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古地圖
규장각 소장 220여종 6,000매에 달하는 고지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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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地圖 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가람古912.5-J561
  • 간행연도 : [刊年未詳]
  • 책권수 : 1冊(23枚)
  • 판본사항 : 木版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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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木版本 지도책의 하나로서, 총13장의 지도가 ‘(圖形)天下圖-中國圖-日本國圖-琉球國圖-東國八道大總圖-京畿-黃海道-江原道-忠淸道-咸鏡道-全羅道-平安道-咸鏡道’의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책에 수록된 지명으로 제작 연대를 추정해 보면, 우선 효종(1650~1659) 때 인천에서 강화도로 옮겨지는 濟物鎭이 강화도에, 1653년(효종 4)에 남양에서 인천으로 옮기는 永宗鎭이 인천에 표시되어 있다. 황해도 瓮津은 1719년(숙종 45)에 縣에서 府로 승격되는데 <黃海道> 지도에는 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1776년 尼城으로 개칭된 충청도의 尼山이 개칭 전 지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경상도의 安陰과 山陰은 1767년(영조 43)에 山淸과 安義로 바뀌는데, 이들 지명 역시 바뀌기 이전 지명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1676년(숙종 2)에 신설되는 英陽 과 1683년(숙종 9)에 복설된 順興, 그리고 1684년에 신설된 함경도의 茂山이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1630년(인조 8)에 신설된 漆谷과 1637년(인조 15)에 신설된 慈仁은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다. 지도책에 표시된 지명을 정리해보면 본 지도책은 1676년 이전에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상황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지명 변천을 통해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해 볼 때, 본 지도책 또는 그 원본은 1676년을 전후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지도책의 기본적 표현양식 및 내용은 ≪東覽圖≫를 따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큰 차이점이 보인다. 우선 ≪東覽圖≫의 바다는 물결 모양의 水波描로 채워져 있으나, 본 지도의 바다는 민무늬로 하얗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朝鮮全圖에는 ≪東覽圖≫에서 보이지 않았던 註記가 지도 좌우 여백에 기록되어 있으며, 京都를 道名과 구별하여 원으로 표시하고 있다. 京都의 표시 방법 외에도 기호의 사용을 보면, ≪東覽圖≫에서는 각 郡縣名이 세로로 긴 직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지만, 본 지도책에서는 원에 각 郡縣名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道別圖상에 표시된 사각형 내부에는 도 내의 주요 驛道와 해안가 변경의 鎭堡가 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지도의 표현양식이 변화면서 ≪東覽圖≫의 道別圖에는 수록되지 않은 정보들이 본 지도책에는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수록된 인문 정보의 차이이다. ≪東覽圖≫의 도별도에는 기본적인 인문 정보로서 군현과 兵·水營의 명칭과 위치만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본 지도책의 道別圖에는 鎭堡와 驛道가 추가되어 있다. 즉, 『新增東國輿地勝覽』의 附圖로서 제작되었던 ≪東覽圖≫의 경우 이러한 정보는 地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 지도 위에서 바로 파악할 수 없었으나, 본 지도책에서는 이와 같은 정보를 지도상에서 파악 살 수 있다. 그리고 지도의 도곽선 여백 주기에는 각 도에 있는 察訪驛을 포함한 驛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鎭堡와 察訪驛은 군사와 행정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였으며, 당시 민간에서 제작되어 유행하던 지도책에 이와 같은 정보가 표시되어 있음은 이런 정보가 국가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지도 이용자도 알아야 하는 정보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수록된 인문 정보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각 정보를 쉽게 구별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다양한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東覽圖≫의 도별도에는 군현과 兵·水營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세로로 긴 사각형만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본 지도책에서는 郡縣과 統營·兵營·水營은 원으로, 察訪驛과 鎭堡는 긴 사각형으로 구분해 표시하고 있다. 郡縣과 統營·兵營·水營을 같은 기호로 표시하여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統營·兵營·水營의 경우에는 그 명칭으로도 郡縣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교통 정보인 察訪驛과 군사정보인 鎭堡 역시 같은 기호를 사용하고 있으나 察訪驛의 경우 ‘道’라는 글자가 표시되어 있어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세 번째는 각 군현 명칭의 좌우에 군현의 품계를 나타내주는 수령의 관직과 서울로부터의 일정이 병기되어 있다. 서울로부터의 거리를 里가 아닌 日程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 또한 당시 지도 이용자들이 물리적 거리보다는 시간 거리의 관념을 쉽게 이해하고 있으며, 서울까지의 시간 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道別圖의 도곽선 좌우 여백에는 좌도와 우도, 북도와 남도(함경도), 영동과 영서 등으로 나누어 속한 군현 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가장 큰 행정 단위인 道 아래에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좌우도, 남북도, 영동과 영서 등의 구분도 그 당시에 실질적인 기능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東覽圖≫보다 좀더 상세한 지도를 만들려고 한 노력이 보이며, 그 제작 의도 역시 ≪東覽圖≫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도책은 木版本으로 제작되어 민간에서 널리 이용되었던 지도로서, 현재에도 비슷한 유형의 지도가 많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민간 지도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양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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