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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명 | 金昌洙 등이 鴟河浦에서 일본인 土田을 살해한 사건과 일본인 蛭子가 행방불명된 사건에 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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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4월 19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3월 초 黃州 趙應斗의 배를 타고 安岳郡 安谷三所坊 鴟河浦에 도착한 일본인 1명을 龍岡에서 온 金昌洙 등 4명이 義兵을 자칭하면서 살해하여 강에 던진 후 일본인이 갖고 있던 75兩으로 驪子를 마련하고 나머지 800兩을 浦主人 李化甫에게 맡긴 채 海州로 달아났는데‚ 김창수는 海州의 靑山‚ 白雲 등지에서 八峰接主로 활약하는 자로 全羅道 東學魁首 金亨振‚ 안악군 大德坊에 사는 崔昌祚 등과 함께 용강에서 치하포로 건너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平壤府 日本警察官所의 巡檢과 兵丁이 치하포에 도착하여 洞民 3인과 浦主人의 妻와 살해당한 일본인이 승선했던 배의 승객 2인과 坊隸 1인을 경찰서로 捉去하여 조사하고 있음. 海州府 巡檢 金光明의 보고에 따르면 살해당한 일본인은 土田이라는 자로 황주로부터 三和鎭 南浦에 갔다가 치하포에서 변을 당했다고 하는데‚ 아직 김창수 등을 체포하지 못했으며 일본인 蛭子가 下落한 곳에 대한 조사는 그 배의 모양‚ 물품 등을 沿海 各郡에 訓飭하고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내용. |
검색어 | 安岳郡守 柳冀大 |
건명 | 金昌洙 등이 鴟河浦에서 일본인 土田을 살해한 사건의 수사에 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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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6월 18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일본측에서 長崎縣 平民 土田讓亮이 龍岡人 林學吉과 함께 黃州로부터 鎭南浦를 거쳐 仁川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주 十二浦에서 배를 빌려 大同江을 따라 내려오다가 3월 8일 밤을 치하포에서 지내고 9일 오전 3시 경 출발하려다가 그 旅宿의 韓客 4‚ 5명에게 타살당하였으며 피신한 林哥는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平原警部에게 보고하였으며 警部가 巡査 2명과 巡檢 5명을 인솔하여 15일에 치하포에 도착하여 혐의자 7명을 잡아 심문했으나 모두 作害者가 아니라 하니 속히 범인을 체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또한 平原警部가 海州府 巡檢 4인을 대동하고 6월 18일 다시 안악군으로 출발했으므로 각 군에 범인 체포에 노력하라는 訓飭을 내려보냈다는 내용. |
검색어 | 平壤府觀察使署理 平壤府 參書官 崔錫敏‚ 法部‚ 金昌洙‚ 金亨振‚ 崔昌祚‚ 李化甫. |
건명 | 鴟河浦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범인 金昌洙를 잡았으나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李化甫는 平原警部가 체포해 仁川으로 捉去했으며 김창수가 東徒로서 錢穀을 약탈한 사실은 自服하여 이와 관련된 供案을 上送하며 아직 공범인 金亨振과 崔昌祚는 체포하지 못했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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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6월 28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부속문서 | 海州白雲面居金昌洙供案 김창수는 1893년 東徒에 들어가 八峯接主로서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도처에서 약탈을 한 바 1894년 12월 文化 東山坪에서 일본인이 積置한 大米 150石을 빼앗아 40石은 都中에서 日用하고 110石은 文化接主 李東燁에게 건네주었고 海州 檢丹坊道洛只 朴泓錫이 積置한 正租 200石을 탈취하여 松禾接主 方元仲과 分食하였으며 石潭 李參判家에서 錢 250兩을 討索하기도 했으며 斷髮令이 반포되었을 때는 의병을 일으켜 金亨振‚ 崔昌祚와 함께 海州 檢丹坊 靑龍寺에 유숙하다가 돌아왔는데 鴟河浦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의 진술임(1896년 6월 27일). |
건명 | 日本人 蛭子音三郞이 下落한 곳에 대한 査探 관련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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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7월 23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日本人 蛭子音三郞이 탔던 배의 모양‚ 물품 등을 연해 각 군에 통보하였더니 康翎郡守 卞鼎相이 음력으로 1895년 10월에 강령군 峨嵋坊一里 九月浦와 銀皮浦 간에서 표류하는 배를 발견했다며 그 물품 목록을 보내어 이를 5월 24일 자로 보고하였으나 회답이 없고‚ 또 外部에서 1895년 11월호 貿米를 위해 鄭海州 등과 長淵으로 출발한 山口縣 熊屯郡 麻里府村 출신 蛭子音三郞이 3‚ 4달 정도 소식이 없어 下落한 곳을 모른다고 하여 日本公使의 요청으로 海州府에 보고하라는 指令을 내렸으나 회답이 없고‚ 그 형인 蛭子治三郞 및 西田喜作 2인이 黃海道 九月이라는 곳에서 그 배를 발견했다며 仁川港 日本領事館 事務代理 萩原守一에게 보고하여 시급한 조사를 요청했으나 전혀 보고가 없어 그 形止를 조사하니‚ 지난 5월 29일 밤 長端郡 作廳의 화재로 海州府 報告書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하므로 康翎郡에서 보낸 물품내역을 다시 上送하고 蛭子音三郞의 배가 표류한 사건에 관해서는 해당 郡에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는 내용. |
부속문서 | 別紙 康翎郡에서 발견된 배에서 수거한 물품 내역서. |
건명 | 일본인 蛭子音三郞이 下落한 곳에 대한 査探 관련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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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8월 6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康翎郡守 卞鼎相의 報告에 따르면 康翎郡 峨嵋坊 九月浦에 표류하던 선박을 仁川府 巡檢 車健洪‚ 日本領事館 巡査 宮原佐一郞‚ 日人 池田辰之助 등 4명이 찾아와 蛭子音三郞의 배라고 주장하며 가져가겠다고 하여 內部와 外部의 公文을 받아 올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 |
건명 | 康翎郡守 卞鼎相이 康翎郡 九月浦에 표류중인 日本人 蛭子音三郞의 船隻과 什物을 日本領事代理 荻原守一이 內部의 출급허락을 받은 뒤 仁川府 訓令을 대동하여 보내 온 蛭子治三郞에게 넘겨주었다고 알려왔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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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6년 8월 26일 |
수신자 | 外部大臣 李完用 |
건명 | 東徒들이 西敎를 자칭하며 平民을 脅勒하고 官令을 거역하고 있으니 歐西 各國 公使에게 만일 西學이라는 이름을 자칭하면서 國課를 犯하는 자는 嚴懲하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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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6년 12월 7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건명 | 耶蘇敎人을 仮託한 사건을 처리한 내용에 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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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3월 28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주요내용 | 美國公使 施逸이 黃海道 平山 등지에서 사람들이 耶蘇敎人을 藉托하는 폐해가 있는데 麒麟에 거주하는 朴永義 및 崔獨秀는 서양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元杜尤에게 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장원식의 家兄인 張周植이 관에 잡히자 元杜尤의 편지가 있어야 放送한다고 선전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미국인 의사 元杜尤의 보고를 알려 온 바 박영의 및 최독수는 拿獲하였으나 장주식은 감옥에 있으니 그 이유를 조사하여 보고할 예정이며 전에는 東徒에 투입하던 이들이 최근에는 西學에 가탁하여 敎人이라 하고 末流之弊가 심하니 이를 엄히 다스리라고 각 군에 訓飭했다는 내용. |
건명 | 平山郡守 任麒鎬의 報告에 따르면 朴永義‚ 崔獨秀는 白川郡 耶蘇敎 中에서 숨어 있다가 도주하였고‚ 張周植은 본명이 張在元으로 朴元得과 함께 洋學을 仮稱하여 체포하였으나 장재원은 2월 28일 도주하였다고 하니 박영의와 최독수를 속히 체포하도록 하겠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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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4월 19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검색어 | 美國公使 施逸‚ 元杜尤. |
건명 | 信川郡 斗羅坊 淸溪洞에 사는 安泰勳이 西敎를 藉托하고 率黨하여 信川邑에 돌입하여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두고 洋師를 유인하여 行悖作梗한 사건에 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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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4월 29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주요내용 | 信川郡守 南孝源의 報告에 따르면 安泰勳이 4월 12일 수십명을 이끌고 읍내로 들어와 朴晩菜家에 머물면서 鄕長 柳萬鉉을 유인해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안태훈이 사사로이 每結 上葉 3兩씩의 結錢을 가렴하므로 崔元錫과 柳銀錫을 통해 이를 금하는 令飭을 내렸으나 준수하지 않아 재차 有司인 尹秀謙과 鄭彦國을 가두었으나 이들이 도망을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안태훈은 1894년 甲午匪擾 당시 砲軍 수백명을 私設하여 義兵이라 칭하고 행패를 부렸던 인물로 1896년 겨울에는 서울로부터 西敎冊子를 가져와 西敎라 藉托하고 洋師까지 瞞誘하여 그의 권세를 빌어 官納收捧과 治民 등을 沮戱하면서 郡政을 농락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별도의 방침이 요구된다는 내용. |
검색어 | 柳良秀. |
건명 | 西敎에 藉托하여 작폐를 일으킨 安泰勳의 행적에 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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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5월 14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주요내용 | 信川郡守 南孝源에 따르면 安泰勳은 每結 上葉 3兩式을 분배하고 각 坊에 收刷有司를 差定하여 督捧하므로 이에 有司들을 잡아 가두려 하자 안태훈이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 버렸으며‚ 또한 그는 1894년 甲午匪擾 당시 砲軍 수백명을 私設한 이래 義兵과 西學을 사칭하며 官民을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리던 중 洋敎師와 함께 상경하고 厥兄인 安泰鎭이 砲軍을 이끌고 다시 邑으로 내려와 3兩 加斂條를 督捧하고 있으며 洋敎師는 大法國人으로 이름은 홍석구라는 내용. |
검색어 | 金孝益. |
건명 | 全羅道 木浦와 平安道 鎭南浦를 通商口岸으로 삼아 1897년 10월 1일부터 開辦한다는 사실을 道內 各郡에 알렸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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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7년 7월 23일 |
수신자 | 外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學部大臣 閔種黙. |
건명 | 黍粟豆太 및 禾稻가 旱魃로 파종시기를 놓치고 獰風과 暴雹으로 작황까지 좋지 않아 식량을 생산하기도 부족한 형편인데 외국 상선들이 厚價에 各穀을 사들여 유출하고 있으니 각국에 알려 1898년 햇보리가 성숙할 때까지 외국과의 貿穀을 금지시켜 달라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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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7년 12월 1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式 |
건명 | 金昌洙 등이 鴟河浦에서 일본인 土田을 살해한 사건과 일본인 蛭子가 행방불명된 사건에 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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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4월 19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3월 초 黃州 趙應斗의 배를 타고 安岳郡 安谷三所坊 鴟河浦에 도착한 일본인 1명을 龍岡에서 온 金昌洙 등 4명이 義兵을 자칭하며 살해하여 강에 던진 후 일본인이 갖고 있던 75兩으로 驪子를 마련하고 나머지 800兩을 浦主인 李化甫에게 맡긴 채 海州로 달아났는데‚ 김창수는 海州의 靑山‚ 白雲 등지에서 八峰接主로 활약하는 자로 全羅道 東學魁首 金亨振‚ 안악군 大德坊에 사는 崔昌祚 등과 함께 용강에서 치하포로 건너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平壤府 日本警察官所의 巡檢과 兵丁이 치하포에 도착하여 洞民 3인과 浦主人의 妻와 살해당한 일본인이 승선했던 배의 승객 2인과 坊隸 1인을 경찰서로 捉去하여 조사하고 있으며 海州府 巡檢 金光明의 報告에 따르면 살해당한 일본인은 土田이라는 자로 黃州로부터 三和鎭 南浦에 갔다가 치하포에서 변을 당했다고 하는데 아직 김창수 등을 체포하지 못했으며 일본인 蛭子가 下落한 곳에 대한 조사는 그 배의 모양‚ 물품 등을 沿海 各郡에 訓飭하고 報告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내용. |
검색어 | 安岳郡守 柳冀大. |
건명 | 安岳郡 鴟河浦에서 일본인 土田을 살해한 匪徒 金昌洙를 속히 체포하여 法部로 압송하라는 指令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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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外部大臣 李完用 |
발신일 | 1896년 5월 1일 |
수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건명 | 金昌洙 등이 鴟河浦에서 일본인 土田을 살해한 사건의 수사에 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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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86년 6월 18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일본측에서는 長崎縣 平民 土田讓亮은 龍岡人 林學吉과 함께 黃州로부터 鎭南浦를 거쳐 仁川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주 十二浦에서 배를 빌려 大同江을 따라 내려오면서 3월 8일 밤을 治下浦에서 지내고 9일 오전 3시 경 출발하려다가 그 旅宿의 韓客 4‚5명에게 타살 당하였고 피신한 林哥는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平原警部에게 報告하였으며 警部가 巡査 2명과 巡檢 5명을 인솔하여 15일에 치하포에 도착하여 혐의자 7명을 잡아 심문했으나 모두 作害者가 아니라 하니 속히 범인을 체포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平原警部가 海州府 巡檢 4인을 대동하고 6월 18일 재차 안악군으로 출발했다는 내용. |
검색어 | 平壤府觀察使署理 平壤府 參書官 崔錫敏‚ 法部‚ 金昌洙‚ 金亨振‚ 崔昌祚‚ 李化甫. |
건명 | 各國人護照紙 양식을 改刊하여 下送한다는 訓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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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外部大臣 李完用 |
발신일 | 1896년 7월 3일 |
수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건명 | 鴟河浦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범인 金昌洙를 잡았으나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李化甫는 平原警部가 체포해 仁川으로 捉去했으며 김창수가 東徒로서 錢穀을 약탈한 사실은 自服했으므로 이와 관련된 供案을 上送하며 아직 공범인 金亨振과 崔昌祚는 체포하지 못했다는 報告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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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86년 6월 28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건명 | 金昌洙와의 대질을 위해 日本領事에게 李化甫를 海州府로 압송하도록 요청했으며 김창수는 허다한 悖惡을 저질렀으므로 法部에 報明하여 徵辦한 후 보고하라는 指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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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外部大臣 李完用 |
발신일 | 1896년 7월 9일 |
수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건명 | 日本人 蛭子音三郞이 下落한 곳에 대한 査探 관련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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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7월 23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주요내용 | 日本人 蛭子音三郞이 탔던 배의 모양‚ 물품 등을 연해 각 군에 통보하였더니, 康翎郡守 卞鼎相이 1895년 10월에 康翎郡 峨嵋坊一里 九月浦와 銀皮浦 간에서 표류하는 배를 발견했다며 그 물품 목록을 보내어 이를 5월 24일 자로 보고하였으나 회답이 없고 또 外部에서 1895년 11월에 貿米를 위해 鄭海州 등과 長淵으로 출발한 山口縣 熊屯郡 麻里府村 출신 蛭子音三郞이 3‚4달 정도 소식이 없어 下落한 곳을 모른다고 하여 日本公使의 요청으로 海州府에 보고하라는 指令을 내렸으나 회답이 없고 그 형인 蛭子治三郞 및 西田喜作 2인이 黃海道 九月이라는 곳에서 그 배를 발견했다며 仁川港 日本領事館 事務代理 萩原守一에게 보고하여 시급히 조사를 요청했으나 전혀 보고가 없어 그 形止를 조사하니, 지난 5월 29일 밤 長端郡 作廳의 화재로 海州府 報告書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하므로 康翎郡에서 보낸 물품내역을 다시 上送하고 蛭子音三郞의 배가 표류한 사건에 관해서는 해당군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는 내용. |
부속문서 | 別紙 康翎郡에서 발견된 배에서 수거한 物品의 내역. |
건명 | 康翎郡守 卞鼎相의 보고에 따르면 康翎郡 峨嵋坊 九月浦에 표류하던 선박을 仁川府 巡檢 車健洪‚ 日本領事館 巡査 宮原佐一郞‚ 日人 池田辰之助 등 4명이 찾아와 蛭子音三郞의 배라고 주장하며 가져가겠다고 하여 內部와 外部의 공문을 받아 올 것을 요구했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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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 金孝益 |
발신일 | 1896년 8월 6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건명 | 康翎郡守 卞鼎相이 康翎郡 九月浦에 표류중인 日本人 蛭子音三郞의 船隻과 什物을 日本領事代理 荻原守一이 內部의 출급허락을 받은 뒤 仁川府 訓令을 대동하여 보내 온 蛭子治三郞에게 넘겨주었다고 알려왔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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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6년 8월 26일 |
수신자 | 外部大臣 李完用 |
건명 | 東徒들이 西敎를 자칭하며 平民을 脅勒하고 官令을 거역하고 있으니 歐西 各國 公使에게 만일 西學이라는 이름을 자칭하면서 國課를 범하는 자는 嚴懲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報告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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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6년 12월 7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건명 | 美國公使 施逸이 알려 오길 미국인 의사 元杜尤가 平山 등지에서 耶蘇敎人을 藉托하는 폐해가 있는데 麒麟에 거주하는 朴永義 및 崔獨秀는 서양복장을 하고 다니며 元杜尤에게 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元杜尤를 핑계로 타인의 錢財를 勒奪하는데‚ 그들의 誣告로 잡힌 張周植의 동생 장원식이 찾아와 官에서 元敎師의 편지가 있어야 석방해 줄 수 있다고 하며 하소연한다고 하는데 이처럼 無賴亂類가 敎人을 藉托하고 平民을 침학하는 폐해를 금하도록 각 군에 訓飭하라는 訓令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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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발신일 | 1897년 2월 18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건명 | 訓令 제1호에 의거해 朴永義 및 崔獨秀는 拿獲하겠으며 張周植의 경우는 감옥에 갇힌 이유를 조사하여 보고할 예정이며 전에는 東徒에 투입하던 이들이 최근에는 西學에 가탁하여 敎人이라 하고 末流之弊가 심하니 이를 엄히 다스리라고 각 군에 訓飭했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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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3월 28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검색어 | 美國公使 施逸‚ 元杜尤. |
건명 | 平山郡守 任麒鎬의 보고에 따르면 朴永義‚ 崔獨秀는 白川郡 耶蘇敎 내에 숨어 있다가 도주하였고 張周植은 본명이 張在元으로 朴元得과 함께 洋學을 仮稱하여 체포하였으나 장재원은 2월 28일 도주하였다고 하니 박영의와 최독수를 속히 체포하도록 하겠다는 報告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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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4월 19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검색어 | 美國公使 施逸‚ 元杜尤. |
건명 | 信川郡 斗羅坊 淸溪洞에 사는 安泰勳이 西敎를 藉托하고 率黨하여 信川邑에 돌입하여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두고 洋師를 유인하여 行悖作梗한 사건에 대한 報告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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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4월 29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주요내용 | 信川郡守 南孝源의 보고에 따르면 安泰勳이 4월 12일 수십명을 이끌고 읍내로 들어와 朴晩菜家에 머물면서 鄕長 柳萬鉉을 유인해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안태훈이 사사로이 每結 上葉 3兩씩의 結錢을 가렴하므로 이에 崔元錫과 柳銀錫을 통해 이를 금하는 令飭을 내렸으나 준수하지 않아 재차 有司인 尹秀謙과 鄭彦國를 가두었으나 이들이 도망을 가는 사건이 발생한 바‚ 안태훈은 1894년 甲午匪擾 당시 砲軍 수백명을 私設하여 義兵이라 칭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1896년 겨울에는 서울로부터 西敎冊子를 가져와 西敎라 藉托하고 洋師까지 瞞誘하여 그의 권세를 빌어 官納收捧과 治民 등을 沮戱하면서 郡政을 농락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별도의 방침이 요구된다는 내용. |
검색어 | 柳良秀. |
건명 | 信川郡 斗羅坊 淸溪洞에 사는 安泰勳이 西敎를 藉托하고 率黨하여 信川邑에 돌입하여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두고 洋師를 유인하여 行悖作梗한 사건에 대해서는 우선 안태훈이 砲軍聚會한 根由를 詳探한 뒤 內部‚ 軍部에 보고하여 妥辦하도록 하고 洋敎師의 신상을 소상히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指令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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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발신일 | 1897년 5월 4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건명 | 信川郡 斗羅坊 淸溪洞에 사는 安泰勳이 西敎를 藉托하고 率黨하여 信川邑에 돌입하여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두고 洋師를 瞞誘하여 行悖作梗한 사건에 대한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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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閔泳喆 |
발신일 | 1897년 5월 14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
주요내용 | 信川郡守 南孝源에 따르면 安泰勳은 每結 上葉 3兩式을 분배하고 각 坊에 收刷有司를 差定하여 督捧하므로 이에 有司들이 잡아 가두려 하자 안태훈이 鄕長 柳萬鉉을 잡아 가 버렸으며 또한 그는 1894년 甲午匪擾 당시 砲軍 수백명을 私設한 이래 義兵과 西學을 사칭하며 官民을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리던 중 洋敎師와 함께 상경하고 厥兄인 安泰鎭이 砲軍을 이끌고 다시 邑으로 내려와 3兩 加斂條를 督捧하고 있으며 洋敎師는 大法國人으로 이름은 홍석구라는 내용. |
검색어 | 金孝益. |
건명 | 全羅道 木浦와 平安道 鎭南浦를 通商口岸으로 삼아 1897년 10월 1일부터 開辦하기로 했으니 이를 道內 各郡에 알리라는 訓令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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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議政府參政外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學部大臣 閔種黙 |
발신일 | 1897년 7월 12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건명 | 全羅道 木浦와 平安道 鎭南浦를 通商口岸으로 삼아 1897년 10월 1일부터 開辦한다는 사실을 道內 各郡에 알렸다는 報告書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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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7년 7월 23일 |
수신자 | 外部大臣臨時署理議政府贊政學部大臣 閔種黙 |
건명 | 黍粟豆太 및 禾稻는 旱魃로 파종시기를 놓치고 獰風과 暴雹으로 작황까지 좋지 않아 식량을 생산하기도 부족한 형편인데 외국 상선들이 厚價에 各穀을 사들여 유출하고 있으니 1898년 햇보리가 성숙할 때까지 외국과의 貿穀을 금지시켜 달라는 報告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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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7년 12월 1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式 |
건명 | 海州府에서 京部와 各府郡에 발송하는 공문을 양력 1월 1일로 시작하여 제1호로 塡善했다는 報告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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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7년 12월 31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式 |
건명 | 1897년 11월에 황해도 白川郡에서 朴承成의 주선으로 水蔘을 매득한 일본인 田中作藏‚ 松田爲助‚ 大野松太郞 등을 孫允西와 金春甫‚ 朴景玉‚ 李好石‚ 安國彬 등이 作黨하여 습격한 사건에 대해서는 白川郡守 白命基와 金川郡守 洪鳳觀이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조사한 뒤 작성한 會査結案을 法部와 外部에 보고하니 판결해 달라는 報告 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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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8년 6월 5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稷 |
검색어 | 漢城府裁判所‚ 日本領事 秋月左都夫. |
지령 | 마땅히 法部에서 處辦할 사안임(1898년 6월 11일). |
건명 | 淸人 孫中乳가 黃州의 池昇日에게 맞아 죽은 사건에 관한 初覆檢原文案 1건은 法部에 上送하고 1건은 外部에 上送한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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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8년 6월 7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稷 |
건명 | 金川郡에서 日人 田中作藏를 致死한 범인 孫允西‚ 安國彬 등에 관한 査案과 黃州郡에서 淸人 孫中乳의 初覆檢案은 응당 法部의 處辦을 받도록 하라는 指令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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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兪箕煥 |
발신일 | 1898년 6월 14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건명 | 平山郡 龍巖面에서 淸商 2인이 피살된 사건에 대한 邑報와 죄인에 대한 供案跋辭와 黃海道 觀察使의 指令을 담은 成冊 3건을 만들어 2건은 內部와 法部에 上送하고 1건은 外部에 上送한다는 報告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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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8년 6월 10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趙秉稷 |
건명 | 平山郡司獄廳使 李學吉이 淸人을 타살한 正犯 李成伯은 6월 4일 身病으로 치사했다고 보고하여 平山郡守 白命基가 직접 檢驗하여 病死한 사실을 확인했다는 報告 제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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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8년 6월 14일 |
수신자 | 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兪箕煥 |
건명 | 황해도에서 보낸 제5호 報告書의 경우 外封과 內幅 末行에 착오가 가볍지 않아 원본을 繳送하니 담당 主事를 벌하여 日後 공문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訓令 제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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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兪箕煥 |
발신일 | 1898년 6월 20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건명 | 訓令 제2호에 의거해 직무에 소홀했던 主事 金在卨를 면직했다는 報告 제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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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발신일 | 1898년 6월 25일 |
수신자 | 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兪箕煥 |
건명 | 康翎郡守 卞鼎相이 음력 5월 27일 淸人 16명을 태운 배가 康翎郡 新興坊 3里 古津洞 雪明嶼를 지나다 致敗하여 船隻과 什物 모두 飄蕩되었으나 船人 16명은 목숨을 보전하고 仁川으로 돌아간 사실을 직접 摘奸했음을 알려 왔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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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李垠鎔 |
발신일 | 1898년 8월 2일 |
수신자 | 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兪箕煥 |
건명 | 일부 외국인들이 各國約章 第4款 第4條와 第6條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內地에서 田土와 家屋을 借名으로 구매하거나 장시에 行棧을 개설하고 도회에는 舖店을 廣置하고 있으니 各郡에 各國人이 사들인 전토와 房室을 本主에게 還退하거나 타인에게 轉買하고 行棧과 舖店의 철폐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 指令을 따르지 않는 외국인은 그 출신국과 성명을 2개월 이내에 보고하라는 訓令 제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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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議政府參政外部大臣 朴齊純 |
발신일 | 1898년 10월 19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李垠鎔 |
부속문서 | 再 훈령이 도착한 日時를 먼저 馳報할 것. |
건명 | 瑞興郡 金井里에 사는 柳遠興의 訴狀에 따르면 耶蘇敎徒인 그의 從弟 柳遠楊이 郡守의 비호 하에 耶蘇敎學長 李龍雲과 함께 京鄕來往 관련 浮費로 사용한 돈 8‚9千 중 그의 아들인 柳華年과 再從弟인 柳遠集에게 각각 3‚000兩과 1‚000兩을 成票하였다고 하는 바 사실을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訓令 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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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議政府參政外部大臣 朴齊純 |
발신일 | 1898년 10월 22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李垠鎔 |
건명 | 外部 訓令 제3호를 각 군에 飜飭했다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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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李垠鎔 |
발신일 | 1898년 10월 26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朴齊純 |
건명 | 外部 訓令 제4호의 지시사항에 대한 瑞興郡守 李鶴圭의 보고에 따르면 柳遠興의 訴狀과 관련된 사건은 敎堂과는 무관한 사건이며 4촌 혹은 6촌간인 柳遠興‚ 柳遠楊‚ 柳遠吉과 鄭左玄‚ 그리고 유원흥의 아들인 柳華年과 정좌현의 사위까지 관련된 민사사건으로 상호간의 화해로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報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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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觀察使 李垠鎔 |
발신일 | 1898년 11월 14일 |
수신자 | 議政府贊政外部大臣 閔種黙 |
건명 | 金川郡 江西面民 孫允西가 일본인 梶田警部의 요청으로 開城府로부터 잡아와 金川郡에 갇혀 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손윤서는 開城府의 金仁協‚ 林夏相과 함께 蔘圃 850間을 경작하고 있었는데‚ 1897년 10월 10일 일본인 30여명이 採蔘하여 가다가 白川에서 砲手인 全哥‚ 朴哥 등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 죄를 모두 자신이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하여 그 연유를 사실대로 보고하니 그를 석방해 달라는 報告 제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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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黃海道金川郡守 洪鳳觀 |
발신일 | 1898년 2월 9일 |
수신자 | 外部大臣 |
지령 | 金川郡과 開城府의 보고사항이 다르니 開城府에 다시 照會하고 일본인이 한 일이라면 먼저 보고하고 指令을 기다릴 것(1898년 2월 18일). |
건명 | 1897년 11월 黃海道 白川郡 獨山洞에서 朴承成의 주선으로 水蔘을 매득하고 채굴한 일본인 田中作藏‚ 松田爲助‚ 大野松太郞 등을 孫允西와 全春甫‚ 朴景玉‚ 李好石‚ 安國彬 등이 作黨하여 습격한 사건에 대한 조사서를 제출한다는 報告書 제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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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白川郡守署理平山郡守 白命基·會査官 金川郡守 洪鳳觀 |
발신일 | 1898년 4월 2일 |
수신자 | 黃海道觀察使 |
검색어 | 漢城府裁判所‚ 日本領事 秋月左都夫‚ 開城府‚ 金仁葉‚ 洪聖千‚ 金仁善. |
건명 | 1898년 5월 黃海道 黃州郡 永豊坊 梨井里 下洞 致死 淸國 男人 孫中乳 屍身初覆檢文案謄書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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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발수신자 누락 |
발신일 | 일자 누락 |
주요내용 | 淸國 商人 孫中乳가 1898년 음력 2월 22일 黃州郡 永豊坊 梨井里 下洞에서 池昇日‚ 金致根‚ 李圭辰‚ 池莫同‚ 金德甫‚ 金在鉉 등에게 폭행 당해 사망한 사건과 屍身檢驗에 관한 조사와 처리 및 그에 대한 指令의 내용. |
검색어 | 文在謙‚ 宋斗柄‚ 孫乾辰‚ 孫所者‚ 金仲西‚ 金丙根‚ 李昌永‚ 李完永‚ 金三奉‚ 宋桂浩‚ 李有路‚ 孫仲獻‚ 韓應必. |
건명 | 1898년 6월 平山郡 龍巖面 小地名車踰嶺南谷 淸商 二人 被殺事 前後邑報 及 諸罪人等 供案跋辭 成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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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 | 발수신자 누락 |
발신일 | 일자 누락 |
주요내용 | 平山郡 龍巖面에서 발견된 淸國人 2인은 군수가 직접 摘奸한 결과 商人으로 보이는 바 金商九‚ 朴仁舜‚ 韓萬淑‚ 金鳳淳‚ 吳貞烈‚ 全在欽 등의 巡校를 보내 범죄에 가담한 李成伯‚ 金尙玉‚ 尹松學‚ 李非竹 등을 체포해 가두고 李萬億의 경우는 체포하지 못했으며 尹明吉‚ 金春化‚ 許致永‚ 李宗烈‚ 李善鳴‚ 金致守‚ 李淳明‚ 李圭玉‚ 趙七白‚ 李京五‚ 李光石‚ 李致圭‚ 孔日男‚ 金尙一‚ 全尙祿 등은 保放했는데 淸人 徐廣智‚ 徐中全 등의 확인으로 청국인의 신원이 徐廣慶과 張老九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平山郡守 白命基의 제 46·50·54호 報告와 이에 대한 처리를 지시하는 黃海道觀察使의 指令의 내용. |
검색어 | 韓永華‚ 李女兒音田. |