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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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朝鮮地圖 조선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奎16030-v.1-7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7帖, 彩色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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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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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성군은 고성군 간성읍·현내면·거진읍·죽왕면·토성면과 속초시의 영랑호 주변에 해당된다. 읍치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있는 麻耆山이다. 面의 명칭 중 縣內面이 읍치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이곳에 烈山縣이 있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간성군의 성씨 부분에는 열산현에도 독자적인 여러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비록 간성군에 통폐합되었을 지라도 상당한 독자성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도가 작성될 당시에도 縣內面이라는 명칭이 존재하는 것을 통해 볼 때, 열산현의 역사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에는 ‘古烈山’이라고 적혀 있다. 읍치를 포함하고 있었던 面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만, 간성군 중심지에 있었다는 뜻으로 郡內面이라고 불렀다. 해안가에는 많은 潟湖가 보이고 있다. 潟湖란 급경사의 하천에서 운반된 토사가 바닷물의 힘에 밀려 쌓이면서 만들어진 호수를 의미한다. 석호 중 맨 위쪽의 抱津湖는 花津湖에 대한 誤記이다. 이외에도 명칭의 誤記가 더 보이고 있다. 맨 위쪽의 하천인 湖波川은 明波川의, 아래쪽 왼쪽의 彌時波는 彌時岺의 誤記이다. 이밖에 해안가에 표시된 섬(島)은 다른 지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보다 훨씬 크게 과장되어 있다.(이기봉)

  •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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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부는 강원도 강릉시 전체, 평창읍·미탄면을 제외한 평창군, 정선군의 임계면, 홍천군의 내면, 묵호항을 포함한 동해시의 북쪽에 해당된다. 읍치는 강릉 시내 성내동과 용강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大關岺이다. 2장에 그려야 할 정도로 고을의 규모가 매우 크다. 첫째, 신라 九州의 하나인 溟州였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州·小京은 일반적으로 郡縣보다 영역이 넓었다. 둘째,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主縣으로서 많은 屬縣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현 중 상당수가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지만, 連谷縣과 羽溪縣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두 속현의 독자성은 사라지게 되고, 완전히 강릉의 영역으로 변모한다. 지도에는 이 두 현의 흔적이 동해안의 북쪽에 連谷面으로, 남쪽에 羽溪面으로 남아 있다. 현재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양양계로부터 五臺山으로 들어와 대관령을 지나고, 남쪽의 삼척계로 빠져나간다. 백두대간 서쪽의 하천은 모두 한강 유역에 해당된다. 內面 지역에 있는 하천은 모두 내린천으로서, 홍천강에 합류한 후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蓬坪面·芳林面에 있는 하천은 평창강의 상류로서, 평창읍을 지나 영월읍 서쪽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珍富面·道岩面에 있는 하천은 조양강의 상류로서, 정선읍을 지나 영월읍 동쪽에서 남한강이 된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芳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大和面이라고 해야 한다. 둘째, 巨門面은 珍富面의 1개 里에 불과했다. 셋째, 臨溪面은 더 오른쪽의 素來洞 지역에 위치시켜야 한다. 또한 이 부분의 하천은 三陟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오류는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오류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넷째, 구정면이 끝나는 부분(丘井終面)은 高丹驛 부분이고, 고단역 역시 더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동해안에는 작은 하천과 潟湖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백두대간 위의 五臺山은 특별히 강조되어 표시되지 않았으며, 그 아래쪽에는 5대 史庫 중의 하나인 오대산사고가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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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군은 일제시대의 고성군 고성면·외금강면·서면·수동면과 장전읍의 성북리 일부에 해당된다.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고성읍(장전항) 남쪽의 강원도 고성군이다. 읍치는 고성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全城山이다. 지도 왼쪽에 金剛山을 다른 산보다 조금 크게, 그리고 흰색으로 강조하여 표시하였다. 그러나 금강산의 위치가 지도보다는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며, 읍치를 기준으로 정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하천의 표시에서도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첫째, 溫井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더 작아야 한다. 둘째, 南江 중 아래쪽의 揷峙에서 북류하는 부분은 1/3 정도로 작게 표시해야 한다. 셋째, 狗岺에서 남류하는 부분은 3-4배에 이를 정도로 길게 그려야 한다. 금강산에 표시된 圓通은 圓通寺를 의미하며, 新溪寺·鉢淵寺 등과 더불어 유명한 古刹이다. 이러한 사찰이 입지한 지역을 보통 外金剛이라고 하며, 바닷가에 수려한 경치가 펼쳐지는 지역을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있듯이 海金剛이라고 한다. 해금강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三日浦와 七星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七星峯이 특별히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삼일포 오른쪽의 섬 모양은 실제의 지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실재로 읍치 부근은 서쪽의 급경사 하천으로부터 공급된 모래에 의해 유로가 복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읍치 부근도 실재로는 거의 섬에 가깝다. 그 오른쪽에 있는 섬은 여러 가지 모양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松島로 추정되며, 실제보다 훨씬 확대되어 그려져 있다. 해안가 아래쪽의 ‘鳴沙’는 ‘우는 모래’란 뜻으로, 이곳에 발달한 모래언덕(砂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이 모래언덕에서 모래들의 이동이 자주 일어난다. 이 지도에는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잃고, 이 고을로 속하게 된 廢縣의 흔적도 표시되어 있다. 위쪽에 표시된 古豢徦는 환가현의, 아래쪽에 표시된 安昌面은 안창현의 흔적이다. 기타 읍치 왼쪽 방향에 표시된 溫井은 현재도 外金剛溫泉으로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이기봉)

  •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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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일제시대의 김화군 원동면·원남면·원북면·금성면·창도면·통구면에 해당되며, 현재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김화군과 창도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김화군 김화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의 慶坡山이다. 북쪽의 淮陽界로부터 들어와 남쪽의 狼川界로 빠져나가는 것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連松浦·菩提灘으로 표시되어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꼭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물가’라는 뜻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灘’은 우리말 ‘여울’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경사가 급해져 물살이 빨라지는 하천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은 물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浦와 灘은 보통 해당 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동쪽에서 흘러와 북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금성천이라고 부른다. 지도에는 南大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러한 명칭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았다. 하천의 명칭 부여가 읍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며, 일제시대에는 이런 명칭의 하천 중 상당수를 고유한 지역명칭으로 바꾸었다. 面의 이름 중 방향과 관계없는 것이 2개가 나오고 있다. 북쪽의 歧城面은 옛 歧城縣의 명칭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동쪽의 通津縣은 옛 通溝縣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通溝面의 誤記이다. 그 왼쪽의 任南面에서 ‘任’은 ‘任內’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통구현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곳을 보통 ‘任內’라고 하였다. 任南面은 ‘任內인 통구현의 남쪽에 있는 面’이라는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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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서면·근남면·근동면·근북면에 해당되며, 현재는 휴전선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남한 부분은 철원읍에, 북한 부분은 김화군에 속해 있다. 읍치는 남한의 김화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북쪽 방향에 있는 五申山(1,062m)이다. 본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하천은 한탄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강원도의 다른 지도에 비해 이 지도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하천에 대한 명칭의 기록이 아주 자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輿地圖書≫의 각 邑誌 중 金化 부분이 하천에 대해 특별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도에 나오는 모든 하천의 명칭은 ≪輿地圖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도 작성자가 그 기록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읍치왼쪽에 있는 忠烈祠는 병자호란 때 平壤監司로서 이 고을에서 전사한 洪命耉를 배향하여 세운 것이다. 읍치 왼쪽 바로 아래의 붉은색 작은 원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던 銀溪驛을 표시한 것이다. 察訪驛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는 이 지도책의 모든 곳에서 적용되고 있다. 강원도의 다른 고을 지도에 비해 마을(里)의 이름이 매우 적게 표시되어 있다. 二東面에 기록된 水治里는 水泰里의 誤記로 생각된다.(이기봉)

  • 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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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천현은 사내면을 제외한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 해당된다. 낭천현의 명칭은 고종 32년(1895)에 화천군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읍치는 화천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다. 고을의 鎭山은 ‘서쪽 1리에 있었다’는 狌山인데, 고구려 때 이 고을의 명칭이었던 狌川郡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읍치 아래쪽의 株山은 狌山(또는 牲山)의 誤記로 생각된다. 金化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남쪽을 지나고, 春川界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錢浦·西湖浦·大梨津으로 쓰여 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津’은 우리말 ‘나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浦와 津은 단순히 浦口와 나루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지도에는 面의 표시에서 몇 개의 오류가 발생되고 있다. 첫째, 읍치 서북방면에 있는 西上面은 上西面의 誤記이다. 둘째, 읍치 왼쪽에 있는 上北面이라는 명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기록에는 北面이 등장하며, 위치도 縣內面 북쪽에 있어야 한다. 셋째, 읍치 동북방향의 孫內面이란 명칭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지도 작성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東輿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대부분 수정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 기타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몇 개 보이고 있다. 읍치 아래쪽에 있는 것은 居禮里이며, 그 오른쪽에 있는 것은 羅松山이다. 동면 위쪽에 있는 것은 法興山이며, 현내면 왼쪽에 있는 것은 龍神山이다. 읍치 왼쪽에 있는 것은 俗字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읽기 어려운 것으로 北坪이다.(이기봉)

  •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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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는 삼척시·태백시 전체, 평릉동을 포함한 남쪽의 동해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삼척시내 성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葛夜山이다. 지도 왼쪽 중간 부분에 太白山(1,567m)이 보이고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낙동강(지도에는 穿川)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임계천의 상류로서, 정선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동북쪽으로 흘러 읍치 부근에서 바다와 만나는 하천은 五十川이다. 지도에는 五等川이라고 적혀 있으며, 五十川은 울진과의 경계선에 표시되어 있다. 오등천은 지지와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으로서, 오십천을 잘못 비정하면서 만들어진 오류라고 생각된다. 태백산 오른쪽에 표시된 黃池는 실제 크기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다. 낙동강의 根源으로 인정되어,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략 비슷하게 그려져 있지만, 오십천이 더 북쪽 방향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실제와는 반대로 남북보다는 동서의 폭이 더 넓게 되었다. 읍치 왼쪽에는 關東八景의 하나인 竹西樓가 보이고 있으나, 오른쪽 방향에 있었던 三陟(浦)鎭의 모습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여러 기록과 지도를 통해 볼 때, 삼척(포)진이 이 시기에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지도 작성자가 실수로 빼먹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실수는 交柯驛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역은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지도책에서 이러한 驛은 일괄적으로 붉은색 작은 원을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그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통해 볼 때 지도 작성자의 실수라고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바닷가에 있는 섬은 거의 암초 정도에 불과함에도 너무 크게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안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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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협현은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동면,·서면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서북쪽 일부와 이천군 남쪽 일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철원군 철원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萬景山이다. 고을 왼쪽에 보이는 하천은 임진강 본류의 중류 정도에 해당되며, 지도에는 猪仇灘으로 적혀 있다. 읍치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으로, 지도에는 定山灘으로 기록되어 있다. ‘灘’이란 우리말 ‘여울’을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서, 경사가 급해지면서 물살이 빠른 구간을 의미한다. 이런 곳에는 하천의 깊이가 보통 얕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하천에서 灘(여울)에 대한 파악은 아주 자세한 편이며,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읍치 왼쪽 위에 표시된 古城은 초선초기를 대표하는 ≪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輿地圖書≫ 地誌 내용에서 찾을 수가 없으며, 단지 萬景山古城과 南山城만이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海東地圖≫ 안협현의 지도에는 두 山城 이외에 읍치 서쪽에 ‘擧城’이 더 표시되어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는 이 세 개의 山城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기타 面과 중요 마을(里)를 표시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이다.(이기봉)

  •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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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구현은 수입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양구군에 해당되며, 이 범위는 현재 휴전선 이남의 양구군과 거의 비슷하다. 읍치는 양구읍 상리·중리·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飛鳳山이었다. 이 지도는 실제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北面에 있는 하천은 회양계로부터 文登峴·梨嶺 두 방면으로 들어와야 한다. 둘째, 왼쪽 위의 天尾山은 放散面이란 글씨 바로 위의 산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셋째, 천미산 밑의 淮陽界로부터 양구를 관통하여 狼川界로 들어가는 하천은 없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지명의 위치를 잘못 표시하게 만들기도 했다. 方山面은 北面의 위치로 와야 하며, 北面은 松峴 밑으로 와야 한다. 軍糧洞은 북면의 중심 마을로서, 역시 위치가 송현 밑으로 옮겨야 한다.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는 대부분 답습되고 있다. 일부의 교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실제와 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있다. 아래쪽에 南江으로 표시한 것은 소양강을 의미하며, 그 남쪽의 水內村은 현재 인제군 남면의 하수내리·상수내리를 의미한다. 원래 양구에 속했는데, 근래 들어서 인제로 편입되었다. 方山面이란 명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으로 적혀 있는 方山縣으로부터 온 것이다. 속현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른쪽의 亥安面은 고려시대에 亥安所가 있던 곳이다. 원래 고려시대 때 이 지역의 主縣이었던 춘천에 속해 있었으나, 세종 6년(1424)에 이 고을로 이관되었다. 현재도 양구군 해안면으로 편재되어 있으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盆地를 이루고 있다. 沙台洞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을 지칭한다.(이기봉)

  •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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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부는 강원도 양양군과 영랑호 주변을 제외한 속초시에 해당된다. 읍치는 양양읍 군향리·성내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 위쪽 방향에 있는 雪岳山이다. 설악산은 현재 남한에서 가장 화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국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도 제작 당시에는 金剛山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지도에서 금강산이 특별히 부각되어 그려져 있었음에 반해, 이 지도에서 설악산은 아주 평범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지도 아래쪽의 漢川은 현재 남대천이라고 부르고 있다. ‘漢川’은 우리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과 하천을 뜻하는 ‘내’에 대한 한자 표기이기 때문에 ‘大川’과 서로 통용되어 사용된다. 이 고을은 북쪽보다 남쪽의 동서 폭이 더 넓은데, 이 지도에서는 남북이 거의 같게 표시되어 있다. 한천에서 西面 쪽으로 갈라져 나간 지류는 실재로는 九龍岺 부근까지 뻗어있어야 함에도, 아주 짧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시된 이유는 발원지가 오대산 하나로밖에 되어 있지 않는 地誌의 내용을 지도에 그대로 반영하려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해안에는 靑草湖·雙湖·麻浦 등의 潟湖가 표시되어 있다. 이 중 쌍호는 현재 메워져 사라졌으며, 麻浦는 현남면에 포매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에 縣北面·縣南面이란 지명도 눈에 띈다. 이곳에 이런 지명이 남게 된 것은 조선초기까지도 洞山縣이 이 고을의 屬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속현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이 고을의 面里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렇더라도 현남면·현북면이란 명칭을 남기게 된 것은 그만큼 역사적 관성이 컸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읍치에 적혀 있는 驛은 ‘동쪽 5리에 있었다’는 連倉驛으로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은 이 지도책에서 붉은색의 작은 원으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지도에서는 그것이 적용되고 있지 못하다. 조선전기에는 읍치 아래쪽의 祥雲(驛)에 察訪이 파견되어 있었다. 신라의 義湘(625-702)이 만들었다는 洛山寺를 비롯한 사찰의 표시도 자세한 편이다. 낙산사 오른쪽의 義均臺는 義相臺의 誤記로 보인다. 기타 읍치 오른쪽에는 東海神에게 제사지내던 東海廟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하다. 이 동해묘는 中祀로 인정받을 정도로 중요한 제사처였으며, 다른 지도에서는 대부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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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부는 주천면과 수주면을 제외한 강원도 영월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영월읍 영흥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으로 표시된 鉢山이다. 현재 읍치를 중심으로 왼쪽의 하천을 西江, 오른쪽을 東江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남한강 본류가 되며, 지도에는 錦障江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명칭이 단일화되기 이전까지는 본류라 할지라도 다양한 명칭을로 불려졌다. 특히 크게는 고을마다, 작게는 마을마다 고유한 명칭을 붙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한강에도 수백 개의 이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동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옥동천으로 부르고 있다. 읍치 오른쪽에서 바로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 석항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평창방면에서 흘러들어옴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梨木里 역시 그 아래쪽 하천가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읍치 왼쪽에 있는 莊陵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즉위 4년 만에 쫓겨난 단종(1441-1457)의 묘이다. 그 왼쪽에 있는 淸冷浦는 단종이 유배당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배지로서는 아주 적당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청량포나 그 위쪽의 北浦는 단순히 浦口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浦’는 우리말 ‘개’에 대한 한자 표기로서, ‘물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浦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浦口였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물가에 있는 포구일 수도 있고, 단순히 물가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명칭은 대부분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읍치 위쪽의 章節祠는 단종에 대한 충신으로 이름난 死六臣과 生六臣 및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영월 戶長 엄흥도 등을 배향하여 숙종 때 세워졌다. 읍치 오른쪽 위쪽에 있는 黃場은 黃腸의 誤記이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황장봉산을 의미한다. 고을 전체의 모습은 일부 단순화되기는 했지만 실제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남동쪽이 실제와 많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는데, 이곳이 경상도의 순흥·영천·안동·봉화 등과 복잡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이기봉)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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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는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편재되어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강원도의 울진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세종 이후 중앙의 통제가 어려운 流民들의 피난처라고 인식하여,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는 空島政策을 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공도정책을 포기하였으며, 공식적으로 이주민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지도에 ‘基址’·‘石葬’ 등으로 적혀 있는 것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可居’는 ‘거주 할만하다’는 뜻으로서, 만약 사람들을 살게 한다면 거주시키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의미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숙종 19년(1693)에는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갔던 동래의 水軍 安龍福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어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후 숙종 23년(1697)에 일본이 쓰시마주를 통하여 울릉도의 조선 영토권을 인정하고,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통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刻石立標·刻板立標는 이 때 세운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竹田(대나무밭)은 울릉도의 특산물을 적어놓은 것으로서, 이 섬이 해류의 영향을 받아 난대림을 형성하는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섬 오른쪽 아래의 船泊이라 적혀 있는 부분은 현재 울릉군의 군청소재지가 자리 잡고 있는 도동항 부근으로 추정된다. 섬의 전체적인 모양은 대부분이 실제와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지만, 中峰으로 표시된 성인봉(983.6m)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하천의 모습은 실제에 가깝다. 기타 주변의 섬에 대한 표시도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재로는 대부분이 돌섬 정도에 불과하다.다만 울릉도 동쪽에 '于山'이라 기록된 섬은 현재의 독도를 가리킨다.(이기봉)

  • 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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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현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근남면·원남면·서면·죽변면·북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울진읍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쪽 방향에 있는 安逸王山이다. 이 지도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와 다른 측면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북쪽에 있는 鼎峙山 위쪽의 하천은 지금의 가곡천으로 모두 삼척의 영역에 있었지만 일부가 울진에 속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둘째, 서쪽의 낙동강 수계가 일부 속해 있으며, 안동계가 서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됨에도 이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셋째, 아래쪽 吉谷으로 뻗은 하천은 지금의 왕피천으로서 영양계 방향에서 흘러 들어옴에도 마치 울진-영양 경계선이 分水界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다. 넷째, 아래쪽의 金莊山과 바로 위쪽의 하천은 서남쪽으로 훨씬 내려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류가 김정호의 ≪東輿圖≫와 ≪大東輿地圖≫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지도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해안가에는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竹邊串이 표시되어 있다. ‘串’이란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육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밖에 고을 서쪽에 표시된 封山은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했던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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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목은 원주시 전체와 영월군의 수주면·주천면, 횡성군의 서원면·강림면, 경기도 여주군의 강천면과 북내면의 동쪽에 해당되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원주 시내 일산동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오른쪽 방향에 있는 雉岳山(1,288m)이었다. 이 고을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첫째, 신라 때 5小京의 하나인 北原京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小京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다른 郡縣보다 더 컸다. 둘째,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도 오른쪽의 酒泉이라 표시된 곳에 있었던 酒泉縣이 屬縣으로 나온다. 이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주천현은 독자성을 잃고 원주목에 완전히 편입되게 된다. 여말선초를 지나면서 독자성을 잃은 部曲·所도 각각 2·3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의 표시가 이중의 사각형 안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된 지역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던 방식이다. 성곽이 있는 경우는 성곽표시를 하였지만, 이 고을에는 없었기 때문에 사각형 모양만 그렸다. 그 아래쪽에는 丹丘驛이 붉은색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이 지도책에서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많은 屬驛을 거느린 경우에 적용되던 방식이다. 하천의 표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남한강 본류는 지도 왼쪽 아래쪽의 서남쪽에서 들어와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읍치 방향에서 나가는 하천은 현재 섬강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에는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蟾岩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섬강은 橫城 동북쪽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실재로는 횡성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함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지도 왼쪽의 金堂川은 현재 곡수천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현재는 여주에 속해 있다. 지도 오른쪽의 加田川·古孫津·公龍灘은 현재 주천강으로, 그 오른쪽의 沙川은 평창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진행되면서 주천·평창 등의 지역 이름이 그대로 하천의 명칭에 반영되었고, 옛날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두 하천이 합류하여 西江이 되고,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 본류와 합류한다. 왼쪽의 남한강 본류 곁에 있는 興原倉은 고려 때 12漕倉의 하나였으며,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원주·영월·평창·정선·횡성의 田稅를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던 水站이 설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수참이 폐지되고, 단지 원주의 大同米와 田稅만을 모아 운반하던 곳으로 변했다. 현재의 위치는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이며, 조선후기에 번성했던 浦口 중의 하나였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일부의 오류가 있지만 고을의 모습이 대략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이기봉)

  •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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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부는 안협면·서면·동면을 제외한 일제시대의 강원도 이천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이천군·판교군·법동군 일대에 걸쳐 있다. 읍치는 이천군 이천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城山이었다. 읍치 오른쪽을 흐르는 하천은 발원지가 함경도의 안변(지금은 강원도 법동군)인 임진강 본류이며, 安峽界 방면으로 빠져나간다. 맨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고미탄천의 최상류인데, 평강을 거쳐 읍치 위쪽의 蛇島 부근에서 합류한다. 읍치 아래쪽에서 深洞里 방면으로도 임진강의 지류가 뻗어있는 것처럼 표시되어 있지만, 실재로 이 고을의 경계를 넘어가는 그러한 지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輿地圖書≫·≪海東地圖≫의 안협현 지도와 ≪大東輿地圖≫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지 있다. 읍치 위쪽 방향에 있는 內山面도 山內面의 誤記이다. 가장 위쪽에 표시된 十未呑面이란 명칭도 기록이나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명칭이다. ≪輿地圖書≫의 안협현 지도에 ‘古味呑’이 2개 적혀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마을(里) 이름이 유난히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지도 중간 부분에는 안변과의 경계선에 防墻峙가 보이고 있는데, 철령·분수령과 함께 함경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요해처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일반적으로 關門(城)이라 불리는 防墻이 설치되어 있었다. 谷山界 아래쪽에는 新溪界라고 표시해야 함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지도 동북쪽 끝에는 ‘陽界’라고만 적혀 있는데, 원래는 安邊界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지도 작성자가 뭔가 잘못 쓴 것을 인식한 후 그대로 놔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타 북창 오른쪽으로 封山이 보이고 있는데,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키우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킨 黃腸封山이다.(이기봉)

  • 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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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제현은 기린면과 상남면을 제외한 강원도 인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인제읍 상동리·합강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2리에 있었다’는 伏龍山이다. 이 지도의 명칭으로 사용된 獜蹄에서의 ‘獜’은 ‘麟’의 속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고을의 정확한 한자 명칭은 麟蹄이다. 북쪽에서 흘러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이다. 지도에는 伊布川·磊灘·彌勒川 등의 명칭이 적혀 있다. 일제초기에 하천 명칭의 단일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하천이라도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읍치 동남쪽에서 소양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요즘 리프팅으로 각광받고 있는 내린천이다. 다만 하천의 표시에서 일부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인제 서쪽에서 소양강 본류가 北流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인제읍에서 거의 西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소양강 상류의 양구로부터 臺岩山 근처로 들어오는 하천이 굵게 표시되어 있어, 마치 본류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실재로는 인제의 북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더 큰 본류이다. 셋째, 내린천 본류가 마치 정남에서 오는 것 같이 되어 있지만 실재로는 동남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는 둘째 오류는 시정되어 있지만 첫째와 셋째 오류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내린천에 있는 古耳屯古縣은 地誌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海東地圖≫인제현 지도에는 耳屯古官基로 나오며, 현재의 기린면 귀둔리를 지칭한다. ‘귀둔’에서 ‘귀’는 뜻을 따고, ‘屯’은 음을 딴 것이다. 추동리와 이탄리(귀둔리)도 같은 수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지도 위쪽의 瑞和面 지역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屬縣인 瑞和縣으로 기록된 곳이다. 屬縣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직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은 책의 古蹟조에 기록될 경우 이미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고을 동쪽으로는 현재 태백산맥으로 불리는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지나간다. 이 백두대간 위에 雪岳山(1,707.9m)이 표시되어 있지만,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다. 일반인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五色岺·彌時岺·珍富岺 등이 남북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封山도 2개나 표시되어 있다.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시켰던 黃腸封山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反昌遷과 왼쪽의 九壯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 기타 중요한 마을(里나 村)의 표시도 아주 자세한 편이다.(이기봉)

  •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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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군은 지금의 신동읍과 임계면을 제외한 정선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정선읍 봉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의 飛鳳山이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현재 영월에서는 동강이라고 부르며, 이곳에서는 조양강이라고 한다. 지도에는 下爾江·桐江·寅灘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상류 쪽에는 餘粮驛이 표시되어 있는데, 餘粮은 우리말 ‘아우라지’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이곳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 처음으로 유래된 ‘아우라지나루’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 왼쪽의 花遷은 우리말 ‘꽃벼루’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여기서 ‘遷’, 즉 ‘벼루’는 절벽에 만들어져 있는 벼랑길을 의미한다. 읍치 오른쪽의 古山城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城隍祠가 있었던 곳으로 나온다. 반면에 18세기 중반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輿地圖書≫에는 城隍壇이 동쪽 1리에 있다고 나와 옮겨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 아래쪽에 표시된 石穴避亂處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벽 위에 있는 동굴로서, 倭를 피해 백성뿐 아니라 관청의 문서까지 피난했던 곳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때의 倭는 麗末鮮初에 극성을 부렸던 倭寇로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에는 왕실의 棺槨用 黃腸木을 배양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伐木을 금했던 黃腸封山도 보이고 있다. 이 지도에는 面이 단지 南面과 西面 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아 혼란을 주고 있다. 실재로는 郡內面·西面·東面·南面·北面 등 5개가 있었다. 또한 고을 전체의 모습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고을 동북쪽은 素來洞(川)과 竹峴川이 갈라지기 훨씬 이전에 강릉과의 경계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오류는 같은 책의 강릉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丹林里로 향한 물줄기도 실재로는 省石村 부근에서 加里王山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이기봉)

  •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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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부는 강원도 철원군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어운면·북면·묘장면과 포천군의 관인면 및 연천군의 신서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40리에 있었다’는 高岩山이다. 읍치 오른쪽의 하천이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본류이며, 지도에는 亭子淵·砌川·串津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이며, 지도에는 馬龍淵으로 표시되어 있다. 모두 용암이 흘러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으로서, 양면이 거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절벽 위쪽으로는 지도 위의 裁松坪·大也坪이라는 명칭이 알려주듯이, 용암대지로 불리는 평지가 넓게 발달해 있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三釜淵이 표시되어 있다. 절벽의 지형이 많기 때문에 瀑布가 많고, 그런 폭포 아래에는 깊은 못이 형성된다. 삼부연에도 높은 폭포가 형성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왼쪽 방면에 있는 孤石亭은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1562)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 위쪽에 표시된 高石亭은 高石城의 誤記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弓裔(?-918)가 摩震·泰封이란 국호를 사용하면서 904년부터 918년까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흔적이 이 지도에도 읍치 위쪽의 弓裔古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郁’은 ‘都’에 대한 誤記로 생각된다. 궁예고도는 둘레 14,421尺(약 4,326m)의 外城과 둘레 1,905尺(약 572m)의 內城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휴전선의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어렵다. 面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마을(洞이나 里)도 자세하게 적혀 있음이 눈에 띈다.(이기봉)

  •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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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부는 춘천시 전체와 화천군의 사내면, 인제군의 기린면·상남면에 해당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춘천 시내 요선동 일대이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아래쪽에 표시된 鳳儀山(또는 鳳山)이다. 이 고을이 크게 된 이유는 신라 때 9주의 하나인 朔州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많은 屬縣을 거느린 主縣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오른쪽에 越境地로 표시된 麒麟面(지도에는 속자로 표시되어 있음)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고을의 屬縣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에 해당된다. 고을 서북쪽의 內面과 史呑面 지역은 史呑鄕이 있었던 지역이며, 현재는 화천군 사내면으로 편재되어 있다. 읍치 오른쪽 위쪽 방향에 표시된 楡谷에는 楡谷部曲이, 그 왼쪽의 枝內山 부근에는 枝內村所가 있었다. 위쪽의 狼川界로부터 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이 북한강 본류이다. 지도에는 毋津江·孔之川·西土川이라고 적혀 있는데, 전통시대에는 하천 구간마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楊口界로부터 들어와 읍치 북쪽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은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昭陽江이다. 이곳에는 조선전기에 소양강창이라는 水站이 설치되어, 춘천·홍천·인제·양구·낭천(현재의 화천)의 田稅를 한양으로 운반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미와 전세의 운반이 각 고을의 책임으로 돌아가면서 춘천의 것만 운반하도록 축소되었다. 읍치 오른쪽에 있는 保安驛은 조선초기에는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되어 29개의 屬驛을 거느렸지만, 지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원주의 丹丘驛으로 찰방이 옮겨간 상태였다. 面과 주요 마을(里·洞·谷)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소양강 위쪽의 機落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한다.(이기봉)

  • 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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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군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고저읍·벽양면,·임남면과 장전항 북쪽의 장전읍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현재의 통천군 구읍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登禾山이다. 이 고을은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1,420호로 나올 정도로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에는 臨道縣·碧山縣·雲岩縣 등 3개가 이 지역에 더 있었다. 모든 지역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지역에서만큼은 고대로 갈수록 縣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할 수 있다. 지도에도 이들 廢縣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2개는 面의 명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을 서쪽으로는 지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白頭大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이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 고을의 바닷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叢石亭은 돌기둥처럼 솟아난 해안가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로서, 關東八景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쪽의 卵島는 한쪽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새들이 많은 알(卵)을 낳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은 松(島)·沙(島)·荒(島)이며, 이 섬들 역시 실제 크기보다 훨씬 크게 묘사되어 있다. 섬의 크기가 잘못 표시된 것은 이 책의 다른 지도에서도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크기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기타 아래쪽에 표시된 瓮遷에서 ‘遷’은 벼랑길을 의미하며, 이곳은 말이 쌍으로 서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고 한다.(이기봉)

  •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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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현은 일제시대의 평강군에 해당되며,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세포군과 평강군 일대이다. 읍치는 평강군 평강읍에 있었다. 하천이 매우 복잡하게 표시되어 있다. 읍치 방향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최상류로서, 지도에는 箭川·末訖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읍치 바로 위쪽의 하천은 임진강의 지류인 평안천이며, 지도에는 赤岩川·城洞水로 나온다. 가장 위쪽의 하천 역시 임진강의 지류인 미탄천이며, 북쪽으로 흘러 안변계로 들어가는 하천은 남대천이다. 이곳에는 分水岺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명은 하천의 分水界 역할을 하는 곳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이곳은 鐵岺과 더불어 함경도로 통하는 요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세 개의 關門을 설치했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추가령구조곡이 지나가는 곳으로서, 서울-원산 사이의 철도가 건설된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내려오던 白頭大幹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백두산의 脈勢가 이곳에 이르러 나누어지고, 두 개의 지맥(支)이 된다.’라고 적혀 있어, 조선초기에도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줄기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이루어진 것은 주로 미탄천에 자리 잡았던 많은 所가 이 고을의 소속으로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新村所(북쪽 59리)·史丁所(북쪽 60리)·楡林所(북쪽 90리)로 나온다. 面과 중요 마을(里)이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도와 비슷하며, 중간 왼쪽의 社倉面은 社倉의 誤記로 생각된다. 필사본 지도이게 때문에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어려운 俗字도 보이고 있다. 사창면 오른쪽의 芦洞에서 ‘芦’는 ‘蘆’의 속자이며, 北倉 밑에 있는 것은 戱靈山이다. 기타 다른 고을과의 경계 표시가 잘못된 것이 보이고 있다. 서쪽에 漣川界라고 쓰여 있는 것은 安峽界로 바꾸어야 한다.(이기봉)

  •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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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은 평창군 평창읍·미탄면과 정선군 신동읍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현재의 평창군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강릉의 땅이었다. 읍치는 평창읍 중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魯山城의 ‘魯山’이었다. 江陵界에서 들어와 原州界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남한강의 지류인 평창강이다. 지도에는 여러 개의 津이 표시되어 있는데, 나루를 지칭함과 동시에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평창강은 이 부근에서 심한 嵌入曲流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지도에서처럼 읍치 서북쪽이 아니라 거의 정 북쪽에서 들어온다. 아래쪽의 하천 역시 남한강의 지류인 동강이다. 旌善界에서 들어와 寧越界로 빠져나가는데, 東面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잘못 표시되어 있다. 이 물줄기는 실재로 寧越界로 바로 들어가 영월읍 동쪽에서 동강과 합류한다. 東面의 방향도 지도에서처럼 읍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정확히 동남쪽 방향에 있다. 동면에 있는 所洞은 현재 신동읍 덕천리에, 鳥洞里 역시 신동읍 조동리에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오류는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똑같이 범해지고 있어, 상호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면처럼 다른 고을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행정경계를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犬牙相入地’라고 불렀다. 즉, 개의 이빨이 다물어졌을 때 서로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는 것과 같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몇 개의 오류가 더 발견된다. 첫째, 平安驛 왼쪽에 있는 栗峙(밤재) 역시 寧越界라는 글씨 쪽에 가까워야 한다. 둘째, 麻池里는 평창강이 原州界로 빠져나가는 위치에 가까워야 한다. 셋째, 味呑面이 2개 적혀 있는데, 왼쪽의 것은 味呑峙(또는 岺)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이 지도가 편집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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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군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후포면·온정면·기성면에 해당된다. 읍치는 평해읍 평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왼쪽에 표시된 釜谷山이었다. 고을의 모습은 남북이 동서의 폭보다 실재로는 넓은데, 지도에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북쪽 울진과의 경계선이 동북 방향으로 더 올라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천의 명칭 표기에서도 약간 의아스러운 점이 발견된다. 읍치 위쪽의 작은 하천 명칭은 적어 넣었음에도, 가장 큰 읍치 아래쪽의 南大川은 표시하지 않았다. 가장 위쪽에 있는 明正川도 正明川의 誤記이다. 읍치 바로 위쪽의 다이아몬드 모양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鎭堡를 표시하는 기호이다. 이곳에는 강원도의 동해안에서 보기 드물게 정4품의 兵馬萬戶가 파견된 越松(浦)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조선초기에는 동해안에 水軍이 파견된 많은 鎭堡가 있었지만, 倭寇의 침입이 거의 없어지면서 대부분 혁파되었다. 월송(포)진에도 조선초기에는 水軍萬戶가 파견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육군 위주인 병마만호로 바뀐 것이다. 지도 위쪽의 望洋亭과 월송(포)진에 있었던 越松亭은 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했던 정자이다. 지도 위쪽에 표시된 書院은 鳴溪書院이다. 선조 때의 관리이자 학자로 알려진 黃應淸·黃汝一 등을 배향하여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으나, 賜額 받지는 못하였다. 기타 고을 왼쪽에는 현재도 백암온천으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溫井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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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현은 지금의 내면을 제외한 강원도 홍천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홍천읍 희망리·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에 1리에 있었다’는 石花山이다. 읍치 남쪽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하천은 현재 홍천강으로 불리운다. 읍치 오른쪽에는 三汀이 표시되어 있다. 두 물이 합하여 삼각형 모양의 모래섬(汀)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하천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 홍천강에는 배가 거의 다니고 있지 않지만, 일제시대까지는 홍천읍 근처까지 水運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을 전체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총 10개의 面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 9개의 읍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면과 함께 표시된 里는 대부분 地誌에서 찾을 수 있는 마을들로, 아마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일부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 西倉이란 명칭이 2개나 적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동쪽에 있는 것은 北倉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필사본 지도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든 俗字도 보이고 있다. 읍치 왼쪽 아래의 釰倚山面에서의 ‘釰’은 ‘劒’자 대신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검’으로 읽어야 한다. 그 오른쪽의 面 이름은 永歸美面이다. 이밖에 인문정보로는 驛院과 寺刹의 표시가 자세한 지도이다.(이기봉)

  • 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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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양부는 일제시대의 강원도 회양군 전체와 양구군 수입면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금강군·창도군·세포군에 걸쳐 있다. 읍치는 회양군 회양읍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북쪽 1리에 있었다’는 義舘嶺이었다. 지도에 보이는 하천은 북한강의 최상류에 해당된다. 북쪽으로는 함경도의 안변과 접해 있는데, 이곳에는 함경도로 통하는 최대 요해처인 鐵嶺(685m)이 있다. 지도에는 鐵岺烽으로만 표시되어 있지만, 이곳에는 원래 關門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關北(함경도)·關東(강원도)이란 명칭이 나왔다는 說도 있다. 철령에서 동남쪽으로 현재 태백산맥이라고 불리는 白頭大幹이 지나간다. 지도 중간 오른쪽에는 金剛山이 金岡山이라고 적혀 있으며, 흰색과 크기로서 다른 산들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아래쪽에는 금강산의 유명한 古刹인 正陽寺와 長安寺도 표시되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內金剛이라 불리고 있다. 이 고을은 넓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2장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굉장히 컸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屬縣 부분에는 和川縣·嵐谷縣·水入縣·長楊縣 등이 적혀 있다. 屬縣으로 적혀 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이 속현들의 독자성은 거의 사라지지만, 화천현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의 이름이 모두 면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각 속현들의 역사성이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 아래쪽의 百入面은 다른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보았을 때 水入面의 誤記이다. 또한 지도 제작 당시에 있었던 府內面·初北面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다. 다만 府內·初北里·初北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面을 생략하여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읍치 오른쪽 방향의 天老只面은 여러 가지 지도와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명칭으로서, 夫老只岺에 대한 誤記로 생략된다. ≪해동지도≫의 회양부 지도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모두 夫老只岺으로 나온다. 이 지역에는 7개의 面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는 8개의 면으로 재편된다. 작은 고을의 경우 조선시대의 面이 일제시대의 그것에 비해 1/3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면이 상당히 크게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고을에 屬縣(4개)이나 廢縣(2개)이 많았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봉)

  • 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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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현은 지금의 서원면과 강림면을 제외한 횡성군에 해당된다. 읍치는 횡성읍 읍상리·읍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북쪽 2리에 있었다’는 馬山이었다. 읍치를 지나 남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여주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섬강의 상류이다. 고을 동쪽에 있는 하천은 주천강의 상류로서, 영월읍 부근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섬강의 경우 지도에는 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隅川面으로 가는 물줄기는 읍치 남쪽에서 갈라지는 것이 맞지만, 甲川面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합류되지는 않는다. 후자는 섬강의 본류로서 읍치 북쪽과 서쪽을 지나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갑천면 북쪽에 있는 鴻豆山과 鼎金山도 檜峴 부근에 기록되어야 한다. 정금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도 서쪽의 北倉 아래쪽으로 흘러와 갑천면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面里의 표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井谷面의 경우 안흥역 부근에 있어야 하며, 晴日面도 갑천면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지도 위쪽에 있는 栗實里는 粟實里의 誤記이며, ‘속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우리말 ‘속실’의 발음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속실리는 청일면에 속해 있었으며, 지도에서처럼 홍천으로 내려가는 물줄기가 아니라 그 남쪽에 있었다. 읍치 위쪽의 松原面은 公根面의 誤記로 보이며, 읍치 오른쪽의 水南面은 隅川面의 1개 마을에 불과한 것을 面으로 착각한 것이다. ≪海東地圖≫와 ≪輿地圖書≫의 횡성 지도에서는 비록 회화식으로 표현했지만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발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지도책이 근본적으로 지방에서 그려 보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여러 읍지를 종합해서 그렸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지와 같은 정보를 중심으로 편집에 의존할 경우 중요한 위치와 거리를 몇 개만 잘못 표시해도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잘못되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大東輿地圖≫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 대부분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이 역시 김정호가 다른 지도보다도 이 책의 지도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이기봉)

  • 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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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곡현은 일제시대의 통천군 답전면과 고저읍 북쪽 일부에 해당되며, 지금은 강원도 통천군 시중대와 총석정 사이의 장대리·송전리·거성리·노상리·보탄리이다. 읍치는 지금의 통천군 송전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위쪽에 표시된 朴山이다. 이 고을에는 18세기 말의 상황을 보여주는 ≪戶口總數≫에 609호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정도의 규모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제시대의 면 1개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하다. 강원도에서 가장 컸던 원주가 같은 책에 8,795호인 것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행정단위가 호구의 수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面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縣內面을 포함하면 총 3개가 있었다. 일제시대의 1개면보다 조금 큰 지역에 3개가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이름 중 踏日面은 踏田面의 誤記이다. 읍치 왼쪽의 侍中臺에 있는 호수는 지도에서처럼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 쪽으로 물길이 열러 있으며, 潟湖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중대는 호숫가의 경치 좋은 절벽을 의미한다. 기타 이 고을에도 작고 경치 좋은 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남쪽의 통천 지도와 달리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이 의아스럽다.(이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