을에 완전히 통폐합되었다. 조선 초에는 이 지역이 모두 面으로 재편되었는데, 읍치 위쪽의 召召本面은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인조 5년(1627)에 柳成龍(1542-1607)을 배향하여 세운 南溪書院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사찰은 모두 합해 3개나 지도에 나타나고 있어, 崇儒抑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불교의 생명력이 의외로 강하게 존속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고개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데, 磨搥嶺阨에는 적색선으로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옆에는 ‘敵路要衝’이라는 표시를 해 놓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위쪽의 주기에는 고을 전체의 세금 부과와 관련된 호구의 수·전답의 양·세금 납부처와 부과량을 비롯하여,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炭山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倭城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하여 울산-사천 사이의 남해안에 주둔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 북진의 근거지였으며, 현재 기장읍 죽성리에 사적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총 5개의 封山이 보이고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봉산은 보통 운송의 편리를 위해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에 가장 많았다. 상호 호응 관계에 있는 봉수를 직선의 붉은 선으로 연결하여 알기 쉽게 표현한 점도 눈에 띈다. 지도 아래쪽의 侍郞臺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랑대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으로서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삼월과 시월에 용왕제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기타 문무왕 18년(678)에 창건했다는 長安寺를 비롯하여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시내·어모면·대항면·조마면, 상좌원리와 금평리를 포함한 구성면의 동쪽, 감문면의 금송리, 농소면의 연명리·노곡리, 금곡리와 금라리를 포함한 감문면의 서쪽, 충청북도 영동군의 추풍령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교동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굵게 표시된 하천을 보통 甘川이라고 쓰는데, 지도에는 鑑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굵기를 통해 본류와 지류를 구분해 주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현재의 김천시 명칭이 유래된 金泉驛이 보이고 있다.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20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고을 면 명칭의 일부에는 과거에 독자성을 유지하던 部曲과 所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黃金所面은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으로 황금소가 있었던 곳이다. 助馬란 명칭이 붙은 면은 조마부곡, 迎命面은 영명향이 있던 곳이다. 이 중 영명면은 개령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며, 황금소면은 유일하게 금강유역권에 들어가 있다. 오른쪽의 牙川 유역에는 禦侮縣이 있었던 곳이다. 기타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태가 뒷산인 黃岳山에 묻히면서 노비와 전답을 기부 받아 번창하였던 直指寺가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보물 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김해부는 지금의 김해시 전역과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낙동강 서쪽의 강서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김해시내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3리에 있었다는 盆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김해부는 원래 駕洛國 또는 金官國이 있던 곳으로,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항복하여 김유신 가문의 食邑이 되었다. 이후 5小京 중의 하나인 금관소경으로 정해졌으며, 고려시대에도 主縣으로 기능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항복하였기 때문에 다른 가야 소국에 비해 역사적 상황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首露王陵과 그 왕비인 許后陵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향·부곡을 제외하면 속현이 없었음에도, 주기를 보면 호수 9천을 넘는 큰 고을이다. 이것을 통해 신라의 5소경이 다른 군현에 비해 영역과 호수 면에서 훨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大山面 지역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즉 독자성이 유지되었던 太山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 해안가에는 수도인 한양으로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옮기기 위해 설치한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의 船所는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선소가 待變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오는데, 전선>병선>사후선의 순서로 규모가 컸다. 書院은 2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新山書院만이 南冥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했던 封山과 화살촉이나 피리를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箭竹田·大篁竹田·小篁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에는 어업이나 소금 생산지로 알려진 鳴旨島 등의 섬이 알기 쉽게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다리(橋)의 표시가 아주 자세함이 특징적이다.(이기봉)
남해현은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서변리·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望雲山(759m)이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입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섬 전체의 모습은 현재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아래쪽(동쪽)의 ‘晋州昌善牧場界’라고 쓰인 부분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곳은 현재의 남해군 창선도(창선면)로서 조선시대에는 진주의 越境地였다. 남해보다 훨씬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지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남해현은 남해-서해를 잇는 해로에 위치해 있어 운송과 군사적 측면에서 모두 중요했다. 이와 같은 입지적 특징 때문에 水軍이 배치된 여러 鎭堡가 있었다. 지도에서는 面은 세로의 긴 사각형 안에, 鎭堡는 거의 정사각형 안에 이름을 써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에는 총 7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지역이다. 대부분 수군이 파견된 鎭堡가 있었던 해안가에 지정하여 관리하였다. 도별로는 수군이 파견된 진보가 가장 많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도의 오른쪽의 露梁津이 표시된 곳은 이순신(1545-1598)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조선시대의 곤양땅이었던 현재의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아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은 忠烈祠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단성현은 산청군 신안면·신등면·생비량면 전체와 단성면의 청계리·입석리·사월리·묵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來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은 세종 때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해 만들어졌고, 두 현의 이름으로부터 한 자씩 따서 丹城縣이 되었다. 丹溪倉이 있는 곳이 단계현의 중심지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道川書院은 文益漸(1329-1398)을 배향하여 태종 1년(1401)에 건립되었고, 정조 11년(1787)에 賜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1년에 세워진 것은 후대의 서원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이곳에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목화의 최초 재배지가 단성면 사월리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목화를 최초로 재배한 사람은 鄭天益인데,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 오른쪽의 靑谷祠宇에는 李天慶이 배향되어 있었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이천경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며, 書院과 祠宇는 배향된 인물의 격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오른쪽은 그 지류인 양천이다. 지도에는 新安津과 吐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津은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주기에 적혀 있으며, 이곳에는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다. 신안진 오른쪽의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赤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중국의 유명한 지명을 본 따서 이름을 붙이고 글자까지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통해 송시열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대구부는 대구광역시 북구의 서쪽과 동구·수성구의 동쪽을 제외한 대구광역시 시내 전체, 달성군의 하빈면·다사면·화원읍·옥포면·가창면, 청도군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중구 남성동·동성동·서성동 일대에 있었다. 이곳에는 지도에서 잘 보이는 것처럼 경상도관찰사영이 있었다. 이 監營은 세조 12년(1466)에 경주에서 옮겨왔다. 원래 이 고을의 한자 표기은 ‘大丘’였으나, 공자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丘’자를 피하기 위해 정조(1776-1800) 때부터 ‘大邱’로 바뀌게 되었다. 읍치 위쪽으로는 達城이 그려져 있는데, 천연적인 要塞地에 石築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달성공원으로 단장되어 보호되고 있다. 面의 이름에는 옛 고을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까지도 壽城縣·解顔縣·河濱縣이 이 고을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읍치 동쪽에 ‘守’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수성현, 동북쪽에 ‘解’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해안현, 서북쪽에 ‘河’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하빈현의 땅이었다. 서남쪽에 ‘花’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숙종(1675-1720)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花園縣의 땅이었으며, 남쪽에 ‘角’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현종(1660-1674)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豊角縣의 땅이었다. 고을의 서쪽을 흐르는 강이 낙동강 본류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있는 유명한 八公山이 아니라, 읍치 바로 아래쪽의 蓮龜山이다. 八公山은 신라시대에는 父岳으로 불렸으며, 5岳 중 中岳으로 비정되어 中祀를 지냈던 명산이다. 이곳에는 把溪寺·桐華寺·夫仁寺 등 신라시대의 유서 깊은 절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팔공산 아래는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중의 하나이다. 이 때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그 부하 申崇謙(?-927)과 金樂(?-927)이 대신 죽음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진 곳이다. 王山 밑에 있는 表忠書院은 신숭겸과 김락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0)에 세워지고, 숙종 13년(1687)에 사액 받았다. 硏經書院은 이황(1501-1570)·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사액받았다. 洛濱書院은 세조(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死六臣인 박팽년(1417-1456)·성삼문(1418-1456)·하위지(1387-1456)·이개(?-1456)·유성원(?-1456)·유응부(?-1456)를 배향하여 세워졌고,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이기봉)
동래부는 기장군·북구·강서구를 제외한 부산광역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복천동·안락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보이는 輪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고을은 일본과 가장 가깝게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군사적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水營과 鎭의 경우 파견된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였다. 정3품의 水軍節制使가 파견되었던 慶尙左水營이 지도 가운데에 성곽 표시의 적황색 네모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釜山鎭과 多大鎭은 성곽 표시의 황색 네모로 표시하였다.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된 鎭의 경우 건물과 이름만으로 표현하였다. 지도 오른쪽으로부터 甘浦·丑山·漆浦·包伊·開雲浦·豆毛浦·西平鎭 등이다. 이런 鎭의 경우 때때로 옮길 때마다 鎭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가기 때문에 지명 비정에서 조심해야 한다. 지도 가운데쯤에는 倭館이 보이고 있다. 조선 초에는 웅천(진해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三浦倭亂(1510) 이후에는 한곳에만 설치하였는데, 제포→부산포→초량의 순서로 옮겼다. 지도에 표시된 곳이 숙종 4년(1678)에 마지막으로 옮긴 지역이다. 이 왜관에서는 일본과 조선 상인 사이의 무역이 행해졌으며, 일본 거류민의 주거지와 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을 두었다. 조선에서는 성을 축조하여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이 지도에도 이중의 성곽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문의 이름도 이들의 출입을 지킨다는 의미로 ‘守門’이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국방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壬辰倭亂 때에는 동래읍성·부산진·다대진 등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서 전사한 宋象賢(1551-1592), 부산진 僉使로서 전사한 鄭撥(1533-1592) 등을 배향하여 인조 2년(1624)에 賜額받은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쌓았던 대형산성 중의 하나인 金井山城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숙종 29년(1702)에 처음으로 쌓았다. 이 밖에 기원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오는 居漆山國의 터가 萇山國基로 표시되어 있으며, 해안가에는 海雲臺와 沒雲臺 등의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무이진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고성동에 있었다. 이 지도는 원래 ≪嶺南地圖≫에는 없던 것인데, 후대에 안음 지도에 붙여서 삽입된 것이다. 순조 33년(1833)에 경흥부의 읍치를 과거의 무이진으로 옮기며, 무이진은 순조 37년(1837)년 경흥부의 구읍치로 옮긴다. 본 지도에 표시된 무이진은 구읍치로 옮긴 후의 모습이다. 따라서 본 지도가 만들어진 상한 시기는 순조 37년(1837)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 뒤쪽에는 ‘辛未八月十三日’이라고 적혀 있는데, 순조 37년(1837) 이후 최초로 나오는 辛未년은 고종 8년(1871)이다.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衙舍 밑의 子坐午向은 북쪽(子)을 등지고 남쪽(午)을 향해 건물이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아건물 위쪽에는 이런 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적혀 있다. 鎭城은 둘레 5,260척(약 1,578m)의 石築 성곽으로 제법 큰 축에 들어간다.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배치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赤池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度祖가 검은 용을 쏘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기봉)
문경현은 지금의 정촌동과 영신동을 제외한 문경시 시내, 문경읍·가은읍·마성면·농암면 전체, 호계면의 구산리·우로리·별암리·견탄리·호계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主屹山이다. 面의 이름에는 조선 초까지도 독자성이 유지되다가 완전히 통합된 고을의 이름이 남아 있다. 加가 붙은 면의 이름은 加恩縣의, 戶가 붙은 면의 이름은 虎溪縣의 지역이었다. 이 고을에는 한양-동래를 잇는 도로 상에서 가장 중요한 2개의 관방처가 알려져 있다. 이런 곳으로는 두 곳이 있다. 첫째가 바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鳥嶺이다. 임진왜란 때 조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여, 숙종 34년(1708)에 山城을 조성하였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지형을 이용하여 세 개의 關門을 설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鳥嶺關 ·中城·下城의 모습을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가 지도 가운데의 兎棧이다. 토잔이란 토끼가 겨우 뛰어갈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串岬遷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遷이란 벼랑길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지형조건 때문에 이곳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왼쪽으로는 姑母城이, 맞은편에는 姑父城이 표시되어 있어, 옛날부터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의 幽谷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곳으로 18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주흘산 밑의 神廟는 主屹山祠로서 봄·가을에 香을 하사받아 小祀를 지내던 곳이다. 그 위쪽의 御留殿舊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곳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에는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황장봉산이 표시되어 있다. 사찰도 아주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이 중 加北面 위쪽의 鳳岩寺가 가장 유명했다. 이 사찰은 신라 헌강왕 5년(879)에 智證國師 圓悟가 창건하여 禪風을 일으키고 희양산파를 이룬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보물 137호로 지정된 지증대사석조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가현내면에는 蕭陽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숙종 18년(1688)에 鄭彦信(1527-159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밖에 加北面에 있는 하천은 경치가 좋아 현재도 선유동계곡으로 유명하며, 지도에도 2개의 亭子가 표시되어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이기봉)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 제외한 밀양시에 해당되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시내 내일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府北面에 있는 華岳山이다. 고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이 있으며,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밀양강이다.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옆에는 지금도 보물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嶺南樓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嶺南寺라는 절의 작은 누각이었다고 한다. 지도의 아래쪽 오른쪽에는 낙동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인 三浪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삼랑진에는 영조 5년(1729)에 漕倉이 설치되어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등 여섯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여 서울로 보냈다. 경부선의 건설과 삼랑진역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운반되는 물자의 최대 集散處로도 기능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한양-동래의 대로 중에 가장 험한 지역 중의 하나인 鵲院棧路가 표시되어 있다. 棧路란 낭떠러지 길에 사용되는 용어로서, 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지형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지역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낙동강가의 守山津이 있는 곳에는 둘레가 20리나 되는 삼한시대의 守山堤가 있었고, 조선 초까지도 守山縣이 밀양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수산제는 세종 때 물길을 터 屯田으로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수산현도 조선 중기 이후 밀양에 완전하게 통합되었다. 그 위에 있는 國農所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유지 농장으로서, 紅蓮이 무성하여 그 향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封山이 읍지 오른쪽 방향에 2개가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전함 船材의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보통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해안가에서 떨어진 이 고을에도 있게 된 것은 水運이 가능한 낙동강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세종 때의 名臣이었던 김종직(1431-1492)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賜額받은 禮林書院과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西山大師(1520-1604)·泗溟大師(1544-1610) 등을 배향하여 영조(1725-1776) 때 賜額받은 表忠祠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봉화현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명호면과 상운면의 북·동부, 물야면의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의 애당리·석현리 등에 해당된다. 읍치는 봉성군 봉성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봉화읍 대부분은 원래 안동의 越境地였다. 봉화의 북쪽으로는 영천·안동·순흥·봉화의 영역과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도에도 이 네 고을의 이름이 복잡하게 적혀 있다. 지도 서북쪽의 勿也面은 현재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일대이며, 勿也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 위쪽의 上東面은 현재 춘양면 애당리·석현리 일대에 있었던 봉화의 越境地였다. 이곳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太白山史庫가 있었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사고 안에는 조선 왕실의 계보를 보관한 璿源閣과 實錄을 보관한 實錄閣이 표시되어 있다. 그 밑에는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覺華寺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왕실의 棺槨에 사용할 黃腸木의 생산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보이고 있다. 읍치 동남쪽의 榮川地는 현재의 명화면 고감리 일대에 있었던 영천의 월경지였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金輪峯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도에 보이는 향교는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상의 하천은 오른쪽이 낙동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왼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의 최상류이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文巖書院은 李滉(1501-1570)과 제자 趙穆(1524-1606)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아울러 본관이 봉화이면서, 고려 고종 때 높은 벼슬을 지냈던 琴儀(1153-1230) 등을 배향한 文溪里社와 盤泉里社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비안현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구천면·안계면과 쌍호리·월소리·신수리를 제외한 안사면, 신평면의 검곡리·교안리, 안평면의 금곡리·하평리 일대이다. 읍치는 비안면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에 있는 城隍山이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비안현은 원래 세종 3년(1421)에 比屋縣과 安貞縣을 합해 安比라고 부르다가, 같은 왕 5년(1432)에 읍치를 현재의 위치인 비옥현으로 옮기면서 比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定’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모두 안정현에, 나머지 지역은 비옥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鄕校가 安貞倉 근처에 있는데, 읍치는 옮겼지만 향교는 그대로 과거의 읍치에 남았던 결과로 보인다. 향교가 있었던 곳은 현재의 안계면 교촌리로서, 이곳이 과거 안정현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실재로는 군위와 의성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상주로 흘러 나가는데, 하류가 오히려 얇게 표시되어 있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하천의 명칭이 前川·後川으로 되어 있어, 읍치를 중심으로 붙여졌으며 구간마다 명칭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산세가 ≪嶺南地圖≫ 내의 다른 고을 지도와 달리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왼쪽의 龜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인 것으로 추정되는 朴瑞生 등의 다섯 사람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기타 읍치 오른쪽의 望北亭은 본관이 이 고을인 比安 朴氏의 정자였다고 하며, 다른 부분은 ≪嶺南地圖≫의 일반적인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기봉)
사천현은 사천시 정동면·사남면·용구면·사천읍·용현면 전체와 사천시내 와룡동·봉남동·궁지동·향촌동·사벌동·신구동·신수동·마도동에 해당된다.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三千里面은 현재의 삼천포시 동남쪽에 해당된다. 삼천포시는 진주·고성·사천의 월경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이었다. 읍치 주변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지도와 달리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의 경우 제단 모양을 특별하게 표시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안가에는 여러 倉庫가 표시되어 있다. 統倉은 統營, 巡倉은 巡營, 右兵營倉은 右兵營으로 옮겨갈 이 고을의 각종 稅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海倉은 수도인 한성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船所는 전선을 정박시키던 곳으로서, 위쪽의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과 兵船 각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아울러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주기에는 13개의 封山이 있었음도 표기하였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지역이었다.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장 많았다. 읍치 위쪽으로는 大觀臺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龜岩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은 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기타 사찰과 역 등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산음현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읍·금서면·생초면·오부면·차황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산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東山이다. 읍치에는 조선초에 현감 沈潾이 만들었다는 換鵞亭이 보이고 있다. 王羲之가 중국의 山陰 땅에 사는 어느 도사의 청으로 道德經을 써주고 거위를 받았다는 ‘換鵝’의 고사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조선 초 지배층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정자이며, 현재의 산청초등학교에 있었다. 환아정 위에 있는 西溪書院은 德溪 吳健(1521-1574)을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 오건은 南溟 曺植(1501-1572)의 제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다. 지도에는 沙斤水·鏡湖水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남북의 적황색 도로에는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각 고개마다 ‘險阨’의 표시가 되어 있다. 아울러 ‘古介’·‘嶺’·‘峙’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도 고개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사찰과 창고, 역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삼가현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쌍백면·가회면·대병면 전체, 봉산면의 양지리·고삼리·계산리를 포함한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달리 방위가 지도 안에 표시되어 있으며, 북쪽(子)이 지도 위쪽 오른쪽에 보인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은 합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황강이며, 남쪽은 남강의 지류인 양천(水晶川)이다. 삼가현은 조선 태종 때 三歧縣과 嘉壽縣을 합쳐 만든 고을이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이 가수현의 옛 터이며, 읍치는 삼기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동헌에 있었던 淨襟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왼쪽에는 절벽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곳이 2개이다. 아래쪽의 鋪遷에서 ‘遷’은 이러한 벼랑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문자이다. 이런 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지도에도 賊路要衝·要衝이라는 문구를 넣어 표시하였다. 界山面에 龍巖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 성리학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南溟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그밖에 古巖祠宇·平川祠宇 등도 표시되어 있는데, 둘 다 賜額받지 못한 곳이다. ‘祠宇’라고 표시하여 賜額받은 ‘書院’과 구별 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와 위쪽으로 雷龍亭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아래쪽에는 정자의 모습이 없고, 위쪽에만 있는 것을 통해 옮겨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밖에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사찰 역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이기봉)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선산부는 낙동강 동쪽의 시내 부분을 제외한 구미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완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낙동강 동쪽의 海平面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海平縣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선산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낙향한 冶隱 吉再(1353-1419)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吉冶隱影宇가 길재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길재의 학통을 이어 金宏弼(1454-1504)·鄭汝昌(1450-1504)과 같은 제자를 키워낸 金宗直(1431-1492)의 고향이기도 하다. 읍치 오른쪽 아래의 金烏書院이 바로 길재와 김종직 등을 배향하여 1575년(선조 8)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였다. 月岩書院은 死六臣의 한 명인 河緯地(1387-145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았다. 洛峯書院은 정조 11년(1787)에 사액 받았는데, 위쪽의 주기에는 未賜額으로 되어 있어 이 지도의 제작 하한연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읍치에 있는 蓮亭 근처는 김종직·하위지 등 장원급제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어 장원방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金烏山城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둘레 7,644尺(약 2,293m)의 內城과 4,135尺(1,240m)의 外城으로 이루어진 대형 산성으로, 絶壁을 이용한 곳도 661步(약 1,190m)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中軍이 설치되고 別將이 파견되었으며, 산성 내에 倉이 설치되어 있었던 선산·금산·개령·지례를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형 산성의 보수와 축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외적의 침입 시 몇 개의 고을을 묶어서 방어를 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義狗塚과 義牛塚이 무덤의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조선에서 국가에 대한 忠과 더불어 주인에 대한 義를 강조하던 신분제의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사찰과 정자 등의 정보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성주목은 성주군 전체, 고령군의 다사면·성산면·덕곡면·운수면 대부분, 달성군 논공읍의 위천리-노이리를 포함한 서쪽, 김천시 증산면 전체와 감천면의 광기리-도평리를 포함한 남쪽, 지례면의 신평리·울곡리·이전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印懸山이었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동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성주목이 이렇게 컸던 이유는 고려시대에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왼쪽에 加利倉이 있는 곳은 조선 초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가리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土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세운 關王廟가 표시되어 있다. 關王이란 중국의 ≪三國志≫에 나오는 關于를 의미하며,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더 왼쪽에는 胎封山과 胎封寺가 보이는데, 조선의 3대 임금인 太宗의 胎를 奉安했던 곳이다. 읍치 오른쪽 위에도 胎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의 7대 임금인 世祖의 胎를 봉안했던 곳이다. 무덤이 한양 주위의 고을에 분포되어 있는 반면에 왕실의 胎는 전국 곳곳에 奉安되어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정통성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3개의 祠, 2개의 影堂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유명한 聖賢을 배향하여 제사한다는 측면에서는 기능이 같지만, 격에서는 상호간에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이 중 書院의 격이 가장 높았던 듯하며, 川谷書院과 檜淵書院만이 賜額 받고 있음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賜額이란 임금이 현판을 직접 제작하여 내려주는 것으로, 국가로부터 가장 높은 공신력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川谷書院에는 程子와 朱子 등 중국 유학자를 비롯하여 金宏弼(1454-1504)·李彦迪(1491-1553)·張顯光(1554-1637) 등 조선 초·중기의 성리학자가 배향되어 있었다. 檜淵書院에는 鄭逑(1543-1620)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배향되었다. 이 밖에 사찰과 교통 및 통신에 대한 정보도 잘 실려 있다.(이기봉)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단산면·부석면과 풍기읍의 수철리·창락리 일대, 안정면의 묵리·여륵리 일대와 봉화군의 봉화읍 적덕리·문단리·도촌리·화천리, 개단리와 가평리를 제외한 물야면, 봉성면의 우곡리, 법전면의 법전리·소지리, 춘양면의 소로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순흥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고을에는 3개의 越境地가 있었다. 昌樂面은 현재의 풍기읍 창락리 일대이며, 大龍山面은 안정면 묵리 일대, 臥龍面은 봉화군 봉화읍·봉성면·춘양면에 일부씩 걸쳐 있었다. 이렇게 행정구역이 복잡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던 昌樂驛·大龍山部曲·甘谷部曲 등이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땅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白雲洞書院은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安珦(1243-1306)을 배향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명종 5년(1550)에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에게 아뢴 후, 노비와 田結 및 紹修書院이라는 額書를 받아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55호로 잘 보전되고 있다. 이 백운동서원은 일반적으로 풍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흥부는 세조 3년(1458)에 이곳에 귀양 왔던 錦城大君(?-1457)과 府使 李甫欽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혁파되었다. 숙종 9년(1683)에 이 고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곳은 당시에 풍기의 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풍기의 백운동서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丹溪書院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金淡(1416-1468)을 배향하여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되고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총 4개의 고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여 ‘險阨’이라는 표시를 특별히 해 놓았다. 이 중 竹嶺이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지도에서도 붉은 색으로 도로를 표시하여 가장 중요한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죽령 밑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9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昌樂驛이 보이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浮石寺가 높은 築臺 위에 건물을 세워놓은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이 사찰이 당시에도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절 안에 뜬 돌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국보 17호인 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과 화산면 전체,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죽곡리를 제외한 화남면, 화북면의 하송리·상송리·법화리·죽전리·옥계리·용소리와 동강리 서쪽의 와촌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花山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모두 금호강의 지류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왼쪽의 것은 고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西川으로, 오른쪽의 것은 慈乙阿川으로 나온다. 현재는 각각 신령천과 고현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과의 경계선이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특이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지도 아래쪽의 南面은 永川界를 넘어가 있는데, 지도에서의 표현과는 달리 실재로는 읍치가 있는 곳으로부터 행정경계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곳을 고을 경계를 넘어가 있는 땅이라고 하여 ''越境地''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현재 영천시 와촌면의 동강리 서쪽에 해당된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旨銀所가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곳이었으며, 조선 초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신령현의 면으로 재편되었다. 오른쪽의 知谷面·古縣面·新村面 지역도 영천과 경계선이 애매하게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 지역은 개의 위·아래 이빨이 서로의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하여 ''犬牙相入地''라고 불려졌다. 이 중 신촌면은 고려시대까지 新村部曲이 있었던 곳이며, 이지은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신령현에 완전히 통폐합되면서 面으로 재편되었다. 현재의 영천시 화북면 서쪽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원래 지도 오른쪽 아래의 古縣面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현 읍치로 옮겼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水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으로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위에 있는 環碧亭은 원래 객사 서쪽 10보 거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지도에서처럼 개울가 절벽에 만들어져 있으며, 현재도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편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書院은 아니다. 오른쪽의 白鶴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왼쪽의 龜川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탈환한 權應銖(1562-1608)를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졌다. 신라 때의 사찰인 修道寺와 佛窟寺도 표시되어 있다. 崇儒抑佛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에서도 민간신앙으로 꾸준하게 세를 유지하던 불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굴사에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보물 42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이기봉)
안동부는 녹전면·도산면·예안면을 제외한 안동시 전체,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석포면·소천면·재산면과 봉화읍의 대부분·법전면의 일부·춘양면의 일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안동 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930년에 고려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태조가 승리하였고, 그 과정에서 金宣平·勸行·張吉 등 안동의 호족세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안동은 고려시대 내내 주변의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다. 이후 지방관이 파견된 속현은 독자적인 고을로 남게 되었지만, 조선 초까지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은 그대로 안동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월경지가 많이 생기게 되었고, 행정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지도 왼쪽의 감천면은 甘泉縣, 그 위쪽의 내성면은 退串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1331-1332, 1340-1344) 때 승격된 奈城縣, 그 오른쪽의 춘양면은 원래 加也鄕이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승격된 春陽縣, 그 오른쪽의 소천은 小川部曲, 그 아래쪽의 재산면은 원래 德山部曲이었다가 고려 충선왕(1309-1313) 때 승격된 才山縣의 땅이었다. 이들 지역은 지도에서의 표현과 달리 감천면, 내성면, 춘양면·소천면·재산면 등 3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월경지였다. 월경지는 아니지만 고려시대까지 원래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안동의 땅으로 편제된 속현의 명칭이 面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 ‘臨’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臨河縣, ‘豊’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豊山縣의 땅이었다. 이밖에도 길안면은 원래 吉安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 때 승격된 吉安縣, 일직면은 一直縣의 땅이었다. 읍치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 지도보다 훨씬 많은 인문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의 낙동강 가에는 暎湖樓를 비롯하여 歸來亭·石門亭·臨淸閣·伴鳩亭·白雲亭 등 수많은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들 정자 중 영호루·귀래정·반구정 등은 지금도 안동시의 낙동강변에 복원되어 보존하고 있다. 읍치에는 慕恩樓와 關王廟도 표시되어 있다. 관왕묘는 이미 멸망한 明에 대한 조선후기 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징적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援軍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薛虎臣이 왜란을 평정한 것은 武安王 關于의 도움이라며 세운 것이다. 아울러 양반의 세력이 강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書院도 11개나 표시되어 있다. 이들 서원 중 賜額書院으로는 李滉(1501-1570)·柳成龍(1542-1607)·金誠一(1538-1593) 등을 배향한 虎溪書院, 權橃(1478-1548)을 배향한 三溪書院, 具鳳齡(1520-1585) 등을 배향한 周溪書院, 유성룡을 배향한 屛山書院 등 4개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는 병산서원만이 살아남아 사적 260호로 지정·보전되고 있다. 마을(村)의 이름으로는 유성룡의 고향인 河回가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 마을의 위상이 높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울러 낙동강의 根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氏族의 始祖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강화가 하천에 대한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사찰 역시 서원이나 정자 못지 않게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안음현은 함양군의 안의면·서하면·서상면과 거창군의 마리면·위천면·북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안음현은 지형적으로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이 황강의 상류인 위천천 유역이며, 왼쪽이 남강의 상류이다. 원래 안음현은 조선 태종 때 利安縣과 感陰縣을 합쳐 만들어졌고,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古縣面 지역이 감음현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지도 위의 하천에는 고유명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일제초기에 전국의 하천 명칭을 단일화시키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光風樓가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한데,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에는 각각 3개의 서원과 祠宇가 표시되어 있다. 대대면에 있는 龍門書院은 이 고을 현감을 지낸 鄭汝昌(1450-1504)과 이 고을 덕유산에서 낙향했다가 죽은 鄭薀(569-1642)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賜額 받았다. 읍치 왼쪽에 있는 黃岩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 고을에서 전사한 郭䞭(?-1594) 등을 배향하여 숙종 43년(1717)에 사액 받았다. 현내면에 있는 星川書院은 사액 받지는 못했지만, 老論을 이끌었던 사람 중의 하나인 宋浚吉(1606-1672) 등 유명한 정치인을 배향하였다. 3개의 祠宇는 사액 받지 못한 것으로 서원에 비해서는 격이 떨어진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전라도 장수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六十嶺이 ‘要衝’이라는 단어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위의 黃石古城은 둘레 2,924척(약 877m)의 石城으로 현재 서하면의 황석산에 있다.(이기봉)
양산군은 지금의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전체, 부산광역시 북구 전체와 강서구의 대저1·2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산시 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고을 동쪽 5리에 있었다’는 城隍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와 향교의 이름이 북-남이 아니라 동-서를 향하고 있는데, 읍치가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해 있었던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 전체적으로 보아 아래쪽이 지나치게 확대·왜곡되어 있다. 勿禁津이라 표시된 곳이 낙동강 본류인데, 실재로는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도 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大渚島와 주변의 섬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대저도에 있는 七點山도 높은 산지가 아니라 낙동강 하구의 三角洲 평지에 있는 작은 둔덕이다. 七點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평지에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강하게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도에도 과장되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어업과 염업 등이 성행했던 곳이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지도 왼쪽 위에는 伽倻津祭壇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黃山江으로 불리기도 하며, 신라에서는 동서남북의 하천 신에게 제사지내던 四大瀆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금강인 공주의 웅진과 함께 南瀆으로 여겨져 中祀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그 아래의 勿禁味棧道는 한성-동래의 大路가 지나가던 곳으로 벼랑길이 있는 곳이다. 黃山驛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고, 1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오른쪽의 松潭書院은 숙종 22년(1696)에 세워지고, 같은 왕 43년(1717)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낮은 벼슬의 사람이 배향되었음에도 賜額 받은 사연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와 광해군의 廢母論 通文을 찢어버렸고, 그 때문에 인조반정 후 自如察訪을 지내고 사후 戶曹參議로 추증된 白受繪(1574-1642)를 배향하였다. 사찰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 글씨가 잘 안 보이는 사찰이 通度寺인데,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慈裝律師가 창건하여 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후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졌다. 현재도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기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2군데 보이고 있다.(이기봉)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상북면·삼남면·삼동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직사각형의 石築 읍성이 있었다.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高獻山(1,033m)인데, 읍치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伽智山(1,240m)·肝月山(1,083m)·鷲棲山(1,059m) 등 1,000m 이상의 산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은 태화강이 되어 동쪽의 울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이들 높은 산지 밑에는 사찰이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중 가지산 밑의 石南寺에는 보물 369호 부도가 간직되어 있고, 취서산 밑의 肝越寺에는 보물 37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지도 위쪽의 盤龜書院은 숙종 38년(1712)에 정몽주(1337-1392)·이언적(1491-1553)·정구(1543-1620)를 배향하여 창건한 서원인데,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이 있는 지역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에 깎아지른 절벽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지금은 상당부분이 사연댐에 의해 잠겨버렸지만,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구대 岩刻畵로 유명한 곳이다. 경치가 수려하여 위의 서원에 배향된 세 명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그 흔적이 반구대 약간 북쪽의 협곡 입구에 천전리 刻石(국보 47호, 書石이라고도 한다)으로 남아 있다.(이기봉)
영덕현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지품면·달산면·강구면·남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蕪芚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淸心樓는 읍성의 서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성과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嶺南地圖≫ 내의 邑城에 대한 모든 표시가 성곽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有無만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아래쪽의 南江書院은 16세기에 경상좌도 지역의 성리학자로 가장 유명했던 李彦迪(1491-1553)과 李滉(1501-1570)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천을 매우 강조하여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嶺南地圖≫ 내의 하천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 방식보다 훨씬 강조되어 있음을 통해 지도 작성 시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 오십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하류는 南川, 중류는 五十川, 상류는 北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를 추진하기 전에는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오십천 남쪽의 해안선이 실재로는 남북 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마치 남서쪽으로 꺾인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기타 왕실의 관곽용 목재인 黃腸木을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지도 맨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영산현은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계성면·장마면·도천면·길곡면·부곡면과 남지읍 남지리·마산리·학계리·용산리·신전리·성사리·아지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靈鷲山이었다. 아래쪽 왼쪽에서 낙동강 본류와 그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여 오른쪽(동쪽)으로 빠져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많은 ‘津’이 보이고 있는데, 지역민들에게는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낙동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낙동강 너머 廣心亭이 있는 곳은 특이하게도 영산의 땅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 칠곡면 봉촌리의 낙동강변에 해당된다. 面의 이름에는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던 지역의 명칭이 일부 남아 있다. 계성면은 桂城縣이, 길곡면은 吉谷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는 德峯鄕賢祠와 道泉鄕賢祠가 보이고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모두 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祠와 書院이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개의 祠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하지도, 사액서원도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祠와 書院이 어느 정도 구별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겠다. 기타 곽재우의 別墅였다는 忘憂亭이 낙동강 변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영양현은 입암면의 면소재지 남쪽과 석보면을 제외한 영양군의 전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위쪽의 日月山이다. 영양현은 조선 초까지 영해도호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숙종 9년(1683)에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새롭게 현감이 파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단위가 되었다. 고을은 두개의 水系에 속해 있다. 남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의 최상류이며, 북쪽은 동해로 빠져나가는 왕피천의 최상류이다. 왕피천은 지도에는 深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首比部曲이 있던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영양군 수비면이다. 청이면과 청초면 지역도 원래 大靑部曲·小靑部曲이 있던 곳으로, 면의 명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변천에는 위로부터 將軍川·大川·矢川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의 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던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池는 項谷堤와 元唐堤가 합쳐져 있는 것으로서, 주위가 각각 2,852尺(약 856m)·1,698尺(약 509m)이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작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제언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英山書院은 이황(1501-1570)과 김성일(1538-1593)을 배향하여 세워졌으며,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 지도 위쪽에는 왕실의 棺槨 제조용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향교가 읍치와 많이 떨어져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시내 항구동 남쪽부분, 연일읍·대송면·오천읍·동해면, 대보면의 서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迎日’이 ‘延日’이라고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하천의 모습이 상류와 하류의 구분 없이 표시되어 있어, 냉천이 마치 경주방향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지도 남서쪽 경주와의 경계선이 실재로 分水界이기 때문에, 지도상에 나타난 냉천의 최상류가 곧 발원지이다. 형산강과 냉천의 하류에는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 河中島가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하중도는 홍수 시에는 물에 잠기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으며,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이 갈대를 이용하여 鹽盆을 끓일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내내 이 지역은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소금 생산지로 알려질 수 있었다. 포항시가 형성·확대되면서 모두 메워져, 현재는 시내 중심가의 대부분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중도 오른쪽 끝에는 포항시의 명칭이 유래된 浦項倉이 보이고 있다. 지도 오른쪽 끝의 大冬背烽臺가 있는 곳이 지금의 장기곶이다. 이곳의 지형은 동북쪽 바닷가로 솟아 올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남서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雲梯山과 陳田山에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주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을 지칭한다. 읍치 아래쪽의 烏川書院에는 본관이 이 고을이며 고려말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1337-1392)와 우리말로 쓴 ≪關東別曲≫, ≪思美人曲≫의 작자인 정철(1536-1593) 등이 配享되어 있었다. 이 서원은 선조 21년(1588)에 만들어져 광해군 5년(1613)에 賜額받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종 8년(1871)에 毁撤되었다. 이 밖에 영조 36년경(1760)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輿地圖書≫에는 邑城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 지도의 읍치에는 邑城에 대한 표시가 없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축산면·창수면·병곡면과 영양군의 석보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石築의 邑城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으며, 북면·서면·남면의 명칭이 해안가 가까이에만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대부분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쪽 바닷가 근처에는 넓은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서쪽)의 석보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 유역에 속하며, 원래 고려 말까지 石保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의 丹山書院은 禹倬(1263-1343)과 李穀(1298-135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그 왼쪽의 有金菴는 신라시대의 절이라 하며, 현재 보물 674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하천의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붙였기 때문에 서천·북천·남천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북천은 하천의 표현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蒼水院이나 莊陸菴 방향의 하천이 더 크고 긴데, 상대적으로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본류가 영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영덕과의 경계가 발원지이다. 그밖에 봉화는 붉은 직선을 그어 서로 호응관계에 있음을 표시하였고, 북천 끝 해안가의 觀魚臺가 깎아지른 절벽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도산면·녹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에 표시된 하천은 거의 낙동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현재는 약간 하류 쪽에 안동댐이 건설되어 있어, 읍치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이 수몰되어 버렸다. 예안현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退溪 李滉(1501-1570)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지도에도 그가 태어난 退溪舊宅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도산면 도계리에 보존되고 있다. 이황의 고향답게 4개의 書院과 1개의 書堂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은 이 고을 토계리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했다. 이황이 죽은 4년 후인 선조 7년(1574)에 이황을 배향하여 도산서원을 창건하였고,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이 후 이황의 제자인 趙穆(1524-1606)을 추가로 配享하였는데, 지금도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易東書院은 고려 말에 이 고을 예안에 살면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노력한 易東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창건하였고, 숙종 10년(1684)에 賜額받았다. 그 나머지는 사액서원이 아니며, 도산서원 이외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毁撤되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文廟가 있었던 鄕校와 토지신·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社稷壇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孤山亭과 丹沙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강가에 절벽이 솟아 있는 등 이 지역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丹沙는 이황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협곡이 펼쳐져 있어 丹沙峽이라고도 한다.(이기봉)
예천군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용문면·유천면·보문면·호명면, 우감리를 포함한 동쪽의 개포면, 풍양면의 공덕리·괴당리·고산리·풍신리, 문경시 동로면과 신북면의 가좌리·창구리·소야리·내화리·가곡리·월천리·흑송리·지내리, 의성군 다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서본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북쪽에 표시된 德鳳山이다. 하천이 어지럽게 갈라져 있다. 현재는 아래쪽으로부터 낙동강(大谷灘)·내성천(沙川)·한천(瀼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왼쪽의 것은 금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面의 이름에 옛 행정구역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있는 冬老所面은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행정단위의 역할을 하였던 冬老所가 있었던 곳이다. 아래쪽의 ‘縣’자가 붙어 있는 면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多仁縣 지역으로서, 용궁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였다. 읍치에는 객사 동쪽에 있었던 快賓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뒤쪽의 黑鷹山城은 원래 鵲城이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三面이 모두 암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古城이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廢해져 있었음에도 특별히 표시한 것은 그만큼 군사적 중요성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鼎山書院만이 賜額 받았음을 표시하였다. 이 서원에는 李滉(1501-1570)과 그의 제자이며, 이 고을이 고향인 趙穆(1524-1606)을 배향하였다. 鄕賢祠의 경우 이 고을에서만 알려져 있는 인물을 배향했기 때문에 ‘鄕賢’이란 명칭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함을 통해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력 역시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龍門寺는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창건되어 고려 태조 이후 여러 번 중수된 유서 깊은 절이다. 기타 지도 왼쪽 맨 위에는 왕실의 棺槨用 목재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과 지보면, 개포면의 서쪽 7개리, 풍양면의 북쪽 8개리, 의성군 안사면의 쌍호리·월소리·신수리, 문경시 영순면의 동쪽 6개리에 해당된다. 지도상의 읍치는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그러나 1856년의 큰 장마로 인하여 관아건물이 떠내려가자 용궁면 읍부리로 옮겼다. 이 지역은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맨 아래쪽의 낙동강 본류, 중간 부분의 내성천, 가장 왼쪽의 금천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 오른쪽의 낙동강 본류에는 ‘龜潭江’이 적혀 있는데, 낙동강 전체가 아니라 표시된 근처에서만 부르던 명칭이다. 그리고 낙동강 변에 知保津과 河豊津 등 2개의 나루만이 적혀 있지만, 실재로는 훨씬 많이 있었다. 이러한 나루의 명칭은 나루 그 자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 의해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아래쪽의 長安菴 맞은편 지역은 하천이 거의 180˚ 돌아 흘러가는 곳으로, 장안암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장소의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지도에는 書院·祠·社가 각각 2개씩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중 三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이황(1501-1570)·유성룡(1542-1607)을 배향하여 인조 21년(1643)에, 尙節祠는 정몽주 피살 후 의령으로 귀양 갔던 安俊(?-?)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浣潭里社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鄭光弼(1462-1538)과 그 조상·자손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세워졌다. 각각의 배향 인물로 보아 書院·祠·社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社는 일개 가문에서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寺刹도 4개나 표시되어 있어, 유교 사회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울산부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시내와 울주군 강동면·범서면·청량면·웅촌면·온양면·서생면·온산읍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3개의 하천이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바로 아래쪽이 태화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동천강이며, 맨 아래쪽이 현재의 회야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無里龍山인데, 읍치와 산세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하천 너머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읍치 바로 오른쪽으로는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보이고 있다. 경주의 後營·대구의 中營·안동의 前營을 관할하였으며, 현재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있었다. 읍치와 좌병영에 모두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 아래쪽의 甑城은 현재 鶴城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과 1598년 1월 사이에 朝明聯合軍과 倭軍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남해안으로 후퇴한 왜군은 증성과 지도 맨 아래쪽의 西生鎭에 倭城을 쌓고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말이 넘나들지 못하도록 설치한 牧場馬城의 모습이 성문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이곳은 監牧官이 파견되었던 蔚山牧場이며, 감목관이 머물렀던 곳은 목장마성 위에 牧官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현대계열의 회사가 밀집해 있는 울산광역시 동구일대에 해당된다. 그 왼쪽에는 통일신라 말기 처용설화의 근원지였던 處容岩이 보이고 있다. 그 위쪽의 舊開雲浦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이 海神에게 빌어 구름과 안개를 걷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개운포이다. 여기에는 원래 수군이 주둔하던 개운포진이 있었는데, ‘戰船泊處 ’는 그러한 흔적을 반영하는 지명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동래로 옮겨갔기 때문에 구개운포라고 표현한 것이다. 鷗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오른쪽의 亏佛祠는 祀典에 小祀로 기록되어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민간신앙이 수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여러 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이 밖에 사찰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특이한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熊山(703m)이다. 지도에는 熊巖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면서도 과장되게 그렸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에는 제단 모양을 그려 넣어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에는 일본과 가까운 해안가이기 때문에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전략적 요인 때문에 수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은 ‘○○鎭’으로, 정4품의 水軍萬戶나 종9품의 水軍別將이 파견된 곳은 ‘○○陣’으로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船所’라는 표시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船所란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각 鎭堡에 배치된 전선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邑船所는 웅천현 관할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던 곳이며, 각 鎭堡가 관할하던 곳에는 선소 앞에 관할 진보의 이름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倭城도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倭軍은 울산-순천에 이르는 해안가로 후퇴한 후 수많은 倭城을 쌓아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는 이 왜성을 근거지로 다시 북상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왜군이 저항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2개의 倭古堞과 1개의 古倭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흔적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 바닷가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덕도를 제외하면 크기의 비교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만 좀 큰 섬이면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人居’라는 표시를 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封山도 2개나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조선후기에 산림의 남벌로 戰船의 船材 조달도 어렵게 되자,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지역이다. 기타 도로와 봉수 등의 정보가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세한 편이다.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을 기록하였다.(이기봉)
의령현은 궁유면의 운계리·평촌리·벽계리를 제외한 의령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는 선조 22년(1589)에 만들어진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표시된 德山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낙동강 본류가, 아래쪽에는 그 지류인 남강이 흘러와 합류한다. 남강 변에 있는 鼎巖津은 솥 모양의 큰 바위가 강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갈수기 때 남강을 거슬러 오르는 수많은 소금배의 최종 정박처로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 내내 남강에서 가장 번성한 浦口였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이 남산천이며, 북쪽의 것이 유곡천이다. 후자의 지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新繁縣이 있었다. 지도 오른쪽에 毛兒面·大谷面이 있는 지역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강의 지류인 양천의 최상류에 속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谷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효종 7년(1656)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9)에 賜額받았다. 사찰의 표시도 아주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寶泉寺에는 보물 373호로 지정된 3층석탑과 472호로 지정된 부도가 보존되고 있다. 이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으로 구분했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의성현은 의성군 의성읍·단촌면·점곡면·옥산면·사곡면·춘산면·가음면·금성면·봉양면, 교안리·검곡리를 제외한 신평면, 하평리·금곡리를 제외한 안평면, 군위군 고로면에서 양지리를 포함한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성읍 후죽리·도동리·도서리 일대에 있었다. 의성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이 위천의 지류인 쌍계천 유역이고, 위쪽이 안동의 풍산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안망천의 상류이다. 후자에는 高丘縣이 있었으며, 仇火面의 ‘구화’는 고구현의 옛 이름이다. 하천이 지나치게 굵게 표시되어 있어 실제보다 훨씬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聞韶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聞韶는 의성의 옛 이름이다. 이 고을은 원래 신라에 의해 병합된 召文國이었다고 하며, 지도 아래쪽의 召文面과 金鶴山 사이가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대형의 탑리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으며,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국보 77호 탑리 5층석탑도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개의 書院, 2개의 祠, 1개의 齋, 9개의 書堂이 주기뿐만 아니라 지도에도 빽빽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중 金安國(1478-1543) 등을 배향한 氷溪書院만이 선조 9년(1576)에 賜額 받았다. 書堂이 이 고을에만 많았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의 최초 작성자는 이 고을의 학문적 분위기를 특별히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빙계서원 옆의 氷穴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곳으로,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춘산면 빙계리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孤雲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31본산의 하나이며, 신라 때 義湘法師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보물 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통일신라 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이기봉)
의흥현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우보면·부계면·산성면과 고로면 남쪽,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향교 뒤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고을의 남쪽과 동쪽에는 八公山(1,192m)과 華山(828m)을 비롯한 7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포진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의흥현은 지도에서처럼 2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으며, 읍치가 지나치게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까지 원래 2개의 고을이었던 것이 조선 초에 완전히 합쳐졌기 때문이다. 縣內面이 있던 곳이 고려 말에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缶溪縣의 중심지였으며, 그 아래쪽의 缶溪倉이 옛 지명을 그대로 잇고 있다. 현내면을 중심으로 부서면·부동면·부남면이 부계현의 지역이었으며, 현재의 군위군 부계면 전체와 산성면의 동쪽 및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화산 위쪽에 北門과 南門의 표시가 있는데, 이곳을 華山城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넓은 高位平坦面이 형성되어 있어 성곽을 축조하기에 알맞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35년(1709)에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정부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으면서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숙종(1675-1720)과 영조(1725-1776) 때 대대적으로 대형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 화산성 역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축조된 대형 산성 중의 하나이다. 산성 안에는 戰時가 아닐 때 보수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軍需寺와 장기전을 위해 필수적인 食水源인 龍潭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인동부는 칠곡군 기산면·약목면·북삼면, 석적면과 금화리 서쪽의 가산면, 낙동강 동쪽의 구미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미시내 인의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流岳山(839m)이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다. 인동현에는 조선 초까지도 若木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낙동강 서쪽의 若木面 지역에 있었다. ≪嶺南地圖≫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鄕校가 사각형 모양의 읍치 안쪽에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위에 만들어져 있어, 하늘이 만든 것 같다는 天生山城이 보이고 있다. 원래 신라의 옛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선조 34년(1601)에 둘레 3,612척(약 1,084m)의 外城을 쌓았다고 한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築造하거나 修築한 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이 지도에는 천생산성이 간단하게 이름만 나오는데, 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낙동강 변에는 범람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숲이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보이고 있다. 吳山書院은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吉再를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세우고, 광해군 때 사액 받았다. 서원 오른쪽에 표시된 비문 모양은 吳泰山에 있었다는 吉再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것이 砥柱로 기록되어 있다. 東洛書院은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장현광(1554-1637)을 배향하여 효종 5년(1654)에 세워지고, 숙종 2년(1676)에 사액 받았다. 그 밖에 사찰도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자인현은 경산시의 자인면·남산면·용성면과 압량면의 백인리·가일리·강서리·당리리, 진량면의 남쪽 절반 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자인면의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현은 조선 초까지도 경주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인조(1623-164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독립된 고을이 되었다. 下北面 즉, 현재의 진량면 남쪽 부분에 있었던 仇史部曲도 조선 초에는 경주의 屬縣이었다. 효종(1649-165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자인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이며, 남·동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1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觀瀾書院은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받지는 못했다. 忠賢祠에는 임진왜란 때 이 고을의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崔文炳(?-1599)이, 그 아래쪽의 南川尙德祠에는 인조 때 자인현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있는 이광후·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 배향된 인물을 통해 書院과 祠는 서로 격이 달랐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사찰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을 통해, 불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이기봉)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남구의 장기면·구룡포읍과 대보면의 대보리·강사리, 동해면의 상정리·중산리·공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巨山이다. 읍치는 산 중턱의 평탄한 지형 위에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石築의 작은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성곽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상당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 위쪽에는 牧場城門이 서북-동 방향의 긴 城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城은 군사용이 아니라 이 목장에서 길렀던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서북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특별히 城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輿地圖書≫에는 冬乙背串牧場에 331마리의 말을 키웠다고 나오며, 울산목장에 속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오른쪽 끝은 현재의 장기곶에 해당된다. 동북쪽 바닷가로 더 튀어 올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市嶺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竹林書院은 숙종 33년(1707)에 송시열(1607-1689) 등을 배향하여 창건하였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대덕면·부항면, 구성면의 상원리·미평리 서남쪽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지례면 교리·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龜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삼도봉(1,177m)과 대덕산(1,290m) 등 소백산맥이 지나가며, 남쪽과 동쪽으로도 높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는 牛頭嶺이 표시되어 있는데, 거창과 지례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였다. 고을 동·서·남의 삼면에서 흘러온 물이 甘川이 되어 동북쪽의 金山(지금의 김천)으로 흘러나간다. 읍치에는 華玉亭, 鑑湖亭, 寒松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중 鑑湖亭은 숙종 16년(1690)에 현감 조인상이 연못을 파서 세운 정자로서, 이름만으로도 정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기타 남북의 주요도로가 마치 직선으로 이루어진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적황색 직선의 실선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진보현은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의 관리 북쪽과 영양군 입암면의 신구리 남쪽, 석보면의 택전리·화매리·포산리·삼의리,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남쪽에 있는 南角山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현재는 안동시 임하면에 임하댐을 설치하여, 읍치 부근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반변천에는 경치 좋은 장소가 많은데, 이곳에 표시된 文岩과 孔岩은 실제 모양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천변에는 風呼亭·玉流亭 등의 風流 있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인 厲壇·城隍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제단들은 고을을 통치하며, 대표하는 자로서의 수령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운영되었다. 아울러 읍치 주변에 입지시킴으로써 읍치의 공간적 위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鳳覽書院은 선조 32년(1599)에 세워졌고, 숙종 16년(1690)에 賜額 받았다. 이곳에는 主理哲學의 대가이며, 본관이 이 고을인 退溪 李滉(1501-1570)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동리면은 실재로 영해부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에 가까운 곳이었다. 더 오른쪽에 眞寶地라고 표시된 낙평은 현재의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로서, 영덕의 땅인 지품 지역을 넘어가 있었던 越境地였다.(이기봉)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진해현은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진북면, 봉암리·양촌리를 포함한 남쪽의 진전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동면의 진동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6-700m의 산지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남해로 빠져 나간다. 현재의 진해시는 일제시대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서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웅천현에 속해 있었다. 고을이 작아 선조 3년(1570)에는 함안에 붙였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세워지고, 인조 5년(1627)에는 창원에 붙였다가 17년(1639)에 다시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의 鷲山(수리봉)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으며,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社壇과 鄕校(文廟)가 보인다. 사단은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며, 향교의 大成殿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해안가에 2개의 창고가 보이고 있다. 統都廳은 統營都廳倉의 줄임말로서, 이 고을에서 통영으로 받쳤던 세금을 모아 두던 곳이다. 咸安海倉은 이 고을 바로 북쪽에 있으면서, 바다와 접해 있지 않았던 咸安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그 왼쪽의 船所는 戰船이 정박했던 곳이다.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주기를 통해 常令驛에 大馬 2필, 騎馬 5필, 卜馬 10필이 배치되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이기봉)
창녕현은 창녕군의 창령읍·대지면·유어면·이방면·대합면·성산면·고암면과 남지읍의 월하리·시남리·대곡리·반포리·칠현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령읍 교상리·말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있는 火旺山(757m)이다. 지도는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아래쪽의 낙동강은 왼쪽(북)에서 오른쪽(남)으로 흘러 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여러 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아울러 梨旨浦·樓仇澤도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우포를 비롯한 늪지가 보전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대가 낮아 홍수시 낙동강의 물이 역류하여 올라오기 때문에 광범위한 습지가 유지·보전될 수 있었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山城은 화왕산성으로서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石築으로 쌓은 대형의 산성이다. 읍지에는 9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의 못이 龍池로 표현된 것 같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바로 이 산성에 들어와 紅衣將軍으로 칭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나오고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冠山書院은 영남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曺植(1501-1572)과 이황(1501-1570) 모두에게서 배운 광해군 때의 학자 鄭逑(1543-1620)가 서재를 만들어 강학하던 곳이다. 그가 죽은 후 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숙종 37년(1711)에 사액 받았다. 그 왼쪽의 燕巖書院은 정구의 제자인 成安義(1561-1629)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成氏世德祠에는 세조 때 死六臣의 하나이며, 본관이 창녕인 成三問(1418-1456)을 비롯하여 그 조상·자손 등 成氏 8인을 배향하여 세워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祠는 書院과 달리 지역 전체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성씨의 문중만을 대표하여 세워진 경우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읍치에는 사적 80호로 지정된 가야시대의 수많은 고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는 이와 같은 고분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창원부는 지금의 대산면을 제외한 창원시 전체, 마산시 시내·내서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원시 소계동·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뒤쪽의 檐山이다. 이 고을은 조선 태종 때 義昌縣과 會原縣을 昌原이란 이름으로 합쳐 만들어졌는데, 회원현의 중심지는 회원서원 부근에 있었다. 檜原書院은 鄭逑(1543-1620)와 그의 제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인조 12년(1623)에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읍치 아래쪽의 鄕賢祠는 朴身潤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지만, 역시 사액 받지는 못했다. 여기서 박신윤이란 인물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을 통해 서원과 향현사 사이에 격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西三面에 있는 月影臺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月影臺’라는 글자를 楷書體로 손수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쪽의 해창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 이곳은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征東行省을 설치한 合浦로서, 3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출발지이기도 하였다. 舊兵營은 태종(1401-1418) 때 慶尙右兵營이 세워졌다가 선조(1568-1608) 때 진주로 옮겨간 곳이다. 그 옆의 盤龍山 밑에는 영조 36년(1760)에 盤山倉이라는 漕倉을 설치하여, 근처 9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서울로 옮겼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이 지도가 1760년 이전의 상황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3개,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국가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伐木을 금지시키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의 自如驛에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이기봉)
청도군은 지금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 전체와 밀양시 청도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양읍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있는 鰲山이다. 읍치에는 선조 24년(1596)에 쌓은 石築의 邑城이 있었다. ≪嶺南地圖≫에는 일반적으로 城郭의 유무를 표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는 하천이 매우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의 상류이다. 읍치 남서쪽의 外西面은 밀양강에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청도천의 최상류 盆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듯이 거의 越境地에 가까운 땅으로 현재는 밀양시 청도면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을은 한성-동래를 잇는 大路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읍성의 축성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밀양강 아래쪽에는 ‘賊路要衝’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양쪽의 험한 산지로 인한 좁은 골짜기가 수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곳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古山城基는 烏惠(또는 烏禮)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레 9,980척(약 2,994m)에 이르는 대형이다. 신라 때의 仇刀城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이 가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관방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그 위쪽의 古山城은 여러 기록에 동서가 모두 석벽이라고 나오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省峴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16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왼쪽의 古伊西國은 ≪三國史記≫에 儒禮尼師今 14년(297)에 신라의 金城을 공격한 나라로 나온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도에는 賜額 받은 紫溪書院만이 표시되어 있어, 격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서원은 戊午士禍(1498)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선조 11년(1578)에 건립되고, 현종 2년(1661)에 사액 받았다. 사찰은 서원보다도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오른쪽의 雲門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되었고, 고려 태조가 雲門禪師라 이름붙인 곳이다. 보물 193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청송부는 진보면과 파천면 북부를 제외한 청송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의 것이 길안천이고 위쪽의 것이 용천천인데, 두 하천 모두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조선 초까지 길안천 유역에는 安德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다. 지도에도 安德古縣倉을 표시하였으며, 面의 명칭인 현내면·현북면·현서면·현남면·현동면도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표현해주고 있다. 용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 靑寶郡이 하류에, 松生縣이 상류에 있었다. 조선 세조 때 두 고을을 합하고, 각각 한 자씩 따와서 靑松府라고 하였다. 戶數의 측면에서 보아 그리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고을의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本鄕(본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을에는 두 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의 屛岩書院은 主氣論을 대표하는 李珥(1536-1584)와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賜額받았다. 지도 왼쪽의 松鶴書院은 主理論을 대표하는 李滉(1501-1570)·金誠一(1538-1593)·張顯光(1554-1637)을 배향하여 숙종 25년(1699)에 세워졌는데, 사액 받지는 못했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하나의 고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放光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객사 남쪽에 있었던 讚慶樓가 병기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周房山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周王山(720m)이다. 이 지도의 단점은 ≪영남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하천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혼돈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송라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작은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청하초등학교 근방에 일부가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보이는 呼鶴山이며, 대부분의 읍지에 ‘읍치 서쪽 9리에 있다’고 나온다. 서쪽으로는 內延山(710m) 등의 높은 산봉우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고을의 동쪽 해안가에 가까워지면서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서쪽의 높은 산줄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로 합류되지 않은 채 동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의 명칭이 北川과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각각 광천과 청하천 등 고유 지명을 따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鳳松亭은 長松 수백 그루가 바닷바람을 막아주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읍지에는 ‘동쪽 2리에 있었다’고 나오며, 현재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도 위쪽의 鶴山書院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옆의 寶鏡寺에는 고려 고종 13년(1226)에 세운 圓眞國師碑가 보물 25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松羅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는 높이 21m의 거대한 바위가 바닷가에 솟아있는 釣鯨臺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초계군은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적중면·청덕면·쌍책면·덕곡면, 율곡면의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 대양면의 백암리·오산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淸溪山이다. 하천은 크기를 구별하기 어렵게 그렸다. 읍치 위쪽이 지도에는 ‘黃芚江’으로 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다. 오른쪽의 낙동강은 위쪽에는 ‘開山江下流’라고 적혀 있는 곳이 본류에 해당된다. 당시에는 고령과 맞닿아 있는 낙동강을 開山江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高靈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을 의미한다. 낙동강 변에는 몇 개의 津이 보이고 있는데, 나루를 가리킴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폭과 1척의 나룻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읍치가 있는 곳은 ‘펀치볼’이라 불리는 양구의 해안면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이다. 현재 이 분지는 초계면과 적중면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書院이 보이고 있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칠곡부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지천면·동명면과 가산면의 동쪽 일부, 대구광역시 북구 서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동명면 架山山城 안에 있었다. 칠곡부는 조선 초까지도 성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조선에서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대형 산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대형의 산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매우 빠른 시기인 인조 18년(1640)에 架山山城이 만들어졌다. 이 가산산성은 한양-동래를 잇는 大路에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한 최고의 關防處로 여겨졌다. 所也峴에서 琴湖津으로 연결된 적황색 도로가 바로 이 대로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都護府가 설치되면서 성주로부터 독립된 고을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에서도 읍치가 있는 內城을 비롯하여 북쪽의 中城과 남쪽의 外城 등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산성 안에는 일상적인 성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찰이 2개 보이고 있다. 이 중 외성에 있는 天柱寺에는 軍器·弓·箭(화살)을 보관했던 것으로 여러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향교는 원래 읍치 근처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고을에서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훨씬 남쪽의 八莒面에 있었다. 읍치가 架山(901m) 주변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八莒面에서의 八莒란 명칭은 칠곡의 古號이며, 후에 이곳으로 읍치를 옮긴다. 현재의 위치는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일대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泗陽書院은 鄭逑(1543-1620)를 배향하여 효종 2년(1651)에 설립된 서원으로, 현재 지천면 신리에 있었다. 下北面 동쪽에 있는 松林寺에는 통일신라 때 건립한 塼塔 중의 하나로서 보물 189호로 지정된 5층탑이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며, 아래쪽은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이기봉)
칠원현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칠서면·칠북면과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 2리에 있었다’는 靑龍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龜山面은 창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였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조선 초까지 龜山縣이 칠원현의 속현으로 존재했었다. 이 구산현은 본래 省法部曲이었는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되었고 공민왕(1352-1374) 때 칠원현의 속현이 되었다. 이곳에는 칠원현에서 수도인 한양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海倉,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龜山鎭,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재정의 결핍으로 宮房 및 王室에게 租稅勸을 나누어주었던 屯稅所가 2군데나 보이고 있다. 水晶浦稅所도 같은 유형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가며, 읍치 왼쪽의 古川은 현재 광노천으로 불리고 있다. 낙동강 변에는 3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津의 폭과 이곳에 4척의 津船(나룻배)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읍치 아래쪽의 德淵書院은 周世鵬(1495-1554)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았다. 주세붕은 중종 37년(1542) 풍기(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땅에 처음으로 白雲洞書院(지금의 紹修書院)을 세운 사람이다. 기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船材封山이 기록되어 있다. 거리를 볼 때 모두 구산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封山은 전선의 선재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것이기 때문에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다.(이기봉)
풍기군은 지금의 영주시의 풍기읍·봉현면·안정면과 예천군의 상리면·하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은 내성천의 지류인 남원천 유역이고, 왼쪽은 역시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두 지역은 고려 말까지 각각 안동의 屬縣인 基川縣과 殷豊縣으로 독립적인 고을이었다.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기천현에 監務를 설치하면서 은풍현을 속현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문종의 태를 殷豊縣 鳴鳳寺 뒷산에 안치하면서 두 현을 합쳐 豊基로 고치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은풍현은 현재의 영주시 상리면과 하리면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 아래쪽의 殷豊倉이라는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위쪽의 郁陽書院은 이황(1501-1570)과 황준량(1517-1563)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아래쪽의 愚谷書院은 풍기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던 유운룡(1539-1601) 등을 배향하여 숙종 34년(1708)에 세워졌지만 賜額書院은 아니다. 사찰도 총 4개가 표시되어 있어 불교에 대한 인식도 유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죽령 바로 밑의 땅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순흥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죽령이 마치 풍기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하동부는 하동군 하동읍·고전면·양보면·황천면·적량면·악양면·화개면과 북천면의 방화리·사평리·직전리, 진교면의 월운리·관곡리·고이리·백련리·송원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다. 古縣面에 있는 성곽은 세조 7년(1461)까지 읍치로서 기능했으며, 세종 때 쌓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곳이 읍치로, 뒤쪽의 陽慶山이 고을의 鎭山으로 나온다. 이후 여러 번 읍치를 옮겼으며, 지도에 표시된 읍치는 영조 21년(1745)에 옮겨진 곳이다. 숙종 28년(1702)에는 진주의 화개면·악양면·적량면·진답면 등 4개 면을 편입하여 2년 후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화개면·악양면은 고려시대에 진주의 屬縣으로 존재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섬진강이 보이고 있는데, 이름이 유래된 蟾津이 읍치 왼쪽 아래에 보이고 있다. 악양면 섬진강가에 있는 ‘賊路要害處’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깎아지른 강가의 절벽이 구례까지 계속 이어지는 곳이다. 적의 침입 시 이 지역에서 북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그 아래쪽에는 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雙磎寺가 가장 유명한데, 문성왕 2년(840)에 眞鑑禪師 慧昭가 만들어 옥천사라 불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여러 개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船所와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선소란 전선을 정박시키는 곳이며, 해창이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나르던 곳이다. 선소 위의 待變亭은 전선을 관리하던 곳이다. 그 위쪽에 보이는 統倉은 이 고을에서 統營으로 가는 稅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내횡면에 있는 永溪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이고, 무오사화(1504) 때 종성에 귀양 가서 죽은 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이기봉)
하양현은 경산시 하양읍, 계전리를 포함한 남쪽의 와촌면, 신상리-봉화리-문천리를 포함한 북쪽의 진량면,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각산동·신서동·동내동 일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無落山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금호강인데, 위쪽의 주기에는 금호천으로 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3단1묘는 일반적으로 읍치 주변에 배치되며, 고을 수령의 권위와 그가 거주하는 공간의 위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 성황단과 여단은 고을 백성을 대표한다는 성격을, 사직단과 문묘는 중앙의 임금을 대신한다는 성격을 지닌 제사공간이었다. 지도 왼쪽에는 경산 북면과의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安心面이 원래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진 安心所의 지역이었는데, 麗末鮮初를 지나며 거리상 가까운 경산이 아니라 좀더 먼 하양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琴湖書院은 許稠(1369-1439)를 배향하여 숙종 10년(1684)에 세워지고, 정조 14년(179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서원이 未賜額으로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의 내용이 1790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조가 이곳에 배향된 이유는 조선 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본관이 河陽이어서, 이 고을의 품격을 대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이기봉)
함안군은 함안군 함안면·여항면·군북면·법수면·가야읍·대산면·산인면과 마산시 진전면의 여양리·고사리·평암리·금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남쪽에 있는 餘航山(744m)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邑治’라는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있는데, 읍치의 방향이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이 매우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嶺南地圖≫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표현 방법으로서, 한 사람이 모든 지도를 일률적으로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함안은 신라 법흥왕(514-540) 때 멸망시킨 阿尸良國, 일반적으로 阿羅伽倻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그 흔적으로 읍치 위쪽의 城山만 나오고 있다. 이 성산에는 산성이 남아 있는데,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북쪽, 지금의 가야읍 일대에는 대형고분이 능선 위에 줄을 지어 남아 있다. 지도에는 4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西山書院만이 세조 왕위 찬탈에 반대한 生六臣을 배향하여 숙종 32년(1706)에 세워지고, 경종 3년(1723)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比谷面은 높은 산줄기 남쪽에 떨어져 있는데, 현재의 마산시 진전면 북쪽에 해당된다.(이기봉)
함양부는 함양군 함양읍·백전면·병곡면·지곡면·수동면·유림면·휴천면·마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향교 위쪽의 白巖山이다. 읍치에는 둘레 7,035척(약 2,111m)의 대형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읍치는 원래 古邑基라 표시된 곳에 있었다. 倭寇의 침입으로 인해 함락 당하자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읍성 안에는 學士樓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다. 함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인 崔致遠(857-?)이 太守로 부임하여 남긴 치적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㵢溪亭·白沙亭 근처에는 최치원이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여, 당시의 읍치를 보호하게 했다는 上林과 下林이 있었다. 현재는 상림만이 남아 있고,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학사루도 최치원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고을은 전라도의 운봉·장수와 연결되는 八良嶺(팔량치)·中峙(중고개) 등이 있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전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古城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 서원은 총 5개가 표시되어 있다. 蘫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명종 7년(1552)에 세워지고, 명종 21년(1566)에 사액 받았다. 溏洲書院은 이조판서를 지냈던 盧禛(1518-1578)을 배향하여 선조 14년(1581)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는 賜額書院이 아니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沙斤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찰은 당시에 폐사된 것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간에서는 불교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있다.(이기봉)
함창현은 상주시 이안면·공검면, 금곡리·하갈리를 제외한 함창읍, 은척면 황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쪽 경계에 있는 宰岳山이다. 읍치 아래쪽의 利安川은 상주로부터 흘러들어와 串川으로 표시된 현재의 영강(낙동강의 지류)으로 흘러 나간다. 원래 현의 서쪽 5리에 있었다는 利安部曲의 명칭에서 유래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咸昌黃嶺寺’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상주의 땅을 넘어가 있는 함창의 越境地지이며, 현재의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恭儉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로는 ‘공갈못’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제 19대 명종(1170-1197)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에 다시 修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최초의 것은 11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수지가 있는 곳의 물은 모두 상주 땅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함창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함창 사람과 상주 사람 사이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저수지가 축조된 것은 이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공검지는 모두 메워져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검면 면소재지 부근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못둑’이라는 마을의 지명이 남아 있다. 그 밖에 공검지 위쪽에 표시된 臨湖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읍치에 있는 司倉은 관아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관하던 곳이다.(이기봉)
합천군은 합천군 합천읍·가야면·야로면·묘산면과 송림리-봉계리를 포함한 봉산면의 북쪽, 죽죽리를 제외한 용주면, 백암리·오산리를 제외한 대양면,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을 제외한 율곡면, 의령군 궁유면의 평촌리·벽계리·운계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리에 있었다는 北山이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진다. 위쪽이 회천의 상류이며, 아래쪽이 황강유역이다. 회천의 상류에는 조선 초까지 冶爐縣이 屬縣으로 존재했으며, 縣東面의 ‘縣’이 야로현을 의미한다. 기암절벽과 그 위의 정자 및 폭포 등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절벽 길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군사적인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어, 향촌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伊淵書院은 연산군의 무오사화(1504) 때 죽음을 당한 김굉필(1454-1504)과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여 선조 19년(1589)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華巖書院은 김굉필과 더불어 제자를 키운 朴紹를 배향하여 효종 4년(1653)에 세워지고, 영조 3년(1727)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 祠는 모두 사액 받지 못했다. 가야산 주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수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어, 결코 작지 않은 불교의 영향력도 이해할 수 있다. 가야산 밑에는 海印寺와 藏經閣이 약간 좀이 먹어 글씨를 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건립되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장격각에는 몽고의 침입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5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그 옆의 學士臺는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내며, 수많은 설화를 남긴 崔致遠(857-?)의 호를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이기봉)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유가면·구지면과 논공읍의 상리 동쪽, 고령군 개진면의 동쪽 옥산리 일대, 우곡면의 동남쪽 답곡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현풍면 부동에 있었다. 읍치 주위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중 城隍壇을 제외한 社壇·厲壇·文廟(향교)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琵瑟山(1,083m)을 비롯하여 높은 산지가 펼쳐져 있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동서를 오가는 나루(津)가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현풍현의 지도이기 때문에 서쪽의 고령으로부터 흘러와 왕지면에서 합류하는 회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낙동강 서쪽에 있는 津村面·畓谷面·王旨面은 고령과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하천에 의해 현풍과 분리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현풍과의 연결성이 더 좋은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仇之面은 仇知山部曲이 있던 곳으로 현재도 달성군 구지면으로 불리고 있다. 이 부곡은 원래 현재의 밀양에 딸린 곳이었는데,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현풍으로 소속을 옮긴 후 面으로 재편되면서 독자적인 성격을 상실하였다. 지도에는 각각 2개의 書院과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禮淵書院은 숙종 18년(167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본관이 이 고을 현풍이고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일어난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곽재우(1552-1617)와 안음현감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곽준(?-1594)이 配享되었다. 지도 왼쪽의 道洞書院은 선조 40년(160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김종직(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1498) 때 유배당하고 갑자사화(1504) 때 처형당한 김굉필(1454-1504)을 배향하였으며, 이후 정구(1543-1620)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중 道洞書院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淸白祠와 松潭祠는 사액서원이 아니다. 비슬산 주변에는 3개의 절이 표시되어 있어, 사찰이 서원 못지않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瑜珈寺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숙종 25년(1699)과 영조 52년(1776) 등 많은 중창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찰이다.(이기봉)
흥해군은 포항시 흥해읍과 시내의 우현동·창포동을 포함한 북부, 연일읍의 달전리·자명리·유강리·학전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왼쪽에 표시된 禱陰山이다. 도음산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船材)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封山의 둘레가 40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2개의 하천이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이 현재의 형산강이고, 위쪽이 곡강천이다. 형산강은 경주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은 하천에 불과한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곡강천은 지도에 北川과 曲江 2개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이름의 통일화 작업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르게 불렀음을 보여주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北川이란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울러 이 曲江은 신라 때 吐只河라고 불렸으며, 中祀에 東瀆이라 실려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닷가에 있는 烏島도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작지만 섬이 거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曲江書院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 출신인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주기에는 北上面, 지도에는 上北面이라고 표기한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이기봉)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30里에 있었다’는 麻耆羅山이다. 지도에서 읍치는 郡內面에 있었는데, 衙舍·官廳·客舍·司倉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다. 객사 위쪽의 社壇은 土地神에게 제시 지내던 곳으로,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서쪽(위)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쪽(아래)으로 흘러 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하천의 명칭은 대부분 고유명을 띄고 있다. 읍치 왼쪽과 오른쪽의 南川·北川만이 방위를 중심으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남천·북천 등은 상당수의 고을에서 나타나는 명칭으로, 읍치를 중심으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바닷가에는 永朗湖·松池浦·仙遊潭·乾津浦 등의 석호가 보이고 있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大路·中路·小路’란 단어를 써 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쪽(위)으로 넘어가는 도로 위에는 고개의 이름이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이 중 彌矢岺이나 珍富岺 등은 현재도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다만 진부령의 경우 훨씬 동남쪽(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치 읍치의 정 동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미시령-진부령의 실재 거리는 진부령에서 ‘北’자가 쓰여 있는 곳까지의 거리에 비해 1/10도 안된다. 해안가에는 3개,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섬 이름이 적혀 있다. 실재로 이 섬들은 매우 작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關東八景의 하나로 아려진 淸澗亭도 영랑호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烽燧의 경우 모두 ‘今廢’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지도 작성 당시에는 이 봉수들의 기능이 정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강릉부는 강릉시 전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정선군의 임계면, 홍천군의 내면, 묵호항을 포함한 북쪽의 동해시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아래쪽 바닷가의 鄕校 근처이다. 고을의 鎭山은 특이하게도 구체적인 산이 아니라 大關嶺이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오른쪽(북)에서 왼쪽(남)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南大川을 비롯한 백두대간 아래쪽(동)의 하천은 모두 동해로 흘러간다. 백두대간 위쪽에는 남한강 상류가 왼쪽에 표시되어 있고, 북한강의 지류인 내린천 상류가 오른쪽에 보이고 있다. 전자의 지역은 현재 평창군 대부분과 정선군 임계면에 해당되며, 후자의 지역은 홍천군 내면이다. 백두대간 위에는 대관령을 비롯한 주요 고개가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고, 도로 곁에는 곳곳에 驛이 보이고 있다. 해안가에는 바닷물의 작용에 의해 입구가 막혀 형성된 潟湖가 3군데(楓湖·浦·香湖) 보이고 있다. 이 중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鏡浦臺 아래쪽의 ‘浦’는 현재의 경포호를 의미하며, 풍호는 현재 메워져 버렸다. 지도 중간의 五臺山 밑에는 신라 때의 고찰로 유명한 上院寺와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아울러 5대 史庫 중의 하나였던 五臺山史庫도 2층의 樓閣 형태로 그려 놓았다. 書院은 2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이 外家인 李珥(1536-1584)를 배향한 松潭書院만이 현종 7년(1666)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주기에는 黃腸山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이기봉)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외금강면·서면·수동면과 장전읍 성북리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 상으로는 고성읍(장전항)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읍치는 현재의 고성군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아래쪽 가운데에 客舍·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를 環抱型으로 그렸는데, 풍수적 관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9리에 있었다’는 全城山인데, 지도에는 金城山으로 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산 중의 하나인 金剛山이 있는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위쪽(서)에 작은 산의 하나로만 표시되어 있다. 반면에 海金剛 부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 비해 축척이 확대되어 있다. 여러 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七星峯만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關東八景의 하나인 三日浦 역시 주변의 산세와 호수의 모습, 四仙亭 등 상대적으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鑑湖 왼쪽에는 ‘楊蓬業故墟’가 표시되어 있는데, 양봉업은 楊士彦(1517-1584)을 의미한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만폭동에 그의 글씨 8자가 남아 있는 등 금강산과 관련된 일화가 많은 인물이다. 읍치 아래쪽의 南江은 금강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南流하다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北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간다. 금강산 동쪽(아래)의 外金剛에는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알려진 楡店寺와 新溪寺를 비롯하여 유서 깊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신계사 위쪽의 九龍淵은 높이가 73m에 달한다는 九龍瀑布 밑에 형성된 못으로서, 깊이도 13m나 된다고 한다. 신계사 아래쪽의 溫井은 현재도 외금강온천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지도와 왼쪽의 주기에 黃腸山 1곳이 炭屯에 있었음을 표시하였다. 황장산이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소나무의 일종)을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 당시에 황장봉산이 중요한 정보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삼척부는 삼척시·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있었다는 葛夜山이다. 지도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西高東底의 지형적 요인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동쪽)로 흘러나가는 하천으로 유명한 것은 읍치 왼쪽의 오십천이다. 위쪽에는 왼쪽의 낙동강 상류와 오른쪽의 남한강 상류가 보이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는 약간 둥근 모양의 표시가 보이는데,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십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읍치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社稷壇이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竹棲(樓)도 표시되어 있다. 오십천 변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며, 현재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鎭營이 표시되어 있는데, 三陟浦鎭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고, 右營將을 겸했기 때문에 鎭營이라고 쓴 것이다. 지도 맨 오른쪽 해안가에는 平陵驛이 보이고 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5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驛 뿐만 아니라 사찰·창고 등도 집 모양으로 표시하여 구별이 쉽도록 하였다. 아울러 중요한 고개의 경우 사각형 안에 표시하여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다. 도로는 색을 통해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5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封山은 위쪽의 주기에도 적혀 있듯이,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공급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黃腸封山이다.(이기봉)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 가운데 아래쪽 바닷가에 衙舍가 있는 곳이다. 府內面이라는 명칭을 통해 이곳이 읍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사 왼쪽(남)에는 南大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안에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이다. 또한 읍치 남쪽을 흐르며, 해당 고을에서는 가장 크다는 의미로 南大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雪嶽山인데, 특별히 강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다만 설악산에서 읍치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의 모습을 통해 고을의 산세에 대한 지도 작성자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백두대간 위에는 중요 고개의 이름이 노란색 사각형 안에 쓰여 있다. 이 중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五色岺인데, 현재는 한계령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는 적황색·황색의 순으로 중요성을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황색 도로 위에 있는 五色嶺과 九龍嶺이 大路이며, 要害處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진짜 大路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다른 고개에 비해 중요한 도로라는 뜻 정도라고 생각된다. 衙舍 오른쪽의 祥雲館은 객사를 의미한다. 훨씬 왼쪽의 祥雲驛은 조선 초기에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府內面 아래쪽에 ‘東至海’를 큰 글씨로 써 놓은 것은 이 고을에 東海神에게 제사지내던 곳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東海神祠는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국가에서 봄·가을 2차례에 걸쳐 香祝을 내려 제사지냈다. 실제 위치는 상운관 아래쪽에 이름 없는 건물이 표시된 곳이었다. 이 건물이 아마 동해신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찰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이 중 해안가에 있는 洛山寺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기타 黃腸封山도 2군데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원래 강원도에 속했는데, 1962년에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아래쪽 해변 가의 衙舍·司倉이 있는 곳이다. 읍치 주변의 산세가 環抱型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왼쪽의 ‘壬坐’란 邑治가 북쪽(壬)을 등지고 입지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가운데에 있는 安逸王山이다. 지도는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위쪽의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왼쪽의 것이 현재 왕피천·불영천으로 불리는 하천이고, 그 오른쪽이 남대천이다. 현재 왕피천과 불영천은 기암절벽의 깊은 계곡과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흐르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왕피천의 경우 遠南面 남동쪽의 영양 지역으로부터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도 맨 위쪽은 낙동강 최상류에 속한다. 지도 아래쪽 바닷가에는 鬱陵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당시에 울릉도는 울진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流民들의 피난처라고 인식하여,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空島政策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이주민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울릉도가 실제 위치보다 해안가에 훨씬 가깝게 그려져 있다. 실질적인 거리보다는 그 방향에 이 섬이 있다는 것만 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의 순으로 그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적황색 도로에는 3개의 역이 보이고 있다. 가장 오른쪽 興富驛에 표시된 ‘館亭’에서의 館은 驛의 館舍를 의미한다. 지도 왼쪽의 주기에는 역에 딸린 말의 종류와 수도 자세히 적어놓았다. 도로 위의 중요한 고개는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하여 눈에 잘 띄도록 하였다. 지도 위쪽에 좀이 먹어 약간 잘 안 보이는 사찰이 佛影寺이다. 이 절은 신라 진덕왕 5년(651)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으며,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기타 망양정 위쪽에는 석회동굴인 聖留窟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벽양면,·임남면, 장전항 북쪽의 장전읍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총석정 남쪽의 통천군, 장전항 북쪽의 고성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통천군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가 安置된 客舍와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다. 서쪽(위)의 높은 산지로부터 읍치까지 이어진 산줄기의 강조를 통해 읍치 공간이 다른 공간에 비해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돌기둥이 우뚝 우뚝 솟아 있는 절벽과 그 위에 만들어져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 등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위쪽에 있는 亭子는 換仙亭이다. 지도에는 작은 하천들이 서쪽(위)에서 동쪽(아래)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재로는 서남쪽에서 동북쪽을 향해 바다로 나간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중요성이 표시되어 있다. 도로변에는 驛과 館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驛은 말을 갈아타는 곳, 館은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한 듯하다. 지도 왼쪽의 도로변에는 ‘瓮遷’이 속자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遷’이란 벼랑길을 의미하며, 기록에도 말 두 마리가 서로 엇갈려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고 나온다. 기타 사찰에 대한 표시가 자세하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도 1군데 보이고 있다.(이기봉)
평해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평해는 조선시대에 강원도 최남단의 고을이었다. 1914년에 강원도 울진군에 편입된 후, 1962년에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라고 표현된 곳이다. 衙舍란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던 관아건물을 일컫는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衙舍 바로 위쪽(서쪽)에 있는 釜谷山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입지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衙舍 아래쪽으로는 月松亭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왼쪽의 주기에는 邑治와 鎭에 모두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月松亭과 望洋亭은 해변 가에 입지하고 있어,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도 위쪽에는 古山城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성은 거의 사용되지 않던 것인데, 임란 이후 國防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자세하게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산성 아래쪽의 溫井은 현재도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망양정 위쪽의 鳴溪書院은 선조 때의 관리이자 학자로 알려진 黃應淸·黃汝一 등을 배향하여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도로는 등급에 따라 황적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이기봉)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이다. 일제시대의 통천군 흡곡면은 조선시대의 흡곡현과 관계가 없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오른쪽에 縣衙·客舍 등이 표시되어 있는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객사 오른쪽에 있는 朴山이다. 지도 왼쪽의 주기에는 이 고을의 호구가 적혀 있는데, 겨우 513호에 불과하다. 보통 작은 고을도 최소 2,000호 안팎이었던 점과 비교해 보면,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 중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사 오른쪽에는 侍中臺가 표시되어 있다. 韓明澮(1415-1487)가 이곳에 올라 구경하다가 세조가 右議政으로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섬들이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섬들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北關, 즉 함경도와 연결되는 중요한 도로가 보이고 있으며, 곳곳에 要衝處가 표시되어 있다. 가장 오른쪽의 霜陰遷에서의 ‘遷’은 벼랑길을 의미하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실재로는 함경도 安邊의 땅이었음에도, 자세하게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와 감물면 오창리, 불정면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錦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관념 속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을이 마치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울러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내부로 뻗은 산줄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지도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다. 달천강은 남쪽의 청주경계로부터 흘러들어 옴에도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왼쪽이 성황천, 오른쪽이 동진천이다. 읍치 주변을 강조하다보니까 달천강 본류와 그 지류들의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게 그려져 있다. 달천강에 있는 ‘梨灘’은 우리말로 ‘배나무여울’이다. 그 왼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槐江津’인데, 달천강 수운에서 배가 운행되는 최상류 부분이었다. 그 근처에 ‘槐灘’이 있었는데, 우리말로는 ‘느티여울’이라고 한다. 괴강진에 강을 건너기 위한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음이 뒤쪽의 주기에 표시되어 있다. 괴강진은 나루 이름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달천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기타 인문적 정보로는 서원과 사찰·면의 이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는데, 지도 왼쪽 위에는 面의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사각형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와 감물면 오창리, 불정면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錦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관념 속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을이 마치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울러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내부로 뻗은 산줄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지도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다. 달천강은 남쪽의 청주경계로부터 흘러들어 옴에도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왼쪽이 성황천, 오른쪽이 동진천이다. 읍치 주변을 강조하다보니까 달천강 본류와 그 지류들의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게 그려져 있다. 달천강에 있는 ‘梨灘’은 우리말로 ‘배나무여울’이다. 그 왼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槐江津’인데, 달천강 수운에서 배가 운행되는 최상류 부분이었다. 그 근처에 ‘槐灘’이 있었는데, 우리말로는 ‘느티여울’이라고 한다. 괴강진에 강을 건너기 위한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음이 뒤쪽의 주기에 표시되어 있다. 괴강진은 나루 이름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달천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기타 인문적 정보로는 서원과 사찰·면의 이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는데, 지도 왼쪽 위에는 面의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사각형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현재의 단양읍 중심지는 충주호의 건설 후 새로 만든 신단양이며, 과거의 중심지는 보통 구단양이라고 부른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켜,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흘러나간다. 남한강에는 上津과 下津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上·下란 명칭을 통해 고을 내부의 입장에서 나루의 이름이 붙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통시대에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地誌에 ‘나루’가 보통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하천 명칭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단양은 남한강과 그 지류에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丹陽八景’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한강변에는 오른쪽에 島潭(三峰)·石門이, 왼쪽에 玉筍峯 ·龜潭(峯) 등이 표시되어 있다. 도담삼봉의 경우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섬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는 강변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島潭과 龜潭에서 ‘潭’(연못)이 붙은 것은 두 지역이 모두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잔잔한 모습이 마치 ‘연못’과 같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下津으로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上仙岩·中仙岩·下仙岩이, 上津이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舍人岩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하천 변의 절벽과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작성자도 이러한 丹陽八景을 고을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내세우려 했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읍치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한 적황색 도로에는 영남과 충청 지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였던 竹嶺이 표시되어 있다. 죽령 오른쪽에는 ‘慶尙道順興界’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 밑의 昌落道(驛)가 있는 곳이 순흥의 월경지였기 때문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丹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면의 이름 등만 간단하게 수록하였다.(이기봉)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현재의 단양읍 중심지는 충주호의 건설 후 새로 만든 신단양이며, 과거의 중심지는 보통 구단양이라고 부른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켜,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흘러나간다. 남한강에는 上津과 下津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上·下란 명칭을 통해 고을 내부의 입장에서 나루의 이름이 붙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통시대에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地誌에 ‘나루’가 보통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하천 명칭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단양은 남한강과 그 지류에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丹陽八景’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한강변에는 오른쪽에 島潭(三峰)·石門이, 왼쪽에 玉筍峯 ·龜潭(峯) 등이 표시되어 있다. 도담삼봉의 경우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섬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는 강변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島潭과 龜潭에서 ‘潭’(연못)이 붙은 것은 두 지역이 모두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잔잔한 모습이 마치 ‘연못’과 같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下津으로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上仙岩·中仙岩·下仙岩이, 上津이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舍人岩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하천 변의 절벽과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작성자도 이러한 丹陽八景을 고을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내세우려 했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읍치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한 적황색 도로에는 영남과 충청 지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였던 竹嶺이 표시되어 있다. 죽령 오른쪽에는 ‘慶尙道順興界’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 밑의 昌落道(驛)가 있는 곳이 순흥의 월경지였기 때문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丹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면의 이름 등만 간단하게 수록하였다.(이기봉)
보은현은 보은군에서 회북면·회남면과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보은읍 삼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에 있는 俗離山이다. 읍치가 있는 쪽의 물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으로, 오른쪽 위의 물줄기는 남한강의 달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蛙山, 서쪽에는 蛇山, 동쪽에는 猪山, 남쪽에는 南山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위에 있는 산줄기를 제외하면 이 네 산으로 뻗은 산줄기만이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 지도의 작성자가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려 노력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俗離山이 매우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천황봉·문장대를 비롯한 봉우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속리산은 신라 때 俗離岳으로 불리며, 中祀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 초에도 大自在天王祠를 설치하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산이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도 속리산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린 듯하다. 산 아래에는 俗離寺를 비롯한 많은 암자가 표시되어 있다. 속리사 왼쪽의 다층 건물은 현재 국보 55호로 지정된 법주사 捌相殿이다. 팔상전은 인조 2년(1624)에 재건된 목조 5층 건물로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목탑이다. 읍치 오른쪽에는 三年城이 보이고 있다. 신라 자비마립간 12년(469)에 3년 간 쌓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三年山城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내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서 기능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象賢書院이 보이고 있다. 己卯士禍(1519) 때 귀향 갔다가 죽은 金淨(1486-1520) 등을 배향하여 명종 4년(1549)에 세워지고, 광해군 2년(1610)에 賜額 받았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중요도를 표시하였으며, 중요 고개마다 적황색 원의 표시를 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기타 위쪽의 주기에는 고개의 險夷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왼쪽의 주기에는 驛에 배치된 말의 上中下 등급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연풍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장연면과 충주시 상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풍면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의 伊火峴(현재의 이화령)에서 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2개의 작은 유역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오른쪽에는 長延縣이, 왼쪽에는 長豊縣이 있었다. 태조 3년(1394)에 두 고을을 합쳐 하나의 고을로 만들었으며, 태종 3년(1403)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延豊縣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水回面이 있던 곳은 원래 충주 소속의 水回村이 있던 곳으로, 성종 7년(1476)에 이 고을에 합쳤다. 지도 맨 위쪽에 창고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은 현재 하늘재 밑의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다. 이 하늘재는 鷄立嶺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阿達羅尼師今 3년(156)에 처음 열었다고 나온다. 이 밖에도 고개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특히 경상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鳥嶺과 伊火峴(현재의 梨花嶺)도 보이고 있으며, 조령에는 鳥嶺關의 모습을 실제처럼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에는 鄕校·城隍堂·潄玉亭을 남색의 사각형 안에 표시하는데, 面의 표시와 같아 약간의 혼동을 주고 있다. 이 중 성황당은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의 하나로서,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주기에 표시된 面의 이름과 지도상의 이름이 다른 점, 古沙里面은 古沙里로만 표시한 점 등도 눈에 띈다. 지도 위의 내용과 주기의 내용 차이는 어떤 역사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이 밖에 사찰·역·창고·봉수의 표시도 아주 자세하게 이루어져 있다.(이기봉)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는 於上川面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도 어상천면으로 불리고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任縣倉’이란 이름은 어상천현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를 북쪽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상류이다. 남한강변에는 기암절벽이 계속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가 영춘현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러한 경치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변에는 北壁을 비롯한 자연 경관과 亭子 등의 인문 경관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松坡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廢古城은 현재 溫達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 어느 쪽에서 만든 것인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이기봉)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는 於上川面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도 어상천면으로 불리고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任縣倉’이란 이름은 어상천현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를 북쪽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상류이다. 남한강변에는 기암절벽이 계속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가 영춘현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러한 경치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변에는 北壁을 비롯한 자연 경관과 亭子 등의 인문 경관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松坡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廢古城은 현재 溫達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 어느 쪽에서 만든 것인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이기봉)
음성현은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과 원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현재의 음성군은 대부분 충주의 땅이었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에 있는 가섭산(迦葉山)이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남한강의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음성천이며, 왼쪽은 금강의 미호천으로 들어가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다른 지도에 비해 산과 고개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 점이 특징이다. 적황색·황색·남색으로 도로의 중요성을 표시한 다른 지도와는 다르게 적황색만 사용하였다. 위쪽의 주기 嶺隘 부분에는 중요한 고개에 ‘大路’라는 표시를 하여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봉수는 호응 관계에 있는 다른 곳과 직선의 분홍색을 그려 넣었으며, 오른쪽 주기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역의 위치가, 주기에는 역에 배치된 말의 종류와 수를 써 넣어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모두 살리고 있다. 아울러 주기에는 東面이라 표시한 것이 지도에는 東道面이라고 나와 있어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읍치를 강조하기 위해 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를 상세하게 그렸다. 읍치 바로 뒤쪽의 산은 다른 산에 비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읍치 주변의 面 이름에 左·右란 글자가 들어간 경우가 있는데, 읍치 북쪽의 산으로부터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졌다. 물줄기는 고을의 산줄기를 강조하기하기 위해 일부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遠西面 오른쪽의 하천은 북쪽의 원주 경계를 넘어서 흘러들어 오지만,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원서면 바로 위쪽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란 대중가요 때문에 유명해진 박달재가 ‘朴達峙’로 나온다. 그 오른쪽에는 ‘朴達洞幕’, 즉 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런 酒幕은 조선후기에 고개나 나루 등 사람이 일시 머무는 곳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의 지도에는 별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는 신라 초기(보통 三韓時代라고 부름)에 만들어졌다는 義林池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의림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큰 규모로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아, 호수 면적에 비해 많은 저수량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수지 남쪽의 넓은 들판에 관개의 이로움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書院은 滄洲書院인데,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 寺刹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읍치를 강조하기 위해 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를 상세하게 그렸다. 읍치 바로 뒤쪽의 산은 다른 산에 비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읍치 주변의 面 이름에 左·右란 글자가 들어간 경우가 있는데, 읍치 북쪽의 산으로부터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졌다. 물줄기는 고을의 산줄기를 강조하기하기 위해 일부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遠西面 오른쪽의 하천은 북쪽의 원주 경계를 넘어서 흘러들어 오지만,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원서면 바로 위쪽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란 대중가요 때문에 유명해진 박달재가 ‘朴達峙’로 나온다. 그 오른쪽에는 ‘朴達洞幕’, 즉 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런 酒幕은 조선후기에 고개나 나루 등 사람이 일시 머무는 곳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의 지도에는 별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는 신라 초기(보통 三韓時代라고 부름)에 만들어졌다는 義林池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의림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큰 규모로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아, 호수 면적에 비해 많은 저수량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수지 남쪽의 넓은 들판에 관개의 이로움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書院은 滄洲書院인데,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 寺刹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이 특이하다.(이기봉)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읍치나 서원 등으로 뻗은 산줄기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읍치는 마치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의 표현이다. 풍수적 명당임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城隍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성황당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마을(村)에 있는 성황당 또는 서낭당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격이 다르다. 읍치 아래쪽에는 ≪충청좌도각읍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烽臺가 보이고 있다. 호응관계에 있는 봉수가 주기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지도에는 직선의 분홍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도에 磻灘이라고 적혀 있으며, 鵲川으로 통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다양한 하천 명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반탄이나 작천의 명칭은 사라지고 현재는 미호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百源書院은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芝山書院은 숙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崔錫鼎((1646-1715)을 배향하여 경종 2년(1722)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주기에는 다른 고을로 통하는 고개의 험준함과 驛에 배치된 말의 종류 및 수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읍치나 서원 등으로 뻗은 산줄기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읍치는 마치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의 표현이다. 풍수적 명당임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城隍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성황당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마을(村)에 있는 성황당 또는 서낭당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격이 다르다. 읍치 아래쪽에는 ≪충청좌도각읍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烽臺가 보이고 있다. 호응관계에 있는 봉수가 주기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지도에는 직선의 분홍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도에 磻灘이라고 적혀 있으며, 鵲川으로 통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다양한 하천 명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반탄이나 작천의 명칭은 사라지고 현재는 미호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百源書院은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芝山書院은 숙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崔錫鼎((1646-1715)을 배향하여 경종 2년(1722)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주기에는 다른 고을로 통하는 고개의 험준함과 驛에 배치된 말의 종류 및 수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청산현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청성면과 보은군 내북면의 아곡리·대안리를 포함한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0리에 있었다’는 已城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로 이어진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오고 있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가 강조되어 있으며,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산을 그렸다. 고을 안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인데, 실제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그려져 있다. 고을 전체가 마치 산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북쪽의 보은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는 보청천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아울러 금강으로 빠져나가는 수구 근처의 경우도 골짜기에 의해 상당히 구불구불함에도 마치 직선과 같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내적 통일성 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적인 모습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 배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보은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보은군 내북면 북쪽 부분에 해당되며,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훨씬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원래 酒城部曲이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이 주성부곡은 청산현의 古跡으로 처리되지 않고, 屬縣조에 기입되어 있다. 이후 面里制의 시행과정 속에서 독자성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청산의 땅으로 된 것이다. 읍치 왼쪽의 德峯書院은 西人의 거두로 알려진 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청안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증평읍·도안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안면 읍내리에 있었다. 청안현은 태종 5년(1405)에 淸塘縣과 道安縣을 합치고, 글자 한자씩을 따서 고을의 이름을 만들었다. 읍치는 청당현의 중심지였으며, 도안현의 중심지는 북면에 있었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을 마치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로 그렸지만, 실재로는 서북-남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실제 모습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 인식을 중요하게 여겨 고을이 마치 직사각형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그렸다. 고을 중앙을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상류의 보강천인데, 괴산과 음성 방면으로부터 흘러 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면의 경우에도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있음에도 지도에는 역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역시 環抱型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도 실제의 시형이라기보다는 인식된 지형이다. 지도 작성자가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려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서원은 龜巖書院이다.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李浚慶(1499-1572)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면과 역 등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이기봉)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읍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1리에 있었다’는 因地山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안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매우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서, 풍수적 관념의 반영을 통해 명당으로서의 고을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읍치 남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남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합류되는 지류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남한강 변에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단양과의 경계선에 있었던 龜潭과 玉筍峯이, 그 왼쪽에는 風穴·屛山·水穴 등이 표시되어 있다. 후자는 현재의 청풍면 북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근처에는 凌江洞·桃花洞·白石洞 등의 마을도 적혀 있는데, 모두 수려한 경관의 특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강 변에는 槐谷(津)·北津·惶恐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세 곳 모두 유명한 여울(灘)과 나루(津)가 있는 곳이다. 하천에는 보통 물살이 빠른 여울 있고, 그곳을 지나면 물결이 잔잔하고 깊은 곳(潭·湖 등으로 표현됨)이 이어진다. 후자의 지역에는 대부분 나루(津)가 입지하게 되며, 여울과 나루 모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두렵다’는 뜻의 한자가 2개나 겹친 惶恐灘의 이름을 통해 당시 이곳이 사공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곳 바로 하류에는 黃江津이 있었다. 北津과 黃江津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남한강 水運을 통해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이다. 黃江書院은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鳳剛書院은 본관이 청풍이며, 己卯士禍(1519) 때 자살한 金湜(1482-1520) 등을 배향하였다.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읍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1리에 있었다’는 因地山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안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매우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서, 풍수적 관념의 반영을 통해 명당으로서의 고을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읍치 남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남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합류되는 지류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남한강 변에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단양과의 경계선에 있었던 龜潭과 玉筍峯이, 그 왼쪽에는 風穴·屛山·水穴 등이 표시되어 있다. 후자는 현재의 청풍면 북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근처에는 凌江洞·桃花洞·白石洞 등의 마을도 적혀 있는데, 모두 수려한 경관의 특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강 변에는 槐谷(津)·北津·惶恐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세 곳 모두 유명한 여울(灘)과 나루(津)가 있는 곳이다. 하천에는 보통 물살이 빠른 여울 있고, 그곳을 지나면 물결이 잔잔하고 깊은 곳(潭·湖 등으로 표현됨)이 이어진다. 후자의 지역에는 대부분 나루(津)가 입지하게 되며, 여울과 나루 모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두렵다’는 뜻의 한자가 2개나 겹친 惶恐灘의 이름을 통해 당시 이곳이 사공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곳 바로 하류에는 黃江津이 있었다. 北津과 黃江津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남한강 水運을 통해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이다. 黃江書院은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鳳剛書院은 본관이 청풍이며, 己卯士禍(1519) 때 자살한 金湜(1482-1520) 등을 배향하였다.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불정면과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남쪽 10리에 있었다’는 大林山이다. 충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현 중 조선 초기까지 독립하지 못한 고을은 모두 충주의 땅으로 되었다. 屬縣으로는 모두 鄕1·部曲6·所1·處4 등이었지, 고려시대까지 縣이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곳도 그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德山鄕은 지도에 德山面으로 편제되어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제천시 덕산면과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廣反石部曲은 지도에 乷未面으로 나오는 지역으로, 현재는 충주시 살미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실재로는 동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렸으며, 관아까지의 산줄기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서 잘 나타나는 것으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에는 실제의 지형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천의 표시는 본류와 지류가 잘 구분되지 않고 있다. 위쪽의 ‘小白山下流北江’이라 표시한 부분부터 ‘呂州界’라고 쓰인 부분까지가 남한강 본류이다. 여기서 ‘呂州’는 ‘麗州’를 잘못 쓴 것이다. ‘俗離山下流達川江’이라 쓰인 부분부터 ‘達津’ 부분까지가 남한강의 지류 중 가장 큰 현재의 달천이다. 남한강 변에는 水運과 관련된 중요한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可興倉은 조선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고을과 충청도 동쪽 14고을의 田稅를 나르던 水站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6고을의 대동미와 전세만 나르는 곳으로 축소된다. 그 위쪽의 金遷倉은 세조 때 가흥창으로 옮기기 전까지 水站이 있던 곳으로, 현재 가금면 창동리 오층석탑 부근으로 추정된다. 가흥창 위쪽에 좀이 먹은 부분의 木溪津은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 엄정면 목계리이다. 읍치 아래의 北津도 목계보다는 못하지만 충주 읍내로 물자를 조달하던 중요한 포구였다. 북진 오른쪽에는 彈琴臺가 표시되어 있다. 대가야의 후예로 가야금을 만들었던 于勒이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申砬(1546-1592)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溟所祭壇은 小祀에 실려 있었으며,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連原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사액 받은 팔봉서원·운곡서원·누암서원·충렬사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불정면과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남쪽 10리에 있었다’는 大林山이다. 충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현 중 조선 초기까지 독립하지 못한 고을은 모두 충주의 땅으로 되었다. 屬縣으로는 모두 鄕1·部曲6·所1·處4 등이었지, 고려시대까지 縣이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곳도 그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德山鄕은 지도에 德山面으로 편제되어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제천시 덕산면과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廣反石部曲은 지도에 乷未面으로 나오는 지역으로, 현재는 충주시 살미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실재로는 동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렸으며, 관아까지의 산줄기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서 잘 나타나는 것으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에는 실제의 지형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천의 표시는 본류와 지류가 잘 구분되지 않고 있다. 위쪽의 ‘小白山下流北江’이라 표시한 부분부터 ‘呂州界’라고 쓰인 부분까지가 남한강 본류이다. 여기서 ‘呂州’는 ‘麗州’를 잘못 쓴 것이다. ‘俗離山下流達川江’이라 쓰인 부분부터 ‘達津’ 부분까지가 남한강의 지류 중 가장 큰 현재의 달천이다. 남한강 변에는 水運과 관련된 중요한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可興倉은 조선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고을과 충청도 동쪽 14고을의 田稅를 나르던 水站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6고을의 대동미와 전세만 나르는 곳으로 축소된다. 그 위쪽의 金遷倉은 세조 때 가흥창으로 옮기기 전까지 水站이 있던 곳으로, 현재 가금면 창동리 오층석탑 부근으로 추정된다. 가흥창 위쪽에 좀이 먹은 부분의 木溪津은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 엄정면 목계리이다. 읍치 아래의 北津도 목계보다는 못하지만 충주 읍내로 물자를 조달하던 중요한 포구였다. 북진 오른쪽에는 彈琴臺가 표시되어 있다. 대가야의 후예로 가야금을 만들었던 于勒이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申砬(1546-1592)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溟所祭壇은 小祀에 실려 있었으며,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連原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사액 받은 팔봉서원·운곡서원·누암서원·충렬사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회인군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회남면 전체와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 가덕면의 계산리·수곡리·시동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賀麻峯이다. 지도는 실제의 지형 모습보다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관념 속의 형태를 그렸다. 산줄기가 읍치를 3중·4중으로 둘러싼 형태로 그려, 풍수적으로 좋은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맨 바깥쪽의 산줄기는 실재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지도 위의 지형과 같다면 그 안쪽 산줄기와의 사이에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지도에도 그런 표시는 없다. 고을 전체의 실질적인 지형은 읍치 오른쪽을 북-남으로 흐르는 회인천과 그것을 둘러싼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쪽에는 금강 본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지도에는 亍(→亇)屹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마흘천 역시 동-서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실재로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고개에는 적색 원을 표시한 반면에 상상에 의해 그려진 산줄기에는 그런 표시가 없다. 읍치 오른쪽의 昧谷山城은 둘레 1,152尺(약 346m)의 작은 石城이다. 昧谷이란 이름은 신라 때의 이 고을 이름인데, 당시의 중심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아래쪽의 虎堞山城은 기록에 남쪽 6리에 있으며, 둘레 5,148尺(약 1,544m)의 중형 石城으로 나온다.(이기봉)
경성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성군·청진부 전체와 명천군의 서면·동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 전체와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경성군 경성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祖白山이다. 咸鏡道의 ‘鏡’자가 바로 이 고을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할 정도로 중요했던 지역이다. 이러한 중요성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읍치에 표시된 北兵營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종2품의 咸鏡北兵馬節度使가 파견되었으며, 鏡城都護府使를 겸하였다. 이외에도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漁游澗(堡)·吾村堡·朱乙溫(堡)·甫老知(堡)·森森坡(堡) 등의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내용은 ≪海東地圖≫의 鏡城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두 지도 사이의 연관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의 색을 내부와 다르게 표시하였으며, 지도 오른쪽 위의 산줄기는 특별히 하얗게 표현하였다. 이곳에 있는 白山 또는 長白山이 5월이 되어야 눈이 녹고, 7월이 되면 눈이 다시 쌓이는 지역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長白山은 흰 색 산줄기의 외쪽 끝에 있어야 하는데, 지도에는 중간쯤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가 서쪽(酉)를 위로 향해 그린 것도 白山이 이 방향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방위는 실제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유독 서쪽만 東西南北이 아닌 酉라는 干支로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潟湖로 추정되는 長者澤·長浦 등의 호수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붉은색의 것이 더 중요했다. 驛站은 노란색 타원 안에 표시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맨 오른쪽의 輸城館에만 ‘站’이 아닌 ‘館’의 명칭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기타 오른쪽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낼 때 大凶年이 들자, 兵營에 있었던 곡식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했던 李光夏(?-1701) 등의 廟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경원부는 일제시대의 용덕면·유신면의 일부를 제외한 경원군, 온성군의 훈융면, 경흥군의 웅기읍에 해당된다. 지금은 서쪽 일부를 제외한 함경북도의 새별군,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쪽 일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새별군 성내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이 ≪海東地圖≫ 내의 慶源府 지도와 거의 흡사하여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전체적인 윤곽이 마치 사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실재로는 북쪽 부분의 동서 폭이 넓고 남쪽은 좁다. 또한 오른쪽 두만강의 굴곡이 거의 없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음도 실제와 약간 다르다. 마지막으로 아래쪽에 海倉이 있는 부분은 동해에 연해 있는 일제시대의 웅기읍 일부에 해당되는 월경지이다. 이러한 월경지의 표시 방법은 실제의 거리가 아니라 단지 ‘그 방향에 있다’라는 정도의 정보만 싣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표시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 지도가 나타내는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 역시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정확성보다는 관념적인 인식의 반영이라는 측면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 이외에도 위쪽으로부터 訓戎鎭·安原堡·乾原堡·阿山鎭 등의 군사기지가 표시되어 있다. 훈융진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안원보·건원보에는 종9품의 權管이, 아산진에에는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다만 같은 책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세세하게 표시된 把守가 전혀 보이지고 있지 않음이 특이하다. 실재로는 14개 이상의 파수가 있었다. 撥站의 경우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발참제도는 선조 30년(1597)에 파발을 두어서 변방의 급보를 전하도록 한 것이다. 보통 말을 타고 달리는 騎撥의 경우 25리마다, 사람이 달리는 步撥의 경우 30리마다 1站을 두었다. 站의 명칭이 古乾原·古阿山으로 되어 있는데, 건원보·아산보가 옮겨가면서 만들어진 명칭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발참은 이외에도 세 군데 더 있었는데,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는 남색으로 칠하여 고을 내부와 구분하였다. 두만강 동쪽(卯)의 여진 지역 역시 남색으로 산을 칠하여 이 고을의 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곳에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것은 縣城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밖에 경흥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이 고을이 경흥부의 땅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대에 경흥부에 있었던 이성계의 高祖父 穆祖 李安社와 그의 부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인 德陵·安陵이 있어, 王業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라는 의미의 慶源과 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이기봉)
경흥부는 일제시대의 웅기읍을 제외한 경흥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부분과 라선시의 동쪽부분 일대이다. 읍치는 은덕군 사회리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장 큰 성곽이 있는 곳이다. 원래 경흥 고을이 신설되기 이전에는 경원부의 읍치였다. 경원부의 읍치가 더 북쪽의 새별군 성내리 지역으로 옮기고, 경흥군이 독자적인 고을로 신설되면서 읍치로서 확정되었다. 읍치 이외에도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撫夷堡·造山堡·阿吾地堡와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西水羅堡가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두만강 변에는 오늘날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把’라는 명칭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성곽의 크기는 실제의 규모를 상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 李安社가 삼척으로부터 함경남도의 덕원으로 옮겼다가, 또 다시 옮겨 살았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陵과 安陵이 바로 목조 이안사와 그의 부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이다. 그러나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이미 함경남도 함흥으로 옮겨간 상태이기 때문에 ‘古’자가 붙어 있어야 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도의 전반적인 윤곽이 같은 ≪海東地圖≫ 내의 慶興府 지도에 古陵이라고 표시한 것과 대조된다. 지도 아래쪽의 赤島는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가 여진족의 추격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읍치 바로 아래쪽의 赤池는 이성계의 祖父인 度祖 李椿이 용을 쏘아 붉은 피로 물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王業이 흥했다는 의미의 慶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고, 세종 25년(1443)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두만강 동쪽(卯)에는 胡地(오랑캐땅)라고 표시하여 여진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기록에 자주 나오는 八池의 모습도 여덟 개의 호수를 그려 넣었다. 두만강 하구는 상류의 급경사지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만들어낸 광범위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울러 호수와 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두만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섬은 鹿屯島로서, 현재의 크기보다는 좀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이곳의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규모를 추적하기는 어렵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히 표시된 ‘社’(남쪽 지방에서의 坊·面에 해당)가 전혀 보이고 있지 않은 점, 지도 위쪽에 普賢寺가 특별히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이기봉)
고원군은 일제시대의 운곡면을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옛 운곡면 지역을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읍치는 고원군 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0리에 있었다’는 椵山이다. 고을의 남북 폭은 서쪽 지역이 넓은 반면, 동쪽 지역은 매우 좁다.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마치 고을이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것처럼 그렸다. 또한 서쪽 지역은 산악지역이며, 동쪽 지역은 거의 평지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산의 높이도 서쪽과 동쪽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보를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읍치의 산세는 環抱型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화된 세계의 반영이다. 또한 읍치를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시켜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회화식 군현지도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읍치에 유난히 많은 인문정보를 자세히 기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읍치에는 다른 곳에서는 자주 보이지 않는 私賑廳이 표시되어 있다. 백성의 구휼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왼쪽 주기에 쓰여 있는 交濟穀을 운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厲壇과 社壇도 표시되어 있다. 여단은 억울하게 죽은 자를 위해, 사단은 토지신에게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邑誌에는 社廟 조가 있으며, 여기에는 社稷壇·厲壇·城隍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거의 필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하는 제단으로서, 보통 읍치 주변에 배치된다. 읍치 오른쪽에는 神堂淵과 德池灘이 표시되어 있다. ‘淵’은 진짜 연못이 아니라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하천의 구간을 의미하며, 灘은 급경사로 인해 물살이 빠른 구간을 의미한다. 둘 다 하천의 명칭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 밖에 읍치 위쪽으로는 伐羅堰이 표시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도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길주목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길주군·학성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김책시와 화대군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길주군 길주읍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오른쪽에 邑이 있는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고려 예종 2년(1107)에 尹瓘(?-1111)과 吳延寵(1055-1116)이 17만의 군사로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동북 9성 중의 하나이다. 이후 곧바로 여진족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며, 공민왕(1352-1374) 때에 다시 고려의 영토로 되었다. 지도에는 방향의 표시가 잘못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는 북쪽을 의미하는 ‘子’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동쪽에 해당된다. 卯(동쪽)·午(남쪽)·酉(서쪽)도 모두 약 90˚씩 좌측으로 회전하면 실제에 합당하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것은 이 지도가 지지에 바탕을 두고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 위의 주기 부분에 있는 相距里數에는 ‘북쪽으로 明川界에 이르기까지 15리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명천으로 가는 길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地境峙인데, 실재로는 동북쪽에 있지만 북쪽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북쪽인 ‘子’는 지경치의 왼쪽 방향에 있어야 함에도 오른쪽에 기입함으로써 전체적인 방위가 틀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輿地圖書≫의 길주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海東地圖≫의 길주목 지도에는 방향이 대체적으로 합당하게 그려져 있다. 두만강·압록강 변으로 향하는 요지에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과 고개 등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 왼쪽 방향에는 西北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堡였지만 현종 14년(1673)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鎭으로 승격되었다.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새로 설치되었으며, 일제시대에 성진시(현재는 김책시)의 중심이 되었던 城津鎭이 표시되어 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며, 국방의 강화에 더 많은 신경을 썼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주요 고개에는 붉은 색 원을 표시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으며, 수많은 봉수도 모두 기입하였다. 도로는 붉은 색과 노란 색 실선으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는데, 붉은 색이 더 중요한 도로였다. 이 밖에 ‘○○社’라는 지명이 자주 나오는데, 다른 지방에서 사용했던 ‘坊’ 또는 ‘面’에 대한 함경도 지방에서의 異稱이다.(이기봉)
덕원부는 일제시대의 문천군 덕원면과 성북면, 원산시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원산시 세길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客舍·鄕校 등이 표시된 곳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이 ≪輿地圖書≫에 수록된 德源府地圖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쪽의 盤龍山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는데, 전통시대의 군현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방식이다. 반룡산 위쪽에 좀이 먹은 산 이름은 束高山이다. 문천과의 경계선에 있으며, 고을 내부의 산과 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다. 이렇게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의 색을 달리하는 것은 ≪咸鏡道全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현재의 원산시 중심부인 元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였다. 그 아래쪽에 溟鎭이라 표시된 곳은 ‘明沙十里’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곳은 현재 갈마반도라고 한다. 그 끝에 있는 連島라는 섬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섬이었지만, 수많은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된 곳이다. 그 아래쪽의 竹島는 몽골의 침입 때 주변 12개 城의 백성들이 피난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의 침입 때 내륙의 상당 수 고을이 섬으로 피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도의 현재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租 李安社가 삼척으로부터 옮겨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에 좀이 먹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湧珠里舊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목조 이안사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康氏陵’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神德王后 康氏의 무덤이다. 지도 맨 오른쪽에는 함경도에서 보기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龍津書院으로서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여 숙종 21년(1695)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명천부는 동면과 서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명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 화성군 하우리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성곽과 함께 邑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永平岺으로 표시된 永平山이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의 호족인 李時愛(?-1467)가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됨에 따라 길주의 일부를 떼어서 이 고을을 만들었다. 길주목의 지도와 달리 방위는 대체적으로 맞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海東地圖≫의 명천부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방향의 오류가 거의 수정되어 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이 지역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던 長白山과 그곳으로로부터 읍치까지 이어진 산세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과 고을 내부에 있는 산의 색을 달리하여 표현함으로써 고을 내부가 부각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 아래의 성곽은 글씨가 잘 안보이지만 在德(鎭)이다. 이 鎭은 선조 38년(1605)에 설치되는데, 임진왜란(1592) 이후 강화된 국방 정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붉은색의 것이 한양-종성을 잇는 大路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높이가 906m에 불과하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七寶山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상징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밖에 창고·역참·봉수 등도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자주 보이는 ‘○○社’는 다른 지방에서 사용했던 ‘坊’ 또는 ‘面’에 대한 異稱이다.(이기봉)
무산부는 일제시대의 무산군과 부령군의 삼해면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라진시의 삼해리·노창리, 량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무산군 무산읍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한 가운데에 邑과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 초에 이 지역 최북단의 군현은 부령이었다. 그리고 茂山은 부령에 소속된 茂山鎭이었으며, 위치도 현재의 부령군에 있었다. 현종 15년(1674)에 이 지도 위의 읍치 지역으로 茂山鎭이 옮겨 설치되고, 숙종 10년(1684)에 府로 승격되었다. 읍치에서 회령까지의 거리는 백두산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움에도 이런 사실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白頭山과 현재 天池라 부르는 大澤이다. 백두산을 다른 산들과는 달리 흰색으로 표시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통해,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神聖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 아래쪽에는 숙종 38년(1712)에 淸과 朝鮮이 이 부근의 국경을 합의하여 세운 白頭山定界碑가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에서 동쪽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는 土門江이 이 지도에는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 아래쪽에는 세 개의 큰 호수라는 뜻의 三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아래쪽 외쪽의 長白山 줄기도 흰색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실재로 여름철 3개월만 제외하면 거의 눈이 덮여 있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지금의 두만강이다. 읍치로부터 회령경계까지는 실재로도 굴곡이 심한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 이외에도 2개의 성곽이 더 보이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각각 豊山堡·梁永堡이며, 곳곳에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도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전방으로서의 모습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달리 표시하여 그 중요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전자가 더 중요한 도로였다. 지도 아래쪽에는 일제시대의 부령군 삼해면에 있었던 이 고을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기타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가 ≪輿地圖書≫와 ≪海東地圖≫에 나오는 무산부의 지도와 거의 흡사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문천군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서남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대이다. 읍치는 문천시 교성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軍資倉·客舍 등이 있는 곳이다. 객사는 일반적으로 가운데의 높은 지붕과 양쪽의 조금 낮은 지붕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남쪽 25리에 있었다’는 盤龍山인데, 같은 책의 덕원부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는 색을 달리하여 구별하였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왼쪽에는 石灘이, 지도 오른쪽에는 前灘(箭灘으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음)이 표시되어 있다.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경사가 급해져 물살이 빨라지는 하천의 구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지도에 표시된 灘도 각종 地誌에는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어 하천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淑陵이 붉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와 그의 부인인 貞淑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四訥島와 馬祭島가 표시되어 있다. 모두 島라는 명칭을 갖고 있지만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서쪽 급경사의 하천에서 공급되는 모래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목장이 있었다. 사눌도에서는 進上할 말(馬)을 키웠으며, 마제도에서는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양(羊羔)을 키웠다.(이기봉)
부령부는 일제시대의 관해면·삼해면을 제외한 부령군과 청진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청진시 동부와 부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부령군 부령읍 부령동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성곽과 함께 ‘邑’이라는 글자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북동남서(子卯午酉)의 방향이 현재의 입장에서 보아도 거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는 廢茂山(堡)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고려 말까지 여진족과의 경계는 이 고을 바로 서남쪽에 있었던 鏡城이다. 이 고을은 세종 때 설치한 六鎭 중의 하나로서, 원래는 寧北鎭이라고 불렀다. 세종 16년(1434)에 富居縣과 합해지면서 富寧縣이란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경선의 변경 때문에 각종 鎭堡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었는데, 廢茂山(堡)에는 원래 茂山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종 15년(1674)에 부령 서북쪽의 두만강변을 개척하면서, 무산보를 옮기고 鎭으로 승격시켰다. 鎭堡의 이름은 장소의 이동과 함께 동시에 옮겨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원래의 무산보 지역은 廢茂山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이와 같은 경우가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지명의 비정에 조심해야 한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뿐만 아니라 고을 내부로 뻗은 일부의 산줄기도 색을 다르게 표시하였다. 경계선으로부터 직접 뻗어 내린 산줄기를 파생된 산줄기와 구별하려 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읍성 동쪽으로는 ‘東大川’, 서쪽으로는 ‘西大川’ 등의 이름이 있는 것을 통해 읍치가 지명 부여의 기준으로도 일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이 하천의 하류에 있었던 察訪驛인 輸城館의 이름을 따서 수성천이라고 부른다. 기타 읍치 왼쪽 아래에 보이는 仇正棧道에서의 棧道는 ‘벼랑길’을 의미한다.(이기봉)
안변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안변군과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그리고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위쪽 일대이다. 읍치는 안변군 안변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5리에 있었다’는 鶴城山이다. 지도에는 ‘邑’이란 글자와 성곽이 표시된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客舍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왕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를 奉安하고, 고을 수령이 매달 1일과 15일에 望闕向拜하던 곳이다. 지도는 특이하게도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백두대간이 지도 아래쪽(북)으로부터 위쪽(남)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꺾이고,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읍치로 뻗은 산줄기는 남쪽으로 향하는 지점에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회화식 군현지도는 산줄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보통이며, 이 지도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읍치의 산줄기가 남쪽에서 올라온 점을 고려하여,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바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南大川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서쪽의 물줄기는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 위쪽의 高山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3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위쪽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강원도와 함경도를 가르던 중요한 關防處인 鐵嶺이 있었다. 안변부는 고려초기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이었기 때문에 많은 屬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속현 중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안변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초기까지도 지도 왼쪽의 鶴浦倉이 있는 곳에는 鶴浦縣이, 오른쪽의 永豊社가 있는 곳에는 永豊縣이 독자성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던 屬縣으로 존재했었다. 학포창 왼쪽에는 鶴湖라는 글씨만 쓰여 있는데, 실재로는 潟湖가 상당히 많았던 곳이다. 석호는 급경사의 산지에서 물에 의해 쓸려 내려온 모래가 바닷가에 쌓이면서 입구를 막아 형성된 호수이다. 학호 바로 아래에 쓰여 있는 沙峯은 바로 이 모래언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붉은색 작은 원이 하나 표시되어 있고, 좀 희미한 글씨로 智陵이라고 적혀 있다. 이성계의 曾祖父인 李行里의 무덤으로서, 翼祖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陵’으로 표시된 것이다. 그 왼쪽에는 國島가 기암절벽의 모습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실재로는 매우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에게도 특별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영흥부는 일제시대의 영흥군 전체와 고원군의 운곡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의 옛 운곡면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좀이 먹어 보이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聖歷山이다. 지도에서의 읍치는 가운데쯤에 衙舍·客舍가 표시된 곳이다. ≪咸鏡道全圖≫1책의 지도와는 달리 방안이 그려져 있지 않으며, 고을의 실제 형태와는 달리 단순히 사각형 모양으로 그렸다. 읍치를 비롯하여 誕聖基·眞殿·道尊墓 등은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려 풍수적 명당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誕聖基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탄생한 곳이다. 그 아래쪽의 本宮은 이성계가 살던 곳으로, 그의 位版을 奉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眞殿이라 표시된 곳도 이성계가 살던 곳 중의 하나이며, 이성계의 畵像(초상화)이 奉安된 곳으로, 원래 璿源殿이라고 불리었다. 道尊墓는 이성계의 외할아버지(外祖)인 崔閑奇의 묘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정확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북쪽이 아니라 다른 방위를 위로 향해 그릴 경우, 보통 읍치의 坐向이나 읍치로 들어오는 산줄기의 방향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흥부 읍치의 좌향이 북쪽을 등진 채 남쪽을 향해 있지만, 기본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다가 북으로 꺾여 올라왔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낭림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모여 龍興江이 되고, 읍치 북쪽을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용흥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은 현재의 虎島半島가 있는 지역으로,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안선이 복작하고 섬이 많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용흥강의 하구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함경도에서 보기 드문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興賢書院은 鄭夢周(1337-1392)·趙光祖(1482-1519)·李繼孫(1423-1484) 등을 배향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세워지고, 같은 왕 9년(1617)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온성부는 훈융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온성군, 경원군의 용덕면과 유신면의 일부, 경흥군의 나진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 동북부와 새별군·은덕군·나진시 일부이다. 읍치는 온성군 온성읍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우리나라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세종 때 김종서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동북 六鎭 중의 하나이다. 읍치 위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두만강이며, 만주쪽에서 흘러들어와 합류하는 分界江은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간도 지방의 해란강이다. 이 고을에는 2개의 월경지가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五弄川(현재는 五龍川이라고 부른다)에 있는 德川社와 德山社는 일제시대의 경원군 용덕면·유신면의 서쪽 부분에 있었다. 그 아래쪽의 해안가에 있는 安和社는 현재의 함경북도 나진시 시내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柔遠鎭·美錢鎭과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永達堡,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黃拓坡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수많은 把守가 표시되어 있어, 최전방으로서의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만강 건너 만주 쪽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방어를 위해 필요한 정보로서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표현한 것이다. 산의 색이 2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늘색의 경우 다른 고을과의 경계나 하천의 분수계에 주로 적용되었다. 특히 가운데에 표시된 하늘색 산줄기의 경우 그 아래쪽의 越境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牧場도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大草島에 설치되었으며, 이 고을의 수령이 監牧官을 겸하였다. 지도 가운데쯤에 龍水德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德’은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산지를 지칭하는 어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기타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정평부는 일제시대의 정평군이며, 지금은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의 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정평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鼻白山이다. 지도에는 客舍·衙舍·邑倉 등이 표시된 곳이 읍치이며, 이중의 산줄기가 環抱型으로 둘러싸인 풍수적 명당 관념을 반영하도록 그렸다. 읍치 왼쪽을 지나는 길에는 남쪽의 영흥과 북쪽의 함흥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大路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경흥을 잇는 大路를 의미한다. 대로에는 客館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草原驛을 의미하며,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客)가 잠시 머무는 곳(館)’이라는 의미에서 客館이라 표시한 것이다. 도로에는 站도 보이고 있는데, 선조 30년(1597)부터 변방이나 한양으로부터 급한 일이 생겼을 경우 말을 타거나 사람이 직접 달려 소식을 전하는 擺撥制度가 운용되었다. 騎撥의 경우 25리마다, 步撥의 경우 30리마다 1站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한양-경흥을 잇는 대로에는 총 64개의 站이 설치하였다. 고을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낭림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 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모여 고을 남쪽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 하천이 지금의 금진강이며, 지도에는 長溪川이라 적혀 있다. 읍치 왼쪽에는 廣浦가 표시되어 있는데, 큰 호수이다. 서쪽의 급경사에서 발원한 하천이 동해의 깊은 바다와 만나면서 형성된 潟湖로 추정된다. 기타 지도에는 ‘○○社’가 자주 보이는데, 다른 지역에서 사용된 ‘坊’이나 ‘面’에 대한 함경도만의 異稱이다.(이기봉)
종성부는 일제시대의 종성군과 경흥군의 풍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새별군·회령군·은덕군·라진시에 흩어져 있다. 읍치는 현재의 온성군 종성로동자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 중간에 표시된 小白山이다. 지도는 북쪽(子)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 왼쪽에는 두만강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흘러가며,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는 동해가 일부 보이고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潼關鎭·防垣堡가 城郭과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守’라는 글자와 집의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왼쪽 주기에는 이 파수의 이름도 자세히 적혀 있다. 지도 가운데에 있는 성곽은 北行營으로서, 咸鏡北道兵馬節度使가 머무는 곳이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潼巾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기록에는 동건산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鍾城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종을 엎어놓았다는 것은 고위평탄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런 곳에 산성을 만들면 축성과 방어가 쉽다. 하천과 洞里의 표시도 다른 지도에 비해 아주 자세하며, ‘○○社’도 여러 개 보이고 있다. ‘社’는 함경도에서 面이나 坊에 해당되는 행정단위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북병영 오른쪽에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鍾山書院은 연산군 4년(1498)의 戊午士禍 때 이 고을에 귀양왔다가 죽은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현종 7년(1666)에 세워지고, 숙종 12년(1686)에 賜額 받았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과 읍치·북병영 등을 둘러싼 산줄기는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남색으로 표시하였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지도에는 함경남도지도라는 명칭이 없다. 다만 (咸鏡)南道兵馬節度使가 관할하는 구역을 그렸기 때문에 함경남도지도라는 명칭을 임시적으로 붙인 것이며, 일제시대의 함경남도와도 동일한 영역이다. 남도병마절도사는 지도 오른쪽 아래의 北靑에 설치되어 있었다. 함흥 위쪽의 長津府가 아직 長津柵으로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는 장진부가 설치되는 정조 11년(1787)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쪽에는 백두산과 大澤이 표시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뻗어 나온 중요한 산줄기(대부분 白頭大幹)는 남색으로 표시하여 다른 산줄기와 구분하였다. 백두산은 거의 일년 내내 흰 눈이 덮여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흰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흰색의 표현에는 甲山 바로 아래쪽에도 보이고 있다. 이곳 역시 여름철 3개월을 제외하면 봄·가을에도 흰 눈에 덮여 있다는 長白山 부근이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는 군사기지인 鎭堡가 표시되어 있다. 진보는 현재의 惠山市가 자리 잡은 압록강 변의 혜산진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분포한다. 이곳은 압록강의 지류인 장진강으로서, 그 왼쪽(西)에는 세종 때 개척되었다가 곧바로 관리를 포기한 廢四郡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최전방이 압록강-장진강을 잇는 선이었다. 이 밖에 甲山으로부터 端川으로 넘어오는 지역, 長津柵에서 함흥으로 넘어오는 지역에도 진보가 일부 보이고 있다. 이곳이 2차 저지선 역할을 하며, 중요한 요해처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는 이 외에도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驛, 監牧官이 파견된 牧場 등도 일부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표현되어 있으며, 驛站과 고개는 붉은색 원의 크기로서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표현도 중요한 요소로서 인식되었다. 먼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조상의 묘가 德安陵(高祖父·母), 義陵·純陵(曾祖父·母), 智陵·淑陵(祖父·母), 定和陵(父母)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에 位版을 奉安한 本宮과 역시 이성계가 살던 곳으로 그의 畵像을 奉安한 璿源殿도 표시되어 있다. 전반적인 모습은 사각형에 맞추려 했기 때문에 실제의 모습과 차이가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실재로는 함흥 왼쪽의 定平 부근부터 해안선이 남쪽으로 꺾임에도 이런 사실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본 지도에는 咸鏡道地圖라는 명칭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세 개의 지도를 합한 ≪咸鏡道全圖≫의 5책 표지에 北關地圖라는 명칭만 적혀 있을 뿐이다. 함경도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함경남도와 강원도 통천군 학일면·흡곡면에 해당되는데, 당시에 장진군에는 고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는 함경북도·함경남도, 김형직군을 제외한 량강도, 자강도의 랑림군, 고산군·안변군·법동군·통천군 시중대 이북의 강원도로 나누어졌다. 咸鏡道라는 명칭은 咸興과 鏡城 고을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때로는 永安道(永興, 安邊)·永吉道(永興+吉州)·咸吉道(咸興+吉州) 등으로 불린 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함경도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함경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北關·關北 등이 있다. 함경도는 고려 예종 7년(1107)에 尹瓘(?-1111)이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東北九城을 쌓으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 동북구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이후 상당수를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면서 현재의 정평군과 함주군 사이를 북쪽 경계로 삼았다. 이후 철령 이북의 땅이 元에 속하였다가 공민왕(1351-1374) 때 다시 수복하였고, 조선의 개국 시에는 현재의 삼수군-갑산군-경성 부근까지 영토로 편입되었다. 세종 때에 東北六鎭(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이 설치되면서 두만강을 동북쪽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후 茂山府가 숙종 10년(1684)에, 長津府가 정조 11년(1787)에는 설치되면서 후대의 함경도가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무산부는 보이고 있지만 장진부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조 11년(1787) 이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2품의 觀察使가 파견된 監營은 함흥에 있었다. 종2품의 兵馬節度使는 3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하였다. 그리고 南道兵馬節度使營은 北靑에, 北道兵馬節度使營은 鏡城에 설치되어 있었다. 본 지도에는 함경도의 고을이 붉은색과 남색의 원으로 나누어져 표시되어 있는데, 전자는 남도병마절도사영에, 후자는 북도병마절도사영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을 통해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붉은색·노란색의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변에 있는 역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경우 세로의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찰방역인 草原譯은 高山道, 谷口驛은 居山道, 輸城驛은 輸城道라고도 불렸다. 그렇지 않은 역은 노란색 원과 站이란 명칭으로 표시하였으며, 高山道·居山道 명칭의 유래가 된 高山·居山만은 館으로 표시되어 있다. 노란색의 세로로 긴 사각형 안에 이름만 적혀 있는 것은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鎭堡이다. 왼쪽 위의 압록강과 오른쪽의 두만강 변, 이곳으로부터 남쪽·동남쪽으로 향하는 요충지에 진보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수계이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산줄기는 짙은 남색으로 표시하여 강조하였다. 기타 백두산과 현재 天池라고 불리는 大澤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음을 통해 지도 작성 당시에 상당히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海東地圖≫·≪輿地圖書≫ 내의 함경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東西南北을 子卯酉午라는 干支로 표시하였으며, 이 지도를 통해서는 방향 표시의 기점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이기봉)
본 지도에는 咸鏡北道地圖라는 명칭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咸鏡)北道兵馬節制使가 관할하는 지역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함경북도지도라는 명칭을 임시적으로 붙인 것이다. 北道兵馬節度使營은 鏡城에 있었다. 지도 위쪽에는 白頭山과 현재 天池라 부르는 大澤이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눈 덮인 머리’란 뜻의 명칭처럼 특별히 흰색으로 그렸다. 지도 중간 부분의 산줄기에도 흰색이 칠해져 있는데, 한가운데에 좀이 먹은 부분의 長(白山) 역시 여름철만 제외하면 눈이 덮여 있다는 여러 地誌의 기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중요 산줄기는 남색으로 그려 다른 산줄기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왼쪽(西)으로는 鴨綠江이 흘러나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豆萬江이 발원하고 있다. 大澤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黑龍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흑룡강 유역은 두만강 이남과는 전혀 다른 축척이 적용되고 있다. 실재로는 한반도보다도 크거나 비슷한 면적임에도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古地圖에서 한정된 지면에 먼 지역의 정보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흑룡강 바로 아래쪽의 黑龍坪 주기에는 오른쪽 위의 寧古塔으로부터 백두산 밑의 天坪까지 사람·경계 가 없는 평평하고 곧은 길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것을 통해 이 지역이 평원지형을 이루고 있음과 청나라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던 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흑룡강과 두만강 사이에 동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간도 지방에서 유명한 해란강이며, 동쪽의 柔遠鎭 부근에서 두만강과 합류한다. 백두산 아래쪽에는 숙종 38년(1712)에 淸과 朝鮮이 이 부근의 국경선을 합의하여 세운 (白頭山)定界碑가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에는 ‘東爲土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1880년대부터 土門(江)이 어느 것인냐를 놓고 청과 조선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에서는 두만강이 아니라고 보면서 간도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였으나, 1909년에 일제가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으면서 두만강으로 확정했다. 고을은 남색의 원으로 표시하였으며, 주변까지의 거리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담고 있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은 군사기지인 鎭堡을 의미하며, 廢堡의 정보 역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진보는 주로 두만강 변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鏡城 지역에도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통해 이곳이 2차 저지선과 같은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 순서로 중요성을 표현하였으며, 驛站은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다. 고개에 대한 표시도 아주 자세하여 군사적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두만강 동쪽의 영역 역시 縮尺이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이기봉)
함흥부는 일제시대의 함흥부·흥남부·함주군·신흥군과 장진군의 남쪽 일부에 해당되며,지금은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 락원군의 서쪽, 장진군의 남쪽,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흥시 성천강구역 남문1동·남문2동·동문동·서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북쪽에 城串烽이 표시된 성곶산(城串山)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표현은 ≪海東地圖≫ 함흥부의 지도, ≪輿地圖書≫의 함흥부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당시에 함흥부의 지도가 여러 번 模寫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가 회색으로 표시되어 구분된 점은 앞의 두 지도와 확연히 다르다. 고을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함경산맥)이 지나가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成川江이 된다. 성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큰 섬이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이런 섬은 급경사에서 발원한 하천이 평지와 바다를 만나 갑자기 유속이 느려지면서 형성된 三角洲에서 많이 나타난다. 함흥부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었던 고을이며, 지도에도 그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붉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本宮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직전까지의 저택(潛邸)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성계를 비롯하여, 그의 조상과 왕비들의 位版이 奉安되어 있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定和陵과 純陵이 보이고 있다. 定和陵은 定陵과 和陵을 함께 표시한 것으로서 각각 이성계의 아버지인 桓祖 李子春과 어머니인 懿惠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純陵은 이성계의 할아버지 度祖 李椿의 부인인 敬順王后 朴氏의 무덤이다. 지도 위쪽에는 德安陵이 표시되어 있는데, 德陵과 安陵을 합해서 부른 이름이다. 각각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 李安社와 그의 부인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이다. 위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는 군사기지인 堡가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북쪽의 압록강 유역과 바로 연결되는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왼쪽 위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長津江과 長津柵(堡 또는 鎭)이 표시되어 있다. 장진 지역은 현종 8년(1667)에 堡가 설치되었다가, 정조 9년(1785)에 鎭으로 승격된다. 같은 왕 11년(1787)에는 府로 승격되면서 독자적인 고을이 되고, 이후 고종 때 廢四郡 지역에 정식으로 고을을 설치하기 전까지 북쪽 최전방의 방어기지 역할을 한다. 이 지도는 최소한 장진이 고을로 정해진 정조 11년(1787) 이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홍원현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홍원군과 락원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홍원군 홍원읍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鄕校가 있는 곳이다. 읍치가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표시되었다. 또한 環抱型의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싼 것처럼 표시하였는데,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주변 산지에 대한 관념적 인식의 반영이다. 도로는 붉은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왼쪽의 咸關嶺으로부터 오른쪽의 北靑界로 넘어가는 것이 한양-경흥의 大路이다. 왼쪽의 함흥과 이 고을 사이에는 북-남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함관령(450)이 중요한 關防處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馬養島는 울릉도를 제외하면 동해안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곳에는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와 마양도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穿島는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실재로는 해안가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이며, 그 사이에 구멍이 뚫려 있어 穿島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지도와 주기에는 ‘○○社’란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面’이나 ‘坊’에 대해 함경도 지방의 異稱이다. 기타 인문정보로는 倉庫와 驛, 烽燧 등만이 간단하게 기재되어 있다.(이기봉)
회령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회령군과 부령군의 관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서쪽과 동쪽의 일부를 제외한 회령시, 나진시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회령시 남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서북)의 鰲山이다. 이 고을은 세종 때 여진족이 거주하던 斡木河 지역에 김종서(1390-1453)가 개척하여 설치한 동북 六鎭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에 도착하는 산줄기가 남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지도 위쪽에는 동해가, 아래쪽에는 두만강이 표시되어 있다. 동해쪽에 있는 이 고을의 땅은 현재 라진시 낙산동·이진리·관해리 일대이다. 읍치에는 邑城이 보이고 있는데, 둘레 10,776尺(약 3,233m)에 해당되는 대형 성곽이다. 두만강 변에는 이외에도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高嶺鎭·甫乙下鎭(乶下鎭이라고도 쓴다)과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수많은 把守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古豊山堡가 표시되어 있는데, 豊山堡가 무산으로 옮겨가면서 이와 같은 이름이 사용되게 되었다. 지도는 산과 산줄기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며,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방식이다. 또한 서쪽에서 읍치와 보을하진까지 연결된 산줄기가 특별히 남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맥의 흐름을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관념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기타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붉은색·노란색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강령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용연면·봉치면·흥미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동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 강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강령군 강령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아래쪽에 있는 鳳凰山이다. 이 고을은 세종 10년(1428)에 永康縣과 白翎島를 합하고, 각 명칭에서 한자씩 따다가 강령현을 만들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백령도가 獨鎭이 되어, 독립적인 영역을 갖고 있었다. 방위표시는 지도 오른쪽에 북쪽만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하여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에는 登山串이 표시되어 있다. ‘串’이란 半島에 대한 옛 명칭으로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육지를 일컫는 지명의 어미였다. 이곳에는 登山舊鎭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登山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등산진은 그 위쪽의 巡威島로 옮겨갔으며, 지도에도 ‘僉使設鎭處’라고 표시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등산구진 오른쪽에는 ‘舊環場處’ 즉, ‘옛날에 牧場을 둘러친 곳’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곳에는 원래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말들을 관리하기 위해 牧場城을 쌓았다. 도로는 붉은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祠宇는 ≪海東地圖≫의 강령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기록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곳에 왕실의 棺槨과 戰船用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3곳의 封山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無黃腸船材’라는 문구를 함께 삽입하여, 실재로는 관곽용의 황장목과 전함 건조용의 선재가 전혀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조선후기에 산림이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다른 지도에는 대부분 표시되어 있는 面이 전혀 보이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사찰은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표시하였다.(이기봉)
곡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곡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곡산군·신평군과 평안남도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동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곡산군 곡산읍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좀이 먹어 하얗게 나온 붉은색 원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8리에 있었다’는 南山이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상류이다. 왼쪽 아래에 있는 하천은 예성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에 작게 나타나 있는 하천은 임진강 상류의 작은 지류이다. 지도는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산줄기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河南山(1,486m)을 최고봉으로 하여, 북쪽과 동쪽에는 1,000m 안팎의 높은 산지가 이어진다. 다음으로 중요하게 눈에 띄도록 한 것은 읍치를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에 표시된 4개의 고개(嶺)이다. 이 고개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18세기 중반 경에 편찬된 ≪輿地圖書≫의 關阨(요충지) 부분에 기록된 것과 동일하다. 이중 가장 북쪽의 檢險嶺에는 지도와 같이 關門을 설치하여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그 남쪽에는 숙종 때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文城鎭을 두었다. 이 관문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으로 쌓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고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의 고개도 ‘古介’·‘嶺’ 등의 이름으로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으로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驛院도 모두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輿地圖書≫ 곡산부분의 外助伊 제언으로 추정되는 堤堰이 둑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띈다. 제언은 조선후기의 地誌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의 하나로 취급되었지만, 곡산 지역은 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기타 인문정보로는 面·寺刹·倉庫 등만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금천군은 토산면·서천면·합탄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황해도 금천군과 경기도 장단군의 소남면·대남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북도 남쪽 일부를 제외한 금천군과 토산군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 동쪽 일부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금천군 금천읍에 있었다. 이 고을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읍치는 강음의 金郊 북쪽, 우봉의 烏助川 남쪽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이다. 또한 금교의 ‘金’과 오조천의 ‘川’를 따서 ‘金川’이라는 고을 명칭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고을을 합칠 때 각 고을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도를 보면 읍치를 중심으로 거의 둘로 나누어진 고을의 형세를 볼 수 있다. 왼쪽이 강음현의 땅이었고, 오른쪽이 우봉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江陰舊基와 牛峯舊基가 붉은색의 타원형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金郊驛舊基는 검은색의 타원형으로 그려, 고을 터와의 구별을 쉽게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이 금교역에 종6품의 丞을 파견하여 10개의 속역을 거느리게 했지만, 이후 폐지되고 平山의 寶山으로 옮겨갔다. 고을 한가운데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예성강본류이다. 지류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어 혼란을 주고 있으며, 오른쪽의 小南面 지역은 임진강의 지류인 사미천 상류이다. 예성강에는 猪灘·龍津·馬灘·岐灘·廣灘·助邑浦·栗浦·潭靑浦 등 여울(灘)과 津渡·浦口 등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읍포는 조선 초기에 水站을 설치하여, 황해도 12개 고을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곳이다. 조선후기에는 각 고을이 책임지고 운반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驛站을 의미하는 撥所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지도 위쪽에 표시된 붉은색의 원은 발소가 아니라 글씨로 유명한 石峰 韓濩(1543-1605)의 묘소이다. 오른쪽 小南面에는 益齋 李齊賢(1287-1367)의 묘소와 그를 배향하여 숙종 때 賜額 받은 道山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그 왼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白峙鎭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 밖에 烽燧는 호응관계를 붉은색의 직선으로 나타내고 있다.(이기봉)
배천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운산면·유곡면·해월면·온정면·도촌면·화성면·금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이다. 읍치는 배천군 배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있는 雉岳(山)이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村)의 이름과 위치 정보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단 한자로 ‘村’이라고 적어놓았다고 해서 모두 ‘촌’으로 부른 것은 아니며, 촌·동·골·말 등 다양한 어미들이 마을 이름에 사용되었다. 面의 이름은 村과의 구별을 위해 붉은색의 큰 글씨로 써넣었다. 가끔 면에 소속된 촌을 구별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는 지도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이 지도에는 그러한 구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방향은 南北이 아니라 子(북)·午(남)와 같은 干支로서 표시하였다. 방향에 대한 이러한 간지의 사용은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다. 도로는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다른 직선으로 표시하려 노력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색의 긴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고을의 동쪽을 북-남으로 흐르는 하천은 예성강이며, 읍치 남쪽에는 현재 옥산강이라 부르는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산지는 이 고을에서 가장 높은 黃衣山(478m)이 우뚝 솟은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고을 곳곳에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만 해안가의 경우 거의 산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연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른쪽 예성강 변에는 고려시대 내내 開京의 外港으로서 번성했던 碧瀾渡가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에는 錢浦(돈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 예성강의 이 구간에 대해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벽란도와 전포 사이의 金谷村에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았다가 서울로 나르던 海倉이 보이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이곳에 金谷浦倉이라는 水站을 설치하여, 황해도 해안가 12개 고을의 전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다. 조선후기에는 각 고을이 책임지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읍치 왼쪽의 文會書院은 李珥(1536-1584)를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향되어 있었으며, 인조 6년(1628)과 숙종 6년(1680)에 걸쳐 賜額을 받은 독특한 서원이다. 기타 우리말 ‘고개’의 소리를 그대로 적은 ‘古介’라는 명칭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어, ‘嶺’·‘峴’·‘峙’ 등과 함께 당시에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봉산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봉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봉산군·사리원시·은파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봉산군 봉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에 있는 古邑의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祿科山이다. 고을의 서쪽은 현재의 재령강이며, 북쪽은 정방산을 비롯한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령강 부분은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지역으로서, 습지에 가까운 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대동강을 건너온 外賊은 대규모 부대일 경우, 고을 북쪽의 산지를 넘어야 했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고을 북쪽에는 많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북쪽에는 높은 산지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것으로 표시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고개는 붉은색 원 안에 표시하였으며, 東里鎭과 蒜山鎭이 방어를 담당하였다. 모두 숙종 때 설치된 것으로서,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洞仙嶺에 만들어진 關門의 모습도 실제와 흡사하게 그려놓았으며, 그 왼쪽에는 거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正方山城도 보이고 있다. 더 왼쪽에는 ‘土築蕀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 때 쌓아 關門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棘城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방산성으로부터 재령강까지 防守軍을 두었고, 평지엔 가시나무(棘)를 심었다고 한다. 신라 때 북쪽 국경선에 설치한 浿江鎭도 이곳에 설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浿江이란 현재의 대동강을 의미하며, 그 대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패강진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아래쪽의 鵂鶹城은 古邑이며, 둘레 8,656尺(약 2,597m)에 달하는 대형의 石築山城이다. 중종 18년(1523)에 염병이 발생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휴유성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곳이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왼쪽의 神龍潭은 祈雨處로 알려져 있으며, 국가에서 봄·가을에 香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아래쪽의 文井은 文井書院인데, 書院 부분이 좀이 먹어 사라져 버렸다. 李珥(1536-1584)·金長生(1548-1631)·金集(1574-1656) 등을 배향하여 숙종 7년(1681)에 세워지고, 같은 왕 29년(1703)에 賜額 받았다. 원래 서원 근처에는 文武井이라는 우물이 있었으며, 이 중 文井만 따서 서원의 이름을 만든 것이다. 지도 위쪽의 산산진 아래쪽에는 사리원시 이름의 기원이 된 沙里院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의 水鐵嶺에는 ‘鑿穴處’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 굴(穴)을 인위적으로 뚫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도에는 물이 이 굴을 통해 동류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왼쪽에는 忠烈祠도 보이고 있는데,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서흥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서흥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서흥군과 연탄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서흥군 화곡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大峴山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위쪽의 것은 황주강의 상류이다. 재령강에는 ‘淵’의 명칭이 몇 개 보이고 있는데, 연못이라기보다는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하천의 구간을 지칭한다. 지도는 東西南北의 방향을 ‘子(북)·卯(동)·午(남)·酉(서)’라는 干支로 표시하였다. 북쪽에서 읍치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특히 강조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南山이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읍치 공간을 풍수적 관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읍치에는 여러 건물이 사실적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여 선조 때 賜額 받은 禾谷書院도 보이고 있다. 이 고을은 대동강을 넘어온 적이 남하하여 한양으로 가기 위해 거의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군사시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읍치 오른쪽의 大峴山城은 둘레 20,238尺(약 6,071m)의 초대형 산성으로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주변 5개 고을의 軍餉倉과 軍器庫가 들어서 있었다. 고대부터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때에도 거란의 침입 시 중요한 방어기지 역할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거의 관리되고 있지 않다가 임진왜란(1592) 때 처음으로 修築되어 사용되었다. 지도 위쪽으로는 붉은색 원 안에 표시된 고개(嶺)가 여러 개 보이고 있다. 대동강을 건너 황주·수안 방면으로 들어온 적을 방어하는 要害處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왼쪽의 慈悲嶺이 대동강에서 개성·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최고 요해처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중요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善積鎭과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所已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각 鎭이 담당하고 있던 고개를, 진에서 연결된 남색의 도로를 통해 구분해주고 있다. 이 진들은 모두 숙종 때 설치된 것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36)을 거치면서 강화된 국방체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서로 중요성을 구별하였으며, 驛院과 기타의 고개(嶺·峴·古介 등)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烽燧는 호응관계를 붉은색 직선으로 표시하였으며, 도로 역시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달리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이밖에 사찰과 창고(倉·屯으로 표시됨) 및 다리 등의 정보가 자세하며, 面은 지도에는 없고 위쪽의 주기에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송화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연정면·연방면·봉래면·도원면·장양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송화군과 삼천군의 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송화군 송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5리에 있었다’는 墨山이다. 이 고을은 태종 8년(1408)에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해 하나로 만들었으며, 각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서 松禾縣이 되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청송현 지역에 속하였으며, 가화현의 중심지는 長陽面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크게 두 개의 유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두 개의 고을이 합해져 만들어진 역사적 측면과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청송현과 가화현 지역의 산줄기를 각각 중심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 두 고을이 나누어져 있었던 과거의 역사성을 담아내고 있다. 읍치와 주기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지도의 방향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먼저 읍치를 중심으로 지도를 그린 후, 주기를 적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는 북쪽(지도에서는 아래쪽)을 향하도록 그려져 있는데, 중요 산줄기가 북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을의 전체적인 모양이 서북쪽의 읍치 지역과 동남쪽의 옛 가화현 지역이 서로 연결된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전통적인 회화식 군현지도에서는 고을의 형태를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실제 모양과 다르게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도에는 面, 주기에는 坊으로 표시한 것도 눈에 띈다. 지도 작성자와 주기 작성자가 틀렸거나, 참고 자료가 틀렸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읍치 왼쪽의 道東書院은 朱子(1130-1200)·趙光祖(1482-1519)·李滉(1501-1570)·李珥(1536-1584)를 배향하여 숙종(1675-1720) 때 賜額 받은 서원이다. 성리학의 창시자, 조선 초기 士林 세력의 대표자, 主氣論과 主理論의 대표자를 함께 배향했음이 이채롭다. 기타 도로는 주황색·노란색·남색의 순서로 중요성을 구분하였다.(이기봉)
수안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수안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수안군과 연산군 및 연탄군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수안군 석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遼東山(547m)이다. 산줄기가 모두 연결된 것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지도 오른쪽 위에는 谷山 玄武山에서 이 고을의 山脈이 들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전형화 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오른쪽 위쪽 부분에 있는 彦眞山(1,120m)이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鎭山인 읍치 위쪽의 요동산이 가장 크게 표시되어 있는 등, 산의 높이나 규모에 대한 정보는 거의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 중 가장 큰 것의 하나인 남강이다. 전통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綾城江 또는 能成江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아래쪽의 하천은 예성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원 안에 표시된 고개이다. 이 고개들은 최고의 요충지로 인식된 곳이었으며, 각각 文山鎭·位羅鎭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다. 위쪽의 주기에는 각 鎭에서 방어하는 고개가 잘 분류되어 있는데, ‘次知防守’란 문구는 ‘담당하여 방어한다’는 뜻이다. 이 두개의 진은 모두 숙종 6년(1680)에 설치되었으며,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었다.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이밖에 건물 모양의 그림과 함께 표시된 정보는 사찰·창고·역원·서원 정도이다. 특히 사찰의 정보가 자세한 것을 통해 崇儒抑佛의 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面은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어, 다른 정보와 구별되게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눈에 확 띄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읍치 오른쪽의 龍溪書院은 遂安君 李連松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신계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신계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신계군 전체와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및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신계군 신계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九峯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新恩縣과 俠溪縣을 합해 이루어졌으며, 각각 한자씩 따다가 ‘新溪’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신은현의 중심지는 오른쪽 아래의 水回坊에, 협계현의 중심지는 읍치 왼쪽의 西里坊에 있었다고 한다. 두 고을을 합할 경우 각각의 중심지가 아닌 중간 정도에 읍치를 새로 정하는 사례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위쪽(북)에서 아래쪽(남)으로 흐르는 하천은 예성강의 상류이다. 북쪽 수안계로부터 본류가 흘러 들어오며, 오른쪽 위의 이천계로부터도 지류 중의 하나가 들어온다. 이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고을이 마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하는 회화식 고지도에서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다. 읍치 역시 산줄기에 의해 이중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에는 內南山과 外南山이란 명칭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읍치의 풍수적 명당 관념을 표현하고자 했던 조선후기 사회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에 의해 인식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厲壇·社稷(壇)·文廟(鄕校의 大成殿)가 중요한 정보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城隍壇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에 이러한 제사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淸心亭·秀林亭 등의 정자가 상징처럼 표시되어 있다. 읍치 이외의 지역에는 山川과 사찰, 다른 지역의 ‘面’에 해당되는 ‘坊’만이 수록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으로 중요도를 표시하였으며, 사각형의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다른 직선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연안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호동면·호남면·해성면·송봉면·해룡면·봉서면·봉북면·석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연안군 동남쪽과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연안군 연안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飛鳳山(또는 鳳勢山, 282m)이다. 읍치에는 명종 10년(1555)에 만든 둘레 1,389尺(약 417m)의 石築 邑城이 있었다. 이 고을은 읍치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평지에 해당되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읍치 남쪽에 있는 南大池(臥龍池라고도 한다)이며, 둘레는 20里 102步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정도의 크기면 조선시대에는 초대형에 해당되며, 이런 사실 때문에 고을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을에 대한 다른 지도에서도 이 남대지는 실제보다도 훨씬 크게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巨味川은 ‘巨美筒洑’라고도 한다. ‘筒’은 보통 간척지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며, ‘洑’는 하천을 막아 물을 저장하던 둑이다. 이렇게 볼 때 거미천은 해안가의 하천을 막아 만든 저수지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사실 때문에 ‘川’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堤堰과 洑(또는 川防)는 조선후기에 가장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로서 인식되었다. 거미천 이외에도 작은 제언이 지도 여기저기에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塩幕이 표시되어 있고, 육지나 바다와는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조선후기에는 염분의 농도를 높인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煮鹽法이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자염처는 주로 염분의 농도를 높이는 작업에 필요한 갯벌(干潟地)에 입지하였으며, 지도에 바다·육지와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는 부분이 바로 이 갯벌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오른쪽의 書院은 飛鳳書院이며, 朱子(1130-1200)·崔沖(984-1068)·金宏弼(1454-1504) 등을 배향하여 숙종 8년(168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옹진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동남면·북면·서면·용천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 옹진군 일대이다. 읍치는 옹진군 옹진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花山이다. 읍치에는 廣大山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邑城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 읍성의 둘레는 3,524尺(약 1,057m)이었는데, 이 지도를 통해 산지와 평지를 아우르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의 邑誌에 가장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었던 것 중의 하나인 堤堰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둘레 584丈(약 1,752m)의 松筒堤堰으로서, 당시에는 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송동제언에서의 ‘筒’은 일반적으로 간척한 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한자이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황해도 水軍節度使가 파견된 所江(行營)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소강진이었는데, 숙종 45년(1719)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 옹진현 역시 옹진도호부로 동반 승진되었으며, 수군절도사가 옹진도호부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바다를 막은 곳에 ‘築筒’이라는 글씨를 적어놓았으며, 그 아래쪽에는 망루에 해당되는 瞭望이 초가집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船艙은 소강 소속의 戰船이, 읍치 왼쪽의 船艙津에는 옹진 소속의 戰船이 정박하는 곳이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전선의 종류와 수가 자세히 적혀 있다. 또한 棺槨과 戰船 제조용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無黃腸船材木’이란 문구를 통해 봉산의 운영이 실질적으로는 잘 운영되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기타 해안가에 ‘浦’가 아주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은율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북부면·서부면·남부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중 城隍壇을 제외한 세 군데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厲壇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게, 社壇은 토지신에게, 文廟(향교의 大成殿)는 유교의 聖賢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황단은 기록에 의하면 읍치 남쪽의 南山에 있었으며,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漢川은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하천 명칭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漢’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의 소리를 그대로 적은 것이며, ‘川’은 우리말 ‘내’의 뜻을 따서 붙인 것이다. ‘한내’는 한자의 뜻을 따서 ‘大川’이라고 기록하는 경우도 많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九月山城이 보이고 있다. 九月山(954m) 정상 부근의 평탄면에 만들어진 대형산성으로서, 둘레가 14,386尺(약 4,319m)이었다고 한다. 남북으로는 절벽이며, 동서로는 棧道(벼랑길)만 있을 정도로 천혜의 요지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그 위쪽의 高要淵은 하천에 있는 가마같이 생긴 깊은 못이라고 하며, 이런 곳에는 조선초기까지도 祈雨祭를 지냈다. 왼쪽 위의 席島에는 牧場이 있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목장에 牧子가 30명, 말이 암수 합해 102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栗峯書院은 광해군 5년(1613)에 朱子(1130-1200)·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도로는 검붉은 타원형 안에 글씨를 써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面의 이름은 위쪽의 주기에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장련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일도면·이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은율군 동북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장련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鳳凰寺가 있는 鳳凰山이었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長命鎭과 連豊莊을 합해 만들었으며, 태종 13년(1413)에 각각 한자씩 따서 長連縣이 되었다. 장명진이 읍치가 있는 지역이며, 연풍장은 지도 왼쪽에 古縣이라 적혀 있는 곳이었다. ‘莊’이란 고려시대의 귀족이나 승려가 가지고 있었던 莊園이며, 독자적인 행정단위로서 기능했다. 연풍장을 통해 ‘莊’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으며, 縣에 맞먹는 독자성을 가진 경우도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읍치 주변에서는 社壇·厲壇과 같은 제사 공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왼쪽 위에는 대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의 松串祭壇도 보이고 있다. 국가에서 大川의 小祀로 인정하여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제사하던 곳이다. 그 왼쪽에는 이 고을의 戰船이 정박하던 防船所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의 鳳陽書院은 좌의정에까지 올라 탕평에 힘을 쏟았던 朴世采(1632-1695)를 배향하여 숙종 21년(1695)에 세워지고, 그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에는 ‘面’이라고 적혀 있지만, 아래쪽 주기의 설명문에는 面 대신에 황해도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坊’이라는 명칭이 보인다.(이기봉)
장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장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인천직할시 백령면과 황해남도 장연군·룡연군·태탄군의 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장연군 장연읍에 있었다. 지도의 표현 방식이 같은 책의 다른 지도와는 약간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심부의 산줄기를 지도 한가운데에 있는 御營屯 쯤에서 바라보이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와 같은 방식은 회화식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정확성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 지도에도 일부 반영되고 있다. 여기서 어영둔은 御營廳에서 折受한 屯田을 의미한다. 도로도 정사각형의 方案에 맞추기 위해 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붉은색·황색·연초록색의 순서로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아래쪽의 백령도·대청도·소청도도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정된 지면에 표시해야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 섬을 方案이 없는 부분에 그린 것은 실제의 거리보다는 방향 같은 정보만을 담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위에 있는 島沙乃島·陸沙乃島 등의 위치 정보는 거의 정확하지만, 크기에 대한 정보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간 곳은 ‘장산곶매’로 널리 알려진 長山串이다. 중국의 山東半島와 가장 가까운 곳이며, 평안도를 왕래하는 뱃길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인지 조선에서도 祀典에 小祀로 정한 후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長山祭堂이 바로 그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는 海安面은 태종 16년(1416)에 이 고을에 통폐합된 海安縣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는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助泥鎭과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된 吾叉鎭, 그리고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와 海防要衝處 역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백령도에는 이 당시에 獨鎭이 설치되어 있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灣으로 표시된 곳에는 本府防船所·吾叉防船所·助泥防船所 등이 보이고 있는데, 각 소속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다. 여기서 본부방선소는 장연부 소속임을 의미한다. 조니방선소 위쪽에는 僧將所管이란 문구가 보이는데, 金沙寺에 堡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僧將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 아래쪽에는 私封松田이 표시되어 있다.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封山으로서, 봉산이 松田으로 기록된 경우는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밖에 사찰·면·역참·봉수·진도에 대한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재령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재령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재령군과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재령군 재령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장수산성이 있는 長壽山(747m)이다. 원래의 읍치는 장수산성 바로 남쪽에 있었는데, 중종 14년(1519)에 염병이 돌았다고 하여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재령강이며, 왼쪽은 그 지류인 서강이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濟梁大海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 바다로 들어가는 부분을 일컫는다. 이곳이 大海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潮水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폭이 매우 넓기 때문이었다. 재령강에는 많은 灘(여울)이 표시되어 있다. 灘(여울)이란 물살이 빠르지만 얕아서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며,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다양한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은 일제초기에 전국적인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진 이후이다. 지도 아래쪽 부분에 있는 長壽山城은 둘레 31,908尺(약 9,572m)에 달하는 초대형 산성이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재령·신천·배천·해주의 군기고와 군향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內城·外城의 규모와 절벽을 성곽처럼 그대로 이용한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鐵峴鎭도 보이고 있는데, 유사시에는 장수산성에 들어가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작은 붉은색 원 안에는 ‘屯’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屯田을 의미하는데, 미개간지를 개척·경작하여 지방관청이나 국가기관의 경비 및 군량에 쓰도록 한 땅이다. 원이 표시된 곳은 그러한 둔전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모아두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信川地에 있는 守禦屯은 守禦廳에서 관리하던 屯田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 보면 ‘守禦屯의 屯畓은 본 고을에 있지만, 倉庫는 信川 땅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지도 중간쯤에는 朱子(1130-1200)·李珥(1536-1584)를 배향하여 효종 6년(1655)에 세워지고, 숙종 21년(1695)에 賜額 받은 景賢書院도 보이고 있다. 기타 驛院·面·寺刹 등의 정보도 지도에 소상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토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금천군의 토산면·합탄면·서천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 토산군이다. 읍치는 토산군 월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兎山이다. 지도를 보면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고, 지도 왼쪽에 있는 하천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지역에서는 임진강을 지도에 기록된 萬東江으로 불렸다. 지도에서 표현된 것처럼 북쪽의 鶴鳳山(664m)과 남쪽의 頭毛山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그리고 학봉산으로부터 줄줄이 연결된 산줄기의 표현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 역시 회화식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3壇1廟, 즉 厲壇·社(稷)壇·城隍壇(지도에는 發告壇으로 되어 있음)과 文廟(향교에 있는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여단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성황단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3단의 경우 제단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 지도에도 그러한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도로는 붉은색·남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달랐다. 붉은색 도로의 경우에만 고개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못이나 기암괴석 등 특이하게 생긴 지형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龍淵은 비가 오지 않을 때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 창고와 사찰도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어 표시되고 있다.(이기봉)
평산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평산군 전체와 연안군의 목단면·괘궁면·용해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북도 평산군·린산군과 황해남도 봉천군·연안군 서쪽 일부·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산군 산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지도 위쪽에 가장 큰 산으로 그려져 있는 滅惡山(816m)이다. 인구나 면적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큰 고을이며, 세 개의 서로 다른 유역권에 속해 있고 고을의 경계선도 복잡하다. 이런 현상은 보통 몇 개의 고을이 합쳐질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평산에 대한 地誌의 기록에는 그러한 흔적이 보이고 있지 않다. 평산 박씨인 朴守卿(?-964) 등이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고려시대 내내 가장 강한 호족 중의 하나로 군림했던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의 동쪽은 예성강과 그 지류(漏川)가 보이고 있으며, 서북쪽은 북쪽으로 흐르는 재령강의 상류(琵琶川), 남쪽은 화양천(三灘)의 유역권에 속한다. 고을 북쪽과 중앙 부근에 높은 산이 몰려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거의 평지에 가까운 남쪽 부분까지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전형화 된다. 읍치는 環抱型의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식이다. 실제 지형이 이런 모양이 아닐지라도 관념 속에 인식된 형태가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읍치 오른쪽의 太白山城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 쌓았다고 하며, 이후에도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조선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지역 집단 방어의 중심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영조 때 둘레 12,111尺(약 3,633m)에 달하는 대형산성으로 修築되었다. 예성강에는 다리가 세 개나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모두 여울(灘)에 설치되어 있다. 여울이란 물살이 빠르면서 수심이 얕은 구간이며, 이런 곳에 다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성강의 폭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통해 볼 때, 지도에 그려놓은 것처럼 나무와 흙으로 만든 임시적인 다리였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색 직선으로 그려 넣었다. 申崇謙(?-927)·李穡(1328)을 배향한 東陽書院과 朴世采(1632-1695)를 배향한 九峯書院도 중요한 정보로서 표시되어 있다. 두 서원 모두 숙종 때 사액 받았다. 신숭겸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申氏를 賜姓받으면서, 이 고을을 본관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등도 아주 자세하며, 지도 가운데에는 현재도 봉천온천으로 개발되어 있는 溫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풍천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운유면·율리면·하리면·상리면·천동면·진풍면·초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과일군 일대이다. 읍치는 과일군 과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望德主山 바로 남쪽에 있었던 瑞麟峰이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리고 있는데,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실제 지형이라기보다는 풍수적 관념에 의해 인식된 모습이다. 중요한 산의 경우 청회색으로 표시하여 다른 산과 구별하고 있다. 읍치 왼쪽에는 西海壇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해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중국과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라고 하며, 그 흔적이 지도 아래쪽 왼쪽에 있는 唐館浦이다. 당에서 신라로 올 때 바로 이곳에 정박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런 이유로 이곳이 서해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지도에도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許沙鎭과 椒島鎭이 표시되어 있다. 초도진에는 牧場도 개설되어 있었으며, 수군첨절제사가 監牧官을 겸하고 있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풍천부·초도진·허사진에 배치된 戰船의 종류와 수, 水軍의 수 등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坊과 面이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위쪽의 주기에는 坊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고 모두 面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방과 면은 같은 행정단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또 다른 명칭으로는 社가 있다. 일반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坊, 함경도에서는 社, 나머지 도에서는 面이라고 지칭하였다. 기타 아래쪽의 栗里面에 있는 하천이 마치 松禾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잘못된 부분이다.(이기봉)
해주목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해주시·벽성군 전체, 옹진군 교정면·가천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남도 해주시·벽성군 전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주시 영광동·부용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향교 위쪽에 표시된 龍秀(→首)山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輿地圖書≫ 내의 해주목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본 지도에 비해 ≪해동지도≫의 것은 읍치를 부각시켜 그렸으며, ≪여지도서≫의 것은 더 간략하게 그렸다. 해주에는 黃海道觀察使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黃海道兵馬節度使·海州牧使 등을 겸하고 있었다. 邑城은 황해도의 최고 정치중심지에 걸맞게 둘레 10,197尺(약 3,059m)에 달하는 대형의 石築 城郭이었다. 지도에는 마치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았다. 曲城이라 표시한 부분은 성곽이 주로 곡선의 형태를, 나머지는 주로 직선이 교차되는 형태를 취했을 뿐이다. 읍성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文廟(향교의 大成殿)·厲壇·社稷壇의 제사처와 화려한 亭子가 배치되어 있다. 읍성 오른쪽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伯夷·叔齊 형제를 배향하여 숙종 17년(1691)에 세워지고 같은 왕 27년(1701)에 사액 받은 淸聖廟가 보이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周 武王의 商에 대한 정벌이 부당하다며, 周의 祿을 받기를 거부하고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다가 굶어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東夷 사람이라는 추정에 의해 해주에는 그의 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국적인 書院 건립의 붐을 타고, 숙종 때에는 이 고을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뒤쪽의 首陽山이란 명칭도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있다. 기타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모였던 司馬所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수양산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바뀐 방어 개념의 산물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을마다 책임지고 방어하던 방식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몇 개의 고을을 묶어 방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대대적으로 대형산성을 修築하거나 新築하였다. 수양산성도 숙종 2년(1676)에 수축하였고, 유사시 해주·옹진·연안·장연·강령 5개 고을이 들어와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읍성 아래쪽 해안가에는 方船船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고을에서 관할하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龍媒鎭도 보이고 있다. 지도 오른쪽의 延安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靑丹院이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고 9개의 屬驛을 거느린 靑丹驛이었다. 이밖에도 사찰·서원·다리·고개·하천의 명칭과 위치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황주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황주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주군·송림시 전체와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황주군 황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碧霞山이다. 지도 왼쪽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대동강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재령강이 합류한다. 이곳을 急水門이라고 하며, 潮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다로 인식되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황주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간다. 읍성 왼쪽에 있는 海倉을 통해 潮水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오른쪽에는 ‘筒’이라는 명칭이 2개 보이고 있는데, 보통 간척하여 만든 둑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女妣筒과 細塘筒은 간척 과정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둘레 2,000尺(약 600m) 안팎의 제언이다. 지도 아래쪽 왼쪽에는 간척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大也島-斗用島-烽火串을 잇는 防築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大也筒이 보이고 있다. 그 바깥쪽은 육지로 표시되어 있지만 간석지, 즉 갯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에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야도 오른쪽에는 蘆田(갈대밭)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갈대의 쓰임새가 많아 중요한 稅源으로 인식되었다. 고을의 남쪽과 서쪽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산줄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듯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地脈이 모든 지역에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적 인식의 반영이다. 북쪽으로부터 대동강을 넘어온 적을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 인식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남쪽의 산줄기가 재령강과 만나는 지점은 대부분 습지로 존재했기 때문에, 대동강을 넘어온 적은 남쪽의 산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이 산줄기 위에는 각종 방어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도 중요한 고개 이름이 붉은색 타원 안에 적혀 있으며, 洞仙關·正方山城·蕀城土城 등 중요한 방어시설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고을의 읍치에는 黃海道兵馬節度使營(兵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읍성은 둘레 2,830步(약 5,094m)에 해당되는 대형이었으며, 문을 공격하는 적을 재공격하기 위한 甕城과 도랑에 물을 넣어 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는 垓字도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朱子書院의 일반 명칭은 白鹿書院이며, 朱子(1130-1200)·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였다. 선조 1년(1568)에 세워지고, 경종 1년(1721)에 賜額 받았다. 기타 일반적으로 ‘面’이라 지칭되는 행정단위가 본 지도에서는 ‘坊’이라고 적혀 있다.(이기봉)
황해도는 일제시대에도 그대로 황해도로 되었으며, 현재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초기에는 황해도에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으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이 합쳐져 金川이 되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전체 모습이 현재와 거의 유사하며, 고을 간 경계선이 표시된 몇 안 되는 지도 중의 하나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중요 산줄기는 높낮이에 상관없이 청남색을 칠하여 쉽게 구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후기의 道別地圖나 全圖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서, 김정호의 ≪東輿圖≫나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산줄기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監營·水營·兵營 등은 정사각형의 성곽 표시와 함께 붉은색을 칠하여 눈에 확 띄도록 하였다. 鎭堡와 같은 군사기지는 세로로 긴 청색의 사각형으로, 대형산성은 구체적인 모습과 청남색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戰船이 정박하던 防船(所)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며, 유사시 소식을 전하던 烽燧 역시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도로와 驛站의 표시가 자세하다. 이 모든 것이 지도 작성자가 군사적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대형산성의 강조는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초기에는 각 鎭堡나 고을마다 독자적으로 방어하는 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대형 전투가 주를 이루었던 兩亂을 겪으면서, 여러 고을이 대형산성에 들어가 집단적으로 방어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각 고을은 흰색의 원 안에 표시하였으며, 다음의 행정단위로는 面의 대부분과 중요 洞이 표시되어 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面 대신에 사용한 坊이란 명칭도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창고의 표시도 자세하며, 宮房田인 ‘屯’도 자주 눈에 띈다. 위쪽의 大同江, 오른쪽의 禮成江을 비롯한 하천도 중요한 것은 거의 모두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구간마다 사용된 다양한 명칭도 적혀 있는데, 津·浦·灘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기타 사찰·제언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당시에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강진현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금의 전남 강진군 강진읍, 군동면, 대구면, 도암면, 병영면, 성전면, 옴천면, 작천면, 칠량면과 완도군 완도읍, 고금면, 약산면, 신지면, 청산면, 군외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서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태종 17)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해 만들어진 고을로 전라도 해안 방어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도에도 읍치 동쪽의 兵營을 비롯하여 해안가와 바다에 진영이 그려져 있다. 兵馬節度使營은 전라도 육군의 총본부로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된 것을 옮겨온 것이다. 1599년(선조 32)에 권율의 상소로 일시 장흥으로 옮겨갔으나 1604년 다시 원래대로 복귀하였다. 남쪽 바다의 新智島鎭은 강진군에 속한 진영으로 원래 사복시 관할의 목장이 있었다고전해지기도 한다. 1681년(숙종 7)에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므로 萬戶鎭을 설치하였다. 그 위쪽에 위치한 古今島鎭은 1598년(선조 31)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募民屯耕하면서 왜선을 격파했고, 明將 陳璘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군을 제압하는데 일조를 하여 명나라까지 알려졌던 곳이다. 1681년(숙종 7) 이곳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임이 인정되어 진을 설치하고 水軍同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大口面 해안가에 위치한 馬島鎭은 수군 만호진으로 원래 강진현 백도면 완도의 북쪽에 있었으나 선박처로서 불편하다 하여 대구면 마량으로 옮긴 것이다. 서남쪽 寶岩面의 萬德寺는 지금의 백련사로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1232년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오상학)
고부군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부군은 전라도의 동진강 유역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정읍, 서로는 흥덕과 연결된다. 1리 방격으로 그려졌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를 부각시켰다. 읍성 안에는 衙舍, 客舍 등의 관청 건물과 다른 고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社位牌堂이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의 향교에는 일종의 기숙사인 養士齋의 모습도 보인다. 畓內面의 道溪書院은 1673년(顯宗 14)에 金昌集, 閔鎭遠의 주창으로 창건된 서원으로, 益齋 李希孟, 鰲峯 金齋閔, 慕菴 崔安, 苔川 金地粹 등을 배향했다. 所井面의 旌忠祠는 1632년(인조 10)에 세워졌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宋象賢,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申浩및 金俊 등이 배향되었다. 읍치의 남쪽에 있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원래는 富安鄕이었다. 지도에도 고을과 멀리 떨어져 그려져 있다. 여타 항목에 비해 제언의 표시가 상세한데 고을 남쪽의 毛助堤에는 과거 毛助部曲이 있었다.(오상학)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고산은 지리산 북쪽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계룡산 쪽으로 뻗어 가는 錦南正脈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유역권으로는 동진강 유역에 해당한다. 북쪽 雲梯山 아래는 雲梯廢縣이 있던 곳으로 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면이름이 운북, 운동, 운서 등으로 되어있다. 운제현은 본래 백제의 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고려 때는 전주에 속했다가 조선 태종 원년에 고산현에 來屬되었다. 용계원 서쪽의 花巖寺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절로 檀香木으로도 유명한데 절 주위에 이를 상징하는 수목을 그려놓은 것도 이채롭다. 大芚山에 있는 安心寺는비문에 의하면 638년(신라 선덕여왕7)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사적비(지방유형 제110호), 안심사 부도 및 부도전(지방유형 제109호) 등이 남아 있다. 그 남쪽에는 경승으로 이름난 玉溪洞이 표시되어 있다. 대로의 주변에 형성된 주막촌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雲東面에 있는 新巨里酒幕이 대표적이다.(오상학)
고창현은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부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정읍, 아래로는 영암과 연결된다. 지도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흡사 꽃이 피는 모습으로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도 잘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보통의 고을과는 달리 산사면에 위치해 있어 방어적 기능이 강조되어 있다. 일명 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과거 고창의 지명이 牟陽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주위가 561把이고 방어를 위한 曲城이 9, 女堞이 538곳이라 했는데 고창 읍성이 지니는 방어적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읍성 안에는 동헌·객사뿐만 아니라 鄕廳, 刑房廳, 鍊武廳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현재에도 이곳에 관청 건물들이 복원되어 남아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古城峰이 있는데 이는 西山城을 말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성은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2리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을 남쪽의 鷲嶺山 자락에는 文殊寺가 그려져 있는데 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643년(의자왕 3년)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오상학))
곡성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곡성읍 읍내리에 있었다. 곡성은 지리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로, 읍치의 서쪽으로 動樂山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섬진강의 지류인 子江이 고을을 감싸며 돌아나간다. 고을 북쪽에는 靑溪洞이 표시되어 있는데, 청계동은 지금의 곡성읍과 입면 사이로, 동악산이 큰 용처럼 달려오다 강줄기를 만나 멈춘 곳이다. 또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남원시의 한봉과 순자강을 사이에 둔 道界 지역으로써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마치 삼청의 진경을 옮겨 놓은 듯 하다는 명승지이다. 읍치 동남쪽의 文成公影堂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다고 전해지는 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아래쪽의 德陽書院는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고려 태조 때의 開國功臣 申崇謙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에 賜額되었다. 고을 남쪽의 東裏山 부근에는 고려초기 대찰이었던 泰安寺가 그려져 있다. 태안사는 九山禪門의 하나인 桐裏山派의 중심 사찰로 慧徹國師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오상학)
광양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섬진강이 감싸도는 풍광이 수려한 고을로 땅은 남해에서 끝나고 산은 지리산을 연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맥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환포형으로 그려지지 않고 봉우리가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쪽에는 蟾津鎭과 船所 등의 군사기지가 들어서 있다. 섬진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었던 鎭이다. 섬진강 하류 영남과 호남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서 1603년(선조 36)에 통영에서 都廳을 설치하고 募軍을 두었다. 그 후 1705년(숙종 31)에 전라도 巡使 閔鎭遠과 巡撫使 權尙游, 統制使 吳重周 등이 이곳이 국방의 요충지가 됨을 장계하여 진을 설치하고, 종8품의 別將을 두어 통영에서 관할케 하였다. 지도 상단에는 고을의 여러 封山이 기재되어 있는데, 해안에 위치한 고을의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 船材를 공급하는 봉산이었다.특히 고을에 산재해 있는 사찰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읍치의 북쪽에는 우리 나라 풍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道詵이 기거했던 玉龍寺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광주목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와 담양군 대전면과 담양군 수북면 일부, 신안군 하의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옛 성내면 지역으로 지금의 광주시 동구 광산동, 궁동, 금남로, 장동, 충장로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단일한 시점으로 지역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특히 이 지역 최고의 명산인 무등산의 기암괴석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수려한 경치의 舍人岩, 持平岩도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는 1,401把였다. 읍치 동편에 위치한 景陽驛은 여섯 개의 屬驛을 거니린 察訪驛이었는데 지도에도 여러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다. 광주는 양반들이 세거했던 큰 고을이어서 많은 서원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가운데 포충사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했던 서원이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도 남아 있었다. 石保面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개인 亭子인 環碧堂이 그려져 있다. 환벽당은 沙村 金允悌( 1501 1572)가 세운 別墅亭子로, 그는 말년에 낙향해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당시 주인이 幼學 鄭桓으로 되어 있다. 무등산으로 향하는 길목의 초입에 위치한 證心寺는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 도윤(798 868)이 세운절로 고려 때 혜조국사가, 조선조 때 김방이 새로 지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1609년에 석경, 수장, 도광 등 세 선사가 다시 중수하였다.(오상학)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 부분, 토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구례읍 鳳東里 일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웅장한 지리산이 포진해 있고 섬진강이 고을을 가로질러 흘러 나간다. 지도에도 산지가 많은 지역이 특성이 반영되어 많은 산들이 그려져 있는데 봉우리의 시점이 통일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 도면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주위는 4,481척이었다. 읍치의 북쪽에는 壇과 城隍壇이 그려져 있는데 성황단의 모습이 초가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치 북쪽의 華嚴寺는 31본산의 하나로 우리 나라 華嚴宗의 鼻祖로 알려진 義相이 신라 문무왕 때 화엄경 80권을 석판에 새겨 보관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화려한 석등과 석탑 등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이 지역에는 封山도 지정되어 있었는데, 艮田面과吐旨面의 宜松山이 대표적이다. 이들 봉산에서는 집을 짓는 재목을 공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栗木封山도 토지면에 설치되어 있어서 이 지역이 목재를 공급하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금구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전주와 김제 사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산지, 서쪽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鳳頭山인데 산의 모양이 봉황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術家들이 掘禪山에 開桐寺를 세워 날고 움직이는 기세를 눌렀다고 한다. 지도에도 봉두산의 아래쪽에 개동암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쪽에 있는 母岳山은 이 지역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 있는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眞表律師가 중건하여 5교의 하나인 法相宗의 도량이 되었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후백제 견훤이 창건한 것이라 전하고 있고, 아들 神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가두었던 곳이라 한다. 지도에도 여러 건물과 울창한 수목을 그려 당시에도 번성했던 사찰임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에는 사액서원인 九成書院과 미사액 서원으로 六松鄕賢이 그려져 있는데 六松祠는 현재 금산면 삼봉리에 남아 있다.(오상학)
금산군은 지금의 충남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전북 무주군 부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금산읍 중대리 일대에 있었다. 금산군은 역사적으로 전라북도에 속했다가 1963년에 충청남도로 이속되었다. 금산군은 금남정맥이 경유하는 산간분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발고도가 높다. 지도에도 읍치를 중심으로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산지의 모습을 흡사 동심원처럼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원래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황폐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음을 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所山으로 그 아래에는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義 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수만명과 싸우다 순국한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700여명을 장사지낸 곳이다. 그 옆에는 이들에게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從容堂과 高霽峯殉節碑도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 南上面의 星谷書院은 고려 충렬왕 때원나라에서 參政이라는 벼슬을 받았던 金侁 등이 배향되었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북쪽에 위치한 濟源驛은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었다.(오상학)
김제군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제시 교동, 요촌동 일원에 있었다. 김제군은 김제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평지 고을로 남쪽의 원평천과 북쪽의 신평천이 서해로 흘러간다. 고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벽골제로 예로부터 이름난 곳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벽골제는 백제 때 처음 제방이 축조되었고, 790년(신라 원성왕 6년) 侍中 金宗基가 전주 등 7읍 인민을 징발하여 증축한 바가 있고, 고려 현종과 인종 때 修築한 후 폐해졌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수축하였고 후에 다시 폐해졌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또한 수축하였는데, 제방의 길이가 2,600步, 둘레가 60리이다. 지도상에는 제언의 기능보다는 둑을 따라 도로로 활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고을이지만 고을 전역에 걸쳐 산들을 그려 넣었다. 고을 서쪽의 鳴良山에는 과거 鳴良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龍岩書院은 조선 1488년(성종 17)에 세워졌으나, 병화(兵禍)로 불타 없어지고 1575년(선조 8)에 다시 지었던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성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는 文良公 趙簡을 중심으로 李繼孟, 羅應參, 羅建溪 등이 배향되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興福寺 원래 백제 의자왕 10년(650년)에 보덕화상이 승가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승가사가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지자 1625년(인조 3)에 다시 절을 지어 흥복사로 이름지었던 것이다.(오상학)
羅州牧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의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의 경현동과 교동지역에 있었다. 羅州牧은 인근 務安縣의 地界를 넘어 서쪽 해안의 도서를 越境地로 소유하고 있었는데,이로 인해 지도에도 해안의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무안현 境內에 있던 三鄕面도 나주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다. 이들 월경지는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로소 인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산지의 묘사는 회화적 수법을 가미하였다. 특히 서쪽 해안의 산에는 수목의 모습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읍성이 있던 읍치에는 중요 관아 건물과 더불어 민가를 노란색 지붕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지도의 상단에는 지역 각종 지지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토지, 인구를 비롯하여 재정, 군사뿐만 아니라 산천·진보·서원·정사·사찰·驛站·酒站·烽臺·封山·목장·道里·各面 등 많은 항목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지역의 이해를 돕고 있다. 서쪽 해안의 智島鎭은 1682년(숙종 8)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水軍萬戶를 두고 司僕寺別將을 겸하게 하였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사람들은 나주목에 속해 있지만 땅은 사복시소속이었다. 지도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戰船, 兵船이 각각 1척, 伺候船이 2척이 있었다.(오상학)
낙안군은 지금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서부와 보성군 벌교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남내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 지역은 남해안에 연해 있다. 남해안을 동서로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바다에 접해 있어 수운도 편리할 뿐 아니라 순천만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해안방어에도 유리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성 북쪽에 우뚝솟은 金錢山이다. 지도에도 크게 강조되었으며 수목까지 그려져 있다.상단의 기록에는 邑基를 鎭壓한다고기재되어 주변의 산에 비해 위세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고 내부에는각종의 관아 건물이 포진해 있다. 이 읍성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고 일부 관아 건물도 복원되어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둘레가 1,748把로 비교적 큰 읍성에 해당한다. 고을 남쪽의 開雲山 桐華寺는 1047년에 창건되었고,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 대각국사가 중건한 절로 전해진다. 또한 이 고을에는 다수의 봉산도 있었는데, 朴江山·油芚山·船頭登·鉢里山 등에 있었다. 그러나 지도에는 단지 松田으로만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남평현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일대에 있었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위로는 광주, 서로는 나주와 연결된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고졸하게 묘사되었는데, 산지는 읍치를 중심으로 환포형으로 그렸다. 고을의 서북쪽에는 군사들이 훈련받던 陳場이 있는데, 이를 지휘하는 將軍이 머무르던 將臺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蓬山書院으로서 조광조의 제자이자 선조 때 이조참판과 大司憲에까지 오른 休庵 白仁傑(1497-1579)을 배향하여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다. 고을의 남쪽에 위치한 佛會寺는 백제 때 胡僧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고려 말 원정국사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德龍山 기슭에 있는 雲興寺는 당 희종년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熊峙寺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熊岾寺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능주목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원에 있었다. 능주는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있으면서 영산강의 상류인 지석강을 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雲山이다. 고을 내부를 관통하는 函洑川 양안으로 수려한 경관이잘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남면 아래쪽 기암절벽이 있는 倭城山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옛 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의 서쪽 西二面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 터에 단지 雲住塔이라고 쓰여 있다. 운주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전해지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배와 같아서 돛과 사공을 상징하는 많은 탑과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과 같은 사찰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폐사되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竹樹書院은 중종 때의 名臣이고 己卯士禍(1519) 때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은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0년(선조 3)에 賜額되었다. 東面에는 天日臺가 그려져 있는데 조광조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읍치 주위에 竹田이 여러 군데 표시되어 있는데, 대나무의 산지로 유명했던 고을의 면모를 볼 수 있다.(오상학)
담양부는 지금의 전남 담양군 담양읍, 봉산면, 무정면, 대덕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담양읍 객사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위로는 순창, 아래로는 창평에 이어진다. 고을의내부를 영산강의 지류인 白川과 大橋川이 감돌아 나가고 있다. 지도에는 고을 주변의 산세가 여러 시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객사, 아사 등의 관아 건물과 더불어 臥治軒, 鍊武亭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동북쪽에 위치한 金城山城은 石城으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1653년(효종 4)에 重修하였는데,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성내에 있는 補國寺의 승려와 담양, 순창, 옥과, 창평, 동복 등의 고을 주민이 유사 시 산성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將臺의 모습과 大將廳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향교 옆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인 義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어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柳希春(1513-1577)을 배향한 서원이다. 유희춘은 1568년(선조 1)부터 1577년(선조 10)까지 10년간의 公私의 사실을 기록한 ≪眉巖日記≫의 저자로 유명하다.(오상학)
동복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동복천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며 곳곳에 비경을 이루었지만 현재는 동복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었다. 지도에도 동복천을 따라 萬景臺, 赤壁 등의 절경이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고을 동남쪽에 있는 母后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蘿茵山이었는데 고려 공민왕이 여기에 피난할 때 이 산의 덕이 母后와 같다 해서 모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읍치의 주맥이 동남쪽에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氷庫가 草屋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동쪽에는 甕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일명 철옹산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며 입암산성, 금성산성과함께 전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시에는 이 고을 현감을 지내고 진주성에서 순국한 황진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 하며 동학이 활발한 때에는 오계련이 이곳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읍치 북쪽의 서원은 道源書院을 말한다.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는데 崔山斗, 鄭逑 등을 배향하였다. 적벽 위쪽에 있는 勿染亭은 중종 명종 대에 성균관 전적 및 구례·풍기군수를 역임한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오상학)
만경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진봉면, 광활면,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과 부안군 동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일대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이다. 지도는 육지부에 있는 만경현 지역과 바닷가에 있는 고을 소속의 섬들을 같이 그리다 보니 전체 도면에 비해 고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지도 서쪽에는 여러 섬들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해당한다. 진영이 설치되었던 선유도를 중심으로 장자도, 무녀도, 신시도, 곶리도, 횡경도 등의 섬들이 포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로 향하는 무역항로의 기항지이자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들이 이곳에 정박하면서 바람을 기다렸던 곳이다. 조선초기부터 군산도였던 선유도에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때 옥구현 북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같이 이동하게 되자 이곳의 지명은 古群山島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의 고군산진은 1624년에 다시 설치되어 別將과 防牌船 1척을 두었고 1637년에 戰船을 두었다. 이어 1675년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고 1781년에 營將을 두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陵堤라는 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8,100척인데 지금도 이 일대의 가장 큰 저수지로 기능하고 있다.(오상학)
무안현은 삼향면, 해제면, 망원면, 운남면, 현경면 일부를 제외한 무안군 전체와 목포시, 함평군의 엄다면·학교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안읍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강이 동쪽에서 남류하고 지역의 서부와 남부가 바다와 접해 있다. 지금의 무안군 소속의 삼향면은 당시 나주목에 속한 월경지였기 때문에 무안현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서쪽의 해안에는 炭島 이외의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데, 압해도를 비롯한 이 지역의 여러 섬들은 당시 나주목에 속해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를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이 축조된 읍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졌는데, 특히 양쪽 날개 지붕이 있는 객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 해안에 위치한 木浦鎭은 정4품의 水軍 萬戶가 관할하던 진영으로 1439년에 최초로설치되었다. 근처의 唐串都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나주의 高下島에 처음 세운 것인데, 1647년(인조 25) 이곳으로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別將을 두었다. 해안에 위치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封山도 다수 설치되어 있음을 상단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서문 근처의 松林書院은 광해군 때 廢母論을 반대하다 무안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金權을 배향하였는데 1682년(숙종 8)에 사액되었다. 남쪽의 僧達山 밑에는 724년 서역의 僧인 明이 창건한 法泉寺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서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으로 고창, 남쪽으로는 영광에 이어진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진 고을이다. 읍치에는 원형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주위가 754把였다.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전한다. 동북쪽의 兜率山에는 이 지역의 대찰인 禪雲寺가 여러 암자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선운사는 금산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전북도내 2대 본사로서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이 절은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는 한 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 정책를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향교 근처에는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액서원인 忠賢祠가 그려져 있다. 忠賢祠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진 서원으로≪眉岩日記≫로 알려진 柳希春 등이 배향되었다.(오상학)
무주부는 지금의 전북 무주군 중에서 부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무주는 조선 1414년(태종 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여 만든 고을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과거 무풍현이 있던 곳으로지도에도 풍동, 풍서, 풍남 등의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동쪽으로 백두대간과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읍치는 산지가 있는 동쪽을 피해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읍치 내부에는 여러 관아 건물과 아울러 다른 지도에서는 보기 힘든 鐘閣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읍치 전면에는 여러 樓亭도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寒風樓는 이 고을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이었다. 한풍루는 전주 한벽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의 아름다운 누각으로 손꼽혔다. 읍치 남쪽의 적상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시대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史閣을 창건하여 1618년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別將을 두어 守城을 담당하게 하였다.(오상학)
보성군은 지금의 전남 보성군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으로는 호남정맥이 뻗어나가고,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고을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고을의 동남쪽이 바다와 연해 있어서 바다를 통한 교류도 이루어졌던 곳이다. 군의 진산은 서쪽에 위치한 德山이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고, 읍성 안에 그려진 列仙亭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公亭子로 郡守 申經이 중수한 것이다. 북쪽 積田面에 위치한 大原寺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명찰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승 圓悟의 부도와 黃喜의 影堂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원오국사의 부도는 남아 있으나 황희의 영당은 전하지 않고 있다. 고을의 동남쪽 해안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득량면 해평리 지역에해당한다.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곳이다. 이 고을에는 몇 개의 사액서원도 있었는데, 大溪書院·旌忠祠·龍山書院이 그것이다. 대계서원은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安邦俊을 배향했고, 정충사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郡守 安弘國을 배향했으며, 용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朴光前을 각각 배향했다.(오상학))
조선시대의 부안현은 지금의 부안군 중에서 백산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부안읍 서외리,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부안현은 1416년(태종 16)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부령현은 부안 읍치 쪽, 보안현은 남쪽 입하면·입상면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접해 있는 고을이지만 해안까지 이어진 산세가 제법 험준하다. 읍치가 있는 고을의 북쪽으로 동진강이 흘러가고 있고 강 유역에 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역의 특성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변산의 산세를 정교하게 그렸다. 특히 내변산의 유명한 폭포가 있는 龍湫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중요한 군사 기지들이 그려져 있는데, 종3품 僉使가 파견된 蝟島鎭, 종4품 萬戶가 파견된 黔毛鎭, 종5품 別將이 파견된 格浦鎭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격포진에는 1640년 인조 때 축조된 행궁의 모습도 보인다. 서원도 몇 개 창건되어 있는데, 고을 남쪽의 柳川書院과 읍치 남쪽의 淸溪書院, 東林書院, 南下面의 道洞書院 등이 그려져 있다. 서원과 더불어 사찰과 암자의 모습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오상학)
순창군은 지금의 전북 순창군 관할 가운데 영계면을 제외한 순창읍,구림면, 인계면, 적성면, 유등면, 풍산면, 팔덕면, 금과면, 쌍치면, 복흥면 지역이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동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고을이다. 지도는 조감도식으로 단일한 시점에 의해 그려졌으며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여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는 중요 관아 건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남아 있다. 동쪽의 赤城面과 서쪽의 福興面은 과거 적성현과 복흥현이 있었던 곳으로 여전히 지명에 남아 있다. 읍치 서쪽에 그려진 大母山城은 ''홀어미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관곡을 저장한 官倉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이미 많이 훼손되어 산성으로서의 구실은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華山書院은 邑誌에는 花山書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에는 급제하여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단종 양위 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고을 순창에 내려와 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살았다는 신숙주의 동생 申末舟 등이 배향되었다.(오상학)
순천부는 지금의 전남 순천시, 별량면 동부, 쌍암면, 서면, 송광면, 월등면, 주암면, 해룡면, 황전면과 여수시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남해안의 동쪽 경상도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여수반도에서 돌산도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걸쳐있다. 해안에는 左水營, 古突山鎭, 防踏鎭 등의 진영이 포진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었다.지도에도 남쪽에 성이 축조된 진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麟蹄山으로 다른 산에 비해 크게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읍치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동서남북의 성문도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쪽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은 성종 11년(1480) 수군절도사를 두었는데, 상단의 기록에 따르면 성 둘레가 3,336尺이었다. 黃田面 남쪽의 고돌산진에는 원래 수군 만호를 두었는데 중종 때 만호를 혁파하여 權管을 두었고, 1522년에 다시 召募別將을 두었다. 그 남쪽에는 監牧官이 그려져 있는데, 선조 때 설치한 曲華牧場이다. 방답진은 남해안에서 경상도로 가는 수로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중종 때 적이 침입하는 길목이 되므로 이곳에 僉使鎭을 설치하였다. 조계산 서쪽에 위치한 松廣寺는 신라 말엽 혜린대사가 창건한 우리 나라三寶 寺刹의 하나이다. 조계사 동쪽에 위치한 선암사는 末寺를 거느린 본산으로 雲岩寺, 龍岩寺와 더불어 호남의 三岩寺라고 한다.(오상학)
여산부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과 논산시 연무읍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산면 여산리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을 끼고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는 지역의 모습이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天壺山으로 여기에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서북쪽 금강변의 黃山은 조선후기 포구로 유명한 강경포가 있던 곳으로 黃山書院과 八卦亭이 그려져 있다. 황산서원은인조 때 낙향한 沙溪 金長生(1548-1631)이 이황, 이이, 성혼을 향사했던 서원으로 나중에 김장생이 추가로 배향된 후 1655년(현종 6)에 竹林書院으로 賜額을 받았다. 팔괘정은 김장생이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이후 송시열과 같은 이도 이곳에서 강학했다. 지도 상단의 여백에는 대표적인 私亭子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 북쪽 충청도와의 접경 지역에는 皇華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전라도의 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던 곳이다.(오상학)
영광군은 지금의 전남 영광군 영광읍, 백수읍, 홍농읍, 군남면, 낙월면, 대마면, 묘량면, 법성면, 불갑면, 염산면과 장성군 삼계면, 무안군 망운면, 진하면, 신안군 임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 일대에 있었다. 영광은 서해안에 접하여 완만한 평지가 펼쳐 있다. 고을 내부를 남북에서 立石川과 道鞭川이 감돌아 서해로 빠져 나간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지도에는 육지부뿐만 아니라 해안의 섬들도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섬의 방향은 육지부와는 달리 서쪽을 향하고있다. 읍치에는 둘레 2,000把 정도되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남문과 북문에는 누각도 세워져 있다. 서북쪽 해안의 法聖鎭은 처음에는 수군 만호가 배치되었으나 1708년(숙종 34)에는 水軍僉節制使로 승격시키면서 진량면을 분할하여 獨鎭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법성창이 있었는데 인근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합하여 서울로 조운하였다. 고을 남쪽의 多慶鎭은 수군 만호가 관할하는 진영으로 鎭城은 1515년(중종 10)에 쌓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는 封山과 더불어 箭竹田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지도 상단에는 이들 봉산의 상태와 전죽전의 크기까지 기재하였다. 또한 목장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임자도에 있는 荏子牧場과 망운면에 있는 羅州牧場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나주목장은 영광군 지역에 있으면서도 모든 일은 나주목에서 처리하였다. 이 밖에 서원도 다수 창건되어 있었는데 栢山祠宇·龍溪祠宇·龍巖祠宇·壽岡祠宇·長川祠宇 등을 들 수 있다.(오상학)
영암군은 지금의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서면, 덕진면, 도포면, 미암면, 삼호면, 서호면, 시종면 서부, 신북면, 학산면과 해남군 북평면, 송지면, 옥천면, 북제주군 추자면 그리고 완도군 노화읍, 보길면, 소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남풍리 일대에 있었다. 영암은 남쪽으로 월출산이 포진하여 있고, 위로는 영산강 유역의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고을이다. 전체적으로 지역의 모습이 단일한 시점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호남의 금강으로 일컬어지는 月出山에는 기암괴석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산 남쪽 기슭에 그려져 있는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기도 하다. 정자는 公亭子뿐만 아니라 私亭子도 많이 있었는데 서종면에 있는 會社亭은 주인이 개인이 아닌 鳩林大同契였다. 구림대동계는 향약 정신의 구현을 통해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으로 다소 침체되었으나 이후 활성화되어 호남의 대표적인 마을계로서 이어져 왔다. 해안에는 군사기지도 볼 수 있는데, 고을의 남쪽 끝에는 梨津鎭이 그려져 있다. 최초 1597년에 진을 설치하여 權管을 두었다가 1627년(인조 5)에 수군 만호진으로 승격시켰다. 이곳은 삼남대로의 끝 지점으로 제주가는 배가 떠나던 포구이기도 했다. 서남쪽의 於蘭鎭은 영암의 월경지로 해남현 너머 해안에 위치한수군 만호진이었다.(오상학)
옥과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삼기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있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섬진강의 지류인 옥과천 유역에 평지가 펼쳐져 있고 나머지 지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른 지도에 비해 지도의 크기도 작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회화적 성격이 비교적 강하다. 다른 지도에 비해 읍치가 비교적 크게 그려져 있다. 특히 읍치 북쪽에는 氷庫까지 표시되어 있다. 남쪽의 聖德山에는 觀音寺가 탑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300년(백제 분서왕 3) 성덕보살이 전남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봉안하여 창건한 백제 고찰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은 현내면의 詠歸書院이다. 이 서원은 1564년(명종 19) 옥과유림들이 옥과현감으로 재임했던 河西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사우로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詠歸亭祠로 세워진 뒤, 그로부터 130년 후인 1694년(숙종20)에 들어와 詠歸書院으로 발전하였는데 사액되지는 못했다.(오상학)
沃溝縣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시내와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옥구읍 상평리에 있었다. 서해안의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고을의 남쪽과 북쪽에서 금강과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에 위치한 鉢伊山이다.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1544년(중종 39)에 修築하였는데 둘레는 布帛尺으로 3,490척이다. 읍성 안에는 관아 건물과 통상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와 興學堂의 모습이 보인다. 고을 북쪽의 山鎭은 원래 萬頃에 소속되어 있던 古群山島에 있었는데 해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1701년 이곳으로 옮겼다. 1710년에는 萬戶鎭에서 僉使鎭으로 승격시켜 漕運의 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戰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있었다. 군산진의 옆에는 인근 6개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도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운선이 17척이나 있었다.(오상학)
용담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최근 용담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수몰된 지역이기도 하다. 평지가 적은 산간 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이지만 고을의 범위는 비교적 넓다. 고을의 진산은 龍岡山으로 그 북쪽에서 뻗어오는 맥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남이면 황산마을 앞에는 금강이 그 지류인 주자천과 합수하여 三川을 이루고 있는데 그 곳은 예전에 이름이 馬山潭으로서 龍潭이라고도 불리었다. 고을의 이름은 바로 이 용담에서 유래한 것이다. 南二面에 그려진 三川書院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의 顔子·程子·朱子·諸葛亮 등을 배향하였다. 1667년(현종 8)에 현령 洪錫이 창건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되었다. 읍치 서남쪽에 위치한 珠 山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산으로 이 산에서 북쪽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이 된다. 산 기슭에는 崇巖寺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天皇寺가 바로 이 절로 신라 헌강왕 때 道人 無染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西面의 주자천 가에는 수려한 경치로 이름난 臥龍岩과 半日岩이 그려져 있다. 반일암은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라 한다.(오상학)
용안현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용안면과 용동면에 있었던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용안면 교동리에 있었다. 용안은 북쪽으로는 충청도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咸悅, 동쪽으로는 礪山에 이어진다. 금강에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비교적 적은 면적의 고을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도 그려져 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石築으로 주위가 1,497尺5寸이라 한다. 그러나 이 시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 북서쪽 강가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초에 得成倉(그 이전에는 德成倉이라 불렀음)이 있었던 곳이다. 득성창은 이후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여기로 옮겼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群山倉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는 여기에서 거두어 서울로 조운하였다. 고을 동남쪽의 廣頭院에는 봉수도 표시되어 있는데, 서쪽으로는 함열의 所方峯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청도 은진의 江景山 봉수에 연결된다.(오상학)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도에 속하지만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한다. 따라서 문화적으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害處였다. 지도에도 이러한 고원 분지형의 고을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을 동북쪽의 八良峙를 통해 경상도와 이어지고 서쪽의 女院峙를 통해 남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들 고개 근처에 성을 쌓아 지켰던 흔적이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미쳤던 곳으로 고을의 곳곳에 이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편의 荒山은 고려 우왕 때 왜적이 함양·운봉을노략질하자, 인월역에 주둔한 왜적을 이성계가 섬멸하였던 곳이다.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 운봉현감 박광옥이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지도에도 산 기슭에 비각을 그리고 碑殿이라 표기하였다. 또한 동쪽에 당시의 죽은 왜적의 혈흔이 남아 있다는 血巖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에는 선종 9산의 하나로 828년(신라 흥덕왕 3)에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의 모습이 보인다.(오상학)
익산군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삼기면, 금마면, 춘포면, 팔봉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동고도리 일대에 있었다. 익산은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한 때 백제 무왕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이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들이 남아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子山인데 지도에도 산 밑에 향교가 그려져 있고 동쪽으로 맥이 내려오고 있다. 북쪽에 彌力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다른 지도에는 彌勒山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미력면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가 있는 곳으로 지도에는 사찰의 표시가 없고 단지 탑만 그려져 있다. 당시 폐찰되고 寺址로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현재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목탑을 모방한 한국 석탑의시원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원래 9층으로 축조되었으나 벼락에 맞아 7층만 남아 있었음을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帝石面에는 왕궁탑이 그려져 있는데, 이 탑은 현재 왕궁면 왕궁리에 남아 있고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전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백제계 양식을 따르는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력면의 華山書院은 1654년(효종 5)에 창건, 1662년(현종 3)에 사액된 서원으로 김장생, 송시열을 배향했다.(오상학)
일신은 남원부를 지칭하는데 1739년(영조 15) 현으로 강등되면서 바뀐 지명이다. 이후 1750년(영조 26)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1739년에서 17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원부는 지금의 전북 남원시 가운데 운봉읍·산내면·동면·야영면을 제외한 전지역과 장수군의 번암면·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지사면과 오수면 남쪽 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오방면 북쪽 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읍치는 현재의 남원 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 때 10만 왜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읍성의 서문 밖에는 1599년 명나라 都督 劉綎이 건립한 관왕묘가 그려져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내원하여 왜군을 격퇴시킨 것은 關羽의 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왕묘를 세웠던 것이다. 읍치 서북쪽의 蛟龍山城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km 가량에 이른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 處英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 무엇보다 남원 지역에는 많은 서원이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寧川書院·路峯書院·忠烈祠·愍忠祠 등의 사액서원을 비롯하여 蓼溪鄕賢·古龍鄕賢·高巖鄕賢·玄溪鄕賢·方山鄕賢 등의 未賜額 서원이 다수 있었다.(오상학)
임실현은 지금의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상류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호남정맥을 넘어 전주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순창과 이어진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에 있는 龍繞山이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를 환포형으로 그려 고을의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다. 고을 서쪽의 九皐面은 원래 九皐縣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백제의 坪縣이었는데 신라 시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淳化郡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초기 남원부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태조 때 來屬되었다. 북쪽의 上雲面에는 私亭子인 兩樂亭이 그려져 있다. 양요정은 1592년(선조 25) 충현공 양요당최응숙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곳으로 낙향하여 건립한 것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양요정이라 하였다. 북쪽 사자산 기슭에 있는 新興寺는 529년(백제 성왕 7)에 창건된 절이다. 그후 여러 차례 중건했지만 대웅전 등 주요 건물은 창건 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임피현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대야면, 개정면, 성산면, 나포면, 서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피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라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함열, 아래로는 옥구에 연결된다. 금강이 북쪽을 휘돌아 나가고 고을 남쪽에는 동진강의 지류가 서쪽으로 흘러간다. 지도에는 鷲城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이 읍성은 1410년 崔潤德이 전라도 巡問使가 되었을 때 장정 1만 7천여명을 동원하여 40일만에 쌓았다고 한다. 해안의 방어를 목적으로 했던 성이기 때문에 문은 남쪽으로 하나만 만든 것으로 보인다. 北三面에는 羅 倉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공주에 설치되었던 羅里浦倉을 말한다. 중종 때 공주에 설치되었다가 경종 때 臨陂로 옮겼으며, 영조 때에 山에 속했다가 다시 임피로 옮겼는데, 이후 정조 때 다시 나주목으로 옮겼다. 따라서 지도의 내용은 영조 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 서북쪽 강가에는 세금을 거두었던 海倉이 그려져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는 고려의 漕倉 중의 하나인 鎭城倉으로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남쪽의 鳳岩書院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임피 현감을 지낸 金集 등을 배향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오상학)
장성부는 지금의 전남 장성군 장성읍, 남면,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 대부분, 서삼면, 진원면, 황룡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장성군 장성읍 聖山里에 있었다. 장성부는 영산강 유역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으로는 노령을 넘어 정읍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광주에 연결된다. 조선 초에 원래 長城縣과 珍原縣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두 고을이 衰殘하자 1599년(선조 23)에 합쳐서 長城縣으로 만들었다. 이후 1655년(효종6)에 장성현이 입암산성의 主鎭管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지도에도 외동면에 古珍原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비교적 산지가 많은 지역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봉우리의 방향은 사방이 다르다. 북쪽으로는 노령과 白巖山의 산지가 포진해 있고 黃龍江이 고을의 남쪽을 흘러 나주의 영산강에 이른다. 지도에도 이 지역 최고의 요해처인 노령의 모습과 이를지키는 笠巖山城이 잘 표현되어 있다. 笠岩山城은 조선 초까지는 석성 터만 남아 있던 곳인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대대적으로 修築되었다. 백암산에는 지금의 백양사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 그려져 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淨土寺로 불려졌다. 읍치 북쪽의 靑巖驛은 속역 11개를 거느린 찰방역으로 원래 나주에 있던 것이 옮겨온 것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河西 金麟厚를 배향한 筆巖書院이 西一面에 그려져 있고 그 밖에 사액되지 않은 서원들도 자세히그려져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제언의 표시가 상세한 점도 특징적이다.(오상학)
장수현은 지금의 전북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 고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로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북쪽으로 흘러나가고 있다.원래 이 지역에는 조선초기까지 長溪縣과 長水縣 두 고을이 있었는데, 1414년(태종 14)에 장계현을 병합하여 장수현으로 만들었다. 지도에서는 壬縣面 일대가 과거 장계현 지역이었다. 동북쪽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잘 표현되었는데 산에는 수목까지 그려져 있다. 덕유산 남쪽에는 경상도 안음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六十峙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요충지로서 도적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많아 60명이 되어야 이곳을 지났다고 해서 육십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읍치 서쪽의 新光寺는 지금의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1849년(헌종15)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 읍치 서쪽의 蒼溪書院(지금의 장수읍 선창리 소재)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장흥부는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량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 웅치면, 회령면 그리고 완도군 금당면, 생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 일대에 있었다. 장흥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탐진강이 고을을 돌아 나간다. 비교적 너른 범위에 걸쳐 있는 지역의 모습이 단일한 시점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해안의 島嶼에는 소속처까지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일명 長寧城이라고 한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당시 성 둘레가 13,435尺으로 비교적 큰 성에 해당한다. 동북쪽 迦智山 아래쪽의 寶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남쪽의 碧沙驛는 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1520년에만든 것이다. 남쪽 해안가에 있는 會寧鎭城은 1490년(성종 21) 4월에 축조된 萬戶鎭城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水軍 鎭營이었다. 특히 지도에는 서원과 사우의 표시가 상세하다. 읍치 남쪽의 淵谷書院은 1698년(숙종 24)에 창건되고 1726년(영조 2)에 사액되었는데, 閔鼎重·閔維重을 배향한 이 고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오상학)
전라좌도와 우도는 조선초기 태조 때 나누어 졌는데,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 의하면 전라우도는 전주 익산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만경 임피 금구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나주 장성 영암 영광 함평 고창 무장 무안 진도 강진 해남 제주 대정 정의의 32개 고을이었다. 지도에는 제주, 정의, 대정이 빠져 있고 강진은 전라좌도로 속해 있다. 대부분이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해안에는 많은 섬들도 그려져 있다. 해안선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비해 많이 왜곡되어 있는 편이다. 지도에 표현된 내용들을 보면 자연적 요소로서 지역을 대표하는 산과 하천이 필수 사항으로 그려져 있다. 인문적 요소로는 국방과 관련된 진보, 봉수, 산성 등이 그려져 있고, 창고·봉산 등의 경제적 요소도 수록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형성된 역원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문화적 요소도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지역의 명찰과 서원, 그리고 정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지도가 관찬 지도의 성격을 띠면서도 군사, 행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서원, 사찰, 누정 등의 문화경관을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대 지도문화의 다양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오상학)
조선왕조 초기 팔도의 도제가 생기면서 좌도 우도의 구분이 생겼다. 당시 좌도와 우도를 나눈 뚜렷한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전라좌도는 남원 담양 순창 용담 창평 임실 무주 곡성 진안 옥과 운봉 장수 광주 장흥 남평 순천 낙안 보성 능주 광양 구례 흥양 동복 화순 24개 고을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강진이 좌도로 그려져 있다. 전라좌도는 주로 전라도의 동부 산간지대와 남부 해안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끝에 위치한 전라좌수영과 강진에 위치한 병영은 성곽의 표시와 함께 강조되어 있다. 지도는 이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남원이 一新縣으로 강등되어 있을 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남원부는 1739년(영조 15) 일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복구되었다. 따라서 지도는 최소한 174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하한시기를 명확히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시대 지도제작에서는 과거의 상황이 수정되지 않고 후대에도 그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좌도는 동쪽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접하고 있고 지리산으로 백두대간의 맥이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산지의 險夷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지도 서쪽에는 우도와의 경계를 실제 선으로 그려 흡사 해안처럼 그린 점은 이 지도의 가장 큰 오류로 볼 수 있다.(오상학)
전주는 지금의 전북 전주시 시내, 삼례읍·봉동읍과 완주군 용진면·소양면·상관면·구이면·이서면, 익산시 익산 시내·오산면·왕궁면, 김제군 금산면 일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일부를 포함하는 호남의 大都會였다. 읍치는 전주시 경원동, 중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貫鄕이자 전라 감영의 소재지였다. 지도 상단에 기재된 당시 전주의 인구는 75,494명이었다.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전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전주 읍치는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쪽 전주천 변에서 북서쪽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이다. 지도에는 당시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성 둘레가 2,618步였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 허물어지고 문루도 남문인 풍남문만이 남아 있다. 읍성 안쪽의 眞殿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 하여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으로 1422년(세종 4)에 慶基殿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이다. 고을의 북쪽에는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道인 參禮驛이 館舍 건물과 함께 대로상에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여백에는 인구, 전답, 재정, 군사, 문화 등과 관련된 각종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정자를 公亭子와 私亭子로 구분하여 기재한 점은 일반적인 읍지에서도 보기 힘든점이다.(오상학)
정읍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시내와 북면, 입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읍시 연지동, 미창동 일대에 있었다. 정읍은 호남정맥의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泰仁, 남으로는 노령을 넘어 長城과 연결된다. 지도 하단에 그려진 노령은 이 지역의 관문으로 남쪽 지역으로 연결되는 호남대로의 길목에 해당한다. 이 길목을 지키는 관방으로서 笠巖山城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의 상단 여백에는 고개의 險夷를 기재하여 군사적 요충을 파악하고 있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鷹山이다. 읍치에는 동헌을 비롯한 주요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고 생원, 진사들이 모여 강학하던 養士齋의 모습도 보인다. 단풍으로 유명한 동남쪽의 내장산에는 이 지역의 名刹인 靈隱寺가 그려져 있다. 고려 말년에 智嚴 스님이 처음으로 거처하였다고 전해진다. 읍치 서쪽의 茅川에는 考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고암서원은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1695년(숙종 21) 송시열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해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고을 남쪽에는 井海里部曲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水曲部曲을 지칭하는 것이다.(오상학)
진도군은 지금의 전남 진도군 진도읍, 고군면, 군내면, 의신면, 임회면, 조도면, 지산면과 해남군 삼산면 서부,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월악리·만수리·태간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해상방어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지도에도 남쪽 해안에 군영이 그려져 있다. 南桃鎭은 진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水軍萬戶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해당한다. 현재에도 진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金甲鎭은 수군 만호가 관할하던 진영으로 1431년(세종 13)에 창설되었다.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진도군의신면 금갑리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봉산도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 봉산들은 대부분 船材를 공급하던 곳으로 상단의 기록에는 송림의 상태까지 기재되어 있다. 智力山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 國馬가 675필, 이를 키우던 牧子가 133명 있었다. 고을의 서쪽 古郡內面에는 龍藏寺 基와 龍藏王溫 基가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용장산성이 있던 곳이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오상학)
진산군은 지금의 전북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는데 비교적 면적이 작은 고을이다. 읍치는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상류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錦山에 연결된다. 백제 시기의 珍同縣과 고려의 猿山鄕 지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고을이기 때문에 珍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세를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태실이 있는 북쪽 산의 맥세가 부각된 점이 이채롭다. 태조의 태실은 1393년(태조 2) 고을 사람 陳舜道의 건의에 따라 태조 이성계의 胎를 영흥부에서 옮겨 봉안한 것이다. 지도상에도 태조 이성계의 태실과 비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歡壽阿只氏의 胎室이 그려져 있지만 태조의 태실만큼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읍치 내부에는 2층 누각으로 된 邀月臺가 그려져 있는데, 군수 鄭 이 처음 세운 것으로 孫比長의 기문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을 남쪽의 淸澄淵도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강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어서 기우제를지냈던 곳이라 한다. 향교 동쪽의 水心臺는 重峯 趙憲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오상학)
진안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의 사이 고지대에 위치한 산간 고을로 북쪽은 금강 수계, 남쪽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한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의富貴山으로 읍치의 산세가 이곳에서 갈라지고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大同庫, 賑恤廳 등의 고을 재정과 관련된 시설물도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에는 유명한 마이산이 그려져 있는데 馬耳山(685m)은 마치 말의 두 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암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되었던 산이다. 신라에서도 西多山이라 하여 小祠를 지냈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행해졌다. 1413년(태종 13) 태종이 남행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쪽의 馬靈面에는 원래 마령현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백제의 馬突縣이었는데 신라 때 마령으로 고치고 林實郡의 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초기에 全州에 속하였고 후에 鎭安의 監務가 겸임하게 하였다. 고을의 남서쪽(현재 백운면 백암리)에는 절경으로 유명한 白雲洞 계곡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창평현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수북면,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평면 창평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는 산지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영산강 상류를 따라 담양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섬진강 지류를 따라 동복에 연결된다. 지도 위쪽의 長北面과 長南面은 長平部曲의 자리로서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일대이고, 甲鄕面은 甲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대전면 갑향리 일대로서 모두 창평의 越境地에 해당한다. 담양 고을을 넘어 위치해 있지만 군현의 경계가 표시되지 않아 흡사 인접한 지역처럼 보인다. 지도에는 산지를 환포형으로 그려 읍치를 부각시켰다. 읍치 내에 중요 건물인 客舍는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는지 터만 표시되어 있다. 창평은 누정 문화의 보고로서 지도에도 유명한 정자들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남쪽에 있는 息影亭, 瀟 園 등이 대표적인 누정이다. 소쇄원은 梁山甫(1503∼1557)가 은사인 정암 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別墅庭園이다. 息影亭은 1560년(명종 15) 棲霞堂 金成遠(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인 石川 林憶齡(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식영정의 당시 주인은 幼學 鄭敏河였고 소쇄원은 幼學 梁翼龍이었다.(오상학)
태인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金溝, 남쪽으로는 井邑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지역의 형세가 반영되어 있는데, 동남쪽은 산지가 많고 동진강의 상류가 흘러가는 서북쪽은 상대적으로 저평하다. 읍치에는 여러 관아 건물과 披香亭과 같은 정자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披香亭은 신라 말 정강왕 때 孤雲 崔致遠이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세웠다 하며, 그 뒤 여러 번 증수하였는데 기둥이 33개이고 29평의 웅장한 건물로 동서쪽에 연못이 있다. 지금은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古縣內面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아래에서도 훼철되지 않았던 서원이다. 南皐書院은 1577년(선조 10)에 창건되어 호남의 성리학자인 李恒과 그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金千鎰을 배향하였다. 이후 1685년(숙종 11)에 사액되었다. 고을의 남쪽 운주산 중턱에 있는 雲住寺는 일명 龍藏寺로 불리는 절인데 이후 폐찰되었다. 도로변에는 酒幕과 酒站의 표시도 볼 수 있는데 도로변을 중심으로 가촌이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함열현은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함열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접해 있으며 위로는 龍安, 아래로는 臨陂에 연결된다. 고을의 중심을 돌아나가는 함열천을 중심으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는 전체적으로 고을의 모습이 소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咸羅山이다. 東二面에는 龍山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1440년(세종 22)에 현을 옮기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그러나 치소를 이곳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北二面 금강가에는 聖堂倉이 그려져 있고 漕船列泊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聖堂倉은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得城倉이 수로가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종 때 海倉이 있는 皮浦로 옮겼다가 1487년(성종 18)에 이곳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등 인근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던 漕倉이었다. 지도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운선이 11척, 沙工과 格軍을 합쳐 176명이 있었다고 한다. 함열현의 세곡은 西二面의 海倉에서 거두었다.(오상학)
함평현은 지금의 전남 함평군 관내에서 엄다면·학교면을 제외한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서쪽으로 서해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靈光, 남으로는 務安에 연결된다. 지도에는 산지의 봉우리가 북쪽을 향하게 단일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봉수가 설치되었던 봉우리는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해제면 서쪽 해안에 설치된 임치진은 지금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있었던 수군 첨사진이다. 임치진은 영광의 임자진이 설치될 때 조그만 성에 불과했으나 이후 몇 개의 마을과 전선, 군졸들을 劃屬하여 진을 만들었다. 지도에는 鎭城과 더불어 戰船의 모습도 보인다. 지도 상단에는 많은 제언(防築으로 표기됨)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다수의 봉산도 설치되어 있는데 대부분 바다에 연한 海際面에 집중되어 있다. 읍치 북쪽의 龍泉寺는 신라 721년(성덕왕 11)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0년(선조 33)에 다시 세웠다. 여기에는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돌우물이 있고 석등과 해시계가 유명하다.(오상학)
해남현은 지금의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문내면, 북일면, 산이면, 삼산면 서부, 현산면, 화산면, 화원면, 황산면과 신안군 비금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산지의 모습이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특히 소나무를 장양하던 宜松山의 경우 나무를 그려 울창한 송림을 표현하였다. 읍치와더불어 서남해안 수군의 총본영인右水營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우수영은 조선 초기 무안 대굴포의 水軍處置使營에 있다가 1440년(세종 22)에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해남의 黃原으로 옮겼다. 그 후 1464년(세조 10)에 節度使營으로 승격되었다. 지도에도 영내의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해안 船所에는 전선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도 읍성의 모습과 더불어 관아 건물이 상세하다. 특히 읍성의 서문 부근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祠宇가 그려져 있다. 黃原面의 북쪽 지역에는 목장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珍島의 屬場인 黃原場이다. 우수영의 남쪽에는 울둘목이라고 불리는 鳴梁 해협이 표기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왜군을 대파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을의 남쪽에는 이 지역 최고의 명찰인 大芚寺가 여러 건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절은 대흥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31본산 가운데 하나이다. 544년(신라 진흥왕5)에 阿度和尙이 創建하였는데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오상학)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을 그린 지도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그리고 충청도 금산군이 이에 해당한다. 지도는 방격을 사용하여 비교적 정교하게 그렸다. 泰仁에서 井邑까지의 거리는 30리인데 눈금의 차이가 3개 정도 난다. 따라서 1개 눈금의 실제 거리는 10로 추정된다. 이러한 방격지도는 조선후기 관찬지도의 활발한 제작과 맞물려 나타났는데 지역의 방위와 거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군현지도 제작에도 이어져 방격식 군현지도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호남전도는 방격을 사용한 지도이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 이전 유형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야가 많은 호남지역이지만 평야 지역의 구릉성 산지도동부 지역의 험준한 산지처럼 그렸다. 산지의 표현은 봉우리의 방향을 북쪽으로 하여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정의 명산은 강조되어 있다. 바다의 섬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상대적인 위치관계가 부정확하게 표현되었고 섬의 대소도 실제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좌도와 우도를 고을 색의 짙기로 구분하였고,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고을에는 해바라기 모습의 성가퀴를 그려 넣었다. 관내의 여러 고을을 연결하는 도로는 황선·홍선·청선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봉수는 횃불 모양으로 표현하였고, 내륙의 요충지에 쌓은 산성도 상세히 그려져 있어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외에도 사찰, 서원, 정자 등의 문화적 요소도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당시인의 관심사를 엿보게 한다.(오상학)
화순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화순읍, 동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가는 산지에 위치한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 영산강의 지류인 화순천이 고을을 감돌아 나간다. 다른 고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의 고을이어서 지도도 작고 내용적 비교적 간략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羅漢山인데 주맥은 무등산에서 뻗어 내려왔다. 읍치 동쪽에 있는 卵山을 흡사 알처럼 그린 것이 이채롭다. 그 동쪽으로 九峯山이 있는데 봉우리를 아홉 개로 표현했다. 고을 서남쪽 평지에는 鶴栖島가 그려져 있다. 이는 화순천의 하도가 변경되면서 하중도였던 학서도가 평지로 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나한산 밑에는 이 고을 최고의 명찰인 萬淵寺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 1208년(희종 4)에 만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한국전쟁 전까지는 많은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동면의 烏城山에는 古城이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오상학)
흥덕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면 남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에 있었다. 서북쪽으로 해안과 접해 있으며 위로는 부안, 고부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茂長과 연결된다. 지도에는 전반적으로 산지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으며 산봉우리의 방향도 사방이 다르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원래 돌로 쌓아진 읍성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이르러는 많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의 중요 관청과 대동미를 보관했던 大同庫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고을 서쪽의 逍遙山은 당시 船材를 공급하던 封山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북쪽 艮尺堤 근처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상업으로 유명한 沙津浦가 있었던 곳이다. 대동지지에는 鹽盆과 漁箭이 있고, 商船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창에서는 흥덕현의 田稅穀과 大同米가 수납되어 私船에 의해 경강에 상납되었다. 二西面 근처에 古阜地로 표기된 지역은 고부의 월경지인 富安面이다. 지도 상단의여백에는 다른 고을과 연결되는 嶺路의 險夷까지 기재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井邑으로 통하는 小蘆嶺이 가장 험한 곳으로 인식되었다.(오상학)
흥양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흥읍 옥하리, 행정리, 서문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의 고흥반도에 위치해 있어서 해안 방어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도에도 위쪽으로부터 呂島鎭, 蛇渡鎭, 鉢浦鎭, 鹿島鎭 등이 포진해 있다. 흥양현은 원래 장흥부에 딸린 高伊部曲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11년 고을 아전 柳庇가 통역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이 있어 高興으로 이름을 고쳐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세종 때 장흥부의 南陽縣과 합쳐져 흥양으로 된 것이다. 지도에는 고흥반도의 육지부 모습과 더불어 바다의 섬들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여부와, 宜松山·放馬處 등의 섬의 기능까지 기재되어 있다. 해안에는 이 지역이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봉수도 여럿 축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을 남쪽의 鉢浦鎭城은 1490년(성종 21)에 축성되었고 전하며, 1589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 때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했다. 占巖面의 八田山 기슭에는 이 지역의 명찰인 楞伽寺가 그려져 있다. 능가사는 삼국시대 아도화상이창건하였으며 팔영산 하단부에 있는 평지형 사찰로 일명 보현사라전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고을은 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국가에서 관리하는 송전, 봉산이 설치되어 있고 말을 키우던 곳이 곳곳에 산재한 중요한 지역이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은하면, 구항면, 광천읍, 서부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결성면 읍내리 부근에 있었다. 지도는 산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에는 둘레 3,325尺8寸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현재에도 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縣內面에는 神衿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흙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1,350척이라 한다. 그 옆의 海門驛은 1415년(태종 15)에 설치된 것이다. 고을 남쪽에 있는 烏栖山은 명산으로 신라 때 中祀에 등재했던 산이다. 고을의 동남쪽 廣川面에는 廣川院이 보인다.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광천은 조수의 영향으로 배가 드나들 수 있었는데, 지도의 광천원(지금의 광천읍 옹암리)까지 배가 들어 왔다고 한다. 이 지역은 현재에도 새우젓으로 명성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도에 제언의 표시가 자세한 것이 특징적이다. 서쪽의 하구에는 防船所도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1척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封山도 5군데 있었는데 읍치 동쪽의 加次面에 4곳이 있었다. (오상학)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시 시내,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에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계룡산에 이른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공주의 전역을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따라서 읍치도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고 단지 감영 건물만 그려져 있다. 산지의 모습은 산줄기를 연결하에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물줄기도 지류까지 상세하게 그렸으나 위계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읍치에서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그렸는데 홍선은 대로, 청선은 소로를 나타낸다. 지도의 외곽으로 고을의 경계선을 그린 점이 이채롭다. 봉수도 상세한데 붉은 직선으로 조응관계를 표시하였다. 읍치의 금강가의 雙樹山城은 곧 公山城을 말하는데,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쌓은 후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역원의 표시도 상세하다. 半灘面에는 利仁道가 그려져 있는데, 인근 9개의 역을 관할하는 찰방역이었다. 지도의 여백에는 인구, 토지, 재정, 군사, 교통과 관련된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관내의 면의 초경과 종경을 표기하였다. 특히 嶺阨 항목에는 험준 여부와 향하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車嶺의 경우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나 수목이 울창하여 내포의 여러 고을로 통하는 길목의 요충지라 기술하고 있다.(오상학)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시 시내,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에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계룡산에 이른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공주의 전역을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따라서 읍치도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고 단지 감영 건물만 그려져 있다. 산지의 모습은 산줄기를 연결하에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물줄기도 지류까지 상세하게 그렸으나 위계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읍치에서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그렸는데 홍선은 대로, 청선은 소로를 나타낸다. 지도의 외곽으로 고을의 경계선을 그린 점이 이채롭다. 봉수도 상세한데 붉은 직선으로 조응관계를 표시하였다. 읍치의 금강가의 雙樹山城은 곧 公山城을 말하는데,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쌓은 후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역원의 표시도 상세하다. 半灘面에는 利仁道가 그려져 있는데, 인근 9개의 역을 관할하는 찰방역이었다. 지도의 여백에는 인구, 토지, 재정, 군사, 교통과 관련된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관내의 면의 초경과 종경을 표기하였다. 특히 嶺阨 항목에는 험준 여부와 향하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車嶺의 경우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나 수목이 울창하여 내포의 여러 고을로 통하는 길목의 요충지라 기술하고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평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가 확대되어 크게 그려졌다. 관아 건물도 그려졌는데 兩翼 형태의 객사가 衙舍로 잘못 그려져 있다. 다른 고을의 지도에 비해 산천의 표현이 다소 독특한데 몰골법을 사용하여 원근을 표현하기도 했다. 고을의 동남쪽 齋月臺에는 孤山亭이라는 정자가 그려져 있다. 고산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여 1596년(선조 29)에 처음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 정자를 萬松亭이라고 불렀으나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의 이름을 고산정으로 바꾸었다. 고을의 동쪽을 돌아흐르는 槐江에는 연풍으로 가는 길목에 槐灘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데 비가 오면 다리를 놓아 건너갔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평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가 확대되어 크게 그려졌다. 관아 건물도 그려졌는데 兩翼 형태의 객사가 衙舍로 잘못 그려져 있다. 다른 고을의 지도에 비해 산천의 표현이 다소 독특한데 몰골법을 사용하여 원근을 표현하기도 했다. 고을의 동남쪽 齋月臺에는 孤山亭이라는 정자가 그려져 있다. 고산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여 1596년(선조 29)에 처음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 정자를 萬松亭이라고 불렀으나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의 이름을 고산정으로 바꾸었다. 고을의 동쪽을 돌아흐르는 槐江에는 연풍으로 가는 길목에 槐灘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데 비가 오면 다리를 놓아 건너갔다.(오상학)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읍치는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고을의 북동쪽은 이 지역의 명산인 聖住山이 있는데 계곡의 풍광이 수려하여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양질의 벼루돌 생산지이기도 하다. 근처에 聖住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당시는 터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撰한 朗慧和尙塔碑와 탑이 남아 있는데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深田面에는 이 고을의 고적인 撲坪所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의 馬梁鎭은 터로 남아 있는데 相臣 李尙眞이 효종 때 배를 대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啓達하여 庇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宜松山도 네 곳이나 있어서 재목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을이다. 고을 서쪽의 船所에는 防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오상학)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읍치는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고을의 북동쪽은 이 지역의 명산인 聖住山이 있는데 계곡의 풍광이 수려하여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양질의 벼루돌 생산지이기도 하다. 근처에 聖住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당시는 터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撰한 朗慧和尙塔碑와 탑이 남아 있는데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深田面에는 이 고을의 고적인 撲坪所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의 馬梁鎭은 터로 남아 있는데 相臣 李尙眞이 효종 때 배를 대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啓達하여 庇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宜松山도 네 곳이나 있어서 재목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을이다. 고을 서쪽의 船所에는 防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단양팔경의 빼어난 경치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고,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 강이 돌았고 돌을 깍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행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남한강의 상류를 따라가면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단양의 팔경은 도담삼봉·석문·구담봉·옥순봉·사인암·하선암·중선암·상선암 등을 말하는 것인데 지도에도 팔경이 전부 그려져 있다. 읍치의 강가에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二樂亭은 강가의 절벽위에 있는 정자로 이곳에는 성이 있어서 숨기에 알맞아 可隱岩이라는 바위명이 생겼다 한다. 고려 말에 단양, 청풍, 제천 사람들이 왜적을 피해 이곳에 피난하기도 했다. 남쪽에 보이는 丹巖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단양팔경의 빼어난 경치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고,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 강이 돌았고 돌을 깍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행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남한강의 상류를 따라가면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단양의 팔경은 도담삼봉·석문·구담봉·옥순봉·사인암·하선암·중선암·상선암 등을 말하는 것인데 지도에도 팔경이 전부 그려져 있다. 읍치의 강가에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二樂亭은 강가의 절벽위에 있는 정자로 이곳에는 성이 있어서 숨기에 알맞아 可隱岩이라는 바위명이 생겼다 한다. 고려 말에 단양, 청풍, 제천 사람들이 왜적을 피해 이곳에 피난하기도 했다. 남쪽에 보이는 丹巖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당진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예로부터 해로를 이용한 교역이 많았던 고을이다. 당진이라는 이름도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과 관련된 지명이라 볼 수 있다. 지도는 바다가 있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읍성은 1442년(세종 24)에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1,954척으로 되어 있다. 수운의 이점이 있는 고을이어서 읍치 근처의 浦倉과 북쪽 해안가의 포창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당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影浪寺가 그려져 있다. 이 절은 당나라와의 교역이 성행하면서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 1091년(선종 8)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하고, 조선 1684년(숙종 4) 호암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그 옆의 하천에는 彩雲浦橋라는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다리는 석교로서 1688년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당시 이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갔다는 사실로 볼 때 큰 규모의 돌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다리의 축조와 관련된 비가 남아 있다.(오상학)
대흥군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는 예당저수지의 축조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다. 금북정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예산, 아래로는 청양과 연결된다. 지도는 고을의 진산 鳳首山이 있는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봉수산에는 봉수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이 산성은 福信을 비롯한 백제의 부흥세력이 항거했던 任存城으로 알려져 있다. 남쪽 白月山의 봉우리에는 胎室이 보이는데, 1681년(숙종 7)에 父王인 현종의 御胎를 이 곳에 묻고 이로 인해 고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사찰과 암자도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서쪽의 大蓮寺는 656년(의자왕 16)에 백제부흥군의 승장 도침선사가 창건했고 그 후 1468년에 중창을 거친 사찰로 현재 경내에는 고려말기 양식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의 향교 옆에는 牛泉祠宇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牛泉 李若水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이약수는 寒喧堂 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강원도 동해안인 평해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31년 대흥으로 옮겨져 생을 마감했던 인물이다.(오상학)
덕산현은 현재 예산군 삽교읍, 덕산면, 고덕면, 봉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는 내포 지방의 명산인 가야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삽교천이 아산만으로 흘러간다. 이 지역에는 원래 德豊縣과 伊山縣이 있었는데, 1405년(태종 5)에 이산현의 인구와 형세가 피폐하다 하여 하나로 합치고 덕산이라 하였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산봉우리의 방향은 모두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는 가야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이 서쪽에 위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동북쪽 모퉁이에 그려진 非方串面이 그곳이다. 여기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월경지의 기능이 세곡의 운반이나 해산물의 수취와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서쪽의 德崇山에는 이 지역 최고의 명찰로 알려진 修德寺가 그려져 있다. 이 절은 현존 기록으로 볼 때 고려 충렬왕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비구니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가야산에는 가야사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남연군묘에 있던 사찰로 당시 수십 개의 예속사찰을 거느린 대찰이었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그 옆에 西林寺도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봉림저수지에 잠겨 버렸다.(오상학)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읍치는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지도의 주기에는 둘레 3,235把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읍성은 세종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현재도 약간 남아 있다. 고을의 북쪽에는 馬場이 그려져 있다. 이 마장은 바로 倉宅牧場으로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牧馬 30필, 牧子 17명이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靈塔寺가 그려져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였으며, 그 후 조선시대 1798년(정조 2) 연암당 지윤이 중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름에 걸맞게 7층석탑이 남아 있다.(오상학)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읍치는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지도의 주기에는 둘레 3,235把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읍성은 세종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현재도 약간 남아 있다. 고을의 북쪽에는 馬場이 그려져 있다. 이 마장은 바로 倉宅牧場으로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牧馬 30필, 牧子 17명이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靈塔寺가 그려져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였으며, 그 후 조선시대 1798년(정조 2) 연암당 지윤이 중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름에 걸맞게 7층석탑이 남아 있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에 해당하여 여러 산성들이 축조되기도 했다. 작성산을 비롯하여 북쪽의 黑城山에도 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은 성이1,571척이고 성안에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고을에 가뭄이 들 때 이 못에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읍내면의 延春驛 근처에는 伏龜亭酒幕, 그 동쪽에는 石橋酒幕, 西面의 升天酒幕이 표시되어 있다. 이 시기 사람의 왕래가 증가하면서 대로변에 酒幕이 형성되던 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읍치 북쪽에 尉禮山이 보이는데, 이곳에 尉禮城이 있었다. 위례성은 그 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 초기 도읍지로서 부정된 바 있으나 최근에 와서 많은 유물의 발견으로 재조명되고 있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그러나 고을의 主山은 黑城山으로 읍치 바로 북쪽에 그려져 있다. 읍치 공간을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확대하여 그렸는데, 아사·객사 등의 건물뿐만 아니라 武學堂·司馬所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사마소는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조직한 기관으로 여기서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함과 아울러, 노비를 두어 곡식을 대부하여 늘이는 일들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세력이 강하여 서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인조 때 폐지했다. 그러나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일부 고을에서는 계속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흑성산·세성산 등에서 보이는 청색의 둥그런 원은 산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고을에서는 흑성산성·세성산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이었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그러나 고을의 主山은 黑城山으로 읍치 바로 북쪽에 그려져 있다. 읍치 공간을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확대하여 그렸는데, 아사·객사 등의 건물뿐만 아니라 武學堂·司馬所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사마소는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조직한 기관으로 여기서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함과 아울러, 노비를 두어 곡식을 대부하여 늘이는 일들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세력이 강하여 서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인조 때 폐지했다. 그러나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일부 고을에서는 계속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흑성산·세성산 등에서 보이는 청색의 둥그런 원은 산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고을에서는 흑성산성·세성산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이었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쪽으로 荊江에 임하였고 산에 울창한 빛이 적으나 강을 임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하였다.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 고을의 주산이다. 이곳에는 신라 慈悲王 때 축조된 산성이 있었는데 성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고을 서쪽에 위치한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浚吉을 배향했다.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는 荊江津과 新灘津이 표시되어 있다. 신탄진에는 형강진과는 달리 私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신탄진은 현재 이 지역 교통의 결절로 급성장한 곳이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754척으로 비교적 큰 성이다. 성 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넘치거나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서쪽에 위치한 荊江津은 옥천, 회덕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利遠津이라고도 한다. 읍치의 남쪽에는 大龍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커다란 동굴로 굴 안에는 큰 소가 있다고 한다. 一道面에 있는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鄭Ꜿ·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 비문이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나 ꡐ萬曆十六年戊子ꡑ에 세운 아기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로 본다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754척으로 비교적 큰 성이다. 성 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넘치거나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서쪽에 위치한 荊江津은 옥천, 회덕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利遠津이라고도 한다. 읍치의 남쪽에는 大龍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커다란 동굴로 굴 안에는 큰 소가 있다고 한다. 一道面에 있는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鄭Ꜿ·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 비문이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나 ꡐ萬曆十六年戊子ꡑ에 세운 아기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로 본다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오상학)
보령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연한 고을로 인근에는 水營이 포진하고 있다. 지도는 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鎭堂山으로 지도에는 山圖적인 기법으로 그려 읍치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水營이 표시되어 있다. 본래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는데, 1421년(세종 3)에 都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66년(세조 12)에 水軍節度使를 두었다. 충청도 수군의 총본부로 둘레가 3,174척이 되는 성곽도 축조되어 있었다. 이 성곽은 현재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 의해면, 당시 수영에는 전선 2척, 거북선 1척, 防船 1척, 兵船 2척, 伺候船 7척, 搜討船 2척, 梭船 8척 등 다양한 배들이 있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花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창건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인물인 土亭 李之菡, 昌瑞 李夢奎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 고을의 명산은 속리산으로 지도에도 강하게 부각되어 천왕봉, 문장대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九峰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中祀에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사찰인 法住寺가 있는데 지도에도 대웅전, 오층탑, 용화각 등의 건물이 잘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蛇山인데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북쪽에 보이는 산성은 含林山城으로, 돌로 쌓았고 둘레가 1,488척이다. 고을 남쪽의 元巖驛은 고려 공민왕이 복주에서 청주로 올 때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오상학)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 고을의 명산은 속리산으로 지도에도 강하게 부각되어 천왕봉, 문장대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九峰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中祀에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사찰인 法住寺가 있는데 지도에도 대웅전, 오층탑, 용화각 등의 건물이 잘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蛇山인데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북쪽에 보이는 산성은 含林山城으로, 돌로 쌓았고 둘레가 1,488척이다. 고을 남쪽의 元巖驛은 고려 공민왕이 복주에서 청주로 올 때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오상학)
부여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여현의 읍치는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백제의 古都로 고을의 내부를 백마강이 감돌아 나간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면서도 환포형으로 그렸다. 읍치의 동북쪽에는 天政臺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백제 때 재상의 임명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그 아래쪽에는 釣龍臺가 있는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이곳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로 인해 백마강과 조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浮山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白江 李慶輿, 愼獨齋 金集 등을 배향한 사액 서원이다. 읍치 동쪽에는 백제 충신 成忠과 階伯, 그리고 고려충신 李存吾 등을 배향한 義烈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義烈寺로 표기되어 있다. 백마강가에 있는 落花岩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했을 때 백제의 궁녀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전한다. ≪三國遺事≫ 태종 춘추공조에 의자왕이 후궁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여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어 墮死岩이라 전해온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이라는 말은 후세 사람들이 미화한 이름이다. 그 옆에는 皐蘭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백제 제17대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삼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남포, 아래로는 서천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擇里志≫에서는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는 산줄기가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특히 扶蘇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서쪽 해안가의 內都屯串에 위치한 馬梁鎭은 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서천포를 관장했다. 藍浦 廣岩에 있던 진영이 배를 대기에 불편하여 1655년(효종 6)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해안가에 있는 裁松山에는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는데 고을에서 장양하는 禁松으로 보인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 의하면 해안의 船倉所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1척이 배치되어 군사적 기능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封山도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었는데, 장성한 나무보다는 아직 어린 稚松들이 많은 상황이었다.(오상학)
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시내,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고을로 서쪽으로는 泰安, 동으로는 海美에 연결된다. 고을이 안면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모습이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의 맥세를 표현하였다. 무엇보다 안면도 남쪽 지역의 표현이 독특하다. 안면도는 홍주와 태안, 서산 등의 고을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다. 船材를 장양하는 많은 봉산이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55가구가 살고 있었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는 간월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50가구가 살고 있던 섬이었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연륙되었다. 고을의 북부에는 僉使鎭인 平薪鎭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望日山 아래 목마장과 같이 있다가 목마장이 남양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三吉山 밑으로 옮겼다. 이후 1794년(정조 18)에 獨鎭이 되었다. 안면도의 남쪽에 要兒梁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군절도사가 군사를 보내 방수하던 곳이다. 聖淵面의 鳴川倉은 고려 때 永豊倉의 옛터이기도 하다. 군내면에 있는 도로변에는 豊田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과거 왜구로 인해 없어졌던 것을 1400년(정종 2)에 다시 설치하였다.(오상학)
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시내,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고을로 서쪽으로는 泰安, 동으로는 海美에 연결된다. 고을이 안면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모습이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의 맥세를 표현하였다. 무엇보다 안면도 남쪽 지역의 표현이 독특하다. 안면도는 홍주와 태안, 서산 등의 고을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다. 船材를 장양하는 많은 봉산이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55가구가 살고 있었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는 간월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50가구가 살고 있던 섬이었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연륙되었다. 고을의 북부에는 僉使鎭인 平薪鎭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望日山 아래 목마장과 같이 있다가 목마장이 남양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三吉山 밑으로 옮겼다. 이후 1794년(정조 18)에 獨鎭이 되었다. 안면도의 남쪽에 要兒梁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군절도사가 군사를 보내 방수하던 곳이다. 聖淵面의 鳴川倉은 고려 때 永豊倉의 옛터이기도 하다. 군내면에 있는 도로변에는 豊田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과거 왜구로 인해 없어졌던 것을 1400년(정종 2)에 다시 설치하였다.(오상학)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이익이 매우 큰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烏石山으로 동북쪽에서 맥이 뻗어오고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둘레는 3,925척이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熊津溟所가 있어서 致祭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해상의 開也召島에는 당시 53戶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봄철이면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豆山洞面의 鳴谷書院은 鳴谷 李山甫를 배향한 建巖書院을 말한다. 건암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고을 서쪽의 海倉에는 防船 2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宜松山도 한 군데 있었는데 고을 남쪽의 靈鷲山에 주위 20리의 규모로 있었다.(오상학)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이익이 매우 큰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烏石山으로 동북쪽에서 맥이 뻗어오고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둘레는 3,925척이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熊津溟所가 있어서 致祭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해상의 開也召島에는 당시 53戶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봄철이면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豆山洞面의 鳴谷書院은 鳴谷 李山甫를 배향한 建巖書院을 말한다. 건암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고을 서쪽의 海倉에는 防船 2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宜松山도 한 군데 있었는데 고을 남쪽의 靈鷲山에 주위 20리의 규모로 있었다.(오상학)
석성현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읍치는 지금의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고을 서쪽으로는 금강이 흘러간다. 고을의 면적이 비교적 작기 때문에 지도의 크기도 작다. 지도에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에는 백제의 태조가 놀았던 太祖山, 도사 田禹治가 독서하다 비결을 얻었던 波鎭山 등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산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尹文擧를 배향했던 蓬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을의 津渡로는 鳳頭津과 佛巖津이 있었는데 불암진에는 私船 1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사선을 이용한 사람과 물자의 수송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도로는 홍선, 황선, 청선 등으로 위계를 구분지었는데 홍선이 대로에 해당한다.(오상학)
신창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내포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아산, 아래로는 예산과 연결된다. 鎭山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城山이다. 지도에는 鶴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여기에는 둘레 1,213척의 산성이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시대부터 인근 고을의 租稅를 거두어 해상으로 조운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도 북쪽 해안 근처에 海倉이 그려져 있다.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홍선은 내포에서 아산으로 이어지는 대로이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기도 하다. 동남쪽에는 昌德驛이 위치해 있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1필, 중등마 5필, 하등마 4필이 있었다.(오상학)
신창현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鶴城山(해발 183M)인데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산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1,213척, 높이 15척이었다. 성은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의 북쪽 맨 끝에 축조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를 보면 서쪽은 거의 정상부 가까운 곳을 성벽이 통과하고 있으나 동쪽은 성벽이 거의 중복에 가까운 부분까지 내려와서 테뫼식 산성이지만 포곡식에 가까운 형태을 띠고 있다. 지도제작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拱北亭이라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이는 현감 趙侯가 축조한 것인데, 徐居正의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다. 북면의 曲橋川 가에 있는 丹津倉은 이 지역의 세곡을 보관 운반하던 海倉이었다.(오상학)
신창현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鶴城山(해발 183M)인데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산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1,213척, 높이 15척이었다. 성은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의 북쪽 맨 끝에 축조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를 보면 서쪽은 거의 정상부 가까운 곳을 성벽이 통과하고 있으나 동쪽은 성벽이 거의 중복에 가까운 부분까지 내려와서 테뫼식 산성이지만 포곡식에 가까운 형태을 띠고 있다. 지도제작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拱北亭이라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이는 현감 趙侯가 축조한 것인데, 徐居正의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다. 북면의 曲橋川 가에 있는 丹津倉은 이 지역의 세곡을 보관 운반하던 海倉이었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고을의 서쪽 해안가에는 湖西의 漕運을 위해 설치한 貢津倉이 성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1523년(중종18)에 아산을 비롯하여 全義·木川·淸州·燕岐·天安·溫陽 등의 田稅를 조운하기 위해 처음으로 창을 설치하였고 1631년(인조9)에는 성곽을 축조하였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는 이 곳에 조운선 15척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곳은 원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을 설치한 이후로는 많은 백성과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번창했으며 부유한 집이 많았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靈仁山인데 봉우리의 방향은 남쪽으로 향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예전에 축성된 산성의 모습도 보인다. 一東面의 顯忠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일찍이 국가에서 영안산 북쪽 바다에 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배에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하는데 지도에 보이는 貢稅倉이 그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漕倉(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성곽은 1631년(인조9)에는 축조되었고, 숙종 때에는 아산·전의·목천·연기·청주·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고을 동남쪽의 忠武公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아산 현충사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함양하는 도장이 되었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일찍이 국가에서 영안산 북쪽 바다에 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배에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하는데 지도에 보이는 貢稅倉이 그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漕倉(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성곽은 1631년(인조9)에는 축조되었고, 숙종 때에는 아산·전의·목천·연기·청주·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고을 동남쪽의 忠武公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아산 현충사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함양하는 도장이 되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읍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금강의 지류인 東津江이 흐르고 주변으로 산지가 지역을 감싸안고 있다. 북으로는 전의, 남으로는 공주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城山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읍치 동쪽의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남면에 공주로 가는 도로에는 金沙驛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6필, 하등마 2필이 있었다. 읍치 동북쪽의 봉암산에 위치한 鳳岩書院은 1651년(효종 2)에 창건되어 1665년(현종 6)에 賜額된 서원인데, 韓忠·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연기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연기는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청주와 문의, 서쪽과 남쪽은 공주, 북으로는 전의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북쪽으로 목천·전의에서 남쪽으로 연기까지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살기를 벗어다고 한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고을의 중앙을 관통하여 흘러가는 東津(지금의 연기천)이 금강과 만나는 곳에는 合江이라고 강조되어 표시되었다. 지금의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합소서원이 남아 있다.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오상학)
연기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연기는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청주와 문의, 서쪽과 남쪽은 공주, 북으로는 전의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북쪽으로 목천·전의에서 남쪽으로 연기까지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살기를 벗어다고 한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고을의 중앙을 관통하여 흘러가는 東津(지금의 연기천)이 금강과 만나는 곳에는 合江이라고 강조되어 표시되었다. 지금의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합소서원이 남아 있다.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오상학)
조선시대의 연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벌곡면, 양촌면, 부적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연산면 연산리에 있었다. 連山이란 지명은 산들이 연달아 뻗어간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고을의 동쪽으로 금남정맥의 줄기가 계룡산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이 마지막 격전을 치렀던 황산벌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지도는 大芚山이 위치한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전역이 같은 축척으로 그려져 있으나 읍치 주변에는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읍치의 서쪽에는 古山城基라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의 도성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黃山城을 말한다. 도로는 색채를 달리하여 위계를 표현하였는데, 대로는 홍선, 중로는 청선, 소로는 황선으로 표시하였다. 이 지역은 다른 고을보다 서원이 비교적 많이 세워져 있었다. 龜山書院(연산면 오산리)은 1702년(숙종 28)에 창건되어 윤전, 윤원거, 윤순거를 배향하던 서원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고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또한 休亭書院은 1700년(숙종 26)에 창건하고 1705년(숙종 31)에 준공하여 휴계 유무 선생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瓦南峙 기슭에 위치한 忠谷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어 백제의 계백장군과 조선의 사육신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지도는 산지가 많은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 지역 최대의 관문인 조령성문의 모습이 성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鳥嶺은 새재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봉수대도 보이는데 古沙里面에 麻骨烽臺가 그려져 있다. 이 봉수는 동쪽으로 문경의 炭項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이 고을의 周井山 봉수에 응했다. 安保驛과 院站의 모습이 여러 건물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安富驛으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지도는 산지가 많은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 지역 최대의 관문인 조령성문의 모습이 성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鳥嶺은 새재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봉수대도 보이는데 古沙里面에 麻骨烽臺가 그려져 있다. 이 봉수는 동쪽으로 문경의 炭項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이 고을의 周井山 봉수에 응했다. 安保驛과 院站의 모습이 여러 건물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安富驛으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는 고을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험하지 않고, 땅이 기름진데 물이 많아서 한재가 적다고 한다. 읍치에는 원래 둘레 2,410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 여백의 기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지도 제작의 당시에는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에서 가장 큰 나루터는 고을 서쪽에 있는 深川渡이다. 이 나루터는 대로가 지나는 곳이며 옥천의 赤登津에 이어진다. 고을의 동쪽에 보이는 重華寺는 신라 진평왕 때 義湘祖師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普覺國尊·登階祖師·擽山祖師 등이 중수했다. 읍치 서남쪽에 위치한 草江書院은 원래 晦谷에 있었는데 1676년(숙종 2)에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로 옮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 다 물이 많으므로 물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평하고 있다. 이 고을에는 원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남천변에는 落花臺가 그려져 있는데, 속담에는 稽州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이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서쪽의 高塘浦 근처에 있는 폭포는 지금의 옥계폭포로 일명 박연폭포라고도 한다. 20여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절경을 이루는데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명소이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 다 물이 많으므로 물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평하고 있다. 이 고을에는 원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남천변에는 落花臺가 그려져 있는데, 속담에는 稽州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이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서쪽의 高塘浦 근처에 있는 폭포는 지금의 옥계폭포로 일명 박연폭포라고도 한다. 20여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절경을 이루는데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명소이다.(오상학)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지도의 모습과 수록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거의 같다. 그러나 읍치의 남쪽 高代峯 아래에는 지금의 온달산성으로 전하는 古城의 표시가 없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현내면 아래쪽에 南窟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온달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굴에는 석회암층의 담백색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내부의 비경이 웅장하고 지표수가 유입되어 항상 수심 1m 정도의 물이 동굴 내부를 흐르고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 지도에서는 지명의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는 배를 이용한 수운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지도에서도 이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北津과 南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 변에는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 있었는데 북쪽의 赤壁과 北壁이 대표적이다.(오상학)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지도의 모습과 수록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거의 같다. 그러나 읍치의 남쪽 高代峯 아래에는 지금의 온달산성으로 전하는 古城의 표시가 없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현내면 아래쪽에 南窟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온달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굴에는 석회암층의 담백색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내부의 비경이 웅장하고 지표수가 유입되어 항상 수심 1m 정도의 물이 동굴 내부를 흐르고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 지도에서는 지명의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는 배를 이용한 수운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지도에서도 이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北津과 南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 변에는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 있었는데 북쪽의 赤壁과 北壁이 대표적이다.(오상학)
예산현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예산현은 동쪽으로 삽교천을 경계로 덕산현 및 洪州牧(현재 홍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도고산 등의 산줄기로 아산현과 접하고 있었다. 고을의 내부를 무한천이 북쪽으로 흘러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한천에는 여름에 홍수가 나면 큰 뱀이 산에서 냇물을 따라 흘러내려 사람과 가축에 해를 준다고 한다. 하천 동쪽에는 無限城이 그려져 있다. 이 성은 읍치 서쪽의 넓은 평야에 솟아있는 야산에 위치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에는 烏山城으로 표기되어 있고 둘레는 2,002척이라 한다. 7세기에 金庾信의 아들 元述郞이 쌓았다고도 전해오고, 百濟復興軍이 당군을 맞이하여 싸웠던 곳이라고도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추정된다. 읍치의 향교에 인접해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인데, 1705년(숙종 31)에 세워졌고, 1714년(숙종 40)에 사액되었다. 대제학을 지낸 金絿(1488-1533)를 배향했던 서원이다. 이 밖에 여러 사찰과 암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에 있는 香泉寺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향천사는 656년(백제 의자왕 16)에 당대의 고승인 의각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서북쪽 무한천변에는 인근 고을의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조운하던 창고였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은 높고 물을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 전한다. 옥천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이 그것이다. 이들 현이 있던 지역은 각각 利內面, 安內面, 陽內面이다. 이곳에는 外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을은 혁파되었지만 과거의 중심성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을 남서쪽 智勒山 기슭에는 寧國寺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고려의 韓文俊의 撰한 圓覺의 비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南秀文의 記文에 의하면,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있는 고을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서 영특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을의 남쪽 陽內面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陽山倉이다. 이곳은 신라 무열왕 때 金歆運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전사했다는 곳이다. 당시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利內面의 利山倉이 있는 곳은 과거 赤峴部曲이 있던 곳으로 부곡이 없어지더라도 당시 중심지였던 관성이 유지되어 창고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동남쪽의 赤登津은 영동으로 통하는 이 고을의 큰 나루터이다. 여기에 흘러오는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온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南秀文의 記文에 의하면,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있는 고을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서 영특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을의 남쪽 陽內面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陽山倉이다. 이곳은 신라 무열왕 때 金歆運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전사했다는 곳이다. 당시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利內面의 利山倉이 있는 곳은 과거 赤峴部曲이 있던 곳으로 부곡이 없어지더라도 당시 중심지였던 관성이 유지되어 창고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동남쪽의 赤登津은 영동으로 통하는 이 고을의 큰 나루터이다. 여기에 흘러오는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온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은 높고 물을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 전한다. 옥천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이 그것이다. 이들 현이 있던 지역은 각각 利內面, 安內面, 陽內面이다. 이곳에는 外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을은 혁파되었지만 과거의 중심성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을 남서쪽 智勒山 기슭에는 寧國寺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고려의 韓文俊의 撰한 圓覺의 비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옛부터 온천으로 명성을 날렸던 곳으로 지금도 온천이 유명하다. 고을은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아산, 남으로는 천안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고을 동쪽의 排方山은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溫宮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임금이 행차하여 온천욕을 할 때 머무르던 行宮이다. 이곳에는 태조, 세종, 세조 등이 온천욕을 위해 거둥했다. 남면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 日興, 汲泉, 順城, 興世, 長時, 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 등이 있었다. 군내면의 靜退祠는 1634년(인조12)에 창건되어 이황·조광조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고을의 동쪽을 지금이 온양천인 加之川이 흘러가 곡교천과 합류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조감도식으로 표현되었다. 고을의 서면에는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行宮이다. 이 온천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태조·세종·세조 임금이 다녀갔고 조선후기에는 숙종과 영조도 이곳에 행차했다. 읍치에서 온천 행궁까지 이르는 御路는 검을 선으로 그린 점이 이채롭다. 南下面의 도로변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역은 察訪驛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그 위쪽에는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려준 孝旌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고을의 동쪽을 지금이 온양천인 加之川이 흘러가 곡교천과 합류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조감도식으로 표현되었다. 고을의 서면에는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行宮이다. 이 온천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태조·세종·세조 임금이 다녀갔고 조선후기에는 숙종과 영조도 이곳에 행차했다. 읍치에서 온천 행궁까지 이르는 御路는 검을 선으로 그린 점이 이채롭다. 南下面의 도로변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역은 察訪驛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그 위쪽에는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려준 孝旌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오상학)
은진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논산시내, 은진면, 가야곡면, 연무읍, 채운면, 강경읍 일대의 지역이다. 은진면 연서리가 과거의 은진현의 邑治에 해당한다.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수운의 이점이 큰 고을이다. 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반영되어 수계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다. 花之山面에는 유명한 觀竺寺 미륵이 표시되어 있다. 관축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는데, 여기의 은진미륵은 36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고을의 북서쪽에 보이는 中和齋祠宇는 중화재 강응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13년 숙종 때 재건되었다. 九子谷面에 있는 金谷祠宇는 1687년 만치당 김수남(1576-1636)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江景津은 금강의 수운을 이용한 이 지역 최대의 포구로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서해안의 각종 해산물이 이곳에서 거래되어 전국에 팔려나가면서 조선후기 3대시장의 하나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佛明山 아래의 雙溪寺는 충청과 전라를 잇는 지점에 위치한 대찰로 백암이라고 불리웠으나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다. 그 뒤 고려말 대문장가 행촌 이암 선생이 중건하였다.(오상학)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迦葉山(해발 710M)이다. 산 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와 응한다. 음성의 별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도 동북쪽에 雪城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설성은 水精山 위에 있는 성으로 수정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의하면 둘레가 1,271척이었다. 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성내의 건물은 3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서문·북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수정산성의 축성시기는 대략 8~9세기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된 듯하다. 그리고 방어용 산성보다는 전략적 거점확보를 위한 전투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古邑의 遺址가 있는데 官坪이라 불렀다.(오상학)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迦葉山(해발 710M)이다. 산 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와 응한다. 음성의 별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도 동북쪽에 雪城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설성은 水精山 위에 있는 성으로 수정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의하면 둘레가 1,271척이었다. 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성내의 건물은 3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서문·북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수정산성의 축성시기는 대략 8~9세기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된 듯하다. 그리고 방어용 산성보다는 전략적 거점확보를 위한 전투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古邑의 遺址가 있는데 官坪이라 불렀다.(오상학)
이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원래 명칭은 尼山인데 1800년 노성으로 바뀌었다. 이로 보아 湖西地圖는 1800년 이후에 제책된 것으로 보인다. 노성은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公州, 남으로는 恩津에 연결된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비교적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와 주변지역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읍치에는 관아 건물 등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 주변의 산지는 환포형으로 그려 풍수적 명당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魯城山으로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노성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퇴뫼식 산성으로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군사요충지로 쓰여졌으며 봉수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광석면에 있었던 魯崗書院은 1675년(숙종 원년)에 세워져 1682년(숙종 8)에 사액된 서원으로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임천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임천은 고을 동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는 수륙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당나라 劉仁願이 扶餘를 공략할 때도 이곳이 견고하여 피해갔다고 한다. 임천은 특히 모시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여 모시로 얻는 이익이 한산과 더불어 으뜸으로 손꼽혔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聖興山이다. 이 산에는 둘레가 2,705척의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 때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옛 성인 加林城이 바로 성흥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 태조 때의 명장인 庾黔弼이 지켰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郡民들이 사당을 짓고 그의 木像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했다. 읍치 남쪽의 七星山은 너른 평야에 일곱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七星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남쪽의 南塘津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진도로 당시에도 津船이 2척이 있었는데, 물이 깊고 험해 南塘津祠를 세워 뱃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남쪽에 위치한 七山書院은 1687년(숙종 13)에 세워져 1697년(숙종 23)에 사액을 받았는데, 市南 兪棨를 배향한 서원이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동면에는 雲住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李城인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며 둘레가 1,184척이다. 또 하나는 金伊城으로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528척이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岩菴은 현재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비암사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암이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운주산 기슭에 있는 雲住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雲岾寺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빼어난 경치가 있었다고 한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고을의 내부를 곡교천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읍치 동쪽의 운주산(해발 459M)은 솥발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李城이라는 산성이 있었다. 이성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돌로 쌓았는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巖寺는 지금의 전의면 다방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石碑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사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고을의 내부를 곡교천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읍치 동쪽의 운주산(해발 459M)은 솥발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李城이라는 산성이 있었다. 이성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돌로 쌓았는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巖寺는 지금의 전의면 다방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石碑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사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오상학)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大朴谷山인데 지도에는 산명이 없고 단지 면명에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慈悲城이라 불리는 옛 성이 있었다. 읍치의 북쪽 鷄鳳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200척이고 우물과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渡가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도는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赤谷面에는 道林寺가 표시되어 있으나 단지 터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중기까지 있었으나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며, 도림사 터에는 현재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 남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大朴谷山인데 지도에는 산명이 없고 단지 면명에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慈悲城이라 불리는 옛 성이 있었다. 읍치의 북쪽 鷄鳳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200척이고 우물과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渡가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도는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赤谷面에는 道林寺가 표시되어 있으나 단지 터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중기까지 있었으나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며, 도림사 터에는 현재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 남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산간 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세가 가장 높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북쪽의 용두산(해발 871M)인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은 읍치 북쪽에 있는 義林池로 지도에도 원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허물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朴達峙가 있는데, 오늘날 노래 ‘울고넘는 박달재’로 알려진 이 고을의 대표적인 고개이다.(오상학)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산간 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세가 가장 높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북쪽의 용두산(해발 871M)인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은 읍치 북쪽에 있는 義林池로 지도에도 원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허물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朴達峙가 있는데, 오늘날 노래 ‘울고넘는 박달재’로 알려진 이 고을의 대표적인 고개이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을의 형세를, ‘북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고 남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고 했다. 이 고을도 천안처럼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지도에 보이는 外也串面, 安中面, 堰里面, 慶陽面이 그것이다. 경양면은 경양현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 월경지도 해산물의 수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은 溫祚王이 도읍으로 삼았다는 尉禮城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북쪽의 蛇山이다. 읍치 남쪽의 鵂鶹巖은 그 모양이 양, 말, 인물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의 聖居山은 고려 태조가 고을 서쪽 愁歇院에 거둥했다가 산이 성스러워 붙인 이름이다. 조선의 세종도 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 전한다. 고을의 서북쪽에 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다. 근처에는 주막의 모습도 보인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정연하게 그려져 있고 연못까지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堰里面, 外也串面, 慶陽面은 직산의 월경지인데 지도에는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본현과 인접하여 그렸다. 이들 월경지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지역의 산물을 수취했던 곳으로 보인다. 남북 직로의 연해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오늘날에도 교통의 결절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교통의 요지에 있던 곳이 현재까지 기능이 유지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 聖居山 근처에는 溫祚王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보이고 있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정연하게 그려져 있고 연못까지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堰里面, 外也串面, 慶陽面은 직산의 월경지인데 지도에는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본현과 인접하여 그렸다. 이들 월경지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지역의 산물을 수취했던 곳으로 보인다. 남북 직로의 연해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오늘날에도 교통의 결절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교통의 요지에 있던 곳이 현재까지 기능이 유지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 聖居山 근처에는 溫祚王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보이고 있다.(오상학)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진잠현의 읍치는 지금의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계룡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지류가 남쪽에서 돌아 나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고을에 있는 九峯山이 남쪽에 불끈 솟아서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의 東郊보다 낫고, 田地가 아주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가 조금 멀어서 서쪽으로 강경과 교역한다고 한다. 지도에도 읍치 남쪽에 구봉산이 환포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지도는 면명과 일부의 지명 몇 개 정도만 표기되어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읍치의 서북쪽에는 산기슭에 鶴雲寺라는 절이 그려져 있다. 이 절은 읍치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산장산(현 금수산)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은 들이 적고 산이 많은 편인데 산골이 겹겹이 있어서 큰 내가 많으나,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고 했다. 이 고을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진천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였는데,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生居鎭川이라 하였다. 반면에 용인은 산세가 順厚하여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도는 읍치 공간을 크게 확대하고 주변의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성을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등의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누정까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吉祥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 때 万弩郡 太守 金舒玄의 아내 萬明이 아들 金庾信을 낳고 이곳에 태를 묻어 길상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은 들이 적고 산이 많은 편인데 산골이 겹겹이 있어서 큰 내가 많으나,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고 했다. 이 고을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진천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였는데,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生居鎭川이라 하였다. 반면에 용인은 산세가 順厚하여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도는 읍치 공간을 크게 확대하고 주변의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성을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등의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누정까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吉祥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 때 万弩郡 太守 金舒玄의 아내 萬明이 아들 金庾信을 낳고 이곳에 태를 묻어 길상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육로 교통의 분기점으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또한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 월경지들은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당시 세곡과 해산물의 수취를 목적으로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동북쪽에 치우쳐 있는 읍치에는 객사와 사창, 華祝館 등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地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 珠島 등의 지명이 보인다. 大東面 부근의 豊歲坪은 고려시대 豊歲縣이 있던 자리이다. 지도에서는 다른 고을과 달리 일부의 洞里 지명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호남으로 향하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車嶺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는 홍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건물과 더불어 華祝館이 그려져 있다.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별도로 그려졌을 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방격을 이용한 지도에서는 거리와 방위를 고려하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여 본읍과 멀리 떨어져 그리기도 한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호남으로 향하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車嶺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는 홍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건물과 더불어 華祝館이 그려져 있다.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별도로 그려졌을 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방격을 이용한 지도에서는 거리와 방위를 고려하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여 본읍과 멀리 떨어져 그리기도 한다.(오상학)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보청천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과 더불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서북쪽 酒城面에는 酒城倉이 격리된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청산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酒城部曲이 있던 곳으로 본래는 경상도 상주에 속해 있었다. 이후 고려 공양왕 시기 청산에 감무를 설치할 때 땅이 적어 이곳을 쪼개어 합친 것이다. 읍치 북쪽에는 白雲亭이 그려져 있는데, 記文에 의하면 金守溫이 고을 수령에 권하여 백운정이라 지었다 한다. 지도에서 객사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보청천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과 더불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서북쪽 酒城面에는 酒城倉이 격리된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청산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酒城部曲이 있던 곳으로 본래는 경상도 상주에 속해 있었다. 이후 고려 공양왕 시기 청산에 감무를 설치할 때 땅이 적어 이곳을 쪼개어 합친 것이다. 읍치 북쪽에는 白雲亭이 그려져 있는데, 記文에 의하면 金守溫이 고을 수령에 권하여 백운정이라 지었다 한다. 지도에서 객사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읍성에 접해 있다. 지도에는 풍수의 산도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산지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산의 밑 부분까지 선으로 그려 기맥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읍치에는 아사와 객사가 붉은 색의 사각형 속에 그려져 있고 향교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고을 안을 감돌아 나가는 하천은 지금의 청안천인데 지도에는 曾子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하천 건너편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중국 선현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명을 표기하는 것은 당시 유교적 이념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을 동남쪽에 있는 坐龜山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읍성에 접해 있다. 지도에는 풍수의 산도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산지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산의 밑 부분까지 선으로 그려 기맥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읍치에는 아사와 객사가 붉은 색의 사각형 속에 그려져 있고 향교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고을 안을 감돌아 나가는 하천은 지금의 청안천인데 지도에는 曾子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하천 건너편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중국 선현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명을 표기하는 것은 당시 유교적 이념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을 동남쪽에 있는 坐龜山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양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청양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산간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牛山인데 일명 騎龍山이라 한다. 여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전해진다. 고을 동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과 산 기슭에 있는 長谷寺가 그려져 있다. 칠갑산은 해발 561m의 높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닌 명산으로 곳곳에 험한 고개가 있다.장곡사는 850년(신라 문성왕 12) 보조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현재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고 특히 상하 대웅전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南下面에는 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 光時·海門·靑淵·世川·龍谷·夢熊·下川·豊田 등의 屬驛을 거느렸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3필, 하등마 5필이 있었다. 읍치 남쪽의 碧涵亭은 烏城都正 李希良이 세운 정자이다.(오상학)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과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에 있었다.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있었던 고을로 최초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다. 이후 忠淸兵營을 1416년(태종 16)에 충남 海美로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도는 넓은 지역에 펼쳐 있는 고을의 모습을 방격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읍치와 주변지역에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는데, 월경지는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拱北樓가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臥牛山으로 동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통합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금강의 지류인 無心川이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작천 동쪽의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로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堪輿家는 殺氣를 벗었다 한다. 또한 금산·옥천에 비해 더욱 평탄하고 토지가 매우 기름져 오곡과 면화 재배에 알맞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의 표현이 강렬한데 읍치로 뻗어오는 맥세가 부각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그 동쪽으로도 숙종 때 다시 石築한 上黨山城이 포진하고 있다. 읍성 안에는 병영이 들어서 있으며, 상당산성에는 충청도의 兵馬虞候가 파견되어 있었다. 청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구역이 넓고 인재의 많음이 실로 다른 고을에 비할 수가 없는데, 지도에도 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여러 서원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통합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금강의 지류인 無心川이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작천 동쪽의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로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堪輿家는 殺氣를 벗었다 한다. 또한 금산·옥천에 비해 더욱 평탄하고 토지가 매우 기름져 오곡과 면화 재배에 알맞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의 표현이 강렬한데 읍치로 뻗어오는 맥세가 부각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그 동쪽으로도 숙종 때 다시 石築한 上黨山城이 포진하고 있다. 읍성 안에는 병영이 들어서 있으며, 상당산성에는 충청도의 兵馬虞候가 파견되어 있었다. 청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구역이 넓고 인재의 많음이 실로 다른 고을에 비할 수가 없는데, 지도에도 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여러 서원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과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에 있었다.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있었던 고을로 최초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다. 이후 忠淸兵營을 1416년(태종 16)에 충남 海美로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도는 넓은 지역에 펼쳐 있는 고을의 모습을 방격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읍치와 주변지역에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는데, 월경지는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拱北樓가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臥牛山으로 동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남이 南道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산간 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논이 적고 주로 火耕이 많이 이루어졌던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 북쪽의 屛山에는 바람구멍, 물구멍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물살이 빠른 여울로, 아래 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북쪽의 鳳岡書院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는데, 金湜·金權·金堉 등을 배향하였다. 黃江驛 우측에 보이는 황강서원은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남이 南道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산간 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논이 적고 주로 火耕이 많이 이루어졌던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 북쪽의 屛山에는 바람구멍, 물구멍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물살이 빠른 여울로, 아래 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북쪽의 鳳岡書院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는데, 金湜·金權·金堉 등을 배향하였다. 黃江驛 우측에 보이는 황강서원은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옛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결절에 위치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大林山인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까지 그려져 있는데 둘레가 3,650척이다. 읍치 북쪽에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가에 연한 金遷은 수운의 이점이 가장 큰 취락이다. 금천은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한데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가 될 정도였다. 인근의 可興倉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조운창으로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날랐다. 다른 고을에 비해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주변에 여러 서원이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옛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결절에 위치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大林山인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까지 그려져 있는데 둘레가 3,650척이다. 읍치 북쪽에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가에 연한 金遷은 수운의 이점이 가장 큰 취락이다. 금천은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한데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가 될 정도였다. 인근의 可興倉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조운창으로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날랐다. 다른 고을에 비해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주변에 여러 서원이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방격을 사용하여 충청도 고을의 모습을 그린 일종의 인덱스 지도이다. 지도 모퉁이의 기록에 의하면 남북 330리, 동서 560리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격자 하나의 실제 거리는 10리에 해당한다.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나오기 이전 유형을 따르고 있다. 충청도 관내의 고을을 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여 채색했으며 고을의 경계선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越境地를 본 고을과 같은 색채로 그렸다. 해안의 섬들도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데, 바다에는 파도무늬를 정교하게 그린 점이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산계보다는 수계를 중심으로 그렸는데 산계를 그리게 되면 지도의 내용이 복잡하여 각 군현의 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지는 개별 산만을 모식적으로 그린 정도에서 그쳤다. 군현에 수록된 내용은 군현명과 서울로부터의 일정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홍선으로 표시하고 중요 역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지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봉수망이다. 해안으로부터 내륙에 연결되는 봉수를 상세히 그렸고, 조응관계를 도로망과 구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民戶, 田畓, 군사에 관한 내용과 烽燧路·左道·右道·五鎭營·五驛·五鎭浦·五倉 등이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충청도의 형세를 한눈에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한 지도로 평가된다.(오상학)
방격을 사용하여 충청도 고을의 모습을 그린 일종의 인덱스 지도이다. 지도 모퉁이의 기록에 의하면 남북 330리, 동서 560리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격자 하나의 실제 거리는 10리에 해당한다.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나오기 이전 유형을 따르고 있다. 충청도 관내의 고을을 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여 채색했으며 고을의 경계선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越境地를 본 고을과 같은 색채로 그렸다. 해안의 섬들도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데, 바다에는 파도무늬를 정교하게 그린 점이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산계보다는 수계를 중심으로 그렸는데 산계를 그리게 되면 지도의 내용이 복잡하여 각 군현의 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지는 개별 산만을 모식적으로 그린 정도에서 그쳤다. 군현에 수록된 내용은 군현명과 서울로부터의 일정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홍선으로 표시하고 중요 역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지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봉수망이다. 해안으로부터 내륙에 연결되는 봉수를 상세히 그렸고, 조응관계를 도로망과 구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民戶, 田畓, 군사에 관한 내용과 烽燧路·左道·右道·五鎭營·五驛·五鎭浦·五倉 등이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충청도의 형세를 한눈에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한 지도로 평가된다.(오상학)
태안군은 지금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충청도의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고을로 곶의 형태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안에 위치하여 해적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선박이 왕래하는 수로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안흥진 서쪽에는 安興梁이 있는데 이곳은 삼남 수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뻗어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봉수대가 있었던 白華山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이 산은 사면이 모두 돌로 된 것으로 유명하다. 지도의 남쪽에는 屈浦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삼남의 漕運船이 안흥량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곳에서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서쪽의 安興鎭은 1653년(효종 4) 花亭島에서 이설된 수군 첨사진으로 士人 金石堅의 청에 의해 鎭城을 축조하였다. 서북쪽 해안의 所斤鎭은 수군 첨사진으로 1514년(중종 9)에 성을 쌓았다.(오상학)
태안군은 지금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충청도의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고을로 곶의 형태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안에 위치하여 해적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선박이 왕래하는 수로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안흥진 서쪽에는 安興梁이 있는데 이곳은 삼남 수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뻗어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봉수대가 있었던 白華山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이 산은 사면이 모두 돌로 된 것으로 유명하다. 지도의 남쪽에는 屈浦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삼남의 漕運船이 안흥량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곳에서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서쪽의 安興鎭은 1653년(효종 4) 花亭島에서 이설된 수군 첨사진으로 士人 金石堅의 청에 의해 鎭城을 축조하였다. 서북쪽 해안의 所斤鎭은 수군 첨사진으로 1514년(중종 9)에 성을 쌓았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작은 고을 면적에 비례하여 그려진 지도도 다소 소략한 편이다. 고을을 감돌아 흐르는 안성천과 산지, 주변의 면이름 정도가 기재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 안성천 변에 위치한 褒義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 동남쪽의 길가에는 주막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북쪽을 안성천의 하류가 감돌아 흘러간다. 서면에는 토성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팽성읍 안정리에 남아 있는 農城이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설, 그리고 신라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 고려때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 방어를 위하여, 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성이 위치한 지세로 볼 때 이런 소규모의 토축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이 지역의 토착 세력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아래쪽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북쪽을 안성천의 하류가 감돌아 흘러간다. 서면에는 토성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팽성읍 안정리에 남아 있는 農城이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설, 그리고 신라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 고려때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 방어를 위하여, 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성이 위치한 지세로 볼 때 이런 소규모의 토축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이 지역의 토착 세력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아래쪽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오상학)
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한산군의 읍치는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 있었다. 모시로 유명한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土亭 李之菡은 호서 제일의 形局으로 평하기도 했다. 또한 이 곳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水田의 비율이 旱田의 2배가 넘는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인데 북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건지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토성이고 둘레가 3,061척이었다고 한다. 읍치의 북쪽에 그려진 牧隱書院은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文獻書院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稼亭 李穀과 牧隱 李穡을 配享하기 위하여 1594년(선조 27)에 이곳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1610년(광해군 2)에 韓山 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 해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지도의 하단은 금강인데 흡사 바다처럼 그려져 있다. 여러 나루터와 함께 서남쪽에는 船所도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다.(오상학)
해미현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 당진군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해안 고을로 병영이 설치되었던 군사적 요충이기도 하다. 조선초기 1402년(태종 2)에 덕산에 있던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移設되어 1651년(효종 2)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존속했다. 이후 左營이 설치되었는데, 좌영은 인조 때에 온양에 세웠다가 1712년(숙종 38)에 본현으로 옮겼다. 左營將은 본현의 현감이 겸하였고 속읍은 海美·大興·溫陽·沔川·瑞山·泰安·結城·禮山·平澤·牙山·新昌·德山·唐津이었다. 읍치는 고을의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주변 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져 단지 읍치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지도 하단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1,380보, 높이 12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읍성은 원형으로 축조된 평지성으로 현재에도 잘 남아 있다. 지도의 중앙 부분에는 洪州의 월경지인 云川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역참으로는 읍치 서쪽의 夢熊驛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하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5필이 있었다.(오상학)
충청도의 모습을 그린 지도이다. 충청도에 대해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한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살면서 이 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와 하천 등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각 군현과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 그리고 봉수와 산성과 같은 군사적인 요소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곳의 중요 산성으로는 청주의 상당산성과 공주의 공산성이 부각되어 있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여 그리면서도 명산은 좀더 강조하였다. 전후좌우의 진영이 들어서 있던 충주, 청주, 공주, 홍주와 수영은 원을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 해안선의 윤곽이나 도서의 표시 등으로 볼 때 영조 대 정상기의 ≪동국지도≫ 이전의 지도를 기초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청담 이중환은 충청도에 가장 살만한 곳으로 내포를 꼽았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라 하는데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도 적군의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고 했다. (오상학)
홍산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금천이 고을을 감돌아 흘러간다. 다른 지도와 달리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는 지도를 종이의 규격에 맞추어 가로를 길게 배치하려 했던 데에 기인한다. 산지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풍수의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그렸다. 읍치의 위치는 고을의 서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에 있는 飛鴻山이다. 縣內面의 길가에는 이 고을의 驛站인 宿鴻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의 옛날 이름은 非熊이었는데 태종 때 홍산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지관의 말이 있어서 숙홍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 밖의 문화적 요소로는 몇몇 서원과 사찰·암자 등을 볼 수 있다. 읍내면의 淸逸祠는 1621년(광해군13)에 창건되어 매월당 김시습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上下東面의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어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尹集·洪翼漢·吳達濟 등을 배향했다. 현의 북쪽 外山內面에 있는 萬壽山에는 無量寺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삼한시대의 사찰로 이후 김시습이 은거하다 죽었다는 곳이다.(오상학)
홍주목은 충남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보령시 천북면, 안면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서해안의 대읍으로 당시 27개의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海美 너머에 있는 雲川面, 德山 너머에 있는 合北面, 合南面, 新北面, 新南面, 縣內面 등은 모두 월경지로서 읍치로부터 멀게는 120리에 걸쳐 있다.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고을의 면적이 큰 만큼 지도의 크기도 크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주산은 白月山인데 지도는 백월산이 위치한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읍성이나 관아 건물이 전혀 없고 단지 읍치라는 표기만 있다.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둘레 2,351척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해안가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축조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현재에도 성벽의 일부와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읍치에는 前營鎭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홍주에는 충청도의 前營이 설치되어 서해안의 19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동북쪽 合南面에는 合德蓮堤가 그려져 있다. 이 합덕연제는 신라말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는 오래된 제방으로 곡창지대인 합덕평야를 관개해 주던 저수지이다. 지금은 당진군에 속해 있고 저수지가 아닌 농경지로 변해버렸다.(오상학)
홍주목은 충남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보령시 천북면, 안면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서해안의 대읍으로 당시 27개의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海美 너머에 있는 雲川面, 德山 너머에 있는 合北面, 合南面, 新北面, 新南面, 縣內面 등은 모두 월경지로서 읍치로부터 멀게는 120리에 걸쳐 있다.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고을의 면적이 큰 만큼 지도의 크기도 크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주산은 白月山인데 지도는 백월산이 위치한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읍성이나 관아 건물이 전혀 없고 단지 읍치라는 표기만 있다.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둘레 2,351척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해안가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축조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현재에도 성벽의 일부와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읍치에는 前營鎭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홍주에는 충청도의 前營이 설치되어 서해안의 19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동북쪽 合南面에는 合德蓮堤가 그려져 있다. 이 합덕연제는 신라말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는 오래된 제방으로 곡창지대인 합덕평야를 관개해 주던 저수지이다. 지금은 당진군에 속해 있고 저수지가 아닌 농경지로 변해버렸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추풍령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충청도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간 고을이다. 서쪽으로는 영동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의 金川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황간 고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는데 동남으로 물들이 세차게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는 원래 1,646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는 이 고을 최고의 관방으로서 秋風嶺과 掛榜嶺이 이에 해당한다. 동쪽의 金化倉이 있는 곳은 과거 金化部曲이 있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金山에 속해 있었는데 뒤에 京山府로 옮겼다가 공양왕 때 영동에 소속시켰다. 읍내면에 있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時烈을 배향했다. 梅下面의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인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영동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金山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오른쪽 하단에 추풍령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추풍령은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와 다름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한 아주 평평하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하여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본래 1390년(공양왕 2)에 축조된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하천변 절벽 위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駕鶴樓가 그려져 있다. 이 누정은 조선 태조 초년에 縣監 河澹이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具長源이 增修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을 받았는데, 宋時烈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영동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金山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오른쪽 하단에 추풍령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추풍령은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와 다름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한 아주 평평하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하여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본래 1390년(공양왕 2)에 축조된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하천변 절벽 위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駕鶴樓가 그려져 있다. 이 누정은 조선 태조 초년에 縣監 河澹이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具長源이 增修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을 받았는데, 宋時烈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오상학)
회덕현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 일대에 해당한다. 회덕현의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북쪽 지역은 금강 상류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공주와 옥천에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鷄足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이 산에는 둘레 1,969척의 산성이 있었다. 지도에는 맥세를 강조하여 산지가 표현되어 있다. 고개 가운데 중요한 嶺阨는 붉은 색의 동그라미로 강조하였다. 지도에는 무엇보다 서원의 표시가 상세하다. 西面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崇賢서원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창건되어 그 해에 사액을 받았다. 金淨·宋麟壽·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고을의 동남쪽 金藏山 기슭에는 高山寺가 이 지역의 유일한 사찰로 그려져 있다. 고산사는 886년(신라 정강왕 1)에 道詵國師가 처음 지었고, 1636년(인조 14) 守登國師가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서쪽에는 이 고을의 유일한 역참으로 田民驛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에 이 역에는 상등마 1필, 중등마 4필, 하등마 3필이 있었다.(오상학)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듭된 멧부리와 겹겹의 고개가 멀리 연해 있고, 길은 양의 창자처럼 돌아간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간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읍의 규모가 매우 작다. 지도의 주기에도 民戶가 804호로 거주하는 인구도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논(166결)도 밭(987결)에 비해 매우 적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중심공간임을 부각시켰다. 산지의 표현은 회화식 기법을 많이 가미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고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가 중심건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북쪽 청주로 가는 고개인 皮盤嶺은 이 지역의 가장 큰 고개로 고갯길이 아홉 번 꺽여 매우 험하다 한다. 읍치의 남쪽의 玉女峯은 玉女彈琴形의 풍수적인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오상학)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듭된 멧부리와 겹겹의 고개가 멀리 연해 있고, 길은 양의 창자처럼 돌아간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간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읍의 규모가 매우 작다. 지도의 주기에도 民戶가 804호로 거주하는 인구도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논(166결)도 밭(987결)에 비해 매우 적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중심공간임을 부각시켰다. 산지의 표현은 회화식 기법을 많이 가미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고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가 중심건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북쪽 청주로 가는 고개인 皮盤嶺은 이 지역의 가장 큰 고개로 고갯길이 아홉 번 꺽여 매우 험하다 한다. 읍치의 남쪽의 玉女峯은 玉女彈琴形의 풍수적인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오상학)
군위현은 지금의 군위군 군위읍·소보면·효령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군위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방향 표시가 현재와 같은 東西南北으로 되어 있지 않고, 子(북)·卯(서)·午(남)·酉(동)의 형식으로 적혀 있다. 고을은 실재로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정북-정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馬井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孝令縣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孝令面과 孝令倉은 옛 효령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붙여진 것이며, 현재도 군위군 효령면으로 남아 있다. 召召保部曲과 仍末谷部曲도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며 이 고을에 완전히 통폐합되었다. 조선 초에는 이 지역이 모두 面으로 재편되었는데, 읍치 위쪽의 召召本面은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인조 5년(1627)에 柳成龍(1542-1607)을 배향하여 세운 南溪書院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사찰은 모두 합해 3개나 지도에 나타나고 있어, 崇儒抑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불교의 생명력이 의외로 강하게 존속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고개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데, 磨搥嶺阨에는 적색선으로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옆에는 ‘敵路要衝’이라는 표시를 해 놓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위쪽의 주기에는 고을 전체의 세금 부과와 관련된 호구의 수·전답의 양·세금 납부처와 부과량을 비롯하여,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炭山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倭城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하여 울산-사천 사이의 남해안에 주둔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 북진의 근거지였으며, 현재 기장읍 죽성리에 사적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총 5개의 封山이 보이고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봉산은 보통 운송의 편리를 위해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에 가장 많았다. 상호 호응 관계에 있는 봉수를 직선의 붉은 선으로 연결하여 알기 쉽게 표현한 점도 눈에 띈다. 지도 아래쪽의 侍郞臺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랑대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으로서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삼월과 시월에 용왕제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기타 문무왕 18년(678)에 창건했다는 長安寺를 비롯하여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개령현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아포읍·남면과 연평리·노곡리·봉곡리를 제외한 농소면, 보광리·삼성리 동쪽의 감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三國史記≫에 조분니사금 2년(231) 신라에 의해 병합된 甘文國의 땅으로 나온다. 고을의 鎭山이며, 읍치 북쪽에 표시된 甘文山은 이 지역의 과거 명칭이 지명에 반영된 것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甘川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나가 낙동강에 합류한다. 실재로는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서-정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 감천은 ≪新增東國與地勝覽≫과 ≪擇里志≫에 모두 관개가 가장 잘 이루어지는 하천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扶桑驛과 赤峴面이 있는 지역도 실재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는데, 마치 정남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의 德林書院은 김종직(1431-1492)·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세워졌으며,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이기봉)
거제부는 거제시 전체와 통영시 한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鷄龍山이다. 읍치는 원래 신현읍의 고현리에 있었던 古縣城이었는데, 숙종 37년(1711)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거제부는 뱃길로 일본과의 왕래가 쉬운 곳이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당시에 사용되지 않던 성곽이나 廢鎭堡의 경우 명칭과 원형의 성곽 모양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한 뒤 남해안과 섬 지역에 倭城을 쌓고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재침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는데, 거제도에도 여러 군데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3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성과의 구분을 위해 반원의 성곽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제작 당시에 사용되고 있었던 鎭堡는 주기에 8개가 기록되어 있으며, 배치된 戰船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다. 지도에는 건물의 모양과 鎭堡의 이름을 적어 넣어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待變亭 역시 戰船을 배치하여 관리하던 곳이라는 점은 다른 鎭堡와 마찬가지이지만 운영 주체가 거제부였다. 지도에는 읍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바다를 수시로 감시하던 瞭望도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見乃梁津은 통영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현재 이곳에는 거제대교가 만들어져 있다. 漆川島와 加助島에는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앞의 섬에는 祭享黑牛 49마리, 뒤의 섬에는 牧馬 77마리가 방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牧子軍이 각각 111명과 93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祭享黑牛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아마 특별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한산도에는 制勝堂이 표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1545-1598)이 堂을 짓고 웅거하면서 왜병을 물리쳤던 곳이라고 하며, 후에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란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주기에는 산의 이름과 읍치로부터의 거리, 둘레의 크기 등을 기록한 6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봉산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봉산이 있는 산의 이름을 기록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시내·남천면, 압량면의 신대리-내리를 포함한 서북쪽,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고모동-삼덕동을 포함한 동쪽, 동구의 율하동·용계동·괴전동·금강동·내곡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삼남동·삼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맨 아래쪽의 馬巖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은 남쪽으로는 600m 정도의 산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천천이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특히 3단의 경우 산 중턱에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입지와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하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押梁驛이 있는 곳은 신라에 의해 정복된 辰韓 小國인 押督國의 옛 터로 알려져 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孤山書院은 선조 때 이황에게 孤山이란 이름을 받아 만든 서재였다. 인조 11년(1633) 李滉(1501-1570)과 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여 서원으로 바꿨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이 밖에 사찰도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을 표시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은 없다.(이기봉)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30里에 있었다’는 麻耆羅山이다. 지도에서 읍치는 郡內面에 있었는데, 衙舍·官廳·客舍·司倉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다. 객사 위쪽의 社壇은 土地神에게 제시 지내던 곳으로,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서쪽(위)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동쪽(아래)으로 흘러 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하천의 명칭은 대부분 고유명을 띄고 있다. 읍치 왼쪽과 오른쪽의 南川·北川만이 방위를 중심으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남천·북천 등은 상당수의 고을에서 나타나는 명칭으로, 읍치를 중심으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바닷가에는 永朗湖·松池浦·仙遊潭·乾津浦 등의 석호가 보이고 있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大路·中路·小路’란 단어를 써 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쪽(위)으로 넘어가는 도로 위에는 고개의 이름이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이 중 彌矢岺이나 珍富岺 등은 현재도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다만 진부령의 경우 훨씬 동남쪽(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치 읍치의 정 동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미시령-진부령의 실재 거리는 진부령에서 ‘北’자가 쓰여 있는 곳까지의 거리에 비해 1/10도 안된다. 해안가에는 3개,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섬 이름이 적혀 있다. 실재로 이 섬들은 매우 작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關東八景의 하나로 아려진 淸澗亭도 영랑호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烽燧의 경우 모두 ‘今廢’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지도 작성 당시에는 이 봉수들의 기능이 정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와 감물면 오창리, 불정면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錦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관념 속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을이 마치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울러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내부로 뻗은 산줄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지도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다. 달천강은 남쪽의 청주경계로부터 흘러들어 옴에도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왼쪽이 성황천, 오른쪽이 동진천이다. 읍치 주변을 강조하다보니까 달천강 본류와 그 지류들의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게 그려져 있다. 달천강에 있는 ‘梨灘’은 우리말로 ‘배나무여울’이다. 그 왼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槐江津’인데, 달천강 수운에서 배가 운행되는 최상류 부분이었다. 그 근처에 ‘槐灘’이 있었는데, 우리말로는 ‘느티여울’이라고 한다. 괴강진에 강을 건너기 위한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음이 뒤쪽의 주기에 표시되어 있다. 괴강진은 나루 이름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달천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기타 인문적 정보로는 서원과 사찰·면의 이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는데, 지도 왼쪽 위에는 面의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사각형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경성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성군·청진부 전체와 명천군의 서면·동면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경성군·어랑군 전체와 청진시 서쪽 및 화성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경성군 경성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祖白山이다. 咸鏡道의 ‘鏡’자가 바로 이 고을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할 정도로 중요했던 지역이다. 이러한 중요성은 지도 오른쪽 아래의 읍치에 표시된 北兵營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종2품의 咸鏡北兵馬節度使가 파견되었으며, 鏡城都護府使를 겸하였다. 이외에도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漁游澗(堡)·吾村堡·朱乙溫(堡)·甫老知(堡)·森森坡(堡) 등의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내용은 ≪海東地圖≫의 鏡城府 지도와 거의 동일하여, 두 지도 사이의 연관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의 색을 내부와 다르게 표시하였으며, 지도 오른쪽 위의 산줄기는 특별히 하얗게 표현하였다. 이곳에 있는 白山 또는 長白山이 5월이 되어야 눈이 녹고, 7월이 되면 눈이 다시 쌓이는 지역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長白山은 흰 색 산줄기의 외쪽 끝에 있어야 하는데, 지도에는 중간쯤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가 서쪽(酉)를 위로 향해 그린 것도 白山이 이 방향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방위는 실제와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유독 서쪽만 東西南北이 아닌 酉라는 干支로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潟湖로 추정되는 長者澤·長浦 등의 호수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붉은색의 것이 더 중요했다. 驛站은 노란색 타원 안에 표시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맨 오른쪽의 輸城館에만 ‘站’이 아닌 ‘館’의 명칭이 있는데,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기타 오른쪽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낼 때 大凶年이 들자, 兵營에 있었던 곡식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했던 李光夏(?-1701) 등의 廟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영흥부는 일제시대의 영흥군 전체와 고원군의 운곡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남도 요덕군·금야군과 고원군의 옛 운곡면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금야군 금야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좀이 먹어 보이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聖歷山이다. 지도에서의 읍치는 가운데쯤에 衙舍·客舍가 표시된 곳이다. ≪咸鏡道全圖≫1책의 지도와는 달리 방안이 그려져 있지 않으며, 고을의 실제 형태와는 달리 단순히 사각형 모양으로 그렸다. 읍치를 비롯하여 誕聖基·眞殿·道尊墓 등은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려 풍수적 명당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誕聖基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탄생한 곳이다. 그 아래쪽의 本宮은 이성계가 살던 곳으로, 그의 位版을 奉安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眞殿이라 표시된 곳도 이성계가 살던 곳 중의 하나이며, 이성계의 畵像(초상화)이 奉安된 곳으로, 원래 璿源殿이라고 불리었다. 道尊墓는 이성계의 외할아버지(外祖)인 崔閑奇의 묘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정확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북쪽이 아니라 다른 방위를 위로 향해 그릴 경우, 보통 읍치의 坐向이나 읍치로 들어오는 산줄기의 방향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흥부 읍치의 좌향이 북쪽을 등진 채 남쪽을 향해 있지만, 기본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다가 북으로 꺾여 올라왔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낭림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모여 龍興江이 되고, 읍치 북쪽을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용흥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은 현재의 虎島半島가 있는 지역으로,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안선이 복작하고 섬이 많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용흥강의 하구에 여러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함경도에서 보기 드문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興賢書院은 鄭夢周(1337-1392)·趙光祖(1482-1519)·李繼孫(1423-1484) 등을 배향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세워지고, 같은 왕 9년(1617)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고원군은 일제시대의 운곡면을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에 해당되며, 지금도 옛 운곡면 지역을 제외한 함경남도 고원군 일대이다. 읍치는 고원군 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0리에 있었다’는 椵山이다. 고을의 남북 폭은 서쪽 지역이 넓은 반면, 동쪽 지역은 매우 좁다. 지도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마치 고을이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것처럼 그렸다. 또한 서쪽 지역은 산악지역이며, 동쪽 지역은 거의 평지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산의 높이도 서쪽과 동쪽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보를 이해할 수 없도록 그렸다. 읍치의 산세는 環抱型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화된 세계의 반영이다. 또한 읍치를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시켜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회화식 군현지도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읍치에 유난히 많은 인문정보를 자세히 기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읍치에는 다른 곳에서는 자주 보이지 않는 私賑廳이 표시되어 있다. 백성의 구휼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왼쪽 주기에 쓰여 있는 交濟穀을 운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厲壇과 社壇도 표시되어 있다. 여단은 억울하게 죽은 자를 위해, 사단은 토지신에게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邑誌에는 社廟 조가 있으며, 여기에는 社稷壇·厲壇·城隍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거의 필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하는 제단으로서, 보통 읍치 주변에 배치된다. 읍치 오른쪽에는 神堂淵과 德池灘이 표시되어 있다. ‘淵’은 진짜 연못이 아니라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하천의 구간을 의미하며, 灘은 급경사로 인해 물살이 빠른 구간을 의미한다. 둘 다 하천의 명칭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 밖에 읍치 위쪽으로는 伐羅堰이 표시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도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이기봉)
경원부는 일제시대의 용덕면·유신면의 일부를 제외한 경원군, 온성군의 훈융면, 경흥군의 웅기읍에 해당된다. 지금은 서쪽 일부를 제외한 함경북도의 새별군, 은덕군 서북부, 나진시 동북쪽 일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새별군 성내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이 ≪海東地圖≫ 내의 慶源府 지도와 거의 흡사하여 상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을의 전체적인 윤곽이 마치 사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으나, 실재로는 북쪽 부분의 동서 폭이 넓고 남쪽은 좁다. 또한 오른쪽 두만강의 굴곡이 거의 없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음도 실제와 약간 다르다. 마지막으로 아래쪽에 海倉이 있는 부분은 동해에 연해 있는 일제시대의 웅기읍 일부에 해당되는 월경지이다. 이러한 월경지의 표시 방법은 실제의 거리가 아니라 단지 ‘그 방향에 있다’라는 정도의 정보만 싣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표시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 지도가 나타내는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 역시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정확성보다는 관념적인 인식의 반영이라는 측면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 이외에도 위쪽으로부터 訓戎鎭·安原堡·乾原堡·阿山鎭 등의 군사기지가 표시되어 있다. 훈융진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안원보·건원보에는 종9품의 權管이, 아산진에에는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다만 같은 책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세세하게 표시된 把守가 전혀 보이지고 있지 않음이 특이하다. 실재로는 14개 이상의 파수가 있었다. 撥站의 경우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발참제도는 선조 30년(1597)에 파발을 두어서 변방의 급보를 전하도록 한 것이다. 보통 말을 타고 달리는 騎撥의 경우 25리마다, 사람이 달리는 步撥의 경우 30리마다 1站을 두었다. 站의 명칭이 古乾原·古阿山으로 되어 있는데, 건원보·아산보가 옮겨가면서 만들어진 명칭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발참은 이외에도 세 군데 더 있었는데,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는 남색으로 칠하여 고을 내부와 구분하였다. 두만강 동쪽(卯)의 여진 지역 역시 남색으로 산을 칠하여 이 고을의 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곳에 붉은색 사각형으로 표시한 것은 縣城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밖에 경흥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이 고을이 경흥부의 땅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대에 경흥부에 있었던 이성계의 高祖父 穆祖 李安社와 그의 부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인 德陵·安陵이 있어, 王業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라는 의미의 慶源과 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이기봉)
지도에는 함경남도지도라는 명칭이 없다. 다만 (咸鏡)南道兵馬節度使가 관할하는 구역을 그렸기 때문에 함경남도지도라는 명칭을 임시적으로 붙인 것이며, 일제시대의 함경남도와도 동일한 영역이다. 남도병마절도사는 지도 오른쪽 아래의 北靑에 설치되어 있었다. 함흥 위쪽의 長津府가 아직 長津柵으로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는 장진부가 설치되는 정조 11년(1787)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른쪽 위쪽에는 백두산과 大澤이 표시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뻗어 나온 중요한 산줄기(대부분 白頭大幹)는 남색으로 표시하여 다른 산줄기와 구분하였다. 백두산은 거의 일년 내내 흰 눈이 덮여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흰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흰색의 표현에는 甲山 바로 아래쪽에도 보이고 있다. 이곳 역시 여름철 3개월을 제외하면 봄·가을에도 흰 눈에 덮여 있다는 長白山 부근이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는 군사기지인 鎭堡가 표시되어 있다. 진보는 현재의 惠山市가 자리 잡은 압록강 변의 혜산진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분포한다. 이곳은 압록강의 지류인 장진강으로서, 그 왼쪽(西)에는 세종 때 개척되었다가 곧바로 관리를 포기한 廢四郡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최전방이 압록강-장진강을 잇는 선이었다. 이 밖에 甲山으로부터 端川으로 넘어오는 지역, 長津柵에서 함흥으로 넘어오는 지역에도 진보가 일부 보이고 있다. 이곳이 2차 저지선 역할을 하며, 중요한 요해처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 안에는 이 외에도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驛, 監牧官이 파견된 牧場 등도 일부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표현되어 있으며, 驛站과 고개는 붉은색 원의 크기로서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표현도 중요한 요소로서 인식되었다. 먼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조상의 묘가 德安陵(高祖父·母), 義陵·純陵(曾祖父·母), 智陵·淑陵(祖父·母), 定和陵(父母)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에 位版을 奉安한 本宮과 역시 이성계가 살던 곳으로 그의 畵像을 奉安한 璿源殿도 표시되어 있다. 전반적인 모습은 사각형에 맞추려 했기 때문에 실제의 모습과 차이가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실재로는 함흥 왼쪽의 定平 부근부터 해안선이 남쪽으로 꺾임에도 이런 사실이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강령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용연면·봉치면·흥미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동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 강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강령군 강령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아래쪽에 있는 鳳凰山이다. 이 고을은 세종 10년(1428)에 永康縣과 白翎島를 합하고, 각 명칭에서 한자씩 따다가 강령현을 만들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백령도가 獨鎭이 되어, 독립적인 영역을 갖고 있었다. 방위표시는 지도 오른쪽에 북쪽만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하여 동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왼쪽에는 登山串이 표시되어 있다. ‘串’이란 半島에 대한 옛 명칭으로서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육지를 일컫는 지명의 어미였다. 이곳에는 登山舊鎭이라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登山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등산진은 그 위쪽의 巡威島로 옮겨갔으며, 지도에도 ‘僉使設鎭處’라고 표시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등산구진 오른쪽에는 ‘舊環場處’ 즉, ‘옛날에 牧場을 둘러친 곳’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곳에는 원래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말들을 관리하기 위해 牧場城을 쌓았다. 도로는 붉은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祠宇는 ≪海東地圖≫의 강령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기록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곳에 왕실의 棺槨과 戰船用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3곳의 封山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無黃腸船材’라는 문구를 함께 삽입하여, 실재로는 관곽용의 황장목과 전함 건조용의 선재가 전혀 없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 조선후기에 산림이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다른 지도에는 대부분 표시되어 있는 面이 전혀 보이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사찰은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표시하였다.(이기봉)
황해도는 일제시대에도 그대로 황해도로 되었으며, 현재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초기에는 황해도에 총 24개의 고을이 있었으며, 효종 3년(1652)에 牛峰縣과 江陰縣이 합쳐져 金川이 되면서 23개로 줄어들었다. 황해도의 전체 모습이 현재와 거의 유사하며, 고을 간 경계선이 표시된 몇 안 되는 지도 중의 하나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중요 산줄기는 높낮이에 상관없이 청남색을 칠하여 쉽게 구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후기의 道別地圖나 全圖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서, 김정호의 ≪東輿圖≫나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산줄기에 대한 인식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監營·水營·兵營 등은 정사각형의 성곽 표시와 함께 붉은색을 칠하여 눈에 확 띄도록 하였다. 鎭堡와 같은 군사기지는 세로로 긴 청색의 사각형으로, 대형산성은 구체적인 모습과 청남색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戰船이 정박하던 防船(所)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며, 유사시 소식을 전하던 烽燧 역시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도로와 驛站의 표시가 자세하다. 이 모든 것이 지도 작성자가 군사적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대형산성의 강조는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초기에는 각 鎭堡나 고을마다 독자적으로 방어하는 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대형 전투가 주를 이루었던 兩亂을 겪으면서, 여러 고을이 대형산성에 들어가 집단적으로 방어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각 고을은 흰색의 원 안에 표시하였으며, 다음의 행정단위로는 面의 대부분과 중요 洞이 표시되어 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面 대신에 사용한 坊이란 명칭도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창고의 표시도 자세하며, 宮房田인 ‘屯’도 자주 눈에 띈다. 위쪽의 大同江, 오른쪽의 禮成江을 비롯한 하천도 중요한 것은 거의 모두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구간마다 사용된 다양한 명칭도 적혀 있는데, 津·浦·灘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기타 사찰·제언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당시에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곡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곡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곡산군·신평군과 평안남도 회창군 동쪽 일부 및 강원동 판교군 서북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곡산군 곡산읍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좀이 먹어 하얗게 나온 붉은색 원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8리에 있었다’는 南山이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상류이다. 왼쪽 아래에 있는 하천은 예성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오른쪽에 작게 나타나 있는 하천은 임진강 상류의 작은 지류이다. 지도는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산줄기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의 河南山(1,486m)을 최고봉으로 하여, 북쪽과 동쪽에는 1,000m 안팎의 높은 산지가 이어진다. 다음으로 중요하게 눈에 띄도록 한 것은 읍치를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에 표시된 4개의 고개(嶺)이다. 이 고개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18세기 중반 경에 편찬된 ≪輿地圖書≫의 關阨(요충지) 부분에 기록된 것과 동일하다. 이중 가장 북쪽의 檢險嶺에는 지도와 같이 關門을 설치하여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그 남쪽에는 숙종 때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文城鎭을 두었다. 이 관문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으로 쌓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고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의 고개도 ‘古介’·‘嶺’ 등의 이름으로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으로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驛院도 모두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輿地圖書≫ 곡산부분의 外助伊 제언으로 추정되는 堤堰이 둑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음이 눈에 띈다. 제언은 조선후기의 地誌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의 하나로 취급되었지만, 곡산 지역은 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수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기타 인문정보로는 面·寺刹·倉庫 등만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고부군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부면 고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부군은 전라도의 동진강 유역에 위치한 고을로 동으로는 정읍, 서로는 흥덕과 연결된다. 1리 방격으로 그려졌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읍치를 부각시켰다. 읍성 안에는 衙舍, 客舍 등의 관청 건물과 다른 고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社位牌堂이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의 향교에는 일종의 기숙사인 養士齋의 모습도 보인다. 畓內面의 道溪書院은 1673년(顯宗 14)에 金昌集, 閔鎭遠의 주창으로 창건된 서원으로, 益齋 李希孟, 鰲峯 金齋閔, 慕菴 崔安, 苔川 金地粹 등을 배향했다. 所井面의 旌忠祠는 1632년(인조 10)에 세워졌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宋象賢,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申浩및 金俊 등이 배향되었다. 읍치의 남쪽에 있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원래는 富安鄕이었다. 지도에도 고을과 멀리 떨어져 그려져 있다. 여타 항목에 비해 제언의 표시가 상세한데 고을 남쪽의 毛助堤에는 과거 毛助部曲이 있었다.(오상학)
고산현은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 동상면, 경천면,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산면 읍내리에 있었다. 고산은 지리산 북쪽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계룡산 쪽으로 뻗어 가는 錦南正脈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유역권으로는 동진강 유역에 해당한다. 북쪽 雲梯山 아래는 雲梯廢縣이 있던 곳으로 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면이름이 운북, 운동, 운서 등으로 되어있다. 운제현은 본래 백제의 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고려 때는 전주에 속했다가 조선 태종 원년에 고산현에 來屬되었다. 용계원 서쪽의 花巖寺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절로 檀香木으로도 유명한데 절 주위에 이를 상징하는 수목을 그려놓은 것도 이채롭다. 大芚山에 있는 安心寺는비문에 의하면 638년(신라 선덕여왕7)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사적비(지방유형 제110호), 안심사 부도 및 부도전(지방유형 제109호) 등이 남아 있다. 그 남쪽에는 경승으로 이름난 玉溪洞이 표시되어 있다. 대로의 주변에 형성된 주막촌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雲東面에 있는 新巨里酒幕이 대표적이다.(오상학)
곡성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곡성읍, 삼기면, 오곡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곡성읍 읍내리에 있었다. 곡성은 지리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을로, 읍치의 서쪽으로 動樂山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섬진강의 지류인 子江이 고을을 감싸며 돌아나간다. 고을 북쪽에는 靑溪洞이 표시되어 있는데, 청계동은 지금의 곡성읍과 입면 사이로, 동악산이 큰 용처럼 달려오다 강줄기를 만나 멈춘 곳이다. 또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남원시의 한봉과 순자강을 사이에 둔 道界 지역으로써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마치 삼청의 진경을 옮겨 놓은 듯 하다는 명승지이다. 읍치 동남쪽의 文成公影堂은 고려 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다고 전해지는 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아래쪽의 德陽書院는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고려 태조 때의 開國功臣 申崇謙을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에 賜額되었다. 고을 남쪽의 東裏山 부근에는 고려초기 대찰이었던 泰安寺가 그려져 있다. 태안사는 九山禪門의 하나인 桐裏山派의 중심 사찰로 慧徹國師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오상학)
낙안군은 지금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외서면, 별량면 서부와 보성군 벌교읍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낙안면 서내리, 남내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쪽 지역은 남해안에 연해 있다. 남해안을 동서로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바다에 접해 있어 수운도 편리할 뿐 아니라 순천만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해안방어에도 유리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성 북쪽에 우뚝솟은 金錢山이다. 지도에도 크게 강조되었으며 수목까지 그려져 있다.상단의 기록에는 邑基를 鎭壓한다고기재되어 주변의 산에 비해 위세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고 내부에는각종의 관아 건물이 포진해 있다. 이 읍성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고 일부 관아 건물도 복원되어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둘레가 1,748把로 비교적 큰 읍성에 해당한다. 고을 남쪽의 開雲山 桐華寺는 1047년에 창건되었고,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 대각국사가 중건한 절로 전해진다. 또한 이 고을에는 다수의 봉산도 있었는데, 朴江山·油芚山·船頭登·鉢里山 등에 있었다. 그러나 지도에는 단지 松田으로만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무안현은 삼향면, 해제면, 망원면, 운남면, 현경면 일부를 제외한 무안군 전체와 목포시, 함평군의 엄다면·학교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안읍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강이 동쪽에서 남류하고 지역의 서부와 남부가 바다와 접해 있다. 지금의 무안군 소속의 삼향면은 당시 나주목에 속한 월경지였기 때문에 무안현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서쪽의 해안에는 炭島 이외의 섬들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데, 압해도를 비롯한 이 지역의 여러 섬들은 당시 나주목에 속해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를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성이 축조된 읍치 내부에는 각종의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졌는데, 특히 양쪽 날개 지붕이 있는 객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 해안에 위치한 木浦鎭은 정4품의 水軍 萬戶가 관할하던 진영으로 1439년에 최초로설치되었다. 근처의 唐串都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나주의 高下島에 처음 세운 것인데, 1647년(인조 25) 이곳으로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別將을 두었다. 해안에 위치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封山도 다수 설치되어 있음을 상단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서문 근처의 松林書院은 광해군 때 廢母論을 반대하다 무안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金權을 배향하였는데 1682년(숙종 8)에 사액되었다. 남쪽의 僧達山 밑에는 724년 서역의 僧인 明이 창건한 法泉寺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강진현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지금의 전남 강진군 강진읍, 군동면, 대구면, 도암면, 병영면, 성전면, 옴천면, 작천면, 칠량면과 완도군 완도읍, 고금면, 약산면, 신지면, 청산면, 군외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강진읍 남성리, 동성리, 서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태종 17)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해 만들어진 고을로 전라도 해안 방어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지도에도 읍치 동쪽의 兵營을 비롯하여 해안가와 바다에 진영이 그려져 있다. 兵馬節度使營은 전라도 육군의 총본부로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된 것을 옮겨온 것이다. 1599년(선조 32)에 권율의 상소로 일시 장흥으로 옮겨갔으나 1604년 다시 원래대로 복귀하였다. 남쪽 바다의 新智島鎭은 강진군에 속한 진영으로 원래 사복시 관할의 목장이 있었다고전해지기도 한다. 1681년(숙종 7)에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므로 萬戶鎭을 설치하였다. 그 위쪽에 위치한 古今島鎭은 1598년(선조 31)에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여 募民屯耕하면서 왜선을 격파했고, 明將 陳璘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군을 제압하는데 일조를 하여 명나라까지 알려졌던 곳이다. 1681년(숙종 7) 이곳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임이 인정되어 진을 설치하고 水軍同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大口面 해안가에 위치한 馬島鎭은 수군 만호진으로 원래 강진현 백도면 완도의 북쪽에 있었으나 선박처로서 불편하다 하여 대구면 마량으로 옮긴 것이다. 서남쪽 寶岩面의 萬德寺는 지금의 백련사로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1232년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오상학)
전라좌도와 우도는 조선초기 태조 때 나누어 졌는데,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 의하면 전라우도는 전주 익산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만경 임피 금구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나주 장성 영암 영광 함평 고창 무장 무안 진도 강진 해남 제주 대정 정의의 32개 고을이었다. 지도에는 제주, 정의, 대정이 빠져 있고 강진은 전라좌도로 속해 있다. 대부분이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서해안에는 많은 섬들도 그려져 있다. 해안선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비해 많이 왜곡되어 있는 편이다. 지도에 표현된 내용들을 보면 자연적 요소로서 지역을 대표하는 산과 하천이 필수 사항으로 그려져 있다. 인문적 요소로는 국방과 관련된 진보, 봉수, 산성 등이 그려져 있고, 창고·봉산 등의 경제적 요소도 수록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형성된 역원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문화적 요소도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지역의 명찰과 서원, 그리고 정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지도가 관찬 지도의 성격을 띠면서도 군사, 행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서원, 사찰, 누정 등의 문화경관을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대 지도문화의 다양성을 시사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오상학)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시 시내,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에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계룡산에 이른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공주의 전역을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따라서 읍치도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고 단지 감영 건물만 그려져 있다. 산지의 모습은 산줄기를 연결하에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물줄기도 지류까지 상세하게 그렸으나 위계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읍치에서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그렸는데 홍선은 대로, 청선은 소로를 나타낸다. 지도의 외곽으로 고을의 경계선을 그린 점이 이채롭다. 봉수도 상세한데 붉은 직선으로 조응관계를 표시하였다. 읍치의 금강가의 雙樹山城은 곧 公山城을 말하는데,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쌓은 후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역원의 표시도 상세하다. 半灘面에는 利仁道가 그려져 있는데, 인근 9개의 역을 관할하는 찰방역이었다. 지도의 여백에는 인구, 토지, 재정, 군사, 교통과 관련된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관내의 면의 초경과 종경을 표기하였다. 특히 嶺阨 항목에는 험준 여부와 향하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車嶺의 경우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나 수목이 울창하여 내포의 여러 고을로 통하는 길목의 요충지라 기술하고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은하면, 구항면, 광천읍, 서부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결성면 읍내리 부근에 있었다. 지도는 산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에는 둘레 3,325尺8寸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현재에도 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縣內面에는 神衿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흙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1,350척이라 한다. 그 옆의 海門驛은 1415년(태종 15)에 설치된 것이다. 고을 남쪽에 있는 烏栖山은 명산으로 신라 때 中祀에 등재했던 산이다. 고을의 동남쪽 廣川面에는 廣川院이 보인다.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광천은 조수의 영향으로 배가 드나들 수 있었는데, 지도의 광천원(지금의 광천읍 옹암리)까지 배가 들어 왔다고 한다. 이 지역은 현재에도 새우젓으로 명성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도에 제언의 표시가 자세한 것이 특징적이다. 서쪽의 하구에는 防船所도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1척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封山도 5군데 있었는데 읍치 동쪽의 加次面에 4곳이 있었다. (오상학)
방격을 사용하여 충청도 고을의 모습을 그린 일종의 인덱스 지도이다. 지도 모퉁이의 기록에 의하면 남북 330리, 동서 560리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격자 하나의 실제 거리는 10리에 해당한다.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나오기 이전 유형을 따르고 있다. 충청도 관내의 고을을 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여 채색했으며 고을의 경계선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越境地를 본 고을과 같은 색채로 그렸다. 해안의 섬들도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데, 바다에는 파도무늬를 정교하게 그린 점이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산계보다는 수계를 중심으로 그렸는데 산계를 그리게 되면 지도의 내용이 복잡하여 각 군현의 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지는 개별 산만을 모식적으로 그린 정도에서 그쳤다. 군현에 수록된 내용은 군현명과 서울로부터의 일정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홍선으로 표시하고 중요 역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지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봉수망이다. 해안으로부터 내륙에 연결되는 봉수를 상세히 그렸고, 조응관계를 도로망과 구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民戶, 田畓, 군사에 관한 내용과 烽燧路·左道·右道·五鎭營·五驛·五鎭浦·五倉 등이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충청도의 형세를 한눈에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한 지도로 평가된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평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가 확대되어 크게 그려졌다. 관아 건물도 그려졌는데 兩翼 형태의 객사가 衙舍로 잘못 그려져 있다. 다른 고을의 지도에 비해 산천의 표현이 다소 독특한데 몰골법을 사용하여 원근을 표현하기도 했다. 고을의 동남쪽 齋月臺에는 孤山亭이라는 정자가 그려져 있다. 고산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여 1596년(선조 29)에 처음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 정자를 萬松亭이라고 불렀으나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의 이름을 고산정으로 바꾸었다. 고을의 동쪽을 돌아흐르는 槐江에는 연풍으로 가는 길목에 槐灘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데 비가 오면 다리를 놓아 건너갔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에 해당하여 여러 산성들이 축조되기도 했다. 작성산을 비롯하여 북쪽의 黑城山에도 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은 성이1,571척이고 성안에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고을에 가뭄이 들 때 이 못에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읍내면의 延春驛 근처에는 伏龜亭酒幕, 그 동쪽에는 石橋酒幕, 西面의 升天酒幕이 표시되어 있다. 이 시기 사람의 왕래가 증가하면서 대로변에 酒幕이 형성되던 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읍치 북쪽에 尉禮山이 보이는데, 이곳에 尉禮城이 있었다. 위례성은 그 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 초기 도읍지로서 부정된 바 있으나 최근에 와서 많은 유물의 발견으로 재조명되고 있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그러나 고을의 主山은 黑城山으로 읍치 바로 북쪽에 그려져 있다. 읍치 공간을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확대하여 그렸는데, 아사·객사 등의 건물뿐만 아니라 武學堂·司馬所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사마소는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조직한 기관으로 여기서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함과 아울러, 노비를 두어 곡식을 대부하여 늘이는 일들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세력이 강하여 서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인조 때 폐지했다. 그러나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일부 고을에서는 계속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흑성산·세성산 등에서 보이는 청색의 둥그런 원은 산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고을에서는 흑성산성·세성산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이었다.(오상학)
봉화현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명호면과 상운면의 북·동부, 물야면의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의 애당리·석현리 등에 해당된다. 읍치는 봉성군 봉성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봉화읍 대부분은 원래 안동의 越境地였다. 봉화의 북쪽으로는 영천·안동·순흥·봉화의 영역과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도에도 이 네 고을의 이름이 복잡하게 적혀 있다. 지도 서북쪽의 勿也面은 현재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일대이며, 勿也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 위쪽의 上東面은 현재 춘양면 애당리·석현리 일대에 있었던 봉화의 越境地였다. 이곳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太白山史庫가 있었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사고 안에는 조선 왕실의 계보를 보관한 璿源閣과 實錄을 보관한 實錄閣이 표시되어 있다. 그 밑에는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覺華寺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왕실의 棺槨에 사용할 黃腸木의 생산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보이고 있다. 읍치 동남쪽의 榮川地는 현재의 명화면 고감리 일대에 있었던 영천의 월경지였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金輪峯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도에 보이는 향교는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상의 하천은 오른쪽이 낙동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왼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의 최상류이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文巖書院은 李滉(1501-1570)과 제자 趙穆(1524-1606)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아울러 본관이 봉화이면서, 고려 고종 때 높은 벼슬을 지냈던 琴儀(1153-1230) 등을 배향한 文溪里社와 盤泉里社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비안현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구천면·안계면과 쌍호리·월소리·신수리를 제외한 안사면, 신평면의 검곡리·교안리, 안평면의 금곡리·하평리 일대이다. 읍치는 비안면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에 있는 城隍山이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비안현은 원래 세종 3년(1421)에 比屋縣과 安貞縣을 합해 安比라고 부르다가, 같은 왕 5년(1432)에 읍치를 현재의 위치인 비옥현으로 옮기면서 比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定’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모두 안정현에, 나머지 지역은 비옥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鄕校가 安貞倉 근처에 있는데, 읍치는 옮겼지만 향교는 그대로 과거의 읍치에 남았던 결과로 보인다. 향교가 있었던 곳은 현재의 안계면 교촌리로서, 이곳이 과거 안정현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실재로는 군위와 의성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상주로 흘러 나가는데, 하류가 오히려 얇게 표시되어 있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하천의 명칭이 前川·後川으로 되어 있어, 읍치를 중심으로 붙여졌으며 구간마다 명칭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산세가 ≪嶺南地圖≫ 내의 다른 고을 지도와 달리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왼쪽의 龜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인 것으로 추정되는 朴瑞生 등의 다섯 사람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기타 읍치 오른쪽의 望北亭은 본관이 이 고을인 比安 朴氏의 정자였다고 하며, 다른 부분은 ≪嶺南地圖≫의 일반적인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기봉)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우곡면의 연리·월오리·도진리 서쪽, 개진면의 구곡리 서쪽, 성산면의 사부리, 덕곡면의 후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耳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이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에서는 회천과 안림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령현은 4-6세기 가야연맹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대가야 지역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대가야는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지도에는 梅林祠·道巖祠·靈淵祠·文淵祠 등 4개의 ''祠''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江倉은 이 고을의 稅米와 大同米를 운반하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이기봉)
거창부는 거창군 거창읍·남상면·남하면·가조면·가북면·주상면·웅양면·고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8리에 있었다는 乾興山이다. 거창부는 지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이 황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그 지류인 가천천이다. 가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加祚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면의 이름 중 ‘加’자가 붙은 곳은 모두 이 가조현의 지역이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3壇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지내던 厲壇,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城隍壇, 곡식신과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社稷壇, 孔子를 비롯한 유교의 聖賢에게 제사지내던 文廟(향교의 대성전)가 그것이다. 지도에는 3壇의 위치에 제단 모양의 표시를 하여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다만 서쪽에 있었던 社稷壇에는 제단 표시만 있고, 명칭은 기재되지 않았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적황색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는데, 이 고을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기에는 고개의 험한 정도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道山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金宏弼(1454-1504)과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현종 1년(1660)에 세워지고, 같은 왕 3년(1662)에 사액 받았다. 浣溪書院은 金湜(1482-1520)을 배향하여 현종 5년(1664)에 세워지고, 숙종 6년(1680)에 사액 받았다. 褒忠祠는 李逑源을 배향하여 영조 13년(1737)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이 중 포충사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포충사에 배향된 이구원은 鄕所의 座首에 불과했는데,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기 때문에 大司憲으로 추증되었다.(이기봉)
양산군은 지금의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전체, 부산광역시 북구 전체와 강서구의 대저1·2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산시 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고을 동쪽 5리에 있었다’는 城隍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와 향교의 이름이 북-남이 아니라 동-서를 향하고 있는데, 읍치가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해 있었던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 전체적으로 보아 아래쪽이 지나치게 확대·왜곡되어 있다. 勿禁津이라 표시된 곳이 낙동강 본류인데, 실재로는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도 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大渚島와 주변의 섬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대저도에 있는 七點山도 높은 산지가 아니라 낙동강 하구의 三角洲 평지에 있는 작은 둔덕이다. 七點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평지에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강하게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도에도 과장되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어업과 염업 등이 성행했던 곳이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지도 왼쪽 위에는 伽倻津祭壇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黃山江으로 불리기도 하며, 신라에서는 동서남북의 하천 신에게 제사지내던 四大瀆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금강인 공주의 웅진과 함께 南瀆으로 여겨져 中祀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그 아래의 勿禁味棧道는 한성-동래의 大路가 지나가던 곳으로 벼랑길이 있는 곳이다. 黃山驛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고, 1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오른쪽의 松潭書院은 숙종 22년(1696)에 세워지고, 같은 왕 43년(1717)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낮은 벼슬의 사람이 배향되었음에도 賜額 받은 사연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와 광해군의 廢母論 通文을 찢어버렸고, 그 때문에 인조반정 후 自如察訪을 지내고 사후 戶曹參議로 추증된 白受繪(1574-1642)를 배향하였다. 사찰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 글씨가 잘 안 보이는 사찰이 通度寺인데,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慈裝律師가 창건하여 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후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졌다. 현재도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기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2군데 보이고 있다.(이기봉)
강릉부는 강릉시 전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정선군의 임계면, 홍천군의 내면, 묵호항을 포함한 북쪽의 동해시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아래쪽 바닷가의 鄕校 근처이다. 고을의 鎭山은 특이하게도 구체적인 산이 아니라 大關嶺이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오른쪽(북)에서 왼쪽(남)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南大川을 비롯한 백두대간 아래쪽(동)의 하천은 모두 동해로 흘러간다. 백두대간 위쪽에는 남한강 상류가 왼쪽에 표시되어 있고, 북한강의 지류인 내린천 상류가 오른쪽에 보이고 있다. 전자의 지역은 현재 평창군 대부분과 정선군 임계면에 해당되며, 후자의 지역은 홍천군 내면이다. 백두대간 위에는 대관령을 비롯한 주요 고개가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고, 도로 곁에는 곳곳에 驛이 보이고 있다. 해안가에는 바닷물의 작용에 의해 입구가 막혀 형성된 潟湖가 3군데(楓湖·浦·香湖) 보이고 있다. 이 중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鏡浦臺 아래쪽의 ‘浦’는 현재의 경포호를 의미하며, 풍호는 현재 메워져 버렸다. 지도 중간의 五臺山 밑에는 신라 때의 고찰로 유명한 上院寺와 月精寺가 보이고 있다. 아울러 5대 史庫 중의 하나였던 五臺山史庫도 2층의 樓閣 형태로 그려 놓았다. 書院은 2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고을이 外家인 李珥(1536-1584)를 배향한 松潭書院만이 현종 7년(1666)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주기에는 黃腸山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이기봉)
괴산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괴산읍·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전체와 감물면 오창리, 불정면 신흥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2리에 있었다’는 錦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로 오는 산줄기가 서쪽에서 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관념 속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을이 마치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울러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내부로 뻗은 산줄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지도 아래쪽을 흐르는 하천이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 상류이다. 달천강은 남쪽의 청주경계로부터 흘러들어 옴에도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왼쪽이 성황천, 오른쪽이 동진천이다. 읍치 주변을 강조하다보니까 달천강 본류와 그 지류들의 크기가 별로 다르지 않게 그려져 있다. 달천강에 있는 ‘梨灘’은 우리말로 ‘배나무여울’이다. 그 왼쪽에 약간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槐江津’인데, 달천강 수운에서 배가 운행되는 최상류 부분이었다. 그 근처에 ‘槐灘’이 있었는데, 우리말로는 ‘느티여울’이라고 한다. 괴강진에 강을 건너기 위한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음이 뒤쪽의 주기에 표시되어 있다. 괴강진은 나루 이름임과 동시에 해당구간의 달천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기타 인문적 정보로는 서원과 사찰·면의 이름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는데, 지도 왼쪽 위에는 面의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사각형도 보이고 있다.(이기봉)
길주목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길주군·학성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길주군·김책시와 화대군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길주군 길주읍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오른쪽에 邑이 있는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고려 예종 2년(1107)에 尹瓘(?-1111)과 吳延寵(1055-1116)이 17만의 군사로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동북 9성 중의 하나이다. 이후 곧바로 여진족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며, 공민왕(1352-1374) 때에 다시 고려의 영토로 되었다. 지도에는 방향의 표시가 잘못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는 북쪽을 의미하는 ‘子’가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동쪽에 해당된다. 卯(동쪽)·午(남쪽)·酉(서쪽)도 모두 약 90˚씩 좌측으로 회전하면 실제에 합당하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것은 이 지도가 지지에 바탕을 두고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 위의 주기 부분에 있는 相距里數에는 ‘북쪽으로 明川界에 이르기까지 15리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명천으로 가는 길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地境峙인데, 실재로는 동북쪽에 있지만 북쪽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북쪽인 ‘子’는 지경치의 왼쪽 방향에 있어야 함에도 오른쪽에 기입함으로써 전체적인 방위가 틀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오류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輿地圖書≫의 길주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海東地圖≫의 길주목 지도에는 방향이 대체적으로 합당하게 그려져 있다. 두만강·압록강 변으로 향하는 요지에 있기 때문에 군사시설과 고개 등에 대한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읍치 왼쪽 방향에는 西北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원래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堡였지만 현종 14년(1673)에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鎭으로 승격되었다.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6년(1614)에 새로 설치되었으며, 일제시대에 성진시(현재는 김책시)의 중심이 되었던 城津鎭이 표시되어 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며, 국방의 강화에 더 많은 신경을 썼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주요 고개에는 붉은 색 원을 표시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으며, 수많은 봉수도 모두 기입하였다. 도로는 붉은 색과 노란 색 실선으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는데, 붉은 색이 더 중요한 도로였다. 이 밖에 ‘○○社’라는 지명이 자주 나오는데, 다른 지방에서 사용했던 ‘坊’ 또는 ‘面’에 대한 함경도 지방에서의 異稱이다.(이기봉)
정평부는 일제시대의 정평군이며, 지금은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의 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정평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鼻白山이다. 지도에는 客舍·衙舍·邑倉 등이 표시된 곳이 읍치이며, 이중의 산줄기가 環抱型으로 둘러싸인 풍수적 명당 관념을 반영하도록 그렸다. 읍치 왼쪽을 지나는 길에는 남쪽의 영흥과 북쪽의 함흥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大路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한양-경흥을 잇는 大路를 의미한다. 대로에는 客館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草原驛을 의미하며,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客)가 잠시 머무는 곳(館)’이라는 의미에서 客館이라 표시한 것이다. 도로에는 站도 보이고 있는데, 선조 30년(1597)부터 변방이나 한양으로부터 급한 일이 생겼을 경우 말을 타거나 사람이 직접 달려 소식을 전하는 擺撥制度가 운용되었다. 騎撥의 경우 25리마다, 步撥의 경우 30리마다 1站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한양-경흥을 잇는 대로에는 총 64개의 站이 설치하였다. 고을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낭림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 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모여 고을 남쪽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 하천이 지금의 금진강이며, 지도에는 長溪川이라 적혀 있다. 읍치 왼쪽에는 廣浦가 표시되어 있는데, 큰 호수이다. 서쪽의 급경사에서 발원한 하천이 동해의 깊은 바다와 만나면서 형성된 潟湖로 추정된다. 기타 지도에는 ‘○○社’가 자주 보이는데, 다른 지역에서 사용된 ‘坊’이나 ‘面’에 대한 함경도만의 異稱이다.(이기봉)
덕원부는 일제시대의 문천군 덕원면과 성북면, 원산시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원산시와 문천시의 남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원산시 세길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客舍·鄕校 등이 표시된 곳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모습이 ≪輿地圖書≫에 수록된 德源府地圖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쪽의 盤龍山으로부터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특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는데, 전통시대의 군현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방식이다. 반룡산 위쪽에 좀이 먹은 산 이름은 束高山이다. 문천과의 경계선에 있으며, 고을 내부의 산과 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다. 이렇게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의 색을 달리하는 것은 ≪咸鏡道全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현재의 원산시 중심부인 元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번창했던 포구였다. 그 아래쪽에 溟鎭이라 표시된 곳은 ‘明沙十里’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튀어나간 곳은 현재 갈마반도라고 한다. 그 끝에 있는 連島라는 섬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섬이었지만, 수많은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된 곳이다. 그 아래쪽의 竹島는 몽골의 침입 때 주변 12개 城의 백성들이 피난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의 침입 때 내륙의 상당 수 고을이 섬으로 피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도의 현재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작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격의 고을 이름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租 李安社가 삼척으로부터 옮겨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에 좀이 먹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湧珠里舊基’가 표시되어 있는데, 목조 이안사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그 아래쪽의 ‘康氏陵’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神德王后 康氏의 무덤이다. 지도 맨 오른쪽에는 함경도에서 보기 드물게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龍津書院으로서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여 숙종 21년(1695)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경흥부는 일제시대의 웅기읍을 제외한 경흥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은덕군의 동쪽부분과 라선시의 동쪽부분 일대이다. 읍치는 은덕군 사회리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장 큰 성곽이 있는 곳이다. 원래 경흥 고을이 신설되기 이전에는 경원부의 읍치였다. 경원부의 읍치가 더 북쪽의 새별군 성내리 지역으로 옮기고, 경흥군이 독자적인 고을로 신설되면서 읍치로서 확정되었다. 읍치 이외에도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撫夷堡·造山堡·阿吾地堡와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西水羅堡가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두만강 변에는 오늘날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把’라는 명칭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된 성곽의 크기는 실제의 규모를 상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 李安社가 삼척으로부터 함경남도의 덕원으로 옮겼다가, 또 다시 옮겨 살았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陵과 安陵이 바로 목조 이안사와 그의 부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이다. 그러나 지도 제작 당시에는 이미 함경남도 함흥으로 옮겨간 상태이기 때문에 ‘古’자가 붙어 있어야 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도의 전반적인 윤곽이 같은 ≪海東地圖≫ 내의 慶興府 지도에 古陵이라고 표시한 것과 대조된다. 지도 아래쪽의 赤島는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가 여진족의 추격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읍치 바로 아래쪽의 赤池는 이성계의 祖父인 度祖 李椿이 용을 쏘아 붉은 피로 물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王業이 흥했다는 의미의 慶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고, 세종 25년(1443)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두만강 동쪽(卯)에는 胡地(오랑캐땅)라고 표시하여 여진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기록에 자주 나오는 八池의 모습도 여덟 개의 호수를 그려 넣었다. 두만강 하구는 상류의 급경사지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만들어낸 광범위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울러 호수와 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두만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섬은 鹿屯島로서, 현재의 크기보다는 좀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이곳의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규모를 추적하기는 어렵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히 표시된 ‘社’(남쪽 지방에서의 坊·面에 해당)가 전혀 보이고 있지 않은 점, 지도 위쪽에 普賢寺가 특별히 표시된 점이 특이하다.(이기봉)
본 지도에는 咸鏡道地圖라는 명칭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세 개의 지도를 합한 ≪咸鏡道全圖≫의 5책 표지에 北關地圖라는 명칭만 적혀 있을 뿐이다. 함경도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함경남도와 강원도 통천군 학일면·흡곡면에 해당되는데, 당시에 장진군에는 고을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현재는 함경북도·함경남도, 김형직군을 제외한 량강도, 자강도의 랑림군, 고산군·안변군·법동군·통천군 시중대 이북의 강원도로 나누어졌다. 咸鏡道라는 명칭은 咸興과 鏡城 고을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때로는 永安道(永興, 安邊)·永吉道(永興+吉州)·咸吉道(咸興+吉州) 등으로 불린 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함경도라고 불렸다. 이외에도 함경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北關·關北 등이 있다. 함경도는 고려 예종 7년(1107)에 尹瓘(?-1111)이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東北九城을 쌓으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 동북구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이후 상당수를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면서 현재의 정평군과 함주군 사이를 북쪽 경계로 삼았다. 이후 철령 이북의 땅이 元에 속하였다가 공민왕(1351-1374) 때 다시 수복하였고, 조선의 개국 시에는 현재의 삼수군-갑산군-경성 부근까지 영토로 편입되었다. 세종 때에 東北六鎭(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이 설치되면서 두만강을 동북쪽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후 茂山府가 숙종 10년(1684)에, 長津府가 정조 11년(1787)에는 설치되면서 후대의 함경도가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본 지도에는 무산부는 보이고 있지만 장진부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조 11년(1787) 이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2품의 觀察使가 파견된 監營은 함흥에 있었다. 종2품의 兵馬節度使는 3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하였다. 그리고 南道兵馬節度使營은 北靑에, 北道兵馬節度使營은 鏡城에 설치되어 있었다. 본 지도에는 함경도의 고을이 붉은색과 남색의 원으로 나누어져 표시되어 있는데, 전자는 남도병마절도사영에, 후자는 북도병마절도사영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을 통해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붉은색·노란색의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변에 있는 역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된 경우 세로의 노란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찰방역인 草原譯은 高山道, 谷口驛은 居山道, 輸城驛은 輸城道라고도 불렸다. 그렇지 않은 역은 노란색 원과 站이란 명칭으로 표시하였으며, 高山道·居山道 명칭의 유래가 된 高山·居山만은 館으로 표시되어 있다. 노란색의 세로로 긴 사각형 안에 이름만 적혀 있는 것은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鎭堡이다. 왼쪽 위의 압록강과 오른쪽의 두만강 변, 이곳으로부터 남쪽·동남쪽으로 향하는 요충지에 진보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분수계이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산줄기는 짙은 남색으로 표시하여 강조하였다. 기타 백두산과 현재 天池라고 불리는 大澤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음을 통해 지도 작성 당시에 상당히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海東地圖≫·≪輿地圖書≫ 내의 함경도 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東西南北을 子卯酉午라는 干支로 표시하였으며, 이 지도를 통해서는 방향 표시의 기점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이기봉)
송화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연정면·연방면·봉래면·도원면·장양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송화군과 삼천군의 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송화군 송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5리에 있었다’는 墨山이다. 이 고을은 태종 8년(1408)에 靑松縣과 嘉禾縣을 합해 하나로 만들었으며, 각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서 松禾縣이 되었다. 지도 위의 읍치는 청송현 지역에 속하였으며, 가화현의 중심지는 長陽面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크게 두 개의 유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두 개의 고을이 합해져 만들어진 역사적 측면과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청송현과 가화현 지역의 산줄기를 각각 중심에서 바라보이는 형태로 그려, 두 고을이 나누어져 있었던 과거의 역사성을 담아내고 있다. 읍치와 주기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지도의 방향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먼저 읍치를 중심으로 지도를 그린 후, 주기를 적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읍치는 북쪽(지도에서는 아래쪽)을 향하도록 그려져 있는데, 중요 산줄기가 북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을의 전체적인 모양이 서북쪽의 읍치 지역과 동남쪽의 옛 가화현 지역이 서로 연결된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다. 전통적인 회화식 군현지도에서는 고을의 형태를 사각형의 종이에 맞추기 위해 실제 모양과 다르게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도에는 面, 주기에는 坊으로 표시한 것도 눈에 띈다. 지도 작성자와 주기 작성자가 틀렸거나, 참고 자료가 틀렸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읍치 왼쪽의 道東書院은 朱子(1130-1200)·趙光祖(1482-1519)·李滉(1501-1570)·李珥(1536-1584)를 배향하여 숙종(1675-1720) 때 賜額 받은 서원이다. 성리학의 창시자, 조선 초기 士林 세력의 대표자, 主氣論과 主理論의 대표자를 함께 배향했음이 이채롭다. 기타 도로는 주황색·노란색·남색의 순서로 중요성을 구분하였다.(이기봉)
금천군은 토산면·서천면·합탄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황해도 금천군과 경기도 장단군의 소남면·대남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북도 남쪽 일부를 제외한 금천군과 토산군 서쪽, 황해남도 봉천군 동쪽 일부와 개성직할시 장풍군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금천군 금천읍에 있었다. 이 고을은 효종 3년(1652)에 江陰縣과 牛峯縣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읍치는 강음의 金郊 북쪽, 우봉의 烏助川 남쪽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이다. 또한 금교의 ‘金’과 오조천의 ‘川’를 따서 ‘金川’이라는 고을 명칭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고을을 합칠 때 각 고을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도를 보면 읍치를 중심으로 거의 둘로 나누어진 고을의 형세를 볼 수 있다. 왼쪽이 강음현의 땅이었고, 오른쪽이 우봉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江陰舊基와 牛峯舊基가 붉은색의 타원형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金郊驛舊基는 검은색의 타원형으로 그려, 고을 터와의 구별을 쉽게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이 금교역에 종6품의 丞을 파견하여 10개의 속역을 거느리게 했지만, 이후 폐지되고 平山의 寶山으로 옮겨갔다. 고을 한가운데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하천이 예성강본류이다. 지류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어 혼란을 주고 있으며, 오른쪽의 小南面 지역은 임진강의 지류인 사미천 상류이다. 예성강에는 猪灘·龍津·馬灘·岐灘·廣灘·助邑浦·栗浦·潭靑浦 등 여울(灘)과 津渡·浦口 등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읍포는 조선 초기에 水站을 설치하여, 황해도 12개 고을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운반하던 곳이다. 조선후기에는 각 고을이 책임지고 운반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驛站을 의미하는 撥所는 붉은색의 원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지도 위쪽에 표시된 붉은색의 원은 발소가 아니라 글씨로 유명한 石峰 韓濩(1543-1605)의 묘소이다. 오른쪽 小南面에는 益齋 李齊賢(1287-1367)의 묘소와 그를 배향하여 숙종 때 賜額 받은 道山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그 왼쪽에는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白峙鎭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 밖에 烽燧는 호응관계를 붉은색의 직선으로 나타내고 있다.(이기봉)
고창현은 지금의 고창군 고창읍, 고수면, 아산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창읍 읍내리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부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정읍, 아래로는 영암과 연결된다. 지도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흡사 꽃이 피는 모습으로 산지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도 잘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보통의 고을과는 달리 산사면에 위치해 있어 방어적 기능이 강조되어 있다. 일명 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과거 고창의 지명이 牟陽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주위가 561把이고 방어를 위한 曲城이 9, 女堞이 538곳이라 했는데 고창 읍성이 지니는 방어적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읍성 안에는 동헌·객사뿐만 아니라 鄕廳, 刑房廳, 鍊武廳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현재에도 이곳에 관청 건물들이 복원되어 남아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古城峰이 있는데 이는 西山城을 말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성은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2리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을 남쪽의 鷲嶺山 자락에는 文殊寺가 그려져 있는데 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643년(의자왕 3년)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오상학))
금구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구면 금구리 일대에 있었다. 전주와 김제 사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산지, 서쪽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鳳頭山인데 산의 모양이 봉황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術家들이 掘禪山에 開桐寺를 세워 날고 움직이는 기세를 눌렀다고 한다. 지도에도 봉두산의 아래쪽에 개동암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쪽에 있는 母岳山은 이 지역에서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에 있는 金山寺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眞表律師가 중건하여 5교의 하나인 法相宗의 도량이 되었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후백제 견훤이 창건한 것이라 전하고 있고, 아들 神劍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가두었던 곳이라 한다. 지도에도 여러 건물과 울창한 수목을 그려 당시에도 번성했던 사찰임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에는 사액서원인 九成書院과 미사액 서원으로 六松鄕賢이 그려져 있는데 六松祠는 현재 금산면 삼봉리에 남아 있다.(오상학)
광양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에 해당하며 읍치는 광양읍 읍내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섬진강이 감싸도는 풍광이 수려한 고을로 땅은 남해에서 끝나고 산은 지리산을 연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맥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환포형으로 그려지지 않고 봉우리가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쪽에는 蟾津鎭과 船所 등의 군사기지가 들어서 있다. 섬진진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었던 鎭이다. 섬진강 하류 영남과 호남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서 1603년(선조 36)에 통영에서 都廳을 설치하고 募軍을 두었다. 그 후 1705년(숙종 31)에 전라도 巡使 閔鎭遠과 巡撫使 權尙游, 統制使 吳重周 등이 이곳이 국방의 요충지가 됨을 장계하여 진을 설치하고, 종8품의 別將을 두어 통영에서 관할케 하였다. 지도 상단에는 고을의 여러 封山이 기재되어 있는데, 해안에 위치한 고을의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 船材를 공급하는 봉산이었다.특히 고을에 산재해 있는 사찰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읍치의 북쪽에는 우리 나라 풍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道詵이 기거했던 玉龍寺가 그려져 있다.(오상학))
무장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서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으로 고창, 남쪽으로는 영광에 이어진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진 고을이다. 읍치에는 원형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주위가 754把였다.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전한다. 동북쪽의 兜率山에는 이 지역의 대찰인 禪雲寺가 여러 암자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선운사는 금산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전북도내 2대 본사로서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이 절은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는 한 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 정책를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향교 근처에는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액서원인 忠賢祠가 그려져 있다. 忠賢祠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진 서원으로≪眉岩日記≫로 알려진 柳希春 등이 배향되었다.(오상학)
영암군은 지금의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서면, 덕진면, 도포면, 미암면, 삼호면, 서호면, 시종면 서부, 신북면, 학산면과 해남군 북평면, 송지면, 옥천면, 북제주군 추자면 그리고 완도군 노화읍, 보길면, 소안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남풍리 일대에 있었다. 영암은 남쪽으로 월출산이 포진하여 있고, 위로는 영산강 유역의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고을이다. 전체적으로 지역의 모습이 단일한 시점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호남의 금강으로 일컬어지는 月出山에는 기암괴석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산 남쪽 기슭에 그려져 있는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이기도 하다. 정자는 公亭子뿐만 아니라 私亭子도 많이 있었는데 서종면에 있는 會社亭은 주인이 개인이 아닌 鳩林大同契였다. 구림대동계는 향약 정신의 구현을 통해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으로 다소 침체되었으나 이후 활성화되어 호남의 대표적인 마을계로서 이어져 왔다. 해안에는 군사기지도 볼 수 있는데, 고을의 남쪽 끝에는 梨津鎭이 그려져 있다. 최초 1597년에 진을 설치하여 權管을 두었다가 1627년(인조 5)에 수군 만호진으로 승격시켰다. 이곳은 삼남대로의 끝 지점으로 제주가는 배가 떠나던 포구이기도 했다. 서남쪽의 於蘭鎭은 영암의 월경지로 해남현 너머 해안에 위치한수군 만호진이었다.(오상학)
광주목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와 담양군 대전면과 담양군 수북면 일부, 신안군 하의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읍치는 옛 성내면 지역으로 지금의 광주시 동구 광산동, 궁동, 금남로, 장동, 충장로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단일한 시점으로 지역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특히 이 지역 최고의 명산인 무등산의 기암괴석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수려한 경치의 舍人岩, 持平岩도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둘레는 1,401把였다. 읍치 동편에 위치한 景陽驛은 여섯 개의 屬驛을 거니린 察訪驛이었는데 지도에도 여러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다. 광주는 양반들이 세거했던 큰 고을이어서 많은 서원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가운데 포충사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했던 서원이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도 남아 있었다. 石保面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개인 亭子인 環碧堂이 그려져 있다. 환벽당은 沙村 金允悌( 1501 1572)가 세운 別墅亭子로, 그는 말년에 낙향해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당시 주인이 幼學 鄭桓으로 되어 있다. 무등산으로 향하는 길목의 초입에 위치한 證心寺는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 도윤(798 868)이 세운절로 고려 때 혜조국사가, 조선조 때 김방이 새로 지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1609년에 석경, 수장, 도광 등 세 선사가 다시 중수하였다.(오상학)
조선왕조 초기 팔도의 도제가 생기면서 좌도 우도의 구분이 생겼다. 당시 좌도와 우도를 나눈 뚜렷한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전라좌도는 남원 담양 순창 용담 창평 임실 무주 곡성 진안 옥과 운봉 장수 광주 장흥 남평 순천 낙안 보성 능주 광양 구례 흥양 동복 화순 24개 고을이다. 그러나 지도에는 강진이 좌도로 그려져 있다. 전라좌도는 주로 전라도의 동부 산간지대와 남부 해안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끝에 위치한 전라좌수영과 강진에 위치한 병영은 성곽의 표시와 함께 강조되어 있다. 지도는 이 지역의 큰 고을이었던 남원이 一新縣으로 강등되어 있을 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남원부는 1739년(영조 15) 일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복구되었다. 따라서 지도는 최소한 174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하한시기를 명확히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전통시대 지도제작에서는 과거의 상황이 수정되지 않고 후대에도 그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좌도는 동쪽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접하고 있고 지리산으로 백두대간의 맥이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산지의 險夷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지도 서쪽에는 우도와의 경계를 실제 선으로 그려 흡사 해안처럼 그린 점은 이 지도의 가장 큰 오류로 볼 수 있다.(오상학)
조선시대 공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시 시내, 유구읍, 신풍면, 정안면, 사곡면, 우성면, 의당면, 장기면, 반포면, 계룡면, 이인면, 탄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백제의 古都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에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계룡산에 이른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공주의 전역을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따라서 읍치도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고 단지 감영 건물만 그려져 있다. 산지의 모습은 산줄기를 연결하에 그려 맥세를 강조하였고 물줄기도 지류까지 상세하게 그렸으나 위계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읍치에서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그렸는데 홍선은 대로, 청선은 소로를 나타낸다. 지도의 외곽으로 고을의 경계선을 그린 점이 이채롭다. 봉수도 상세한데 붉은 직선으로 조응관계를 표시하였다. 읍치의 금강가의 雙樹山城은 곧 公山城을 말하는데, 523년(백제 성왕 1)에 웅진성으로 쌓은 후 1603년(선조 36)에 수축하였다. 역원의 표시도 상세하다. 半灘面에는 利仁道가 그려져 있는데, 인근 9개의 역을 관할하는 찰방역이었다. 지도의 여백에는 인구, 토지, 재정, 군사, 교통과 관련된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관내의 면의 초경과 종경을 표기하였다. 특히 嶺阨 항목에는 험준 여부와 향하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車嶺의 경우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나 수목이 울창하여 내포의 여러 고을로 통하는 길목의 요충지라 기술하고 있다.(오상학)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읍치는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고을의 북동쪽은 이 지역의 명산인 聖住山이 있는데 계곡의 풍광이 수려하여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양질의 벼루돌 생산지이기도 하다. 근처에 聖住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당시는 터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撰한 朗慧和尙塔碑와 탑이 남아 있는데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深田面에는 이 고을의 고적인 撲坪所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의 馬梁鎭은 터로 남아 있는데 相臣 李尙眞이 효종 때 배를 대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啓達하여 庇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宜松山도 네 곳이나 있어서 재목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을이다. 고을 서쪽의 船所에는 防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오상학)
방격을 사용하여 충청도 고을의 모습을 그린 일종의 인덱스 지도이다. 지도 모퉁이의 기록에 의하면 남북 330리, 동서 560리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격자 하나의 실제 거리는 10리에 해당한다.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나오기 이전 유형을 따르고 있다. 충청도 관내의 고을을 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여 채색했으며 고을의 경계선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越境地를 본 고을과 같은 색채로 그렸다. 해안의 섬들도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데, 바다에는 파도무늬를 정교하게 그린 점이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산계보다는 수계를 중심으로 그렸는데 산계를 그리게 되면 지도의 내용이 복잡하여 각 군현의 형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산지는 개별 산만을 모식적으로 그린 정도에서 그쳤다. 군현에 수록된 내용은 군현명과 서울로부터의 일정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이와 더불어 각 군현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홍선으로 표시하고 중요 역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지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봉수망이다. 해안으로부터 내륙에 연결되는 봉수를 상세히 그렸고, 조응관계를 도로망과 구분하기 위해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지도의 여백에는 民戶, 田畓, 군사에 관한 내용과 烽燧路·左道·右道·五鎭營·五驛·五鎭浦·五倉 등이 기재되어 지도를 보완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충청도의 형세를 한눈에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한 지도로 평가된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불정면, 사리면, 문광면, 칠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읍 서부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사면,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연풍, 서로는 음성, 남으로는 청안, 북으로는 충주와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지역이 조령과 楡嶺의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비좁고 옹종스러우나 살기를 조금 벗었다고 평하고 있다. 지도에는 읍치가 확대되어 크게 그려졌다. 관아 건물도 그려졌는데 兩翼 형태의 객사가 衙舍로 잘못 그려져 있다. 다른 고을의 지도에 비해 산천의 표현이 다소 독특한데 몰골법을 사용하여 원근을 표현하기도 했다. 고을의 동남쪽 齋月臺에는 孤山亭이라는 정자가 그려져 있다. 고산정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여 1596년(선조 29)에 처음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 정자를 萬松亭이라고 불렀으나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의 이름을 고산정으로 바꾸었다. 고을의 동쪽을 돌아흐르는 槐江에는 연풍으로 가는 길목에 槐灘津이라는 나루터가 있는데 비가 오면 다리를 놓아 건너갔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일부 지역이 수몰되어 있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남쪽으로 荊江에 임하였고 산에 울창한 빛이 적으나 강을 임하여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하였다.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 고을의 주산이다. 이곳에는 신라 慈悲王 때 축조된 산성이 있었는데 성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고을 서쪽에 위치한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浚吉을 배향했다.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는 荊江津과 新灘津이 표시되어 있다. 신탄진에는 형강진과는 달리 私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신탄진은 현재 이 지역 교통의 결절로 급성장한 곳이다.(오상학)
목천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면, 북면, 병천면, 동면, 수신면, 성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목천면 서리 일원에 있었다. 목천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동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 북쪽은 직산, 남쪽은 전의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鵲城山이다. 그러나 고을의 主山은 黑城山으로 읍치 바로 북쪽에 그려져 있다. 읍치 공간을 주변 지역에 비해 크게 확대하여 그렸는데, 아사·객사 등의 건물뿐만 아니라 武學堂·司馬所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사마소는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조직한 기관으로 여기서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함과 아울러, 노비를 두어 곡식을 대부하여 늘이는 일들도 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세력이 강하여 서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폐단이 일어나자 인조 때 폐지했다. 그러나 지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일부 고을에서는 계속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의 道東書院은 1649년(인조 27)에 창건되어 1676년(숙종 2)에 사액되었는데, 朱子와 鄭逑·金馹孫·黃宗海 등을 배향했다. 흑성산·세성산 등에서 보이는 청색의 둥그런 원은 산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고을에서는 흑성산성·세성산성 등이 대표적인 산성이었다.(오상학)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과 화산면 전체,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죽곡리를 제외한 화남면, 화북면의 하송리·상송리·법화리·죽전리·옥계리·용소리와 동강리 서쪽의 와촌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花山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모두 금호강의 지류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왼쪽의 것은 고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西川으로, 오른쪽의 것은 慈乙阿川으로 나온다. 현재는 각각 신령천과 고현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과의 경계선이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특이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지도 아래쪽의 南面은 永川界를 넘어가 있는데, 지도에서의 표현과는 달리 실재로는 읍치가 있는 곳으로부터 행정경계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곳을 고을 경계를 넘어가 있는 땅이라고 하여 ''越境地''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현재 영천시 와촌면의 동강리 서쪽에 해당된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旨銀所가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곳이었으며, 조선 초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신령현의 면으로 재편되었다. 오른쪽의 知谷面·古縣面·新村面 지역도 영천과 경계선이 애매하게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 지역은 개의 위·아래 이빨이 서로의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하여 ''犬牙相入地''라고 불려졌다. 이 중 신촌면은 고려시대까지 新村部曲이 있었던 곳이며, 이지은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신령현에 완전히 통폐합되면서 面으로 재편되었다. 현재의 영천시 화북면 서쪽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원래 지도 오른쪽 아래의 古縣面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현 읍치로 옮겼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水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으로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위에 있는 環碧亭은 원래 객사 서쪽 10보 거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지도에서처럼 개울가 절벽에 만들어져 있으며, 현재도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편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書院은 아니다. 오른쪽의 白鶴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왼쪽의 龜川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탈환한 權應銖(1562-1608)를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졌다. 신라 때의 사찰인 修道寺와 佛窟寺도 표시되어 있다. 崇儒抑佛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에서도 민간신앙으로 꾸준하게 세를 유지하던 불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굴사에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보물 42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이기봉)
대구부는 대구광역시 북구의 서쪽과 동구·수성구의 동쪽을 제외한 대구광역시 시내 전체, 달성군의 하빈면·다사면·화원읍·옥포면·가창면, 청도군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중구 남성동·동성동·서성동 일대에 있었다. 이곳에는 지도에서 잘 보이는 것처럼 경상도관찰사영이 있었다. 이 監營은 세조 12년(1466)에 경주에서 옮겨왔다. 원래 이 고을의 한자 표기은 ‘大丘’였으나, 공자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丘’자를 피하기 위해 정조(1776-1800) 때부터 ‘大邱’로 바뀌게 되었다. 읍치 위쪽으로는 達城이 그려져 있는데, 천연적인 要塞地에 石築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달성공원으로 단장되어 보호되고 있다. 面의 이름에는 옛 고을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까지도 壽城縣·解顔縣·河濱縣이 이 고을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읍치 동쪽에 ‘守’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수성현, 동북쪽에 ‘解’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해안현, 서북쪽에 ‘河’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하빈현의 땅이었다. 서남쪽에 ‘花’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숙종(1675-1720)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花園縣의 땅이었으며, 남쪽에 ‘角’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현종(1660-1674)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豊角縣의 땅이었다. 고을의 서쪽을 흐르는 강이 낙동강 본류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있는 유명한 八公山이 아니라, 읍치 바로 아래쪽의 蓮龜山이다. 八公山은 신라시대에는 父岳으로 불렸으며, 5岳 중 中岳으로 비정되어 中祀를 지냈던 명산이다. 이곳에는 把溪寺·桐華寺·夫仁寺 등 신라시대의 유서 깊은 절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팔공산 아래는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중의 하나이다. 이 때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그 부하 申崇謙(?-927)과 金樂(?-927)이 대신 죽음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진 곳이다. 王山 밑에 있는 表忠書院은 신숭겸과 김락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0)에 세워지고, 숙종 13년(1687)에 사액 받았다. 硏經書院은 이황(1501-1570)·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사액받았다. 洛濱書院은 세조(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死六臣인 박팽년(1417-1456)·성삼문(1418-1456)·하위지(1387-1456)·이개(?-1456)·유성원(?-1456)·유응부(?-1456)를 배향하여 세워졌고,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이기봉)
영산현은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계성면·장마면·도천면·길곡면·부곡면과 남지읍 남지리·마산리·학계리·용산리·신전리·성사리·아지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靈鷲山이었다. 아래쪽 왼쪽에서 낙동강 본류와 그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여 오른쪽(동쪽)으로 빠져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많은 ‘津’이 보이고 있는데, 지역민들에게는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낙동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낙동강 너머 廣心亭이 있는 곳은 특이하게도 영산의 땅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 칠곡면 봉촌리의 낙동강변에 해당된다. 面의 이름에는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던 지역의 명칭이 일부 남아 있다. 계성면은 桂城縣이, 길곡면은 吉谷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는 德峯鄕賢祠와 道泉鄕賢祠가 보이고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모두 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祠와 書院이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개의 祠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하지도, 사액서원도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祠와 書院이 어느 정도 구별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겠다. 기타 곽재우의 別墅였다는 忘憂亭이 낙동강 변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남해현은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서변리·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望雲山(759m)이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입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섬 전체의 모습은 현재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아래쪽(동쪽)의 ‘晋州昌善牧場界’라고 쓰인 부분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곳은 현재의 남해군 창선도(창선면)로서 조선시대에는 진주의 越境地였다. 남해보다 훨씬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지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남해현은 남해-서해를 잇는 해로에 위치해 있어 운송과 군사적 측면에서 모두 중요했다. 이와 같은 입지적 특징 때문에 水軍이 배치된 여러 鎭堡가 있었다. 지도에서는 面은 세로의 긴 사각형 안에, 鎭堡는 거의 정사각형 안에 이름을 써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에는 총 7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지역이다. 대부분 수군이 파견된 鎭堡가 있었던 해안가에 지정하여 관리하였다. 도별로는 수군이 파견된 진보가 가장 많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도의 오른쪽의 露梁津이 표시된 곳은 이순신(1545-1598)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조선시대의 곤양땅이었던 현재의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아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은 忠烈祠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고성현은 개천면·영오면·영현면을 제외한 고성군 전체, 한산면을 제외한 통영시 전체 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無量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慶尙右水營兼三道統制營인 統營이 표시되어 있다. 통영은 선조 26년(1593)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李舜臣(1545-1598)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통영 바로 옆에 있는 忠烈祠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현종 4년(1663)에 사액 받았다. 堀梁橋가 설치된 곳은 썰물 때면 섬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한 때 흙으로 메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시 파내어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들고 다리를 설치한 곳이다. 현재는 위·아래로 일제시대에 만든 해저터널과 충무교가 지나가고 있다. 통영 위쪽의 轅門은 통영과 외부와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통영에는 그 위상을 반영하여 戰船 8척, 兵船 7척, 伺候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적혀 있다. 고성 관할의 전선은 읍치 아래쪽의 船倉에 배치되어 있었다. 10개의 船材封山도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封山이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선재봉산은 전선의 선재로서 사용하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지역이다. 지도에는 4개의 眞木封山도 표시되어 있다. 眞木이란 참나무를 의미하며, 전선의 櫓·防牌·木釘에 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를 공급하던 선재봉산 또는 봉산과 구별하기 위해 진목봉산이라는 명칭을 특별히 기재한 것이다. 統倉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는데, 統營으로 조달되던 세미를 보관하며 운송하던 곳이다. 이 밖에 고성의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한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거제와 남해가 마치 거대한 대륙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고지도에서 가끔 나타나는 형식이다.(이기봉)
영덕현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지품면·달산면·강구면·남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蕪芚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淸心樓는 읍성의 서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성과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嶺南地圖≫ 내의 邑城에 대한 모든 표시가 성곽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有無만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아래쪽의 南江書院은 16세기에 경상좌도 지역의 성리학자로 가장 유명했던 李彦迪(1491-1553)과 李滉(1501-1570)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천을 매우 강조하여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嶺南地圖≫ 내의 하천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 방식보다 훨씬 강조되어 있음을 통해 지도 작성 시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 오십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하류는 南川, 중류는 五十川, 상류는 北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를 추진하기 전에는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오십천 남쪽의 해안선이 실재로는 남북 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마치 남서쪽으로 꺾인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기타 왕실의 관곽용 목재인 黃腸木을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지도 맨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외금강면·서면·수동면과 장전읍 성북리 일부에 해당되며,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 상으로는 고성읍(장전항)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읍치는 현재의 고성군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아래쪽 가운데에 客舍·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를 環抱型으로 그렸는데, 풍수적 관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9리에 있었다’는 全城山인데, 지도에는 金城山으로 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산 중의 하나인 金剛山이 있는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위쪽(서)에 작은 산의 하나로만 표시되어 있다. 반면에 海金剛 부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 비해 축척이 확대되어 있다. 여러 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七星峯만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關東八景의 하나인 三日浦 역시 주변의 산세와 호수의 모습, 四仙亭 등 상대적으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鑑湖 왼쪽에는 ‘楊蓬業故墟’가 표시되어 있는데, 양봉업은 楊士彦(1517-1584)을 의미한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만폭동에 그의 글씨 8자가 남아 있는 등 금강산과 관련된 일화가 많은 인물이다. 읍치 아래쪽의 南江은 금강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南流하다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北流하여 동해로 빠져나간다. 금강산 동쪽(아래)의 外金剛에는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알려진 楡店寺와 新溪寺를 비롯하여 유서 깊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신계사 위쪽의 九龍淵은 높이가 73m에 달한다는 九龍瀑布 밑에 형성된 못으로서, 깊이도 13m나 된다고 한다. 신계사 아래쪽의 溫井은 현재도 외금강온천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지도와 왼쪽의 주기에 黃腸山 1곳이 炭屯에 있었음을 표시하였다. 황장산이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소나무의 일종)을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 당시에 황장봉산이 중요한 정보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기봉)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현재의 단양읍 중심지는 충주호의 건설 후 새로 만든 신단양이며, 과거의 중심지는 보통 구단양이라고 부른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켜,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흘러나간다. 남한강에는 上津과 下津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上·下란 명칭을 통해 고을 내부의 입장에서 나루의 이름이 붙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통시대에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地誌에 ‘나루’가 보통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하천 명칭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단양은 남한강과 그 지류에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丹陽八景’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한강변에는 오른쪽에 島潭(三峰)·石門이, 왼쪽에 玉筍峯 ·龜潭(峯) 등이 표시되어 있다. 도담삼봉의 경우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섬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는 강변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島潭과 龜潭에서 ‘潭’(연못)이 붙은 것은 두 지역이 모두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잔잔한 모습이 마치 ‘연못’과 같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下津으로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上仙岩·中仙岩·下仙岩이, 上津이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舍人岩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하천 변의 절벽과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작성자도 이러한 丹陽八景을 고을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내세우려 했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읍치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한 적황색 도로에는 영남과 충청 지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였던 竹嶺이 표시되어 있다. 죽령 오른쪽에는 ‘慶尙道順興界’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 밑의 昌落道(驛)가 있는 곳이 순흥의 월경지였기 때문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丹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면의 이름 등만 간단하게 수록하였다.(이기봉)
명천부는 동면과 서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명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명천군·화성군·화대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 화성군 하우리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성곽과 함께 邑이라고 표시된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永平岺으로 표시된 永平山이었다. 세조 13년(1467)에 길주의 호족인 李時愛(?-1467)가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됨에 따라 길주의 일부를 떼어서 이 고을을 만들었다. 길주목의 지도와 달리 방위는 대체적으로 맞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海東地圖≫의 명천부 지도와 거의 유사하게 그려져 있어, 두 지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이와 같은 방향의 오류가 거의 수정되어 있다. 지도는 동북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이 지역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던 長白山과 그곳으로로부터 읍치까지 이어진 산세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과 고을 내부에 있는 산의 색을 달리하여 표현함으로써 고을 내부가 부각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 아래의 성곽은 글씨가 잘 안보이지만 在德(鎭)이다. 이 鎭은 선조 38년(1605)에 설치되는데, 임진왜란(1592) 이후 강화된 국방 정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붉은색의 것이 한양-종성을 잇는 大路이다. 읍치 아래쪽에는 높이가 906m에 불과하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七寶山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상징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밖에 창고·역참·봉수 등도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자주 보이는 ‘○○社’는 다른 지방에서 사용했던 ‘坊’ 또는 ‘面’에 대한 異稱이다.(이기봉)
함흥부는 일제시대의 함흥부·흥남부·함주군·신흥군과 장진군의 남쪽 일부에 해당되며,지금은 함경남도 함흥시·영광군·신흥군, 락원군의 서쪽, 장진군의 남쪽, 부전군의 남쪽, 함주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함흥시 성천강구역 남문1동·남문2동·동문동·서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북쪽에 城串烽이 표시된 성곶산(城串山)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와 표현은 ≪海東地圖≫ 함흥부의 지도, ≪輿地圖書≫의 함흥부지도와 동일하다. 이를 통해 당시에 함흥부의 지도가 여러 번 模寫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가 회색으로 표시되어 구분된 점은 앞의 두 지도와 확연히 다르다. 고을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지금의 함경산맥)이 지나가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成川江이 된다. 성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큰 섬이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이런 섬은 급경사에서 발원한 하천이 평지와 바다를 만나 갑자기 유속이 느려지면서 형성된 三角洲에서 많이 나타난다. 함흥부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와 많은 관련을 갖고 있었던 고을이며, 지도에도 그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붉은 사각형으로 표시된 本宮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직전까지의 저택(潛邸)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성계를 비롯하여, 그의 조상과 왕비들의 位版이 奉安되어 있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定和陵과 純陵이 보이고 있다. 定和陵은 定陵과 和陵을 함께 표시한 것으로서 각각 이성계의 아버지인 桓祖 李子春과 어머니인 懿惠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純陵은 이성계의 할아버지 度祖 李椿의 부인인 敬順王后 朴氏의 무덤이다. 지도 위쪽에는 德安陵이 표시되어 있는데, 德陵과 安陵을 합해서 부른 이름이다. 각각 이성계의 高祖父인 穆祖 李安社와 그의 부인인 孝恭王后 李氏의 무덤이다. 위쪽의 백두대간 부근에는 군사기지인 堡가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북쪽의 압록강 유역과 바로 연결되는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왼쪽 위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長津江과 長津柵(堡 또는 鎭)이 표시되어 있다. 장진 지역은 현종 8년(1667)에 堡가 설치되었다가, 정조 9년(1785)에 鎭으로 승격된다. 같은 왕 11년(1787)에는 府로 승격되면서 독자적인 고을이 되고, 이후 고종 때 廢四郡 지역에 정식으로 고을을 설치하기 전까지 북쪽 최전방의 방어기지 역할을 한다. 이 지도는 최소한 장진이 고을로 정해진 정조 11년(1787) 이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기봉)
문천군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읍·운림면·천내읍·명귀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서남쪽 일부를 제외한 강원도 문천시와 천내군 일대이다. 읍치는 문천시 교성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軍資倉·客舍 등이 있는 곳이다. 객사는 일반적으로 가운데의 높은 지붕과 양쪽의 조금 낮은 지붕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남쪽 25리에 있었다’는 盤龍山인데, 같은 책의 덕원부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는 색을 달리하여 구별하였다.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의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읍치 왼쪽에는 石灘이, 지도 오른쪽에는 前灘(箭灘으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음)이 표시되어 있다.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인데, 경사가 급해져 물살이 빨라지는 하천의 구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천의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지도에 표시된 灘도 각종 地誌에는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어 하천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淑陵이 붉은색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성계의 曾祖父인 翼祖 李行里와 그의 부인인 貞淑王后 崔氏의 무덤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四訥島와 馬祭島가 표시되어 있다. 모두 島라는 명칭을 갖고 있지만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서쪽 급경사의 하천에서 공급되는 모래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목장이 있었다. 사눌도에서는 進上할 말(馬)을 키웠으며, 마제도에서는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양(羊羔)을 키웠다.(이기봉)
무산부는 일제시대의 무산군과 부령군의 삼해면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무산군·연사군, 라진시의 삼해리·노창리, 량강도의 대흥단군·백암군 전체와 삼지연군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무산군 무산읍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한 가운데에 邑과 성곽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 초에 이 지역 최북단의 군현은 부령이었다. 그리고 茂山은 부령에 소속된 茂山鎭이었으며, 위치도 현재의 부령군에 있었다. 현종 15년(1674)에 이 지도 위의 읍치 지역으로 茂山鎭이 옮겨 설치되고, 숙종 10년(1684)에 府로 승격되었다. 읍치에서 회령까지의 거리는 백두산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움에도 이런 사실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白頭山과 현재 天池라 부르는 大澤이다. 백두산을 다른 산들과는 달리 흰색으로 표시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통해,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神聖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 아래쪽에는 숙종 38년(1712)에 淸과 朝鮮이 이 부근의 국경을 합의하여 세운 白頭山定界碑가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에서 동쪽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는 土門江이 이 지도에는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 아래쪽에는 세 개의 큰 호수라는 뜻의 三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아래쪽 외쪽의 長白山 줄기도 흰색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실재로 여름철 3개월만 제외하면 거의 눈이 덮여 있었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 지금의 두만강이다. 읍치로부터 회령경계까지는 실재로도 굴곡이 심한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 이외에도 2개의 성곽이 더 보이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각각 豊山堡·梁永堡이며, 곳곳에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도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최전방으로서의 모습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달리 표시하여 그 중요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전자가 더 중요한 도로였다. 지도 아래쪽에는 일제시대의 부령군 삼해면에 있었던 이 고을의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기타 지도의 전반적인 형태가 ≪輿地圖書≫와 ≪海東地圖≫에 나오는 무산부의 지도와 거의 흡사하여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본 지도에는 咸鏡北道地圖라는 명칭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咸鏡)北道兵馬節制使가 관할하는 지역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함경북도지도라는 명칭을 임시적으로 붙인 것이다. 北道兵馬節度使營은 鏡城에 있었다. 지도 위쪽에는 白頭山과 현재 天池라 부르는 大澤이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눈 덮인 머리’란 뜻의 명칭처럼 특별히 흰색으로 그렸다. 지도 중간 부분의 산줄기에도 흰색이 칠해져 있는데, 한가운데에 좀이 먹은 부분의 長(白山) 역시 여름철만 제외하면 눈이 덮여 있다는 여러 地誌의 기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중요 산줄기는 남색으로 그려 다른 산줄기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왼쪽(西)으로는 鴨綠江이 흘러나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豆萬江이 발원하고 있다. 大澤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黑龍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흑룡강 유역은 두만강 이남과는 전혀 다른 축척이 적용되고 있다. 실재로는 한반도보다도 크거나 비슷한 면적임에도 지도에는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古地圖에서 한정된 지면에 먼 지역의 정보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흑룡강 바로 아래쪽의 黑龍坪 주기에는 오른쪽 위의 寧古塔으로부터 백두산 밑의 天坪까지 사람·경계 가 없는 평평하고 곧은 길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것을 통해 이 지역이 평원지형을 이루고 있음과 청나라에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던 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흑룡강과 두만강 사이에 동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간도 지방에서 유명한 해란강이며, 동쪽의 柔遠鎭 부근에서 두만강과 합류한다. 백두산 아래쪽에는 숙종 38년(1712)에 淸과 朝鮮이 이 부근의 국경선을 합의하여 세운 (白頭山)定界碑가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에는 ‘東爲土門’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1880년대부터 土門(江)이 어느 것인냐를 놓고 청과 조선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에서는 두만강이 아니라고 보면서 간도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였으나, 1909년에 일제가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으면서 두만강으로 확정했다. 고을은 남색의 원으로 표시하였으며, 주변까지의 거리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담고 있다. 세로로 긴 노란색 사각형은 군사기지인 鎭堡을 의미하며, 廢堡의 정보 역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진보는 주로 두만강 변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鏡城 지역에도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통해 이곳이 2차 저지선과 같은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로는 붉은색과 노란색 순서로 중요성을 표현하였으며, 驛站은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다. 고개에 대한 표시도 아주 자세하여 군사적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두만강 동쪽의 영역 역시 縮尺이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이기봉)
옹진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동남면·북면·서면·용천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남도 옹진군 일대이다. 읍치는 옹진군 옹진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花山이다. 읍치에는 廣大山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邑城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 읍성의 둘레는 3,524尺(약 1,057m)이었는데, 이 지도를 통해 산지와 평지를 아우르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쪽에는 조선후기의 邑誌에 가장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었던 것 중의 하나인 堤堰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둘레 584丈(약 1,752m)의 松筒堤堰으로서, 당시에는 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송동제언에서의 ‘筒’은 일반적으로 간척한 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한자이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황해도 水軍節度使가 파견된 所江(行營)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소강진이었는데, 숙종 45년(1719)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 옹진현 역시 옹진도호부로 동반 승진되었으며, 수군절도사가 옹진도호부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바다를 막은 곳에 ‘築筒’이라는 글씨를 적어놓았으며, 그 아래쪽에는 망루에 해당되는 瞭望이 초가집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船艙은 소강 소속의 戰船이, 읍치 왼쪽의 船艙津에는 옹진 소속의 戰船이 정박하는 곳이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전선의 종류와 수가 자세히 적혀 있다. 또한 棺槨과 戰船 제조용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無黃腸船材木’이란 문구를 통해 봉산의 운영이 실질적으로는 잘 운영되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기타 해안가에 ‘浦’가 아주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배천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운산면·유곡면·해월면·온정면·도촌면·화성면·금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남부 일부를 제외한 배천군 일대이다. 읍치는 배천군 배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있는 雉岳(山)이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村)의 이름과 위치 정보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단 한자로 ‘村’이라고 적어놓았다고 해서 모두 ‘촌’으로 부른 것은 아니며, 촌·동·골·말 등 다양한 어미들이 마을 이름에 사용되었다. 面의 이름은 村과의 구별을 위해 붉은색의 큰 글씨로 써넣었다. 가끔 면에 소속된 촌을 구별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는 지도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이 지도에는 그러한 구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방향은 南北이 아니라 子(북)·午(남)와 같은 干支로서 표시하였다. 방향에 대한 이러한 간지의 사용은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다. 도로는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다른 직선으로 표시하려 노력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색의 긴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고을의 동쪽을 북-남으로 흐르는 하천은 예성강이며, 읍치 남쪽에는 현재 옥산강이라 부르는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산지는 이 고을에서 가장 높은 黃衣山(478m)이 우뚝 솟은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고을 곳곳에 연결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만 해안가의 경우 거의 산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연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른쪽 예성강 변에는 고려시대 내내 開京의 外港으로서 번성했던 碧瀾渡가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에는 錢浦(돈개)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서 예성강의 이 구간에 대해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벽란도와 전포 사이의 金谷村에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았다가 서울로 나르던 海倉이 보이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이곳에 金谷浦倉이라는 水站을 설치하여, 황해도 해안가 12개 고을의 전세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다. 조선후기에는 각 고을이 책임지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읍치 왼쪽의 文會書院은 李珥(1536-1584)를 비롯한 많은 인물이 배향되어 있었으며, 인조 6년(1628)과 숙종 6년(1680)에 걸쳐 賜額을 받은 독특한 서원이다. 기타 우리말 ‘고개’의 소리를 그대로 적은 ‘古介’라는 명칭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어, ‘嶺’·‘峴’·‘峙’ 등과 함께 당시에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기봉)
羅州牧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의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의 경현동과 교동지역에 있었다. 羅州牧은 인근 務安縣의 地界를 넘어 서쪽 해안의 도서를 越境地로 소유하고 있었는데,이로 인해 지도에도 해안의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무안현 境內에 있던 三鄕面도 나주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다. 이들 월경지는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로소 인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1리 방안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산지의 묘사는 회화적 수법을 가미하였다. 특히 서쪽 해안의 산에는 수목의 모습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읍성이 있던 읍치에는 중요 관아 건물과 더불어 민가를 노란색 지붕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지도의 상단에는 지역 각종 지지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토지, 인구를 비롯하여 재정, 군사뿐만 아니라 산천·진보·서원·정사·사찰·驛站·酒站·烽臺·封山·목장·道里·各面 등 많은 항목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지역의 이해를 돕고 있다. 서쪽 해안의 智島鎭은 1682년(숙종 8)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水軍萬戶를 두고 司僕寺別將을 겸하게 하였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사람들은 나주목에 속해 있지만 땅은 사복시소속이었다. 지도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戰船, 兵船이 각각 1척, 伺候船이 2척이 있었다.(오상학)
금산군은 지금의 충남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전북 무주군 부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금산읍 중대리 일대에 있었다. 금산군은 역사적으로 전라북도에 속했다가 1963년에 충청남도로 이속되었다. 금산군은 금남정맥이 경유하는 산간분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발고도가 높다. 지도에도 읍치를 중심으로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산지의 모습을 흡사 동심원처럼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원래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황폐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음을 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所山으로 그 아래에는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義 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수만명과 싸우다 순국한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700여명을 장사지낸 곳이다. 그 옆에는 이들에게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從容堂과 高霽峯殉節碑도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 南上面의 星谷書院은 고려 충렬왕 때원나라에서 參政이라는 벼슬을 받았던 金侁 등이 배향되었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북쪽에 위치한 濟源驛은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었다.(오상학)
구례현은 지금의 전남 구례읍, 간전면, 광의면, 마산면, 문척면, 용방면 남쪽 부분, 토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구례읍 鳳東里 일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웅장한 지리산이 포진해 있고 섬진강이 고을을 가로질러 흘러 나간다. 지도에도 산지가 많은 지역이 특성이 반영되어 많은 산들이 그려져 있는데 봉우리의 시점이 통일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 도면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성곽의 주위는 4,481척이었다. 읍치의 북쪽에는 壇과 城隍壇이 그려져 있는데 성황단의 모습이 초가로 그려진 점이 이채롭다. 읍치 북쪽의 華嚴寺는 31본산의 하나로 우리 나라 華嚴宗의 鼻祖로 알려진 義相이 신라 문무왕 때 화엄경 80권을 석판에 새겨 보관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화려한 석등과 석탑 등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이 지역에는 封山도 지정되어 있었는데, 艮田面과吐旨面의 宜松山이 대표적이다. 이들 봉산에서는 집을 짓는 재목을 공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栗木封山도 토지면에 설치되어 있어서 이 지역이 목재를 공급하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순천부는 지금의 전남 순천시, 별량면 동부, 쌍암면, 서면, 송광면, 월등면, 주암면, 해룡면, 황전면과 여수시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순천시내 영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은 남해안의 동쪽 경상도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여수반도에서 돌산도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걸쳐있다. 해안에는 左水營, 古突山鎭, 防踏鎭 등의 진영이 포진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던 곳이었다.지도에도 남쪽에 성이 축조된 진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麟蹄山으로 다른 산에 비해 크게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읍치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동서남북의 성문도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쪽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은 성종 11년(1480) 수군절도사를 두었는데, 상단의 기록에 따르면 성 둘레가 3,336尺이었다. 黃田面 남쪽의 고돌산진에는 원래 수군 만호를 두었는데 중종 때 만호를 혁파하여 權管을 두었고, 1522년에 다시 召募別將을 두었다. 그 남쪽에는 監牧官이 그려져 있는데, 선조 때 설치한 曲華牧場이다. 방답진은 남해안에서 경상도로 가는 수로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중종 때 적이 침입하는 길목이 되므로 이곳에 僉使鎭을 설치하였다. 조계산 서쪽에 위치한 松廣寺는 신라 말엽 혜린대사가 창건한 우리 나라三寶 寺刹의 하나이다. 조계사 동쪽에 위치한 선암사는 末寺를 거느린 본산으로 雲岩寺, 龍岩寺와 더불어 호남의 三岩寺라고 한다.(오상학)
진도군은 지금의 전남 진도군 진도읍, 고군면, 군내면, 의신면, 임회면, 조도면, 지산면과 해남군 삼산면 서부, 영암군 시종면 신흥리·월악리·만수리·태간리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해상방어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지도에도 남쪽 해안에 군영이 그려져 있다. 南桃鎭은 진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水軍萬戶鎭으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해당한다. 현재에도 진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金甲鎭은 수군 만호가 관할하던 진영으로 1431년(세종 13)에 창설되었다.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진도군의신면 금갑리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봉산도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 봉산들은 대부분 船材를 공급하던 곳으로 상단의 기록에는 송림의 상태까지 기재되어 있다. 智力山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 國馬가 675필, 이를 키우던 牧子가 133명 있었다. 고을의 서쪽 古郡內面에는 龍藏寺 基와 龍藏王溫 基가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용장산성이 있던 곳이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오상학)
남평현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 남평읍, 다도면, 봉황면,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일대에 있었다.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위로는 광주, 서로는 나주와 연결된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고졸하게 묘사되었는데, 산지는 읍치를 중심으로 환포형으로 그렸다. 고을의 서북쪽에는 군사들이 훈련받던 陳場이 있는데, 이를 지휘하는 將軍이 머무르던 將臺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 오른쪽의 서원은 蓬山書院으로서 조광조의 제자이자 선조 때 이조참판과 大司憲에까지 오른 休庵 白仁傑(1497-1579)을 배향하여 1667년(현종 8)에 사액받았다. 고을의 남쪽에 위치한 佛會寺는 백제 때 胡僧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고려 말 원정국사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德龍山 기슭에 있는 雲興寺는 당 희종년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熊峙寺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熊岾寺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을 그린 지도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그리고 충청도 금산군이 이에 해당한다. 지도는 방격을 사용하여 비교적 정교하게 그렸다. 泰仁에서 井邑까지의 거리는 30리인데 눈금의 차이가 3개 정도 난다. 따라서 1개 눈금의 실제 거리는 10로 추정된다. 이러한 방격지도는 조선후기 관찬지도의 활발한 제작과 맞물려 나타났는데 지역의 방위와 거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군현지도 제작에도 이어져 방격식 군현지도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다. 호남전도는 방격을 사용한 지도이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동국지도 이전 유형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야가 많은 호남지역이지만 평야 지역의 구릉성 산지도동부 지역의 험준한 산지처럼 그렸다. 산지의 표현은 봉우리의 방향을 북쪽으로 하여 단일한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정의 명산은 강조되어 있다. 바다의 섬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상대적인 위치관계가 부정확하게 표현되었고 섬의 대소도 실제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좌도와 우도를 고을 색의 짙기로 구분하였고,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고을에는 해바라기 모습의 성가퀴를 그려 넣었다. 관내의 여러 고을을 연결하는 도로는 황선·홍선·청선으로 그려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봉수는 횃불 모양으로 표현하였고, 내륙의 요충지에 쌓은 산성도 상세히 그려져 있어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외에도 사찰, 서원, 정자 등의 문화적 요소도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당시인의 관심사를 엿보게 한다.(오상학)
부여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초촌면, 규암면, 은산면, 공주군 노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부여현의 읍치는 부여읍 舊衙里, 官北里, 舊校里 일대에 있었다. 백제의 古都로 고을의 내부를 백마강이 감돌아 나간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면서도 환포형으로 그렸다. 읍치의 동북쪽에는 天政臺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백제 때 재상의 임명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그 아래쪽에는 釣龍臺가 있는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이곳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로 인해 백마강과 조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浮山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白江 李慶輿, 愼獨齋 金集 등을 배향한 사액 서원이다. 읍치 동쪽에는 백제 충신 成忠과 階伯, 그리고 고려충신 李存吾 등을 배향한 義烈祠가 표시되어 있는데 지도에는 義烈寺로 표기되어 있다. 백마강가에 있는 落花岩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했을 때 백제의 궁녀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고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전한다. ≪三國遺事≫ 태종 춘추공조에 의자왕이 후궁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여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어 墮死岩이라 전해온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이라는 말은 후세 사람들이 미화한 이름이다. 그 옆에는 皐蘭寺가 표시되어 있는데, 백제 제17대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삼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오상학)
남포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남포면, 성주면, 미산면, 웅천읍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와 옥동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위로는 보령, 아래로는 비인과 연결된다. 읍치는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고을의 북동쪽은 이 지역의 명산인 聖住山이 있는데 계곡의 풍광이 수려하여 살만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양질의 벼루돌 생산지이기도 하다. 근처에 聖住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당시는 터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撰한 朗慧和尙塔碑와 탑이 남아 있는데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深田面에는 이 고을의 고적인 撲坪所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의 馬梁鎭은 터로 남아 있는데 相臣 李尙眞이 효종 때 배를 대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啓達하여 庇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宜松山도 네 곳이나 있어서 재목 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을이다. 고을 서쪽의 船所에는 防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배치되어 있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단양팔경의 빼어난 경치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고,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 강이 돌았고 돌을 깍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행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남한강의 상류를 따라가면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단양의 팔경은 도담삼봉·석문·구담봉·옥순봉·사인암·하선암·중선암·상선암 등을 말하는 것인데 지도에도 팔경이 전부 그려져 있다. 읍치의 강가에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二樂亭은 강가의 절벽위에 있는 정자로 이곳에는 성이 있어서 숨기에 알맞아 可隱岩이라는 바위명이 생겼다 한다. 고려 말에 단양, 청풍, 제천 사람들이 왜적을 피해 이곳에 피난하기도 했다. 남쪽에 보이는 丹巖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고을의 서쪽 해안가에는 湖西의 漕運을 위해 설치한 貢津倉이 성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1523년(중종18)에 아산을 비롯하여 全義·木川·淸州·燕岐·天安·溫陽 등의 田稅를 조운하기 위해 처음으로 창을 설치하였고 1631년(인조9)에는 성곽을 축조하였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는 이 곳에 조운선 15척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곳은 원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을 설치한 이후로는 많은 백성과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번창했으며 부유한 집이 많았다고 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남쪽의 靈仁山인데 봉우리의 방향은 남쪽으로 향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예전에 축성된 산성의 모습도 보인다. 一東面의 顯忠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754척으로 비교적 큰 성이다. 성 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넘치거나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서쪽에 위치한 荊江津은 옥천, 회덕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利遠津이라고도 한다. 읍치의 남쪽에는 大龍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커다란 동굴로 굴 안에는 큰 소가 있다고 한다. 一道面에 있는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鄭Ꜿ·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 비문이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나 ꡐ萬曆十六年戊子ꡑ에 세운 아기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로 본다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오상학)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상북면·삼남면·삼동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직사각형의 石築 읍성이 있었다.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高獻山(1,033m)인데, 읍치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伽智山(1,240m)·肝月山(1,083m)·鷲棲山(1,059m) 등 1,000m 이상의 산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은 태화강이 되어 동쪽의 울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이들 높은 산지 밑에는 사찰이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중 가지산 밑의 石南寺에는 보물 369호 부도가 간직되어 있고, 취서산 밑의 肝越寺에는 보물 37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지도 위쪽의 盤龜書院은 숙종 38년(1712)에 정몽주(1337-1392)·이언적(1491-1553)·정구(1543-1620)를 배향하여 창건한 서원인데,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이 있는 지역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에 깎아지른 절벽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지금은 상당부분이 사연댐에 의해 잠겨버렸지만,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구대 岩刻畵로 유명한 곳이다. 경치가 수려하여 위의 서원에 배향된 세 명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그 흔적이 반구대 약간 북쪽의 협곡 입구에 천전리 刻石(국보 47호, 書石이라고도 한다)으로 남아 있다.(이기봉)
동래부는 기장군·북구·강서구를 제외한 부산광역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복천동·안락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보이는 輪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고을은 일본과 가장 가깝게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군사적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水營과 鎭의 경우 파견된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였다. 정3품의 水軍節制使가 파견되었던 慶尙左水營이 지도 가운데에 성곽 표시의 적황색 네모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釜山鎭과 多大鎭은 성곽 표시의 황색 네모로 표시하였다.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된 鎭의 경우 건물과 이름만으로 표현하였다. 지도 오른쪽으로부터 甘浦·丑山·漆浦·包伊·開雲浦·豆毛浦·西平鎭 등이다. 이런 鎭의 경우 때때로 옮길 때마다 鎭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가기 때문에 지명 비정에서 조심해야 한다. 지도 가운데쯤에는 倭館이 보이고 있다. 조선 초에는 웅천(진해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三浦倭亂(1510) 이후에는 한곳에만 설치하였는데, 제포→부산포→초량의 순서로 옮겼다. 지도에 표시된 곳이 숙종 4년(1678)에 마지막으로 옮긴 지역이다. 이 왜관에서는 일본과 조선 상인 사이의 무역이 행해졌으며, 일본 거류민의 주거지와 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을 두었다. 조선에서는 성을 축조하여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이 지도에도 이중의 성곽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문의 이름도 이들의 출입을 지킨다는 의미로 ‘守門’이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국방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壬辰倭亂 때에는 동래읍성·부산진·다대진 등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서 전사한 宋象賢(1551-1592), 부산진 僉使로서 전사한 鄭撥(1533-1592) 등을 배향하여 인조 2년(1624)에 賜額받은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쌓았던 대형산성 중의 하나인 金井山城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숙종 29년(1702)에 처음으로 쌓았다. 이 밖에 기원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오는 居漆山國의 터가 萇山國基로 표시되어 있으며, 해안가에는 海雲臺와 沒雲臺 등의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영양현은 입암면의 면소재지 남쪽과 석보면을 제외한 영양군의 전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위쪽의 日月山이다. 영양현은 조선 초까지 영해도호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숙종 9년(1683)에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새롭게 현감이 파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단위가 되었다. 고을은 두개의 水系에 속해 있다. 남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의 최상류이며, 북쪽은 동해로 빠져나가는 왕피천의 최상류이다. 왕피천은 지도에는 深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首比部曲이 있던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영양군 수비면이다. 청이면과 청초면 지역도 원래 大靑部曲·小靑部曲이 있던 곳으로, 면의 명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변천에는 위로부터 將軍川·大川·矢川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의 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던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池는 項谷堤와 元唐堤가 합쳐져 있는 것으로서, 주위가 각각 2,852尺(약 856m)·1,698尺(약 509m)이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작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제언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英山書院은 이황(1501-1570)과 김성일(1538-1593)을 배향하여 세워졌으며,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 지도 위쪽에는 왕실의 棺槨 제조용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향교가 읍치와 많이 떨어져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단성현은 산청군 신안면·신등면·생비량면 전체와 단성면의 청계리·입석리·사월리·묵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來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은 세종 때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해 만들어졌고, 두 현의 이름으로부터 한 자씩 따서 丹城縣이 되었다. 丹溪倉이 있는 곳이 단계현의 중심지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道川書院은 文益漸(1329-1398)을 배향하여 태종 1년(1401)에 건립되었고, 정조 11년(1787)에 賜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1년에 세워진 것은 후대의 서원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이곳에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목화의 최초 재배지가 단성면 사월리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목화를 최초로 재배한 사람은 鄭天益인데,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 오른쪽의 靑谷祠宇에는 李天慶이 배향되어 있었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이천경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며, 書院과 祠宇는 배향된 인물의 격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오른쪽은 그 지류인 양천이다. 지도에는 新安津과 吐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津은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주기에 적혀 있으며, 이곳에는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다. 신안진 오른쪽의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赤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중국의 유명한 지명을 본 따서 이름을 붙이고 글자까지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통해 송시열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곤양군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곤명면·서포면과 하동군 금남면·금성면 및 진교면의 진교리·안심리·양포리·술상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3리에 있었다는 銅谷山이다. 昆陽郡은 세종 19년(1437)에 昆明縣과 金陽部曲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각각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였다. 이를 통해 部曲 역시 당시까지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縣 못지 않은 힘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陽面이 金陽部曲이 있던 곳이며, 위쪽의 주기에는 읍치로부터 ‘서쪽 40리’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 ‘동쪽 45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왼쪽 위쪽에는 이 고을이 郡으로 승격되고 유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世宗大王胎封과 端宗大王胎封이 표시되어 있다. 왕릉은 주로 한성 주변의 고을에 분포하고 있지만, 胎封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胎의 奉安을 통해 전국적인 지배자로서의 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확보하려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과 1개의 眞木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船材封山은 소나무(松木)를 戰船의 船材로서 사용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封山이라고 하면 선재봉산을 의미했다. 眞木은 참나무를 의미하며, 戰船의 櫓·防牌·木釘 등에 사용되었다. 진목봉산 위쪽에는 ‘進上靑大竹田’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해안가에는 이 고을에서 통영에 받치던 세미의 보관소인 統倉과 戰船을 정박시키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이 선소에는 이 고을에서 한양으로 田稅와 大同米를 실어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도 함께 있었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삼척부는 삼척시·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옛 북평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1리에 있었다는 葛夜山이다. 지도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西高東底의 지형적 요인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동쪽)로 흘러나가는 하천으로 유명한 것은 읍치 왼쪽의 오십천이다. 위쪽에는 왼쪽의 낙동강 상류와 오른쪽의 남한강 상류가 보이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는 약간 둥근 모양의 표시가 보이는데, 發源地로 알려진 黃池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십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읍치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社稷壇이 표시되어 있다. 그 위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竹棲(樓)도 표시되어 있다. 오십천 변의 절벽 위에 만들어져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며, 현재도 보물 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鎭營이 표시되어 있는데, 三陟浦鎭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어 있었고, 右營將을 겸했기 때문에 鎭營이라고 쓴 것이다. 지도 맨 오른쪽 해안가에는 平陵驛이 보이고 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5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驛 뿐만 아니라 사찰·창고 등도 집 모양으로 표시하여 구별이 쉽도록 하였다. 아울러 중요한 고개의 경우 사각형 안에 표시하여 눈에 쉽게 띄도록 하였다. 도로는 색을 통해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5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封山은 위쪽의 주기에도 적혀 있듯이,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공급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黃腸封山이다.(이기봉)
단양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대강면·단성면·적성면·매포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하방리 일대에 있었는데, 충주댐의 건설로 대부분 충주호에 수몰되었다. 현재의 단양읍 중심지는 충주호의 건설 후 새로 만든 신단양이며, 과거의 중심지는 보통 구단양이라고 부른다. 읍치 북쪽을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작은 지류들을 합류시켜,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으로 흘러나간다. 남한강에는 上津과 下津의 명칭이 보이고 있다. 上·下란 명칭을 통해 고을 내부의 입장에서 나루의 이름이 붙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전통시대에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地誌에 ‘나루’가 보통 山川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하천 명칭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단양은 남한강과 그 지류에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丹陽八景’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한강변에는 오른쪽에 島潭(三峰)·石門이, 왼쪽에 玉筍峯 ·龜潭(峯) 등이 표시되어 있다. 도담삼봉의 경우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섬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는 강변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島潭과 龜潭에서 ‘潭’(연못)이 붙은 것은 두 지역이 모두 하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잔잔한 모습이 마치 ‘연못’과 같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下津으로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上仙岩·中仙岩·下仙岩이, 上津이 표시된 곳의 하천 상류에는 舍人岩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하천 변의 절벽과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지도 작성자도 이러한 丹陽八景을 고을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내세우려 했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읍치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한 적황색 도로에는 영남과 충청 지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였던 竹嶺이 표시되어 있다. 죽령 오른쪽에는 ‘慶尙道順興界’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고개 밑의 昌落道(驛)가 있는 곳이 순흥의 월경지였기 때문이다. 읍치 바로 위쪽에는 丹岩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에 능통했던 李混(1252-1312)과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세워지고, 숙종 38년(1712)에 사액 받았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면의 이름 등만 간단하게 수록하였다.(이기봉)
부령부는 일제시대의 관해면·삼해면을 제외한 부령군과 청진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청진시 동부와 부령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부령군 부령읍 부령동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성곽과 함께 ‘邑’이라는 글자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북동남서(子卯午酉)의 방향이 현재의 입장에서 보아도 거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위쪽에는 廢茂山(堡)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9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고려 말까지 여진족과의 경계는 이 고을 바로 서남쪽에 있었던 鏡城이다. 이 고을은 세종 때 설치한 六鎭 중의 하나로서, 원래는 寧北鎭이라고 불렀다. 세종 16년(1434)에 富居縣과 합해지면서 富寧縣이란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경선의 변경 때문에 각종 鎭堡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었는데, 廢茂山(堡)에는 원래 茂山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종 15년(1674)에 부령 서북쪽의 두만강변을 개척하면서, 무산보를 옮기고 鎭으로 승격시켰다. 鎭堡의 이름은 장소의 이동과 함께 동시에 옮겨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원래의 무산보 지역은 廢茂山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이와 같은 경우가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지명의 비정에 조심해야 한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뿐만 아니라 고을 내부로 뻗은 일부의 산줄기도 색을 다르게 표시하였다. 경계선으로부터 직접 뻗어 내린 산줄기를 파생된 산줄기와 구별하려 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읍성 동쪽으로는 ‘東大川’, 서쪽으로는 ‘西大川’ 등의 이름이 있는 것을 통해 읍치가 지명 부여의 기준으로도 일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이 하천의 하류에 있었던 察訪驛인 輸城館의 이름을 따서 수성천이라고 부른다. 기타 읍치 왼쪽 아래에 보이는 仇正棧道에서의 棧道는 ‘벼랑길’을 의미한다.(이기봉)
홍원현은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함경남도 홍원군과 락원군의 동쪽 일대이다. 읍치는 홍원군 홍원읍에 있었으며, 지도에는 가운데에 鄕校가 있는 곳이다. 읍치가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확대되어 표시되었다. 또한 環抱型의 산줄기가 읍치를 둘러싼 것처럼 표시하였는데,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주변 산지에 대한 관념적 인식의 반영이다. 도로는 붉은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는데, 왼쪽의 咸關嶺으로부터 오른쪽의 北靑界로 넘어가는 것이 한양-경흥의 大路이다. 왼쪽의 함흥과 이 고을 사이에는 북-남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함관령(450)이 중요한 關防處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있는 馬養島는 울릉도를 제외하면 동해안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곳에는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와 마양도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穿島는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실재로는 해안가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이며, 그 사이에 구멍이 뚫려 있어 穿島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지도와 주기에는 ‘○○社’란 명칭이 자주 보이는데, ‘面’이나 ‘坊’에 대해 함경도 지방의 異稱이다. 기타 인문정보로는 倉庫와 驛, 烽燧 등만이 간단하게 기재되어 있다.(이기봉)
안변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남도 안변군과 문천군의 풍상면·풍하면 그리고 강원도 통천군의 흡곡면·학일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안변군·고산군·법동군과 통천군의 시중대 위쪽 일대이다. 읍치는 안변군 안변읍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5리에 있었다’는 鶴城山이다. 지도에는 ‘邑’이란 글자와 성곽이 표시된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客舍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왕을 상징하는 闕牌 또는 殿牌를 奉安하고, 고을 수령이 매달 1일과 15일에 望闕向拜하던 곳이다. 지도는 특이하게도 남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백두대간이 지도 아래쪽(북)으로부터 위쪽(남)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꺾이고,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읍치로 뻗은 산줄기는 남쪽으로 향하는 지점에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온 것이다. 회화식 군현지도는 산줄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보통이며, 이 지도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읍치의 산줄기가 남쪽에서 올라온 점을 고려하여, 남쪽을 위로 향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바로 오른쪽의 하천은 현재 南大川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서쪽의 물줄기는 임진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 위쪽의 高山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3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위쪽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강원도와 함경도를 가르던 중요한 關防處인 鐵嶺이 있었다. 안변부는 고려초기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이었기 때문에 많은 屬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속현 중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안변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초기까지도 지도 왼쪽의 鶴浦倉이 있는 곳에는 鶴浦縣이, 오른쪽의 永豊社가 있는 곳에는 永豊縣이 독자성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던 屬縣으로 존재했었다. 학포창 왼쪽에는 鶴湖라는 글씨만 쓰여 있는데, 실재로는 潟湖가 상당히 많았던 곳이다. 석호는 급경사의 산지에서 물에 의해 쓸려 내려온 모래가 바닷가에 쌓이면서 입구를 막아 형성된 호수이다. 학호 바로 아래에 쓰여 있는 沙峯은 바로 이 모래언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붉은색 작은 원이 하나 표시되어 있고, 좀 희미한 글씨로 智陵이라고 적혀 있다. 이성계의 曾祖父인 李行里의 무덤으로서, 翼祖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陵’으로 표시된 것이다. 그 왼쪽에는 國島가 기암절벽의 모습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실재로는 매우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에게도 특별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봉)
온성부는 훈융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온성군, 경원군의 용덕면과 유신면의 일부, 경흥군의 나진 일대에 해당된다.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 동북부와 새별군·은덕군·나진시 일부이다. 읍치는 온성군 온성읍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우리나라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세종 때 김종서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동북 六鎭 중의 하나이다. 읍치 위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두만강이며, 만주쪽에서 흘러들어와 합류하는 分界江은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간도 지방의 해란강이다. 이 고을에는 2개의 월경지가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五弄川(현재는 五龍川이라고 부른다)에 있는 德川社와 德山社는 일제시대의 경원군 용덕면·유신면의 서쪽 부분에 있었다. 그 아래쪽의 해안가에 있는 安和社는 현재의 함경북도 나진시 시내 부분에 해당된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柔遠鎭·美錢鎭과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永達堡, 종9품의 權管이 파견된 黃拓坡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수많은 把守가 표시되어 있어, 최전방으로서의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만강 건너 만주 쪽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방어를 위해 필요한 정보로서 대부분 적의 예상 침입로를 표현한 것이다. 산의 색이 2가지로 되어 있는데, 하늘색의 경우 다른 고을과의 경계나 하천의 분수계에 주로 적용되었다. 특히 가운데에 표시된 하늘색 산줄기의 경우 그 아래쪽의 越境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牧場도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大草島에 설치되었으며, 이 고을의 수령이 監牧官을 겸하였다. 지도 가운데쯤에 龍水德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德’은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산지를 지칭하는 어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기타 烽燧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은율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북부면·서부면·남부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윤율군 서남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은율읍에 있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중 城隍壇을 제외한 세 군데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厲壇은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게, 社壇은 토지신에게, 文廟(향교의 大成殿)는 유교의 聖賢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황단은 기록에 의하면 읍치 남쪽의 南山에 있었으며,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漢川은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하천 명칭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漢’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 ‘한’의 소리를 그대로 적은 것이며, ‘川’은 우리말 ‘내’의 뜻을 따서 붙인 것이다. ‘한내’는 한자의 뜻을 따서 ‘大川’이라고 기록하는 경우도 많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九月山城이 보이고 있다. 九月山(954m) 정상 부근의 평탄면에 만들어진 대형산성으로서, 둘레가 14,386尺(약 4,319m)이었다고 한다. 남북으로는 절벽이며, 동서로는 棧道(벼랑길)만 있을 정도로 천혜의 요지에 만들어진 산성이다. 그 위쪽의 高要淵은 하천에 있는 가마같이 생긴 깊은 못이라고 하며, 이런 곳에는 조선초기까지도 祈雨祭를 지냈다. 왼쪽 위의 席島에는 牧場이 있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목장에 牧子가 30명, 말이 암수 합해 102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栗峯書院은 광해군 5년(1613)에 朱子(1130-1200)·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도로는 검붉은 타원형 안에 글씨를 써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面의 이름은 위쪽의 주기에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봉산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봉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봉산군·사리원시·은파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봉산군 봉산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에 있는 古邑의 ‘서쪽 5리에 있었다’는 祿科山이다. 고을의 서쪽은 현재의 재령강이며, 북쪽은 정방산을 비롯한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령강 부분은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지역으로서, 습지에 가까운 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대동강을 건너온 外賊은 대규모 부대일 경우, 고을 북쪽의 산지를 넘어야 했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고을 북쪽에는 많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북쪽에는 높은 산지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것으로 표시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고개는 붉은색 원 안에 표시하였으며, 東里鎭과 蒜山鎭이 방어를 담당하였다. 모두 숙종 때 설치된 것으로서, 병자호란(1636) 이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洞仙嶺에 만들어진 關門의 모습도 실제와 흡사하게 그려놓았으며, 그 왼쪽에는 거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正方山城도 보이고 있다. 더 왼쪽에는 ‘土築蕀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려 때 쌓아 關門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棘城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방산성으로부터 재령강까지 防守軍을 두었고, 평지엔 가시나무(棘)를 심었다고 한다. 신라 때 북쪽 국경선에 설치한 浿江鎭도 이곳에 설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浿江이란 현재의 대동강을 의미하며, 그 대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패강진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아래쪽의 鵂鶹城은 古邑이며, 둘레 8,656尺(약 2,597m)에 달하는 대형의 石築山城이다. 중종 18년(1523)에 염병이 발생하면서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휴유성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곳이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왼쪽의 神龍潭은 祈雨處로 알려져 있으며, 국가에서 봄·가을에 香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아래쪽의 文井은 文井書院인데, 書院 부분이 좀이 먹어 사라져 버렸다. 李珥(1536-1584)·金長生(1548-1631)·金集(1574-1656) 등을 배향하여 숙종 7년(1681)에 세워지고, 같은 왕 29년(1703)에 賜額 받았다. 원래 서원 근처에는 文武井이라는 우물이 있었으며, 이 중 文井만 따서 서원의 이름을 만든 것이다. 지도 위쪽의 산산진 아래쪽에는 사리원시 이름의 기원이 된 沙里院이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쪽의 水鐵嶺에는 ‘鑿穴處’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 굴(穴)을 인위적으로 뚫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도에는 물이 이 굴을 통해 동류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왼쪽에는 忠烈祠도 보이고 있는데,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조선시대의 부안현은 지금의 부안군 중에서 백산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부안읍 서외리,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부안현은 1416년(태종 16)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부령현은 부안 읍치 쪽, 보안현은 남쪽 입하면·입상면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접해 있는 고을이지만 해안까지 이어진 산세가 제법 험준하다. 읍치가 있는 고을의 북쪽으로 동진강이 흘러가고 있고 강 유역에 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도 이러한 지역의 특성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변산의 산세를 정교하게 그렸다. 특히 내변산의 유명한 폭포가 있는 龍湫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중요한 군사 기지들이 그려져 있는데, 종3품 僉使가 파견된 蝟島鎭, 종4품 萬戶가 파견된 黔毛鎭, 종5품 別將이 파견된 格浦鎭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격포진에는 1640년 인조 때 축조된 행궁의 모습도 보인다. 서원도 몇 개 창건되어 있는데, 고을 남쪽의 柳川書院과 읍치 남쪽의 淸溪書院, 東林書院, 南下面의 道洞書院 등이 그려져 있다. 서원과 더불어 사찰과 암자의 모습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오상학)
김제군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제시 교동, 요촌동 일원에 있었다. 김제군은 김제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평지 고을로 남쪽의 원평천과 북쪽의 신평천이 서해로 흘러간다. 고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벽골제로 예로부터 이름난 곳이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벽골제는 백제 때 처음 제방이 축조되었고, 790년(신라 원성왕 6년) 侍中 金宗基가 전주 등 7읍 인민을 징발하여 증축한 바가 있고, 고려 현종과 인종 때 修築한 후 폐해졌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수축하였고 후에 다시 폐해졌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또한 수축하였는데, 제방의 길이가 2,600步, 둘레가 60리이다. 지도상에는 제언의 기능보다는 둑을 따라 도로로 활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고을이지만 고을 전역에 걸쳐 산들을 그려 넣었다. 고을 서쪽의 鳴良山에는 과거 鳴良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龍岩書院은 조선 1488년(성종 17)에 세워졌으나, 병화(兵禍)로 불타 없어지고 1575년(선조 8)에 다시 지었던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성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는 文良公 趙簡을 중심으로 李繼孟, 羅應參, 羅建溪 등이 배향되었다. 읍치 북쪽에 위치한 興福寺 원래 백제 의자왕 10년(650년)에 보덕화상이 승가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승가사가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지자 1625년(인조 3)에 다시 절을 지어 흥복사로 이름지었던 것이다.(오상학)
무주부는 지금의 전북 무주군 중에서 부남면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무주는 조선 1414년(태종 14)에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하여 만든 고을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과거 무풍현이 있던 곳으로지도에도 풍동, 풍서, 풍남 등의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동쪽으로 백두대간과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읍치는 산지가 있는 동쪽을 피해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읍치 내부에는 여러 관아 건물과 아울러 다른 지도에서는 보기 힘든 鐘閣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읍치 전면에는 여러 樓亭도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寒風樓는 이 고을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이었다. 한풍루는 전주 한벽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의 아름다운 누각으로 손꼽혔다. 읍치 남쪽의 적상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산성으로서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시대 1374년(공민왕 23)에 최영의 건의에 따라 산성이 만들어졌고, 1639년(인조 17) 巡檢使 朴潢의 건의에 따라 다시 쌓았다. 1614년(광해군 6)에 史閣을 창건하여 1618년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것이다. 別將을 두어 守城을 담당하게 하였다.(오상학)
영광군은 지금의 전남 영광군 영광읍, 백수읍, 홍농읍, 군남면, 낙월면, 대마면, 묘량면, 법성면, 불갑면, 염산면과 장성군 삼계면, 무안군 망운면, 진하면, 신안군 임자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 일대에 있었다. 영광은 서해안에 접하여 완만한 평지가 펼쳐 있다. 고을 내부를 남북에서 立石川과 道鞭川이 감돌아 서해로 빠져 나간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지도에는 육지부뿐만 아니라 해안의 섬들도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섬의 방향은 육지부와는 달리 서쪽을 향하고있다. 읍치에는 둘레 2,000把 정도되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남문과 북문에는 누각도 세워져 있다. 서북쪽 해안의 法聖鎭은 처음에는 수군 만호가 배치되었으나 1708년(숙종 34)에는 水軍僉節制使로 승격시키면서 진량면을 분할하여 獨鎭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법성창이 있었는데 인근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합하여 서울로 조운하였다. 고을 남쪽의 多慶鎭은 수군 만호가 관할하는 진영으로 鎭城은 1515년(중종 10)에 쌓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는 封山과 더불어 箭竹田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지도 상단에는 이들 봉산의 상태와 전죽전의 크기까지 기재하였다. 또한 목장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임자도에 있는 荏子牧場과 망운면에 있는 羅州牧場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나주목장은 영광군 지역에 있으면서도 모든 일은 나주목에서 처리하였다. 이 밖에 서원도 다수 창건되어 있었는데 栢山祠宇·龍溪祠宇·龍巖祠宇·壽岡祠宇·長川祠宇 등을 들 수 있다.(오상학)
함평현은 지금의 전남 함평군 관내에서 엄다면·학교면을 제외한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서쪽으로 서해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靈光, 남으로는 務安에 연결된다. 지도에는 산지의 봉우리가 북쪽을 향하게 단일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봉수가 설치되었던 봉우리는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해제면 서쪽 해안에 설치된 임치진은 지금의 전남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있었던 수군 첨사진이다. 임치진은 영광의 임자진이 설치될 때 조그만 성에 불과했으나 이후 몇 개의 마을과 전선, 군졸들을 劃屬하여 진을 만들었다. 지도에는 鎭城과 더불어 戰船의 모습도 보인다. 지도 상단에는 많은 제언(防築으로 표기됨)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다수의 봉산도 설치되어 있는데 대부분 바다에 연한 海際面에 집중되어 있다. 읍치 북쪽의 龍泉寺는 신라 721년(성덕왕 11)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0년(선조 33)에 다시 세웠다. 여기에는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돌우물이 있고 석등과 해시계가 유명하다.(오상학)
능주목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능주면 관영리 일원에 있었다. 능주는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있으면서 영산강의 상류인 지석강을 끼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雲山이다. 고을 내부를 관통하는 函洑川 양안으로 수려한 경관이잘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남면 아래쪽 기암절벽이 있는 倭城山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옛 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의 서쪽 西二面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 터에 단지 雲住塔이라고 쓰여 있다. 운주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전해지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배와 같아서 돛과 사공을 상징하는 많은 탑과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과 같은 사찰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폐사되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竹樹書院은 중종 때의 名臣이고 己卯士禍(1519) 때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은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으로 1570년(선조 3)에 賜額되었다. 東面에는 天日臺가 그려져 있는데 조광조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읍치 주위에 竹田이 여러 군데 표시되어 있는데, 대나무의 산지로 유명했던 고을의 면모를 볼 수 있다.(오상학)
석성현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과 논산군 성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임천현, 서쪽으로 노성현, 북쪽으로 부여현, 남쪽으로 은진현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읍치는 지금의 석성면 석성리 일대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고을 서쪽으로는 금강이 흘러간다. 고을의 면적이 비교적 작기 때문에 지도의 크기도 작다. 지도에는 태조산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지도에는 백제의 태조가 놀았던 太祖山, 도사 田禹治가 독서하다 비결을 얻었던 波鎭山 등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산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尹文擧를 배향했던 蓬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을의 津渡로는 鳳頭津과 佛巖津이 있었는데 불암진에는 私船 1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사선을 이용한 사람과 물자의 수송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도로는 홍선, 황선, 청선 등으로 위계를 구분지었는데 홍선이 대로에 해당한다.(오상학)
당진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당진읍, 고대면, 석문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바다에 접해있는 고을로 예로부터 해로를 이용한 교역이 많았던 고을이다. 당진이라는 이름도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과 관련된 지명이라 볼 수 있다. 지도는 바다가 있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읍성은 1442년(세종 24)에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1,954척으로 되어 있다. 수운의 이점이 있는 고을이어서 읍치 근처의 浦倉과 북쪽 해안가의 포창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당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影浪寺가 그려져 있다. 이 절은 당나라와의 교역이 성행하면서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 1091년(선종 8)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하고, 조선 1684년(숙종 4) 호암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그 옆의 하천에는 彩雲浦橋라는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다리는 석교로서 1688년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당시 이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갔다는 사실로 볼 때 큰 규모의 돌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다리의 축조와 관련된 비가 남아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매포읍, 적성면, 단성면, 대강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단양읍 하방리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단양팔경의 빼어난 경치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形勝條에도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고,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 강이 돌았고 돌을 깍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행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남한강의 상류를 따라가면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단양의 팔경은 도담삼봉·석문·구담봉·옥순봉·사인암·하선암·중선암·상선암 등을 말하는 것인데 지도에도 팔경이 전부 그려져 있다. 읍치의 강가에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二樂亭은 강가의 절벽위에 있는 정자로 이곳에는 성이 있어서 숨기에 알맞아 可隱岩이라는 바위명이 생겼다 한다. 고려 말에 단양, 청풍, 제천 사람들이 왜적을 피해 이곳에 피난하기도 했다. 남쪽에 보이는 丹巖書院(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소재)은 1662년(현종 3)에 창건하여 禹倬과 李滉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때 사액되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읍의 동쪽에는 남북으로 금강의 지류인 東津江이 흐르고 주변으로 산지가 지역을 감싸안고 있다. 북으로는 전의, 남으로는 공주와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城山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읍치 동쪽의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남면에 공주로 가는 도로에는 金沙驛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6필, 하등마 2필이 있었다. 읍치 동북쪽의 봉암산에 위치한 鳳岩書院은 1651년(효종 2)에 창건되어 1665년(현종 6)에 賜額된 서원인데, 韓忠·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오상학)
문의현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가덕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문의면 문산리 일원에 있었다. 지금은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금북정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고을 남쪽으로는 금강의 상류와 접해 있다. 북으로는 청주, 남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養性山이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754척으로 비교적 큰 성이다. 성 안에는 큰 못이 있어서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넘치거나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서쪽에 위치한 荊江津은 옥천, 회덕으로 통하는 나루터로서 利遠津이라고도 한다. 읍치의 남쪽에는 大龍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커다란 동굴로 굴 안에는 큰 소가 있다고 한다. 一道面에 있는 魯峯書院은 1615년(광해군 7)에 창건되어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는데, 宋麟壽·鄭Ꜿ·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二道面의 黔潭書院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는데, 宋浚吉을 배향했다. 읍내면의 남쪽에는 胎峯이 보인다. 태실을 봉안했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 비문이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나 ꡐ萬曆十六年戊子ꡑ에 세운 아기씨의 태실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로 본다면 조선 선조 21년(1588) 에 태어난 선조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 공의 태실로 추정된다.(오상학)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시내 항구동 남쪽부분, 연일읍·대송면·오천읍·동해면, 대보면의 서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迎日’이 ‘延日’이라고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하천의 모습이 상류와 하류의 구분 없이 표시되어 있어, 냉천이 마치 경주방향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지도 남서쪽 경주와의 경계선이 실재로 分水界이기 때문에, 지도상에 나타난 냉천의 최상류가 곧 발원지이다. 형산강과 냉천의 하류에는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 河中島가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하중도는 홍수 시에는 물에 잠기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으며,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이 갈대를 이용하여 鹽盆을 끓일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내내 이 지역은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소금 생산지로 알려질 수 있었다. 포항시가 형성·확대되면서 모두 메워져, 현재는 시내 중심가의 대부분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중도 오른쪽 끝에는 포항시의 명칭이 유래된 浦項倉이 보이고 있다. 지도 오른쪽 끝의 大冬背烽臺가 있는 곳이 지금의 장기곶이다. 이곳의 지형은 동북쪽 바닷가로 솟아 올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남서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雲梯山과 陳田山에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주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을 지칭한다. 읍치 아래쪽의 烏川書院에는 본관이 이 고을이며 고려말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1337-1392)와 우리말로 쓴 ≪關東別曲≫, ≪思美人曲≫의 작자인 정철(1536-1593) 등이 配享되어 있었다. 이 서원은 선조 21년(1588)에 만들어져 광해군 5년(1613)에 賜額받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종 8년(1871)에 毁撤되었다. 이 밖에 영조 36년경(1760)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輿地圖書≫에는 邑城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 지도의 읍치에는 邑城에 대한 표시가 없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 제외한 밀양시에 해당되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시내 내일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府北面에 있는 華岳山이다. 고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이 있으며,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밀양강이다.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옆에는 지금도 보물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嶺南樓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嶺南寺라는 절의 작은 누각이었다고 한다. 지도의 아래쪽 오른쪽에는 낙동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인 三浪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삼랑진에는 영조 5년(1729)에 漕倉이 설치되어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등 여섯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여 서울로 보냈다. 경부선의 건설과 삼랑진역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운반되는 물자의 최대 集散處로도 기능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한양-동래의 대로 중에 가장 험한 지역 중의 하나인 鵲院棧路가 표시되어 있다. 棧路란 낭떠러지 길에 사용되는 용어로서, 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지형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지역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낙동강가의 守山津이 있는 곳에는 둘레가 20리나 되는 삼한시대의 守山堤가 있었고, 조선 초까지도 守山縣이 밀양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수산제는 세종 때 물길을 터 屯田으로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수산현도 조선 중기 이후 밀양에 완전하게 통합되었다. 그 위에 있는 國農所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유지 농장으로서, 紅蓮이 무성하여 그 향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封山이 읍지 오른쪽 방향에 2개가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전함 船材의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보통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해안가에서 떨어진 이 고을에도 있게 된 것은 水運이 가능한 낙동강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세종 때의 名臣이었던 김종직(1431-1492)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賜額받은 禮林書院과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西山大師(1520-1604)·泗溟大師(1544-1610) 등을 배향하여 영조(1725-1776) 때 賜額받은 表忠祠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자인현은 경산시의 자인면·남산면·용성면과 압량면의 백인리·가일리·강서리·당리리, 진량면의 남쪽 절반 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자인면의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현은 조선 초까지도 경주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인조(1623-164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독립된 고을이 되었다. 下北面 즉, 현재의 진량면 남쪽 부분에 있었던 仇史部曲도 조선 초에는 경주의 屬縣이었다. 효종(1649-165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자인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이며, 남·동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1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觀瀾書院은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받지는 못했다. 忠賢祠에는 임진왜란 때 이 고을의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崔文炳(?-1599)이, 그 아래쪽의 南川尙德祠에는 인조 때 자인현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있는 이광후·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 배향된 인물을 통해 書院과 祠는 서로 격이 달랐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사찰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을 통해, 불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이기봉)
무이진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고성동에 있었다. 이 지도는 원래 ≪嶺南地圖≫에는 없던 것인데, 후대에 안음 지도에 붙여서 삽입된 것이다. 순조 33년(1833)에 경흥부의 읍치를 과거의 무이진으로 옮기며, 무이진은 순조 37년(1837)년 경흥부의 구읍치로 옮긴다. 본 지도에 표시된 무이진은 구읍치로 옮긴 후의 모습이다. 따라서 본 지도가 만들어진 상한 시기는 순조 37년(1837)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 뒤쪽에는 ‘辛未八月十三日’이라고 적혀 있는데, 순조 37년(1837) 이후 최초로 나오는 辛未년은 고종 8년(1871)이다.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衙舍 밑의 子坐午向은 북쪽(子)을 등지고 남쪽(午)을 향해 건물이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아건물 위쪽에는 이런 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적혀 있다. 鎭城은 둘레 5,260척(약 1,578m)의 石築 성곽으로 제법 큰 축에 들어간다.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배치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赤池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度祖가 검은 용을 쏘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기봉)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시내·어모면·대항면·조마면, 상좌원리와 금평리를 포함한 구성면의 동쪽, 감문면의 금송리, 농소면의 연명리·노곡리, 금곡리와 금라리를 포함한 감문면의 서쪽, 충청북도 영동군의 추풍령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교동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굵게 표시된 하천을 보통 甘川이라고 쓰는데, 지도에는 鑑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굵기를 통해 본류와 지류를 구분해 주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현재의 김천시 명칭이 유래된 金泉驛이 보이고 있다.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20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고을 면 명칭의 일부에는 과거에 독자성을 유지하던 部曲과 所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黃金所面은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으로 황금소가 있었던 곳이다. 助馬란 명칭이 붙은 면은 조마부곡, 迎命面은 영명향이 있던 곳이다. 이 중 영명면은 개령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며, 황금소면은 유일하게 금강유역권에 들어가 있다. 오른쪽의 牙川 유역에는 禦侮縣이 있었던 곳이다. 기타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태가 뒷산인 黃岳山에 묻히면서 노비와 전답을 기부 받아 번창하였던 直指寺가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보물 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양양부는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 가운데 아래쪽 바닷가에 衙舍가 있는 곳이다. 府內面이라는 명칭을 통해 이곳이 읍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사 왼쪽(남)에는 南大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동해안에서 많이 나타나는 하천 명칭이다. 또한 읍치 남쪽을 흐르며, 해당 고을에서는 가장 크다는 의미로 南大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위쪽의 雪嶽山인데, 특별히 강조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다만 설악산에서 읍치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의 모습을 통해 고을의 산세에 대한 지도 작성자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위쪽의 백두대간 위에는 중요 고개의 이름이 노란색 사각형 안에 쓰여 있다. 이 중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五色岺인데, 현재는 한계령으로 부르고 있다. 도로는 적황색·황색의 순으로 중요성을 표시하였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황색 도로 위에 있는 五色嶺과 九龍嶺이 大路이며, 要害處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진짜 大路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다른 고개에 비해 중요한 도로라는 뜻 정도라고 생각된다. 衙舍 오른쪽의 祥雲館은 객사를 의미한다. 훨씬 왼쪽의 祥雲驛은 조선 초기에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15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府內面 아래쪽에 ‘東至海’를 큰 글씨로 써 놓은 것은 이 고을에 東海神에게 제사지내던 곳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東海神祠는 祀典에 中祀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국가에서 봄·가을 2차례에 걸쳐 香祝을 내려 제사지냈다. 실제 위치는 상운관 아래쪽에 이름 없는 건물이 표시된 곳이었다. 이 건물이 아마 동해신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찰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이 중 해안가에 있는 洛山寺는 신라의 義湘(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기타 黃腸封山도 2군데나 보이고 있다.(이기봉)
보은현은 보은군에서 회북면·회남면과 대안리 북쪽을 제외한 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보은읍 삼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동쪽에 있는 俗離山이다. 읍치가 있는 쪽의 물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으로, 오른쪽 위의 물줄기는 남한강의 달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읍치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蛙山, 서쪽에는 蛇山, 동쪽에는 猪山, 남쪽에는 南山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 위에 있는 산줄기를 제외하면 이 네 산으로 뻗은 산줄기만이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 지도의 작성자가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려 노력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俗離山이 매우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천황봉·문장대를 비롯한 봉우리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속리산은 신라 때 俗離岳으로 불리며, 中祀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 초에도 大自在天王祠를 설치하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산이기 때문에 지도 작성자도 속리산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린 듯하다. 산 아래에는 俗離寺를 비롯한 많은 암자가 표시되어 있다. 속리사 왼쪽의 다층 건물은 현재 국보 55호로 지정된 법주사 捌相殿이다. 팔상전은 인조 2년(1624)에 재건된 목조 5층 건물로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목탑이다. 읍치 오른쪽에는 三年城이 보이고 있다. 신라 자비마립간 12년(469)에 3년 간 쌓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三年山城이라고도 하며,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내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서 기능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象賢書院이 보이고 있다. 己卯士禍(1519) 때 귀향 갔다가 죽은 金淨(1486-1520) 등을 배향하여 명종 4년(1549)에 세워지고, 광해군 2년(1610)에 賜額 받았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중요도를 표시하였으며, 중요 고개마다 적황색 원의 표시를 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기타 위쪽의 주기에는 고개의 險夷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왼쪽의 주기에는 驛에 배치된 말의 上中下 등급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종성부는 일제시대의 종성군과 경흥군의 풍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함경북도 온성군·새별군·회령군·은덕군·라진시에 흩어져 있다. 읍치는 현재의 온성군 종성로동자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오른쪽 중간에 표시된 小白山이다. 지도는 북쪽(子)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 왼쪽에는 두만강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흘러가며, 지도 아래쪽 오른쪽에는 동해가 일부 보이고 있다. 두만강 변에는 읍치를 비롯하여 潼關鎭·防垣堡가 城郭과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把守가 ‘守’라는 글자와 집의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왼쪽 주기에는 이 파수의 이름도 자세히 적혀 있다. 지도 가운데에 있는 성곽은 北行營으로서, 咸鏡北道兵馬節度使가 머무는 곳이다. 읍치 오른쪽 위에는 潼巾山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기록에는 동건산이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鍾城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종을 엎어놓았다는 것은 고위평탄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런 곳에 산성을 만들면 축성과 방어가 쉽다. 하천과 洞里의 표시도 다른 지도에 비해 아주 자세하며, ‘○○社’도 여러 개 보이고 있다. ‘社’는 함경도에서 面이나 坊에 해당되는 행정단위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북병영 오른쪽에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鍾山書院은 연산군 4년(1498)의 戊午士禍 때 이 고을에 귀양왔다가 죽은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현종 7년(1666)에 세워지고, 숙종 12년(1686)에 賜額 받았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과 읍치·북병영 등을 둘러싼 산줄기는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남색으로 표시하였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장련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일도면·이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은율군 동북쪽 일대이다. 읍치는 은율군 장련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鳳凰寺가 있는 鳳凰山이었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長命鎭과 連豊莊을 합해 만들었으며, 태종 13년(1413)에 각각 한자씩 따서 長連縣이 되었다. 장명진이 읍치가 있는 지역이며, 연풍장은 지도 왼쪽에 古縣이라 적혀 있는 곳이었다. ‘莊’이란 고려시대의 귀족이나 승려가 가지고 있었던 莊園이며, 독자적인 행정단위로서 기능했다. 연풍장을 통해 ‘莊’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으며, 縣에 맞먹는 독자성을 가진 경우도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읍치 주변에서는 社壇·厲壇과 같은 제사 공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왼쪽 위에는 대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의 松串祭壇도 보이고 있다. 국가에서 大川의 小祀로 인정하여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제사하던 곳이다. 그 왼쪽에는 이 고을의 戰船이 정박하던 防船所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의 鳳陽書院은 좌의정에까지 올라 탕평에 힘을 쏟았던 朴世采(1632-1695)를 배향하여 숙종 21년(1695)에 세워지고, 그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에는 ‘面’이라고 적혀 있지만, 아래쪽 주기의 설명문에는 面 대신에 황해도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坊’이라는 명칭이 보인다.(이기봉)
서흥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서흥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서흥군과 연탄군 동쪽에 걸쳐 있다. 읍치는 서흥군 화곡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표시된 大峴山이다. 지도 아래쪽의 하천은 재령강의 최상류에 해당되며, 위쪽의 것은 황주강의 상류이다. 재령강에는 ‘淵’의 명칭이 몇 개 보이고 있는데, 연못이라기보다는 연못처럼 물이 잔잔한 하천의 구간을 지칭한다. 지도는 東西南北의 방향을 ‘子(북)·卯(동)·午(남)·酉(서)’라는 干支로 표시하였다. 북쪽에서 읍치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특히 강조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南山이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읍치 공간을 풍수적 관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읍치에는 여러 건물이 사실적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여 선조 때 賜額 받은 禾谷書院도 보이고 있다. 이 고을은 대동강을 넘어온 적이 남하하여 한양으로 가기 위해 거의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군사시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읍치 오른쪽의 大峴山城은 둘레 20,238尺(약 6,071m)의 초대형 산성으로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주변 5개 고을의 軍餉倉과 軍器庫가 들어서 있었다. 고대부터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때에도 거란의 침입 시 중요한 방어기지 역할을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거의 관리되고 있지 않다가 임진왜란(1592) 때 처음으로 修築되어 사용되었다. 지도 위쪽으로는 붉은색 원 안에 표시된 고개(嶺)가 여러 개 보이고 있다. 대동강을 건너 황주·수안 방면으로 들어온 적을 방어하는 要害處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왼쪽의 慈悲嶺이 대동강에서 개성·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최고 요해처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중요 고개를 방어하기 위해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善積鎭과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所已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각 鎭이 담당하고 있던 고개를, 진에서 연결된 남색의 도로를 통해 구분해주고 있다. 이 진들은 모두 숙종 때 설치된 것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36)을 거치면서 강화된 국방체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서로 중요성을 구별하였으며, 驛院과 기타의 고개(嶺·峴·古介 등)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烽燧는 호응관계를 붉은색 직선으로 표시하였으며, 도로 역시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달리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이밖에 사찰과 창고(倉·屯으로 표시됨) 및 다리 등의 정보가 자세하며, 面은 지도에는 없고 위쪽의 주기에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장성부는 지금의 전남 장성군 장성읍, 남면,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 대부분, 서삼면, 진원면, 황룡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장성군 장성읍 聖山里에 있었다. 장성부는 영산강 유역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으로는 노령을 넘어 정읍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광주에 연결된다. 조선 초에 원래 長城縣과 珍原縣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두 고을이 衰殘하자 1599년(선조 23)에 합쳐서 長城縣으로 만들었다. 이후 1655년(효종6)에 장성현이 입암산성의 主鎭管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지도에도 외동면에 古珍原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비교적 산지가 많은 지역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봉우리의 방향은 사방이 다르다. 북쪽으로는 노령과 白巖山의 산지가 포진해 있고 黃龍江이 고을의 남쪽을 흘러 나주의 영산강에 이른다. 지도에도 이 지역 최고의 요해처인 노령의 모습과 이를지키는 笠巖山城이 잘 표현되어 있다. 笠岩山城은 조선 초까지는 석성 터만 남아 있던 곳인데, 임진왜란을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대대적으로 修築되었다. 백암산에는 지금의 백양사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 그려져 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淨土寺로 불려졌다. 읍치 북쪽의 靑巖驛은 속역 11개를 거느린 찰방역으로 원래 나주에 있던 것이 옮겨온 것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河西 金麟厚를 배향한 筆巖書院이 西一面에 그려져 있고 그 밖에 사액되지 않은 서원들도 자세히그려져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제언의 표시가 상세한 점도 특징적이다.(오상학)
만경현은 지금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진봉면, 광활면, 공덕면, 청하면, 성덕면과 부안군 동진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일대에 있었다. 전라도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이다. 지도는 육지부에 있는 만경현 지역과 바닷가에 있는 고을 소속의 섬들을 같이 그리다 보니 전체 도면에 비해 고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지도 서쪽에는 여러 섬들이 그려져 있는데, 현재의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해당한다. 진영이 설치되었던 선유도를 중심으로 장자도, 무녀도, 신시도, 곶리도, 횡경도 등의 섬들이 포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로 향하는 무역항로의 기항지이자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조운선들이 이곳에 정박하면서 바람을 기다렸던 곳이다. 조선초기부터 군산도였던 선유도에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때 옥구현 북쪽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같이 이동하게 되자 이곳의 지명은 古群山島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의 고군산진은 1624년에 다시 설치되어 別將과 防牌船 1척을 두었고 1637년에 戰船을 두었다. 이어 1675년에 첨사진으로 승격되었고 1781년에 營將을 두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陵堤라는 저수지가 표시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8,100척인데 지금도 이 일대의 가장 큰 저수지로 기능하고 있다.(오상학)
용담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최근 용담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수몰된 지역이기도 하다. 평지가 적은 산간 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이지만 고을의 범위는 비교적 넓다. 고을의 진산은 龍岡山으로 그 북쪽에서 뻗어오는 맥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남이면 황산마을 앞에는 금강이 그 지류인 주자천과 합수하여 三川을 이루고 있는데 그 곳은 예전에 이름이 馬山潭으로서 龍潭이라고도 불리었다. 고을의 이름은 바로 이 용담에서 유래한 것이다. 南二面에 그려진 三川書院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의 顔子·程子·朱子·諸葛亮 등을 배향하였다. 1667년(현종 8)에 현령 洪錫이 창건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되었다. 읍치 서남쪽에 위치한 珠 山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산으로 이 산에서 북쪽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이 된다. 산 기슭에는 崇巖寺가 그려져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天皇寺가 바로 이 절로 신라 헌강왕 때 道人 無染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西面의 주자천 가에는 수려한 경치로 이름난 臥龍岩과 半日岩이 그려져 있다. 반일암은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라 한다.(오상학)
흥양현은 지금의 전남 고흥군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고흥읍 옥하리, 행정리, 서문리 일대에 있었다. 남해안의 고흥반도에 위치해 있어서 해안 방어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지도에도 위쪽으로부터 呂島鎭, 蛇渡鎭, 鉢浦鎭, 鹿島鎭 등이 포진해 있다. 흥양현은 원래 장흥부에 딸린 高伊部曲이었는데 고려 충렬왕 11년 고을 아전 柳庇가 통역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이 있어 高興으로 이름을 고쳐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세종 때 장흥부의 南陽縣과 합쳐져 흥양으로 된 것이다. 지도에는 고흥반도의 육지부 모습과 더불어 바다의 섬들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여부와, 宜松山·放馬處 등의 섬의 기능까지 기재되어 있다. 해안에는 이 지역이 지니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봉수도 여럿 축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을 남쪽의 鉢浦鎭城은 1490년(성종 21)에 축성되었고 전하며, 1589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 때 발포 만호로 부임하기도 했다. 占巖面의 八田山 기슭에는 이 지역의 명찰인 楞伽寺가 그려져 있다. 능가사는 삼국시대 아도화상이창건하였으며 팔영산 하단부에 있는 평지형 사찰로 일명 보현사라전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고을은 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국가에서 관리하는 송전, 봉산이 설치되어 있고 말을 키우던 곳이 곳곳에 산재한 중요한 지역이었다.(오상학)
해남현은 지금의 전남 해남군 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문내면, 북일면, 산이면, 삼산면 서부, 현산면, 화산면, 화원면, 황산면과 신안군 비금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산지의 모습이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특히 소나무를 장양하던 宜松山의 경우 나무를 그려 울창한 송림을 표현하였다. 읍치와더불어 서남해안 수군의 총본영인右水營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우수영은 조선 초기 무안 대굴포의 水軍處置使營에 있다가 1440년(세종 22)에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해남의 黃原으로 옮겼다. 그 후 1464년(세조 10)에 節度使營으로 승격되었다. 지도에도 영내의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해안 船所에는 전선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도 읍성의 모습과 더불어 관아 건물이 상세하다. 특히 읍성의 서문 부근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祠宇가 그려져 있다. 黃原面의 북쪽 지역에는 목장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珍島의 屬場인 黃原場이다. 우수영의 남쪽에는 울둘목이라고 불리는 鳴梁 해협이 표기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왜군을 대파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을의 남쪽에는 이 지역 최고의 명찰인 大芚寺가 여러 건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절은 대흥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31본산 가운데 하나이다. 544년(신라 진흥왕5)에 阿度和尙이 創建하였는데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오상학)
담양부는 지금의 전남 담양군 담양읍, 봉산면, 무정면, 대덕면, 금성면, 용면, 월산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담양읍 객사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위로는 순창, 아래로는 창평에 이어진다. 고을의내부를 영산강의 지류인 白川과 大橋川이 감돌아 나가고 있다. 지도에는 고을 주변의 산세가 여러 시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객사, 아사 등의 관아 건물과 더불어 臥治軒, 鍊武亭 등의 건물도 그려져 있다. 동북쪽에 위치한 金城山城은 石城으로 1597년(선조 30)에 개축하였고, 언덕을 연하여 성을 쌓았다. 1653년(효종 4)에 重修하였는데,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성내에 있는 補國寺의 승려와 담양, 순창, 옥과, 창평, 동복 등의 고을 주민이 유사 시 산성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將臺의 모습과 大將廳이 크게 강조되어 있다. 향교 옆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인 義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창건되어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柳希春(1513-1577)을 배향한 서원이다. 유희춘은 1568년(선조 1)부터 1577년(선조 10)까지 10년간의 公私의 사실을 기록한 ≪眉巖日記≫의 저자로 유명하다.(오상학)
신창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잡아 배치하였다. 내포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아산, 아래로는 예산과 연결된다. 鎭山은 읍치의 서쪽에 있는 城山이다. 지도에는 鶴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大東地志≫에 의하면 여기에는 둘레 1,213척의 산성이 있었다. 이 고을은 고려시대부터 인근 고을의 租稅를 거두어 해상으로 조운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도 북쪽 해안 근처에 海倉이 그려져 있다.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홍선은 내포에서 아산으로 이어지는 대로이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기도 하다. 동남쪽에는 昌德驛이 위치해 있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1필, 중등마 5필, 하등마 4필이 있었다.(오상학)
대흥군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대흥면 동서리와 교촌리 일대에 있었다. 현재는 예당저수지의 축조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다. 금북정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예산, 아래로는 청양과 연결된다. 지도는 고을의 진산 鳳首山이 있는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봉수산에는 봉수산성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이 산성은 福信을 비롯한 백제의 부흥세력이 항거했던 任存城으로 알려져 있다. 남쪽 白月山의 봉우리에는 胎室이 보이는데, 1681년(숙종 7)에 父王인 현종의 御胎를 이 곳에 묻고 이로 인해 고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사찰과 암자도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서쪽의 大蓮寺는 656년(의자왕 16)에 백제부흥군의 승장 도침선사가 창건했고 그 후 1468년에 중창을 거친 사찰로 현재 경내에는 고려말기 양식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의 향교 옆에는 牛泉祠宇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牛泉 李若水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이약수는 寒喧堂 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강원도 동해안인 평해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31년 대흥으로 옮겨져 생을 마감했던 인물이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 다 물이 많으므로 물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평하고 있다. 이 고을에는 원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남천변에는 落花臺가 그려져 있는데, 속담에는 稽州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이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서쪽의 高塘浦 근처에 있는 폭포는 지금의 옥계폭포로 일명 박연폭포라고도 한다. 20여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절경을 이루는데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명소이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는 고을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험하지 않고, 땅이 기름진데 물이 많아서 한재가 적다고 한다. 읍치에는 원래 둘레 2,410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 여백의 기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지도 제작의 당시에는 이미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에서 가장 큰 나루터는 고을 서쪽에 있는 深川渡이다. 이 나루터는 대로가 지나는 곳이며 옥천의 赤登津에 이어진다. 고을의 동쪽에 보이는 重華寺는 신라 진평왕 때 義湘祖師가 창건했다 한다. 고려 普覺國尊·登階祖師·擽山祖師 등이 중수했다. 읍치 서남쪽에 위치한 草江書院은 원래 晦谷에 있었는데 1676년(숙종 2)에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로 옮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오상학)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 고을의 명산은 속리산으로 지도에도 강하게 부각되어 천왕봉, 문장대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九峰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中祀에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사찰인 法住寺가 있는데 지도에도 대웅전, 오층탑, 용화각 등의 건물이 잘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蛇山인데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북쪽에 보이는 산성은 含林山城으로, 돌로 쌓았고 둘레가 1,488척이다. 고을 남쪽의 元巖驛은 고려 공민왕이 복주에서 청주로 올 때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오상학)
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도산면·녹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에 표시된 하천은 거의 낙동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현재는 약간 하류 쪽에 안동댐이 건설되어 있어, 읍치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이 수몰되어 버렸다. 예안현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退溪 李滉(1501-1570)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지도에도 그가 태어난 退溪舊宅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도산면 도계리에 보존되고 있다. 이황의 고향답게 4개의 書院과 1개의 書堂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은 이 고을 토계리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했다. 이황이 죽은 4년 후인 선조 7년(1574)에 이황을 배향하여 도산서원을 창건하였고,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이 후 이황의 제자인 趙穆(1524-1606)을 추가로 配享하였는데, 지금도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易東書院은 고려 말에 이 고을 예안에 살면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노력한 易東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창건하였고, 숙종 10년(1684)에 賜額받았다. 그 나머지는 사액서원이 아니며, 도산서원 이외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毁撤되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文廟가 있었던 鄕校와 토지신·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社稷壇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孤山亭과 丹沙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강가에 절벽이 솟아 있는 등 이 지역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丹沙는 이황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협곡이 펼쳐져 있어 丹沙峽이라고도 한다.(이기봉)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단산면·부석면과 풍기읍의 수철리·창락리 일대, 안정면의 묵리·여륵리 일대와 봉화군의 봉화읍 적덕리·문단리·도촌리·화천리, 개단리와 가평리를 제외한 물야면, 봉성면의 우곡리, 법전면의 법전리·소지리, 춘양면의 소로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순흥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고을에는 3개의 越境地가 있었다. 昌樂面은 현재의 풍기읍 창락리 일대이며, 大龍山面은 안정면 묵리 일대, 臥龍面은 봉화군 봉화읍·봉성면·춘양면에 일부씩 걸쳐 있었다. 이렇게 행정구역이 복잡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던 昌樂驛·大龍山部曲·甘谷部曲 등이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땅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白雲洞書院은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安珦(1243-1306)을 배향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명종 5년(1550)에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에게 아뢴 후, 노비와 田結 및 紹修書院이라는 額書를 받아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55호로 잘 보전되고 있다. 이 백운동서원은 일반적으로 풍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흥부는 세조 3년(1458)에 이곳에 귀양 왔던 錦城大君(?-1457)과 府使 李甫欽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혁파되었다. 숙종 9년(1683)에 이 고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곳은 당시에 풍기의 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풍기의 백운동서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丹溪書院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金淡(1416-1468)을 배향하여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되고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총 4개의 고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여 ‘險阨’이라는 표시를 특별히 해 놓았다. 이 중 竹嶺이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지도에서도 붉은 색으로 도로를 표시하여 가장 중요한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죽령 밑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9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昌樂驛이 보이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浮石寺가 높은 築臺 위에 건물을 세워놓은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이 사찰이 당시에도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절 안에 뜬 돌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국보 17호인 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남구의 장기면·구룡포읍과 대보면의 대보리·강사리, 동해면의 상정리·중산리·공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巨山이다. 읍치는 산 중턱의 평탄한 지형 위에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石築의 작은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성곽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상당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 위쪽에는 牧場城門이 서북-동 방향의 긴 城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城은 군사용이 아니라 이 목장에서 길렀던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서북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특별히 城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輿地圖書≫에는 冬乙背串牧場에 331마리의 말을 키웠다고 나오며, 울산목장에 속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오른쪽 끝은 현재의 장기곶에 해당된다. 동북쪽 바닷가로 더 튀어 올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市嶺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竹林書院은 숙종 33년(1707)에 송시열(1607-1689) 등을 배향하여 창건하였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문경현은 지금의 정촌동과 영신동을 제외한 문경시 시내, 문경읍·가은읍·마성면·농암면 전체, 호계면의 구산리·우로리·별암리·견탄리·호계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主屹山이다. 面의 이름에는 조선 초까지도 독자성이 유지되다가 완전히 통합된 고을의 이름이 남아 있다. 加가 붙은 면의 이름은 加恩縣의, 戶가 붙은 면의 이름은 虎溪縣의 지역이었다. 이 고을에는 한양-동래를 잇는 도로 상에서 가장 중요한 2개의 관방처가 알려져 있다. 이런 곳으로는 두 곳이 있다. 첫째가 바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鳥嶺이다. 임진왜란 때 조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여, 숙종 34년(1708)에 山城을 조성하였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지형을 이용하여 세 개의 關門을 설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鳥嶺關 ·中城·下城의 모습을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가 지도 가운데의 兎棧이다. 토잔이란 토끼가 겨우 뛰어갈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串岬遷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遷이란 벼랑길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지형조건 때문에 이곳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왼쪽으로는 姑母城이, 맞은편에는 姑父城이 표시되어 있어, 옛날부터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의 幽谷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곳으로 18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주흘산 밑의 神廟는 主屹山祠로서 봄·가을에 香을 하사받아 小祀를 지내던 곳이다. 그 위쪽의 御留殿舊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곳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에는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황장봉산이 표시되어 있다. 사찰도 아주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이 중 加北面 위쪽의 鳳岩寺가 가장 유명했다. 이 사찰은 신라 헌강왕 5년(879)에 智證國師 圓悟가 창건하여 禪風을 일으키고 희양산파를 이룬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보물 137호로 지정된 지증대사석조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가현내면에는 蕭陽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숙종 18년(1688)에 鄭彦信(1527-159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밖에 加北面에 있는 하천은 경치가 좋아 현재도 선유동계곡으로 유명하며, 지도에도 2개의 亭子가 표시되어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이기봉)
김해부는 지금의 김해시 전역과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낙동강 서쪽의 강서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김해시내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3리에 있었다는 盆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김해부는 원래 駕洛國 또는 金官國이 있던 곳으로,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항복하여 김유신 가문의 食邑이 되었다. 이후 5小京 중의 하나인 금관소경으로 정해졌으며, 고려시대에도 主縣으로 기능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항복하였기 때문에 다른 가야 소국에 비해 역사적 상황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首露王陵과 그 왕비인 許后陵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향·부곡을 제외하면 속현이 없었음에도, 주기를 보면 호수 9천을 넘는 큰 고을이다. 이것을 통해 신라의 5소경이 다른 군현에 비해 영역과 호수 면에서 훨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大山面 지역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즉 독자성이 유지되었던 太山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 해안가에는 수도인 한양으로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옮기기 위해 설치한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의 船所는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선소가 待變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오는데, 전선>병선>사후선의 순서로 규모가 컸다. 書院은 2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新山書院만이 南冥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했던 封山과 화살촉이나 피리를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箭竹田·大篁竹田·小篁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에는 어업이나 소금 생산지로 알려진 鳴旨島 등의 섬이 알기 쉽게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다리(橋)의 표시가 아주 자세함이 특징적이다.(이기봉)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원래 강원도에 속했는데, 1962년에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아래쪽 해변 가의 衙舍·司倉이 있는 곳이다. 읍치 주변의 산세가 環抱型으로 그려져 있어, 풍수적 관념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왼쪽의 ‘壬坐’란 邑治가 북쪽(壬)을 등지고 입지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 가운데에 있는 安逸王山이다. 지도는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지도 위쪽의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왼쪽의 것이 현재 왕피천·불영천으로 불리는 하천이고, 그 오른쪽이 남대천이다. 현재 왕피천과 불영천은 기암절벽의 깊은 계곡과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흐르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왕피천의 경우 遠南面 남동쪽의 영양 지역으로부터 흘러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도 맨 위쪽은 낙동강 최상류에 속한다. 지도 아래쪽 바닷가에는 鬱陵島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당시에 울릉도는 울진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流民들의 피난처라고 인식하여,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空島政策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이주민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울릉도가 실제 위치보다 해안가에 훨씬 가깝게 그려져 있다. 실질적인 거리보다는 그 방향에 이 섬이 있다는 것만 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의 순으로 그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적황색 도로에는 3개의 역이 보이고 있다. 가장 오른쪽 興富驛에 표시된 ‘館亭’에서의 館은 驛의 館舍를 의미한다. 지도 왼쪽의 주기에는 역에 딸린 말의 종류와 수도 자세히 적어놓았다. 도로 위의 중요한 고개는 노란색 사각형 안에 표시하여 눈에 잘 띄도록 하였다. 지도 위쪽에 좀이 먹어 약간 잘 안 보이는 사찰이 佛影寺이다. 이 절은 신라 진덕왕 5년(651)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無影塔이라는 3층석탑이 신라 때의 유일한 문화재로 남아 있으며, 그 외에 보물 703호 응진전 등이 보전되어 있다. 기타 망양정 위쪽에는 석회동굴인 聖留窟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연풍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장연면과 충주시 상모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풍면 삼풍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는 동쪽을 위쪽으로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의 伊火峴(현재의 이화령)에서 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2개의 작은 유역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원래 오른쪽에는 長延縣이, 왼쪽에는 長豊縣이 있었다. 태조 3년(1394)에 두 고을을 합쳐 하나의 고을로 만들었으며, 태종 3년(1403)에 두 고을의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延豊縣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水回面이 있던 곳은 원래 충주 소속의 水回村이 있던 곳으로, 성종 7년(1476)에 이 고을에 합쳤다. 지도 맨 위쪽에 창고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은 현재 하늘재 밑의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다. 이 하늘재는 鷄立嶺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阿達羅尼師今 3년(156)에 처음 열었다고 나온다. 이 밖에도 고개의 표시가 아주 자세하다. 특히 경상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鳥嶺과 伊火峴(현재의 梨花嶺)도 보이고 있으며, 조령에는 鳥嶺關의 모습을 실제처럼 그려 넣었다. 읍치 주변에는 鄕校·城隍堂·潄玉亭을 남색의 사각형 안에 표시하는데, 面의 표시와 같아 약간의 혼동을 주고 있다. 이 중 성황당은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의 하나로서,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주기에 표시된 面의 이름과 지도상의 이름이 다른 점, 古沙里面은 古沙里로만 표시한 점 등도 눈에 띈다. 지도 위의 내용과 주기의 내용 차이는 어떤 역사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이 밖에 사찰·역·창고·봉수의 표시도 아주 자세하게 이루어져 있다.(이기봉)
회령부는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회령군과 부령군의 관해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서쪽과 동쪽의 일부를 제외한 회령시, 나진시의 서쪽 일부이다. 읍치는 회령시 남문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서북)의 鰲山이다. 이 고을은 세종 때 여진족이 거주하던 斡木河 지역에 김종서(1390-1453)가 개척하여 설치한 동북 六鎭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남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에 도착하는 산줄기가 남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지도 위쪽에는 동해가, 아래쪽에는 두만강이 표시되어 있다. 동해쪽에 있는 이 고을의 땅은 현재 라진시 낙산동·이진리·관해리 일대이다. 읍치에는 邑城이 보이고 있는데, 둘레 10,776尺(약 3,233m)에 해당되는 대형 성곽이다. 두만강 변에는 이외에도 종3품의 兵馬僉節制使가 파견된 高嶺鎭·甫乙下鎭(乶下鎭이라고도 쓴다)과 현재의 국경초소에 해당되는 수많은 把守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는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古豊山堡가 표시되어 있는데, 豊山堡가 무산으로 옮겨가면서 이와 같은 이름이 사용되게 되었다. 지도는 산과 산줄기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며, 조선후기의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방식이다. 또한 서쪽에서 읍치와 보을하진까지 연결된 산줄기가 특별히 남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읍치까지 이어지는 산맥의 흐름을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관념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기타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붉은색·노란색으로 표시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장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장연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인천직할시 백령면과 황해남도 장연군·룡연군·태탄군의 서쪽 일대이다. 읍치는 장연군 장연읍에 있었다. 지도의 표현 방식이 같은 책의 다른 지도와는 약간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심부의 산줄기를 지도 한가운데에 있는 御營屯 쯤에서 바라보이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와 같은 방식은 회화식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정확성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 지도에도 일부 반영되고 있다. 여기서 어영둔은 御營廳에서 折受한 屯田을 의미한다. 도로도 정사각형의 方案에 맞추기 위해 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붉은색·황색·연초록색의 순서로 중요도를 표시하였다. 아래쪽의 백령도·대청도·소청도도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정된 지면에 표시해야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세 섬을 方案이 없는 부분에 그린 것은 실제의 거리보다는 방향 같은 정보만을 담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위에 있는 島沙乃島·陸沙乃島 등의 위치 정보는 거의 정확하지만, 크기에 대한 정보는 실제보다 훨씬 크게 표시되어 있다. 왼쪽의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간 곳은 ‘장산곶매’로 널리 알려진 長山串이다. 중국의 山東半島와 가장 가까운 곳이며, 평안도를 왕래하는 뱃길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인지 조선에서도 祀典에 小祀로 정한 후 봄·가을로 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長山祭堂이 바로 그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이곳에 있는 海安面은 태종 16년(1416)에 이 고을에 통폐합된 海安縣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는 군사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실려 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助泥鎭과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된 吾叉鎭, 그리고 초소에 해당되는 把守와 海防要衝處 역시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백령도에는 이 당시에 獨鎭이 설치되어 있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灣으로 표시된 곳에는 本府防船所·吾叉防船所·助泥防船所 등이 보이고 있는데, 각 소속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다. 여기서 본부방선소는 장연부 소속임을 의미한다. 조니방선소 위쪽에는 僧將所管이란 문구가 보이는데, 金沙寺에 堡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僧將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 아래쪽에는 私封松田이 표시되어 있다.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封山으로서, 봉산이 松田으로 기록된 경우는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밖에 사찰·면·역참·봉수·진도에 대한 내용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이기봉)
수안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수안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수안군과 연산군 및 연탄군 동북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수안군 석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遼東山(547m)이다. 산줄기가 모두 연결된 것처럼 표현되어 있으며, 지도 오른쪽 위에는 谷山 玄武山에서 이 고을의 山脈이 들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전형화 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오른쪽 위쪽 부분에 있는 彦眞山(1,120m)이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鎭山인 읍치 위쪽의 요동산이 가장 크게 표시되어 있는 등, 산의 높이나 규모에 대한 정보는 거의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지도 위쪽의 하천은 대동강의 지류 중 가장 큰 것의 하나인 남강이다. 전통시대에는 지도에서처럼 綾城江 또는 能成江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아래쪽의 하천은 예성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원 안에 표시된 고개이다. 이 고개들은 최고의 요충지로 인식된 곳이었으며, 각각 文山鎭·位羅鎭에서 방어를 담당하였다. 위쪽의 주기에는 각 鎭에서 방어하는 고개가 잘 분류되어 있는데, ‘次知防守’란 문구는 ‘담당하여 방어한다’는 뜻이다. 이 두개의 진은 모두 숙종 6년(1680)에 설치되었으며,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었다.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강화된 북쪽 방어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이밖에 건물 모양의 그림과 함께 표시된 정보는 사찰·창고·역원·서원 정도이다. 특히 사찰의 정보가 자세한 것을 통해 崇儒抑佛의 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面은 세로로 긴 작은 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어, 다른 정보와 구별되게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눈에 확 띄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읍치 오른쪽의 龍溪書院은 遂安君 李連松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정읍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시내와 북면, 입암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정읍시 연지동, 미창동 일대에 있었다. 정읍은 호남정맥의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泰仁, 남으로는 노령을 넘어 長城과 연결된다. 지도 하단에 그려진 노령은 이 지역의 관문으로 남쪽 지역으로 연결되는 호남대로의 길목에 해당한다. 이 길목을 지키는 관방으로서 笠巖山城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의 상단 여백에는 고개의 險夷를 기재하여 군사적 요충을 파악하고 있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鷹山이다. 읍치에는 동헌을 비롯한 주요 관아 건물이 그려져 있고 생원, 진사들이 모여 강학하던 養士齋의 모습도 보인다. 단풍으로 유명한 동남쪽의 내장산에는 이 지역의 名刹인 靈隱寺가 그려져 있다. 고려 말년에 智嚴 스님이 처음으로 거처하였다고 전해진다. 읍치 서쪽의 茅川에는 考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고암서원은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기 때문에 1695년(숙종 21) 송시열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같은 해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고을 남쪽에는 井海里部曲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水曲部曲을 지칭하는 것이다.(오상학)
여산부는 지금의 전북 익산시 여산면, 낭산면, 망성면과 논산시 연무읍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읍치는 여산면 여산리에 있었다.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을 끼고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는 지역의 모습이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읍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동쪽의 天壺山으로 여기에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서북쪽 금강변의 黃山은 조선후기 포구로 유명한 강경포가 있던 곳으로 黃山書院과 八卦亭이 그려져 있다. 황산서원은인조 때 낙향한 沙溪 金長生(1548-1631)이 이황, 이이, 성혼을 향사했던 서원으로 나중에 김장생이 추가로 배향된 후 1655년(현종 6)에 竹林書院으로 賜額을 받았다. 팔괘정은 김장생이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이후 송시열과 같은 이도 이곳에서 강학했다. 지도 상단의 여백에는 대표적인 私亭子로 표기되어 있다. 읍치 북쪽 충청도와의 접경 지역에는 皇華亭이 표시되어 있는데 전라도의 新舊 관찰사들이 교대하던 곳이다.(오상학)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도에 속하지만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한다. 따라서 문화적으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害處였다. 지도에도 이러한 고원 분지형의 고을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고을 동북쪽의 八良峙를 통해 경상도와 이어지고 서쪽의 女院峙를 통해 남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들 고개 근처에 성을 쌓아 지켰던 흔적이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이 미쳤던 곳으로 고을의 곳곳에 이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편의 荒山은 고려 우왕 때 왜적이 함양·운봉을노략질하자, 인월역에 주둔한 왜적을 이성계가 섬멸하였던 곳이다.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 운봉현감 박광옥이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지도에도 산 기슭에 비각을 그리고 碑殿이라 표기하였다. 또한 동쪽에 당시의 죽은 왜적의 혈흔이 남아 있다는 血巖이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에는 선종 9산의 하나로 828년(신라 흥덕왕 3)에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의 모습이 보인다.(오상학)
동복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지류인 동복천이 고을을 휘돌아 나가며 곳곳에 비경을 이루었지만 현재는 동복댐의 건설로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기었다. 지도에도 동복천을 따라 萬景臺, 赤壁 등의 절경이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鎭山은 고을 동남쪽에 있는 母后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蘿茵山이었는데 고려 공민왕이 여기에 피난할 때 이 산의 덕이 母后와 같다 해서 모후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읍치의 주맥이 동남쪽에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氷庫가 草屋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읍치 동쪽에는 甕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일명 철옹산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며 입암산성, 금성산성과함께 전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시에는 이 고을 현감을 지내고 진주성에서 순국한 황진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 하며 동학이 활발한 때에는 오계련이 이곳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읍치 북쪽의 서원은 道源書院을 말한다.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되었는데 崔山斗, 鄭逑 등을 배향하였다. 적벽 위쪽에 있는 勿染亭은 중종 명종 대에 성균관 전적 및 구례·풍기군수를 역임한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오상학)
조선시대의 연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두마면, 벌곡면, 양촌면, 부적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연산면 연산리에 있었다. 連山이란 지명은 산들이 연달아 뻗어간다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고을의 동쪽으로 금남정맥의 줄기가 계룡산까지 이어진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이 마지막 격전을 치렀던 황산벌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지도는 大芚山이 위치한 동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전역이 같은 축척으로 그려져 있으나 읍치 주변에는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명당임을 부각시켰다. 읍치의 서쪽에는 古山城基라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의 도성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黃山城을 말한다. 도로는 색채를 달리하여 위계를 표현하였는데, 대로는 홍선, 중로는 청선, 소로는 황선으로 표시하였다. 이 지역은 다른 고을보다 서원이 비교적 많이 세워져 있었다. 龜山書院(연산면 오산리)은 1702년(숙종 28)에 창건되어 윤전, 윤원거, 윤순거를 배향하던 서원이다. 읍치 서쪽에 위치한 遯巖書院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고 1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또한 休亭書院은 1700년(숙종 26)에 창건하고 1705년(숙종 31)에 준공하여 휴계 유무 선생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瓦南峙 기슭에 위치한 忠谷書院은 1680년(숙종 6)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어 백제의 계백장군과 조선의 사육신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덕산현은 현재 예산군 삽교읍, 덕산면, 고덕면, 봉산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덕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는 내포 지방의 명산인 가야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삽교천이 아산만으로 흘러간다. 이 지역에는 원래 德豊縣과 伊山縣이 있었는데, 1405년(태종 5)에 이산현의 인구와 형세가 피폐하다 하여 하나로 합치고 덕산이라 하였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는데, 산봉우리의 방향은 모두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는 가야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이 서쪽에 위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고을에도 월경지가 있었는데 동북쪽 모퉁이에 그려진 非方串面이 그곳이다. 여기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월경지의 기능이 세곡의 운반이나 해산물의 수취와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서쪽의 德崇山에는 이 지역 최고의 명찰로 알려진 修德寺가 그려져 있다. 이 절은 현존 기록으로 볼 때 고려 충렬왕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비구니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가야산에는 가야사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남연군묘에 있던 사찰로 당시 수십 개의 예속사찰을 거느린 대찰이었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그 옆에 西林寺도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봉림저수지에 잠겨 버렸다.(오상학)
영동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영동읍, 용산면, 심천면, 양강면, 학산면, 용화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동읍 계산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나온 맥이 지나면서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이다. 따라서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가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 몹시 낮거나 평평치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모두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간수가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러우며 추악하거나 놀라운 형상이 없다. 땅이 기름진데 다 물이 많으므로 물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평하고 있다. 이 고을에는 원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남천변에는 落花臺가 그려져 있는데, 속담에는 稽州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이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서쪽의 高塘浦 근처에 있는 폭포는 지금의 옥계폭포로 일명 박연폭포라고도 한다. 20여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절경을 이루는데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명소이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은 높고 물을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 전한다. 옥천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이 그것이다. 이들 현이 있던 지역은 각각 利內面, 安內面, 陽內面이다. 이곳에는 外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을은 혁파되었지만 과거의 중심성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을 남서쪽 智勒山 기슭에는 寧國寺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고려의 韓文俊의 撰한 圓覺의 비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오상학)
보은현은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수한면, 탄부면, 삼승면, 내북면, 산외면, 내속리면, 외속리면, 마로면 일대에 해당한다. 보은현은 경상도에 속했다가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 이속되었다. 읍치는 보은읍 교사리 부근에 있었다. 지리산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청주, 동으로는 경상도 상주, 서로는 회인, 남으로는 청산과 접하고 있다. 이 고을의 명산은 속리산으로 지도에도 강하게 부각되어 천왕봉, 문장대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九峰山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中祀에 등재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사찰인 法住寺가 있는데 지도에도 대웅전, 오층탑, 용화각 등의 건물이 잘 그려져 있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義信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 신라 성덕왕이 중수하고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眞表가 중창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다시 벽암이 중수하였다. 捌相殿, 磨崖如來倚象, 四天王石燈, 雙獅子石燈, 石蓮池 등의 국보와 石槽, 石橋, 珊瑚殿, 金身丈六像, 同幢, 75자 높이의 미륵불 등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상전은 신라시대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고을의 주산은 읍치 북쪽의 蛇山인데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북쪽에 보이는 산성은 含林山城으로, 돌로 쌓았고 둘레가 1,488척이다. 고을 남쪽의 元巖驛은 고려 공민왕이 복주에서 청주로 올 때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오상학)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과 지보면, 개포면의 서쪽 7개리, 풍양면의 북쪽 8개리, 의성군 안사면의 쌍호리·월소리·신수리, 문경시 영순면의 동쪽 6개리에 해당된다. 지도상의 읍치는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그러나 1856년의 큰 장마로 인하여 관아건물이 떠내려가자 용궁면 읍부리로 옮겼다. 이 지역은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맨 아래쪽의 낙동강 본류, 중간 부분의 내성천, 가장 왼쪽의 금천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 오른쪽의 낙동강 본류에는 ‘龜潭江’이 적혀 있는데, 낙동강 전체가 아니라 표시된 근처에서만 부르던 명칭이다. 그리고 낙동강 변에 知保津과 河豊津 등 2개의 나루만이 적혀 있지만, 실재로는 훨씬 많이 있었다. 이러한 나루의 명칭은 나루 그 자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 의해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아래쪽의 長安菴 맞은편 지역은 하천이 거의 180˚ 돌아 흘러가는 곳으로, 장안암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장소의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지도에는 書院·祠·社가 각각 2개씩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중 三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이황(1501-1570)·유성룡(1542-1607)을 배향하여 인조 21년(1643)에, 尙節祠는 정몽주 피살 후 의령으로 귀양 갔던 安俊(?-?)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浣潭里社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鄭光弼(1462-1538)과 그 조상·자손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세워졌다. 각각의 배향 인물로 보아 書院·祠·社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社는 일개 가문에서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寺刹도 4개나 표시되어 있어, 유교 사회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안동부는 녹전면·도산면·예안면을 제외한 안동시 전체,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석포면·소천면·재산면과 봉화읍의 대부분·법전면의 일부·춘양면의 일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안동 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930년에 고려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태조가 승리하였고, 그 과정에서 金宣平·勸行·張吉 등 안동의 호족세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안동은 고려시대 내내 주변의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다. 이후 지방관이 파견된 속현은 독자적인 고을로 남게 되었지만, 조선 초까지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은 그대로 안동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월경지가 많이 생기게 되었고, 행정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지도 왼쪽의 감천면은 甘泉縣, 그 위쪽의 내성면은 退串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1331-1332, 1340-1344) 때 승격된 奈城縣, 그 오른쪽의 춘양면은 원래 加也鄕이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승격된 春陽縣, 그 오른쪽의 소천은 小川部曲, 그 아래쪽의 재산면은 원래 德山部曲이었다가 고려 충선왕(1309-1313) 때 승격된 才山縣의 땅이었다. 이들 지역은 지도에서의 표현과 달리 감천면, 내성면, 춘양면·소천면·재산면 등 3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월경지였다. 월경지는 아니지만 고려시대까지 원래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안동의 땅으로 편제된 속현의 명칭이 面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 ‘臨’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臨河縣, ‘豊’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豊山縣의 땅이었다. 이밖에도 길안면은 원래 吉安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 때 승격된 吉安縣, 일직면은 一直縣의 땅이었다. 읍치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 지도보다 훨씬 많은 인문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의 낙동강 가에는 暎湖樓를 비롯하여 歸來亭·石門亭·臨淸閣·伴鳩亭·白雲亭 등 수많은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들 정자 중 영호루·귀래정·반구정 등은 지금도 안동시의 낙동강변에 복원되어 보존하고 있다. 읍치에는 慕恩樓와 關王廟도 표시되어 있다. 관왕묘는 이미 멸망한 明에 대한 조선후기 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징적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援軍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薛虎臣이 왜란을 평정한 것은 武安王 關于의 도움이라며 세운 것이다. 아울러 양반의 세력이 강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書院도 11개나 표시되어 있다. 이들 서원 중 賜額書院으로는 李滉(1501-1570)·柳成龍(1542-1607)·金誠一(1538-1593) 등을 배향한 虎溪書院, 權橃(1478-1548)을 배향한 三溪書院, 具鳳齡(1520-1585) 등을 배향한 周溪書院, 유성룡을 배향한 屛山書院 등 4개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는 병산서원만이 살아남아 사적 260호로 지정·보전되고 있다. 마을(村)의 이름으로는 유성룡의 고향인 河回가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 마을의 위상이 높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울러 낙동강의 根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氏族의 始祖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강화가 하천에 대한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사찰 역시 서원이나 정자 못지 않게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창녕현은 창녕군의 창령읍·대지면·유어면·이방면·대합면·성산면·고암면과 남지읍의 월하리·시남리·대곡리·반포리·칠현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령읍 교상리·말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있는 火旺山(757m)이다. 지도는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아래쪽의 낙동강은 왼쪽(북)에서 오른쪽(남)으로 흘러 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여러 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아울러 梨旨浦·樓仇澤도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우포를 비롯한 늪지가 보전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대가 낮아 홍수시 낙동강의 물이 역류하여 올라오기 때문에 광범위한 습지가 유지·보전될 수 있었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山城은 화왕산성으로서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石築으로 쌓은 대형의 산성이다. 읍지에는 9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의 못이 龍池로 표현된 것 같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바로 이 산성에 들어와 紅衣將軍으로 칭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나오고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冠山書院은 영남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曺植(1501-1572)과 이황(1501-1570) 모두에게서 배운 광해군 때의 학자 鄭逑(1543-1620)가 서재를 만들어 강학하던 곳이다. 그가 죽은 후 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숙종 37년(1711)에 사액 받았다. 그 왼쪽의 燕巖書院은 정구의 제자인 成安義(1561-1629)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成氏世德祠에는 세조 때 死六臣의 하나이며, 본관이 창녕인 成三問(1418-1456)을 비롯하여 그 조상·자손 등 成氏 8인을 배향하여 세워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祠는 書院과 달리 지역 전체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성씨의 문중만을 대표하여 세워진 경우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읍치에는 사적 80호로 지정된 가야시대의 수많은 고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는 이와 같은 고분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사천현은 사천시 정동면·사남면·용구면·사천읍·용현면 전체와 사천시내 와룡동·봉남동·궁지동·향촌동·사벌동·신구동·신수동·마도동에 해당된다.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三千里面은 현재의 삼천포시 동남쪽에 해당된다. 삼천포시는 진주·고성·사천의 월경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이었다. 읍치 주변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지도와 달리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의 경우 제단 모양을 특별하게 표시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안가에는 여러 倉庫가 표시되어 있다. 統倉은 統營, 巡倉은 巡營, 右兵營倉은 右兵營으로 옮겨갈 이 고을의 각종 稅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海倉은 수도인 한성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船所는 전선을 정박시키던 곳으로서, 위쪽의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과 兵船 각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아울러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주기에는 13개의 封山이 있었음도 표기하였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지역이었다.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장 많았다. 읍치 위쪽으로는 大觀臺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龜岩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은 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기타 사찰과 역 등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예천군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용문면·유천면·보문면·호명면, 우감리를 포함한 동쪽의 개포면, 풍양면의 공덕리·괴당리·고산리·풍신리, 문경시 동로면과 신북면의 가좌리·창구리·소야리·내화리·가곡리·월천리·흑송리·지내리, 의성군 다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서본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북쪽에 표시된 德鳳山이다. 하천이 어지럽게 갈라져 있다. 현재는 아래쪽으로부터 낙동강(大谷灘)·내성천(沙川)·한천(瀼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왼쪽의 것은 금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面의 이름에 옛 행정구역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있는 冬老所面은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행정단위의 역할을 하였던 冬老所가 있었던 곳이다. 아래쪽의 ‘縣’자가 붙어 있는 면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多仁縣 지역으로서, 용궁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였다. 읍치에는 객사 동쪽에 있었던 快賓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뒤쪽의 黑鷹山城은 원래 鵲城이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三面이 모두 암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古城이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廢해져 있었음에도 특별히 표시한 것은 그만큼 군사적 중요성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鼎山書院만이 賜額 받았음을 표시하였다. 이 서원에는 李滉(1501-1570)과 그의 제자이며, 이 고을이 고향인 趙穆(1524-1606)을 배향하였다. 鄕賢祠의 경우 이 고을에서만 알려져 있는 인물을 배향했기 때문에 ‘鄕賢’이란 명칭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함을 통해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력 역시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龍門寺는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창건되어 고려 태조 이후 여러 번 중수된 유서 깊은 절이다. 기타 지도 왼쪽 맨 위에는 왕실의 棺槨用 목재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벽양면,·임남면, 장전항 북쪽의 장전읍에 해당된다. 지금은 강원도 총석정 남쪽의 통천군, 장전항 북쪽의 고성군 일대이다. 읍치는 현재의 통천군 구읍리에 있었다. 지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殿牌가 安置된 客舍와 수령이 집무를 보던 衙舍 등 중요한 건물만 표시하였다. 서쪽(위)의 높은 산지로부터 읍치까지 이어진 산줄기의 강조를 통해 읍치 공간이 다른 공간에 비해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돌기둥이 우뚝 우뚝 솟아 있는 절벽과 그 위에 만들어져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진 叢石亭 등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위쪽에 있는 亭子는 換仙亭이다. 지도에는 작은 하천들이 서쪽(위)에서 동쪽(아래)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재로는 서남쪽에서 동북쪽을 향해 바다로 나간다. 도로는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중요성이 표시되어 있다. 도로변에는 驛과 館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驛은 말을 갈아타는 곳, 館은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한 듯하다. 지도 왼쪽의 도로변에는 ‘瓮遷’이 속자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遷’이란 벼랑길을 의미하며, 기록에도 말 두 마리가 서로 엇갈려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고 나온다. 기타 사찰에 대한 표시가 자세하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도 1군데 보이고 있다.(이기봉)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는 於上川面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도 어상천면으로 불리고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任縣倉’이란 이름은 어상천현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를 북쪽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상류이다. 남한강변에는 기암절벽이 계속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가 영춘현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러한 경치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변에는 北壁을 비롯한 자연 경관과 亭子 등의 인문 경관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松坡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廢古城은 현재 溫達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 어느 쪽에서 만든 것인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이기봉)
풍천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운유면·율리면·하리면·상리면·천동면·진풍면·초도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과일군 일대이다. 읍치는 과일군 과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望德主山 바로 남쪽에 있었던 瑞麟峰이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리고 있는데, 회화식 군현지도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실제 지형이라기보다는 풍수적 관념에 의해 인식된 모습이다. 중요한 산의 경우 청회색으로 표시하여 다른 산과 구별하고 있다. 읍치 왼쪽에는 西海壇이 표시되어 있는데, 서해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중국과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라고 하며, 그 흔적이 지도 아래쪽 왼쪽에 있는 唐館浦이다. 당에서 신라로 올 때 바로 이곳에 정박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런 이유로 이곳이 서해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지도에도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許沙鎭과 椒島鎭이 표시되어 있다. 초도진에는 牧場도 개설되어 있었으며, 수군첨절제사가 監牧官을 겸하고 있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풍천부·초도진·허사진에 배치된 戰船의 종류와 수, 水軍의 수 등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坊과 面이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위쪽의 주기에는 坊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고 모두 面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방과 면은 같은 행정단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또 다른 명칭으로는 社가 있다. 일반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坊, 함경도에서는 社, 나머지 도에서는 面이라고 지칭하였다. 기타 아래쪽의 栗里面에 있는 하천이 마치 松禾의 경계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잘못된 부분이다.(이기봉)
신계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신계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북도 신계군 전체와 수안군의 서남쪽 일부 및 곡산군의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신계군 신계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九峯山이다. 이 고을은 태조 5년(1396)에 新恩縣과 俠溪縣을 합해 이루어졌으며, 각각 한자씩 따다가 ‘新溪’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신은현의 중심지는 오른쪽 아래의 水回坊에, 협계현의 중심지는 읍치 왼쪽의 西里坊에 있었다고 한다. 두 고을을 합할 경우 각각의 중심지가 아닌 중간 정도에 읍치를 새로 정하는 사례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위쪽(북)에서 아래쪽(남)으로 흐르는 하천은 예성강의 상류이다. 북쪽 수안계로부터 본류가 흘러 들어오며, 오른쪽 위의 이천계로부터도 지류 중의 하나가 들어온다. 이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고을이 마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하는 회화식 고지도에서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다. 읍치 역시 산줄기에 의해 이중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남쪽에는 內南山과 外南山이란 명칭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읍치의 풍수적 명당 관념을 표현하고자 했던 조선후기 사회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에 의해 인식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厲壇·社稷(壇)·文廟(鄕校의 大成殿)가 중요한 정보로 표시되어 있다.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城隍壇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에 이러한 제사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淸心亭·秀林亭 등의 정자가 상징처럼 표시되어 있다. 읍치 이외의 지역에는 山川과 사찰, 다른 지역의 ‘面’에 해당되는 ‘坊’만이 수록되어 있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으로 중요도를 표시하였으며, 사각형의 方案에 맞추기 위해 실제와는 다른 직선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이기봉)
흥덕현은 지금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과 부안면 남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흥덕면 흥덕리 일대에 있었다. 서북쪽으로 해안과 접해 있으며 위로는 부안, 고부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茂長과 연결된다. 지도에는 전반적으로 산지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으며 산봉우리의 방향도 사방이 다르다. 읍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원래 돌로 쌓아진 읍성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이르러는 많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 등의 중요 관청과 대동미를 보관했던 大同庫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고을 서쪽의 逍遙山은 당시 船材를 공급하던 封山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읍치의 북쪽 艮尺堤 근처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상업으로 유명한 沙津浦가 있었던 곳이다. 대동지지에는 鹽盆과 漁箭이 있고, 商船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창에서는 흥덕현의 田稅穀과 大同米가 수납되어 私船에 의해 경강에 상납되었다. 二西面 근처에 古阜地로 표기된 지역은 고부의 월경지인 富安面이다. 지도 상단의여백에는 다른 고을과 연결되는 嶺路의 險夷까지 기재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井邑으로 통하는 小蘆嶺이 가장 험한 곳으로 인식되었다.(오상학)
沃溝縣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시내와 옥구읍, 옥서면, 옥산면, 회현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옥구읍 상평리에 있었다. 서해안의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고을의 남쪽과 북쪽에서 금강과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에 위치한 鉢伊山이다.읍치에는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돌로 쌓은 성이다. 1544년(중종 39)에 修築하였는데 둘레는 布帛尺으로 3,490척이다. 읍성 안에는 관아 건물과 통상 읍성 밖에 위치하는 향교와 興學堂의 모습이 보인다. 고을 북쪽의 山鎭은 원래 萬頃에 소속되어 있던 古群山島에 있었는데 해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1701년 이곳으로 옮겼다. 1710년에는 萬戶鎭에서 僉使鎭으로 승격시켜 漕運의 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戰船, 兵船, 伺候船이 각각 1척씩 있었다. 군산진의 옆에는 인근 6개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漕倉도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운선이 17척이나 있었다.(오상학)
일신은 남원부를 지칭하는데 1739년(영조 15) 현으로 강등되면서 바뀐 지명이다. 이후 1750년(영조 26) 남원부로 복구되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1739년에서 17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원부는 지금의 전북 남원시 가운데 운봉읍·산내면·동면·야영면을 제외한 전지역과 장수군의 번암면·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지사면과 오수면 남쪽 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오방면 북쪽 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읍치는 현재의 남원 시내 동충동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 때 10만 왜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읍성의 서문 밖에는 1599년 명나라 都督 劉綎이 건립한 관왕묘가 그려져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내원하여 왜군을 격퇴시킨 것은 關羽의 陰助에 의한 것이라 하여 관왕묘를 세웠던 것이다. 읍치 서북쪽의 蛟龍山城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km 가량에 이른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 處英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 무엇보다 남원 지역에는 많은 서원이 있는 것이 특징적인데, 寧川書院·路峯書院·忠烈祠·愍忠祠 등의 사액서원을 비롯하여 蓼溪鄕賢·古龍鄕賢·高巖鄕賢·玄溪鄕賢·方山鄕賢 등의 未賜額 서원이 다수 있었다.(오상학)
보성군은 지금의 전남 보성군 보성읍, 노동면, 득량면, 미력면, 겸백면, 문덕면, 북내면, 율어면, 조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보성읍 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남쪽으로는 호남정맥이 뻗어나가고,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고을의 북쪽으로 흘러간다. 고을의 동남쪽이 바다와 연해 있어서 바다를 통한 교류도 이루어졌던 곳이다. 군의 진산은 서쪽에 위치한 德山이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고, 읍성 안에 그려진 列仙亭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公亭子로 郡守 申經이 중수한 것이다. 북쪽 積田面에 위치한 大原寺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명찰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승 圓悟의 부도와 黃喜의 影堂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원오국사의 부도는 남아 있으나 황희의 영당은 전하지 않고 있다. 고을의 동남쪽 해안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득량면 해평리 지역에해당한다.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던 곳이다. 이 고을에는 몇 개의 사액서원도 있었는데, 大溪書院·旌忠祠·龍山書院이 그것이다. 대계서원은 이 고을 사람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安邦俊을 배향했고, 정충사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郡守 安弘國을 배향했으며, 용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朴光前을 각각 배향했다.(오상학))
예산현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예산읍, 대술면, 오가면, 신암면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예산읍 예산리 일대에 있었다. 예산현은 동쪽으로 삽교천을 경계로 덕산현 및 洪州牧(현재 홍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도고산 등의 산줄기로 아산현과 접하고 있었다. 고을의 내부를 무한천이 북쪽으로 흘러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한천에는 여름에 홍수가 나면 큰 뱀이 산에서 냇물을 따라 흘러내려 사람과 가축에 해를 준다고 한다. 하천 동쪽에는 無限城이 그려져 있다. 이 성은 읍치 서쪽의 넓은 평야에 솟아있는 야산에 위치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에는 烏山城으로 표기되어 있고 둘레는 2,002척이라 한다. 7세기에 金庾信의 아들 元述郞이 쌓았다고도 전해오고, 百濟復興軍이 당군을 맞이하여 싸웠던 곳이라고도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추정된다. 읍치의 향교에 인접해 있는 서원은 德岑書院인데, 1705년(숙종 31)에 세워졌고, 1714년(숙종 40)에 사액되었다. 대제학을 지낸 金絿(1488-1533)를 배향했던 서원이다. 이 밖에 여러 사찰과 암자도 보이고 있는데, 읍치에 있는 香泉寺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향천사는 656년(백제 의자왕 16)에 당대의 고승인 의각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서북쪽 무한천변에는 인근 고을의 海倉이 표시되어 있는데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조운하던 창고였다.(오상학)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읍치는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지도의 주기에는 둘레 3,235把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읍성은 세종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현재도 약간 남아 있다. 고을의 북쪽에는 馬場이 그려져 있다. 이 마장은 바로 倉宅牧場으로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牧馬 30필, 牧子 17명이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靈塔寺가 그려져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였으며, 그 후 조선시대 1798년(정조 2) 연암당 지윤이 중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름에 걸맞게 7층석탑이 남아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南秀文의 記文에 의하면,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있는 고을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서 영특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을의 남쪽 陽內面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陽山倉이다. 이곳은 신라 무열왕 때 金歆運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전사했다는 곳이다. 당시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利內面의 利山倉이 있는 곳은 과거 赤峴部曲이 있던 곳으로 부곡이 없어지더라도 당시 중심지였던 관성이 유지되어 창고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동남쪽의 赤登津은 영동으로 통하는 이 고을의 큰 나루터이다. 여기에 흘러오는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온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은 높고 물을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다고 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서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 전한다. 옥천에는 속현이 세 개 있었는데 利山縣, 安邑縣, 陽山縣이 그것이다. 이들 현이 있던 지역은 각각 利內面, 安內面, 陽內面이다. 이곳에는 外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을은 혁파되었지만 과거의 중심성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을 남서쪽 智勒山 기슭에는 寧國寺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고려의 韓文俊의 撰한 圓覺의 비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을에는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영동 박달봉수에서 와서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月裡山烽燧에서 와서 懷德 鷄足山烽燧로 간다.(오상학)
신창현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鶴城山(해발 183M)인데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산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1,213척, 높이 15척이었다. 성은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의 북쪽 맨 끝에 축조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를 보면 서쪽은 거의 정상부 가까운 곳을 성벽이 통과하고 있으나 동쪽은 성벽이 거의 중복에 가까운 부분까지 내려와서 테뫼식 산성이지만 포곡식에 가까운 형태을 띠고 있다. 지도제작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拱北亭이라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이는 현감 趙侯가 축조한 것인데, 徐居正의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다. 북면의 曲橋川 가에 있는 丹津倉은 이 지역의 세곡을 보관 운반하던 海倉이었다.(오상학)
의흥현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우보면·부계면·산성면과 고로면 남쪽,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향교 뒤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고을의 남쪽과 동쪽에는 八公山(1,192m)과 華山(828m)을 비롯한 7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포진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의흥현은 지도에서처럼 2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으며, 읍치가 지나치게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까지 원래 2개의 고을이었던 것이 조선 초에 완전히 합쳐졌기 때문이다. 縣內面이 있던 곳이 고려 말에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缶溪縣의 중심지였으며, 그 아래쪽의 缶溪倉이 옛 지명을 그대로 잇고 있다. 현내면을 중심으로 부서면·부동면·부남면이 부계현의 지역이었으며, 현재의 군위군 부계면 전체와 산성면의 동쪽 및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화산 위쪽에 北門과 南門의 표시가 있는데, 이곳을 華山城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넓은 高位平坦面이 형성되어 있어 성곽을 축조하기에 알맞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35년(1709)에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정부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으면서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숙종(1675-1720)과 영조(1725-1776) 때 대대적으로 대형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 화산성 역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축조된 대형 산성 중의 하나이다. 산성 안에는 戰時가 아닐 때 보수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軍需寺와 장기전을 위해 필수적인 食水源인 龍潭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축산면·창수면·병곡면과 영양군의 석보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石築의 邑城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으며, 북면·서면·남면의 명칭이 해안가 가까이에만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대부분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쪽 바닷가 근처에는 넓은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서쪽)의 석보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 유역에 속하며, 원래 고려 말까지 石保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의 丹山書院은 禹倬(1263-1343)과 李穀(1298-135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그 왼쪽의 有金菴는 신라시대의 절이라 하며, 현재 보물 674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하천의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붙였기 때문에 서천·북천·남천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북천은 하천의 표현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蒼水院이나 莊陸菴 방향의 하천이 더 크고 긴데, 상대적으로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본류가 영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영덕과의 경계가 발원지이다. 그밖에 봉화는 붉은 직선을 그어 서로 호응관계에 있음을 표시하였고, 북천 끝 해안가의 觀魚臺가 깎아지른 절벽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산음현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읍·금서면·생초면·오부면·차황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산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東山이다. 읍치에는 조선초에 현감 沈潾이 만들었다는 換鵞亭이 보이고 있다. 王羲之가 중국의 山陰 땅에 사는 어느 도사의 청으로 道德經을 써주고 거위를 받았다는 ‘換鵝’의 고사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조선 초 지배층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정자이며, 현재의 산청초등학교에 있었다. 환아정 위에 있는 西溪書院은 德溪 吳健(1521-1574)을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 오건은 南溟 曺植(1501-1572)의 제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다. 지도에는 沙斤水·鏡湖水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남북의 적황색 도로에는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각 고개마다 ‘險阨’의 표시가 되어 있다. 아울러 ‘古介’·‘嶺’·‘峙’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도 고개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사찰과 창고, 역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의성현은 의성군 의성읍·단촌면·점곡면·옥산면·사곡면·춘산면·가음면·금성면·봉양면, 교안리·검곡리를 제외한 신평면, 하평리·금곡리를 제외한 안평면, 군위군 고로면에서 양지리를 포함한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성읍 후죽리·도동리·도서리 일대에 있었다. 의성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이 위천의 지류인 쌍계천 유역이고, 위쪽이 안동의 풍산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안망천의 상류이다. 후자에는 高丘縣이 있었으며, 仇火面의 ‘구화’는 고구현의 옛 이름이다. 하천이 지나치게 굵게 표시되어 있어 실제보다 훨씬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聞韶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聞韶는 의성의 옛 이름이다. 이 고을은 원래 신라에 의해 병합된 召文國이었다고 하며, 지도 아래쪽의 召文面과 金鶴山 사이가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대형의 탑리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으며,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국보 77호 탑리 5층석탑도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개의 書院, 2개의 祠, 1개의 齋, 9개의 書堂이 주기뿐만 아니라 지도에도 빽빽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중 金安國(1478-1543) 등을 배향한 氷溪書院만이 선조 9년(1576)에 賜額 받았다. 書堂이 이 고을에만 많았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의 최초 작성자는 이 고을의 학문적 분위기를 특별히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빙계서원 옆의 氷穴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곳으로,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춘산면 빙계리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孤雲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31본산의 하나이며, 신라 때 義湘法師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보물 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통일신라 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이기봉)
평해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평해는 조선시대에 강원도 최남단의 고을이었다. 1914년에 강원도 울진군에 편입된 후, 1962년에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에는 衙舍라고 표현된 곳이다. 衙舍란 고을 수령이 집무를 보던 관아건물을 일컫는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衙舍 바로 위쪽(서쪽)에 있는 釜谷山이었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입지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衙舍 아래쪽으로는 月松亭鎭이 표시되어 있는데, 종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되어 있었다. 왼쪽의 주기에는 邑治와 鎭에 모두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月松亭과 望洋亭은 해변 가에 입지하고 있어,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도 위쪽에는 古山城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성은 거의 사용되지 않던 것인데, 임란 이후 國防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자세하게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산성 아래쪽의 溫井은 현재도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망양정 위쪽의 鳴溪書院은 선조 때의 관리이자 학자로 알려진 黃應淸·黃汝一 등을 배향하여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도로는 등급에 따라 황적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이기봉)
영춘현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이다. 조선 초까지도 於上川縣이 屬縣으로 존재하며, 독자적인 관사와 군창을 갖고 있었다. 지도에는 於上川面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도 어상천면으로 불리고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任縣倉’이란 이름은 어상천현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를 북쪽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남한강의 상류이다. 남한강변에는 기암절벽이 계속 이어지는데, 지도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 작성자가 영춘현의 대표적 이미지를 이러한 경치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변에는 北壁을 비롯한 자연 경관과 亭子 등의 인문 경관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松坡書院은 尹宣擧(1610-1669)를 배향하여 숙종 29년(1703)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아래쪽의 廢古城은 현재 溫達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와 신라 어느 쪽에서 만든 것인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이기봉)
해주목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해주시·벽성군 전체, 옹진군 교정면·가천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남도 해주시·벽성군 전체, 서쪽 일부를 제외한 청단군, 신원군의 남쪽 일부, 태탄군의 서쪽, 옹진군의 일부에 해당된다. 읍치는 해주시 영광동·부용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향교 위쪽에 표시된 龍秀(→首)山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海東地圖≫·≪輿地圖書≫ 내의 해주목지도와 동일하여, 상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본 지도에 비해 ≪해동지도≫의 것은 읍치를 부각시켜 그렸으며, ≪여지도서≫의 것은 더 간략하게 그렸다. 해주에는 黃海道觀察使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黃海道兵馬節度使·海州牧使 등을 겸하고 있었다. 邑城은 황해도의 최고 정치중심지에 걸맞게 둘레 10,197尺(약 3,059m)에 달하는 대형의 石築 城郭이었다. 지도에는 마치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았다. 曲城이라 표시한 부분은 성곽이 주로 곡선의 형태를, 나머지는 주로 직선이 교차되는 형태를 취했을 뿐이다. 읍성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文廟(향교의 大成殿)·厲壇·社稷壇의 제사처와 화려한 亭子가 배치되어 있다. 읍성 오른쪽에는 좀이 먹어 잘 보이지 않지만, 伯夷·叔齊 형제를 배향하여 숙종 17년(1691)에 세워지고 같은 왕 27년(1701)에 사액 받은 淸聖廟가 보이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周 武王의 商에 대한 정벌이 부당하다며, 周의 祿을 받기를 거부하고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다가 굶어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東夷 사람이라는 추정에 의해 해주에는 그의 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국적인 書院 건립의 붐을 타고, 숙종 때에는 이 고을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뒤쪽의 首陽山이란 명칭도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있다. 기타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모였던 司馬所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수양산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바뀐 방어 개념의 산물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을마다 책임지고 방어하던 방식이었다. 조선후기에는 몇 개의 고을을 묶어 방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대대적으로 대형산성을 修築하거나 新築하였다. 수양산성도 숙종 2년(1676)에 수축하였고, 유사시 해주·옹진·연안·장연·강령 5개 고을이 들어와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읍성 아래쪽 해안가에는 方船船嵢이 표시되어 있는데, 본 고을에서 관할하던 戰船이 정박하던 곳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龍媒鎭도 보이고 있다. 지도 오른쪽의 延安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靑丹院이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고 9개의 屬驛을 거느린 靑丹驛이었다. 이밖에도 사찰·서원·다리·고개·하천의 명칭과 위치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연안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호동면·호남면·해성면·송봉면·해룡면·봉서면·봉북면·석산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연안군 동남쪽과 배천군의 서남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연안군 연안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飛鳳山(또는 鳳勢山, 282m)이다. 읍치에는 명종 10년(1555)에 만든 둘레 1,389尺(약 417m)의 石築 邑城이 있었다. 이 고을은 읍치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평지에 해당되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읍치 남쪽에 있는 南大池(臥龍池라고도 한다)이며, 둘레는 20里 102步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정도의 크기면 조선시대에는 초대형에 해당되며, 이런 사실 때문에 고을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을에 대한 다른 지도에서도 이 남대지는 실제보다도 훨씬 크게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巨味川은 ‘巨美筒洑’라고도 한다. ‘筒’은 보통 간척지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며, ‘洑’는 하천을 막아 물을 저장하던 둑이다. 이렇게 볼 때 거미천은 해안가의 하천을 막아 만든 저수지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사실 때문에 ‘川’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堤堰과 洑(또는 川防)는 조선후기에 가장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로서 인식되었다. 거미천 이외에도 작은 제언이 지도 여기저기에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塩幕이 표시되어 있고, 육지나 바다와는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조선후기에는 염분의 농도를 높인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煮鹽法이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자염처는 주로 염분의 농도를 높이는 작업에 필요한 갯벌(干潟地)에 입지하였으며, 지도에 바다·육지와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는 부분이 바로 이 갯벌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읍치 오른쪽의 書院은 飛鳳書院이며, 朱子(1130-1200)·崔沖(984-1068)·金宏弼(1454-1504) 등을 배향하여 숙종 8년(168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용안현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용안면과 용동면에 있었던 아주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용안면 교동리에 있었다. 용안은 북쪽으로는 충청도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咸悅, 동쪽으로는 礪山에 이어진다. 금강에 연해 있어서 고을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비교적 적은 면적의 고을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도 그려져 있는데,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石築으로 주위가 1,497尺5寸이라 한다. 그러나 이 시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 북서쪽 강가에는 海倉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초에 得成倉(그 이전에는 德成倉이라 불렀음)이 있었던 곳이다. 득성창은 이후 물길이 막혀 함열현으로 옮겼다가 1482년(성종 13)에 다시 여기로 옮겼다. 이후 8개 고을은 맞은편 함열의 聖堂倉에서, 7개 고을은 옥구의 群山倉에서 맡게 하고 나머지 용안, 임피, 김제, 만경, 여산, 금산, 무주 등의 조세는 여기에서 거두어 서울로 조운하였다. 고을 동남쪽의 廣頭院에는 봉수도 표시되어 있는데, 서쪽으로는 함열의 所方峯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청도 은진의 江景山 봉수에 연결된다.(오상학)
임실현은 지금의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의 상류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호남정맥을 넘어 전주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순창과 이어진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에 있는 龍繞山이다. 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를 환포형으로 그려 고을의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다. 고을 서쪽의 九皐面은 원래 九皐縣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백제의 坪縣이었는데 신라 시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淳化郡의 領縣이 되었다. 고려초기 남원부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태조 때 來屬되었다. 북쪽의 上雲面에는 私亭子인 兩樂亭이 그려져 있다. 양요정은 1592년(선조 25) 충현공 양요당최응숙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곳으로 낙향하여 건립한 것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양요정이라 하였다. 북쪽 사자산 기슭에 있는 新興寺는 529년(백제 성왕 7)에 창건된 절이다. 그후 여러 차례 중건했지만 대웅전 등 주요 건물은 창건 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순창군은 지금의 전북 순창군 관할 가운데 영계면을 제외한 순창읍,구림면, 인계면, 적성면, 유등면, 풍산면, 팔덕면, 금과면, 쌍치면, 복흥면 지역이다. 읍치는 순창읍 순화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동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은 고을이다. 지도는 조감도식으로 단일한 시점에 의해 그려졌으며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여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는 중요 관아 건물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도 남아 있다. 동쪽의 赤城面과 서쪽의 福興面은 과거 적성현과 복흥현이 있었던 곳으로 여전히 지명에 남아 있다. 읍치 서쪽에 그려진 大母山城은 ''홀어미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관곡을 저장한 官倉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이미 많이 훼손되어 산성으로서의 구실은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華山書院은 邑誌에는 花山書院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서원에는 급제하여 벼슬이 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단종 양위 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고을 순창에 내려와 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살았다는 신숙주의 동생 申末舟 등이 배향되었다.(오상학)
은진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논산시내, 은진면, 가야곡면, 연무읍, 채운면, 강경읍 일대의 지역이다. 은진면 연서리가 과거의 은진현의 邑治에 해당한다.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수운의 이점이 큰 고을이다. 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특성이 반영되어 수계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다. 花之山面에는 유명한 觀竺寺 미륵이 표시되어 있다. 관축사는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는데, 여기의 은진미륵은 36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006년(고려 목종 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고을의 북서쪽에 보이는 中和齋祠宇는 중화재 강응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13년 숙종 때 재건되었다. 九子谷面에 있는 金谷祠宇는 1687년 만치당 김수남(1576-1636)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江景津은 금강의 수운을 이용한 이 지역 최대의 포구로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서해안의 각종 해산물이 이곳에서 거래되어 전국에 팔려나가면서 조선후기 3대시장의 하나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佛明山 아래의 雙溪寺는 충청과 전라를 잇는 지점에 위치한 대찰로 백암이라고 불리웠으나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다. 그 뒤 고려말 대문장가 행촌 이암 선생이 중건하였다.(오상학)
면천현은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면천면, 신평면, 송악면, 순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와 성하리 일대에 있었다. 내포 지방의 한 고을로 동쪽으로는 홍주, 서쪽으로는 당진에 접하고 있다. 읍치는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 지도의 주기에는 둘레 3,235把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읍성은 세종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현재도 약간 남아 있다. 고을의 북쪽에는 馬場이 그려져 있다. 이 마장은 바로 倉宅牧場으로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牧馬 30필, 牧子 17명이 있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靈塔寺가 그려져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였으며, 그 후 조선시대 1798년(정조 2) 연암당 지윤이 중건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이름에 걸맞게 7층석탑이 남아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이원면, 동이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옥천읍 교동리에 있었다. 동쪽으로 금강의 상류가 흘러가고 있고, 남동쪽으로는 영동, 서북쪽으로는 회덕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南秀文의 記文에 의하면,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있는 고을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서 영특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馬城山이다.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고을의 남쪽 陽內面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陽山倉이다. 이곳은 신라 무열왕 때 金歆運이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전사했다는 곳이다. 당시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利內面의 利山倉이 있는 곳은 과거 赤峴部曲이 있던 곳으로 부곡이 없어지더라도 당시 중심지였던 관성이 유지되어 창고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동남쪽의 赤登津은 영동으로 통하는 이 고을의 큰 나루터이다. 여기에 흘러오는 물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온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옛부터 온천으로 명성을 날렸던 곳으로 지금도 온천이 유명하다. 고을은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아산, 남으로는 천안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고을 동쪽의 排方山은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고을의 동북쪽에는 溫宮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임금이 행차하여 온천욕을 할 때 머무르던 行宮이다. 이곳에는 태조, 세종, 세조 등이 온천욕을 위해 거둥했다. 남면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 日興, 汲泉, 順城, 興世, 長時, 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 등이 있었다. 군내면의 靜退祠는 1634년(인조12)에 창건되어 이황·조광조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신창현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도고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신창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의 鶴城山(해발 183M)인데 이곳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산성은 석성으로 둘레가 1,213척, 높이 15척이었다. 성은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의 북쪽 맨 끝에 축조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를 보면 서쪽은 거의 정상부 가까운 곳을 성벽이 통과하고 있으나 동쪽은 성벽이 거의 중복에 가까운 부분까지 내려와서 테뫼식 산성이지만 포곡식에 가까운 형태을 띠고 있다. 지도제작 당시에는 많이 허물어져 산성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과 더불어 拱北亭이라는 정자도 그려져 있다. 이는 현감 趙侯가 축조한 것인데, 徐居正의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사찰로는 북면에 위치한 咽嘴寺를 들 수 있다. 인취사는 고려시대 창건한 사찰로 현재 경내에 삼층석탑 2기(석탑1기는 지방문화재 자료 235호)가 남아 있다. 북면의 曲橋川 가에 있는 丹津倉은 이 지역의 세곡을 보관 운반하던 海倉이었다.(오상학)
진보현은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의 관리 북쪽과 영양군 입암면의 신구리 남쪽, 석보면의 택전리·화매리·포산리·삼의리,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남쪽에 있는 南角山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현재는 안동시 임하면에 임하댐을 설치하여, 읍치 부근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반변천에는 경치 좋은 장소가 많은데, 이곳에 표시된 文岩과 孔岩은 실제 모양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천변에는 風呼亭·玉流亭 등의 風流 있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인 厲壇·城隍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제단들은 고을을 통치하며, 대표하는 자로서의 수령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운영되었다. 아울러 읍치 주변에 입지시킴으로써 읍치의 공간적 위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鳳覽書院은 선조 32년(1599)에 세워졌고, 숙종 16년(1690)에 賜額 받았다. 이곳에는 主理哲學의 대가이며, 본관이 이 고을인 退溪 李滉(1501-1570)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동리면은 실재로 영해부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에 가까운 곳이었다. 더 오른쪽에 眞寶地라고 표시된 낙평은 현재의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로서, 영덕의 땅인 지품 지역을 넘어가 있었던 越境地였다.(이기봉)
울산부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시내와 울주군 강동면·범서면·청량면·웅촌면·온양면·서생면·온산읍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3개의 하천이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바로 아래쪽이 태화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동천강이며, 맨 아래쪽이 현재의 회야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無里龍山인데, 읍치와 산세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하천 너머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읍치 바로 오른쪽으로는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보이고 있다. 경주의 後營·대구의 中營·안동의 前營을 관할하였으며, 현재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있었다. 읍치와 좌병영에 모두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 아래쪽의 甑城은 현재 鶴城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과 1598년 1월 사이에 朝明聯合軍과 倭軍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남해안으로 후퇴한 왜군은 증성과 지도 맨 아래쪽의 西生鎭에 倭城을 쌓고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말이 넘나들지 못하도록 설치한 牧場馬城의 모습이 성문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이곳은 監牧官이 파견되었던 蔚山牧場이며, 감목관이 머물렀던 곳은 목장마성 위에 牧官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현대계열의 회사가 밀집해 있는 울산광역시 동구일대에 해당된다. 그 왼쪽에는 통일신라 말기 처용설화의 근원지였던 處容岩이 보이고 있다. 그 위쪽의 舊開雲浦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이 海神에게 빌어 구름과 안개를 걷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개운포이다. 여기에는 원래 수군이 주둔하던 개운포진이 있었는데, ‘戰船泊處 ’는 그러한 흔적을 반영하는 지명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동래로 옮겨갔기 때문에 구개운포라고 표현한 것이다. 鷗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오른쪽의 亏佛祠는 祀典에 小祀로 기록되어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민간신앙이 수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여러 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이 밖에 사찰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특이한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삼가현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쌍백면·가회면·대병면 전체, 봉산면의 양지리·고삼리·계산리를 포함한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달리 방위가 지도 안에 표시되어 있으며, 북쪽(子)이 지도 위쪽 오른쪽에 보인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은 합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황강이며, 남쪽은 남강의 지류인 양천(水晶川)이다. 삼가현은 조선 태종 때 三歧縣과 嘉壽縣을 합쳐 만든 고을이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이 가수현의 옛 터이며, 읍치는 삼기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동헌에 있었던 淨襟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왼쪽에는 절벽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곳이 2개이다. 아래쪽의 鋪遷에서 ‘遷’은 이러한 벼랑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문자이다. 이런 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지도에도 賊路要衝·要衝이라는 문구를 넣어 표시하였다. 界山面에 龍巖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 성리학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南溟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그밖에 古巖祠宇·平川祠宇 등도 표시되어 있는데, 둘 다 賜額받지 못한 곳이다. ‘祠宇’라고 표시하여 賜額받은 ‘書院’과 구별 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와 위쪽으로 雷龍亭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아래쪽에는 정자의 모습이 없고, 위쪽에만 있는 것을 통해 옮겨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밖에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사찰 역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이기봉)
선산부는 낙동강 동쪽의 시내 부분을 제외한 구미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완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낙동강 동쪽의 海平面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海平縣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선산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낙향한 冶隱 吉再(1353-1419)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吉冶隱影宇가 길재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길재의 학통을 이어 金宏弼(1454-1504)·鄭汝昌(1450-1504)과 같은 제자를 키워낸 金宗直(1431-1492)의 고향이기도 하다. 읍치 오른쪽 아래의 金烏書院이 바로 길재와 김종직 등을 배향하여 1575년(선조 8)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였다. 月岩書院은 死六臣의 한 명인 河緯地(1387-145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았다. 洛峯書院은 정조 11년(1787)에 사액 받았는데, 위쪽의 주기에는 未賜額으로 되어 있어 이 지도의 제작 하한연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읍치에 있는 蓮亭 근처는 김종직·하위지 등 장원급제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어 장원방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金烏山城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둘레 7,644尺(약 2,293m)의 內城과 4,135尺(1,240m)의 外城으로 이루어진 대형 산성으로, 絶壁을 이용한 곳도 661步(약 1,190m)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中軍이 설치되고 別將이 파견되었으며, 산성 내에 倉이 설치되어 있었던 선산·금산·개령·지례를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형 산성의 보수와 축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외적의 침입 시 몇 개의 고을을 묶어서 방어를 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義狗塚과 義牛塚이 무덤의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조선에서 국가에 대한 忠과 더불어 주인에 대한 義를 강조하던 신분제의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사찰과 정자 등의 정보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인동부는 칠곡군 기산면·약목면·북삼면, 석적면과 금화리 서쪽의 가산면, 낙동강 동쪽의 구미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미시내 인의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流岳山(839m)이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다. 인동현에는 조선 초까지도 若木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낙동강 서쪽의 若木面 지역에 있었다. ≪嶺南地圖≫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鄕校가 사각형 모양의 읍치 안쪽에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위에 만들어져 있어, 하늘이 만든 것 같다는 天生山城이 보이고 있다. 원래 신라의 옛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선조 34년(1601)에 둘레 3,612척(약 1,084m)의 外城을 쌓았다고 한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築造하거나 修築한 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이 지도에는 천생산성이 간단하게 이름만 나오는데, 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낙동강 변에는 범람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숲이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보이고 있다. 吳山書院은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吉再를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세우고, 광해군 때 사액 받았다. 서원 오른쪽에 표시된 비문 모양은 吳泰山에 있었다는 吉再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것이 砥柱로 기록되어 있다. 東洛書院은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장현광(1554-1637)을 배향하여 효종 5년(1654)에 세워지고, 숙종 2년(1676)에 사액 받았다. 그 밖에 사찰도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이다. 일제시대의 통천군 흡곡면은 조선시대의 흡곡현과 관계가 없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오른쪽에 縣衙·客舍 등이 표시되어 있는 곳이다. 고을의 鎭山은 객사 오른쪽에 있는 朴山이다. 지도 왼쪽의 주기에는 이 고을의 호구가 적혀 있는데, 겨우 513호에 불과하다. 보통 작은 고을도 최소 2,000호 안팎이었던 점과 비교해 보면, 전국에서 가장 작은 고을 중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사 오른쪽에는 侍中臺가 표시되어 있다. 韓明澮(1415-1487)가 이곳에 올라 구경하다가 세조가 右議政으로 임명한다는 왕명을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섬들이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섬들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오른쪽에는 北關, 즉 함경도와 연결되는 중요한 도로가 보이고 있으며, 곳곳에 要衝處가 표시되어 있다. 가장 오른쪽의 霜陰遷에서의 ‘遷’은 벼랑길을 의미하는데,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실재로는 함경도 安邊의 땅이었음에도, 자세하게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이기봉)
음성현은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과 원남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현재의 음성군은 대부분 충주의 땅이었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에 있는 가섭산(迦葉山)이었다. 지도 오른쪽의 하천은 남한강의 달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음성천이며, 왼쪽은 금강의 미호천으로 들어가는 초평천의 상류이다. 다른 지도에 비해 산과 고개에 대한 표시가 자세한 점이 특징이다. 적황색·황색·남색으로 도로의 중요성을 표시한 다른 지도와는 다르게 적황색만 사용하였다. 위쪽의 주기 嶺隘 부분에는 중요한 고개에 ‘大路’라는 표시를 하여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봉수는 호응 관계에 있는 다른 곳과 직선의 분홍색을 그려 넣었으며, 오른쪽 주기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 놓았다. 지도에는 역의 위치가, 주기에는 역에 배치된 말의 종류와 수를 써 넣어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모두 살리고 있다. 아울러 주기에는 東面이라 표시한 것이 지도에는 東道面이라고 나와 있어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재령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재령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해남도 재령군과 남쪽 일부를 제외한 신원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재령군 재령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장수산성이 있는 長壽山(747m)이다. 원래의 읍치는 장수산성 바로 남쪽에 있었는데, 중종 14년(1519)에 염병이 돌았다고 하여 지도 위의 읍치로 옮겼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재령강이며, 왼쪽은 그 지류인 서강이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濟梁大海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 바다로 들어가는 부분을 일컫는다. 이곳이 大海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潮水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폭이 매우 넓기 때문이었다. 재령강에는 많은 灘(여울)이 표시되어 있다. 灘(여울)이란 물살이 빠르지만 얕아서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며, 단순히 여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다양한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은 일제초기에 전국적인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이루어진 이후이다. 지도 아래쪽 부분에 있는 長壽山城은 둘레 31,908尺(약 9,572m)에 달하는 초대형 산성이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재령·신천·배천·해주의 군기고와 군향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內城·外城의 규모와 절벽을 성곽처럼 그대로 이용한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鐵峴鎭도 보이고 있는데, 유사시에는 장수산성에 들어가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작은 붉은색 원 안에는 ‘屯’이란 명칭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屯田을 의미하는데, 미개간지를 개척·경작하여 지방관청이나 국가기관의 경비 및 군량에 쓰도록 한 땅이다. 원이 표시된 곳은 그러한 둔전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모아두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읍치 왼쪽의 信川地에 있는 守禦屯은 守禦廳에서 관리하던 屯田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 보면 ‘守禦屯의 屯畓은 본 고을에 있지만, 倉庫는 信川 땅에 있다’라고 적혀 있다. 지도 중간쯤에는 朱子(1130-1200)·李珥(1536-1584)를 배향하여 효종 6년(1655)에 세워지고, 숙종 21년(1695)에 賜額 받은 景賢書院도 보이고 있다. 기타 驛院·面·寺刹 등의 정보도 지도에 소상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익산군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삼기면, 금마면, 춘포면, 팔봉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동고도리 일대에 있었다. 익산은 금남정맥의 서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고을로 한 때 백제 무왕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이와 관련된 지명과 유적들이 남아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子山인데 지도에도 산 밑에 향교가 그려져 있고 동쪽으로 맥이 내려오고 있다. 북쪽에 彌力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다른 지도에는 彌勒山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미력면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가 있는 곳으로 지도에는 사찰의 표시가 없고 단지 탑만 그려져 있다. 당시 폐찰되고 寺址로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현재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목탑을 모방한 한국 석탑의시원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원래 9층으로 축조되었으나 벼락에 맞아 7층만 남아 있었음을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帝石面에는 왕궁탑이 그려져 있는데, 이 탑은 현재 왕궁면 왕궁리에 남아 있고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전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백제계 양식을 따르는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력면의 華山書院은 1654년(효종 5)에 창건, 1662년(현종 3)에 사액된 서원으로 김장생, 송시열을 배향했다.(오상학)
장수현은 지금의 전북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 고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로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북쪽으로 흘러나가고 있다.원래 이 지역에는 조선초기까지 長溪縣과 長水縣 두 고을이 있었는데, 1414년(태종 14)에 장계현을 병합하여 장수현으로 만들었다. 지도에서는 壬縣面 일대가 과거 장계현 지역이었다. 동북쪽 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잘 표현되었는데 산에는 수목까지 그려져 있다. 덕유산 남쪽에는 경상도 안음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六十峙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요충지로서 도적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많아 60명이 되어야 이곳을 지났다고 해서 육십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읍치 서쪽의 新光寺는 지금의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1849년(헌종15)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 읍치 서쪽의 蒼溪書院(지금의 장수읍 선창리 소재)은 1695년(숙종 21)에 창건되어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등을 배향했던 서원이다.(오상학)
옥과현은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삼기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일대에있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섬진강의 지류인 옥과천 유역에 평지가 펼쳐져 있고 나머지 지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다른 지도에 비해 지도의 크기도 작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회화적 성격이 비교적 강하다. 다른 지도에 비해 읍치가 비교적 크게 그려져 있다. 특히 읍치 북쪽에는 氷庫까지 표시되어 있다. 남쪽의 聖德山에는 觀音寺가 탑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300년(백제 분서왕 3) 성덕보살이 전남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봉안하여 창건한 백제 고찰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은 현내면의 詠歸書院이다. 이 서원은 1564년(명종 19) 옥과유림들이 옥과현감으로 재임했던 河西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사우로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詠歸亭祠로 세워진 뒤, 그로부터 130년 후인 1694년(숙종20)에 들어와 詠歸書院으로 발전하였는데 사액되지는 못했다.(오상학)
이산현은 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 상월면, 광석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원래 명칭은 尼山인데 1800년 노성으로 바뀌었다. 이로 보아 湖西地圖는 1800년 이후에 제책된 것으로 보인다. 노성은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公州, 남으로는 恩津에 연결된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이 비교적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읍치와 주변지역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읍치에는 관아 건물 등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다. 읍치 주변의 산지는 환포형으로 그려 풍수적 명당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魯城山으로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노성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퇴뫼식 산성으로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군사요충지로 쓰여졌으며 봉수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광석면에 있었던 魯崗書院은 1675년(숙종 원년)에 세워져 1682년(숙종 8)에 사액된 서원으로 尹煌, 尹文擧, 尹宣擧, 尹拯을 배향하였다.(오상학)
보령현은 지금의 충남 보령시 보령시내, 주포면, 청라면, 청소면, 홍성군 광천읍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보령현의 읍치는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일대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에 연한 고을로 인근에는 水營이 포진하고 있다. 지도는 맥이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의 鎭堂山으로 지도에는 山圖적인 기법으로 그려 읍치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다. 읍치의 서쪽에는 水營이 표시되어 있다. 본래 1396년(태조 5)에 水軍僉節制使를 두어 보령을 관리하였는데, 1421년(세종 3)에 都按撫處置使로 고쳤다가 1466년(세조 12)에 水軍節度使를 두었다. 충청도 수군의 총본부로 둘레가 3,174척이 되는 성곽도 축조되어 있었다. 이 성곽은 현재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 의해면, 당시 수영에는 전선 2척, 거북선 1척, 防船 1척, 兵船 2척, 伺候船 7척, 搜討船 2척, 梭船 8척 등 다양한 배들이 있었다. 읍치의 동쪽에는 花巖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창건되어 1686년(숙종 12)에 사액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인물인 土亭 李之菡, 昌瑞 李夢奎 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고을의 동쪽을 지금이 온양천인 加之川이 흘러가 곡교천과 합류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조감도식으로 표현되었다. 고을의 서면에는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行宮이다. 이 온천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태조·세종·세조 임금이 다녀갔고 조선후기에는 숙종과 영조도 이곳에 행차했다. 읍치에서 온천 행궁까지 이르는 御路는 검을 선으로 그린 점이 이채롭다. 南下面의 도로변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역은 察訪驛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그 위쪽에는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려준 孝旌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동면에는 雲住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는 두 개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李城인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며 둘레가 1,184척이다. 또 하나는 金伊城으로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528척이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岩菴은 현재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비암사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암이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운주산 기슭에 있는 雲住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雲岾寺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이 고을의 대표적인 사찰로 빼어난 경치가 있었다고 한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일찍이 국가에서 영안산 북쪽 바다에 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배에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하는데 지도에 보이는 貢稅倉이 그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漕倉(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성곽은 1631년(인조9)에는 축조되었고, 숙종 때에는 아산·전의·목천·연기·청주·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고을 동남쪽의 忠武公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아산 현충사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함양하는 도장이 되었다.(오상학)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송라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작은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청하초등학교 근방에 일부가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보이는 呼鶴山이며, 대부분의 읍지에 ‘읍치 서쪽 9리에 있다’고 나온다. 서쪽으로는 內延山(710m) 등의 높은 산봉우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고을의 동쪽 해안가에 가까워지면서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서쪽의 높은 산줄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로 합류되지 않은 채 동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의 명칭이 北川과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각각 광천과 청하천 등 고유 지명을 따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鳳松亭은 長松 수백 그루가 바닷바람을 막아주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읍지에는 ‘동쪽 2리에 있었다’고 나오며, 현재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도 위쪽의 鶴山書院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옆의 寶鏡寺에는 고려 고종 13년(1226)에 세운 圓眞國師碑가 보물 25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松羅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는 높이 21m의 거대한 바위가 바닷가에 솟아있는 釣鯨臺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청송부는 진보면과 파천면 북부를 제외한 청송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의 것이 길안천이고 위쪽의 것이 용천천인데, 두 하천 모두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조선 초까지 길안천 유역에는 安德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다. 지도에도 安德古縣倉을 표시하였으며, 面의 명칭인 현내면·현북면·현서면·현남면·현동면도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표현해주고 있다. 용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 靑寶郡이 하류에, 松生縣이 상류에 있었다. 조선 세조 때 두 고을을 합하고, 각각 한 자씩 따와서 靑松府라고 하였다. 戶數의 측면에서 보아 그리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고을의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本鄕(본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을에는 두 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의 屛岩書院은 主氣論을 대표하는 李珥(1536-1584)와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賜額받았다. 지도 왼쪽의 松鶴書院은 主理論을 대표하는 李滉(1501-1570)·金誠一(1538-1593)·張顯光(1554-1637)을 배향하여 숙종 25년(1699)에 세워졌는데, 사액 받지는 못했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하나의 고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放光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객사 남쪽에 있었던 讚慶樓가 병기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周房山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周王山(720m)이다. 이 지도의 단점은 ≪영남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하천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혼돈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안음현은 함양군의 안의면·서하면·서상면과 거창군의 마리면·위천면·북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안음현은 지형적으로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이 황강의 상류인 위천천 유역이며, 왼쪽이 남강의 상류이다. 원래 안음현은 조선 태종 때 利安縣과 感陰縣을 합쳐 만들어졌고,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古縣面 지역이 감음현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지도 위의 하천에는 고유명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일제초기에 전국의 하천 명칭을 단일화시키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光風樓가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한데,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에는 각각 3개의 서원과 祠宇가 표시되어 있다. 대대면에 있는 龍門書院은 이 고을 현감을 지낸 鄭汝昌(1450-1504)과 이 고을 덕유산에서 낙향했다가 죽은 鄭薀(569-1642)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賜額 받았다. 읍치 왼쪽에 있는 黃岩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 고을에서 전사한 郭䞭(?-1594) 등을 배향하여 숙종 43년(1717)에 사액 받았다. 현내면에 있는 星川書院은 사액 받지는 못했지만, 老論을 이끌었던 사람 중의 하나인 宋浚吉(1606-1672) 등 유명한 정치인을 배향하였다. 3개의 祠宇는 사액 받지 못한 것으로 서원에 비해서는 격이 떨어진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전라도 장수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六十嶺이 ‘要衝’이라는 단어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위의 黃石古城은 둘레 2,924척(약 877m)의 石城으로 현재 서하면의 황석산에 있다.(이기봉)
성주목은 성주군 전체, 고령군의 다사면·성산면·덕곡면·운수면 대부분, 달성군 논공읍의 위천리-노이리를 포함한 서쪽, 김천시 증산면 전체와 감천면의 광기리-도평리를 포함한 남쪽, 지례면의 신평리·울곡리·이전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印懸山이었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동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성주목이 이렇게 컸던 이유는 고려시대에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왼쪽에 加利倉이 있는 곳은 조선 초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가리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土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세운 關王廟가 표시되어 있다. 關王이란 중국의 ≪三國志≫에 나오는 關于를 의미하며,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더 왼쪽에는 胎封山과 胎封寺가 보이는데, 조선의 3대 임금인 太宗의 胎를 奉安했던 곳이다. 읍치 오른쪽 위에도 胎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의 7대 임금인 世祖의 胎를 봉안했던 곳이다. 무덤이 한양 주위의 고을에 분포되어 있는 반면에 왕실의 胎는 전국 곳곳에 奉安되어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정통성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3개의 祠, 2개의 影堂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유명한 聖賢을 배향하여 제사한다는 측면에서는 기능이 같지만, 격에서는 상호간에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이 중 書院의 격이 가장 높았던 듯하며, 川谷書院과 檜淵書院만이 賜額 받고 있음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賜額이란 임금이 현판을 직접 제작하여 내려주는 것으로, 국가로부터 가장 높은 공신력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川谷書院에는 程子와 朱子 등 중국 유학자를 비롯하여 金宏弼(1454-1504)·李彦迪(1491-1553)·張顯光(1554-1637) 등 조선 초·중기의 성리학자가 배향되어 있었다. 檜淵書院에는 鄭逑(1543-1620)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배향되었다. 이 밖에 사찰과 교통 및 통신에 대한 정보도 잘 실려 있다.(이기봉)
청도군은 지금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 전체와 밀양시 청도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양읍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있는 鰲山이다. 읍치에는 선조 24년(1596)에 쌓은 石築의 邑城이 있었다. ≪嶺南地圖≫에는 일반적으로 城郭의 유무를 표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는 하천이 매우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의 상류이다. 읍치 남서쪽의 外西面은 밀양강에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청도천의 최상류 盆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듯이 거의 越境地에 가까운 땅으로 현재는 밀양시 청도면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을은 한성-동래를 잇는 大路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읍성의 축성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밀양강 아래쪽에는 ‘賊路要衝’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양쪽의 험한 산지로 인한 좁은 골짜기가 수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곳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古山城基는 烏惠(또는 烏禮)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레 9,980척(약 2,994m)에 이르는 대형이다. 신라 때의 仇刀城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이 가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관방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그 위쪽의 古山城은 여러 기록에 동서가 모두 석벽이라고 나오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省峴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16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왼쪽의 古伊西國은 ≪三國史記≫에 儒禮尼師今 14년(297)에 신라의 金城을 공격한 나라로 나온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도에는 賜額 받은 紫溪書院만이 표시되어 있어, 격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서원은 戊午士禍(1498)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선조 11년(1578)에 건립되고, 현종 2년(1661)에 사액 받았다. 사찰은 서원보다도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오른쪽의 雲門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되었고, 고려 태조가 雲門禪師라 이름붙인 곳이다. 보물 193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읍치를 강조하기 위해 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를 상세하게 그렸다. 읍치 바로 뒤쪽의 산은 다른 산에 비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읍치 주변의 面 이름에 左·右란 글자가 들어간 경우가 있는데, 읍치 북쪽의 산으로부터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졌다. 물줄기는 고을의 산줄기를 강조하기하기 위해 일부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遠西面 오른쪽의 하천은 북쪽의 원주 경계를 넘어서 흘러들어 오지만,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원서면 바로 위쪽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란 대중가요 때문에 유명해진 박달재가 ‘朴達峙’로 나온다. 그 오른쪽에는 ‘朴達洞幕’, 즉 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런 酒幕은 조선후기에 고개나 나루 등 사람이 일시 머무는 곳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의 지도에는 별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는 신라 초기(보통 三韓時代라고 부름)에 만들어졌다는 義林池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의림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큰 규모로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아, 호수 면적에 비해 많은 저수량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수지 남쪽의 넓은 들판에 관개의 이로움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書院은 滄洲書院인데,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 寺刹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이 특이하다.(이기봉)
토산현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금천군의 토산면·합탄면·서천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서쪽 일부를 제외한 황해북도 토산군이다. 읍치는 토산군 월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兎山이다. 지도를 보면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하천이 임진강 본류이고, 지도 왼쪽에 있는 하천은 예성강의 지류인 구연강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 지역에서는 임진강을 지도에 기록된 萬東江으로 불렸다. 지도에서 표현된 것처럼 북쪽의 鶴鳳山(664m)과 남쪽의 頭毛山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그리고 학봉산으로부터 줄줄이 연결된 산줄기의 표현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읍치 주변의 산줄기는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 역시 회화식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방식이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3壇1廟, 즉 厲壇·社(稷)壇·城隍壇(지도에는 發告壇으로 되어 있음)과 文廟(향교에 있는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여단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성황단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3단의 경우 제단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많았는데, 이 지도에도 그러한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도로는 붉은색·남색·노란색의 순서로 중요성이 달랐다. 붉은색 도로의 경우에만 고개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못이나 기암괴석 등 특이하게 생긴 지형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龍淵은 비가 오지 않을 때 祈雨祭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 창고와 사찰도 중요한 정보로 인식되어 표시되고 있다.(이기봉)
임피현은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대야면, 개정면, 성산면, 나포면, 서수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피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라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함열, 아래로는 옥구에 연결된다. 금강이 북쪽을 휘돌아 나가고 고을 남쪽에는 동진강의 지류가 서쪽으로 흘러간다. 지도에는 鷲城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강조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이 읍성은 1410년 崔潤德이 전라도 巡問使가 되었을 때 장정 1만 7천여명을 동원하여 40일만에 쌓았다고 한다. 해안의 방어를 목적으로 했던 성이기 때문에 문은 남쪽으로 하나만 만든 것으로 보인다. 北三面에는 羅 倉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공주에 설치되었던 羅里浦倉을 말한다. 중종 때 공주에 설치되었다가 경종 때 臨陂로 옮겼으며, 영조 때에 山에 속했다가 다시 임피로 옮겼는데, 이후 정조 때 다시 나주목으로 옮겼다. 따라서 지도의 내용은 영조 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 서북쪽 강가에는 세금을 거두었던 海倉이 그려져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는 고려의 漕倉 중의 하나인 鎭城倉으로 흙으로 쌓은 성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남쪽의 鳳岩書院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임피 현감을 지낸 金集 등을 배향하여 1695년(숙종 21)에 사액받은 서원이다.(오상학)
진안현은 지금의 전북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의 사이 고지대에 위치한 산간 고을로 북쪽은 금강 수계, 남쪽은 섬진강 수계에 해당한다. 고을의 진산은 북쪽의富貴山으로 읍치의 산세가 이곳에서 갈라지고 있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大同庫, 賑恤廳 등의 고을 재정과 관련된 시설물도 그려져 있다. 고을 남쪽에는 유명한 마이산이 그려져 있는데 馬耳山(685m)은 마치 말의 두 귀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암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되었던 산이다. 신라에서도 西多山이라 하여 小祠를 지냈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행해졌다. 1413년(태종 13) 태종이 남행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쪽의 馬靈面에는 원래 마령현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백제의 馬突縣이었는데 신라 때 마령으로 고치고 林實郡의 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초기에 全州에 속하였고 후에 鎭安의 監務가 겸임하게 하였다. 고을의 남서쪽(현재 백운면 백암리)에는 절경으로 유명한 白雲洞 계곡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장흥부는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량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 웅치면, 회령면 그리고 완도군 금당면, 생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 일대에 있었다. 장흥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탐진강이 고을을 돌아 나간다. 비교적 너른 범위에 걸쳐 있는 지역의 모습이 단일한 시점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해안의 島嶼에는 소속처까지 기재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일명 長寧城이라고 한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는 당시 성 둘레가 13,435尺으로 비교적 큰 성에 해당한다. 동북쪽 迦智山 아래쪽의 寶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남쪽의 碧沙驛는 9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1520년에만든 것이다. 남쪽 해안가에 있는 會寧鎭城은 1490년(성종 21) 4월에 축조된 萬戶鎭城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水軍 鎭營이었다. 특히 지도에는 서원과 사우의 표시가 상세하다. 읍치 남쪽의 淵谷書院은 1698년(숙종 24)에 창건되고 1726년(영조 2)에 사액되었는데, 閔鼎重·閔維重을 배향한 이 고을의 대표적인 서원이다.(오상학)
임천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충화면, 세도면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임천면 군사리 일대에 있었다. 임천은 고을 동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는 수륙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당나라 劉仁願이 扶餘를 공략할 때도 이곳이 견고하여 피해갔다고 한다. 임천은 특히 모시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여 모시로 얻는 이익이 한산과 더불어 으뜸으로 손꼽혔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聖興山이다. 이 산에는 둘레가 2,705척의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 때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옛 성인 加林城이 바로 성흥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 태조 때의 명장인 庾黔弼이 지켰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郡民들이 사당을 짓고 그의 木像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했다. 읍치 남쪽의 七星山은 너른 평야에 일곱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七星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남쪽의 南塘津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진도로 당시에도 津船이 2척이 있었는데, 물이 깊고 험해 南塘津祠를 세워 뱃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남쪽에 위치한 七山書院은 1687년(숙종 13)에 세워져 1697년(숙종 23)에 사액을 받았는데, 市南 兪棨를 배향한 서원이다.(오상학)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서면, 판교면, 종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비인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남포, 아래로는 서천과 연결된다. 이중환의 ≪擇里志≫에서는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해 있어서 생선·소금·메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는 산줄기가 뻗어오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특히 扶蘇山에서 뻗어 내린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서쪽 해안가의 內都屯串에 위치한 馬梁鎭은 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는 진영으로 서천포를 관장했다. 藍浦 廣岩에 있던 진영이 배를 대기에 불편하여 1655년(효종 6)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해안가에 있는 裁松山에는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는데 고을에서 장양하는 禁松으로 보인다. 지도 여백의 기록에 의하면 해안의 船倉所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1척이 배치되어 군사적 기능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封山도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었는데, 장성한 나무보다는 아직 어린 稚松들이 많은 상황이었다.(오상학)
온양군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탕정면을 합친 지역이었다. 최근에 이 지역이 도농통합시로 되면서 시의 명칭이 시내에 해당하는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온양이 없어진 셈이 된다. 온양군의 읍치는 아산시 읍내동에 위치해 있었다. 고을의 동쪽을 지금이 온양천인 加之川이 흘러가 곡교천과 합류한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燕山이다. 산지는 맥세를 강조하여 조감도식으로 표현되었다. 고을의 서면에는 溫泉이 표시되어 있는데 보이는 건물은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行宮이다. 이 온천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태조·세종·세조 임금이 다녀갔고 조선후기에는 숙종과 영조도 이곳에 행차했다. 읍치에서 온천 행궁까지 이르는 御路는 검을 선으로 그린 점이 이채롭다. 南下面의 도로변에는 時興驛이 위치하고 있다. 이 역은 察訪驛으로서 驛丞 1명이 있었고, 昌德·日興·汲泉·順城·興世·長時·花川驛 등을 관할하였다. 그 위쪽에는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려준 孝旌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을의 형세를, ‘북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고 남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고 했다. 이 고을도 천안처럼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지도에 보이는 外也串面, 安中面, 堰里面, 慶陽面이 그것이다. 경양면은 경양현이 있었던 곳이다. 이들 월경지도 해산물의 수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을은 溫祚王이 도읍으로 삼았다는 尉禮城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지도의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북쪽의 蛇山이다. 읍치 남쪽의 鵂鶹巖은 그 모양이 양, 말, 인물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의 聖居山은 고려 태조가 고을 서쪽 愁歇院에 거둥했다가 산이 성스러워 붙인 이름이다. 조선의 세종도 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 전한다. 고을의 서북쪽에 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었다. 근처에는 주막의 모습도 보인다.(오상학)
아산현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염치읍, 영인면, 음봉면, 인주면, 둔포면을 포괄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영인면 아산리 일대에 있었다. 아산만에 위치하여 해안을 접하고 있고 남쪽의 곡교천, 삽교천을 통한 수운의 이점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지역 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일찍이 국가에서 영안산 북쪽 바다에 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여러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 배에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하는데 지도에 보이는 貢稅倉이 그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倉庫條에 의하면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건물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인근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보내던 조운 활동의 요지로서 1523년(중종 18)부터 1762년(영조 38)까지 유지된 이 곳의 漕倉(공진창)은 전국 9대 조창의 하나였다. 성곽은 1631년(인조9)에는 축조되었고, 숙종 때에는 아산·전의·목천·연기·청주·온양 등 6읍의 稅米만 이 창고에 보관되었다. 고을 동남쪽의 忠武公祠宇는 1706년(숙종 3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된 서원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李莞, 李鳳祥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아산 현충사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함양하는 도장이 되었다.(오상학)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유가면·구지면과 논공읍의 상리 동쪽, 고령군 개진면의 동쪽 옥산리 일대, 우곡면의 동남쪽 답곡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현풍면 부동에 있었다. 읍치 주위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중 城隍壇을 제외한 社壇·厲壇·文廟(향교)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琵瑟山(1,083m)을 비롯하여 높은 산지가 펼쳐져 있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동서를 오가는 나루(津)가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현풍현의 지도이기 때문에 서쪽의 고령으로부터 흘러와 왕지면에서 합류하는 회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낙동강 서쪽에 있는 津村面·畓谷面·王旨面은 고령과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하천에 의해 현풍과 분리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현풍과의 연결성이 더 좋은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仇之面은 仇知山部曲이 있던 곳으로 현재도 달성군 구지면으로 불리고 있다. 이 부곡은 원래 현재의 밀양에 딸린 곳이었는데,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현풍으로 소속을 옮긴 후 面으로 재편되면서 독자적인 성격을 상실하였다. 지도에는 각각 2개의 書院과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禮淵書院은 숙종 18년(167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본관이 이 고을 현풍이고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일어난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곽재우(1552-1617)와 안음현감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곽준(?-1594)이 配享되었다. 지도 왼쪽의 道洞書院은 선조 40년(160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김종직(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1498) 때 유배당하고 갑자사화(1504) 때 처형당한 김굉필(1454-1504)을 배향하였으며, 이후 정구(1543-1620)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중 道洞書院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淸白祠와 松潭祠는 사액서원이 아니다. 비슬산 주변에는 3개의 절이 표시되어 있어, 사찰이 서원 못지않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瑜珈寺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숙종 25년(1699)과 영조 52년(1776) 등 많은 중창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찰이다.(이기봉)
칠곡부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지천면·동명면과 가산면의 동쪽 일부, 대구광역시 북구 서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동명면 架山山城 안에 있었다. 칠곡부는 조선 초까지도 성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조선에서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대형 산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대형의 산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매우 빠른 시기인 인조 18년(1640)에 架山山城이 만들어졌다. 이 가산산성은 한양-동래를 잇는 大路에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한 최고의 關防處로 여겨졌다. 所也峴에서 琴湖津으로 연결된 적황색 도로가 바로 이 대로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都護府가 설치되면서 성주로부터 독립된 고을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에서도 읍치가 있는 內城을 비롯하여 북쪽의 中城과 남쪽의 外城 등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산성 안에는 일상적인 성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찰이 2개 보이고 있다. 이 중 외성에 있는 天柱寺에는 軍器·弓·箭(화살)을 보관했던 것으로 여러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향교는 원래 읍치 근처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고을에서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훨씬 남쪽의 八莒面에 있었다. 읍치가 架山(901m) 주변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八莒面에서의 八莒란 명칭은 칠곡의 古號이며, 후에 이곳으로 읍치를 옮긴다. 현재의 위치는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일대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泗陽書院은 鄭逑(1543-1620)를 배향하여 효종 2년(1651)에 설립된 서원으로, 현재 지천면 신리에 있었다. 下北面 동쪽에 있는 松林寺에는 통일신라 때 건립한 塼塔 중의 하나로서 보물 189호로 지정된 5층탑이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며, 아래쪽은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이기봉)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熊山(703m)이다. 지도에는 熊巖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면서도 과장되게 그렸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에는 제단 모양을 그려 넣어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에는 일본과 가까운 해안가이기 때문에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전략적 요인 때문에 수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은 ‘○○鎭’으로, 정4품의 水軍萬戶나 종9품의 水軍別將이 파견된 곳은 ‘○○陣’으로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船所’라는 표시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船所란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각 鎭堡에 배치된 전선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邑船所는 웅천현 관할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던 곳이며, 각 鎭堡가 관할하던 곳에는 선소 앞에 관할 진보의 이름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倭城도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倭軍은 울산-순천에 이르는 해안가로 후퇴한 후 수많은 倭城을 쌓아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는 이 왜성을 근거지로 다시 북상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왜군이 저항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2개의 倭古堞과 1개의 古倭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흔적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 바닷가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덕도를 제외하면 크기의 비교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만 좀 큰 섬이면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人居’라는 표시를 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封山도 2개나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조선후기에 산림의 남벌로 戰船의 船材 조달도 어렵게 되자,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지역이다. 기타 도로와 봉수 등의 정보가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세한 편이다.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을 기록하였다.(이기봉)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하양현은 경산시 하양읍, 계전리를 포함한 남쪽의 와촌면, 신상리-봉화리-문천리를 포함한 북쪽의 진량면,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각산동·신서동·동내동 일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無落山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금호강인데, 위쪽의 주기에는 금호천으로 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3단1묘는 일반적으로 읍치 주변에 배치되며, 고을 수령의 권위와 그가 거주하는 공간의 위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 성황단과 여단은 고을 백성을 대표한다는 성격을, 사직단과 문묘는 중앙의 임금을 대신한다는 성격을 지닌 제사공간이었다. 지도 왼쪽에는 경산 북면과의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安心面이 원래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진 安心所의 지역이었는데, 麗末鮮初를 지나며 거리상 가까운 경산이 아니라 좀더 먼 하양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琴湖書院은 許稠(1369-1439)를 배향하여 숙종 10년(1684)에 세워지고, 정조 14년(179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서원이 未賜額으로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의 내용이 1790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조가 이곳에 배향된 이유는 조선 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본관이 河陽이어서, 이 고을의 품격을 대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이기봉)
제천현은 제천시 시내·봉학면·봉양읍·백운면 전체, 금성면의 월림리·동막리·대장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제천시 시내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읍치를 강조하기 위해 북쪽으로부터 읍치까지 내려오는 산줄기를 상세하게 그렸다. 읍치 바로 뒤쪽의 산은 다른 산에 비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읍치 주변의 面 이름에 左·右란 글자가 들어간 경우가 있는데, 읍치 북쪽의 산으로부터 읍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붙여졌다. 물줄기는 고을의 산줄기를 강조하기하기 위해 일부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遠西面 오른쪽의 하천은 북쪽의 원주 경계를 넘어서 흘러들어 오지만,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원서면 바로 위쪽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란 대중가요 때문에 유명해진 박달재가 ‘朴達峙’로 나온다. 그 오른쪽에는 ‘朴達洞幕’, 즉 酒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이런 酒幕은 조선후기에 고개나 나루 등 사람이 일시 머무는 곳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의 지도에는 별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위쪽에는 신라 초기(보통 三韓時代라고 부름)에 만들어졌다는 義林池의 모습이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의림지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일반적인 堤堰에 비해 엄청나게 큰 인공저수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큰 규모로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나 밀양의 수산제가 조선시대에 모두 메워져 사라진 반면에 지속적으로 수축되어 사용되었다. 협곡 사이에 높은 제방을 쌓아, 호수 면적에 비해 많은 저수량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수지 남쪽의 넓은 들판에 관개의 이로움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다. 읍치 아래쪽의 書院은 滄洲書院인데,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다른 지도에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 寺刹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이 특이하다.(이기봉)
평산부는 일제시대의 황해도 평산군 전체와 연안군의 목단면·괘궁면·용해면에 해당된다. 현재는 황해북도 평산군·린산군과 황해남도 봉천군·연안군 서쪽 일부·청단군 동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평산군 산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지도 위쪽에 가장 큰 산으로 그려져 있는 滅惡山(816m)이다. 인구나 면적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큰 고을이며, 세 개의 서로 다른 유역권에 속해 있고 고을의 경계선도 복잡하다. 이런 현상은 보통 몇 개의 고을이 합쳐질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평산에 대한 地誌의 기록에는 그러한 흔적이 보이고 있지 않다. 평산 박씨인 朴守卿(?-964) 등이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고려시대 내내 가장 강한 호족 중의 하나로 군림했던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의 동쪽은 예성강과 그 지류(漏川)가 보이고 있으며, 서북쪽은 북쪽으로 흐르는 재령강의 상류(琵琶川), 남쪽은 화양천(三灘)의 유역권에 속한다. 고을 북쪽과 중앙 부근에 높은 산이 몰려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곳으로부터 거의 평지에 가까운 남쪽 부분까지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 가장 전형화 된다. 읍치는 環抱型의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식이다. 실제 지형이 이런 모양이 아닐지라도 관념 속에 인식된 형태가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읍치 오른쪽의 太白山城은 신라 경덕왕 21년(762)에 처음 쌓았다고 하며, 이후에도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조선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지역 집단 방어의 중심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영조 때 둘레 12,111尺(약 3,633m)에 달하는 대형산성으로 修築되었다. 예성강에는 다리가 세 개나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모두 여울(灘)에 설치되어 있다. 여울이란 물살이 빠르면서 수심이 얕은 구간이며, 이런 곳에 다리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성강의 폭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통해 볼 때, 지도에 그려놓은 것처럼 나무와 흙으로 만든 임시적인 다리였다고 생각된다. 도로는 붉은색·노란색·남색의 순으로 그 중요성을 표시하였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붉은색 직선으로 그려 넣었다. 申崇謙(?-927)·李穡(1328)을 배향한 東陽書院과 朴世采(1632-1695)를 배향한 九峯書院도 중요한 정보로서 표시되어 있다. 두 서원 모두 숙종 때 사액 받았다. 신숭겸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申氏를 賜姓받으면서, 이 고을을 본관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이 밖에 사찰과 창고 등도 아주 자세하며, 지도 가운데에는 현재도 봉천온천으로 개발되어 있는 溫井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전주는 지금의 전북 전주시 시내, 삼례읍·봉동읍과 완주군 용진면·소양면·상관면·구이면·이서면, 익산시 익산 시내·오산면·왕궁면, 김제군 금산면 일부, 충남 논산시 양촌면 일부를 포함하는 호남의 大都會였다. 읍치는 전주시 경원동, 중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貫鄕이자 전라 감영의 소재지였다. 지도 상단에 기재된 당시 전주의 인구는 75,494명이었다. 지도에는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전주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전주 읍치는 전주천 충적토상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여 남동쪽 전주천 변에서 북서쪽으로 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이다. 지도에는 당시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성 둘레가 2,618步였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 허물어지고 문루도 남문인 풍남문만이 남아 있다. 읍성 안쪽의 眞殿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 하여 이성계의 御容을 奉安한 곳으로 1422년(세종 4)에 慶基殿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威鳳山城은 1675년(숙종 1)에 성을 쌓고 行宮을 설치했던 곳이다. 고을의 북쪽에는 12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道인 參禮驛이 館舍 건물과 함께 대로상에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여백에는 인구, 전답, 재정, 군사, 문화 등과 관련된 각종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정자를 公亭子와 私亭子로 구분하여 기재한 점은 일반적인 읍지에서도 보기 힘든점이다.(오상학)
창평현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 수북면, 고서면, 창평면, 남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창평면 창평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는 산지면에 위치한 고을로 위로는 영산강 상류를 따라 담양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섬진강 지류를 따라 동복에 연결된다. 지도 위쪽의 長北面과 長南面은 長平部曲의 자리로서 지금의 담양군 수북면 일대이고, 甲鄕面은 甲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대전면 갑향리 일대로서 모두 창평의 越境地에 해당한다. 담양 고을을 넘어 위치해 있지만 군현의 경계가 표시되지 않아 흡사 인접한 지역처럼 보인다. 지도에는 산지를 환포형으로 그려 읍치를 부각시켰다. 읍치 내에 중요 건물인 客舍는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는지 터만 표시되어 있다. 창평은 누정 문화의 보고로서 지도에도 유명한 정자들이 그려져 있다. 고을의 남쪽에 있는 息影亭, 瀟 園 등이 대표적인 누정이다. 소쇄원은 梁山甫(1503∼1557)가 은사인 정암 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別墅庭園이다. 息影亭은 1560년(명종 15) 棲霞堂 金成遠(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인 石川 林憶齡(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식영정의 당시 주인은 幼學 鄭敏河였고 소쇄원은 幼學 梁翼龍이었다.(오상학)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大朴谷山인데 지도에는 산명이 없고 단지 면명에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慈悲城이라 불리는 옛 성이 있었다. 읍치의 북쪽 鷄鳳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200척이고 우물과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渡가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도는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赤谷面에는 道林寺가 표시되어 있으나 단지 터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중기까지 있었으나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며, 도림사 터에는 현재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 남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시내,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고을로 서쪽으로는 泰安, 동으로는 海美에 연결된다. 고을이 안면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모습이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의 맥세를 표현하였다. 무엇보다 안면도 남쪽 지역의 표현이 독특하다. 안면도는 홍주와 태안, 서산 등의 고을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다. 船材를 장양하는 많은 봉산이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55가구가 살고 있었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는 간월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50가구가 살고 있던 섬이었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연륙되었다. 고을의 북부에는 僉使鎭인 平薪鎭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望日山 아래 목마장과 같이 있다가 목마장이 남양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三吉山 밑으로 옮겼다. 이후 1794년(정조 18)에 獨鎭이 되었다. 안면도의 남쪽에 要兒梁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군절도사가 군사를 보내 방수하던 곳이다. 聖淵面의 鳴川倉은 고려 때 永豊倉의 옛터이기도 하다. 군내면에 있는 도로변에는 豊田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과거 왜구로 인해 없어졌던 것을 1400년(정종 2)에 다시 설치하였다.(오상학)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산간 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세가 가장 높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북쪽의 용두산(해발 871M)인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은 읍치 북쪽에 있는 義林池로 지도에도 원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허물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朴達峙가 있는데, 오늘날 노래 ‘울고넘는 박달재’로 알려진 이 고을의 대표적인 고개이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육로 교통의 분기점으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또한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 월경지들은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당시 세곡과 해산물의 수취를 목적으로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동북쪽에 치우쳐 있는 읍치에는 객사와 사창, 華祝館 등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 보이는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地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 珠島 등의 지명이 보인다. 大東面 부근의 豊歲坪은 고려시대 豊歲縣이 있던 자리이다. 지도에서는 다른 고을과 달리 일부의 洞里 지명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연기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연기는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청주와 문의, 서쪽과 남쪽은 공주, 북으로는 전의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북쪽으로 목천·전의에서 남쪽으로 연기까지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살기를 벗어다고 한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고을의 중앙을 관통하여 흘러가는 東津(지금의 연기천)이 금강과 만나는 곳에는 合江이라고 강조되어 표시되었다. 지금의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합소서원이 남아 있다.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오상학)
풍기군은 지금의 영주시의 풍기읍·봉현면·안정면과 예천군의 상리면·하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은 내성천의 지류인 남원천 유역이고, 왼쪽은 역시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두 지역은 고려 말까지 각각 안동의 屬縣인 基川縣과 殷豊縣으로 독립적인 고을이었다.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기천현에 監務를 설치하면서 은풍현을 속현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문종의 태를 殷豊縣 鳴鳳寺 뒷산에 안치하면서 두 현을 합쳐 豊基로 고치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은풍현은 현재의 영주시 상리면과 하리면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 아래쪽의 殷豊倉이라는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위쪽의 郁陽書院은 이황(1501-1570)과 황준량(1517-1563)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아래쪽의 愚谷書院은 풍기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던 유운룡(1539-1601) 등을 배향하여 숙종 34년(1708)에 세워졌지만 賜額書院은 아니다. 사찰도 총 4개가 표시되어 있어 불교에 대한 인식도 유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죽령 바로 밑의 땅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순흥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죽령이 마치 풍기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의령현은 궁유면의 운계리·평촌리·벽계리를 제외한 의령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는 선조 22년(1589)에 만들어진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표시된 德山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낙동강 본류가, 아래쪽에는 그 지류인 남강이 흘러와 합류한다. 남강 변에 있는 鼎巖津은 솥 모양의 큰 바위가 강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갈수기 때 남강을 거슬러 오르는 수많은 소금배의 최종 정박처로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 내내 남강에서 가장 번성한 浦口였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이 남산천이며, 북쪽의 것이 유곡천이다. 후자의 지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新繁縣이 있었다. 지도 오른쪽에 毛兒面·大谷面이 있는 지역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강의 지류인 양천의 최상류에 속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谷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효종 7년(1656)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9)에 賜額받았다. 사찰의 표시도 아주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寶泉寺에는 보물 373호로 지정된 3층석탑과 472호로 지정된 부도가 보존되고 있다. 이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으로 구분했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흥해군은 포항시 흥해읍과 시내의 우현동·창포동을 포함한 북부, 연일읍의 달전리·자명리·유강리·학전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왼쪽에 표시된 禱陰山이다. 도음산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船材)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封山의 둘레가 40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2개의 하천이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이 현재의 형산강이고, 위쪽이 곡강천이다. 형산강은 경주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은 하천에 불과한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곡강천은 지도에 北川과 曲江 2개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이름의 통일화 작업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르게 불렀음을 보여주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北川이란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울러 이 曲江은 신라 때 吐只河라고 불렸으며, 中祀에 東瀆이라 실려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닷가에 있는 烏島도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작지만 섬이 거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曲江書院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 출신인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주기에는 北上面, 지도에는 上北面이라고 표기한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이기봉)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읍치나 서원 등으로 뻗은 산줄기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읍치는 마치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의 표현이다. 풍수적 명당임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城隍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성황당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마을(村)에 있는 성황당 또는 서낭당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격이 다르다. 읍치 아래쪽에는 ≪충청좌도각읍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烽臺가 보이고 있다. 호응관계에 있는 봉수가 주기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지도에는 직선의 분홍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도에 磻灘이라고 적혀 있으며, 鵲川으로 통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다양한 하천 명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반탄이나 작천의 명칭은 사라지고 현재는 미호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百源書院은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芝山書院은 숙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崔錫鼎((1646-1715)을 배향하여 경종 2년(1722)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주기에는 다른 고을로 통하는 고개의 험준함과 驛에 배치된 말의 종류 및 수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황주군은 일제시대의 황해도 황주군에 해당되며, 현재는 황주군·송림시 전체와 연탄군의 서쪽 절반에 걸쳐 있다. 읍치는 황주군 황주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碧霞山이다. 지도 왼쪽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대동강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재령강이 합류한다. 이곳을 急水門이라고 하며, 潮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다로 인식되었다. 고을의 한가운데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황주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간다. 읍성 왼쪽에 있는 海倉을 통해 潮水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오른쪽에는 ‘筒’이라는 명칭이 2개 보이고 있는데, 보통 간척하여 만든 둑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女妣筒과 細塘筒은 간척 과정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둘레 2,000尺(약 600m) 안팎의 제언이다. 지도 아래쪽 왼쪽에는 간척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大也島-斗用島-烽火串을 잇는 防築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大也筒이 보이고 있다. 그 바깥쪽은 육지로 표시되어 있지만 간석지, 즉 갯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에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야도 오른쪽에는 蘆田(갈대밭)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갈대의 쓰임새가 많아 중요한 稅源으로 인식되었다. 고을의 남쪽과 서쪽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산줄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듯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서,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地脈이 모든 지역에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적 인식의 반영이다. 북쪽으로부터 대동강을 넘어온 적을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 인식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남쪽의 산줄기가 재령강과 만나는 지점은 대부분 습지로 존재했기 때문에, 대동강을 넘어온 적은 남쪽의 산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이 산줄기 위에는 각종 방어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도 중요한 고개 이름이 붉은색 타원 안에 적혀 있으며, 洞仙關·正方山城·蕀城土城 등 중요한 방어시설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 고을의 읍치에는 黃海道兵馬節度使營(兵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읍성은 둘레 2,830步(약 5,094m)에 해당되는 대형이었으며, 문을 공격하는 적을 재공격하기 위한 甕城과 도랑에 물을 넣어 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는 垓字도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朱子書院의 일반 명칭은 白鹿書院이며, 朱子(1130-1200)·金宏弼(1454-1504)·李珥(1536-1584) 등을 배향하였다. 선조 1년(1568)에 세워지고, 경종 1년(1721)에 賜額 받았다. 기타 일반적으로 ‘面’이라 지칭되는 행정단위가 본 지도에서는 ‘坊’이라고 적혀 있다.(이기봉)
진산군은 지금의 전북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는데 비교적 면적이 작은 고을이다. 읍치는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상류에 위치한 고을로 북으로는 충청도와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錦山에 연결된다. 백제 시기의 珍同縣과 고려의 猿山鄕 지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고을이기 때문에 珍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지도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세를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태실이 있는 북쪽 산의 맥세가 부각된 점이 이채롭다. 태조의 태실은 1393년(태조 2) 고을 사람 陳舜道의 건의에 따라 태조 이성계의 胎를 영흥부에서 옮겨 봉안한 것이다. 지도상에도 태조 이성계의 태실과 비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歡壽阿只氏의 胎室이 그려져 있지만 태조의 태실만큼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읍치 내부에는 2층 누각으로 된 邀月臺가 그려져 있는데, 군수 鄭 이 처음 세운 것으로 孫比長의 기문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을 남쪽의 淸澄淵도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강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어서 기우제를지냈던 곳이라 한다. 향교 동쪽의 水心臺는 重峯 趙憲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오상학)
화순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화순읍, 동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일대에 있었다. 호남정맥이 지나가는 산지에 위치한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 영산강의 지류인 화순천이 고을을 감돌아 나간다. 다른 고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의 고을이어서 지도도 작고 내용적 비교적 간략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羅漢山인데 주맥은 무등산에서 뻗어 내려왔다. 읍치 동쪽에 있는 卵山을 흡사 알처럼 그린 것이 이채롭다. 그 동쪽으로 九峯山이 있는데 봉우리를 아홉 개로 표현했다. 고을 서남쪽 평지에는 鶴栖島가 그려져 있다. 이는 화순천의 하도가 변경되면서 하중도였던 학서도가 평지로 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나한산 밑에는 이 고을 최고의 명찰인 萬淵寺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 1208년(희종 4)에 만연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한국전쟁 전까지는 많은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동면의 烏城山에는 古城이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오상학)
정산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정산면 서정리 부근에 있었다. 북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가고 남으로는 금강과 연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大朴谷山인데 지도에는 산명이 없고 단지 면명에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慈悲城이라 불리는 옛 성이 있었다. 읍치의 북쪽 鷄鳳山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1,200척이고 우물과 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읍치 동남쪽 금강 변에 江倉과 汪津渡가 표시되어 있다. 강창은 정산현의 세곡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 보관된 창고이었다. 왕진도는 漕運船이 출발하는 포구이면서 부여로 통하는 도로의 주요 나루터이었다. 赤谷面에는 道林寺가 표시되어 있으나 단지 터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다. 도림사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중기까지 있었으나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며, 도림사 터에는 현재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고을 남쪽의 定惠寺는 841년(신라 문성왕 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松月禪師가 중창한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은 절이다.(오상학)
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시내, 부석면, 인지면, 팔봉면, 지곡면, 성연면, 대산면, 음암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읍내동과 동문동 일대에 있었다. 서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고을로 서쪽으로는 泰安, 동으로는 海美에 연결된다. 고을이 안면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모습이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의 맥세를 표현하였다. 무엇보다 안면도 남쪽 지역의 표현이 독특하다. 안면도는 홍주와 태안, 서산 등의 고을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었다. 船材를 장양하는 많은 봉산이 있었던 곳으로 지도에도 울창한 송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 55가구가 살고 있었다. 고을의 남쪽 해안에는 간월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50가구가 살고 있던 섬이었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연륙되었다. 고을의 북부에는 僉使鎭인 平薪鎭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望日山 아래 목마장과 같이 있다가 목마장이 남양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三吉山 밑으로 옮겼다. 이후 1794년(정조 18)에 獨鎭이 되었다. 안면도의 남쪽에 要兒梁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군절도사가 군사를 보내 방수하던 곳이다. 聖淵面의 鳴川倉은 고려 때 永豊倉의 옛터이기도 하다. 군내면에 있는 도로변에는 豊田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과거 왜구로 인해 없어졌던 것을 1400년(정종 2)에 다시 설치하였다.(오상학)
제천현은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송학면, 봉양읍, 금성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제천시 중앙로 1가 일대에 있었다. 산간 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지세가 가장 높다고 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고 산 위에 터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이 열려 있고 산이 낮아서 훤하고 명랑하며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들이 많다. 그러나 지대가 높아서 바람이 차고, 땅이 메말라 목화가 없으며 부자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고을 북쪽의 용두산(해발 871M)인데 지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이 고을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은 읍치 북쪽에 있는 義林池로 지도에도 원으로 크게 부각되어 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城池條에 의림지는 현 북 10리에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고, 관개면적이 심히 넓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때 의림이 적성(단양), 자춘(영춘), 사열이현(청풍), 내제(제천)의 네 고을사람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1441년(세종 23)에 충청관찰사 정인지가 고쳐 쌓았고, 또 허물어진 것을 1456년(세조 1)에 다시 쌓았다. 충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朴達峙가 있는데, 오늘날 노래 ‘울고넘는 박달재’로 알려진 이 고을의 대표적인 고개이다.(오상학)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과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에 있었다.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있었던 고을로 최초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다. 이후 忠淸兵營을 1416년(태종 16)에 충남 海美로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도는 넓은 지역에 펼쳐 있는 고을의 모습을 방격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읍치와 주변지역에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는데, 월경지는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拱北樓가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臥牛山으로 동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연기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면, 동면, 남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남면 연기리에 있었다. 연기는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청주와 문의, 서쪽과 남쪽은 공주, 북으로는 전의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북쪽으로 목천·전의에서 남쪽으로 연기까지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살기를 벗어다고 한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元帥山(해발 254M, 일명 원사봉)은 고려 충렬왕 때 哈丹이 침범해 오자 이를 물리치러 온 원나라의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전한다. 고을의 중앙을 관통하여 흘러가는 東津(지금의 연기천)이 금강과 만나는 곳에는 合江이라고 강조되어 표시되었다. 지금의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합소서원이 남아 있다. 東津은 문의, 회인으로 통하는 나루터이다. 물이 넘칠 때에는 200보 정도이고 물이 가물면 50보 정도여서 배로 다닐 수 없다. 동진은 나루의 명칭이지만 하천의 명칭도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진의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 두타산에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는 충주 적현에서 나오며, 마지막 하나는 전의현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오상학)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대덕면·부항면, 구성면의 상원리·미평리 서남쪽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지례면 교리·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龜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삼도봉(1,177m)과 대덕산(1,290m) 등 소백산맥이 지나가며, 남쪽과 동쪽으로도 높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는 牛頭嶺이 표시되어 있는데, 거창과 지례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였다. 고을 동·서·남의 삼면에서 흘러온 물이 甘川이 되어 동북쪽의 金山(지금의 김천)으로 흘러나간다. 읍치에는 華玉亭, 鑑湖亭, 寒松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중 鑑湖亭은 숙종 16년(1690)에 현감 조인상이 연못을 파서 세운 정자로서, 이름만으로도 정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기타 남북의 주요도로가 마치 직선으로 이루어진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적황색 직선의 실선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창원부는 지금의 대산면을 제외한 창원시 전체, 마산시 시내·내서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원시 소계동·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뒤쪽의 檐山이다. 이 고을은 조선 태종 때 義昌縣과 會原縣을 昌原이란 이름으로 합쳐 만들어졌는데, 회원현의 중심지는 회원서원 부근에 있었다. 檜原書院은 鄭逑(1543-1620)와 그의 제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인조 12년(1623)에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읍치 아래쪽의 鄕賢祠는 朴身潤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지만, 역시 사액 받지는 못했다. 여기서 박신윤이란 인물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을 통해 서원과 향현사 사이에 격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西三面에 있는 月影臺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月影臺’라는 글자를 楷書體로 손수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쪽의 해창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 이곳은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征東行省을 설치한 合浦로서, 3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출발지이기도 하였다. 舊兵營은 태종(1401-1418) 때 慶尙右兵營이 세워졌다가 선조(1568-1608) 때 진주로 옮겨간 곳이다. 그 옆의 盤龍山 밑에는 영조 36년(1760)에 盤山倉이라는 漕倉을 설치하여, 근처 9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서울로 옮겼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이 지도가 1760년 이전의 상황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3개,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국가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伐木을 금지시키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의 自如驛에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이기봉)
진천현은 충청북도 진천군 대부분에 해당되며,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교성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읍치나 서원 등으로 뻗은 산줄기를 특별히 강조하여 그렸다. 읍치는 마치 높은 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의 지형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의 표현이다. 풍수적 명당임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城隍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성황당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마을(村)에 있는 성황당 또는 서낭당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격이 다르다. 읍치 아래쪽에는 ≪충청좌도각읍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烽臺가 보이고 있다. 호응관계에 있는 봉수가 주기에 자세히 적혀 있으며, 지도에는 직선의 분홍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은 지도에 磻灘이라고 적혀 있으며, 鵲川으로 통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다양한 하천 명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반탄이나 작천의 명칭은 사라지고 현재는 미호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百源書院은 李穡(1328-1396)의 아들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살해된 李鍾學(1361-1392) 등을 배향하여 선조 30년(1597)에 세워지고, 현종 10년(1669)에 賜額 받았다. 芝山書院은 숙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崔錫鼎((1646-1715)을 배향하여 경종 2년(1722)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기타 주기에는 다른 고을로 통하는 고개의 험준함과 驛에 배치된 말의 종류 및 수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이기봉)
태인현은 지금의 전북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호남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金溝, 남쪽으로는 井邑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지역의 형세가 반영되어 있는데, 동남쪽은 산지가 많고 동진강의 상류가 흘러가는 서북쪽은 상대적으로 저평하다. 읍치에는 여러 관아 건물과 披香亭과 같은 정자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披香亭은 신라 말 정강왕 때 孤雲 崔致遠이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세웠다 하며, 그 뒤 여러 번 증수하였는데 기둥이 33개이고 29평의 웅장한 건물로 동서쪽에 연못이 있다. 지금은 보물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古縣內面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아래에서도 훼철되지 않았던 서원이다. 南皐書院은 1577년(선조 10)에 창건되어 호남의 성리학자인 李恒과 그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金千鎰을 배향하였다. 이후 1685년(숙종 11)에 사액되었다. 고을의 남쪽 운주산 중턱에 있는 雲住寺는 일명 龍藏寺로 불리는 절인데 이후 폐찰되었다. 도로변에는 酒幕과 酒站의 표시도 볼 수 있는데 도로변을 중심으로 가촌이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상학))
진잠현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유성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진잠현의 읍치는 지금의 유성구 교촌동 일대에 있었다. 계룡산의 동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금강의 지류가 남쪽에서 돌아 나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이 고을에 있는 九峯山이 남쪽에 불끈 솟아서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의 東郊보다 낫고, 田地가 아주 좋고 넓으나 다만 바다가 조금 멀어서 서쪽으로 강경과 교역한다고 한다. 지도에도 읍치 남쪽에 구봉산이 환포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는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지도는 면명과 일부의 지명 몇 개 정도만 표기되어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읍치의 서북쪽에는 산기슭에 鶴雲寺라는 절이 그려져 있다. 이 절은 읍치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산장산(현 금수산)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오상학)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이익이 매우 큰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烏石山으로 동북쪽에서 맥이 뻗어오고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둘레는 3,925척이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熊津溟所가 있어서 致祭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해상의 開也召島에는 당시 53戶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봄철이면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豆山洞面의 鳴谷書院은 鳴谷 李山甫를 배향한 建巖書院을 말한다. 건암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고을 서쪽의 海倉에는 防船 2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宜松山도 한 군데 있었는데 고을 남쪽의 靈鷲山에 주위 20리의 규모로 있었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정연하게 그려져 있고 연못까지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堰里面, 外也串面, 慶陽面은 직산의 월경지인데 지도에는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본현과 인접하여 그렸다. 이들 월경지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지역의 산물을 수취했던 곳으로 보인다. 남북 직로의 연해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오늘날에도 교통의 결절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교통의 요지에 있던 곳이 현재까지 기능이 유지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 聖居山 근처에는 溫祚王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보이고 있다.(오상학)
청주목은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과 제천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대성동, 수동 부근에 있었다.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있었던 고을로 최초 1402년(태종 2)에 설치되었다. 이후 忠淸兵營을 1416년(태종 16)에 충남 海美로 옮겼다가 1651년(효종 2)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도는 넓은 지역에 펼쳐 있는 고을의 모습을 방격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읍치와 주변지역에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는데, 월경지는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남쪽의 周岸面과 서쪽의 德坪面이 청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拱北樓가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동쪽에 있는 臥牛山으로 동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동쪽으로는 청주의 대표적인 산성인 上黨山城이 그려져 있다.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하는데,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임진왜란 중인 선조대와 이후 숙종대에 대대적인 改修築이 있었다. 이곳에는 충청도의 兵馬虞侯가 파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華陽書院, 表忠祠를 비롯한 많은 서원이 산재해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배향한 萬東廟는 1704년(숙종 30)에 창건되었고 그 옆에 있는 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창건되어 송시열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유명하다.(오상학)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지도는 산지가 많은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 지역 최대의 관문인 조령성문의 모습이 성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鳥嶺은 새재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봉수대도 보이는데 古沙里面에 麻骨烽臺가 그려져 있다. 이 봉수는 동쪽으로 문경의 炭項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이 고을의 周井山 봉수에 응했다. 安保驛과 院站의 모습이 여러 건물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安富驛으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진해현은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진북면, 봉암리·양촌리를 포함한 남쪽의 진전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동면의 진동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6-700m의 산지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남해로 빠져 나간다. 현재의 진해시는 일제시대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서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웅천현에 속해 있었다. 고을이 작아 선조 3년(1570)에는 함안에 붙였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세워지고, 인조 5년(1627)에는 창원에 붙였다가 17년(1639)에 다시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의 鷲山(수리봉)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으며,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社壇과 鄕校(文廟)가 보인다. 사단은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며, 향교의 大成殿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해안가에 2개의 창고가 보이고 있다. 統都廳은 統營都廳倉의 줄임말로서, 이 고을에서 통영으로 받쳤던 세금을 모아 두던 곳이다. 咸安海倉은 이 고을 바로 북쪽에 있으면서, 바다와 접해 있지 않았던 咸安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그 왼쪽의 船所는 戰船이 정박했던 곳이다.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주기를 통해 常令驛에 大馬 2필, 騎馬 5필, 卜馬 10필이 배치되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이기봉)
초계군은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적중면·청덕면·쌍책면·덕곡면, 율곡면의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 대양면의 백암리·오산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淸溪山이다. 하천은 크기를 구별하기 어렵게 그렸다. 읍치 위쪽이 지도에는 ‘黃芚江’으로 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다. 오른쪽의 낙동강은 위쪽에는 ‘開山江下流’라고 적혀 있는 곳이 본류에 해당된다. 당시에는 고령과 맞닿아 있는 낙동강을 開山江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高靈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을 의미한다. 낙동강 변에는 몇 개의 津이 보이고 있는데, 나루를 가리킴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폭과 1척의 나룻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읍치가 있는 곳은 ‘펀치볼’이라 불리는 양구의 해안면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이다. 현재 이 분지는 초계면과 적중면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書院이 보이고 있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청산현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청성면과 보은군 내북면의 아곡리·대안리를 포함한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백운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쪽 10리에 있었다’는 已城山이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읍치로 이어진 산줄기가 서쪽으로부터 오고 있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에 있는 산줄기가 강조되어 있으며, 읍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형태로 산을 그렸다. 고을 안쪽의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인데, 실제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그려져 있다. 고을 전체가 마치 산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북쪽의 보은 방면에서 흘러 들어오는 보청천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아울러 금강으로 빠져나가는 수구 근처의 경우도 골짜기에 의해 상당히 구불구불함에도 마치 직선과 같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을의 내적 통일성 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적인 모습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 배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으로 표시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보은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보은군 내북면 북쪽 부분에 해당되며, 지도에서 표시된 것보다 훨씬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원래 酒城部曲이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이 주성부곡은 청산현의 古跡으로 처리되지 않고, 屬縣조에 기입되어 있다. 이후 面里制의 시행과정 속에서 독자성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청산의 땅으로 된 것이다. 읍치 왼쪽의 德峯書院은 西人의 거두로 알려진 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이기봉)
함열현은 지금의 익산시 함열읍, 황등면,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다. 함열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접해 있으며 위로는 龍安, 아래로는 臨陂에 연결된다. 고을의 중심을 돌아나가는 함열천을 중심으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도에는 전체적으로 고을의 모습이 소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咸羅山이다. 東二面에는 龍山古城이 그려져 있는데, 1440년(세종 22)에 현을 옮기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그러나 치소를 이곳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北二面 금강가에는 聖堂倉이 그려져 있고 漕船列泊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聖堂倉은 지금의 용안면 난포리에 있었던 得城倉이 수로가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종 때 海倉이 있는 皮浦로 옮겼다가 1487년(성종 18)에 이곳으로 옮겨 만든 것이다. 남원, 운봉, 진산, 금산, 용담, 고산, 익산 등 인근 7읍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던 漕倉이었다. 지도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운선이 11척, 沙工과 格軍을 합쳐 176명이 있었다고 한다. 함열현의 세곡은 西二面의 海倉에서 거두었다.(오상학)
청양현은 현재 충남 청양군 청양읍, 운곡면, 남양면, 대치면, 비봉면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청양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청양은 금북정맥의 사면에 위치한 산간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牛山인데 일명 騎龍山이라 한다. 여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전해진다. 고을 동쪽에는 이 지역의 명산인 七甲山과 산 기슭에 있는 長谷寺가 그려져 있다. 칠갑산은 해발 561m의 높이로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닌 명산으로 곳곳에 험한 고개가 있다.장곡사는 850년(신라 문성왕 12) 보조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현재 많은 문화재가 남아있고 특히 상하 대웅전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南下面에는 金井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은 찰방역으로 光時·海門·靑淵·世川·龍谷·夢熊·下川·豊田 등의 屬驛을 거느렸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3필, 하등마 5필이 있었다. 읍치 남쪽의 碧涵亭은 烏城都正 李希良이 세운 정자이다.(오상학)
서천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초면, 문산면, 장항읍, 마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서천읍 사곡리 일대에 있었다. 금강 하구와 서해안에 접한 고을로 위로는 비인, 동쪽으로는 한산에 연결된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이익이 매우 큰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烏石山으로 동북쪽에서 맥이 뻗어오고 있다. 읍치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둘레는 3,925척이다. 남쪽의 龍堂津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과거에는 長岩津이라 불렸는데 옥구현과 통하는 길목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熊津溟所가 있어서 致祭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해상의 開也召島에는 당시 53戶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봄철이면 고깃배들이 모여들어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豆山洞面의 鳴谷書院은 鳴谷 李山甫를 배향한 建巖書院을 말한다. 건암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세워졌고, 1713년(숙종 39)에 사액을 받았다. 고을 서쪽의 海倉에는 防船 2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宜松山도 한 군데 있었는데 고을 남쪽의 靈鷲山에 주위 20리의 규모로 있었다.(오상학)
직산현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직산면 군동리와 군서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으로는 천안, 북으로는 경기도 안성에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북쪽으로는 한강을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蛇山이다. 읍치에는 관아 건물이 정연하게 그려져 있고 연못까지도 표시되어 있다. 서북쪽에 있는 堰里面, 外也串面, 慶陽面은 직산의 월경지인데 지도에는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본현과 인접하여 그렸다. 이들 월경지에는 창고가 그려져 있는데, 지역의 산물을 수취했던 곳으로 보인다. 남북 직로의 연해있는 成歡驛은 11개의 속역을 거느린 察訪驛으로 오늘날에도 교통의 결절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교통의 요지에 있던 곳이 현재까지 기능이 유지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을의 남쪽 聖居山 근처에는 溫祚王이 도읍했다는 尉禮城도 보이고 있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작은 고을 면적에 비례하여 그려진 지도도 다소 소략한 편이다. 고을을 감돌아 흐르는 안성천과 산지, 주변의 면이름 정도가 기재되어 있다. 고을 남서쪽 안성천 변에 위치한 褒義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 동남쪽의 길가에는 주막도 표시되어 있다.(오상학)
연풍현은 현재 충북 괴산군 연풍면, 장연면 일대와 충주시 상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일원에 있었다. 속리산에서 조령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괴산, 북으로는 충주와 접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연풍은 충주 남쪽에 있는 고을로 높은 벼슬을 지낸 자는 없으나, 땅이 후하고 물대기가 쉬워서 목화 가꾸기에는 상등이다’고 쓰여 있다. 지도는 산지가 많은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 지역 최대의 관문인 조령성문의 모습이 성벽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鳥嶺은 새재 또는 草岾라고 부른다. 1708년(숙종 34)에 관문과 산성을 쌓았고, 1752년(영조 28)에 조령관문을 설치하였다. 봉수대도 보이는데 古沙里面에 麻骨烽臺가 그려져 있다. 이 봉수는 동쪽으로 문경의 炭項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이 고을의 周井山 봉수에 응했다. 安保驛과 院站의 모습이 여러 건물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安富驛으로 표기되어 있다.(오상학)
칠원현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칠서면·칠북면과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 2리에 있었다’는 靑龍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龜山面은 창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였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조선 초까지 龜山縣이 칠원현의 속현으로 존재했었다. 이 구산현은 본래 省法部曲이었는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되었고 공민왕(1352-1374) 때 칠원현의 속현이 되었다. 이곳에는 칠원현에서 수도인 한양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海倉,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龜山鎭,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재정의 결핍으로 宮房 및 王室에게 租稅勸을 나누어주었던 屯稅所가 2군데나 보이고 있다. 水晶浦稅所도 같은 유형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가며, 읍치 왼쪽의 古川은 현재 광노천으로 불리고 있다. 낙동강 변에는 3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津의 폭과 이곳에 4척의 津船(나룻배)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읍치 아래쪽의 德淵書院은 周世鵬(1495-1554)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았다. 주세붕은 중종 37년(1542) 풍기(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땅에 처음으로 白雲洞書院(지금의 紹修書院)을 세운 사람이다. 기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船材封山이 기록되어 있다. 거리를 볼 때 모두 구산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封山은 전선의 선재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것이기 때문에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다.(이기봉)
하동부는 하동군 하동읍·고전면·양보면·황천면·적량면·악양면·화개면과 북천면의 방화리·사평리·직전리, 진교면의 월운리·관곡리·고이리·백련리·송원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다. 古縣面에 있는 성곽은 세조 7년(1461)까지 읍치로서 기능했으며, 세종 때 쌓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곳이 읍치로, 뒤쪽의 陽慶山이 고을의 鎭山으로 나온다. 이후 여러 번 읍치를 옮겼으며, 지도에 표시된 읍치는 영조 21년(1745)에 옮겨진 곳이다. 숙종 28년(1702)에는 진주의 화개면·악양면·적량면·진답면 등 4개 면을 편입하여 2년 후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화개면·악양면은 고려시대에 진주의 屬縣으로 존재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섬진강이 보이고 있는데, 이름이 유래된 蟾津이 읍치 왼쪽 아래에 보이고 있다. 악양면 섬진강가에 있는 ‘賊路要害處’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깎아지른 강가의 절벽이 구례까지 계속 이어지는 곳이다. 적의 침입 시 이 지역에서 북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그 아래쪽에는 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雙磎寺가 가장 유명한데, 문성왕 2년(840)에 眞鑑禪師 慧昭가 만들어 옥천사라 불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여러 개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船所와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선소란 전선을 정박시키는 곳이며, 해창이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나르던 곳이다. 선소 위의 待變亭은 전선을 관리하던 곳이다. 그 위쪽에 보이는 統倉은 이 고을에서 統營으로 가는 稅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내횡면에 있는 永溪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이고, 무오사화(1504) 때 종성에 귀양 가서 죽은 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이기봉)
청안현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증평읍·도안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안면 읍내리에 있었다. 청안현은 태종 5년(1405)에 淸塘縣과 道安縣을 합치고, 글자 한자씩을 따서 고을의 이름을 만들었다. 읍치는 청당현의 중심지였으며, 도안현의 중심지는 북면에 있었다. 지도에는 고을의 모습을 마치 동-서로 길게 누운 형태로 그렸지만, 실재로는 서북-남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실제 모습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 인식을 중요하게 여겨 고을이 마치 직사각형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그렸다. 고을 중앙을 흐르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상류의 보강천인데, 괴산과 음성 방면으로부터 흘러 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면의 경우에도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있음에도 지도에는 역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읍치 역시 環抱型의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도 실제의 시형이라기보다는 인식된 지형이다. 지도 작성자가 풍수적 관념을 반영하려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서원은 龜巖書院이다.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李浚慶(1499-1572)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면과 역 등만 간단하게 표시하였다.(이기봉)
한산군은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한산군의 읍치는 한산면 虎岩里 일대에 있었다. 모시로 유명한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土亭 李之菡은 호서 제일의 形局으로 평하기도 했다. 또한 이 곳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水田의 비율이 旱田의 2배가 넘는 곳이기도 하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乾止山인데 북쪽에서 뻗어오는 맥세가 잘 표현되어 있다. 건지산에는 산성이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토성이고 둘레가 3,061척이었다고 한다. 읍치의 북쪽에 그려진 牧隱書院은 이 고을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文獻書院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稼亭 李穀과 牧隱 李穡을 配享하기 위하여 1594년(선조 27)에 이곳에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1610년(광해군 2)에 韓山 枯村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다음 해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지도의 하단은 금강인데 흡사 바다처럼 그려져 있다. 여러 나루터와 함께 서남쪽에는 船所도 그려져 있다. 지도 상단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에는 防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있었다.(오상학)
태안군은 지금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충청도의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고을로 곶의 형태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안에 위치하여 해적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선박이 왕래하는 수로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안흥진 서쪽에는 安興梁이 있는데 이곳은 삼남 수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뻗어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봉수대가 있었던 白華山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이 산은 사면이 모두 돌로 된 것으로 유명하다. 지도의 남쪽에는 屈浦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삼남의 漕運船이 안흥량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곳에서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서쪽의 安興鎭은 1653년(효종 4) 花亭島에서 이설된 수군 첨사진으로 士人 金石堅의 청에 의해 鎭城을 축조하였다. 서북쪽 해안의 所斤鎭은 수군 첨사진으로 1514년(중종 9)에 성을 쌓았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호남으로 향하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車嶺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는 홍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건물과 더불어 華祝館이 그려져 있다.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별도로 그려졌을 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방격을 이용한 지도에서는 거리와 방위를 고려하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여 본읍과 멀리 떨어져 그리기도 한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추풍령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충청도의 동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산간 고을이다. 서쪽으로는 영동과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의 金川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황간 고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는데 동남으로 물들이 세차게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는 원래 1,646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는 이 고을 최고의 관방으로서 秋風嶺과 掛榜嶺이 이에 해당한다. 동쪽의 金化倉이 있는 곳은 과거 金化部曲이 있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金山에 속해 있었는데 뒤에 京山府로 옮겼다가 공양왕 때 영동에 소속시켰다. 읍내면에 있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으로 宋時烈을 배향했다. 梅下面의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된 서원인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지도의 모습과 수록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거의 같다. 그러나 읍치의 남쪽 高代峯 아래에는 지금의 온달산성으로 전하는 古城의 표시가 없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현내면 아래쪽에 南窟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온달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굴에는 석회암층의 담백색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내부의 비경이 웅장하고 지표수가 유입되어 항상 수심 1m 정도의 물이 동굴 내부를 흐르고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 지도에서는 지명의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는 배를 이용한 수운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지도에서도 이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北津과 南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 변에는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 있었는데 북쪽의 赤壁과 北壁이 대표적이다.(오상학)
함창현은 상주시 이안면·공검면, 금곡리·하갈리를 제외한 함창읍, 은척면 황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쪽 경계에 있는 宰岳山이다. 읍치 아래쪽의 利安川은 상주로부터 흘러들어와 串川으로 표시된 현재의 영강(낙동강의 지류)으로 흘러 나간다. 원래 현의 서쪽 5리에 있었다는 利安部曲의 명칭에서 유래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咸昌黃嶺寺’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상주의 땅을 넘어가 있는 함창의 越境地지이며, 현재의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恭儉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로는 ‘공갈못’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제 19대 명종(1170-1197)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에 다시 修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최초의 것은 11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수지가 있는 곳의 물은 모두 상주 땅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함창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함창 사람과 상주 사람 사이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저수지가 축조된 것은 이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공검지는 모두 메워져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검면 면소재지 부근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못둑’이라는 마을의 지명이 남아 있다. 그 밖에 공검지 위쪽에 표시된 臨湖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읍치에 있는 司倉은 관아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관하던 곳이다.(이기봉)
함안군은 함안군 함안면·여항면·군북면·법수면·가야읍·대산면·산인면과 마산시 진전면의 여양리·고사리·평암리·금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남쪽에 있는 餘航山(744m)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邑治’라는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있는데, 읍치의 방향이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이 매우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嶺南地圖≫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표현 방법으로서, 한 사람이 모든 지도를 일률적으로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함안은 신라 법흥왕(514-540) 때 멸망시킨 阿尸良國, 일반적으로 阿羅伽倻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그 흔적으로 읍치 위쪽의 城山만 나오고 있다. 이 성산에는 산성이 남아 있는데,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북쪽, 지금의 가야읍 일대에는 대형고분이 능선 위에 줄을 지어 남아 있다. 지도에는 4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西山書院만이 세조 왕위 찬탈에 반대한 生六臣을 배향하여 숙종 32년(1706)에 세워지고, 경종 3년(1723)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比谷面은 높은 산줄기 남쪽에 떨어져 있는데, 현재의 마산시 진전면 북쪽에 해당된다.(이기봉)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읍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1리에 있었다’는 因地山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안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매우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서, 풍수적 관념의 반영을 통해 명당으로서의 고을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읍치 남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남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합류되는 지류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남한강 변에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단양과의 경계선에 있었던 龜潭과 玉筍峯이, 그 왼쪽에는 風穴·屛山·水穴 등이 표시되어 있다. 후자는 현재의 청풍면 북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근처에는 凌江洞·桃花洞·白石洞 등의 마을도 적혀 있는데, 모두 수려한 경관의 특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강 변에는 槐谷(津)·北津·惶恐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세 곳 모두 유명한 여울(灘)과 나루(津)가 있는 곳이다. 하천에는 보통 물살이 빠른 여울 있고, 그곳을 지나면 물결이 잔잔하고 깊은 곳(潭·湖 등으로 표현됨)이 이어진다. 후자의 지역에는 대부분 나루(津)가 입지하게 되며, 여울과 나루 모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두렵다’는 뜻의 한자가 2개나 겹친 惶恐灘의 이름을 통해 당시 이곳이 사공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곳 바로 하류에는 黃江津이 있었다. 北津과 黃江津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남한강 水運을 통해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이다. 黃江書院은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鳳剛書院은 본관이 청풍이며, 己卯士禍(1519) 때 자살한 金湜(1482-1520) 등을 배향하였다.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홍산현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외산면, 내산면, 옥산면, 구룡면, 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금천이 고을을 감돌아 흘러간다. 다른 지도와 달리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이는 지도를 종이의 규격에 맞추어 가로를 길게 배치하려 했던 데에 기인한다. 산지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풍수의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그렸다. 읍치의 위치는 고을의 서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에 있는 飛鴻山이다. 縣內面의 길가에는 이 고을의 驛站인 宿鴻驛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역의 옛날 이름은 非熊이었는데 태종 때 홍산현의 형국이 나는 기러기의 모습이라는 지관의 말이 있어서 숙홍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 밖의 문화적 요소로는 몇몇 서원과 사찰·암자 등을 볼 수 있다. 읍내면의 淸逸祠는 1621년(광해군13)에 창건되어 매월당 김시습을 배향했던 서원이고, 上下東面의 彰烈祠는 1717년(숙종 43)에 창건되어 1721년(경종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尹集·洪翼漢·吳達濟 등을 배향했다. 현의 북쪽 外山內面에 있는 萬壽山에는 無量寺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 절은 삼한시대의 사찰로 이후 김시습이 은거하다 죽었다는 곳이다.(오상학)
태안군은 지금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면, 이원면, 원북면, 소원면, 근흥면, 서산시 팔봉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태안읍 동문리와 남문리 일대에 있었다. 충청도의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고을로 곶의 형태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안에 위치하여 해적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선박이 왕래하는 수로의 요충지로 유명하다. 지도 왼쪽에 보이는 안흥진 서쪽에는 安興梁이 있는데 이곳은 삼남 수로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뻗어내린 맥세를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봉수대가 있었던 白華山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이 산은 사면이 모두 돌로 된 것으로 유명하다. 지도의 남쪽에는 屈浦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삼남의 漕運船이 안흥량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곳에서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서쪽의 安興鎭은 1653년(효종 4) 花亭島에서 이설된 수군 첨사진으로 士人 金石堅의 청에 의해 鎭城을 축조하였다. 서북쪽 해안의 所斤鎭은 수군 첨사진으로 1514년(중종 9)에 성을 쌓았다.(오상학)
천안군은 지금의 천안시내와 천안시 풍세면, 광덕면 그리고 현재 아산만 부근의 아산시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현재 천안시 대흥동과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천안은 호남으로 향하는 남북 직로상에 위치하여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지도에도 車嶺을 넘어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는 홍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천안은 고대 三國의 中心으로서 五龍爭珠의 땅으로도 유명하며 三南의 요충지로서 기능해 왔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견훤을 항복시키기 전에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켜 조련했다. 지도에도 이와 관련된 太祖峯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맥세를 강조하는 山圖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환포형으로 표현하였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건물과 더불어 華祝館이 그려져 있다. 華祝館은 현재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行宮 건물로서 인조가 李适의 난리를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아산만 해안에 월경지를 갖고 있었는데 頓義面, 德興面, 新宗面, 毛山面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의면은 頓義鄕이었고, 덕흥면은 德興部曲, 신종면은 新宗部曲, 모산면은 毛山部曲이었다. 이들 월경지들은 별도로 그려졌을 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방격을 이용한 지도에서는 거리와 방위를 고려하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를 반영하여 본읍과 멀리 떨어져 그리기도 한다.(오상학)
회덕현은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 일대에 해당한다. 회덕현의 읍치는 경부고속도로변의 대덕구 읍내동에 있었다. 북쪽 지역은 금강 상류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공주와 옥천에 접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鷄足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이 산에는 둘레 1,969척의 산성이 있었다. 지도에는 맥세를 강조하여 산지가 표현되어 있다. 고개 가운데 중요한 嶺阨는 붉은 색의 동그라미로 강조하였다. 지도에는 무엇보다 서원의 표시가 상세하다. 西面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崇賢서원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창건되어 그 해에 사액을 받았다. 金淨·宋麟壽·金長生·宋浚吉·宋時烈 등을 배향했다. 고을의 동남쪽 金藏山 기슭에는 高山寺가 이 지역의 유일한 사찰로 그려져 있다. 고산사는 886년(신라 정강왕 1)에 道詵國師가 처음 지었고, 1636년(인조 14) 守登國師가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읍치 서쪽에는 이 고을의 유일한 역참으로 田民驛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에 이 역에는 상등마 1필, 중등마 4필, 하등마 3필이 있었다.(오상학)
영춘현은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가곡면, 어상천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대에 있었다. 영춘은 충청도 지역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에 있는 산간 지역이다. 지도의 모습과 수록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해동지도≫와 거의 같다. 그러나 읍치의 남쪽 高代峯 아래에는 지금의 온달산성으로 전하는 古城의 표시가 없다. 이 지역은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데 지도에도 현내면 아래쪽에 南窟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동굴은 현재 온달동굴로 알려져 있다. 이 굴에는 석회암층의 담백색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내부의 비경이 웅장하고 지표수가 유입되어 항상 수심 1m 정도의 물이 동굴 내부를 흐르고 있다. 읍치 서쪽 하천 건너에 있는 건물은 松坡書院(단양군 영춘면 상리 409번지)인데, 1703년(숙종 29)에 창건하여 尹宣擧를 배향하였다. 지도에서는 지명의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는 배를 이용한 수운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지도에서도 이 고을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北津과 南津이 표시되어 있다. 하천 변에는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 있었는데 북쪽의 赤壁과 北壁이 대표적이다.(오상학)
함양부는 함양군 함양읍·백전면·병곡면·지곡면·수동면·유림면·휴천면·마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향교 위쪽의 白巖山이다. 읍치에는 둘레 7,035척(약 2,111m)의 대형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읍치는 원래 古邑基라 표시된 곳에 있었다. 倭寇의 침입으로 인해 함락 당하자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읍성 안에는 學士樓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다. 함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인 崔致遠(857-?)이 太守로 부임하여 남긴 치적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㵢溪亭·白沙亭 근처에는 최치원이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여, 당시의 읍치를 보호하게 했다는 上林과 下林이 있었다. 현재는 상림만이 남아 있고,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학사루도 최치원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고을은 전라도의 운봉·장수와 연결되는 八良嶺(팔량치)·中峙(중고개) 등이 있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전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古城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 서원은 총 5개가 표시되어 있다. 蘫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명종 7년(1552)에 세워지고, 명종 21년(1566)에 사액 받았다. 溏洲書院은 이조판서를 지냈던 盧禛(1518-1578)을 배향하여 선조 14년(1581)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는 賜額書院이 아니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沙斤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찰은 당시에 폐사된 것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간에서는 불교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있다.(이기봉)
청풍군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수산면 전체, 송계리 일대를 제외한 한수면, 양리·위림리를 포함한 금성면의 남쪽 부분에 해당된다. 읍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충추호에 의해 수몰되어 버렸다. 읍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쪽 1리에 있었다’는 因地山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줄기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다른 고을과의 경계선에 있는 산줄기와 그곳으로부터 고을 안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매우 강조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서, 풍수적 관념의 반영을 통해 명당으로서의 고을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읍치 남쪽에서 들어와 북쪽을 휘감고 서남쪽 아래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남한강이다. 남북에서 합류되는 지류보다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남한강 변에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경치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단양과의 경계선에 있었던 龜潭과 玉筍峯이, 그 왼쪽에는 風穴·屛山·水穴 등이 표시되어 있다. 후자는 현재의 청풍면 북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근처에는 凌江洞·桃花洞·白石洞 등의 마을도 적혀 있는데, 모두 수려한 경관의 특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한강 변에는 槐谷(津)·北津·惶恐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세 곳 모두 유명한 여울(灘)과 나루(津)가 있는 곳이다. 하천에는 보통 물살이 빠른 여울 있고, 그곳을 지나면 물결이 잔잔하고 깊은 곳(潭·湖 등으로 표현됨)이 이어진다. 후자의 지역에는 대부분 나루(津)가 입지하게 되며, 여울과 나루 모두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두렵다’는 뜻의 한자가 2개나 겹친 惶恐灘의 이름을 통해 당시 이곳이 사공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곳 바로 하류에는 黃江津이 있었다. 北津과 黃江津은 조선후기와 일제초기에 남한강 水運을 통해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이다. 黃江書院은 權尙夏(1641-1721) 등을 배향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사액 받았다. 이곳은 실재로 권상하가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擇里志≫에도 나오는 유명한 양반촌이었다. 鳳剛書院은 본관이 청풍이며, 己卯士禍(1519) 때 자살한 金湜(1482-1520) 등을 배향하였다. 인조 17년(1629)에 세워지고, 현종 13년(1672)에 賜額 받았다.(이기봉)
해미현은 지금의 충남 서산시 해미면, 운산면, 고북면, 당진군 정미면과 대호지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해안 고을로 병영이 설치되었던 군사적 요충이기도 하다. 조선초기 1402년(태종 2)에 덕산에 있던 충청도 兵馬節度使營이 移設되어 1651년(효종 2)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존속했다. 이후 左營이 설치되었는데, 좌영은 인조 때에 온양에 세웠다가 1712년(숙종 38)에 본현으로 옮겼다. 左營將은 본현의 현감이 겸하였고 속읍은 海美·大興·溫陽·沔川·瑞山·泰安·結城·禮山·平澤·牙山·新昌·德山·唐津이었다. 읍치는 고을의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주변 지역과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져 단지 읍치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읍치에는 지도 하단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1,380보, 높이 12척의 읍성이 있었으나 지도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이 읍성은 원형으로 축조된 평지성으로 현재에도 잘 남아 있다. 지도의 중앙 부분에는 洪州의 월경지인 云川面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역참으로는 읍치 서쪽의 夢熊驛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 하단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상등마 2필, 중등마 4필, 하등마 5필이 있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통합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금강의 지류인 無心川이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작천 동쪽의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로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堪輿家는 殺氣를 벗었다 한다. 또한 금산·옥천에 비해 더욱 평탄하고 토지가 매우 기름져 오곡과 면화 재배에 알맞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의 표현이 강렬한데 읍치로 뻗어오는 맥세가 부각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그 동쪽으로도 숙종 때 다시 石築한 上黨山城이 포진하고 있다. 읍성 안에는 병영이 들어서 있으며, 상당산성에는 충청도의 兵馬虞候가 파견되어 있었다. 청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구역이 넓고 인재의 많음이 실로 다른 고을에 비할 수가 없는데, 지도에도 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여러 서원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迦葉山(해발 710M)이다. 산 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와 응한다. 음성의 별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도 동북쪽에 雪城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설성은 水精山 위에 있는 성으로 수정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의하면 둘레가 1,271척이었다. 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성내의 건물은 3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서문·북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수정산성의 축성시기는 대략 8~9세기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된 듯하다. 그리고 방어용 산성보다는 전략적 거점확보를 위한 전투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古邑의 遺址가 있는데 官坪이라 불렀다.(오상학)
합천군은 합천군 합천읍·가야면·야로면·묘산면과 송림리-봉계리를 포함한 봉산면의 북쪽, 죽죽리를 제외한 용주면, 백암리·오산리를 제외한 대양면,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을 제외한 율곡면, 의령군 궁유면의 평촌리·벽계리·운계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리에 있었다는 北山이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진다. 위쪽이 회천의 상류이며, 아래쪽이 황강유역이다. 회천의 상류에는 조선 초까지 冶爐縣이 屬縣으로 존재했으며, 縣東面의 ‘縣’이 야로현을 의미한다. 기암절벽과 그 위의 정자 및 폭포 등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절벽 길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군사적인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어, 향촌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伊淵書院은 연산군의 무오사화(1504) 때 죽음을 당한 김굉필(1454-1504)과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여 선조 19년(1589)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華巖書院은 김굉필과 더불어 제자를 키운 朴紹를 배향하여 효종 4년(1653)에 세워지고, 영조 3년(1727)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 祠는 모두 사액 받지 못했다. 가야산 주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수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어, 결코 작지 않은 불교의 영향력도 이해할 수 있다. 가야산 밑에는 海印寺와 藏經閣이 약간 좀이 먹어 글씨를 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건립되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장격각에는 몽고의 침입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5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그 옆의 學士臺는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내며, 수많은 설화를 남긴 崔致遠(857-?)의 호를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이기봉)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불정면과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남쪽 10리에 있었다’는 大林山이다. 충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현 중 조선 초기까지 독립하지 못한 고을은 모두 충주의 땅으로 되었다. 屬縣으로는 모두 鄕1·部曲6·所1·處4 등이었지, 고려시대까지 縣이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곳도 그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德山鄕은 지도에 德山面으로 편제되어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제천시 덕산면과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廣反石部曲은 지도에 乷未面으로 나오는 지역으로, 현재는 충주시 살미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실재로는 동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렸으며, 관아까지의 산줄기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서 잘 나타나는 것으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에는 실제의 지형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천의 표시는 본류와 지류가 잘 구분되지 않고 있다. 위쪽의 ‘小白山下流北江’이라 표시한 부분부터 ‘呂州界’라고 쓰인 부분까지가 남한강 본류이다. 여기서 ‘呂州’는 ‘麗州’를 잘못 쓴 것이다. ‘俗離山下流達川江’이라 쓰인 부분부터 ‘達津’ 부분까지가 남한강의 지류 중 가장 큰 현재의 달천이다. 남한강 변에는 水運과 관련된 중요한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可興倉은 조선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고을과 충청도 동쪽 14고을의 田稅를 나르던 水站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6고을의 대동미와 전세만 나르는 곳으로 축소된다. 그 위쪽의 金遷倉은 세조 때 가흥창으로 옮기기 전까지 水站이 있던 곳으로, 현재 가금면 창동리 오층석탑 부근으로 추정된다. 가흥창 위쪽에 좀이 먹은 부분의 木溪津은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 엄정면 목계리이다. 읍치 아래의 北津도 목계보다는 못하지만 충주 읍내로 물자를 조달하던 중요한 포구였다. 북진 오른쪽에는 彈琴臺가 표시되어 있다. 대가야의 후예로 가야금을 만들었던 于勒이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申砬(1546-1592)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溟所祭壇은 小祀에 실려 있었으며,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連原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사액 받은 팔봉서원·운곡서원·누암서원·충렬사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홍주목은 충남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보령시 천북면, 안면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서해안의 대읍으로 당시 27개의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海美 너머에 있는 雲川面, 德山 너머에 있는 合北面, 合南面, 新北面, 新南面, 縣內面 등은 모두 월경지로서 읍치로부터 멀게는 120리에 걸쳐 있다.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고을의 면적이 큰 만큼 지도의 크기도 크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주산은 白月山인데 지도는 백월산이 위치한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읍성이나 관아 건물이 전혀 없고 단지 읍치라는 표기만 있다.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둘레 2,351척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해안가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축조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현재에도 성벽의 일부와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읍치에는 前營鎭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홍주에는 충청도의 前營이 설치되어 서해안의 19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동북쪽 合南面에는 合德蓮堤가 그려져 있다. 이 합덕연제는 신라말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는 오래된 제방으로 곡창지대인 합덕평야를 관개해 주던 저수지이다. 지금은 당진군에 속해 있고 저수지가 아닌 농경지로 변해버렸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청주시, 청원군 오창면, 북이면, 옥산면, 강외면, 강내면, 남이면, 남일면, 낭성면, 미원면, 청천면, 북일면, 제천통합시 덕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청도의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큰 고을로서 병영은 1651년(효종 2) 海美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청안, 남으로는 문의·회인·보은, 서로는 전의·목천·연기, 북으로는 진천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중앙을 금강의 지류인 無心川이 흐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작천 동쪽의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로 산빛이 아름답고 고우며 들 형세가 겹겹으로 감싸서 堪輿家는 殺氣를 벗었다 한다. 또한 금산·옥천에 비해 더욱 평탄하고 토지가 매우 기름져 오곡과 면화 재배에 알맞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의 표현이 강렬한데 읍치로 뻗어오는 맥세가 부각되어 있다. 읍치에는 정방형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으며 그 동쪽으로도 숙종 때 다시 石築한 上黨山城이 포진하고 있다. 읍성 안에는 병영이 들어서 있으며, 상당산성에는 충청도의 兵馬虞候가 파견되어 있었다. 청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구역이 넓고 인재의 많음이 실로 다른 고을에 비할 수가 없는데, 지도에도 華陽洞書院을 비롯한 여러 서원이 그려져 있다.(오상학)
음성현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에서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음성은 금북정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의 서북쪽에 있는 迦葉山(해발 710M)이다. 산 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동쪽으로 충주 馬山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는 충주 望夷山 봉수와 응한다. 음성의 별칭은 雪城인데 지도에도 동북쪽에 雪城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설성은 水精山 위에 있는 성으로 수정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김정호의 ≪大東地志≫에 의하면 둘레가 1,271척이었다. 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석축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전체적으로 부정형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성내의 건물은 3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서문·북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수정산성의 축성시기는 대략 8~9세기초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도 일시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용되지 않고 폐허된 듯하다. 그리고 방어용 산성보다는 전략적 거점확보를 위한 전투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古邑의 遺址가 있는데 官坪이라 불렀다.(오상학)
충주목은 상모면을 제외한 충주시 전체,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음성군 전체, 괴산군 불정면과 감물면, 제천시 덕산면 전체와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충주 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남쪽 10리에 있었다’는 大林山이다. 충주가 이렇게 큰 고을이 된 것은 고려시대 내내 많은 屬縣을 거느린 州縣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현 중 조선 초기까지 독립하지 못한 고을은 모두 충주의 땅으로 되었다. 屬縣으로는 모두 鄕1·部曲6·所1·處4 등이었지, 고려시대까지 縣이었던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곳도 그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德山鄕은 지도에 德山面으로 편제되어 기록되었으며, 현재의 제천시 덕산면과 한수면의 송계리 일대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廣反石部曲은 지도에 乷未面으로 나오는 지역으로, 현재는 충주시 살미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지도는 동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로 내려오는 산줄기가 동쪽(실재로는 동남쪽)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주변의 산세를 環抱型으로 그렸으며, 관아까지의 산줄기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은 조선후기의 군현지도에서 잘 나타나는 것으로 풍수적 관념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도에는 실제의 지형보다는 관념 속의 공간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천의 표시는 본류와 지류가 잘 구분되지 않고 있다. 위쪽의 ‘小白山下流北江’이라 표시한 부분부터 ‘呂州界’라고 쓰인 부분까지가 남한강 본류이다. 여기서 ‘呂州’는 ‘麗州’를 잘못 쓴 것이다. ‘俗離山下流達川江’이라 쓰인 부분부터 ‘達津’ 부분까지가 남한강의 지류 중 가장 큰 현재의 달천이다. 남한강 변에는 水運과 관련된 중요한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可興倉은 조선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고을과 충청도 동쪽 14고을의 田稅를 나르던 水站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6고을의 대동미와 전세만 나르는 곳으로 축소된다. 그 위쪽의 金遷倉은 세조 때 가흥창으로 옮기기 전까지 水站이 있던 곳으로, 현재 가금면 창동리 오층석탑 부근으로 추정된다. 가흥창 위쪽에 좀이 먹은 부분의 木溪津은 조선후기 내내 남한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가 있었던 곳이며, 현재 엄정면 목계리이다. 읍치 아래의 北津도 목계보다는 못하지만 충주 읍내로 물자를 조달하던 중요한 포구였다. 북진 오른쪽에는 彈琴臺가 표시되어 있다. 대가야의 후예로 가야금을 만들었던 于勒이 연주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申砬(1546-1592)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오른쪽의 溟所祭壇은 小祀에 실려 있었으며, 봄·가을에 나라에서 香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이다. 읍치 왼쪽에는 14개의 屬驛을 거느린 連原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사액 받은 팔봉서원·운곡서원·누암서원·충렬사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홍주목은 충남 홍성군 흥성읍, 홍북면, 홍동면, 금마면, 장곡면, 보령시 천북면, 안면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홍성읍 대교리와 오관리 부근에 있었다. 서해안의 대읍으로 당시 27개의 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海美 너머에 있는 雲川面, 德山 너머에 있는 合北面, 合南面, 新北面, 新南面, 縣內面 등은 모두 월경지로서 읍치로부터 멀게는 120리에 걸쳐 있다. 지도에도 실제의 거리를 고려하여 본읍과 떨어져 그려져 있다. 고을의 면적이 큰 만큼 지도의 크기도 크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주산은 白月山인데 지도는 백월산이 위치한 서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읍치는 주변지역과 동일한 축척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읍성이나 관아 건물이 전혀 없고 단지 읍치라는 표기만 있다. 지도의 注記에 의하면 둘레 2,351척의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해안가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축조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현재에도 성벽의 일부와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읍치에는 前營鎭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홍주에는 충청도의 前營이 설치되어 서해안의 19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동북쪽 合南面에는 合德蓮堤가 그려져 있다. 이 합덕연제는 신라말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오는 오래된 제방으로 곡창지대인 합덕평야를 관개해 주던 저수지이다. 지금은 당진군에 속해 있고 저수지가 아닌 농경지로 변해버렸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남이 南道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산간 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논이 적고 주로 火耕이 많이 이루어졌던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 북쪽의 屛山에는 바람구멍, 물구멍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물살이 빠른 여울로, 아래 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북쪽의 鳳岡書院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는데, 金湜·金權·金堉 등을 배향하였다. 黃江驛 우측에 보이는 황강서원은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고을의 내부를 곡교천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읍치 동쪽의 운주산(해발 459M)은 솥발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李城이라는 산성이 있었다. 이성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돌로 쌓았는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巖寺는 지금의 전의면 다방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石碑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사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오상학)
회인군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북면·회남면 전체와 내북면의 염둔리·법주리·용수리·신궁리, 수한면의 차정리, 청원군 가덕면의 계산리·수곡리·시동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회북면 중앙리와 부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賀麻峯이다. 지도는 실제의 지형 모습보다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관념 속의 형태를 그렸다. 산줄기가 읍치를 3중·4중으로 둘러싼 형태로 그려, 풍수적으로 좋은 땅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맨 바깥쪽의 산줄기는 실재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지도 위의 지형과 같다면 그 안쪽 산줄기와의 사이에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지도에도 그런 표시는 없다. 고을 전체의 실질적인 지형은 읍치 오른쪽을 북-남으로 흐르는 회인천과 그것을 둘러싼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쪽에는 금강 본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지도에는 亍(→亇)屹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마흘천 역시 동-서 직선의 형태가 아니라 실재로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고개에는 적색 원을 표시한 반면에 상상에 의해 그려진 산줄기에는 그런 표시가 없다. 읍치 오른쪽의 昧谷山城은 둘레 1,152尺(약 346m)의 작은 石城이다. 昧谷이란 이름은 신라 때의 이 고을 이름인데, 당시의 중심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아래쪽의 虎堞山城은 기록에 남쪽 6리에 있으며, 둘레 5,148尺(약 1,544m)의 중형 石城으로 나온다.(이기봉)
지금의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한수면, 수산면, 금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당시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 백두대간의 서북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남한강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으로는 단양, 남으로는 경상도 문경, 서로는 충주, 북으로는 제천과 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남이 南道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산간 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논이 적고 주로 火耕이 많이 이루어졌던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고을 북쪽의 屛山에는 바람구멍, 물구멍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에 보이는 惶恐灘은 물살이 빠른 여울로, 아래 여울을 지나면 龍湫를 이루는데, 물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북쪽의 鳳岡書院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되어 이듬해에 사액되었는데, 金湜·金權·金堉 등을 배향하였다. 黃江驛 우측에 보이는 황강서원은 1726년(영조 2)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고,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윤봉구·권욱을 배향하였다.(오상학)
전의현은 지금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전동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한 조그만 고을로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연기와 접해 있다. 고을의 내부를 곡교천의 지류인 조천천이 흘러가고 있다. 읍치의 주맥은 月照山에서 뻗어 내려오고 있다. 읍치 동쪽의 운주산(해발 459M)은 솥발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李城이라는 산성이 있었다. 이성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돌로 쌓았는데 옛날 李棹가 살던 곳이라 한다. 李棹는 고려 태조가 南征할 때, 금강이 범람하자 태조를 보호해 건너게 했던 인물이다. 小西面에 있는 碑巖寺는 지금의 전의면 다방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石碑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인 비상 3위가 전해져 왔는데, 신라 문무왕대(661-680)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비암사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비암사라는 명칭도 비상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옛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결절에 위치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大林山인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까지 그려져 있는데 둘레가 3,650척이다. 읍치 북쪽에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가에 연한 金遷은 수운의 이점이 가장 큰 취락이다. 금천은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한데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가 될 정도였다. 인근의 可興倉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조운창으로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날랐다. 다른 고을에 비해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주변에 여러 서원이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은 들이 적고 산이 많은 편인데 산골이 겹겹이 있어서 큰 내가 많으나,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고 했다. 이 고을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진천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였는데,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生居鎭川이라 하였다. 반면에 용인은 산세가 順厚하여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도는 읍치 공간을 크게 확대하고 주변의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성을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등의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누정까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吉祥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 때 万弩郡 太守 金舒玄의 아내 萬明이 아들 金庾信을 낳고 이곳에 태를 묻어 길상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충주시 앙성면, 노은면, 신니면, 주덕읍, 소이면, 이류면, 살미면, 동량면, 금가면, 산척면, 엄정면, 가금면, 소태면 일대에 해당한다. 충주는 한때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모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을의 昇降이 다른 군현보다 자주 행해졌던 대표적인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읍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여 옛부터 많은 서울 사대부들이 여기에 살 곳을 정하였다. 또한 국도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한 고을에서 과거에 오른 사람이 많기로는 팔도 여러 고을 중 첫째여서 이름난 도회라 부르기에 족하다. 그러나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된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결절에 위치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고을의 진산은 남쪽의 大林山인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까지 그려져 있는데 둘레가 3,650척이다. 읍치 북쪽에는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가에 연한 金遷은 수운의 이점이 가장 큰 취락이다. 금천은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 마을과 흡사한데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가 될 정도였다. 인근의 可興倉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조운창으로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날랐다. 다른 고을에 비해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주변에 여러 서원이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오상학)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면, 이월면, 만승면, 덕산면, 초평면, 문백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진천읍 읍내리 일원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 유역권에 해당하는 고을이다. 동으로는 충주, 남으로는 청주, 북으로는 경기도 죽산현과 접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지역은 들이 적고 산이 많은 편인데 산골이 겹겹이 있어서 큰 내가 많으나,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고 했다. 이 고을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진천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였는데,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生居鎭川이라 하였다. 반면에 용인은 산세가 順厚하여 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지도는 읍치 공간을 크게 확대하고 주변의 산줄기를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성을 부각시켰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 등의 관아 건물뿐만 아니라 누정까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吉祥山이 그려져 있는데, 신라 진평왕 때 万弩郡 太守 金舒玄의 아내 萬明이 아들 金庾信을 낳고 이곳에 태를 묻어 길상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고을의 동쪽에는 서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百源書院이다. 1597년(선조 30)에 창건되어 李鍾學과 그의 5대손 李畬와 李皐, 金德崇 등이 배향되었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사액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오상학)
충청도의 모습을 그린 지도이다. 충청도에 대해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한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살면서 이 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도에는 산지와 하천 등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각 군현과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 그리고 봉수와 산성과 같은 군사적인 요소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곳의 중요 산성으로는 청주의 상당산성과 공주의 공산성이 부각되어 있다. 산지는 연맥을 강조하여 그리면서도 명산은 좀더 강조하였다. 전후좌우의 진영이 들어서 있던 충주, 청주, 공주, 홍주와 수영은 원을 굵게 그려 위계를 나타냈다. 해안선의 윤곽이나 도서의 표시 등으로 볼 때 영조 대 정상기의 ≪동국지도≫ 이전의 지도를 기초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청담 이중환은 충청도에 가장 살만한 곳으로 내포를 꼽았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라 하는데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도 적군의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고 했다. (오상학)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보청천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과 더불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서북쪽 酒城面에는 酒城倉이 격리된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청산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酒城部曲이 있던 곳으로 본래는 경상도 상주에 속해 있었다. 이후 고려 공양왕 시기 청산에 감무를 설치할 때 땅이 적어 이곳을 쪼개어 합친 것이다. 읍치 북쪽에는 白雲亭이 그려져 있는데, 記文에 의하면 金守溫이 고을 수령에 권하여 백운정이라 지었다 한다. 지도에서 객사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산현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 청산면과 청성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청산면 교평리 일대에 있었다.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수계로는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영동, 서로는 옥천, 북쪽으로는 보은과 접하고 있다. 고을의 가운데를 흘러가는 하천은 금강의 지류인 지금의 보청천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과 더불어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으므로 물 대기가 쉬워 한재가 적다고 한다. 고을의 서북쪽 酒城面에는 酒城倉이 격리된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곳은 청산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酒城部曲이 있던 곳으로 본래는 경상도 상주에 속해 있었다. 이후 고려 공양왕 시기 청산에 감무를 설치할 때 땅이 적어 이곳을 쪼개어 합친 것이다. 읍치 북쪽에는 白雲亭이 그려져 있는데, 記文에 의하면 金守溫이 고을 수령에 권하여 백운정이라 지었다 한다. 지도에서 객사 좌측에 있는 서원이 德峰書院이다. 덕봉서원은 현재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서원은 1701년(숙종 27)에 창건되어 趙憲과 宋時烈의 位牌를 봉안하였으나 사액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읍성에 접해 있다. 지도에는 풍수의 산도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산지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산의 밑 부분까지 선으로 그려 기맥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읍치에는 아사와 객사가 붉은 색의 사각형 속에 그려져 있고 향교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고을 안을 감돌아 나가는 하천은 지금의 청안천인데 지도에는 曾子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하천 건너편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중국 선현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명을 표기하는 것은 당시 유교적 이념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을 동남쪽에 있는 坐龜山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로 훼철되었다.(오상학)
청안현은 지금의 충북 괴산군 증평읍, 청안면, 도안면, 청원군 북이면과 오창면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청안현의 읍치는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금북정맥의 서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금강의 상류 유역권에 해당한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청주, 북쪽은 괴산과 읍성에 접해 있다. 지도에는 풍수의 산도적인 기법을 가미하여 산지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산의 밑 부분까지 선으로 그려 기맥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읍치에는 아사와 객사가 붉은 색의 사각형 속에 그려져 있고 향교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고을 안을 감돌아 나가는 하천은 지금의 청안천인데 지도에는 曾子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하천 건너편에는 顔子山이 표시되어 있다. 중국 선현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명을 표기하는 것은 당시 유교적 이념이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을 동남쪽에 있는 坐龜山은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書院은 金塘書院이다. 1789년(정조 13)에 창건하여 延嗣宗·延忠秀·延世鴻·延最積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로 훼철되었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북쪽을 안성천의 하류가 감돌아 흘러간다. 서면에는 토성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팽성읍 안정리에 남아 있는 農城이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설, 그리고 신라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 고려때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 방어를 위하여, 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성이 위치한 지세로 볼 때 이런 소규모의 토축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이 지역의 토착 세력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아래쪽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오상학)
평택현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일대로 면적으로는 매우 작은 고을이었다. 지금은 경기도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충청도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서 양쪽으로 계속 쪼개져 작은 읍으로 존속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현감을 두었는데,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596년(선조 29)에는 직산에 예속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구되었다. 읍치는 팽성읍 객사리 일원에 있었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지가 환포형으로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고을의 동북쪽을 안성천의 하류가 감돌아 흘러간다. 서면에는 토성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팽성읍 안정리에 남아 있는 農城이다. 이 성의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설, 그리고 신라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 고려때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 방어를 위하여, 또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성이 위치한 지세로 볼 때 이런 소규모의 토축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이 지역의 토착 세력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아래쪽에 위치한 褒義洞書院은 1661년(현종 2)에 세워졌고, 1704년(숙종 30)에 사액된 서원이다. 홍익한, 오달재, 윤집의 3학사를 배향하였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영동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金山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오른쪽 하단에 추풍령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추풍령은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와 다름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한 아주 평평하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하여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본래 1390년(공양왕 2)에 축조된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하천변 절벽 위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駕鶴樓가 그려져 있다. 이 누정은 조선 태조 초년에 縣監 河澹이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具長源이 增修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을 받았는데, 宋時烈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오상학)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상촌면, 매곡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황간면 남성리 일원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 고을로 서쪽으로는 영동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金山과 연결된다. 지도에도 오른쪽 하단에 추풍령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추풍령은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와 다름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많아도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고 또한 아주 평평하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읍치에는 아사, 객사를 비롯하여 누정까지 그려져 있다. 읍치에는 본래 1390년(공양왕 2)에 축조된 읍성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많이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 서쪽의 하천변 절벽 위에는 이 고을의 대표적인 누정인 駕鶴樓가 그려져 있다. 이 누정은 조선 태조 초년에 縣監 河澹이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縣監 孫蓄·具長源이 增修했다. 읍치 위쪽에 보이는 寒泉書院은 숙종 때 창건되어 영조 때 사액을 받았는데, 宋時烈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松溪書院은 1570년(선조 3)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오상학)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듭된 멧부리와 겹겹의 고개가 멀리 연해 있고, 길은 양의 창자처럼 돌아간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간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읍의 규모가 매우 작다. 지도의 주기에도 民戶가 804호로 거주하는 인구도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논(166결)도 밭(987결)에 비해 매우 적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중심공간임을 부각시켰다. 산지의 표현은 회화식 기법을 많이 가미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고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가 중심건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북쪽 청주로 가는 고개인 皮盤嶺은 이 지역의 가장 큰 고개로 고갯길이 아홉 번 꺽여 매우 험하다 한다. 읍치의 남쪽의 玉女峯은 玉女彈琴形의 풍수적인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오상학)
회인현은 지금의 충북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한다. 읍치는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동으로는 보은현, 남으로는 청주, 서로는 문의, 북으로는 청주 등의 고을과 접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듭된 멧부리와 겹겹의 고개가 멀리 연해 있고, 길은 양의 창자처럼 돌아간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간분지에 위치한 고을로 읍의 규모가 매우 작다. 지도의 주기에도 民戶가 804호로 거주하는 인구도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논(166결)도 밭(987결)에 비해 매우 적다. 지도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둥그렇게 그려 중심공간임을 부각시켰다. 산지의 표현은 회화식 기법을 많이 가미하였다. 전패와 궐패를 봉안하고 망궐례를 행했던 객사가 중심건물로 그려져 있다. 고을 북쪽 청주로 가는 고개인 皮盤嶺은 이 지역의 가장 큰 고개로 고갯길이 아홉 번 꺽여 매우 험하다 한다. 읍치의 남쪽의 玉女峯은 玉女彈琴形의 풍수적인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오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