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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地圖 해동지도

  • 편저자 : [作者未詳]
  • 청구기호 : 古大4709-41-v.1-8
  • 간행연도 : [18世紀(英祖 年間:1724-1776)]
  • 책권수 : 8帖
  • 판본사항 : 筆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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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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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강진군과 완도군 서쪽 섬 지역으로서 읍치는 강진읍 서성리, 동성리, 남성리 일대에 있었다. 강진현은 1417년(태종 17) 道康縣과 耽津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탐진현의 치소가 읍치가 되었고 도강현의 치소에는 兵營이 들어섰다. 강진현의 본래 모습은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이 안쪽으로 쑥 들어온 형태이지만 竹島 위쪽 부분에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월출산 남쪽의 無爲寺는 신라말 도선이 처음 세웠다고 하며, 읍치 남서쪽의 萬德寺도 신라 때 세운 절로서 지금은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白蓮寺로 알려져 있다. 읍치 동북쪽의 兵營은 종2품관인 全羅道兵馬節度使가 파견된 곳으로 지금의 강진읍 병영면에 해당하며, 그 오른쪽의 修仁寺가 있는 산성은고려말 왜구의 침입 때 주변 군현의 사람들이 난리를 피했던 修因山城이다. 지도의 남쪽에는 성이 있었던 加里浦鎭, 馬島眞, 성이 없었던 古今島鎭, 新智島鎭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완도는 신라 때 장보고의 청해진이 세워졌던 곳이고 조선 초에는 완도 밑의 靑山島에도 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금도진 옆의 關王廟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都督으로 파견되었던 陳璘이 세운 것으로 관우, 진린, 鄧子龍 등의 중국인과 이순신이 배향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하게 한다.(이기봉)

  • 고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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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군은 정읍시 고부면, 영원면, 소성면, 덕천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의 백산면, 고창군의 부안면 북부 일대이며 읍치는고부면 고부리에 있었다. 군은 서쪽으로는 고부천이, 동쪽으로는 정읍천이 남북으로 흐르다 동진강을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며, 지세는 남동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지도 왼쪽 밑에 보이는 富安面은 고부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富安鄕이었다.읍치 동쪽의  忠祠는 1632년(인조 10)에 세워졌고 1657년(효종 8)에 사액받은 서원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宋象賢,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申浩 및 金俊등이 배향되었다. 읍치는 동학농민전쟁이 처음으로 발생한 곳으로 남쪽으로부터 뻗어 올라온 산줄기의 서북 기슭에 의지한 성곽과 함께 客舍, 衙舍, 寧民堂, 琴鶴樓, 邑倉 등의 주요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는 전체적으로 읍치가 확대되어 있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강조하여 다른 부분은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기타 다른 지도에 많이 표시되는 역, 원, 절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는 특징이 있다.(이기봉)

  • 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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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구의 황룡강 서쪽 부분을 제외한 광주광역시 전역과 담양군의 대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충장로, 장동, 금남로 1·2가, 광산동, 궁동 일대에 있었다. 지도에는 1601년(선조 34)에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사망한 高敬命과 아들 因厚를 배향한 褒忠祠,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을 배향한 義烈祠, 1646년(인조 24)에 名儒 奇大升과 金長生을 배향한 月峯書院이 보이는데 모두 사액서원으로 호남에서 이름난 양반고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포충사만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읍치 밑에 보이는 景烈祠는 고려말 왜적 침입 때 전공을 세웠으며 위화도 회군에서 태조 이성계를 도운 鄭地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읍성 남쪽에는 신라 때는 小祀를, 고려 때는 國祭를, 조선 초에도 無等山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냈던 고을의 鎭山 無等山이 보이고 아래쪽에 신라 경문왕 때 澈鑒禪師 道允이 세웠다는 證心寺가 登心寺로 표시되어 있다. 더 밑 쪽에는 기둥같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瑞石臺가 그려져 있다. 읍치 서쪽의 景陽驛은 덕기, 가림, 인물, 검부, 창신, 대부 등 여섯 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었다.(이기봉)

  • 괴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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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괴산군은 현재 괴산읍, 칠성면, 불정면, 소수면, 사리면, 문광면, 감물면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괴산군의 읍치는 현재 괴산읍 서부리 일대이었다. 조선시대 객사 터에는 현재 괴산읍사무소, 동헌 터에는 괴산 경찰서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 터는 고려 때 一昇寺란 절이 있었다. 즉, 고려시대의 절터에 행정기관을 지은 셈이다. 부근에 괴산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괴산은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한 달천 유역의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아 인구가 적었다. 괴산군을 관통해서 흐르는 하천이 달천이다. 물이 많으면 괴산읍 동쪽의 槐江과 梨灘까지 배가 소강하여 이들 나루터에서 어염과 곡물 물물교환되었다. 大東地志 倉庫條에 옛날 괴산읍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지도에 없는 柳倉이 있어서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후에 창고를 없앴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 달천의 수심이 점차 낮아져서 창고를 폐한 것일 것이다. 현대 1:50,000 지형도에 감물면 五倉里에 上柳倉과 下柳倉의 지명이 보이는 데 이 곳일 것이다. 지도에 보이는 土溪書院은 위치상 花巖書院으로 보인다. 화암서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졌고, 이 황, 노수신, 김제갑, 유 근을 배향하였다가, 그 후 박세무, 이문건, 허 후, 이신의, 김유형, 박지겸, 허 조 등을 추배하였다.(金在完)

  • 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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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군은 지금의 금산군 금산읍, 금성면, 군북면, 제원면, 부리면, 남일면, 남이면과 무주군 부남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금산읍 아인리 일대였다. 군 서쪽의 여러 계곡에서 발원한 봉황천, 용문천 등의 하천이 모여 군 동쪽의 금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여백 주기의 고적조에 부리폐현이 나오는데 지도에서는 동남쪽의 부북면, 부서면, 부동면, 부남면에 해당한다. 향교 위쪽에 보이는 義 은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700여명이 왜군 수만명과 싸우다 전원이 순국한 후 고경명의 문인들이 시체를 거두어 戰場 남쪽에 장사를지낸 곳이고, 이들을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從容堂과 高霽峯殉節碑도 보인다. 지금은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읍치 서쪽에 보이는 星谷書院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參政이라는 벼슬을 받은 공로가 있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게 만든 金侁 등이 배향되었고 1663년(현종 4)에 사액받았다. 부북면에 보이는 濟原驛은 여백의 주기에도 보이듯이 무주의 所川, 용담의 達溪, 진안의 丹嶺, 고산의 玉包 등 4개역을 관장하는 察訪驛이었으며, 身安寺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오다가 몸을 편히 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절이다.(이기봉)

  • 금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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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현은 남평면, 산포면, 다도면, 봉황면을 제외한 나주시 전체와 광주광역시 황룡강 서쪽, 영암군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일부, 무안군 삼향면, 신안군의 여러 섬에 해당한다. 읍치는 나주시내 서내동, 남내동 일대이다. 보통 羅州牧으로 지칭되었는데 1733년(영조 9)에 금성현으로 강등된 것이 지도 이름에 그대로 기록된 것이다. 나주는 후삼국시대 고려 왕건의 편을 들어 주목받았고 1018년(현종 9) 牧으로 승격되어 수많은 屬縣을 거느렸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도 艅 縣, 安老縣, 伏龍縣, 潘南縣,壓海縣, 長山縣, 榮山縣 등은 나주 관내에 완전히 편입되어 民戶 2만이 넘는 큰 고을이 되었다. 지도 왼쪽의 많은 섬들과 아래쪽의 삼향면은 나주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읍치 위쪽의 錦城堂은 고을의 鎭山인 錦城山에 1277년(충렬왕 3)부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조선에서도 名山이라 하여 小祀로 삼았고, 지도 아래쪽의 南海堂은 中祀를 거행했던 곳이다. 읍치 남쪽의 榮江倉은 조선 초기에 조창을 설치하고 倉城을 쌓아 현재의 전라남도 대부분 군현의 田稅를 모아 서울로 운송하던 곳이었는데 중종 7년(1512)에 법성포로 옮겼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영산강 수운의 중요한 포구로서 번성했던 곳이다.(이기봉)

  • 김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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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시의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교동, 옥산동, 요촌동 일대에 있었다. 김제군은 실제로는 산이 거의 없는 광활한 벌판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지도에는 산들이 수없이 연결되어 그려져 있다. 산이 많은 지역에선 작은 뒷동산이나 둔덕에 불과한 지형이 이곳에서는 山·山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통해 조선시대 자연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고적조에 보이는 平皐廢縣은 지도의 동북쪽에 해당되는데 김제군의 전체적 모양이 지도와 달리 실제로는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길게 누운 형태라는 사실을 통해 두 개의 고을이 합쳐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도의 남쪽에는 ≪三國史記≫에 330년(訖解王 21)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번 개축된 碧骨堤의 모습이 수문과 둑의 형태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지도가 그려진 시대에는 여백의 주기 古蹟조에 적혀 있듯이 이미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모두 논으로 바뀐 상태였다. 현재는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직접 가보면 지도에서의 동서방향과는 달리 남북방향으로 둑이 쌓여져 있다.(이기봉)

  • 남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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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부는 지금의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을 제외한 남원시 전 지역과 장수군의 반암면, 산서면 일대, 임실군의 삼계면, 지사면과 오수면 남쪽부분, 구례군의 산동면과 광의면·용방면 북쪽부분 그리고 곡성군의 고달면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당시 읍치는 남원시내 동충동 일대에 있었다. 남원부는 동쪽과 서쪽으로 백두대간과 그 산줄기의 높은 봉우리에 의해 둘러 쌓여 있지만 북쪽 장수군 반암면에서 발원한 요천이 고을 중심부를 관통하며 넓은 평지를만들고 남쪽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郡名에 보이는 ''帶方''이란 명칭은 ≪三國史記≫에는 나오지 않다가 ≪高麗史≫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 지명으로 이 지도에서는 고을 옛 이름 중 가장 먼저 쓰여 있어 세계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지도에는 ''面''을 ''坊''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읍성 안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7인을 배향한 忠烈祠와 1599년(선조 32) 서문밖에 세워졌던 關王廟가 객사, 아사 등과 함께 그려져 있어 임진왜란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동남쪽 所義坊에는 신라 때 五岳의 하나로 받들어져 中祀를 거행했던 지리산에게 제사지내던 南岳祠가 그려져 있어 산악신앙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이기봉)

  • 동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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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현은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일대로 읍치는 동복면 천변리, 독상리에 있었다. 동복천이 동쪽의 높은 봉우리들로부터 흘러내린 작은 하천들을 아우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 보성강으로 빠져나간다. 동복천 일대는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며 지도에서도 赤璧, 萬瀑臺, 姑蘇臺, 鳳凰臺 등의 기암절벽과 勿染亭, 滄浪亭, 流玉亭 등의 정자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지금은 동복댐이 만들어져 호수가 되었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三韓古城은 지금의 동복면 북쪽 옹성산에 있는 산성으로 사방이 깍아지른 절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으며, 지도가 만들어질 당시까지 석대, 돌기둥 등이 남아 있었다. 읍치 북쪽의 도원서원은 1670년(현종 11)에 만들어지고 1687년(숙종 13)에 사액받았다. 지도 전체적으로는 동쪽의 높은 산줄기와 서쪽의 동복천 물줄기가 실제 지세와 거의 비슷하게 제작되었으며, 현의 진산인 母后山이 동남쪽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여백의 주기는 아주 간략하게 처리되었다.(이기봉)

  • 만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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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김제시 만경읍, 청하면, 공덕면, 성덕면, 진봉면, 광활면과 군산시 옥도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만경읍 만경리에 있었다. 현 전체가 광활한 평지에 있기 때문에 높고 큰 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산들이 봉긋봉긋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현 서쪽의 進鳳山 ·泥波山·加釵山은 실제 높이가 80m도 안 되는 작은 산임에도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어 지도가 만들어진 18세기경의 산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서쪽의 섬들은 현재의 군산시 고군산군도에 해당되며 경상·전라의 漕運船이 통과하는 해로상의 險路였다. 따라서 지금의 선유도에 설치된 古群山鎭 첨사는 일상적인 해양 경비와 함께 조운선의 안전 운항에 관한 보조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과 여러 암초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고 여백 주기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고군산도는 고려 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남송이 된 후에는 양쯔강 하류 항주와 연결되는 중요한 使臣路의 기착지가 되기도 했다. 입석산 뒤쪽으로 烽燧가 표현되어 있고 도로상의 여러 다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이기봉)

  • 무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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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현은 삼향면, 해제면, 망원면, 운남면, 현경면 일부를 제외한 무안군 전체와 목포시, 함평군의 엄다면, 학교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안읍 성내리에 있었다. 영산강이 南流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바다로 들어가며, 북쪽에서 들어온 산줄기가 최남단 목포까지 현의 가운데를 관통한다. 읍치 서쪽의 松林書院은 광해군 때 廢母論을 반대하다 무안으로 유배되어 사망한 金權을 배향하고 있으며 1682년(숙종 8)에 사액받았다. 읍치 서남쪽의 僧達山이 고을의 鎭山인데 고려 때 원나라 중 圓明과 그의 제자 500명이 이곳에 와서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원명이 머물렀던 절이 산 아래의 法泉寺이다. 그 왼쪽의 胎峯에는 단종의 태가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도 아래쪽의 木浦鎭은 종6품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唐串은 충무공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친 후 비축된 군량미를 나주 高下島에 비치하였다가 1647년(인조 25)에 옮긴 곳이다. 駐龍津에는 조선 초까지 龍津溟所라 하여 고을에서 봄·가을로 제사지내던 곳인데 ≪輿地圖書≫와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무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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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현은 고창군 무장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과 아산면의 일부지역으로 읍치는 무장면 성내리, 무장리, 교흥리 일대에 있었다.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읍치 남동쪽의 茂松縣과 서북쪽의 長沙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읍치는 두 현의 중간으로 결정되었다. 현의 실제 모양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비스듬하게 서해를 향하고 있는데 지도에서는 거의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지도의 읍치 동남쪽이 실제로는 바다와접해 있지 않음에도 바다와 접해 있는 것으로, 읍치 동북쪽 부분도 확대·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읍치 위쪽에 있는 禪雲山은 ≪高麗史≫ 樂志에 나오는 禪雲山曲의 무대이며, 높이는 300-400m에 불과하지만 북쪽 곰소만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신령스러운 느낌을 발산하기 때문에 禪雲寺를 비롯한 많은 절들이 곳곳에자리잡고 있다. 읍치 서쪽의 忠賢祠는 1608년(선조 41)에 세워지고 광해군이 친필로 사액한 서원으로 ≪眉岩日記≫로 알려진 柳希春 등이 배향되었다. 기타 읍성과 각종 관아 건물 및 남문밖에 있었던 觀豊亭이 연못과 함께 그려져 있고 烽臺, 靑松驛 등도 보인다.(이기봉)

  • 무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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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부는 지금의 부남면을 제외한 무주군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무주읍 읍내리에 있었다. 무주부는 1391년(공양왕 3) 茂豊縣과 朱溪縣을 합쳐 만들었고, 1414년(태종 14)에 주계를 治所로 삼았는데 무풍현은 지도 동북쪽 풍서면, 풍동면, 풍남면의 지명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도 가운데에는 五大史庫 중의 하나였던 적상산 사고가 적상산성의 天然要塞적 모습과 함께 자세히 그려져 있다. 산성 안에는 왕실의 계보가 안치된 선원각과 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 및 객사가 그려져 있어 史庫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읍치 남쪽에는 加玉洞酒幕이 표시되어 있어 관에서 운영하는 驛院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운영되어 길손의 편의를 돕던 시설도 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기타 읍내에는 향교·객사·아사뿐만 아니라 1706년(숙종 32)에 세운 喚垂亭 등의 정자와 敎場, 주자영당 등이 그려져 있고, 읍의 진산인 향로봉이 향교 뒤에 그려져 있다.(이기봉)

  • 부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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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현은 백산면을 제외한 부안군 전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부안읍 서외리, 동중리 일대에 있었다. 부안현은 1416년(태종 16) 扶寧縣과 保安縣을 합해 만들어졌는데 부령현은 부안 읍치쪽, 보안현은 현 남쪽 입하면, 입상면 일대에 있었다. 현의 서남부는 현재 국립공원인 변산의 우뚝우뚝 솟은 기암절벽 명산들이 잘 그려져 있으며, 신라의 惠丘頭陀가 창건했다는 來蘇寺와 고려 숙종 때 圓鑑國師가 개창했다는 開巖寺 등의 절들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북·서쪽으로는 고부천과 동진강이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낸 저평한 모습이 서남부와 대비되어 이해될 수 있도록 표현되었다. 현의 남쪽에는 종3품 僉使가 파견된 위도진, 종4품 萬戶가 파견된 검모진, 종5품 別將이 파견된 격포진 등이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고, 月古里烽臺, 界火島烽燧 등이 그려져 있어 군사적 요충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격포진에는 내륙으로 쑥 들어온 천혜의 항구 모습이 잘 그려져 있고 안쪽에는 숙종 때 쌓았던 제방 같은 것이 보인다. 이 곳은 일찍부터 입구에 제방을 쌓아 간척된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이며, 기타 왼쪽 위쪽에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되어버린 계화도가 보이고 있다.(이기봉)

  • 영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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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군은 현재의 영광군 전체와 신안군의 임자면·증도면, 무안군의 망운면·운남면과 장성군의 삼계면·삼서면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영광읍 무령리에 있었다. 영광군은 원래 세 개의 현이 합쳐진 것으로 동쪽의 현내면은 고려 때 영광에 속하게 된 森溪廢縣의 땅이고, 읍치 남쪽 동서로 뻗은 하천유역은 신라 碣島縣의 지역이다. 지도 오른쪽 위의 법성진은 영광 굴비로 유명한 곳으로 매년 봄 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바다 위에서 조기를 팔고 사던 波市田이 성황을 이뤘던 곳이며,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와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大西湖라고도 불렸다.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으며, 전라도 12개 고을의 田稅와 大同米를 수집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법성창이라는 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래쪽의 임자진과 다경포진에는 각각 종3품의 水軍僉節制使와 종4품의 萬戶가 파견되었으며, 두 지역 모두 나라에서 말을 키우던 牧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경포진 오른쪽에 나주목 소관이었던 목장이 표시되어 있다. 다경포진과 망운면 지역은 영광군의 월경지로서 지금의 무안군 망운면과 운남면에 해당하며 원래는 望雲部曲이 있던 곳이다. 그밖에 서원과 절, 창, 봉수 등도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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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은 지금의 금정면, 신북면·시종면 북쪽을 제외한 영암군 전체와 해남면의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 그리고 완도군의 보길도 부근 도서에 해당하며, 읍치는 영암읍 동무리, 서남리에있었다. 지도에는 서쪽이 위쪽을 향하고 있는데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보이며, 읍치의 성곽이 확대·과장되어 다른 부분은 상당히 축소되어 그려졌다. 신라 때 小祀에 해당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山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월출산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산 안쪽의 道甲寺는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道詵國師가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했던 절로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도선국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위쪽의 곤일면과 곤이면은 고려 때 영암에 완전히 속하게 된 昆湄縣 지역이며, 읍치 왼쪽의 옥천면, 북평면, 송지면은 각각 冷泉部曲, 北平鄕, 松首鄕이 있었던 지역으로 실제로는 해남현의 땅을 넘어 있는 越境地에 해당한다. 기타 於蘭鎭, 梨津鎭 등이 지도의 왼쪽에 보이며, 그 옆으로 보길도 주변의 섬들이 실지보다 작은 형태로 그려져 있다. 갈두진은 이미 폐지되었으나 주기에 그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이기봉)

  • 옥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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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은 현재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 안남면, 안내면, 군북면, 군서면 등 1읍 5면을 포함하는지역이었다. 읍치는 현재 옥천읍 馬城山(409m) 밑의 교동리에 있었다. 옥천읍의 鎭山은 마성산으로, 전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馬祖神을 제사지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붙었다고 한다. 금강 상류의 지류들이 군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안고, 또 읍내면 지역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옥천에는 봉수대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月伊山烽燧으로 동으로 영동현 박달산에 응하고, 북으로 環山烽燧에 응한다. 다른 하나는 環山烽燧로 서로는 懷德縣 鷄足山 烽燧, 남으로 月伊山 燧에 응한다. 지도에서 보이는 가화역 뒤에 있는 산이 三城山인데,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정상 부근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 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신라 때 국경선이라 하는데 현재 약 1km 쯤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에 옥천향교가 보이는데, 현재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지었으며, 1960년도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재 대성전 이 외에도 향교에 딸린 행랑채와 홍문, 하마비 등이 남아 있다.(金在完)

  • 용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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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현은 지금의 진안군 용담면, 주천면, 동향면, 안천면, 정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용담면 옥거리에 있었다. 금강이 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으나 큰 들이 없고 산과 물 사이에 어우러진 골짜기의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다. 용담현에는 금강으로 흘러드는 큰 하천이 세 개 있는데 지도에 보이는 朱子川, 程子川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輿地圖書≫에 보이는 동면 지역의 顔子川이 그것이다. 또한 읍치 서쪽의 三川書院은 顔子, 程伯子, 程叔子, 朱子와 諸葛亮을 배향한 서원으로 1667년(현종 8)에 세워지고 1679(숙종 5)에 사액받았다. 세 하천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삼천서원이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사실을 볼 때 16-7세기를 지나며 확고해진 유교적 양반사회의 모습이 지도에도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치 서남쪽에 있는 馬山은 실제로는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산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백의 사묘조에 보이는 熊津溟所祠의 산천제사와 관련이 있다.(이기봉)

  • 운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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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봉현은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동면, 아영면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읍치는 운봉읍 동천리, 서천리 일대에 있었다. 서·남쪽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동쪽 남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水系 상으로는 낙동강 유역권에 속하며, 문화적으로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이지대적 성격을 보인다. 또한 남원 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 경상도와도 두터운 산지로 막힌 고원형 지형을 이루고 있어 삼국간 경쟁이 치열했을 때 백제와 신라 사이의 중요한 要衝地였다. 이런 흔적으로 백제와 신라간 중요한 관문이었던 팔량치 등의 險隘를비롯하여 여러 개의 古城터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객사 오른쪽 위쪽에 표시되어 있는 碑殿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을 보호하는 전각이고 선종 9산의 하나로 828년(흥덕왕 3년) 증각대사에 의해 세워진 실상사가 왼쪽 아랫부분에 보이고 있다. 기타 군사적 요충지임을 보여주는 埋伏處가 표시되어 있으며, 제언이 자세하고 산세가 전반적인 지형을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이기봉)

  • 음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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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음성현은 소이면을 제외한 음성읍, 금왕읍, 삼성면, 감곡면, 대소면, 생극면, 맹동면, 원남면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음성읍 읍내리 일대이었다.음성현은 금강 유역과 남한강 유역의 분수계에 자리한다. 음성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진 가엽산(709m)이 鎭山이 된다. 이 산의 정상에는 가엽산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읍치 윗쪽에 위치한 望山은 현대 지형도의 수정산(393m)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산 정상에는 산성터가 남아 있고, 산성의 남쪽에 古邑遺址가 있어 官坪이라 불린다. 수정산 남쪽에 있는 수정사터에서 "新羅景文王五年"이라 적힌 기와를 발견하였다. 관세음보살 입상과 노사나불좌상이 있는데, 좌상은 1968년 윤병준이 발견하여 머리가 잘린 것을 복원하였다. 윗쪽에 보이는 雪城山은 음죽현의 鎭山으로 산성이 있다.(金在完)

  • 임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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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현은 지금의 임실군 임실읍, 성수면, 관촌면, 신덕면, 신평면, 운암면, 강진면, 덕치면, 청웅면, 오수면 북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임실읍 성가리 일대에 있었다. 섬진강 줄기가 동북쪽의 진안으로부터 들어와 여러 지류들을 합하며 현 전체를 휘감고 동남쪽 순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지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읍치는 鎭山인 龍繞山을 비롯한 산줄기와 섬진강 물줄기가 잘 어우러진 풍수상의 명당형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다. 고적조에나오는 구고폐현은 1394년(태조 3)에 편입된 후 읍치 서쪽에 구고면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겨울에는 다리(橋)를 놓고 여름에는 외나무다리( )를 놓았다는 갈담교, 마항교, 오원교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읍 앞쪽의 작은 다리는 廣濟橋이다. 기타 원, 창, 서원, 절 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장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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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현은 지금의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일대로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었다. 지도에서는 금강 최 상류 물줄기가 현의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흐르며 동쪽 백두대간으로부터 여러 물들을 합하는 지형적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조선 초에 장수현에 폐합된 장계현은 임현내면, 임남면, 임북면 등의 지역으로 물줄기와 산줄기에 의해 장수 지역과 구분됨이 지도에서 분명히 보이며, 면 이름에서도 옛 장계현의 땅이었음을 남기고 있다. 현 동쪽에 경상도 안음현과의 경계로 표시된 六十峙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간 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읍치 서북쪽에 있는 蒼溪書院은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며 본관이 장수인 황희와 그 아들 황수신, 기타 유호인, 장응두 등을 배향하고 황희의 영정을 안치한 서원이며, 기타 절, 창, 원, 고개, 제언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백에는 연혁, 고적, 불우 등이 상세히 적혀 있지만 지도에 다르게 표시된 것이 있어 옛 문헌을 베낀 흔적이 보인다.(이기봉)

  • 장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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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장흥군 전체와 보성군의 웅치면, 회천면 그리고 완도군의 동쪽 섬들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흥읍 남동리, 동동리 일대에 있었다. 지도 위쪽의 장서면과 장동면은 長澤폐현의 땅이었고, 오른쪽의 회령면은 會寧폐현의 흔적이다. 고을의 읍치는 원래 遂寧폐현의 자리였으며, 古長興은 天冠山 근처에 있었다. 탐진강이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읍치를 감아 돌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실제와 비슷하게 잘 그려져 있다. 동북쪽의 물줄기는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의 상류이다. 지도 위쪽의  林寺는 860년(헌안왕 4)에 普照禪師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九山門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국보 44호 삼층석탑과 보물 158호 普照禪師彰聖塔碑 등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지도 아래쪽의 천관산은 해안가에 우뚝 솟은 험한 산으로 고을에서는 神祠를 두어 봄·가을로 제사지냈고, 산밑에는 신라 때 만들어진 天冠寺가 보인다. 읍치 오른쪽의 碧沙驛은 9개의 屬驛을 가진 察訪驛이었으며, 지도 아래 해안가에는 정4품 水軍萬戶가 파견된 會寧鎭이 보이고 있다. 기타 7개의 서원과 사당이 표시되어 있어 임란 이후 향촌사회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이기봉)

  •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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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전라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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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는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및 충청남도 금산군에 해당하며, 관찰사 소재지인 감영은 전주에 있었다. 지도에는 전라도에 속한 57개 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25개의 鎭과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던 右水營, 여수시 시내에 있었던 左水營, 강진군 병영면에 있었던 兵營이 보이고 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靑岩, 景陽, 獒樹, 碧沙는 여러개의 屬驛을 거느린 察訪驛이다. 지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각 지역의 山城인데 이들 산성은 조선 초까지는 거의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郡縣의 집단적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修築한 곳이다. 하천은 맨 위쪽에 금강하류, 금강상류가 충청도 부분이 절단된 채 표시되어 있으며,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비교적 실제 모양에 맞게 잘 그려져 있다. 산의 표현은 계속적으로 이어진 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지도 오른쪽의 백두대간으로부터 전지역이 거의 연결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강의 유역권을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산의 크기는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이 평지인지, 산지인지가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 섬은 크고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면 섬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 수 있도록 표현하여 섬의 존재유무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이기봉)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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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제주삼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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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지도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었음이 눈에 띈다. 白鹿潭은 여전히 부각되어 있으나 가운데의 우뚝 솟아 동서로 걸쳐 있는 한라산의 모습이 강조되고 기타 오름은 작은 크기로 표현되었다. 한라산 산간 중턱에 있는 여러 목장이 울타리가 쳐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果樹園의 표시도 자세하다. 앞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읍성이 굴곡의 모양까지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특히 제주 읍성 안에는 여러 관아시설을 상세하게 표현하였다.이런 건물 중 김상헌·송시열을 비롯하여 제주에 귀양왔던 여러 사람을 배향하고 1682년(숙종 8)에 賜額받은 제주 유일의 橘林書院도 보인다. 읍성 위쪽으로는 제주 탐라국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나왔다는 三姓穴이 毛興穴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 三姓에게 제사지내던 三姓壇의 모습도 보인다. 그 위쪽으로는 한라산의 護國神에게 제사지내던 廣壤壇이 있다. 해안가에는 대규모의병력이 상륙할 수 있는 지점에 성을 쌓아 병졸을 주둔시키던 防護所를 자세히 그렸는데, 제주 읍성 왼쪽의 朝天館은 제주도에서 본토로 떠나는 배들이 출발하던 곳으로서 배의 모습을 그려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기타 烈女門 2개, 孝子門 1개가 특별히 표시되어 있음이 특이하고 涯月所 위쪽으로는 고려 때 몽고에게 항복하기를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三別抄의 고성이 표시되어 있다.(이기봉)

  • 제주삼현도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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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목은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이며 읍치는 제주시 삼도동 일대에 있었다. 대정현은 지금의남제주군 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 서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대정읍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일대에 있었다. 정의현은 남제주군 성산읍·표선면·남원읍·서귀포시 동쪽에 해당하며 읍치는 표선면 성읍리에 있었다.지도의 아래쪽에는 전라도 남해안의여러 고을, 오른쪽에는 중국 북부해안이 표시되어 있고, 위쪽에는 중국 남부해안 및 현재의 베트남인 安南國과 오끼나와인 琉球國, 일본의 一岐島 등이, 오른쪽에는 일본 본토와 對馬島가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고을의 鎭山인 한라산의 白鹿潭이 강조되어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음이 눈에 뜨이고, 거대한 무덤처럼 수없이 솟아있는 寄生火山 오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들이 해안가로 줄지어 내려가는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런 하천은 화산 폭발에 의한 多孔質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乾川이 대부분이다. 한라산을 둘러싸고 一所부터 十所까지 노란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는 곳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서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해안가에도 여러 개의 馬場이 보이고 있다. 기타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에 수많은 烽臺가 만들어져 해안 감시를 맡게 하였으며 古縣과 각종 마을 이름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이기봉)

  • 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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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진도군 일대로서 읍치는 진도읍 성내리에 있었다. 읍성위쪽의 고군내면 古城基가 옛 진도의 중심지였고, 지도상의 읍치는 嘉興폐현 자리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아래쪽 임회면은 臨淮폐현의 흔적이다. 지도 위쪽의 命山面은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일대, 오른쪽의 三寸面은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일대의 越境地이다. 碧波亭은 고려 때 만든 정자로서 진도에서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三枝院으로 건너가는 요충지에 지어졌으며, 그 왼쪽의 綠津은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해남현의 右水營과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읍치 남쪽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목재를 조성하기 위해 벌채를 금지한 封山이 4개나 보이고 있다. 지도 서남쪽 끝의 智力山에는 조선 초에 목장이 설치되고 監牧官이 파견되어 진도 내의 南桃浦, 尖察山, 富智山의 屬場을 거느렸으나 감목관은 나중에 해남의 黃原場으로 옮겨갔다. 지도 아래쪽에는 각각 정4품 萬戶가 파견된 金甲鎭과 南桃鎭이 그려져 있고, 그 사이에 沙仇味烟臺, 上堂串烟臺, 屈浦烟臺가 연속적으로 보이고 있는데 1622년(광해군 14) 감시가 어려운 곳에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읍치에는 鎭山인 望敵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좌우로 감싸고 있고 內南山·外南山이 설정되어 있어 풍수적 관념이 충실하게투영되고 있다.(이기봉)

  • 진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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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진산면 읍내리 일대이다. 남쪽의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물들이 모여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데 큰 들이 없는 산골 작은 고을로서, 지도에서도 산줄기와 물줄기를 서로 뒤엉키게 그려내어 산골 고을의 특징을 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의 가운데에 보이는 하천은 대전광역시 시내 한 복판을 흘러 갑천으로 들어가는 유등천의 상류이다. 읍치 서쪽에는 이 고을 鎭山인 大芚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특별히 강조되어 있지는 않고, 실제 높이로는 대둔산보다 더 낮은 읍내 뒷산 五臺山이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 天庇山 밑에는 태조 이성계의 태를 묻은 곳임이 표시되어 있는데 풍수적으로 산줄기가 겹겹이 중첩된 최고의 명당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입지의 탁월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재의 위치는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태봉촌 뒷산이다.(이기봉)

  • 진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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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현은 지금의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 부귀면, 마령면, 성수면, 백운면에 해당하고 읍치는 진안읍 군상리 일대에 있었다. 진안현은 서쪽 전주로부터 熊峙(곰치재) 등의 험한 고개를 오른 후부터 평탄해지는 고원형 지형이고 남서쪽으로는 섬진강, 동북쪽으로는 금강상류 진안천이 마이산을 중심으로 갈라지며 두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다. 고적조에 1413년(태종 13)에 來屬한 것으로 나오는 馬靈폐현은 지도 왼쪽 아랫부분의 馬靈面 일대로서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두 현의 규모와 경계선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읍치 남쪽에 있는 마이산은 거대한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이감을 일으키게 하는 명산이다. 신라 에서도 西多山이라부르며 小祀를 거행했다 하며, 태종이 南行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馬耳山이란 이름을 내렸다 한다. 전체적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조합을 통해 지역적 특징을 쉽게 볼 수 있게 했으며, 기타 절, 역, 원 등도 자세히 표시하고 있다.(이기봉)

  • 태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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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현은 지금의 정읍시 태인면, 신태인읍, 감곡면, 산내면, 산외면, 옹동면, 칠보면에 해당하며 읍치는 태인면 태성리에 있었다. 태인현은 1409년(태종 9) 太山郡과 仁義縣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읍치는 두 고을의 중간에 해당하는 居山驛으로 정해졌다. 지도에서 태산군은 읍치 동쪽의 古縣面으로, 인의현은 읍치 서쪽의 仁義谷面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읍치 동남쪽에 있는 武城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賜額받았고 통일신라 때 이곳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을 배향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은 사적 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 밖의 모충사, 용계서원, 남고서원 등은 모두 1868년 훼철되었다. 지도는 풍수적 사고를 충실히 따르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읍치가 과장되어 있으며, 산줄기가 백두대간으로부터 이 고을로 들어오는 동쪽 방향이 지도의 위쪽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고을의 실제 지형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다. 따라서 이 고을 동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를 통해 서해로 들어간다. 전라도 대부분의 지도에 수록된 驛院이 여백 주기에만 표시되어 있고 지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이기봉)

  • 함평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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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다면, 학교면을 제외한 함평군 전 지역과 무안군 해제면, 현경면 일부에 해당하며 읍치는 함평읍 기각리에 있었다. 함평현은 1409년(태종 9) 咸豊縣과 牟平縣이 합해져 만들어졌는데 현 중심의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동쪽의 고막원천 유역은 모평, 서쪽의 함평천 유역은 함풍의 땅이었다. 지도 왼쪽부분의 해제면과 다경면은 함평현의 越境地로서 원래는 해제현과 다경부곡이었고 읍치 왼쪽의 영풍면은 영풍향이 면으로 편제된 곳이다. 지도 왼쪽에는 臨淄鎭이 성곽, 건물, 전선과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종3품인 全羅右道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던 곳으로 黔毛浦,법성포, 다경포, 목포, 於蘭浦,군산포, 南桃浦, 金甲島 등을 관할하였다. 鎭 오른쪽에 해제봉대, 아래쪽에 옹산봉대가 함께 그려져 있어 군사적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는 대체적으로 간결하며 여백의 주기도 중요한 몇 개를 제외하고는 싣지 않고 있다.(이기봉)

  • 해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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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현은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송지면을 제외한 지금의 해남군에 해당하며, 읍치는 해남읍성내리에 있었다. 지도 왼쪽의 황원면은 黃原폐현, 그 위쪽의 산일면과 산이면은 竹山폐현의 흔적이다. 해남현은 원래 지도 아래쪽의 현산면에 있었는데 1412년(태종 12) 玉山폐현의 땅으로 읍치를 옮기었다. 지도 왼쪽의 우수영은 지금의 화원반도 문내면 서상리, 동외리 일대에 있었으며, 正二品 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파견되어 전라도 서쪽 12개의 고을과 18개의 鎭을 관할하던 곳이다. 성 오른쪽엔 忠武公 이순신의 勝捷碑 비각이 표시되어 있고, 우수영과 외부와의 육로 차단 구실을 했던 外城과 轅門도 보인다. 우수영 아래쪽에 보이는 鳴洋은 진도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커서 ''울돌목''이라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이 12척의 적은 배로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33척의 倭船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우수영 위쪽의 牧場은 黃原場으로서 종6품의 監牧官이 파견되었고 지금의 화원면 청룡리에 있었다. 읍치 남쪽의 館頭烽臺 밑은 제주도를 왕래하던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다. 읍치는 고을 鎭山인 金剛山으로부터 뻗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 쌓인 풍수적 형국으로 그려져 있는데 실제 지형도 이와 비슷하다.(이기봉)

  • 화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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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현은 지금의 화순군 화순읍, 동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화순읍 교리, 향청리, 광덕리 일대에 있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의 작은 고을로서 사방의 산에서 쏟아져 내린 물들이 화순천으로 모이고 고을 중심부를 지나 서남쪽 영산강으로 들어간다. 지도에서는 고을 鎭山인 羅漢山이 읍치 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강조되어 있는 점, 좌우로 겹겹이 뻗어 내린 산줄기, 그 사이사이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 읍치를 빙 돌아 내려가는 모습을 통해 풍수적 명당 관념을 지도로 형상화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는 외부로부터 이 고을로 脈勢가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지도 맨 윗부분에 광주의 서석산이 그려져 있고, 읍치가 매우 확대·과장되어 있다.그 밖의 지역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여백의 주기 부분도 가장 기초적인 내용만 실려있는 아주 간소한 지도이다. 읍치 남쪽 加林驛의 건물과 색이 눈에 띄게 그려져 있음이 특이하다.(이기봉)

  • 회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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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인현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과 회남면을 포함하는 좁은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인은 보은에 병합되었다. 회인 구읍은 현재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 있었다. 지금도 ''향교말'' 지명이 남아 있다. 산줄기가 읍치를 겹겹히 싸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형승조에 ''거듭된 묏부리가 겹겹의 고개 멀리 서로 연했고, 길은 羊의 창자처럼 둘리었으니 馬이 나아가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회인현의 산세를 입증하는 것이다. 회인 고을의 진산은 읍치 서쪽 2리에 있는 何磨山이다. 읍치 남쪽에 위치한 虎岾山城은 돌로 쌓은 성이었는데, 지금은 없다. 우측에 보이는 麻田庵은 세종대왕이 이 곳 절에 와서 비에 젖은 옷을 빨아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암자이다. 읍치 아래쪽에 보이는 玉女峰은 山形이 풍수형국 상 玉女彈琴形이라 한다. 읍치 동쪽에 있는  壇은 못된 돌림병을 퍼뜨리는 惡鬼를 慰撫하고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의 神인 社와 곡식의 神인 稷에 대하여 제사지내는 壇이다.(金在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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