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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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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현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아포읍·남면과 연평리·노곡리·봉곡리를 제외한 농소면, 보광리·삼성리 동쪽의 감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개령면 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三國史記≫에 조분니사금 2년(231) 신라에 의해 병합된 甘文國의 땅으로 나온다. 고을의 鎭山이며, 읍치 북쪽에 표시된 甘文山은 이 지역의 과거 명칭이 지명에 반영된 것이다.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甘川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나가 낙동강에 합류한다. 실재로는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서-정동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 감천은 ≪新增東國與地勝覽≫과 ≪擇里志≫에 모두 관개가 가장 잘 이루어지는 하천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扶桑驛과 赤峴面이 있는 지역도 실재로는 읍치의 동남쪽에 치우쳐져 있는데, 마치 정남쪽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의 德林書院은 김종직(1431-1492)·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세워졌으며,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이기봉)

  •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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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부는 거제시 전체와 통영시 한산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제면 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鷄龍山이다. 읍치는 원래 신현읍의 고현리에 있었던 古縣城이었는데, 숙종 37년(1711)에 지도상의 위치로 옮겼다. 거제부는 뱃길로 일본과의 왕래가 쉬운 곳이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당시에 사용되지 않던 성곽이나 廢鎭堡의 경우 명칭과 원형의 성곽 모양을 표시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한 뒤 남해안과 섬 지역에 倭城을 쌓고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재침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는데, 거제도에도 여러 군데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3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성과의 구분을 위해 반원의 성곽 형태로 그려져 있다. 지도 제작 당시에 사용되고 있었던 鎭堡는 주기에 8개가 기록되어 있으며, 배치된 戰船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다. 지도에는 건물의 모양과 鎭堡의 이름을 적어 넣어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待變亭 역시 戰船을 배치하여 관리하던 곳이라는 점은 다른 鎭堡와 마찬가지이지만 운영 주체가 거제부였다. 지도에는 읍치 아래쪽에 표시되어 있다. 바다를 수시로 감시하던 瞭望도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見乃梁津은 통영으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현재 이곳에는 거제대교가 만들어져 있다. 漆川島와 加助島에는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앞의 섬에는 祭享黑牛 49마리, 뒤의 섬에는 牧馬 77마리가 방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牧子軍이 각각 111명과 93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祭享黑牛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아마 특별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 아래의 한산도에는 制勝堂이 표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1545-1598)이 堂을 짓고 웅거하면서 왜병을 물리쳤던 곳이라고 하며, 후에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란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주기에는 산의 이름과 읍치로부터의 거리, 둘레의 크기 등을 기록한 6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봉산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봉산이 있는 산의 이름을 기록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이기봉)

  •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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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부는 거창군 거창읍·남상면·남하면·가조면·가북면·주상면·웅양면·고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거창읍 중앙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8리에 있었다는 乾興山이다. 거창부는 지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이 황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그 지류인 가천천이다. 가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加祚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면의 이름 중 ‘加’자가 붙은 곳은 모두 이 가조현의 지역이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던 3壇1廟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지내던 厲壇,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제사지내던 城隍壇, 곡식신과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社稷壇, 孔子를 비롯한 유교의 聖賢에게 제사지내던 文廟(향교의 대성전)가 그것이다. 지도에는 3壇의 위치에 제단 모양의 표시를 하여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다만 서쪽에 있었던 社稷壇에는 제단 표시만 있고, 명칭은 기재되지 않았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적황색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는데, 이 고을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주기에는 고개의 험한 정도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道山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金宏弼(1454-1504)과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현종 1년(1660)에 세워지고, 같은 왕 3년(1662)에 사액 받았다. 浣溪書院은 金湜(1482-1520)을 배향하여 현종 5년(1664)에 세워지고, 숙종 6년(1680)에 사액 받았다. 褒忠祠는 李逑源을 배향하여 영조 13년(1737)에 세워지고, 다음 해에 賜額 받았다. 이 중 포충사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포충사에 배향된 이구원은 鄕所의 座首에 불과했는데,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기 때문에 大司憲으로 추증되었다.(이기봉)

  • 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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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현은 지금의 경산시 시내·남천면, 압량면의 신대리-내리를 포함한 서북쪽,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고모동-삼덕동을 포함한 동쪽, 동구의 율하동·용계동·괴전동·금강동·내곡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삼남동·삼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맨 아래쪽의 馬巖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은 남쪽으로는 600m 정도의 산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남천천이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빠져나간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특히 3단의 경우 산 중턱에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입지와 기능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하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押梁驛이 있는 곳은 신라에 의해 정복된 辰韓 小國인 押督國의 옛 터로 알려져 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孤山書院은 선조 때 이황에게 孤山이란 이름을 받아 만든 서재였다. 인조 11년(1633) 李滉(1501-1570)과 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여 서원으로 바꿨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이 밖에 사찰도 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을 표시하고 있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은 없다.(이기봉)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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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 경주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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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부는 지금의 경주시 전체와 울산광역시 두동면·두서면, 포항시 죽장면·기북면·기계면·신광면, 그리고 영천시 고경면의 고도리·오류리·차당리와 북안면의 유하리·유상리·반정리, 대창면의 대창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이렇게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속현을 거느린 主縣으로 있었고, 여말선초를 지나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했던 속현이 그대로 경주의 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죽장면은 竹長部曲, 북안곡면은 北安谷部曲, 신광창이 있는 곳은 神光縣, 기계창이 있는 곳은 杞溪縣, ‘江’자가 들어가 있는 面은 安康縣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 위의 북안곡면과 大昌 등은 월경지임에도 마치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경주 시내의 동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沙里驛 동쪽에 있었던 낭산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栢栗寺·黃龍寺·祇林寺·骨屈(庵)· 石窟(庵)·佛國寺·遠願寺·深源寺·定慧寺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라 때의 유적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의 古關城은 신라 성덕왕(702-737) 때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쪽과 경주시 외동읍 사이에 동서로 길게 쌓았던 長城이다. 읍치에는 분황사와 첨성대 월성 등이 보이고 있는데, 鐘閣 오른쪽의 鳳凰臺는 산이 아니라 古墳이다. 현재 鳳凰大冢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형고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西川·蚊川(남천)·北川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북천의 범람 위험이 항상적으로 존재하였고,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도 오른쪽의 古城藪와 왼쪽의 五里藪가 표시되어 있다. 이 고을은 여러 하천의 유역에 걸쳐 있다. 읍치를 지나는 형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광면의 곡강천 상류, 죽장면의 금호강 상류, 산내면의 밀양강 상류, 盤龜亭이 있는 태화강 상류, 東海倉이 있는 대종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반구정이 있는 곳은 기암절벽이 수 킬로미터나 이어진 협곡이며, 盤龜臺巖刻花로 유명하다. 읍치 왼쪽으로는 명종 18년(1563)에 설총·최치원(857-?), 김유신(595-673)을 배향하여 세워지고, 인조 원년(1623)에 賜額받은 西岳書院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동북쪽 興海와의 경계선인 萬歸亭 주변은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主理哲學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晦齋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도 양동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잘 보호되고 있다. 安康倉 왼쪽에 보이는 玉山書院은 이언적을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賜額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이언적이 학문을 닦았다는 溪亭도 표시되어 있어 이 고을에서 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서악서원 오른쪽에는 梅月堂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반대한 生六臣의 한 명으로서,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隱居하며 ≪金鰲神話≫를 쓴 것으로 유명한 김시습(1435-1493)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이기봉)

  •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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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우곡면의 연리·월오리·도진리 서쪽, 개진면의 구곡리 서쪽, 성산면의 사부리, 덕곡면의 후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2리에 있었다는 耳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는 서쪽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는데, 읍치의 坐向이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읍치 동쪽에서는 회천과 안림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령현은 4-6세기 가야연맹에서 맹주 노릇을 했던 대가야 지역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대가야는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의 기습적인 침략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지도에는 梅林祠·道巖祠·靈淵祠·文淵祠 등 4개의 ''祠''가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江倉은 이 고을의 稅米와 大同米를 운반하기 위해 저장하던 창고이다.(이기봉)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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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현은 개천면·영오면·영현면을 제외한 고성군 전체, 한산면을 제외한 통영시 전체 에 해당된다. 읍치는 고성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있는 無量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慶尙右水營兼三道統制營인 統營이 표시되어 있다. 통영은 선조 26년(1593)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李舜臣(1545-1598)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통영 바로 옆에 있는  忠烈祠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현종 4년(1663)에 사액 받았다. 堀梁橋가 설치된 곳은 썰물 때면 섬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한 때 흙으로 메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만들었지만, 다시 파내어 배가 다닐 수 있게 만들고 다리를 설치한 곳이다. 현재는 위·아래로 일제시대에 만든 해저터널과 충무교가 지나가고 있다. 통영 위쪽의 轅門은 통영과 외부와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를 보면 통영에는 그 위상을 반영하여 戰船 8척, 兵船 7척, 伺候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이 적혀 있다. 고성 관할의 전선은 읍치 아래쪽의 船倉에 배치되어 있었다. 10개의 船材封山도 적혀 있는데, 지도에는 封山이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선재봉산은 전선의 선재로서 사용하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지역이다. 지도에는 4개의 眞木封山도 표시되어 있다. 眞木이란 참나무를 의미하며, 전선의 櫓·防牌·木釘에 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를 공급하던 선재봉산 또는 봉산과 구별하기 위해 진목봉산이라는 명칭을 특별히 기재한 것이다. 統倉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는데, 統營으로 조달되던 세미를 보관하며 운송하던 곳이다. 이 밖에 고성의 영역이 아닌 곳에 대한 표현이 매우 독특하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거제와 남해가 마치 거대한 대륙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고지도에서 가끔 나타나는 형식이다.(이기봉)

  • 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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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양군은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곤명면·서포면과 하동군 금남면·금성면 및 진교면의 진교리·안심리·양포리·술상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곤양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3리에 있었다는 銅谷山이다. 昆陽郡은 세종 19년(1437)에 昆明縣과 金陽部曲을 합해 만들어졌으며, 각각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였다. 이를 통해 部曲 역시 당시까지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縣 못지 않은 힘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金陽面이 金陽部曲이 있던 곳이며, 위쪽의 주기에는 읍치로부터 ‘서쪽 40리’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新增東國輿地勝覽≫과 ≪輿地圖書≫에 ‘동쪽 45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왼쪽 위쪽에는 이 고을이 郡으로 승격되고 유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世宗大王胎封과 端宗大王胎封이 표시되어 있다. 왕릉은 주로 한성 주변의 고을에 분포하고 있지만, 胎封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胎의 奉安을 통해 전국적인 지배자로서의 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확보하려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읍치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과 1개의 眞木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船材封山은 소나무(松木)를 戰船의 船材로서 사용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封山이라고 하면 선재봉산을 의미했다. 眞木은 참나무를 의미하며, 戰船의 櫓·防牌·木釘 등에 사용되었다. 진목봉산 위쪽에는 ‘進上靑大竹田’도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해안가에는 이 고을에서 통영에 받치던 세미의 보관소인 統倉과 戰船을 정박시키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이 선소에는 이 고을에서 한양으로 田稅와 大同米를 실어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海倉도 함께 있었다.(이기봉)

  • 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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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위현은 지금의 군위군 군위읍·소보면·효령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군위읍의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방향 표시가 현재와 같은 東西南北으로 되어 있지 않고, 子(북)·卯(서)·午(남)·酉(동)의 형식으로 적혀 있다. 고을은 실재로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길게 누운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정북-정남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이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에 있는 馬井山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다가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孝令縣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孝令面과 孝令倉은 옛 효령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붙여진 것이며, 현재도 군위군 효령면으로 남아 있다. 召召保部曲과 仍末谷部曲도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며 이 고을에 완전히 통폐합되었다. 조선 초에는 이 지역이 모두 面으로 재편되었는데, 읍치 위쪽의 召召本面은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인조 5년(1627)에 柳成龍(1542-1607)을 배향하여 세운 南溪書院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사찰은 모두 합해 3개나 지도에 나타나고 있어, 崇儒抑佛의 분위기 속에서도 불교의 생명력이 의외로 강하게 존속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고개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데, 磨搥嶺阨에는 적색선으로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옆에는 ‘敵路要衝’이라는 표시를 해 놓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위쪽의 주기에는 고을 전체의 세금 부과와 관련된 호구의 수·전답의 양·세금 납부처와 부과량을 비롯하여, 읍치로부터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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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현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기장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炭山이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오른쪽 아래에는 倭城이 보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북상했던 왜군이 후퇴하여 울산-사천 사이의 남해안에 주둔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 북진의 근거지였으며, 현재 기장읍 죽성리에 사적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총 5개의 封山이 보이고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봉산은 보통 운송의 편리를 위해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에 가장 많았다. 상호 호응 관계에 있는 봉수를 직선의 붉은 선으로 연결하여 알기 쉽게 표현한 점도 눈에 띈다. 지도 아래쪽의 侍郞臺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랑대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으로서 옛날부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삼월과 시월에 용왕제를 지냈다고 하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기타 문무왕 18년(678)에 창건했다는 長安寺를 비롯하여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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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은 지금의 김천시 시내·어모면·대항면·조마면, 상좌원리와 금평리를 포함한 구성면의 동쪽, 감문면의 금송리, 농소면의 연명리·노곡리, 금곡리와 금라리를 포함한 감문면의 서쪽, 충청북도 영동군의 추풍령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교동에 있었다. 지도에서 가장 굵게 표시된 하천을 보통 甘川이라고 쓰는데, 지도에는 鑑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천의 굵기를 통해 본류와 지류를 구분해 주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현재의 김천시 명칭이 유래된 金泉驛이 보이고 있다. 이곳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20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고을 면 명칭의 일부에는 과거에 독자성을 유지하던 部曲과 所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黃金所面은 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으로 황금소가 있었던 곳이다. 助馬란 명칭이 붙은 면은 조마부곡, 迎命面은 영명향이 있던 곳이다. 이 중 영명면은 개령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이며, 황금소면은 유일하게 금강유역권에 들어가 있다. 오른쪽의 牙川 유역에는 禦侮縣이 있었던 곳이다. 기타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태가 뒷산인 黃岳山에 묻히면서 노비와 전답을 기부 받아 번창하였던 直指寺가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보물 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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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부는 지금의 김해시 전역과 창원시 대산면, 부산광역시 낙동강 서쪽의 강서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김해시내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3리에 있었다는 盆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김해부는 원래 駕洛國 또는 金官國이 있던 곳으로,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항복하여 김유신 가문의 食邑이 되었다. 이후 5小京 중의 하나인 금관소경으로 정해졌으며, 고려시대에도 主縣으로 기능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항복하였기 때문에 다른 가야 소국에 비해 역사적 상황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首露王陵과 그 왕비인 許后陵이 표시되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향·부곡을 제외하면 속현이 없었음에도, 주기를 보면 호수 9천을 넘는 큰 고을이다. 이것을 통해 신라의 5소경이 다른 군현에 비해 영역과 호수 면에서 훨씬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 왼쪽 위의 大山面 지역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즉 독자성이 유지되었던 太山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 해안가에는 수도인 한양으로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옮기기 위해 설치한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의 船所는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선소가 待變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오는데, 전선>병선>사후선의 순서로 규모가 컸다. 書院은 2개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新山書院만이 南冥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했던 封山과 화살촉이나 피리를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箭竹田·大篁竹田·小篁竹田이 표시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에는 어업이나 소금 생산지로 알려진 鳴旨島 등의 섬이 알기 쉽게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다리(橋)의 표시가 아주 자세함이 특징적이다.(이기봉)

  •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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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현은 창선면을 제외한 남해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남해읍 남변리·서변리·북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望雲山(759m)이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입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섬 전체의 모습은 현재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아래쪽(동쪽)의 ‘晋州昌善牧場界’라고 쓰인 부분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곳은 현재의 남해군 창선도(창선면)로서 조선시대에는 진주의 越境地였다. 남해보다 훨씬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육지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남해현은 남해-서해를 잇는 해로에 위치해 있어 운송과 군사적 측면에서 모두 중요했다. 이와 같은 입지적 특징 때문에 水軍이 배치된 여러 鎭堡가 있었다. 지도에서는 面은 세로의 긴 사각형 안에, 鎭堡는 거의 정사각형 안에 이름을 써넣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도에는 총 7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지역이다. 대부분 수군이 파견된 鎭堡가 있었던 해안가에 지정하여 관리하였다. 도별로는 수군이 파견된 진보가 가장 많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도의 오른쪽의 露梁津이 표시된 곳은 이순신(1545-1598)이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殉國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조선시대의 곤양땅이었던 현재의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아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는 이순신을 배향하여 1662년(현종 4)에 賜額받은 忠烈祠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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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성현은 산청군 신안면·신등면·생비량면 전체와 단성면의 청계리·입석리·사월리·묵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來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 고을은 세종 때 丹溪縣과 江城縣을 합해 만들어졌고, 두 현의 이름으로부터 한 자씩 따서 丹城縣이 되었다. 丹溪倉이 있는 곳이 단계현의 중심지였다. 읍치 오른쪽 위쪽의 道川書院은 文益漸(1329-1398)을 배향하여 태종 1년(1401)에 건립되었고, 정조 11년(1787)에 賜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1년에 세워진 것은 후대의 서원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이곳에 문익점을 배향한 서원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목화의 최초 재배지가 단성면 사월리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목화를 최초로 재배한 사람은 鄭天益인데,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 오른쪽의 靑谷祠宇에는 李天慶이 배향되어 있었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이천경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고 보이며, 書院과 祠宇는 배향된 인물의 격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남강이며, 오른쪽은 그 지류인 양천이다. 지도에는 新安津과 吐川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 이 지역에서 부르던 하천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津은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주기에 적혀 있으며, 이곳에는 津船이 1척 배치되어 있었다. 신안진 오른쪽의 赤壁은 붉은 빛의 바위더미가 병풍을 쳐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赤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중국의 유명한 지명을 본 따서 이름을 붙이고 글자까지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통해 송시열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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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부는 대구광역시 북구의 서쪽과 동구·수성구의 동쪽을 제외한 대구광역시 시내 전체, 달성군의 하빈면·다사면·화원읍·옥포면·가창면, 청도군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중구 남성동·동성동·서성동 일대에 있었다. 이곳에는 지도에서 잘 보이는 것처럼 경상도관찰사영이 있었다. 이 監營은 세조 12년(1466)에 경주에서 옮겨왔다. 원래 이 고을의 한자 표기은 ‘大丘’였으나, 공자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丘’자를 피하기 위해 정조(1776-1800) 때부터 ‘大邱’로 바뀌게 되었다. 읍치 위쪽으로는 達城이 그려져 있는데, 천연적인 要塞地에 石築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달성공원으로 단장되어 보호되고 있다. 面의 이름에는 옛 고을의 명칭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까지도 壽城縣·解顔縣·河濱縣이 이 고을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읍치 동쪽에 ‘守’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수성현, 동북쪽에 ‘解’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해안현, 서북쪽에 ‘河’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하빈현의 땅이었다. 서남쪽에 ‘花’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숙종(1675-1720)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花園縣의 땅이었으며, 남쪽에 ‘角’자가 들어가 있는 면들은 현종(1660-1674) 때 이 고을에 속하게 된 豊角縣의 땅이었다. 고을의 서쪽을 흐르는 강이 낙동강 본류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하천이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북쪽에 있는 유명한 八公山이 아니라, 읍치 바로 아래쪽의 蓮龜山이다. 八公山은 신라시대에는 父岳으로 불렸으며, 5岳 중 中岳으로 비정되어 中祀를 지냈던 명산이다. 이곳에는 把溪寺·桐華寺·夫仁寺 등 신라시대의 유서 깊은 절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팔공산 아래는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중의 하나이다. 이 때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그 부하 申崇謙(?-927)과 金樂(?-927)이 대신 죽음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진 곳이다. 王山 밑에 있는 表忠書院은 신숭겸과 김락을 배향하여 현종 11년(1670)에 세워지고, 숙종 13년(1687)에 사액 받았다. 硏經書院은 이황(1501-1570)·정경세(1563-1633) 등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사액받았다. 洛濱書院은 세조(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死六臣인 박팽년(1417-1456)·성삼문(1418-1456)·하위지(1387-1456)·이개(?-1456)·유성원(?-1456)·유응부(?-1456)를 배향하여 세워졌고,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이기봉)

  • 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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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부는 기장군·북구·강서구를 제외한 부산광역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동래구 수안동·복천동·안락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에 보이는 輪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고을은 일본과 가장 가깝게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군사적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예를 들어 水營과 鎭의 경우 파견된 관리의 등급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였다. 정3품의 水軍節制使가 파견되었던 慶尙左水營이 지도 가운데에 성곽 표시의 적황색 네모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있었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釜山鎭과 多大鎭은 성곽 표시의 황색 네모로 표시하였다. 정4품의 水軍萬戶가 파견된 鎭의 경우 건물과 이름만으로 표현하였다. 지도 오른쪽으로부터 甘浦·丑山·漆浦·包伊·開雲浦·豆毛浦·西平鎭 등이다. 이런 鎭의 경우 때때로 옮길 때마다 鎭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가기 때문에 지명 비정에서 조심해야 한다. 지도 가운데쯤에는 倭館이 보이고 있다. 조선 초에는 웅천(진해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三浦倭亂(1510) 이후에는 한곳에만 설치하였는데, 제포→부산포→초량의 순서로 옮겼다. 지도에 표시된 곳이 숙종 4년(1678)에 마지막으로 옮긴 지역이다. 이 왜관에서는 일본과 조선 상인 사이의 무역이 행해졌으며, 일본 거류민의 주거지와 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을 두었다. 조선에서는 성을 축조하여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이 지도에도 이중의 성곽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문의 이름도 이들의 출입을 지킨다는 의미로 ‘守門’이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국방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壬辰倭亂 때에는 동래읍성·부산진·다대진 등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읍치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서 전사한 宋象賢(1551-1592), 부산진 僉使로서 전사한 鄭撥(1533-1592) 등을 배향하여 인조 2년(1624)에 賜額받은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쌓았던 대형산성 중의 하나인 金井山城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숙종 29년(1702)에 처음으로 쌓았다. 이 밖에 기원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오는 居漆山國의 터가 萇山國基로 표시되어 있으며, 해안가에는 海雲臺와 沒雲臺 등의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 무이진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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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이진은 일제시대의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고성동에 있었다. 이 지도는 원래 ≪嶺南地圖≫에는 없던 것인데, 후대에 안음 지도에 붙여서 삽입된 것이다. 순조 33년(1833)에 경흥부의 읍치를 과거의 무이진으로 옮기며, 무이진은 순조 37년(1837)년 경흥부의 구읍치로 옮긴다. 본 지도에 표시된 무이진은 구읍치로 옮긴 후의 모습이다. 따라서 본 지도가 만들어진 상한 시기는 순조 37년(1837)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 뒤쪽에는 ‘辛未八月十三日’이라고 적혀 있는데, 순조 37년(1837) 이후 최초로 나오는 辛未년은 고종 8년(1871)이다.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衙舍 밑의 子坐午向은 북쪽(子)을 등지고 남쪽(午)을 향해 건물이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아건물 위쪽에는 이런 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적혀 있다. 鎭城은 둘레 5,260척(약 1,578m)의 石築 성곽으로 제법 큰 축에 들어간다.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배치 등이 잘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赤池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度祖가 검은 용을 쏘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기봉)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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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현은 지금의 정촌동과 영신동을 제외한 문경시 시내, 문경읍·가은읍·마성면·농암면 전체, 호계면의 구산리·우로리·별암리·견탄리·호계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문경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主屹山이다. 面의 이름에는 조선 초까지도 독자성이 유지되다가 완전히 통합된 고을의 이름이 남아 있다. 加가 붙은 면의 이름은 加恩縣의, 戶가 붙은 면의 이름은 虎溪縣의 지역이었다. 이 고을에는 한양-동래를 잇는 도로 상에서 가장 중요한 2개의 관방처가 알려져 있다. 이런 곳으로는 두 곳이 있다. 첫째가 바로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鳥嶺이다. 임진왜란 때 조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여, 숙종 34년(1708)에 山城을 조성하였다. 산성이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지형을 이용하여 세 개의 關門을 설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鳥嶺關 ·中城·下城의 모습을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가 지도 가운데의 兎棧이다. 토잔이란 토끼가 겨우 뛰어갈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串岬遷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遷이란 벼랑길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지형조건 때문에 이곳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왼쪽으로는 姑母城이, 맞은편에는 姑父城이 표시되어 있어, 옛날부터 중요한 관방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쪽의 幽谷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곳으로 18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주흘산 밑의 神廟는 主屹山祠로서 봄·가을에 香을 하사받아 小祀를 지내던 곳이다. 그 위쪽의 御留殿舊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곳을 의미한다. 그 오른쪽에는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황장봉산이 표시되어 있다. 사찰도 아주 자세하게 나오고 있다. 이 중 加北面 위쪽의 鳳岩寺가 가장 유명했다. 이 사찰은 신라 헌강왕 5년(879)에 智證國師 圓悟가 창건하여 禪風을 일으키고 희양산파를 이룬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보물 137호로 지정된 지증대사석조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가현내면에는 蕭陽書院이 표시되어 있는데, 숙종 18년(1688)에 鄭彦信(1527-159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그 밖에 加北面에 있는 하천은 경치가 좋아 현재도 선유동계곡으로 유명하며, 지도에도 2개의 亭子가 표시되어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이기봉)

  •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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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부는 지금의 청도면을 제외한 밀양시에 해당되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시내 내일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府北面에 있는 華岳山이다. 고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이 있으며, 읍치를 흐르는 하천은 밀양강이다.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읍치 옆에는 지금도 보물 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嶺南樓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嶺南寺라는 절의 작은 누각이었다고 한다. 지도의 아래쪽 오른쪽에는 낙동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인 三浪津이 표시되어 있다. 이 삼랑진에는 영조 5년(1729)에 漕倉이 설치되어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등 여섯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관장하여 서울로 보냈다. 경부선의 건설과 삼랑진역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운반되는 물자의 최대 集散處로도 기능하였다. 그 오른쪽에는 한양-동래의 대로 중에 가장 험한 지역 중의 하나인 鵲院棧路가 표시되어 있다. 棧路란 낭떠러지 길에 사용되는 용어로서, 지도에서도 이와 같은 지형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지역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낙동강가의 守山津이 있는 곳에는 둘레가 20리나 되는 삼한시대의 守山堤가 있었고, 조선 초까지도 守山縣이 밀양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수산제는 세종 때 물길을 터 屯田으로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수산현도 조선 중기 이후 밀양에 완전하게 통합되었다. 그 위에 있는 國農所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유지 농장으로서, 紅蓮이 무성하여 그 향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封山이 읍지 오른쪽 방향에 2개가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전함 船材의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보통 해안가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해안가에서 떨어진 이 고을에도 있게 된 것은 水運이 가능한 낙동강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밖에 세종 때의 名臣이었던 김종직(1431-1492)을 배향하여 현종(1660-1674) 때 賜額받은 禮林書院과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서 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西山大師(1520-1604)·泗溟大師(1544-1610) 등을 배향하여 영조(1725-1776) 때 賜額받은 表忠祠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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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현은 지금의 봉화군 봉성면·명호면과 상운면의 북·동부, 물야면의 가평리 일대, 춘양면 운곡천 동쪽의 애당리·석현리 등에 해당된다. 읍치는 봉성군 봉성리에 있었는데, 현재의 봉화읍 대부분은 원래 안동의 越境地였다. 봉화의 북쪽으로는 영천·안동·순흥·봉화의 영역과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도에도 이 네 고을의 이름이 복잡하게 적혀 있다. 지도 서북쪽의 勿也面은 현재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일대이며, 勿也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 위쪽의 上東面은 현재 춘양면 애당리·석현리 일대에 있었던 봉화의 越境地였다. 이곳에는 5대 史庫의 하나였던 太白山史庫가 있었는데,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사고 안에는 조선 왕실의 계보를 보관한 璿源閣과 實錄을 보관한 實錄閣이 표시되어 있다. 그 밑에는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覺華寺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왕실의 棺槨에 사용할 黃腸木의 생산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보이고 있다. 읍치 동남쪽의 榮川地는 현재의 명화면 고감리 일대에 있었던 영천의 월경지였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金輪峯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도에 보이는 향교는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상의 하천은 오른쪽이 낙동강 최상류에 해당되며, 왼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의 최상류이다. 읍치 서북쪽에 보이는 文巖書院은 李滉(1501-1570)과 제자 趙穆(1524-1606)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아울러 본관이 봉화이면서, 고려 고종 때 높은 벼슬을 지냈던 琴儀(1153-1230) 등을 배향한 文溪里社와 盤泉里社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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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안현은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구천면·안계면과 쌍호리·월소리·신수리를 제외한 안사면, 신평면의 검곡리·교안리, 안평면의 금곡리·하평리 일대이다. 읍치는 비안면 서부리·동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에 있는 城隍山이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비안현은 원래 세종 3년(1421)에 比屋縣과 安貞縣을 합해 安比라고 부르다가, 같은 왕 5년(1432)에 읍치를 현재의 위치인 비옥현으로 옮기면서 比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定’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모두 안정현에, 나머지 지역은 비옥현에 소속되어 있었다. 鄕校가 安貞倉 근처에 있는데, 읍치는 옮겼지만 향교는 그대로 과거의 읍치에 남았던 결과로 보인다. 향교가 있었던 곳은 현재의 안계면 교촌리로서, 이곳이 과거 안정현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다. 실재로는 군위와 의성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상주로 흘러 나가는데, 하류가 오히려 얇게 표시되어 있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하천의 명칭이 前川·後川으로 되어 있어, 읍치를 중심으로 붙여졌으며 구간마다 명칭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읍치의 산세가 ≪嶺南地圖≫ 내의 다른 고을 지도와 달리 풍수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지도 왼쪽의 龜川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인 것으로 추정되는 朴瑞生 등의 다섯 사람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기타 읍치 오른쪽의 望北亭은 본관이 이 고을인 比安 朴氏의 정자였다고 하며, 다른 부분은 ≪嶺南地圖≫의 일반적인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기봉)

  • 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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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현은 사천시 정동면·사남면·용구면·사천읍·용현면 전체와 사천시내 와룡동·봉남동·궁지동·향촌동·사벌동·신구동·신수동·마도동에 해당된다. 읍치는 사천읍 정의리·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아래쪽의 三千里面은 현재의 삼천포시 동남쪽에 해당된다. 삼천포시는 진주·고성·사천의 월경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이었다. 읍치 주변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지도와 달리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의 경우 제단 모양을 특별하게 표시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안가에는 여러 倉庫가 표시되어 있다. 統倉은 統營, 巡倉은 巡營, 右兵營倉은 右兵營으로 옮겨갈 이 고을의 각종 稅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海倉은 수도인 한성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船所는 전선을 정박시키던 곳으로서, 위쪽의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과 兵船 각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아울러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주기에는 13개의 封山이 있었음도 표기하였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국가에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지역이었다.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장 많았다. 읍치 위쪽으로는 大觀臺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龜岩 李楨(1512-1571)의 書齋였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은 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기타 사찰과 역 등도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 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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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음현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읍·금서면·생초면·오부면·차황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산청읍 옥산리·산청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東山이다. 읍치에는 조선초에 현감 沈潾이 만들었다는 換鵞亭이 보이고 있다. 王羲之가 중국의 山陰 땅에 사는 어느 도사의 청으로 道德經을 써주고 거위를 받았다는 ‘換鵝’의 고사로부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조선 초 지배층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정자이며, 현재의 산청초등학교에 있었다. 환아정 위에 있는 西溪書院은 德溪 吳健(1521-1574)을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받았다. 오건은 南溟 曺植(1501-1572)의 제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다. 지도에는 沙斤水·鏡湖水 등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표시되어 있다. 남북의 적황색 도로에는 그 중요성을 반영하여 각 고개마다 ‘險阨’의 표시가 되어 있다. 아울러 ‘古介’·‘嶺’·‘峙’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당시에도 고개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사찰과 창고, 역에 대한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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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현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쌍백면·가회면·대병면 전체, 봉산면의 양지리·고삼리·계산리를 포함한 남쪽, 거창군 신원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가면 금리에 있었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달리 방위가 지도 안에 표시되어 있으며, 북쪽(子)이 지도 위쪽 오른쪽에 보인다.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은 합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황강이며, 남쪽은 남강의 지류인 양천(水晶川)이다. 삼가현은 조선 태종 때 三歧縣과 嘉壽縣을 합쳐 만든 고을이다. 지도 위쪽의 古縣面이 가수현의 옛 터이며, 읍치는 삼기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동헌에 있었던 淨襟堂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왼쪽에는 절벽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곳이 2개이다. 아래쪽의 鋪遷에서 ‘遷’은 이러한 벼랑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문자이다. 이런 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지도에도 賊路要衝·要衝이라는 문구를 넣어 표시하였다. 界山面에 龍巖書院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1501-1570)과 함께 영남 성리학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던 南溟 曺植(1501-1572)을 배향하여 1609년(광해군 1)에 賜額받았다. 그밖에 古巖祠宇·平川祠宇 등도 표시되어 있는데, 둘 다 賜額받지 못한 곳이다. ‘祠宇’라고 표시하여 賜額받은 ‘書院’과 구별 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아래와 위쪽으로 雷龍亭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아래쪽에는 정자의 모습이 없고, 위쪽에만 있는 것을 통해 옮겨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밖에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사찰 역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이기봉)

  •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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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상주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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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목은 이안면·공검면·함창읍을 제외한 상주시 전체, 의성군의 단밀면·단북면, 문경시 산북면·산양면과 영순면의 율곡리-사근리를 포함한 서쪽 및 호계면의 막곡리-부곡리를 포함한 동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상주시내 서성동·성하동 일대에 있었으며, 석축의 城郭이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주기면을 보면 호수가 23,988호로 기록되어 있어, 작은 고을 10개를 합한 것 이상의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도 왼쪽 위쪽의 化北面 일부는 남한강 상류에 걸쳐 있으며, 왼쪽 아래쪽으로는 모두 금강 상류에 속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 九州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주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化寧縣·中牟縣·丹密縣·山陽縣·長川部曲 등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內·外가 붙지 않은 面 이름의 첫 자는 모두 옛 폐현이나 부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창고 이름의 경우 옛 폐현의 이름이 거의 붙어 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되어 있는 鎭營은 경상도 左營으로서 상주·개령·금산·지례·함창을 관할하였다. 상주목은 조선시대 경상도 굴지의 도회지답게 9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 의하면 이 중 2개만이 賜額 받았을 뿐이다. 道南書院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초선 초·중기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학자를 배향하여 선조 39년(1606)에 세워지고, 숙종 3년(1677)에 賜額 받았다. 興巖書院은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宋浚吉(1606-1672)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지고, 영조 12년(1736)에 사액 받았다. 이 중 興岩書院만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낙동강에는 갈수기 때 소금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착지로 알려진 洛東津도 표시되어 있다. 이 밖에 사찰을 비롯하여 역원·정자·산성 등의 인문정보가 골고루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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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부는 낙동강 동쪽의 시내 부분을 제외한 구미시 전체에 해당된다. 읍치는 선산읍 동부리·완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낙동강 동쪽의 海平面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기록된 海平縣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선산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낙향한 冶隱 吉再(1353-1419)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吉冶隱影宇가 길재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길재의 학통을 이어 金宏弼(1454-1504)·鄭汝昌(1450-1504)과 같은 제자를 키워낸 金宗直(1431-1492)의 고향이기도 하다. 읍치 오른쪽 아래의 金烏書院이 바로 길재와 김종직 등을 배향하여 1575년(선조 8)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였다. 月岩書院은 死六臣의 한 명인 河緯地(1387-145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았다. 洛峯書院은 정조 11년(1787)에 사액 받았는데, 위쪽의 주기에는 未賜額으로 되어 있어 이 지도의 제작 하한연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읍치에 있는 蓮亭 근처는 김종직·하위지 등 장원급제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어 장원방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지도 아래쪽에는 金烏山城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둘레 7,644尺(약 2,293m)의 內城과 4,135尺(1,240m)의 外城으로 이루어진 대형 산성으로, 絶壁을 이용한 곳도 661步(약 1,190m)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中軍이 설치되고 別將이 파견되었으며, 산성 내에 倉이 설치되어 있었던 선산·금산·개령·지례를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형 산성의 보수와 축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외적의 침입 시 몇 개의 고을을 묶어서 방어를 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義狗塚과 義牛塚이 무덤의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조선에서 국가에 대한 忠과 더불어 주인에 대한 義를 강조하던 신분제의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사찰과 정자 등의 정보가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기봉)

  •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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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목은 성주군 전체, 고령군의 다사면·성산면·덕곡면·운수면 대부분, 달성군 논공읍의 위천리-노이리를 포함한 서쪽, 김천시 증산면 전체와 감천면의 광기리-도평리를 포함한 남쪽, 지례면의 신평리·울곡리·이전리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성주읍 경산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印懸山이었다. 지도는 서쪽(酉)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읍치가 동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성주목이 이렇게 컸던 이유는 고려시대에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왼쪽에 加利倉이 있는 곳은 조선 초까지도 속현으로 존재했던 가리현의 중심지였다. 읍치에는 土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왼쪽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세운 關王廟가 표시되어 있다. 關王이란 중국의 ≪三國志≫에 나오는 關于를 의미하며, 명나라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더 왼쪽에는 胎封山과 胎封寺가 보이는데, 조선의 3대 임금인 太宗의 胎를 奉安했던 곳이다. 읍치 오른쪽 위에도 胎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조선의 7대 임금인 世祖의 胎를 봉안했던 곳이다. 무덤이 한양 주위의 고을에 분포되어 있는 반면에 왕실의 胎는 전국 곳곳에 奉安되어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정통성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3개의 祠, 2개의 影堂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유명한 聖賢을 배향하여 제사한다는 측면에서는 기능이 같지만, 격에서는 상호간에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이 중 書院의 격이 가장 높았던 듯하며, 川谷書院과 檜淵書院만이 賜額 받고 있음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賜額이란 임금이 현판을 직접 제작하여 내려주는 것으로, 국가로부터 가장 높은 공신력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川谷書院에는 程子와 朱子 등 중국 유학자를 비롯하여 金宏弼(1454-1504)·李彦迪(1491-1553)·張顯光(1554-1637) 등 조선 초·중기의 성리학자가 배향되어 있었다. 檜淵書院에는 鄭逑(1543-1620)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배향되었다. 이 밖에 사찰과 교통 및 통신에 대한 정보도 잘 실려 있다.(이기봉)

  • 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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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부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단산면·부석면과 풍기읍의 수철리·창락리 일대, 안정면의 묵리·여륵리 일대와 봉화군의 봉화읍 적덕리·문단리·도촌리·화천리, 개단리와 가평리를 제외한 물야면, 봉성면의 우곡리, 법전면의 법전리·소지리, 춘양면의 소로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순흥면의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고을에는 3개의 越境地가 있었다. 昌樂面은 현재의 풍기읍 창락리 일대이며, 大龍山面은 안정면 묵리 일대, 臥龍面은 봉화군 봉화읍·봉성면·춘양면에 일부씩 걸쳐 있었다. 이렇게 행정구역이 복잡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까지도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기능하던 昌樂驛·大龍山部曲·甘谷部曲 등이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땅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위쪽에 있는 白雲洞書院은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安珦(1243-1306)을 배향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명종 5년(1550)에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에게 아뢴 후, 노비와 田結 및 紹修書院이라는 額書를 받아 賜額書院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백운동서원은 이후 소수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적 55호로 잘 보전되고 있다. 이 백운동서원은 일반적으로 풍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흥부는 세조 3년(1458)에 이곳에 귀양 왔던 錦城大君(?-1457)과 府使 李甫欽이 단종 복위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혁파되었다. 숙종 9년(1683)에 이 고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곳은 당시에 풍기의 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풍기의 백운동서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도 아래쪽의 丹溪書院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金淡(1416-1468)을 배향하여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되고 영조 때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총 4개의 고개가 표시되어 있으며, 군사적 중요성을 반영하여 ‘險阨’이라는 표시를 특별히 해 놓았다. 이 중 竹嶺이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지도에서도 붉은 색으로 도로를 표시하여 가장 중요한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죽령 밑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9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던 昌樂驛이 보이고 있다. 지도 위쪽에는 浮石寺가 높은 築臺 위에 건물을 세워놓은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이 사찰이 당시에도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절 안에 뜬 돌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국보 17호인 無量壽殿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 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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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령현은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과 화산면 전체,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죽곡리를 제외한 화남면, 화북면의 하송리·상송리·법화리·죽전리·옥계리·용소리와 동강리 서쪽의 와촌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신령면 화성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花山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모두 금호강의 지류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왼쪽의 것은 고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西川으로, 오른쪽의 것은 慈乙阿川으로 나온다. 현재는 각각 신령천과 고현천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과의 경계선이 현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특이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지도 아래쪽의 南面은 永川界를 넘어가 있는데, 지도에서의 표현과는 달리 실재로는 읍치가 있는 곳으로부터 행정경계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곳을 고을 경계를 넘어가 있는 땅이라고 하여 ''越境地''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현재 영천시 와촌면의 동강리 서쪽에 해당된다. 이곳은 고려시대까지 梨旨銀所가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곳이었으며, 조선 초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신령현의 면으로 재편되었다. 오른쪽의 知谷面·古縣面·新村面 지역도 영천과 경계선이 애매하게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이런 지역은 개의 위·아래 이빨이 서로의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하여 ''犬牙相入地''라고 불려졌다. 이 중 신촌면은 고려시대까지 新村部曲이 있었던 곳이며, 이지은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신령현에 완전히 통폐합되면서 面으로 재편되었다. 현재의 영천시 화북면 서쪽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원래 지도 오른쪽 아래의 古縣面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현 읍치로 옮겼다. 읍치 왼쪽에 있는 長水驛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역으로서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읍치 위에 있는 環碧亭은 원래 객사 서쪽 10보 거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지도에서처럼 개울가 절벽에 만들어져 있으며, 현재도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편 지도에는 2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書院은 아니다. 오른쪽의 白鶴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왼쪽의 龜川書院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탈환한 權應銖(1562-1608)를 배향하여 숙종 12년(1686)에 세워졌다. 신라 때의 사찰인 修道寺와 佛窟寺도 표시되어 있다. 崇儒抑佛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에서도 민간신앙으로 꾸준하게 세를 유지하던 불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굴사에는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보물 429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이기봉)

  •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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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부는 녹전면·도산면·예안면을 제외한 안동시 전체, 예천군 감천면, 봉화군 석포면·소천면·재산면과 봉화읍의 대부분·법전면의 일부·춘양면의 일부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안동 시내 동부동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930년에 고려 태조와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태조가 승리하였고, 그 과정에서 金宣平·勸行·張吉 등 안동의 호족세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안동은 고려시대 내내 주변의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다. 이후 지방관이 파견된 속현은 독자적인 고을로 남게 되었지만, 조선 초까지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은 그대로 안동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월경지가 많이 생기게 되었고, 행정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지도 왼쪽의 감천면은 甘泉縣, 그 위쪽의 내성면은 退串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1331-1332, 1340-1344) 때 승격된 奈城縣, 그 오른쪽의 춘양면은 원래 加也鄕이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승격된 春陽縣, 그 오른쪽의 소천은 小川部曲, 그 아래쪽의 재산면은 원래 德山部曲이었다가 고려 충선왕(1309-1313) 때 승격된 才山縣의 땅이었다. 이들 지역은 지도에서의 표현과 달리 감천면, 내성면, 춘양면·소천면·재산면 등 3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월경지였다. 월경지는 아니지만 고려시대까지 원래 독자적인 행정단위였다가 麗末鮮初를 지나면서 안동의 땅으로 편제된 속현의 명칭이 面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 ‘臨’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臨河縣, ‘豊’자가 들어가 있는 면의 이름은 豊山縣의 땅이었다. 이밖에도 길안면은 원래 吉安部曲이었다가 고려 충혜왕 때 승격된 吉安縣, 일직면은 一直縣의 땅이었다. 읍치에는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 지도보다 훨씬 많은 인문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의 낙동강 가에는 暎湖樓를 비롯하여 歸來亭·石門亭·臨淸閣·伴鳩亭·白雲亭 등 수많은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들 정자 중 영호루·귀래정·반구정 등은 지금도 안동시의 낙동강변에 복원되어 보존하고 있다. 읍치에는 慕恩樓와 關王廟도 표시되어 있다. 관왕묘는 이미 멸망한 明에 대한 조선후기 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징적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援軍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薛虎臣이 왜란을 평정한 것은 武安王 關于의 도움이라며 세운 것이다. 아울러 양반의 세력이 강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書院도 11개나 표시되어 있다. 이들 서원 중 賜額書院으로는 李滉(1501-1570)·柳成龍(1542-1607)·金誠一(1538-1593) 등을 배향한 虎溪書院, 權橃(1478-1548)을 배향한 三溪書院, 具鳳齡(1520-1585) 등을 배향한 周溪書院, 유성룡을 배향한 屛山書院 등 4개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는 병산서원만이 살아남아 사적 260호로 지정·보전되고 있다. 마을(村)의 이름으로는 유성룡의 고향인 河回가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 마을의 위상이 높았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울러 낙동강의 根源地로 알려진 黃池가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氏族의 始祖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강화가 하천에 대한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사찰 역시 서원이나 정자 못지 않게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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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음현은 함양군의 안의면·서하면·서상면과 거창군의 마리면·위천면·북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안의면 금천리·교북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3리에 있었다는 城山인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안음현은 지형적으로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이 황강의 상류인 위천천 유역이며, 왼쪽이 남강의 상류이다. 원래 안음현은 조선 태종 때 利安縣과 感陰縣을 합쳐 만들어졌고,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古縣面 지역이 감음현의 중심지가 있던 곳이다. 지도 위의 하천에는 고유명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일제초기에 전국의 하천 명칭을 단일화시키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光風樓가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한데,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지도에는 각각 3개의 서원과 祠宇가 표시되어 있다. 대대면에 있는 龍門書院은 이 고을 현감을 지낸 鄭汝昌(1450-1504)과 이 고을 덕유산에서 낙향했다가 죽은 鄭薀(569-1642)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賜額 받았다. 읍치 왼쪽에 있는 黃岩書院은 임진왜란 때 이 고을에서 전사한 郭䞭(?-1594) 등을 배향하여 숙종 43년(1717)에 사액 받았다. 현내면에 있는 星川書院은 사액 받지는 못했지만, 老論을 이끌었던 사람 중의 하나인 宋浚吉(1606-1672) 등 유명한 정치인을 배향하였다. 3개의 祠宇는 사액 받지 못한 것으로 서원에 비해서는 격이 떨어진다. 지도 오른쪽 위에는 전라도 장수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인 六十嶺이 ‘要衝’이라는 단어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읍치 왼쪽 위의 黃石古城은 둘레 2,924척(약 877m)의 石城으로 현재 서하면의 황석산에 있다.(이기봉)

  •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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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군은 지금의 웅상읍을 제외한 양산시 전체, 부산광역시 북구 전체와 강서구의 대저1·2동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산시 시내 중부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고을 동쪽 5리에 있었다’는 城隍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으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와 향교의 이름이 북-남이 아니라 동-서를 향하고 있는데, 읍치가 동쪽의 산을 등지고 입지해 있었던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 전체적으로 보아 아래쪽이 지나치게 확대·왜곡되어 있다. 勿禁津이라 표시된 곳이 낙동강 본류인데, 실재로는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도 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大渚島와 주변의 섬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대저도에 있는 七點山도 높은 산지가 아니라 낙동강 하구의 三角洲 평지에 있는 작은 둔덕이다. 七點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평지에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강하게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도에도 과장되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어업과 염업 등이 성행했던 곳이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지도 왼쪽 위에는 伽倻津祭壇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黃山江으로 불리기도 하며, 신라에서는 동서남북의 하천 신에게 제사지내던  四大瀆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금강인 공주의 웅진과 함께 南瀆으로 여겨져 中祀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그 아래의 勿禁味棧道는 한성-동래의 大路가 지나가던 곳으로 벼랑길이 있는 곳이다. 黃山驛은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고, 11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오른쪽의 松潭書院은 숙종 22년(1696)에 세워지고, 같은 왕 43년(1717)에 賜額 받았다. 이 서원은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낮은 벼슬의 사람이 배향되었음에도 賜額 받은 사연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19세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와 광해군의 廢母論 通文을 찢어버렸고, 그 때문에 인조반정 후 自如察訪을 지내고 사후 戶曹參議로 추증된 白受繪(1574-1642)를 배향하였다. 사찰도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에 글씨가 잘 안 보이는 사찰이 通度寺인데,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慈裝律師가 창건하여 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 후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졌다. 현재도 보물 74호 국장생석표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기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2군데 보이고 있다.(이기봉)

  • 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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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현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상북면·삼남면·삼동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언양읍 동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직사각형의 石築 읍성이 있었다. 현재도 사적 1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에 있는 高獻山(1,033m)인데, 읍치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고을의 서쪽에는 伽智山(1,240m)·肝月山(1,083m)·鷲棲山(1,059m) 등 1,000m 이상의 산들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은 태화강이 되어 동쪽의 울산만으로 빠져나간다. 이들 높은 산지 밑에는 사찰이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중 가지산 밑의 石南寺에는 보물 369호 부도가 간직되어 있고, 취서산 밑의 肝越寺에는 보물 37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지도 위쪽의 盤龜書院은 숙종 38년(1712)에 정몽주(1337-1392)·이언적(1491-1553)·정구(1543-1620)를 배향하여 창건한 서원인데,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이 있는 지역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변에 깎아지른 절벽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지금은 상당부분이 사연댐에 의해 잠겨버렸지만,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구대 岩刻畵로 유명한 곳이다. 경치가 수려하여 위의 서원에 배향된 세 명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그 흔적이 반구대 약간 북쪽의 협곡 입구에 천전리 刻石(국보 47호, 書石이라고도 한다)으로 남아 있다.(이기봉)

  • 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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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현은 지금의 영덕군 영덕읍·지품면·달산면·강구면·남정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덕읍 남석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蕪芚山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邑城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淸心樓는 읍성의 서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성과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嶺南地圖≫ 내의 邑城에 대한 모든 표시가 성곽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有無만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아래쪽의 南江書院은 16세기에 경상좌도 지역의 성리학자로 가장 유명했던 李彦迪(1491-1553)과 李滉(1501-1570)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천을 매우 강조하여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嶺南地圖≫ 내의 하천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 방식보다 훨씬 강조되어 있음을 통해 지도 작성 시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읍치 왼쪽의 하천은 현재 오십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하류는 南川, 중류는 五十川, 상류는 北川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를 추진하기 전에는 같은 하천이라도 구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오십천 남쪽의 해안선이 실재로는 남북 직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마치 남서쪽으로 꺾인 것처럼 잘못 표시되어 있다. 기타 왕실의 관곽용 목재인 黃腸木을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지도 맨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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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현은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계성면·장마면·도천면·길곡면·부곡면과 남지읍 남지리·마산리·학계리·용산리·신전리·성사리·아지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산면 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靈鷲山이었다. 아래쪽 왼쪽에서 낙동강 본류와 그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여 오른쪽(동쪽)으로 빠져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많은 ‘津’이 보이고 있는데, 지역민들에게는 나루임과 동시에 해당 구간의 낙동강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낙동강 너머 廣心亭이 있는 곳은 특이하게도 영산의 땅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 칠곡면 봉촌리의 낙동강변에 해당된다. 面의 이름에는 고려시대까지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존재하던 지역의 명칭이 일부 남아 있다. 계성면은 桂城縣이, 길곡면은 吉谷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는 德峯鄕賢祠와 道泉鄕賢祠가 보이고 있는데 ≪輿地圖書≫에는 모두 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祠와 書院이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개의 祠 모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하지도, 사액서원도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祠와 書院이 어느 정도 구별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겠다. 기타 곽재우의 別墅였다는 忘憂亭이 낙동강 변에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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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현은 입암면의 면소재지 남쪽과 석보면을 제외한 영양군의 전 지역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양읍 서부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위쪽의 日月山이다. 영양현은 조선 초까지 영해도호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숙종 9년(1683)에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새롭게 현감이 파견되면서 독립적인 행정단위가 되었다. 고을은 두개의 水系에 속해 있다. 남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의 최상류이며, 북쪽은 동해로 빠져나가는 왕피천의 최상류이다. 왕피천은 지도에는 深川으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首比部曲이 있던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영양군 수비면이다. 청이면과 청초면 지역도 원래 大靑部曲·小靑部曲이 있던 곳으로, 면의 명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반변천에는 위로부터 將軍川·大川·矢川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의 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에는 각 구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던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池는 項谷堤와 元唐堤가 합쳐져 있는 것으로서, 주위가 각각 2,852尺(약 856m)·1,698尺(약 509m)이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작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제언으로서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읍치 아래쪽의 英山書院은 이황(1501-1570)과 김성일(1538-1593)을 배향하여 세워졌으며, 숙종(1675-1720) 때 사액받았다. 지도 위쪽에는 왕실의 棺槨 제조용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기타 향교가 읍치와 많이 떨어져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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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현은 지금의 포항시 시내 항구동 남쪽부분, 연일읍·대송면·오천읍·동해면, 대보면의 서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읍치는 연일읍 생지리 일대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迎日’이 ‘延日’이라고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하천의 모습이 상류와 하류의 구분 없이 표시되어 있어, 냉천이 마치 경주방향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지도 남서쪽 경주와의 경계선이 실재로 分水界이기 때문에, 지도상에 나타난 냉천의 최상류가 곧 발원지이다. 형산강과 냉천의 하류에는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 河中島가 여러 개 보이고 있다. 이 하중도는 홍수 시에는 물에 잠기기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으며,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이 갈대를 이용하여 鹽盆을 끓일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내내 이 지역은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소금 생산지로 알려질 수 있었다. 포항시가 형성·확대되면서 모두 메워져, 현재는 시내 중심가의 대부분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중도 오른쪽 끝에는 포항시의 명칭이 유래된 浦項倉이 보이고 있다. 지도 오른쪽 끝의 大冬背烽臺가 있는 곳이 지금의 장기곶이다. 이곳의 지형은 동북쪽 바닷가로 솟아 올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남서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고을의 鎭山인 雲梯山과 陳田山에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주로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산림보호구역을 지칭한다. 읍치 아래쪽의 烏川書院에는 본관이 이 고을이며 고려말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1337-1392)와 우리말로 쓴 ≪關東別曲≫, ≪思美人曲≫의 작자인 정철(1536-1593) 등이 配享되어 있었다. 이 서원은 선조 21년(1588)에 만들어져 광해군 5년(1613)에 賜額받았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종 8년(1871)에 毁撤되었다. 이 밖에 영조 36년경(1760)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輿地圖書≫에는 邑城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 지도의 읍치에는 邑城에 대한 표시가 없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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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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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 영천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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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군은 영천시 시내·자양면·임고면·청통면·금호읍 전체, 대창리를 제외한 대창면, 반정리·유하리·유상리를 제외한 북안면, 고도리·전사리·차당리·오류리를 제외한 고경면, 화남면의 용계리·구전리·온천리·대천리, 화북면의 입석리·정각리·자천리·횡계리·오리·공덕리,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시내 문내동·성내동·창구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90리에 있었다는 母子山이다. 고을 서북쪽과 동남쪽에 각각 신령·경주와의 복잡한 행정경계가 이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동북쪽의 仇里內面 역시 현재의 경주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있었던 越境地였음에도 그런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현재 금호강으로 불리고 있다. 지도에는 南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읍치를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읍치에는 朝陽閣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남쪽의 금호강가는 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현재도 보존되고 있는 조양각이 있다. 지도에는 4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臨皐書院과 道岑書院만이 賜額 받은 서원임을 표시하였다.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 鄭夢周(1337-1392)와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된 영천 황보씨 皇甫仁(?-1453) 등을 배향하여, 선조 36년(1603)에 賜額 받았다. 도잠서원은 이황의 문하생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서 싸웠던 曹好益(1545-1609)을 배향하여, 숙종 4년(1678)에 賜額 받았다. 사찰도 서원 못지 않게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왼쪽의 銀海寺는 헌덕왕 1년(809)에 惠哲國師가 창건하여 海眼寺로 부르다가, 조선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후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절이다. 이 절 안에는 현재도 보물 514호 청동보살좌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이기봉)

  • 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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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부는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축산면·창수면·병곡면과 영양군의 석보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해면 성내리에 있었으며, 石築의 邑城이 있었음에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으며, 북면·서면·남면의 명칭이 해안가 가까이에만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대부분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쪽 바닷가 근처에는 넓은 평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 아래쪽(서쪽)의 석보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 유역에 속하며, 원래 고려 말까지 石保部曲이 있었던 곳이다. 읍치 아래쪽의 丹山書院은 禹倬(1263-1343)과 李穀(1298-1351)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서원은 아니다. 그 왼쪽의 有金菴는 신라시대의 절이라 하며, 현재 보물 674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하천의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붙였기 때문에 서천·북천·남천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중 북천은 하천의 표현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蒼水院이나 莊陸菴 방향의 하천이 더 크고 긴데, 상대적으로 너무 작게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본류가 영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영덕과의 경계가 발원지이다. 그밖에 봉화는 붉은 직선을 그어 서로 호응관계에 있음을 표시하였고, 북천 끝 해안가의 觀魚臺가 깎아지른 절벽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이기봉)

  • 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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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안현은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도산면·녹전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도산면 서부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에 표시된 하천은 거의 낙동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현재는 약간 하류 쪽에 안동댐이 건설되어 있어, 읍치를 비롯하여 상당 부분이 수몰되어 버렸다. 예안현은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退溪 李滉(1501-1570)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지도에도 그가 태어난 退溪舊宅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도산면 도계리에 보존되고 있다. 이황의 고향답게 4개의 書院과 1개의 書堂이 표시되어 있다. 이황은 이 고을 토계리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했다. 이황이 죽은 4년 후인 선조 7년(1574)에 이황을 배향하여 도산서원을 창건하였고, 다음 해에 賜額받았다. 이 후 이황의 제자인 趙穆(1524-1606)을 추가로 配享하였는데, 지금도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易東書院은 고려 말에 이 고을 예안에 살면서 성리학의 체계화에 노력한 易東 禹倬(1263-1343)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창건하였고, 숙종 10년(1684)에 賜額받았다. 그 나머지는 사액서원이 아니며, 도산서원 이외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모두 毁撤되었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文廟가 있었던 鄕校와 토지신·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社稷壇이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에 있는 孤山亭과 丹沙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강가에 절벽이 솟아 있는 등 이 지역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丹沙는 이황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협곡이 펼쳐져 있어 丹沙峽이라고도 한다.(이기봉)

  • 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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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은 지금의 예천군 예천읍·용문면·유천면·보문면·호명면, 우감리를 포함한 동쪽의 개포면, 풍양면의 공덕리·괴당리·고산리·풍신리, 문경시 동로면과 신북면의 가좌리·창구리·소야리·내화리·가곡리·월천리·흑송리·지내리, 의성군 다인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예천읍 노상리·서본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북쪽에 표시된 德鳳山이다. 하천이 어지럽게 갈라져 있다. 현재는 아래쪽으로부터 낙동강(大谷灘)·내성천(沙川)·한천(瀼川)으로 부르고 있으며, 왼쪽의 것은 금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面의 이름에 옛 행정구역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지도 왼쪽 위에 있는 冬老所面은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행정단위의 역할을 하였던 冬老所가 있었던 곳이다. 아래쪽의 ‘縣’자가 붙어 있는 면은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多仁縣 지역으로서, 용궁현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越境地였다. 읍치에는 객사 동쪽에 있었던 快賓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읍치 뒤쪽의 黑鷹山城은 원래 鵲城이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三面이 모두 암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古城이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廢해져 있었음에도 특별히 표시한 것은 그만큼 군사적 중요성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3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 중 鼎山書院만이 賜額 받았음을 표시하였다. 이 서원에는 李滉(1501-1570)과 그의 제자이며, 이 고을이 고향인 趙穆(1524-1606)을 배향하였다. 鄕賢祠의 경우 이 고을에서만 알려져 있는 인물을 배향했기 때문에 ‘鄕賢’이란 명칭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함을 통해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력 역시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龍門寺는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창건되어 고려 태조 이후 여러 번 중수된 유서 깊은 절이다. 기타 지도 왼쪽 맨 위에는 왕실의 棺槨用 목재인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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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현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과 지보면, 개포면의 서쪽 7개리, 풍양면의 북쪽 8개리, 의성군 안사면의 쌍호리·월소리·신수리, 문경시 영순면의 동쪽 6개리에 해당된다. 지도상의 읍치는 용궁면 향석리에 있었다. 그러나 1856년의 큰 장마로 인하여 관아건물이 떠내려가자 용궁면 읍부리로 옮겼다. 이 지역은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맨 아래쪽의 낙동강 본류, 중간 부분의 내성천, 가장 왼쪽의 금천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 오른쪽의 낙동강 본류에는 ‘龜潭江’이 적혀 있는데, 낙동강 전체가 아니라 표시된 근처에서만 부르던 명칭이다. 그리고 낙동강 변에 知保津과 河豊津 등 2개의 나루만이 적혀 있지만, 실재로는 훨씬 많이 있었다. 이러한 나루의 명칭은 나루 그 자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에 의해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아래쪽의 長安菴 맞은편 지역은 하천이 거의 180˚ 돌아 흘러가는 곳으로, 장안암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제단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장소의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지도에는 書院·祠·社가 각각 2개씩 보이고 있는데, 모두 賜額받지는 못했다. 이 중 三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이황(1501-1570)·유성룡(1542-1607)을 배향하여 인조 21년(1643)에, 尙節祠는 정몽주 피살 후 의령으로 귀양 갔던 安俊(?-?) 등을 배향하여 현종 10년(1669)에, 浣潭里社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鄭光弼(1462-1538)과 그 조상·자손을 배향하여 선조 원년(1568)에 세워졌다. 각각의 배향 인물로 보아 書院·祠·社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특히 社는 일개 가문에서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寺刹도 4개나 표시되어 있어, 유교 사회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이기봉)

  •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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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부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시내와 울주군 강동면·범서면·청량면·웅촌면·온양면·서생면·온산읍과 양산시 웅상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3개의 하천이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바로 아래쪽이 태화강 본류이고, 오른쪽이 동천강이며, 맨 아래쪽이 현재의 회야강이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쪽의 無里龍山인데, 읍치와 산세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하천 너머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읍치 바로 오른쪽으로는 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보이고 있다. 경주의 後營·대구의 中營·안동의 前營을 관할하였으며, 현재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있었다. 읍치와 좌병영에 모두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 아래쪽의 甑城은 현재 鶴城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과 1598년 1월 사이에 朝明聯合軍과 倭軍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남해안으로 후퇴한 왜군은 증성과 지도 맨 아래쪽의 西生鎭에 倭城을 쌓고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 오른쪽으로는 말이 넘나들지 못하도록 설치한 牧場馬城의 모습이 성문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이곳은 監牧官이 파견되었던 蔚山牧場이며, 감목관이 머물렀던 곳은 목장마성 위에 牧官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재 현대계열의 회사가 밀집해 있는 울산광역시 동구일대에 해당된다. 그 왼쪽에는 통일신라 말기 처용설화의 근원지였던 處容岩이 보이고 있다. 그 위쪽의 舊開雲浦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이 海神에게 빌어 구름과 안개를 걷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개운포이다. 여기에는 원래 수군이 주둔하던 개운포진이 있었는데, ‘戰船泊處 ’는 그러한 흔적을 반영하는 지명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동래로 옮겨갔기 때문에 구개운포라고 표현한 것이다. 鷗江書院은 정몽주(1337-1392)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숙종 20년(1694)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지도 오른쪽의 亏佛祠는 祀典에 小祀로 기록되어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가물 때 특히 효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민간신앙이 수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아래쪽에는 여러 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봉산이란 숙종(1675-1720) 이후 전선의 선재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키던 산림보호구역이었다. 이 밖에 사찰이 아주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특이한 지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기봉)

  • 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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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천현은 지금의 진해시 전체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진해시 성내동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의 熊山(703m)이다. 지도에는 熊巖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면서도 과장되게 그렸다. 읍치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壇(또는 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3단에는 제단 모양을 그려 넣어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읍치에는 일본과 가까운 해안가이기 때문에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전략적 요인 때문에 수많은 鎭堡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된 곳은 ‘○○鎭’으로, 정4품의 水軍萬戶나 종9품의 水軍別將이 파견된 곳은 ‘○○陣’으로 표시하였다. 해안가에는 ‘○○船所’라는 표시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船所란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곳이다. 위쪽의 주기에는 각 鎭堡에 배치된 전선의 종류와 수에 대해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邑船所는 웅천현 관할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던 곳이며, 각 鎭堡가 관할하던 곳에는 선소 앞에 관할 진보의 이름이 붙어 있다. 임진왜란의 흔적을 보여주는 倭城도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북상했던 倭軍은 울산-순천에 이르는 해안가로 후퇴한 후 수많은 倭城을 쌓아 주둔하였다. 정유재란(1597) 때는 이 왜성을 근거지로 다시 북상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왜군이 저항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2개의 倭古堞과 1개의 古倭城이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도 흔적의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아래쪽 바닷가에는 수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덕도를 제외하면 크기의 비교가 고려되어 있지 않다. 다만 좀 큰 섬이면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人居’라는 표시를 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封山도 2개나 보이고 있다. 封山이란 조선후기에 산림의 남벌로 戰船의 船材 조달도 어렵게 되자,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지역이다. 기타 도로와 봉수 등의 정보가 ≪嶺南地圖≫의 다른 고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세한 편이다. 주기에는 4개의 船材封山을 기록하였다.(이기봉)

  •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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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령현은 궁유면의 운계리·평촌리·벽계리를 제외한 의령군 전체에 해당되며, 읍치는 의령읍 중동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에는 선조 22년(1589)에 만들어진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표시된 德山이다. 지도의 오른쪽에는 낙동강 본류가, 아래쪽에는 그 지류인 남강이 흘러와 합류한다. 남강 변에 있는 鼎巖津은 솥 모양의 큰 바위가 강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갈수기 때 남강을 거슬러 오르는 수많은 소금배의 최종 정박처로 알려져 있다. 조선후기 내내 남강에서 가장 번성한 浦口였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읍치를 흐르는 하천이 남산천이며, 북쪽의 것이 유곡천이다. 후자의 지역에는 조선 초까지도 屬縣으로 존재했던 新繁縣이 있었다. 지도 오른쪽에 毛兒面·大谷面이 있는 지역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남강의 지류인 양천의 최상류에 속해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德谷書院은 이황(1501-1570)을 배향하여 효종 7년(1656)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9)에 賜額받았다. 사찰의 표시도 아주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寶泉寺에는 보물 373호로 지정된 3층석탑과 472호로 지정된 부도가 보존되고 있다. 이밖에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으로 구분했으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 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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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현은 의성군 의성읍·단촌면·점곡면·옥산면·사곡면·춘산면·가음면·금성면·봉양면, 교안리·검곡리를 제외한 신평면, 하평리·금곡리를 제외한 안평면, 군위군 고로면에서 양지리를 포함한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성읍 후죽리·도동리·도서리 일대에 있었다. 의성현은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이 위천의 지류인 쌍계천 유역이고, 위쪽이 안동의 풍산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안망천의 상류이다. 후자에는 高丘縣이 있었으며, 仇火面의 ‘구화’는 고구현의 옛 이름이다. 하천이 지나치게 굵게 표시되어 있어 실제보다 훨씬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읍치에는 객사 북쪽에 있었다는 聞韶樓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다. 聞韶는 의성의 옛 이름이다. 이 고을은 원래 신라에 의해 병합된 召文國이었다고 하며, 지도 아래쪽의 召文面과 金鶴山 사이가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대형의 탑리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으며,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국보 77호 탑리 5층석탑도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개의 書院, 2개의 祠, 1개의 齋, 9개의 書堂이 주기뿐만 아니라 지도에도 빽빽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중 金安國(1478-1543) 등을 배향한 氷溪書院만이 선조 9년(1576)에 賜額 받았다. 書堂이 이 고을에만 많았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의 최초 작성자는 이 고을의 학문적 분위기를 특별히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빙계서원 옆의 氷穴은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곳으로,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춘산면 빙계리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도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孤雲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31본산의 하나이며, 신라 때 義湘法師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보물 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는데, 통일신라 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이기봉)

  • 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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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흥현은 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우보면·부계면·산성면과 고로면 남쪽,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의흥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향교 뒤에 표시된 龍頭山이다. 고을의 남쪽과 동쪽에는 八公山(1,192m)과 華山(828m)을 비롯한 7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포진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들이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데, 지도에 표시된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의흥현은 지도에서처럼 2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으며, 읍치가 지나치게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까지 원래 2개의 고을이었던 것이 조선 초에 완전히 합쳐졌기 때문이다. 縣內面이 있던 곳이 고려 말에 이 고을에 속하게 된 缶溪縣의 중심지였으며, 그 아래쪽의 缶溪倉이 옛 지명을 그대로 잇고 있다. 현내면을 중심으로 부서면·부동면·부남면이 부계현의 지역이었으며, 현재의 군위군 부계면 전체와 산성면의 동쪽 및 효령면의 매곡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지도 아래쪽에는 화산 위쪽에 北門과 南門의 표시가 있는데, 이곳을 華山城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넓은 高位平坦面이 형성되어 있어 성곽을 축조하기에 알맞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35년(1709)에 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정부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으면서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숙종(1675-1720)과 영조(1725-1776) 때 대대적으로 대형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 화산성 역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축조된 대형 산성 중의 하나이다. 산성 안에는 戰時가 아닐 때 보수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軍需寺와 장기전을 위해 필수적인 食水源인 龍潭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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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부는 칠곡군 기산면·약목면·북삼면, 석적면과 금화리 서쪽의 가산면, 낙동강 동쪽의 구미시내에 해당된다. 읍치는 구미시내 인의동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流岳山(839m)이다. 고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다. 인동현에는 조선 초까지도 若木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는데, 낙동강 서쪽의 若木面 지역에 있었다. ≪嶺南地圖≫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鄕校가 사각형 모양의 읍치 안쪽에 표시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위에 만들어져 있어, 하늘이 만든 것 같다는 天生山城이 보이고 있다. 원래 신라의 옛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선조 34년(1601)에 둘레 3,612척(약 1,084m)의 外城을 쌓았다고 한다. ≪嶺南地圖≫ 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築造하거나 修築한 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이 지도에는 천생산성이 간단하게 이름만 나오는데, 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의 낙동강 변에는 범람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숲이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보이고 있다. 吳山書院은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창에 반대하여 낙향했던 吉再를 배향하여 선조 7년(1574)에 세우고, 광해군 때 사액 받았다. 서원 오른쪽에 표시된 비문 모양은 吳泰山에 있었다는 吉再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이것이 砥柱로 기록되어 있다. 東洛書院은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죽었다는 장현광(1554-1637)을 배향하여 효종 5년(1654)에 세워지고, 숙종 2년(1676)에 사액 받았다. 그 밖에 사찰도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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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현은 경산시의 자인면·남산면·용성면과 압량면의 백인리·가일리·강서리·당리리, 진량면의 남쪽 절반 정도에 해당된다. 읍치는 자인면의 원당리 일대에 있었다. 자인현은 조선 초까지도 경주부의 屬縣으로 존재하다가 인조(1623-164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독립된 고을이 되었다. 下北面 즉, 현재의 진량면 남쪽 부분에 있었던 仇史部曲도 조선 초에는 경주의 屬縣이었다. 효종(1649-1659) 때 지역 사람들의 청원에 의해 자인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지도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이며, 남·동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잘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1개의 書院과 2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의 觀瀾書院은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받지는 못했다.  忠賢祠에는 임진왜란 때 이 고을의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崔文炳(?-1599)이, 그 아래쪽의 南川尙德祠에는 인조 때 자인현을 복구시키는 데 공이 있는 이광후·창후 형제와 김응명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모두 사액받지는 못했다. 배향된 인물을 통해 書院과 祠는 서로 격이 달랐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사찰이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을 통해, 불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이기봉)

  •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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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현은 지금의 포항시 남구의 장기면·구룡포읍과 대보면의 대보리·강사리, 동해면의 상정리·중산리·공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장기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의 巨山이다. 읍치는 산 중턱의 평탄한 지형 위에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石築의 작은 성곽이 있었다. 현재도 성곽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상당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고을의 서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로 작은 하천들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지도 위쪽에는 牧場城門이 서북-동 방향의 긴 城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城은 군사용이 아니라 이 목장에서 길렀던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서북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특별히 城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輿地圖書≫에는 冬乙背串牧場에 331마리의 말을 키웠다고 나오며, 울산목장에 속해 있었다. 지도 위쪽의 오른쪽 끝은 현재의 장기곶에 해당된다. 동북쪽 바닷가로 더 튀어 올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市嶺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이 보이고 있다. 기타 읍치 아래쪽의 竹林書院은 숙종 33년(1707)에 송시열(1607-1689) 등을 배향하여 창건하였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 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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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현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대덕면·부항면, 구성면의 상원리·미평리 서남쪽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지례면 교리·상부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남쪽 2리에 있었다는 龜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삼도봉(1,177m)과 대덕산(1,290m) 등 소백산맥이 지나가며, 남쪽과 동쪽으로도 높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는 牛頭嶺이 표시되어 있는데, 거창과 지례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였다. 고을 동·서·남의 삼면에서 흘러온 물이 甘川이 되어 동북쪽의 金山(지금의 김천)으로 흘러나간다. 읍치에는 華玉亭, 鑑湖亭, 寒松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중 鑑湖亭은 숙종 16년(1690)에 현감 조인상이 연못을 파서 세운 정자로서, 이름만으로도 정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기타 남북의 주요도로가 마치 직선으로 이루어진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봉수는 호응관계를 적황색 직선의 실선으로 표시하였다.(이기봉)

  •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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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현은 청송군 진보면, 파천면의 관리 북쪽과 영양군 입암면의 신구리 남쪽, 석보면의 택전리·화매리·포산리·삼의리,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보면 광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남쪽에 있는 南角山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며, 동쪽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현재는 안동시 임하면에 임하댐을 설치하여, 읍치 부근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반변천에는 경치 좋은 장소가 많은데, 이곳에 표시된 文岩과 孔岩은 실제 모양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천변에는 風呼亭·玉流亭 등의 風流 있는 정자가 표시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인 厲壇·城隍壇·社壇·文廟(향교)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제단들은 고을을 통치하며, 대표하는 자로서의 수령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운영되었다. 아울러 읍치 주변에 입지시킴으로써 읍치의 공간적 위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鳳覽書院은 선조 32년(1599)에 세워졌고, 숙종 16년(1690)에 賜額 받았다. 이곳에는 主理哲學의 대가이며, 본관이 이 고을인 退溪 李滉(1501-1570)을 배향하였다. 지도 오른쪽에 표시된 동리면은 실재로 영해부의 땅을 넘어가 있는 越境地에 가까운 곳이었다. 더 오른쪽에 眞寶地라고 표시된 낙평은 현재의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로서, 영덕의 땅인 지품 지역을 넘어가 있었던 越境地였다.(이기봉)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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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 진주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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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목은 진주시 전체와 고성군의 개천면·영현면, 사천시 시내 일부와 축동면, 남해군 창선면, 하동군 옥종면·청암면·북천면의 북부, 산청군 시천면·삼장면·단성군 서쪽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주시내 본성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飛鳳山이다. 진주가 이렇게 크게 된 이유는 신라 九州의 하나였으며, 고려시대 내내 수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조선 초까지도 독립하지 못한 곳은 모두 이 고을의 땅으로 되었다. 지도 아래쪽의 末文里는 현재의 사천시내에, 昌善里 부근은 남해군의 창선면에 있던 월경지였다. 이 고을에서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面이란 행정단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里를 사용하였다.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읍치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이 그려져 있다. 矗石山城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남강 가의 절벽과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곽일 뿐이다. 성 안에는 慶尙道右兵營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팎에 논개의 일화로 유명한 矗石樓와 義巖도 표시되어 있다. 진주성의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그려져 있는데, ≪嶺南地圖≫ 전체가 성곽의 모양과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고을이 커서 주기면을 1장 더 만들었다. 주기면에는 7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이 중 2개만이, 祠는 3개 모두 사액 받았음을 통해 서원만이 사액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의 경우 주기 아래쪽에 鄕賢祠라는 문구를 써넣어 격이 낮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 부근을 비롯하여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중 斷俗寺는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나온다. 현재는 폐사되었는데, 이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보물 72·73호로 지정된 동서 3층석탑이 남아 있다. 기타 창선도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음이 보이며, 주기에는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3개의 封山도 나오고 있다.(이기봉)

  • 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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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현은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진북면, 봉암리·양촌리를 포함한 남쪽의 진전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진동면의 진동리에 있었다. 고을의 북쪽으로는 6-700m의 산지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남해로 빠져 나간다. 현재의 진해시는 일제시대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서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웅천현에 속해 있었다. 고을이 작아 선조 3년(1570)에는 함안에 붙였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세워지고, 인조 5년(1627)에는 창원에 붙였다가 17년(1639)에 다시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동북쪽의 鷲山(수리봉)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으며,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중 社壇과 鄕校(文廟)가 보인다. 사단은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며, 향교의 大成殿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냈다. 해안가에 2개의 창고가 보이고 있다. 統都廳은 統營都廳倉의 줄임말로서, 이 고을에서 통영으로 받쳤던 세금을 모아 두던 곳이다. 咸安海倉은 이 고을 바로 북쪽에 있으면서, 바다와 접해 있지 않았던 咸安의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그 왼쪽의 船所는 戰船이 정박했던 곳이다. 주기에는 이곳에 戰船 1척, 兵船 1척, 伺候船 2척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주기를 통해 常令驛에 大馬 2필, 騎馬 5필, 卜馬 10필이 배치되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이기봉)

  • 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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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현은 창녕군의 창령읍·대지면·유어면·이방면·대합면·성산면·고암면과 남지읍의 월하리·시남리·대곡리·반포리·칠현리·고곡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령읍 교상리·말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있는 火旺山(757m)이다. 지도는 동쪽(卯)을 위로 향하도록 그렸다. 아래쪽의 낙동강은 왼쪽(북)에서 오른쪽(남)으로 흘러 나간다. 낙동강 변에는 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여러 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아울러 梨旨浦·樓仇澤도 표시되어 있는데, 현재 우포를 비롯한 늪지가 보전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대가 낮아 홍수시 낙동강의 물이 역류하여 올라오기 때문에 광범위한 습지가 유지·보전될 수 있었다. 읍치 위쪽에 있는 古山城은 화왕산성으로서 정상부의 평평한 지역에 石築으로 쌓은 대형의 산성이다. 읍지에는 9개의 샘과 세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개의 못이 龍池로 표현된 것 같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가 바로 이 산성에 들어와 紅衣將軍으로 칭하고, 왜적과의 싸움에서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나오고 있다. 이 중 읍치 왼쪽의 冠山書院은 영남 성리학의 양대 산맥인 曺植(1501-1572)과 이황(1501-1570) 모두에게서 배운 광해군 때의 학자 鄭逑(1543-1620)가 서재를 만들어 강학하던 곳이다. 그가 죽은 후 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숙종 37년(1711)에 사액 받았다. 그 왼쪽의 燕巖書院은 정구의 제자인 成安義(1561-1629) 등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成氏世德祠에는 세조 때 死六臣의 하나이며, 본관이 창녕인 成三問(1418-1456)을 비롯하여 그 조상·자손 등 成氏 8인을 배향하여 세워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祠는 書院과 달리 지역 전체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성씨의 문중만을 대표하여 세워진 경우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읍치에는 사적 80호로 지정된 가야시대의 수많은 고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는 이와 같은 고분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사찰에 대한 표시도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이기봉)

  • 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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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부는 지금의 대산면을 제외한 창원시 전체, 마산시 시내·내서읍에 해당된다. 읍치는  창원시 소계동·북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바로 뒤쪽의 檐山이다. 이 고을은 조선 태종 때 義昌縣과 會原縣을 昌原이란 이름으로 합쳐 만들어졌는데, 회원현의 중심지는 회원서원 부근에 있었다. 檜原書院은 鄭逑(1543-1620)와 그의 제자 許穆(1595-1682)을 배향하여 인조 12년(1623)에 세워졌지만, 사액 받지는 못했다. 읍치 아래쪽의 鄕賢祠는 朴身潤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지만, 역시 사액 받지는 못했다. 여기서 박신윤이란 인물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음을 통해 서원과 향현사 사이에 격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西三面에 있는 月影臺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인 최치원이 노닐던 곳으로, ‘月影臺’라는 글자를 楷書體로 손수 써서 돌에 새긴 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쪽의 해창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한양으로 옮기던 곳이다. 이곳은 고려 때 몽고가 일본을 정벌할 때 征東行省을 설치한 合浦로서, 3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출발지이기도 하였다.  舊兵營은 태종(1401-1418) 때 慶尙右兵營이 세워졌다가 선조(1568-1608) 때 진주로 옮겨간 곳이다. 그 옆의 盤龍山 밑에는 영조 36년(1760)에 盤山倉이라는 漕倉을 설치하여, 근처 9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모아 서울로 옮겼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이 지도가 1760년 이전의 상황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3개,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국가가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伐木을 금지시키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의 自如驛에는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이기봉)

  •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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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군은 지금의 각북면·풍각면·각남면을 제외한 청도군 전체와 밀양시 청도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화양읍 서상리·동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있는 鰲山이다. 읍치에는 선조 24년(1596)에 쌓은 石築의 邑城이 있었다. ≪嶺南地圖≫에는 일반적으로 城郭의 유무를 표시해 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는 하천이 매우 강조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의 상류이다. 읍치 남서쪽의 外西面은 밀양강에 합류하지 않고 바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청도천의 최상류 盆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어 있듯이 거의 越境地에 가까운 땅으로 현재는 밀양시 청도면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을은 한성-동래를 잇는 大路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읍성의 축성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밀양강 아래쪽에는 ‘賊路要衝’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양쪽의 험한 산지로 인한 좁은 골짜기가 수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곳이다. 그 오른쪽에 있는 古山城基는 烏惠(또는 烏禮)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레 9,980척(약 2,994m)에 이르는 대형이다. 신라 때의 仇刀城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이 가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관방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그 위쪽의 古山城은 여러 기록에 동서가 모두 석벽이라고 나오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위쪽의 省峴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었으며, 16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왼쪽의 古伊西國은 ≪三國史記≫에 儒禮尼師今 14년(297)에 신라의 金城을 공격한 나라로 나온다. 지도 위쪽의 주기에는 2개의 書院과 1개의 祠가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도에는 賜額 받은 紫溪書院만이 표시되어 있어, 격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서원은 戊午士禍(1498) 때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金馹孫(1464-1498) 등을 배향하여 선조 11년(1578)에 건립되고, 현종 2년(1661)에 사액 받았다. 사찰은 서원보다도 더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지도 오른쪽의 雲門寺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사찰은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되었고, 고려 태조가 雲門禪師라 이름붙인 곳이다. 보물 193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이기봉)

  •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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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부는 진보면과 파천면 북부를 제외한 청송군에 해당되며, 읍치는 청송읍 월막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게 2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아래쪽의 것이 길안천이고 위쪽의 것이 용천천인데, 두 하천 모두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조선 초까지 길안천 유역에는 安德縣이 屬縣으로 존재했다. 지도에도 安德古縣倉을 표시하였으며, 面의 명칭인 현내면·현북면·현서면·현남면·현동면도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표현해주고 있다. 용천천 유역에는 조선 초까지 靑寶郡이 하류에,  松生縣이 상류에 있었다. 조선 세조 때 두 고을을 합하고, 각각 한 자씩 따와서 靑松府라고 하였다. 戶數의 측면에서 보아 그리 크지 않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都護府라는 높은 고을의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세종의 妃인 昭憲王后의 本鄕(본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을에는 두 개의 서원이 보이고 있다. 지도 한가운데의 屛岩書院은 主氣論을 대표하는 李珥(1536-1584)와 金長生(1548-1631)을 배향하여 숙종 28년(1702)에 賜額받았다. 지도 왼쪽의 松鶴書院은 主理論을 대표하는 李滉(1501-1570)·金誠一(1538-1593)·張顯光(1554-1637)을 배향하여 숙종 25년(1699)에 세워졌는데, 사액 받지는 못했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흐름이 하나의 고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읍치는 고을의 鎭山인 放光山 밑에 자리잡고 있는데, 객사 남쪽에 있었던 讚慶樓가 병기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周房山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周王山(720m)이다. 이 지도의 단점은 ≪영남지도≫ 내의 다른 지도에 비해 하천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어, 혼돈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이기봉)

  •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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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하현은 지금의 포항시 청하면·송라면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으며, 읍치는 청하면 덕성리에 있었다. 읍치에는 石築의 작은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청하초등학교 근방에 일부가 남아 있다.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에 보이는 呼鶴山이며, 대부분의 읍지에  ‘읍치 서쪽 9리에 있다’고 나온다. 서쪽으로는 內延山(710m) 등의 높은 산봉우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고을의 동쪽 해안가에 가까워지면서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서쪽의 높은 산줄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로 합류되지 않은 채 동쪽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의 명칭이 北川과 南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읍치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각각 광천과 청하천 등 고유 지명을 따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의 鳳松亭은 長松 수백 그루가 바닷바람을 막아주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읍지에는 ‘동쪽 2리에 있었다’고 나오며, 현재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도 위쪽의 鶴山書院은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받지는 못했다. 그 옆의 寶鏡寺에는 고려 고종 13년(1226)에 세운 圓眞國師碑가 보물 25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위쪽의 松羅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7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타 지도 아래쪽에는 높이 21m의 거대한 바위가 바닷가에 솟아있는 釣鯨臺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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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계군은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적중면·청덕면·쌍책면·덕곡면, 율곡면의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 대양면의 백암리·오산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초계면 초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뒤쪽의 淸溪山이다. 하천은 크기를 구별하기 어렵게 그렸다. 읍치 위쪽이 지도에는 ‘黃芚江’으로 되어 있는데,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다. 오른쪽의 낙동강은 위쪽에는 ‘開山江下流’라고 적혀 있는 곳이 본류에 해당된다. 당시에는 고령과 맞닿아 있는 낙동강을 開山江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高靈界’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을 의미한다. 낙동강 변에는 몇 개의 津이 보이고 있는데, 나루를 가리킴과 동시에 나루가 있는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위쪽의 주기에는 나루가 있는 곳의 하천 폭과 1척의 나룻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읍치가 있는 곳은 ‘펀치볼’이라 불리는 양구의 해안면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이다. 현재 이 분지는 초계면과 적중면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적황색·황색·남색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 봉수는 상호 호응관계를 직선의 적황색 실선으로 표시하였다. 기타 지도에는 2개의 書院이 보이고 있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이기봉)

  •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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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곡부는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지천면·동명면과 가산면의 동쪽 일부, 대구광역시 북구 서쪽에 해당되며, 읍치는 동명면 架山山城 안에 있었다. 칠곡부는 조선 초까지도 성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면서 조선에서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대형 산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에 대형의 산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매우 빠른 시기인 인조 18년(1640)에 架山山城이 만들어졌다. 이 가산산성은 한양-동래를 잇는 大路에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한 최고의 關防處로 여겨졌다. 所也峴에서 琴湖津으로 연결된 적황색 도로가 바로 이 대로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都護府가 설치되면서 성주로부터 독립된 고을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에서도 읍치가 있는 內城을 비롯하여 북쪽의 中城과 남쪽의 外城 등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산성 안에는 일상적인 성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찰이 2개 보이고 있다. 이 중 외성에 있는 天柱寺에는 軍器·弓·箭(화살)을 보관했던 것으로 여러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향교는 원래 읍치 근처에 입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고을에서는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훨씬 남쪽의 八莒面에 있었다. 읍치가 架山(901m) 주변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八莒面에서의 八莒란 명칭은 칠곡의 古號이며, 후에 이곳으로 읍치를 옮긴다. 현재의 위치는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일대이다. 지도 왼쪽 위에 표시된 泗陽書院은 鄭逑(1543-1620)를 배향하여 효종 2년(1651)에 설립된 서원으로, 현재 지천면 신리에 있었다. 下北面 동쪽에 있는 松林寺에는 통일신라 때 건립한 塼塔 중의 하나로서 보물 189호로 지정된 5층탑이 있다. 기타 지도 왼쪽의 하천은 낙동강 본류이며, 아래쪽은 그 지류인 금호강이다.(이기봉)

  • 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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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현은 지금의 함안군 칠원면·칠서면·칠북면과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동쪽 2리에 있었다’는 靑龍山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龜山面은 창원의 경계를 넘어가 있는 월경지였다. 현재의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조선 초까지 龜山縣이 칠원현의 속현으로 존재했었다. 이 구산현은 본래 省法部曲이었는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되었고 공민왕(1352-1374) 때 칠원현의 속현이 되었다. 이곳에는 칠원현에서 수도인 한양으로 옮겨갈 田稅와 大同米를 보관하던 海倉,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던 龜山鎭, 戰船을 정박시키며 관리하던 船所도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재정의 결핍으로 宮房 및 王室에게 租稅勸을 나누어주었던 屯稅所가 2군데나 보이고 있다. 水晶浦稅所도 같은 유형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는 않다. 읍치에는 石築의 성곽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지도 위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가며, 읍치 왼쪽의 古川은 현재 광노천으로 불리고 있다. 낙동강 변에는 3개의 津이 보이고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津의 폭과 이곳에 4척의 津船(나룻배)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津은 단순히 나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읍치 아래쪽의 德淵書院은 周世鵬(1495-1554)을 배향하여 숙종 2년(1676)에 賜額받았다. 주세붕은 중종 37년(1542) 풍기(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땅에 처음으로 白雲洞書院(지금의 紹修書院)을 세운 사람이다. 기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쪽의 주기에는 5개의 船材封山이 기록되어 있다. 거리를 볼 때 모두 구산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封山은 전선의 선재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것이기 때문에 주로 해안가에 입지하였다.(이기봉)

  • 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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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기군은 지금의 영주시의 풍기읍·봉현면·안정면과 예천군의 상리면·하리면에 해당되며, 읍치는 풍기읍 성내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 개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쪽은 내성천의 지류인 남원천 유역이고, 왼쪽은 역시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상류이다. 두 지역은 고려 말까지 각각 안동의 屬縣인 基川縣과 殷豊縣으로 독립적인 고을이었다.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기천현에 監務를 설치하면서 은풍현을 속현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문종의 태를 殷豊縣 鳴鳳寺 뒷산에  안치하면서 두 현을 합쳐 豊基로 고치고, 郡으로 승격시켰다. 은풍현은 현재의 영주시 상리면과 하리면 일대에 있었는데, 지도 아래쪽의 殷豊倉이라는 명칭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위쪽의 郁陽書院은 이황(1501-1570)과 황준량(1517-1563) 등을 배향하여 현종 3년(1662)에, 아래쪽의 愚谷書院은 풍기군수로 재직한 적이 있던 유운룡(1539-1601) 등을 배향하여 숙종 34년(1708)에 세워졌지만 賜額書院은 아니다.  사찰도 총 4개가 표시되어 있어 불교에 대한 인식도 유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타 죽령 바로 밑의 땅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순흥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죽령이 마치 풍기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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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부는 하동군 하동읍·고전면·양보면·황천면·적량면·악양면·화개면과 북천면의 방화리·사평리·직전리, 진교면의 월운리·관곡리·고이리·백련리·송원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하동읍 읍내리에 있었다. 古縣面에 있는 성곽은 세조 7년(1461)까지 읍치로서 기능했으며, 세종 때 쌓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곳이 읍치로, 뒤쪽의 陽慶山이 고을의 鎭山으로 나온다. 이후 여러 번 읍치를 옮겼으며, 지도에 표시된 읍치는 영조 21년(1745)에 옮겨진 곳이다. 숙종 28년(1702)에는 진주의 화개면·악양면·적량면·진답면 등 4개 면을 편입하여 2년 후에 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화개면·악양면은 고려시대에 진주의 屬縣으로 존재했던 곳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섬진강이 보이고 있는데, 이름이 유래된 蟾津이 읍치 왼쪽 아래에 보이고 있다. 악양면 섬진강가에 있는 ‘賊路要害處’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깎아지른 강가의 절벽이 구례까지 계속 이어지는 곳이다. 적의 침입 시 이 지역에서 북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지도 왼쪽 위에는 지리산(智異山)이, 그 아래쪽에는 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雙磎寺가 가장 유명한데, 문성왕 2년(840)에 眞鑑禪師 慧昭가 만들어 옥천사라 불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와 여러 개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는 船所와 海倉이 표시되어 있다. 선소란 전선을 정박시키는 곳이며, 해창이란 이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한양으로 나르던 곳이다. 선소 위의 待變亭은 전선을 관리하던 곳이다. 그 위쪽에 보이는 統倉은 이 고을에서 統營으로 가는 稅米를 보관하던 곳이다. 戰船의 船材 조달을 위해 국가에서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封山도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내횡면에 있는 永溪書院은 본관이 이 고을이고, 무오사화(1504) 때 종성에 귀양 가서 죽은 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이기봉)

  • 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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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현은 경산시 하양읍, 계전리를 포함한 남쪽의 와촌면, 신상리-봉화리-문천리를 포함한 북쪽의 진량면,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각산동·신서동·동내동 일대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하양읍 금락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의 無落山이다. 고을 한가운데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금호강인데, 위쪽의 주기에는 금호천으로 되어 있다. 읍치 주변에는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던 3壇1廟, 즉 城隍壇·厲壇·社稷壇·文廟(향교의 大成殿)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이 3단1묘는 일반적으로 읍치 주변에 배치되며, 고을 수령의 권위와 그가 거주하는 공간의 위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 성황단과 여단은 고을 백성을 대표한다는 성격을, 사직단과 문묘는 중앙의 임금을 대신한다는 성격을 지닌 제사공간이었다. 지도 왼쪽에는 경산 북면과의 경계가 매우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安心面이 원래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진 安心所의 지역이었는데, 麗末鮮初를 지나며 거리상 가까운 경산이 아니라 좀더 먼 하양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琴湖書院은 許稠(1369-1439)를 배향하여 숙종 10년(1684)에 세워지고, 정조 14년(1790)에 賜額 받았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서원이 未賜額으로 표시되어 있어, 이 지도의 내용이 1790년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조가 이곳에 배향된 이유는 조선 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본관이 河陽이어서, 이 고을의 품격을 대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이기봉)

  •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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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군은 함안군 함안면·여항면·군북면·법수면·가야읍·대산면·산인면과 마산시 진전면의 여양리·고사리·평암리·금암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안면 봉성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남쪽에 있는 餘航山(744m)이다. 읍치에는 石築의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邑治’라는 글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있는데, 읍치의 방향이 서쪽의 산지를 등지고 동쪽을 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이 매우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嶺南地圖≫내의 다른 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표현 방법으로서, 한 사람이 모든 지도를 일률적으로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함안은 신라 법흥왕(514-540) 때 멸망시킨 阿尸良國, 일반적으로 阿羅伽倻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그 흔적으로 읍치 위쪽의 城山만 나오고 있다. 이 성산에는 산성이 남아 있는데,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북쪽, 지금의 가야읍 일대에는 대형고분이 능선 위에 줄을 지어 남아 있다. 지도에는 4개의 서원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 西山書院만이 세조 왕위 찬탈에 반대한 生六臣을 배향하여 숙종 32년(1706)에 세워지고, 경종 3년(1723)에 賜額 받았다. 기타 지도 아래쪽의 比谷面은 높은 산줄기 남쪽에 떨어져 있는데, 현재의 마산시 진전면 북쪽에 해당된다.(이기봉)

  •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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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부는 함양군 함양읍·백전면·병곡면·지곡면·수동면·유림면·휴천면·마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함양읍 상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은 향교 위쪽의 白巖山이다. 읍치에는 둘레 7,035척(약 2,111m)의 대형 읍성이 있었는데, 지도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읍치는 원래 古邑基라 표시된 곳에 있었다. 倭寇의 침입으로 인해 함락 당하자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도 위의 위치로 옮겼다. 읍성 안에는 學士樓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다. 함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인 崔致遠(857-?)이 太守로 부임하여 남긴 치적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㵢溪亭·白沙亭 근처에는 최치원이 제방을 쌓고 숲을 조성하여, 당시의 읍치를 보호하게 했다는 上林과 下林이 있었다. 현재는 상림만이 남아 있고,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학사루도 최치원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고을은 전라도의 운봉·장수와 연결되는 八良嶺(팔량치)·中峙(중고개) 등이 있는 지역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전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古城이 세 개나 표시되어 있다. 서원은 총 5개가 표시되어 있다. 蘫溪書院은 戊午士禍(1498) 때 사망한 鄭汝昌(1450-1504) 등을 배향하여 명종 7년(1552)에 세워지고, 명종 21년(1566)에 사액 받았다. 溏洲書院은 이조판서를 지냈던 盧禛(1518-1578)을 배향하여 선조 14년(1581)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는 賜額書院이 아니다.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沙斤驛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14개의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찰은 당시에 폐사된 것까지도 자세하게 표시하였는데, 이를 통해 민간에서는 불교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있다.(이기봉)

  • 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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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창현은 상주시 이안면·공검면, 금곡리·하갈리를 제외한 함창읍, 은척면 황령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읍치는 함창읍 구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서쪽 경계에 있는 宰岳山이다. 읍치 아래쪽의 利安川은 상주로부터 흘러들어와 串川으로 표시된 현재의 영강(낙동강의 지류)으로 흘러 나간다. 원래 현의 서쪽 5리에 있었다는 利安部曲의 명칭에서 유래하였다. 지도 왼쪽 아래에 ‘咸昌黃嶺寺’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상주의 땅을 넘어가 있는 함창의 越境地지이며, 현재의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에는 恭儉池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로는 ‘공갈못’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제 19대 명종(1170-1197) 때 司錄 최정분이 옛 터에 다시 修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최초의 것은 11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수지가 있는 곳의 물은 모두 상주 땅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함창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함창 사람과 상주 사람 사이에 많은 분쟁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저수지가 축조된 것은 이런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던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공검지는 모두 메워져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공검면 면소재지 부근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못둑’이라는 마을의 지명이 남아 있다. 그 밖에 공검지 위쪽에 표시된 臨湖書院은 사액서원이 아니며, 읍치에 있는 司倉은 관아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관하던 곳이다.(이기봉)

  •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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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군은 합천군 합천읍·가야면·야로면·묘산면과 송림리-봉계리를 포함한 봉산면의 북쪽, 죽죽리를 제외한 용주면, 백암리·오산리를 제외한 대양면, 황강 남쪽과 낙민리 동쪽을 제외한 율곡면, 의령군 궁유면의 평촌리·벽계리·운계리에 해당된다. 읍치는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1리에 있었다는 北山이다. 이 고을은 크게 두 개의 유역권으로 나누어진다. 위쪽이 회천의 상류이며, 아래쪽이 황강유역이다. 회천의 상류에는 조선 초까지 冶爐縣이 屬縣으로 존재했으며, 縣東面의 ‘縣’이 야로현을 의미한다. 기암절벽과 그 위의 정자 및 폭포 등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절벽 길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군사적인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지도에는 2개의 書院과 3개의 祠가 표시되어 있어, 향촌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다. 伊淵書院은 연산군의 무오사화(1504) 때 죽음을 당한 김굉필(1454-1504)과 정여창(1450-1504)을 배향하여 선조 19년(1589)에 세워지고, 현종 1년(1660)에 사액 받았다.  華巖書院은 김굉필과 더불어 제자를 키운 朴紹를 배향하여 효종 4년(1653)에 세워지고, 영조 3년(1727)에 사액 받았다. 나머지 祠는 모두 사액 받지 못했다. 가야산 주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수많은 사찰이 표시되어 있어, 결코 작지 않은 불교의 영향력도 이해할 수 있다. 가야산 밑에는 海印寺와 藏經閣이 약간 좀이 먹어 글씨를 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건립되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장격각에는 몽고의 침입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5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그 옆의 學士臺는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내며, 수많은 설화를 남긴 崔致遠(857-?)의 호를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이기봉)

  • 현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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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풍현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유가면·구지면과 논공읍의 상리 동쪽, 고령군 개진면의 동쪽 옥산리 일대, 우곡면의 동남쪽 답곡리 일대에 있었다. 읍치는 현풍면 부동에 있었다. 읍치 주위에는 고을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3壇1廟 중 城隍壇을 제외한 社壇·厲壇·文廟(향교)가 표시되어 있다. 고을의 동쪽으로는 琵瑟山(1,083m)을 비롯하여 높은 산지가 펼쳐져 있다. 고을의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동서를 오가는 나루(津)가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현풍현의 지도이기 때문에 서쪽의 고령으로부터 흘러와 왕지면에서 합류하는 회천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낙동강 서쪽에 있는 津村面·畓谷面·王旨面은 고령과 산줄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하천에 의해 현풍과 분리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현풍과의 연결성이 더 좋은 지역이다.  지도 아래쪽에 있는 仇之面은 仇知山部曲이 있던 곳으로 현재도 달성군 구지면으로 불리고 있다. 이 부곡은 원래 현재의 밀양에 딸린 곳이었는데, 고려 공양왕(1389-1392) 때 현풍으로 소속을 옮긴 후 面으로 재편되면서 독자적인 성격을 상실하였다. 지도에는 각각 2개의 書院과 祠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쪽의 禮淵書院은 숙종 18년(167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본관이 이 고을 현풍이고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일어난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곽재우(1552-1617)와 안음현감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곽준(?-1594)이 配享되었다. 지도 왼쪽의 道洞書院은 선조 40년(1607)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김종직(1431-1492)의 제자로서 무오사화(1498) 때 유배당하고 갑자사화(1504) 때 처형당한 김굉필(1454-1504)을 배향하였으며, 이후 정구(1543-1620)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중 道洞書院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淸白祠와 松潭祠는 사액서원이 아니다. 비슬산 주변에는 3개의 절이 표시되어 있어, 사찰이 서원 못지않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瑜珈寺는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숙종 25년(1699)과 영조 52년(1776) 등 많은 중창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찰이다.(이기봉)

  • 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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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해군은 포항시 흥해읍과 시내의 우현동·창포동을 포함한 북부, 연일읍의 달전리·자명리·유강리·학전리 일대에 해당된다. 읍치는 흥해읍 성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 왼쪽에 표시된 禱陰山이다. 도음산에는 戰船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船材)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위쪽의 주기에는 이 封山의 둘레가 40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2개의 하천이 표시되어 있다. 아래쪽이 현재의 형산강이고, 위쪽이 곡강천이다. 형산강은 경주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작은 하천에 불과한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곡강천은 지도에 北川과 曲江 2개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하천 이름의 통일화 작업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천의 구간마다 다르게 불렀음을 보여주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北川이란 명칭은 읍치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울러 이 曲江은 신라 때 吐只河라고 불렸으며, 中祀에 東瀆이라 실려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닷가에 있는 烏島도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게 표시되어 있다. 작지만 섬이 거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曲江書院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 출신인 李彦迪(1491-1553)을 배향하여 세워졌지만, 賜額 받지는 못했다. 기타 주기에는 北上面, 지도에는 上北面이라고 표기한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이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